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에게 있어서 은혜와 행위와 구원유지
샌더스 (E.P. Sanders)의 저서'Paul and Palestinian Judaism'(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27)- 이 책은 PPJ로 부르기로 한다-은 바울신학 연구를 고무 시켰다. 그러나 샌더스는 이책에서 바울 보다는 팔레스틴 유대주의에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최근 샌더스는 'Paul, the Law and the Jewish People'(여기서는 PLJP라고 부르기로 한다)1 이라는 또다른 저서를 남겼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불균형을 수정하여 우리가 그의 사상에 대하여 좀더 완전하고 정당한 근거를 취할 수 있도록 한다. 이것들이 바울 연구에 끼친 영향은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논문은 샌더스의 가장 중요한 사상 중 하나를 논박하기 위해 기록되었는데. 그의 사상 중 가장 중요한 하나는 다음과 같다.
“많은 이들이 바울과 유대주의은혜와 행위사이에 결정적 대조를 발견하고 있는데. 이점에 대해서 바울은 팔레스틴 유대주의를 따르고 있으며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나 심판은 행위를 따라 이루어진다. 그리고 행위는 구원을 유지시키는 조건이나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료를 통해 바울의 것과 팔레스틴 유대적인 것에 강조점을 두고 다루게 될 때 아주 색다른 인상 즉 팔레스틴 유대주의는 행위 중심인 것 같고. 바울신학의 인상은 은혜 중심인 것같은 인상을 주는 듯하다.
팔레스틴 유대주의 자료를 중요시 하는 것은. 구원을 유지하는 방법으로서 율법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는데 더욱 중점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에 근거한 언약이 가정될 수도 있으나 이것은 샌더스가 인정한 바와같이 주도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율법을 설명하거나 적용하기 위한 전승들은 기록된 구약 율법과 병행되어 온 구도 율법전승(이것은 마지막에 미쉬나에 기록되어 있다)을 더욱 부채질 하기 시작한다. 율법의 본래 의도를 삼켜버린 이 전승들은 바울 서신 이외의 신약 성경에 의해 비판을 제기하는 팔레스틴 유대인들이 율법에 몰두하고 있으며. 그 율법을 신중히 준수하기에 열중한다는 것을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팔레스틴 유대주의와 기독교 사이에 기본적으로 일치하지 않고 있음을 암시한다.
유대종파에 대한 요세푸스의 묘사들은 미쉬나 그리고 또다른 초기 문헌들의 내용과 같이 유대인의 열성을 확인하고 있다. 쿰란에 있는 종파들의 꼼꼼함은 신중하게 율법 준수에 열중하는 것을 약화시키기 위해 우리가 말세의 열정을 정당하게 사용할 수 없음을 입증한다.
샌더스는 구원을 유지시키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많은 선행을 해야하다는 팔레스틴 유대주의적 관념을 손상 시키는데 성공했으나. 율법주의적 해석의 확대 적용 준수에 대한 열정을 훨씬 줄일 수 있는 방법인 선택적 은혜와 율법을 관련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다.
순종은 바울신학에서 필수적이고 중요한 것이지만 팔레스틴 유대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열성과 나란히 비교해 볼 때 순종에 대한 바울의 언급들은 가벼워 보인다. 더욱이 바울이 언급한 것들은 율법적인 해석. 확대. 적용이 아닌 훈계의 형식을 취한다. 도덕과 관계가 없는 문제들 (고전8-10;참고 롬14우상제물에 관한 것)이 야기된 곳에서 바울은 율법적으로 규정하기 보다는 양심의 자유에 호소하는 경향이 있다. 율법의 도덕적 요구들을은 바울은 유대주의적 특성으로서가 아닌 보편적 의무의 문제 (특히 롬1:18―32를 보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와 대립되는 듯한 요구들을 충족시키라는 그의 명령과 어긋나지 않는다.
바울은 유대인의 자격에 관한 논쟁에서. 특히 율법의 유대적 특성 (할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들 (갈4:10) 금지된 식물)과 팔레스틴 유대인이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샌더스는 바울과 팔레스틴 유대인 사이에 중요한 일치점을 보고 있다. 즉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샌더스의 견해가 우리에게 주지시키는 것은 인간이 은혜로 들어서게 되는 비유대적. 기독교적 길을 바울이 규정한 후에. 바울이 구원 유지에 대해서 주장하면서 그가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유대적. 비기독교적 사고 방식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율법을 잘 성취했는가에 따라 심판 받고. 그리고 그것을 잘 성취하지 않는다면 배척될 것이다)으로 복귀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 사상의 견해는 구원 유지의 문제가 바울과 유대인 사이에 신학적 논쟁점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모순된 주장을 피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그의 구원론의 초점을 유지하기 위하여 구원을 얻고 구원을 유지하는 데까지 비유대적 사고를 덧붙이기를 기대하려는 것이다.
사실 유지의 문제가 논점인데. 최소한 갈라디아서에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가는 조건이다”라는 샌더스의 주장과는 반대로. 바울은 믿는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은 여부의 문제를 취급하지 않고. 오히려 믿는 이방인들이 할례를 행하지 않고 율법의 다른 부분을 행하지 않고서도 구원이 유지될 수 있는지를 취급하고 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3) 이것은 신명기27:27(3:10)에 따르면 출발의 문제가 아니라 지속의 문제이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5:4, 7) 심지어는 논쟁이 덜한 로마서에서도 구원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유지된다는 것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왜냐하면 6-8장에서는 율법 아래에 있지 않은 그러나 은혜 아래에 있는 존재로서 계속적인 신자의 삶을 강조한다. 그리고 1:17절에 “믿음으로 믿음에 (from faith to faith)라는 구절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만이 (바울은 명백히 행위와 믿음을 대조하고 있다 특히 4:4―5를 보라) 구원을 얻고 동시에 구원을 유지하는 구원론의 모든 진리를 형성하고 있다. 유사한 것으로 우리는 로마서 11:20에서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라는 말을 읽는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외에서도 바울은 거듭 구원유지의 원리로 믿음을 강조하고 행위를 거절한다. 그리고 그는 보존의 근거로서 하나님의 행위를 강조하고 인간의 노력을 부정한다. 인간의 노력은 의미는 있으나 원인은 아니다.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후1:24)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3:5)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2;12하―13)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3:3. 8―9) 또한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9 “(너희) 믿음에 굳게서서”(골2: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엡3:17) 참고 고후4: 10. 12: 13:4. 엡2:10. 6:10.
