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기준 세우기 - 6. 기복신앙
하나님의 기준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기준을 읽고 다른 사람이 보이고, 다른 교회들이 보이면, 하나님의 기준을 바로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바로 보게 되면, 자기 자신이 천리만리 주님 앞을 떠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자기 코가 석자인데, 남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 글이 자신 이외에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데 사용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모습의 가짜신앙을 따르고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거짓신앙이라하면, 많은 사람들이 교리가 틀린 것을 지적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올바르고 바른 교리는 우리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칼빈주의만 유일한 진리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신학을 공부해도 칼빈주의만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학자세계에서 대화 자체가 안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책 한권 읽은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칼빈주의와 다르면 이단소리부터 나오는 문화를, 일부 지역에서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에서 여러 가지 교리에 대하여 인정받은 교리들이 있습니다. 조금씩 다르지만 성서를 통해 인정을 받은 교리들입니다. 성서적인 바른 교리는 우리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기초를 놓아 줍니다.
성경에서는 거짓신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거짓신앙이 교리가 잘못된 거짓신앙을 이야기한 것이 많지 않습니다. 교리적으로는 전적으로 옳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오용되어서 거짓이 되어 버리고 만 것들을 무수히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건강하고 성서에서 위배되지 않는 교리를 지키는 것은 우리의 의무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가짜신앙을 성경이 지속적으로 이야기하지만, 그것에 대하여는 관심 밖으로 생각하고, 심지어 입으로만 기복신앙이 나쁜것이라 말하면서, 여전히 자신이 기복신앙에 빠져있는 것은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흔히 복을 많이 강조하면, 그것을 기복신앙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복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으면, 기복신앙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거짓 신앙체계로서의 기복주의 내지는 기복신앙은 그러한 구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에 대해서 강조하건 안하건 상관없이 우리 주변에는 기복신앙 널려있습니다.
기복신앙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이 우리의 수단된 신앙입니다.
우리의 참된 신앙은 하나님 그분이 나의 인생의 목적이요 목표가 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이 타락하면, 우리는 자기의 목적을 위해 살면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우리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그것이 기복신앙입니다.
예레미야 시대는 영적으로 지극히 타락하여, 실제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서에 보면, 가짜신앙이 판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형적인 기복신앙의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예레미야 시대가 시대말적인 상황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극히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에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여,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하나님은 그 시대의 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2:13).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영적으로 타락한 시대인데,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는 하나님께 대한 큰 희생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시바와 원방에까지 가서 특별한 유향과 향품을 사다가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습니다(렘 6:20).
시바는 오늘날의 에티오피아나 예멘이며, 여기의 원방은 많은 학자들이 인도라고 말합니다. 비행기도 자동차도 철도도 없던 시절에 그 먼곳 까지 수개월을 걸어서 다녀왔으니 얼마나 큰 희생입니까?
그 먼 거리에서 온 특별한 향품들이니, 얼마나 귀하고 비싼 것이었겠습니까?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러한 유향이나 향품들을 하나님을 위해 사서,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주일이면, 제일좋은 옷을 준비하고, 구겨지지 않은 현금을 미리 준비하고, 예배 전에 목욕으로 자신을 정결케하는, 그리고 예배 시작 전 1시간 전에 교회에 가서 예배를 위해 기도하는, 정성껏 준비하는 열성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 열정이 보잘 것 없어 보이기까지 할 정도로 그 시대는 하나님께 대하여 훨신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했겠습니까?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아니 많이 사랑한다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들의 그러한 희생을 받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 다가오는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 땅 거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 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수꾼을 세웠으니 나팔 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그러므로 너희열방아 들으라 회중아 그들의 당할 일을 알라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 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뇨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렘 6:12-20).
이것이 바로 가짜신앙의 실체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이 흑과 백처럼 달랐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별력이 가리어져서 하나님의 기준을 전혀 모른 채, 자기들 나름대로의 신앙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1. 성경은 먼저 그 당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총체적으로 거짓을 행했다고 말합니다.
