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내용!! 강해!!

[스크랩] 요한복음 강해

하나님아들 2013. 3. 6. 23:54

요한복음 강해 - 최승락 교수

•요한복음의 서론적 이해
•요한복음의 신학적 특성8

•본문연구

Ⅰ. 도입부(1:1-18)11

Ⅱ. 표적의 책(1:19-12장)13

Ⅲ. 영광의 책(13-20장)35

Ⅳ. 종결부(21장)50


< 요 한 복 음 연 구 >

A. 요한복음의 서론적 이해

1. 요한복음의 저자, 저작 시기, 저작의 배경

1) 요한복음의 저자에 관해서는 A.D. 180년경 이레니우스(Irenaeus)의 언급이 최초

“주님의 제자요, 그의 가슴에 기대었던 자인 요한은 아시아의 에베소에 머무는 동안 친히 한 복음서를 기록하였다”(Against Heresies 3.1).

이는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터툴리안(Tertullian), 유세비우스(Eusebius) 등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복음서 내적 증거들로는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21:20)에 대한 언급이나 예수의 어머니를 맡기신 제자(19:25-27)에 대한 언급 등이 당사자로서의 제자 요한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이 복음서가 가지는 셈어적 특성이나 유대 풍속에 익숙한 점, 예루살렘의 세세한 사물들에 대한 정확한 지식(5:2 베데스다 못가의 다섯 행각, 9:7 실로암 못 등) 같은 것을 볼 때, 이에 대한 1차 목격자인 요한을 그 저자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2) 저작의 시기와 배경

요한복음의 저작 시기를 2세기 이후로 잡는 것은 튜빙겐의 바우르(F.C. Baur) 이후 많은 비평적 학자들이 견지하는 견해이지만, 이런 견해는 갈수록 그 입지를 잃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제1세대 목격자들이 사라져 가고, 제2세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중심축으로 부상하고 있던 시점에서 복음서 기자는 교회의 증거 사역의 뿌리를 재확인하면서, 더 나아가 새롭게 펼쳐지는 상황들 가운데서 어떻게 보다 창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이 글을 쓰고 있다.

거기에는 넘어야 할 오해의 벽들도 있으며, 박해의 상황도 닥쳐온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헤쳐나아가면서 복음의 증거를 감당할 수 있는 힘은 교회의 뿌리에 대한 확인, 진리에 대한 체험적 확신, 그리고 성령의 증거와 지도하심 등에서 나온다. 요한복음은 어떤 지교회의 구체적 문제보다도 더 보편적 관점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에 접근하고 있다.

2. 요한복음의 목적과 주제

요20:31이 밝히는 기록의 목적

“믿게 하려 함이요” = pisteu[s]ête

사본상 부정과거의 시제를 가진 경우(pisteusête = you may come to believe)

현재형의 시제를 가진 경우(pisteuête = you may continue believing)

하나님의 사랑을 주제로 한 웅장한 우주적 드라마

‘요한 공동체’의 신학적 자기이해를 위한 선언서로 보는 좁은 이해 탈피

(예를 들어, Maurice Casey, Is John's Gospel True?, London, 1996)

반유대주의의 문제(hoi Ioudaioi의 용례들)

민족적 안과 밖의 경계구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적 행위로 말미암은 구분

(요3:16-21, 9:39, 예수의 오심이 심판을 위함이 아니나 심판적 결과를 가져옴)

3. 요한복음의 특성

1) 다른 복음서들과 구별되는 특성

공관복음서들이 주로 예수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보다 역사적인 진술을 하고 있는 것에 비해 요한복음은 보다 자유롭게 그 의미를 해석하고 설명한다.

(한 예로, 다른 복음서들의 도입부 보다 더욱 웅장하고 신학적인 도입부).

예수에 대한 단순한 지상차원에서의 접근은 수많은 오해와 적대 행위들을 낳지만, 그에 대한 천상차원의 이해(하늘로부터 옴, 아버지로부터 보냄 받은 사실 등)는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을 판가름한다.

예수의 기원을 증거하는 표적들(공관복음서에서 비유들의 역할에 해당)은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을 더 풍성하게 맛보게 하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현재 그 표적을 맛보면서도 그것이 이끄는 최종 종착점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아이러니를 낳는다.

이런 관점의 차이 때문에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보다 더욱 상징적이며 또한 역동적인 특성을 갖는다.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현재의 결단과 응답 앞에 서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2) 요한복음이 특징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들

* 동사형으로는 ‘믿다’(pisteuô, 98회), ‘증거하다’(martureô, 33회), ‘사랑하다’(agapaô, 37회), ‘보내다’(pempô, 32회), ‘영화롭게 하다’(doksazô, 23회) 등

* 명사형으로는 ‘세상’(kosmos, 78회), ‘제자’(mathêtes, 78회), ‘생명’(zôê, 36회), ‘진리’(alêtheia, 25회), ‘빛’(phôs, 23회), ‘영광’(doksa, 19회), ‘표적’(sêmeion, 17회), ‘계명’(entolê, 10회), ‘사랑’(agapê, 7회) 등

* ‘믿다’의 동사형은 신약에서 요한복음이 가장 많이 사용하나, 다른 복음서들에서 많이 쓰는 ‘믿음’(pistis)의 명사형은 한 번도 사용치 않음

* ‘복음’(euangelion)의 명사형이나 동사형은 요한복음이 한 번도 사용하지 않으며, 대신 ‘증거하다’의 동사형을 가장 많이 사용

* ‘진리’, ‘생명’, ‘영광’, ‘세상’, ‘사랑(하다)’ 등의 단어를 특징적으로 많이 사용

3) 요한복음의 문학적 특성

* 칼 와호멜(qal wahomer) 논증의 사용

안식일 논쟁(7:22-24)

하나님의 아들 논쟁(10:22-38)

* 오해와 아이러니, 이중의미 기법의 사용

<18개의 오해들과 그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

2:19-21(성전) - 유대인들의 오해 - 죽음과 부활

3:3-5(거듭남) - 니고데모의 오해 -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

4:10-15(생수) - 사마리아 여인의 오해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계시 혹은 영(7:38)

4:31-34(양식) - 제자들의 오해 - 예수와 아버지의 관계

6:32-35(하늘에서 내린 떡) - 무리들의 오해 - 예수의 기원, 정체, 사명

6:51-53(내 살) - 유대인들의 오해 - 예수의 죽음

7:33-36(너희가 올 수 없는 곳으로 감) - 유대인들의 오해 - 예수의 영화(榮化)

8:21-22(내가 가리니) - 유대인들의 오해 - 예수의 영화

8:31-35(자유케 함) - 유대인들의 오해 - 영접한 사람들에게 주는 자유

8:51-53(죽음) - 유대인들의 오해 - 영생

8:56-58(나의 때를 봄) - 유대인들의 오해 - 하나님의 구속 행위의 성취인 예수

11:11-15(잠자다) - 제자들의 오해 - 죽음과 영생

11:23-25(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 마르다의 오해 - 부활과 영생의 근원인 예수

12:32-34(들리워지다) - 무리들의 오해 - 예수의 죽음과 영화

13:36-38(내가 가겠다) - 베드로의 오해 - 예수의 영화

14:4-6(내가 가려는 곳) - 도마의 오해 - 예수의 영화

14:7-9(네가 그를 보았다) - 빌립의 오해 - 예수가 아버지를 계시함

16:16-19(조금 후에) - 제자들의 오해 - 예수의 죽음과 제자들에게로 다시 돌아오심

(참고, 앨런 컬페퍼, <요한복음 해부>, 요단 출판사)

<아이러니의 예들>

7:3-5 그리스도가 세상에 드러나야 할 것을 말하지만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함

9:39-41 소경보다 더 소경된 자들의 자기에 대한 스스로의 언급

11:49-52 예수님의 죽음의 위대한 의미가 그 대적자의 입으로 말해짐

오해와 아이러니들은 표현된 말들의 의미를 피상적 차원에서 이해함으로 그 참 뜻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달리, 그 말의 더 깊은 의미를 아는 자리로 독자들을 초청하는 역할을 하며, 따라서 그들로 하여금 저자의 증거의 세계에 동참케 하는 묘미를 자아낸다.

* 상징의 사용

빛과 어두움, 어린 양, 놋뱀, 들림, 물, 떡, 목자 등의 많은 상징 언어들

별도의 종교적 언어들을 사용하지 않고, 일상적 언어들을 통해 심오한 종교적 뜻을 전달

영지주의적 상징 세계와의 차이

(참고, Samuel Laeuchli, The Language of Faith, London: Epworth, 1962).

첫째, 영지주의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언어의 상실’: 영지주의 문서 <진리복음서, Gospel of Truth>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는 살과 피를 잃어버린 존재, 그러나 요한복음은 “살아있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있는 그림”을 제시한다.

둘째, 영지주의의 ‘인간에 대한 언어의 상실’: 인간의 전체성에 대한 관점 대신 영과 육의 이원론적 분열 구조 속에 인간을 위치시킨다.

셋째, 영지주의의 ‘성경적 리얼리즘의 상실’: 영지주의는 조직적 상징주의로 인해 성경의 구체적이고 일상적 언어를 상징화된 ‘마술 또는 주술적’ 언어로 변질시키며, 그 결과 성경적 종말론을 상실하고 만다. 종말에 대한 모든 것이 영해되며, 따라서 역사적 맥락 가운데서 더 이상 기다림도, 변혁적 긴장도 없어지고 만다.

넷째, ‘구약성경의 상실’: 그 결과는 창조자의 상실이요 유일하신 언약의 하나님의 상실임과 동시에 혼합주의의 도입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섯째, ‘신앙공동체의 상실’: 영지주의는 지상적 공동체의 개념 대신 개별화된 영혼의 수직적 관계와 그로부터 얻는 ‘안식’, ‘재결합’, ‘완성’ 등의 영적 결과들만 강조한다. 이에 비해 요한복음은 하나님과 그 백성, 그 백성들 상호간의 공동체적 관계를 강조한다.

요한복음의 상징 세계는 영지주의의 상징 세계가 가지는 일상성의 상실, 현실성과 보편성의 상실, 암호화, 혼합주의화, 비 윤리화, 개인주의화의 위험에 결코 빠지지 않는다. 요한복음의 상징들은 우리 편에서 천상을 향한 영적 점프를 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로 성육신하여 오신 로고스로 인해 우리의 일상적 삶의 세계가 새로운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상징은 우리의 현실적 삶을 새롭게 보게 하는 변혁적 영성의 뿌리가 되고 있다.

4. 요한복음의 구조

*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

도입부: 로고스의 계시, 그리고 영접과 불신의 차이 명시(1:1-18)

표적의 책: 표적들을 중심으로 하는 사역의 전반부(1:19-12장)

영광의 책: 수난을 중심으로 하는 사역의 후반부(13:1-20장)

종결부: 부록적 종결(21장)

* ‘때’에 대한 언급이 전체의 흐름을 관장하는 중요한 키의 역할

2:4, 7:6, 7:30, 8:20, 12:23, 12:27, 13:1, 17:1, 19:25-27

5.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기사들

로고스 도입부(1:1-18)

가나 혼인잔치(2:1-12)

니고데모와의 대화(3:1-13)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4:1-26)

베데스다 못가의 병자 치유(5:1-18)

ego eimi 말씀들(6:35 등)

장막절 예루살렘 방문 기사(7:1-14)

간음하다 잡힌 여자(8:1-11)

실로암에서 씻어 고침받은 맹인(9:1-12)

죽은 나사로를 살림(11:1-16)

제자들의 발을 씻김(13:1-20)

보혜사 성령에 대한 말씀(14:1-31)

대제사장적 기도(17:1-26)

B. 요한복음의 신학적 특성

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

1) 기독론의 특성

* 로고스 기독론과 영광 기독론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독특한 로고스 기독론은 복음의 헬라화 시도인가?