그러면. 유대인들이. 이방 신자들은 할례를 행하고 율법의 나머지도 구원을 얻는 수단으로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바울이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유대인과 논쟁하지 않았다. PPJ에서 샌더스 자신은. 엄격히 말해 비기독교적인 팔레스틴 유대주의조차 그같은 견해를 시사하지 않았음을 제시하고 있다. 대신에 언약으로 들어가는 것은 계명들의 멍에를 메는 것보다 선행한다. 즉 이방 개종자들은 계명들의 멍에를 수용하고. 그 계명들과 할례를 그리고 언약에 들어가는 수단이라기 보다는 언약에 참여한 자의 증거로서 수반되는 유사한 행위들을 순종하겠다는 의사를 밝힘으로 언약에 참여했다. 그렇다고 우리는 교회 내의 유대인들이 구원을 얻으려면 믿는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의 나머지도 지키기를 시작해야 한다고 가르쳤다고는 거의 생각할 수 없다. 반대로 바울은 구원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할례를 행하고 율법의 나머지도 지키기 시작하는 것즉 은혜에 들어가지 못함에 대해서가 아니라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반대한다 (갈5:4). 동시에 바울은 선행을 요구한다. 그러나 바울이 구원을 유지시키는 은혜와 믿음을 반유대적으로 확장하는 것은 선행이 은혜 유지의 수단이 아니라 믿음을 은혜 받음의 증거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확장은 또한. 유대인들의 가르침에 대한 바울의 공격들이 단순한 교리적 부정 즉 유대주의는 악하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라는 것으로 설명된다고 하는 샌더스의 견해를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와 반대로 바울은 은혜와 믿음을 변질시킨 유대인의 가르침에 대하여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과 구원을 유지하는 것은 행위와는 반대되는 듯한 믿음이라는 흠없는 까운에 포괄된다. 이와 더불어 행위란 수단이라기 보다는 증거로 오는 결과이다.
바울이 구원을 얻고 동시에 구원을 유지시키기 위해 율법보다 믿음을 주장하는 것은. 왜 그가 율법과 믿음을 서로 배척하는 것으로 주장했는가라는 문제를 야기시킨다. 샌더스는 구속사로 귀결되는 한 답변을 제시했다.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의지는 변함이 없다율법은 결코 하나님에 의해 의의 수단으로 의도되지 않았다. 그것이 성취된 것은 그다지 늦지 않았다.”
그러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역사적 의도는 믿음이 역사 속에서 늦게 온 것으로(갈 3:―29) 바울이 말할 수 있는 이유와 이방인의 구원 역사적으로 최근 전개된 것으로 말할 수 있는 이유. 믿음과 율법이 구약에서 양립된 것으로 가정할 수 있는 이유. 또는 율법의 의의 규례가 육이 아니 성령을 좇아 행하는 (롬8:4 우리 안에 성취되어야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이유 등을 설명하지 않는다.
믿음과 양립할 수 없는 팔레스틴 유대주의에서 예시된 바와 같이 인간의 경험 안에는 분명히 율법에 관한 어떤 요소가 있다. 그런데 그 율법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이며 성령 안에 사로잡힌바 되었고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교정되었다. 그리고 이 율법과 완고한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접붙임은 믿음과 모순되지 않는다. 율법이 성취 되었음을 말하는 진술들은 성령의 새로운 사역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믿음이 온다거나(갈 3:)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롬6:14. 15) 같은 진술들은 과거 인간에서 율법의 실패를 반영하고 있다.
과거 인간의 경험 속에서 율법과 믿음 사이의 모순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우리는 샌더스가 거절한 다음과 같은 답변으로 되돌아 가야한다. 즉 바울에게 있어서 그 모순은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불신자들이 굴복하게 되는 자기 의에 있다.라는 자기 의에 대해 반대한 것은 공적에 대한 자기 의의 자만이 아니라. 율법을 소유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자기들의 위치에 대한 신뢰에 대한 것이며. 더 좋은 의에 대하여 그들이 실패했음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더 좋은 의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만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지 율법을 소유함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유대주의가 지닌 오류는 유대인들이 스스로 구원하려 한다거나 스스로 의로와지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노력이 올바른 목표를 향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에 관한 한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고 율법을 순종함으로 얻어지는 의와 또다른 의를 제공해 주셨다.”(롬10:2-4). 유대인의 의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의 차이는 “공로와 은혜라는 차이가 아니라 두세대들 사이의 차이이다. 율법으로 오게된 의가 있지만 지금은 다른 세대에 속하기 때문에 아무 가치가 없다 그것은 또다른 의를 오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구원사적인 요소이다.”
확실히 바울은 여러 세대들 속에서 어떤 변화를 보고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의 것을 보고있다. 핵심 구절인 빌립보서3:2-11은 바울이 자신의 유대인의 신분을 자랑하면서 시작되고 있으며 (8일만에 할례. 이스라엘 족속. 베냐민 지파요) 자신의 공적을 자부하며 계속된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율법으로는 바리새인.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 율법의 의로는 홈이 없는 자로다). 샌더스는 바울이 빌립보서3:2-11에서 유대인의 신분을 가진 것과 자신의 공적을 육체의 자랑거리로 삼고있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샌더스는 바울이 자기 의를 뽐내는 죄로 인해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빌립보서3:2-11에서 길게 열거된 항목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놓치고 있는 실수와 더불어 자기 의를 뽐내는 죄를 지적하고 있다.
세대의 변화가 바울이 말한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울이 열거한 아브라함의 예에서도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바울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새로운 시대가 임하였음을 알리는 그리스도보다 훨씬 이전에 믿음으로 의로와졌다(갈 3. 롬4). 다윗의 문제도 샌더스가 구속사를 설명함에 있어 골칫거리이다. 왜냐하면 다윗 또한 믿음으로 의로와졌기 때문이다 (롬4:6―8) 여전히 다윗도 새로운 세대가 임하기 오래 전에 살았을 뿐 아니라 율법의 옛 세대 가운데서 살았다.
