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53장1-12<주가 당하신 고난의 의미> 08.3.16 (종려주일)
Ⅰ. 오늘 종려주일입니다. 2,000여년 전에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이제 이 땅에서의 마지막 한 주간을 대단히 바쁘게 보내시며 많은 일들을 하십니다. 그리고서 성금요일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3일째가 되는 주일 새벽에 부활하십니다. 오늘을 종려주일이라고 하는 것은 그때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고 또 나귀가 지나가는 곳에 뿌리며 호산나(주여 구원하소서!) 라고 외친 일에 기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 당시로부터 700여 년 전의 이사야 선지자가 고난의 종에 관하여 한 예언, 곧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하여 예언한 말씀입니다.
Ⅱ. 우리는 오늘 예수께서 당하시는 우리 죄의 결과들과 주님이 당하신 고난의 의미와 내용들을 살펴보시겠습니다.
1.우리의 죄로 인한 불행한 결과가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반드시 그 형벌이 따릅니다. 말씀을 보십시다.
:3-멸시받고, 사람들에게 싫어버림을 받습니다. 그리고 간고를 많이 겪고, 질고를 당합니다. :4-슬픔을 당합니다. 징벌을 받습니다. 하나님께 매를 맞으며 고난을 당합니다. :5-찔리고 傷하고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습니다. :7-곤욕을 당하고 괴롭고,:8-심문을 당하고 끌려가고, 산자의 땅에서 끊어지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9-무덤이 기다립니다. 3-9절까지의 이러한 형벌들이 죄지은 자들에게 기다리는 고통들입니다. 성경도 죄의 삭은 사망이라고 하듯이 죄는 결코 그냥 없어지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냥 어떻게 되는 것이었으면 굳이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지 않았겠지요. 그 고통과 수치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필요도 없었겠지요.
예)지난주일 아는 분이 ‘봉침을 잘 놓는 권위자가 있는데 그분에게 봉침을 맞으면 기가 막히게 병들이 낫는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봉침이라도 누가 놓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하는데, 작은 벌침 하나가 우리 몸의 오랜 질병을 고치는 효과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저의 집사람 기침하는 것 한방에 끝낼 수 있다는 거예요. 결국 거기는 못가고 명성기도원에 다녀왔는데, 이 벌침이 그렇게 효과가 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라고 하는 것의 毒도 얼마나 강하든지 한번 죄의 독침을 받으면 죄는 결코 저절로 그냥은 없어지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습니다. 반드시 이 세상에서도 죄의 독침은 사람들을 여러가지 형벌로 이끌고 갈 뿐만이 아니고 반드시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아무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완전한 첫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한 이상 그 아담도 땅에서 고생하고 죽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죄로 인하여 거두게 되는 불행들입니다.
2. 주님이 당하시는 고난은
1)우리의 죄사함을 위한 고난입니다. :6절말씀은 죄지은 인간의 모습을 아주 정확히 묘사하는 명구이지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다 양같고, 다 그릇 행하였고, 다 제각기의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무리의 죄악을 그 예수님께 담당시키셨습니다. 대신 지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셨다는 것은 그 죄의 형벌을 우리 대신 받게 한다는 것-그 고통을 자기 한 몸에 다 받으시는 것입니다. 죄의 대가를 치룬다는 것-즉 죄 값의 요구를 지불함-죽으심으로 그래서 죄인을 노예로 비유되기도 하였지요. 옛날에 노예가 되면 누군가가 값을 지불하지 않으면 영원히 노예인데, 죄의 노예된 우리의 죄값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지불하여주신 것입니다.
2) 죄없이 당하신 고난-이스라엘백성들이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반드시 짐승을 끌고 가서 도살하여 그 피를 통하여 사죄함을 받았습니다. 그 때 제물을 드릴 때 첫 번째 조건은 '흠없는 짐승, 깨끗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제물로 바치기 전에 그 짐승에다 사람이 안수하여 그 죄를 전가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흠없는 짐승은 흠있는 짐승이 되어 도살당하였습니다.
이 일은 이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1)죄가 없으시다는 것을 미리 예고해주는 예언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으시다는 것은 그가 오실 때 우리와 같은 아담의 자손으로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원죄가 죄가 없으셨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지난주에 보신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죄가 없으시다는 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스스로 죄를 짓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 意志로 죄를 짓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그 의지로 죄를 짓지 않으셨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고맙게 느껴집니다. :9-그는 강포를 행치않으셨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다고 합니다. 요일3:5-그가 우리 죄를 없이하려고 나타내신바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우리는 삶의 여러 과정에서 시험꺼리 유혹이 오면, 여러차례 넘어지고 쉽게 죄를 지어왔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아담처럼 하와처럼 그것을 감추고,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킬 때도 많습니다. 지금도 죄를 짓습니다. 우리의 입술과 마음, 그리고 지체로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시면서도 끝까지, 죽어도, 죄를 짓지 않으신 것입니다. 옆에서 지켜본 제자들이 그렇게 증거합니다. 오직 우리를 위하여. 이보다 놀랍고 고마운 일이 어디 있어요?
