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상식 이야기!!

[스크랩] V. ‘창조의 안식’에서 종말을 읽어라

하나님아들 2012. 8. 9. 22:01

V. ‘창조의 안식’에서 종말을 읽어라

- 왜 일곱째 날(창 2:2-3)에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란 말이 빠져있을까? -

 

 

1. 창조의 목적은 안식이다.

창조기사(창 1:1-2:3)에 의하면, 창조의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 째 날이니라.”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유독 창조의 일곱째 날에 대한 기술 다음에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말이 빠져있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왜 일곱째 날(창 2:2-3)에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란 말이 빠져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셨기)”(2:2)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기)”(창 2:3) 때문이다. 따라서 안식일에 관한 제4계명도,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야 하는 이유로써, 엿새 동안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기 때문이라고(출 20:11, 신 5:12)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안식’ 혹은 ‘쉰다“는 것은 어떠한 뜻을 가지고 있는가? 

우선 첫째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창 2:1) 혹은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창 2:2)라는 말씀의 ‘다 이루어지다(הלכ)’ 혹은 ‘마치시다’는 단어는 ‘끝났다(vollendet)’, ‘끝나다(fertig sein; aufhören)’ 혹은 ‘완성하다(vollenden, zu Ende kommen)’라는 뜻이다.1) 다시 말해서 목적했던 바의 모든 창조사역을 ‘끝냈다’, 혹은 창조가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일곱째 날에 ‘완성되어 그 목표하는 바에 도달하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 이루어지다’, 혹은 ‘다 마치시다’라는 말은 결코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끝(Schluß)’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Vollendung)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 일곱째 날, 곧 창조의 안식일의 의미는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완성’, 혹은 ‘창조 사역을 다 이루신 후의 쉼’, 혹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두 가지 의미의 결합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침, 끝, 혹은 종말’과 ‘종말에 이르면 안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히브리적 사유의 특성인 ‘종말’과 ‘안식’이 결합된다. 즉 창조의 완성에서 우리는 동시에 ‘창조의 안식’이라는 접하게 된다.

신약에서 ‘종말’과 ‘안식’을 결합하여 해석한 사람은 히브리서 기자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창조의 안식일’에 관한 증언과 시편의 ‘종말의 안식’을 결합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 안식에 들어가는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히 4:3b-5, 참조 시 95:11) 그리고 이어서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히 4:10)

창조의 목적만이 ‘안식’이 아니라, 히브리적 사유에 따르면, ‘구원의 목적’도 안식이다. 우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해서 죽기 직전 회개한 강도에게 “이르시되 내(= 예수 그리스도)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한 계시록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고 예언하고 있다. 이러한 증언에 의하면 ‘역사 종말의 안식’은 ‘낙원에서의 삶’, 곧 ‘생명구원’을 의미한다. 따라서 ‘안식’은 곧 ‘구원의 목적’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에서 계시록은 ‘보좌에 앉으신 이가’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라)”(계 21:6)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 종말의  마지막 날은 동시에 ‘주의 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도 베드로는,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고 증언하고 있으며, 요한 계시록도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 .”(계 1:10) 라고 ‘마지막 날’을 ‘주의 날’로 증언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분석을 종합하면, ‘창조의 안식일’과 ‘종말의 날’은 ‘마지막 날’로서 - 제7일은 창조역사의 마지막 날이고, 종말의 날은 세속사 및 구원사의 마지막 날로서 - 그 의미에 있어서는 ‘주님의 날’로서  - 주님이 인간과 함께 안식하는 날로서 - ‘유비적’이며 동시에 ‘유형론적’으로 서로 상응한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창조의 역사는 ‘창조의 안식일’로 수렴하고, 구약의 구원역사는 ‘주님의 날’로 수렴하고, 예수 그리스도 부활이후의 화해의 역사는 ‘마지막 날’로 수렴한다. 그러므로 ‘창조의 제7일 안식일’과 ‘마지막 종말의 날’은 서로 유형론적 유비(typologische Analogie) 관계에 있다. 이 ‘안식의 날’, 곧 ‘마지막 날’이 존재론적으로 실현된 날이 바로 ‘주님의 날’, 곧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의 날’이다. 이 ‘임마누엘의 날’이 곧 ‘주님의 날’이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형식화 된 날이. ‘죽은 자(= 예수)가 부활한 날’, 곧 ‘주님의 날 = 주일’이다. 그리고 성령론적으로 이해하면 바로 ‘오늘’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고 약속하셨을 뿐만 아니라, “내(=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 아버지)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라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라는 증언처럼, 이미 ‘마지막 날’에 있을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을 ‘새로운 피조물’이 성령 안에서 ‘오늘 여기hic et nunc’에 있는 것이다.2)

