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16장21-28절(나를 따라오려거든) 13.8.18
Ⅰ.주님오시기 약400년 전쯤에 중국 ‘노’나라에 ‘오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내는 이웃 ‘제’나라 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처가 집 나라인 ‘제’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노나라에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노나라에서는 3군(?) 총사령관을 임명해야 했는데, 공교롭게도 ‘오기’가 하마평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국정회의에서 오기의 아내가 ‘제’나라 출신이라서 안 된다는 여론이 비등했습니다. 무관으로서 나라에 위기가 왔을 때, 용맹을 떨쳐 나라를 구하고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인데, 하필 처갓집 나라가 쳐들어와서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 문제만 해결하면 이 사람은 천하를 얻게 되는 기회를 잡게되는 것입니다. 오기라는 사람은 이때, 용단을 내렸습니다. 어떻게요? 자기 아내를 칼로 베었습니다. 아내를 죽임으로써 나라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고, 군사령관이 되어 ‘제나라’를 물리치고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론이 좋지 않았습니다. 출세를 위해 아내를 죽인 모질고 박정한 인물이라고 손가락질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위’나라로 망명했습니다. 그런데 ‘위’나라 공주가 그를 싫어했습니다. 견딜 수 없어서 ‘초’나라로 또 망명했습니다. 초나라에 갔는데 그곳에서는 귀족들이 왕따를 합니다. 결국 쿠데타에 휩쓸려서 피살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쓴 유명한 병법서가 있습니다. 그 책을 오기가 썼기 때문에 ‘오자 병법’이라고 합니다. 중국의 손무가 쓴 손자병법과 쌍벽을 이루는 유명한 책입니다. 이 오자 병법에 ‘必死卽生 必生卽死’라는 말이 인류역사 최초로 등장합니다. ···
‘죽기를 각오한 자는 반드시 살고, 살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죽는다’
자기 출세를 위해서 멀쩡한 아내를 죽이기까지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그 병법서에 기록한 이 말만은 대단히 유명합니다. 예수님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Ⅱ.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고 고백한 후 주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며 그런 고백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실 것과 교회에 매고 푸는 권세를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서 오늘 말씀21절에 이제 주님이 잡히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죽으시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항변하며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고 말렸습니다. 그때 주님은 “사단아 내뒤로 물러가라!” 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항변하고 말리며 주여 안 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하고 말한 것은 주님을 생각해서 한 말이지만 사단아 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삶이 안 된 상태에서는 주를 위한답시고 하는 것도 결국은 사단을 편드는 결과밖에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모세가 젊은 날에 섣불리 동족을 위하여 무언가 해보려고 나섰지만 결국 그것이 모세가 멀리 내쫓기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라 우리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주예수께서 부르실때 오직 그를 따라가는 삶이야말로 중요합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를 그렇게 초청하십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위하여는,
1. 자기 부인이 있어야 합니다(24). 단적으로 말하면 ‘자기 부인’이란 자기 생각이 없는 삶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많은 분들이 마음이 불편하실 것임을 저도 알아요. 사람이 어떻게 생각없이 살 수 있다는 말인가? 나도 알만큼 알고 배울만큼 배우고 그래서 나도 다 생각이 있는데,, 라고 좀 불만스럽게 느끼고 계실 것입니다. 저도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55장9-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나의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음이라. 나와 힘께 하셔서 인도하시는 주님을 우리가 따라가는데 그분에게 생각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과 얼마만큼이나 다른가하면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각이 하늘이고, 우리의 생각이 땅이면 주님을 따라가는 삶이란 마땅히 주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참 이치아닙니까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로마서11장33-바울같은 자는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깨닫고 난 다음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그럽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생각은 달
라도 너무 다르고 높아도 너무 높다는 것입니다. 그가 주님의 섭리에 대하여 알면 알수록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너무 오묘하여 깊도다 풍성하도다 그러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은 사람들의 지혜와는 너무 달라서 측량할 길이 없다는 것이지요.
피조물인 우리들 그리고 이제 주님을 믿고 따라가는 우리들의 생각의 제 일 기능은 이 높고 깊고 오묘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고 그분의 생각을 생각하고 이게 제일 기능입니다.
♬. 깊고도 넓도다 깊고 넓은 샘물흐르네 깊고도 넓도다 깊고 넓은 샘물흐르네"(예수님사랑 하나님은혜)Deep and wide, deep and wide, there s a fountain flowing deep and wide "Deep and wide, deep and wide, there s a fountain flowing deep and wide 하나님의 생각의 샘이 너무 깊고 넓어서 우리는 그것만 생각해도 얼마든지 충만하게 행복하게 살수 있습니다.
예)비만과의 전쟁에서 어떤 자매가 120킬로의 거구를 이제는 졸업하려고 전문 트레이너에게 훈련을 받는데 거기서는 자기생각은 전혀 반영이 되지를 않습니다. 무조건 트레이너가 시키는 대로 해야 됩니다. 먹어야 할 것 같은데 먹지마라 더 쉬어야 할 것 같은데, 걸어라 하고 또 어떤 때는 안 먹어도 될 것 같은데 먹어라고 합니다. 트레이너에게 맞겨진 이상은 그가 하라는 대로 하면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120킬로에서 55킬로로 빼서는 인간승리라고 감동하고 박수치고 난리는 합니다. 살빼는 일을 위해서도 전문 트레이너를 따라가려면 내 생각은 완전히 黙殺되고 맙니다.
예)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놀라운 사건 있지않습니까? 아니 지금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데 데 왜 주님은 손씻는 큰 물항아리 6개나 다 채우라고 하시는지, 그리고 왜 그것을 연회장에게 갖다주라고 하는지 종들은 아무도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연회장이 그 물을 떠서 맞을 본즉 극상품의 포도주가 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의 생각대로한 결과입니다. 잔치자리는 흥이 가득하였습니다.
다윗은 시편139편17에서 하나님이여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 그 數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고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주와 함께 있나이다. 어떤 일로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며 뒤척이다가 잠들었다가 깨었는데 그때도 내게 대하여 생각이 많으신 주님이 잠자리에 함께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생각하시는 것이 아주 많으니 그것만 생각하기에도 벅찬데 뭐하려고 이런 저런 도움도 안 되는 염려 걱정 고민 이런 그지 같고 누더기 같은 생각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위하여는, 1)자기 부인이 있어야 하고,
2.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입니다(24).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과의 연합을 말씀합니다. 주님은 지금 십자가 이후를 바라보시면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정서상으로는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들은 자기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어려운 짐을 자기가 알아서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을 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으로 져야 될 십자가가 뭡니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자꾸 우리는 ‘우리가 고난을 받는 거다, 뭐다’ 하는데, 우리가 순교한다고 해도, 그게 내 십자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신 그 십자가를 내가 졌어야하는 건데 주님이 대신 지게 하신 거예요. 사실은 주님의 십자가는 주님 개인적으로 보자면 져야 될 필요가 없는 십자가이고, 져야 될 필요가 없는 분이 내 십자가를 진 거예요. 나 위하여, 나 때문에, 나를 대신하여, 내가 되셔서 지신 십지가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지신 십자가가 내 십자가라는 거예요.
만약에 그러지 않고 각자가 다 내 십자가를 져서 내가 십자가를 진 대로 용서를 받는다면 주님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 십자가에 매달려서 연합해야 되기 때문에 주님이 지신 십자가가 내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십자가를 내가 내 십자가로 지고 주님과 연합한다는 것은 무얼 말하는 겁니까? 모든 사건 앞에서 삶의 모든 현장에서 나는 따라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 꿈, 계획 드리밀며 이루어주십시오 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는 거예요, 주님과 연합하여 그 십자가에서 내가 죽는다는 의미는, 좋다 나쁘다, 맘에 든다, 안든다, 밉다, 먼저 느끼는 나, 생각하는 나, 맘대로 판단하는 내가 죽는 거예요,
주님이 나를 인도하시고 나는 그를 따라가는 자입니다. 당연히 주님대접을 해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심각해보이거나 다급한 문제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우리는 제빨리 느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주님이 느끼시고 생각하시고 판단하실 때까지 우리는 느낌을 보류하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셔서 우리의 문제가운데 계시는 주님이 반드시 먼저 느끼시고 생각하시고 판단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각해보이는 문제를 만나도 이게 뭐지 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느끼시고 생각하신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십니다. 함께 하시니까요.
