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적치유의 중요성
-이다윗목사
불의 특성
성령님은 내게 성령님의 불의 특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나는 그러한 내용을 수없이 많이 들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성령님의 능력이나 은사에 대해 불이라고 언급한 내용은 불과 몇 구절에 불과합니다. 혹자는 “왜 성령님의 능력 혹은 성령의 은사라고 말하지 않고 성령의 불이라고 말합니까?”라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내게 성령의 능력이나 성령의 은사, 혹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란 말 대신에 성령의 불이라는 말에 대해서 더 많이 언급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내게 성령의 불에 대해서 매우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불의 특성을 세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성령의 불은 첫째, 태우는 능력이 있습니다. 태운다는 것은 영혼육 안의 모든 죄악을 태운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의 불이 우리 몸 안으로 들어오게 될 때 우리의 영혼육은 죄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성령의 불은 밝게 비추는 능력이 있습니다.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그곳에 빛이 있게 합니다. 이것을 빛으로 오신 주님을 연상케 합니다. 세상에 거하는 사람은 어둠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성령 안에서 거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불은 전이(impartation)의 능력이 있습니다. 불은 또 다른 불을 만들 수 있습니다. 처음 불이 나중 불보다 더 큰 위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늦게 불을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얼마만큼 순종하느냐에 따라 그 불의 능력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불이 갖고 있는 이러한 세가지 능력을 체험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변화를 가져 다 줍니다. 불이 몸 속으로 들어올 때 느껴지는 가장 큰 변화는 치유입니다.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는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마음이 평안해지고 기쁨이 솟게 합니다. 남을 미워하고 증오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평안함과 함께 그 사람을 용서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또한 능력을 사모하는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은사들을 불러오게 합니다. 이처럼 성령의 불은 믿는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될 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불은 곧 성령님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불의 내적 치유
성령님을 통해서 얻은 것 중 가장 큰 것은 내적치유에 관한 것입니다.
사실 성령님과의 대화를 시작한 후로 얻게 된 것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먼저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예언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방언통변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는 구절이 있을 때 성령님께 여쭤보면 마치 녹음기를 틀어 놓은 것과 같이 너무나 명쾌하고 확실한 해석을 말씀해 주십니다. 저는 이것을 성령의 은사 중 지식의 말씀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령님은 내게 지혜의 말씀을 허락하셨습니다. 예배를 인도할 때에 나는 늘 성령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성령님은 구체적으로 모든 순서를 주관하십니다. 때때로 성령님은 찬송가를 두 번 반복해서 부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순종합니다. 어떤 때는 모든 교인들을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때때로 기도가 필요한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을 위해 모든 교인이 함께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 밖에도 병을 치료하는 신유의 은사와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또한 귀신을 쫓아내는 은사도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은사는 내적치유입니다. 이것은 내가 남을 위해 사용하는 은사가 아닙니다. 성령님을 통해 나 자신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 내적치유 은사를 다른 은사들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사역자들 중에 스스로의 내적치유가 되지 않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상처가 남아 있는 성령사역자들에게선 상처를 받을 뿐입니다. 이것은 악한 마음의 소유자에게서 악한 것을 받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안수를 받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항상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시며 내가 건강한 영혼육을 소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님은 나로 인한 어떠한 역사나 사역을 기대하시기 보다는 나의 평안과 행복을 더 먼저 생각하십니다.
성령님께서 나의 내적치유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내적 상처를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내적치유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내게 사람들의 영혼육의 내적치유 사명을 주셨습니다. 나는 이것을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나의 상처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할 때 하나님께서는 내게 눈물을 허락하셨습니다. 보통적으로 사람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서 하나님의 음성을 전해 줄 때면 사람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나 역시 저들이 눈물을 흘릴 때 함께 눈물을 흘립니다.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 함께 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는 치유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에게 아무런 상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에게도 치유되어야 할 상처는 항상 있습니다. 언제고 치유가 필요 없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전에 겪었던 상처에 비하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있습니다.
