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에서는 최후의 심판 때의 모습이 여러 번 나옵니다. 최후의 심판의 모습이 처음 나오는 곳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최후 심판 때 이 땅에 일본의 지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지진이 일어납니다.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같이 검어집니다. 현대과학이 발달하면서 태양에 흑점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태양의 흑점이 조금이라도 커지면 지구에서는 통신장애와 기상이변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후의 심판 때는 그 태양흑점이 커져서 해가 완전히 검게 됩니다. 또 달이 온통 피같이 됩니다. 하늘의 별들이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처럼 지구에 떨어집니다. 또 우리가 보는 이 하늘도 완전히 떠나갑니다. 또 산들과 섬들이 모두 제자리에서 옮겨집니다. 또 이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종들과 자유인이 굴과 산과 바위틈에 숨어서 최후의 심판을 피하여 보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말합니까?
“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세상 사람들은 이런 최후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누구에게 호소를 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피한 산들과 바위들에게 호소를 합니다. 그런데 그 산들과 바위에 호소를 해도 최후의 심판은 피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보면 마지막 날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 누구라고 합니까? 6장 16절을 보면 “어린양의 진노”라고 합니다. 어린양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어린 양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이 세상을 심판하십니까?
이 세상과 사탄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기 때문입니다. 또 이 세상과 사탄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많은 고난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또 왜 마지막 심판 날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합니까? 그 이유는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의 날에는 예수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러면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한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1)오늘은 심판의 날이 아니라 구원의 날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사도바울도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합니다.
지금은 심판의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은혜를 받을 때입니다. 또 구원을 받을 때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 말미암아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을 이때에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마지막 날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 마지막 날이라는 것은 지구 최후의 날도 되지만, 개인적으로 보면 죽음도 됩니다.
계20: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그러니까 우리는 최후의 심판이 있기 전에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또 개인의 죽음이 있기 전에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합니다.
//어제 장례식장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죽은 사람의 죽음과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의 죽음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인간적인 정 때문에 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울음은 소망의 울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에게는 천국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은 죽음 자체가 절망입니다. 그래서 절망의 울음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개인의 종말이 오기 전에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 총 전도 주일에 한 영혼이라도 이 구원의 은혜에 동참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또 지금은 심판할 아니라 사랑할 때입니다.
마태복음 12장 19절과 2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9. 그(예수님)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스펄전 목사님은 마12장에서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를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바리새인으로 보았습니다. 마12장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을 사사건건 예수님을 정죄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주워 먹으니까 바리새인들은 왜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하는데 왜 안식일에 일을 하느냐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 편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에 대해서도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하는데, 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을 하느냐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가진 율법에는 안식일에 한 한 마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는 건져도 된다고 하지 않느냐-그런데 안식일에 양을 구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고,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을 잘못된 일이라고 말하느냐—양이 귀하냐 사람의 생명이 귀하냐”고 바리새인들에게 반문을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다투지도 아니하시고, 큰 소리를 내시지도 아니하시고 상한 갈대도 꺽지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를 죽이려 했던 바리새인조차도 상한 갈대로 보셨습니다. 꺼져가는 심지로 보셨습니다.
/상한 갈대는 언젠가는 버려지게 되는 갈대입니다. 꺼져가는 심지도 언젠가는 불에 타서 없어지게 될 심지입니다. 그러니까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는 언젠가는 심판을 받을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상한 갈대와 같이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들을 심판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날은 최후의 심판의 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최후의 심판의 날이 되기 전에는 상한 갈대라도 꺽지아니하십니다. 꺼져가는 심지라고 할지라도 절대 끄지 아니하십니다. 최후의 심판 날이 되기 전에는 심판하지 아니하고,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죽이려 했던 바리새인들도 꺽지아니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죄는 미워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조차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야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은 심판의 때가 아니라 사랑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하겠습니다. “지금은 심판의 때가 아니라 사랑할 때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따르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을 심판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무자비하게 이슬람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결국 이것 때문에 지금까지 이슬람권선교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최후의 심판의 날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심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최후의 심판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원수들에 대한 심판은 오직 주님께 맡겨야합니다. 물론 악한 자들에 대해서 분별은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은 오직 주님께 맡겨야합니다.
그래서 롬12장 19-2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십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수를 갚고 심판하고 보복하는 사이에 우리의 영혼이 영적으로 너무나 피폐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위를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혹 우리가운데 심판자가 있습니까? 내가 친히 원수를 갚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문제는 그들의 모습이 영적으로 얼마나 피폐해져있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원수를 갚는다는 핑계로 얼마나 더 큰 죄를 저지르고 있습니까?
그래서 왜 예수님께서 원수를 친히 갚지 말라고 하십니까? 왜 너희가 친히 심판자가 되지 말라고 하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들을 보호하시기 위함입니다.
심판은 주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를 힘들게 하는 원수라도 끝까지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같이 미워하는 나 자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싸움은 나를 미워하는 사람과의 싸움이 아니라 나를 미워하는 그 사람을 미워하는 나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진정으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최후의 심판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그 어느 누구도 미워하거나 심판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끝까지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으로 미움을 이기는 일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일입니다. 이것이 최후의 심판을 믿는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끝까지 자신을 미워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싸워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탄의 속삭임입니다. 이런 사탄의 속임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나를 미워해도 내가 끝까지 미워하지 않는 한 원수는 더 이상 지쳐서 나를 미워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가 원수가 되지 않는 한 원수는 없습니다.
제 책상 앞에 얼마 전에 읽어드렸던 순교자의 기도가 있습니다.
“나를 저주하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저주하면 할수록 더욱 나는 당신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내게 침을 뱉어 보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랑의 숨결을 뿜어 낼 것입니다.
나를 때리십시오. 나는 신음 소리로 사랑을 고백할 것입니다.
나를 찌르십시오. 나는 사랑한다고 절규할 것입니다.
나를 짐승의 먹이로 던지십시오. 나는 사랑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나를 불태우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랑의 열기로 당신의 증오의 가슴을 녹일 것입니다”
어느 식당에 가니까 이런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사랑할 시간도 없는데 어떻게 미움을---”“사랑할 시간도 없는 어떻게 미워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개인의 종말이 올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좀 더 사랑했을 걸, 그때 좀 더 잘 했을 걸”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종말의 때가 이러기 전에 끝까지 사랑하시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심판할 때가 아니라 사랑할 때입니다.
3)또 지금은 판단할 때가 아니라 충성할 때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입니다. 그런데 최후의 심판은 믿는 자들에게는 지옥에 가는 심판의 날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우리가 행한 일들에 대해서 주님께서 판단하시는 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최후의 심판이 있기 전에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4:5. 그러므로 때(최후의 심판)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때가 이르기 전, 즉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또 믿는 사람들을 판단하시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스스로 판단했을 때, 자책할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바울은 이제 모든 것이 다 됐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자신이 판단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감추인 모든 것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다 됐다” 고 판단하지 말아합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모든 판단과 평가는 오직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도바울과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판단했을 때 너무나 자책할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만이 문제가 아니라 낙심이 문제입니다. 내가 나를 평가하고 판단했을 때, 하나님 앞에서 너무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만두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때가 이르기 전, 주님께서 모든 것을 심판하시고 판단하시기전에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심판하시고 판단하시기전에 아무 것도 판단하거나 심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디에까지 이르렀던지 최선을 다하는 삶입니다. 충성하는 삶입니다. 또 끝까지 사랑하는 삶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할만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할만한 사람이 될 때까지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또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삶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이런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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