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빌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과 늘 함께 계시며 항상 도와주실 것입니다.
저는 오늘 빌립보서1:20-21절을 본문으로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성경에는 많은 세월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환경과 형편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 나왔는지에 관한 이야기들이 다양하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등장인물들의 인생이나 역사의 흐름이 진행되는 가운데 주관자는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의 인물을 굳이 크게 둘로 나눠본다면 하나님 중심으로 산 사람과 자기중심으로 산 사람으로 나눠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산 사람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하나님의 도구로써 쓰임을 받을 수 있었으나 자기중심으로 산 사람은 쓰임 받지 못하거나 혹은 버려진 사람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고 살았었는지 하나님을 우선시하지 않고 자기중심적으로 산 사람의 삶은 어떠했는지,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 안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고 살았던 사람은 누구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의 주인공은 사도바울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바울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굉장히 열심이 있는 적극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부터는 열심의 대상이 달라진 것입니다.
우리가 본분에서 읽었던 것처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이라면 죽어도 좋다고 할 정도로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율법은 죄로 심히 죄가 되는 역할을 하게 합니다. 죄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족쇄처럼 얽어매는, 그래서 또 다른 죄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외식인 것입니다. 겉으로는 말씀을 잘 지키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내면에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들을 서슴지 않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이 되면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고 했으므로 이웃의 누군가가 곤경에 빠졌어도 나 몰라라 한다든가 짐승이 구덩이에 빠졌는데도 건져주지 않는다는 등 또 마가복은7:10-11절에도 보면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라는 말씀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라 하셨을지라도 내가 하나님께 드리느라고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자기 합리화를 해 버리면 그만이라는 식이죠.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의도와 상관없이 자기의 의를 위해 율법을 지키는데 열심인 사람, 그것이 정당하다는 편에 섰던 사람이 바로 사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여러 개의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학식이 뛰어나고 논리 정연한 사람이었는데 율법에 대해서 얼마나 명확하게 설명을 하고 있는지 로마서7장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7장7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을 보게 되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는것 처럼 죄가 늘 자기 속에 살아 남아서 곤고한 사람이라고 고백했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법을 깨닫고 자유를 얻고 난 후부터는 8장 1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선포하면서 그 어떤 환난과 핍박도 다 복음을 위해서 감수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고후6장4-5절 말씀에 보면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4절에서 자천하였다는 것은 스스로를 추천했다, 자신을 천거했다는 뜻인데 5절에 열거된 바와 같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4절과 같이 하나님의 일군으로서의 삶을 우선적으로 산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실제로도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는지는 고후11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고후11장23-27절 말씀에 보면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그 어떤 고난 앞에서도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삶을 우선순위에 두었기에 신약의 반에 가까운 성경을 기록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소원은 십자가의 형벌을 피해가는 것이었습니다. 죽음 앞에 태연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이었기에 앞두고 있는 고난과 죽음의 잔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마26:39절에 보면 “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자신의 소원은 죽음의 잔이 지나가는 것이었으나 하나님의 뜻을 우선순위에 두었기에 아버지의 소원대로 하시라고 자신을 내어 놓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온 인류가 죄에서 구원받고 그 중에 우리도 천국 백성으로서의 영광을 얻어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 여호수아에 보면 여리고성을 정탐하러 간두 남자를 자기 집에 숨겨 준 라합이라는 여인이 나옵니다. 라합은 여러 사람이 하나님의 기적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듣고 모든 사람은 정신이 나갈 정도였다고 하였는데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자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입니다. 여호수아2:10-11절에 보게 되면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여리고 사람들이 간담이 서늘해져있을 때 라합은 위기를 기회로 삼고 용감하게 정탐군을 숨겨주며 그들과 흥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적을 물리치신 하나님이 여리고 성도 함락시키겠다고 하신다면 멸망할 것은 기정사실인데 “내가 너희를 살려 줬으니까 나와 내 가족도 살려다오”라며 전탐군과 약속하는 장면이 수2:12절 이하에 설명되어지고 있습니다.
여리고왕이 소식을 듣고 라합의 집에 사람을 보내서 정탐군을 내 놓으라고 할 정도의 긴박한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만이 자신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편에 바짝 붙어서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40년 전 12명의 정탐군이 똑같이 가나안을 정탐했을 때 10명은 두려워하여 악평을 쏟아 놓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재앙을 받아 죽음을 당케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손들 조차도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며 고생, 고생하다가 다 죽고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기적을 전해들은 가나안의 여리고 사람들 역시 겁을 잔뜩 집어 먹더니 여리고 성이 무너짐과 동시에 몰살당하게 됩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따른다고 하는 말씀처럼 두려워하던 자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빨리 인정하고 눈에 보이는 두려움과 공포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우선시 했기에 자신과 가족을 구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우선시 하지 않았던 자기중심적인 사람 중에는 누가 있을 까요? ㅇ아담의 아내인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뱀이 와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머거게끔 유혹했을 때 하나님의 뜻을 비슷하게라도 전했다는 것은 알고는 있었다는 것이죠 다만 욕심의 눈으로 바라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탐스럽기도 한 나무다 싶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온데 간데 없고 욕심에 이끌려 죄를 짓고 말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낙원이었던 에덴동산에서 쫒겨나고 여러 모양의 죗값을 치러야 했으며 온 인류에게까지도 원죄의 대물림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 시대에는 모두가 성령 충만 했고 핍절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던 때였습니다. 바나바라고 하는 사람이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그러자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그들의 소유를 팔았는데 사도들의 발 앞에 두기에 앞서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행5장3-4절에 보면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자신의 욕심보다도 하나님이 마음을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컸더라면 남의 것도 아닌 자기의 것을 가지고 참변을 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서라기보다 알면서도 욕심이 앞을 가려 상황을 합리화하면서 범죄를 져지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과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죠.
