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4장15-21절(사랑과 동거) 08.6.8
Ⅰ.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땅에 계시는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부탁하면 보혜사를 보내주신다는 말씀이 아니고 예수께서 부활하시기 때문에 승천하셔서 아버지 우편에 권능의 자리에 앉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말씀드려서 그 하늘로 부터 성령님을 보내도록 하시겠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보내시는 성령을 보혜 사라고 할 때 그 보혜사는 무슨 의미일까요? 보혜사란 우리의 한문의 문자적인 뜻으로는 보호하시고 혜택을 주시는 분이고 영어로는 카운슬러 또는 헬퍼라고 번역합니다. 원래 기록 된 헬라의 말로는 파라 크레이토스=“옆에 불러주시는 자” 또는 “옆에 ,한 쪽에 부를 수 있는 자”입니다.
예)미국의 범죄 영화나, 뉴욕25시 같은 드라마를 보시면 형사가 범죄를 저지른 자를 체포 할때 수갑을 탁 채우면서 형법 몇 몇 조에 의하여 뭐라고 말하고는 너는 변호사를 너에게 “부를 수 있고”, 할 때 부를 수 있다 는 말이 바로 보혜사입니다. 또는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던 사람이 나는 나의 변호사를 “부르겠다” 고 할 때 그 말이 바로 정확하게 보혜사 즉 파라 크레이토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말로는 “옆에 부를 수 있는 자 ” 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범한 자가 하나님앞 에 홀로 이끌려가서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하는 선언을 들으면 도무 지 변명할 여지가 없는데 예수께서 우리의 한 쪽 옆에 불려오셔서 지금식 으로 말씀드리면 변호사가 되어주셔서 유죄판결을 받아야할 죄인을 위하여 힘이 되어주시는 분입니다.
오늘날은 전문교육을 받은 프로가 변호사가 됩니다만 옛날에는 친구나 누구든지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자가 변호를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사정을 생각하면 보혜사란 아주 적절한 번역입니다. 내가 참 곤란하고 어려울 때 언제나 바로 옆에 부를 수 있는 자 성령님은 바로 그런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아주 절친한 친구처럼 어려울 때는 언제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분 그가 바 로 성령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혜사를 “다른 보혜사”라고 하십니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그러시거든요? 다른 보혜사를 또 너희에게 주사 그러시니까 이 전에도 보혜사가 계셨다는 말씀이지요. 그가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이제 예수께서 그의 사역을 끝내시고 가시는 데 예수님이야 말로 제자들에게 보혜사이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어려울 때 언제나 옆에서 도와 주셨습니다. 풍랑이는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이 심히 위협을 느낄 때 “주님!” 하고 부르면 바로 그곳에 서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로부터 안식일날 밀이 삭을 잘라먹었다고 막 공격을 받을 때도 주님께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고 하시면서 제자들을 변호해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하고 정말 입장이 난처해 있을 때 찾아오셔서 내양을 먹이라고 하시면서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언제나 바로 옆에서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주님은 보혜사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는 바로 성령께서 오셔서 보혜사가 되셔서 어느 때나 어디서나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1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 와 함 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니라.
우리가 부를 때 부를 수 있을 정도가 아니고 함께하시고 얼마나 철저히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 속에 거하신다고 까지 말씀하셨을까요? 성령은 이렇게 우리를 철저히 도와주시는 분이 십니다. 주님은 이 세상 아무데나 있는 그런 교제가 아니고 대단히 수준높은 동거하는 관계속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Ⅱ. 그러면 이렇게 성령으로 동거하는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1.개인적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18-19을 읽으십시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안에 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이 러한 표현은 예수님께서 꼭 하나님 아버지이신 것처럼 말씀을 하십니다. 아마 이순간 주님은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말씀하신 것같습니다.
성도여러분은 고아원에 가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혹시 거기서 생활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 지요. 고아의 특징은 원장님이나 거기서 일하던 선생님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기는 하지만 문제는 개인적으로 아버지의 사랑같은 것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고아원의 세계입니다. 저는 고아는 아닌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중학 2학년 때 너무 어려워서 학업을 계속 할 수 없어서 한 학기를 쉬면서 계속 공부하기 위하여 1964년도에 서대문에 있는 구세군의 후생학원(전쟁고아들이 있는 고아원)에서 한동안 생활을 했었습니다. 전쟁고아들이어서 원 생들의 반은 팔이 없고 다리가 없고, 다 그런 장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는 먹는 것 입는 것 숙소는 그런대로 양호했습니다. 학교도 다닐 수 있었습니다. 영국 미국에서 나 오는 과자, 옷, 학용품 이 나오니까요. 그런데도 아이들이 밤낮 다투었습니다. 고아들의 가장 큰 결핍은 먹는 것 입는 것, 공부가 아니고 , 부모적인 관심을 개인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것이 다른 아이들과 다투고 싸우는 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고아와같이 버려두지아니하고 다시 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다시 오신다는 것은 마지막 날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곧 다른 보혜사로 성령강림과 함께 성령으로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주께서 오셔서 얼마나 우리를 잘 돌보아주시는 가하면 20절 말씀처럼입니다.
