마태복음15장1-20절(천국 유전‘油田’) 13.7.14
Ⅰ. 저의 집 아이가 밖에서 들어오자 마자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길래 손이라도 씻고 먹어라고 했더니 너무 깨끗이 씻으면 균이 살 수 없는 데 균이 적당히 있어야 면역력도 생기고 쉽게 질병에도 안 걸린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런 개똥철학을 수용할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의사들의 퀴즈대회에서 한 의학박사가 너무 깨끗한 손보다는 손에 적당히 균이 있으면 오히려 질병에 강한 면역력이 생긴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도 손을 씻지않은 채로 음식을 먹어볼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씻고 먹기로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손 씻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법을 자기들의 생각으로 만들어서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즉,‘하나님의 계명’이 아닌‘사람의 계명’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이름하여 장로들의 전통 이라고 불렀습니다. 장로들이 주축을 이루어 만들고 그렇게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대부분 성문화되어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중에 구약신앙에 열심이었던 사람들의 열심은 그것 말고도 기록되지 않은 것들이 또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율법에 기록된 내용을 보충하고, 여러 가지 생활세칙을 덧붙이기 시작했습니다. 정결예법의 연장선상에서 반드시 손을 씻고 음식을 먹자는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사실 꼭 필요한 일입니다. 요즘의 위생 관념상 이것은 이제 우리에게도 필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음식 먹기 전 손을 씻는 일은 오직 한 가지 衛生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로들의 전통은 위생상 씻으라는 것이 아니고, 정결한 백성이 되기위한 조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위생문제를 종교의식으로 만들어놓고 그것을 아주 신경질적으로 꼭 지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Ⅱ. 오늘 말씀에 유대의 장로들이 주님의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빵을 뜯어 먹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보자마자, 당장 장로들의 전통을 어겼다고 주님께 시비를 걸듯이 불만을 토로합니다. 저 같으면 이때 제자들을 향하여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은 맞는 말이다. 이제부터는 우리도 꼭 손을 씻고 음식을 먹도록 하자” 그랬을 것 같아요. 그런데 주님은 이때를 노칠새라 한마디 하십니다. 이때 주님께서 아주 솔직, 소박한 표현으로 제대로 집어서 맞는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갔다 뒤로 나오는 것, 그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게 아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 앞에서의 정결이란 손을 씻고, 안 씻고에 달린 그 정도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행위를 엄격히 지킴으로 자신이 상당히 정결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바리새인들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진짜 ‘더러움’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해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문제 삼으십니다.
정결하다 더럽다 하는 것은 마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더러워서 그 속 마음에서 부터 더러움이 말과 행동으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인즉 우리의 마음은 온갖 더러운 것을 다 뿜어내고 있습니다(19절).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과 거짓증언, 비방,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런 악한 것들이 아닌, 정말 살리는 말과 세워주는 말, 격려하는 말, 소망을 주는 말, 천국의 언어들을 내뿜으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항상 천국의 아름다운 德目들을 내뿜으면서 살기위하여,
1.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완전히 새롭게 하셨음을 믿는 것입니다(1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인데, 우리는 예수 안에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 이 말씀을 보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는 하나님아버지께서 심어놓으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우리 안에는 더러운 것이 가득합니다. 우리 안에는 자체로 선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더러운 것이 있으면 반드시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3장에서는 우리의 내적인 더러움의 살상을 아주 赤裸裸하게드러내어주고 있습니다. “10,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 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엄청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게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러니 이런 것들은 우리안에 있는 것이기에 어떻게든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그러한 것으로부터 옮겨 심어주셨습니다.
골1:13-“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안에서 천국의 자녀를 삼으시고 지금의 현실 속에 심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여러분.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분명히 아셔야하는 것은 우리는 이전의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자기의 소유된 백성을 삼으셔서 오늘의 내가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사건입니다. 나 자신이 나를 보기에는 옛날과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고, 똑같은 것 같아도 성경에서 “너희는 새사람이다” “너희는 내 것이다” “내가 내 아들예수의 피로 너희를 새롭게 하였단다” 그러십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천하없어도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지는 않고 자꾸 나의 수준을 끌어올리려고 하고, 훈련하려고 합니다. 보다 괜찮은 사림이 되어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무늬만 성도이지요. 그러는 동안에는 우리는 하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그런 성도가 되고 맙니다. 오ㅣ식하는 바리새인처럼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사건은 믿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의 됨됨이보다도, 나 되게 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그 때부터 우리에게서도 천국에 속한 좋은 것들, 아름다운 덕목들이 나오게 됩니다. 믿음은 능력입니다. 우리는 이 믿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예)한 성도님이 시집가서 상당시간이 흘러도 시댁식구들과의 관계가 힘든 거예요. 그런데 은혜받고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새사람이라는 말씀이 믿어지게 되자 그때부터 사댁이 나의 선교지처럼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눈에 가시같았던 시어머니 시동생 시누이 다 그렇게 사랑스러워지더라는 것입니다. 시금치도 그렇게 맛있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의 언어가 뿜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천국의 아름다운 德目들을 내뿜으면서 살기위하여, 1)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완전히 새롭게 하셨음을 믿는 것이고,
2. 언제나 하나님이 보시는 視覺으로 모든 것을 보는 것입니다(14절).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로다”.
