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요약은 노병기박사가 번역한 단행본을 요약한 것이다
들어가는 말 - 본서의 역사적인 배경(12-18)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가 매사추세츠주의 궁벽진 마을 노샘프턴에서 목회한 23년 동안(1727년-1750년) 에드워즈와 그의 교회는 두 번에 걸쳐서 성령의 부어주심(the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을 체험하였다. 첫 번째는 1734년에 시작되어 1735년에 이르기까지 노샘프턴 교회에 서 발화하여 햄프셔 군과 코넷티컷 강 골짜기에 산재한 마을들로 번져간 부흥으로서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1736년 11월 6일 기록)를 통해서 그 내용을 읽었다. 그리고 두 번째 성령의 부어주심은 1740년에 시작하여 1742년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이른바 <1차 대각성 운동>이 그것이다. 1차 대각성 운동은 규모면에서 식민지 전체에 영한 미친 광범위한 부흥운동이었으며 특히 뉴잉글랜드 지역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차 대각성 운동의 중심인물은 영국에서 온 순회 설교자 조지 윗필드(1714-71)이었다. 윗필드는 총 7차에 걸쳐서 미식민지를 방문했는데, 1차 대각성 운동은 그의 제2차 방문기간(1739년 10월 30일-1741년 1월 16일)중에 일어났다. 윗필드는 1740년 가을에 미국 뉴잉글랜드(미동북부 6개지역) 지방을 73일 동안 1,300km를 여행하면서 130회에 걸쳐서 설교를 했고, 1740년 10월 7일부터 4일간 조나단 에드워즈가 목회하던 노샘프턴에 머물면서 설교를 하는 동안 노샘프턴은 옛날 1734년-1735년 때의 부흥과 같은 은혜의 물결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후 뉴헤이븐을 방문하여 예일 칼리지에서 설교를 하였는데, 이때 데이비드 브레이너드가 큰 감화를 받았다. 윗필드의 뒤를 이어 길버트 테넨트(1703-64)가 설교를 통하여 부흥의 열기를 한층 더 고조시켰다. 한편으로 환상을보고 황홀경에 빠지는 열광주의적인 반응으로 인한 부작용도 생겨나면서 사람들 속에 윗필드의 순회 설교때 싹텄던 반부흥주의의 정서를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두 사람의 사역으로 불붙기 시작한 뉴잉글랜드 지역의 부흥은 여러 지역 목회자들에 의해 1741년 4월에는 20여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여름에는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기간 중 에드워즈는 여러 지역으로 순회 설교를 다니게 되었고, 특히 1741년 7월 8일 엔필드(Enfield)에서 행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이라는 설교는 이후 에드워즈의 가장 유명한 설교로 알려지게 되었다. 1741년 8월 , 9월에 부흥은 최고의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지나친 열광주의로 인해 오히려 부흥에 찬물을 끼얹고 반부흥주의 노선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을 강화시켜 주는 사건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열광주의를 부추긴 대표적 인물은 예일대 출신의 제임스 데이번포트(James Davenport 1716-1757)였다. 그는 1740년에 윗필드의 놀라운 성공 소식에 깊은 열등감을 가지고 교인들을 모아놓고 24시간 연속 집회를 가졌다. 그는 회심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형제라 부르고 나머지 사람들은 이웃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후 이웃마을들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1740년 봄에 목회지를 떠나 6개월 동안 회심하지 않은 목사들의 위험성을 강도 높게 경고하는 사역을 하고 있었던 장로교 부흥사 길버트 테넌트와 그리고 10월에는 윗필드와 개인적인 교제를 나누었다. 1741년 한 여름 하나님이 자신을 더 큰 일을 위하여 목회지를 떠나도록 부르셨다는 확신을 가지면서 코네티컷 지역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해안선을 따라 여러 지역을 차례로 순회하면서 데이번포트는 목사들에게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확인하며 회심 여부를 판단하라고 외쳤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목사들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회심하지 않았다. 선언하며, 회중들로 하여금 이러한 목사를 무시하게 하고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올 것을 촉구했다.
데이번포트의 이러한 행동은 사려 깊은 사람들이 “부흥이 통제될 수 있을 것인가?”하는 우려를 하게 했다. 이것이 조나단 에드워즈가 1741년 9월 10일에 예일대 졸업식에서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을 설교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에드워즈는 졸업식 설교 본문으로 요한일서 4장 1절을 택하여 당시 뉴잉글랜드 지방의 태풍의 눈으로 떠오른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에드워즈는 이 설교에서 부흥시 발생하는 강력한 체험, 특히 부흥에 대한 열광주의적인 극단으로 인해 초래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보고 부흥 자체까지 반대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밝혔다. 오히려 성경이 말하는 참된 성령의 역사에 대한 증거를 살펴볼 때, 지금 일어나고 있는 부흥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참된 부흥임을 강조했다. 에드워즈의 이러한 설교에 대해 예일대 학생들은 열렬한 반응을 보였으나 교수진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는 이후 부흥 운동에 대한 친부흥파와 반부흥파의 분열을 예고하는 전조이기도 했다. 에드워즈는 예일대 졸업식 설교를 확대하여 같은 해 보스턴에서 출판하였다. 초판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성령의 역사의 분별 표지: 특히 부흥에 동반된 특별한 상황을 고려하여 최근 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나타난 비범한 일에 적용함』(The 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 Applied to That Uncommon Operation That Has Lately Appeared on the Minds of Many of People of this Land; With a Particular Consideration of the Extraordinary Circumstances with Which This Work is Attended).
