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 그리스도

[스크랩] 성육신 하신 이유

하나님아들 2012. 8. 3. 17:04

 

성경: 딤전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제목: 성육신 하신 이유

 

주제: 내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신    목적을 깨닫고 그에 부합되는 삶을 사는 것이 신자에게는 필요하다.

    * 예수님께서 왜 오셨을까?

 

    * 어떻게 성탄절을 보내야 하나

     1. 경건한 축하가 되어야 한다← 성탄절은 하나님의 비하의 사건입니다.

     2. 경배해야 한다(마2:2, 11)

     3.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마2:11, 황금 유향, 몰약)

     4. 기뻐하고 찬양해야 합니다(마2:10, 눅2:10)

     5. 증거해야 합니다.(눅2:10)

     6. 나누어야 합니다.


   엊그제 극동방송을 듣는 중에 저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세상 사람들이 더 철저하게 준비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성탄절 특수를 잡기 위해서 각 상인들이 완벽하게 준비를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이상야릇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제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얼마나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했느냐하는 점에서 볼 때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는가를 모르면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세상사람을 바라보면서 아이러니칼한 생각을 가져보았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신자는 물론이거니와 불신자들이 더 요란하게 보내는 모습을 보면서 조금은 안타까운 생각도 듭니다. 우리는 흔히 생일을 맞이하면 그 생일의 주인공에게 선물을 주고 축하를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탄절만은 그 주인공이신 예수님께 선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선물을 나누고 즐기고 있으니 뭔가 대단히 잘못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쨌든 매년 맞이하는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왜 예수님께서 태어나셔야 했는가를 바로 아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설교제목도 “성육신 하신 이유‘라고 잡았습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의 구렁텅이속에서 인류를 건져내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으로서 그리스도의 오심도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긴 세월을 두고 준비하시고 선지자를 통해 예언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실현이었습니다. 우주 만물의 생성과 성장, 그리고 쇠퇴, 멸망은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섭리에 따라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인간이 특히 성도가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않고서 어떤 것을 판단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성도가 하나님께서 부르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값진 인생이라면 마땅히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태어나셔야 했는가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알고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이유도 모른 채 그저 기뻐한다면 그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에덴 동산에 살게 만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는 바람에 인간의 영과 육은 죄로 오염된 상태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인간이 최초로 범죄한 후의 행동은 하나님을 피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를 가지고는 다가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범죄함으로서 이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사이에는 죄라는 담으로 가리워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모를 떠나간 탕자를 기다리던 것이 절망과 배고픔이었듯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비참하고 부패한 원죄의 지배를 받는 불쌍한 인간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버렸습니다. 마침내 에덴낙원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창세기에 보면 인간을 유혹하여 타락시킨 사단을 저주하게 되고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도 종일토록 땀을 흘려야 땅의 소산을 먹고 여자는 해산하는 고통을 겪어야 하는 벌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창3:15에 처음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듯이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탄생하실 것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러시면서 창3:21에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죄를 범한 인간을 향한 사랑과 공의를 우리는 여기서 느껴야 합니다. 가죽옷을 짓기 위해서는 분명 짐승이 죽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짐승은 죽어야 할 죄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옷을 위해서 죽었던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실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부터 약 2000년 전에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것은 하나님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구속사를 성취하시기 위한 섭리에 따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은혜란 바로 받은 자격이 없는데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죄로 인해 버림받은 인간은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문제를 해결할 수 가 없는 불쌍한 존재인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인류역사를 살펴보면 죄의 삯인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인간의 노력은 정말로 처절하다고 보여집니다. 이것을 위해 인간은 철학을 만들고 각종 자력종교를 만들어 스스로 해결하려고 몸부림을 쳤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살펴보면 피조물인 인간이 조물주인 하나님으로부터 그 길을 찾지 아니하고 스스로 길을 찾았다는 데에 큰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마치 앞을 못 보는 소경과 같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소경이 되어 죄의 어둠 속을 헤매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작정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기에 죄를 가지고는 결코 그분 앞에 다가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인들을 사랑하사 그 죄문제 해결을 위한 계획을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일방적으로 가지고 계셨던 것이고 이제 그 구체적인 성취를 위해 바로 이 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육신이야말로 하나님의 죄인을 향한 지극한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작정을 성취하는 구체적인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바로 빌2:6-7 말씀처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잠시동안 말씀이신 그분께서 여러분과 같은 육체를 입으시고 이제 인류의 역사 한 가운데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자기비하인 것입니다. 죄인들을 위해 그 몸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죄악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빛이신 그분께서 오셨지만 어두움에 쌓인 죄인들은 결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거룩하신 그분께서 죄의 냄새가 진동하는 이 죄악세상의 죄인들 곁에 나신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랑의 표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낮고 낮은 이 세상에 인간의 형상을 입으시고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원 전부터 인류를 향해 가지고 있던 작정을 이제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는 보낸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어떤 행위도 끼어들 틈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전권적인 주권하에 이루어진 놀라운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전능하신 그분께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위해 태어나신 것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우리의 논리로서는 누구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바로 차원 높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류전체를 운영하시는 대원칙중의 하나인 공의를 결코 포기할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인간이 죄를 범한 이후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원칙은 지금도 지켜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는 원칙도 엄연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 중에 과연 그 누가 피를 흘리므로 죄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입니다. 불행하게도 타락한 인간은 이제 원죄로 말미암아 부패해 있기에 어느 누구도 원죄를 가지고 있는 이상 하나님 앞에 합당한 제물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죄문제 해결을 위해 예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스스로 해결 해보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인간의 무지함과 어리석음에 가슴이 아픕니다. 오래 전에 어떤 절에 잠시 들려서 스님이 하는 말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동정녀 탄생이 어디 가능한 일이냐고 허구성이 많은 것이 기독교라고 비판을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해석입니까?

