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기록의 목적과 성경의 논리적 틀은 성도가 갖게 되는 신앙의 기본성격을 가늠하는 중요한 요소다. 우리가 지금까지 통상적으로 아는 것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구약의 약속대로 오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적 사건이므로 확고부동하며 성도는 이를 믿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 주장은 개신교에서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견지해 온 것으로 성경의 부분적 내용과 합치하기도 하여 문제점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 내용을 좀 더 들여다보면 매우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은 무조건적으로 믿어야 그 의미를 알게 된다는 주장의 역사적 족보는 멀리 어거스틴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어거스틴이 '알기 위하여 믿는다(Credo ut intelligam)' 라는 명제를 말한 이후 이것은 중세 스콜라신학의 아버지 격인 안셈에게로 계승되고 이것이 중세 신학이 규정하는 신앙의 성격을 대변하게 되었으며, 믿을 만한 근거에 의하여 깨닫고 믿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권위에 의해 주입되는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정당한 기독교신앙인 것으로 암묵적(implicit faith)으로 정착되었다. 이는 기독교신앙의 철저한 왜곡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하나님을 알아가는 인식의 우선적 권한 혹은 통로가 믿음이라는 것이며 따라서 믿고 나면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믿음을 앞세우기 때문에 아주 그럴듯한 주장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여기에 철저히 반성경적인 성격을 함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이 강조하는 믿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것을 확인해보면 그것의 오류가 드러난다.
전통신학에서는 믿음을 계시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통로 혹은 도구로 주장하지만 그것에 대해 성경은 지지하지 않는다. 그 주장이 오류임을 밝히고자 하는 질문은 이렇게 제시된다. 도대체 성경계시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우리에게 참된 믿음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이다.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진리의 말씀을 모르고도 믿음이 성립된다는 결과가 된다.
성경은 결코 믿음을 계시를 통한 하나님 지식보다 앞세우지 않는다. 믿음을 인식의 선행조건으로 간주하게 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인간 편에서의 의지적 결단으로서의 성격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때의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로서 지식 이전에 주어진 것이라고 변명한다면 그것은 믿음의 내용이 없는 단지 진리 인식의 조건이라는 것이 되고 만다. 성경은 어디에도 믿음의 내용이 없는, 다시 말해 맹목적인 믿음을 가르치는 곳이 없다. 성경은 믿음을 진리 인식의 선행조건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인식의 결과로써 주어지는 것으로 설명한다. 성경적 믿음은 그 믿음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도무지 성경은 믿음의 내용을 담고 있지 않는 순수 형식적 믿음을 말하는 곳이 없다. 성경에서의 믿음은 언제나 언약을 근거로 하며 하나님 아는 지식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런 그릇된 신앙의 성격은 16세기 개혁신학자에 있어서도 엄격하고 근원적으로 비판 검토되지 아니한 채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암흑기에 하나님의 사명을 좆아 대단한 진리를 캐낸 것으로 평가되는 칼빈이 남다른 안목을 갖고 있었다. 즉 칼빈은 중세의 맹목적 신앙을 의식하였지만,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성경적 신앙의 성격을 성경의 구조적 논리를 통해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못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3권에서 기독교적 믿음이란 인식에 근거하지 맹목적인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혔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며 그 신앙이 성령의 인침으로 된 것이라고 정확히 말했다. 단지 성령의 인침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지 밝히지는 못했다. 우리가 평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굳게 말씀을 신뢰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신앙의 개념에 인간의 의지적 요소를 인정했다. 