물론 여기의 선지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당시 본인들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참다운 선지자로 인정받고, 존경받은 자들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은 그들에게 거짓을 행했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행한 거짓은 무엇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상처를 심상히 여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심상히 여긴다는 말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당시 영적으로 심각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면 거기에는 어떠한 영적인 승리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2장 13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엄청난 죄의 억압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말은 많지만 하나님의 실제는 그들에게서 철저히 걷혀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처럼 심각한데도 그 당시 선지자들은 그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마치 말기 암환자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소득 약이나 발라주고 반창고나 붙여주는 식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했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평화가 없는데 “평화, 평화”를 외쳤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는 히브리어로 ‘살롬’입니다.
“샬롬”은 단순한 마음의 평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로 인하여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승리와 안식과 생명이 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저들이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렸으니 그러한 하나님의 평화가 그들에게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이처럼 평화가 전혀 없는데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평화, 평화”를 외쳤습니다. 그것이 고도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왜 그 당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평화, 평화”를 외쳤습니까?
성경에는 그것이 그들의 탐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 당시는 평화를 외처야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오늘날로 말하면 축복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은혜로운 말씀을 전하는 훌륭한 선지자로 인정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몰려옴으로 자기 사역이 확장되기 위해 평화를 외쳐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는 그토록 심각한데도 그 모든 일들이 다 잘되고 있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그저 평화를 외쳐댓던 것입니다.
평화를 외치고 복을 외치는 것은 성서적으로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시대상황에서는 복과 평화를 외쳐야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을 외치고 회개의 메시지를 외쳐야 정상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메시지였습니다. 이사야처럼 인기가 없고 심지어 톱으로 도동강 나더라도 하나님의 바른 기준을 외치는 것이 그 시대에 외쳐야할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오늘날은 어떤가요? 어떤 메시지가 필요한 것 같습니까?
2. 왜 하나님의 백성들은 평화의 메시지를 듣기 원했습니까?
그것 역시 탐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 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신을 부인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의 목적과 목표와 계획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목적과 목표와 계획을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많은 제사와 희생을 드렸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 자기의 목적과 목표와 계획이 전혀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자신들이 그렇게 많은 희생을 드렸던 것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들은 당연히 자기들이 그 목적과 목표를 잘되게 해준다는 평화의 메시지를 듣기 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짜신앙인 기복신앙입니다.
기복신앙에서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기복신앙에서는 아무리 많은 희생과 선신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전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이익이 중심이된 신앙입니다.
3.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저는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예레미야 시대와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실제가 거의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가 영적으로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 가운데 죄의 억압과 영적인 억압과 세상의 온갖 죄가 가득합니다.
교회 중직들의 가정이 수 없이 깨지고 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의 가정이 깨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삶 속에서 음란과 사술이 가득합니다. 탐심이 하늘을 찌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많은 목회자들은 이러한 백성들의 상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계속해서 축복을 외쳐댔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성도들 또한 예레미야 시대와 너무 흡사합니다.
성도들의 기도 내용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의 그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관심이 있는 것은 자신의 무제 해결, 축복 받는 것, 잘 되는 것, 등이 목적입니다.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을 존재를 다하여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의중을 알기 원하는 것,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은 들어보지도 못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듣기 원하는 것은 당연히 축복입니다.
그래서 축복을 전하는 교회가 성장하고 목회자들은 더욱 축복을 외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심각한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합니다. “성경에서는 여러 곳에서 복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이해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이렇습니다.
1. 하나님이 복이십니다.
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신30:15-20)
성경에서 복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는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 자신이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신명기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 그 분 자신이 복이라 말합니다. 하나님을 택하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과 복 그리고 사망과 저주를 그 앞에 두었으니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생명이시라고 하셨습니다.
2.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도 우리를 버리십니다.
이 부분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리고 전반적으로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하나의 황금률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구약 전체를 통해서 나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도 우리를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대하 15: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말3:7)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4:8)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3)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1:3)
3. 이 말씀의 의미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면,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한다, 하나님께 돌아간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은 다 같은 의미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도 우리를 버리십니다.
하나님을 멸시한다는 말도 역시 같은 뜻입니다.
여기서 주의 깊게 분석해야할 단어가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며, 하나님을 버린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기준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이러한 구절들을 우리 생각과 관점에서 이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실제로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떠나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했던 바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은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올 때 빈손으로 나오지 아니하고, 많은 살진 짐승들을 희생으로 드렸습니다.
