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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왜 휴거가 성경에는 없을까?

하나님아들 2013. 2. 1. 11:42

왜 휴거가 성경에는 없을까?

글 / 扈一麥 목사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교회생활을 어느 정도하면 자연스럽게 말하는 몇몇 단어들이 있는데 그중에 휴거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휴거라는 단어가 성경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휴거를 놓고 교인들은 휴거에 동참이 안되면 어쩌나하고 고심하고 관심을 가질까요? 그렇다면 휴거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그리고 휴거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생겼을까요? 그뜻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의문이 없으신가요? 우리나라 교인들이 이해하는 휴거는 실-휴(休) 살-거(居)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말을 바꾸면 일을 끝내고 쉰다는 뜻입니다. 성경적으로 정확하게 말하면 맞습니다. 그런데 세대주의 자들은 휴거는 들려 올라 간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세대주의 자들이 말하는 휴거(携擧)라는 단어는 들-휴(携) 들-거(擧)입니다.

먼저 이해를 구합니다. 휴거(携擧)라는 단어가 성경 안에 없다는 것에 휴거라는 사건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삼위일체(三位一體)' 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지만 성경 안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십니다.(마태 28:19). 천년왕국(千年王國) 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지만, 계시록 20장의 천년동안 이라는 단어를 확대 해석 한 것 같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어느 신학설(神學設)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렇게 나온 것이 휴거라는 단어이고 그학설을 진짜처럼 믿게 되면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등을 만들어 내게 되어서 혼란을 갖게하며 어느쪽을 택하느냐?에 따라서 신앙노선이 달라집니다.


1.휴거라는 신학이 언제부터 시작 되었을까요?

지상의 왕국을 세우기 위한 프리메이슨(사탄을 숭배하는 비밀조직)과 로마 카톨릭의 두 가지 전략에 있어 주요 양상은 지상에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지상왕국을 건설함에 있습니다. 세대주의 창시자 스코필드(Soofield)는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였으나 증거문헌이 필요했습니다. 스코필드는 성경을 읽을 때 성경에 표시를 하면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스코필드는 그것을 통해 영감과 가르침을 받았고 마침내 스코필드 관주 성경(Scofield Chain Reference Bible)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 스코필드 관주 성경이 교회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습니다. 이 성경은 평신도들이 성경을 독자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안목(眼目)을 제공했고 이 성경은 구원의 확신과 영원한 보증을 비롯한 많은 칼빈주의 교리를 알미니안주의 교회들에게까지 퍼뜨렸다는 점에서도 평가할 만합니다. 스코필드 이전까지 단한 사람의 성경 교사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그처럼 깊은 영향을 -그것이 좋은 영향이든 나쁜 영향이든 간에- 끼친 일은 없었습니다. 좋은영향과 나쁜영향을 동시 보게 되는데 나중에는 좋은 면은 사라지고 나쁜영향이 크게 부각 되었습니다.

이 성경주석이 끼친 좋은 영향중에 성경을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하려는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성경을 보호한 점도 인정해야합니다.그렇지만 이 성경은 세대주의 (dispensationalism) 라고 하는 하나의 분파를 발전시키고 대중화 시켰다는 점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세대주의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이미 세대주의자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세대주의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우선 스코필드의 이야기는 그의 책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구분함' 중에서 한 귀절입니다. "그렇다면 진리의 말씀은 적절한 시대로 구분되며, 그 시대 구분을 모르면 '책망 받을것이 없는 일꾼'이 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러한 시대 구분을 무시하는 어떠한 성경 연구도 전적으로 무익하며, 혼란만 가중시킬 따름이다." 스크필드 말대로 대부분의 교회들이, 하나님께서 인류를 대해 오신 방법은 구약 시대와 신약시대가 다르다고 인정합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 교부들도 이 두 시대를 인정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스코필드는 성경을 일곱 시대로 나누고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새로운 경륜이 작용한다고 말한 것을 믿고 있습니다. 즉, 각 시대는 자연인에 대한 새로운 시험(test)기간으로 생각될 수 있으며 그 시대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스코필드가 나눈 일곱 시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무죄 시대 2. 양심 시대 3. 인류 통치 시대 4.약속 시대
5. 율법 시대 6. 은혜 시대 7. 그리스도의 인격적 통치 시대(천년왕국 시대)


모든 세대주의 자들이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스코필드의 시대 구분을 따릅니다.

