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목회의 신학적 바탕
1.나의 자리는 어디인가?
신유의 은사와 영적인 치유를 이야기 하려면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어떠한 신앙의 자리에 앉아 있는지 마음을 쓰지 않을수 없다. 똑같이 성경말씀을 우리 신앙의 최종권위임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증거를 삶의 최우선 순위로 정하고 있는 신실한 기독교인들이라고 할지라도, 신유의 은사나 하나님의 기적을 이야기 할 때에는 생각이 다르고 주장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자기의 자링에 따라서 성도들은 신유의 은사와 하나님의 치유라는 글의 제목만 보고도 반응이 달라질수 있고 자기의 입장에 굳게 서서 타인의 생각을 무시하거나 간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먼저 우리의 신앙의 자리를 점검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신유의 은사와 영적 치유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한다.
1.오순절 운동
오순절 운동은, ①예수님을 영접한 후 두 번째 주시는 하나님의 복으로 성령세례를 강조한다. 성령세례는 방언을 증거로 주시며, 방언은 성령세례를 받은 자의 증거이다. ② 오순절운동은 공적 예배에서 방언을 말하며 은사집회를 통하여 방언받기를 구한다. ③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과거에 어느 교단에 속했든지 그 교단을 떠나 오순절 운동에 속한 교단으로 들어간다. ④오순절운동은 신유의 은사와 기적을 믿고 강조하지만 방언보다는 덜 중요시한다(Zimmerman, 1981). 오순절운동은 방언과 은사를 특별히 강조하는 것 외에 생활이나 신조에 있어서는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엄격한 보수신앙을 견지하며 철저한 생활의 순결을 강조한다.
2.은사운동
이 운동은 1960년 4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밴 나이스 성 마가 성공회 교회의 목사 데이빗 바네트신부가 예배 도중에 교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5개월 전에 자기가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실을 고백한 사건에 비롯되었다고 본다. 물론 그 이전에도 자기 교단을 떠나지 않고 방언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바네트 신부처럼 공개적으로 자기 교단에 머물겠다고 선언하지는 않았다. 은사운동은 ①방언과 함께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도 방언을 받아야만 성령세례를 받는 것은 아니라는, 약간은 부드러운 입장을 취한다. ② 공중예배시 방언하는 것을 자제하나 은사집회에서는 방언을 사모하며 신유를 구한다. ③방언의 은사를 받은 후에도 자기의 교단에 그대로 머문다. ④은사운동은 방언의 은사, 신유의 은사, 기적의 체험등을 같은 무게로 강조하며 2000년 전에 이스라엘 가운데서 기적을 베푸시던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 가운데서 신유의 은사를 베풀고 계신다고 믿는다.
3.전통적 복음주의 운동
필자는 특별히 합당한 제목을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전통적 복음주의 운동’이라고 명명했다. 이 제목은 복음주의 운동 가운데에서 방언, 방언통역, 신유, 기적 행함 등의 은사들이 사도시대가 끝나면서 중지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일컫는 말로 쓰여졌다.
이 뿌리는 프린스턴의 벤자민 위필드(Benjamin Warfield)와 존 캘빈(John Calvin)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통적인 복음주의 운동은 개혁신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신유의 은사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존 스토트(John R. Stott)는 1966년 베를린에서 있었던 세계복음주의 대회에서 “교회에서 주어진 사명은 병자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 오늘날 교회는 기적적인 치유사역을 행할 권세가 없습니다”라고 주장했다 (Wager, 1987:35). 우리는 전통적인 복음주의 운동의 입장을 패커 (J. I. Packer) 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분명히 볼수 있을 것이다.