나는 아주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에는 쌀집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쌀은 먹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내 기억에는 쌀집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초등학교 6학년 되었을 때 돌아갔습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일을 해야만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내 기억으론 어머니는 건축하는 곳에 가셔서 잡일을 도왔던 것 같습니다. 힘든 노동일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늘 할머니와 함께 생활했습니다. 어머니는 저녁때나 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일터에서 쓰러지셨고 3일 후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의 삶은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야만 했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새엄마를 데려왔습니다. 약간 정신이 나간 분이었습니다. 보통 때는 괜찮은데 어느 날 갑자기 온 몸을 뒤흔들면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행동을 했습니다. 듣기로는 어떤 사람에게 큰 사기를 당했고 그 후로 정신이 가끔 나간다고 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그 분과 오래 살지 못하고 헤어져야만 했습니다. 그 분이 집을 떠난 뒤로 네 명의 새엄마가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모두 다섯 명의 새엄마와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새엄마가 싸준 도시락은 맛도 없었고 먹기도 싫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더 이상 점심을 싸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 그때부터 학교 식당에서 빵과 우유를 사먹었습니다.
한번은 아주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소풍을 가게 되었는데 점심으로 약밥을 사서 가지고 갔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어서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고 있는데 선생님이 다가와서 내 뜸 하는 말이, “니 엄마는 점심도 안 싸 주냐?”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나의 환경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너무도 창피했고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에 분개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유 때문에 난 늘 아버지에게 불만이 가득한 청소년의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유를 아버지의 무능력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툭하면 아버지에게 대들었고 이유도 없이 아버지 말에 불순종했습니다. 무능력한 아버지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길에서 아버지를 만나는 날이면 아버지가 보기 싫어서 몰래 숨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나의 상처 치유자
그렇게 우울한 사춘기를 경험할 때에 우연찮게 친구들과 함께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옆 동네에 있는 장로교회였습니다. 분위기도 좋았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내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게 되었고 하나님 아버지와 개인적인 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생각하면 너무나 좋아서 학교 수업이 끝나면 교회에 가서 혼자 벽에 걸려진 예수님 사진을 보며 마음으로 함께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나눴던 교제가 있었습니다. 혼자서 기타를 치면서 예수님 사랑을 노래에 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과의 사랑은 커져만 갔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에 대해서도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시지만 나의 아버지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있었는데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고 나면서부터 모든 창피와 수치스러움이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만 왕의 왕보다 더 크고 능력 많으신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그것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우울한 사춘기를 경험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로 받아 드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기 시작할 때 육신의 아버지와의 관계도 점차적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이전에는 그런 육신의 아버지를 둔 것이 너무나 창피하고 부끄러운 사실이었지만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 주신 아버지의 큰 은혜가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계속적으로 지속되자 육신의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큰 사랑 또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나를 비롯한 다섯 명의 자녀들을 잘 키우기 위해서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하신 분이었습니다. 나중에 크면서 알게 되었지만, 내 아버지는 새벽마다 2시간 이상씩 자녀들이 잘 되길 기도하였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아버지의 기도 소리는 나의 가슴을 감동으로 저미게 했고 가끔은 눈물을 흘리게 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내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상처를 치유해 주었습니다. 어찌 상처가 이것뿐이겠습니까. 책에다 다 기록할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상처가 많고 크다 할지라도 예수님 앞에서 모든 상처는 사라졌습니다. 마치 햇빛에 눈이 녹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나의 치료자가 되셨습니다. 할렐루야!
성령님, 나의 치유자
난 성령님에 대해서 잘 몰랐습니다. 예수님도 알았고 하나님 아버지도 알았지만 성령님에 대해선 잘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신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사가 되었을 때에는 어느 때보다 성령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내 생각엔 성령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예수님과의 깊은 관계처럼 성령님과도 그런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내 생각뿐이었습니다.