그들은 많은 기도를 하고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은 얼마나 자기들이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멸시하여 멀리 떠나갔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사1:4)
엘리제사장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엘리제사장은 아들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악을 행했을 때, 비록 그들의 악행을 막지 못했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타일렀습니다.(삼상2:22-25). 뿐만 아니라 엘리는 나중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셔서 그들이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했을 때, 자기의 두 아들이 한꺼번에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빼앗겼다는 소식 들었을 때 더 충격을 받고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엘리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 자입니까, 아니면 멸시한 자입니까?
그러나 위의 구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엘리를 하나님을 멸시한 자의 편에 두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점과 우리의 관점이 철저히 다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버렸다는 말이나 하나님을 멸시 했다는 말은 모두 신앙의 본질에서 떠난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앞에서 여러 번 살펴보았지만 이사야 시대는 수 많은 의식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대를 다루고 있는 호세아 4장 1절과 6절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삶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고 하나님을 멸시하여 멀리 떠나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많은 의식들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성전에 나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렘7장). 그러나 그들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렘2:13).
이것이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일날 예배에 빠지지 않고 십일조를 철저히 드리고, 새벽기도도 한 번도 안 빠지고, 또 교회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봉사한다 하여도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요, 하나님을 버린 것이요, 하나님을 멸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성령이 그 마음속을 강하게 인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신이 보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을 지금 멸시하고 있는 자신이 안보이면, 하나님의 기준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 하나님을 찾는 것,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이 모두가 다 같은 의미인데 그것은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전존재로 사랑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잘못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이 어려울 때는 주일을 빠지지 않고 십일조도 철저히 드리고, 금요기도회도 나오고 그러더니 일이 바빠지니까 예배에 빠지고 기도회도 나오지 않고 그랬다고 하십시다. 십일조도 액수가 커지면서 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사업이 어려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권면을 합니다. 그 의미인즉 다시 예전처럼 예배를 잘 드리고 기도회도 잘 나오고 헌금을 잘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면 이사야나 호세아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 시대만 하더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수 없이 많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신앙의 본질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호세아 6장 1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호소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호 6:1-3)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문맥에서 1절과 3절의 내용이 정확하게 같은 것을 말함을 우리는 의심할 나위 없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황금률의 내용처럼 반드시 그들에게 돌아오시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말을 아침이 되면 해가 뜨듯이 반드시 그들에게 임하시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것도 정확하게 같은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을 우리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찾는 것은 전혀 그러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그분 자신을 간절히 찾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위에 나오는 역대하 15:2에서 하나님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과 하나님을 찾는 것을 나란히 같은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시24편6절에서 이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히브리 문학에는 평행법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의미를 보다 풍요롭게 표현하기 위해 정확하게 같은 말을 두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을 구하는 것임을 명백히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말이 정확하게 그 뜻입니다.
4. 복과 신앙의 본질
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 분이 복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전존재로 사랑하는 삶 가운데 있을 때,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그분 안에 있는 생명이 우리에게 넘칩니다. 하나님의 평화이든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든지, 세상과 죄를 이기는 능력이든지, 모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넘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복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하나님을 버릴 때, 하나님도 우리를 버리십니다. 즉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날 때, 하나님도 우리를 버리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면, 하나님의 모든 생명이 우리에게서 고갈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실제적인 도움이든지, 하나님의 은혜이든지, 하나님의 안식이든지, 세상과 죄를 이기는 능력이든지, 모든 생명이 걷힙니다. 하나님 그 분이 생명이시니까요. 신명기 30장에서 하나님은 여러 차례 걸쳐 내가 너희 앞에 복과 저주 생명과 사망을 놓았으리, 어희와 너희 자손들을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 두 가지 중, 복과 생명보다 사망과 저주를 택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건 원치 않건, 또 알건 모르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그것이 정확하게 사망과 저주를 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확히 예레미야 시대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실제가 거의 없습니다. 죄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소멸되어있습니다. 영적인 태는 철저히 닫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안식이나 샬롬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제 그 이유가 선명이 보이십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는 생명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렘29:11)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생명이요, 평안입니다. 재앙과 저주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명기 30장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 앞에 복과 저주 그리고 생명과 사망을 두었다고 하시면서,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위해 생명을 택하라고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을 보아도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얼마나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 삶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탕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에 있을 때는 풍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의 집을 떠났을 때, 곧바로 그를 찾아온 것은 생명의 고갈이었습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이 평안이요 소망이라고 하신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서에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이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 하나님의 평안과 생명 가운데 그들이 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그렇게 되기 위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부르짖고 계십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렘29:12-14)