은사운동자들이 주장하는 바 오순절 운동으로부터 이어받은 사도시대의 은사들이 현재도 나타난다는 이론은 적용이 불가능하다. 신약성경의 은사들, 방언, 방언통역, 신유, 기적행함등의 은사가 현재에도 나타난다는 것은 누구도 확인할수 없고 또 그런 것 같지도 않다. (Packer, 1984 :229)
4.제3의 물결
피터 와그너 (Peter Wagner)는 빈손 사이넌 (Vinson Synam)과 제임스 왕(James Wang)을 인용하면서 제 3의 물결을 주장한다 (Wagner, 1987:20). 와그너는 오순절운동이나 은사운동과 마찬가지로 성령님의 은사가 오늘날에도 나타날 뿐만 아니라 이 은사들은 교회성장과 그리스도의 복음확장과 성도들의 삶에 생명을 공급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다음의 네 가지 점에서 그의 제3의 물결은 오순절운동이나 은사운동과 다르다. ①신약성경에서 보는 성령님의 힘으로 가득 채워지는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성령세례(Baptism in the sprit)란 표현보다는 성령충만 ( filling with the sprit) 으로 이해해야 하며 성령을 받은 성도들도 계속적으로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 ② 성령세례는 일회적인 사건으로 성령님을 받아 교회의 지체로 가입하는 것 (고전 12:13)으로 보아야 한다. ③ 방언도 성령의 은사이나 모든 성도가 다 방언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④ 성령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성령님의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필요에 따라 성령님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사람들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실 수도 있고 안 주실수도 있다(Wagner, 1987:27-28). ⑤ 신유의 은사는 매우 중요한 성령의 은사로 그리스도으 복음증거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은사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대체로 위의 네가지 입장 가운데 어느 하나에 서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 오순절운동이나 은사운동이나 제 3의 물결의 입장은 그 정도나 강조점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신유의 은사가 오늘날에도 나타난다고 믿기 때문에 신유의 은사를 이야기 할 때에 별로 저항감 없이 받을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복음주의 입장에 서게 되면 사도시대와 함께 신유의 은사는 끝이 났기 때문에 오늘날 신유의 은사를 이야기 할 때에 상당한 저항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먼저 치유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를 하고 하나님의 역사와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사건들을 종합하면서, 하나님의 치유를 하나님께서 단순히 우리의 병을 고치시는 기적적인 행위가 아니라, “인간을 회복시키시고 구원하시는 믿음”의 사건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그리고 흔히 병고치는 은사로 이야기하는 신유는 하나님의 치유 (영적인 치유)의 과정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II.치유의 네가지 유형
아퀴나스 신학교 (Aquinas Institute of Theology)에서 목회학을 강의하다가 병으로 고통받는 형제들과 자매들의 상담을 받으면서 그들을 돕고자 기도하던 중 신유의 은사를 받은 프팬시스 맥너트는 질병의 종류와 그 질병의 발병원인에 따라서 네가지 형태의 치유로 유형을 나누어서 설명한다(MacNutt, 1992 : 201-202). 모든 질병은 같은 원인으로 오지 않는다. 어떤 질병은 개인적인 죄로 인해 발생할수 있으며, 또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감정의 상처로 인해 발생한 병도 있고, 사고나 질병이 원인이 되어서 생겨 나는 병도 있으며, 귀신으로 말미암아 오는 병도 있을수 있다. 질병의 원인들이 여러 가지라는 뜻은 그 질병을 고치는 데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필요하며, 그 질병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도 여러 가지 다른 기도를 드리지 않을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다양한 질병의 원인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질병의 치유에 대하여 대체로 세가지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있다. ① 첫 번째 입장은
②
③
①②③
그레스는 그 사람의 뇌파의 활동, 면역의 균형, 혈압과 피의 공급, 호흡의 속도와 호흡량, 내분비, 소화과정 등에 현저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Pelletier, 1977:35-36)
이렇게 감정이 원인이 되어 질병에 이르렀을 때에는 의학적인 치료와 함께 상담이 필요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도 고통스러운 과거의 상처들과 억압들과 스트레스를 치유해 주시도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3.육체적 질병
이것은 질병, 사고 심리적 스트레스 등의 정신-신체적 (Psychosomatic)인 원인에 의하여 발생하는 질병으로 성경은 이러한 질병을 하나님께서 고치시고 있다고 증거한다.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육체적 질병이 환자의 신체에 장애만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환자에게 총체적인 장애를 초래하고 있다고 암시한다. 예컨데 마가복음 1장 40-45절에 나오는 문둥병자들을 보자. 그의 질병은 부녕히 문둥병이라는 육체적인 원인에 의해서 왔다. 그러나 이 문둥병은 ①그에게 정신적으로 공포, 불안, 수치, 죄책감, 분노, 스트레스 등의 정서적 질병을 가져다 주고 있으며 (정서적인 장애). ②가족과 사회와 사랑하는 이웃과 격리되어 문둥병자촌에 수용되는 사회적 소외를 당하고 있으며 (사회적 장애). ③이웃과의 친밀관계가 단절되는 아픔을 경험하며 (관계의 장애). ④하나님께 재앙을 당하고 있다는 저주받은 (하나님과 단절되는 영적장애)인생을 살고 있다. 그러므로 신체적 장애는 다양한 질병과 장애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며 그의 삶을 총체적으로 위태롭게 만든다. 이렇게 신체적인 원인에 의하여 발생한 질병은 의학적인 방법을 사용하면서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를 위한 기도를 드릴 것이다. 신체적인 병이 총체적인 장애를 만들고 있기 때문에 신체적인 질병의 치유와 함께 총체적인 건강 회복을 위한 기도를 드리지 않으면 안된다.
