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스크랩] 일반 은총론 (一般 恩寵論)

하나님아들 2012. 12. 20. 11:43

일반 은총론 (一般 恩寵論)



 


_ 경계해야 할 _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



H. Bavinck  저(著)

차  영  배  역(譯)


   <저자에 대한 표지글> 개혁 신학계의 거성인 교의신학자(敎義神學者) 헤르만 바벵크 박사(Dr.H.Bavinck, 1854~1921)는 개혁신앙의 아성인 네델란드의 캄펀(Kampen) 개혁신학교와 암스텔담의 자유대학에서 40년간 조직신학을 강의할 때마다 학생들을 사로잡아 그리스도를 아는 고상한 지식에 심취케 했을 뿐아니라, 유명한 교부(敎父)들의 신학사상을 두루 살피고 중세(中世) 로마교 신학을 깊숙이 파헤친 것은 물론 종교개혁과 그후의 개혁신학의 자양분을 섭취케한 후, 좌우의 극단적인 사상들을 분석비평하는데 과감하여 올바른 길을 찾게하고 개혁신학을 더욱 돈독히 붙잡게 하였다. 그의 글도 예외는 아니다. 지금도 우리의 머리와 마음을 함께 사로잡는 그의 글도 그가 자주 인용한 “각양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온다”(약 1:17)는 말씀 그대로 “헤르만”에게 이루어져 이 은혜를 그에게 주신 삼위(三位)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읽는 각자의 마음에 기쁨과 나아가는 길이 환하게 트이게 될 것을 의심치 않는다.


목    차


역자 서문(譯者 序文)

서  언(序  言)

1. 성경적 근거 (聖經的 根據)

2. 로마교의 이원론 (二元論)

3. 종교개혁(宗敎改革)의 이원론 극복(克服)

4. 일반은총교리의 현대적 의의

5. 역자의 보충적 해설

   ① 계시(啓示)와 종교의 상관관계

   ② 계시의 역사성

   ③ 일반은총과 특별은총

   ④ 노아와 맺은 계약의 초자연성

   ⑤ 하나님의 섭리는 능력이다

   ⑥ 이방민족의 할예(割禮)

   ⑦ 자연신학

   ⑧ 초자연주의

   ⑨ 스콜라 신학

역자 서문


  헤르만 바빙크(H. Bavinck)는 130여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네덜란드 개혁신학교(Oudestr 6, Kampen 소재)가 설립되던 해(1854년)에 역시(亦是) 그 신학교의 전신인 (분리)개혁신학교(Hoogeveen 소재)의 교수였던 얀(Jan) 바빙크 목사의 장자로 태어났다.

 

  1880년에 “쯔빙글리(Zwingli)의 윤리(倫理)”라는 제목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마침 설립될 자유대학의 교수로 초빙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옛날의 개혁신학교가 있었던 Franker시의 교목생활을 1년 반가량 하던 중 상기(上記) 캄펀 소재 개혁신학교의 교수로 1882년에 임명을 받아 “신학의 학문성”(De Wetenschap der H.Geleerdheid)이라는 제목으로 임직강연(任職講演)을 한 후 조직신학을 40년간 강의하였다. 이에 갈라져 나온 교회들과 아직도 남아있는 개혁교회들의 난립을 개탄한 나머지 그는 1888년 교장인계시 “교회의 통일성”(De Katholiciteit der Kerk)이라는 유명한 강연을 하여 마침내 1892년에 카이퍼가 이끄는 Doleantie(행정보류)교회와 이미 1834년에 분리된 바빙크 쪽 개혁교회들과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그후 그는 1894년에 “일반은총”(De Algeemene Genade)이라는 강연을 역시 교장 인계시(두번째)에 발표하였다. 바빙크는 교수초기나 후기나 그 사상에 있어서 별로 큰 차이를 나타내 보이지 않을 만큼 처음부터 개혁신앙에 젖어 있었지만, “일반은총”을 발표한 이 시기에는 이미 교수한지 12년이나 지났고 지금도 호평을 받고 있는 그의 “개혁교의학(改革敎義學=De Gereformeerde Dogmatiek)"의 골격과 내용이 다 완성되었다. 그것은 다음해부터 출판하기 시작하여 5,6년 내에 제4권까지 방대한 분량으로 빛을 보게 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이 일반은총론은 1909년에 미국에서 강연한 ”Calvin and common grace"(1960년경에 한역됨)의 기본사상을 이루고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전자는 제목에 충실하여 일관성이 있지만 Warfield의 글과 함께 실려진 이“칼빈과 일반은총”은 “The Princeton Theological Review" vol7(1909)의 30페이지(pp.437-465)를 차지하고 ”칼빈“에 관한 견해가 광범하게 다루어졌다.

 

  그는 먼저 일반은총의 성경적 근거를 들었고 다음에 어떻게 로마교가 이를 무시 혹은 과대평가하여 이원론에 빠졌는가를 보인 후 종교개혁 특히 칼빈, 루터, 쯔빙글리의 사상을 비교하였고, 나아가서 좌우의 극단으로 치우친 재세례주의(再洗禮主義)와 소씨니안의 합리주의를 분석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일반은총교리의 현대적 의의를 약술함으로써 끝맺었지만 80년이 지난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진로에도 아주 유익한 줄 사려되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번역 하였다.

 

  여기에는 신앙과 지식, 신학과 철학, 권위와 이성, 머리와 마음, 하늘의 소명과 땅의 직업, 명상(기도)과 실생활, 교회와 정부와의 관계가 칼빈주의에 입각하여 풀려진다. 특히 칼 바르트(K. Barth)가 19세기의 낙관주의와 관념주의적 인본주의를 맹렬히 비평, 분석함으로써 자유주의신학에 일대 타격을 가하여 불투만이나 틸릭과 부룬너의 신학에 치명상을 입힌 것은 높이 평가를 받긴 하지만, 반면에 그는 일반은총을 부인할 뿐 아니라, 아담과 그리스도의 순서를 반복하여 그리스도를 첫째 아담으로 바꾸므로써 아담의 순수상태와 타락이 희미해지고, 계시의 진전성(進展性)이 무너지며 만인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지음받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현존함으로써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기독론 일변도에 치우쳐 만인구원론을 주창할 수 밖에 없으나 신의 주권과 그 자유를 빙자하여 그것을 부인할 수 밖에 없는 딜렘마에 빠졌다. 무엇보다 그는 일반은 총교리를 무시함으로써 신의 세계통치와 그 계시를 부인한 점에 있어서 재세례주의와 루터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개혁주의 신학의 고장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초(超)칼빈주의(Hyper-Calvinism)라고 함이 적절할지 모른다. 무릇 바빙크의 일반은총론을 정독함으로써 이러한 바르크의 잘못된 사상이 시정될 뿐 아니라, 그 당시 바빙크도 절실히 느낀 것처럼 정통신학 자체내에 있는 재세례주의적 초자연주의도 속히 제거될수록 교회는 건전해질 것이다.

 

  우리는 인본주의의 자연주의를 배격한다. 그러나 동시에 초자연주의를 배격한다. 기계적 영감설은 초자연주의의 산물이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초자연적으로 오셔서 마리아에게서 탄생되었지만 물과 피를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다. 그는 마리아의 몸에서 보통아이와 같이 자라나야 했고 탄생 후, 석가모니와 같이 초자연적으로 곧 일어서서“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는 말을 한 것이 아니라(물론 거짓말이지만),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함”과 동시에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눅 2:40).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초자연적이다. 그러나 재세례주의자가 주장한 것처럼 인성을 하늘에서 가지고 온 것이 아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자라났다. “은혜 없이”가 아니라 은혜와 더불어 ! 이와 같이 성경도 화육(化肉)된 것이다. 확실히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되, 사람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는 서민층의 통상어인 고이네를 가지고 신약성경을 기록하기를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셨다. 그만큼 낮아지신 것이다. 모세5경(經)에 나오는 할예는 이방인에게도 있었다고 바빙크는 말한다. 그러나 그 내용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의 성전이나 제사(祭司)나 희생은 이스라엘의 것과 그 내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즉 “은혜계약”에 입각치 아니한 점이 다른 것이다.

 

  이 책을 일반 신학생 뿐 아니라, 교직자, 교회의 대학생들, 기타 모든 평신도에게 권하고 싶다. 대학생회나 청년회에서 정독하는 가운데 신앙의 증진을 도모함과 동시에 토론의 실마리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번역을 허락해 주신 화란의 Zalsman 출판사와 이 소책자의 출판을 위해 총신대학 김히보 학장께서 쾌히 허락하여 주심에 감사를 드린다.


1979년 2월 7일


관악산을 바라보면서


역자 차 영 배



 


※ 서  문 (序 文)


  개혁교회들이 그들의 신앙적 교부(敎父)로서 존경하는 제네바의 종교개혁가(칼빈)는 아직도 엄격하고 검소한 인물로서 삶의 즐거움과 아름다운 음악에 대해서는 완전히 담을 쌓거나 혹은 적어도 무관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를 부르신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헌신, 그의 성격의 위엄성(威嚴性), 그의 엄격한 권징으로 다스리는 교회정치로 말미암아 그는 존경과 놀라움의 대상이 될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어떤 사랑이나 정서에 찬 마음을 품지 않는다. 날카로운 코와 긴 수염, 활기찬 눈을 가진 뚜렷한 얼굴, 뼈와 신경만 남아있는 듯한 여윈 몸은 사람을 매혹시키는 매력은 없고 반면에 존경심을 두는 어떤 거리감을 갖게 한다. 그는 자신의 소명(召命) 밖의 모든 일에 대해서 아무런 식견이나 관심도 없었다고 사람들은 비난한다. 삶의 즐거움이란 그의 안목엔 없었다. 그의 편지에서 가정적 쾌락이나 괴로움에 관하여 결코 언급한 일이 없다. 자연의 미에 대해서 그의 마음은 싸늘했다. 예술, 시, 음악에 대해서도 아무런 관심을 표시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는 슬픈 마음의 소유자요, 침울한 천재였다. 이같은 비난은 개혁교회를 고백하는 자들에게 되풀이 되었다. 모든 개혁교회들은 칼빈의 이와같은 정신을 이어 받았다.

 

  불란서의 유구노파(派), 화란의 칼빈주의자들, 영국의 청교도 및 스코틀란드의 장노교인들은 다 역사상에 등장한 강직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교제코자 한 자들은 많지 않았다. 그들의 굳은 얼굴, 굽히지 않는 그들의 성격은 사람들의 호감을 사지 못했다(역사적 현재). 그들의 태도와 교제는 쉽게 굽힌다든지, 함께 협조하는 것이란 전혀 없다. 그래서 강직하고 엄격함이 칼빈주의자에게 붙는 수식어가 되었다. 오늘날까지도(1894년 현재) 융통성 없는 칼빈의 내력에 관하여 혹심한 비난이 날아들고 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칼빈은 그의 사상 체계속에 자연적 생활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그 가치를 인정했는데 이러한 생각은 다른 견해를 가진 기독교 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칼빈은 그의 깊은 종교개혁의 사명감 때문에 일상생활에 약간 위축을 당한 것은 사실이었다. 루터의 강한 개성이 칼빈과 나란히 기독교적 인격의 한 측면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기쁜 일로서 감사하게도 높이 평가되어질 수 있다. 따라서 칼빈주의는 그 자체가 유일한 진리라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신학체계 속에 자연과 은혜와의 관계가 루터나 쯔빙글리의 그것보다 훨씬 바르고 깊이 이해되어졌다.

  칼빈은 일반은총교리의 원리를 밝히 말했는데 그 결과는 엄청나게 컸으나 후에 가끔 오해나 무시를 당했다. 따라서 이러한 일반은총에 관한 개혁교리를 여러분 앞에 서술코자 함을 용납해 주길 바라며 이로써 이 원리가 ① 얼마나 성경에 근거했으며, ② 로마교의 체계속에는 여지가 없었던 것을 ③ 종교개혁, 특히 칼빈에 의하여 발견되었고, ④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큰 의미가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1)

 

   1) 1894년에 발표된 “일반은총”이라는 이 주제는 1888년, 네덜란드 칼빈(Kampen) 신학교 교장 인계시, Bavinck 자신이 강연한 “기독교의 통일성과 교회”(De Katholiciteit van Christandom en Kerk) 속에 간직된 내용과 서로 연결이 되도록 채택되었다.







1. 성경적 근거 (聖經的 根據)


  슈바이처(A. Schweizer)3)는 그의 복음적 개혁교의학(改革敎義學=Dogmatic der ev. ref. Kirche)에서  행위(行爲)계약[foedus operum]과 은혜(恩惠)계약[foedus gratiae]사이를 특징짓는 구별은 “계시(啓示)”라는 개념에 있지 않고 “은혜(恩惠)”에 있다고 바로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금 후에 이것을 잘못 사용하여, 행위계약을 자연교로 삼았고, 은혜계약을 초자연교와 동일시 했으며, 자연교, 율법교, 및 도덕교4)의 세 단계로 발전하는 계단을 구축하였다.5) 그러나 그가 지적한 정당성은 이로써 상쇄될 수 없다. 타락 전에도 계시가 있었다.

   2) 이 제목은 역자가 이해를 돕기 위해 삽입하였다. 이하 모든 제목을 다 삽입하였다.

   3) Alexander Schweizer(1808~1888), 스위스의 몬화철학자요, 실천신학자이며, Schleiermacher의 영향을 받은        개혁신학자.(역자 註)

   4) Zedelijke religie(도덕교)는 교독종교 곧 기독교를 가리킨 듯 하다. 그는 통상적으로 자연종교(이교), 율법종        교(유대교), 구속종교(기독교)로 나누었다.(역자 註)

   5) 인용된 책(복음적 개혁교의학) 1.P. 103;  참조 : 스콜튼 (Scholten), 개혁교회의 교리 1, p. 304; 환 데이크        (1. van Dijk), 신학연구, 1880, 4,1장 p.11~.


 


  창조 자체가 처음으로 나타난 풍부한 하나님의 계시이며 다음에 나타난 모든 계시의 주춧돌이요 시작이었다. 하니님과 흠없는 사태(status imtegritatis, staat der rechtheid)에 있었던 인간과의 관계는 인격적 교제로 묘사되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셨고(창 1:28~30) 그에게 명하기를 그는 본성으로 선악을 알 수 없다고 하였고(창 2:16) 친히 그를 돕는 배필로 여자를 만드셨다(창 2:22). 또한 행위계약도 계시에 의존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기는 했으나 아직도 최고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아담이 가지는 종교의 형태가 이것(계시의존)밖에는 달리 있을 수 없었다. 총교는 항상 계시를 초석으로 삼았고 종교와 계시는 상관관계에 있다. 계시가 없는 종교란 있을 수 없다. 아담의 타락으로 변화가 오긴 왔다. 그러나 이 변화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기를 중지하셨거나 혹은 비로소 그것을 시작하였다는데 있지 않다. 계시는 그대로 계속되었다. 그는 인간을 다시 찾으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제 신의 음성을 두려워 했고 그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다(창 3:8). 그의 죄책감이 그를 몰아내어 하나님의 전면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김으로써 죽을 죄를 지었음을 알았다(창 2:17). 따라서 계시는 그대로 계속되나 그 성격이 달라졌다. 계시는 다른 내용을 갖게 되었다. 죽어야 마땅한 인간에게 대하여 은혜의 계시가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범죄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부르시고 사탄과 친교를 맺게하지 않고 원수되게 하실 때, 벌써 계시 속에 전적으로 새로운 요소, 곧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나타났다.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 은혜의 샘물로부터 인간에게로 흘러나온다. 사는 것과 일하는 것, 먹는 것과 입는 것이 다 행위계약에 일치하거나, 혹은 그 행위계약에 주어진 권리에 따라서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말미아마 주어 진다. 이 흔혜가 인간을 위한 모든 삶과 축복의 원천이요 디딤돌이 되었다. 이 은혜가 바로 모든 것이 넘쳐흐르는 샘물의 근원이다(창 3:8~24). 그러나 이 은혜의 샘물은 한줄기로 머물러 있지 않고 분류되어 일반적인 것과 특수한 것으로 갈라졌다. 가인은 아우를 죽였으므로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난다(창 4:1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아 남는다. 아무도 그를 죽이지 하게 법적으로 은혜를 입혔고 심지어 땅을 지배하는 물질문명의 시조가 되게 하셨다(창 4:15~24).

