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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면죄부 이야기

하나님아들 2013. 8. 21. 11:56
면죄부 이야기



    일반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로 알려진 카톨릭의 대 신학자 토마스 아크비노(Thomas aqvino)는 면죄부 발행의 신학적 기초를 제공하였는데 그것을 고해성사 및 제사장의 대사 교리와 연결시킴으로써 정당화했다. 고해성사는 크게 통회, 고백, 보상이라는 세가지 요소가 수행되어야 했다. 마음의 통회와 입술의 고백에는 반드시 기도, 금식, 구제, 순례 등의 선행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크빈의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만이 영원한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하시지만 죄인인 인간은 이 세상이나 연옥에서 일시적인 죄의 형벌이라는 보상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이 형벌은 사제나 교황에 의해 조절될 수 있다. 13세기에 형성된 "교회의 보화"(Thesaurus Ecclesiae)에 대한 교리에 의하면 "그리스도와 성자들의 잉여의 공로들은 동시에 하늘의 보고를 이루고 있고, 교황은 그로부터 죄인이 그 형벌 때문에 참회를 할 때 그에 상응하는 돈의 기부를 언도함으로 도움을 베풀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대사(代赦, indulgentia)의 교리는 트렌트 공의회에서(1563,12,4) 재가되었는데, indulgentia는 로마의 법적 용어로 형벌의 면제나 특별사면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카톨릭교회에서 대사(代赦)는 참회자에게 교회나 자선 목적을 위해 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죄에 대한 형벌을 일시적으로 사(赦)해주는 것을 의미하는데, 북부나 서부의 야만인들의 범죄 행위에 대한 형벌을 금전으로 대신하는 관습에서 비롯되었다. 교회 내에서는 영국 켄터베리의 대주교 테오도르(Theodore, 690년 사망)시대에 영국에서 최초로 시행되었다. 이런 관습은 십자군 전쟁 기간동안 병사를 모집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보니페이스 8세는 최초로 성 베드로성당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년 면죄 교서를 발행했다(1300). 그것은 로마에만 한정하여 100년에 한번씩 만 발행키로 되어 있었으나 지켜지지 않고 시간과 장소를 넘어 남발되었다. 이후 면죄부 발행은 점차 정규적 상행위로 전락해 갔다. 교회와 수도원의 부를 축적하기 위한 방편이 되었으며 상당액은 교황의 재정으로 들어갔다.

 

    성 베드로 성당은 1506년 교황 줄리우스 2세 때에 기공하여 1626년에 완공되었는데 그 동안 사용된 경비는 46,000,000 스쿠디가 들었고 매년 유지비가 30,000 스쿠디가 소요된다.
    줄리우스 2세와 레오 10세 당시 성 베드로 성당을 재건축하기 위한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면죄부가 발행되었다. 레오는 독일 지역을 셋으로 나눠 1515년 그 중 한 지역의 면죄부 판매를 마인쯔와 막데부르크의 대주교이며 부란덴부르크 선거후의 형제인 알브레히트(1490-1545)에게 일임했다. 28세 때인 1518년에 추기경이 된 그는 아우구스부르크의 은행가인 푸거에게서 돈을 빌려썼다. 또한 교황 레오 10세는 화려한 궁정에 살면서 사치했는데, 알브레히트는 교황의 영대 값을 지불하기 위해 황금으로 삼만 플로린을 빌렸다. 그리하여 푸거는 교황과 합의하에 면죄부 판매 수익금의 절반을 갖는다는 허락을 받아냈고 결국 수익금은 푸거家의 돈벌이는 물론 알브레히트의 채무 변제를 위해, 그리고 교황의 사치를 위해 사용되었다.

 

    알브레히트는 도미니코회 수도사인 요한 테쩰(Johann Tetzel)을 자기의 대리인으로 임명했고 테?은 1501년 면죄부판매인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는 훌륭한 대중연설가였기에 면죄부 판매는 성공적이었다. 1517년 프랑스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1518년 1월 루터와의 면죄부 논쟁에서 면죄 교리를 옹호한 대가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으나 1519년 7월 루터와 에크의 면죄부 논쟁이 한창이던 때에 라이프찌히에서 사망했다.