제 1 부. 본문과 설명(43-48)
에드워즈는 사도시대가 하나님의 성령이 전례없이 엄청나게 부어진 시대였다고 말함으로 설교를 시작한다. “영감을 주고 기적을 행하게 하시는 성령의 특이한 영향력과 은사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마음의 죄를 깨닫게 하고, 회심하게 하고, 조명하고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평상적인 역사에 있어서도 전례없이 큰 역사”(43)가 있었던 시대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드워즈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기도 “비범한 시대, 즉 사람들의 마음 속에 진귀한 역사가 매우 괄목할 만하고 또 광범위하게 나타나고”있는 시대(44)라고 말한다. 그리고 성령이 폭포수처럼 부어졌던 사도 시대에도 이미 사단의 거짓 역사들이 많이 나타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을 통하여 성도들이 거짓 선지자나 거짓 사도들에게 미혹당하지 않도록 경고를 하고, 무엇이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셨다. 에드워즈가 본문으로 택한 요한일서 4장도 바로 그와 같은 목적을 위해 쓰여진 중요한 장이다. 본문은 참된 영과 거짓 영을 구별하는 표징들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다. 사도 요한은 여기서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에 분명하고도 안전한, 그리고 확실한 구별성이 있으며 사용하고 적용하기에 아주 편리한 참된 성령의 표지들을 제공함과 동시에, 이 주제를 분명하고도 충분하게 다루려고 노력했다.
요일4:1의 말씀은 참된 영과 거짓 영을 구별하는 표징들에 대하여 가르치는 이 설교의 서론에 해당한다. 사도는 이러한 표징들을 말하기 전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의사항을 말한다. 첫째, 겉으로 그럴 듯 하게 보이는 모든 것을 참된 영의 사역으로 함부로 믿는 어리석음과 무모함을 경고하면서, 영들을 시험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역설하고, 둘째, 영들을 시험하는 의무가 필요한 이유는 많은 모조품들이 등장하였기 때문임을 상키시킨다. 사도는 자신의 편지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들을 시험하는 문제에 대해 이와 같이 권면하고 경계한 후에, 성령의 평상적 사역이나 특이한 사역으로 위장하는 모든 것을 안전하게 판단할 수 있는 규칙들을 곧장 제시해준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계획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나의 계획은 하나님의 성령이 가진 참되고, 확실하고, 뚜렷한 증거들이 어떤 것인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들 또는 다른 사람들 안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역사라도 제대로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47).
우리가 이와 같은 확실하고 뚜렷하고 안전한 기준을 얻기 위해서는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왜냐하면 사도와 선지자들을 영감하여 정확무오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님께서 무엇이 참된 성령의 역사인지 아니면 사단의 역사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분명한 기준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 영혼의 중대한 모든 문제에 대해 우리를 올바르게 안내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위대한 표준 규칙이며, 또한 성경은 오류 없는 충족한 규칙이기 때문이다. 영들을 판단하는 이러한 위대한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교회를 지도하기에 충족한 표지들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표지들이 없다면 교회는 애처로운 미혹 속에 빠지기 쉽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기만당하게 될 것이며 적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고 말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것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가 성경에서 어떤 규칙들을 발견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 규칙들을 두려움 없이 신뢰할 수 있다. 성경을 지으신 성령께서 그 자신의 영향력과 그의 영향력이라고 사칭하는 모든 것을 구별할 수 있도록 어떤 좋은 규칙들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는지를 잘 알고 계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 2 부.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데 있어서 증거가 될 수 없는소극적 증거 9가지(51-104)
조나단 에드워즈는 영들을 분별하는 표지들을 논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 우리가 판단할 수 없는 표지들이 무엇인지 9가지를 말하고 있다. 소극적인 표지들은 성령의 역사와 동반되는 현상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사단이 흉내낼 수도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이것은 성령의 역사이다’든지 아니면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는 점을 유념하여야한다.
[소극적 증거 1] 매우 일상적이지 않고 아주 비범하고 특별한 일어 일어난다고 해서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성령의 역사다 아니다고 말할 수가 없다.
