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1:33-44(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4)<사순절3> 08.2.24
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는 꿈과 비젼을 가지고 살아 갈 것을 몇 주 동안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우리에게 있는 영생은 현실적으로 생기있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삶이야말로 우리에게 영생-참 생명-예수생명을 주신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며 하나님을 크게 영화롭게 하는 일인 줄 믿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롬14:8절의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우리는 주의 것이기 때문에 주의 것이 된 이상, 우리는 살아도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의 영광을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가를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면 우리의 삶의 기준이 뚜렷해집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가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이야말로! 우리의 삶의 내용이요, 방향이요, 목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의 고민이요,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롬14:23절 말씀처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믿음으로 행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으면 주님의 영광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죄짓는 자리에서는 주님의 영광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 40절 말씀이 잘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본문 말씀은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을 때에 예수님은 그 소식을 들은지 이틀 후에 오십니다. 그 때 마리아는 예수님이 조금만 일찍 오셨더라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텐데, 이제는 죽었으니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끝장났다는 투로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말을 듣고도 그 즉시로 오시지 않았습니까? 왜 예수님은 나사로와 그의 자매들을 그토록 사랑했고, 그 분을 위해 그토록 많이 행했는데 왜 그냥 죽게 내버려 두셨습니까? 마리아는 낙심되는 말로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마디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너희들이 내 말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40절)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것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표적을 본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하나님께는 큰 영광입니다. 나사로 한 사람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12:11절)
더 나아가 나사로나 그의 가족들이나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래 나사로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얻을 자”라는 뜻으로 그는 참으로 주님의 도우심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다시 살아나는 영광의 표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까? 우리가 이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합니까?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의 사람들은 믿지를 못했습니다.
그러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은 죽어 장사되어 나흘이 된 나사로의 무덤앞에 오셔서 기도하십니다(기도내용- ). 기도하시고 큰 소리로 호령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랬더니 죽어 장사되어 나흘이 지난 나사로가 돌무덤가운데서 수족이 베로 동인채로 나아왔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죽어 무덤에 장사된 사람을 다시 살게 하신 단 한번사건입니다.(수족이 묶인 채로 어떻게 나아왔을까? 지옥에 갈 사람들은 이런 질문만 하지요).
Ⅱ. 예수께서 완전히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믿으면 죽지 않거나,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하면 벌떡 일어난다는 것일까요? 예수께서 이 나사로를 살리신 일로 인하여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유대당국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이 일로 인하여 유대당국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최종 결정을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 사순절에 잡혀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므로 우리 믿는 모두가 구원받고 새 생명을 받고 이다음에 주님의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게 될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영광의 부활을 확신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이 사망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부활의 권능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부활의 권능으로 살기 위하여,
1. 사망권세를 향하여 痛憤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통분히 여기셨다 라는 표현이 두 번에 걸쳐 나옵니다. 33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여기서 통분히 여기셨다는 말씀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슬픈 분노’,또는 분노의 슬픔을 말합니다.(deeply moved)(민망-동요-troubled-난처하셨다). 주님께서 무엇 때문에 통분히 여기셨는가? 마음에 노한 심정으로 아파하셨는가?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을 보시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셨기 때문이었습니까? 아니지요. 성경을 자세히 읽으면 우리 주님의 통분하심은 다른 데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1)마리아의 울음-마리아가 울고 있었습니다. 32절에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뵈옵자 마자 땅에 엎드리어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예수님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냅니다.
죽은 오라비 나사로로 인한 절망에 사로잡힌 슬픔과 통곡의 눈물입니다. 마리아는 오라비 나사로가 죽지 않았다면 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지금 마리아에게는 죽은 나사로만이 있습니다. 이 울음은 이미 다 끝난 상황에 대한 슬픈 체념 울음입니다.
2) 그런데 마리아와 함께 울고 있는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주님은 통분하십니다. 마리아가 울고, 그녀와 함께 있는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우리 주님이 심령으로 통분히 여기십니다. 왜 통분히 여기십니까? 믿지 않는 그들의 불신앙의 모습에 대한 주님의 비통한 심정입니다. 여기 오시기 전에 나사로가 중병에 들었다 라는 전갈을 받고 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요11:4).
나사로의 병에 대해, 그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늦게 오셨고,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죽어 가는데 이틀씩이나 지체하심에 대한 아쉬움, 불신, 낙심하는 모습을 보시고 주님은 통분히 여기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능력의 주님을, 죽은 나사로라 할지라도 다시 살릴 수 있는 주님을 믿지 못한데 대한 안타까움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을 위한 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못 믿을 때 통분히 여기신 것입니다.
