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으로서의 신학 <교의학>
유 해 무(고신대학원) 교수
제 1 강
조직신학, 교의 신학은 파수군의 위치에 있다. 이것은 평화의 시절의 역할이 아니고 전시에 담당하는 역할이다.
문제가 없는 곳, 문제를 폭로하고 해결하는 역할이다.
교의학은 정면에 나타나서 안된다. 조직신학을 설교해서는 안된다.
한 교단에 조직신학이 강한 것은 그 교단에 교리적인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조직신학 체계가 필요하였고 그 결과 조직신학이 강해진 것이다.
* 공교회-
한국교회는 수동적이었고, 받는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늘 이 시점에서 목회와 신학을 자립해야 한다. 즉 한국화 토착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한국의 신학이 다음세대와 세계 교회에 줄 수 있는 한국의 것이 있어야 한다.
어거스틴이 살았던 북아프리카에 교회가 없다. 이것이 말하는 바는 신학이 교회를 강하게 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으로 교회는 없으나 신학이라도 남아 있음이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샤르트르는 하이데크에 영향을 받아 실존철학, 허무주의와 무신론 의식을 가진 사람이나 인간을 적자존재 - 반성능력이 없는 존재 와, 대자 존재 즉 의식적 존재로 자기를 반성할 수 있는 존재로 보고 인간은 의식적인 이중적 존재로 그 삶이 또 다른 나의 삶이 가능한 존재,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면서 동시에 자기 존재 형성하는 여유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한국의 목회자가 이런 의미에서 여유가 있어야 한다.
번역 일변도의 신학은 무의미하고, 위험하다. 일면 참조 가능하나 송두리채 받아서는 안된다. 이것은 거지 근성이다.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가 별종의 기독교요 아류의 기독교로 서 있는 현실이다. 즉 족뵤에 없는 기독교의 모습이다.
세계 기독교는 한국의 기독교에 무엇이 있는지? 한국 선교의 현장에 일어나는 분열의 형상을 보면서 조롱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의 자립이 시급하다.
이는 고대, 중세, 근대의 조류를 반영하되 20C 한국의 터전에 지극히 한국적이고 토착적인 신학을 정립해야 할 때가 되었다.
* 신학은 목회에 앞서는 것이 아니다.
목회가 융성한 가운데 신학이 체계화 되어야 한다.
신학자가 목회자를 이끄는 것이 아니다.
교단이 신학자에게 많은 기대를 해서는 안된다.
교회의 활동 주체는 목회자다.
* 교의학의 자립, - 이것은 필요한 것이고 동시에 위험하기도 하다.
애찬이 고대 교회, 초대 교회에서 시행된 것이다. 이것이 한국인의 심성에 조화되는 것으로 공교회적 전통으로 계승할 가치가 있고, 토착화할 필요가 있다.
새벽기도 신학은 본회퍼가 이미 정확히 제시하고 있다.
공교회의 전통을 순수하게 받아들인 바탕이 없이는 토착화는 불가능하다.
한국교회의 전형적인 토착화의 시도는 조용기 목사였다.
그러나 타협한 것이 있으니,- 기독교가 이교화 되게 할 위험이 있는 것으로, 이는 말씀에 기초한 심성을 만들어 가는데 실패의 요인이었다.
* 한국교회의 위기는 설교의 위기요, 성례의 위기다.
이 측면에 한국교회는 아류의 기독교로 머물러 있다.
설교와 성례를 집행하는 목사가 변해야 한다.
칼빈은 성찬을 잔치(눅14:)로 표현하여 계시록의 어린양의 혼인잔치로 연결하였다.
말씀, 성례를 포기하고 잔치성을 띠게 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이교화의 위험이 있다.
목사의 One Man Show가 아니라 전회중의 참여가 있어야 한다.
현실의 한국교회에 그런 예배에로의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특히 부산 경남은 한국의 무저갱과 같다. 월간조선의 통계의 의하면 불교의 60%를 경남 지역에서 먹여 살린다고 한다.
이 지역에 터를 잡고 있는 고신에 개혁이 얼마나 될지 미지이다.
그러나 목표는 분명히 세워야 한다.
* 예배 공동체로서의 교회
예배가 이루어지는 그곳이 곧 교회다. 예배 드리는 곳은 교회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부름에 모였을 때 이들을 백성이라 하지 않고 ‘총회’(להק)이라 했다.
이들이 흩어지면 ‘백성’으로 불렀다.
우리는 어디 있든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그러나 예배를 위해 모였을 때 이는 교회요, 거기 모인 무리가 교인이다.
예배의 교인들과 하나님이 사귐에 매개가 설교요, 성례다.
예배에는 말씀과 성례가 공존해야 한다.
미사라는 행위가 고래적인 전통이다.
우리의 예배가 회복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곧 말씀이 말씀으로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가 잔치로 시행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공교회를 체계화하기 위해서는 고대교회와 중세교회 그리고 개혁교회를 다 섭렵해야 된다.
* 왜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설교자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의식하고 생각함에 그 근거가 무엇인가?
목사가 말씀 선포자로서 권위를 잃어버림에 비판을 받고 있는 현실이다.
고대교회에는 감독이 없는 곳에 성례 시행을 중지시키기도 했다.
즉 목사의 권위는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목사라는 직책, 하나님을 대신하여 교인을 불러모았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에서 목사를 통해서 백성을 받으신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설교가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이다. - 말씀의 소명
*예배에의 부름이라는 것은 시편 송시로 변형된 것이다.
예배에서 설교자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계시해야 한다.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당신을 교인에게 계시하신다.
목사 개인의 자격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이 설교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기 때문이다. 그 자리, 그 시간 하나님이 계시하신다. 그러므로 설교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에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설교단은 자기를 소개하거나 시나 평론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단에서 쇼를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게 해야 한다.
교회는 우리가 모였기 때문에 교회가 아니고 거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더불어 사귀고 당신 자신을 소개하고 드러내시기에 교회가 된다.
그러므로 설교는 삼위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해야 한다.
설교의 주제가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아니다, 이들은 단지 도구일 뿐이다.
축도는 기도가 아니다. 예배로 부르신 그 계시자 하나님을 드러내고 목사의 입을 통해 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 성례 - 성찬을 보이는 말씀이다.
카톨릭이 중세에 와서 설교가 사라지면서 성례만 남았다. 이것은 바로 이교화된 것이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 - 그것은 땅, 아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신 복은 바로 요한복음 3:16, 독생자를 주심이다.
성례는 삼위 하나님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이었다.
예배가 있기 위해 말씀, 성례가 함께 있어야 한다.
말씀만 있어서는 예배라 하기 곤란하다.
기회 있을 때마다 성례(세례, 성찬)를 시행해야 한다.
칼빈이 매 주 시행하려 했을 때 시의회가 그것을 반대했다. 이는 그들이 가책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 주 시행되지 못했다.
성찬은 주님이 제정한 것으로 주님 자신을 주심이다. 그러므로 성찬은 기회 있을 때마다 시행되어야 한다.
성찬 시 그리스도의 죽으심만 강조되고 그 사실만 기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늘 동시에 강조되어서 잔치로 시행되어야 한다.
제 2 강
성경) 딤전 4:11-16
제목) 네 자신과 듣는자를 구원하라
하이데커는 “인간은 질문하는 존재다” 라고 했다.
사도들의 가르친 문헌인 디다케 9장에 마7:6을 근거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자만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 라고 가르친다.
칼빈은 성찬을 ①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 ②우리 믿음의 표현 ③그리도인의 교제라고 했다.
성찬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성찬식 1주일 전에 성찬 준비를 위한 설교를 할 필요가 있다.
요6장(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34절)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것, 피를 마시는 것이 엄중함을 일깨워야 한다.
잘못하면 목사가 성찬을 훼손할 수 있다.
딤후 1:12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지키실줄을 확신함이라”
딤후 1: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지키라”에서
동시에 나타난 지키다(παραθηκην)는 100% 하나님의 지키심과 100% 내가 지켜야 할 것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순수한 교리가 계승되어야 한다.
로마의 속담에 “빵이 해결된 후에는 서커스다” 라는 말이 있다.
고려파가 초기에는 부흥했다.
백영희 목사는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오두막에 들어가서 엎드려 말씀을 묵상하고 설교했다. 50-60년대 4000명이 회집하는 교회로 성장했고, 교인들에게 설교를 듣는 훈련을 시켰다.
그는 박윤선 목사의 제자였으나 한상동 목사에 의해 짤렸다.
이런 유능한 인재들, 김창인, 최훈, 최문호등과 같은 이들을 다 축출시켰다.
눅 17:10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 고백하는 정신이 필요하다.
성실한 목회사역이 있어야 한다.
말씀이 말씀을 풀어주는 신비로운 은혜를 체험하면 말하게 된다.
이것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은 머리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에 사로잡히고 말씀에 삼킨바 되어질 때 가능한 것이다.
렘 20: 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여기 나오는 권유는 호세아 2:14의 개유(התפ)와 같은 말로 설득한다. 꼬신다는 말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나를 권유하심으로, 내가 권유를 받았다고 했고, 하나님이 나를 이기심으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했다.