바울의 자기 의는 자신의 행위와 신분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그가 그리스도를 믿음에 반해 율법의 행위들을 반대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의지함을 공격하는 것과 동시에 세대의 변화를 암시하고 있음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4:2. 4에서 아브라함에 대하여 말한 것은 이 점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샌더스는 그 삯이 사실상 믿음을 근거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이며. 행위로 의로와지려는 아브라함의 어떤 시도에 대해 바울이 언급도 비판도 하지 않는다고 주석함으로 이 구절들의 의미를 회피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진술들은 아브라함의 의가 행위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면 아브라함이 자랑할 수도 있었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샌더스가 인식하고 있는 것은.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의 의도는 사람이 선택된 자가 되기 위해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항상 믿음에 의한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도에 관한 한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로부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까지 구속사는 변동되지 않았다. (샌더스는 구속사에 대한 바울의 생각에 모든 것을 떠맡기려고 한다는 점에서 자기 모순적으로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약속으로부터 성취까지는 그렇지가 않다 (참고 갈3―4) 자신의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을 사용한 것은 바울의 과거의 삶을 포함해 팔레스틴 유대주의에서 바울이 잘못된 것이라고 발견한 것이었다.
이제 로마서 9:30-10:13을 다루려 한다. 얼핏 보아 9:30-32만을 취하게 되면. 이스라엘이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으로 율법을 이루지 못했음을 의미하게 되는데 샌더스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샌더스는 나머지 구절들은 이러한 실패의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율법을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잘못된 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결핍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의” (10:3)란 “개개인이 그들의 공로를 제시함으로 구성되는 하나님에 대한 권리와 같은 자기 의라기 보다는 유대인만이 얻을 권리가 있다는 자기 의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결핍 때문에 바울이 이스라엘을 책망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행위에 대한 잘못된 의존을 보완하기 보다 오히려 그 결점을 대체하려는 것은 설득력을 잃는다.
샌더스는 9:31에서 두번째 νομο를(바울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게되는 하나님의 의를 의도할지라도) 사용하는 것은 분명히 이상하며. 바울이 그가 의도하는 바를 정확히 말하지 않았으나 균형잡힌 대조를 위한 욕망 때문에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을 조합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샌더스는 8:10과 대구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8:10에서 바울은 쌍을 이루는 반대말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즉 몸과 영. 사망과 생명. 죄와 의 등이다. 그리고 샌더스는 9:31에 있는 똑같은 단어인 율법이 한번은 모세율법 같은 느낌으로 언급되고 다음에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로 언급된다고 우리들이 믿는가를 묻고있다.
보다 더 바람직한 견해가 있다. 9:32에서 바울이 믿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율법적 느낌을 주는 νομον과 대조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리고 사실 강한 반대를 나타내는 αλλω εζεγων (그러나 행위에 의지함이라)는 이 대조를 확증하고 있으며. 31절에 있는 νομον을 행위 의를 위해 사용된 법으로 해석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찌 그러하뇨”란 질문과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라는 그 대답에 의심을 갖게한다. 왜냐하면 31절에 있는 νομον의 두번째 사용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를 의미하고 있다면. 바울은 이미 이스라엘이 그것을 얻지 못한 이유를 31절 첫머리에서 말했기 때문이다. 즉 저희는 법을 추구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얻는 것의 대조가 아닌 추구의 대조는 그 대상이 같은 것이라는 것을 요구하게 된다. Νομον은 한 가지 대상인 율법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νομον의 두번째 사용은 부가된 한정사가 없다. 왜냐하면 첫번째 사용에 부가된 “의의”가 뒤에까지 미치기 때문이다. 동사 εφθαρεν은 “얻음”을 의미하지 “성취”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샌더스는 말한다.
그러나 의미상 “이룸”의 뜻인 “얻음”은 성취와 훨씬 비슷한 의미가 된다. 동사 κατελαβεν은 “붙잡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유사 대구법에 의해 εφθασεν.을 위한 유사한 의미를 결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자기 의를 확보하려는 방법으로 율법을 추구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죄 때문에 (참고, 특히 2:1-3, ) 실패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같다. 의를 얻은 자는 이방인이라는 진술에서 보듯이 30절 바울은 아마도 이스라엘이 결국 도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제일 먼저 이방인을 앞서 (θανω)의 근본 의미 도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εφθασεν을 선택하고 있다.
10:3의 “자기 의를 세우려고”라는 구절에서. “세운다”는 부정사와 하나님의 의에 복종을 대조하는 것은. 바울이 반박하고 있는 것이 자기 신뢰와 같은 특권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전히 10:5에서 믿음과 대조를 이루는 것은 특권보다는 실행이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행하는 ( οιησα)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그리고 10:8에서 “믿음의 말씀”에 관한 신명기 30:14의 인용으로부터 바울이 빠뜨린 “네가 그것을 할 수 있느니라”란 말은 여기에서 믿음이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의 특권이 아닌 유대인의 율법을 행하려 함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울이 율법을 행하려 하는 유대인의 시도 대신 그리스도에 대한 유대인의 불신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려는 시도로 말미암아 야기된 것과 같은 그들의 불신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한 시도는 자기 의로 인도한다.
그러나 율법 그 자체 혹은 순종함에 어떤 결함이 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교만이 성령 없이 율법에 순종하는 것을 변질시킨다. 성령 없는 순종은 결국 인간이 만든 종교로 끝난다(그것은 이미 인간이 만든 종교로 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러나 율법 그 자체는 영적이다. (바울의 용법에서 롬 7:14―πνευματικο는 성령과 관련된다 여기의 영문 번역이 대문자이다).