 

  이에 대하여 셋과 그의 후손은 하나님을 알고 그를 섬기는 백성으로 보존되었다(창 4:25~5:32). 이 두 족속이 서로 섞여져 땅에 충만하여 서로 통혼하여 죄악이 땅에 충만할 때, 홍수의 심판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었다. 한 다른 인류가 노아에게서 났는데 그 성격이 부드럽고 그 힘이 보다 약하여 수명이 보다 짧게 되었다. 이 새로운 인류도 또한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존립하여 살게 되는데 이제 은혜가 언약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하나님의 노하심을 격동시킨 불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말하자면 하나의 계약으로 모든 자연생물과 더불어 맺어 피조물의 존립과 생명을 확고부동하게 하신다. 이러한 존립과 생명은 절로 보존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자연적이 아니고 무엇을 지켜야 할 의무가 없는 초자연적 은혜에 기인한 언약의 열매로 주어진다(창 8:21~22, 9:1~17). 심지어 함과 아벳으로부터 나온 족속들도 은혜로 말미암아 계속 살게 된다. 인류의 단일성도 노아 이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데, 그것은 언어의 혼란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이 제각기의 줄기를 따라 흘러나온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시대가 그 시작을 본 것이다.(롬 2:4). 알지못하는 무지의 시대로 접어든다(행 17:30). 하나님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자기의 길을 걸어가게 하신다.(행 14:1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증거하지 않고 그냥 버려두시지 않는다(행 14:17). 그 안에서 그들은 살고, 움직이며, 존립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그렇게 멀리 게시지 않으신다.(행 17:27,28). 그는 자연의 사역(事役)가운데 스스로 그들에게 나타나신다(롬 1:19). 모든 선한 선물과 은사가 다 빛의 아버지로부터 이방인들에게도 내려온다(약 1:17). 만물을 지으시고 만물을 붙드시는 말씀(로고스)은 각 사람을 비취어 이 세상에 오시는 분이다(요 1:9). 성령은 모든 생명과 능력과 모든 덕(德)의 원천이다(시 33:6, 104:30, 139:7, 욥 32:8). 이로 보건데 이방인 세계에도 하나님의 풍성하고 영광스런 계시(나타나심)가 있음을 본다. 자연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양심에, 그들의 생애와 역사속에, 정부와 정치가와 예술가들 가운데, 그들의 철학자들과 개혁가들 속에 나타나신다. 하나님의 이러한 계시를 축소시키거나 과소평가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6) 심지어 이것은 소위 자연계시 만으로 국한되어질 수 없다. 낙원의 전통, 가인과 그 후손들의 생애, 노아와 맺은 언약은 다 특수한 초자연적 근원을 갖고 있다. 초자연적 능력의 역사(役事)가 이방세계 안에서 선험적(先驗的)으로 아주 불가능하다거나 심지어 있음직하지 않다고 할 수 없다. 또한 불가능하다거나 심지어 있음직하지 않다고 할 수 없다. 또한 자연과 역사속에서의 계시는 결코 신덕(神德)의 소극적인 행동이다. 예수의 아버지는 항상 일하신다(요 5:17). 하나님의 섭리는 신적이고 영원하며 어디나 임재(臨在)하는 능력(Kracht)이다.

   “Er bestaat geene enkele reden, om deze openbaring Gods to verkleinen of te

    minachten" p.10.


 

따라서 이스라엘 종교와 이방민족 종교와의 특별한 구별은 계시라는 개념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없다. 계시종교(religio revelata)와 자연종교(religio naturalis)의 대립으로는 그것이 바로 표현되었다고 할 수 없다. 자연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다. 모든 종교는 적극적이며 실제적 혹은 가상적 계시에 의존한다. 그러나 이 양자의 본질적, 실질적 차이는 은혜(gratia)에 있다. 특수은총은 이방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7) 그들의 모든 종교는 자의적(eigenwillig)이며 율법적이다. 심지어 불교도 이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방종교들은 다 이미 어겨진 행위계약의 모조 혹은 퇴화된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는 인간이 항상 자력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고자 한다. 정화의식(淨化儀式), 고행(苦行), 희생, 계율의 엄수, 명상등이 복(福)에 이르는 길이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종교 속에 나타난 새롭고 이적적인 것은 특수은총이요,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과 맺은 은혜의 계약이었다.

 

  창조와 자연의 신인 엘로힘은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곧 언약의 하나님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계시는 전(前) 역사에 연결되며, 이미 나타난 계시를 내포한다. 아브라함이 셈의 자손이었음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결에 관한 생각이 함과 이벳 족속에게서 날이 갈수록 희미해져 사라지고 그 자손들이 점점 더 죄악세상에 깊이 빠져 잃은 백성이 될 때, 셈의 자손들은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일을 가장 오랫동안 또 가장 순수하게 보존하였다. 셈의 자손들 가운데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들이 항상 존재하였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아담과 노아, 셋과 셈 족속 가운데 있었던 인류원시종교의 광범한 초석위에 세워졌다. 따라서 창조를 통해서 알려지는 신의 속생들, 예컨대 그의 전능과 전지(全知), 그의 영원성과 편재성 등이 신약보다는 구약 가운데 더 드러난다. 자연 가운데 나타난 신의 사역, 그의 창조와 섭리, 그의 유지와 통치하심이 복음 기자들이나 사도들 보다도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시편 기자들에 의하여 훨씬 광범하게 묘사 되었다. 자연에 대한 느낌, 지음받은 피조물의 기뻐하는 소리들은 새 언약에서보다 옛 언약의 책들 속에 더 크고 강하게 울린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물론 없어서는 안될 전제이며 필요한 부분이긴 하나 이스라엘 종교의 핵심이거나 본질은 아니다. 이것이 처음으로 드러난 것은 그렇게도 강하게 높여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언약관계를 맺게될 때 였다. 엘로힘(하나님)은 이제 여호와로 나타나신다. 창조와 은혜계약의 설정은 이스라엘 종교가 의존하는 두 개의 기둥이다. 시편과 예언은 계속 이 두 가지 사실로 돌아간다. 하나님은 항상 천지의 창조자로 기록되어졌음과 동시에 은혜로 값없이 자신의 기업으로 택하신 특정한 백성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것이야말로 구약이 지니고 있는 독특하고도 이적적(異蹟的) 진리이다. 이것은 마치 신의 사람되심이 이스라엘 가운데 이미 그 시작을 본것이나 다름이 없다.8)

 

  주님은 높이 초월해 게신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민족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하늘의 군대들과 땅의 거민(居民)들을 그의 기쁘신 뜻대로 다스리신다. 헤겔이 이스라엘 종교를 “초월(超越)의 종교”(die Religion der Erhabenheit)라고 한 것은 그릇된 말은 아니다. 그러나 유일한 높고 초월의 하나님은 가난하고 멸시받는 백성에게 내려오셔서 거의 모든 일에 인간과 같이 되셨다. 거의 순진한 방법으로 인간의 언어, 인간적인 행동, 인간적 감정을 가진 하나님인 것처럼 묘사되었다. 하나님은 이미 그 어딘가 이방 민족들 간에 있었던 할예(割禮)나 희생, 성전과 제사장직의 종교적 형식을 이스라엘 종교의식에 채용하셨다.9) 이렇게도 깊이 신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에 내려왔으므로 이스라엘 종교와 인접 민족들의 그것과


  7) “De gratia specialis is aan de Heidenen onbekend"_p.11.

  8) "Het is 미낼 de menshwording Gods reeds onder Israeleen aanvang neemt"_p.12


의 한계가 없어지는 것같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종교 속에서 고동치는 것은 다른 심장(hart)이었다. 타종교에서는 신을 감지하고 발견할까해서 신을 찾는 것이 인간이지만 이스라엘 종교는 항상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으시고 그로인해 인간은 긍휼 가운데 그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는 오셔서 “나는 너희의 주(主 ),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신다. 이스라엘 종교의 본질은 은혜의 언약에 있다. 모든 것이 은혜계약에 의존하게 된다. 하나님의 전능과 전지, 영원성, 편재성 같은 속성들은 결코 추상적인 개념으로 표현된 적이 없으며 항상 종교적, 윤리적 관점에서 묘사되었고, 자기 백성을 부끄럽게 하거나 혹은 위로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엘로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다. 이 하나님께서는 오직 이스라엘을 위해서만 구원이 되셨다. 그는 이스라엘의 전부요, 경건한 자들의 최고 선(善)이요, 그들의 방패와 상급이며, 원천과 샘물이며, 반석과 피난처, 그들의 빛과 구원이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과 나란히 사모할만한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그들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함보다 더욱 사모하였다. 그의 율법은 그들이 종일 기뻐하는 바요, 나아가는 길의 빛이요, 발의 등불이었다. 깨끗한 마음과 새로운 영(靈)으로 그의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 그들의 기쁨이었다.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며 그들은 그의 백성이었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본질적으로 이미삼위신적(三位神的)이었다. 하나님은 엘로힘으로서 높이 초월해 게셔서 모든 피조물과 불결을 멀리 하시면서 영원세계에서 거룩히 거하신다. 그러나 그는 또한 여호와시요,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여호와의 사자로 나타나시며, 자신을 이스라엘에게 주셔서 은혜로 그들을 택하사 애급에서 구출하시며, 희생의 제사(祭司)로 자기 백성을 깨끗하게 하신다. 그는 또한 영으로서 모든 구원과 축복의 원인이며 이스라엘로 하여금 언약의 기반 위에 그의 길을 걸어가도록 하시며 제사장적인 나라로 삼기 위하여 자기 백성을 정결케 하신다.

 

  께시가 발전함에 따라 이스라엘 종교의 이같은 본질이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결국(結局)과 목적이 함께 이루어진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예”와 “아멘”으로 화답한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고 그 자신이 순전한 은혜이시다. 새로운 법을 제정하거나 주시지 않는 임마누엘이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온전히 나타나시며 온전히 주어진 여호와이시다. 신약적 종교의 내용인 은혜가 너무나 완전하기에 창조와 자연으로부터 알려질 수 있는 신의 속성이 약간 뒤로 물러선다. 이러한 속성들이 부인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처에서 전제된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평화의 속성들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 가운데 죄인을 위한 모든 구원이 내포된다. 자연에 대한 신의 관계가 교회에 대한 관계를 위하여 뒤로 물러선다. 종교적인 생활과 국가적 생활과의 직접적 연결이 무너진다. 말하자면 은혜가 독립적 위치에 올라 아직까지도 이스라엘이 매여 있었던 모든 형식에 이젠 의존치 않게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지혜요, 의로움심이요, 거룩하심이요, 구독이시다. 구원의 축복은 인간의 사역이 아니다. 이것은 그 사랑의 아들 안에서 나타난 아버지의 선물이다. 복음은 순전히 은혜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이요, 내용이다. 심지어 이스라엘 역사와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 있었던 평범한 일 까지도 이러한 특별한 은혜의 계시이다. 이것은 심지어 특별계시이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완전히 자연적인 것 같이 보이고 어떤 자연법칙을 어긴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점이다. 초자연적 형식 그 자체에서가 아니라 신적 은혜의 내용 가운데 우리 기독교의 본질이 있고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특징이 보인다. 바로 이것을 그 어떠한 눈도 볼 수 없었다. 그 어떠한 귀도 듣지 못했고 그 누구의 마음에도 떠 오르지 못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그 중심이 뜨겁게 불타는 사랑으로 우리를 찾으셨다.

 

  그러나 이러한 특별한 은혜는 그것이 인류 최초부터 준비되어진 것과 관련시킬 때만이 충분히 평가되어질 수 있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에게서 나오셨다. 신약은 옛 언약이 완전히 성취된 열매이다. 그리스도의 모습은 구약의 막(幕)에 비추어 볼 때 비로소 명백히 드러난다. 이 때에 비로소 그의 은혜와 진리의 충만한 모습이 보다 환하게 나타난다. 이는 바로 천지의 창조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은 완전히 나타내시고 자기 백성에게 자신을 주시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히 나타난 이 은혜는 이제 모든 사람을 위해 겨냥되었다. 이스라엘은 인류의 유익을 위하여 택함을 입었던 것이다. 특별은혜의 샘물은 오랫동안 이스라엘 가운데 자기의 하상(河床)을 돈독히 하긴 했으나, 보통 은혜로 인해서 유지되고 보존된 인류의 넓고 광활한 바다로 결국 흐르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육신에 관한 한, 오직 그리스도를 낳게 하기 위하여 특별은혜를 완전히 나타내며 이것을 보다 일반화시켜 충만케하기 위하여 택함을 입었다. 특별은총의 강물은 점점 부풀어 올라 마침내 차고 넘쳐, 이스라엘 나라 조수 밖으로 흘러 나아간다. 이 강물은 전 지구위로 퍼져 흐르고 있다. 이것이 바로 바울사도가 놀라움과 경의심으로 자주 말한바, 이방인들도 함께 기업(基業)을 이으며 하나님의 한 권속이라는 그 비밀이었다. 보통은혜와 특별은혜가 수세기 동안 나누어져 있었던 것이 다시 함께 만나게 되었다. 이것들은 서로 연합하여 이제 기독교 백성 가운데 함께 가야할 길을 달리고 있다.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진 것이다. 이젠 아브라함의 씨로 인하여 땅의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게 되었다.




2. 로마교의 이원론(二元論)



  이 은혜의 복음이 사도들의 전도로 이방인들에게 알려질 때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의 사상이 그 가운데 나타났다. 그것은 희랍에서 나온 철학과는 다른 새로운 철학이었다. 그토록 새롭고 이적적 내용을 가진 기독교를 사상적으로 점령하여 학문적인 형태의 의식으로 바꾸자 하는 열망이 곧 일어났다. 제2세기의 노스틱주의는 기독교를 위대한 세계적 사상 조류속에 집어넣어 모든 종교 및 철학과 함께 혼합시켜 하나의 체계로 녹여 보고자한 야심적 기도였다. 그러나 곧 이에 대한 각성이 뒤따랐다. 안악한 인간의 사색속에 은혜의 복음의 빛이 상실하게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계속해서 온갖 힘을 다해 신앙을 지식의 차원으로 높이고, 삼의일체, 화육(化肉) 및 구독(救韇)의 교리를 인간이성으로서 증명하거나 혹은 밝히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이 중세 말기까지 시도되었다. 그러나 사상계(denken)는 이러한 교리들이 쉽게 이해되지 않고 또 되어질수도 없는 비밀이라는 심증을 날이 갈수록 굳히게 되었다. 이성은 초감각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아는 일에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올릴 수는 있었다. 이성은 신과 영혼의 존재 및 그 불멸성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로써 또한 그 지식의 한계성을 드러낸 것이다. 혼합된 불순한 신조와 순수한것, 자연 신학과 계시 신학 사이를 구별하게 되었다. 실질적으로는 이러한 구별이 이미 교부들, 곧 이레네우스(Irenaeus)와 터툴리아누스(Tertullianus),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다메섹의 요한(Jahannes Damascenus)에게서도 있었다.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로부터 배워서 알았던 하나님의 솜씨가 자연과 역사속에서도 살펴 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구별은 정상시 될 수는 있다. 그러나 로마교의 스콜라 신학에서는 종교개혁 전후를 막론하고, 이러한 구별이 전혀 다른 의미로 발전되어 굳어졌다. 로마교는 죄악과 은혜의 대립을 자연교와 초자연교의 그것으로 바꾸었고, 그 위에 본래의 기독교와 원리적으로 대립되는 사상체계를 세웠다.

 

  로마의 표현에 의하면 신의 의식속에 두 가지 개념의 인물, 따라서 두 가지 종류의 도덕, 두 가지의 사랑, 두 가지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먼저 지상적(地上的)이고 감각적이며 순수한 자연적인 상태에 있는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 그런데 그 후 곧, 이러한 자연인 아담에게 하나님은 사실상 그의 형상 곧, “덧붙여진 은사”(donum superadditum)를 더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곧 죄로 인해 상실되었다. 원죄란 전적으로 혹은 대부분이 “덧붙여진 은혜”의 상실로서, 순수한 자연상태로 돌아가는데 있다. 주위 환경에 미칠 수 있는 해로운 영향은 미루어 두고라도 인간은 이제 타락 전 아담의 경우, 곧 “덧붙여진 은사” 없는 상태와 같은 조건하에서 태어난다.

 

  따라서 욕망 그 자체는 죄가 아니고, 그것이 이성의 지배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죄가 된다. 이렇게 생각할 때 이제 인간은 참되며 선하고 완전하다. 인간은 선하고 순수한 종교 곧 자연종교를 가질 수 있다. 그는 선하고 완전한 도덕성을 소유할 수 있고 여러 가지 참된 덕을 행사할 수 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죄없는 지상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고, 예술과 과학, 상업과 공업에 종사하며, 가정적, 사회적 및 국가적 의무를 신실(信實)하게 수행할 수 있다. 한마디로,전적으로 자연의 권내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이념에 완전히 상응되어지는 인간의 존재를 생각할 수 있다 (로마교의 견해).