3)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향한 통분입니다-38절에도 우리 주님의 통분한 심정이 표현됩니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엇으로 인하여 우리 주님이 또 통분히 여기시느냐면, 37절을 보면,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을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소경의 눈을 떠서 보게 하신 능력이 어디 있느냐 하는 비꼬는 말입니다. 왜 죽도록 내 버려두었느냐 하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로 인해 우리 주님의 마음이 몹시 상하셨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에 대한 우리 주님께서 크게 분개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우리 주님께서는 마음이 편치 않으십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람니다. 믿음이 있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 영광이 나타납니다. 우리 주님은 믿음이 있는 곳에서 역사하십니다.
39절-"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죽어서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으니 더 이상 부질없는 시도는 그만 두시지요. 이미 다 끝난 일인데 이제 와서 무덤 문을 왜요? 이쯤 오면 그들의 믿음은 다 바닥나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습니다. 무덤에 오기 전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불신앙에 대하여 강력하게 점검을 받은(요11:21-27) 마르다였는 데도 믿음이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니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씀도 도무지 안 들어오고, 소망도 없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묵상해 볼 때 우리 주님이 그렇게 痛忿히 여기신 실체는 그들의 눈물도 슬픔도 불신도 아니고, 그 배후에 있는 사망권세입니다. 사람들을 철저하게 ·불신앙과 슬픔으로 몰고 가는 이 사망권세를 향하여 주님은 통분히 여기셨습니다. 그것도 모든 사람을 하나같이 불신하게 하고 절망하게 하고 슬픔에 빠지게 하는 죽음, 사망의 권세를 대하여 주님은 통분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도 사망권세에 대하여 통분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예)히브리서2장14,25-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노아주려 하심이니라.
사망의 뿌리에는 죄가 있습니다. 죄의 배후에는 마귀가 있습니다. 죄와 사망과 마귀가 사람을 이렇게 철저한 불신앙과 절망 가운데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불신앙과 절망의 뿌리에 있는 사망의 권세와 죄와 마귀를 향하여 주님은 통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사망의 권세와 죄와 마귀에 대하여는 언제나 통분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원수 마귀에게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마귀는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한 원수의식을 가지고 통분히 여겨야 합니다. 전에는 우리도 죄의 왕권, 사망의 왕권아래 있었습니다(로마서5장). 공중권세잡은 자를 마냥 따라다녔습니다(엡2장).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그러한 권세 위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이미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부활의 권능을 누리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주님은 사랑의 주님이시지만 단 한 번도 마귀와 그 방법을 용납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땅히 마귀와 마귀의 무기인 죄와 사망에 대하여도 통분히 여겨야 합니다.
고전15:26-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55-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은 우리를 절망과 불신가운데 몰아가는 우리의 철천지원수이지요. 그러므로 성도여러분은 이 불신과 절망케하는 사망권세를 향하여 언제나 거룩한 분노를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부활의 권능으로 살기위하여, 1. 사망권세를 향하여 痛憤히 여길 수 있어야 하고,
2. 우리에게 부여된 구체적인 행동을 해야 합니다.- 11:41절을 보면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십니다. 믿음의 행동이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믿음은 말이나 생각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이 요구됩니다. 우리의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완전히 죽어 장사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능력이 있으신 주께서 왜 돌무덤은 사람들에게 옮겨놓으라고 하셨을까요?
주님께서는 많은 기적을 베푸신 중에도 그 기적에 영적인 큰 교훈을 담고 행하시는 기적은 표적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표적을 행하실 때는 혼자하시지 않고 어던 일들을 사람들에게 요구하십니다.