다시 한 번 20절을 읽으십시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안에 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또 21절도 읽으십시다. 나의 게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그에게 나를 나타내신다는 말씀은 지극히 개인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에 임하신 성령으로 우리안에 거하실 뿐만이 아니고 우리들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렇게 자신을 나타내시마 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알뜰히 도와주시던 때처럼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옆에 우리안에 언제나 부를 때마다 도와주십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너무나 자주 근심 걱정하고 외로워하고 자신이 외톨이가 된 것같은 그런 불신앙적인 행동으로 가는데 주님은 그때처럼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 이렇게 온전한 동거하는 삶에는 한 가지 필요조건이 따릅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15-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21-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동거하는 삶이란 분명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적과의 동침’이란 영화가 있기는 합니다만 영원한 동거는 분명히 사랑하는 관계에서만 가능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분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황혼 이혼이라는 말도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영원히 동거하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같이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3. 오늘 주께서 말씀하시는 사랑하는 자가 지키는 계명은 과연 무엇일까요?
1)요한복음13:34-35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예)우리 개신교 목사님 중에 직접 수도원을 창설하고, 그 속에서 수도자로 살아오는 분으로 엄두섭 목사님이란 분이 있습니다. 그 노 목사님이 교회를 목회 하는 목회자의 삶으로부터, 한평생 수도원 운동에 앞장서는 수도자로 돌아서게 된 데에는 그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분이 30세 되던 해에 목사 안수를 받고 처음 부임한 곳은, 전라남도 광주 인근의 남평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막상 그 곳에 당도하고 보니 교회의 분위기가 매우 어수선하였습니다. 까닭을 알아보았더니, 그 교회에서 신앙적으로 가장 모범적이었던 집사님 한 분이 얼마 전에 교회를 떠나 `산중파'를 따라 가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소위 `산중파'의 지도자는 이 현필이란 사람이었는데, 그 무리들은 산 속에서 기거하면서 기성교회에는 다니지 않고 그들 나름대로 성경을 공부하며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 교인들과 목회자들은 그들을 `산중파'라 부르면서 아예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부임한 엄목사님 역시 그렇게만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전라도에는 공산당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었는데, 엄 목사님이 목회 하는 교회에도 공산당원 임을 자처하는 자들이 5명이나 될 정도 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6 25 전쟁이 터졌습니다. 인민군들에 의해 서울이 점령되었다는 정보를 제일 먼저 입수한 사람들은 광주를 비롯한 도시 큰 교회 목사들과 힘있는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연줄을 대어 상무대 장교들의 군 트럭을 타고 서둘러 부산으로 도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인민군들이 전라도까지 쳐들어 왔을 때 곤욕을 치루어야 했던 사람들은, 시골 작은 교회 목사들과 힘없는 교인들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는 미국 여인으로 한국명이 유화례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끝까지 돕다가 그만 피난 시기를 놓쳐 버린 채, 인민군의 눈을 피해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국적상 만약 인민군에게 붙잡히면 어떤 고초를 당할지 알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도와 줄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미국 여 선교사의 생명보다는 각자 자기의 생명이 더 급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목숨을 걸고 미국 여 선교사를 구출해 낸 사람들이 바로 이 `산중파' 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헌신하던 미국 여 선교사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 된 자의 의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큰 궤짝을 만들어 여선교사를 그 속에 들어가게 한 뒤 번갈아 지게에 지고, 도중에 사람들이 물으면 짐짝이라 대답하면서 70리나 떨어진 화순 화학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산중턱에 있는 동굴에 선교사님을 숨겨놓고, 인민군들이 해를 넘겨 물러갈 때까지 산중파 사람들이 먹을 것을 구해 그녀를 지켰습니다. 그 와중에서 산중파 사람 두 명이 빨치산에 발각되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산중파 사람들의 이와 같은, 생명을 건 헌신과 사랑에 의해 미국 여 선교사는 끝내 무사히 구출될 수가 있었습니다.