나는 성령님에 대해서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적어도 내 나이 40이 되었을 때까지는 방언을 하지도 못했고 방언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방언을 하게 되었을 때부터 성령님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점차적으로 기도의 시간이 간구에서 묵상으로 변해갔습니다. 하지만 성령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은 시점에서 난 오히려 성령님으로부터 큰 상처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개척한 교회가 전혀 부흥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열심히 준비했고 세상적인 욕심이 없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데 교회는 늘 부흥하지 못했습니다. 하루 이틀 기다리기를 1년쯤 했을 때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께 욕설까지 퍼부었습니다. 나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이 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 자체도 싫어졌습니다.
나는 늘 하나님으로부터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열심히 하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나를 도와주지 않으시나’하고 늘 불평 불만만 가득 찼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는 점차 악한 상황으로 전개되었고 급기야 모든 목회를 때려 치고 싶은 마음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이 들면서부터 모든 의욕은 사라져 버렸고 아내와 함께 매일마다 한국드라마와 영화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내 평생에 그렇게 많은 드라마를 본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나는 상처를 받았고 그렇게 상처 받은 자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끝까지 나를 사랑하셨고 나의 상처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영성훈련을 시작하게 하셨고 변화된 나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하셨고 여러 은사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물론 내가 받은 은사들은 너무나 소중해서 받은 은사만 생각하면 하나님께 깊은 감사만 나옵니다. 하지만 그런 은사들을 받은 기쁨보다 나의 상처가 치유된 것이 난 더 기쁘고 기쁩니다.
치유가 필요한 상처들
치유사역을 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만났던 사람들 모두에게서 상처를 봤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상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 한 사람도 상처 없이 살아가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치유의 필요를 느끼고 있습니다. 목사도 치유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권사고 장로도 상처가 있습니다. 사장도 상처가 있고 직원도 상처가 있습니다. 이 세상 사는 모든 사람에겐 상처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처가 치유되지 않고선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상처가 치유되어야 하나님과 의 깊은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누가 당신의 상처를 치유하겠습니까? 당신입니까? 아니면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입니까? 당신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닙니다. 당신에게 상처 준 사람이 당신에게 잘못했다며 용서해 달라고 매달린다 할지라도 그것은 당신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합니다. 당신의 상처를 치유할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예수님만이 당신의 상처를 알고 있으며 치유할 수 있습니다.
상처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그 상처를 보이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상처를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아주 말끔히 말입니다.
상처의 배후
만약 당신에게 상처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상처가 아닙니다. 진범은 마귀입니다. 언뜻 보면 마치 하나님께서 상처를 준 것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상처는 마귀로부터 옵니다.
상처는 ‘틈’과도 같습니다. 성경은 마귀가 얼마나 ‘틈’을 좋아하는지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7)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틈’입니다. 조그마한 틈만 보이더라도 마귀는 그 틈을 이용해서 우리 속으로 들어옵니다. 마귀는 우리가 틈을 주지 않으면 절대로 우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오직 우리가 ‘틈’을 허용할 때 그 ‘틈’을 이용해서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틈’은 죄를 통해서 만들어 집니다.
이것은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허용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없습니다. 사도요한은 오직 우리가 문을 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어오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문’을 열 때 들어오시는 것처럼, 마귀는 우리가 ‘틈’을 열 때 들어옵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틈’을 만들기 위해서 갖가지 방법을 동원합니다.
마귀가 이용하는 방법 중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은 ‘죄’를 짓도록 유횩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도 마귀의 유혹에 걸려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 누구도 ‘죄’에서 자유 하지도 못했고 완전하지도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제외하고 말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기 위해서 마귀는 철저하고도 치밀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협력하여 ‘선’을 이룰 때 마귀는 협력하여 ‘악’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그것은 상처를 가져다 줍니다. 그 상처로 인해 마귀는 하나님의 자녀를 한 사람씩 쓰러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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