1)요한복음의 첫 번째 기적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하신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기적입니다. 요한복음 2장 -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 -7-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여섯항아리에 물을 아구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갖다 주라>하셔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었더니 그 물이 극상품의 포도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이 부분을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물이 제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졌다, 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엘리야가 사르밧에 있는 과부의 집에 머물렀을 때에 그 집에서 병에서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였던 기적의 이야기를 알고 계시기 때문에 (왕상 17: 14) 그냥 포도주가 병에서 계속 나오게 할 수 있었음에도 굳이 하인들로 하여금 항아리에 물을 가져다 붓게하고 떠다 주도록 한 것은 분명히 깊은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2)그리고 이어서 요한복음 6장에 광야에서 5병 이어로 5,000명이 넘는 군중을 먹이신 의 기록이 나옵니다. 광야에서 날은 저물어가고 군중들이 먹을 것이 없을 때-제자들이,,주님은 ,,,너희가,,,, 6: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가졌나이다. 11. 예수께서 축사하시고 나누어주게 하십니다. 모세 때 광야에서 만나를 내리신 주님이 그냥 빵을 내놓으시면 될 터인데 굳이 한 소년의 도시락을 가져오게 하시고 그것으로 표적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3) 9장으로 가 보시면 나면서 소경된 자를 고치신 기록이 나옵니다. 7-그에게 침으로 진흙을 이겨 그 눈에 발라주시고 실로암 물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가서 씻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냥 눈을 보게 하시면 될 터인데 소경으로 실로암까지 찾아가는 행동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표적사건에는 기적을 완성하기 위해 다 사람의 동의, 또는 협조, 사람이 해야 할 무언가를 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인 요한복음 11장에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인데 여러분 다 아시는 내용이니까 관련되는 부분만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 11: 33- 44). 요11: 39 돌을 옮겨 놓으라 ? 41 돌을 옮겨 놓으니 호령을 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왜 주님의 기사에 반드시 사람의 행동이 개입하도록 하셨을까?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시면서 우리에게도 그 기적을 일으키는데 한몫을 하라고, 동참하라고 하시는구나 아니면 최소한도로 그 기적을 위해 우리의 그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기적을 일으키도록 하기 위해 환경을 조성한다거나, 기적을 일으키기 전에, 혹은 그 후에 사람이 할 일을 적어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표적을 나타내심에 있어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 하신다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과 함께 일을 하고 싶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 그래서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의 사역에 인간이 담당할 수 있는 일을 허락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준비해 놓고 그 일을 펼치시기 전에 사람에게 그 일정 부분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일에 우리들도 동참케 하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러면 지금현재는 어떻습니까? 저는 확신하기는, 지금도 그리고 또 앞으로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돌 문을 좀 치워줄 수 있겠니?”
물론 내가 나 혼자 다 할 수 있지만 너랑 함께 그 일을 하면서 그 영혼이,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것을 보는 기쁨을 그 권능을, 그 권세를 그 영광을 너희들과 같이 누리고 싶구나! 먼저 너희가 돌문을 열어놓으면 내가 그 영혼을 살려 놓을게.
그처럼 우리가 할 일을 지금도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사람을 살려내자, 그 영혼을 살려내야 하지 않니, 하시면서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 말씀이 역사하기 전에 그 사람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환경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러한 작업을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주님은 그러한 사람을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십니다. 여기 계시는 우리 모두가 그러한 사람들이라고 믿습니다.
예)12년전쯤에 지하실 교회에 모여 모임을 가질 때 전라남도 땅끝 마을에서 온 해남청년, 키 크고 잘생긴 청년하나가 있었습니다(자매들이 그 청년을 참 좋아했어요. 하여튼 얼굴 반반하고 키만 크면 사죽을,,, ㅋ ㅋ) 그 청년이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병명을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본인에게는 참 마음아픈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 당연히 청년들이 다 놀라며 술렁거렸습니다. 다들 주만 마라봐야 주만 바라봐야 하는데 저만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그 때 제가 다가가서 사도행전 3장의 성전미문의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킨 베드로처럼 “은과 금은 네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라고,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베드로의 말 중에서 앞의 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는 완벽하게 저에게 맞는 말인데, 그 다음 말에 자신이 없는 바람에…그래서, 제가 그냥 조용히 손을 얹고 기도만 했습니다. 그 청년은 ‘즉시’ 일어나지 않고 깨어날 시간이 되어서야 일어났습니다. 저는 스타일 완전히 구겼지요,,,. 청년들이 그 청년을 방안으로 옮겨 뉘었습니다. 그리고는 다 같이 기도도 하고 위로도 하고 했지요. 그때 제가 얼마나 당황했던지, 이럴 때 내가 능력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청년에게 안수하고 기도하면 아이가 벌떡 일어나면 .. ….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일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하나님이 그것을 제 눈앞에 보여주는 것을 보니 그게 다른게 아니라 나에 대한 책망으로 들렸습니다. 너에게 맡겨준 양떼가 그렇게 고생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너에게 맡겨 주었으면 그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니? 그런 하나님의 음성이 마구 힘들게 합니다. 또 어떤 교회의 힘든 상황을 알게 하시고 계속 마음에 부담감을 안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다른 사람의 아픈 모습을 보여주시는가?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도록 하라는 하나님의 신호입니다. 또한 아울러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동을 토대로 해서 큰 능력을 베푸시겠다는 신호이고 음성입니다. 선교사들의 삶을 생각하면서 그들의 외로움과 노고가 실감나십니까? 다른 성도의 겪는 심한 고통이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까? 바로 거기에 주님의 부활의 권능이 나타나기 위하여 내가 해야 할 작은 일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기를 원하시는 그 작은 일을 할 때 주님은 거기에 큰 권능을 나타내십니다.
Ⅲ. 우리가 부활의 권능으로 살기위하여, 1. 사망권세를 향하여 痛憤히 여길 수 있어야 하고,
2. 우리에게 부여된 구체적인 행동으 반드시 하시는 성도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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