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1:17-32(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3) 08. 2.17 사순절2
Ⅰ. 요한복음은 시작부터 하나님의 생명으로 시작합니다.‘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1-3).
하나님의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의 등장과 동시에 이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도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DNA를 가지고 생긴머치는 삶을 살것을 말씀합니다. 예)2장의 포도주사건-무미건조한 물에서 생명,활기,발효)력이 넘치는 포도주로, 3장의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성령으로 거듭난자, 4장의 사마리아여인과의 대화에서-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가 되리라,, 5장-베데스다 간헐천 연못의 전설따라 마냥 세월을 보내고 있는 38년 된 중환자-예수님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6장-하늘에서 내려온 참 떡, 참된 음료 예수, 7장38-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9장-나면서 소경된자-실로암(보냄을 맏은 자)에가서 씻으라-주님이야말로 시력을 창조하시는 보내심을 받은자. 10장-양들로 생명을 얻고 풍성한 삶을 누리게하시는 주님. 11장-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 그러니 요한복음은 한가지를 우리에게 말하려고 합니다. 요한복음20장30-31-"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 생명은 이다음에 죽어 천국에 가는 것에 국한 되지않고 오히려 지금 현실적으로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하는 생명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실에서는 너무 무력하고 생기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본문은 죽었던 나사로가 사흘만에 살아난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복음 증거 하시면서 마땅히 유하실 곳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가는 곳마다 예수님을 힘들게 하고 피곤하게 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로마 당국에 넘겨서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의 무리가 언제나 들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머리둘 곳 없으실 만큼, 제대로 쉴 곳이 없는 그런 생활을 하셨습니다(눅9:58). 그런데 유독 오늘 주인공인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에서는 예수님께서 참 편히 쉬셨습니다. 이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5리 떨어져 있다고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다가 말씀을 선포하실 때는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다니의 나사로 집에 유숙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가족들을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5) 예수님이 사랑하셨어요. 예수님이 나사로를 친구라고 하실 정도로 사랑을 받는 가정이었습니다(11).
그런데 이 가정에 죽음이 찾아 왔습니다.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는 나사로가 갑자기 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동생인 마르다와 마르다가 사람을 보내서 예수님께 소식을 전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즉시 달려 오셔서 나사로의 병을 고쳐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틀이 지나도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나사로는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죽고 나서 나흘이 지난 후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미 그때는 장례식이 다 끝났습니다.
유대나라의 장례는 되도록 빨리 진행이 됩니다. 한국은 최소한 하루는 지나게 하는데 유대는 아나니아 삽비라의 경우처럼 빨리 치루어집니다. 그리고 나서 유대인들은 큰 슬픔에 잠기게 되고 약 7일 동안 우는 날로 정하여 슬퍼합니다. 유대인들의 민간신앙의 인식으로는 죽은 지 사흘가지는 영혼이 떠나가지 않다가 사흘이 지나면 부패하고 악취가 나기 때문에 그 영혼이 완전히 떠나간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나흘이나 지난다음에 나사로의 무덤에 오신 것은 이미 그 영혼이 죽은 자의 몸에서 떠났기 때문에 몸으로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오지 못한다고 유대인 일반이 생각하는 그 때에 즉 완전히 죽어서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런 때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장사의 행열이 나가고 나면 죽은 자의 친구가 죽은 자의 물건을 전부 꺼내어 뒤집어 놓습니다. 그러면 가족 중에 여인이 거기 앉아서 우는 것이 장래의 한 절차입니다. 20절에 마리아가 집에 앉았더라는 것은 마리아가 그렇게 상에 임하여 있는 모습을 말합니다.
Ⅱ. 마르다와 마르다는 성격은 좀 다르지만 적어도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아주 똑 같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과 마르다가 나누는 대화를 통하여 보시면 마르다는 주님을 부활의 주님으로 믿지 못했습니다. 20-21-‘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0-21) 예수님이 여기 계셨으면 우리 오빠가 죽지 않았을텐데, 이제는 이미 끝났다는 것입니다. 불만이라기 보다는 애석해하고 심히 안타까워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32절에 보시면 마리아도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오라비는 죽지 않았을 텐데,,하고 애석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하면 21-22절에 있습니다. 즉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그럽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가능하다는 믿음, 그리고 주께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 주신다는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님은 우리 인간의 어떤 원이든 간에 하나님께 탁하여 이루어 주시는 분이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능력자로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예님은 23-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고 하십니다.
이에 대하여 마르다의 신앙의 표현은 24-마지막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 합니다.
그리고 27절에서는 아주 훌륭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런 고백은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 거의 최고의 수준에 달하는 고백입니다. 베드로나 나다나엘의 고백과 비길만한 훌륭한 고백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신앙고백을 하는데 다만 문제는 오늘 현재의 부 활을 믿지 하는 그런 신앙입니다. 세상 끝 에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러한 부활은 직접관계가 없고
나의 눈물 한숨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그런 믿음입니다.
우리가 마르다의 입을 통하여 보는 신앙, 말로 나타난 신앙은 분명 최고의 레벨의 신앙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아주 훌륭한 믿음을 고백하는데 실질면에 이어서는 그렇지를 못하다는 것입니다.