4.귀신에 의한 병
성경은 귀신들려 질병에 빠진 사람들을 많이 소개하고 있다. 가나안 여인의 딸은 귀신들려 정신적으로 미쳐 있었으며 (마15 : 21-28) , 귀신이 들리면 간질병에 걸리기도 하며 (막9:14-29).눈멀고 벙어리 되게 하기도 한다.(마12:22)오늘 어떤 이들은 모든 질병이 귀신들림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극단에 흐르고, 다른 이들은 오늘날에는 귀신들림으로 병이 온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극단에 빠진다.모든 질병이 귀신 때문이 아닌 것은 사실이나 질병 가운데에는 귀신에 기인한 것도 있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사실이다. 이렇게 귀신에 기인하는 질병은 귀신을 쫒아내는 축사의 방법을 활용할수 있다. 그러나 중세기 이후에는 기도의 방법으로만 - 귀신들린 사람을 고칠때에는 그 귀신에게 책망하여 그 사람에게 떠나기를 명하고 있다(Green, 1994 : 185-186).
그러면 이상과 같이 질병의 유형이 다양하다고 하면 병든 사람을 치유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프랜시스 맥너트는 다음의 3단계 치유법을 제시하고 있다.
제 1 단계 : 근본적으로 어떠한 질병인가? 그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어디가 아픈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어 내는 단계
제 2 단계 : 질병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 “왜 이러한 질병을 앓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내는 단계.
제 3단계 : 어떠한 기도가 필요한가? 그 밖의 다른 치료법 (상담, 의학적 치료, 약물치료등)이 필요한가 등을 결정하는 단계.
하나님께서는 이 세가지 과정을 거쳐 환자를 총체적으로 치유한다고 우리는 믿는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질병을 고치실 때에 기도라는 한가지의 통로만을 통해서 고치시지 않고 그 외에도 그 발병의 원인에 따라서 약물치료, 의학적수단, 축사, 상담, 목회등의 통로를 통해서 얼마든지 환자를 치유하신다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기도라는 한 가지 통로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신유의 은사를 주신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하나의 통로 속에 가두는 위험스러운 일이다.