즉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이 말씀을 퍼부어셨고, 그의 말은 지어낸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렘20: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 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라고 했다.
설교자가 선포하는 것은 자신에게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퍼부어 주심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이 지핀 불이 있는 자는 입다물고 잠잠히 있을 수 없다.
말 2 : 7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
대제사장은 ①지식을 지켜야 하고,
②사람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하며
③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되어야 한다.
말씀은 머리로 깨닫는 것이 아니고 기도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기도해야 한다.
이는 먼저 자신을 구하기 위함이고, 그리고 난 후 남을 구하기 위해서다.
즉 설교를 말로 하기 전에 먼저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다.
*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신학을 학문화 한 것이 비극이다.
신학박사가 신앙이 좋은 것은 아니다.
신학은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당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이 신학이다.
그 말하는 것을 들으려면 기도로 들어야 한다.
기도는 택한 자 만이 누리는 행복이다. 기도를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신학이다.
고대 문헌에 “그대가 신학자라면 진정으로 기도할 것이요
그대가 진정으로 기도하였다면 그대는 신학자다.” 라고 했다.
칼빈주의를 아무리 말해도 영혼이 살아나지 않는다.
기도의 평안 - 기도 없이는 아무것도 안된다.
기도 없이 사역한다는 것이 죄다.
이론이 없어 발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없어서 실패한다.
기도하면 누구나 유능한 설교자가 될 수 있다.
목사가 기도 훈련이 되지 않아서 문제가 생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책을 쓰기 전에 1시간30분 기도했다.
초대 교회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전파에 전무하기 위해 봉사자를 세웠다.
이들은 말씀 전하기 위해 기도하자고 한 것이 아니라 기도와 말씀을 동일 선상에 두었다.
대상29:1-14에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가 나온다.
그는 전심을 다하여 금과 은과 목재와 여러 보물들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는 바로 그 목적, 곧 성전을 세울 일을 위해 준비했다.
지도자가 즐거이 드릴 때 백성들도 함께 힘 모아 드렸다.
여호와의 전을 사모함으로 드렸다.
다윗이 자신을 위해 헌신하니 백성들이 따랐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너와 듣는 자를 구원케 하라” 라고 권면 한다.
자신을 구원케 하는 경건이 성실히 시행되면 남에게 구원의 은총을 나누어줄 수 있다.
다윗이 자신을 위해 성실히 헌신한즉 남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대상29:9 -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함
10 - 여호와를 송축(חרב)함 - 하나님께 복을 줌
; 여기 이 송축은 기도와 구별되는 것으로 하나님께 복을 준다는 개념이 있음
우리의 신앙이 구약보다 발전되어야 한다.
유대인들은 6시간 예배했다. 동방 정교도 3시간 예배에 할예하며, 카톨릭의 미사도 1시간 30분 소요된다.
오늘날 신교의 예배는 세상 풍조에 편협하여 시간을 조정하고 말았다.
대상29:10-14은 송축의 내용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주십시오’가없다. ‘받으소서’, ‘주의 것이로소이다’. ‘찬양하나이다’. 라는 말로 채워져 있다.
목사가 송축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신론이고, 신학이다.
대상29:14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 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 이니이다.”
인간에게는 선한 것이 없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것도 없다. 드린 것이 다 주님의 것이다.
이런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설교강사로 받은 사례 - 불의의 재물 - 우연히 생긴 재물 ; 즉시 없애버린다. 남에게 줌
교수로 받은 사례 - 의로운 재물
우리의 삶은 실은 공짜다, 그러므로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산 제물로 받으시기 원하신다. - “나는 무익한 종,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라는 고백으로 살아야 한다.
제 2강 본 강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칼빈은 신학자인가? - 주석가, 목회자, 설교자, 신학자.
우리는 칼빈을 주로 신학자로만 생각한다.
칼빈은 말하기를 “신학자의 의무는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고 양심을 강화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고 했다.
칼빈의 스타일- 간단명료함이다. 칼빈의 언어는 정황 때문에 우리에게 어렵게 여려질 뿐 어렵지 않다. 번역에 문제가 있을 뿐이다.
칼빈은 신학이란 용어를 부정적인 측면에서 사용하였다.
비판자, 그릇된 자에게 대항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그는 ‘신학’ 대신 ‘교리’ 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가 말하는 ‘교리’는 성경말씀과 같은 의미였다.
왜 칼빈은 신학이라는 용어를 거부했나? → 중세 학자들이 신학으로 성경을 오히려 어둡게 했기 때문이다.
신학의 의무는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며, 설교하는 것이다.
신학교는 신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
* 헬라 교부들의 신학이해
신학을 학문으로 보지 않았다.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단지 근대 학문의 학문방법론을 도입했을 뿐이다.
학문으로써의 신학은 목회 현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신학의 의미는 개인의 신앙고백과 교회 현장과 연관하여야 한다.
‘신학’ Θεο - λογι 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 혹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해 들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 표현하는 것이 신학이다.
신학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없다. 만약 그러면 거짓 선지자다.
신학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이어야 한다.
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훈련이 안되어 있다. - 성경을 설교 준비하기 외에 읽고 듣는 훈련이 미비하다.
기도로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해야 한다.
신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그래서 그 말씀을 듣고 나도 말한다.” 바로 이것이다.
회의나 심방, 정치활동 등으로 바빠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니 엉뚱한 소리를 강단에서 하게 된다. 이것은 거짓 선지자다.
우리도 얼마든지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성경에는 ‘신학’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프라톤이 헬라의 신화(神話)에 대해 정리했는데, 이것은 순전히 반성의 차원에서였다.
그 내용인즉, 신화의 내용은 신화가 이루어지는 곳은 연극 무대였으며, 연극 배우들에 의해 신들이 연출되었고, 배우가 신에 대해 말하는 것의 각본은 헬라 시인들이 썼다.
연극 무대라는 현장에 신들에 대한 표현들이 시인들에 의해 쓰여진 각본에 의해 표현되었다. 플라톤은 이것을 신학이라고 했다.
즉 헬라 시인의 각본에 따라 배우가 무대에서 신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신화였다.
신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내용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 내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신학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 하나님이 주신 계시가 신학이다.
신에 대해 말하는 현장성은 도입했으나 그 내용을 거부한 것이 바로 신학이다.
신학은 현장의 사건이며, 그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계시는 지금도 계속된다.
오늘의 시각으로 어떤 사건을 표현할 때, 교통사고에 대해 신학의 입장은 “하나님이 지켜 주셨습니다.”이지만, 신화의 입장은 “운이 좋았습니다.”로 달리 표현된다.
계시가 오늘도 계속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성경에 갇히신 분은 아니는 뜻이다.
지금 여기에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고 일하신다. 그분으로부터 우리는 오늘도 받아야 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게 해야 한다.
플라톤이 평론가로써 그 연극을 보니 신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들이 하는 짓거리를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갈파했다.
이 신화를 정리 판단하는 기준이 이성(λογία)인데, λογία 가 곧 비평의 기준이라고 보았다.
현장과 감성으로 신화를 만들고, 이성으로 신화를 정리한 것이 자연신학이다.
이 자연은 헬라와 라틴 세계에서는 이 자연과 본성의 기준이 인간 이성으로 본다.
어거스틴의 신국론 6,8권에서 자연을 본성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λογία를 강조한 것이 신학이다.
신학이 추구하는 것은 그 형식과 현장은 도입하나 그 내용이 근본 다른 것이다.
플라톤이 연극무대에 처음에는 자주 갔으나 후에 비 신화 할 때엔 가지 않았다.
이런 배경 때문에 교회에서는 신학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신계통의 신 족보학과 신학이란 용어가 혼용되었기 때문에 거부했다.
유스틴은 “성경에서 성부와 그리스도 외에 어떤 다른 존재를 하나님이라 부르며 주님이라 부른다면 대답해 보시오.” 라고 했다.
“성부와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 부르다, 하나님이라 선언하다.” 라는 말에서 “신학 하다” 라는 말이 교회에 도입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이 신학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고 고백하는 것이 신학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고 선포하는 것이 신학이다.
고전8: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8: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 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 로 말미암았느니라.” 라고 했다.
신학은 이론이 아니라 삶이고 고백이다.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 것을 선포하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았다.
이것은 당시 기독교인에게는 생사의 문제이기도 했다.
모든 시편의 찬송이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를 신학하며(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선포함) 선포했다.
이것을 공적으로 선포하는데 320년(예수님 - 하나님)이라는 긴 세월이 소요되었다.
380년(성령님 - 하나님)
신학은 삼위 일체론이며 신학은 송영론이다.
찬송과 기도와 송영 - 이것이 신학이다.
신앙의 현장이 신학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라는 선언 하에 신학이 계속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신학하며 살아가야 한다.
본회퍼는 “하나님 인정하지 않는 신앙 속에 신학 할 수 없다.” 라고 했다.