따라서 이러한 칼빈의 신앙의 개념은 카톨릭의 그릇된 신앙의 개념보다는 훨씬 진일보된 설명이지만 온전한 설명이라고 볼 수 없다. 이는 믿음 안에 인간 편에서의 의지적 요소를 어느 정도 인정해 준 결과를 낳으며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순수한 선물로서의 믿음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러한 신앙 혹은 믿음에 대한 전통적 설명 방식은 결국 신앙과 이성의 상호 모순되고 분리된 것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낳았고 결국 후대 자유주의신학자들이나 철학자들에게 기독교가 맹목성과 유아성을 지닌 것으로 비판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즉 기독교란 진리의 일관된 객관적인 체계에 기초를 두는 종교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불안과 공포로부터 도피하려는 인간의 단순하고 맹목적인 그리고 주관적인 믿음에 기초를 두는 저급한 종교로 인식되고 비판되어 왔다. 특히 자유주의신학의 태동은 전통신학의 맹목적 믿음을 비판하면서 체계를 중시하는 이성을 인식의 원리로 삼는 또 다른 극단으로 차달아 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주의신학은 전통신학의 모순과 문제 속에서 잉태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자유주의신학의 발전된 형태라고 볼 수 있는 20세기 볼트만 신학의 뿌리는 종교개혁 전통의 그릇된 믿음의 이해에 근거한다. 볼트만은 그리스도사건의 역사성에 대해 회의한 끝에 역사성은 확증될 수 없으며 그것은 당대의 신화적 사유의 반영으로 간주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사건은 신화에 불과하지만 그것의 신앙적 의미는 확보할 수 있다는 실존철학적 논리를 전개했다. 이때의 신앙이란 역사적 사건을 믿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절벽 속을 뛰어드는 것과 같은 결단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런 의미의 신앙의 개념은 종교개혁 전통에서 계승되고 있다고 볼트만은 말하고 있는 셈이다. 즉 볼트만은 자기주장의 정당성이 종교개혁의 전통 속에 있다고 하는 묘한 논리를 개진한 것이다. 전통신학의 약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볼트만은 전통신학에 대해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사건의 역사성에 대한 확증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느냐고 몰아붙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신학이 갖고 있는 의지적 결단으로서의 신앙의 개념을 확대 수용하면서 자기주장을 전개한 것이다.
이런 신출귀몰한 볼트만의 논리에 앞서 전통신학은 지금까지 성경적 논리를 가지고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즉 그리스도 사건의 역사성에 대해 뚜렷한 성경적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무조건적으로 믿어야 된다고 하는 주장을 반복하기만 했으며 볼트만의 결단으로서의 신앙의 개념에 대해서는 그저 긍정적 지지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 의해 구라파와 미국의 신학에서는 전통신학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고 철학에 기초하는 현대신학이 판을 치게 되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성격, 신앙의 발생 근거와 형성과정은 어떠한가 ? 성경신학에 의하면 신앙이란 하나님을 인식하는 선행조건이 아니다. 오히려 신앙은 진리 인식의 결과로 주어진다.
그러면 진리 인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 진리 인식의 주관자는 인간이 아니라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전통신학이 말하는 것처럼 믿음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이성을 중생시킴으로 성령이 기록해 놓으신 성경을 깨닫게 하신다. 성경을 통해 신실하신 하나님을 깨닫게 될 때 참된 믿음이 생겨나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진리를 들음, 그리고 그로 말미암는 깨달음에서 생겨나는 선물이지(로마서 10장17절) 그것은 결코 진리를 듣기 이전에 인간에게 장치되어 있는 인식의 틀이거나 혹은 인간의 의지적인 결단의 형식이 아니다. 신지식을 갖는 것은 성령의 주관에 달려 있으며 타락한 이성을 중생케 하여 말씀을 이해하게 하신다. 그런 과정을 거쳐 믿음에 이르게 된다.
이 주장이 정당하다면 우리는 여기서 성령께서 성경의 어떤 논리를 구체적으로 깨닫게 하셔서 믿음을 가지게 하시는가를 밝힐 필요가 있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이며 객관적인 확인 작업이 없이는 우리의 주장, 즉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 믿음을 갖게 하신다는 것이 신비주의적인 주장으로 오해,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 실제 과거 교회사에서나 오늘날 교회에서 이런 예는 얼마든지 확인된다. 즉 객관적인 성경의 논리가 아닌 인간의 주관적 신념을 미리 정해놓고 그것을 성령께서 주신 신앙이라고 간주해 버린다.