주님은 우리보다 잘 느끼시고, 당연히 그가 생각을 가지고 계시고, 돈쓸 일이 있어도 그가 쓰십니다. 주님과 연합하여 오직 주님의 생각을 알고 그것을 따라 구하게 될 때부터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결재권의 역사가 시행되는 것입니다.
메디칼 드라마 ‘굿 닥터’에서 서번트증후군을 자폐증세를 가진 천재적 신참 의사 박시온(이주원)의 문제는 무엇이냐면 항상 주치의나 고참의사보다 환자들의 감추인 병을 먼저 느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다른 의사등에게 밉보이고 의사들간의 갈등을 조장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드라마이고, 우리는 언제나 주님보다 먼저 느끼지 마시고 주님 이게 무엇이지요? 하고 주님의 느낌과 생각을 기다릴 줄 아는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과 연합하여 함께하며 따라가는 자들이니까요.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위하여는, 1)자기 부인해야 하고, 2)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 즉 십자가의 주님과 연합하는 것이고,
3. 자기 목숨을 잃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25). 이런 말씀을 들으면 지나간 시대처럼 순교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런 의미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이 목숨이라는 말이 영어로, 혼(soul)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육체의 생명이라는 뜻보다는 내가 마음으로 호흡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몸은 음식을 먹어야 하듯이, 우리자신은 많은 것을 목숨처럼 소중히 호흡하고 살아갑니다.
일단 목숨이라고 하면 내게는 이 목의 숨처럼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내 목의 숨처럼 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라졌을 때 삶의 의미를 상살하게 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사업을 일구어 기업을 정상궤도에 올려놓고 싶어하는 가장에게 있어서는 자기의 사업이 목숨입니다. 아들딸을 사랑하는 너무 나머지 자식을 몰애하여 자식 때문에 산다는 부모는 자식이 바로자기의 목숨입니다. 그런가하면 안중근의사나 이준 열사 같은 분은 조국독립이 그분들의 목숨입니다. 이런분들에게는 이 육체의 생명은 그 다음입니다. 지난 수요일 한 일본에 끌려갔던 위안부 할머니의 인터뷰에서는 억만금을 주어도 내 상처는 아물지않아 일본의 사과를 받고싶다 고 했습니다. 일본국가의 진심어린 사과의 한마디가 이 할머니에게는 가장 귀한 목숨입니다. 사과를 받기전에는 죽을 래야 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내가 살아야 될 의미가 없는 것, 그것이 없어지면 내 숨이 멎어버리는 것, 육체는 살아있지만 내 마음의 숨이 딱 멎어버리면서 살아야 될 의미가 아무것도 없어지는 것, 그런 게 바로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목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마음의 목숨입니다.
예수님 만나기 전까지 유지되고 있던 그 마음의 목숨, 그것이 없었으면 세상의 것이 아무것도 의미가 없는 그런 그 목숨을 예수님 만나면서부터 “나를 위하여‘ 내 마음 속에서 자리를 바꾸라는 얘깁니다.
예수님 만나기 전까지는 ‘내가 어떡하든지 자식을 한번 잘 키워 떵떵거리며 재미보며 살아 보겠다’ 는 것은 자식이 목숨이었어요. 자식이 내 마음의 호흡이었어요, 자식을 호흡하면서 살아요.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내 애인이 목숨이었어요, 애인이 없으면 나는 살 이유가 없어요. 그러니까 군대 가있는 동안에 애인이 고무신 바꿔 신으면 탈영해서 총기사건을 일으키지 않습니까? 살 이유가 없는 거니까. 그것이 자기 목의 숨처럼 가장 귀하게 생각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총기난사사건 일으키고 탈영하면 자기 사회적으로 인생이 종친다는 걸 아는데도, 그 애인이 없을 바에는 내 이 인생이 종치거나 말거나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게 바로 목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만나고서는 그 마음의 목숨의 자리에 예수님과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마음의 목숨의 자리가 되는 순간부터 온 천하도 내가 좋아하던 모든 것들이 새로운 의미로 새로운 느낌으로 닥아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남편, 하나님이 주신 아들, 딸, 하나님이 주신 보내주신 교회, 다 예수안에서 새롭게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러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과 새로운 관계가 되니 모든 것이 다 정상적인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내게 줄로 재어준 구역이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구역이 실로 아름답도다! 그랬지요.
Ⅲ.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위하여는, 1)자기 부인해야 하고, 2)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 즉 십자가의 주님과 연합하는 것이고, 3)자기 목숨을 잃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게 다 다른 말이 아니고 같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알기 쉽게하기 위하여 셋으로 나누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과 연합한 자입니다. 전에는 우리마음에 목숨같은 소중한 것들이 많았으나 이제는 그모든 것들이 예수님과 자리바꿈이 일어났습니다. 가끔씩 아직도 다른 좋은 것을 호흡하고 싶을 때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만 우리의 마음으로 호흡하는 우리 자신임을 확인하여, 우리안에 계신 주님이 이전에 우리안에 있다가 밀려난 모든 것들을 복주시고 주님의 것으로 삼으시고 형통하게 하시는 은혜가 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
마태복음17장1-8절(아들만 보이는 삶) 13.8.25
Ⅰ.지난 주 오후시간에,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위하여는,
1)자기 부인해야 하고, 2)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 즉 십자가의 주님과 연합하는 것이고, 3)자기 목숨을 잃어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게 다 다른 말이 아니고 같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알기 쉽게하기 위하여 셋으로 나누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과 연합한 자입니다. 전에는 우리마음에 목숨같은 소중한 것들이 많았으나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이 예수님과 자리바꿈이 일어났습니다. 가끔씩 아직도 돈이나 자식이나, 인기나 미모나 다른 좋은 것을 호흡하고 싶을 때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만 우리의 마음으로 호흡해야 하는 우리 자신임을 확인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베,요,약 세 제자들과 높은 산에 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이 산을 지난 주에 들으신 가이사랴 빌립보가 가까운 헐몬산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가셔서 기도하던중에(눅9장) 예수님의 모습이 갑자기 변형되셨습니다.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온몸이 놀러운 광채를 발하시니까 그 빛이 옷을 뚫고 밖으로 비취니 옷도 빛과 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원래 밫가운데 계시던 주님의 모습으로 돌아오신 것입니다. 몸의 광채가 밖으로 드러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보니까 모세와 엘리야가 거기 나타나서 주님과 더불어 말하는 것을 그들이 목격하게 됩니다. 너무 놀란 베드로가 예수님께 얼떨결에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초막을 세 개 짓고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또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이이다 하자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고 하셨습니다. 일상적이 아닌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 제자들은 얼떨결에 일어난 일로 시각적 청각적으로 그들을 압도하는 상황에 듣고는 엎드렸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들을 만져주시며 “일어나라 두려워하지말라” 말씀하실 때 비로소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오직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더라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왜 십자가의 길로 제자들을 초청하신 다음에 이런 특이한 경험을 하게 하셨을까요? 우리가 예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로 따라가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이지만 우리에게 그런 에너지가 없습니다. 이러한 특별한 경험을 통하여 능히 주님이 가신 길을 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Ⅱ. 우리로 예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게 하게 위하여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장치는 ,
1.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이 영광을 본다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메소보다미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됩니다. 사도행전7장2-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그 유명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나이 75세가 된 아브라함에게 그 당시 삶의 기반인 본토친척아비의 집을떠나 나그네가 되어 미지의 땅으로 말씀을 따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가 다 버리고 갈 수 있었던 것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본다는 것과 아브라함이 다 버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땅으로 갔다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표현되었습니다.
늙은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미지의 땅을 향해 가게했던 힘 그 원동력은 그에게 나타난 영광의 하나님, 즉 그는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 영광을 보자 마자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일등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뿅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이사야35장-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즐거워하며 2.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어떤 사람들은 돈의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바울같은 열정의 사람은 종교 사회적으로 일등이 되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박근혜대통령은 육영수여사가 죽은 다음에 퍼스트레에디로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대통령이라는 자리의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무슨 영광을 보는 자들입니까?