그러므로 신학에는 학위를 없애야 한다. - 이것은 학위로 주어질 수 없는 것이다.
제 3 강
성경) 딤후 4:1-8
제목)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라
2절에 목사의 일로 (1) 말씀을 전파하라
(2) 말씀을 가르치라 - ① 경책하며
② 경계하며
③ 권하라 라고 했다.
3절 “귀가 가려워서” - 바른 번역 “자기 사욕을 좇을 스승을 찾아 귀를 가려줄 자를 찾고”
; 한국에 귀를 잘 가려주는 목회자가 많다. 이런 목회자들이 대형교 회를 맡아 있다.
4절 “허탄한 이야기” (myths: 신화)를 좇는다.
족보 이야기 - 신 계통학, 신 족보학을 가리킨다.
고려파는 잘 하는 부분이 있으나 자기 내실이 없다.
참 하나님의 신학을 가지고 있으나 편가르는데 체질화되어 있다.
조금 이상한 소리만 하면 가위질 해버리고 축출 해 버린다.
진리를 위해서는 전통을 사수하고 생명을 걸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문제에 가위를 남용함으로 교단이 크지 못했다.
목회 현장에 귀를 가려달라고 찾아오는 사람을 주의해야 한다.
동시에 권징을 시행하되 이것은 사람을 살리는 권징을 해야 한다. 짤라버리는 권징이 능사가 아니다.
7절 유언의 자세가 나온다.
임종을 앞둔 자만이 할 수 있는 노래다.
인간이 생시에 이런 이야기(노래)를 할 수 없다. 험
산 준령을 타고 올라가서 정상을 앞두고 저 아래 산 기슭에서 뒤 따라오는 후배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다.
이런 승전가는 아직 유보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종말론적 특성으로 이미 우리 위해 예비 되어 있는 것이다.
귀를 끍어주는 삯군이 되어서는 안된다. 동시에 골통분자가 되어서도 안된다.
바울과 같은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는 정상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3강 본강의
신학이 무엇인가? 이것은 학문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어원적으로 보아 ‘학’은 후기 현상일 뿐이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신학이다.
이것은 반성이다. 유일한 것이 아니라 파생적인 것이다.
국가의 철학가가 민중신화를 정리, 반성작업으로 신학이 나왔다.
여기에서의 신학은 이성이 매개였다.
교회에서는 신화, 신 계통학과 연관되는 개념이 있기에 도입하기를 꺼렸다.
“예수는 하나님이라고 말하다, 선포하다” 라는 말에서 신학이란 마을 도입했다.
신화는 - 인간들이 만든 이야기요, 허구며, 사변이다. 이것은 인간 속에 있는 애욕과 기만을 신들에게 투사하여 인간의 사악을 묘사하는 탈춤과 같은 것이다.
신학은 - 하나님에 대해 말함이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듣는 훈련이 목사에게 필요하다.
말씀을 말씀되게 하는 것이 신학의 토착화다.
바른 목사는 들은 바를 말하는 목사다. 그럴 때 교회가 살고 교인이 산다.
귀를 간지러 주는 교훈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 어거스틴의 주 활동 무대였던 북아프리카에 교회가 왜 사라졌나?
철저하게 순수한 것은 조만간에 멸망하고 만다.
금욕주의와 율법주의가 너무나 강한 것은 멋이 없다.
순수한 것, 이것을 인간이 지키려 하니 문제다.
목사를 위선자 되게 하는 경향이 있다.
나이가 들면 멋이 있어야 한다. 즉 완숙 단계에 들어야 한다.
그러나 고신 교단은 정통을 주장하고 이단과의 싸움을 선언하고 인간의 노력과 힘으로 순수를 지키려고 지나치게 치우치고 있다.
신학은 체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이성적이 작업이 아니다.
이것은 감성적이어야 한다.
말씀을 듣고, 들은 바를 전하고자 하는 자세, 이것은 근엄함이 아니고 뒤고 즐기고 감화하는 삶의 현장에서 바르게 시행되는 것이다.
설교만이 신학 행위가 아니고 삶 자체가 신학이어야 한다.
공자는 70이 되어서 지천명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지금 이것을 알았다.
신학은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진다. 학을 가지고 논해서는 안된다.
통례적인 신학은 논리로 신학 체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의 필요조건이나 충분조건은 아니다.
기도하고 봉사하며 말씀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신학 하는 사람들이다.
소크라테스를 위해 순교한 사람은 없다. 어떤 이론이나 학을 위해 생명 걸 필요는 없다.
신학 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어야 한다.
주자의 독서법은 물러 떠질 때까지 앉아서 읽는 것이다. 선비들이 그냥 앉아서 계속 깨달을 때까지 읽었다.
시편 1편의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여기 “주야로 묵상하며” 는 “주야로 낭송하며”로 번역해야 한다.
절간의 중들은 화두를 두고 생명을 걸고 읽고 있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 걸고 낭송하는 일이 없는 것이 문제다.
* “신학의 주제는 무엇이냐?” 이런 질문은 용납될 수 없다.
오히려 “신학의 주제는 누구시냐” 라고 해야 한다.
초대 교회에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다” - 이것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오늘 우리의 현장에서도 이것은 여전히 어려운 것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 이것은 말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삶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삶에서 나타나야 한다.
신학은 학이라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삶이기 때문에 어렵다.
기도하지 않고 귀 놓은 교인은 쓸모 없다. 고려파 교인들은 입은 살아있는데 손발이 죽어 있다.
제자 훈련의 한계가 왔다고들 한다. 이제 중보 기도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현재 기독고인들이 범하고 있는 윤리의 문제들, 이것은 그 이전에 신학의 문제다.
손봉호 교수가 소리를 높이는 것은 윤리 시행 이전에 목사들의 제대로 된 신학의 결여 때문이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는 것이 신학이다.
하나님의 존전에 갈수록 두렵고 떨림이 있다.
오늘날 경건이 없는 곳에는 종교가 없다. 경건의 모양만 가지고 있어서는 참된 종교가 아니다.
하나님은 시내산 정상에 계신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 계신다.
그러므로 신학은 경건과 경외함, 떨림이 있어야 한다.
기독교란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떨림, 경외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신 신학이란 이런 바른 입장을 떠나는 것이다.
중세에 개혁자들에 대해 카톨릭은 새 교리를 전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다. 원리의 교리를 전하는 것이다.
고대교회 교부들이 모세를 신학자로 했다. 물론 현대 편집 비평가들도 그를 신학자라 했다.
모세 오경을 조각 내어 보았다. 그리고 그 안목으로 오경을 신학의 교서로 보고 모세를 신학자로 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관점에서 오경을 조각 내어 보니 서로간에 의견의 불일치로 분쟁이 생겼다.
그래서 근래에 와서 오경을 있는 그대로 보자고 했다(김재순의 경우) 즉 조각 내었던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아들을 나는 것과 아버지를 아는 것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불가능한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 “예수님이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시니 예수님이 신학 하신다” 라고 했다.
서양 언어에 “신학 한다”라는 동사가 없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말씀하셨다.
선지자들이 오실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시니 신학 하신다.
구약은 신학 책이다. -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을 말하는 자가 신학 하는 사람이요 신학자다.
오리게네스는 - “성령님을 신학하지 아니하는 자는 세례를 파괴하는 것이다.”
“성령님을 하나님이라 하지 아니하는 자는 세례를 파괴하는 것이다.”
“찬양은 신학 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그리고,
“기도하는 자는 그냥 지껄이는 것이 아니라 신학 한다.” 라고 했다.
기도는 간구만이 아니다.
한국은 간구만이 기도라고 가르쳤다.
심리학적 자기 최면적인 기도를 하면 안된다. (예컨데 조용기 목사의 자전거를 구하는 기도)
시편은 절규조차도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권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 사도 요한은 신학자다.
테골로고스가 대문자가 나오면 요한의 이름이 없어도 사도 요한을 가리켰다.
아타나시스는 - “신화는 신학이라 칭할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했다.
신학이란 용어가 완전히 입양되었다. - 헬라 세계에서 나온 것이나 이제는 거기 있을 자리가 없다.
오직 기독교의 세계에만 서 있게 되었다. - 입양되어 토착화 된 것이다.
이처럼 이방 개염이 기독교에서 사용하게 될 때 루터는 “세례 받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교부들은 성부 성자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신학 하는 것이라 했다.
설교의 주제가 무엇이냐? 가 아니고 설교의 주제가 누구시냐? 가 되어야 한다.
설교의 소제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주제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
성경의 계시가 종결되었기에 다시 성경을 쓸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에 구금되어 있는 분이 아니다.
거기 기록된 소제에서처럼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길 진리 생명 되신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오시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있게 된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시다.
직분 때문에 안 떠나는 것이 아니다. 떠나기도 하신다.
시내산에 강림하심은 바아(אב) “오심”이다.
성령님의 강림하심도 역시 지속적인 강림이다.
성육신 사건은 한번이고, 단회적이다. 오순절 사건도 한번이고 단회적이다.