여기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 단순히 우리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에서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 도움을 얻으라고 하나님께 많은 희생과 제사를 드렸을지 모르지만 보통 때는 신앙의 본질을 떠나 임의대로 살다가 어려움이 당하면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나오자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겠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나무를 향하여 너는 나의 아비라 하며 돌을 향하여 너는 나를 낳았다 하고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그 얼굴은 내게로 향치 아니하다가 환난을 당할 때에는 이르기를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리라” (렘 2:27)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기의 악한 마음의 꾀와 강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그 얼굴을 향치 아니하였으며” (렘 7:24)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 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 (렘11:11)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곤액을 인하여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을 듣지 아니하리라” (렘11:14)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멸하리라” (렘14:12)
그들의 문제는 그들이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삶에서 떠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버린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살기 위하여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의도인 생명과 평강과 소망이 그들의 삶에 넘치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치고 계십니다. 즉,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 위해 하나님 자신을 구하여 하나님께 나오라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는 방법은 마음을 다하여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29장 13절에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고 하셨고, 호세아서 6장 3절에서도 하나님 알기를 구되 힘써 하나님을 알기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역대하 15장은 아사왕 시절에 이스라엘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자 하나님께서 만나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저희의 만난바가 되시고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대하15:15)
예레미야 29장의 이 말씀이 이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짖음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생명이요 샬롬입니다. 저주와 사망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살기 위하여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삶으로 돌아 오라고 외치고 계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의도인 생명과 복이 우리 삶에 넘치기 위하여 하나님자신을 간절히 찾아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보증’이라니라 ‘초청’입니다.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렘6:13-14)
예레미야 시대의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나름대로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평강을 외쳤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다윗의 왕위와 자손과 가문에게 영원한 평강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을 굳게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당시의 왕은 다윗의 친계보로 다윗의 가문에 속한 왕이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 하나님의 이름을 영원히 두시고,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거기에 항상 머룰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매일 성대한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하여 평강을 외쳤고, 백성들은 그들의 말을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성경에서 틀린 것이 어디있나요?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교리적으로 틀렸다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성서적인 설교를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그 설교가 틀렸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관점으로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다윗자손에게 영원한 평강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이루시고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이 약속을 근거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을 평강을 외쳤고, 백성들을 성경에서 하나도 위배되지 않는 약속을 근거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다윗과 다윗의 자손에게 영원한 평강과 영원한 나라를 약속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윗을 통해서 메시야를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메시야의 나라가 영원하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실제적으로 다윗의 자손을 향한 약속도 됩니다. 무엇이 문제냐하면, 하나님을 오해한것입니다. 기준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보증’이 아니라 ‘초청’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개념입니다. 보증이 아니라 초청의 개념입니다.
보증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지만, 초청은 전재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을 저는 하나님의 기준에서 멀어지는 신앙이라 표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실 때 그분은 항상 초청으로 약속하십니다. 다윗의 후손에게 하나님이 지속적으로 하신 말씀중 하나가, “다윗과 같이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렇게 하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보증이 아니라 초청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성전이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앙의 형식은 가득하지만,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는 모습을 보고, 성전을 파괴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왕상 9:1-7)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있습니다. 의식은 무수할지 모르고, 드려지는 헌금과 예배와 봉사는 가득할지 몰라도, 하나님의 관점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보증으로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초청으로 약속하셨기에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수많은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복만 찾아보아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주님을 많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약속하신 이 세상에서의 잘되는 모든 것들은, 보증이 아니라, 초청입니다. 하나님 그분이 복이신데, 하나님 그분이 나의 유일한 사랑이며, 모든 것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약속하신 세상에서 잘되는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세상에서 잘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는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그분이 모든 것되어, 그분을 사랑하고 아는 일이 자신의 목표가 되고 목적이 되는, 진정한 복이 하나님이 될 때, 성경에 약속하신 세상에서 잘되는 모든 것들을 주님이 가지신 주권으로 나누어집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의 개념입니다.