우리는 제자들처럼 아버지 품에 있는 독생하신 아들의 영광을 보는 자들이고 그것을 보고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지는 자들입니다.
저는 우리 생명시내교회 성도님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임하여 이 하나님의 영광을 꼭 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부스러기 같은 세상영광에 속지마시고 십자가의 길도 기쁨과 찬송의 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게 하게 위하여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장치는 , 1)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고,
2. 그 영광의 주님 외에는 다 스스로 잃어버리게 되어야 합니다(3-4). 그러니까 아무것도 두렵지않고, 무섭지않고, 염려않게 되는 것이지요. 눅9장28-29-31주님은 그들과 기도하러 산에 가셨고 기도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 산에서 제자들은 기도중 광채로 빛나는 본래의 예수님을 보게되자 말합니다. 그 현장이 너무 좋고 황홀하여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구약성경의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선지자를 대표하는 엘리야 선지자가 주님과 대화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의 종말은 죽었니 살았니 하고 물어와야 할 정도로 그들의 종말이 애매하게 기록되었습니다. 모세는 그의 시체를 아무도 못봤다고 한다. 엘리야는 불말로 승천-
그 대화 내용은 주님이 別世하실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지실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산아래에서 있었던 일, 있을 일, 모든 것을, 까마득히 다 잊어버리고 심지어는 자신들이 앞으로 살아갈 일들에 대하여도 잊고 잃어버리고, 세분을 위하여 초막을 짓겠다고 하였습니다.(우리동네 삼막사-서산 의상 원효). 자신들의 집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젊은 한 쌍이 신혼여행을 갔는데 그 첫날밤을 같이 못 보내고 신부가 얼굴이 멍이 들어 돌아왔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보니 옛날애인하고 “자기야” 하고 통화하다가 맞고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한 남자가 정해졌으면 옛날 애인은 반드시 기억에서 지워야 하는데 그것을 못한 것입니다. 맞아도 싸지요. 못 잊어 생각이 난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는 사도바울은 그 나중모습이 참 본이되는 사람입니다. 나는 뒤엣것은 잊어버리고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하여 쫓아가노라(3장13) 또 이전에 유익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을 害로여기고 또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3장7-8)합니다. (잊어버리고 해로여기고 잃어버자! 누구를위하여? 오직 예수를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게 하게 위하여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장치는 , 1)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고, 2)그 영광의 주님 외에는 다 스스로 잃어버리게 되어야 하고,
3. 예수만 보이는 삶이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가 세상 헛것이 자꾸 보이면 어떻게 합니까? 잘나가는 동창이 보이고, 명품 가방이 보이고, 선악과가 생명나무처럼 보이고, 큰 교회가 보이고, 세상 헛것이 자꾸 보이면, 힘이 빠져서 신앙생활 지속하기 힘들어요. 성경이 십자가에서 옛사람이 죽었다고 하는데 뭐하려고 그런 옛사람의 보는 것을 지금와서 새삼 바라보겠습니까?
스데반은 순교할 때 하늘을 우럴어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이 하나님보좌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은 오직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향한 용서의 마음 기도의 마음이었습니다.(행7장55-)
영광의 주님만 보고 보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김진홍목사님의 간증을 한번 말한 적이 있는 줄로 압니다. 청계천 넉마주이들의 전도사시절 정부로부터 너무 압력이 심하고 자신도 한계를 느끼고 이제는 그 동네를 떠나려고 할 때 한 어린 소년이 전도사님이 떠나면 우리는 어떻게 해요 하고 막 울더랍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 아이의 눈물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환하게 보이더랍니다. 그래서 포기하지 못하고 넉마촌에 남아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서 예수님이 보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다 무슨 한상을 보고 꿈을꾸고 큰 음성을 듣고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수도 있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어떻게 영광의 주님을 봅니까? 성경말씀에 나타난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오늘 본문의 사건을 회상하면서 벧전1장16-19절-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베드로는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고 합니다. 영광의 주님이 말씀하신 것과 행하신 일들이 기록된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영광의 주님을 보고 느끼고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 말씀을 다 배워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말씀의 핵심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것 한 가지는 절대로 노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에는 예수님의 죽으심, 하나님의 공의, 사랑, 심판이 남김없이 다 나타나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다 느낄 수 있고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십자가 무한영광일세라고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 느낌이 팍팍 오는 데도 못 느끼는 것은 세상 영광을 자꾸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버림받으시고 고난당하신 그 십자가 그보다 영광스럽게 아름다운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설교말씀이 들리는데 저 공기 정화기 양쪽에 검은 것이 떼일까 색깔일까 얼마나 오래 안 닦았으면 저렇게 까말까? 내가 한 번 닦아 봐야지,,. 설교말씀을 들으면서 연방 이런 생각을 합니다.하하 )
Ⅲ.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게 하게 위하여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장치는 , 1)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고, 2)그 영광의 주님 외에는 다 스스로 잃어버리게 되어야 하고,
3)예수만 보이는 삶이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직 주님 말씀을 따라가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열심히 일하실 때 저희는 목회자 다섯 가정이 이 휴가를 완도 명사십리로 갔습니다. 정말 7시간 걸리더라구요. 말로만 듣던 명사십리에서 한 장로님의 염가로 경영하는 팬션에 머물며 바닷가에서 고동을 잡는데 정말 물이 맑고 좋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여행이 좋아도 몇 일 지나면 역시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이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습니다. 먼길 돌아오니 아무리 초라해도 집이 좋았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주님이 제일이지,,, 한 여름보내시면서 좀 힘들고 지치고 마음 불편한 일들이 있으셨다 할지라도 이제 말씀에서 아름다운 주님,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주님만 보이고 그 말씀따라 가을을 맞이하게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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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7장1-13절(하나님이 소원하신 나라)13.9.1
Ⅰ.예수님께 대한 제자들의 고백을 들으신 후 주님은 이제 본격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려는 자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기 까지 하면서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그 후 주님은 헐몬이라는 높은 산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기도중에 영광의 모습으로 바뀌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의 영광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원래 아버지 품속에 계시던 독생하신 아들의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그의 영광의 빛이 입고 계신 옷을 뚫고 광채가 나올 만큼 輝煌燦爛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의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십자가에서 別世하실 일을 나누고 계셨습니다(눅9:31).
그때 제자 중의 하나인 베드로는 얼떨결에 그 산 위에 삼막사처럼 초막을 세 개를 짓고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와 영원히 그곳을 머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평생 잊지 못할 아주 특별한 체험을 가진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원래의 영광의 모습을 목격하는 체험을 하게하신 것은 그들이 주께서 가시게 되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일을 제자들이 잘 감당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지난주이 들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오리지널한 그 영광의 모습 한번 경험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믿음으로 아브라함,, 스데반, 제자들이 본 그 영광을 다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Ⅱ. 우리는 오늘 이 말씀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간절한 소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소원을 알고 그것을 따라 살면 반드시 하늘로부터 오는 福이 임합니다. 아무리 대단한 福이라도 왔다가 곧 빠져나가는 것은 ‘하늘 복’이 아닙니다. 주님의 소원을 따라 살면 결코 빼앗기지 않고 누리게 되는 福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딤전 6:17 우리에게 모든 것을 厚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아주 厚하게 복을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변모산상에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소원은,
1.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을 듣게 되는 일입니다. 5-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주님 앞에서는 우리는 듣는 마음이 되고 듣는 자가 되는 것이 가장 합당한 모습이고 이게 바로 천국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의 유일한 소원은 오직 하나님께 듣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저는 출입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와 같습니다. 나에게 ‘듣는 마음’을 주십시오” 그랬습니다. (열왕기상서3장9, 12-13). 그랬더니 하나님은 그 솔로몬에게 지혜와 富와 榮光과 壽의 前代未聞의 복을 내리셨습니다. 이후로 솔로몬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들어서 복이고 듣는 자에게 더하여 주시는 복이 있다는 말씀이지요.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들 예수께 듣기를 원합니다. 히1:1-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의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이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오직 그에게 듣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귀를 기울이면 오늘도 얼마든지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듣지를 못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우리안에 거하시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동안은 주님의 뜻과 생각과 그 말씀은 하나도 들려오지를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생활, 구체적인 순간순간 속에 주어지는 문제와 난관과 곤고와 환란을 생각하시고, 그리고 막 판단하시지요. 그리고 우리가 해결책을 모색하고 그 문제를 끌어안고 씨름하시고 그러는 사이에 해결자이시고 주인이신 하나님을 마음에서 쫒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간단하게 우리의 삶으로부터 쫒겨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붙잡고 이것이 해결이라고 생각하고, 우리 스스로가 노력하고, 판단하고, 생각하며, 욕망이 끄는 대로 욕망을 따라 계속해서 말하는 동안에, 그리고 자녀를 보고, 남편과 아내를 보면서 무엇이 부족하다, 또 교회를 보면서 무엇이 안 좋다, 판단하고, 말하고 있는 그 동안에 하나님은 가정에서, 교회에서 우리들의 심령 바깥으로 쫓겨나십니다.