여기서 우리는 창조에 대한 히브리적 인지구조와 헬라적 인지구조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선 그리스 헬라적 사유체계에 의하면, 그리스 헬라인들은 과거 지향적이 반면에, 히브리인들은 미래 지향적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헬라 사람들은 역사를 자연과학적으로 모든 것은 그 원인이 있고, 그 결과는 또 다른 것의 원인이 되는 인과법칙에 따라서 역사를 이해한 반면에, 히브리인들은 역사에는 긍극적인 목적final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리스 헬라적 역사관은 모든 사건의 원인을 묻는 과거 지향적인 반면에, 히브리적 사관은 목적론적으로 현재와 미래에 중점을 두고 있다. 즉 그리스 헬라적 사유는 자연과학적 인과적 사유이고, 히브리적 사유는 의미론적 목적론적 사유이다. 이러한 점에서 히브리적 시간관은 ‘수평적horizontal’이 아니라, ‘수직적vertical’, 즉 '양적chronos' 시간관이 아니라, '질적kairos' 내지는 '의미론적' 시간관이라고 할 수 있다.  

히브리적 사유가 목적론적-미래 지향적이라는 것은 역사적 차원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론적 차원에서도 나타난다. 이점을 우리는 에스겔의 예언에서 단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에스겔 선지자는,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행한 공의로 살리라.”(겔 18:21-22)고 선포한다. 그러나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으리라.”(겔 18:24) 그리고 계속해서 에스겔 선지자는 “만일 의인이 그 공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그로 말미암아 죽으면 그 행한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이요,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리라.”(겔 18:26-27) 이러한 이유로서 에스겔 선지자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라)”(겔 18:32)고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제기된다. 히브리적 시간관 내지 역사관이 수평적 역사관이 아니라, 수직적, 의미론적 시간관이라면, 창세기의 ‘첫째 날’, ‘둘째 날’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II. 시간의 ‘순환’과 ‘선’이 아니라, ‘주기’ 

