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하는 삶
요4:20-24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령님이 오늘도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저는 오늘 예배하는 삶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예배의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되고 있습니다. 도처에서 생명력 있는 예배를 드리려고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전통과 역사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자유롭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들이 여기저기 눈에 띕니다.
예배음악만 현대적으로 바꾸면 된다고 생각하는 교회들도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르간을 기타와 드럼으로 대체하고, 가운을 입은 성가대 대신 찬양 가수들을 동원하고 전통적인 찬송가 대신 복음성가를 부르며, 엄숙한 태도를 벗어버리고 열광적으로 자유롭게 찬양하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의 수단과 형태만을 약간 바꾸는 것으로 예배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이루어졌다고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 즉 예배의 본질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배의 본질은 다음 두 가지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누구에게 예배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찬송가에 실려 있는 교독문에 보면 시편 말씀이 많이 발견됩니다. 시편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시편은 하나님께 대한 친밀한 정서를 담고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솔직하고 자유롭게, 놀라움과 경이감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기뻐합니다. 그리고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겸손히 자신을 내어 놓고 경배 드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을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 그분을 경배하는 성도의 삶을 깨닫게 됩니다. 시편에 따르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슬픈 모습을 하고 가만히 앉아 있지 않습니다. 오리려 능동적으로 소리 높여 찬양하고 머리 숙여 절하고, 무릎을 꿇으며, 때로는 하늘을 향하여 손을 높이 들고 춤추기도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는 생명력 있는 예배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성과 합리를 앞세운 예배를 넘어서서, 창조주이자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뵈옵는 기쁨이 흘러넘치는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왜 예배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문제는 앞서 언급한 첫 번째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유는 그 분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밖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배를 명하셨으며, 그분을 예배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예배를 계획하셨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은 성막을 지으라는 명령을 주시면서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처소를 만들라. 그곳에서 내가 너희를 만나고 너희에게 모든 일을 이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배제도를 친히 세우시고, 그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를 통해 그분 앞에 나아가고,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그분의 백성 가운데 거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목적인 것입니다.
예배의 틀 안에는 기도와 찬양과 봉헌과 말씀축복 등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와 열정적인 찬양과 정성어린 헌금을 받으시고 말씀을 통해 축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아무도 하나님만큼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는 없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다음에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기도할 때 먼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높이고, 그 다음에 우리의 현재 상황에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하는 기도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는 또한 찬양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현재의 고통과 기쁨과 희망을 토로하는 수단인 것입니다. 성경은 시편22:3절에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라는 표현은 원문의 의미로 직역하면 “찬송 위에 보좌를 정하고 앉아 계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분의 능력과 축복을 깨닫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과 능력을 체험한 성도는 기쁨으로 노래하며, 가진 것을 주님께 드리며, 다른 성도들과 함께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등, 여러 가지 외적인 반응으로 자신이 받은 은혜를 표현하게 됩니다.
얼마나 생명력 있는 예배를 드리느냐에 따라 우리의 외적 삶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은 예배를 드리는 내적 마음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지식도 많고, 영적인 깨달음이 아무리 많더라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는 마음이 없다면 성숙한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종처럼 겸손해야 하며,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주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예배는 바로 이와 같은 자세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찬양하는 능력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찬양과 더불어 인생의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찬양의 능력을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사도행전 16장을 보게 되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때는 사방이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그들이 찬양하자, 땅이 흔들리며 옥문이 다 열렸습니다. 간수가 그것을 보고 자결하려고 했을 때, 바울은 간수를 저지했고 결국에는 그를 구원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우리가 찬양할 때, 우리 주변에 놀라운 축복이 임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26편을 보면, 다윗은 찬양을 통해 인생의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갔습니다. 우리의 앞날은 불확실하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지만 찬양은 우리를 인도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을 향해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합니다.