현대의 목사들도 다르지 않고 이 세대 주의론에 동의하여 그렇게 가르칩니다.

로마 카톧릭에서 태동한 휴거설

"휴거" 논리는 로마 카톨릭에서 400년 전에 기초를 놓은 가르침 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이러한 논리가 생기게 되었으며, 왜 이러한 논리가 생겼는가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만약 휴거 논리와 미래 적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그토록 열렬히 지지하는 개신교인들이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 경악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종교 혁명 당시, 마틴 루터와 그의 동료 개혁자들은 과감하게 교황이 "죄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밝혔으며 로마 카톨릭교회를 예언에 나타나 있는 적 그리스도의 세력이라고 지목하였습니다. 이러한 공격에 대하여 로마 카톨릭의 지도층에서는 로마 카톨릭가 그러한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예언 해석을 만들기 위하여, 두 명의 제수이트(예수회) 신부들에게 방어용 예언 해석의 책임을 맡기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두 신부는 개혁자들의 해석을 반대하기 위한 학설을 만들어 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겨난 학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신부의 이론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거의 모든 개신교 신학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 두 제수이트 신부들은, 마틴 루터가 교황을 적 그리스도로 지목하는 일을 효과적으로 방어했을 뿐 아니라 개혁 운동의 결과로 생겨난 모든 개신교회들의 항거운동을 교묘하게 분리시키고 희석시키는 일에 성공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종교의 흐름을 주의 깊게 지켜보는 사람들은 빌리 그래함 목사나 제리 포웰 목사 같은 개신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들이 미국과 바티칸의 정치적인 연합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지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라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토록 유명한 개신교의 대표자들이 로마 천주교회와의 연합에 대한 위험을 보지 못할 수 있는가? 그것은 그들 역시 다른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처럼, 종교 개혁자들의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입장을 희미하게 만들어 버린 로마 카톨릭의 두 신부들의 논리에 깊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정신 못 차리게 만든 두 신부의 학설(學說)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과거주의 설(說)

먼저, 알카잘 신부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에 대한 모든 예언을 안티오커스에피파네스 즉, 교황이 로마를 지배하기 오래 전에 살았던 한 장군에게 적용시킴으로써, 적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 이미 과거에 성취된 것으로 설명함으로써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지목하였던 개혁자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지금도 깨여있는 목사님들은 교황을 겨냥하지만 제수이트(예수회) 신부들에게 방어를 당해서 꼼짝을 못합니다.

2. 미래주의 설(說)

반면에, 제수이트(예수회) 신부인 프란시스코 리베라는 해석 방법에 있어서 미래주의로 알려진 학설을 창안해 내었습니다. 그는, 적 그리스도를 세상의 종말에 나타나서 3년 반 동안 세력을 유지하는 뛰어난 어떤 인간으로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그의 가르침도 교황을 향한 종교 개혁자들의 공격을 미래로 돌리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연히 과거주의나 미래주의적인 해석 중 둘 중에 하나를 받아들이거나 택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 가르침의 잔재가 기독교 신학에 남아있게 된 것입니다.

휴거의 이론과 미래의 적그리스도 이론은 제수이트의 두 신부가 교황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적그리스도에 관한 예언 해석을 왜곡시켜 놓았던 데에서부터 유래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그의 비 성경적인 학설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재해석 되어서 퍼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수백만의 침례교, 감리교, 오순절 파의 교인들이 예수회(제수이트) 신부들이 만든 잘못된 학설을 마치 오류가 있을 수 없는 교리처럼 받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초창기 신학자들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오면서부터 이런 학설을 가르치고 유명한 목사들이 그것을 재 교육하면서 점점 눈덩이처럼 되었습니다.