 

  이와같은 인간이 어떠한 종교없이 존립할 수 있다고 까지는 로마교가 주장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인간이 가지는 유일한 종교를 가지게 될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자연속에 있는 신의 계시로부터 추출되고 인간의 특유한 자연적인 능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자연종교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신을 두려워 하는 종의 자리에 낮아져 신의 직접적인 임재(臨在) 가운데 있는 하늘의 축복에 호소할 아무런 권리도 없다. 실제적으로는 이것이 대부분의 인간으로 하여금 이같은 지상의 죄없는 자연적 생활에 이르게 할 수는 없고 거기까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죄악의 본으로 인하여 그것에 주는 영향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사색의 추리에 의하면 10) 이것이 불가능한 것 같이 보이지 않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땅 위에서 덕스런 생을 영위하고 자연종교의 의무를 감당할 정도의 어떤 경지에 아르게 된다면 수세(受洗)전에 죽은 아이들처럼 죽음의 건너편에서 어떠한 형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다만 어떤 최상의 초자연적인 축복이 결여된 연옥(煉獄)이 그를 기다릴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의 성품과 그 운명에 관하여 또다른, 보다 높은 생각을 가지셨다.11) 고전 2:6~16에 관한 로마교의 해석에 의하면, 사리에 한 질서가 있는데 이것은 “절대적이고, 엄밀한 의미에서 초자연적이며 타락된 인간 뿐만 아니라, 무죄(無罪)한 자연, 심지어 천사들의 지식도 초월하기 때문에 단지, 그리고 오직 초자연적 계시에 의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고 한다. 신은 이제 그의 자유로운 작정에 따라서 인간을 이런 초자연적 질서속에 두기를 원하셨다.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단지 자연으로 부터의 지식 뿐만 아니라 계시 (특별 계시)로부터 고차원적 지식에 이르게 되기를 원하셨다.

 

  그는 인간이 지상적인 것이 아니고 천상적, 초자연적 축복에 이르도록 작정하셨다. 인간을 다만 부리는 종으로 만들지 않고 자녀로 삼는 것을 기뻐하셨다. 이를 위하여 이제 다른 하나의 보다 높은 은사가 필요했다. 그 목적에 이르기 위해서 인간이 자기의 자연적 능력으로는 불완전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 성령의 내주(內住) 곧 초자연적 은사가 필요했다. 타락전에 이것이 “덧붙여진 은사”가운데 인간(아담)에게 주어졌다. 타락 후에는 이 은사가 두 가지 이유로 필요하다. 첫째, 우연히 필요한데 죄로 인하여 다소 약화된 자연인의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함이며, 둘째, 인간으로 하여금 초자연적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능력을 부여받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러한 초자연적 은혜의 보존과 시여(施與)는 지상에 있는 교회(카톨릭)에 위임한 것인데, 교회는 신부에 의해서 자동적 효과를 나타내는 성례를 집행하여 사람(敎人)에게 초자연적 은혜를 나누어 줌으로써 사람을 능하게 하여 응보의 법에 따라 초자연적 원리하에서 천상의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선행을 행하도록 한다. 12) 자연적 및 초자연적 질서의 이러한 병립(並立=juxtapositie)은 로마교로 하여금 항상 두 가지 종류의 자녀(교인들)를 교육케 했고 기독교는 다소간 아무 구별없이 모든 사람을 위해 모든 준비를 갖추었다는 특이한 현상을 설명해 주고 있다.13)

 

  로마교가 자연적 질서 위에 세웠던 초자연적 질서를 순간적이나마 제거된 것으로 생각한다면 남는 것은 순수한 합리주의 뿐이요, 참된 펠라기안 주의이며, 순전한 초자연신론(超自然神論(deisme), 혹은 이신론(理神論) 밖에 남지 않는다. 로마교 신학체계의 근본은 펠라기안 주의라는데 있다. 신은 세계를 창조할 수도, 안할 수도 있었겠다. 그는 이 세계를 이렇게도 혹은 달리 저렇게도 조성할 수 있었겠다.. 그는 인간을 그 기쁘신 뜻대로 신의 본질에 관한 초자연적 지식을 가지게도, 혹은 안가지게도 조성하실 수 있었겠다. 그(神)는 그의 의사결정에 아무런 이념에 의해서도 지배를 받지 아니했다. 신이 기뻐하시는 만큼 많은 수의 계층과 여러 가지 정도의 선(善)과 덕(德)이 있다. 계급적 순서는 로마교 체계의 가장 깊은 사상이다. 천사들 사이의 계급, 신(神)지식의 계급, 도덕적 생활의 계급, 교회안에서의 계급, 죽음 건너편에 있는 대기소에서의 계급등, 가장 높은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해 있지 않다. 고전 2:14의 자연인은 로마교에 의하면 죄의 사람이 아니라 덧붙여진 은사가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 사람(自然人)은 자기 힘을 다함으로써 자연적 목적에 완전히 도달할 수 있다. 이로써 로마교는 이방인들에 관하여 보다 부드러운 판단을 하는 이유를 해석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원리로부터 또한 신도들을 위한 복잡한 신앙, 도덕적 양보 및 결의론(決疑論=casuistiek)14) 에 관한 교리가 흘러 나온다. 도덕적, 종교적 이상이 똑같이 높이 우뚝 솟아 인간의 품성과 이해력에 따라서 스스로 적응한다. 이로써 또한 로마교의 신학자들이 전세기(18세기)의 이신론적 및 합리주의 신학에 대하여 품은 그 동정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18세기의 신학 그 자체는 완전히 참되고 좋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불확실하고 보충을 필요로 하는 것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합리주의적 기초 위에 변증학(辨證學)에 의하여 초자연적 질서의 건물이 세워져야 한다. 로마교의 교의학(敎義學)은 이 표준에 따라서 세워졌다. 자연신학은 “신앙의 전위”(praeambula fidei)이다. 그 다음에 가신성(可信性)의 동기가 따르고 그 위에 초자연신학이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그러나 로마는 또 다른 아이를 키운다. 이것은 자연적인 것에 만족치 않고 보다 나은 것, 보다 높은 것을 사모하여 신이 교회로 하여금 가능케 한 초자연적 생명의 숭고한 목적을 향하여 뻗어나가는 이상적이고 신비적인 품성을 가리킨다. 이에 도달하기 위하여는 자연적 생활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그래도 장애는 된다. 가장 선하게 가장 확실하게 완전에 이르는 길은 세가지 덕행 곧 빈곤, 순종 및 정결이다. 수도승 신분의 기원은 아직도 여러 가지 점에서 어두움에 묻혀있다.15) 그러나 로마는 그 정신을 전신학적 체계속에 받아들였다. 초자연적인 것이야말로 본유(本有)의 질서이며 자연적인 생활을 넘어서 높이 솟아있기 때문에 주위의 것들과 단절되었다.

 

  초자연적인 것을 섬기고자 하는 자는 가능한 한 자연적인 것을 죽여야 한다. 수도승들은 종교적으로 최고의 경지에 이른 크리스챤이다. 그들은 로마교의 유일한 대표자는 아니지만 최상급에 속하는 기독교적 이상이다. 따라서 자연의 영역에서 초자연세계로 넘어오는 것은 모두 봉헌되어져야 한다. 십자가의 징표, 성수, 성유, 귀신 물리기(exocisme), 봉직 의식 등은 양 영역의 혼합을 피하고 초자연적인 것을 분리시켜 따로 정결하게 보존하는 수단들이다. 사람들만이 아니라, 물건들 예컨대 교회 제단, 시계, 초, 잔(미사에 쓰는), 의상 등도 이러한 수단등을 통하여 세속적인 것에서부터 구별되어 성역으로 옮겨진다. 이 영역 안에 있는 것은 모두 보다 높은 질서에 속하여 초자연적인 목적에 쓰인다. 특히 “주입(注入)된 은혜”(gratia infusa)를 통해서 교회가 제공하는 수단들의 도움으로, 인간은 최고의 목적을 향하여 혹은 보다 지성적인 길을 따라서 혹은 보다 신비적인 길을 따라서 달음질칠 수 있다. 스콜라 신학과 신비주의는 한 계열에 속한 같은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것들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서로 지지하며 같은 원리에 의하여 지탱되어지며 이따금 함께 걸어간다. 양자는 그 출발점과 성격 및 그 목적에 있어서 로마교적이다. 로마교의 경건은 헌신의 성격 곧 자연적 생활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전인격을 바치되 그의 모든 능력을 다하여 거룩하고 종교적인 것(좁은 의미에서)을 묵상하며, 명상에 잠긴다.

 

  로마교의 이같은 특징은 어느 시대나 눈이 띄인다. 한편으로는 지상생활을 완전히 부인하며, 천상적인 것에 완전히 헌신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경의와 놀람을 금치 못한다. 로마는 거룩한 생활을 첫째로 꼽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성품의 연약성(軟弱性)을 시인하는데 이것은 물론 기독교 도덕의 취약점이다. 중세처럼 로마교의 지배력이 확부동한 적은 결코 없었다. 교회는 모든 분야에 그 세력을 확장시켰다. 그러나 그 찬란한 빛은 모두 황금빛은 아니었다. 기독교적 형식하에 강한 자연적 생활이 숨겨져 있었는데 이것은 세상의 욕망을 조금도 제어한 것은 아니었다.16) 자연적인 것이 억눌리긴 했으나 새롭게 되거나 거룩함을 입지는 못했다. 로마교의 계급제도에 대립하여 자연의 권위가 그 모든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날이 갈수록 점점 그 때는 다가왔다. 중세의 말기에 이르러 도처에서 정신적인 각성이 일기 시작했다. 자유화에의 운동이었다. 이것은 불신앙, 비웃음, 세속화, 방종, 문예부흥, 인도주의 등 각양 형태로 나타났다. 로마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신앙과 지식, 교회와 정부, 자연과 은혜는 서로 대치하여 맞서고 있었다. 결국 자연인이 로마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말았다.



3. 종교개혁의 이원론 극복



  그러나 또한 종교인 즉 기독교인도 끝내 로마교 안에서 참 진리를 찾을 수 없었다. 로마교의 초자연주의는 종교개혁자들에게 사상적인 부담으로는 느껴지지 않았으나, 신앙양심상 무거운 짐이 되었고, 축복에 이르는 길을 막는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었다. 종교개혁은 정치적, 사회적, 학문적인 운동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적-윤리적 운동으로서 기독교적 신앙운동이었다. 루터에게도 축복의 확실성 보다도 죄악을 물리치는 것이 문제였다.17) 그러나 종교개혁이 탄생된 것은 선행이 결코 죄사함의 위로나, 하나님 자녀의 즐거움과 기쁨이나, 구원의 확실성을 줄 수는 없다는 확신에서 나왔다. 구원을 얻기위한 선행의 실행은 하나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이라는 입각점(立却點) 위에서 세워진 행위계약에는 전적으로 맞으나 죄로 인하여 전적으로 불가능하게 된 인간에게는 맞지 않는다. 이제 죄 사함이나 양자됨이나, 칭의(稱義)나, 구원 등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실 때에만 우리가 그것들을 얻을 수 있다. 심지어 선행이 오직 가능한 것은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의 자녀됨이 확실해 질 때이다. 종은 품삯을 위해서 일하지만, 아들 딸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한다. 선한 행실은 믿음을 전제하며 그것의 열매이다. 나무의 질을 바꾸면 좋은 열매는 절로 따른다. 이와같이 종교개혁은 초자연적 종교(religio supranaturalis)가 아니라 은혜계약을 그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로써 자연과 은혜와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신앙이 있기전에 혹은 그 밖에서는 선행에 관하여 아무것도 언급할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은 물론 인간의 본질에 속하였으나 죄로 인하여 상실되었다. 이젠 타락된 인간 속에는 아무런 선이 없다. 그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죄로 물들었다. 자연인에 관한 종교개혁가들의 판단은 로마교보다 훨씬 엄하다. 고전 2:14의 육(肉)의 사람은 단순한 자연인이 아니고, 본성품(本性品)으로는 진리의 비밀을 이해할 수 없는 단순한 자연인이 아니라 지성이 어두어 영적 일을 이해할 수 없는 죄인이다.

 

  루터(Luther)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이성을 불신했는데, 항상 하나님의 법에 반항하고자 하는 어두운 가로등이라고 생각했다.18) 그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를 죽은 이방인으로 멸시한 것은 그 안에 아무런 능력이 없고 공허한 어두움만이 있기 때문이었다.19) 그리고 일치신조(一致信條)도 이에 상응하여 말하기를 인간의 지성과 마음과 의지가 신령(神靈)한 일에는 전적으로 부패되어, 심지어 죽은 것이라 했고, 돌이나 썩은 나무둥치와 같이 아무런 능력이 없다고 하였다.20) 그러나 개혁신학은 자연인이 이루어 놓은 많은 선한 일에 대하여 눈을 감을 수는 없었다. 루터교는 이 난관을 천상적인 것, 신령한 것과 감각적인 것, 곧 두 개의 세계를 만들어 하나는 하계(下界)로, 다른 하나는 상계(上界)로 엄격히 분리시키는 것 외에는 달리 해결할 수가 없다. 자연생활의 여러 가지 일을 할 때 인간의 이성과 의지는 아직 자유롭고, 어떤 선한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신령한 일에는 완전히 어둡고 전적으로 무능하다. 21) 루터교의 주장은 자연과 초자연의 대립이 비록 윤리적인 의미로 바꾸어지긴 하여도 로마교의 이원론이 완전히 극복된 것은 아니다.

 

  칼빈의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정신은 이같은 이원론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한편 죄악을 너무 깊이 또 심각하게 이해했기 때문에 어떠한 영역에서든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어떤 선이 나온다고 하지 아니했다. 만약 죄의 소욕 그대로 버려 두었더라면 - 이렇게 칼빈은 말한다 - 그것은 모든 것을 썩게 하며 망하게 했을 것이다.22) 다른 한편으로 칼빈은 또한 특별은혜를 너무 지나치게 넓혀 역사적 기독교의 한계를 넘어 이방인 세계에서도 그것이 사역한다고 한 쯔빙글리(Zwingli)와 함께 보조를 맞출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연인속에 아무리 여러 가지 은사와 덕이 있다 할찌라도 한가지 일, 곧 그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지식, 성부의 사랑과 자비하심에 관한 그 지식은 결여되어 있다.23) 물론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모든 참되고 선한 아름다운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것을 부인하면 우리의 경험에 배치될 뿐아니라, 하나님의 여러기지 은사의 본질을 오인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감사함이 없는 무정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24) 이렇게 칼빈은 이제 성경에 일치하여 또 그것에 호소하면서 일반은총과 특별은총, “모든”피조물 가운데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과 오직 신자들만 참여하는 성결의 령을 구별하였다.25) 하나님은 죄로 하여금 죄 자체가 갖고있는 파괴의 사역을 하도록 버려두지 아니하셨다. 그는 타락 후에도 그의 창조의 의도를 그대로 가지셨고 또 지키셨다. 그는 내면적으로 새롭게 하지는 못하나 외부적으로 맞서서 제어하는 일반은총으로써 중간에 들어오셨다.26) 지금도 우리가 타락된 인간세계에서 경험하는 모든 선과 참된 것이 다 이 일반은총으로부터 유래되었다. 그 빛은 아직도 어두움에 비취고 있다.

 

하나님의 성령은 모든 피조계에 사역하고 있다. 이로써 인간에게는 신형상(神形像)에 관한 약간의 특징이 아직 남아있다. 아직도 지성과 이성이 있고, 여러 가지 자연적 은사가 인간 속에는 현존하고 있다. 신성(神性)에 대한 감각과 인상, 곧 종교의 씨가 사람속에 있다. 이성은 신의 귀중한 은사이며27) 철학도 신의 빛나는 은사이다.음악도 신의 한 은사이다. 예술과 학문은 선하고 유용하며 하나의 높은 가치를 지닌다. 정부는 신의 제정으로 세워졌다.29) 생활필수품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의 필요를 충족키 위함만이 아니고 생의 락(樂)을 위하는데 까지 미친다. 그것들은 순전히 필수품만이 아닌 즐기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30) 일반적 진리추구와 덕행에 의미가 아직 있고, 부모와 자녀들 사이의 자연적 사랑이 있다.31) 지상생활에 관계되는 일들 가운데 인간이 아직도 성취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칼빈에 의하여 제네바에서 시행된 극단적인 엄한 권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사상이 그에게 있었다는 것을 감사하면서 시인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할 필요는 없다. 이것 외에 달리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에 궁지에 몰려 마지못해 그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아니, 그는 그것을 시인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를 앞지른다. 그는 스스로 앞장 서서 기꺼이 감사하면서 중심으로 시인했다. 만약 그가 이러한 선한 선물과 온전한 은사들이 빛의 아버지로부터 온 것임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성경과 어긋나게 행동할뻔 했고 하나님을 향하여 그 은혜를 무시하는 죄를 지울뻔 하였다.