따라서 성령에 의한 신자들은 자연히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성취하게 된다(롬8:4). 신자들의 행위를 결정하는 바로 그 성령이 율법의 가르침을 결정했다. 그리고 진정한 신자가 아니라면 그 안에 성령이 없다 (롬8:9) 그러므로 육체의 일을 계속하게 될 때에는 믿음의 고백을 문제시 하게 된다 (특히 갈 5:19-24)를 보라 샌더스의 논증에서 보듯이 팔레스틴 유대주의에서 선한 행위들이 서적상의 공적에 대한 비중에 따라 하나님의 호의를 얻게 하는 것으로 항상 생각되고 있다는 것은 너무 지나쳐서 말할 수 없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팔레스틴 유대문학 샌더스가 선한 행위들로 말미암은 속죄에 관해 인용한에 있는 많은 구절들을 볼 때. 팔레스틴 유대주의에 대한 바울의 표현 가운데서 선한 행위가 죄의 용서를 위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데 최소한 필요한 의를 구성한다는 것은 지나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바울에게 있어 구원은 전적으로 믿음을 통한 은혜이기 때문에 일말의 신인협력설도 있을 수 없다 (참고 엡2:8―10) 선한 행위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의 부산물이다.
바울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믿음과 모순된다고 논증하는 것으로 만족해 하지 않는다. 그는 불신 유대인과 기독교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는 것이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로마서 2:1-3, 이 이러한 실패를 지적하고 있으며 이 지적은 3:24-25. 21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에 대해 세부적으로 설명하게 된다. 샌더스를 지지하는 7 T. 라이트 (Wright)는 바울이 비난하고 있는 것은 율법주의에 대해서가 아닌 죄에 대해서 즉 율법을 파괴하는 것에 대해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교만에 비난을 퍼붓고 있다. 그러한 교만은 율법주의에서 비롯되었다. 라이트가 지지하는 샌더스는 이 교만은 공로와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와 관계있는 것이라고 롬2:17-20. 상에서와 같이 거꾸로 주장한다. 그러나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불순종에 대해 바울이 문맥상 논술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순종함을 자랑한다고 말하는 것으로부터 그를 지켜준다. 바울 자신은 모순되게 보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율법과 하나님 안에서만 자랑한다고 말할 뿐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율법을 자랑하고 있다는 것은 간단히 추측되어진다.
우리가 이미 주목한 바와 같이. 로마서4:2은 분명히 자랑이 소유에 대한 자존심과 마찬가지로 순종의 행위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하심을 얻었다면. 그는 자랑의 근거를 가졌으려니와”(참고 빌3:4. 6) 샌더스가 바울이 율법에의 복종을 나쁜 것이라 한 것을 부정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그런 순종이 자만의 죄로 이끌었다는 바울의 비평을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샌더스에 따르면. 보편적 죄성에 관한 바울의 진술이 설득력이 없는 것과 그 모순은 그가 보편적 죄성의 결과로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도달하였다기 보다는 차라리 그가 보편적 죄성을 생각하기 전에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주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샌더스는 로마서5:12-14에서 바울이 의미하는 것을 놓치고 있는 것같다. 즉 사망이 율법 이전에 역사했는데 그 이유는 아담과 모세 사이에 있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 모세의 계명으로부터 빗나가 범죄했기 때문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계명을 불순종한 아담 안에서 범죄 했다는. 아담의 원리가 그들에게 전가 되었다 (특히 5:19상을 보라)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바울의 생각 속에 보편적 죄성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이전에 오게 되었는지 또는 그 반대인지. 혹은 그 두 가지가 동시에 그에게 생겨났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바울은 율법에 대한 율법주의적 의존을 반대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지지하기 위해 이방인과 더불어 유대인을 율법 파괴자로서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남게 된다.
샌더스는 바울이 로마서 첫머리에서 율법주의를 공격하고 있지는 않으나 유대인의 특별한 방법인 율법 대신. 보편적 구원의 방법인 믿음을 확고히 하기 위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동일선상에 놓기를 시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율법 아래서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동등함이란 있을 수 있는가. 만일 유대주의로 개종한 자 같은 그들이 할례를 행하고 교회 속으로 들어올 때 율법의 나머지를 지키기를 시도했다면. 바울은 왜 이방인들을 동일선상으로 보지 않았는가. 샌더스는 이방인들이 율법에 의해 살 수 있다는 것을 바울이 생각하지 않았음을 갈라디아서2:14이 암시하고 있다고 함으로 대답하고 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2:14은 그런 식으로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능력의 문제가 개입되지 않는다. 바울은 유대인인 게바가 유대인이라기보다는 이방인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적인 진술만을 하고있다. 그리고 바울은 게바가 왜 이방인들에게 유대인같이 살라고 강요했는지를 묻고있다.
그밖에 능력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으나 유대인들에 관한 언급과 더불어서이다. 로마서7:7-25에서 “나(I)" 는 바울인지 그밖에 어떤 누구인지는 몰라도 율법 아래 있는데 따라서 유대인임에 틀림없다. 최소한 “나”는 유대인을 포함해야만 한다. 이 “나”는 율법을 지키는데 있어 무능력함과 그 이상을 실망한다.
그래서 바울의 유대인의 범죄의 현실과 죄에 대해서가 아닌 유대인의 무능력에 주의를 환기시킴으로 행위 의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고 있다. 샌더스는 로마서7:7-25의 고통을 죄를 가져오게 한 율법을 의도한 것. 그리고 죽음을 가져오게 한 율법을 주신 것으로부터 “부분적으로” 하나님이 무고함을 밝히려는 바울의 열망의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그 고통의 나머지 부분은 어디서 온 것인가. 그 구절 안에 있는 고통은 하나님의 멍에가 아닌 직접적으로 인간의 무능력에 관계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4절 샌더스는 논증의 결론에서 “우리는 바울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로마서 7장의 정밀한 주석으로 부터 후퇴해야만 한다”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주장의 약점을 무심코 드러내고 있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를 이룸을 이루려면 순종이 전부인 것같다. 회개와 용서가 불순종에 의해 야기된 공백을 메꿔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히 행위 의가 불충분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율법이 분할되는 것을 (그것은 마치 율법의 나머지는 아니지만 그 일부를 지킴으로 사람이 성공적인 의를 점차로 성취할 수 있는 것처럼) 허용하려 하지 않는다.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신27:26). 샌더스는 바울이 인용을 위해 신명기 27:26을 선택하였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여기서만 70인경이 “율법”과 “저주”를 연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그 단어 (율법,저주)에 강조를 두고 있다. 우연히 나타나는 “모든 이”라는 단어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바울 논증의 핵심은 창세기15:16과 하박국2:4(갈 3:8. 11)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12절에 있는 레위기18:5 이상의 인용은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믿음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율법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면 갈라디아서3:10에서의 인용은 “이방인들이 할례를 수용하는 것”을 단념시키기 위한 간접 설명으로 설계되었다. 왜냐하면 율법의 완전 성취의 실패는 율법에 의한 저주로 인도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진정한 생명은 어떤 경우에도 율법을 순종하는 것에 의해 성취될 수 없다. 심지어 그 순종이 무흠하다 할지라도.