예)요즈음 우리 사회는 너무 끔찍한 죄가 많습니다. 저는 살만큼 인생을 살은 나이로, 아이도 아닌, 여자도 아닌데도 저도 막 무서워지려고 합니다. 너무 흉악합니다. 이 자리에서 다시 거론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잔혹한 살인사건, 그리고 어린 혜진양의 암매장,,,,.지난 주 한 신문 사설에는 “나는 이런 야수를 속에 품고 사는 나라가 싫다, 이런 야수들의 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어떻하면 좋습니까? 사실은 우리들 속에 그러한 잔혹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실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죄를 조금도 짓지 않으신 흠없는 어린양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이 죄없으신 구원의 예수님께 감사찬양을 드립니다! 이렇게 주님은 의인으로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1.우리의 죄로 인한 불행한 결과들 2.주님이 당하시는 고난은 1)우리의 죄사함을 위한 고난 2) 죄없는 의인이 당하신 고난이고 )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은,
3. 오해를 받으시면서 당한 고난- 또 4절에는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12-범죄자중의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다고,,
고난도 그 고난의 의미를 알아주는 고난은 그나마 견딜만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전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1)사랑하는 제자에게 배신당하여 팔려서 제사장들에게 넘기워지시고, 2)자기백성들에겐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리셨고, 그것도 가장 극악한 형인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십니다. 아시는 대로 유대나라에서는 저주받은 자를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합니다. 로마의 법으로는 被점령지의 반역자들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극악한 형을 받으십니다. 그것도 당대의 악명높은 살인강도들 사이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누가 봐도 주님의 죽으심은 의인의 죽음의 아닌 하나님 앞에서 특별히 죄가 많은 자처럼 그렇게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이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빌라도 총독에게 외치는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요?? 철저한 오해 속에서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의인이 죄인으로 오해받는 것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그것도 가장 극악한 죄인으로 판결받고 죽으시니 이 의인의 심장이 파열하고도 남는 고통입니다.
4.철저한 무저항의 고난-자신의 저항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大事에 흠이 가게하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묵묵히 자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오늘7절-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같이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아니 하였도다 .지금은 양모를 깎을 것은 기계화가 되어있어 쉽습니다만 예전엔 한 번씩 날을 잡아 들로 끌고 나가 많은 양떼의 털을 깎을 때는 지금과는 달라서 양의 목을 다리로 걸고 조이며 양의 발을 밟고 거치른 가위로 순식간에 털을 깎다보니 양들이 여기저기 상처를 많이 입습니다. 양들은 꼼짝할 수 없으니 잠잠할 수밖에 없습니다.
의인으로 십자가를 지신다면 그래도 좀 당당해야 하지 않습니까? 요새 세상에 자기가 죄를 지었다고 죽도록 낮아지고 한마디 변명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보기에는 그들도 다 의인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죽을죄를 지은 죄인입니다 죽어야만 합니다. 하는 자세 그 자체입니다.
제자가 그를 손에 입을 맞추며 팔아 넘기고, 제사장은 뺨을 치고, 군병들은 가시관을 씌우고 침을 �으며 눈을 가리고 갈대막대기로 치면서 누가 그랬느냐고 알아 맞춰라 고 조롱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시종 말씀이 없으신 채 끝까지 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의 한사람 죄인이 되셔서 대신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4절말씀-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12-범죄자중의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다고,, 합니다. 사실인즉 그 시대에 예수님의 드러난 일들을 보았을 때 누가 그를 의인으로 생각했겠습니까?
1)사랑하는 제자에게 배신당하여 팔려서 제사장들에게 넘겨지시고, 2)자기백성들에겐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리셨다고 합니다. 3절을 다같이 읽어보십시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바 되었고 간고를 많이 겪었으므로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 하였도다”고 아주 생생한 묘사입니다.
*영국의 극작-희곡-거의 다 비극 그 비극이 그 시대로는 고상하다는 귀족, 왕족, 갑부, 시인들의 이야기 그러니 그들의 비극적인내용들이 자살로 끝나고, 살인으로 끝나고 정말 비극인데도 다 참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햄릿, 로미오와 쥬리�, 오델로, 사람들이 흠모합니다.