부흥을 반대하는 자들은 부흥시 일어나는 비범하고 특별한 일을 가지고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닌 증거라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어떤 사람들은 난 이런 일은 생전 듣도 보도 못했다고 하면서, 새로운 일은 무조건 반대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옛날에 없었던 일이라고 해서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옳지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롭고 특이한 역사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비범한 방식으로 일해 오셨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일들, 기묘한 역사들이 일어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천사들을 놀라게 하는 방식으로 일해 오셨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비범하게 일해 오셨는데, 앞으로는 계속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께서 아주 다양하게 일하심을 알고 있다. 예수님의 초림과 공생애 사역은 역사에 전례가 없는 비범하고 독특한 일 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라.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도 역시 예전에는 없던 비범하고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아주 비범하고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이것은 성령의 사역이다고 하던지 성령의 사역이 아니다고 확실하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비범한 일들이 일어날 때에 우리는 성령의 분별 표지들을 적용하여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를 분별해야 하는 것이다.
[소극적 증거 2] 우리는 인간의 신체에 나타나는 어떤 영향들, 즉 눈물, 전율, 신음, 큰 소리를 지름, 육체적 고뇌, 혹은 신체적 힘이 빠지는 것 등에 의해서 그 역사가 참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없다.
몸에 특별한 현상이 일어날 때에, 즉 눈물을 펑펑 흘리거나, 큰 소리를 지르거나, 혹은 실신하는 경우를 보고서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참된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이런 몸의 특별한 현상만 가지고서는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우리 인간의 몸과 마음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몸이 마음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마음이 몸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우리는 너무 슬픈 소식을 듣거나 너무 기쁜 소식을 듣고서 실신하는 사람들을 일상 생활에서도 보게된다. 마찬가지로 큰 영적인 체험을 할 때에 몸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예를 들어 지옥에 대한 인식이 생긴 사람이 공포에 잠기고 비참함에 울부짖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그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빌립보의 간수는 극도의 고민과 경악으로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나와 엎드렸다(행16장). 그리고 시편 32편 3절과 4절에 보면 시편 기자가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 아래서 크게 부르짖고 그의 몸이 크게 쇠약해진 것에 대해서 고백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탁월하심과 죽으심으로 보여주신 놀라운 사랑에 대한 참된 깨달음, 그리고 참된 영적인 사랑과 기쁨의 역사가 육체적 힘을 소진시킬 수 있다(아2:5,5:8). 그러므로 몸에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을 보고서 이것은 성령의 사역이다 아니다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사물의 뿌리와 원인,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작용들과 감정들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의 규칙에 의해서 조사되고 시험되어야지 혈육의 움직임에 의해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
[소극적 증거 3] 큰 소동과 종교에 대한 큰 잡음이 나타난다고 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나타나는 작용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부흥시 일어난 현상으로 사회가 온통 소란케 된다는 것을 들어서 부흥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 때문에, 대중들이 알 수 있도록 공적으로 알려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는 어떤 중요한 일, 즉 사람들이 커다란 관심과 애정과 마음을 쏟는 일이 공개적으로 말하지지 않거나 알려지지 않는 것은 도덕적으로 불가능하다. 또한 그런 일이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가시적이고 공개적인 동요와 변화를 초래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단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이 세상에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주목할 만하고, 관찰할 수 있는 커다란 효과를 동반하지 아니하고는 세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시대에 성령의 주목할 만한 부으심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였을 때, 커다란 소요와 소동이 모든 곳에 일어났음을 보게된다. 성령의 커다란 부으심이 예루살렘에 있었을 때, 그 곳에 얼마나 큰 반대가 있었는가? 그리고 사마리아, 안디옥, 에베소, 고린도, 그리고 다른 곳에서 얼마나 큰 소동이 일어났는가? 그 사건은 세상을 들썩이게 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사도들이 세상을 뒤엎는다고 말하였다(행2:6, 12- 13, 47; 5:13; 17:6).
[소극적 증거 4] 성령의 영향력 속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상상(imaginations)에 커다란 인상들을 받는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마음에 나타나는 작용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어느 정도의 상상력이 없이는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아무리 큰 정신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가 묵상하는 가운데 수반되는 상상적인 생각 없이 하나님이나 그리스도, 혹은 다른 세계의 것들에 그의 사고를 고정시킬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상상력(想像力)이라는 능력을 주셨고, 또한 이러한 기능을 어느 정도 사용하지 않고는 영적이거나 비가시적인 것을 생각할 수 없도록 우리들을 만드셨기 때문에 이러한 능력을 적당하게 사용하기만 한다면 참으로 마음의 다른 기능들을 보조하게 된다.