그러나 우리가 “…할지라도”라는 표현으로서 바울 논증의 주된 흔적을 따르려는 단순한 동기를 갈라디아서3:10 옆으로 제쳐두어야 하는가. 모든 일련의 생각들은 우리가 그러지 않기를 지지한다. 샌더스는 바울이 의미하는 바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구약 인용들이 아니라는 원리를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설정하고 있는 것은 구약 인용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바울이 취하여 우리에게 말하려는 바울 자신의 말들이다. 그렇다면 샌더스는 바울의 말들 속에서 바울이 율법을 수용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저주만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논증의 목적을 위해 우리는 샌더스의 원리를 받아들여. 바울의 말들이 사실상 저주에 국한되어 있는지를 질문해 보자. 그 대답은 아니다이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이란 말로써 인용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만일 바울이 단순히 율법을 수용할 것을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율법의 행위에 대해서가 아닌. 율법만의 언급을 기대해야 했을 것이다. “행위들”은 그가 마음 속에 실행을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그 인용의 주요한 부분과 관련이 있다. 즉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바울이 로마서2:13. 에서 율법 안에 모든 것을 지키려는 유대인의 실패를 언급하고 있는 부분들은 이같은 관찰을 확고히 한다.
더욱이. 신명기27:26의 인용에서 바울은 70인경으로부터 히브리어 yaqim “확실히 하다”의 좀 더 정확한 번역 (그것은 율법을 지키려는 기본적인 의도만을 요구한다)을 제공하기 보다는 차라리 동사 εμμενει “지키다”를 취하고 있는데. 그것은 율법적 완전을 요구한다.
그러나 여전히 바울은 12절의 실행의 문제로 되돌아 간다. 그러나 율법은 믿음에 속하지 않고 차라리 그것들을 행하는 자(율법책에 기록된 것들)가 율법에 의하여 (레18:5) 살 것 ησεται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영생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이다. 바울이 의 또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영생을 위해 인용한 하박국2:4을 레위기18:5과 대치 시키고 있으며. 모세의 진술과는 일치하지 않는 것인가. 로마서에서 율법에 대한 그의 변증은 그렇다는 긍정의 대답에 의심을 던진다.
갈라디아서 3:10에 분명하게 드러난 실행의 문제에 대한 관심은 그 의심을 실증하고 있다. 더욱이 믿음이 혹은 영생에 우선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바울이 하박국 2:4을 인용하고 있고. 레위기 18:5는 영생은 율법의 완전한 순종을 통하여 올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인용한다.
그러면 13절에서 그는 순종의 실패로 인해 오게되는 저주와 같은 주제로 되돌아 온다. 10절을 따르면 저주는 율법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키지 못하는 자에게 임하는 것이므로. 바울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 부터 구원하셨다”라는 진술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믿는데 필요한 모든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실패라는 것을 암시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바울이 또다시 저주를 언급할 이유가 없다. 비실행은 그의 논증의 동기가 아닌 주된 흐름 속에 있다. 그리고 그의 논증은 심지어 인간이 율법을 완전히 순종한다 할지라도 영생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논증은 인간이 율법을 단지 불완전하게만 순종함으로 인해 얻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확증이 갈라디아서5:3으로부터 오고 있는데 갈라디아서5:3은 비록 바울이 신명기 27:26을 저주와 νομο를 연관 시키기 위해서 인용하였지만 바울은 그것이 “모든 것을” 말했음을 잊지 않고 있었음을 샌더스는 인정하고 있다. 즉 “내가 할례를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우리들이 첫째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것들이 바울 자신의 말이라는 점이다. 이 바울의 말들은 갈라디아서3:10에서 신명기 27:26을 인용한 것으로부터 바울이 얻은 바를 보여주고 있다. 둘째로 다시라는 부사는 바울이 이전 구절을 사실상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6:13에서 바울이 고발한 “할례를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고”란 말은. 바울이 완전한 실행과 단순히 할례에만 복종하는 것같은 불완전한 실행을 대조시키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샌더스에 따르면 바울이 추론하는 것은. 율법 모두를 지킬 수 없으므로 율법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종의 우려에서. 즉 “너희가 율법을 지키기를 시작한다면 모든 것은 지켜져야만 한다”는 것 곧 할례를 받아들이는 것은 모든 율법을 받아들이는 것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샌더스는 계속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양적으로 모든 율법을 지키기가 불가능하므로 바울이 율법에 반대하여 주장한다는 견해를 지지하도록 만들려면. 바울의 갈라디아서 율법에 대한 전제들에 관한 긴 가설들의 목록을 만들어야만 한다. 즉 사람은 그 모두를 지켜야만 한다. 그런데 사람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탈선하게 될 때는 용서가 없다. 필요상 율법을 받아들이는 것은 저주의 존재에 이르게 된다. 이 일련의 사상 중. 가운데 주장들은 결코 바울에 의해 주장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일련의 견해들은 당시 유대문헌에서 발견할 수 없다.” 사실 이러한 전제들은 바울에게만 필요할 뿐이지 갈라디아인들에게는 그렇지가 않다. 첫째로. 사람이 모든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 가정이 아니라 갈라디아서 5:3에서 바울이 명백히 진술한 것이다. 둘째로. 사람이 모든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은 거의 오류가 없다. 우리가 보았듯이 10절과 비교된 갈라디아서3:13절이 이를 분명히 암시하고 있으며. 갈라디아서6:13이 그것을 명백히 주장하고 있다. 로마서2:13. 이 그것을 구체화하고 있으며. 로마서7:7-25이 그 느낌을 더해주고 있다. 더욱이 갈라디아서5:1721은 현재 문제시되고 있는 구절에 곧이어 등장하게 되는데. 성령이 없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할 육체의 행위들을 피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세번째 전제. 즉 탈선하게 될 때는 용서가 없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오히려 바울은 예수의 대속적 죽음이 (율법에 대한 우리의 순종이 아님) 범죄를 해결한다는 초대 기독교 견해를 채택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이러한 전제를 언급함을 회피하지 않는다 (갈3:13을 보라;참고 롬3:-25;4:25, 5:6-10;고전15:3;고후5:21;갈1:4). 따라서 이 가운데 있는 주장들은 바울에 의해 주장되었다. 그리고 바울신학에서 그것들이 당시의 유대문헌에서 발견될 수 있건 없건 마찬가지이다.