 

해마다 성탄절이 돌아오면 많은 세상사람들이 파티를 벌이고 선물을 나누며 즐기기에 바쁩니다. 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는가를 모른 채 공휴일로 하루를 보내고 있는 현실을 보면 성도들의 책임이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죄문제 해결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탄생하신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동정녀 탄생을 문제삼지만 왜 그런 방법으로 육신을 입어야했는지를 모르기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죄문제 해결을 위한 속죄제물은 죄가 없는 다시 말해서 원죄가 없는 사람만이 자격이 되기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여 마리아의 몸을 빌어 이 세상에 탄생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느껴야 합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분께서 정해신 공의를 만족시켜야 하는 철두철미한 하나님의 거룩한 방법을 엿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을 결코 위반하는 방법으로 섭리를 하지 않습니다. 시38:28절에도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사랑하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정하신 방법에 어긋나지 않는 방법을 만족시키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저와 여러분이 구원을 얻은 것은 대가없이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불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기에 값비싼 대가를 치룬 것입니다. 그러기에 찬송가에도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로 속죄함 받은 것 아니요 거룩한 예수님의 보혈의 은총을 힘입어 속죄함을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때를 알지 못한 채 태어나지만 예수님은 한 마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해 죽으시기 위해 태어나신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분의 탄생은 십자가를 향해 있었고, 고난을 향해 있었습니다. 없으신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시기 위해 탄생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가장 비참한 죽음을 위해 태어나셨기에 처음부터 슬픔과 고통을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기쁨을 만끽하기 전에 경건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예수님의 아픔을 먼저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기뻐해야 할 날임에 분명하지만 예수님께는 고통의 시작임에 틀림없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순종이 있었기에 눅2:14절 말씀처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사건이야말로 예수님의 순종위에 이루어진 일이요 마리아의 순종위에 성취된 위대한 사건입니다. 얼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마리아의 순종하기 어려운 환경중에 목숨을 건 순종 위에 그리고 훨씬 이전에 예수님의 자기비하의 순종이야말로 예수님의 탄생의 배경이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임금인 마귀의 살기가 유다 온 땅을 지배하는 속에 예수님께서 태어났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눅2장을 보면 예수님이 탄생할 당시의 환경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을 하라는 이른바 호적령을 내린 시기였습니다. 로마 황제는 세금부과에 필요한 인구를 정확히 알기 위해 호적령을 내린 것입니다. 순전히 자신의 세금징수만을 위한 명령인 셈이지요. 그래서 요셉도 디윗의 집 족속인 이유로 갈리리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을 하기 위해 올라가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구약에 예언한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할 예수님은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령과 때를 같이하여 성취되었다는 것은 인류역사에 다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있음을 알려주기에 충분합니다. 비록 가이스 아구스도는 다른 목적으로 호적령을 내렸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위대한 메시야의 탄생을 가져오는 배경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한꺼번에 호적을 위해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다보니 사관이 부족하였고 마침내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왕이신 그분께서 드릴 방 한 칸이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는 비단 탄생하실 때만 방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사실 때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마는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듯이 집없이 사셨습니다. 어디 그 뿐 입니까? 예수님을 위해 무덤 하나 마련되어 있지 않아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을 빌려 쓰셨습니다. 철저하게 가나하게 태어나시고 살으시고 돌아가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에 우리가 생명을 얻은 것이요, 그분의 가나함 때문에 우리가 부함을 입은 것이요 그분의 고통 때문에 우리가 평안을 누림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산타클로스를 위해서 선물을 기다리는 마음의 방은 마련되어 있지만 나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모실 방이 없지 않은지 한번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한번 솔직히 생각해 보십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 어디에 거하실 수 있겠습니까?  최고급 호텔이나 화려한 궁전이면 충분하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감히 어떻게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인간이 만든 곳에 거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당시에 그분께서 태어나실 방 한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실 때 베들레헴에 방이 없었듯이 오늘 우리의 마음속에 그분을 맞이할 방이 없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해 탄생하셨습니다. 그런데 빈방이 없었던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방이 왜 없었겠습니까? 로마 군병들이 머물 방은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방은 그들에게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빠져버린 성탄절이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없이 크리스마스를 잘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서로 선물을 준비한다고 야단을 떨지만 정작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빠져 있지는 않은 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맞이할 방은 지금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 당시처럼 방이 없는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의 마음의 방이 혹시 탐욕과 정욕과 죄악으로 가득 채워져서 예수님께 드릴 방이 없는지 깊이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성탄절을 맞이하여 거룩하신 그분께서 머물 수 있는 마음의 방을 비워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40일 동안 대강절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오늘 성탄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흠없고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방이 정결하게 준비되어 잇지 않으면 결코 머무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머물고 싶어도 우리 스스로가 예수님을 쫓아내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 속에 탐욕을 털어 내버리고 정욕을 털어 내버리고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해진 마음으로 예수님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정결해지지 못한 탓에 예수님께서는 추운 날씨 속에 밖에서 떨고 계시는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섭리하에 때가 차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듯이 이제 멀지않아 하나님의 계획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그러한 은밀한 방법으로 이제 재림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린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초림하셨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 정도로 밖에 파악하지 않았고 그 욕망이 충족되지 않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제 재림하실 예수님을 맞이하는 성도들도 잘 깨어서 준비하지 않으면 신랑이 왔을 때 등은 준비하고 있었으나 기름이 준비되지 않아서 신랑을 놓쳐버린 미련한 다섯처녀가 될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이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잘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그 때를 알고 그 분께 경배를 드린 사람은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잠을 자지 않고 깨어서 양떼를 돌보던 목자들 몇몇과 동방박사 몇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헤롯왕이나 서기관들은 구약의 예언을 알았던 탓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결코 예수님을 맞이하여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헤롯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악한 계교를 세우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가지고 태어나는 그 순간에도 인간은 그 예수님을 죽이려는 간계를 꾸몄다는 것은 너무도 아이러니칼한 모습입니다. 성도라면 성경에 계시된 대로 이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착실히 준비하지 않으면 오히려 화가 미칠 뿐입니다. 벧전3:9에 보면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바로 저와 여러분이 회개하여 정결케 되어서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시간적 여유를 주기 위해 재림을 늦추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갈4:4말씀처럼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신’ 성육신 사건은 이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두 번째 재림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성육신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의미하듯이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는 말씀처럼 바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해 탄생하신 것입니다. 그 목적을 위해 저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이 낮고 천한 땅에 육신을 입고 영원을 버리고 시간이 흐르는 죄악이 넘쳐나는 세상에 그분이 오신 것입니다. 빛이신 그분께서 어두움에 쌓인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어두움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그분께서 사망의 권세아래 신음하고 있는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희망의 소식을 가지고 달려오신 것입니다. 더 이상 죄 아래 팔린 종이 되어서 절망과 죽음의 권세에 벌벌 떠는 모습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인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기비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그분의 생명까지도 십자가에 버리신 사랑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 십자가상에서 준비해 주신 사죄의 은총과 성결의 은총을 힘입어 천국을 바라보고 달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세기말의 성탄절을 맞이하는 저와 여러분은 이제 미움을 털어 내버리고 비어진 그 공간에 예수님의 사랑을 대신 채워야 하겠습니다. 교만대신에 겸손을 포학대신에 온유를, 태만대신에 부지런함을 음란대신에 순수함을 채워야 하겠습니다.