 

  이런 칼빈의 이해가 모든 선한 개혁신앙가들의 건전한 입장이다. 그들은 칼빈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짱키우스(Zanchius)32) 는 기독교강요의 주요내용을 그대로 옮긴 s 것외에 아무것도 하지 아니했다.33) 그들은 또 그들의 교의학 속에 어떤 특별한 부분을 위해서 힘쓴 일도 없다. 그러나 신형상의 상실, 행위계약의 파약, 이방인들의 덕행, 세상의 정부등에 관한 그들의 교리는 모두 칼빈의 사상에 귀일한다. 이 보통은총을 통해서 개혁신앙가들은 한편, 기독교의 특수성과 절대성을 주장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론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주신 모든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들을 평가하는데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이로써 그들은 죄악의 심각성과 자연적인 것의 권리를 동시에 시인하였다. 그들은 이로써 펠라기안주의34)는 물론 경건(敬虔)주의34)를 경계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양자가 각각 치우쳐 소씨니안주의와 재세례주의로, 개혁주의와 나란히 등장하여 일방적인 극단으로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 두 가지 운동이 신교의 개혁신앙적인 이름에 호소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중요한 물음이다. 그들은 확실히 항거하는 자로서 형식적으로, 소극적으로 로마에 대항하여 싸운자들에게 속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사상이 이원적인 이상 실질적으로 원리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개혁사상보다 로마교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36) 그들은 종교개혁으로 동이 튼 새 시대보다도 오히려 중세의 아이들이다. 그들의 사상은 일찍이 로마교 안에 이미 있었던 사상적 경향과 그 추구의 연속을 이룬다. 그들의 정신적 조상들은 로마교 안에 있었던 교인들이었다. 라엘리우스(Laelius)와 파우스투스(Faustus)같은 소씨니안들은 다 이탈리아 태생이었다. 불신앙, 무관심주의, 무신론은 이미 개혁전에 이탈리아 전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문예부흥은 교회와 기독교에 대항하여 싸우는데 좋은 무기들을 제공했고, 신앙, 삼위일체, 화육(化肉) 및 속죄 등의 여러 가지 신비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리한 비평하에 있었다. 라엘리우스는 특히 법조계에서 남달리 구별된 상류가정에서 태어나, 이같은 진리에 대한 비평가로서 베네치아에 알려져 있었다. 파우스투스는 후에 전적으로 그의 숙부인 라엘리우스의 영향 아래에 들어갔다. 소씨니안주의는 종교적인 민중운동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귀족적, 지성적, 운동이 었다. 따라서 이 사상이 특히 인문주의적 사상을 가졌던 폴란드의 귀족에게 더 환영을 받았다. 이와같이 재세례주의도 중세시대에 이미 나타났던 종교적인 운동 현상과 명백한 연관성을 드러내고 있다. 릿출(Ritschl)이 재세레주의를 전적으로 중세를 배경으로 해석하여 프란시스칸 종단의 재생으로 보고자 한 것은 아마 좀 지나친 것 같다.37) 그러나 재세례주의의 특유한, 그 수많은 특징들이 전에 있었던 여러 종단에서 이미 발견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산상보훈의 여자적(如字的) 해석, 맹세의 금지, 전천년설(前千年說)38), 제(諸)계시의 호소, 현실도피 등은 개혁신앙적인 것이 아니라 중세에서부터 유래되었다.

 

  소씨안주의나 재세례주의는 양자가 다 로마교의 체계의 한 부분에 대항하여 나아온 것이다. 옛날에 경교(景敎=네스토리안)와 단생론자(單生論者)들이 동일한 원리에서 서로 상이한 결론을 낸 것처럼 소씨니안들과 재세례주의자들도 동일한 기본 사상에 입각하면서도 서로 대립되는 방향으로 달음질 쳤다. 양측은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이 서로 화목할 수 있음을 부인했다. 양측은 다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대립으로부터 출발한다. 소씨니안들은 초자연적인 질서를 측면으로 돌렸다. 전자는 신앙, 삼위일체, 화육 및 속죄등의 특유한 비밀들을 비평하였고, 후자(재세례주의자)는 로마교가 가정, 국가, 사회의 제 문제에 관한 자연적 질서를 인정한 일에 대하여 반대의 입장에 섰다. 소씨니안들은 특별은총을 오해하고 자연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재세례주의자들은 보통 은혜를 무시하고 특별은혜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자기는 그리스도는 아무런 참된 신도 아니며 여기는 참된 사람이 아니다. 소씨니안들에게는 기독교의 특수한 성격이 상실되며, 합리적인 종교 이외는 아무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인간은 세계를 지배하는 신의 형상을 지녔고 타락 후에도 상실되지 아니했다. 원죄는 없다. 그리스도가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가져온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상금으로 영생을 얻는다. 자연종교는 점점 모든 초자연종교를 추방한다. 이에 반해 재세례주의자들은 창조를 멸시한다. 아담은 땅에서 났고 지상적이다. 자연계는 그 자체가 불결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늘로부터 그 인생을 가지고 오셨고,39) 신자의 중생(重生)시 새롭고 영적이며 신적인 실질을 주입시킨다. 중생자는 전적으로 다른 새 사람으로서 불신자와는 아무런 교제를 가져서는 안된다. 따라서 그들은 맹서, 전쟁, 정부의 관직, 사형집행, 세상적 옷차림과 생활방식, 불신자와의 결혼, 유아세례 등을 배척한다. 여기서 초자연적 질서는 자연적인 것을 전적으로 도외시한다. 소씨니안은 세상과 같이 될려고하나 이들은 세상을 도피한다. 양자는 개혁신앙이 좀더 극단적으로 달음질하지 않았다고 비난한다. 소씨니안주의는 개혁신학이 로마교의 교리에 대한 비평이 불충분하기 때문에 실망을 느꼈다. 이 양극은 합리주의적이고 초자연주의적인 요소들이 경의적인 혼합을 이루어 서로 접촉하곤 한다.

 

  이 양 조류는 종교개혁과 나란히 하나의 위치를 차지했을뿐 아니라, 종교개혁 안에 미친 영향도 막대하였다. 소씨니언주의는 항론파에 의하여 국내(화란)의 교계에 잠식해 왔으며, 스피노자(Spinoza)를 거쳐 영국의 초연신론(超然神論=Deisme)40) 속에 되살아났고, 카르데시우스(Cartesius)41)을 통해서 네덜란드와 독일의 합리주의 속에 침투하였다. 소씨니안주의는 합리주의뿐만 아니라 초자연주의의 요람이기도 했다.43) 이와같이 또한 재세례주의의 흔적을 Mennonit 주의43) 뿐만 아니라 유럽대륙의 경건주의 및 라바디주의(Labadisme)44) 헤론휴트주의(Herrnhuttisme)45) 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국과 미국의 독립주의와 침례교,퀘에커주의 및 감리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모든 교파들에 의해서 “보통은총”교리가 오해를 받았거나 배척을 당했다. 심지어 개혁교회 안에서도 원래의 개혁주의적 원리가 여러 차례 이편 혹은 저편으로 약화 혹은 왜곡되었다. 합리주의라는 이름은 많이 거론되었으나 참으로 극복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신자들 사이에는 옛 재세례주의를 기억케 하는 풍조가 자주 나타났다. 성경 문자를 멸시하고, 성령의 내적 조명을 높이는 일, 말씀을 섬기는 것이 직분임을 망각하고 아무나 준비없이 하는 즉흥적 설교를 더 좋아하는 일, 교회와 언약, 직분과 성례를 하나님께서 객관적으로 제정하심을 멸시하는 일, 그리고 폐쇄적인 고립을 좋아하는 것 : 예술, 학문, 문화 및 지상생활에 속한 모든 물질에의 혐오 : 가정, 사회 및 국가안에서 우리가 져야 할 사명을 무시하는 것 - 이 모든 것은 건전한 개혁신앙적 사상조류에서가 아니라 병들고 폐쇄적인 재세례주의적인 조류의 결과이다.

 

  또한 신앙과 관계를 끊어버린 사람들(자유주의 교회)사이에도 우리는 본질적으로 같은 경향, 동일한 조류를 만나게 된다.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을 향한 결국(結局)을 오인하므로써 결코 벌받지 않는 일이란 없다. 몇 년전만 해도 (1894년 현재) 인류를 위한 구원이 오직 이 땅을 지배하는데 있다고 기대했다. 세속화는 세기의 표어였다. 인간을 영원세계에 붙으로 매는 결박은 그들의 생각에 벌써 끊어져야만 했다. 그리하여 인간을 위한 낙원이 이 땅에 세워져야 했다. 신과 종교는 적어도 초자연적 의미에서 인류의 원수였다. 초자연적인 것은 초신적이다. 자연은 신이었다. 예술, 과학, 공업 등은 경의를 받아야 할 신들이었다. 문화는 종교의식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었다. 인도주의가 기독교에 대치되었다. 위생학이 윤리의 자리에 올랐다. 연극 무대는 교회가 갚아야 할 보상이었다. Lessing의 Nathan(렛싱의 나단)은 그들 생각에 성경을 해롭게 한 것이 아니라 회복케 한 약이었다. 신의 화육교리는 인간의 신격화 교리로 바꾸어 졌다.

 

  아직도 세기의 종말에 이르지는 못했다. 여러 가지 방면에서 그 반대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편에는 한숨과 괴로움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엔 문화의 충족과 그 혜택의 충일(充溢)이 넘친다. 인간이 문화 위에 세웠던 거대한 기대는 그 기초가 무너졌다. 소망은 실망과 의혹으로 바뀌었고 낙관주의는 비관주의로 뒤바뀌었다. 전에는 사람들이 인간 품성의 고귀함을 찬양하였고, 남미나 아프리카 미개인의 성품에 감탄하였다. 그러나 이젠 최상의 문화인 속에 인간의 야수성(野獸性)이 존재하고 있는 사실을 기꺼이 말한다. 전에는 그 미(美)를 자랑하고 거룩한 전(殿)으로 높임을 받은 자연이 이제는 혼돈과 모순을 드러내는 빈약한 무대로 전락한다. 자연은 그 난폭한 요소와 그 위협적 능력으로써 인간 생활을 좌우하였다. 이 세계는 가능한 한 약하다. 그것은 선하고 지혜로운 하나님의 솜씨로 지으신 작품이 아니라, 맹목적 의지, 우둔한 무의식자의 산물이다. 예술과 과학이 전에는 모두 가치가 있는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이젠 말할 수 없이 빈곤한 것으로 나타났고, 가장 많이 그리고 첫째로 그 도움과 위로를 필요로 하던 곳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생명과 운명 그것은 모두 신비에 속한다. 인간의 사상은 우리를 그 곳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학문은 도처에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의 인식은 유한하고 현상계에 제한된다. 따라서 가치가 있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환상이다.

 

  격렬한 감정이 사유(思惟)에 대치되기를 바란다.분위기가 중요하고 사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의지의 능력은 헛되고, 행동은 정숙과 휴식으로 넘어간다. 명상이 능동적 생활 보다도 높은 자리에 오른다.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 아마 미지의 세계가 우리 앞에 열려진다. 몇 년전만 해도 사람들은 이적이나 천사들이나 모든 초자연적인 것들에 대하여 조롱했다. 이젠 사람들이 신령주의, 최면술, 신지학(神知學 또는 接神學), 불교 등 여러 방법을 다하여 누구나 다시 돌아오지 않는 미지의 땅으로 가는 길을 개척고자 한다. 신비스러운 것, 어두운 것, 알지못하는 것이 미치는 영향은 믿지 못할 만큼 막대하다. 비종교적인 단체들 속에 이방적인 미신이 날마다 불어난다. 신앙이 추방되자마자 불신앙이 이미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합리주의의 승리의 나팔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신비주의가 이미 왕좌에 오르고자 힘쓰고 있다. 이같이 금세기(19세기)말경 인간의 신격화와 인간의 야수화, 자연 승배와 자연 경멸이 경의적인 방법으로 서로 얽혀 있다. 균형은 깨어졌고, 인생의 조화는 사라졌다.



4. 일반은총교리의 현대적 의의



  이로써 이미 보통 은총 교리의 중요성이 오늘날에도 명백하게 눈에 띠인다. 여러 가지 신중한 문제들, 예컨대 믿는 것과 아는 것, 신학의 철학, 권위와 이성, 머리와 마음, 기독교와 인도주의, 종교와 문화, 하늘의 사명과 땅의 직업, 종교와 도덕, 명상과 능동적 생활, 안식일과 주간(週間)의 노동, 교회와 정부간의 한계, 등의 여러 가지 신중한 문제등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문제는 항상 동일하다. 이 모든 문제들과 그 밖의 많은 문제들이 다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창조와 재창조, 성부의 사역과 성자의 사역 사이에 존립하는 관계여부에 달려있다. 누구든지 땅의 직업과 하늘의 사명 사이에서 어떤 부조화를 느낄 때는 심지어 가장 단순한 일까지도 이러한 갈등에 말려 들어 간다. 이렇게 섬세하고 복잡한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거나, 온전한 조화를 여기 이 세대에서 그 누구에게든 발견되지 못한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모든 사람, 모든 교파들은 다소간 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폐단을 안고 있고, 우리의 생은 가끔 현실추구와 현실도피 사이를 왕래하면서 중심을 잡지 못한다. 머리와 마음 사이에 고통스러운 싸움이 계속된다. 각 사람의 속에는 약간의 유대인적인 것과 헬라적인 것이 함께 거한다고 말했다. 여기 이땅 위에서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롭고 기쁘게 활보하는 것이 좋긴 하다. 반율법주의 가운데 이같은 매력적인 생각, 즉 정언명령(定言命令)에 따른 의무감 없이 저질로 본능처럼 선을 행한다는 생각이 깃들고 있다.

 

  이것은 항상 거듭되는 금령(禁令)으로 우리가 그 범위 안에서 행동해야 할 한계를 기억하는 것보다는 훨씬 유쾌하다. 천재, 본능, 자발적인 자유로운 날개가 어찌하여 율법의 올가미로 말미암아 자주 마비되어져야 하는가? 은혜와 율법이 서로 어떤 조화를 갖고 있는가? 자유와 권위와는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가? 낭만주의와 고전주의 사이에는 서로 교통하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그러나 예술과 학문, 종교와 윤리에서 반율법주의의 아름다운 꿈을 꾼 자는 무서운 타락으로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님이 드러난다. 자연과 은혜는 다 필요하다. 양자 중의 그 어느 하나라도 잘못 이해되거나 멸시되어질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 이원론이 절대적 혹은 상대적으로 취급되어지느냐의 여부에 큰 차이가 생긴다. 로마교에서는 이것이 절대적이다. 기독교 계시의 본질은 신비에 싸인다. 그것은 이해되어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이해되어져서도 안된다. 로마교는 신비는 신비대로 남아 지속되도록, 조심스럽게 깨어 지킨다. “기록되었는 바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바티칸 회의는 선언하기를 계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무한한 선을 따라서 인간을 초자연적인 목적을 위하여 만드셨기 때문이며, 이는 인간의 지성적 개념을 완전히 초월하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에 참여케 되도록 하기 위함인데, 이러한 은혜를 아무도 그 눈으로 볼 수 없고, 그 귀로 듣지 못했고,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도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46) 이같은 입장으로는 자연과 은혜의 참되고 충만한 화목이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그 관계를 달리 보았고 특별계시의 본질을 신비에서가 아니라 은혜에서 찾는다. 십자가의 복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은혜의 기쁜 소식, 이것은 육(肉)의 사람의 지성을 초월하는 신비이며 오직 신령한 사람을 통해서만 알려진다. 자연을 초월하는 것은 종교개혁에 따르면, 형이상학적인 삼위일체 교리나, 화육이나, 화해교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의 육용(肉容) 곧 은혜에 있다. 그것은 마치 형의상학을 신학에서 추방코자 함에 있자않다. 릿출에 의하여 제의된 분리(分離)는 실제적으로 실행 가능성이 없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교리도 그 자체로서 또 그 자체로 인하여 바로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거나 대상이 아니다. 루터나 멜랑톤 뿐만 아니라47) 칼빈도 “하나님이 무엇인가”(guid sit Deus)라는 것을 연구하는 것은 헛된 사색이라 했고, 우리에게는 오직 “그가 어떠한 분이며 무엇이 그의 성품에 부합하는가”라는 것을 아는 것이 관심사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인격, 그 은혜와 진리의 충만하심은 기독교 안에서 새롭고 독특한 진리이다. 교회의 구원은 단지,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인격에 근거하고 있다.49) 이것이 본래적인 의미에서 초자연적이며, 자연적이고 육에 속한 사람의 이성을 초월한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확실성을 이방인들이 알지 못했고 또 알 수 없었다. 우리에게 본질이 감추어져 있는 그 참된 신은 누구인가를 어떠한 인간의 지성이라도 이해할 수 없다.50)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신 그것이 유대인들을 거리끼게 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값없이 은혜로 용서하신 것이 바로 덕행을 그들 자신의 행위로 본 희랍과 로마인들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였다. 로마는 진리가 계시되는 거기에 기독교의 본질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인간으로 말미암아 결코 그것이 발견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것은 특히 삼위일체, 화육 및 화묵의 교리들인데 바로 그러한 이유로 극소수에게만 하늘의 축복에 참여키 위하여 감추인 믿음에 의하여 진리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개혁신학자들은 이 모든 초자연적 진리들이 실질적으로 이미 타락 전에 아담에게 알려졌고 신의 형상 속에 그 내용이 담겨져 있음으로 이런 의미에서 자연적이고 인간의 본질에 속했다는 것을 보이고자 힘썼다.51) 신의 삼위성(三位性)도 첫째 사람에게 이미 알려졌다고 그들은 말하였다. 이들은 타락 전에도 중보자(仲保者)였다. 물론 화해의 중보자가 아니라 화합(vereaniging)의 중보자였다. 그리고 아담도, 아니 그리스도 자신도 믿음으로 거닐었으며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했다. 정반대로 타락 후에 인간에 의하여 자연으로부터 추출해 낸 종교적 및 윤리적 진리의 체계치고 순수하게 거짓이 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52) 자연신학이란 없다. 죄의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삼위신이나 화육을 알지 못할 뿐아니라 그는 이로써 또한 신의 단일성이나, 본질, 속생을 알지 못한다. 그는 또 자연 속에 있는 신의 계시를 이해하지 못하여, 진리를 불의로 여긴다. 따라서 타락 후의 계시는 유일한 초자연적 진리가 아니면 인간에게 알려지지 아니했던 것을 알리기 위함이 그 목적이 아니었다. 그것(啓示)은 타락 전 계시의 보충이 아니고 그것의 고침(更正)이 었다. 죄책으로 떨고있는 인간에게 각종 초자연적 진리를 아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었겠는가? 범죄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그 하나님께서 은혜의 신이라는 것을 아는 그것이었다. 여기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의 계시로 보여주신 고치심이 보인다. 타락 후의 계시는 죄의 상태에 있는 인간을 겨냥하여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이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흘러나온다. 이 은혜가 그 계시의 오리이다. 이 원리는 이제 말하자면, 모든 지식을 내포하는데, 만약 이것이 아니면 인간은 혹 자연으로부터 혹은 특별계시를 통해서 얻을 수 밖에 없다. 이 은혜는 우리에게 이제 삼위일체나 화육 및 화해뿐 아니라, 신의 단일성과 본질 및 그 속성들도 계시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의 전능과 전지 그의 편재와 영원성을 다시 바로 알게 한다. 은혜의 계시는 먼저 인간과 그 인간의 유래 및 목적에 관한 바른 빛을 비춰준다. 이 계시는 우리의 모든 종교적 및 윤리적 지식의 유일한 원리가 된다. 모든 지식은 그것을 사람이 죄밖에서 자연으로부터 얻든 혹은 계시로부터 얻든 간에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섬기게 한다.계시는 구원론적으로 경정(更正)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게로 집중되었다. 그것은 은혜를 섬기기 위해 등장한다. 엘로힘이었던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셨고, 여호와는 자신을 알리신다. 화합의 중보자였던 아들은 이제 화해의 중보자가 된다. 성령은 내주하시는 령이셨다. 그러나 그는 이제 확신과 위로의 령이 된다. 신앙은 일반적 신앙으로서 이미 아담 안에 있었다. 그러나 이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은혜를 의지하는 특별한 신앙이 칭의(稱義)의 수단과 구원의 길이 된다. 복음에 대항하는 원수는 궁극적으로 초자연적 형식보다도 실제적 내용에 대항하여 싸운다. 만약 지성이 죄로 인하여 어두워지지 아니했더라면, 이적 자체에 대하여 아무런 이의가 없었을 터이다. 왜냐하면 이적 자체는 우리의 본성이나 피조물들의 본성과 모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인간의 본질에 속한다.