샌더스가 부정하지 않은 네번째 전제인 율법을 필요하여 받아들이는 것은 저주의 존재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본문 3:10에서 나타난다. 그렇다면 바울의 주요 논증의 특성이 믿음으로써만 의로와진다는 것이므로 갈라디아서5:3은 모든 율법을 지킬 필요성과 지키지 못함을 확증하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바울은 율법이 사실상 죄를 더하게 한다고 말함(갈 3:19, 22, 롬5:20. 6:15-16, 7:56, 7―25 특히 13절. 11:32)으로 어려운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샌더스는 이점을 논박하지 않지만 긍정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율법을 성취할 수 없음이 주된 문제로 바울에게 제시된 것을 어떻게 그가 부정할 수 있는지를 질문해야만 한다.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는 것이 그를 괴롭히지 않는다 할지라도 율법이 죄를 더하게 한다고 말하는 이 놀라운 말을 바울이 왜 시도하는가. 인간의 연약함과 구속사라는 두 기둥들이 믿음으로써만 의로와짐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바울의 생각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해결로부터 인간의 곤경으로까지 미치고 있음에 반대하여 바울의 인간론은 단순히 기독교 구원론을 반영한 결과일 뿐이라는 것은 설명하기가 어려운 지배하에 있는 삶에 대한 그의 묘사 가운데 율법과 그 연민의 정을 사용하는 죄의 지배에 대한 그의 강조를 강화시킨다. 샌더스는 이런 문제들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으나 곤경으로부터 해결로 가는 진전을 보는 가운데 일치된 문제들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진전이 있는가를 문제시 해야 한다. 그 문제들이 암시하고 있는 것은 바울이 연속적이라기 보다는 동시적으로 곤경과 해결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구원론이 그의 생각 속에 죄의 지배에 의하여 균형을 잡는 것이 필요한 것같이. 그리고 죄의 지배는 칭의의 긍정적 의미와 그 의미가 내포한 죄의식 같은 개념에 의해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다.
오늘날 인기가 있는 것으로서 샌더스는 바울의 죄론의 정수인 죄에 대한 죄의식 보다는 죄의 권세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칭의는 신자와 그리스도 사이에 죄의식과 의를 교체하는 것이기 보다는 죄의 지배로부터 더욱 그리스도 지배로의 이동을 지칭한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율법이 저주를 가져오게 하는 범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로서 칭의를 소개한다. 이때 비로소 종노릇의 문제를 토의하게 된다. 그리고 첫째 거짓 종교 (4:1-10. 21-5:1). 둘째로는 죄에 대한 (3:22. 5:17-21) 종노릇을 토의하게 된다. 이러한 모형은 로마서에서도 반복된다. 죄의식의 문제가 처음 나오고 절정에 이르게 될 때 (3:19-) 법정적 칭의가 3:24-5. 19에 뒤따른다. 그리고 그 후 죄의 지배를 (5:20-8:17) 다루는 대표적 구절들이 오게 된다. 그리고 고전6:9-11과 고후5:21을 보라.
앞서말한 구절들로 바울 사상을 단순히 전통적이고 특징 없는 것으로 진행 시키는 것은 충분치 못하다. 바울은 죄의식과 그 죄의식을 그리스도의 의로 대치하는데 너무 많은 지면을 허비하고 있다. 샌더스는 로마서6:16과 갈라디아서3:3. 6, 21에서 “의” 대신에 “생명”과 “성령”의 사용 가능성에 적절한 주의를 끌고 있다. 그러나 이 가능성은 결코 법정적 요소를 부정하거나 점차로 줄여가지 않는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죄의식과 의와의 교체를 가능하게 빌3:711 만들고 있으므로 바울은 그 연합과 의의 법정적 유익을 다른 이익들과 혼합하고 있다. 법정적 언어 “한 사람이 모두를 위해 죽었은즉”과 관계적 언어 “그러므로 모두가 죽었다” (고후5:14)와의 혼합. 더욱이 죽음이 죄를 위한 형벌이므로 (롬5:12-21. 6:15-) 바울이 생명을 주는 성령 안에 있는 생명을 형벌의 법정적 부정과 관련 시켜야만 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울 뿐이다 (롬8:12) 그리스도와 연합의 유익들은 서로 동등하지 않다. 그것들은 서로 동반하며 서로 구별되어진다 (롬5:17-21. 8:1-11). 샌더스는 로마서1:18-3. 3:에서조차 죄의식의 밑바닥까지 이르지 못했다고 반대하면서 차라리 “죄아래”(3:9)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장 후반부에서 이교도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음과 2장에 유대인들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음. 3:19에서의 유대인과 이교도의 똑같은 책임에 대해 그리고 피안에서 그리스도의 화목 혹은 속죄 그리고 이전에 지은 지에 대해 간과하심 3:25 대해 우리가 어떻게 읽을 수 있겠는가.