일례로 잘아는바와 같이 70-80년 대에 여의도 조용기 목사가 방송설교를 시작하면서 이 말세론을 주장하였고 재림날자를 정하기도 하였고 틀려서 사과도하고 하는등 물의를 이르키더니 큰교회 목사님이 주장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여서 인지 몰라도 그것을 들은 이단들이 그 학설을 재 해석하면서 주의 재림 날짜를 주장하기도 하고 휴거를 받으려면 신부단장을 해야한다고 하면서 자기들 단체에 들어와야 14만 4천의 수(數)에 가입할 수 있다고 하든지 일을 포기하고 예배만 드리면 깨끗해 진다는 교리를 만들며 사람들을 혼란으로 몰아갔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연구할 때, 기도하는 마음으로 연구하여야 하며, 또 성령이 주시는 지혜를 구하며 지혜롭게 그 장의 전체의 요약과 문맥과 문장과 배경사(背景史)를 함께 살피며 공부하여야 억지로 성경을 해석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휴거설"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인간이 만들어 낸 거짓 학설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진짜 휴거는 아무도 모르게 살짝 들리워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을 위하여 준비된 의인(구원 받은 무리)들이 공중에서 예수님을 만날 때, 바로 그 가장 감동적인 재림의 순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바르게 보는 관점에서

마태복음 24장에는 주님의 재림 때를 언급하고 있는 바, 두 사람이 밭을 갈고 있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고 했고,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다가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고 했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이 말씀은 세상을 살아가는 일상 상황을 그린 것입니다. 말세론 자들은 이구절을 휴거라는 단어로 이해를 합니다. 휴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두명이 있는데 구약에는 같이 구원을 받습니다. 같은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데려감을 당한다(paralambano)라는 헬라어는 다른 성경구절에서 다 적극적인 용법으로 쓰여진 단어입니다. 요한복음 14장 3절의 ‘처소를 예비하면… 나 있는 곳에 너희를 영접하여’라고 할 때 영접한다는 말이나 마태복음 17장 1절의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라고 할 때의 ‘데리시고’ 등에 쓰여진 말입니다. 이는 다 주님이 믿는 이들을 데리고 가실 때 쓰는 말이므로 적극 용법으로 사용됐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사용한 ‘파라람바노’는 주님의 재림과 환난의 때를 말하므로 더 적극적인 말로 쓰였으며, 결국 구원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또한 버려둔다(마 24:40)는 말은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에서 쓰였는데 이는 소극적으로 쓰였습니다. 필요하여 쓰임을 받았지만 이제는 필요치 않다는 것이고, 이 구절의 해석에서 주님에 의해 버려둠을 당한다고 할 때 그 말은 절대로 적극적으로 볼 수 없는 단어입니다.

마태복음의 이 구절들은 도적이 어느 시(時)에 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과 연결돼 있는데, 주님은 도적같이 오셔서 귀한 물건을 훔치러 오시는 분으로 비유돼 있습니다.(마 24:43). 그러니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니 철야파들이 나옵니다. 깨여 있는 것은 여러가지 입니다. 잠을 자지않고 깨여 있는 것만 깨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맹에서 깨여나는 것도 깨여나는 것입니다. 군대에 가면 특공대나 119 구조대는 평상시 근무시간에 쉬고 있지만 돌발상황이 발생하면 언제든지 바로 뛰어나가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마태복음 40절과 41절의 데려감을 당하는 것에 이어 하신 말씀입니다. 도적같이 오신다는 것은 아무도 오는 것을 모른 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오시는 것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자가 그를 반드시 만날 것입니다.

데려감 받을 자, 버림을 당할 자

그러면 주님이 누구를 데려가고 버림을 당할 것인가요? 그것은 휴거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휴거를 말씀했을까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구약의 구원은 집단 구원입니다. 구약에도 믿음으로 구원을 하셨지만 집단 구원을 하셨습니다. 이집트에서 마지막 열번째 재앙이 있던 날이 이스라엘은 구원의 날이었습니다.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이스라엘이 거하는 집에 문설주에 바르고 그안에 들어가는 자는 이스라엘이든지 이집트인든지 다 죽음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유월절에 성소에서 이스라엘 온 백성을 위하여 속죄 일에 양이나 염소 중에 숫컷을 잡아서 그피를 대제사장이 언약궤에 피를 뿌리면 하나님께서 그피를 보시고 온 백성의 죄를 일년동안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집트에서 마지막 열번째 재앙이 있던날 문밖에 있는 자는 버림을 당했고 피를 바른 문안에 있는 자는 죽음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강제로 구원해 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택하여서 집단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홍해를 건너고 광야의 교육기간이 끝이났을 때도 가나안에 여호수아를 통하여 집단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최소 집단이 열명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키려는 천사들에게 의인 10명을 거래하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열문둥이. 열드라크마 열처녀가 다섯은 데려감을 당하고 다섯은 버림을 당하는 것은 휴거로 보는 것이 아니고 구약시대의 끝으로 메시야가 오셨으니 구원의 법이 구약에 집단 구원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집단 구원이 아니고 주께서 택하시고 믿는 자만 구원하여 데려 가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잘못하여서 사람을 죽이는 죄를 범하면 도피성으로 도망하면 목숨을 보호받으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은 구원을 받았지만 그 살인한 죄는 대제사장이 죽어야 그죄가 없어져서 자유롭게 됩니다. 이제 구약의 대제사장이 죽고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늘의 대제사장이 되셨기 때문에 옛법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구원받은 자이며 늘 하늘나라에 갈 준비기 되어 있는 자를 데려가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한 집단에서 열명 중에 다섯만 데려 가신다는 것은 옛날 방식 대로 한묶음으로 데려가지 않고 주님께서 택한 백성 중에 믿음이 있는 자만 데려가신다는 것입니다. 두명이 있는데 믿음이 있는 한 명만 데려가신다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자들은?