 

  모든 사람은 본성으로 초자연주의적이다. 자연주의는 무신론과 마찬가지로 철학이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본성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종교가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한, 인간은 초자연주의자일 것이며 또 계속 그렇게 머물 것이다. 초자연주의가 없는 종교란 없다. 모든 신자는 어떠한 교파에 속하든지 비록 그의 머리로는 자연주의자라 할찌라도 마음으로는 초자연주의자이다. 누구든지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기도생활에서, 그의 전종교적 생활에서, 초자연주의를 완전히 멀리하려 하는 자는 자기 속에 있는 가장 고상하고 가장 좋은 것의 자멸을 시도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계시에 대한 적대감은 항상 윤리적 성격을 띠고 있고, 이런 의미에서 오직 계시에 대한 원수는 바로 죄와 불신앙이다. 무지와 어두움은 마음에서부터 나온다. 인간에게는 은혜로 복받아 주어진 것으로 사는 것 이상 더 어려운 일은 없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 능력, 그 본성을 너무나 초월한다. 이제 만약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가 단지 원래 나타난 계시의 경정이라면 이것(특별계시)은 또한 두말할 것 없이 단지 잠정적으로 지나가는 성격을 지니게 된다. 그것은 절대적으로가 아니라 다만 우유적(偶有的)으로 필요하다. 그것은 오직 우연히 개입된 죄 때문에 필요하게 되었고, 사물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은혜계약은 자기의 계약시대가 지나면 없어지도록 작정되었다. 여러 세대가 벌써 지나간 역사에 속한다.53) 율법 전 시대와 율법하의 시대가 이미 지나간 과거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신약시대 혹은 기독교시대로 한 번은 그 종말에 이를 것이다.

 

기독교는 잠재적이다. 화해의 종교로서 그것은 언젠가는 그 임무를 다할 때가 올 것이다. 은혜(gratia)는 종말에 가면 영광(gloria)으로 넘어갈 것이다. 성경, 교회, 직분, 셩례, 이 모든 것은 은혜계약의 지상시대를 위해서만 작정되었다. 그리스도는 언젠가 천국이 완성되면 하나님 아버지께 그 나라를 넘긴다. 그때는 원래의 질서가 회복된다. 마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아니한 것처럼 자연적으로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죄가 존재한 적이 없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은혜의 계시가 결코 없었던 것처럼 되는 것은 아니다. 죄가 빼앗아 간 것보다 그리스도는 더욱 많이 주신다. 그는 우리를 아담의 원시의(原始義)의 상태(status integritatis) 정도로만 회복하는 것이 아니고, 이 죽을 수 없는 부활을 누리게 하신다(요11:25). 아담은 그의 불순종으로 잃었던 자리로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첫째 사람은 땅에서 난고로 땅에 속하였고 둘째 아담은 하늘에서 난 주님이시다. 우리가 한번 땅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부활후에는 우리도 하늘의 형상을 지니게 될 것이다.(고전 15:45~49). 하늘에서 불리워지는 것은 새노래이다.(계 5:9~10). 그러나, 자연과 은혜 사이의 모든 구별이 단번에 없어지는 한, 원시적 창조의 질서로 돌아간다고 할 수 있다. 이원론은 끝장을 본다. 은혜는 자연의 밖에서 위에서 나란히 있지 않게 되고 그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전적으로 새롭게 한다.(그 때는 하늘과 땅이 모두 새롭게 된다). 은혜로 다시 나게 된 자연은 그것의 최고의 계시에 이르게 된다. 자유롭고 기쁘게 아무 억지가 없이 또 두려워 하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우리 자신의 본성이 말하는 그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시대가 다시 올 것이다. 이것이 참된 자연종교이다. 이것을 회복코자 하는 것이 일시적으로 나타난 기독교요, 화해의 종교이다.

 

  자연과 은혜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서 종교개혁은 로마교회의 기계적 병립과 이원론적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극복하였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세계(Kosmos)는 곧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부상되었다. 그런데, 이 세계는 기독교 곧 그 은혜 계약이 되돌아 가고자한 기본적, 원시적, 자연적 상태를 항상 그대로 보이는 본(本)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세계는 죄로 인해 부패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천지의 창조자이신 성부의 만드신 피조물임은 변함이 없다. 그는 언약을 통해서 계획적으로 이 세계를 유지하시며 일반은총으로 말미아마 죄의 파괴력을 제어하신다. 음식과 기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채우셔서 아무에게도 증거하지 않고  버려두시는 일ㅇ이 없다. 그는 은사(恩賜)들을 한량없이 쏟아 부으신다. 그는 자연적 사랑과 정서로서 가정, 종족, 민족을 하나로 묶는다. 그는 그들 가운데 사회와 국가가 일어나게 하셔서 백성들이 평화와 안정중에 살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넘치는 풍요를 더하사, 예술과 학문이 잘 성숙되게 하신다. 자연과 역사, 마음과 양심속에 나타내시는 그의 계시를 통해서 그는 그들을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 세계에 연결시키고, 그들의 마음 속에 종교와 윤리, 도덕에 대한 의미를 가꾼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세계를 총망라한 부요한 생은 신의 보통은혜에 힘입음으로써 가능하다. 그러나 신은 어찌하여 이같은 죄악 세상을 아직도 그의 은혜의 특수한 사역으로 보존하시는가? 신은 자기의 은사들을 헛되이 낭비하시는가? 그는 아무 목적없이 행동하시는가? 각종 형태로 나타나는 자연적 생이 죄로 인해 부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의 눈에는 아직도 가치가 있어 보이셨는 것이 아닐까? 가정과 가문의 사랑, 사회적 및 정치적 생활, 예술과 학문, 이것들은 그 자체가 신의 기뻐하시는 한 대상이다. 그는 자기 손으로 이루신 일을 보시고 친히 기뻐하신다.

 

  이 모든 것은 다 그것들의 현존재방식에서라기 보다도, 그 본질에 있어서 태초에 정해진 법도대로 된 세계의 질서인데 이것을 하나님께서 창조시 지으신 그대로,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지하시며 보존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같은 질서를 멸시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 그것은 성경과 경험에 다 어긋난다. 모든 분리주의와 고행주의는 여기서 뿌리부터 뽑혀진다. 모든 현실도피는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제1조를 부인하는 셈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부수기 위함이지만, 그러나 아버지의 일을 회복하여 사람을 지으신 분의 형상을 따라서 인간을 새롭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로써 죄악의 심각한 성격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죄는 물론 아무런 실증(substantie)가 아니고 하나의 특질(eene qualiteit)이며, 질료(質料=materia)가 아니라, 형식(form)이다. 그것은 사물의 본질이 아니고 그 본질에 부착되어 있다. 그것은 비록 활동적이긴 하나 거세될 운명에 있고, 사망과 같이 밖에서 친입해 들어온 점에서 우발적이다. 따라서 죄가 분리되어 제거되어질 수 있다. 세계는 계속 정결하게 되고, 그 구원이 가능하다. 그 본질은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그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죄는 하나의 권능이요, 피조물의 모든 형식에 깊이 침투된 원리이다. 그것은 세계의 유기체 자체를 잠식했다. 그것은 그대로 버려 두었다면 모든 것을 황폐케 하며, 멸망케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은혜로써, 그의 언약을 가지고 중간에 들어오셨다. 그의 일반 은총으로써 그는 모든 것을 무너뜨리며 황폐케하는 죄의 세력을 막아 제어하신다. 그러나 이것을 제어하는 정도로는 불충분하다. 그것은 압력을 가할 수는 있으나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그것은 제어할 수는 있으나 이길 수는 없다. 불의는 항상 둘러쌓여 있는 담을 깨뜨린다.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가장 크신 능력,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사 하늘 우편에 앉게 하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신 그 강한 능력의 사역보다 조금도 못지않은 능력이 필요하다(엡 1:19,20). 이를 위해, 그 은혜의 충만함과 그 사랑의 크신 능력보다 조금도 손색이 없는 능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기독교는 어떤 새롭고 초자연적 질서의 별다른 세계를 창조코자 하는 것이 그 임무가 아니다. 로마교가 교회를 그런 의미로 보았고, 재세례주의자들이 이것을 뮌스터(Munster)에서 시도했던 것처럼 완전히 새로운 천국을 새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창조의 질서속에 그 어떤 이질적인 요소를 집어넣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런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새롭게 한다. 그것은 죄로 인하여 부패된 것을 다시 회복시킨다. 정죄당한 자를 화해시키고, 병든 것을 고친다. 상한 것을 싸맨다. 예수가 아버지에 의해서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입은 것은 기쁜 소식을 온유한 자에게 전하며,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며, 묶인 자들에게 옥문이 열려있음을 전하며, 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은혜의 해를 전파하사 모든 슬픈 자들을 위로코자 하심에 있다(사 61:1,2), 그로 말미암아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해지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마 11:5).

 

  예수는 어떤 새로운 입법자가 아니었다. 그는 어떤 정치가나 철학자이거나, 법관이나, 예술인도 아니었고, 그는 예수 곧 구세주였다. 그러나 그는 구세주로되, 로마교도와 재세례자들과, 루터교도들의 좁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충만하고, 깊고, 넓은 개혁신앙적인 의미로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구원하신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윤리적, 종교적 생활만은 회복하고 다른 것은 간섭치 않고자 함이 아니다. 마치 이것들이 죄로 부패되지 않고 그 어떤 회복이 필요없는 것처럼! 아니다. 죄가 어디든지 미치는 곳까지,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하심이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죄악과 죄책, 불결과 비참함이 있는 것은 모두 그 자체가 또 바로 그것 때문에 모든 피조물에게 전파되어져야 할 은혜로운 복음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가정과 사회에 대하여, 예술과 과학에 대하여 약간이라도 말씀하셔야 한다. 자유주의는 그리스도의 능력과 말씀을 마음과 골방에 제한코자 했다. 그들은 천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에 호소한다.55) 그러나 천국이 비록 이 세상에 “속한”(van) 것은 아니지만 그 “안”(in)에 있고 이 세상을 위하여 심어졌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지성과 그의 의지, 그의 영혼과 그의 육체를 위한 전인간적 구원과 회복의 말씀이다.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또한 이 세상을 사랑하셨다. 이제 그 말씀이 이따금 그것을 감당하기에는 짐이 되어 너무 무겁다고 여겨지기는 한다. 로마교는 그 말씀을 자연적인 것을 억누르고 답답하게 하는 한 멍에로 만들었다. 또한 신교도 자유롭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대개 복음을 다시 새로운 율법으로 변질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참 복음이 아니다. 그것은 율법이 아니요, 복음이다. 생명의 말씀은 정죄(定罪)코자 온 것이 아니고 구원하고자 오셨다. 그 말씀이 하나님의 자유롭고 강제가 없는, 풍부한 사랑에서 솟아나왔기 때문에 자연을 초월한다. 그것은 명하는 것이 아니라 주신다. 그것은 죽이지 않고 살린다. 그것은 때리지 않고 치유한다. 그것은 순전히 은혜이다. 그리고 이 은혜는 자연을 무(無)로 돌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본연의 모습으로 회부케 한다.

 

  만약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은혜와 자유 가운데 선다면 우리는 먼저 우리의 지상적 직업과 사명을 신실(信實)하게 수행하는 것으로 우리의 기독교 신앙을 나타내야 한다. 로마는 기독교적 생활의 이상을 무엇보다 먼저 자연적 직업을 버리고 오직 신령한 일에만 전념하는 수도승 가운데 충분히 본연화(本然化)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 같은 견해가 우리 신교계에도 같이 침투되고 있다. 일상 직업의 직장 생활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 영광을 위하여 사는 평범한 사람을 거의 알아주지 않는다. 일상 직업이 보이는 것처럼 그는 천국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열심히 공부하고 그의 시간을 기독교적으로 잘쓰는 학생을 선량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그러나 그의 시간이 대부분을 복음 전도하는 일에 바치면, 보다 선량하고 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 많은 사람들의 견해대로 오늘날 참 크리스챤이 되기 위해서는 무슨 특별한 일, 보통이 넘는 일, 초자연적으로 무엇을 해야만 하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이 비범한 일이 대개의 경우 단지 어떤 회원이 되는 것, 보통회원, 상무 위원, 명예 회원, 휴무 회원이 되는 것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어쨌든 기독교 신앙의 가치와 능력은 사람이 보통의 직업생활을 하는데 따라서가 아니라, 그 밖에 그것을 넘어선 무슨 일을 하는데 따라서 평가된다. 참 기독교인이란 인간임을 멈추는 것과 같을 정도로 언어나 의복이나 습관이나 일상 생활의 습성이 보통 사람보다 구별되어 져야 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경고하기를 각자가 부르심을 받은 그 자리에 그대로 계속 머물기를 바란다고 할 때(고전 7:17~23) 그는 이상의 생각과는 다른 생각을 가졌음에 틀림 없다.