그러나 성령님의 오심은 반복적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선포하고 증거하는 이것이 신학인바 이것은 내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지속적으로 받아서 내는 것이다.
하나님이심을 듣고 계속 계시해 주심을 받아서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 마태복음 13장 씨뿌리는 비유에서 밭은 몇 종류인가? - 단지 두 종류의 밭이 있다.
① 옥토
② 옥토가 아닌 밭 - 여기 세 종류의 양상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야 한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3, 20장에서,
계시는 - 송두리채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들려주시는 것
조명은 - 한계가 있음, 이것은 우리의 이성을 비춰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단지 읽는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삼위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신다.” 고 칼빈은 말하므로 성경을 인격적으로 접근했다.
성경을 읽는 것과 기도하는 것이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읽되 기도하는 자세로 펴서 읽어야 한다.
하나님께 나가되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가야 한다.
아버지께 나갈 때 그 길은 내가 준비한 것이 아니다. 성부 하나님이 준비한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시기 위해 만들어 놓은 길이다.
내가 주님을 영접했는데 알고 보니 주님이 나를 영접하시고 그 길을 통해 늘 내게 와 계신다.
그러므로 기도의 구조가 신학의 구조가 되어야 한다.
기도는 간구의 도구가 아니라 교제의 도구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받아주심이 전제된다.
나를 지명하여 부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
기도는 오직 예수님으로만 가능하고, 그 기도 속에 하나님과 사귐이 가능한 것이다.
* 학문에는 연구의 대상이 있다.
그럼 신학의 주제, 대상은?
신학의 대상(object), 주제(subject)는 3인칭이다. - 여기서 신학의 구조는 기도의 구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리학은 그것, 사람이 아니고 사람의 인식과 심리다.
일반 학문에서는 연구 주체가 연구 대상을 지배하고, 아는 것만큼 그 대상을 지배한다.
그러나 신학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단순히 3인칭(he 혹은 it)으로 보면 안된다.
현대 학문은 주체가 대상을 지배하고 객관성을 위해 대상에 참여할 수 없고 인격적 교호가 불가능하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인정되지 않는다.
신학에서는 대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들어야 하고 그분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세상 학문 스타일대로 발전한 것이 서양 신학이다.
벌코프의 신학은 하나님을 시학 대상으로, 단지 3인칭으로 둔 것이 폐단이다.
신학의 구조는 기도의 구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3인칭인 대상으로가 아니라 2인칭(You)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3인칭으로 두고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바로 사신신학이다.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자는 2인칭으로 말해야 한다.
그런데 성경에 3인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그것은 2인칭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송영이다.
기도에서 3인칭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신학에서 3인칭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송영에서 3인칭이 비로소 있어야 한다. 이것은 바로 감사요,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는 방법이고 자세이기 때문이다.
송영에서 3인칭은 바로 감사와 찬양의 자세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최고봉은 송영이다.
하나님은 이미 오셨고, 동시에 기도 중에 오시는 분이시다.
신학이 기도의 구조가 되어야 하는 것은 곧 주신 것을 헤아리며 감사 송영하는 것이 신학이라는 것이다.
제 4 강
성경) 시 51:1-19
제목) 원죄의 교리에 관하여
루터가 신학을 시편 51편 3절에서 정의하였다.
루터의 영적 체험과 그 고난의 믿음이 우리에게 전수되지 않고 있는 것이 유감이다.
코람데오는 다윗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모습니다.
“정직” 이라는 윤리적인 자세가 아니다.
다윗은 자기 변호에서 칭의를 언급한다. - 그는 왜 내 모친이 죄 중에 잉태했다고 했나?
이것은 스스로의 의가 없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의롭게 해주시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코람데오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한 인간이 죄를 인해 스스로의 의가 없음을 인해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고 인생을 구하시는 그리스도를 보는 자세다.
이 시는 다윗이 밧세바와 더불어 부정을 저지른 이후 죄를 깨닫고 참회하며 지은 시다.
삼하11:4 “다윗이 사자를 보내어 저를 자기에게로 데려 오게 하고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이 본문은 번역의 순서가 원문과 다르다.
원문에는 “여자가 오매 더불어 동침하고, 부정함을 깨끗케 한 후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이다.
한글 번역에서는 밧세바를 단순한 희생자로 보게 된다.
그 여인이 피동적으로 당하고 억지로 죄에 빠진 것 같이 보여진다.
그러나 원문의 의미를 잘 보면 다윗만이 죄인이 아니라 밧세바도 역시 죄인임이 드러난다.
‘속박된 의지’ 곧 자유롭지 못하므로 마지못해 지은 죄가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의지로 죄를 범한 것이다.
밧세바는 정당방위요, 최고 권력에 저항하지 못한 채 마지못한 범죄에의 동참이라고 변호해 줄 수는 있으나, 신학자와 목사는 그것을 죄라고 말해야 한다.
여기서 밧세바를 죄인으로 지목하는 것, 신학자, 목사, 곧 영감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스스로의 죄를 인식하고 폭로하고 고백하고 구속의 은혜와 영생의 복락을 삶 속에 체험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자기 칭의의 죄인들이 모여있는 모임이 되어서는 안된다.
시편 51편 기자는 죄의 고백, 사죄의 기쁨 - 이것이 있을 때 진정 정직이 있고, 신앙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 학생들이 시험을 치는 것, - 이것은 곧 선생(교수)에 대한 평가다.
교인들의 신앙 수준 - 이것은 곧 목회자의 수준이며, 그에 대한 평가 기준이다.
Pector라는 독일 신학자는 가슴의 신학, 눈물의 신학을 이야기하면서 교부들의 말을 인용하여 요한은 가슴의 신학자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슴에 기대고 있는 모습을 상기시키며)
시므온(949-1022년)의 성령세례 논쟁 이야기(교제25p) - 그는 신유와 투사와 방언 등 다양한 은사를 받았으나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맹인이 되었는데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것으로 감격한다.” 고 했다.
그는 성령세례의 표적으로 ‘눈물’을 들었다.
* 감동을 주는 설교에 관하여
설교작성을 금요일까지는 완성하고, 열 번 정도 묵상하며 읽고 강단에 설 때는 원고 없이 서야 한다.
에피클레시스(έπικλεσις: 성찬에 임하도록 간구함)←에피칼레오(έπικαλεω: 부르다, 청하다)
그 응답으로 파라클레토스(παραπλητος: 보혜사)가 성찬 말씀에 나타나신다.
설교 준비를 위한 말씀 듣기에만 맞추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삶을 살아야 한다. 준비를 위해 모든 것이 동원되되 내가 학습한 것이나 내 실력 만으로가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 설교자는 설교 노트를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주석도 정확하게 해야 하며, 한 설교에 대해서는 판권 소유가 나의 것이 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뜸을 충분히 들여야 한다. 즉 숙성시켜서 원고에 얽매이지 말고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눈과 눈, 얼굴로 교통하면서, 성령의 역사가 그 현장에 일어나도록 전해야 한다.
숙성된 설교를 하면 설교의 흐름이 때로는 바뀌는 경우도 있다.
중요한 것은 금요일까지는 설교 원고준비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이미 주일 저녁이나 월요일 새벽에는 다음 주일 설교 분문이 결정이 되어야 한다. (실상은 2-3주 전에 결정되어 있으면 더욱 좋다. - 그 주제에 대해 충분히 묵상하고 준비하며 자료를 모으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 본문에 관련된 성경을 두루 섭렵해야 한다.
성경의 저작권이 하나님에게 있은 즉 , 지금 내가 말씀을 제한하지 안도록 해야 한다.
설교단에서는 유창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자기 개발이 필요하다. 배워야 하고, 필요하다면 웅변도 연습하고, 전달법에 대해 충분한 연습과 훈련의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설교자가 말씀에 관해서는 권위를 가져야 한다.
* 화란의 박사학위 과정 - 교수들의 질의에 대해 1시간 방어해야 하는 과정이 있다. 2달 전 교수들이 논문을 읽고 헛점을 지적하기 위해 연구를 한다. 그 주제에 대해 논문 당사자가 자기 생각과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강단에 올라갈 때 그 주제에 대해 내가 최고 권위자다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빽을 굳게 믿고 주님이 나의 산성이시며 반석 되심을 고백하고 나갈 때 여유를 가질 수 있다.
그러기 위해 교회의 주인 되시는 분에게 충성해야 한다. 사람에게 아부하고 타협하면 생명이 길지 않다.
교인의 수준, 그들의 변화는 곧 목사에 대한 평가다.
설교가 온 교회에 은혜를 끼치고 모든 사람을 변화시킬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말라
한 사람이라도 은혜 받으면 만족한 것이다. 혹 아무도 은혜 받지 못해도 여호와로 인해 기뻐해야 한다.
* 교회의 개혁은 예배의 개혁에 있고, 이 예배의 개혁은 곧 말씀의 개혁에 있다.
어느 군목이 3년 동안 단 10명에게만 세례를 주었다는 사람이 있다. - 오늘날 3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단에게 세례를 주는 일이 있다.