하나님이 임하셔서 이끄시면 지구 전체가 반대를 해도 하나님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님들이 생각하고, 욕망을 따라 우리의 뜻대로 계획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은 너무 간단히 우리에게서 쫓겨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믿음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심령에는 하나님은 결코 거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편 46편 10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그러십니다. 그 하나님은 옆에 와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내가 발 디디고 살고 있는 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우리는 잘 몰라요. 말만 들었어요. 내가 그 하나님을 경험해본 적이 없으면 그래요. 그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십니다. 그러나 잘 몰라요. 경험해본 적이 없어요.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몰라요. 마음에 사랑을 실감하고 경험해본 적이 없어요. 왜 우리는 그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채 긴 긴 세월을 살아가며 자기 생각에 이끌려 살아갈까요?
하나님 앞에서 가만히 있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침묵해본 적이 없어요. 눈에 보이는 문제와, 눈에 보이는 환경과 귀에 들리는 말들과 떠오르는 생각들 속에서, 생각의 방향을 틀어서 가만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묵묵히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실 때 한 것처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처럼 침묵해본 적이 없어요. 침묵하면서 그 길을 가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사랑한다 하고, 믿는 다고 하면서 정작은 모두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해 보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됨을 알려 하면 너는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에요. 너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일이 많이 다급하여도 가만히 있어보기 전까지는 절대로 하나님 됨을 알지 못합니다.
예)출애굽기13장-모세가 홍해바다 앞으로 출애굽 시킨 이스라엘 백성을 끌고 왔습니다. 직선으로 가면 보름도 안 걸리는 가나안 땅인데 아래로 아래로 홍해바다 앞으로 끌어왔어요. 그러자 사람들은 금방 그들의 계산이 나오고, 생각이 불만으로 원망으로 눈덩이처럼 커져서 터져 나왔습니다. 왜 하필 이런 곳으로 끌고 왔느냐? 이사람 모세로는 절대로 안 되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돌아가려고 하는데 뒤에서는 疾風怒濤 같은 애굽 바로의 군대가 馬兵을 동원해서 쫒아옵니다. 이때 모두가 동시에 모세를 향하여 네가 애굽 땅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 사막으로 끌어내서 여기서 공동묘지를 만들려고 그러느냐? 200만 명이 모세를 향해서 대어들 때, 이스라엘의 원망에 대해 모세가 말합니다.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좀 가만히 있을 지어다. 가만히,,. 그럽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실테니 제발 입 좀 다물고 가만히 있어라. 백성들이 목소리가 조용해지자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모세야 너는 지팡이를 든 손을 바다를 향하여 들고 사람들로 항오를 지어 바다를 향해 걸어가게 하라” 그러자 모세는 듣고 행합니다. 모세가 손을 들자 광야에 정적이 흐르더니 드디어 거센 동풍이 밤새도록
불어오고 홍해가 갈라지고 사람들은 마른 땅처럼 홍해를 걷습니다.
가만히 있기 전까지는 홍해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절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옆에서 내 머리로, 내 경험으로, 내 지식으로 왈가왈부 비평하고, 비난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근심하고 있는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영이 어떻게 임하시겠습니까? 임하실 수가 없지요. ‘믿음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 앞에서 하는 침묵만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길이고, 하나님의 능력과 에너지를 우리의 일상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찬양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환란 중에 우리의 힘과 도움이시라,,그러쟎아요? 그러나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지고 능력을 맛보려면,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 알지어다. 그럽니다.
예)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감상하려면 두 가지가 있어야 됩니다. 첫째는, 어두움이 있어야 됩니다. 둘째는, 침묵이 있어야 됩니다. 계속해서 사람들이 말하는 동안에 영화는 상영되지 않습니다. 어두움이 임하는 것이 하나님을 부르는 부르짖음이에요. 이 세상에 대해서 내가 밝히 판단하고 생각하고 내 지혜의 불을 키고 발동시키는 모든 것을 끊어서 캄캄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입을 다물라는 겁니다.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화관에서 영사기를 통해서 영화 화면이 쫙 비춰지듯이 나를 향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계획이 내 마음에 점점 환하게 비춰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요. 하나님의 소원은, 아들에게 듣는 것이고,
2. 아들에게 들은 말만 하는 것입니다(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지니,,,.” 특이한 장면을 목격했으니 얼마나 말하고 싶겠습니까? 사람에게는 報道본능이 있어서 특이한 것을 보았으
면 말하고 싶어서 못 견딥니다. 하지 말아라 하면 더 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라는 말을 하고, 禁하시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하는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주님께 듣는 자는 자기 말이 없어지기 시작합니다. 주님께 계속 듣지 아니하면 우리는 우리의 말만 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심성속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야 살맛도 나고, 스트레스도 확 풀리는 것 같고,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불만도 불평도 비난도 판단도 거침없이 나오게 됩니다. 이런 것은 사탄의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나는 오직 아버지께 들은 대로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니면 침묵하셨습니다. 그런대도 주님은 스트레스는커녕 기쁨이 충만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에 보면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스스로 하는 것은 에드리브입니다. 작가가 배우에게 씨나리오대본을 주어서 하게 하는데 애드리브라는 것은 작가가 준 대본을 벗어나서 스스로 말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5장 30절.「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義로우니라 나의 원(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Ad lib(libitum)을 안한다는 것입니다.
Ad lib 이것은 내키는 대로, 마음대로 내 뜻대로 한다는 거예요. 유명가수들이 나와서는 원래 노래에 없는 음이나 소리를 막 내는 것이라든지, 배우가 즉흥적으로 대본에 없는 말을 하여 재미를 돋구는 것을 에드리브라고 합니다. 그런 것을 잘하는 자들이 김구라 이경구 신정환이나 김용만 같은 자들입니다.
우리 주님이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아버지께 들은 대로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하신 臺本 그대로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에게 들어라”는 것은 이제는 우리의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말을 하며 살라는 것이 아니고, 에드리브 하지 말고 주님께 들은 대로 만 말하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작가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대본을 따라서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원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는 것은 그 순간은 십자가 붙잡고 죽어라는 것과 같습니다. 언제 특히 잠잠해야 합니까? 내 생각대로 에드리브가 막 불만으로 불평으로 원망으로 판단으로 염려로 나오려고 할 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죽은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자신의 말이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주신 대본이 아닌 나의 생각이 말이 되어 나오려고 할 때 마다 특히 다른 사람을 향한, 교회나 다른 사람을 향한 판단이나 불평일 때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과연 이것이 주께서 하게 하시는 말씀인가 하고 말입니다.
예)모세는 광야 40년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같이 하여 오직 하나님께 들은 대로만 言行을 하던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백성들이 불평, 원망 할 때마다 그는 백성들 앞에서는 죽은 자 같이 되고 당하기만하고, 회막에 들어가서 오직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들은 대로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므리바에서 백성들이 물이없어 원망 불평하며 거역할 때 그의 생애 단 한 번 하나님께 들은 대로가 아닌 자기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이 패역한 너희여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 하며 반석을 두 번 내리쳤습니다. 모세의 지도력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모세 너는 요단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바라보기는 하겠지만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 한다 고 하셨습니다.