에필로그
기복신앙은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 자신이 그런 신앙을 지속적으로 가져오고 있었다는 것을 보았을 때, 저의 마음은 참담하였습니다. 앞에서 비전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을 보고 목회고 뭐고 모든 것을 포기하였던 것처럼, 나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이용하여 목회하였는지를 보는 순간, 역시 나는 가짜목사고, 삭군목사라는 결론을 지었습니다. 나는 목회할 자격이 없는 자라는 결론이 났습니다.
과거 내가 성도들이 교회에 헌금하면서, 또는 목사에게 헌금하면서, 기도제목으로 사업이 잘되고 건강하고 자식이 잘 되게 해 달라며 헌금을 주는 것을 사양하지 않은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헌금으로 먼저 바치면서 기도하면, 주님이 들어주신다는 설교는 하지 않았지만, 그런 의식으로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을 방치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새벽기도를 강조하기 위해 자녀를 위해 사업을 위해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라고 부축였던 것들이 기억이 났습니다. 성도를 주님 그분을 찾고 사랑하는 자리로 인도한 것이 아니라, 기복신앙의 자리로 보내면서까지 새벽기도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자신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가 틀린 기도가 아니지만, 적어도 나의 마음에 새벽기도의 동기가 불순한 마음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설교를 한적 없지만, 그런식으로 성도들이 서로 말하는 것을 제제하지도 않고, 바르게 잡아주지도 않은 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도 그들과 똑같은 가짜인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내가 더 깊은 기복신앙이 있는 것을 하나님은 저에게 이렇게 보게하셨습니다.
먼저, 제 마음속에 교회를 성장시키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를 보게 하셨습니다. 교회성장은 목사의 마음이고 교회 전체 성도의 마음이고, 주님의 마음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 숨겨진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성장하면, 내가 조금 유명해지고, 하고 싶은 사역도 더 크게 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이 생각이 한순간 나의 뇌를 스쳐지나가듯 지나가는 것이, 바로 내가 주님을 이용하여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졌습니다. 목회가 바로 우상숭배이고, 목회사역을 키우기 위해 하나님을 나도 모르게 이용하고 있는 나 자신이 보여졌습니다.
선교지에 나가서도 선교사역이 성장하고 열매가 있게되면, 내가 유명하게 되겠지... 하는 생각과 좀더 많은 후원금으로 더 큰 사역을 하겠지...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가듯 나의 마음속 깊은곳에 숨어 있었습니다.
저는 지옥에 떨어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얼마나 나 자신이 미웠는지, 병원에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몸이 허약해지고 아팠습니다. 경찰서에 찾아가 나의 야망이 내려지지 않는 문제 때문에, 나를 벌해달라고 가다가 아내 때문에 멈춘 적도 있습니다. 바퀴벌래와 쥐와 도마뱀이 부러울 정도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괴로웠습니다. 이 과정은 너무나 할 이야기가 많기 때문에 다음 기회에 간증하도록 하겠습니다.