엄 목사님은 그 사실을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으면서 과연 누가 진정한 크리스천인지, 누가 참으로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인지, 어느쪽이 정말 교회인지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8년 만에 서울로 목회지를 옮기어 도시 그리스도인 들의 타락상을 더욱 절실하게 확인한 뒤, 옛날 산중파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목회를 관두고 수도원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크리스천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참다운 크리스천이란 그 심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사람만 어떤 상황 속에서든, 자신이 모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분별하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마태28:18-20이지요. 주님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영원히 동거하마고 하셨습니다.
사랑과 전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입니다.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적어도 성경이 말씀하는 참 사랑 아가폐의 사랑은 아니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반드시 영혼을 사랑하고 멸망의 길로 가지 않도록 인도하게 마련입니다. 전도하는 것입니다. 救靈愛의 전도가 없는 사랑을 말한다면 하나님 은 분명히 그 사랑 좀 보여달라 고 하실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금년에 몇 사람씩 전도하자고 했습니까? 두 사람? 세 사람? 한사람, 한 사람을 전도하려는 마음을 품고 기도하셨습니까? 지금도 과연 기도하고 계십니까? 지속적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이웃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이웃사랑은 반드시 전도로 나타납니다. 그 전도는 마침내 사람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인도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사랑을 품고 이웃을 구원하는 큰 일을 이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Ⅲ. 주님은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들과 아주 수준높은, 그리고 비밀스러운 교제를 원하시고 우리와 영원히 동거하십니다. 우리가 죄가운데 있었을 때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찾아 오시고 사랑해주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교회된 우리는 주님과 일방통행 이 아닌 쌍방통행의 사랑을 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듯이 우리도 주님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동시에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을 지키는 일을 통하여만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신 그런 사랑으로 우리도 뭇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고 섬겨주시고, 찾아가고 마침내 인도하여 구원하는 모두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Ⅰ.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땅에 계시는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부탁하면 보혜사를 보내주신다는 말씀이 아니고 예수께서 부활하시기 때문에 승천하셔서 아버지 우편에 권능의 자리에 앉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말씀드려서 그 하늘로 부터 성령님을 보내도록 하시겠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보내시는 성령을 보혜 사라고 할 때 그 보혜사는 무슨 의미일까요? 보혜사란 우리의 한문의 문자적인 뜻으로는 보호하시고 혜택을 주시는 분이고 영어로는 카운슬러 또는 헬퍼라고 번역합니다. 원래 기록 된 헬라의 말로는 파라 크레이토스=“옆에 불러주시는 자” 또는 “옆에 ,한 쪽에 부를 수 있는 자”입니다.
예)미국의 범죄 영화나, 뉴욕25시 같은 드라마를 보시면 형사가 범죄를 저지른 자를 체포 할때 수갑을 탁 채우면서 형법 몇 몇 조에 의하여 뭐라고 말하고는 너는 변호사를 너에게 “부를 수 있고”, 할 때 부를 수 있다 는 말이 바로 보혜사입니다. 또는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던 사람이 나는 나의 변호사를 “부르겠다” 고 할 때 그 말이 바로 정확하게 보혜사 즉 파라 크레이토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말로는 “옆에 부를 수 있는 자 ” 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범한 자가 하나님앞 에 홀로 이끌려가서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하는 선언을 들으면 도무 지 변명할 여지가 없는데 예수께서 우리의 한 쪽 옆에 불려오셔서 지금식 으로 말씀드리면 변호사가 되어주셔서 유죄판결을 받아야할 죄인을 위하여 힘이 되어주시는 분입니다.
오늘날은 전문교육을 받은 프로가 변호사가 됩니다만 옛날에는 친구나 누구든지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자가 변호를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사정을 생각하면 보혜사란 아주 적절한 번역입니다. 내가 참 곤란하고 어려울 때 언제나 바로 옆에 부를 수 있는 자 성령님은 바로 그런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아주 절친한 친구처럼 어려울 때는 언제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분 그가 바 로 성령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혜사를 “다른 보혜사”라고 하십니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그러시거든요? 다른 보혜사를 또 너희에게 주사 그러시니까 이 전에도 보혜사가 계셨다는 말씀이지요. 그가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이제 예수께서 그의 사역을 끝내시고 가시는 데 예수님이야 말로 제자들에게 보혜사이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어려울 때 언제나 옆에서 도와 주셨습니다. 풍랑이는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이 심히 위협을 느낄 때 “주님!” 하고 부르면 바로 그곳에 서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로부터 안식일날 밀이 삭을 잘라먹었다고 막 공격을 받을 때도 주님께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고 하시면서 제자들을 변호해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하고 정말 입장이 난처해 있을 때 찾아오셔서 내양을 먹이라고 하시면서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언제나 바로 옆에서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주님은 보혜사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는 바로 성령께서 오셔서 보혜사가 되셔서 어느 때나 어디서나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1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 와 함 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니라.
