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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령의 학교에서의 교육

하나님아들 2013. 8. 9. 16:56

성령의 학교에서의 교육

 
 
                                                                                                                                             변종길고려신학대학원교수
 
 
딛 2:11-14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12절에 보면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양육하다'는 말은 원어로 '파이듀오(paideuo-)'인데, 이것은 '아이'라는 뜻의 '파이디온(paidion)'이라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곧 '아이를 기르다, 양육하다, 교육하다'는 뜻이지요. 영어의 '페다고지(pedagogy, 교육학)란 단어도 어원상 헬라어 '파이디온'이라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I. 교육의 주체
 
그러면 우리를 교육하는 '교육의 주체'는 누구일까요?
그것은 11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신다"고 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교육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육하신다 또는 그리스도께서 교육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랍비(Rabbi)'란 '나의 큰 자'란 뜻인데,
요한복음에서는 '선생(didaskalos)'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너희의 '선생' 곧 '참 스승'은 오직 한 분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사람을 가리켜 너무 '랍비'라고 높여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요한일서 2장 27절에서 사도 요한은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기름 부음'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께서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기 때문에,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무도'라는 것은 좀 지나친 번역인데, 원어에 의하면 '어느 누가' 너희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가르쳐 주고 지도할지라도
참으로 우리로 깨닫게 해 주시는 분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십니다.
만일 우리 안에 성령이 우리를 가르쳐 주시지 않는다면 아무리 사람이 가르칠지라도 그것은 소리나는 꽹과리에 불과하며 스쳐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깨우치지 못하고 무지한 채로 남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힙포의 감독 어거스틴은 그의 [요한일서 설교]에서 성령을 '내적 선생(magister interior)'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의 말들의 소리는 귀를 때리지만 선생은 안에 있습니다. 사람으로부터 무엇을 배운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말의 소리로써 권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에 계신 선생이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내는 소리는 헛되고 맙니다.
" 종교개혁 시대의 칼빈은 어거스틴의 이 말을 이어받아서 성령을 '내적 교사(doctor interior)'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성령은 우리의 스승이 되셔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십니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그 순간부터 성령의 지도를 받아서 배웁니다.
천국에 갈 때까지 평생 동안 교육을 받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을 우리는 '성령의 학교에서의 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 교육은 주로 '교회'에서 이루어지지만, '가정'과 '학교'와 '직장' 등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II. 교육의 내용
 
그러면 이 성령의 학교에서의 '교육 내용'은 무엇일까요? 즉 어떤 '교과 과정' 곧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본문 12절에 보면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부정적인 교과목'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교과목'입니다.
 
I. 부정적인 교과목
 
이것은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을 말합니다. 12절에 보면 '... 버리고(arneomai)'라고 했는데, 이것은 '부정하다, 부인하다, 배척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입니다.
 
먼저 '경건치 않은 것(asebeia)'은 '불경건'을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모든 악한 말과 행동을 말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향하여 나쁜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은 물론 사람을 향하여서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 정욕'이란 정확하게 번역하면 '세상적인 욕심들'인데, 이것은 이기적이고 방탕하고 악한 욕심들을 뜻합니다. 곧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욕구하는 모든 것들을 가리킵니다. 그 구체적인 목록은 갈라디아서 5장 19절 이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성령의 학교에서의 교육은 먼저 이런 것들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을 버리지 않고서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의미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더러운 그릇에 맛있는 음식을 담는 것과 같아서 둘 다 못 쓰고 버리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이런 더러운 것들을 깨끗이 버리고 씻어내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여러분은 신대원 3년 동안에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닦고 또 닦아 내어야 합니다. 그래서 불경건한 것들, 속된 말들과 옳지 못한 행동과 습관들을 다 씻어 내어야 합니다. 그래서 졸업할 때에는 온 마음과 몸이 깨끗하여서 교문을 나서야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특히 새벽기도 시간에 자신의 부족한 점이 무엇인가를 잘 살피셔서, 철저하게 자신을 뉘우치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 하나님이 기뻐 쓰시는 귀한 그릇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II. 긍정적인 교과목
 
두 번째로 우리가 적극 노력해야 할 '긍정적인 교과목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입니다(12하).
 
