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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가? (1)
‘하나님 인식’이 가능한 것은 근본적으로 그분의 ‘자기 계시’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분이 자신을 먼저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분이 자연 속에서 자신을 확실히 계시하셨다고 분명히 밝힌다. 자연을 통한 그분의 계시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누구도 그분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다. 바울은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19,20)고 증거한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에게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확신이 때때로 흔들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관하여 종종 이런저런 의문들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 우리는 의심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분명한 증거를 부정하려는 우리의 죄악된 성향이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우리는 하나님 없이 우리 자신의 뜻대로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보여주는 증거는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정직해진다면 그 증거를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완벽한 객관적 증거를 들이대면 그 증거를 인정하고 승복해야 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종종 사람들은 그 증거를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어떤 편견이나 적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증거를 제시해도 자신의 선입견을 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선입견과 다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기독교 변증가들의 논리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입견을 가진 사람들을 설복시키기 위해 기독교의 변증가들은 자연에 호소했다. 즉, 그들은 자연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준다는 논리를 폈다. 가장 오래된 형태의 변증은 이런 논리를 폈다.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반드시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우주의 법칙을 만들고 우주에 질서를 부여한 지성적 존재가 없다면, 현재와 같은 우주가 존재할 수 없다.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없다면 우주는 설명되지 않는다.”
우주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우주는 무(無)에서 생겼다”는 설명을, 또 어떤 사람들은 “우주는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다”는 설명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설명들을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우주는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설명뿐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분은 누구인가?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증명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펼 수 있다.
“나는 인간이다. 인간으로서 나는 역사(歷史)를 가지고 있다. 역사를 가진다는 것은 그 역사 이전에는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는 것은 내가 스스로 존재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다른 어떤 존재에 의하여 만들어진 존재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나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 다른 존재가 있어야 하는데, 그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어떤 회의주의자들은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능력, 즉 ‘자존적(自存的) 능력’이 우주 자체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우주의 어떤 부분에 그런 자존적 능력이 있다면 우주의 나머지 부분은 그 부분에 의존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우주는 ‘자존적 부분’과 ‘의존적 부분’으로 나뉘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존적 부분이 바로 ‘신’(神)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회의주의자들의 주장을 일단 인정하고 그들의 논리를 따라간다 할지라도 결국 유신론(有神論)으로 귀착된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가? (2)
나무의 존재 증명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자. 여기에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나무가 있다.
이 나무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네 가지라고 생각된다. 첫째, 나무는 존재하지 않는데 사람들이 환상을 보는 것이다(환상설). 둘째, 나무는 본래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에 영원하다(자존설). 셋째, 나무가 나무 자신을 창조했다(자기 창조설). 넷째, 나무는 어떤 다른 자존적 존재에 의해서 창조되었다(타자 창조설).
첫 번째 가능성, 즉 환상설에 대해 생각해보자. 나무에 대한 경험이 환상이라 할지라도 그 환상을 경험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환상 자체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확실한 것은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앞에서 논증했듯이, 우리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만다. 그러므로 소위 이 ‘환상설’은 결국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두 번째 가능성, 즉 자존설에 대해 생각해보자. 만일 나무가 본래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에 영원하다면, 나무가 곧 하나님이라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본래 스스로 존재하는 영원한 존재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무는 전혀 신적 속성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나무는 신적 존재가 아니며, 본래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세 번째 가능성, 즉 자기 창조설을 살펴보자. 어떤 것이 자기를 창조하려면 그 창조 이전에 이미 자신이 존재해야 한다. 만일 자기를 창조하기 이전에 존재했다면, 그것은 동시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해야 한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자기 창조설을 믿는 것은 이성적 사고를 포기하는 행위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철학적 이론들은 자기 창조설을 받아들여 ‘자발적 발생’ 또는 ‘우연히 생겼다’ 등의 개념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가능성은 네 번째 가능성, 즉 타자 창조설뿐이다. 다시 말해, 나무의 존재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그것이 어떤 다른 자존적 존재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이론뿐이다. 나는 이 자존적 존재가 하나님이시라고 믿는다.
삼위일체 하나님
삼위일체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신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본질적으로는 한 분이면서도 성부, 성자, 성령의 세 분이라는 것은 기독교 진리의 큰 신비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位格)으로 존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위일체의 진리를 완전히 다 이해할 수는 없다.
우리가 한 하나님이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고 말한다고 해서 모순과 비논리와 비이성의 잘못을 범하는 것은 아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다른 어떤 것과 비교되어 설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은 각각 단일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단지 하나의 위격만을 갖는다. 피조물 중에는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존재’가 없다.
사람들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비유들을 사용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한 남자가 있다. 이 남자는 한 사람이지만, 그는 그의 부모에 대해서는 아들이요, 그의 자식들에 대해서는 아버지요, 그의 형제들에 대해서는 형제이다. 삼위일체도 바로 이런 것이다”라는 설명을 내놓았다. 그러나 성경이 의미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런 의미가 아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한 분이면서도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고 분명히 밝히신다.
성경은 한 하나님의 세 위격, 즉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하여 증거한다. 우리는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왜냐하면 이것이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첫째, 논리는 “어떤 것이 이성적으로 가능하거나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있지만,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논리는 논리의 타당성을 검증할 수는 있지만, 존재의 유무를 증명할 수는 없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논리적으로 설명 또는 증명되든 말든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도 우리의 이성적 이해나 증명과 관계없이 존재하는 분이시다.
둘째, 삼위일체는 비이성적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면서도 세 분이다” 또는 “하나님은 세 위격이면서도 한 위격이다”라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모순이기 때문에 성립될 수 없다. 그러나 ‘세 위격을 가진 하나의 존재’라는 개념은 결코 논리적으로 모순이 아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는 논리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삼위일체라는 신비로운 존재를 받아들였다면,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들을 어떻게 구분하는 것이 좋은가? 때때로 성경은 각각의 위격들이 행하시는 사역들을 기준으로 위격들을 구분하기도 한다. 구속 사역을 감당하도록 성자 하나님을 이 세상에 보낸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할 수 있는 길을 여신 분은 성자 하나님이시다. 성자의 사역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의 사역, 성자의 사역, 그리고 성령의 사역을 볼 때 우리는 삼위일체의 위격들을 어떻게 구별하고 이해해야 할지에 대해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모든 일을 주권적으로 정하신 위격을 생각하게 되면 나는 성부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다. 속죄의 사역을 감당하신 위격을 생각하게 되면 나는 성자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다. 나의 영혼을 살려서 나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신 위격을 생각하게 되면 나는 성령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다.
이런 창조와 구속의 다양한 사역들에서 어떤 한 위격이 강조될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이 모든 사역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다 알 수는 없다고 겸손하게 고백해야 할 것이다.
- R. C. 스프룰, 기독교 교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