우리가 부를 때 부를 수 있을 정도가 아니고 함께하시고 얼마나 철저히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 속에 거하신다고 까지 말씀하셨을까요? 성령은 이렇게 우리를 철저히 도와주시는 분이 십니다. 주님은 이 세상 아무데나 있는 그런 교제가 아니고 대단히 수준높은 동거하는 관계속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Ⅱ. 그러면 이렇게 성령으로 동거하는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1.개인적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18-19을 읽으십시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안에 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이 러한 표현은 예수님께서 꼭 하나님 아버지이신 것처럼 말씀을 하십니다. 아마 이순간 주님은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말씀하신 것같습니다.
성도여러분은 고아원에 가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혹시 거기서 생활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 지요. 고아의 특징은 원장님이나 거기서 일하던 선생님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기는 하지만 문제는 개인적으로 아버지의 사랑같은 것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고아원의 세계입니다. 저는 고아는 아닌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중학 2학년 때 너무 어려워서 학업을 계속 할 수 없어서 한 학기를 쉬면서 계속 공부하기 위하여 1964년도에 서대문에 있는 구세군의 후생학원(전쟁고아들이 있는 고아원)에서 한동안 생활을 했었습니다. 전쟁고아들이어서 원 생들의 반은 팔이 없고 다리가 없고, 다 그런 장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는 먹는 것 입는 것 숙소는 그런대로 양호했습니다. 학교도 다닐 수 있었습니다. 영국 미국에서 나 오는 과자, 옷, 학용품 이 나오니까요. 그런데도 아이들이 밤낮 다투었습니다. 고아들의 가장 큰 결핍은 먹는 것 입는 것, 공부가 아니고 , 부모적인 관심을 개인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것이 다른 아이들과 다투고 싸우는 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고아와같이 버려두지아니하고 다시 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다시 오신다는 것은 마지막 날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곧 다른 보혜사로 성령강림과 함께 성령으로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주께서 오셔서 얼마나 우리를 잘 돌보아주시는 가하면 20절 말씀처럼입니다.
다시 한 번 20절을 읽으십시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안에 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또 21절도 읽으십시다. 나의 게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그에게 나를 나타내신다는 말씀은 지극히 개인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에 임하신 성령으로 우리안에 거하실 뿐만이 아니고 우리들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렇게 자신을 나타내시마 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알뜰히 도와주시던 때처럼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옆에 우리안에 언제나 부를 때마다 도와주십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너무나 자주 근심 걱정하고 외로워하고 자신이 외톨이가 된 것같은 그런 불신앙적인 행동으로 가는데 주님은 그때처럼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 이렇게 온전한 동거하는 삶에는 한 가지 필요조건이 따릅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15-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21-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동거하는 삶이란 분명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적과의 동침’이란 영화가 있기는 합니다만 영원한 동거는 분명히 사랑하는 관계에서만 가능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분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황혼 이혼이라는 말도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영원히 동거하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같이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3. 오늘 주께서 말씀하시는 사랑하는 자가 지키는 계명은 과연 무엇일까요?