먼저 '근신함(so-frosune-)은 원래 '건전한 마음, 생각'이란 뜻에서 '신중함, 자제, 절제'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13장 13절에 보면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곧 '근신함'의 구체적인 내용을 말해 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둘째로 '의로움(dikaiosune-)'는 '죄'의 반대 개념인데,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로 '경건함(eusebeia)'은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태도를 말합니다. 곧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또한 이웃에 대해서도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곧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 참 경건이라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습니다(약 1:27).
 
이 교과목들은 모두 우리의 '생활'에 관계된 것입니다. 곧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의 교과과정에 왜 '헬라어'와 '히브리어'가 없는가? 그리고 '교의학(조직신학)'과 '실천신학'은 왜 없는가 하고 질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의 교과목은 신학생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 과정은 평신도 과정입니다. 성령의 학교는 '모든 성도들'이 의무적으로 입학해서 '평생 동안' 배우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이 배워야 할 주요 교과목은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 가지를 '3대 필수과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나가서 가르쳐야 할 주요 교과목도 바로 이 세 가지입니다.
 
III. 균형 잡힌 신학 교육
 
그렇다면 '신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주요 교과목도 이런 것들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이런 것들을 중요하게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나가서 바로 이런 것들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학교에서는 단지 헬라어, 히브리어, 성경 신학, 교의학, 교회사, 실천신학 등의 지식만 가르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이 모든 것들은 학생들로 하여금 '근신하는 사람', '의로운 사람', '경건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 데 궁극적인 목표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즉, 올바른 신학 교육은 '지적 교육', '인격 교육', '영적 교육'이 골고루 균형 있게 시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적 교육'은 정해진 커리큘럼을 따라 수강 신청을 하고 수업을 듣고 과제물을 제출하고 시험을 쳐서 학점을 이수하는 것을 통해 진행됩니다. 그 목표는 훌륭한 설교자와 성경 교사를 길러내는 데 있습니다.
'인격 교육'은 교회를 지도하고 인도하기에 부족함이 있는 지도자적 인격을 배양하는 것입니다. 정직성과 협동심, 이타심과 근면성 등에 있어서 모범적인 사람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흠이 없는 사람, 남을 돕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만들어 내고자 합니다.
'영적 교육'은 경건 훈련을 통해 진행되는데, 새벽기도회와 경건회, 호실기도회, 성경 읽기 등을 통해 훈련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학대학원은 이 세 가지를 골고루 교육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 학교는 신학생 전원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 시설을 갖추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종합적인 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서울 시내의 많은 신학교들은 이런 기숙사 시설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그저 학교에 와서 교실 수업만 하고 집에 돌아갑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올바른 신학 교육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또는 학생 수가 천 명, 이천 명이 넘는 학교에서는 학생 개개인을 돌아보고 상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학생 이름도 모르고 출석도 제대로 부를 수 없는 상황에서 인격 지도는 생각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 고려신학대학원은 학생 수도 많지 않고, 기숙사와 교수 사택이 마련되어 있어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예배하며, 또 반별 모임을 통해 학생들을 만나고 지도하고 있습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교육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다 보니 교수들의 부담이 너무 크다는 사실입니다. 강의 준비하고 수업하기도 바쁜데, 경건회와 새벽기도회 설교 준비하랴 반별 모임하랴 학생들 상담하랴 등등 너무 시간이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우리 교수들의 저서가 적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참 할 말이 없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저를 비롯해서 우리 모든 교수들이 앞으로 이 점에 있어서 더욱 노력해야 될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신학 교수'의 임무는 '강의'하고 '연구'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전체의 1/3에 불과합니다. 학생들의 '인격 지도'와 '영적 훈련'은 강의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훌륭한 목사를 만들어 내기 위해 애쓰고 있는 미국의 '칼빈신학교' 교수들은 저서가 별로 없다고 합니다(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고 다른 신학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는 뜻임). 은퇴 후에야 비로소 책이 나온다고 합니다. 제가 작년에 연구년차 그곳에 가 보니, 칼빈신학교 교수들은 매주 월요일 오전에 자기 반 학생들(10명 정도)을 모아 놓고 이런 전런 이야기를 나눈 후에 '기도회'를 가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해가 지나면 그 학생 개개인에 대해 상세하게 '리포트'를 작성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교수들은 방학이 되어도 한 두 주 정도는 리포트 작성한다고 매달린다고 합니다. 자기 반 학생이 어떤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했느냐까지 상세히 다 기록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졸업하기 전에 다시 그 '기록부'를 꺼내놓고서 교수들이 질문을 한다고 합니다. 자네는 입학할 당시에는 이런 문제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는데, 지금은 생각이 어떠하냐는 식으로 묻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학생이 깜짝 놀랄 정도로 자세하게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 교단 교회에서 졸업생을 목사로 '청빙'해 갈 때에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우선 학점은 2.8 이상이면 족하다고 본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원어로 성경을 읽고 주석하고 설교를 작성할 수 있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중요하게 보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학생 기록부'라고 합니다. 그 학생이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느냐? 그 학생의 인격이 어떠하냐? 성향이 어떠하냐? 우리 교회와 잘 어울릴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을 중점적으로 본다고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 "교단 신학교는 바로 이렇게 되어야 하는구나. 내가 한국에서 고민하던 것을 이 신학교는 이미 시행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한국의 신학교는 이런 점에서 얼마나 빈약하고 기본적인 이해가 안 되어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영적 훈련'과 '인격 지도'에 대해서는 생각도 안 하고 있는 신학교와 신학 교수들이 대부분이고, 기껏해야 "그렇게 하면 좋지요"라는 정도의 반응밖에는 없습니다. 즉, 그들은 '영적 훈련'과 '인격 지도'가 신학 교육의 필수 요소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신학 교육의 요소 중 1/3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 신학교는 이 세 가지 요소를 다 교육하려고 애쓰고 있는 중입니다. 아직 부족한 것이 많지만,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애쓰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환경에 대해, 이런 환경을 마련해 준 하나님과 우리 교단에 대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새벽기도회나 경건회, 호실기도회 등에 적극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물론 잘 하고 있습니다만). 이런 것들은 아주 중요합니다. 학점보다 더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반별 모임도 그저 밥만 먹는 시간이 아니라, 수업 이상의 의미 있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단지 학점만 잘 따서 졸업하면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할 것입니다.
 