욥기 38장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새벽별들이 그분을 찬양했다고 전합니다. 별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했던 것처럼 우리도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그분은 계속해서 창조적인 사역을 행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사역이 일어나기 원한다면 찬양해야 합니다. 영으로 노래하며 마음으로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찬양할 때, 다른 모든 일이 저절로 해결되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우리의 삶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여기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특히나 주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 누구보다도 예배의 중요성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요즘같이 바쁜 세상에 교회에서는 자꾸 예배만 강요하면 성도들이 싫어하니까 부흥하는데 지장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 때문에 예배에 관해 거론하는 것을 꺼려할 수도 있겠지만 교회 예배는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성경을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출애굽기 25:2,8,22절을 차례대로 읽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아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교인 출석률, 교회의 규모, 헌금 액수 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서로 만나는 것에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함께 모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예배 중에 찾아오시고, 말씀을 일러 명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한 시간에 함께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이대며 예배를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마음이 우러나지 않는데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어? 오늘은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걸 날이 이렇게 추운데 애들이랑 집에 있는 게 더 낫겠어.” 내지는 “예배가 아니라도 나는 교회에서 봉사 하는 게 많은데 다 같은 주의 일이니까 주님이 알아주시겠지?” “지난밤에 우리는 대판 싸움을 벌였지. 아직도 어젯밤의 감정이 삭지 않은 상태야. 이런 기분으로 교회에 나가 봤자 말씀이 내 귀에 들어오겠어? 그냥 집에 있는 게 낫지.” “이번 한 주간의 생활은 여러 가지로 잘못이 많았어. 이런 상태로 교회에 나간다면 하나님은 나를 위선자라고 하실 거야. 속은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말끔하게 차려 입고 교회에 나가 선한 척하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거야. 교회에 나가기 전에 나의 잘못을 먼저 깨끗하게 뉘우치는 일이 필요해. 오늘은 그냥 집에서 기도나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때론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무작정 하나님께 나와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 생활 속에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육신의 생각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순종하는 마음으로 몸과 마음을 정돈하고 주님 앞에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히10:25절 말씀에 보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배를 드릴 때 부패한 세상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을 대망하며 깨어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분의 판단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날”은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늘 재림하실 것이라는 마음으로 매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오늘 재림하신다 해도 결코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외관이 맘에 안 든다든지 또는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의 신앙이 형편없다느니 하며 교회와 예배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간혹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9장 12-13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자신이 죄인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주님 앞에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예수님께서 회당에 예배를 드리러 갔을 때 그 곳 사람들은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쫒아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낭떠러지에 밀어 뜨려 죽이려고까지 했었습니다. 주님은 당시 사람들이 적대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규례대로” 예배를 드리러 회당에 가셨습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나는 그리스도의 몸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교회는 살아 있는 주님의 몸입니다. 지체가 몸에 붙어 있지 않으면 말라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대한 책임을 이해하는 행위입니다. 교회는 서로를 섬기며, 서로를 격려하고 바르게 해 주는 장소입니다. 예배는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복종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예배 시간은 하나님을 뵈옵는 시간입니다. 다시 말해 예배는 주님의 제단 앞으로 나가는 시간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보면, 그가 여러 번 제단을 쌓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 자신 뿐 아니라 많은 민족들을 위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여러 번 제단을 쌓았고 그 때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쌓은 제단의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로 약속의 제단이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12:5-7말씀을 읽어보게 되면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방인들이 거하는 낯선 땅에서 주어졌습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의 경험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니만 그 목적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온갖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된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우리 앞에는 극복해야 할 온갖 역경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제단을 쌓음으로써 믿음으로 그 약속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확고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는다면 어떤 역경이 몰려온다고 해도 전혀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바울은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이라고 디모데후서 1:12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두 번째 제단을 쌓을 때는 어느 정도 삶에 안정을 찾고 믿음이 성숙해져 갈 무렵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위해 제단을 쌓았습니다. 창세기12:8절에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표현은 그가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에 대해 전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는 점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이 단순한 호칭을 넘어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잠18:10절에“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창조주이며 전능하신 능력을 지닌 분이심을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분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를 인격적으로 기꺼이 만나주시고, 친구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을 이루기까지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릅니다. 우리는 약속이 이루어져가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입으로만 하나님의 약속을 운운하는 형식적인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사랑과 은총으로 대해 주시는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형성된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 아브라함이 드린 제단은 서약의 제단이었습니다.