말씀의 주인이 말씀하시도록 해야 한다.
* 허숭길 교수께서 말이 어눌한 부분이 있으나, 설교단에서는 말의 실수가 없다.
육신의 나이가 들수록 설교가 완숙해야 한다. 가면 살수록 설교가 완숙해지느냐? 아니냐? 에 따라서 목회의 성패가 판가름 난다.
* 기독론은 성경에서만 찾아야 한다. 그러나 성령론은 성경과 나의 체험에서 찾아야 한다.
목회 할수록 말씀이 복리계산법으로 풍성해지는 것을 경험하고 더 풍성함을 드러내야 한다.
책을 연구하는 것은 설교 증진에 필요 요건이나 충분 여건이 아니다. 기도하면서 활용하고 숙성하고 증거해야 한다. 또 설교를 마친 후에도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평가가 있어야 한다.
정말 말씀이 부어진 것을 체험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유교수 - 어제 밤에 4시 10분에 자고 5시 50분에 일어났다. - 연구에 즐거움 때문에...
10년 전의 설교를 지금 보니 부끄럽다. 자신의 신앙 수준에 따라 설교가 다르다. 속사람이 갈수록 더 젊어지고, 싱싱해야 한다. 말씀을 들고 표효할 수 있는 젊음이 나이가 들수록 있어야 한다.
시작에는 부족함이 있어도 마칠 때는 넘쳐야 한다.
<신학의 두 줄기>
①헬라 신화에서 나온 말
②교회사에서 성자를 하나님으로 부르다.
성령을 하나님으로 부르다라고 선언하다 에서 신학이란 용어가 등장, 따라서 신학은 삼위일체론이다.
교제 28p
신학이란,
요 17: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 다.”
하나님을 아는 것(γινωσκωσιν) 이다.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알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그분께 갈 수도 없다.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 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계시)만이 아니고 그분은 하나님의 계시 자체이시다. 즉 말씀 자체이시다. - 여기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본다.
하나님은 하나님에 의해서 알려지신다. 즉 계시하는 자의 자기 주심에 의해 알려진다.
고전12: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 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여기서 성령께서 계시하시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심을 보여준다.
신학은 삼위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삼위일체론적 신학이 정립되어야 하고, 성령론적 사건을 파악해야 한다.
* ‘안다’(γινωσκω)는 것은 지적인 앎이 아니다.
죽음 - 육체적 죽음만이 아니다. 죽음이 생물학적 죽음이 다가 아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났을 때 그는 이미 죽어서 나온 자다.
그래서 산 소망으로 가죽옷을 입고 나왔다.
생명은 하나님에게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시며, 진리시며, 생명이시다.
우리가 쓰는 언어를 세례 주어야 한다. 이것을 새로 사용해야 한다.
호 4 :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 들을 잊어버리리라.”
이들이 언약을 깨뜨림으로 로 암미가 되었다. 즉 소속이 달라지게 되었다.
지식은 합격 불합격의 판단 기준이 아니라 관계 설정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새치기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법도와 그분의 권위에 대한 그의 마음가짐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것도 실상은 신학의 문제다.
모든 행위는 그가 하나님을 아느냐? 혹은 모르느냐? 둘 중 하나에서 결정되어 나타난다.
하나님 보시기에 밭은 옥토거나 옥토가 아닌 밭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모든 성경은 제 1계명의 주석이다.
“내가 완전하니 너도 완전하라 ” 이 하나님의 요청에 응하든지 아니면 무시하든지 둘 중 하나다.
세속법정에 가는 것, 이것은 1계명의 문제, 이 상황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 성경에서 비정상적인 관계로 동침하는 것을 ‘안다’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창 26:10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하기 쉬웠을뻔 하였은즉 ...”
창 35:22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창 39: 7 “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39:10,12,14)
상상2:22 “그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 하였음을 듣고.”
삼하11:4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
창 34 :2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삼하12:11“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삼하13:11“암논이 그를 붙잡고 이르되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
삼하13:14“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동침하니라.”
슥 14 : 2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보며...”
* 정상적인 성관계에만 ‘알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삼상1:19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여기서 엘가나는 한나를 알았다. -이것은 신학 하더라와 연관된다.
삼상2:12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여기서 엘리의 두 아들은 여호와를 알지 아니함, 즉 그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은 신학하지 아니하더라와 연관된다.
이것은 흡니와 비느하스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우리가 매 순간마다 신학 해야 한다. 즉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붙들어주지 않으면 우리의 신학은 항상 연결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위기 의식을 가져야 한다.
신약에서 ‘안다’ 의 의미
요8:54-5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 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장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54절 “내 아버지” “너희 아버지” - 대상 : 같으면서도 다름
55절 너희 -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 그를 안다.
예수께서 증거 하시는 분 예수님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불렀다.
하나님을 아들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쳐놓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우상숭배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며 그분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나 부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학은 하나님을 나는 것,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핵심이다.
그리스도를 인정할 때 - 신학 함이요,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을 때 - 신학이 아님
신학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단계요, 하나님에게 안기는 것이며, 그분의 품에 휩싸이는 것이다.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 - 기도, 찬송, 설교, 전도 등은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요, 하나님에 대해 행동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신학이다.
‘안다’ - 안긴다. 포옹한다는 뜻이다.
교제 33p "신뢰는 심리적인 신뢰가 아니라 존제론적 관계요, 참여다.“
신학은 대상인 하나님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내 속에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화(神化)다.
곧 신학은 나를 하나님으로 되게 하는 것이다.
제 5 강
성경) 요 12:36-43
제목) 무슨 영광을 구하느냐?
주님 곁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다.
이런 배신감이 우리 목회자의 현장에 있을 수 있다. 많은 표적을 행하였으나 믿지 않는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믿는 자들이 더러 있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드러내지 못하는 자들이 많았다.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고 했고,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구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기록이 가능한 것은 이들이 후에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깨닫고 간증했기 때문이다.
본문 43절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엄청 더 크고 귀한 것인데 그것을 깊이 인식하지 못한데서 온 실수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면 교회는 조용하고 평화롭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마음이 여기서 나온다.
사람의 영광을 구해서는 안된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성경의 핵심에 이르게 된다.
내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현현하게 된다.
신학 함은 하나님을 말하는 것, - 헬라 신화를 공연한 것 같은 일상성인 특성이 있다.
하나님은 곧 삼위 하나님이시다.
신학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당신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한다.
말씀은 약속, 행동, 집행, 구현에서 인격이 나타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시고, 또 성령님을 보내셨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친히 성자와 성령과 함께 오셔서 보이셨다.
하나님을 아는 것, 그것은 그분에게 휩싸이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울타리, 그분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으므로 가능한 것이다.
신학 하는 자는 하나님의 분위기, 그분의 터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 모세가 시내산 곧 하나님의 전에 올라가 구름가운데 들어갔던 것 같은 은혜의 영역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신학 함이다.
안다는 것, 이것은 성적 관계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용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에게 스며드는 것이다.
신비적인 일체의 체험이 있을 때 그분을 앎으로 주어지는 기쁨이 있다. 이것은 자신만이 아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의 인격자가 된다.
* 고려파가 이단이 활동하는 당시 출발했기 때문에 신비주의를 많이 경계했다. 그러나 신비를 부인해서는 안된다. 신비적 체험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각자가 하나님과 더불어 즐거워하는 신비의 구름 속에 들어갈 때 힘있는 신앙생활, 즐거운 신앙생활이 된다.
“예수도 성질대로 믿는다.”는 말이 있다. 뜨거운 사람이 그 Em거움을 꺼서는 안된다. 그러나 자기 영광을 구하는 신비 체험을 구하는 사람을 경계하고 그들을 잘 지도해야 한다.
교인들에 대한 평가를 정확히 해서 바로 지도하고, 불길을 일으켜야 한다.
목회자가 매일 새벽마다 여호와를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오늘 서방교회는 즐거워함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영광을 돌림과 즐거워하는 것, 향유하고, 누리는 것이 겸비해야 한다.
이 둘은 결국 하나다. 이는 연애하는 마음과 같다. 즐거워하는 것은 곧 우리의 상급이다.
5강 본 강의
교제 33p 인격적인 참여에 관해-
“신앙이란 객관적인 대상에 대한 파악이 아니라 인격에 대한 신뢰이다. 이 신뢰는 단지 심리적인 신뢰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관계요, 참여이다.”
; 하나님을 아는 것은 내가 주체가 되어 그분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분에게 안기는 것이며, 그분에게 스며드는 것이다.
영감, 계시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인식론적 방법은 어리석은 방법이다.
하나님을 대상화하는 비평론적 방법은 사단의 방법이다.
인식론의 관계가 아닌 몸과 몸의 관계다. 이는 성교시의 즐거움과 일치하는 것이다. 곧 하나됨의 체험은 항상 기대되고 가슴 설레이는 행복이다.
이는 몸이 없으면 체험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몸의 작용이 아니다. 체험은 인격적인 체험이다.
주님도 역시 우리를 체휼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몸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우리의 삶에 오셔서 접근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 태아가 탯줄을 통해서 어머니의 영양을 받는 것 같다.