22-이제라도 주께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하나님이 실 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39절에 가면 주께서 무덤을 막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시니까 마르다는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럽니다.
이론상으로는 주님은 무엇이든지 가능하다고 하지만 무덤 에 썩어 냄새나는 시체를 향하여는 역시 상식적으로 그것은 무리다 고 하는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즉 머리와 마음이 서로 맞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입술과 가슴이 서로 맞지 않는 서로 모순된 신앙을 이들은 소유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입술로 최고의 신앙을 고백하는 머리로 아는 그 신앙과 실제의 생활 실제의 사고방식이 서로 맞지 않는 심각한 문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요한복음의 호소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이러한 것을 위하여 기록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0:30-이 복음서의 결론에 도달한 부분에서 그는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한 다른 많은 표적도 많이 행하였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여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니라.
말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시다 고 고백할 뿐만이 아니고, 실제로 그 이름에 의하여 생명을 얻고 그 이름에 의하여 그렇게 살게 하기 위하여 요한은 기록해야 할 거리가 더 많았지만 이만큼만 기록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도 항상 그런 각도에서 읽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저는 성도님들이 입술로 고백하는 신앙과 마음으로 믿고 그리 사는 것이 언제나 한결같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렇게 입술과 마음이 엇갈리고 있는 마르다에게 큰 도전을 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또 40절에서는 주여 벌써 냄새가 난다는 마리아에게 내 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말로 입술로 훌륭한 고백을 말하는데 머물지 않고 그것이 참으로 자신의 신앙이 되어 있느냐 강력히 물으시는 말씀입니다.
부활에 관하여는 예수께서 요5장24-25에서 두 가지로 나누어 말씀하셨습니다.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여기서는 말씀하는 부활은 지금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있는 현재의 일을 말씀하십니다. 질적인 의미에서 전혀 다른 삶입니다
이에 대하여 28-이를 기이히 여기지말라 무덤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이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 말씀은 무덤에서 나오게 되는 미래의 부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현재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있다고 하는 의미의 부활과 그리고 마르다가 말하는 마지막 날 부활의 때에 무덤에서 나온다고 하는 두 종류의 부활을 말씀하고 계시므로 이 사실을 잘 이해하시고 마르다와의 대화를 살펴가야 겠습니다.
이제 예수께서 23-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하시니 마르다는
마지막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 그러는데 바로 그때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고 말씀하십니다. 멀고먼 미래에 있을 남의 일과 같은 그러한 의미에서가 아닌 지금 마르다의 곁에 있는 나 내가 바로 지금 니가 말하고 있는 바로 그 부활이라고 하는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고 하는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나는 생명이니 하는 말씀은 26절에서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아니하리니,, 즉 “영원한 죽음을 죽지아니한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죄의 결과로서의 영원한 형벌의 죽음을 죽지 아니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전에도 드린 말씀입니다만 요한복음에서 에고 에이미=나는 00이다. 지금가지는 비유로 나는 생명의 떡, 생수, 양의 문 등으로 비유의 말씀을 하셨는데 이제 비유로서가 아니고 진리 그 자체로서 나는 생명이고 부활이다 고 주장하고 계십니다. 내가 부활 그 자체라고 생명자체라고 하십니다.
마르다는 먼 훗날 좀 막연한 부활을 고백하였는데 주님은 지금 여기서 주님 자신이 부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은 미래의 일이 아니다. 현재의 일이다. 부활신앙은 단지 말이나 교리의 가르침이 아니고 막연한 어느 때의 일이 아니고 지금의 사실 현재의 사실, 지금 현재에 영생을 내 것으로 하여 살고 있다고 하는 상태, 삶의 모습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서로를 알 때는 어떤 공통된 원리나 같은 취미나 같은 직업이나 보람같은 것이 있을 때 상대방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알 수 있을 때는 하나님과 같은 생명이 우리 속에 있어야 합니다. 지금과는 영원으로 이어지는 영생이라고 하는 원리가 우리 속에 싹터와야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예)하마의 출생이야기-지난주에는 하마가 출산하는 장면이 방영되었습니다. 이 어미 하마가 얼마나 힘을 주었던지 새끼가 날 때 뻥! 하고 담장 너머리 날아갔습니다. 동물원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안고 하마의 우리에 넣어두니 그 새끼가 기가 막히게 어미를 찾아가고 그리고 어미 젖을 찾아서는 먹는 거예요. 또 어미 하마는 새끼가 물에 빠지지않도록 그 숏다리로 갓난 새끼 하마를 받처주는 거예요. 하마는 물만 먹는 줄 알았는데 젖도 먹드라구요 ㅋ ㅋ. 하마는 갓 태어나도 그 속에 어미를 금방 알 수 있는 거시 다 입력이 되어있습니다.