불법의 성적 연합들은 확실히 그리스도의 연합과 대치된다 (고전 6:12-20. 10:1-22). 그러나 바울은 특성상 연합과 관련이 없는 또 다른 죄들에 대해 (도적, 탐욕. 술 취하는 자. 후욕하는 자. 토색하는 자. 고전6:10-이 목록들은 갈5:20-21과 다른 구절들로 부터 첨가되며 확대될 수 있다)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죄 짓는 것이 죄의식을 가져오는 이유가 아니라면 바울이 왜 그토록 죄의 지배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가? 죄 짓는 것이 죄의식을 가져오는 것이라면 심지어 어떤 성적 연합들 조차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모순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이 때때로 관계적 언어에 이바지하도록 그의 법정적 언어를 강조하였듯이 법정적 언어에 이바지 하도록 그의 관계적 언어를 결코 강조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거짓이다 (갈라디아서 3:21을 보라. 이곳에서는 “의”가 “살게하는” 대신에 나타난다. 그리고 로마서6:7에서는 “죄로부터 의로와짐”이란 말이 “죄의 지배로부터 자유케됨”이란 문맥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갈라디아서5:16-24에서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 참여하는 것은 육체의 행위들을 반대하는 경고에 도움이 된다. 성령의 대조적인 열매를 바울이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은 성령에 따라 행하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구절의 법적 골격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로마서6:1-11에 있는 그리스도와 연합이. 중간에 삽입된 훈계를 지지하는 14절에 있는 사상의 요점을 되풀이 하기를 우리들이 기대하도록 유도하는 곳에서. 바울은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14상)라는 말에서 그치지 않는다 바울은 법적이고 신적인 것에 속한 그의 권고의 궁극적 근거를 찾는다. “너희는 율법 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하에 있다”(14하) 그리고 8:1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는 죄의 지배로 부터 자유함이 있다는 것을 읽는 것 대신 로마서7:7―25에서 기대된 그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저주함이 없다는 법적 진술을 읽게 된다. 2절까지만. 우리의 자유에 대해 쓴 것이 아니라 그는 “죄악의 선물 (죄악이 가져온 결과)" “저주받은 죄”“율법의 의로운 법령” 3―4절 같은 구절에서 법적 언어로 즉각 되돌아 가고 있다. 요컨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힘은 법적 칭의에 이바지 하도록 강요된다. 동시에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만일 법적인 사상이 바울신학의 깊은 특징이라면. 왜 그는 속죄와 회개와 용서에 대해 더 많이 기록하지 않았는가. 그는 많은 부분을 쓰지 않은 것같다. 그리고 그가 기록한 최소한의 어떤 것은 초대 기독교 전승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나 이미 개종한 자를 언급하면서 주로 그 전승을 가정할 수 있었다. 속죄와 회개 그리고 용서는 전승적인 것으로 그의 신학에서 덜 근본적이거나 또는 그의 생각에서 중요하여도 좋다. (샌더스는 이러한 주장 배후에 있는 원리를 제공한 첫번째 사람인 것같다. 왜냐하면 팔레스틴 유대주의에서 유명론의 언약적 측면은 명백히 그 문헌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해석에 따르면 근본적으로 중요성을 가진다.) 사실 “우리 죄를 위하여”라는 그리스도에 죽음에 관한 전승을 인용하면서 바울이 그 전승을 제일 중요한 것에 속한 것으로서 (고전 15:3) 묘사하고 있다.
전승적이건 아니건 간에 로마서3:25에 있는 화해 혹은 속죄에 관한 진술은 그의 논증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때에 즉 죄로부터 의로 변화되는 지점에서 등장한다. 바울은 만일 그가 죄의식이 아닌 죄의 권세에 대해 주로 관심이 있었다면 여기서 법적 전승을 인용할 필요가 거의 없다. 더욱이 그것이 전승이고 바울 자신의 말이 아니라면 이 법적 전승은 1:183, 25에 있는 변명의 여지가 없음에 대한 그의 강조와 일치한다. 더 나아가 4:7-8, 25과 5:6-11. 8:3. 14:15 (이것들의 대부분은 분명히 법적이고 그 나머지도 거의 자연스럽게 그같이 여겨진다 그리고 죄의 전가 교리와 의의 전가 교리 5:12-19에 있는 5:21과 그 다음 장까지 죄의 지배에 대한 토론을 지연하고 있는 것과도 일치한다. 심지어 샌더스는 고린도후서5:11-21의 법적 진술들이 바울에게 속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우리가 이것들에 고전5:7, 11-24. 25 갈1:4. 2:20. 3:13 살전5:10 (참고 엡2:13. 골1:20)을 추가할 때에. 그리스도 죽음의 법적 가치에 바울의 관심이 부족하다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팔레스틴 유대주의에서 두드러진 회개와 용서는 바울에게서 속죄만큼이나 주도적인 것으로 자주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롬2:4-5. 4:6-8 고후3:16. 7:9-10. 살전1:9-10을 보라). 왜 그러한가. 샌더스는 그 이유를 제시한다. 즉 바울은 죄의 지배의 문제에 너무 관심이 있었다. 왜냐하면 회개와 용서는 해결책을 제공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의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은 해결책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은 해결책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샌더스는 부분적으로 옳다. 그리스도를 대상으로 삼는 믿음과는 달리 기독론적 어조가 아니다. 혹은 용서도 신자와 그리스도 사이에 죄의식과 의의 교체를 수반하는 의와 비교할 때 기독론적 어조가 아니다.
그러나 샌더스는 바울이 기독교에 바탕을 둔 용어에는 호의를 보이지만. 기독교는 단순히 유대주의가 아니라는 교리적 이유만으로 유대적 용어를 피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호기를 놓치고 있다. 차라리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바울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과 단절을 아주 깊이 느꼈으므로 그는 율법을 정확히 지키는 것을 시도하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율법을 지키기에 실패하거든 용서받기 위해 회개만을 하라. 율법이 인간이 연약함으로 인해 죄의 지배를 부추길수록 죄의식을 치료할 회개는 점점 불충분하게 된다. 왜냐하면 회개는 행동의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이유로 인해 바울은 속죄의 가치를 선행으로 돌릴 수 없었다. 법적으로.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은 선행을 불필요하고 비교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만든다. 죄의 지배는 율법을 통하여 강력히 역사하며. 속죄 받기에 충분할 만큼 율법을 잘 지키는 노력들을 붕괴시킨다.