 

  그리스챤이 된 어떤 사람이 그의 자연적 직업을 희생하고 좁은 의미에서 천국의 일꾼으로 몸을 바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 비범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외이며 규칙은아니다. 감리교가 원하는 것처럼 그것이 회개 자체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이런 심각한 때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처TWo로 비범한 그 무엇을 하는데 있지않고, 각인이 그의 지상 생활에서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에 중심으로 충성하는데 있다. 어떤 자의적 종교가 아니요 복음을 어떤 새로운 법으로 바꾸어도 안되며, 접촉하지도 말고 맛 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는 사람의 계명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일반 민족 생활의 근간을 이루는 기독교적 덕행이 필요하다. 가정적인 것, 분수를 지키는 것, 절약과 근면, 신실, 정직, 질서, 친절 등 이러한 덕행이 날이 갈수록 사라져 가는 경향인데 이런 덕행은 정부나 교회나 단체의 어떠한 비범한 규칙으로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 이러한 덕행들을 특히 칼빈주의가 가꾸었다. 이로 인하여 이러한 덕행들이 돋보인다. 이로써 민족이 다시 나고 정부가 세워졌다. 칼빈주의는 엄위주의 임에도 불구하고, 그 실은 자연적인 것의 개혁이었다.56)

 

  이로써 또한 기독교가 가정과 사회에 대처하며 교회가 정부에 대해서 처신하는 그 관계가 자연히 정립된다. 인간의 이 모든 유기적 생활권이 창조로부터 생겨난다. 그것은 일반은혜에 의해서 존립한다. 즉 그것들의 권위와 권세가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는다.그리스도는 시온을 다스리는 왕으로 기름부음을 입었고, 교회의 머리이시다. 심지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주어졌고, 만물이 그의 발 아래 굴복한다. 그러나 가정과 국가와 사회의 주권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피조물 위에 임한다. 로마교에서는 강직한 이론에 따라서 모든 주권이 하나님으로 말마암아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이와같이 다시 법왕에게 놓여진다. 정치적 권세는 교회의 권세에 승복하게 된다. 항론파에 의하면 하나님은 모든 권세를 정부에게 주셨고, 이 정부는 교회 위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개혁신학의 원리에 따르면 정부는 가정이나 사회와 같이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그 자체의 권세와 자신의 권위를 가진다. 그리고 교회는 그 정부와 나란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자신의 정치형태를 가지고 선다. 따라서 정부에 의한 교회의 지배 혹은 교회의 정부지배는 모두 불법이다. 그들은 서로 존중하며 협조하고 상호의 유익을 도모해야 한다. 억압은 양자에게 다 금물이다. 교회는 그 땅의 정부가 기독교 원리에 의하여 인도를 받으며,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로써 유익을 얻게 되기를 바랄 수 있다. 정부와 사회도역시 죄로 인해 부패되었고 바른 척도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서도 은혜는 자연을 무시하지 않는다. 가정과 사회와 국가는 그리스도의 령(靈)으로 말미암아 다시 나긴하나 자연 거운데 있는 하나님의 정하신 법에 따라서 존립하며 그것에 힘입어 살고, 교회와 나란히 완전한 자유를 보유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과 그 가운데 있는 여러 가지 생활권을 파괴코자 하심이 아니라, 그것들을 다시 회생시켜 구원코자 오셨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의 예술과 과학에 대한 관계도 이와 같다.

  이것이 제일 먼저 가인의 족속 가운데 익혀졌다. 그것들은 인류 자체가 다 그러함과 같이 죄악 가운데 태어났다. 그러나 그것들 자체가 죄가 있거나 불결한 것은 아니다. 예술인이나 과학자들도 그리스도의 말씀과 령으로 거룩함을 입을 수 있다. 문명의 이러한 강한 요인들에게도 복음은 구원과 축복의 말씀이 된다. 복음을 멸시하여 버리는 예술이나 과학은 이로써 가장 큰 해독을 자처하며 가장 고귀한 축복을 스스로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등을 돌리는 예술은 그 이념을 상실하여 현실주의로 넘어간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치 않는 학문은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끝맺으며 처음부터 사물의 본질과 그 목적이 해결할 수 없는 난제로 계속 남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재창조와 창조는 약간 다르다. 예술과 과학은 그들의원리가 중생(重生)이나 회개와 같은 특별은혜에 있지않고, 하나님께서 일반적 은총에 따라서 불신자에게도 주시는 자연적 은사들과 여러 재능에 달렸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학은 언제나 이방인의 예술과 학문을 통해서 유익을 얻었고, 신학자를 포함한 많은 학자들에 관한 고전적 교육에 열의를 다 했다. 그들은 이러한 연구들의 위험성에 대해서 어둡지는 아니했고, 따라서 이러한 일반학문이 기독교적 인도 아래 이루어지기를 사모했다. 그러나 그들(기독교 신학자들)은 예술과 학문의 권리와 독립성을 주장하였고, 단지 그리스도의 령에 의하여 양자의 성결을 요구하였다. 성경은 그들 자신에게 이를 위한 자유를 주셨다고 그들(신학자들)은 생각한다. 모세는 애급의 모든 지혜 가운데 교육을 받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급의 금과 은으로 하나님의 집을 단장하였다.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할 때 히랍의 도움을 받았다. 다니엘은 갈대아 사람들의 학문의 교육을 받았다. 동방에서 온 지혜자들은베들레헴의 아기 예수의 발아래 그들의 선물을 예물로 바쳤다.

 

  심지어 신학은 보통 은혜의 은사밖에서 학문으로서 존립할 수 없다. 신학은 물론 제학문중에 자기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원리와 대상과 목적을 갖고 있는데 이것들은 오직 특별은총에 의존한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생각하는 자의식이 믿음으로 거룩함을 입어 계시 속에 깊이 파고 들어가서 그 내용을 이해하고자 노력하지 않았더라면 특별은총 만으로는 학술적인 의미에서 오늘날의 신학에까지 성장치 못했을 것이다. 일반은혜와 특별은혜가 함께 손을 잡을 때 기독교회 안에 신학이 일어났다. 따라서 신학은 다른 학문들이 갖고 있는 그 권리를 충분히 시인한다. 신학의 영광은 모든 학문의 여왕으로서 왕위에 높이 앉아 최고의 권력으로 휘두르는데 있지 않고, 그것이 갖고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모든 것을 섬길 수 있는데 있다.

 

  이와같이 신학은 오직 섬김으로 지배할 수 있다. 그것은 약할 때 강하다. 그것은 가장 작은 자가 되고자 할때 가장 큰 자가 된다.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않고자 할때 영광을 얻는다. 그것은 학계에 하나님의 은혜를 대변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다. 이 은혜를 신학은 상고(想考)한다. 그것은 은혜의 길이와 넓이, 그 깊이와 높이를 이해하고자 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비참, 이것은 학계에도 드러나 보이는 이 비참의 한복판에서 신학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높이 찬양한다.

 

  신학은 모든 대립, 자연과 은혜의 대립도 사라져 화목을 이루고,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다시 하나로 모이는 영광스러운 미래에 관하여 예언한다 ! 57)



5. 역자의 보충적 해설


  ㊀ 계시와 종교의 상관관계

  

  계시없는 종교란 없다(P.15). 바빙크의 이러한 사상은 그의 개혁교회학 1권38(종교의 원리), 72항 및 39(계시의 본질과 그 개념), 82항(1905년의 증보재판이 표준판이지만 그후 3,4판의 페이지수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항목만 표시함)에도 나타난다.

 

  모든 종교는 다 신탁, 선견자, 이적을 통해서 성립되고 비범한 계시에 의존한다고 Tiele(1830-1902 비교종교학의 시조)는 말한다. 특히 윤리적 종교는 다 인격적 신들의 계시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예: Indo의 Veda 성전(聖典)... 신적 계시에 의존한다(물론 참된 신이 아니지만).

   Zoroaster... 천사에 의하여 꿈속에 선지자로 부름받았다하며 하늘로 여러번 올라가 거기                 서 “Ormuzd"와 이야기 했다고 한다.

   Hammurabi... 태양신 Samas의 계시에 의하여 그의 법전을 썼다고 한다.

   Mohammed... 40세때, 첫 계시에 접한 후 늘 계시에 접했다고하는 내용이 곧 코란경                  (經)이라고 한다.

   희랍인과 로마인들... 일반적으로 신들은 구원자요, 도우는 자, 지혜를 주는 자로 여긴다.


  이에 Bavinck는 결론짓기를 계시와 종교가 너무나 밀접하게 연관되었기 때문에 양자가 함께 서든지 혹은 함께 넘어진다고 하였다. (Revelatie en religie is zoo nauw verwant en zoo innig verbonden, dat de eene met de ander staat of valt(G.D. 1, 82). 종교는 학문이나, 예술이나 일반적 도덕과는 다르다.그것은 인간을 어떤 형태로든 초자연적이고 불가견적(不可見的)이며 영원한 능력과 관계를 맺게 하는데 그 본질이 있다. 신이 없는 종교란 없다 (Geen godsdient zonder God- 동). 불교도 예외는 아니다. 석가모니의 도가 종교의 성격을 띠게 될 때 Budha는 신으로 높여졌다. 신과의 관계가 정립되면 반드시 거기에는 계시가 있게 마련이고 따라서 신이 인간에게 알려져야 한다. 불가지론은 종교의 본질과 정면으로 충돌된다. 자연주의와 종교도 서로 양립될 수 없다. 종교에서 초자연적 능력(eene bovennatuurlijke macht)을 제거하면 종교의 본질을  상실하고 만다 : 자기자신(Feuerbach), 인류(Comte), 세계전체(Strauss), 진선미(Haeckel) 등과 관계를 맺게 하면 벌써 그것은 종교가 아니다. 따라서 참이든 거짓이든, 계시가 없는 종교란 성립될 수 없다.


㈡ 계시(啓示)의 역사성(Historia revelationis)

 

  "계시는 그대로 계속되었다.(p,15). 창조 자체가 계시이고(p,12-13), 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말씀하신 것, 행위계약을 맺으신 것이 계시요, 타락 후에도 숨어 피한 아담을 찾으시고, 원시복음(창 3:15)을 주신 것이 계시이다. 다만 타락 전후의 차이는 전자는 아담의 순수 상태를 전제한 행위계약에 근거 하였고, 후자는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값없이 주신 은혜계약에 근거한데 있다. 계시는 그대로 계속되어 신약의 계시록으로 그 완결을 보게 된다. 이로써 계시종결교리가 성립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계시행위 혹은 그 역사(役事)가 그친 것이 아니다. 계시의 werking은 그대로 계속되어 지금도 역사하고 있다. (In Christus heeft God 캬초 ten volle geopenbaard en volle geschonken. Daarom is de schrift ook voltooid, zij is het volkonmene woords Gods. Maar al is de openbaring ook voltooid, hare werking houdt daarmede niet op. Integendeel omdat zij voltooid is, gaat zij 소문 in het leven en de geschiedenis der menschheid in. -G.D.1,105).

 

계시종결교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이 단번에 완성되었고 사도들을 통해서 그 구속에 대한 설명과 적용에 관한 말씀이 계시될뿐 아니라, 기록되었고 또 장차 될일에 대한 계시가 사도요한에 의하여 계시되어 기록되었으므로 이에 가감할 수 없다.(계 22:18-19). 계시록에만 가감해서는 안되는 것 아니다. 왜냐하면 계시록은 신구약 전체가 그 배경이 되었고, 성경 전체의 매듭이기 때문에 다른 성경에 가감하면 그 내용도 변질되어 계시록에도 그 영향이 미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러한 완결된 계시의 역사가 중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바빙크는 특히 계시의 역사성을 강조한다.

 

  첫째, 바로 이 역사성 때문에 역사적으로 기록된 성경을 중시하며, 그것외에 달리 계시를 알 수 없고 (Juist omdat de openbaring historie is, is er geen andere weg om er iets van te weten, dan de gewone weg bij alle historie, dat is het getuigenis -G.D. 1,104)

사도의 말씀과 교제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와의 참된 교제를 가질 수 없다 (Geen gemeensshap met Christus dan alleen door de gemeenschap aan het woord der apostelen, 요 17:20,21. 요일 1:3-G.D.1, 104).

 

  둘째, 계시의 역사(役事)는 오늘날도 계속되고, 역사적으로 진행한다. “계시는 그 자체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라기 보다도 새로운 인류속에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거하는 거기에 그 목적을 가진다” (Zij heeft haar einddoel immers niet in zichzelve, niet in Christus, die middelaar is, maar in de nieuwe menschheid, in het wonen Gods bij zijn volk- 동). 계시는 한번 나타났다가 이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과거의 사실일 수도 없고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Zij kan en mag daarom niet een fiet zijn, dat eenmaal heeft plaats en 소문 spoorloos verdwenen is - 동).

 

   셋째,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 계시를 성경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붙으시고 인류의 생과 생각 속에 그 내용을 실현하신다. 계시 자체가 신의 나타나심, 예언 및 이적을 통해서 성립된 것처럼, 계시의 역사도 이 세가지에 상응하므로써 계시의 내용이 인류의 소유가 되도록 하신다 (De openbaring kwan zelve door theophanie, profetie en wonder tot stand. Daaraan beantwoordt drieerlei werkzaamheid Goods, waardoor Hij den inhoud der openbaring tot het eigendom der menschheid maakt. 동).

 

  넷째, 따라서 이적과 신의 나타나심이 계속된다. 성경밖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또 그것과 더불어 계속된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계속 나타남을 의미한다.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통해서 몸된 교회에 거하신다(그리스도께서 일곱 촛대 사이에 다니심과,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함께 하심).

 

  다섯째, 이적도 항상 계속된다. (Hij dost wonderen altijd door).  왜냐하면 그는 중생(重生)과 성결과 영화(verheerlijking)을 통해서 몸된 교회를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신령한 이적을 중지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항상 일하신다” (de geestelijke wonderen houden niet op, God werkt altijd - 동)

 

  여섯째, 계시가 이적(異蹟), 신현(神顯)뿐만 아니라 예언으로 성립되었기 때문에 또한 말씀이 사람의 의식속에 살아 움직여야 한다. 은혜만이 아니라 진리에 충만하신 그리스도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의 의식에 채우신다. 성령은 거듭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밝힌다. 조명과 중생, 지성과 생이 함께 손을 잡는다. 지금도 계시는 지성을 밝히는 교훈만이 아니라, 함께 마음을 새롭게 하는 생이다. “지성주의나 신비주의로 치우치는 것은 계시의 부요함을 오해하는데서 비롯된다.” (De eenzijdigheden van het inteelectualisme en mysticisme zijn beide te vermijden, want zij zijn eene miskenning van den rijkdom der openbaring - 동) 성경은 교회를 밝히고, 교회는 성경을 이해한다.

 

  일곱째, 성경은 항상 살아잇고, 영원한 젊음을 지닌 하나님의 말씀이다 (히 4:12-13). 그것은 항상 우리에게 계속 나오시는 하나님의 말씀하심이다 (Zij is altijd voortgaande sprake Gods tot ons. (-G.D. 1.105, p.405).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매일같이 가까운데서 말씀하신다. “성경으로 그는 은혜와 진리의 충만한 가운데 신자들에게 매일같이 계시 하신다”(In de Schrift openbaart Hij zijch van dag tot dag aan de gelovigen in de volheid van zijn genade en waarheid - 동). 성경은 그 자체 위에 서 있지 않다. 그것은 이신론적(理神論的)으로 이해되어져서는 안된다. (Daarom staat de Schrift ook niet op zichzelve. Zij mag niet deistisch worden opgevat - 동) 이 세계를 창조하신 후에도 계속 붙으시고 다스리며 만물 가운데 신성과 그 능력이 분명히 보여 알도록(계시) 하시는 것처럼 성경도 성령으로 계속 무지한 인간의 마음을 열어 알게 하신다.

 

  이와같이 계시는 보통계시이든 특별계시이든 계속 나타나 역사한다. 이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마 11:27). 이러한 계시의 역사없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게 되면 이는 사람의 지혜로 믿는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인본주의적인 합리주의에 떨어지고 만다. 더욱이 성경 자체가 로마교의 Sacrament처럼 자동적으로, 혹은 루터교처럼 말씀 속에(in verbum)성령이 절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그것을 계시하기로 원하시는 자에게만 ” 루디아의 마음이 열리는 것처럼 열려진다 (행 16:14). 물론 K. Barth처럼 이때 비로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현재형이며 역사적 진리임을 보이는 확실한 말씀으로서 항상 살아있다.


3. 일반은총과 특별은혜 (p. 17)


  칼 바르트는 자연계시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특별계시와의 조화를 부인했고, 스킬더 (K, Schilder, 1890 - 1952)는 1914년부터 약 20년간 네덜란드 각처에서 목회를 한후, 1933년에 독일 Erlangen대학에서 칼빈과 키엘케골의 역설(逆說) “Paradoxon"에 거한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음과 동시에 캄펜신학대학의 조직신학교수로 20년간 교수한 천재적인 개혁신학자였다. 그는 보통은총은 본래적인 의미에서 ”은혜“가 아니라고하여 부인하였다. 그러나 최근 스킬더의 제자인 다우마(Douma, 현 캄펜신학대학 윤리학 교수)박사는 칼빈, 카이퍼 및 스킬더의 일반은총교리를 서로 대조하면서 ”보통은혜“라는 논문으로 학위를 받은 분인데, 카이퍼와 스킬더를 비평 보완하면서 보통은혜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주목을 끈다. 말하자면 칼빈의 그것으로 돌아간 셈이다. 이 점에 있어서 Bavinck의 신앙노선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바빙크는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이 두 줄기로 각각 흘러나왔는데(구약시대), 이젠 서로 유기적 관계를 이루다가(신약시대), 마침내 영광의 시대(그리스도의 재림후)에는 그것이 서로 하나가 됨으로 이원(二元)은 끝장을 본다고 한다(p,66). 다만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이 분류되긴 하여도 이스라엘에게는 특별은총, 이방인에게는 일반은총만 주셨다는 식으로 간단하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게도 일반은총이 넘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혜가 분류됐다기 보다는 특별은총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주로 이스라엘에게 제한되었고, 이방인에게는 이것이 결여되여 오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 제한이 사라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4. 노아와 맺은 계약의 초자연성 (p.17 - 18)

 

  노아와 모든 생물에게 언약하신 일반은총을 자연계약이라고들 한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일반은총의 성격을 문화 지향적인 것으로 보았지만(J. Douma, Algemene Genade, 1966, p.367), 그 실은 은혜계약과 똑같이 초자연성을 띠고 있다. 바빙크에 의하면, 모든 피조물의 생명과 존립이 자연적이 아니고 무엇을 지켜야 할 의무가 없는 초저연적  은혜에 기인한 언약의 열매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창 8:21 - 22, 9:1 - 17). 사람의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고 전적으로 부패하여 홍수 전에는 심판을 받았으나, 그 후에는 똑같이 악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하리라”(창 9:11)고 하신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모든 자연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자연계약이라고 한 것 뿐이지 그 성격은 초자연성을 띠고 있다. 더욱이 무지개를 언약의 증거로 삼으신 것은 하늘 보좌에 둘려진 무지개(계4:3)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보인다. 그러나 카이퍼는 이것을 독립화 시켜 아주 새로운 것으로 보고자 했지만, 스킬더는 원시복음의 성취, 곧 셈, 아브라함, 이스라엘, 그리스도에게로 이르게 하는 은혜계약의 일환으로서 그리스도를 향한 역사와 연결된다고 보았다 (Heid, Cat.4. 132; Wat is de hemel? 187: het natuurverbond als "phase van het genadeverbond"-Douma, 동 138참조). 바빙크가 이 노아와의 계약을 초자연적 은혜계약의 열매로 본것과 비슷하여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는 조금 후에(p.18) 또 말하기를 “노아와 맺은 언약은 다 특수한 초자연적 근원을 갖고 있다”고 한다. 물론 이 계약이 바로 은혜계약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5. 하나님의 섭리는 신적이고 영원하며 어디나 임재하는 능력이다 (p.18)


  바빙크의 이러한 생각은 그의 교의학 제2권, 39, “De Voorzienigheid"(섭리)에도 나온다. ”하나님의 뜻대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은 순간도 스스로 존립하지 않고, 순간에서 순간으로 오직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에 의하여 유지된다“.