III. 신앙과 치유
1. 고침을 받으려면 믿어야 하는가
대체로 치유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믿으면 고침을 받는다’든지 또는 ‘믿음이 치유의 전제’라고 하든지 아니면 ‘고침을 받으려고 한다면 믿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성경을 읽어보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헤 주는 듯 보이는 구절들이 있다. 예수님은 “그의 옷에 손을 댄 여인을 향하여 ”딸아 내 믿으이 너를 구언하였느니라“(막5:34)라고 하셨다. 또 소경 바디매오를 향하여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5:34)라고 하셨다. 또 소경 바디메오를 향하여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리라“(막10:52)라고 말씀하시니 바디매오는 곧 보게 되어 에수님을 좇았다. 이러한 구절들만 찾으면 우리는 믿어야 고침을 받으며, 고침을 받으려면 믿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성경말씀과 하나님의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치별과 구원의 사건들 가운데는 수혜자(고침을 받거나 구언을 받은 자)들의 믿음과 치병과 구원사이에 어떤 연관을 찾기 어려운 사건들이 많이 있다. 38년동안 병이 들어 베데스다 못가에 누워 있던 병자는 자기를 고쳐준 이가 예수님이심을 알지도 못했는데 고침을 받았다(요5:12-13, 요5:18-20참조). 에수님께서 거라사인의 지방에서 만난 군대귀신들렸던 자는 예수님께서 더나기를 간구했으나 고침을 받았다.(막5:1-20) 가버나움에 있던 백부장의 하인과 왕의 신하의 아들은 집에 누워만 있었고 예수님을 만난 적고 없었으나, 고침을 받았다.(막8:5-12, 요4:46-54)(Tillich, 1966:4, 1964:7, 42.) 이 경우에 ‘믿음으로 고침을 받는다’는 명제를 정당화하려고 하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신유의 사건 가운데서 수혜자의 믿음이 신유의 조건이 되는 사건들도 있고 그렇지 않는 사건들도 있다면, 우리는 수혜자의 믿음과 신유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실제로 성경은 수혜자에게 전혀 믿음의 훈적이 보이지 않는 사건을 해석하면서도 신유는 믿음의 결과로 온 것이라고 한다. 사도행전 3장의 앉은뱅이 거지의 치유사건은 초대교회의 선교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제9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갈 때에 그 앉은뱅이는 사도들애게 무엇을 얻을까하여 쳐다 보고 있었다. 그는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는 사도들에게 더 많은 동전을 기대하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베드로는 단순히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랄”(행3:6)라고 명했다. 그리고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았을 때, 이것이 결코 자신들의 권능과 경건의 결과로 온 것이 아님을 선언했다.(행3:12) 이 구절은 앉은뱅이의 믿음도 베드로와 요한에게 있는 믿음도 앉은뱅이를 고치는 조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히 한다. 그러면서도 베드로는 이 사건이 믿음의 결과로 온 것이라고 밝힌다.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전3:16)
그렇다면 이 경우에 우리는 믿으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신유와 수헤자인 앉은뱅이에게도 믿음이 없었고, 신유의 은사를 실천한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권능이 없었다면, 이 앉은뱅이를 고친 권능, 즉 믿음은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신유의 사건들의 공통된 요소들을 분석하면서 그 대답을 찾고자 한다.
2. 신유의 사건의 공통요소
앞서 언급한 사건들은, 그것이 수혜자의 믿음으로 일어난 것이든 또는 수혜자에게 어떠한 믿음의 흔적도 없는데 일어난 사건이든 간에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①모든 신유의 사건에는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초점이 되고 있다. 12년을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 소경이 되어 거지 생활을 하고 있는 바디메오, 38년 동안 병으로 괴로워하던 백부장의 하인등 모든 치유의 사건은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의 초점을 모으고 있다. 성경의 신유 사건들은 그 병이 어떠한 병이냐, 또는 어떻게 하여 그런 병에 걸리게 되었느냐, 또는 어떠한 방법으로 고쳤느냐, 하는 것을 그렇게 중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그 환자가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느냐, 그 질병으로 어떠한 장애를 만나고 있느냐, 또는 어떻게 그 환자를 고통 가운데서 건져내어 생명이 넘치는 풍성한 삶을 살게 할 것이냐 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모든 성경의 신유 사건들의 첫 번째 공통점은 환자 자신과 그의 고통과 완전한 인간 회복, 즉 구원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② 성경의 신유 사건의 두 번째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지시고 그들을 질병의 고통 가운데서 건지실 뿐만 아니라 생명이 넘치는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떠한 인간의 권능이나 인간의 경건이나 믿음이 신유의 사건을 일으키는 힘이라고 암시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신 사건 속에서도 사람들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막2:12, 눅7:16 등)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그들의 병을 고치고 있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신유는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대로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슥4:6)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으로만 되는 것이다. 신유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하나님의 지혜에 따라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구원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유를 이야기할 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사역을 하나로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다.