오히려 헬라 세계를 포함한 코스모스 전체를 그 창조자와 창조자의 계시 속에서 새롭게 보도록 인도하는 도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신의 코스모스를 향하여 나타낸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과 직결된다. 아버지의 사랑을 위해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아 오고, 십자가에서 그 뜻을 온전히 순종하여 이루시며, 마침내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는 이 과정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이어진다.

요한복음에서 영광은 희생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희생의 과정 그 자체가 영광으로 제시되고 있다.

* 7개의 egô eimi (I am) 표현들 속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자기계시

① 6:35,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6:51 ‘산 떡’; 6:41 ‘하늘로서 내려온 떡’

② 8:12 ‘나는 세상의 빛이니’; 9:5 ‘세상의 빛’(egô 없이)

③ 10:7, 9 ‘나는 양의 문이라’, ‘내가 문이니’

④ 10:11, 14 ‘나는 선한 목자라’

⑤ 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⑥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⑦ 15:1, 5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나는 포도나무요’

(보어 없이 나오는 egô eimi의 절대적 용법도 주목: 8:24, 28, 58 등)

예수의 어떠하심은 곧 그와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어떠함을 나타내는 관계적 표현들이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기독론과 구원론의 통합적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 7개의 표적 기사들을 통해 나타나는 기독론

①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2:1-11)

② 가나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일(4:46-54)

③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5:2-18)

④ 오병이어의 기적(6:1-15)

⑤ 물 위를 걸으신 일(6:16-21)

⑥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치신 일(9:1-12)

⑦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11:1-44)

표적들을 통하여 ‘예수를 누구로 아느냐?’ 하는 문제가 중심적 역할

이는 표적들에 이어오는 논쟁들 속에서 자주 확인되고 있다.

예수께 가하는 인간의 제한을 포기하는 곳에 예수께서 열어주시는 새로운 신앙의 세계가 펼쳐진다. 예수가 누구신가에 대한 참 믿음과 고백이 그가 열어주시는 새로운 세계를 누리게 하는 열쇠가 된다.

2. 삼위일체론적 특성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하나 됨이 요한복음 전반에 걸쳐 강조되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의 반삼위일체론적 주장들은 이런 일체성을 깨트린다.

요1:1의 경우

요14:28의 경우

아들의 종속은 아버지와 그 뜻의 온전한 하나 됨에 대한 다른 표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상호계시는 모두가 그러할 위치에 있음을 전제한다.

3. 요한복음의 성령론

보혜사(paraklêtos)라는 독특한 이름의 사용

예수께서 그의 교회와 언제나 함께 하심의 증거로 오심(14:16)

교회를 항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와 믿음의 역동성 속에 머물게 하고, 자기만족에의 안주 대신 파루시아 대망의 행진이 현재진행형 되게 하시는 분

또한 교회가 직면하는 박해의 상황 속에서 진리의 증거에 착념케 하시는 분(15:26)

그 가운데서 교회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무한한 확신 가운데 살도록 하시는 분(16:13-14)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증거의 일관성을 이루게 한다. 성령 안에서 교회의 증거는 세상 끝 날까지 그 내용에 변함이 없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현재화한다. 그것은 과거의 일로 종결된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현재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4. 요한복음의 교회론

교회에 대한 명시적 표현은 없으나 교회를 나타내는 은유적, 관계적 표현들 통해

‘내 양’(10:14, 27)

‘포도나무’와 ‘가지’(15:1, 5)

‘자기 사람들’(13:1)

‘내게 주신 자들’(17:9, 24)

5. 요한복음의 종말론

헬라적 세계와의 접촉 와중에서 요한이 당대에 익숙한 신화적 종말론을 현재적 종말론으로 재해석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불트만(R. Bultmann) 이후 많은 비평적 학자들의 견해

그렇다면 요한복음에는 미래적 기다림의 요소는 없는가?

요5:24-29의 경우는 현재적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이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요한은 이 둘 사이의 긴장을 결코 소멸시키지 않는다. 이 긴장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현재적 모습이다.

요14-15장의 연속적 이해

예비된 영원한 맨션의 소망

⇒ 세상 속에서의 주님의 사람들의 위치, 사명, 핍박

⇒ 그 가운데서 주님과 더불어 누리는 친밀감

C. 본문 연구

I. 도입부(1:1-18)

1. 로고스의 계시(1:1-5)

헬라인들에게 있어서의 말씀(logos)의 개념

Logos prophorikos = uttered word

Logos endiathetos = word remained in the mind

사람의 속에 로고스가 있듯이 우주 속에도 질서와 조화의 세계를 만드는 원리

BC 6세기의 Heraclitus에게 있어서 로고스는 곧 하나님

스토아학파 사람들이 우주 속에 깃든 이성으로서의 로고스 개념 집중적으로 사용

유대인들에게 있어서의 말씀 개념

‘말씀으로의 창조’가 모든 것의 출발점,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

神名의 대체어로 ‘말씀’을 사용하기도(Targum of Jonathan에 약 320회)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경우 약 1300여회 logos를 사용

특히 하나님의 행위와 관련하여, 때로는 하나님을 대체하는 말로도 사용

헬라인이나 유대인에게 있어서 로고스 개념 자체가 낯선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요1:14의 선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말씀으로, 또 하나님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

빛과 어두움의 대조

어두움이 빛을 깨닫지/이기지(katalambanô) 못함

요한이 사용하는 이중의미(double meaning)의 예

2. 로고스에 대한 증거(1:6-8)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로서의 요한

“그는 이 빛이 아니요” -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1:20)

3. 영접과 불신의 차이(1:9-13)

배척의 주제

세상에 의해서 - 세상이 그 존재를 빚지고 있는 자를 배척

자기 백성에 의해서 - ‘자기 땅’(eis ta idia), 19:27에 동일 어구

영접의 주제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 자녀(tekna theou)의 권세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속하게 된 사람들

4. 그 백성 가운데서의 로고스의 영광(1:14-18)

말씀이 육신 되신 대사건: 하나님과 인간 관계의 일대 전환

거하심과 그 영광: 거하다(skênoô = 텐트에 거하다)

구약에서 하나님 영광(shekinah)-장막(mishkan)의 연결(출40:34-35, 민14:10 등)

그 영광이 이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 온전히 임하여 거함

하나님의 영광의 새로운 임재

1. “예수는 과거 장막의 대체” 또는 “새 성전”(Brown)

2. 그 영광과 효력이 모세 율법을 능가 - 아버지 품속의 독생하신 아들에 기인

3. 요한복음에 있어서 그 영광의 새로운 측면 - 십자가의 영광(12:23 등)

II. 표적의 책(1:19-12장)

A.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들(1:19-51)

1. 세례 요한의 사역과 그의 정체(1:19-28)

“나는 메시야가 아니다”: 아닌 것을 아니다 할 줄 알았던 사람

‘엘리야’(말4:5, cf. 마11:14 - 예수님이 이 타이틀을, 그의 부정에도 불구, 그에게 돌림)도

‘그 선지자’(신18:15-19)도 아니다

그의 자아정체성은 그가 사람들 앞에 소개하는 그보다 먼저 계신 분과의 관계 속에서

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1:29-34)

그보다 뒤에 오나 먼저 계신 자: 그 본질에 있어서 비교가 되지 않는 분

- 하나님의 어린 양(amnos)으로서(29절): 유월절 양을 염두에 둔 듯(비교, 19:31-36)

- 성령이 내려와 그 위에 머무는 분으로서(32-33절): 메시야이심의 증거(사11:2, 42:1 등)

- 하나님의 아들(ho hyios tou theou)로서(34절): 12절의 tekna와 달리 본질적 아들

3.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첫 제자들의 증거(1:35-51)

제자도를 나타내는 단어들: 좇는다(akoulotheô), 함께 거한다(menô)

안드레의 증거: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41절)

빌립의 증거: 모세와 선지자에 의해 약속된 자(45절)

나다나엘의 고백: 개인적 체험의 바탕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49절)

그 속에 작용하고 있던 편견의 제거(제거되지 못한 사람들과 비교)

그 속에 간사(dolos)가 없는 사람

진리에 대한 신속한 반응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자기 증거: 인자이신 분

단7:13과 창28:12의 복합

하늘과 땅을 잇는 계시의 장소

B.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새 시대의 도래(2-4장)

<2-10장 사이의 내러티브 구성>

* 이스라엘의 옛 제도들을 새롭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2:1-4:54)

그 상징 요소들을 각각 언급(결례의 돌 항아리, 성전, 랍비, 야곱의 우물, 예배처)

* 이스라엘의 절기들을 새롭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5:1-10:42)

그 상징 요소들을 각각 언급하고 자신의 의미를 연관하여 밝히심

1. 결례의 제도를 새롭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2:1-12)

* 교차대조 구조(chiastic structure)

a 1-2절: 날, 갈릴리 가나, 예수의 어머니, 예수, 제자들

b 3-5절: 포도주, 하인들

c 6-8절: 유대인의 결례, 돌 항아리

b' 9-10절: 포도주, 하인들

a' 11-12절: 갈릴리 가나, 예수, 제자들, 어머니, 날

결례의 돌 항아리(레11:33에 의거 흙 항아리는 배제) - 옛 제도의 상징물

다 떨어진 포도주와 마리아의 요청

아이러니 요소: 해당 결혼식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요청

예수님은 자신의 때를 위해 행동(비교, 7:2-6)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온 세상을 위해 천국의 새 포도주를 공급

혼인 잔치의 상징성: 메시야의 오심 통해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연회 시작

옛 것의 보다 풍성한 것으로의 대체: 새 포도주 공급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그의 영광(종국적으로는 십자가의 영광)을 나타내는 첫 표적

그의 오심과 죽으심이 온 세상으로 하여금 천국 연회를 누리도록 할 것을 암시

2. 새 성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2:13-25)

발단: 유월절의 성전 청결 사건

세 번의 유월절에 대한 언급(2:13, 6:4, 11:55)

성전에서의 매매 현상(산헤드린에서 가야바의 입장이 승리함으로)

명목은 헌물의 질과 순결을 보장하기 위함이나 실제로는 이익을 남기는 장사

즉석에서 만든 채찍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메시야의 날에 대한 기대:

성전의 갱신을 통해 이스라엘을 새롭게 함(사56:7, 렘7:11, 슥14:21, 말3:1)

유대인들과의 대화: 표적의 요구와 성전에 대한 말씀, 그리고 유대인의 오해

성전을 두고 이루어지는 오해

문자적 차원의 인식과 우리가 알아야 할 더 깊은 의미

의의: 옛 성전을 대체하는 새 성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몸

그의 죽으심과 부활의 암시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전적으로 새로운 측면

변화되어야 할 시각: 인간이 주인 노릇하는 옛 종교 대신 하나님과의 산 교제 속으로

결과: 많은 사람들의 믿음과 그 한계(2:23-25)

성전 권력자들과는 대립(계속 이어지는 논쟁들)

사람들의 믿음의 성격: 예수님과의 진정한 하나 됨 보다 표적 자체를 인함

사람들은 믿었으나(episteusan) 예수님은 그들을 믿지(의탁지)(episteuen) 않으심

그가 바라시는 합당한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의 관심 환기

이어지는 이야기 속으로 자연스럽게 연결

3.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백성을 찾으시는 예수 그리스도(3:1-21)

발단: 니고데모의 방문

유대 사회 속에서의 그의 지위(최상층 엘리트)

4장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조(최하층 서민)

대화: 니고데모가 예수께 돌리는 이름, 과연 합당한가?