  섭리에 관한 성경적 증거는 많지만 가장 핵심적인 곳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본다(Maar de Christus aanschouwd, - 동 39,p.639). 이러한 특별한 섭리는 신자가 하나님의 죄사하심과 거듭나게 하는 은혜를 자기 마음에 경험하는데서도 찾아 볼 수 있다.(en in de vergevende en wederbarende genade Gods aan zijn eigen hart ervaren - 동). 하나님은 할 일이 없어 노시는 분이 아니고(God is geen Deus otiosus), 항상 일하신다. 만물을 지으시고 쉬셨다함(창 2:2)은 창조로 인하여 피곤하셨거나, 단순히 구경하신다는 뜻이 아니고(시 40:28), 새로운 종류의 피조물(nova genera)을 창조하시는 일, 무에서의 창조(productio reum e nihilo)는 이미 지나갔고, 완성된 피조물을 보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창 1:31). 그는 만물을 친히 창조하셨기 때문에 결코 그냥 버려두시지 않고 보존하시고 통치하신다.

 

  섭리는 단순한 예지(nuda praescientia)이거나 예견(providentia)도 아니며 창세 전에 감추인 신의 뜻만도 아니다. 섭리(미리 아심)란 말은 이러한 뜻이 있긴하나 신학은 용어에 매이지 않고 성경의 말씀에 근거하여 교리를 풀어나아간다. 섭리는 내향성적 행동이라기 보다도 외향성적 행동이며, 정하신 순서의 집행으로서 제정(ordo) 자체와는 구별되어져야 한다. 18세기의 합리주의자들처럼 이것을 추상화하여 정적 개념으로 바꾸면 운명, 기회, 숙명등의 결정론으로 떨어져, 생생하여 활력이 넘치며, 다양중의 통일, 혹은 통일된 질서 속에서의 다양이란 찾아볼 수 없다. 기회란 통일이 없는 다양에서 일어나고, 숙명이란 다양이 없는 일률(一律) 혹은 획일(劃一)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창조적인 마음을 가진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무한한 다양속에 경이적인 통일이 있도록 하신다. 범신론(汎神論)은 신과 세계와의 구별을 무시한다. 세계를 신격화하면 관념론적 범신론이 되고, 신을 세계속에 흡수시키면, 유물론적 범신론이 되고 만다. 헤겔의 범신론에서 우파 혹은 좌파가 나온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창조”의 여지는 없고 따라서 보존이나 통치의 여지도 없다. 섭리는 자연법칙과 동일시되고, 자연법칙은 신의 예정(豫定)과 일치된다. 신의 통치는 “자연만물을 함께 묶는 통일이 없이 확고부동하며 불변하는 자연법칙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인격이나 자유가 없고 이적(wonder)의 여지도 없다.히스기야의 기도나 회개도 있을 수 없고, 종교전체가 무너지고 만다. 유기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짝이 없는 말씀이 하나도 없는 성경도 있을 수 없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는 말씀으로 가득찬 성경은 그 전체가 하나님 섭리에 관한 책이다.

 

  성경이 보여주는 신의 다스리심이 얼마나 능한지 이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으신다.(히 1:3). 이로 보건데 섭리란 단순한 자연법칙이 아니다. 심음과 거둠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는 것이 일정한 법칙이지만,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의 언약에서 나왔고(창 8:21, 9:11), 햇빛이 악인이나 선인에게 비취는 것도 신의 온전하신 뜻에 따라서 되어진다.(마 5:45).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에 민감하셨다. 백합화 한 송이도 아버지께서 그 옷을 입히신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완악한 자는 그 마음이 어두어 섭리를 모른다. 애급인들은 장자들이 죽임을 당한 후에야 여호와의 강한 손이 그들을 치신 줄 알았다. 그때까지 그들은 그저 평범한 일인 줄로만 알았다. 그때까지 그들은 그저 평범한 일인 줄로만 알았다. 이와같이 살아게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으로 한국교회를 다스리시고 강한 손으로 역사하시는 그의 섭리하심을 모르는 자는 소경이거나, 알아도 모르는체 하는 완악한 마음의 소치라 할 수 있다.


6. 이방민족의 割禮 (p.21)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에게도 시행되던 이 할례는 특수한 문화권의 족장, 입법자, 혹은 추장들에 의하여 성년, 혹은 갱년기에 접어들 때 혹은 번식을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모세가 애굽에 있을 때도 특히 바로 왕실과 제사장들과 귀족들 사이에서만 이 할례가 시행되었다. 현재, 할례를 시행하고 있는 나라는 대부분의 아랍국가들과 아프리카, 인도네시아, 호주, 카나다의 북부, 남미의 일부인데 그 근본은 아브라함에게서 유래된 것이 대부분인 것으로 추측될 수도 있으나 여러 가지로 이스라엘의 그것과는 다른 점이 많다. 이스라엘은 난지 8일만에 개별적으로 시행됐지만 이방인들의 그것은 단체적으로 되어졌고, 연령도 각양일 뿐 아니라 의무적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난지 8일이면 주일에도 시행될 만큼 의무적이었다.(요 7:22). 더욱이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은혜계약에 근거하여 남자에게만 주어졌고(창 17:12), 가장이 이를 집행했으나(창 17:23) 위급한 때는 어머니도 대행할 수 있고(출 4:25), 후에 대개 일정한 전문의사에 의하여 집행되었다. 가나안 불레셋인들은 할례를 몰랐기 때문에 이스라엘인들의 멸시를 받았다(사사 14:3, 삼상 31:4). 비록 애급인이나 아랍인들이나(바빌론과 앗수르인들은 무할례자들) 베니게 사이에 할례가 알려져 있긴 하여도, 이스라엘에게는 자기백성과 맺은 언약의 증표로 주셨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다르다(창 17:10).

 

  무할례자는 언약밖에 있게 된다(창 17:14). 그러나 이것은 할례만 받으면 자동적으로 하나님 백성되기에 충족한 것은 아니다. 육체의 할례는 마음의 할례가 함께 수반되어져야 한다. 신명기에 이미 이것을 지젓하였고(신 10:16, 30:6) 선지자 예레미야는 특히 마음의 할례를 강조하였다.(4:4, 9:25). 따라서 바울도 하나님의 성령으로 섬기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의지하지 않는 것이 참 할례라고 하였다.(빌3:3).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것도 아니로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인 것은(갈 5:6), 할례의 조상이라할 수 있는 아브라함도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었기 때문이다(롬 4:9 - 10). 바울은 더욱 강하게 말하기를 누구든지 할례를 받는자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졌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한다(갈 5:2 - 3).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는 속죄가 이루어졌고 성령의 사역으로 믿음을 일으켜 마음의 참 할례를 받는 이 광명한 신약시대에, 이방인들의 모든 할례는 거론할 필요도 없고, 이스라엘의 모든 할례, 제사장, 성전제도 모든 것이 의식에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종교속에 고동치는 것이 다른 심장(hart)이었고 그 본질이 은혜의 언약에 근거하였기 때문이었다.

 

7. 자연신학 (自然神學) (p.19,29,34)


  자연신학이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특별계시인 성경밖에 혹은 나란히 인간의 이성으로써 신에 관하여 어느정도 말 할 수 있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을 가리킨다. 환언하면 기독교의 교리를 자연과 이성으로써 증명코자 하는 학문이다(G.D. 1.85).

  n.t.(자연신학의 약칭)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theologia naturalis in insita et acquisita(생득적 및 후천적 자연신학)는 이미 옛 교부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Tertullianus는 영혼의 내적 증거 (het inwendige getuigenis)와 신의 창조에 호소하였고, Augustinus는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증명을 자연속에서 찾고자 하였다. Anselmus는 Cur deus homo(신이 왜 인간이 되었는가?)를, Albertus Magnus와 Thomas는 창조를 aposterior(후천적으로) 증명코자 하였다. Raymund de abunde는 Liber naturae sive creaturarum(자연 혹은 피조물의 책)에서 기독교의 모든 교리들을 성경과 전통의 도움없이 인간의 본성으로써 구축코자 하였다. 그 당시, 이러한 합리적 론증들은 보조의 기능밖에 없는 걸로 알았고 교리는 선험적으로 계시에 근거하여 확립되어 있었다. : adjuvantur in fide invisibilium per ea, quae facta sunt (Lombardus, Sent, I dist 3,6).

 

  그러나 a.t.와 s.t(theologia supernaturalis)는 스콜라신학에서 갈수록 이 양자를 긴장시켜 절대적인 대립으로 혹은 대등한 입장에서 맞서도록 했다. 자연계시를 통해서 신과 신적인 사건에 관하여 엄격한 학문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토마스는 자연과 이성에서 얻은 지식에 초자연적인 계시에 의하여 얻는 신비의 지식을 첨가시켜 지식과 신앙, 이성과 권위, 자연계시와 초자연계시가 이원론적으로 나란히 서게했다. 오랜 세월 후 로마교는 선언했다. : “Deum naturali humanae rationis lumine e rebus creatis certo cognosci posse" 그러나 ”alia, eaque supernaturali via, se ipsum ac aeterna voluntatis decreta humano generi revelare"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다고도 했다. (Conc. Vatic. Sess 3 Const. 애흐, de fide cath. C.2 - G.D. 1, 10, 85,p.313).

 

  1870년의 Vatican회의에서 로마교는 롬 1:19에 호소하면서 상기와 같이 “인간이성의 자연적인 빛을 통해서 지음받은 피조물로부터 하나님이 확실히 알려질 수 있다”고 하였다. 초자연적 계시에 의한 신지식을 신이 기뻐하신다고 하면서도 인간 이성에 의한 지식이 “확실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로마교의 죄악관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아담의 타락으로 그에게 주어진 “덧붙여진 은사”는 상실되었지만, 처음 지음받을 때의 신형상(神形像)을 그대로 지니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자연인이고, 이성도 온전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의 능력으로 특별계시가 없어도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다는 말이 나오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로마교신학과 개혁신학 사이에 논쟁점이 되었던 “analogia entis는 Thomism(토마스주의)의 핵심일 뿐 아니라 이것없이는 자연신학이 성립될 수 없다. 피조물의 본질과 신의 본질 사이에 anologia(류의=類依)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여 초자연적 계시가 없어도 사유(思惟)와 류추(類推)를 통하여 점진적인 계층을 밟아 신의 존재 및 그의 속성들도 알 수 있다는 것, 환언하면 인간이 경험하는 유한(有限)의 원인과 목적으로서 절대자가 존재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인간의 ”생각“ 혹은 ”사색“에 불과하므로 바빙크는 이러한 자연신학 혹은 자연교를 철학이라고 한적이 있다(p.19). 계시에 의존치 않고 이성의 사색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는 또 그의 교의학 신론(2권) ”후천적 신지식“에서 이러한 논증을 분석평가 하였다. 여러 가지 논증들이 있는중 우주론적 논증(argumentum cosmologicum)의 예를 들면 곧 이 논증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알 수 있다. a.c.(우주론적 논증)도 Aristoteles의 ”primum movens, quod a nullo movetur," 다마세누스(Damascenus)의 가변자에서 불변자에의 추론, 토마스의 제일원인(prima causa efficiens), 스피노자, 헤겔 등의 절대자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있으나 결과에서 원인으로 찾아들어가 궁극적인 제일동인자(第一動因者), 혹은 제일원인(第一原因)이 곧 신이라고 하는데는 다 일치한다.

 

  흄이나 칸트의 비평에도 불구하고 결과에서 원인을 찾는 그 자체는 옳은 일이다. 우리가 인가법칙(因果法則)을 무용한 것으로 도외시하면 모든 신학은 설립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 자연신학 혹은 변증학이야말로 엄격히 과학성을 띤 신학이라고 우길 수 있다. 그러나 신학에는 이것이 통용이 될 수 없다. 가장 지혜로운 것 같으나 실상인즉 가장 어리석은 방법이요, 간사한 인간의 꾀와 이론이 항상 반론을 일으킬 여지를 남겨두게 되는 것은 논증 자체가 빈약한데다가 인간이 부패했기 때문이고 또 신 자신이 인간의 지혜를 초월한 삼위신(三位神)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빈약하다 함은 여러 가지 전제들, 즉 세계의 특수한 것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우유적(偶有的)이거나, 일련의 원인들(series causarum)이 무한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 세계전체에도 인과법칙이 적용될 수 있다는 것 등이 먼저 증명되어야 a.c.가 효력을 가지게 된다. 비록 우주자체가 원인을 가진다는 것이 증명된다 할지라도 그 원인의 성격이나 본질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말할 수 없다. 부패하고 마음에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는 가능한한 인격적 신 임을 부인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자는 철학적인 추상적 개념으로, 무식한 자는 금수와 버러지와 같은 우상으로 바꾸고자 한다. 이에 여러 가지 이론을 붙혀 제일원인이 인격적 신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할찌라도, 이분이 단일신이라는 데까지는 올라가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것을 누가 증명할 것인가? 이 우주가 다 없어져도 폐하지 못하는 성경이 삼위신에 관하여 확실히 말하여도 각종 이단설 특히 양태론(樣態論), 양자론(養子論) 등이 일어나 지금까지도 신학계를 어지럽히고 있는 이때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누가 증명할 것인가?

 

  따라서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빈과 쯔빙글리는 “Fintum non est capax infiniti"라는 명제를 즐겨 사용하였다. 물론 루터와 같이 인간을 목석으로는 생각지 아니했으나 죄로 인하여 semen religionnis(종교의 씨)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보았고 자연계에 나타난 신의 솜씨와 그 능력도 성경이라는 안경을 껴야만 바른 신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신의 능력과 신성이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 인간은 이것을 보고도 타락된 이성의 판단에 맡기므로 ”이성의 신학“(theologia rationis)이라고 한다.  이 자연신학과 나란히 특별계시를 인정하면 로마교와 같이 이원론이 빠지고, 성경을 짓밟고 그것을 판단하여 이성의 지배하에 두게되면 합리주의에 빠져 자유주의신학에로 다름질치게 된다.


8. 초자연주의(超自然主義) (p.34,39,49-,60-)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 인격과 그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 기독교는, 자연적이고 육에 속한 사람의 이성을 초월하기 때문에 초자연적이다)(p.58). 그러나 인간에게 만약 죄가 없었던라면, 만약 지성이 죄로 인하여 어두워지지 아니했더라면 기독교의 초자연성에 대하여 아무런 이의가 없었을 것이다. 이적 자체는 죄가 없는 인간의 본성에 모순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본성으로 “초자연주의적”이다. 종교가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한, 인간은 초자연주의일 것이며, 또 계속 그렇게 머물 것이다. 초자연주의를 완전히 멀리하려하는 자는 자기 속에 있는 가장 고상하고, 가장 좋은 것의 자멸을 시도한 것이나 다름없다(p.61-62). 그러나 바빙크는 이렇게 기독교의 “초자연성”을 전적으로 인정하면서도 불건전한 초자연주의를 경계한다. 본 일반은혜론과 그의 교의학에 나타난 것들을 대략 정리하는 한편 다른 개혁신학자들의 의견을 참고하면서 세가지 곧 로마교적, 재세례주의적 및 변증학적 초자연주의로 나누어 살피고자 한다.