새벽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과 성관계 하듯 관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탯줄을 통해 지속적인 공급을 받아야 한다.
이는 마치 포도나무 가지가 원줄기에서 영양을 공급받는 것과 같다.
그분과의 교제의 신비는 철학적, 신학적, 언어적 공부 속에서 말하는 사람은 많으나, 기도를 신학의 방법으로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기도야말로 계시의 방편이고, 말씀을 듣는 것이 신학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방편이다.
기도 속에 읽고 묵상하고 찬송 속에 하나님을 알아가게 된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참 신학자요 하나님의 사람이다.
이러한 것은 인간의 언어로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 올바른 체험을 한 사람은 교만함이 있을 수 없다.
제 2위 하나님에 대해 죄 범한 것은 3위 하나님이 계시기에 사람을 받으나 제 3위 하나님을 거역한 것은 사람을 받을 수 없다. 왜? 이는 제 4위가 없기 때문이다.
* 교수님 - “예술적 자질과 미적인 자질을 개발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고려파는 멋이 없다. 하늘을 바라보며 싯귀가 나와야 하는데 이런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안타깝다.
교수들이 신비적 체험을 하고, 시, 예술이 있어야 하는데 - 논문, 숙제에 얽매이는 것이 문제다.
“주여! 오직 주님만 갈망하게 하소서! 학위가 아니고, 세상 영광이 아닌 우리 주님만 갈구하게 하소서. 내 속에 주님이 온전히 거하시고 내가 주께 스며들어 하나되게 하소서.”
작은 예수가 되어 하나님을 즐기고 누려야 한다.
하나 ‘Ηην’ 은 1+1=1 곧 하나됨이 있을 때, 신학을 하게 되고 하나님을 이야기 할 수 있다.
교부 시프리아는 “성부 안에 있으며, 성자 안에 살고, 성령의 능력으로 움직여 완성된다.” 라고 했다.
교부 힐라리는 “경쾌하고 즐겁다.” 라고 했다.
그가 즐거워한 까닭은 “하나님이 나타나셨고, 성경은 나타나신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로부터 아무런 선행이나 선물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힐라리의 마태복음 주석에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유한 임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이름과 능력에 대한 정보를 제시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라틴 교부이기에 동방 교부의 영성의 깊이에는 이르지 못한 경향이 있다. 그는 또 서방의 신비주의를 거부했다.
순수성만 유지하려면 우생 관계로 인해 근친에서 오는 열등생, 변이, 기아가 출생한다.
이단들이 가진 영적인 체험들과 기성 교단이 갖지 못한 선지자적 요인도 필요하다.
“신자가 아니고서는 신학자가 될 수 없다.”
변증학 속에서는 성령께서 할 일이 없어진다. 여기서 그분은 질식한다.
<기도> 에 관하여
말씀, 성례를 제정 - 주님이 이것을 통해 임재 하신다.
기도가 은혜의 방편인가? - 우리가 하나님께 가는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만약에 기도가 은혜의 방편이라면 그 근거를 문헌으로 남겨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다.
기도가 하나님의 오심, 계시하심이다.
중세-타락의 대명사- 기도를 가지고 하나님께 간다는 생각으로 인식되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 없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나님께 갈 수 없다.
중세는 미사를 통해서 우리의 정성을 하나님께 나가는 형태로 변형했다.
기도는 명령이다. 우리의 정성에 대한 보답으로 응답이 아니고 약속이다. 교제의 약속인데, 그것은 “오시겠다”는 것이다.
주님은 오셨고, 오시는 분이시며, 장차 오실 분이시다.
“장차 오시리라” 이 말은 현재분사형으로 쓰여졌다.
칼빈은 기도가 지닌 계시의 성격을 강조했는데, 그는 기도가 보여준다는 의미 보다 자신을 준다는 의미를 강조했다.
“하나님은 나의 방패시요, 나의 상급이시니이다.” 기독강요3권25장 - 하나님은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상급이다. - (원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주셔서 즐기게 하신다.”
(3판) “하나님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유일하게 칼빈만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기독강요3권 20:2) - 킬빈의 영성의 깊이가 심오함을 알 수 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시며 당신을 계시하여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 기도 중에 응답이 없는 것, - 믿음이 없어서
잘못 구해서 - 그리스도 밖에서 구했기 때문이다.
* 교부 클레맨스는 “기도는 놀이터다. - 하나님과 내가 함께 노는 놀이터다.” 라고 했다.
기도를 대화, 사귐 즉 성교로 보았다.
대화 (όμιλία)에서 설교라는 말이 나왔는데, 설교 역시 하나님과의 사귐으로 보았다.
영원한 천국의 즐거움이 기도에서 가능하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기도가 참된 의미의 기도다.
하나님과의 교제, 그 속에 하나님의 계시가 있고, 그분과 즐거워하는 것이 기도다.
* 교부 오리겐은 “깨닫기 위해 기도한다” 라고 했다.
그는 설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알도록 기도한다.
성경을 파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기 위해 기도한다고 했다.
기도는 하나님의 계심,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방편이다.
신앙은 흑백 논리다. 복잡한 상황일수록 이 논리로 속히 위치를 굳혀야 한다.
오리겐이 “사단도 구원받을 수 있다” 함으로 이단으로 정죄 되었다.
이로 인해 그의 모든 좋은 이론가 사상이 사장되고 말았다.
<신화(神化)>에 관하여
신화(神化)는 하나님에게 빠지는 것, 그분화 되어감이 기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이다.
이것은 윤리적인 차원이 아니다. 합리주의에서 신화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 하라”고 분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함을 보여주셨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보증이 되셨다.
여기서 우리의 부족을 깨닫고 늘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왕상 3:6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바른 번역 “주께서 큰 은혜를 베푸심으로 - 다윗이 성실, 공의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셨고” 라고 해야 함
은혜의 근거를 볼 때 있는 자는 더 있게 됨, 왕위에 앉을 아들을 주심
솔로몬은 여기서 다윗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고 있다.
다윗의 성실, 공의, 정직이 어디서 왔는가? - 하나님이 당신의 성실, 공의, 정직을 특별한 목적을 위해 주신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것으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신화(神化)다.
하나님의 형상 - 이것은 거울이고, 하나님을 비추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고, 일하심을 보여주는 것, 우리는 반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흡수하고 받아들인다. 여기에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받아야 하며, 받아들인 후에 그분에게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다. 우리가 먼저 바칠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받아들여야 드릴 수 있는 것이다.
* 펠라기우스 - 인간 안에 무언가가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선함이 남아 있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 되는 것이다.
빌 2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여기서 우리가 이루어야 할 구원은 무엇인가? - 이는 성령론적 구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웨슬리안이나 알미니안들 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근본적으로 성령론에 대한 결핍과 오해로 인해 고려파는 성장이 부진하다.
예정론이 아니라 숙명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문제다.
상급을 받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고 상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일한다. 우리는 빚진 자들이다.
사람을 제대로 사람되게 하는 것이 신학공부고 신학 하는 것이다.
제 6 강
성경) 마 28:16-20
제목) 전도의 지상명령 (The Great Commit)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으로 세례를 주고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기 11제자가 받은 말씀은 일종의 임직식이다.
우리는 이 당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야 적용이 가능하다.
이 본문은 11제자들에게 준 임직식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목적격) -내게 주셨으니
↳ 신적 수동태(아주 잘된 번역임) ↳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권세를 주셨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의 주인 되시는 분이시다.
하늘과 땅이 하나님께 속했으나, 이것을 주님께 주셨으니 주님이 이 모든 것의 주인 되심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예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의 주인 되심을 선언해야 한다.
‘크리스투스 빅토르’ 즉 “예수 그리스도는 승리자시다!” 는 것을 선언해야 한다.
* 첫째 단계는 전도하여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베푸는 것이다.
주님은 여기서 세례를 명하셨다. 이 ‘세례’는 소유권 확증으로 인치는 것이다.
목사가 받은 특권이 도장 찍는 것이다.
이것이 곧 세례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장을 함부로 찍어서 안되듯이 세례를 함부로 주어서는 안된다.
그분의 소유가 된 자에게 비로소 도장을 찍어야 한다.
함부로 도장 찍는 것은 파송 받은 자가 파송자에게 저항하는 행위와 같다.
* 둘째 단계는 -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는 것과 또 그것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다.
가라지를 심은 도둑이 다른 도장을 찍었는지 확인을 해야 한다.
이 사명을 위한 보장으로;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신 말씀이다.
주님은 성령 안에서 다시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우리를 성숙한 자 되게 하신다.
도장 받은 자에게는 결코 부재하신 분이 아니시다.
이는 단지 성령으로만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성찬 중에, 그리고 성령님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늘과 땅의 권세로 명령을 받은 제자들은 영적 투쟁에 임한 자들이다.
이 싸움은 곧 소유권 쟁탈전의 싸움인데,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이 이 전쟁의 지휘자이시다.