‘거듭 남’ 또는 ‘위로부터 남’(anothen의 이중의미)에 대한 말씀

니고데모의 오해: 문자적 의미에 머묾

물과 성령으로 남에 대한 두 번째 말씀

한 전치사에 두 단어가 묶임(ex hydatos kai pneumatos)

물(양수)에 의한 육적 출생과 성령으로의 출생 구분은 용례 불충분

물 세례와 불 세례의 기독교적 구분은 역으로 읽기

둘은 한 짝으로 종말론적 갱신 상징(참고, 욜2:28, 사44:3, 겔36:25-27)

종말론적 새 시대의 성취로 말미암아 위로부터 남이 가능하게 됨

바람과 성령의 연관

옛 종교의 죽은 고착성을 넘어 성령 안에서의 역동성

니고데모의 무지(랍비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됨에 대한 계시적 선포

그는 ‘들려야’ 할 인자(들리다 hypsoô의 이중의미)

의의: 위로부터 온 자의 올바른 정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잘 가르치는 한 선생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문이요 열쇠

그의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결정적 사랑의 행위

이에 대한 가장 적합한 반응: 믿음

표적을 보고 믿는 피상적 믿음이 아니라, 참 빛에 대한 온전한 돌이킴

어두움에 속한 모든 것들로부터의 철저한 돌이킴

빛의 집(1:11)이 되어 빛과의 온전한 교제

변화되어야 할 시각: 단순한 선생이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운명의 결정자

그의 십자가가 우리를 아버지의 구원 속으로 인도

십자가의 길이 곧 영광의 길

4. 세례 요한의 증거(3:22-36)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26절)

온 세상이 다 그에게로 가야 할 것에 대한 아이러니적 표현

이에 대한 요한의 일관된 반응

다시 한번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자신의 사명과 위치에 대한 분명한 인식

“그는 흥하여야[만] 하겠고”: 온 세상이 마땅히(dei) 그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로 나아가야

“나는 쇠하여야[만] 하리라”: 주신 사명 기쁨으로 감당하고 유유히 퇴장할 줄 아는 사람

3:31-36의 위치는 약간의 논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 연결시켜야 할 것인지

아니면 세례 요한의 증거의 연속인지

양자를 다 포함하여 3장 전체에 대한 복음서 기자 자신의 신학적 결론부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증거하는 표현들:

“위로부터 오시는 이”(ho anothen erchomenos)

“하늘로서 오시는 이”(ho ek tou ouranou erchomenos)

“하나님의 보내신 이”(hon apesteilen ho thoes)

“아들”(ho huios)

아들과 아버지의 상호작용: 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고, 아버지가 성령을 주심

아버지의 것인 모든 것이 또한 아들의 손에 다 맡겨짐

참 믿음은 그의 본질과 기원을 바르게 아는 데서 비롯

아들에 대한 믿음과 불순종에 따라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됨

5. 참 예배를 가능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4:1-42)

발단: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를 통과

사마리아 길에 대해서는 요세푸스의 언급 참고:

“지금 사마리아는 로마의 지배 하에 있고, 황급한 여행을 위해서는 사마리아의 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이 편의로 인해 갈릴리로부터 3일 만에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화 1: “물을 좀 달라” - 물과 관련된 예수님의 대화의 주도

예수님에 대한 여인의 첫 인식

예수님의 본질에 대한 암시와 ‘생수’에 대한 언급

사마리아 여인의 오해

“내가 주는 물”의 본질과 성격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

여인의 갈망 - 표적의 차원

남편에 대한 언급 - 보다 깊은 갈망에 대한 터치

예수님에 대한 여인의 변화된 인식과 예배에 대한 질문

참된 예배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과 자신에 대한 계시적 선언

예수님에 대한 여인의 최종적 인식: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29절)

대화 2: 제자들과의 막간의 대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

제자들의 오해

자신의 양식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과 추수에 대한 언급

결과: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옴

그들의 신앙 고백: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42절)

유대인들의 구원자를 넘은 온 세상의 구원자

온 세상 속에 참되고 진정한 구원을 가지고 오시는 분

변화되어야 할 시각: 인간의 전통이 규정한 예배의 처소와 방법

이를 넘어 오신 메시야 안에서의 참 예배

그 자신이 살아 있는 성전이요, 하나님의 참 영광이 현현하는 거처

6. 왕의 신하의 병을 고치심(4:43-54)

배경: 갈릴리 가나, 해안에 위치한 가버나움에서 산지 쪽으로 약 30km

왕의 신하(분봉왕 헤롯 안디바의 궁중 신하로 보임)

하룻길을 마다치 않고 예수님을 찾아 와 그 아들의 병 고침을 간청

대화: 간청 - “내려 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예수님의 반응

거듭되는 간청 - “내 아이가 죽기 전에”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인간의 제한에 상관없이 그 자신의 주권적 방식에 따라 고치심

내려가지 않고도 고치심

‘죽기 전에’의 한계에 매이지 않는 분

의의: 우리의 한계나 전제, 제한을 넘어 그 분 자신의 어떠하심에 대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보여주고 있다(5:20-21, 보다 결정적으로는 11장의 표적기사 속에서)

변화되어야 할 시각: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인간의 필요의 충족자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명의 세계 속으로 사람들을 인도하시는 분

C.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진정한 절기의 의미들(5-10장)

1. 안식일과 관련하여(5:1-47)

배경: 이름이 명시되지 않은 ‘명절’(heortê = 9절의 ‘안식일’), 예루살렘에서

사건의 전개: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세 번째 표적)

‘베데스다’(Bethesda)는 사본상 Bethzada(현 Greek text), Bethsaida 등

베데스다의 히브리어의 의미는 ‘자비의 집’

쿰란 문서 가운데 Betheshdathayim의 못에 대한 언급이 나타남

3절하-4절(물의 동함에 관한 내용)은 필사자의 삽입으로 보임

신빙성 있는 가장 오랜 사본들(P66, P75, א, B, D 등)에는 이 부분이 없음

가장 자리의 설명(7절 이해의 열쇠 역할)을 본문 속으로 삽입한 듯

신성한 치료소와 연못은 헬라 세계의 치유 신 Asclepius 신전 이미지와 상통

유대 지도자들의 허락을 떠나 병자들의 미신과 열망에 따라 유지되고 있었던 듯

간헐 온천과 그 속의 미네랄 등이 치유 효과를 일으키기도 하였던 듯 하다.

사람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고치시는 예수님

자기 앞의 참 치유자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절망의 이유에 매달리는 사람의 모습

스스로의 어둠 속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의 또 다른 예: 10-18절의 ‘유대인들’

초래된 논쟁: 유대 법정적 분위기 속에서

고소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죄목 1: 안식일을 어김

죄목 2: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음

자신에 대한 그리스도의 변호(19-21절)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관계, 행위와 뜻의 일치(19하, homoiôs, 꼭 같이)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19, 30절) - 무능이 아니라 전적 일치

“그보다 더 큰 일[들]”(20절)은 21절에서 설명

아들에게 주어진 심판의 권세(exousia)에 대한 선언(22-29절)

아들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결정적 행위와 관련

아들에게 대한 모든 자세가 하나님에 대한 것

공경하는 자(ho timôn), 듣고 믿는 자(ho akouôn kai pisteuôn)를 요구

아들 안에서 내려지고 있는 판정의 현재형

“영생을 얻었고”(24절, 가지다의 현재형 echei 사용)

“사망에서(ek tou thanatou) 생명으로(eis tên zôên) 옮겼느니라”

(옮기다 metabainô의 완료형 사용, 이미 옮겨져 있는 상태의 지속)

따라서 현재가 영원한 미래를 결정

이 일의 결정적 중요성 강조하려 24-25절에 아멘 문구 반복

이 모든 일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ho huios tou theou)이심과(25절)

동시에 ‘인자’(huios anthrôpou, 관사 없이 인성강조)이심(27절)에 근거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들의 제시

증거 1: 인간적 증거(세례 요한)

증거 2: 신적 증거(하나님)

증거 3: 성경의 증거(모세)

증거 1은 조건적(이를 믿지 않는 자에게라도 증거 불충분이 되지는 않음)

요한은 “그 빛”(1:8, to phôs)이 아니라 “켜서 비취는 등불”(ho lychnos)

사람의 증거는 취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과 성경의 증거는 취하여야 할 것

이를 거부함은 하나님 사랑(tên agapên theou)을 가지지 않은 증거

예수의 거부는 인간의 영광에 대한 추구가 가득하다는 증거(44절)

그 결과는 영생과 심판의 나누임, 현재가 영원한 미래를 결정

의의: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고 영접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안식과 자신의 반역에 합당한 심판을 판가름 짓는 결정적 기준이 된다.

2. 유월절과 관련하여(6:1-71)

배경: 유월절(4절), 갈릴리 바다 주변, 가버나움

사건의 전개: 오병이어의 표적(1-15절, 네 번째 표적)

표적과 사람들의 반응: ‘그 선지자’(14절, 신18:15, 18에 근거), ‘임금’

물 위를 걸으심의 표적(16-21절)

자신에 대한 선언: “내니(egô eimi) 두려워 말라”(20절)

예수님의 강화: 사람들이 찾는 양식(유월절의 기대)과 인자가 주는 양식

사람들의 헛된 추구: ‘썩는(소멸되는, 버려지는, 12절) 양식’

인자가 주는 양식: ‘영생하도록 있는(머무는, 거하는, 51절) 양식’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 인자가 ‘주리니’(dôsei) - 51절 내가 ‘줄’(dôsô)

생명의 양식으로 자신을 주심

하나님의 역할: 인자를 인치심(sphragizô)

제물로 바쳐진 짐승이 흠 없음을 확인하는 절차

흠 없는 희생 제물로서의 그리스도를 암시

양식(만나)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31절) - 특히 유월절에

메시야 시대에 일어날 일을 출애굽 시대에 비추어 기대

“그 날에는 만나의 창고가 위로부터 다시 내려와서 그들이 그로부터 먹게 될 것이다”(2Bar. 29:8)

“첫 구속자가 만나가 내려오게 한 것처럼 마지막 구속자 역시 만나가 내려오게 할 것이다”(출16:4에 대한 Midrash Rabbah Eccles. 1:9)

사람들의 오해 시정: 조상들이 먹었던 것은 ‘모세의’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떡

‘하나님의 떡’에 대한 새 정의: 물질이 아니라 인격체

하늘로부터 와서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이(33절)

(ho katabainôn ... kai didous)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 떡이심에 대한 선언(35, 48, 51절)

그가 하늘로부터 오신 목적: 38-40절

논쟁 1: 예수의 기원과 관련

“우리가 안다”(42절) - 육신적 차원의 지식

예수께 대한 부정의 근거로 사용(비교, 7:27, 8:14, 9:29)

우리가 알아야 할 참 지식 - 합당한 자격자인 예수님께 배워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ei mê ho ôn para tou theou, 46절)

예수의 기원에 관한 전혀 다른 두 시각이 가지고 오는 결과:

“영생을 가졌나니”(47절, 54절) 가지다의 현재형(echei) 사용

“영생하리라”(51절, zêsei), “다시 살리리니”(54절, anastêsô) 미래형 사용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확정, 그 현재성과 미래성이 잘 연결되어 있다.

이 연결의 고리는 예수께서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심(50절)

논쟁 2: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51절)이라는 선언과 관련

먹음에 대한 문자적 의미에서 오는 유대인들의 오해

먹고 영생을 가지는 것(54절)은 믿고 영생을 얻는 것(40절)과 동의어

신자의 생명(현재와 영원히)은 예수를 계속적으로 먹는 것에 의존

(54, 57절, ho trôgôn 현재분사 - echei 현재형, zêsei 미래형)

논쟁 3: 제자들의 수군거림과 관련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63절) - 영은 생명수여자 성령을 지칭

영과 육의 이원론적 구조에서가 아니라 살리는 일에 관한 한 육의 무익성

예수님이 이미 말씀하신 것들은 영과 생명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을 요구

제자 중의 믿지 않는 자 - 따르는 것은 사람이 하나 믿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머무는 자와 떠나는 자의 구분

머무는 자의 고백: 영생의 말씀을 유일하게 가지신 분 =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

의의: 유월절 유대인들의 떡에 대한 기대를 그 자신의 본질과 연관시켜 재해석하심으로써, 그 안에서 사람들이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재발견하게 하고 있다. 그의 떡이심은 우리를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떡돌이와 떡순이로 자아 재발견이 이루어지게 한다.