③ 성경에 기록된 신유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손을 사용하여 베푸신다는 것이다. 4복음서에 기록된 대부분의 신유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하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심을 믿는다. 예수님의 치유는 인간 예수님의 치유이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와 달리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치유는 인간의 치유요, 예수님 자신은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이 병을 고칠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을 우리 곁에 서 있는 한 인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통점은 사도행전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치유는 전적으로 인간이라는 통로를 거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앉은뱅이를 고칠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의 치유의 통로가 되고 있으며(행3:1-16), 유두고를 살릴 때 바울은 하나님의 치유의 통로가 되고 있다..(행20:7-21)
이상에 언급한 세가지 요소는 성경에 기록된 어떠한 신유의 사건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도표로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3. 신유의 전 과정은 믿음의 사건
위에서 살펴본 대로 모든 신유의 사건은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환자에게 사랑의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께서 그가 선택하고 위임한 사람들을 통하여 고통당하는 환자를 치료하시고 넘치는 생명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의 구원사건이다. 즉, 신유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일어나는 사건이요, 고통당하는 인간을 회복시키시고 완전케 하시는 구원의 사건이요, 하나님이 선택하고 위임한 하나님의 종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목회(Ministry of God)를 일으키는 믿음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신유에 있는 것도 중심은 환자의 확신에 있는 것도 아니요, 질병을 고치는 신유에 있는 것도 아니다. 신유의 중심은 하나님께서 질병으로 고통하는 환자를 사랑하시고 그를 고치시기를 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에 있는 것이며, 그 환자를 고쳐 완전한 인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으로 회복시키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유는 하나님의 사건이요, 하나님의 구원이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을 믿음으로 넘치게 만들어가는 과정 가운데 하나이다. 즉, 신유 사건 그 자체는 믿음의 사건이요, 믿음의 과정이요, 믿음 그 자체인 것이다.
4. 영적 치유와 전인 회복
흔히 하나님께서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는 신유의 은사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적인 병인 죄를 용서하고 영생을 선물로 주시는 구원, 즉 소위 영적 치유를 구별하여 보는 것은 신유와 영적 치유(하나님의 구원)의 외형에 너무 지나치게 관심을 모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외형상으로 볼 때, 신유는 단순히 우리의 육체의 질병으로 고치는 하나님의 기적이다. 그러나 영적인 치유는 인간의 삶의 구석구석을 좀먹고, 썩게 만드는 죄의 독소를 물리치고 씻어내어 진정한 인간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본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더 깊이 살펴보면 신유와 영적 치유는 그처럼 명백하게 구별할 수 있는 경계선을 찾기 힘들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신유와 영적치유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양면이요, 영적 치유의 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문둥병 환자의 치유사례(막1:40~45)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마가복음 1장 40-45절에 기록된 문둥병 환자의 사건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이 사건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신 신유의 사건이다. 위에 언급한 네 입장 중에서 전통적 복음주의의 입장에 따르면, 이 사건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기적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이 사건의 목적은 단순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들의 입장을 따르면 문둥병으로 고통당하는 문둥병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이나 또는 문둥병을 고친 사건으로 그친다. 즉, 이 사건은 단순한 신유의 사건이요, 영적 치유와는 별개의 것이다.
사실 그런가? 좀더 자세히 이 사건을 살펴보자.
1) 문둥병자의 문제
문둥병이라는 몸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이 문둥병자는 육체적 질병 뿐만 아니라 총체적인 인간문제를 가지고 있다.
① 육체적인 결함 : 이 환자는 문둥병이라는 육체적인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다.
② 정신적 결함 : 이 환자는 문둥병으로 절망, 분노, 수치, 죄책감, 원망, 불안, 공포, 무기력, 부정적 사고 등 정신․정서적으로 충격을 받고 있다.
③ 사회적 소외 : 그는 사랑의 공동체로부터 강제로 격리되어 문둥병자촌에 수용되어 있으며, 모든 인간의 특권과 정체성을 빼앗기고 있다.
④ 영적 단절 : 이 병은 저주의 병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랑의 하나님이나 구원의 주님이 아니라 저주와 재앙의 하나님이 되고 있다.
⑤ 복합적인 문제들 : 문둥병은 이 환자에게 가정문제, 경제적인 문제, 관계의 문제 등을 가져왔으며, 죄의 삶을 살도록(하나님과 단절된 삶) 만들고 있다.