한 교회의 주인은 당회장이 아니고 목사는 한 지휘관으로 총 지휘자의 명을 따라야 한다.
목사가 제 마음대로 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어느 목사의 교회가 아니다. 주인은 우리 주님이시다.
주님이 그 싸움을 챙기시고 이끄신다.
그러므로 목사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다. 목회가 쉬울 수도 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기 때문이다.
* 대전 안디옥 교회 목사 - 그분은 자신의 힘으로 하지 않고 밀려서, 이끌려서 목회 한다고 진술한다. 목회자는 자연스럽게, 산들바람 불 듯이 목회 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는 정말 할만한 것이다.
어려울 때, “이것은 내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이오니 힘을 주소서” 하고 구할 때 자유함을 누리며 목회 할 수 있다.
교회론이 이 본문에서 출발하고, 신론이 이 본문에서 출발한다.
삼위 하나님, 교회론, 그리고 종말론이 이 본문에 다 있다.
우리는 소유권 쟁탈전에 참여한 자들이다. 세상 끝날까지 이 싸움은 계속된다.
안식일에 쉬려면, “우리에게는 제 8일이 기다리고 있다.” - 6일, 7일의 주기가 넘어선 제 8일, 종말의 약속이 여기 있다.
신학의 최종점이 이 본문에 귀착된다.
루터는 “우리는 철학적 인간 지식을 추구하지 않는다. 물리적 인간 지식도 추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철학적 인간지식 추구를 이성적 동물로 정의하는 것으로 보았다.
법률은 - 인간을 소유주, 물건의 주인으로 규정한다.
의학은 - 인간을 건강과 병자에 대해 언급한다.
신학은 - 인간을 죄인에 대해 논한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이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 곧 죄인임을 선언한다.
죄인을 죄인이라 해야 한다. 법률가, 의학자처럼 말하면 신학자가 아니다.
죄인이라고 하는 인간 본성은 신학자에게만 거론되는 것이다.
인간이 죄로 부해한 자신을 의식하도록 하는 것이 신학자의 의무이다.
바로 이 지식에 기초하여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데, 그 하나님은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 중세의 하나님을 일컬어 Nudus Deous 라고 했다. 즉 생각 없는 하나님, 인간에 의해 좌우되는 하나님이란 뜻이다.
인간과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지식은 시57편에서 전수해준 지식이다.
이 시의 근거는 신학적인 인간지식과 신학적인 신(神) 지식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신학의 고유한 주제는 죄와 벌을 받아 멸망을 받을 인간이요, 또한 죄인인 인간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철학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을 하나님에게까지 소급한 것이 철학이다.- 이것은 인간의 교만이다.
제 6 강 본 강의
* 코람데오 -
코람데오는 정직하게란 뜻이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윤리의 개념이 아니다.
이것은 종교적, 존재론적 근원적인 개념이다.
곧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자기 이해다. (이것은 루터 신학의 핵심이다.)
코람데오가 말하는 것은,
1) 인간은 죄인이다.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설 있을 수 없는 존대라는 말이다.
루터가 사제로 있을 때 남의 죄를 사해주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나 평화가 없었다.
개인으로 어찌할 수 없는 근원적인 문제에 부딪혔던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때 죄를 가릴 차단기가 없다는 것을 그는 인식했던 것이다.
1514년 시편을 강의할 때, 시 71:1-2에서 인간의 의로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로 서게되는 것을 깨닫는다.
시 72: 1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이전에는 자기의 의를 붙들었으나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의를 붙들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주의 의로 나를 받아 주소서” 라고 구할 수 있게 되었고, 여기서 말하는 주의 의는 롬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 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렇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외선 차단기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신학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 우리의 탯줄 예수 그리스도에 싸여야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
2) 인간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다.
물론 인간을 의인이라고 해서 죄인이 지나간 것은 아니다.
코람데오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죄인임과 동시에 우리가 의인됨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것은 투쟁이다. 한 순간도 면제될 수 없다. 매 순간 의인으로 서 있으면서 죄와 싸우는 실존이다.
신학교에서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하면서 학을 전개 할 수 있는가?
루터 - “십자가의 신학”을 말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잘 나타난 곳이 어디냐? 십자가이다.
엄청난 건물과 수많은 군중들이 아니다.
죄인을 살리고 소성케 하는 십자가에 있다.
루터가 하나님을 붙들고 씨름하는 생생한 신앙의 투쟁을 보라!
우리에게 이런 믿음의 선배를 있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오늘 우리의 교가가 루터이고, 교훈이 루터이면서 실상은 루터를 모르고 있다.
* 인간이 타락했다. 인간 속에 하나님을 둘 기관이 있는가?
루터는 아무리 부패했어도 인간의 양심의 한 부분에 받아들일 기관이 있다는 펠라기우스 주장과 대립한다.
시편 강의에서 루터가 전회한다.
“양심이라는 것이 없어진다면 모든 것이 없어질 것이다.” 이것은 중세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루터는 “양심도 완전히 부패했다.” 고 주장했다.
말씀을 하신 이는 귀를 창조하신다.
인간론적 접근이 아니라 인간이 속에 양심이 선함이 있어서 깨닫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은혜로 깨우쳐 주심으로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는 자기 일을 하면서 자기의 것을 투자하지 않고 결국 상급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다.
기도해서 듣고, 그것을 증거한다.
루터는 인간의 지성(Interectus)를 정죄 한다.
객관적 지식이 있을 수 없다.
코람데오 즉 인간의 죄인 됨과 죄인 된 인간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 외에 신학에서 질문 토론하는 것은 독이다. 여기서 벗어나면 그것은 무효다.
죄와 구원론을 전면에 붙이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신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은 인간의 오류다.
죄인이 하나님을 파악하려고 부패한 인간의 이성으로 접근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다.
이성이 신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다.
신학하는 자는 참된 루터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루터의 잣대에 머무는 것, 그것은 은혜요, 신학적 지혜다.
시편 51편에서 신학을 정의한 것, 깊은 영성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시51: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이 본문에서 루터는 이렇게 주석한다.
“바로 이 죄에 대한 인식은 이 세상 어디에도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것을 율법과 약속을 통해서 계시하실 수밖에 없다. 양자 중 각자가 죄를 들추어내는데 죄란 우리가 지식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다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말하자면 말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죄는 해명되어져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죄가 계시되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죄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다.“
- 그는 죄에 부딪혔기 때문에 깨달았다. 이는 머리로 아니고 믿어야 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영적으로 죄인인 것을 믿는가? - 이것은 지적 사건이 아니라 영적인 사건이다.
“영적으로 죄인 됨을 깨닫는 자를 하나님께서 기꺼이 의롭다 하신다.”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 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 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루터는 말하기를, “‘내가 내 죄를 아노니’ 하는 것은 머리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고 몸으로 느끼는 체험이다.” 고함으로 체험의 신학을 말한다.
“그냥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고 경험하고 체험하여 하는 것이다. 이렇게 체험하는 자가 무엇을 느끼느냐? -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며 하나님의 얼굴로 인하여 두려워한다.”
루터의 신학에서 죄인은 자기 속으로 들어가는 자다.
의인은 하나님께로 도망치는 자다. 왜? 하나님이 사유하시기 때문이다.
시130: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130:5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루터의 신학은 가능의 신학이고, 경험 신학이다.
사죄의 체험, 의로워지고, 계속 평생 경험해야 하는 이 체험이 있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어느 한 순간도 이 은총이 없이 어찌 하나님 앞에 서리요!
그는 말하기를 “이신 칭의의 교리는 하나님 말씀으로 믿지 아니하면 주어지지 아니한다.”고 함으로 말씀의 신학을 주장한다. 이것은 머리의 신학이 아니다.
“코람데오 - 곧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연옥에서 이전한다.”고 했다.
여기 연옥은 없는 것인데. 당시의 용어를 사용한 것뿐이다.
이 말의 의미는 불구덩이에서 나온 것 같다는 의미다.
“위로란 모든 위로는 말씀에 있고, 말씀을 떠나서는 어디에도 위로가 없다.”
그는 입을 열면 하나님 외에 다른 말을 하지 않으나 모든 말씀들이 우리의 정곡을 찌른다.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고 했다.
중세 이후에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한 사람은 많지 않다. - 고대 동방 교회의 전통을 존중하는 경향에 의해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참 신학이 있다.” - 여기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신학의 좌소임을 밝힌다.
“신학자는 삶을 통해 그리고 죽음을 통해 저주받음으로 신학자가 되지 사변으로, 머리로, 혹은 책을 읽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저주받아 신학자가 된다.” 고 했다!!!
제 7 강
성경) 행 6:1-6
제목) 본분에 돌아가라
찬송) 410장 - 논리적인 일관성 결여, “난 알 수 없도다” - 이것은 “난 확실히 아네”로 연결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은 논리적으로 알 수 없다. “난 알 수 없다”는 것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고 송영이다.
본문1절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 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이 본문에 대한 두 가지 가능한 해석이 있다.