3. 초막절과 관련하여(7:1-8:59)

a. 초반부의 강화

배경: 초막절(3-4월의 유월절 이후 9-10월의 초막절까지 약 6개월간 갈릴리에 머무심)

예수님의 형제들의 권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내 때’와 ‘너희 때’에 대한 구분(예수님의 때의 관점에서 보면 형제들의 말은 아이러니)

‘너희 때’(사람의 때)의 관점에서: 예수님 행위의 모순을 지적

‘나타나기를’(en parrêsia) 구하나 ‘묻혀서’(en kryptô) 행하고 있다

따라서 ‘나타내라’(phaneroô) - 육신적 동기에 근거한 권유

‘내 때’의 관점에서 행동하시는 예수님

7:10 ‘나타내지 않고’(ou phanerôs) ‘비밀히’(en kryptô) 올라가심

사람의 권유나 육신적 동기에 따라 행하시는 분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나 때가 되매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심

18:20 ‘드러내어 놓고’(parrêsia) 세상에 말하며, ‘은밀히’(en kryptô) 하지 않음

이는 미혹(planaô, 12절, 47절)의 주제와 연관 - 과연 누가 미혹자인가?

일반 유대인들과 유대 권력자들(당국자들)의 구분 필요(11, 13절 - 25, 26절)

예수께 돌려지고 있는 폄하 표현들: 7:15, 27, 41, 49

유대 당국자들(hoi archontes)들의 영역권 주장: 모든 권세는 우리로부터

우리로부터 나오지 않고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은 제거(죽이려 함)의 대상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나님께로부터 임에 대한 예수님의 논증

판단의 기준들을 따라 바르게 판단하라

1.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말하는 자와 보내심 받아 말하는 자 구분(18절)

자기 영광을 구하느냐 보내신 자의 영광을 구하느냐?

2. 모세 율법과의 관계에서: 누가 진정으로 토라의 준행자인가?

할례의 표만을 주는 자인가 아니면 전신을 온전케 하는 자인가?

(‘하물며’ qal wahomer 논법의 사용)

자신의 기원에 대한 예수님의 선언(28-29절)

믿는 자와 배척자의 분기점

‘돌아감’ ‘나 있는 곳’ 등의 표현에 대한 유대인들의 문자적 차원에서의 오해

공간 언어의 독특한 기능: 사람의 영역이 아닌 하나님의 영역의 회복

b. 하반부의 강화

배경: 명절(초막절) 끝날 곧 큰 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예수님의 초청(37절)

초막절에 유대인들이 물에 대해 가지는 기대와 헌수(獻水, libation) 예식

처음 엿새 동안 매일 실로암 못에서 황금 주전자에 물을 길어 옴

수문(Water Gate)에서 세 번 뿔나팔 울린 후 성전에 이름

종려와 버드나무 가지 등을 엮어 만든 룰랍(lulab)을 흔들며 제단 주위를 행진

제사장이 주전자를 취하여 제단 위의 주발에 따라서 제단에 부음

일곱 번째 날에는 일곱 번 제단 주위를 행진

랍비 문헌(Qohelet Rabbah 1:9)에 따르면

“첫 구속자가 샘이 솟아나게 한 것처럼, 마지막 구속자 또한 물을 주실 것이다.”

37절의 ‘명절 끝날 곧 큰 날’ = 헌수식이 정점에 이르는 제 7일인지

아니면 더 이상 헌수식 없이 대회로 모이는 제 8일인지의 논란

사람들의 기대가 정점에 달한 제 7일의 현장으로 보는 것이 나을 듯

예수님 자신이 이런 물을 주시는 메시야이심을 선포(37절, ‘내게로’ pros me)

우리가 마실 진정한 물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생수(비교, 4:13-14)

‘성경에 이름과 같이’는 정확히 어느 구절의 인용인지 불분명

(사12:3, 또는 겔47:1-11, 슥14:8)

39절의 괄호 안 설명부는 요한복음의 독특한 성령 이해를 반영

성령의 오심이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고 영광 받으심과 연관되어 있다.

무리의 반응: ‘그 선지자’(신18:15) - 우리에게 다시금 물을 주도록 약속된 분

또는 ‘그 그리스도’(ho christos) - 이를 두고 무리 중에 일어난 ‘쟁론’(분열, schisma)

‘참 빛’은 빛 속에 거하는 자와 어두움 속에 거하는 자를 나누는 역할을 한다.

육신적 시각에 의한 판단: “어찌 갈릴리에서”(41절 - 52절)

우리가 가져야 할 천상적 시각: 특히 8장에서(8:21-23, 42)

c. 삽입부

7:53-8:11의 사본상의 문제(부록 참조)

d. 종반부의 강화

8:12의 선언과 그 배경

(이 부분의 해설은 부록 참조)

4. 예수 안에서 빛을 찾은 한 사람의 예(9:1-41)

배경: 계속 예루살렘, 초막절 강화와 긴밀히 연결

“나는 세상의 빛” 선언의 실제적 예시(8:12 - 9:5)

예수를 통해 빛을 찾는 날 때부터 소경 된 한 사람

처음에는 육신의 눈을 떠서 보게 되나

종국에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고 경배(38절, proskyneô = 예배하다, 4:20-24)

사건의 전개:

1단계: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고쳐주심

2단계: 고침 받은 소경과 그 이웃 사람들과의 논쟁

3단계: 고침 받은 소경과 바리새인들과의 논쟁

4단계: 소경의 부모와 바리새인들과의 논쟁

5단계: 소경과 바리새인들과의 두 번째 논쟁

6단계: 예수님과 소경의 두 번째 만남

7단계: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두드러진 반전의 구조를 주목:

소경은 예수를 통해 보는 자가 되는 반면(하나님이 그에게 하신 일의 증거자)

본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은 더욱 어두운 소경으로 드러남

이 반전의 중심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39절, 빛과 어두움의 심판의 기능)

그를 중심으로 뒤바뀌는 판정들(34절의 정죄와 41절의 정죄 비교)

의의: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누가 진정으로 보는 자인가?

5. 수전절과 관련하여(10:1-42)

10장 강화(10:1-21)의 위치

9장과의 관계 속에서 보면 바리새인들의 거짓 목자상과 대비되는 참 목자상

소경의 눈 뜨게 한 일에 대한 계속적인 언급(21절)

10:22 이하의 수전절과 연관시켜 보면 그 배경 강화의 역할

앞과 뒤를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역할

절기적 측면에서는 초막절보다 수전절에 적합한 주제(물과 빛 → 목자)

수전절(Hanukkah, Feast of Dedication 또는 Festival of Lights)의 유래

이스라엘의 실패한 목자들(헬라화에 앞장섰던 Jason, Menelaus 같은 제사장들)

BC 165년 유다 마카비를 통한 성전의 수복과 봉헌

이 절기에 자주 읽는 성경 본문 중의 하나가 겔34장

예수님의 비유(paroimia)를 통한 가르침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양의 우리의 정황

문으로 들어가는 자와 담을 넘어 들어가는 자(누가 과연 하나님이 보내신 자인가?)

자기 양을 아는 자와 그 양을 모르는 자(누가 과연 양의 따름을 받는가?)

목자와 ‘자기 양’(ta idia probata, 비교 13:1 tous idious) 사이의 긴밀한 관계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부터의 합법적 목자

오직 그만이 자신의 양들을 끝까지 책임짐(10:15, 28, 비교 6:39, 13:1 등)

비유의 발전적 해석

문으로 들어가는 자(하나님과 관계에서의 합법성) → 문 자체(양과의 관계에서)

오직 하나의 문(제외적 특성)이 있고, 양들은 그 문을 통해 구원받게 됨(9절)

예수님은 구원에 이르는 문, 그를 통하지 않고 구원에 이르는 다른 길이 없음

유일하게 합법적 문이신 그 분을 통하는 자가 얻게 되는 결과(10절 하)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주는 ‘선한 목자’(11절)

오직 예수님만이 그러함(제외적 특성) - 그의 사랑의 극치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의 언급(16절) - 그의 사랑의 포괄성

‘한 목자’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한 무리’(비교 17:20-23)

그들을 인도해야만 하는 당위성(dei의 사용)

그 결과로 이루어지는 새 공동체의 비전

(word play: kai genêsontai mia poimnê, heis poimên)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과 자신이 받은 계명에 대한 자발적 순종

자기 양들의 구원을 위한 아버지와 아들의 온전한 뜻의 일치

아들의 일: “내가 나의 목숨을 버림이라”

아버지의 일: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무리들의 반응(19-21절): ‘다시 분쟁(schisma)’ - 모임(gathering)과 나누임(scattering)

솔로몬 행각에서의 논쟁(10:21-39)

유대인들의 요구(24절): 당신이 ‘그 그리스도’(ho christos)라면 ‘밝히’(parrêsiai = 공개적으로, 비교 7:4) 말하라 - 그들의 메시야 개념의 전제 위에서

특히 수전절의 상황 속에서 유대인들에게 증폭된 기대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은 이미 수없이 선포되고 증거되었다.

그가 자기 양들을 위하여 가지고 오는 진정한 유익

그들이 누리는 영생의 확실성은 그와 아버지가 하나이신 사실에 근거(30절)

이를 거부하는 유대인들 - 참람함(blasphemy)의 죄목

그들의 눈높이에서의 예수님의 논증

시82:6에 근거한 qal wahomer 논증 방식

자신의 본질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논증

유대인들의 반응: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음

반면 표적을 인하여 믿게 된 사람들(10:40-42)의 소개

그렇다면 진정으로 표적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11장으로 연결

D. 죽음을 향한 영광의 길(11-12장)

1. 생명을 주시는 자: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11:1-57)

배경: 베다니 마을, 예루살렘 동쪽 약 2-3km(18절)

마리아에 대한 소개(12장 사건을 앞당겨서 제시)

나사로의 중병에 대한 기별과 예수님의 이상한 지연반응

이 일이 가지고 올 결과와 목적에 대해 미리 암시(4절)

다가오는 위험과 낮의 열두 시간에 대한 언급 - 제한된 시간과 제한된 기회

‘이 세상의 빛’(9절, 비교 8:12)의 이중의미: 자연계의 태양과 영적 태양

이 태양은 밖에 있는 빛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안에 있는 빛(10절)

그 빛을 자기 안에 두지 않은 사람들은 넘어짐

자연계의 태양만 아니라 죽음을 투과하는 영원한 빛을 가져야 할 것에 대한 제시

이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적 제시

죽음과 관련해서도 두 가지 시각

예수님의 관점에서: 영광 나타냄의 도구(잠에 비유)

제자들(특히 도마)의 관점에서: 일면적이고 최종적(8, 16절)

부활을 새 현실로 보여주려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15절)

죽음은 현실이나 그 너머를 보지 못하는 제자들의 제한된 시야(16절)

예수님을 따라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죽으면 죽으리’의 차원 너머의 세계

참 예수를 만나기 위해 우리가 버려야 할 제한된 전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의 전개:

이미 결정된 상황 속으로

마르다와 마리아의 말의 전제(21, 32절)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23절)는 말씀과 일반적 유대인 신앙 속에서의 부활

예수님이 가지고 오시는 부활의 새로운 지평: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25절)

egô eimi 선언과 표적기사의 의미가 한 곳에서 결합

인간의 전제를 넘어 예수님이 열어주시는 믿음의 세계 속으로 나아가야

인간의 불신의 울음과 예수님의 화(embrimaomai, 33, 38절)

마땅치 아니함에 대한 강한 화의 표현

죽음 너머를 바라보지 못하는 인간의 불신에 대해(Beasley-Murray)

또는 그 속에 사람들을 가두는 영적 세력에 대해(Brown)

죄로 인한 인간의 죽음과 슬픔의 현실에 대한 예수님의 울음(35절)

“불신에 대한 화와 인간의 현실에 대한 슬퍼함이 균형을 이루는 것은 요한복음서 전체의 예수님의 모습과 조화를 이룬다”(Beasley-Murray)

이 사건의 의의:

나사로의 부활과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 믿음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표적

믿음의 재정의: 나의 전제가 예수님을 해석하지 않고 예수님이 나를 재해석

후반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모의

대제사장 가야바(재위 18-36년)의 공회 발언(50절)과 그 말의 아이러니

예수님 죽음의 의미(52절)

말하고도 모르는 자와 진정으로 아는 자의 구분: 참 이해의 세계 속으로의 초청

아이러니적 반전 구조:

생명을 주는 자 → 생명을 잃는 자 → 다시 생명을 주는 자

2. 생명을 내어주시는 자: 죽음의 길을 향해(12:1-50)

다시 베다니에서(예수님의 발 - 13장의 제자들의 발)

이번에는 행동의 아이러니

표면적으로 마리아의 행위는 자신의 최상, 최선의 것 드리는 순수한 헌신의 행위

나드(Nard)는 북인도로부터 수입되는 희귀한 향유

Pliny의 Natural History에 언급

관목의 잎과 연한 순에서 채취(때론 무게 늘리려 뿌리 부분을 섞기도)

붉은 빛의 글라디올러스 향기, 의료용, 와인에 섞어 음용, 또는 향수

마리아는 한 해치 품삯에 해당하는 분량을 아낌없이 소비

그 행위가 가지는 보다 깊은 의미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밝혀지고 있다.