IV.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
 
결국 이러한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훌륭한 교역자 또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을 배출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꾼을 양성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려보았습니다. '교회 목회자'는 국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꾼입니다. '선교사'는 해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꾼입니다. '신학자'는 복음 전하는 일꾼들을 양성하는 사람입니다.
 
'신학자'는 별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목회 못하는 사람이 신학을 한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오히려 목회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신학을 더 공부해야만, 앞으로 훌륭한 목회자를 양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 교수 임용에 있어서 '목회 경력'은 철저히 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행 규정으로는 (담임) 목회 3년 이상이라고 되어 있는데, 앞으로는 이것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회를 잘 하는 사람 가운데서 학적 실력을 갖춘 사람이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 올바른 신학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신학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 교수들은 이러한 일꾼을 양성하기 위해 수고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일꾼으로서 교회를 섬기고 교회를 위해 봉사할 따름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3절에서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25절에서 "내가 '교회 일꾼' 된 것은 ...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복음의 일꾼'이 되었고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 '출발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본문 11절에 있는 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나타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양육'하십니다. 즉, 우리를 '교육'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으로 우리를 날마다 가르치시고 지도하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도록" 교육하십니다.
 
이 성령의 학교에 부름 받은 우리는 날마다 기쁨으로 잘 배워서 훌륭한 '복음의 일꾼'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며 노력하는 주의 종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 blessglolia
글쓴이 : nokob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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