바울이 팔레스틴 유대주의의 선행에 의한 속죄에 대해 충분히 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샌더스는 바울이 팔레스틴 유대주의와 얼마나 다르게 속죄를 생각하고 있는가를 무시하고 있다. 이같은 무시는 바울이 죄의식의 문제 이상으로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잘못된 신념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바로 그같은 관심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바울이 유대주의를 거절하는 것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심지어 바울은 마지막에서 사람은 그들의 행위를 따라 심판 받을 것을 말하고 있다. 샌더스는 로마서2:12-16. 11:22. 14:10. 고린도전서3:10-13. 4:25. 6:9-10. 10:21. 11:29-32. 고린도후서5:8-10. 갈5:21을 인용하면서 구원을 유지하는 문제에 대해. 악행을 피하고 선행을 하는 것은 구원 유지의 조건이지만 구원을 획득하지는 못한다는 유대적 사고방식을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이러한 주장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 요점은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하시지만 그러나 은혜로 이룩된 틀 속에서 선행은 상을 주시고 범죄는 벌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과 팔레스틴 유대주의 사이에 분명한 유사성을 자세히 조사해 보지않고 그냥 놔둘 이유는 없다. 다음과 같은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믿음으로 부터 믿음까지란 바울의 말 롬1:17은 구원이 오직 믿음이라는 원리에서만 시작되며 동시에 계속된다는 것. 또한 이것은 바울이 명백히 한 바와 같이 행위를 배척한다는 것 (가장 명백한 구절로서 롬4:45를 보라. 참고11:17-22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행위 대신 믿음을 강조하는 갈라디아서는 구원을 얻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을 더 많이 다루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행위를 따라 심판한다는 바울의 교리 가운데서 신인협력설 (Synergism)이 은혜교리를 희석시켰는지 혹은 위험한 것은 진실로 받아들인 구원을 부정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거짓고백 (거짓고백이라면 구원의 상실은 명백하다) 인지를 질문해야만 한다.
샌더스가 팔레스틴 유대문헌으로부터 인용하는 증거물이 압도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선행이 조건일 뿐 아니라 구원이 유지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는 믿음이 구원을 얻고 유지하는 필요충분조건이며. 선행은 단순히 구원이 유지되는 모습일 뿐 (그렇다고 중요치 않은 것은 아니다 ) 임을 말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13:5에서 명백하게 그의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 자신을 (스스로) 시험하라”. “너 자신을 시험하라”란 말은 수단이라기 보다는 증명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악이 아닌 선을 행하라고 계속 말한다. 따라서 선행들은 구원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방법인 것이다.
이와 반대로. 랍비들은 마지막 심판에서 공로와 율법의 이행여부와 범죄여부의 비중에 대해 가지각색의 주장과 이따금 모순된 주장들을 한다. 샌더스는 은혜에 반대되기 보다는 비체계적인 충고로서 이같은 주장들을 취한다. 심지어 공적에 관한 언어 그리고 은혜에 관한 언어를 랍비들이 혼합하는 것은 신인협력설 (Synergism)을 적절한 호칭으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바울이 공로에 관한 모든 말을 피하려 하고 사실상 공로를 명백히 부정하려는 것과 아주 반대되는 입장에 있다.
행위에 따른 심판이 바울에게 훈계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으며. 행위가 아닌 믿음에 의한 칭의에 대한 그의 주장은 신학적이고 심지어는 아주 논쟁적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그 교리에 논쟁적이 된 것은. 팔레스틴 유대주의 안에서 행위 의가 충고적 의도일 뿐 구원론적 원리는 아니라는 샌더스의 주장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바울은 팔레스틴 유대주의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의 주장들은 팔레스틴 유대주의에 속한 다른 이들에 대해 언급할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유대주의 안에 참여했던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갈 1:13-14) 하지만 그는 분명히 기독교로 돌아섰다. 그러나 회심이 어떤 인간을 과거에 실재했던 것에 대해 눈 멀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유대주의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곡해했다고 말할 자유는 없는 것이다.
계명들을 정확히 정의하고 더 나아가 계명들을 범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오는 것으로부터 사람을 지키기 위해 그 계명들 주위에 울타리를 치는데 바울이 몰두하고 있는 것같이 상상하는 것은 곤란하다. 샌더스는 랍비들의 일부를 빼앗고자하는 시도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신실한 열망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사실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바울이 랍비들의 패턴을 따르지 않는 것은 그와 랍비들 사이가 다른 세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랍비들은 바울보다 인간 본성에 더 많은 자신감을 나타내고 있다. 그가 성령에 의지하는 것은 이같은 악세설과 관련이 있으며 그리고 계명들에 대해 학적으로 정의하고 보호할 필요에 대해 기선을 제압하는 것이다.
샌더스는 공의와 상급과 벌이 유력 시되는 묘사들과 반대되는 듯한 하나님께 대한 기도 가운데서 우리가 특별히 발견하는 무가치성에 관한 말과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할 것을 강조함으로 팔레스틴 유대주의의 인간 본성에 관한 상대적으로 낙관적인 평가를 반대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에 대해 말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다. 더욱이 팔레스틴 유대주의 문헌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전형적으로 “경건한 자” “의인”이라고 불려지는데 이 용어들은 선행을 나타낸다. 그러나 바울서신에서는 “신자” “부름받은 자” “성도”로 불리워지는데 이 용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반영한다.
그렇다면 어떤 형식적 유사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팔레스틴 유대주의는 은혜와 행위라는 점에서 현저하게 다른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바울이 유대주의와 유대주의적 기독교를 배격했다고 결론을 내려야 할 것같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를 그에게 계시했다는 결국 이것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를 메시야적인 율법의 완성자로서 선포할 수 있었다확신 때문만이 아니라 행위 의가 유대주의와 유대주의 기독교의 핵심적인 위치에 있으며 그리고 행위 의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 믿게 된 사실을 변질시킬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출처..네이버 블로그..mokpoj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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