2) 예수님의 관심과 치유
① 정신․정서적의 치유 :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민망히 여기사’ 그를 고치셨다. 예수님은 먼저 문둥병자의 마음과 자기의 마음을 하나로 공감함으로 문둥병자의 상처입은 정서를 치유하고 있다.
② 사회적 소유의 치유 : 예수님은 교제가 금지된 문둥병자를 만나시며, 그의 몸에 손을 대시며,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리게 함으로 소외되었던 문둥병자에게 사회적 환원과 친밀 공동체 회복을 성취시키셨다.
③ 육체의 치유 :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고 말씀하심으로 문둥병이 그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함을 받게 하셨다.
④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 문둥병자는 예수님께서 문둥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심을 믿었다.(막 1:40, 마 11:2-5) 예수님께서 문둥병이 있는 환자의 몸에 손을 대시고, 말씀으로 그 병을 고쳐 주셨을 때, 저주의 하나님은 치유와 사랑의 하나님으로 바뀌었다. 이제 하나님은 더 이상 그를 버리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사 그를 고치셨다. 이제 그 문둥병자는 하나님께 감격하며 헌신하는 새사람이 되었다. (막1:45)
3) 치유와 구원
우리는 위에서 본 대로 문둥병자의 근본 문제가 육체의 병인 것을 사실이나 그의질병이 육체에만 머무르지 않고, 정신적, 사회적, 영적인 병까지 야기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그를 치유할 때에 문동병을 고치는 데에만 관심을 집중한 것이 아니라, 그의 정신적 ․정서적인 상처들까지 치유하시고 사회적 소외를 극복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도우며, 하나님과의 영적 단절을 치유하셨다. 예수님의 치유는 문둥병의 치료에만 머물지 않고 그를 하나님과의 사이에 사랑의 관계, 감격적인 친밀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데에까지 이르고 있다. 즉, 예수님의 치유는 질병의 치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둥병자의 모든 결함을 총체적으로 치유하사 하나님의 사랑으로 새출발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문둥병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문둥병자의 치유의 의미는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메시아가 저주받은 자기 몸의 질병을 고쳐주었다는 사실 앞에서 이 문둥병자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시며, 자기를 고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믿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경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소문을 전파하였다는 마가복음의 기록은 여러 가지를 우리에게 시사한다. 첫째로는 저주와 재앙의 고통으로 찢어지던 가슴에 치유받은 감격이 넘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눈은 이전과 같은 세상을 보고 있으나 그의 가슴속에는 새 세상을 보는 기쁨이 넘치고 있었다. 둘째로 문둥병 환자는 질병에서 고침을 받았지만 이 사건이 ① 그의 삶을 감격으로 넘치게 하며, ② 하나님 앞에서 감사와 감격이 넘치게 하며, ③ 사람들 앞에 자신 있게 외칠 수 있는 사명자로 서게 했다. 즉 이 문둥병자는 육체의 질병에서 고침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 새로운 관계를 회복(구원)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분명한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치유가 단순히 한 인간의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전인적으로 회복시키며,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은혜의 치로와 영적인 구원을 구분하는 것은 치유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오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Ⅳ. 구원과 치유
1. 인간존재 차원의 연계성
틸리히(Paul Tillich)는 인간의 관심사를 예비적 관심(Preliminary Concern)과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으로 구분하여 삶의 차원을 두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다.(Tillich, 1966 : 4, 1964 :7,42) 틸리히에 따르면, 예비적 관심은 우리 인간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필요와 욕구에 대한 관심이요, 궁극적 관심은 인간 존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다. 전자는 우리 육체적인 건강, 정신․정서적인 건장, 이웃과의 바른 관계, 사회적인 안녕과 정의사회 구현, 자연의 보존 등에 관한 인간의 필요를 채우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후자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수립에 그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이 양자는 서로 배타적이거나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며 양립적이다. 그 듯은 궁극적 관심이 예배적 관심의 보다 효과적 충족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틸리히에 따르면 ① 인간의 육체적 질병의 치유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촉진시키며, ② 하나님과의 관계회복(구원)은 육체의 질병 치료에 영향을 준다. ③ 그러므로 진정한 치유자는 육체의 질병만 치료하는 의사나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를 회복시키는 제사장이 아니라 ‘의사-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④ 예수님은 ‘의사-제사장’의 완전한 치유자의 모델이다.(Tillich, 1985 :58~77, 147).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궁극적 관심)에 중점을 두는 제사장(목사)들은 육체의 건강과 질병의 치료에 과심을 가지고 질병의 치료를 담당한 의사는 영적인 관계회복을 치향할 때에 진정한 치유자가 되는 것이다(ibid.).