우리가 말하며 기다리는 휴거는 예수님께서 그분의 성도들을 데리러 오실 때 일어날 사건이고, 예수님의 재림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으로 돌아올 때의 일을 말합니다. 유다서 14절은 이를 두고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성도들과 함께 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1절에서 바울은 “보라,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눈 깜짝할 사이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변형,곧 사람의 몸이 변화될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홀연히 우리들의 영화롭게(예수님의 부활때 모습)변한 몸은 모든 교회와 함께 주님 앞으로 불려가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일들은 모두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나는 바람에 우리 자신들도 그것이 진행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끝나버릴 것입니다. 개인 체험이지만 자동차에 치어서 자기가 죽은 지도 모르는 상태를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두고 빌립보서 3장 20-21절에서 “오직 우리의 시민귄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고 시민권이 하늘나라에 있는 확신있는 자는 언제 휴거되나?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 오시는 날이 언제인지 모르나 갑자기 온다하여도 하나도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바 베트남이 멸망하는 날 많은 사람들이 국외로 도망을 하였고 바다로 도망 하였지만 미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미국대사관 건물로 모여들었습니다. 미국 시민권이 있는 사람이라면 베트남인이든지 어느나라 사람이든지이 미국 국적만 확인되면 그들은 걱정할 것이 없었고 분명히 미국은 구원할 것이라고 확신을 하였습니다. 마찮가지입니다. 천국의 시민을 걱정을 할 것이 없습니다. 주 예수의 날에 썩지 않을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여 구원받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3절에서 우리들이 받아야 할 몸의 변화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또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나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6-18)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늘 준비하는 생활은 하여야 하지만 주님께서 맡겨준 일을 제쳐놓고 철야기도하고 가정도 버리고 생업도 버리고 신부단장 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야합니다. 주님께서 맡겨진 일에 충성을 하다보면 주님의 재림의 나팔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에 나오는 “끌어 올려”라는 말은 헬라어로 ‘하르파조’(harpazo)라는 말로써 그 의미는 ‘억센 힘에 의해 낚아채어지다’라는 뜻입니다. 헬라어 ‘하르파조’를 라틴말로 바꾸면 ‘라피오’(rapio)가 되는데 이는 원래 ‘강제로 끌어가다’라는 뜻입니다. 현존하는 성경번역본 중 가장 오래된 번역본들의 하나인 벨게이트(Vulgate) 라틴어 성경에는 바로 이 ‘라피오’가 4장 17절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끌려 올라가는 구체적 시점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히 재림의 날이 어느 날 혹은 어느 시간에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비성경적인 만용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때를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이 땅 위에 계셨을 때의 예수님보다도 더 뛰어난 지혜를 가졌노라고 말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주의 재림이 정확히 언제 일어날지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이르기를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장17절에 있는 'harpazo'라는 그리스 단어의 라틴어판 번역에서부터 나왔습니다. 그 그리스 단어인 'harpazo'는 '낚아채다 또는 잡아가 버리다' 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휴거라는 것은 국적 불명의 단어 입니다. 차라리 주의 '재림의 날'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모든 일은 재림의 날에 다 이루어지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날이 가까올수록 사모하고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세대주의자들이 날뛰는 것에 동조하다 보면 주님이 원하시는 본 뜻을 잃어버립니다. 깨어 분별하고 깨여서 지키고 깨여서 그날을 준비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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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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