1)요한복음13:34-35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예)우리 개신교 목사님 중에 직접 수도원을 창설하고, 그 속에서 수도자로 살아오는 분으로 엄두섭 목사님이란 분이 있습니다. 그 노 목사님이 교회를 목회 하는 목회자의 삶으로부터, 한평생 수도원 운동에 앞장서는 수도자로 돌아서게 된 데에는 그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분이 30세 되던 해에 목사 안수를 받고 처음 부임한 곳은, 전라남도 광주 인근의 남평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막상 그 곳에 당도하고 보니 교회의 분위기가 매우 어수선하였습니다. 까닭을 알아보았더니, 그 교회에서 신앙적으로 가장 모범적이었던 집사님 한 분이 얼마 전에 교회를 떠나 `산중파'를 따라 가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소위 `산중파'의 지도자는 이 현필이란 사람이었는데, 그 무리들은 산 속에서 기거하면서 기성교회에는 다니지 않고 그들 나름대로 성경을 공부하며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 교인들과 목회자들은 그들을 `산중파'라 부르면서 아예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부임한 엄목사님 역시 그렇게만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전라도에는 공산당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었는데, 엄 목사님이 목회 하는 교회에도 공산당원 임을 자처하는 자들이 5명이나 될 정도 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6 25 전쟁이 터졌습니다. 인민군들에 의해 서울이 점령되었다는 정보를 제일 먼저 입수한 사람들은 광주를 비롯한 도시 큰 교회 목사들과 힘있는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연줄을 대어 상무대 장교들의 군 트럭을 타고 서둘러 부산으로 도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인민군들이 전라도까지 쳐들어 왔을 때 곤욕을 치루어야 했던 사람들은, 시골 작은 교회 목사들과 힘없는 교인들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는 미국 여인으로 한국명이 유화례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끝까지 돕다가 그만 피난 시기를 놓쳐 버린 채, 인민군의 눈을 피해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국적상 만약 인민군에게 붙잡히면 어떤 고초를 당할지 알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도와 줄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미국 여 선교사의 생명보다는 각자 자기의 생명이 더 급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목숨을 걸고 미국 여 선교사를 구출해 낸 사람들이 바로 이 `산중파' 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헌신하던 미국 여 선교사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 된 자의 의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큰 궤짝을 만들어 여선교사를 그 속에 들어가게 한 뒤 번갈아 지게에 지고, 도중에 사람들이 물으면 짐짝이라 대답하면서 70리나 떨어진 화순 화학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산중턱에 있는 동굴에 선교사님을 숨겨놓고, 인민군들이 해를 넘겨 물러갈 때까지 산중파 사람들이 먹을 것을 구해 그녀를 지켰습니다. 그 와중에서 산중파 사람 두 명이 빨치산에 발각되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산중파 사람들의 이와 같은, 생명을 건 헌신과 사랑에 의해 미국 여 선교사는 끝내 무사히 구출될 수가 있었습니다.
엄 목사님은 그 사실을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으면서 과연 누가 진정한 크리스천인지, 누가 참으로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인지, 어느쪽이 정말 교회인지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8년 만에 서울로 목회지를 옮기어 도시 그리스도인 들의 타락상을 더욱 절실하게 확인한 뒤, 옛날 산중파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목회를 관두고 수도원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크리스천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참다운 크리스천이란 그 심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사람만 어떤 상황 속에서든, 자신이 모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분별하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마태28:18-20이지요. 주님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영원히 동거하마고 하셨습니다.
사랑과 전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입니다.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적어도 성경이 말씀하는 참 사랑 아가폐의 사랑은 아니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반드시 영혼을 사랑하고 멸망의 길로 가지 않도록 인도하게 마련입니다. 전도하는 것입니다. 救靈愛의 전도가 없는 사랑을 말한다면 하나님 은 분명히 그 사랑 좀 보여달라 고 하실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금년에 몇 사람씩 전도하자고 했습니까? 두 사람? 세 사람? 한사람, 한 사람을 전도하려는 마음을 품고 기도하셨습니까? 지금도 과연 기도하고 계십니까? 지속적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이웃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이웃사랑은 반드시 전도로 나타납니다. 그 전도는 마침내 사람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인도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사랑을 품고 이웃을 구원하는 큰 일을 이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Ⅲ. 주님은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들과 아주 수준높은, 그리고 비밀스러운 교제를 원하시고 우리와 영원히 동거하십니다. 우리가 죄가운데 있었을 때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찾아 오시고 사랑해주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교회된 우리는 주님과 일방통행 이 아닌 쌍방통행의 사랑을 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듯이 우리도 주님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동시에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을 지키는 일을 통하여만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신 그런 사랑으로 우리도 뭇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고 섬겨주시고, 찾아가고 마침내 인도하여 구원하는 모두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사랑하지않으면 죽기
글쓴이 : 롱잉 원글보기
메모 :
'은혜 설교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마태복음16장21-28절(나를 따라오려거든) 13.8.18-마태복음17장27절까지.13.9.15 (0) | 2013.09.28 |
|---|---|
| [스크랩] 마태복음18장1-4절(하나님나라의 거인) 13.9.22 (0) | 2013.09.28 |
| [스크랩] 요한복음14장12-14절(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려면) 08.6.1 (0) | 2013.09.28 |
| [스크랩] 요한복음14장1-11(근심거리가 많을 때) 08.5.25 (0) | 2013.09.28 |
| [스크랩] 창세기18장1-15(정오의 잔치) 08. 5.25 (0) | 2013.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