예수님의 장사할 날을 위한 예비(7절)

그의 죽음이 가지는 의미(세상의 생명 위해 자신의 최상의 것을 아끼지 않으심)

다 알지 못하고 행한 행위가 가장 값진 죽음을 위한 예비의 행위가 됨

예루살렘 입성과 사람들의 환영

사람들의 ‘맞으러’ 나감(hypantêsis) - 높은 사람들에 대한 공적 영접의 행위

종려나무 가지와 호산나 외침 - 유다 마카비의 환영 상기

민족적 구원자에 대한 희구

호산나(시118:25, 26) - 그 구원의 참 의미 알 때 하나의 아이러니

나귀를 타신 왕

승리의 왕이나 영웅의 입성과는 거리가 먼 모습

그러나 그는 진정한 구원의 왕

그의 구원의 본질은 바리새인들의 언급(19절)에 의해 아이러니적으로 표현

헬라인(이방인의 총칭으로서)의 방문

온 세상이 그에게로 감의 한 실제적 예

그들의 등장이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23절, 인자의 영광의 때)

‘그 때’가 가지는 양면적 성격

영광(23절)과 동시에 고통의 때(27절)

겟세마네의 고뇌를 요한의 방식대로 표현

순종을 통해 아버지의 이름 영광되게 함이 예수님의 길

아들의 순종을 받으셨음과 이를 기뻐하심의 확인(28절)

예수님의 죽음의 방식 “땅에서 들리면”(32절) - 이중의미

그의 죽음과 이를 통한 영광은 실상 최대의 표적

그가 세상의 빛이 됨으로써 그 안에서 ‘빛의 아들들’(36절)과 어둠의 자식들이 명확히 구분된다.

믿음의 사람들은 온 세상으로부터 나아오나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 유대인들(37절)

명백한 증거와 특권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불신앙

이는 그 마음의 추구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에 있음을 증거(43절)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루어지는 궁극적 분기점

대전제: 그가 아버지께로부터이며 또한 아버지와 하나이신 사실

그가 전하는 ‘아버지의 계명’(50절, hê entolê autou = 48절, ta rhemata mou, ho logos hon elalêsa = 14:10, ta rhemata)

이 증거의 ‘말’이 가지는 법적 효력(illocutioanary force):

믿는 자: 영생을 ‘가지고 있고’ 또한 영원히 살 것(6:47-57)

믿지 않는 자: 현재 그를 저버림(48절) - 마지막 날에 ‘그 말이’ 심판

예수님 자신에 대한 현재의 반응(ho pisteuôn eis eme, 46절)이 영원한 결과 초래

결론적 의의: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밝혀지고 있고, 또 그가 무엇을 위해 세상에 오셨는지가 점점 더 뚜렷하게 밝혀지고 있다. 이제 이분에 대한 우리의 합당한 반응이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게 된다. 세상의 영광을 사랑함으로 자기 전제를 벗어버리지 못하는 자들은 부활이요 생명 자체이신 그분이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 속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자아와 세상에 대하여 죽음이 십자가 안에 나타난 가장 놀라운 영광의 빛을 우리 마음에 가득히 채우는 길이다.

III. 영광의 책(13-20장)

A. 제자들과의 마지막 유월절 만찬(13:1-30)

<구조적 이해>

13장의 분기점

12장까지는 주로 공적 사역에 해당

13-17장 부분은 제자들에게 국한된 사역

보냄 받은 자 → 보내시는 자 → 제자들의 역할 부각

‘세상’(이 부분 속에서 약 40회 언급)의 의미가 새로운 성격을 띰

예수님의 ‘자기 사람들’ ↔ 적대하는 세상

세상 속에서의 새로운 사명 공동체

1-12장에서는 표적들 → 설명 강화

13장부터는 역순: 자신의 죽음에 대한 설명 강화(13-17장) → 표적 중의 표적(18장 이하)

1. 자기 사람들에 대한 ‘끝까지’의 사랑(13:1-20)

13장 사건을 보는 시각

불트만(Bultmann)의 경우: 전승의 핵은 4-5절과 12-20절 부분

6-10은 복음서기자 자신의 첨가

중심 부분을 12절 이하로 잡아 하나의 moral 중심으로 이해

브라운(Brown)의 경우: 전반부는 상징적 행위, 후반부는 요한학파의 moral

오히려 무게중심은 전반부에 놓여진다.

13:1은 ‘때’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

이 때는 말씀이 육신 되신 일의 최정점이요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 이루는 때

이 때의 관점에서 보면 이 사건은 하나의 moral보다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상징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구분의 행위

적대하는 세상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위해 순종의 길을 걸어야 하는 사람들

그들 위에 십자가의 동일한 길과 사명을 지우는 일

‘자기 사람들’(hoi idioi = ‘아버지의 계명’ 따르는 자신의 증거자들)을 구별

그들을 십자가 길의 사명 공동체로 세우심

예수님의 ‘끝까지’(eis telos)의 사랑

시간적 의미에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질적 의미에서는 ‘충만한 부분까지’

어떤 방식으로든 십자가의 사랑으로 연결

이와 대비되는 사탄의 역사(2절)

사탄의 의지적 작용: ‘넣었더니’(27절에서는 더 결정적으로 ‘들어가다’)

유다의 의지적 작용: ‘유다의 마음’이 반응

사랑의 극진함에 대비된 배반의 차가움

그러나 배반의 끝자락에서 완성되는 구속의 길

예수님의 섬김의 행동(4절)

권위나 격식의 표시인 웃옷을 벗고 종의 자세를 취하심

보이는 차원을 넘어 자신의 생명까지 주심으로 섬기시는 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은 12장의 마리아의 발 씻김과 연결

그 충만한 의미를 깨닫는 것은 그의 죽음과 부활 이후(7절)

베드로의 반응과 씻음의 보다 깊은 의미(6-11절)

8절은 씻음의 외면적 의미 넘어 보다 깊은 의미가 있음을 암시

곧 그의 십자가의 피로 씻음(10절의 온 몸을 씻음과 연관)

12절 이하에서 그 의미의 설명과 적용

보냄을 받은 자에서 보내시는 자로(16, 20절)

세상 속에서의 제자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보여준다.

선생의 길을 가는 자들로서의 사명 공동체의 형성

2. 배반당하시는 선생(13:21-30)

배반하는 자는 “너희 중 하나”(21절), 곧 발 씻음을 받은 자들 가운데 하나

사탄의 작용(27절, “그 속에 들어간지라”)

유다의 일: “네 하는 일”

차별 없는 사랑과 그 사랑을 독으로 바꾸는 죄성

B. 고별 강화(13:31-17:26)

1. 사랑의 새 계명(13:31-38)

‘지금’ 인자의 영광 얻으심

아직 구체적 일들은 앞에 남아 있으나 예수님께는 이미 시작

미래적 순종이 아닌 현재적 순종

십자가의 순종의 죽으심이 자신의 영광이요 아버지의 영광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영광 돌리심

하나님이 ‘인자를 인하여’(en autô) 영광 받으심

하나님이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auton en autô) 영광을 주심

“곧 주시리라”(= 곧 그를 영화롭게 하리라) -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

아버지와 아들의(또 성령의) 상호관계가 제자들의 상호관계의 기초

그리스도의 사랑이 기초

서로를 그리스도 안에서 다르게 바라보는 새 관점

일차적으로 동역자들 속에서 실현되어야 할 사랑

그 바탕 위에서 세상을 향한 공동체적 싸움

예수님의 떠나심에 대한 언급(33절)과 베드로의 반응(36-38절)

2. 떠나심의 목적(14:1-31)

제자 공동체의 새로운 국면 - 선생이 가시적으로 함께 하지 않음

이 상황 속에서 그들에게 주시는 위로와 소망, 구체적 대처

근심하지 말라(= 마음이 요동되게 말라) - 허락의 주체, 그 마음을 어디로 향할 것인가?

하나님을 믿으라, 그리고 나를(eis eme) 믿으라 - 예수님에 대한 지속적, 인격적 의탁

처소를 예비하러 가시는 예수님

사라짐이 아니라 다시 오심을 위한 준비

아버지 집에 있는 많은 거처들(monai)

아름답고 소망스러운 것이긴 하나 우리의 최종 목표는 주님과 함께 있음(3절)

주님 자신 또한 그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의 궁극적 목표(23절)

‘아버지께로’ 이르는 유일한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

여섯 번째 egô eimi 말씀(6절)

그 자신이 진리와 생명이며 동시에 거기에 이르는 ‘그 길’

그를 따라갈 때 과정과 결과가 확실히 보장

이를 분리할 때 빌립과 같은 어리석은 질문

믿음의 눈으로 볼 때는 아들과 아버지가 하나(10절)

따라서 그는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

‘그 길’ ‘그 진리’ ‘그 생명’에 대한 믿음의 결과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들보다 더 큰 일에 대한 약속(12절)

구속사의 완성의 관점에서 이해

표적들을 보고서도 믿음에 이르지 못한 무리들

십자가와 부활, 성령의 오심 속에서 믿음을 일으키는 보다 큰 일

성령의 오심은 믿음의 기적을 일으킨다(참고, 고전12:1-2)

성령의 오심에 대한 첫 번째 예고(14:16-17)

“또 다른 보혜사” 예수님 자신의 다른 형태의 임재

보혜사(paraklêtos)라는 단어의 다양한 용례

제자들 속에서 가르치며 기억나게 하며 해석하여 깨닫게 함

(14:25-26, 16:13-14)

“진리의 영”으로서 성령은 세상이 받지 못하는 영(참고, 고전2:14)

그러나 성령은 제자들과 함께 함으로써 그들을 진리의 증거자 되게 함

16절의 ‘너희와 함께’(metha) = 내적 친교, availability

17절의 ‘너희와 함께(para) 거하심’ = 인격적 동행

17절의 ‘너희 속에’(en) = 성령의 내주

말씀의 증거 안에서의 사랑의 교제(18-24절)

‘아버지의 말씀’(24절) 증거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의 계명들 가진 자(21절, ho echôn tas entolas mou)로서의 제자들

그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하나 됨과 상호거주, 그리고 사랑의 관계

이것이 예수의 사람들과 세상을 구분짓는 요소

보혜사 성령에 대한 두 번째의 예고(25-26절)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자로서의 성령

예수의 일을 기억나게 하시는 사역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는 성령(14:16, 26)