성도가 나의 우상인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주님을 섬기고 있었지만, 주님과 성도를 함께 섬기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기복신앙인줄 알면서도 성도들을 방치한 이유가 바로 성도와 하나님을 같이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삶 가운데 기복신앙으로 찌들어 있는 보습을 보면 괴로워하고, 나 자신을 미워하고, 세상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뻔 했다는 생각까지 하였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나의 야망이 내려지는 경험을 하게되었는데, 다른 지면을 통해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선교지에서 그 어떠한 선교후원모금을 하지 않고, 선교지로 나아가서 오직 주님의 공급하심만 의지하고, 나의 필요와 쓸 것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고 주님 그분만 구하고 살아갈 때 였습니다. 한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부모님이 다니시는 저의 모교회에서 어느 사업하시는 집사님이 사업이 잘 돼서, 담임목사님께 100만원을 헌금하고, 부목사님과 선교사님에게 얼마를 헌금 한다면서 헌금을 보내오셨습니다. 이유인즉, 나에게 사업이 더 잘되도록 기도해달라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헌금과 기복신앙에 대하여 잘 설명하고 그 헌금을 돌려 주도록 한국에 요청하였습니다. 그 집사님은 이미 헌금한 것이기 때문에 돌려받지 않겠다고 우겨서, 그 집사님에게 이렇게 기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사업이 잘 되게 하시는 것은, 그 사업을 통해 하나님이 필요한 곳에 물질로 섬기라고 하신 것입니다. 저는 집사님이 하나님 그분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여 사업이 잘되게 하는 마음을 주님께로 돌라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지금은 마음이 아플지 모르지만, 진정 하나님만이 인생에 전부인 것을 알게되었을 때 얼마나 큰 하나님의 가르침인 것을 깨닫도록 기도하겠습니다. 그렇게 사업이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성장하도록 기도하겠습니다.”라고 연락하였습니다. 그 후 그 집사님은 더 이상 헌금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한 가지는 한국 기독교방송에서 유명한 목사님 두분이 저를 후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두 교회가 약100만원정도 되었습니다. 그 때 연락받았을 때 저는 100만원도 안되는 후원금으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역 계획서를 요구하였습니다. 저는 1년에 1000명씩 성장하는 대형교회에서 사역을 해 보았기 때문에, 그 목사님들이 요구하는 사역계획서를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그 사역계획서를 잘 쓸 자신도 있었습니다.
내 마음에 대형교회가 요구하는 사역계획서가, 내가 성경을 통해 추구 하고 있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사역의 내용을 담을 수 없는 사역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저를 테스트하는 기회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과 저의 사역의 특성을 작성하여 보냈습니다. 3년이나 지났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만약 제가 일반적인 이스람지역에서 사역하듯이 사역하는 그런 사역이었다면, 목사님 입맛에 맞는 사역 계획서를 보내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사역은 30만 전세계 선교사중에서 120명만이 가장최전방에서 사역하는 그런 사역을 하고 있기 때문에, 대형교회가 요구하는 그런 사역계획서를 보내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후원금 약100만원이 하나도 아쉽지 않았습니다. 비록 생활이 많이 불편하더라도, 불편할 뿐이지 나의 마음은 주님 때문에 행복하였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다가, 내 마음에 이 글 때문에 사람들이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하겠지 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가듯 내 머릿속을 지나갔습니다. 더 이상 이 글을 쓸 가치가 없는 놈이라 생각하고, 저는 무기한 글 쓰고 정리하는 것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곧 길이요”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 있도록 하였습니다. 참 많은 깨달음과 회개의 시간이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 글을 쓰고 정리하기 시작하였는데, 내 마음에 스쳐지나가는 불순한 마음이 나를 지배하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이 저의 옆에 계신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다시 글을 정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저는 아직도 내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 앞에 들어가서 주님이 나를 통치하실때까지 기다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하나님의 기준 앞에 하나님이 저를 다룬 많은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저의 죄를 이렇게 고백하였는데, 목사가 이정도면, 성도들은 어떻겠습니까? 자신이 보이시는지요? 남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자신이 멸망 받아 마땅한 모습이 보이시는지요?
하나님의 기준을 정리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저를 위해서 시작한 일입니다.
카페 회원들이 하나님의 기준위에 영적인 자극이 될 수 있다면, 이 글이 유익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저 혼자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의 기준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좋은 충고와 가르침이 이 글을 더욱 알차게 할 것 같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댓글 등을 통해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위 내용을 정리하면서 지속적으로 조금씩 내용이 발전하고 다듬어 질 것을 소망합니다.
김바울 선교사 // 다음카페 // 빛과 흑암의 역사 http://cafe.daum.net/aspire7
'은혜 설교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하나님의 기준 세우기 - 17. 하나님의 질투(열심) (0) | 2013.01.19 |
|---|---|
| [스크랩] 하나님의 기준 세우기 - 18. 신앙의 회복이 되어질 때 나타나는 현상 (0) | 2013.01.19 |
| [스크랩] 하나님의 기준 세우기 - 5. 죽은정통 (0) | 2013.01.19 |
| [스크랩] 하나님의 기준 세우기 - 4. 본질과 의식 (0) | 2013.01.19 |
| [스크랩] 하나님의 기준 세우기 - 3. 하나님의 나라. (0) | 2013.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