우선 인류가 - 시계가 발견되지 않았을 때 - 때를 측정하는 것은, 물리적 시간에 의해서가 측정되지 않았고, 육체적 주기성Rhythmus에 의해서 감지感知되었다. 예컨대 여인들은 자신의 생리生理를 통하여 한 달(一月)이라는 시간을 감지하였다. 그래서 여인의 생리生理를 ‘월경月經’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도 이러한 생리적 혹은 신체적 감각을 통하여 시간을 감지하였다. 예컨대 철새들이 이동하는 날짜를 정하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신체적 리듬에 따른 변화에서 이동의 시간을 결정하게 되었다. 예컨대 개미가 장마를 앞두고 이동하는 것도 그렇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에게 있어서 주관적主觀的인 시간을 알려주는 것은 ‘잠과 깸’, ‘일과 휴식’, ‘식사 시간’ 등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인간은 충분히 잠을 자고 8시간 후에는 자연히 깨게 되는 것과 같다. 심지어는 인간의 짧은 주기는 심장의 고동, 맥박, 호흡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외에 인간이 신체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시간의 주기성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그것들이 時點과 時點 혹은 하나의 地點과 다른 하나의 地點 사이에 존재하는 객관적 거리距離를 움직이지 않고도 시간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밝음과 어두움의 규칙적인 교체, 혹은 달의 변화와 단계이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이 주기성에 의해서 시간을 구분하였다. 그래서 창세기는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2)고 증언하고 있다. 이것은, 히브리인들이 시간을 무한한 발전 혹은 변화로 보지 않고, 일정한 주기의 반복으로 이해하였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러므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5)는 표현은 시간의 주기성을 의미하는 것이지, 수평적 시간의 연속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앞 절에서 창조 역사가 ‘제7일 안식일’로 끝나고, 이스라엘 역사가 ‘주님의 날’로 끝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의 역사가 ‘마지막 날’의 ‘안식’으로 끝나는 주기성과도 유사하다. 왜냐하면 이사야 선지가가 증언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기)”(사 44:6) 때문이고, 그 분만이 곧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사 45:5-7) 이렇듯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항상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간의 주기성’은 그리스 헬라인들은 ‘원’ 혹은 ‘순환’으로 생각하였다. 그 원인은 태양의 순환에서 본 따 온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태양의 순환운동이 시간의 방향 설정을 위해서 이용되면서, 동시에 태양의 순환 운동에 관한 표상이 해당 시간에 전용된 것이라고 오렐리C. v. Orelli는 말한다.3)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히브리인들은 태양의 운행에서 시간적 방향을 정하지 않고, 오히려 달의 변화 양상의 규칙적인 교체와 빛과 어두움, 더위와 추위의 주기적 교체에서 시간의 방향을 잡았다”4)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인생人生도 주기적으로 해석하였다. 즉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네(= 아담)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도 주기적으로 표현하였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전 3:1-5f) 이것을 다시 전도서 기자는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전 3:15)고 말함으로써, 앞의 모든 일이 주기적임을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순환을 가리켜 히브리어는 ‘dor’라고 말한다. ‘רידdor’는 ‘רודdur’(순환, 원)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주기週期’가 근본 사상이고, ‘순환’은 주기의 형상形狀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주된 것은 주기이다. 이 주기가 있기 때문에, 예컨대 ‘약속과 성취’라는 ‘역사의 유형’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기를 히브리인들은, ‘별들의 운행’ 혹은 ‘태양의 운행’에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원무圓舞’에서 알게 된 것이라고, 보만은 강조한다.5) 그래서 처음은 다시 돌아와서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 기자가 일곱째 날에는 저녁과 아침에 관한 어떤 언급도 하지 않은 이유는 - 보만에 의하면 - “제7일은 그 자체가 안식일이며, 일주一週라는 더 포괄적인 주기, 즉 휴일 - 평일 - 휴일의 마지막(과 시작)이기 때문이다”6)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月의 주기는 초승으로부터 시작하여 - 만월滿月(혹은 월의 전환) - 초승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해 바뀜은 추수가 끝난 후의 가을이고, 즉 해가 기운이 쇠퇴하는 시기였다.7) 한 인간의 일생은 - 창세기 3:19절에 의한 삶의 한 주기 - 흙에서 생겨나서  - 살다가 -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욥기는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 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죽음’ ‘돌아가셨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다분히 히브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의 ‘주기적 시간관’에 의하면, 작은 주기가 차면, 보다 큰 주기로 넘어간다. 예컨대 4주가 되면,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12번 반복하면, 1년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그 단위를 7로 보았다. 그래서 7의 주기는 안식년과 희년의 주기가 되었다.8) 그러나 어떠한 주기든 그 마지막은 ‘안식’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희년이다.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는 밭의 소출을 먹으리라. 이 희년에는 너희가 각기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갈지라.”(레 25:10-13) 한 마디로 말하면, ‘희년’에는 모든 것이 원위치로 되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7 x 7  = 49년 그리고 그 다음 해는 ‘희년’으로서 새로운 주기의 시작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희년’에는 노예도 해방되고, 땅과 해방되고, 모든 것이 억눌리고 억압되었던 상태에서 자유를 얻는 해이다. 이 희년의 해가 바로 모든 주기가 끝나고 새로운 커다란 주기가 시작하는 해이다. 그 해는 바로 ‘참 안식의 해’이다.

이런 점에서 창조역사의 거대한 주기가 ‘제7일 안식일’로 끝난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 창세기의 역사관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 계시록이 세상의 종말을 옛 것이 지나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요한 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1,4-7) 옛 하늘과 땅이 없어지고, 이전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새 생명이 주어지는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III. 인간(영-육)과 생명있는 모든 피조물의 안식처로서의 ‘하나님의 나라’

신명기 기자는 안식일 계명 준수 이유를 출애굽기 기자와 다르게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야 하는 이유를 출애굽이라는 구원 역사에 두고 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신 안식일을 지키라”(신 5:15) 여기서 우리는 안식일 계명이 이스라엘 구원 역사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겪었던 어려움과 고난을 생각하여 네 집에 거하는 종들에 대하여도 너처럼 ‘안식’, 곧 ‘쉼을 주라’는 복음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구약의 여러 곳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에서의 종살이를 기억하여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어려운 사람을 돌보라는 명령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니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출 22:21-23, 레 19:33-34)9)