세 번째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삶이 생활이 있기 때문에 바쁘게 살기도 하고 피곤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하는 것보다 노는 게 더 힘들다고.” 모두가 이렇게 바쁘고 힘들게 살아가다 보면 일상에서 할 일이 배제되기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의 일들이 배제되기가 훨씬 쉽습니다. “내가 이렇게 바쁘고 힘들게 사는데 예배 참석하지 않았다고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겠어? 사람은 몰라줘도 하나님은 더 잘 아시겠지.”라며 스스로를 위안하기 바쁘죠. 저는 누구보다도 몸이 피곤하다는 것에 예민한 사람입니다. 어렸을 적에 청년대학부 활동을 할 때는 주일 새벽부터 저녁예배 마칠 때까지 왠 종일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봉사하려면 토요일은 교회 다녀오는 것 외에 꼼짝도 하지 않고 쉬었어야 했을 정도니까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몸이 피곤하면 얼굴에 써 있죠. 엄마 피곤하냐고 아이들이 물어볼 정도로. 그러면 새벽예배는 하루 일과에서 배제되는 거죠. 언제가는 예배를 드리고 주의 일을 마친 나머지 시간에 쉬자 라고 마음을 먹고 나니까 예배드리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신명기에 보면 재물 얻는 능을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자연세계 뿐만 아니라 물질세계의 주인도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물질을 공급하신 하나님보다도 손에 쥔 물질이 더 귀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할 감사의 고백보다도 어디다 먼저 쓸까? 가 더 빠른 속도로 머릿속에서 계산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딘가가 조금이라도 이상이 오면 중병이 아니가 하고 의심하게 되고 악화되ㅣ면 어쩌지?하면서 곧장 병원으로 달려갑니다. 얼마전에 제가 무릎이 아픈 적이 있었습니다. 앉는 자세가 바르지 않다 보니까 일시적으로 생긴 통증인데도 혹시 관절염?이러면서 약국에 가서 이런 증상에는 트라스트가 좋습니까? 케토톱이 좋습니까? 라가ㅗ 물어서 트라스트를 샀습니다. 붙여봐도 소용이 없더군요. 어느날 목사님이 네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기도는 해봤어? “아니요. 아직 안 해봤는데요.”라고 대답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었습니다. 그 이후로 생각날 때마다 “예수 피, 예수 피”하면서 손으로 만져주면서 기도를 했었는데 언제 나은지도 모르게 나았더라구요.
우리가 하나님을 몰라서라기 보다 눈에 보이는 육의 세계에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살다 보니까 하나님께서 삶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설사 몰라서 그랬다고 한다면 과거는 다 십자가에 내려 놓고 이제라도 우리가 자신의 욕심 또는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때문에 하나님을 밀쳐버리지 말고 범사에서 하나님을 앞세워서 사랑도 받고 쓰임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향하여 사람들이 돌을 던지려 할 때 예수님은 짧고도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8:7절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차피 죄인이니까 죄짓는 건 당연해. 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한다면 양심의 가책조차 못 느끼는 사람이겠죠.
죄가 우리를 발목 잡지 못하도록 나의 우선권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우리가 되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 가운데 평강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욕심에 끌려 또는 자기중심적인 삶이 더 앞서 주님을 소외시키고 실망시킬 때가 많습니다. 아이들과 같이 순수하지도 못하고 이해 타산적으로 계산하고 자로 잴 때도 많습니다. 영혼이 잘 되야 법사가 잘 되고 강건해지는게 순서인데 건강해지면, 돈이 많아지면, 더 큰 일을 해드릴 것처럼 기도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영혼이 잘 되려면 하나님이 우선이 되어야 함을 알았사오니 이제는 육신에 지지 않고 욕심에 지지 않고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먼저 인정하는 우리의 삶이 될 수 있게 성령님, 역사하시고 도와주옵소서 연약한 육체를 치료하여 주시고 날마다 예수님의 피로 수혈해 주셔서 건강한 세포가 늘어나고 정신은 맑아지며 늘 온 몸에 엔돌핀이 넘쳐나서 기쁨과 긍정의 영향을 미치는 그리스도의 사라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내주 교통하심이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모든 영혼들의 머리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은혜 설교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예배와 하나님과의 만남-25 (0) | 2013.06.04 |
|---|---|
| [스크랩] 열매맺는 신앙 (2012.11.18) (0) | 2013.06.04 |
| [스크랩] 예배하는 삶 (0) | 2013.06.04 |
| [스크랩] 예배하는 삶 Ⅱ (0) | 2013.06.04 |
| [스크랩] 다시 시작하자 (0) | 2013.0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