 

 

a) 로마교적 초자연주의(p.32 이하참조)

 

  로마교의 s.n.는 자연적인 것을 신앙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현실을 도피하고 초자연적인 것만을 본유의 질서로 본 점이 잘못이었다. 자연의 영역에서 초자연세계로 넘어오는 것은 모두 봉헌되어져야 한다는 원리 뿐만 아니라 그 수단으로서 십자가의 증표, 성수, 성유, 봉직 등 여러 가지 의식을 사용하는 것이 바리새적인 외식(겉모습)이라 할 수 있다(p.35 참조). 미사를 통해서 은혜가 주입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성례의 자동적 효과를 미신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렇게 로마교의 초자연주의는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는 은혜에 의지하지 않고 육에 속한 의식에 치우쳐 외식하였고, 따라서 신약적이라 할 수 없다. 우리 한국교회 안에도 이같은 로마교의 의식주의적 초자연주의가 침투하는 것은 크게 경계해야 할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b) 재세례주의적 초자연주의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이 서로 화목할 수 있음을 부인한 재세례주의는 자연적인 것을 완전히 측면으로 돌렸고 보통은혜를 무시하여, 특별은혜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p.49). 그리스도의 인성을 로고스가 하늘에서 가지고 마리아의 태를 빌려 오셨다고 하는 이 주장은 확실히 비성경적이다(p.50참조). 중생교리(重生敎理)도 신적 실질(實質)이 주입된다고 하였으니 이는 범신론적인 신비주의요, 객관적인 성경보다 주관적 내적 말씀을 높임으로써 주객이 전도되어, 중세(中世) 신비주의의 특색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기독교의 초자연적 진리를 배격한 소씨니안주의를 반대하면서도 결국 양심이 곧 신의 음성이라는 합리주의로 떨어져 오늘날 자유주의신학으로 전락한 것은 한 극(極)에서 다른 극으로 다름질 친 표본이라 할 수 있다. 병역과 관직기피, 문화외면과 현실도피등은 한국교회 안에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일로서 크게 경계해야 할 일이다. 영육이원론에 사로잡혀 마치 영혼은 육체보다 깨끗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육(사르쿠스)이란 말이 영혼을 포함한 인간전체를 가르킨 것을 망각한 것이고, 바울사상에 어긋난다(롬8:6-9, 고후7:1). 정치나 문화나 사회일반 속에 마치 죄가 없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든지, 혹은 반대로 죄가 너무 많기 때문에 복음을 전해도 효력이 없다고 판단하든지, 혹은 세계속에 들어감으로써 거룩한 것이 속되게 되는 것처럼 생각하여 그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현실도피를 일삼는 것은 기독자 자신의 신앙이 강력하지 못한 증거요,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초등학문에 사로잡혀 능력을 상실함으로써 경건의 모양만 내는 의식이요 그 양심이 화인마자 의식함으로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쫓는 결과라 할 수 있다.(골 2:21-22, 딤전4:1-5).

 

c) 변증학적(辨證學的) 초자연주의

 

  영국의 이신론(理神論)과 불란서의 불신앙 때문에 1760년경부터 합리주의가 강화되었고, 특히 독일에서 계몽주의가 득세하여, 인간의 지성이 모든 객관적 진리를 판단하고 그것을 지배코자 할 때 각국의 일부 정통신학계에서 전통적 진리들이 명석한 지성을 바탕으로 한 학문으로써 변증되어져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진리를 파수하고 보수(保守)하겠다는 동기는 물론 좋았다. 그러나 캄펀신학대학(리데르보스박사계통)의 개혁신학자 풀만 박사가 말한바와 같이 이 초자연주의자들은 부서진 칼로서 싸우는 군병과 같다고 적절한 비유를 들었다 (개혁신학 백화사전, 6.p 293). 이들을 초자연주의라고 하는 이유는 확고부동한 법에 따라서 움직이는 자연법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역(事役)이 있음을 주장했기 때문인데 성경, 육화, 정사(釘死), 부활, 승천은 초자연적이라는 것이다. 전적으로 옳은 말이지만 그와 동시에 자연적인 면도 간과하지 말았어야 했다. 성경으로 탄생된 것, 하나님의 아들이 버림당한 것, 죽은 육체가 부활한 것 등은 초자연적이지만, 마리아의 몸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 키와지혜가 자라난 것, 십자가상의 목마르심과 물과 피를 쏟으심으로 죽으신 것, 부활하신 주님이 고기를 잡수신 것, 내려오신 그가 올라가신 것 등은 자연스러웠다. 물론 자연스러운 것이 오히려 신기하여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초자연주의자들이 단순히 성경과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하여 증거하는 한편 연약한 자를 위하여 부득히 논증을 하는 정도로 그쳤으면 모르되 합리주의자들의 원리인 이성에 의한 논징으로써 초자연적 진리를 변증코자 한 거기에 방법론적 오류가 있었다. 상대방이 이성에 의한 공격을 하는데, 이쪽도 그와 똑 같이 지성적인 논증을 그 방편으로 삼는다면 이러한 싸움은 벌써 승산이 없다. 기독교는 머리로써만 변호된다거나 험증(驗證)된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이다. 변증사 자체가 증거하는 것은 기독교의 초자연적, 역사적 진리를 합리적으로 증명만 하면 그것으로 변호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안일한 생각이다. 상대방이 또다시 합리적 이론으로 반론을 제기할 때, 혹은 Rousseau, Lessing, Kant, Schleiermacher처럼 그들이 초자연주의의 합리주의를 신랄하게 비평할 때 부서진 이성의 칼로써는 감당할 수 없다. 오직 성령의 검을 가져야만 이기는 자가 된다는 성경적 진리를 깊이 명심하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오류에 빠진다. 변증하는 자체가 그릇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방법이 잘못이라는 것을 바빙크는 다음 세가지로 지적했다. 첫째, 변증학을 기독교적인 신앙에서 분리시켜 신학의 서론으로 혹은 그 위에 혹은 그 밖에 두는 것, 둘째, 신앙과 지식을 분리시켜 종교적 진리를 “순전한 지성적 증명”에 의존토록 하는 것, 셋째, 이 결과 변증학이나 험증학과 같은 학문적인 신학작업에 대한 기대가 지나쳐 마치 인간의 지성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이 변한다거나, 이론에 의하여 경건을 일깨울 수 있는 것처럼 과신하는 것은 방법론적 잘못이라고 하엮다.(G.D. 1, 134).

 

종교란 순전한 이론에 의거해서 지탱이 되지 않는다. 더욱이 성경은 인간의 이성도 어두운 것으로 본다. “지식에까지 새로워져야 한다”(골 3:10)고 하였기 때문에 자체도 심판을 받아야 할 이성이나 지성의 재판정에나서는 것은 어리석다 아니할 수 없다. 신학의 원리로 이성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면 계시(성경)의 권위는 뒤로 물러서게 되고 싸우는 칼이 무디어 힘이 없다. “초자연주의는 항상 합리주의에로 전락하는 것은 그것의 원리가 이미 합리주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통신학자들의 이러한 오류에 빠진 사람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영국의 Butler, Chalmers, 화란의 Muntinghe, Heringa, Vinke, Pareau, Hofstede 및 Haagse Genootschap(헤이그의 변증학회)등을 들 수 있다.

♦ J. Butler(1672~1752)는 영국 장로교 신학자요 철학자로서 당시의 이신(理神)론자였던 M. Tindal의 주장 곧 “기독교가 자연교에 일치될 때에만 진리다”라는 것을 반박하기 위해 “성경의 내용이 모두 자연 속에서 그 류추(類推)를 볼 수 있다.”고 하는 원리로써 변증코자 했다. 이것은 류사점을 찾는 인간의 이성자체가 어두운 것을 망각한 어리석고 무능한 변증이었다.

♦ J. Chalmers(1780~1847)sms 스콧틀란드의 장로교신학자로서 성경을 신적 계시로 받아들인 정통 보수주의자로 자처했는데 Bacon의 귀납법적 방법의 결과가 곧 참된 신학인줄로 알았고, 자연과학이 하는 것과 꼭 같은 방법을 그대로 신학에 도입하여 적용코자 하였다.

♦ 영국의 William Paley(1743~1805)는 “기도교 험증학”(驗證學)이란 그 당시 생소한 책을 내어 기독교의 진리를 역사적 사실과 구약의 예언 및 신약의 비평에 근거한 비평을 통해서 증명코자 한 초자연주의자 였다. 지나치게 세분화된 체계적이고 논증적인 도덕과 정치철학의 원리(1, 785)라는 책은 18세기의 공리주의에 잘 먹혀들어가 잘 팔렸고, “Horae Paulinae"(1797)는 사도행전의 신빙성과 바울서신의 진정성을 증명코자 하였고 그의 ”자연신학“(Natural theology, 1802)은 신의 존재의 목적론적인 증명을 주고자 한 변증학이었다. 이와같이 그는 Yorkshire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Anglican 신학자로서 초자연주의자 였다. ”신 자신이 종교적인 일들에 관하여 인간들에게 말씀하신 일반적 말씀들 가운데 니는 신을 공경한다“고 하였다. Paley는 이렇게  역사를 지식과 진리의 근원으로 보았다.

♦ 화란의 H. Muntinghe(문팅허,1752~1824)는 크로닝헌(Groingen)대학의 총장이자 신학교수였는데, 합리주의를 반대하며 오직 성경신학만을 세울려고 한 초자연주의의 대표자였다. 그의 주요한 저서는 “성경적 인류사(Gescihiedenis der menschheid naar den Bijbel, 전11권, 1801~1819)였는데 그는 여기서 인류의 종교적 및 도덕적문명의 발달을 추진키 위한 신적 교육은 인간들의 지성적인 발전에 맞추어 단계적인 조정을 하였다는 것을 보이고자 하였다. 이러한 지성주의적 생각은 아무리 성경신학자라 할찌라도, 결국 비성경적인 생각을 지니게 한다. 그는 보수적이면서도 속죄의 충족성을 믿을 수 없었다.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초자연주의자들이 결국 합리주의적인 불신앙으로 떨어진 좋은 예는 헤이그(海牙=해아)의 변증학회(Haagsch Genootschap)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1785년에 비기독교적인 책들을 비평코자 모인 동지들의 보수적인 학회였고, 성경의 신적 권위, 대속(代贖)의 교리 등 중요한 교리들을 변호하는 많은 소책자들을 내었고 ‘그 당시의 신신학(Neologie~삼위일체, 천사 부인)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1821년에 그 막을 내림과 동시에 그 방향이 차츰 바꾸어져 결국 현대신학에의 길로 걸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초자연주의는 우리 보수신학에 큰 경종을 울린다. 기독교의 역사성과 초자연성을 변증하기만 하면 그것이 곧 건전한 정통신학이 수립되는 것으로 쉽게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안일한 생각이다. 남을 비평만 하고 자기자신이 얼마나 벌거벗었으며, 무력하며, 인간적인 지성과 능력만 의지한 나약한 자리에 있는 것을 모른다면 이는 소경이다. 성경의 이적(異蹟)과 기사(奇事)를 자랑삼아 변호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폴만 교수의 말과 같이 이적은 과거에 지나간 “memoriepost"(기억의 푯말)만이 아니다. 이적중의 이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었다. 이러한 이적에 근거한 중생(重生)도 성령의 강력한 역사(役事)로 일어나는 이적이다. 바빙크는 이러한 성령의 역사도 부활과 꼭 같은 강한 능력이 역사한다고 하였다.(신학지남, 김희보학장 60회생신기념특집 78가을, 겨울호, p.97참조). 따라서 교회 안에 신령한 이적은 계속 일어나야 하고, 또 일어나고 있다. 지성적 변증도 필요하지만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합리적인 이론이나 변증의 능력에 있지않고, 오직 성령과 말씀의 능력에 의해서만 이루어 진다. 바빙크의 적절한 말로서 이 항목을 끝맺고자 한다.

 


9. 스콜라신학 (theologia scholastica)


  "스콜라신학과 신비주의는 한 계열에 속한 같은 운명을 지니고 있다“(p.35)고 한 바빙크는 그의 교의학 여러 곳에 이 스콜라신학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Van Dale(환 달러)의 화란어 큰사전에 scholasti다dp 관하여 다음과 같이 간단하나마 정의를 내리고 있다. 즉 ”학문적 지혜: 중세기의 대학에서 가르쳐진, 철학과 신학의 체계적 종합: 그것은 특히, 그러나 꼭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사상체계에 연결되어 있다“.

 

  그 특징을 폴만 박사는 네가지로 들었다 : 첫째, 철학과 신학을 완전히 분리시켜 감각적인 경험적 자료로부터 능동적인 지성의 추상적 작업을 철학이라 하였고, 그것을 초월한, 오직 특별계시를 통해서 알려질 수 있는 것을 신학이라 하였다. 둘째, 전통주의(traditionalisme)에 강하여 무엇이든 보수라는 것, 교부(敎父)들의 신학을 그대로 재현하되 원문을 참고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인용한 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은 그들 대부분이 헬라어를 몰랐기 때문이다. 셋째, 철학과 신학을 종합하여 큰 체계를 세우고자 하였다. 인간의 이성과 계시 사이에는 아무런 대립이나 모순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성이 발견한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추상화한 후 가신성(可信性)의 동기를 거쳐 신앙에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이리스토텔레스의 변증법, 추론(연역법), 삼단론법(三段論法)이 신학에도 적용되어 철학과 신학이 서로 협동하였고 “per 량드 ad intellectum"(Augustinus가 먼저 말한 것임) 곧 신앙을 따라서(통해서) 지식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넷째로, 성경 읽는 것을 힘쓴 것은 좋았으나 ”sic et non"(긍정과 부정)의 변증법적인 문답을 통해서 서로 모순되는듯한 난해절(難解節)들을 중심으로 토론하는 것을 일삼았다. 찬반의 논증들을 열거한 후 적당한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의 집대성을 토마스의 Summa Theologica (신학대전)에서 보는데, 대소 취지로 빈틈없이 구분에 구분을 거듭하여 작은 취지들까지 세분화하고 각 취지마다 많은 질문이 따르고 한 질문에 많은 항목들이 따르는 번잡하기 짝이 없는 것이 특징이었다.

 

  위의 전통주의를 바빙크는 스콜라신학의 첫째 특징으로 꼽았는데, 스콜라신학은 전통에 대한 아무런 비평이나 의심도 없이 어린아이 같이 그대로 추종하였다. 셋째특징을 바빙크는 두 번째로 들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통해서 사유(思唯)의 훈련을 쌓은 후, 신학적인 문제들을 변증법적으로 혹은 체계적으로 다루었다. 세례요한이 특별은총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가르키는 선구자 였음과 같이, 이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총 영역에서의 선구자였다. 조직신학은 단순한 신앙에 관한 적극적인 교리해설이 아니라, 여러 가지 복잡한 논설과 학문의 백과사전이었고 철학적인 문제는 많이 취급되었으나 종교 자체는 자주 결여되었다.

 

또 네 번째의 특징 곧 번잡한 세분화와 각종문제의 종합, 혹은 체계에 관하여 바빙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이 스코라이신학의 체계는 날이 갈수록 번잡하게 되어 교회의 종교적 생명과의 연관이 전적으로 깨어졌다. 교리를 너무 세분화 했기 때문에 그 핵심적 내용이 상실되는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러한 스콜라신학은 대개 그 시기를 3분한다.

  1) actas vetus (옛시대 초기). Anselmus로부터 시작하여 Lombardus까지 약 100년간의 Sententiarum libri (전 4권)는 거의 모든 것을 갖춘 교의학으로서 후대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말하자면 스콜라신학의 본문이었다.

  2) aetas media (중기). A. Halesius로 시작되는데, 그는 Lombardus의 교의학을 주석하였으나 엄격한 삼단론법과 변증법을 적용하여 번잡하게 만들었다. 신학에 이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Albertus Magnus (1280년 사망), Thomas Aquinas (1274년 사망)등이 수립하였다. 모두 Lombardus의 신힉을 풀이하였고 Albertus Magnus는 그위에 summa theologiae(신학대전)를 저술하였다.(미완성).

  3) aetas nova (말기). Duns Scotus의 비평으로 스콜라신학은 그 막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토마스의 신학을 비평하였고, 푸란시스칸 종단의 de Rada (1608년 사망)는 86가지 이상의 모순되는 점을 토마스신학에서 찾아내어 그것을 비평하였다 (개혁교의학, 1권, 제2판 p.139).

  스콜라신학은 그 후에 계속 로마교 안에서 간혈적으로 나타났고 (동, p.144,145 - ), 개혁교회 안에서도 기끔 일어나 즉각적인 비평으로 바로 되었다 (종교개혁 후 일부 개혁신학, 카이퍼 당시의 헤프(Hepp)의 변증신학 등). 신학과 철학이 분리 혹은 구별되는 것이 어떻게 스콜라신학의 특징이 될 수 있는가라는 의심이 일어날 수 있으나 지면 관계상 바빙크의 교의학 1권, 제2판, p.312이하와 p.539이하를 참고하기 바란다. 그리고 신비주의와 스콜라신학이 어느 정도 서로 일치하며 어느 점에서 서로 다른가라는 것도 바빙크의 교의학 1권 p. 140이하를 참고하기 바란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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