내 생각 내키는 대로, 내 하고 싶은 대로 말하는 애드리브에 의존된 인생 끝내시고 하나님의 각본대로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위해 오직 들은 대로 말하며 사시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십자가는 세상에 대하여 귀를 막고,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합니다(12).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앞서 오셔서 선지자 엘리야와 같은 일을 하였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極惡無道한 아합왕 시대에 풍요와 다산을 추구하는 바알우상으로 가득할 때 사람들이 회개하고 우상을 버리고 그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하였습니다. 엘리야가 그랬고 세례요한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바른말 하고 거절당한 엘리야처럼, 세례요한도 그러다가 거절당하고 처형당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임의로 대하였다는 것은 그런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지금 그 같은 노선을 가시마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미움받고 버림받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길을 가십니다.
온 세상이 죄악의 힘에 의해서 억압당하고 있을 그때에, 한 사람, 예수그리스도가 견딜 수없는 고난 속에서 할 말도 많고, 원망도 많을 수 있는 그 상황에서 버림받고 침묵하심을 통해 세상의 구원의 길을 열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구원을 확신하는 자들에게는 늘 주의 음성이 들립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아버지의 뜻이니라,,,. 그러므로 수많은 환경을 통하여 내 안에서 불만의 소리가 나오고 염려가 나오고 미움 다툼 시기 질투가 막 일어나려고 할 때도 주님께 듣는 것입니다. 기뻐하라 염려하지마라 감사해야지,,,,, 내 육성의 생각, 육신 소리, 발 빠른 죄성의 잔꾀가 다 죽고 하나님의 아들에게 듣게 되고 그의 말만하는 세상 이런 세상을 위하여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입니다.
Ⅲ. SNS(Social Network Service)란 인터넷상으로 그리고 스마트폰을 통하여 페이스북이라든지, 트위터라든지 이런 것을 통하여 정보를 빨리 공유하게 되고 또 서로 사교를 하게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특징이 모든 사람이 다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신앙적으로 좋은 영향력을 흘려보내려는 그리스도인들의 말도 많지만 대부분은 그냥 자기 생각 느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로 가득하지요. 그리고 수억, 수천만의 많은 사람들은 그 가상의 세계인 싸이버 세상에 빠져 들어갑니다. 보이지 않는 실체가 있어서 그렇게 싸이버의 세상으로 사람들을 끌고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은 사람들이 자기 생각 자기 말을 하는 세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듣고 그의 말을 하는 세상을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면서 까지 그런 세상을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리라”(요5장25절)그럽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니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고 하십니다. 세상에 들리는 소리가 많은 이 시대야말로 우리는 오히려 잠잠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즐겨 듣고, 그가 기뻐하시는 언행만을 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17장14-20절(산 신앙을 위하여) 13.9.8
Ⅰ.예수께서 변화산에서 그 모습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바뀌시던 특별한 일이 있은 후, 거기서 내려 오셨을 때의 일입니다. 그 때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귀신들려 심한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들을 고쳐달라고 엎드려 간청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직전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면 산 아래에 남아있던 아홉 명의 제자들이 아주 난처한 입장에 말려들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下山 후, 그 내용을 알아봤더니, 귀신이 들려서 간질병증세가 나타나는 아이를 제자들에게 와서 고쳐달라고 했는데 제자들이 못 고쳐주고, 또 마가복음9:14에 보면 이렇게 못 고쳤을 뿐만 아니라 그 못 고친 것을 서기관들이 와서 트집을 잡게 되고, 그들은 서기관들의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못 고치면 그냥 가만히 기도를 하고 기다릴 것이지 “귀신아 나갈지어다”!,“간질병아 떠나갈 지어다”! 하고 물리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소리질러도 안 나으니까, 사람들이 제자들을 우습게 여겼고 비난했고 서기관들은 제들 진짜 웃긴다며 시비를 걸고,,,,,얼마나 곤욕을 치렀겠습니까.
이 상황을 보시고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강도 높게 꾸지람을 하신 뒤에 그 아이를 고쳐주시게 됩니다. 예수님은 못 고치는 제자들, 비웃는 서기관들, 그리고 비난하는 모인 사람들, 이 모든 상황들을 보시고‘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라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그 후에 제자들이 나와서 “주님 우리는 왜 귀신을 못 쫓아냈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그 앞에서의 제자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너희들의 믿음이 작은 까닭이다, 만약에 너희들이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이 있었더라도, 산을 향하여 옮겨지라고 명령했어도 그 산이 옮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못할 것이 없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Ⅱ. 오늘 예수께서는 믿음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작다는 것은 겨자씨보다도 작다고 하십니다. 도대체 보일까 말까하는 쌍추씨 같은 겨자씨보다 작은 믿음은 얼마나 작다는 것일까요? 이 말씀은 믿음의 크기보다는 내용, 질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겨자 씨’라고 표현된 말씀이 암시하듯이 생명력이 있는 믿음, 살아있는 믿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미 우리가 들으신 대로 한 중풍병자를 주님께 메고왔던 사람들의 믿음, “주님 오시지 않아도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 고 했던 백부장의 믿음, 그리고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 고생하던 한 가나안여인의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하던 믿음을 예수님께서 크게 칭찬하신 것을 우리가 압니다.
이런 믿음은 다름 아닌 살아있는 믿음이지요. 그러므로 믿음이 크다는 것은 산 신앙이고, 믿음이 작다는 것은 생명력이 없는 믿음입니다. 우리 교회가 ‘생명시내교회’아닙니까? 저는 우리 생명시내 교회 성도님들이 다 이런 살아있는 신앙을 소유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이런 생명력이 있는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이런 살아있는 신앙을 가지기 위하여,
1. 지금 살아계신 주님과 ‘연결’이 되어있어야 합니다(16). 많은 성도들의 오해는 믿음을 固定된 것으로 생각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자주 실족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고정된 것이 아니지요. 다윗을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소년시대에 골리앗을 무찌를 때의 태도나 말을 보면 너무 믿음의 사람 아닙니까? 골리앗을 향하여 “너는 칼과 단창으로 중무장하여 나오지만 나는 오직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가노라” 이렇게 대단한 믿음의 사람 다윗같은 자도 왕이 된 후에 넘어질 때는 형편없이 추락하였습니다. 밧세바와의 일로 범죄하고 또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격전지에서 죽게하는 과정에서는 하나님을 어쩌면 단 한 번도 찾지 않습니다. 그 다윗이 죄악의 奈落으로 추락할 때는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믿음은 고정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믿음으로 살려고 하지마시고 살아계신 주님과 늘 지금 여기서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그 신앙이 파워가 있습니다.
우리가 암송하신 요절 고전10장11-12절은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래요 자신은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왜 넘어질 수 있습니까?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어있지 않는데도 자신은 그래도 괜챦다 고 든든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을 믿고 사는 것이지요. 이게 영성생활에 무서운 함정이 되는 것이지요.
‘구원의 확신’ 이라는 것, 이것도 참 애매하지요. 전도훈련을 할 때 사람들을 붙잡고 복음을 일방적으로 전하고는 믿느냐? 해서 믿는다고 하면 ‘됐다’ 하고 등록표를 받아내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래가지고 교회 나와서 생활하는 동안 신앙이 잘 자라는 경우는 정말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그런데 전도받아서 금방 구원의 확신을 가진다는 것은 정말 드문 일입니다. 그때는 확신이 안 들면 아직 안 든다고 해도 괜챦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를 오래 다녀도 확신이 안 들 수 있습니다. 확신이라는 것은 急造하여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분은 “나는 확신합니다” 하는데도 사실은 확신 못하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개는 그냥 자기의 생각을 믿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정말 믿어지면, 그리고 그분이 나를 구원해주신 사실이 믿어지면, 보이지 않는 천국을 이 땅의 보이는 어떤 현실보다 더 좋아하게 되고, 그리워하게 되고,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뉴엘이 나의 현실로 실감하게 되고, 지금 나에게 있는 통장의 돈보다도 보이지 않는 천국의 보화가 더 실감나고 그래서 정말 마음이 든든하고 넉 너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이 구원받았는지 않았는지는 천국에 가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살았던 것은 이미 우리가 듣지 않았습니까? 보이는 자식,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보다도 보이지않는 하나님이 더 현실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많은 재산들보다 그는 하늘에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고 살았다고 히브리서 11장9-10절에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냥 천막생활을 하면서 옮겨 다녀도 넉넉하였습니다. 불만 제로입니다.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떠돌이 인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바로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말씀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 그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듯이 믿는 믿음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냥 괜히 믿음이 조상이 되는 것은 아니더라구요.