성령의 역사의 영향력 속에 있는 몇 몇 사람들이 그들의 특이한 체질로 인해 일종의 황홀경(ecstasy)에 빠진다고 해서, 그 역사가 하나님의 성령이 행한 역사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 황홀경 중에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초월하여, 그들의 마음이 일련의 강렬하고 유쾌한 상상으로 들어가고, 심지어 천국에게까지 올려가서 거기서 영광스러운 광경들을 보는 것처럼 되어도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경험들이 선지자들의 환상이나 바울 사도가 천국으로 이끌려간 경험(고후12:1-4)과 같은 성질을 지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본 환상을 마치 선지자들이 본 환상과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자신들이 새로운 신적인 계시나 하늘로부터 온 통지를 받았다고 주장을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소극적 증거 5] 부흥을 반대하는 이들 중에는 부흥시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따라하여 동일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것은 참된 성령의 역사가 아니야라고 부정을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영향을 받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자극을 받았다는 것만 가지고서 이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무조건 부정할 수는 없다. 성경에 의하면 다른 사람의 선한 행동을 본받으라는 것을 적극 권면하고 있고, 또한 다른 사람의 모범에 영향을 받는 것은 인간 행동의 합리적이고 자연스러운 결과이기 때문이다(마5:16, 벧전3:1, 딤전4:12, 딛2:7, 고후8:1-7, 히6:12, 빌3: 17, 고전4:16, 살후3:9, 살전1:7).
성령께서 주목할 만하게 부어지는 시기에, 그리고 종교의 커다란 부흥의 역사가 있을 때에 모범이 큰 역할을 하지 않은 경우는 지금까지 결코 없었다. 종교개혁 시대에도 그러하였지만, 특히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그 사실을 누구나 명백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감동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한 도시나 마을이 다른 도시나 마을의 모범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살전1:7-8).
[소극적 증거 6] 성령의 역사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으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의 행동이 매우 신중하지 못하고 변칙적인 일들(irregularities)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역사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부흥시에 때로 지혜롭지 못하고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꼬집어서 ‘보라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야’라고 전체를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부흥을 체험하는 사람들 중에는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뒤섞여 있고, 또한 구원받은 한 개인 안에도 여전히 죄의 세력은 남아있기 때문에, 부흥시에 어떤 사람이 때로 지혜롭지 못한 행동을 하고 실수를 한다고 해서 부흥의 모든 현상들을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도매금으로 부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심지어 베드로 사도 같은 사람도 바울에게 책망들을 만큼 큰 실수를 범하기도 했고(갈2:11-13), 고린도전서에 나타나는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보면 성령에 충만하고 은사가 충만한 교회에도 문제들이 허다함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지혜롭지 못하고 비정상적인 행동이 때로 보여진다고 해서 그 부흥 현상을 성령의 사역이다 아니다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소극적 증거 7] 판단에 있어서 많은 실수들이 있고 사단이 그 역사에 어떤 미혹들을 뒤섞어 놓았다고 해서, 그 역사 전체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아무리 성령께서 엄청나게 부어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주어졌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즉 사도들을 기독교 교리의 핵심으로 오류 없이 인도하셔서 그들이 가르친 것을 기독교회의 규칙으로 의지할 수 있도록 하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지금 주어지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동일한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도, 어떤 면에 있어서는 마귀의 미혹에 끌려갈 수가 있다. 참된 성도에게 있어서도 은혜가 많은 부패와 함께 존재하며, 새 사람과 옛 사람이 같은 사람 안에 공존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마귀의 나라가 같은 마음 안에 잠시 동안 함께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극적 증거 8] 소위 성령의 영향력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몇 몇 사람들이 심각한 실수를 범하거나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하거나 또는 이단에 빠지는 일이 일어난다고 해서 전체 부흥 운동을 거짓 영의 역사라고 매도할 수 없다.
초대교회의 경우 가룟 유다나 니골라를 생각해 보라. 가룟 유다 때문에 예수님의 나머지 제자들을 가짜라고 할 수 없고, 배신하여 이단의 괴수가 된 니골라 집사(행6:3-5,계2:6,15) 때문에 나머지 초대 교회 집사나 성도들을 거짓 영을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때로 부흥운동의 지도자처럼 보였던 사람들이 세상으로 나가거나 이단으로 변질되는 사태가 일어난다고 해서 전체 부흥 운동을 매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심지어 한국의 부흥사 중에 나중에는 타락하여 자리 깔고 점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도 들은 바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교회 가운데 부어주신 은혜나 성령의 역사를 다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령의 위대한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종교가 부흥할 때에, 한동안 거기에 참여하는 것처럼 보였다가 떨어져 나가서, 기괴하고 엉뚱한 잘못들과 심한 열광주의에 빠져, 높은 영성과 완전함을 이루었다고 자랑하며, 다른 이들을 육적이라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초대교회때 영지주의와 종교개혁때 재세례파등이 그런 부류이다. 이런 사람들은 마귀가 뿌려놓은 가라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 때문에 성령의 역사를 부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소극적 증거 9] 부흥의 시기에 목회자들이 율법설교나 지옥설교를 많이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에 잠기게 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 아니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우리가 천국가게 하시기를 원하시는데 왜 자꾸 하나님의 진노를 이야기하고 지옥을 말하느냐고 하면서 회개하라는 권면을 듣기도 싫어하는 사람들이 교회 내에는 늘 있어왔다. 그러나 지옥이 실제로 존재하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그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무덤덤하게 지옥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아니면 아예 지옥 설교를 회피해 버릴 수 있겠는가? 지옥이 있다면 겁을 주어서라도 지옥을 피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예를 들어서 우리는 불이 활활 타고 있는 집에 여전히 남아서 자고 있는 아이가 있다면 이 다급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외칠 것이다. 하물며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경각간에 달려있는 것을 느낄 때에 어찌 목회자나 성도들이 간절하고 절박하게 지옥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목회자들이 지옥이나 죄 혹은 율법에 대해서 설교를 많이 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는 성령의 사역이 아니다고 부인할 근거가 못된다.