아들이 아버지께로서 보내는 성령(15:26, 16:7-8)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그 주된 사역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관계(28절)

종속적 관계를 나타내나? - 아버지와의 완전한 뜻의 일치에 근거한 완전한 순종

요한복음의 양면적 언급:

일체성과 하나 됨 1:1-18, 5:16-18, 10:30, 20:28 등

의존성 4:34, 5:19-30, 8:29, 12:48-49 등

아버지의 유일하고도 완전한 대리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31절)

그의 죽음은 희생자, 패배자의 죽음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한 자발적 순종

3. 참 포도나무 예수 그리스도(15:1-17)

아버지 - 아들 관계 바탕 위에서 아들 - 자기 사람들의 관계

독특하고도 유일한 관계 - 신비적 연합

egô eimi 본문의 최고 정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그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가 이 두 측면이 긴밀히 연결

포도나무 메타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유대인들에게 친숙

(시80, 사5:1-7, 렘2:21, 12:10-11, 겔15:1-5, 17:1-6, 19:10-15, 호10:1-2 등)

동시에 언약적 불신실함의 부정적 이미지와도 결부

예수님은 자신을 ‘참’ 포도나무로 재정의

더 이상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닌 예수님 자신이 ‘하나의’ 포도나무

다른 모든 것들은 그의 가지로 이에 참여

그 안에서 우리가 새 이스라엘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 됨을 나타냄

우리의 구원/언약 백성 됨은 그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불가능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언약적 삶의 열매 또한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

그 결과는 ‘내 아버지’의 영광(8절)

보잘것 없는 우리의 일이 아버지의 영광이 되도록 중보하시는 그리스도

이런 관계 속에 있는 자들을 향한 배타적 ‘나의’ 사랑 등 강조

(나의 사랑, 나의 계명, 내 기쁨, 나의 친구, 내 제자 등)

‘참 포도나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관계

a. 사랑의 새 관계

아버지와의 사이에 - 그의 아버지가 곧 우리의 아버지

그의 이름으로 구할 수 있는 특권(16절)

다른 가지들과의 사이에 - 더 이상 개체가 아닌 집합체

서로 사랑하라(12, 17절)

b. 사명의 새 관계

아버지와의 사이에 - 아버지가 명하신 대로 행함(14:31)

예수님 자신이 보내심 받은 자, 아버지의 뜻의 준행자

제자들과의 사이에 -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16절)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열매 맺는 가지들

c. 한 포도나무 안에서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 되어 세상 속으로 뻗어감

아들과의 연합적 관계는 아들 속에서의 사명적 관계

4. 세상 속의 제자들(15:18-16:33)

a. 세상의 미움(13-17장의 ‘세상’ 40회 언급: 적대하는 세상)

그 미움의 이유: “나의 택함”(19절)

b.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이유: 아버지의 사명 수행(14:28-31)

c. 제자들의 고난의 이유: 아들의 사명 수행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20절)

예수의 받으신 그것을 받기를 기뻐하며 세상 속에서 고난 짊어지는 사명공동체

세 번째 보혜사 성령에 대한 언급(15:26)

‘내가 보낼’ 성령

특히 적대하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증거자로서의 성령

같은 증거의 사명 받은 ‘너희’(27절)를 붙드시는 분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의 신적, 인간적 측면

그 구원 사건의 영원한 측면과 역사적 측면의 증거

네 번째 보혜사 성령에 대한 언급(16:7-15)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7절)

구원 계획의 성취 과정에서 반드시 오셔야만 할 보혜사

보혜사의 힘을 주고 증거하는 사역과 더불어 심판적 사역

“그가 ...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책망한다(elenchô)는 것은 법적 죄의 입증

세상으로 하여금 그 잘못을 수긍하도록 입증하는 성령의 사역

세상이 성령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아니라(14:17), 세상이 그리스도에 대해 행하는 일의 성질(그 악함)이 무엇인지, 그 범과를 드러내는 일을 한다는 것

* 죄에 대하여: 관사 없이, 구체적 죄 하나하나 보다 그 죄성의 본질과 깊이

예수를 믿지 아니한 것이 가장 큰 죄임을 성령이 입증

* 의에 대하여: 세상이 의라고 생각하는 것의 반역적 성격을 드러냄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감은 이를 근본적으로 뒤집는 일

성령의 오심이 이를 입증

* 심판에 대하여: 세상이 바른 심판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부당성, 그 책임

그 인식 속에서 예수께 부당한 심판을 행한 모든 것에 대해

성령의 오심은 심판을 당한 자가 심판하는 자가 되셨음을 입증하는 일

성령의 오심은 예수님과 관련하여 세상이 행한 일의 악함을 드러내는 대반전 사건

세상이 가한 심판의 부당성을 입증하는 일이요, 그 배후의 관할자인 사탄이 치명타

예수께서 승리자요 하나님의 아들이며, 진정한 왕이요 심판자 - 이 영광의 증거

성령의 일의 핵심 - 그리스도의 영광(16:14)

16:16-22 제자들의 의문에 대한 답변

세상이 그 잘못된 판단에 따라 행할 일들이 가지고 오는 고통과 슬픔

그러나 이 고통은 해산의 과정이요, 곧 기쁨으로 대체

16:23-33 제자들이 누리게 될 특권

이 고통의 때를 통과한 후에 제자들과 성도들이 누릴 특권

예수의 이름이 믿는 자들이 아버지 앞에서 누릴 특권적 관계의 기초

기도의 응답(16:24)

아버지의 친히 사랑하심(16:27)

세상을 이기는 평안(16:33)

5.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17:1-26)

“The high priestly prayer” (H.C.G. Moule)

구성:A. 그 자신을 위한 기도(17:1-8)

B. 제자들을 위한 기도(17:9-19)

C. 더 넓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17:20-26)

ABC

간구의 제목1920

영광 주제1-51022

‘아버지여’51121

아들에게 주신 자2924

계시하시는 것6(이름)14(말씀)26(이름)

A. 그 자신을 위한 기도

반복되는 주제: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소서”

영광의 두 가지 측면:

세상 속에서 순종 통해 이루신 구속 사역(4절)

영원 전부터의 본래적 영광(5절)

이 모든 일에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영광 취하심

구원의 영원한 계획과 그 성취에 있어서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게 된 것이 아들의 영광

B. 제자들을 위한 기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기초한 제자들의 관계: “저희도 하나가 되게”(14절)

제자들의 정체성: ‘아버지의 말씀’(14절, 8절도)으로 새롭게 된 자들

세상으로부터의 구별 - 세상의 미움의 대상

새로운 사명 - 진리로 거룩함을 얻어 세상에 보내심 받은 자들(18-19절)

세상 속에 있으나(in the world, 11절)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not of the world, 14, 16절) 사람들 - “저희는 아버지의 것”(9절)

핵심적 간구: 아버지의 사람들인 이들을 아버지께서 친히 지키실 것(11, 15절)

C. 더 큰 제자 그룹을 위한 기도

관계의 설정: “저희 말을 인하여” 믿게 된 사람들(20절)

아버지의 말씀 → 아들 → 제자들(14절)

제자들의 말씀 → 다른 믿는 자들

그 안에서 형성되는 본질적 관계: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21절)

예수의 영광을 동일하게 입은 사람들(22절)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동일하게 이들에게도 주어짐(23, 26절)

예수를 믿는 자들이 영원히 그의 영광을 보며, 영원한 하나 됨의 관계 속에 거함

‘자기 사람들’에게 그의 모든 것 지상에서나 영원 차원에서 다 함께 하시며, 그들을 끝까지 돌보시고 챙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C. 수난과 죽음 기사(18-19장)

이 부분 속에 나타나는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의 차이

요한의 생략(omissions)

① 가룟 유다의 입맞춤

②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의 기도 장면

③ 제자들이 잠들어 있는 모습

④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다시 고쳐주신 일

⑤ 구레네인 시몬의 역할

⑥ 군중의 조롱

⑦ 십자가상에서의 외침

요한의 첨가(additions)

① 체포 장면에서 군인들이 땅에 엎드러짐

② 대제사장 안나스와의 대화

③ 빌라도와의 대화

④ 십자가상에 붙인 명패에 대한 논란

⑤ 예수의 옷에 대한 상세한 언급

⑥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신 일

⑦ 다리를 꺾으려고 하였던 일의 언급

⑧ 병사가 창으로 옆구리를 찌른 일

⑨ 예수님의 장사에 니고데모가 참여한 일

18:1-11 잡히시는 모습

유다의 입맞춤의 배반 장면은 생략되고 잡으러 온 자들과의 직접 대면

“내로라”(egô eimi, 5, 6절)는 말씀과 그 앞에 엎드러지는 사람들

제자들을 위한 보호

응함에 대한 문구(9절)는 6:39 등의 말씀에 대한 일차적 성취

영원한 성취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해당

“아버지께서 주신 잔”(11절)을 순종으로 받으심(그 고뇌는 12:27에 표현)

18:12-27 대제사장의 심문과 베드로의 부인

먼저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심문 받으심

안나스는 AD 15년에 총독 Valerius Gratus에 의해 강제 퇴위

그의 다섯 아들과 사위 가야바 배후에서 실세로 영향력 행사

안나스와의 대화 중의 핵심:

‘드러내어 놓고’(parrêsiai) 말하였으며 ‘은밀히’(en kryptô) 하지 않았다는 것

듣지 않는 자들에게 그것은 미혹의 말(7:47) - 자기 영역의 찬탈자

예수님은 자신의 영역 속으로 오신 분, 하나님의 임명에 의해 가르치시는 분

형식적 권위가 아닌 하나님의 권위로 말씀하시는 분

베드로의 부인

‘또 다른 제자’의 언급(15-16절)

문지기 여종 앞에서의 부인

불 쬐는 사람들 앞에서의 부인

말고의 친척 앞에서의 부인

18:28-19:16 빌라도 앞에서의 심문과 십자가 지기까지

교차대조 구조

A (18:28-32) 장면: outside

B (18:33-38a) 장면: inside

C (18:38b-40) outside

D (19:1-3) inside

a 채찍질

b 가시 면류관

c 자색 옷을 입히고

b' 유대인의 왕이여

a' 때리더라

C' (19:4-8) outside

B' (19:9-11) inside

A' (19:12-16) outside

특성: 예수님이 진정 누구인가 하는 점이 이야기 구조 속에 세밀히 제시됨

18:14에 가야바의 말을 재언급

예수님 죽음에 대한 아이러니적 진실 상기

D 부분에서의 극적 아이러니

예수님의 모욕을 위한 것이나 실상은 참 진실

“그는 왕이시다” - 아이러니를 통한 예수님의 참 진실

19:17-42 십자가 지심과 죽음

19:19의 빌라도가 쓴 명패

‘자칭’이라 하라 - ‘나의 쓸 것을 썼다’(22절)

십자가 사건은 요한의 관점에서는 왕으로서의 등극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의 성취가 이루어지는 곳

빌라도의 행동은 실상은 왕에 대한 그 나름의 봉사

예수를 죽이는 자가 실상은 그를 섬기는 자가 됨 - 또 다른 아이러니

19:34-35 십자가 사건의 진정한 의미

그의 죽음의 부정할 수 없는 현실: 목격자의 증언에 의거

목격 → 참된 증거 → 바른 믿음

부활 증언에서도 같은 패턴(20:26 이하)

목격(확인) → 보고 증거 → 복된 믿음

현대신학은 역의 순서: 믿음 → 십자가/부활 사건의 의미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는 초대 교회의 케뤼그마에 의존한다.