성도여러분은 예수님은 어떤 모습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좀 귀한 신분인 사람은 몰락을 해도 어딘지 그 귀한 티가 나타나게 되고, 소위 양반은 양반 티가 납니다. 외모가 뛰어난 사람을 보면 한 번 더 보고 싶어집니다. 영화배우나 가수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보려고 모여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에서는 그런 귀한 티도 흔적도 흠모할만한 것도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고난의 종, 예수님은 멸시를 많이 받고 간고를 많이 겪은 사람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더욱 심한 말씀은 사람들이 이 고난의 종의 옆에 가기도 싫어하고 심지어 바라보기도 싫어할 정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주치면 못 볼 것을 보았다고 침뱉고 고개를 돌리고 피해갈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극악한 죄인의 모습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의 종 예수님의 모습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죄인중에도 죄인의 모습이 되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이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빌라도 총독에게 외쳤습니다. 예수님대신에 그 시대의 살인강도인 바라바를 석방시켜달라고 합니다. 그것도 가장 극악한 죄수에게 내려지는 형벌인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십니다. 아시는 대로 유대나라에서는 저주받은 자를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합니다. 로마의 법으로는 被점령지의 반역자들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극악한 형을 받으십니다. 그것도 당대의 악명높은 두 살인강도들 사이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누가 봐도 주님의 죽으심은 의인의 죽음의 아닌 하나님 앞에서 특별히 죄가 많은 자로서 그렇게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8절을 다같이 읽으십시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을 받을 내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오. 여기까지만봐도 사람들의 눈에 비친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분명히 의인으로서가 아닌 죄인의 모습이셨고 그렇게 극악한 죄인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철저히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 죄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심판받아야만 할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비친 십자가의 예수님은 죄인 그 자체이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를 위하여서 말입니다. 주님은 나는 정말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은 이말씀이 믿어지십니까? 주님은 바로 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되어버리셨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실 때 바로 제 자신이 되어주시고, 성도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버지의 강한 의지를 보십시오- :6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담시키셨도다.
10-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 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예수님의 죄인되심은 하나님아버지의 강한 의지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셔서 철저히 그를 십자가로 몰고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는 결코 양보않으시고 그 길을 가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한번도 거절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이일만은 도무지 양보가 없으십니다. 유다가 팔아넘길 때도, 로마병정이 채찍을 내리칠 때도,가만히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다리-영화 편집 동영상)
참 감동적인 것은 하나님아버지의 침묵입니다. 예수께서 3년반의 공생애를 하시는 동안 주께서 기도하시면 하나님께서 즉각 응답을 하시고,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아버지여 저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면 장사된지 나흘이나되는 시체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일도 있었습니다. 보리떡 5개를 들으시고 하늘향하여 기도하시면 많은 군중을 먹이는 양식으로 변하게도 해주시고 풍랑도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음성으로 들려주시곤 하시던 그 하나님아버지께서 십자가와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한마디도 않으시고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그가 반드시 죽으심으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십자가를 끝까지 감당하기만을 원하셨습니다.
Ⅲ. 주께서 이런 모진 고통을 당하심은 이제부터 죄의 형벌에서 사함받을 뿐만이 아니고 죄의 마력이나 최면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전에는 사람들이 다 죄가 이끄는 대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우리의 죄를 다 끝내셨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믿는 자는 죄악의 힘에 끌려다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유혹입니다. 자석처럼 우리 마음을 끌어당깁니다. 여기에 빠진 자는 스스로는 결코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예)안델센의 동화에 분홍신- 이라는 글은 죄의 힘을 잘 보여줍니다. 이 동화에는 분홍신이 나오는데 분홍신이 얼마나 예쁩니까? 소녀가 이걸 신으려고 너무 사모하고 그래서 기어이 그걸 삽니다. 그런데 이 분홍신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이 신을 신기만 하면 춤을 추게 되는 거예요. 분홍신, 춤, 다 좋지요. 유혹이지요. 좋은 일이지요 보기에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문제가 어디 있느냐? 계속 춤을 춘다는데 문제가 있는 거예요. 이 신을 한 번 신고 나면 벗지를 못하는 거예요. 자기 마음대로 못 벗는 거예요. 신는 것은 자기가 신지만 벗는 것은 자기가 못 벗는 거예요. 죄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유혹을 받아 발을 들여놓기는 했는데 거기서 발이 빠져나갈 수는 없는 거예요. 하루 이틀 1,2년은 좋았는데 계속 춤을 춰야 하는 거예요. 죄는 자기 스스로는 그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대속하시는 것은 ‘죄악의 독제성’으로부터 믿는 자들을 차단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경에서 약속하신 모든 구체적인 복들이 임합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이란 환경에서 사순절이 왔는지, 고난주간이 뭔지,,별 느낌 없이 맞이하고, 세상이 주는 프로그램에 끌려 살아갑니다.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살게하려 하심이니라-하나님과 화목, 자녀됨, 기도응답을 받고, 성령받음, 천국시민이 되고, 영생을 소유하는 것, 사단에게서 해방되는 것 이런 모든 약속들이 우리안에 이루어지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이제 땅에서 남은 삶은 고후5장14-15의 말씀처럼 우리가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자를 위하여(대신하여) 살기 위함입니다. 같은 말씀을 벧전4장1-2에도 말씀하십니다.,,그 후로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않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로다.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로다! 고 말씀하십니다.
용서하지 못한 사람? 다 용서하시고, 잊지못할 상처? 너무 심한 지난 죄의 아픔? 십자가에 다 못박고, 과연 새사람을 사시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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