이상에서 나열한 9가지의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증거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반드시 성령의 사역의 결과인 것도 반대로 성령의 사역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 근거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상의 9가지 증거들은 성령의 역사의 결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아니면 악한 영의 역사 결과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상의 소극적인 기준들은 성령의 역사일수도 있고 성령의 역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에서 “중립적인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제 3 부.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게 해주는 적극적 증거 5가지(107-139)
어떤 영적 현상이나 어떤 성령 체험 혹은 어떤 성령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것이 진정한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분별해낼 수 있겠는가? 앞서 말한 9가지 증거들은 성령의 역사 결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사단도 흉내 낼 수 있는 중립적인 증거이다. 그러나 사단이 절대로 흉내 낼 수 없고 흉내 내려고도 하지 않는 일들이 있다. 그것은 오로지 성령님만이 만들어내실 수 있는 일들이다. 에드워즈는 그와 같은 참되고 확실하며 뚜렷한 증거들이 무엇인지를 본문으로 읽은 요한일서 4장 전체에서 발견해 낼 수 있다고 말한다.
[적극적 증거 1]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 고백
예수님은 고별 설교를 통해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그가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실 것이며(요15:26), 자기 영광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16:14). 이와 같이 성령은 예수님을 알리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기에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성령은 예수님에 대하여 바른 신앙 고백을 하게 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며, 예수님께 순종하게 만들어준다. 따라서 성령 충만은 곧 예수님 충만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일서 4장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일4:2-3).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4:15).
사람들 사이에 역사하고 있는 영이 동정녀에게서 나시고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존경을 높이는 방식으로 역사하는 것이 관찰될 때,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사람들의 구주이심을 선언하는 것이 진리임을 사람들의 마음에 더욱 확신하게 하고 공고히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그 영이 하나님의 성령이라는 확실한 증거이다. 성령이 사람에게 오시면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믿고 고백하게 만들며(고전12:3, 마10:32, 롬15:9, 빌2:11) 또한 성령은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확고히 믿게 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그들의 마음에 그리스도가 육체로 나타나신 것,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 그가 유일하신 구세주이신 것,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대단히 필요로 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 등을 더욱 확고하게 하시며, 그들이 평소에 가졌던 것 보다 그에 대해 더욱 높이 존경스러운 생각을 낳고, 그들의 애정이 더욱 그리스도에게 기울게 만든다.
반대로 사단이 역사할 때에는 예수님을 낮추거나 가벼이 보게 만든다.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든지, 아니면 신성을 부인하게 만든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지 않았다고 하든지, 아니면 우리들 보다 탁월한 선생이나 성자이다는 정도로만 말하게 한다. 사단은 특별히 인류의 구주의 신분으로 오신 그분에 대해 지독하고 화해할 수 없는 적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구속에 대하여 몹시 혐오하기 때문이다. 마귀는 또한 대단히 기이한 현상이나 체험을 주어서 그것에만 집중하게 만들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만든다. 무엇인가 대단한 능력을 받은 것처럼 보이더라도 자기 무용담만 자랑하고 예수님을 높이거나 경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령의 참된 역사라고 할 수 없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높이게 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자기 의나 공적이나 혹은 신앙 체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을 높이게 하고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갈6:14).
[적극적 증거 2]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
사도 요한은 4, 5절에서 참된 영과 거짓된 영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람을 대조시키고 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저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한편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하여 세상의 영을 이기고, 다른 쪽의 사람들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의 것들을 말하며 세상의 것에 취미를 붙인다. 이 세상에 속한 자는 세상에 속한 것들, 즉 죄의 욕심에 속한 모든 것, 인간의 모든 타락한 일과 육욕을 포함하는 모든 것, 그리고 그들의 욕망을 만족시켜 주는 모든 행동들과 대상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사랑한다(요일2:15,16)(115).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면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의 쾌락들과 이익들과 명예들을 덜 소중히 여기게 만드는 방식으로 역사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이러한 것들을 열렬히 추구하는 것에서부터 떠나도록 하며,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이 계시해 주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의 미래와 영원한 행복에 깊은 관심을 갖도록 만들어 주고,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열렬히 추구하도록 만들며, 사람들이 죄의 무서움과 그것이 가져올 죄책과 죄로 인해 맞이하게 될 비참함에 대해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다(116).