이와 같이 안식일 계명을 먼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 동일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촉구하는 말씀으로 이해한다면, 분명히 안식일은 병들고, 약하고, 나그네 된 자들을 위한 날이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은 쉴 틈도 없이 일을 해야 하는 가축을 보호하기 위한 계명이기도 하다. 주인은 쉬면서, 종이나, 가축은 일을 해야 하는 노동착취는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출애굽기는 안식일 준수의 근거를 창조의 안식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10-12) 그래서 신명기 기자는 창조주 ‘하나님의 안식’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자이신 야훼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근거하여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이나,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신 것은 안식일을 바로 실현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10) 이러한 점에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마 12:8)이라고 증언하신 것은, 우리에게 안식일이 ‘누구의’ 날이며, ‘누구를’ 위한 날인가를 명백히 계시해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안식’이 누구를 위한 날인가는 “내가 진실로 네(= 십자가에 달린 강도)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즉 구원론적으로 보면, ‘안식’은 회개한 죄인들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쉬는 자’, 곧 ‘안식하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아니라, 남종과 여종을 비롯하여, 육축이나, 문안에 유(留)하는 객(客)이다.(출 20:10) 이러한 점에서 창조의 안식은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 있는 모든 피조물을 위한 안식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창조의 안식’이 주는 의미는 -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 제 일곱째 날의 역사적 사건 속에서 모든 피조물과 함께 상호공존(Koexistenz)하시는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11) 이러한 의미에서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는 결코 홀로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피조물과 항상 함께 계시기를 바라는 ‘임마누엘Immanuel’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창조의 안식은, 창조주 하나님, 인간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함께 평화의 안식을 누리는 날이다. 그리고 이 ‘안식’이 곧 모든 역사의 목적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기도에서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기도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의 안식’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가 종결된 것이 결코 아니다. ‘창조의 안식’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기 위한다는 ‘하나님 의지의 계시’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과 분리된 역사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항상 우리 인간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Immanuel)’의 역사이기 때문이다.(창 26:24; 28:15; 31:3; 출 3:12; 마 28:20 등) 이러한 창조 역사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언약을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 언약은 성령을 통하여 지금도 이 땅에서 실현되어가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선포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또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인간을 위한’ 날임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창조의 안식’에 근거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이 세상 역사의 종말은 바로 ‘창조의 안식’이 완성되는 날임을 알아야 한다.

 


1)  E. Haag, Art, תבשׁ, ThWAT, Bd.VII, Sp.1040-1046, 특히 1041.

2) Karl Barth도 시간은 자연과학인 그리고 심리학적인 것뿐만 아니라, 종교적 범주도 있다고 본다. 이점에 관하여: K. Barth, KD I/2, halbb, 50ff.

3) v. Orelli, Die hebräischen Synonyma der Zeit und Ewigkeit, geneisch und sprachvergleichend dargestellt, 32

4) Thorlief Bomann, Das hebräischen Denken im Vergleich mit dem griechischen, 허 혁 역, 『히브리적 思惟와 그리스적 思惟의 比較』 (왜관: 분도출판사, 1975), 159,

5) Ibid.

6) Ibid., 160.

7) Guthe, Bibelwörterbuch, 282.(허 혁 역, 『히브리적 思惟와 그리스적 思惟의 比較』, 160에서 재인용)

8) Guthe, Ibid., 282, 250.

9) 레 19:33-34 : “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 낳은 자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10) Samuel Bacchiocchi, The Sabbath in the NT, Michigan 2.ed. 1990(Biblical Perspective 5) - Samuel Bacchiocchi, Sabbatical Typologies in Messianic Remeption, JSJ 17(1986), 153-176 - Sven Olav Back, Jesus of Nazareth and the Sabbath Commandment, Abo 1995 - Eduard Lohse, Jesu Worte über den Sabbat: Walther Eltester(Hg.), Judentum, Urchristentum und Kirche, 1960 (BZNW 26), 79-89 - Willy Rordorf, Sabbat und Sonntag in der Alten Kirche 1972(TrChr 2) - Berndt Schaller, Jesus und der Sabbat, 1994(FDV 3)

11) K. Barth, KD III/1, 244.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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