브리스터(C.W.Brister)는 상담학자로서 조직신학자인 틸리히와 다른 입장에서 질병의 치료와 영적인 구원의 관계를 논하고 있다. 그는 목회상담의 목적의 독특성을 논하면서 일반 상담자들이 질병 그 자체의 치유에 관심을 가지는 데 비해서 목회 상담자들은 고통당하는 인간에게 관심의 초점을 모으기 때문데 내담자의 전인건강과 더불어 영적인 구원이라는 이중의 목표를 가지고 상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인건강이라는 것은 수평적인 삶의 차원을 건강하게 회복시키는 것이며, 몸의 건강, 정신 정서적 건강, 건전한 인간관계, 정의로운 사회구현, 자연의 보존 등을 통하여 인간의 삶의 전인성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반면에 영적 구원이라 함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우리의 모든 삶의 사뤈을 하나님의 영적 질서 안에서 조화로운 삶을 살게 하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는 것이다.
이러한 브리스터의 주장은 틸리히와 다른 용어를 사용할 뿐, 실제로 이 두 학자가 주장하는 삶의 차원들은 거의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학자는 한 사람은 조직신학자로서, 다른 한 사람은 상담학자로서 그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에, 구체적인 설명의 방법이나 사용하는 용어에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마음에 두고 있는 주장은 이 세상에서의 수평적인 삶의 차원과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삶의 차원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양자 모두의 치유가 없이는 건강한 인생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워드 클라인벨(Howard Clinebell)에게서 좀더 구체적인 삶의 차원들의 연계성을 볼 수 있다. 클라인벨은 상호의존적인 삶의 차원을 여섯 개로 구별하여 설명한다. 그중 다섯가지 차원은 수평적인 삶의 차원이요, 나머지 한 차원은 수직적인(영적인) 차원이다(Clinebell, 1987 : 50~60). ① 정신․정서적차원, ② 몸의 차원, ③ 이웃과의 관계의 차원, ④ 사회적 삶의 차원, ⑤ 자연과 관계적 삶, ⑥ 하나님과 관계적 차원, 즉 영적인 차원이다. 클라인벨에 따르면, 다섯가지 차원의 수평적 삶은 상호 연계되어 있어 다른 차원의 치유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이를 도표화하면 아래와 같다.
클라인벨은 수평적 차원의 삶이 서로 연계되어 있으므로 상담이나 목회는 전인적인 회복을 염두에 두고 상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지만, 그가 이처럼 여섯 가지의 삶의 차원들을 이야기할 때의 핵심은 영적인 차원에 중심을 둔 인간회복이라는 데에 있다. 즉 모든 수평적인 삶의 차원들은 영적인 삶의 차원들에 연계되어 있으며, 모든 수평적인 삶의 차원들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하에 놓일 때에 영적인 차원으로 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하면, 실제로 영적인 차원에 속한 제6의 삶은 존재하지 않으며 수평적인 다섯 가지 삶의 차원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때에 곧 영적 차원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영(Sprit)’이라는 뜻은 인간의 수평적 삶의 차원을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삶의 차원이다.
위의 도표는 5각뿔이다. ① 모든 수평적 삶의 차원은 서로 연계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차원의 변화는 다른 차원에 즉각적인 영향을 준다. ② 모든 수평적 삶의 차원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 ③ 하나님과 관계가 올바르게 된 수평적 차원은 영적인 차원을 갖게 된다. ④ 영적이라 함은 수평적 차원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에 생겨나는 새로운 차원이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의 수평적 차원은 수평적 차원일 뿐만 아니라 영적인 차원이 될 수 있다. ⑤ 일반적으로 치유는 수평적 차원의 치유(전인성 회복)에서 그칠 수 없고 수직적 차원(하나님과 관계)의 치유(구원)를 포함한다.