사단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양심을 깨우는 일에 절대로 힘쓰지 않는다. 우리 영혼 속에 있는 양심의 눈과 입을 여는 것은 마귀의 어두운 모든 계획을 방해하고 저지하기 때문이다(117). 양심이 죄의 무서움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죄책의 큼에 대해 많은 느끼면 느낄수록, 자기 자신의 의에 안주하거나, 회심의 그림자 밖에 얻은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도 평온하게 안주하는 일이 더 적어질 것이다(118).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들이 죄의 무서운 본질에 대해 느끼게 되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감을 느끼게 되고, 죄 때문에 그들이 처한, 그들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면, 그리고 그들의 영원한 구원에 대해 열렬한 관심을 갖게 되고, 하나님의 긍휼과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수단을 사용해서 구원을 구하는 데 몰두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말미암았다고 분명하게 결론지을 수 있다(119).
만일 사람들이 신적인 것들의 탁월함에 대한 감각을 가짐으로써 그리고 복음 안에 약속된 다른 세상에 대한 영적인 즐거움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세상에서 멀어지고 세상적인 욕망의 대상들을 버리게 된다면, 그리고 세상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것에서 떠나게 된다면, 하나님의 성령의 영향력이 더욱 풍성히 입증될 것이다(119f.).
[적극적 증거 3] 성경에 대한 높은 관심
사람들이 성경을 매우 존중하게 되고, 성경의 진리와 신성을 더욱 확신하게 된다면, 그런 식으로 역사하는 영은 분명히 하나님의 성령이시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영감 하셔서 기록하여 주신 성경을 사랑하게 해 준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4:6). 사도 요한이 우리의 말이라고 한 것은 사도들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성령님은 사도들을 통해서 주신 말씀을 듣게 하고 순종하게 만드는 분이시듯이 오늘날 사도들을 통해서 기록해 주신 말씀을 사랑하고 부지런히 공부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나 사람들의 영혼의 관심사에 있어서 모든 시대에 걸쳐서 교회를 지도하기 위하여 위대하고 영구적인 규칙으로 신적인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성령은 신적인 말씀에 대한 존중심을 가지게 하고 열심히 공부하게 만드는 것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사도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 몇 시간씩 보내거나 혹은 밤을 새는 일들이 있었다. 에베소 사람들은 3년 동안 매일 같이 말씀을 강론하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들은 성경을 공부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다. 우리 나라에서 일어난 평양 대부흥 시에도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가 아주 열성적인 성경 읽기와 성경 공부였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에, 성령님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게 하지 않는다. 기록된 말씀 이외의 직통 계시나 새로운 계시를 주시지 않는다. 오히려 성령 충만하면 할수록 성경의 권위를 높이고, 성경을 더욱 더 가까이 하게 만드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 말씀을 읽을 때에 조명(照明)하시어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는 일에 도움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만일 성경을 무시하고, 성경을 부인하는 영이 있다면 그는 분명 성령과는 다른 영이다. 자신의 내면의 빛이나 체험만 강조하는 신비주의는 이단적이다. 1992년 10월 휴거설을 주장해서 많은 백성들을 미혹하였던 이장림 목사도 성경에는 없지만 직통 계시를 주셨다고 거짓말을 했다. 오늘날도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일은 게을리 하면서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고 직통 계시를 주신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사단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마귀는 성경의 빛에 의하여 그의 어두움의 나라가 전복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이 찔리고 정복당하는 것도 그 말씀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계12:7,11;19:15,엡6:17), 그 거룩한 책, 즉 성경에 대하여 언제나 치명적인 악의와 증오를 보여 왔기 때문이다. 마귀는 그 빛을 꺼버리기 위하여, 그리고 사람들을 그 빛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하여 그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해 왔다. 성령 충만은 반드시 성경 충만이다. 성경 말씀으로 우리 마음에 가득히 채울 때에 우리는 아주 건전한 성령의 은혜와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
[적극적 증거 4] 건전한 교리와 신학.
우리는 진리나 교리(敎理)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교리는 메마른 뼈다귀와 같아서 교리 공부를 많이 하면 은혜가 떨어진다는 말을 하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오늘날 찬양 집회나 기도 집회는 선호하지만 성경의 기본 진리들을 학습하는 일은 아주 경원시한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 부흥의 역사를 읽어보면 성령의 역사가 가장 활발하게 나타났던 시기에는 성경의 주요 진리, 기독교의 중요 진리에 대한 아주 강렬한 관심과 신앙 고백들이 생겨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을 보면 성령은 곧 “진리의 영”(요14:17,15:26,16:13)이시기 때문에 참된 신자로 하여금 성경에 기록된 주요 진리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만든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 사이에 역사하는 영의 작용 방식을 관찰하는 가운데 그 영이 진리의 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본다면, 즉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고 진실인 것에 대하여 확신을 주는 것을 본다면, 우리는 그 영이 바르고 참된 영이라고 안심하고 판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역사하고 있는 영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과, 그분은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며, 죄를 미워하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평소보다 더욱 민감하게 깨닫게 해 준다면,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들이 반드시 죽는다는 것과, 인생은 짧으며 대단히 불확실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면, 그리고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과 그들이 죽지 않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들이 반드시 하나님께 직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느끼게 해준다면, 그리고 그들의 본성이 죄와 행동으로 지은 죄가 매우 많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면, 그리고 건전한 교리에 일치하는 다른 진리들을 확신케 해 준다면, 이와 같이 역사하는 그 영은 진리의 영이다. 성령은 사물들의 있는 그대로의 참된 실제를 나타내 보여주며, 빛 가운데로 인도해준다(엡5:13).