요한의 증거는 그 반대

십자가와 부활의 사실성에 근거한 진실된 증언 → 믿음으로 연결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의 상황 속에서 십자가 사건을 내면화시키려는 시도

참된 변화의 경험은 내면의 이미지화에 근거하지 않고 19:34-35의 증거 위에

성경의 성취로서의 예수님의 죽음

1. 그 옷을 제비 뽑음(19:23-24) - 시22:18

2. 내가 목마르다(19:28-30) - 시69:21

우슬초(막15:36 등에서는 갈대)의 언급 - 유월절과 연결

3. 그 뼈가 꺾이지 않음(19:36-37) - 시34:20(출12:46), 찌름 - 슥12:10

특히 유월절 양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서의 죽음의 의미가 강조 됨

숨은 제자들에 의한 예수님의 장사

예수의 숨은 제자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의 봉사

요셉은 공회원(막15:43)이며 부요한 자(마27:57)

자신의 신분이 드러날 것을 감수하고 예수님의 시신을 요청

(보통은 메달아 두어 날짐승들의 밥이 되게 함)

니고데모가 가지고 온 100근이나 되는 섞은 향료

몰약은 향료로 사용되던 귀한 물품(마2:11)

침향(알로에)이 장례에 쓰이는 일은 드문 일

100근이나 되는 향료는 왕의 장례를 위해서나 드릴만한 값진 봉사

새 무덤에의 안치(이런 죽음 당한 자에게는 부당하게 여기는 일)

왕이신 분의 죽음에 대한 ‘제한된’ 예우(시신에 대한 것이나 실상은 그 죽음의 뜻)

그 죽음이 세상 죄를 대속하는 영광의 죽음이라는 사실에 대한 간접 증거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며 온 세상의 왕이신 분

동시에 온 세상의 주되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은 나사렛 예수시라는 사실이 부각

우리의 일상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아무리 어둡더라도 그것은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예수의 빛 앞에서 새롭게 밝혀지고 하나님의 통치 영역으로 재 수용되어야 할 곳

D. 부활 기사(20장)

부활의 증인들

가장 먼저 무덤에 간 여인 막달라 마리아(2절의 ‘우리’, 막16:1이하 참고)

빈 무덤의 확인자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

부활의 첫 증인 막달라 마리아

죽은 자를 찾는 마리아에게 나타난 사신 자

이름을 부름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나타내시는 예수님

‘나를 만지지 말라’(mê mou haptou)는 말씀

단순한 접촉의 금지(도마에게는 허용)보다 매달림(embrace, cling)의 금지

이는 그가 아버지께로 가셔야 하고 변화된 관계의 필요 때문

제자들에게 주실 것(22절)의 준비를 위한 보냄(‘가서 이르되’)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심

두려움(19절)과 기쁨(20절)의 교차

제자들을 보내심(‘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성령 곧 자신의 영을 주심(14:23의 성취)

제자들 가운데 그가 자신의 영으로 함께 하심의 표시

그가 영광 받으신 후에 주실 영에 대한 예고(7:39)의 성취

제자들과의 새로운 임재적 관계의 방식

그의 임재 속에서 행하는 제자들의 사죄의 사역

도마에게 자신을 나타내심

도마로 하여금 그를 만져보게 하심

그의 부활의 증언자가 되도록 세우시기 위함

도마의 신앙고백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 믿게 되는 자들의 축복

요한복음의 기록의 목적

사본상 pisteusête(부정과거)로 볼 것인지 pisteuête(현재)로 볼 것인지 논란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이 믿는 자에게 가지고 오는 결과

IV. 종결부(21장)

디베랴 바다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부활의 주님

일곱 제자와의 만남

제자들의 먹을 것을 준비하여 주시는 주님

베드로의 회복: 세 번의 부정과 세 번의 사랑고백

‘내 어린 양’(arnia mou) 또는 ‘내 양’(probata mou)을 위한 사명

agapaôphileôarnia

agapaôphileôprobata

phileôphileôprobata

단어의 차이에 너무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베드로의 세 번의 부정에 비추어 세 번의 사랑의 확인

회복의 동기, 그리고 회복된 자에게 주시는 사명

사명 감당하는 자가 지불해야 할 대가: 베드로의 죽음의 방식에 대한 예고

증거의 책에 대한 종결

<부록>

‘그 말씀’ 2004년 10월호에 실렸던 글

세상의 빛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8장의 주해와 적용)

요한복음 8장은 7장에서부터 계속되고 있는 초막절 강화의 연장선 위에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이 부분 속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에 대해 중요한 내용들을 많이 밝히신다. 계시된 말씀을 따라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는 것이 우리에게 어두움 속에서의 빛이 되기도 하며 죄의 종 된 상태로부터의 자유를 가져오기도 한다. 반면 그를 믿지 아니할 때 사람들은 스스로의 어두움 속에 갇히게 되며, 스스로가 아끼고 자랑하는 모든 기득권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심판 아래에 놓이게 된다. 이토록 중요한 분기점을 형성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 앞에 진지하고 겸손하게 나아간다.

삽입된 에피소드(8:1-11)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의 이야기(7:53-8:11)는 사본상의 문제 때문에 우리 한글 번역 성경에서도 괄호 안에 묶여 있다. 가장 믿을만한 고대의 대문자 사본들 속에는 이 부분이 들어 있지 않다(P66, P75, א, B 등). 알렉산드리아 사본(A) 등에는 이 전후 부분이 유실되고 없으나 공간을 계산해보면 이 이야기가 들어갈 자리를 남기지 않는다. 고대 역본들 또한 이 부분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이를 포함하고 있는 사본들은 주로 서방 계통의 사본들이며 베자 사본(D)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것이 들어가 있는 위치도 일정하지 않아서 어떤 경우에는 7장 36절이나 44절 뒤에 넣은 사본도 있으며, 더러는 요21:25 뒤에나 눅21:38 뒤에 삽입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본래부터 현재의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독립적으로 볼 때 이 이야기는 아름답고 신빙성이 가득한 이야기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실제로 일어났던 이야기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이유 때문인지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 채택되지 않았고, 별도의 방식으로 존속하다가 어떤 시기에 와서 현 위치에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어거스틴이 소개하는 것처럼 이 이야기가 그리스도인 여성들의 행실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일부의 우려가 이 과정에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간음의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은 그를 동정하지도 않을뿐더러 이를 통해 예수를 얽어매려 하는 비정한 동기를 가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빠져나갈 수 없는 올가미에 걸려 있다. 이 여인의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moicheuein)가 미혼자보다는 기혼자의 부정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었던 것에 비추어 이 여인은 기혼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황 자체를 우리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혼자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해 여성이 더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형평성의 문제 따위는 이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끌고 오는 군중의 분위기 속에 다 파묻혀버리고 있다. 사람들의 목적은 예수님을 잡고자 하는 것인 만큼 이 여인에 대해서는 이미 죽어도 무방한 존재로 단정하고 있는 형편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자신의 공적 지위가 심각하게 도전받는 상황 속에서 자신만을 먼저 생각하고 그에 따라 상황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역시 군중의 인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중심판에 영합하지 않으신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과 그 필요를 보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그 여인은 일회용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예수님은 그녀를 죄를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의 삶을 살아야 할 한 소중한 인격으로 보신다. 나아가 예수님은 자신은 숨긴 채 남의 죄를 지적하고 정죄하기에 급급한 사람들의 이중성을 보신다. 과연 이런 사람들이 진정한 재판관이 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손가락으로 땅에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글을 쓰시다가 마침내 입을 열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8:7)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땅에 쓰셨을 지에 대해 고래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한다. 일부 사본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그들 각각의 죄’를 썼다고 첨부하는 경우도 있다. 비록 로마의 관습이기는 하지만 고대 세계에서는 죄의 선고가 있기 전에 먼저 죄목을 기록하는 일이 보편적이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땅에 기록하셨을 것으로 보는 것도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죄를 정확히 보고 계시다는 것을 전제한다. 어느 누가 과연 먼저 돌을 던질 것인가? 신17:7은 이런 형태의 유대식 형벌의 경우 증인이 먼저 돌로 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들의 죄의 증인을 앞에 두고 과연 누가 이 여인에 대한 심판적 증인 노릇을 할 사람이 있는가? 예수님의 말씀 앞에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자신이 이 여인보다 낫다는 상대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기세등등하게 몰려 왔던 사람들이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다 발길을 돌렸다. 남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진정한 심판자 앞에서 스스로 돌을 맞아 마땅한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결과일 것이다. 남을 정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남보다 앞서 자신을 먼저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을 필요가 있다. 참된 심판자는 외면적 행위만이 아니라 그 내면과 동기까지 살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비록 이 이야기가 처음부터 현재의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후대의 필사자들이 현 위치를 적합한 것으로 본 데에는 나름대로의 혜안이 있다고 본다. 이 부분은 그 앞뒤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핵심적인 논지가 어디에 모아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좌표의 역할을 한다. 앞으로는 7:24과 51, 뒤로는 8:15-16, 26, 50에 이어지는 심판의 주제가 부각되고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심판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시각은 너무나 제한되어 있다. 반면 예수님은 하늘의 관점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의 내면까지를 다 살피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 역사의 짧은 한 찰나 속에서 자기 자신조차도 제대로 다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영원의 시각을 가시신 분을 심판하려 하는 것이다. 정작 그런 그들에게 돌아갈 심판의 엄중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그들은 보아야 한다. 간음 중에 붙잡힌 여인의 이야기는 바로 이것을 보여주는 좋은 테스트 케이스가 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심판 앞에 선 자들에게는 새로운 삶의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부당한 심판권을 그리스도 위에 행사하려 하는 자들은 보다 깊은 정죄 아래 떨어지고 만다.

세상의 빛 예수 그리스도(8:12-30)

우리가 이 삽입된 이야기를 별도로 두고 볼 때, 8:12의 예수님의 말씀은 ‘또’(palin)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음을 본다. 우리는 이 부분이 7:37-38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에 이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초막절 절기 중 아침 제사 때 시행되었던 헌수(獻水, libation) 예식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수의 근원으로 밝히시는 것에 이어 8:12에서는 역시 초막절의 저녁 시간대에 거행되었던 빛의 예식과 관련하여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계시하신다.

초막절 미쉬나(Mishnah Sukkah 5.1)에는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 지켜졌는지에 대해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초막절 절기의 첫날이 끝나갈 때 사람들은 여인들의 뜰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황금 등대들이 있었는데, 등대들 각각에 네 개의 황금 주발들이 놓여 있었으며, 그 곁에 네 사다리들이 있었다. 제사장 계열의 네 명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손에 기름 종지를 들고 주발마다 기름을 채웠다. 심지는 제사장들이 입던 바지나 앞치마 등으로 만들었다. 이 헌수의 장소로부터 나는 빛에 의해 예루살렘의 뜰이 밝혀지지 않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경건한 사람들과 그 의로운 행실이 잘 알려진 사람들이 무리들 앞에서 손에 횃불을 들고 춤을 추었으며, 그들 앞에서 노래와 찬양을 불렀다.”

초막절에 행하여졌던 이와 같은 빛의 행사를 통해 유대인들은 조상들의 광야 생활을 이끌어 주었던 불기둥을 재현하고자 하였다. 더군다나 이 절기가 추분과 겹쳐 있는 만큼 이때를 정점으로 기울어가는 여름과 가을의 빛을 아쉬워하며 붙잡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 절기 중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신 장소가 어디인지를 일러주는 단서가 8:20에 나타난다. 그는 성전의 “연보 궤 앞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계신다. 성전을 찾는 유대인들은 여인들의 뜰에 마련된 13개의 뿔나팔 모양의 연보 궤를 통해 헌금을 드리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지금 이 여인들의 뜰에 계신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시점이 7:37의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연결되는 것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빛의 축제가 이루어지는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횃불의 빛이 환히 밝혀진 자리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빛으로 계시하시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갈망하는 빛이 단순히 황금 주발에 기름을 채워 밤을 밝히는 한 축제일의 빛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으로 세상 가운데 오신 살아 있는 인격인 그분 자신이 진정한 빛이심을 알리시는 것이다. 과거 광야 생활의 장막 위에 임하였던 그 영광의 빛을 그들이 사모하고 있다면, 더 이상 하나님의 빛은 그런 방식으로 사람이 손으로 지은 장막이나 성전 위에 임하지 아니할 것이다. 이제는 성육신하신 아들 위에 그 빛이 임하고 우리는 그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이 사실이 다른 시점도 아닌 초막절 절기에 맞추어서 선포되었다는 것이 의미심장한 일이다. 빛에 대한 사람들의 갈망이 최고조에 이른 자리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빛으로 선포하고 계신다. 그것도 단지 유대인들의 기대만을 만족시키는 제한된 의미의 빛이 아니다. 그는 온 세상을 밝히는 “세상의 빛”으로 자신을 나타내고 계신 것이다.