이상에서 논의한 것을 요약하면 인간의 모든 삶의 차원들은 상호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① 육체의 치유와 영적인 구원을 구별하여 이야기할 수 없고, ② 육체의 치유는 어떠한 모양으로든 우리의 영적인 삶에 영향을 미치며, 영적인 구원은 우리의 육체의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치료는 저절로 영적인 가치가 생겨나는가? 그리고 영적으로 구원을 받으면 모든 질병이 치료되는 것인가?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2. 치료, 구원 그리고 믿음
모든 치료가 구원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모든 의사들은 어떤 의미에서 영적인 사역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이 틸리히의 주장이다(Tillich. 1966:55). 그러나 우리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의 치유를 노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틸리히 주장은 우리의 논의 밖의 일이다. 신유의 은사는 육체의 질병 치료에 관심을 가진다는 데에서 의사의 관심과 비슷한 데가 없는 것은 아니나, 몇 가지 점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① 신유의 은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 나타난다. 이것은 단순히 의사가 병자 앞에서 치료행위를 하는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브리스터(C.W.Brister)가 지적한 대로 (Brister, 19:146)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이 환자 앞에 설 때에 그 환자는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거기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으며, 그 하나님 앞에 자기를 세운다. 즉 신유의 은사는 그 시작에서부터 몸의 질병의 치료와 함께 그 환자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한다. ② 교회공동체에서 질병을 치료하는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을 고친다. 가끔 약품이나 기름이나 물이나 술을 병해하여 사용할 수 있으나 이때에도 믿음의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안수하며 병을 고친다. 이때에 환자는 자기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는 자가 사람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자기에게 임재하신 주 예수님이심을 깨닫는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신유의 은사가 주 예수님을 환자와 직접 연결시켜주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유는 그 자체가 영적인 행위요 영적인 사건이다. ③ 신유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질병을 고치신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즉 신유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인간들 속에 들어오셔서 병으로 고통하는 환자를 병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건강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신유를 통하여 환자에게 들어오시며, 환자의 마음과 정서와 삶을 총체적으로 회복시키실 뿐만 아니라 그 환자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시고 하나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갖도록 만드신다.
우리는 여기에서 앞서 언급한 인간 존재 차원의 연계성을 거듭 확인한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수평적인 삶의 여러 차원들이 서로 연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수평적인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영적 삶의 회복에서 완성된다는 것이다. ① 하나님은 우리의 수평적 삶에 관심을 가지고 모든 수평적 차원의 삶을 건강하게 회복시키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불구자에게 완전함을 회복시키신다. 하나님은 애굽의 억압과 폭력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며, 모든 대적자들로부터 이스라엘을 건지신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한 부분이다. ② 그러므로 모든 수평적 차원은 그 자체의 건강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이라는 두 가지 삶의 차원을 가진다. 예를 들면, 건강 회복만으로는 몸의 가치가 완성되지 않으며 하나님 안에서 몸의 목적과 가치를 발견해야 진정한 몸의 건강을 이야기할 수 있다. 즉 몸의 건강은 그 자체만으로는 완전하지 않으며, 하나님 안에서 영적인 목적과 가치를 발견하여 영적인 몸이 되었을 때에만 완전한 건강을 회복한다. 그러므로 신유는 몸의 치료에만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건강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③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하시어 우리의 육체의 질병을 고치실 때에 그 질병의 치유와 함께 영적인 구원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치유하신다. ④ 하나님은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환자를 고치시며, 치유된 환자에게 더욱 영적 건강과 몸의 건강을 증진시키도록 교회에 위임하신다.
요약하면 모든 신유의 과정은 영적인 구원에서 완성되며, 영적인 구원은 몸의 치료와 전인 건강을 회복시킬 때에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넘치는 삶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이 모든 치유의 과정을 통해서 믿음은 환자와 신앙 공동체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상담이란? 목회 상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목회와 치유사역 (0) | 2013.02.15 |
---|---|
[스크랩] 신앙과 건강 (0) | 2013.02.15 |
[스크랩] 구원과 건강의 관계 (0) | 2013.02.15 |
[스크랩] 정신 건강 (0) | 2013.02.15 |
[스크랩] 성격유형2 (0) | 2013.0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