그런데 만일 어떠한 운동이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의 기본 진리들을 무시하게 만든다면, 또한 기본적으로 교리와 신학에 대한 거부감을 조장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보기 힘들다. 사단은 거짓의 아비(요8:44)이기 때문에 참 말을 절대로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화끈한 체험만 추구하게 하고, 진리에 대해서 무시하거나 무지하게 만든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면 성령님은 우리의 머리는 차갑게 하여 진리를 더 알게 만드시며, 우리의 가슴은 뜨겁게 만드시는 분이시다. 성령님은 빛과 열을 함께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적극적 증거 5]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
사람들 사이에 역사하고 있는 영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영으로 역사한다면, 그것은 그 영이 하나님의 성령이라는 분명한 증거이다. 사도는 요한일서 4장 7절-21절까지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사도는 누가 참된 영을 가졌는지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표지로서 사랑을 제시하고 있다. 사도는 사랑은 마치 그 속에 성령의 참된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12-13절,16절). 즉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과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 동일한 일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면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사람 사랑에 대해서는 7절, 11절, 12절에서 말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관해서는 17절, 18절, 19절 등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20절과 21절에서는 두 가지 사랑을 함께 말하면서, 사람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하고 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게 하시는 사랑의 영이시다. 따라서 다음의 증거들이 우리에게 나타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고 있고, 참된 은혜 체험을 했다는 최상의 증거인 것이다. 예수님을 “만 사람 가운데 뛰어나며, 그 전체가 사랑스러운 분”(아5:10,16)으로 여겨지고, 영혼에 보배로운 분으로 여겨지며, 독생자를 주시고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이끌려가며(요일4:9,10), 그리고 복음 안에 계시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속성들이 묵상하기에 매우 기쁜 대상들임이 느껴지고, 그리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그분들의 임재와 교제, 교통을 갈망하고, 그분들을 따르기를 갈망하게 해 주며,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고 영광을 돌리며 살기를 바라게 해 주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이다. 또한 성령님은 사람들 사이의 다툼을 억제하고, 화평과 우호의 영을 주고, 외적 행동들을 친절하게 하고, 다른 영혼들의 구원을 열렬히 바라는 마음을 준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서 기쁨을 누리도록 만든다.
물론 이 세상에는 진정한 사랑의 모조품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다른 모조품들과는 철저하게 구별되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본질과 동기가 충분히 설명되고 있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값없는 은혜와 주권이 얼마나 놀랍고 부요한지를 깨닫는데서 생긴 사랑이다. 여기에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원수요 미워하는 자임을 인정하면서 우리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을 느끼는 것이 수반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탁월함과 의를 모두 포기하는 것이 수반된다. 그리스도인의 덕은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낮추며, 자기를 전멸시키는 데서 빛난다. 즉 겸손에서 빛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 혹은 참된 사랑은 겸손한 사랑이다(고전13:4-5). 예수님의 사랑은 온유와 겸손을 동반한 사랑이었다(마11:29). 따라서 사랑과 겸손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보다 마귀의 영에 가장 반대되는 두 가지이다. 왜냐하면 그 악한 영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교만과 악의에 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서 살펴 본 성령이 역사하실 때 나타나는 5가지 기준을 통해서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울러 배우게 된다고 백금산 목사는 평가한다. 앞서 본 5가지는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이러한 일들이 우리의 영혼 속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성숙한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 이러한 요소들이 우리 안에 더욱 풍성해지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에 의한 부흥이란 한 개인의 성도 안에, 그리고 집단적인 교회 내에서 이러한 요소들이 평상시보다 더욱 크고 비범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과 사랑, 성경의 권위에 대한 존중과 열심히 성경을 탐구하는 것, 진리와 교리와 신학공부에 대한 관심, 죄에 대한 회개와 거룩과 성결한 삶의 추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등이야말로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서 언제나 성도들과 교회가 힘써 추구해야 할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35).
제 4 부. 실제적 적용(143-206)
에드워즈는 본서의 결론 부분에서 지금까지 말해온 진리를 당시 부흥과 관련해서 다양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을 한다.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 부흥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부흥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들에게 권면을 한다.
1. 반부흥파에 대한 적용 - 성경의 분별 기준으로 볼 때 지금 일어나고 있는 부흥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분명하다.