앞서 7장에서 ‘생수’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예수님께서는 초막절이라는 시점 속에서 유대인들을 사로잡는 기대가 무엇인지를 잘 아시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시는 것이다. 그들이 과거의 기적들을 상기하며 간절히 사모하는 생수나 빛은 다름 아닌 예수님 자신 속에서 성취되어졌다. 이제는 그들의 기대, 그들의 소망, 그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생각, 이 모든 것이 빛이요 생수의 근원이신 그분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를 나타내기 위해 멀리 있는 소재들을 끌어 오시지 않는다. 사람들의 삶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것을 사용하시고, 또 그것들이 새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닫혀 있던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빛이신 사실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9장의 한 예를 통해 생생히 제시되고 있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한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 고침을 받고 눈을 떠서 빛을 보게 된다. 그는 단순히 육신의 눈을 뜨게 된 것만이 아니라 차츰 믿음의 눈을 뜨고 하늘로부터이신 분 ‘인자’를 믿게 되었다. 그 안에서 그는 새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고, 세상을 진정으로 바르게 보는 자가 되었다. 빛이 있을 때만 우리는 세상의 비밀을 바르게 볼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이 빛이심으로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를 환히 보게 된다. 그 빛을 통해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단순히 우리 자신만이 아니다. 불트만의 이해는 이런 면에서 다소 제한적이다. 불트만은 이 빛을 통해 “실존 자체가 밝혀지고 그것이 그 본래의 것으로, 곧 생명으로 오게 된다”고 말한다. 인간 실존의 진정성(authenticity) 이것이 계시의 목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헨첸이 잘 지적하는 것처럼, 이런 진정성의 문제는 하이데거의 주제일지 모르나 요한의 주제는 아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자아발견을 넘어 하나님의 진리를 보게 만든다.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선언은 바리새인들 속에서 즉각적인 반대를 불러일으킨다.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증거가 적법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5:31)라는 이전의 말씀을 들어 예수님을 꼬투리 잡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시점에서 형식적인 법적 절차에 관심 가지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인격의 본질을 나타내시는데 관심을 가지신다. 이런 점은 예수님이 자신의 기원에 대해 아시는 것과 바리새인들이 이를 모른다는 것 사이의 대비를 통해 강하게 대조되고 있다. 그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그는 알지만 바리새인들은 모른다. 바리새인들은 육체를 따라 판단하지만 예수님의 판단은 그를 보내신 자에 따른 것이다(8:14-15).

이 부분에서의 논쟁은 7장과 유사성을 가진다. 7:27-30에서 예수님의 기원과 그의 보내신 자에 대한 언급, 그리고 유대인들이 그를 잡고자 하나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는 언급 등은 8:14-20 속에 병행적으로 되풀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8:21-22 속에서 예수님의 떠나심에 대한 언급과 이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 역시 7:33-36 속에서 이미 나타난 바 있다. 이런 반복 속에서 예수님의 참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 강조되고 있는데, 이런 면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던지는 결정적인 질문 “네가 누구냐”(8:25)에 대한 이 복음서의 대답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본질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는 요한이 빈번히 부각시키는 오해가 발생하고 있다.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8:21)는 말씀을 받아 “저가 자결하려는가”(8:22)라고 유대인들이 반응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오해의 희생자들은 예수님 말씀의 표피적인 면만을 건드릴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참 죽음의 의미를 아는 자들은 이것이 얼마나 복된 영광의 길인지를 깨닫게 된다. 이것의 차이는 단순한 지식의 차이로 그치지 않고 영원한 생사의 분기점을 만든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hoti ego eimi)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8:24)는 것이 육신을 따라 판단하는 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판결의 말씀이다. 그리고 이 생사의 분기점은 예수님의 죽으심 속에서 결정적으로 판가름 나게 된다.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hoti ego eimi)을 알” 것이라고 말씀하신다(8:28). 이처럼 끝까지 자신들의 육신적 판단에 따라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이 있겠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믿더라”(8:30)고 보고되고 있다.

다시 논쟁 속으로(8:31-59)

이 믿음의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31절부터 이어지고 있지만, 그 내용은 또 다른 논쟁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곳에서와 유사하게 이 논쟁 역시 예수님의 도전적 선언에서부터 시작된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1-32)는 말씀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종이 아니라는 항변으로 이 말씀을 받고 있지만, 그들의 관심이 무엇으로 나타나든지 상관없이 이 구절의 핵심은 예수님의 자기선포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거하여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지정하신다. 그것은 그의 말씀 안이다. 그의 말씀은 그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요(17:8) 또한 그 아버지의 말씀을 그가 제자들에게 주셨다(17:14). 그 말씀을 듣고 또한 지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결과를 가져온다.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8:51)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토록 중요한 이유는 그분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이며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씀 안에 거하는 자들은 곧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이 된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 부분에서 언급하시는 진리는 예수님 자신을 알고 믿고 따르는 것과 직결된다. 하나의 추상명사로서의 진리가 아니라 예수님이 진정 누구이신지를 알지 못할 때 알지 못하는 진리를 말하고 있다. 그는 진리를 가르치시는 분만이 아니라 그 자신이 진리이다(14:6). 따라서 그 진리가 초역사적 추상성 속에서 파악되지 않고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 실제적 삶 속에서 계시되었다는 사실이 핵심적으로 중요하다. 따라서 본문 속에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2)는 말씀이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8:36)는 말씀과 상호 호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선언에 이어지는 논쟁은 빌라도가 물었던 것처럼 “진리가 무엇이냐”(18:38)라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진리의 근원이 되는 아버지가 누구냐에 대한 물음으로 연결되고 있다. 예수님의 “내 아버지”에 대한 언급과 “너희 아비”에 대한 강한 대조가 두드러진다(8:38).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아버지로 주장하는 것에 대해 부정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아무리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 할지라도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8:37)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 됨을 보증 받을 수 없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지만(8:47) 사람들이 듣지 않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님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 된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녀 됨에 대한 그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다른 근원을 가짐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은 이것을 “거짓의 아비”인 마귀라고 지적하신다(8:44). 이 마귀는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는 자이다. 곧 그에게 속한 것은 전부가 거짓이며 이 거짓의 생산소로부터 모든 거짓들이 나온다. 따라서 그는 거짓 속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자이며 진리 앞에서 가장 불편함을 느끼는 자이다. 이 때문에 그는 진리를 대적할 수밖에 없다. 그 진리가 자신의 기만성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기만된 자들 또한 마귀와 공동체 의식을 느낀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한 공격이 마귀의 자녀들을 통해 예수님께 가하여지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폭로의 말씀 앞에 유대인들은 가장 심한 말로 반격을 가한다. 오히려 예수님 자신이 귀신이 들렸다고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8:48, 52). 이를 위해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육신적 지위에 집착한다. 이미 7장 속에서도 ‘육신에 따른’ 많은 판단들을 하였지만, 이 부분 속에서 그들의 무기는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8:39)는 것이며, 그에 근거해서 자기들의 “아버지는 한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라”(8:41)는 것이다.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적자(嫡子)인 반면 예수님은 피가 섞인 사마리아 사람이며 귀신 들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7장에서 강조하던 ‘갈릴리 사람’에 이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또 하나의 사회적 카테고리를 사용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 지위에 손상을 입히고 결국 이를 박탈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를 존경 대신 천대 받을 부류 가운데 하나로 매도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진정한 영광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 영광은 자신이 스스로 획책하는 것이 아니다.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8:54)라고 말씀하신다. 이 분을 유대인들은 아버지라 부르고 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아버지께서 영광을 돌리는 그분께 유대인들은 영광 돌리기를 거부하고 있다. 곧 자신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실제로는 아버지께 순종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킨다(8:55). 사람들이 불순종의 극치 가운데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을지라도 그는 아버지의 계명을 따라 자기 생명을 사람들을 위하여 스스로 버리심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다(10:17-18).

예수님은 그의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하는(8:44) 유대인들이 자신들에 대해 주장하는 말들의 허구성을 하나씩 하나씩 밝히고 계신다. 먼저는, 앞서 나타난 것처럼, “너희가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그 하나님은 너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은 아들과 아버지의 상호 영광 돌리심을 떠나서는 바로 알 수 없는 하나님이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유대인들의 주장을 다루고 있다. 그가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너희가 너희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아브라함은 너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런 아브라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알고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어떠한지는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8:56)는 말씀 속에 잘 나타난다.

다시 한번 유대인들의 즉각적인 반격이 따른다. “네가 아직 오십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는 것이다. 물론 이는 오십이 되면 아브라함을 볼 자격이 생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십의 나이는 유대인들에게 원로로 대접받을 수 있는 나이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직 그런 지위를 가지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네가 아브라함을 보았느냐?”(heorakas)는 8:57의 질문은 일부 사본에서는 “아브라함이 너를 보았느냐?”(heoraken se)로 나온다(P75 등). ‘아브라함이 나의 날을 보았다’는 56절의 예수님의 언급에 비추어서 이와 같이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메츠거가 잘 지적하는 것처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보다 아브라함의 권위가 월등히 더 크므로 ‘감히 네가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냐’ 하고 묻는 것이 보다 개연성이 있는 일로 보인다. 예수님은 그들이 형식적으로 의존하는 아브라함의 권위를 능가하는 파격적인 선언을 하신다. 곧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8:58)는 선언이 그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본질적으로 누구이시냐에 대한 중요한 선언이다. “내가 있다”는 표현은 ego eimi의 절대적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8:24절과 28절의 “내가 그인 줄”(hoti ego eimi, 원문에는 ‘그’가 나타나지 않는다)에 이어 예수님의 신적 자기계시의 말씀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런 표현 속에 나타난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감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돌을 들어 그를 치려하였다. 곧 레24:16 등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자들에 대한 형벌을 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그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었다. 다만 그들은 예수님을 그와 같이 믿지 않았던 것이다. 8:31에 예수님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그들의 믿음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결정적인 면에서는 허점을 보이고 있다. 믿음과 불신앙의 파도타기는 요한복음 속에서 계속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 가운데 하나이다.

이 연속되는 논쟁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대해서 가지는 인식과 예수님 자신의 참 모습이 얼마나 큰 차이를 가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한 ‘육체를 따른’ 판단을 넘어 그의 참 모습을 깨닫는 자리로 나아오도록 하기 위한 초청의 과정이다. 예수님에 대한 표피적 이해에 그치는 오해의 희생자들이 되지 말고 그를 바르게 알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에 이르는 빛 속으로 나아가며 참 제자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오늘에의 적용

이 본문의 말씀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참으로 크고 중요하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오늘 이 시대 속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미혹된 견해가 형성되기 쉽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의 참 모습을 따라 믿지 아니하고 자신의 필요와 조건에 따라 믿음으로 실상은 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온전한 영광에까지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요한복음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그에게 잘못된 이름들을 돌렸던 것과 같은 실수를 우리가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가 가지고 오시는 “세상의 빛”으로서의 그의 참 이름을 우리가 받을 때 우리 또한 그 안에서 빛의 사람들이 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이 빛의 사람의 삶을 삶으로써 예수님께서 당대에 하셨던 것처럼, 사람들의 일상의 기대와 소망을 진리의 빛으로 조명하고 재해석하게 하는 일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출처 : 智本知神
글쓴이 : Heal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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