 

    테쩰과 면죄부 판매원 일행들은 마치 천국의 사자처럼 영접을 받았다. 사제들, 수도사들, 관리들, 남녀노소들이 모두 노래를 부르고 깃발을 흔들며 촛불을 들고 종소리에 맞춰 행진하여 교회로 들어가면, 벨벳 쿠션 위에 놓인 교황의 교서를 높은 단 위에 놓고 그 앞에는 교황의 문장을 새긴 비단 깃발과 빨간 십자가를 세워놓았다. 그 밑에는 면죄부 대금을 넣을 커다란 철제 상자가 놓여진다. 그들은 "상자 안에 돈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순간" 연옥에서 고생하는 친지들과 친구들이 고통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연설했다.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상자 앞에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는 상자에 돈을 넣고서 면죄부를 받았다. 그들에게 이 시간은 천국행 여권을 받는 시간과 같았다.

 

    흔히 면죄부에 대한 비판을 루터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사실은 루터보다 훨씬 이전부터 면죄부에 대한 반대는 있었다. 영국의 위클리프, 보헤미아의 후스, 독일의 존 폰 베젤, 네델란드의 존 베젤, 스위스의 토마스 비텐바흐등이 그들이다. 이런 배경하에서 성 베드로 성당 재건축을 위한 면죄부 발행은 1517년 루터로 하여금 비텐베르크 대학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게 하였다.

 

    그 자신이 고해신부였던 루터는 면죄부가 고해자의 진지한 참회에 치명적임을 알았다. 알브레히트에 의해 마인쯔와 막데부르크에 배부된 면죄부에 대한 "요약강요"(1516,1517)는 형벌에 대한 보속이 아니라 죄 그 자체에 대한 사면으로 설명되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이 "요약강요"는 네가지 주요 은총에 대한 설명에서 루터의 반대에 직면했다. 이 설명에 의하면 면죄부의 은총은 "첫째, 모든 죄를 사해주는 은총이며 둘째, 가장 크며, 유용하게 그리고 아직까지 들어보지 못한 가능성들로 가득찬 참회서신이며 셋째, 보편적인 복에의 참여 즉 베드로 성당 신축에 돈을 낸 사람과 그들의 죽은 부모들이 이제부터 영원까지 모든 간구. 도고, 적선, 금식, 기도와 모든 종류의 순례에 참여함 넷째, 연옥에 있는 영혼들의 모든 죄가 완전히 사해 짐"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면죄부를 구입하면, 구원이 확실해지며 이런 면죄부 은총은 사면받지 못하며 용서받지 못할 큰 죄가 더 이상 없을 정도로 효능이 있다고 설파한 것이다.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서 면죄부 그 자체는 죄인의 죄가 아닌, 용서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형벌의 사면에 관한 것이지 완전한 죄의 사면을 보장할 수는 없었다.  루터의 은총과 믿음으로 얻는 칭의(稱義) 개념은 면죄부를 구입함으로 얻는 행위적 구원을 반대하는데서 출발하는데 로마서 1:17 곧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말씀이 루터 개혁 중심추가 되었다.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과 그 수익금의 오용, 그리고 그 면죄부 자체가 구원을 위한 어떠한 효력도 가질 수 없음을 간파함과 동시에 루터는 교황의 권위도 성서의 권위 아래 있음을 주장한 것이며, 바울 및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받은 신학적 견해에 근거하여, 교회의 행위와 가르침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 척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루터가 내세운 면죄부에 대한 반박 95개조 논제는 교회 내에서의 토론을 위한 것이었지만 점차 발전되어가는 논쟁의 와중에서 급기야 로마 카톨릭(Roman Catholic)과 분리된 개신교(Protestant)를 탄생시키는 모티브가 된 것이다.


2000.12.28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주님의교회 목사 박찬희
출처 : 삼용이와 순애
글쓴이 : 따스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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