위대한 신앙을 가진 아브라함도 때로는 혼동에 빠져 좌절할 수밖에 없는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신앙의 위기로부터 다시금 제단을 통해 회복시키십니다. 창세기 13:3,4절에 보면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벧엘로 돌아오기 전에 아브라함은 애굽에 있었습니다. 그가 애굽에 갔던 이유는 기근을 피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았지만 그는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갔던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도피한 일은 당연한 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애굽 여행은 두려움과 연약함 때문이었습니다. 어쨌든 이번에도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도와 어려움에서 건져주셨다고 창세기12:10-20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애굽에서의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가나안 땅으로 다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돌아온 아브라함은 다시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는 자신을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다시는 약속의 땅을 떠나지 않겠다는 서약이었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으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다시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때로 이런 순간이 찾아옵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다시는 흔들리지 않겠다고 서약한다고 해서 시련과 어려움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일단 하나님 앞에서 다시는 흔들리지 않겠다는 서약을 할 경우에는 더 이상 인간의 생각대로 살지 않겠다는 확고한 신앙 자세가 확립될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 외에 다른 일을 하지 않게 되죠. 그래서 다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서약의 제단을 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네 번째는 소유의 제단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그 땅을 실제로 걸어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약속이 지니는 차원을 구체적으로 헤아려 보라는 지시였습니다. 창13:17-18절 말씀에 보면,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이는 일종의 소유의 제단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제단을 쌓음으로써 약속이 지니는 구체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약속을 믿는 것과 약속을 실제로 소유하는 것은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을 자신의 발로 밟아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 가능한 구체적인 약속임을 실제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과 비전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소중히 여기며 희망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비전은 때가 되면 구체적으로 성취되기 시작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대로 하나씩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될 때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그분의 약속을 다시금 새롭게 받아들이며, 그 약속이 온전히 성취되는 날까지 헌신을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 우리는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며 점차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오히려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는 기회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13:10절에 언급된 제단은 보통 다른 제단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새 언약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제단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이는 신약 시대의 성도가 제사장이나 율법 없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13:10-12절을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찬송가361장은 “주의 주실 화평”이라는 제목의 찬송가입니다. 이 찬송은 우리에게 주의 제단 앞에 모든 것을 바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 같이 불러 볼까요?
주의 주실 화평 믿음 얻기 위해 너는 정성껏 기도했나
주의 제단 앞에 모두 바치기 전 복을 받을 줄 생각마라
주의 밝은 빛에 항상 활동하며 선한 사업을 힘쓰겠나
자유 얻으려면 주의 뜻을 좇아 너의 모든 것 희생하라
주의 제단 앞에 모두 바친 후에 주와 온전히 사귀겠네
주가 주신 기쁨 또한 그의 사랑 어찌 말로 다 형용하랴
(후렴)
주의 제단에 산제사 드린 후에 주 네 맘을 주장하여
주의 뜻을 따라 그와 동행하면 영생 복락을 누리겠네
이 찬송가는 주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는 행위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심지어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언제나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그분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물질적인 축복을 관리하는 청지기 정신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관대한 마음으로 물질을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관대한 마음으로 물질을 드린 것에 대해 칭찬을 하면서 감사했습니다. 그는 또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마게도냐 교인들의 풍성한 연보를 상기시키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관대한 마음으로 물질을 드려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우리의 영과 혼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 까지 하며 우리의 생각과 마음까지도 감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로 감사해서 드리는지 아니면, 쓸데도 많은데 교회만 가면 바치라고 하니까 할 수 없이 드리는지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눅6: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안겨 주리라”는 표현은 앞치마에 가득 담아 준다는 의미입니다. 즉, “손으로는 다 받을 수 없으니 앞치마를 벌려라. 너희가 관대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이 너희의 벌린 앞치마에 다시 가득 부어주시리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보상을 바라고 바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가 물질을 바치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치는 자에게 축복하겠다는 원칙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높은 빌딩에서 뛰어 내리면 굳이 중력의 법칙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몸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법을 따르면 그 결과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면 그분이 다시 갚아주시겠지 하는 생각으로 물질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그분이 정하신 원리가 자연히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충실히 예배할 때, 그분의 풍성한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물질이나 공로를 내세워 살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우리는 성도들과 함께 정성껏 예배를 드려야 하며, 또한 충실한 청지기처럼 물질을 드려야 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성도가 마땅히 이행해야 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때 우리는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번에 진영례 전도사님이 성도의 양식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와 복음전파라고 했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하늘의 신령한 양식을 받아먹을 수 있고 그 양식을 가지고 굶주리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와서 왜 그리 예배가 많고 그 많은 예배를 다 참석해야 하냐고 묻거든 예배가 곧 양식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예배를 통해 우리의 찬송과 기도와 헌금을 받으시고 하늘의 생명양식을 내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만나를 먹고 양식을 삼았듯이 우리들도 예배를 통해 영의 양식을 공급받아 건강하게 살며 주님나라 위하여 힘차게 전진해 나가는 주님의 귀한 백성들이 다 되어지게 축복하여 주옵소서.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내주 교통 인도하심이 예배의 삶을 통해 매일 매일 승리하길 원하는 모든 영혼들의 머리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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