① 과부들을 구제시의 그 대상으로 보는 해석이 있는데 이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② 과부들이 봉사하는 일에 빠진 것에 대한 불평으로 보는 해석이 가능하다.
본문 2절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여기 나온 ‘공궤’는 재정 출납이 아니다. 이것은 웨이트가 하는 일과 같이 식탁 봉사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목사는 할 일이 있고 해서 안 될 일이 있다.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는 대다수의 문제들이 목사가 All round play 하려고 함에 있다.
과부들이 능동적으로 봉사하는 자로 보는 것이 가능한 것은 제자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사도들이 애찬을 나누었는데 사람들이 많아지니 감당키 어려웠다.
개척교회시 목사가 모든 일을 해야 하나 규묘가 커지면 본 업무에 돌아가서 거기 전력해야 한다.
목사는 노회나 총회의 일이 본업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해 말하도록 세움을 받은 자들이다. 자신의 사명과 파생된 일에 대한 구분을 잘 할 줄 알아야 한다.
한국교회의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들은 - 사람이 많아지니 문제가 발생한다고 했다.
이것은 사실상 감사할 일이다.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증가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목사는 이제 본 업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 1 :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라고 했다.
의인의 회중에는 악인이 들어올 수 없다.
그러나 이 악인들과 죄인들과 오만한 자들이 의인의 삶을 통해 회개하고 의인에 회중에 들어가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바로 이러하여 죄인들, 창기들, 세리들이 회개하고 의인의 회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목사의 사역에 의인의 회중이 가입하는 자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회개해야 한다.
교회가 조용한 것은 회중이 없어서, 부흥이 없어서 그렇다.
문제 있는 교회가 움직이는 교회고 살아 있는 교회다. 왜냐하면 조용한 의인의 회중에 아직 미성숙한 사람들이 가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제 있는 교회는 감사의 제목이 많다.
제자가 많아지면 문제가 있으나 이들이 의인의 회중에 결국 서게 되니 감사한 일이다.
의인들은 많은 열매를 맺게 되고, 시절을 따라 그 열매가 맺히니 이것이 말씀의 사역의 결과다.
이 결과 교회가 열매 있어 죄인이 회개하고 의인화되니 이런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다.
목사가 엎드려 회개하고 신학 하면 가능한 일이다.
시편 1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이제 이것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어야 한다.
문제 많은 교회, 시끄러운 교회 만들어 이 본문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되는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초대 교회는 문제가 생기니 성령 충만한 제자 7명을 선택한다.
목사 혼자 설치는 교회에서는 성령 충만한 제자가 나오지 않는다.
본업에 성실치 아니하는 목사들 때문에 교회 충실한 제자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
목사의 본업은 고신대나 복음병원의 이사가 되는 것이 본업이 아니다.
대학 경영, 병원 경영 전문인이 목사의 성실한 말씀 사역에 의해 배출이 되어야 한다.
본문 4절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사도들은 그들의 본 업에 돌아갔다.
공궤 한다는 것은 식당 봉사를 의미한다.
목사의 봉사는 말씀의 봉사다.
그러므로 목사는 식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제에 있어야 하고, 기도실에 있어야 한다.
식당에서 섬기느냐? 강단에서 섬기느냐? 이것이 문제다.
기도와 말씀 봉사에 전무한다고 할 때 이 기도는 말씀 봉사를 위한 준비이고 과정이다.
준비 없이 강단에 서면 안된다.
교회의 모든 문제를 목사가 다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 교회는 목사의 교회가 아니다.
잘 가르치면 거기 봉사할 자를 준비하신다.
시편 1편의 열매에 의해, 곧 잘 가르치고 양육하면 교회의 제반 문제들이 해결할 일군들을 그 교인들 가운데 일으켜서 해결되게 하신다.
이 해에 사도행전 6장의 결실이 일어나도록 사역에 전념하자!
제 7 강 본 강의
주기도문에는 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할 때 여기 “우리”에 예수님과 내가 포함되어 있다.
나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후5:18-9“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 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 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 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목사는 하나님과 먼저 화목 된 자요, 또 다른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은 자들이다.
신학은 이성으로 접근할 수 없다.
기도로 나아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을 말할 수 없다.
삼위 하나님 이름 안에 모든 성경이 들어 있다.
알고 있는 바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부업. 제사 밥에 관심 가져서는 안된다.
성경을 육법전서를 인용하듯이 인용해서는 안된다.
말씀 한 절 한 절에서 삼위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고, 그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
구구절절 그렇게 보라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을 이성으로 하지 말라
주지주의 입장에서 벗어나야 한다.
신 존재 증명을 한다는 것, 아리스토텔레스의 제 1 원인자 찾으려는 시도와 같은 방법으로 신학을 하는 것을 루터는 전면 거부한다.
신화(神化) 되는 것은 참 사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신학 하는 자는 자신이 죄인 됨을 알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됨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 루터는 죄인 된 인간이 신학의 주제라고 말했다.
이 죄인 된 인간은 하나님과 연관된 인간이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죄를 아는 것이 참된 인간 인식이다.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임을 아는 것, 곧 죄인 됨과 그리스도안에서 의인됨을 아는 것이 신학이다.
신학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배은망덕한 인간들, (이것이 인간의 실체)을 위해, 그리스도는 이들 중에 오셔서 이들을 건지셨으니 이 일을 계승해야 한다.
이것이 성육신의 신학이다.
길 되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이 큰 사건이다.
성육신의 사건, 곧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바로 이 방법을 선택하신 것이다.
그분이 우리 중 하나가 되셨다.
세례 받으심도 그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죄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와 동일시됨을 보여주기 위함인 것이다.
그 일을 공개적으로 보이신 것은 우리를 체휼하시는 대제사장 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의 몸이 아니라 육의 부활을 성경이 말하고 있다.
성경에서 몸이라고 할 때 긍정적인 표현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육이라고 할 때 부정적으로 표현된다.
그런 이 육이 부활하게 된다.
육은 성령을 거스린 지체다. 하나님을 거스리는 인간의 모습의 정체가 육이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이다.
주님은 육을 입고 오신 분이시다.
고후5:18-9“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 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 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 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화목하게 하는 직책(διακονια) 으로 곧 말씀을 주셨다.
우리가 사신이 되었다는 것은 곧 대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분이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신데, 그에게 죄를 삼으셨다.
죄를 삼으셨다는 것은 성육신하심, 세례 받으심, 고난 당하심, 십자가를 지심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 계시의 의미
계시는 우리를 찾아옴을 의미/ 우리는 죄인!
철학자는 이성적 갈증을 채우는 일을 위해 일하고,
의사는 건강 여부를 판단하고 고치는 일을 하며,
법관, 변호사는 개인의 재산과 권리를 위해 일한다.
이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스스로 내려와서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스스로 자신의 영광을 버리고 내려오심으로 우리를 회복하는 일을 하셨다.
우리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의 참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죄인 된 것은 우리를 그분처럼 의인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목회자도 낮은데로 가야 한다.
목회는 성육신의 신학에서 행해져야 되고, 체휼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
약한 자 병든 자를 향해 찾아가는 사람, 음지에서 일하는 사람, 그래서 진정으로 세상에 빛을 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 사역을 통해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교회 내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 많지 않다.
목회의 현장을 보라! 교회 안에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
그분을 닮은 사람을 양육하는 것이 목회다.
고려파는 사람을 중시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런 풍조에 있던 인재들이 이 고려파를 떠나서 비로소 큰 인물로 부각되는 일들이 많다.
이는 우리 교단이 사람을 귀히 여기지 않고, 그들을 잘 양육하지 않아서 그렇다.
조금 이상한 소리만 하면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쫓아내는 풍조는 없어져야 한다.
의인들의 회중 만들기에 전념해야 한다.
하나님 닮은 사람, 신화(神化)된 사람 세워 가는 것이 목회다.
스스로 신학자 되지 못하고 신학하며 강단에 서서 외치니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지 못하고 분열이 있고, 추방이 있다.
참 교회는 문제가 발생하나 그 안에 성령 충만한 사람이 있는 교회였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스며들고 체휼하신 것처럼 성육화된 신학이 되게 하라!
사람 죽이는 교회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나를 파송하신 분의 정신에 따라 사람을 귀히 여기고 세워가야 한다.
이제 신학의 주제들도 정립이 되어야 할 때다.
칼빈의 이론들은 간략함과 명료함이 특색이다.
이해 안되는 부분들과 너무 씨름하지 말고 아는 것을 중심으로 정립하고 처음부터 독파하는 것 보다 관심 있는 분야에 전후 좌우로 살펴 나가면서 그 폭을 넓히는 것이 좋다.
논리 속에 성령님을 가두어서는 안된다.
논리를 초월하는 것은 논리가 없는 것이 아니고 논리를 초월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론과 생각을 넘어선 하나님의 이론을 우리 인간의 이성적 판단으로 파악하는 신학방법이 아니라 기도로 하나님에게 휩싸여 그분의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 바에 따라 우리의 이해를 넓혀 내가 사람이 되고, 나로 사람을 세워 가는 자로 바른 의미에서의 신학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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