분명 요한일서 4장에서 사도 요한이 말하는 성령의 분별 기준을 볼 때, 현재의 부흥은 분명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역사가 틀림없다.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반대 이유는 부흥시 사람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특이한 행동을 한다는 것등이다. 그런데 에드워즈는 이에 대해 죄에 대한 엄청난 깨달음을 얻거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엄청난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이런 외적인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현재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 속에 드러나는 실수를 문제 삼기도 한다. 에드워즈는 현재의 부흥에 대한 이러한 사소한 실수들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실수만을 가지고 부흥 전체를 반대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을 주지시킨다. 창조 사역과 이스라엘 백성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보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모든 것을 완전하게 만드시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때로는 부흥 때에 젊은이들이 많은 영향을 받는데, 젊은이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혈기 많고 실수를 잘하는 데에 있다는 점이다. 때로는 목회자들이 바른 지도를 해 주지 않아서 그런 점도 있다. 그러나 부흥시 일어나는 이러한 사소한 문제들은 시간과 경험이 상당 부분 해결해 준다. 요컨대 부흥시 발생하는 사소한 문제들 때문에 부흥 전체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목욕물을 버리려다가 아이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
2. 중립파에 대한 적용 - 부흥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하라.
에드워즈는 현재의 부흥의 대한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고 있는 중립파에 대해서 찬성과 반대의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함을 경고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역사를 거부해 온 역사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의 초림 때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했다. 또한 오순절 성령 강림 때도 유대인들이 거부했다. 따라서 현재의 부흥에 대해서도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현재 침묵하고 있는 것은 곧 반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걸림돌만 보게 될 것이다. 사실은 신중하게 처신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이것에 대해 부지런히 조사하지는 않고 있다. 이것은 중립을 표방한 사실상의 거부나 마찬가지이다.
3. 친부흥파에 대한 적용 - 부흥의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라.
에드워즈는 부흥이 하나님의 역사라고 찬성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현재의 부흥의 불길이 꺼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적용한다. 부흥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교만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특별히 세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
첫 번째 조심해야 할 점은 내적 충동이나 직통 계시나 예언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은혜와 은사를 구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은혜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은사는 불신자에게도 주어질 수 있다. 말하자면 은사를 받고도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게 하는 것은 은혜이다. 은사는 은혜를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의도된 것이다. 성령의 은혜의 역사를 이루지 못한다면 은사는 무의미하다. “나로서는 일년 내내 예언적인 환상들을 보고 계시들을 받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영적이며, 신적인 아름다움과 무한하신 은혜, 그리고 죽으신 사랑을 나타내 보여 주시고, 거룩한 믿음을 발휘케 하시고, 신적인 사랑과 달콤한 만족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의 겸손한 기쁨을 자아내시는 성령의 달콤한 영향력을 단 15분간만이라도 즐기는 편이 좋습니다”(191).
두 번째 조심해야 할 점은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목사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권면 사항이다. 하나님의 은혜만 받으면 되었지, 공부할 필요가 어디있는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아이들에게 공부시킬 필요가 어디 있는가라는 주장과 같다. 네 살짜리 아이와 서른 살짜리 교육을 잘 받은 성인이 동일한 은혜를 받았다고 가정해 보자. 어느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 사역에 유용한 사람이 되겠는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교육받은 성인이다. 공부와 교육이란 그런 것이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선한 일에도 악한 일에도 크게 사용된다. 공부를 많이 한 목사와 공부를 거의 하지 않은 목사가 동일한 은혜를 받았다고 가정하자. 어느 사람이 성도를 가르치고 세우는 데 유용하게 쓰임을 받겠는가? 이런 면에서 독서와 공부를 하지 않는 목회자는 그 영향력이 미미하다. 교회사의 영적 거장들은 대부분이 독서와 공부의 대가들이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하기만 하면 되지 공부는 왜 필요하냐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비신앙적인 행동이다. 기도만 하면 되었지 설교 준비는 왜 하느냐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생각이다.
세 번째 조심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점이다. 상대방이 구원을 받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내가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최후의 심판 때 하나님만이 하시는 권한이다. 은혜를 받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나 열심이 특심한 사람들은 자꾸 다른 사람의 회심 여부를 손쉽게 판단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물론 이것이 교회에 가입하려고 하는 사람들,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해 교회적인 차원에서 정당한 회심자를 구별하려고 하는 노력까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을 생각해 보라. 다른 사람의 회심을 미리 지레짐작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인간보다 지혜로우시다는 것을 나는 깨닫습니다. 이러한 큰 직무를 나와 같이 불쌍하고, 약하고, 눈이 어두운 피조물에게 맡기지 아니하시고, 그 일을 하시기에 우리보다 무한히 적합하신 한 분의 손에 두시고, 그것을 자신의 특권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지혜와 나의 동료 피조물들에게 향하신 그의 선하심을 나는 찬미할 것입니다”(199).
http://jonathanedwards.cyworld.com
경북 경산시 와촌면 소재 박사교회 담임목사
총신대학교 대학원 Ph.D.과정 재학
경북 경산시 소재 대신대학교 강사
글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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