 

 나의 옛 자아를 죽이고 그 죽어진 자리에 예수님의 생명의 열매의 씨를 부지런히 뿌리는 성탄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동방박사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예수님께 드렸듯이 우리 또한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황금처럼 값지고 변치않는 믿음을 가지고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드렸듯이 우리 마음과 행실속에 예수님의 향기가 진동하는 향내나는 인격을 가지고 주님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몰약을 드렸듯이 이제는 내가 죽어지고 장사지내는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으로 주님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면 드릴 방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정말로 그분이 거하기에 적합한 방 말입니다. 아니면 우리 마음에도 그분께 드릴 방이 없어서 마구간에 쫒아내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1:11에 보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다’고 표현하고 있듯이 성도라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임재를 물리치는 생활인격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분명 예수님의 탄생은 모든 인류에게 희망을 다시 안겨주는 귀한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그 기쁜 소식을 접하지 못하고 성탄절을 하루 쉬는 공휴일 정도로 생각하고 욕망을 불태우기에 분주한 불신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두움에 빠져 지옥을 향해 달려가는 그들에게 생명줄을 던지는 귀한 성탄절 선물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기족 친지, 이웃 그리고 예수님을 모르는 모든 분들을 향해 생명줄을 던지는 귀한 성탄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직도 성탄절의 의미를 모르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이 희망의 멧세지를 전하는 복된 발걸음과 입술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2010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연도를 계산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막10:45 말씀처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하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주려함이라’는 말속에 담긴 의미는 성탄절에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섬김과 대속의 죽음을 통해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은 이제 또 다른 섬김을 실천하는 작은 예수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마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 우리가 섬김의 씨앗이 되어 썩어질 때 예수님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소식을 알게하는 귀한 통로가 될 것입니다.

 

날마다 성령강림을 기다리며 함께 모여 기도하며, 사랑의 교제를 하며 살았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이제 재림하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순간순간 해야하겠습니다. 그것이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성탄절의 의미를 살리는 일일 것입니다. 2000년 전에 태어나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살아서 역사하는 생명력있는 성탄절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소망중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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