제자들은 전에 주께서 그들을 짝을 지어 내 보내실 때, 가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했던 그 경험따라 전에도 고친 적이 있으니까 ‘요시’ “내가 한번 해볼게” 하고 귀신들려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이를 고쳐보려고 차례로 덤볐지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난날의 믿음이 지금 그대로 간직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삼손이 들릴라와의 사랑에 빠져 술퍼마시고 머리카락이 다 잘리고 난 다음 여호와의 영이 떠나버립니다. 그런데도 불레셋사람이 잡으러 왔다니까 내가 요번에도 이 사람들을 제대로 혼을 내주자 하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아무 힘도 못쓰고 무력하게 잡혀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지난 어느 날 믿은 것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어있다면, 다음은
2. 그 살아계신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의식이 있게 됩니다(16). 나의 거하는 모든 현장들이 주님께 보냄을 받은 현장이 되어버립니다. 그렇지요? 살아계신 하나님과 내가 연결되어있다면 나의 현장이 하나님의 뜻과 다를 수가 없습니다. (막6장)제자들도 한 때는 주님께 능력을 부여받고 둘씩 짝을 지어 보냄을 받아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고 병을 고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자신들의 생각과 능력으로 덤비었습니다. 그랬다가 망신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언제나 주께로부터 보냄받은 자의 신앙의식으로 살지 않으면 우리는 늘 사람들과 마귀의 조롱앞에 놓인 종이 호랑이입니다(16).
예)어느 날 주님은 제자들과 배를 타시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십니다. 그런데 광풍이 불고 파도가 일어나고 일엽편주가 사정없이 뒤흔들리게 되자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배 고물에서 쿨쿨 주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깨우면서 “주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안 돌아 보시나이까” 하자 주님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하시고는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십니다. 이 상황에서 제자들이 보는 것과 주님이 보시는 것이 전혀 다릅니다. 주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서 십자가를 지실 때 까지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을 알고 계십니다. 폭풍으로 큰 풍랑이 일든지, 로마 군대가 오든지, 주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기 때문에 보내신 이의 일을 마치기까지는 하나님의 완전한 보호아래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아십니다. 그러니까 그 폭풍과 풍랑 속에서도 흔들어 깨워야 깨셨을 정도로 곤하게 주무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 편 제자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 폭풍 때문에 자신들은 꼭 죽을 것만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이게 그들의 믿음의 한계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실제 세계를 보시고, 제자들은 무서운 폭풍으로 위장되고 가장된 가상의 세계를 보고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이 위장된 세상의 위험과 영광을 바라보게 합니다. 인터넷으로 표현되는 거미줄의 세상, 또는 그물의 세상은 실제로는 없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면 친구들과 대화도 하고, 게임도 하고 외국의 풍경도 있고 다 있는 것 같습니다.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스위치를 딱 끄는 순간 그것은 없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있기는 있는 데 실제로는 없습니다. 그래서 거짓 仮, 생각 想을 써서 실제로는 없는, 가상의 세계라고 합니다. 성도님들. 저도 옛날에 어른들이 인생 일장 춘몽이라고 할 때는 노망한 소리 같았습니다. 그런데 저도 이제 이 나이가 되니 아 정말 인생은 한 바탕의 꿈에 불과하구나 하고 너무 너무 실감합니다. 왜냐하면 인터넷 세상만 가상의 세상이 아니라 알고보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진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짜같기도 하고, 있기는 있는데 다 지나가고 사라져 가기 때문입니다. 꿈속에서도 꿈을 꾸듯이, 알고보니까 지금 이 세상도 이게 영원한 실체가 아니더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으로부터 이 세계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천국을 말씀하시고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내게 있어 아버지께 속한 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감추인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여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이 세상의 사라져갈 영광이 전부인 것처럼 答이 없는 속임수로 우리를 계속 속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고후4:18-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영원하다는 것은 참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그분으로부터 내가 보냄을 받아 살고 있다면 우리를 보내신 분께 대한 신앙이 우리의 변화무쌍한 모든 상황 속에서도 보내신 분의 그 뜻을 따라 언제나 평안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와 연결이 되어 그에게로부터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정은 내가 보냄을 받은 곳입니다. 우리의 일터는 우리가 보냄을 받은 곳입니다. 돈없는 상황, 돈 잘 벌리는 상황, 우리아이가 공부를 잘하는 상황, 못하는 상황, 남편이 몸이 약한 상황들, 우리는 매일 이 모든 상황이 기다리는 현장으로 보냄을 받는 것입니다. 내 아이에게, 내 가정에, 나를 보내신 분이 계십니다.
전에는 결혼을 해서 마냥 기뻤고, 부부싸움을 해서 슬프고, 아이가 나서 기뻤고 속썩이면 마음이 아팠습니다. 장사하는 분은 돈이 잘 벌려서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믿음의 눈을 떠서 보니까 나는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상황에 따라 좋아했다가 슬퍼졌다가 제풀에 꺾였다가 하는 그렇게 사는 삶이 아니고 이제는 꿈을 깨고, 보내신 분의 뜻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보내신 분의 뜻을 찾아 그 뜻이 실현되도록 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가장 합당한 것입니다.
이렇게 1)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2)보냄받은 자로 살아가는 자에게 필수 불가결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3. 임재의 산 위로 가는 것입니다(마17장1-13). 지난주에 들으신 대로 베드로 요한 야곱이 변화산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주님의 영광의 광채를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산(生)신앙은 산(山)위로 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문제를 안고 해결을 바라고 산을 찾고 기도원을 찾습니다. 은행 利子 갚을 날짜가 다가
왔는데 돈 없으면 산에 가고, 잔금치를 날짜가 다가와서 또 산을 찾고 그럽니다. 그러나 산 신앙은 그 산에 가는 것이 아니고 그냥 하나님 안으로 가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주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거기서 영광의 주를 제대로 느끼는 것입니다. 거기서 주님의 생각과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모든 예배는 다 주님을 만나는 山입니다. 우리가 왜 주일 낮 예배 드리기 전에 예배 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가집니까? 이 예배를 통하여 영광의 주님을 보고 깊이 느끼기 위함입니다. 이게 산 예배, 살아있는 예배입니다. 믿음의 사건입니다. 변모산상에서 베드로일행은 그 산에서 그 영광에 취하여 산 아래서의 일들을 까마득히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의 자리에서 영원히 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영광의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내려왔습니다.
우리도 문제가 많은 나의 현장속으로 들어가는데 먼저 하나님과 만나 교제하여 제대로 충만하게 되어 아들에게 딸에게 남편에게 가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으로 내 마음이 천국이 되고 기뻐져서 일터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 일터로 가면 거기는 오직 돈과 능력과 능율을 중심으로 밀리고 밀어내는 생존경재의 싸움터입니다.