성경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상태를, ‘보지 못하는 상태’라고 묘사를 합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는 그때까지와는 다르게 눈에 밝아졌는데 문제는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고, 반대로 죄악의 눈이 밝아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萬事를 자기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세상의 기준으로 정죄하고 그럽니다. 그런데 반대로 하나님을 믿으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느냐하면 죄악에 대하여는 눈이 어두워지고, 하나님께 대하여 밝아지게 됩니다.
이 마음의 눈이 밝아지게 되는 것이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어두어진 인간의 특징은 정말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됩니다. 버려야 할 것을 오히려 껴안게 되고, 껴안아야 하는 것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바로 보지 못하면 세상 모든 것이 판단과 정죄의 대상으로 보이게 마련입니다.
예)요9장1-3보시면 주님과 제자들이 길가다가 ‘나면서 소경된 자’를 보게 됩니다. 그때 제자들은 속으로 판단했습니다. “아 저사람은 저렇게 나면서부터 소경으로 태어났으니 필경은 그의 부모나 그 자신이 죄가 많아서겠구나” 그렇게 판단하는데, 주님은 아니다고 하십니다. 그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고,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나타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보는 視覺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오늘 장로들의 전통을 고집하고, 집착하며 자기들은 정결하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은 장로들의 전통 중에서 가장 폐해가 심각한‘고르반’제도를 꺼내십니다. 그것에 대해서 4절, 5절, 6절을 통하여 지적하셨습니다.5절에서,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것이‘고르반’입니다. ‘드림’을‘고르반’으로 표기합니다.(드림교회=고르반교회)이 고르반이라는 말은‘예물을 바쳤다.’는 뜻입니다. 내 재산을 하나님 전에 드렸다.
이 말을 한 마디로‘고르반’이라고 합니다. 이 고르반 제도를 포함한 이른바 “장로들의 전통” 을 만들기 시작한 시기는 예수님 오시기 전 대략 4~5백 년 전부터입니다. 원래는 성전재건에서 시작된 전통인데,‘고르반’ 제도는 슬슬 변질이 되어갑니다. 부모 공양을 외면하는 ‘면제성’제도로 변질이 됩니다. ‘나는 나중에 내 모든 재산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내가 죽으면 내 모든 전 재산은 하나님 전에 바치겠습니다.’ 이렇게 선포만 하면 그 순간 이후로 부모님의 간절한 필요에 대하여 나 몰라라 해도 면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제 이 사람이 죽은 후에 그렇게 했느냐?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슬그머니 흐지부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힘께나 쓰는 사람들은 ‘고르반’ 즉, ‘내 모든 재산은 하나님께 드렸다.’ 하고는 부모공양 계명에서 떠나, 자기들 멋대로 살다가, 또 세월이 흘러 죽은 후에는 재산을 바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사람의 계명’‘장로들의 전통’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시는 하나님의 계명을 장로들의 전통으로 교묘하게 넘어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하고 우선되어야 하는 것을 못보고, 모르는 것입니다. 더욱 우선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여버리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 내주께서,,, “오늘 믿고서 내눈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엡1장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그 기업의 영광의 지극히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예)민수기13장 이야기 잘 아시지요. 똑같은 장소에서 또 같은 것을 똑같은 시간에 걸쳐 정탐한 그들이었지만 믿음의 눈이 닫혔던 10명의 정탐들은 우리는 메뚜기다, 그 땅은 우리를 삼키는 땅이다. 우리는 그 땅을 정복할 수 없다. 자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들의 악한 말에 온 백성이 동화되어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갈렙은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다 지금 들어가서 차지하자 그랬습니다. 진정 살리는 말이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왔습니다.
믿음으로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언제나 하나님이 보시는 시각으로 보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항상 천국의 아름다운 德目들을 내뿜으면서 살기위하여, 1)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완전히 새롭게 하셨음을 믿는 것이고, 2)언제나 모든 것을 하나님이 보시는 視覺으로 모든 것을 보는 것이고,
3. 마음을 천국에 두고 사는 것입니다(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다고 하십니다. 善과 義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 우리에게서 결코 좋은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마음이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는 비결은 마음을 땅이 아닌 천국에 두고 사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땅에 있으면 땅의 것을 담고 그것을 밖으로 쏟아냅니다. 그러나 천국에 마음을 두고 살면 우리는 천국의 아름다운 덕목들을 내뿜으며 살게 됩니다.