예)요일4:8-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우리 속에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이라고 하는 분을 아무리 설명하여 들려주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내안에 사랑이 있을 때 하나님도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 사랑이라는 말 대신 생명이라는 말을 놓아도 같은 의미이지요. 생명이 없는 자에게는 예수님을 모릅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을 소유한 자라야 생판 보지 못한 예수님인데도 “믿느냐” 그러면 예 제가 믿습니다 고 대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명을 내가 살고 이러한 부활신앙에 사는 것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습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 된다는 말씀이지요
Ⅲ. 우리가 만약 그러한 생명을 살고 그러한 부활에 참여하고 있다면 나는 생명이요 부활이라고 하신 예수께서 하신 일을 미약하지만 우리도 할 것입니다.
계3:1-사대교회가 나옵니다. 이 교회를 향하여 주님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대교회도 ‘교회’라고 하니까 분명히 신앙고백도 할 것이요, 주기도문도 드릴 것이고 찬송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교회의 행위를 보시니 거기에 생명의 행위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너는 살았다고 하는 것은 이름뿐이고 사실은 죽어있지 아니하느냐?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떨까요?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떨까요? 마르다에게 물으신 것처럼 주님은 네가 이것을 믿느냐?참으로 이 신앙에 살고 있느냐?고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접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필요(needs)에 대하여 우리는 죽어있지 않습니까? 전혀 무관심 무자비한 그런 생활을 우리가 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의 감정, 그들이 받아들이는 마음 그러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어디가지 배려를 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대하여도 우리는 죽어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마무 말이나 함부로 하여 상처를 주고 있지 않습니까? 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 고민에 대하여도 죽어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무관심하게 되고 누군가를 위한 기도조차 못하는 죽은 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신의 신앙의 성장이나 무장에 대하여도 죽은 자처럼 무기력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오직 현 상태에만 만족하고 안주하고 아무 진보도 향상도 바라지 않고 포기해버린 시체 화 된 우리가 아닌가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마르다에게 바로 그 생명을 소유하고 그 신앙에 살게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깨달아야 하게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흔히 있는 목숨 동물적인 육체적인 생명이 아니고 참으로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고 말씀하시는 그러한 생명을 살고 있는지 살펴보시고 주님이 주시는 현재적인 부활신앙에 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보 요약판>
요한복음11:17-32(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3) 08. 2.17
Ⅰ.예수님은 나사로의 가족을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 죽음이 찾아 왔습니다.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는 나사로가 갑자기 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나사로가 죽고 나서 나흘이 지난 후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미 그 장례식이 다 끝났습니다.
Ⅱ. 마르다 마리아의 신앙
1. 예수님을 기도의 능력자로 믿고있습니다(22).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그럽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가능하다는 믿음, 그리고 주께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2.위대한 신앙고백- 그리고, 27절에서는 아주 훌륭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렇게 훌륭한 신앙고백을 하는데 다만 문제는 오늘 현재의 부 활을 믿지못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지만 지금은 부활은 직접관계가 없고 나의 눈물 한숨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고 하는 믿음입니다. 39절-주께서 무덤을 막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시니까 마르다는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그럽니다. 이론상으로는 주님은 무엇이든지 가능하다지만 무덤안에 썩어 냄새나는 시체를 향하여는 역시 상식적으로 무리다고 하는 반응입니입니다. 저는 성도님들이 입술로 고백하는 신앙과 마음으로 믿고 그리 사는 것이 언제나 한결같으시기를 바랍니다.
3.예수님은 이렇게 입술과 마음이 엇갈리고 있는 마르다에게 큰 도전을 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로 입술로 훌륭한 고백을 말하는데 머물지않고 그것이 참으로 자신의 신앙이 되있느냐 물으십니다.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고 말씀하십니다. 멀고먼 미래에 있을 남의 일과 같은 그러한 의미에서가 아닌 지금마르다의 곁에 있는 나 내가 바로 지금 니가 말하고 있는 바로 그 부활이라고 하는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고 하는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나는 생명이니 하는 말씀은 26절에서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아니하리니,, 즉 “영원한 죽음을 죽지아니한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Ⅲ. 우리가 만약 그러한 생명을 살고 그러한 부활에 참여하고 있다면 나는 생명이요 부활이라고 하신 예수께서 하신 일을 미약하지만 우리도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어떨까요? 그리고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어떨까요? 마르다에게 물으신 것처럼 주님은 네가 이것을 믿느냐?참으로 이 신앙에 살고 있느냐?고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접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필요(needs)에 대하여 우리는 죽어있지 않습니까? 전혀 무관심 무자비한 그런 생활을 우리가 하고 있지않습니까? 다른 사람들의 감정, 그들이 받아들이는 마음 그러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어디가지 배려를 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대하여도 우리는 죽어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마무말이나 함부로 하여 상처를 주고 있지 않습니까? 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 고민에 대하여도 죽어있지 않습니까?그래서 무관심하게 되고 누군가를 위한 기도조차 못하는 죽은 생활을 하고 있지않습니까? 그래서 자신의 신앙의 성장이나 무장에 대하여도 죽은 자처럼 무기력한 것이 아닙니까? 오직 현 상태에만 만족하고 안주하고 아무 진보도 향상도 바라지않고 포기해버린 시체화된 우리가 아닌가 아주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현재적인 부활신앙에 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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