(행16장)바울과 실라가 귀신들린 여자를 고쳐주고 고발당해 심하게 채찍을 맞고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이유없는 채찍의 고통이나 어두운 지하감옥이 그들의 마음을 조금도 아프게 하거나 우울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보다 큰 하나님께 나가 그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서 찬양과 기도가 나오자 감옥은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리고 간수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전도현장으로 바뀌어버리지 않았습니까? 문제들이 선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Ⅲ. 겨자씨같이 작지만 생명력이 있는 신앙을 가지기 위하여,
1)지금 여기서 살아계신 주님과 ‘연결’이 되어있어야 하고, 2)그 주님과 연결된 자는 모든 나의 현장을 보냄을 받은 자로 가게 되는 것이고, 동시에 그 일을 위하여 먼저 3)하나님의 임재의 안으로 들어가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언제나 이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자리 보다 더 좋은 만남의 장소는 없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케 하십니다. 뿐만이 아니고, 우리의 모든 현장이 주님이 보내신 축복의 장소가 됩니다. 그 십자가의 은총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껏 호흡하고 누리는 생명시내같은 우리가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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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7장22-27절(고백을 따라가는 믿음) 13.9.15
Ⅰ.마태복음16장에서는 제자 베드로의 유명한 그리스도 고백이 나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고, 제자들의 입에서 이 대답이 나오기까지 1장부터 16장이 필요했습니다. 이때부터 예수님은 비로소 자신이 십자가를 지시는 고난의 길을 가실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십니다(16:21,17:9). 그리고 곧장 십자가 수난을 받아야 하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시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오늘도 22-23절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를 반환점으로 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도중, 갈릴리 바다 북쪽 동네 가버나움에 계실 때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가버나움은 시몬 베드로의 집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일행은 시몬 베드로의 집에서 며칠간 유숙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섬기기 위한 여러 가지 준비를 위해 마을에 갔을 때, 마침 성전 세를 받는 사람을 만납니다. (24절)“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예수님 당시 만 20세부터 50세 이하까지의 유대인 남자들은 일 년에 한 번씩 예루살렘 성전을 유지하기 위한 경비로서 세금을 내야했습니다. 그 성전稅가 일인당 반 세겔입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에 통용되는 화폐의 종류에는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발행한 ‘데나리온’이 있고, 헬라에서 발행한 ‘드라크마’가 있습니다. 여기에 유대인들이 자체적으로 만들어서 통용하던 화폐가 ‘세겔’입니다. 이 세 가지 혼용되고 있었습니다. 데나리온이나 드라크마는 화폐 액면가의 가치가 동일합니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 혹은 한 드라크마입니다. 그런데 ‘세겔’은 데나리온이나 드라크마의 네 배입니다. 그러니까 한 세겔은 4 데나리온(드라크마)입니다. 유대인들이 내는 성전 세가 일인당 ‘반 세겔’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稅 거두는 사람들을 ‘반 세겔 받는 자’ 이렇게 불렀어요. 24절에 그렇게 나오지요? 반 세겔은 노동자의 이틀 품삯입니다. 그러니 일인당 일 년에 20만원 정도를 성전세로 내야 합니다. 가난한 서민에게는 부담되는 액수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돈을 거둬서 예루살렘 성전을 보수하고, 또 절기마다 드려지는 각종 제사와 예식을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유대인들은 성전 세만큼은 데나리온이나 드라크마로 받지 않고 세겔로 주고받았습니다. 데나리온에는 로마의 황제인 시저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드라크마 동전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비너스 같은 여러 우상 신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어요. 유대인들이 볼 때 로마 황제의 얼굴이나 희랍의 신들은 모두 우상입니다. 그 우상의 모습이 새겨진 것으로는 하나님의 성전에 갖고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한사코 ‘세겔’을 고집했습니다.
느닷없이 질문을 받은 베드로는 ‘내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일을 아시고 베드로에게 “왕자들이 왕에게 세금을 내지 않듯이 하나님의 아들도 낼 필요가 있겠느냐” 하시고, 그러시고도 동시에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세금을 거두는 말단 관리들을 ‘실족케 하지 않기 위하여’ 세금을 내라고 하십니다.
Ⅱ.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과 취하게 하시는 특이한 행동에는 특별한 주문이 담겨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주는 그리시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고, 고백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 베드로에게 자신이 고백한 대로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大同小異하지요. 본의 아니게 고백과 신앙의식이나 행동은 따로따로가 되고 맙니다. 고백을 했으면 반드시 고백한대로 믿어야 합니다. 어떻게 믿는 것이 고백한대로 믿는 신앙일까요? 고백한대로 믿는 신앙은,
1.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섬기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도 감탄하실 만큼 名品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그의 신앙의식이나 자세는 고백에 못 미쳤습니다(14-25). “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이게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성전관리들의 요청에 그냥 자신의 생각대로 개념없이 “내신다” 하고 말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신분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주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틀품삯의 돈 문제보다도 베드로는 평소에 자신이 고백했던 대로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품 고백을 했을 뿐만이 아니고 바로 두 준 前에 들으신 대로 그는 변모산상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런 영광의 모습으로 바뀐 것을 목격하였고 동시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믿고 따르는 신앙자세는 당연히 그의 말씀을 따라야합니다. 예수께서 비록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오셔서 평범하고 초라하게 동행하셔도 그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는 반 세겔 받는 자가 “너의 선생은 세금 안내느냐?”는 청구에 자신의 생각대로 말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베드로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베드로에게 예수님 자신의 신분에 대한 말씀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늘 우리가 들으시는 대로 주님이십니다. 보이지않는 하나님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오신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영원히 죄에서 대속하여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히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세상은 그들을 거절하여도 우리는 반드시 받들어 섬겨야 하는 분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만이 아니고 우리도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을 핑계로 주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일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특히 한가위 같은 명절이라도 닥아오면 괜히 우리의 마음이 분주하여 주님은 온데 간데 없고, 나 우리만 있는 삶이 아닙니까? 이것은 임마뉴엘도 아니고, 주님을 경외하는 것도 아니지요.
예)성도여러분 혹시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입니다. 아이 큐 75의 좀 모자라는 소년 검프는 어릴 때부터 동네북이 됩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머리는 좀 모자라고, 말도 어눌하고 척추가 굽고, 두 다리는 소아마비로 보철기를 끼고 다니는데 동네 아이들이 바보라며 돌을 던집니다. 그것을 피하려고 도망가는데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잡으려 옵니다. 불편한 다리를 끌고 힘껏 도망가다가 다리의 보철기가 다 떨어져 나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넘어지지 않습니다. 다리가 이미 다 낳은 것입니다. 열심히 뛰어도 괜챦았습니다. 그때부터 검프는 계속 뛰어다닙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 역시 그 동네 깡패들에게 놀림받으며 돌을 맞으며 그들의 車에 쫒기게 됩니다. 그들을 피하여 열심히 달려 도망간 것이 대학 미식축구 게임을 하고있는 운동장으로 뛰어들어갑니다. 경기중인 선수들보다 빠른 그를 보고 놀란 감독이 그를 원합니다. 이 아이큐 75청년이 대학의 미식축구 선수로 발탁이 되고 대학도 졸업하게 됩니다. 베트남 전쟁에도 갑니다. 똑똑한 소꼽친구 소녀 제니가 “너는 꿈이 무엇이니?” 하고 물었을 때 그는 “나는 꿈을 모른다 고 합니다”. 소녀 제니는 나는 포크송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야 그럽니다.
제가 제일 감명받은 것은 나중에 베트남 전쟁에 가기 위하여 특수훈련을 받게 될 때 호랑이같은 교관이 신병들에게 차례로 묻습니다. “너희들은 이 훈련소에 왜 왔느냐?” 차례로 묻습니다. 다들 멋진 대답을 합니다. 나는 조국을 위하여 왔습니다. 나는 젊음을 불태우기 위하여 왔습니다. 나는 베트공을 무찌르기 위하여 왔습니다. 야. 검프. “너는 여기 왜 왔느냐” 아이큐75의 검프는 대답합니다. “나는 교관님의 명령을 따르려고 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교관은 고막이 떠나갈 듯이 소리를 버럭지르며 “빌어먹을 난 이런 대답은 처음 들어보네” “검프 너는 정말 천재야! 아이큐가 160은 넘겠구나”라고 말해줍니다. 꿈이라곤 도무지 없었던 검프는 베트남전쟁에서 발이 빠른 특기로 포격에 重傷을 입고 포로로 끌려가 죽게될 몇 명의 동료를 구하는 공을 세우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소꼽친구이자 첫사랑 제니와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가수의 꿈을 찾아 다니지만 히피족이 되고 마약과 알콜중독에 병까지 안고 꿈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와 얼마있다가 임종을 하게됩니다.
이 영화는 가벼운 깃털하나가 날아오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깃털하나가 날아가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바람에 그냥 날리는 깃털처럼 꿈도 없는 바보소년 포레스트 검프의 ”나는 교관님의 명령을 따르려고 왔습니다“ 라는 말이 마음에 많은 것을 생각게 해줍니다.