사람들은 마음이란 이 가슴에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은 자유자재입니다. 흔히 정신을 어디다 두고 있노? 그러쟎아요? 마음이 나를 떠나 아주 다른 차원에 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시험공부하면서도 마음이 가슴을 떠나 저 멀리 친구에게 가 있을 수도 있고, 바람을 피우는 남자는 집안에 가족과 힘께 있으면서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들이 군에 입대하면 어떤 엄마는 음식을 만들고 청소를 하고 잠자리에서도 마음이 늘 그 아들이 있는 훈련장에 가 있습니다. 어떤 성도님은 낮예배를 드리면서도 마음은 오후에 예배 안드리고 나가서 할 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음이란 결코 우리 가슴안에 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공중권세잡은 자 마귀는 이렇게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마음을 공중에서 낙아채서 그 사람들로 불순종의 길을 가게 합니다. 이게 마음의 정체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내 마음이 어디에 어떻게 처하여 있느냐에 따라 그 상황과 형편을 말과 행동으로 쏱아 내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야당의 대변인은 야당에게 있는 것을 밖으로 뿜어낼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대통령보고도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귀태’라고 하고 폭언도 하는 것이지요. 그가 특별히 나쁜 사람이어서라기보다도 사람이란 자기 마음이 가 있는 곳의 내용물들을 뿜어내는 것입니다. 싸우디 아라비아 유전에 깊이 파이프를 내려놓으면 원유가 분출되어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내 자식에게 쓸 애틋한 마음을 하나님께로 가져가고, 남편에게 쓸 마음을 하나님께 가져가고, 돈에게 줄 마음을 하나님께로 가져가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정말 사는 맛도 없고, 제대로 못살 것 같지만 너무 잘 살게 되는 것 있지요. 바로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내가 마음을 뗀 그들을 특별 케어 대상으로 삼으십니다. 그 때부터 그 자녀가 길이 확 열리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애착을 두고 집착하고 고집하고 있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떼어내지를 못해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 찰떡같이 유착된 우리의 마음을 떼 내어서 저 천국 하나님께 두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로 그때부터 하늘의 제일 좋은 것들이 우리의 모든 관계속으로 쏱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형통만이 아니고 마치 油田에다 파이프를 심으면 原油가 쏱아져 나오는 것과 같이 천국에 있는 그런 아름다운 덕목들이 우리의 입술로 행동으로 나오게 됩니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성령의 열매입니다. 자연인인 나에게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예)이미 아시는 대로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있쟎습니까? 알프스의 산동네의 하이디의 할아버지가 손녀의 장래를 생각하여 어린 하이디를 알프스를 떠나 멀리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부잣집으로 보내어 살게 합니다. 그러나 하이디는 그곳의 호화로운 환경, 예쁜 옷, 맛나는 음식,
푹신한 침대, 이런 데는 전혀 마음도 눈길도 주지 않습니다. 오직 두고 온 알프스마을을 생각합니다. 그 집 딸인 친구 클라라에게도 알프스 이야기만 합니다. 그곳의 자연환경과 우유를 짜서 배달하시는 늙으신 할아버지와 몸이 아픈 아랫마을 할머니, 그리고 밤마다 빛나는 별들을
생각하다 생각하다 그만 그 어린 것이 밤마다 夢遊病 환자가 되어, 자꾸 쇠약해져갑니다. 몸은 프랑크플루트의 부잣집에 살아도 마음은 오직 알프스 마을입니다. 의사의 진단이 내려지고, 이 사실을 안 클라라의 아버지는 할 수 없이 하이디를 다시 알프스로 데려다 주게되고, 병든 자기 딸도 함께 보냅니다. 그런데 하이디를 따라 알프스에 간 부잣집 딸 클라라의 불치병이 거기서 말끔히 낫게 됩니다. 그 일에 감격한 클라라의 아버지는 하이디에게 유산까지 남겨주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동화이지만 이 땅에 살고 있는 성도들의 신앙자세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지요.
시편에 “내가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그러쟎아요? 몸은 이 세상에 살아도 마음은 오직 저 천국에, 하나님께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에게서 하늘의 아름다운 보석같은 德目들이 쏱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전에는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 방탕 또 그와 같은 더러운 것”들인데 이제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이런 하늘의 덕목들이 성령의 열매로 주렁주렁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그 다음에 뭐지요?천국이 저희 것이니라,,,,” 마음을 천국 하나님께 다 드려버리고 딴 데는 쓸 마음이 하나도 없는 가난하여 부도난 마음, 거기에 천국이 가득하게 임하니 당연 천국의 덕목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Ⅲ. 우리가 항상 천국의 아름다운 德目들을 내뿜으면서 살기위하여, 1)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완전히 새롭게 하셨음을 믿는 것이고, 2)언제나 모든 것을 하나님이 보시는 視覺으로 보는 것이고, 3) 마음을 오직 저 천국에 두고 사는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오직 저 천국에 두고, 오직 하늘에서 오는 것을 공급받고, 더 나아가 하늘 아버지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우리의 입술과 삶으로 뿜어져 나오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앞에서 정결한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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