이렇게 되면 성령을 빙자하여 인간의 주관적 신념을 강화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게 된다. 우리는 누가 성령을 받았는지 외관상으로는 확인할 도리가 없다. 외관상으로 판단하고자할 때는 사단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나타나기 때문에(고린도후서 11장14절) 오히려 더욱 기만당하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누구의 주장이라도 그것이 성경의 내용과 합치하는 지를 검증해 보아야 한다.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이 말하는 믿음이 발생하는 성경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성경은 언약과 성취의 논리이다. 여기서 언약과 성취의 논리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밝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전통신학에서도 성경은 언약의 말씀임을 언급하고는 있다. 때로는 그것의 성취를 언급하기도 한다. 심지어 언약과 성취는 자유주의신학자의 주장 속에서도 언급된다. 그러나 그 말을 사용하는 의미와 의도는 모두 다르다.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에서는 전통신학에서 처럼 언약을 근본적으로 인간 구속을 위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에서의 언약은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말하기 위한 계시 방법이다. 즉 전능자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분이심을 드러내기 위해 언약하고 성취하신다. 구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예표적 인물인 다윗을 왕으로 하는 유다 나라를 통해 이루셨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실체적으로 이루셨다. 이처럼 성경은 언약의 성취사건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성경의 내용과 성도가 가지는 신앙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 이것이 문제이다.
전통신학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구약에서 약속하신 대로 예수를 보내 주었으므로 그것을 성도가 믿어야 구원이 있다고 가르친다. 이런 주장에 의하면 인간이 타락함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보낼 것을 약속하시며 신실되게 이루심은 하나님의 하실 일이지만 그것을 믿는 일은 인간의 의지와 결단에 달려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런 구속사적 논리를 따르는 전통 교회 설교의 대종은 예수를 믿으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의 논리는 이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우선 전통신학과는 언약의미와 목적이 다르다. 지금까지 많이 강조해 온 대로 언약은 인간의 구속이 일차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호와이심. 즉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인간의 구원은 그에 따른 결과로 이루어진다. 둘째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이루어진 구속은 성도 자신의 의지적 결단을 통해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의 언약대로 오신 예수는 다시 승천 직전에 성령을 보내실 것을 언약하신다(사도행전 1장). 그 때의 성령은 요한복음이 증거 하는 대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는 진리의 영(요한복음16장13절)이셔서 그가 하시는 일은 당신이 기록해 놓으신 당신이 기록해 놓으신 성경 진리를 깨닫게 하신다. 이렇게 진리를 듣고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이 믿음을 갖게 하신다.
구약의 약속대로 역사상 그리스도가 오셨고 또한 예수의 약속대로 성령이 오셔서 지금 우리로 하여금 중생한 이성의 작용을 통해 성경을 알게 하고 믿게 하신다. 믿음은 성령께서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사역의 결과이며 이것 역시 약속된 선물이다. 이것은 인간 편에서의 결단의 산물이 아니다. 남편의 신실한 행동이 아내로 하여금 남편을 믿게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의 성취가 성도로 하여금 믿게 만든다.
이런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의 논리를 따르면 설교가 전통신학에서처럼 믿으라고 촉구하고 강요하는 성격을 띠지 않는다. 오히려 설교의 핵심은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신실되게 이루시는 여호와 이심을 신구약 성경을 통해 구조적을 확증해 준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설교가 그러하다. 언약대로 신실되게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가 확인이 되면 믿음은 생겨나게 된다. 믿으라고 윽박지르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있는 확실한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설교의 본령이다. 믿으라고 백번 강조하는 것보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성경을 통해 한번 증거 하는 것이 확실한 믿음을 갖게 한다.
성경이 말하는 선물로서의 믿음이란 믿음의 대상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믿는 자 편에서 스스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선물이 받는 자 쪽에서 생겨날 수 있겠는가 ? 선물이란 주는 편에서 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 알고 보면 너무도 명백하고 단순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인간 편에서의 주체적 결단으로 이해하는 가르침은 반성경적이다. 이것이 변화고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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