우리에게 야 너 왜 살고 있느냐? 물으신다면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아가씨 만나 장가가려고 살고 있습니다. 돈 걱정안하고 돈 벌어 남보랍시고 잘 살게 될 그 날을 바라보면 삽니다. 언젠가는 남들이 우럴어 봐 주는 그런 사람이 되려고 살고 있습니다. 이런거 아니지 않습니까? 너 왜 지금 이 땅에 사냐? 지금 하나님께서 내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 섬기기 위해서 나는 지금 살고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대답이고 신앙의식이 되어야할 줄로 믿습니다.(아멘 안 해도,, 하신줄로,,)
베드로가 주님을 주님으로 온전히 섬기지 못하면 누가 하겠습니까? 우리가, 목사인 제가, 그리고 직분자들인 여러분이, 그리고 예수님을 오래 믿은 우리, 그리고 지성인이라고 자부하는 청년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경외하지 못하면 누가 하겠습니까? 바보소년 ‘검프’처럼 꿈이 없어도 아이큐가 낮아도, 아니 세상에서는 좀 바보스럽게 보여도 예수님을 언제나 매순간 살아계신 주 하나님으로 의식하며 섬기시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고백한대로 믿는 신앙은, 1)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섬기는 것이고,
2. 믿음으로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성전세를)주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그냥 받아들이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베드로의 입장에 되어서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은 그에게 바다에 가서 낚시를 하여 제일먼저 잡히는 생선의 입을 열면 한 세겔이 나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읽다보면 말도 안 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베드로가 주님이 명하신대로 하게 됩니다. 베드로도 아이큐가 얼마나 되었을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이게 너무 귀한 믿음이지요. 베드로가 고백한 믿음은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데 그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주님은 능치 못 할 일이 없으십니다.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너무 많습니다. 예)노아시대는 당시 세상을 물 심판하기 위하여 아라랏 산에 방주를 만들게 합니다. 그런데 노아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또 이스라엘민족이 애굽에 400여년 노예로 있다가 이제 애굽을 나오게 될 때 하나님은 유월절의식을 집행하게 합니다. 이 유월절이라는 것이 집 출입구에 양의 피를 시뻘겋게 바르게 하고 식구들은 그 집안에 들어가 있게하는 의식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그대로 집행을 하게 됩니다. 참 웃기는 이야기 같고 어찌보면 이상한 나라의 이야기 같습니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노아도 모세도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고 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또는 무소불능하시다 무소부재하시다 며 온갖 美辭麗句로 고백을 합니다. 정말 우리가 고백한 그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그 고백대로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믿고 따라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우리나라 불교야화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野話니까 그냥 야화로 들으시면 됩니다. 서산대사의 마지막 남은 단하사람의 제자가 사명당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도를 닦겠다고 高僧을 찾아왔다가 너무 힘들어서 도중에서 다 떨어져 나갑니다. 단 한 사람 젊은 사명당이 서산대사를 섬기며 도를 닦는데, 공부는 한마디도 안 가르쳐주고 날마다 물깃고 나무하고 불 때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이런 것만 시킵니다. 그래도 참고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러기를 十年, 어느 날은 서산대사가 그를 부릅니다. 그러면서
지푸라기를 손에 쥐어주며 “야 오늘 장날이니까 장터에 가서 송아지 한 마리 사와라” 그러는 것입니다.
사명당이 하도 기가 막혀서 “아니 스승님 송아지 사려면 돈을 주셔야지 지푸라기를 주시면 날더러 어떻하라는 것입니까?” 하고 화를 냈더니,,,, 스스이 지팡이를 가지고 머리를 탁 치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사명당의 입에서 나온 말이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 그랬답니다. 그리고 다시 십년, 눈 내리는 어느 날은 절벽위로 사명당을 데리고 가서 그를 밀어 던졌답니다. 그때 사명당이 두 손을 합장하고 말없이 절벽 아래로 떨어졌는데, 바로 그때 도를 통하였다고 합니다. 사명당이 20년 만에 도를 닦았다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道를 닦으러 왔으면 묵사발이 되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우리는 入山修道하여 難行苦行 하여 道를 통하려는 자가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자들 아닙니까? 하나님을 좋으신 하나님, 나의 아버지, 전능하신 왕,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주님으로 믿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바다에 가서 낚시하면 먼저잡히는 물고기입에 한 세겔이 있다”고 하시든지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셨다”든지, 콩이 팥이라고 해도 주님의 말씀은 사실로 믿고 행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고백한 대로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생명시내교회 식구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화끈하게 믿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백한대로 믿는 신앙은, 1)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섬기는 것이고, 2)믿음으로 말씀을 행하는 것이고, 그리고, 고백한대로 믿는 신앙은,
3. 최소한 상식적입니다(27a). 주님은 불신자들에게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십니다.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높은 영적 진리를 무리하게 고집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금방 실족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성전 稅를 지불하라 고 하십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주님과 베드로사이의 이 문답에는 대단히 심오한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왜 존재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곳을 통해서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고, 그곳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고, 그곳을 통해서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 받고자 하는 곳입니다. 성전 세란 출애굽기 30:13-16에 나와 있는 대로 그 어떤 사람도 예외 없이 20세 이상 성인이라면 다 동참해야 되는 생명의 속전입니다.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에 세겔대로 반 세겔을 낼찌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 곧 二十歲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의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의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속하리라" 즉 결코 가난한 자라고해서 봐주는 것도 없고 부한 자라고해서 더 많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 사함을 받아야 지만 구원이 되는 동일한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전세가 곧 생명의 속전이 된다는 말 은 성전 세를 거두어 성전을 유지해야만 그 안에서 속죄 효과가 발생되어 그로 인하여 생명이 보존된다는 말이 됩니다. 성전이 이런 속죄의 기능을 하기 위해 있는 겁니다. 따라서 이 속죄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제사 드리는 자나 성전 건립 및 유지와 보수에 비용이 들게 마련입니다. 만약 성전세를 내지 않는 자가 있다면 이는 하나님의 속죄의 효과를 거부해 버리는 몸짓이라고 간주해도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그 성전을 폐기처분하시고, 자기 몸을 십자가로 말미암아 전혀 새로운 성전을 지으려고 하십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 마당에, 베드로가 “예수님도 성전 세를 내신다.”고 자기 멋대로 대답했으니 얼마나 모순된 대답을 했습니까? 주님은 제자인 베드로가 잘못 대답한 것을 깨우쳐 주십니다.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이 문답으로써, 시몬 베드로는 마16:16에서 자기 입으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한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그때는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놓고, 성전세를 낼 것이라고 했으니 자기의 모순을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주님은 물고기 입에서 나오는 세겔로 성전세를 내라고 하셨습니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세금을 거두는 일을 하는 말단 관리들을 실족하게 하지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도, 주일날 병자 고치는 문제에서는 양보하시지 않았어요.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에 주일이라고 손 놓고 있어야 한다는 데는 절대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또 제자들이 주일날 밀 이삭을 비벼먹었다고 트집 잡는 바리새인들에게도 절대 양보하지 않았어요. 사람이 먼저이지 안식일이 먼저냐?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여 트집을 잡으려하고 함정을 놓으려고 다가오는 사람들에게도 역시 양보하지 않았어요.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행해 보라고 요청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예수님은 헛된 진리와 욕망으로 권력을 잡고 목에 힘주는 사람들에게는 단호하게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시고 원칙을 고수하셨습니다. 그러나 약한 자들에게는 한없이 자비하셨습니다. 이 진리를 모르는 약한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하기 위하여 성전세를 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주로 믿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마땅한 권리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손해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생활 중에도, 직장에서도, 명절을 맞아 내일부터 고향가는 길-시댁 식구들과의 어울림 속에서도 기꺼이 권리포기를 하실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시댁에서 제사상 앞에서 절은 안해도 기도하면서 푸지게 열심히 음식만들어 어른들이 기분좋게 해드린다면 얼마든지 “아가 그래 절 안 해도 괜찮다” 그러시지요. 교회다닌다 고 아무것도 안하고 “난 제사 안 지내요”,그러면 최소한의 상식도 없다고 야단맞습니다.
Ⅲ. 우리가 고백한대로 믿는 신앙은, 1)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섬기는 것이고, 2)믿음으로 말씀을 행하는 것이고, 그리고, 고백한대로 믿는 신앙은, 3) 최소한 상식적입니다. 우리 마음에 좋고 나쁜 수많은 요청이 끊임없이 쇄도하여도 그때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가 고백한대로 주님을 섬기며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그러면서도 약한 자를 배려하여, 실족하지 않게 하는 상식있는 우리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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