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믿음으로
로마서 1:16-17
오늘은 10월 마지막 주일로, 종교개혁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95개 조항의 논제를
비텐베르크교회 게시판에 붙여서, 본격적인 종교개혁의 불길을 붙인 일을 기념하는 주일인 것입니다.
의미 있는 것은 루터가 한 일을 기념하면서도, 종교개혁기념주일이라고 하지 않고, 종교개혁주일이라고
한다는 점입니다. 종교개혁은 지금도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한 배려인 것입니다.
2년 전에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군 영화가 있었습니다. 바로 ‘도가니’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2005년
광주에 있는 인화학교라는 장애인 복지시설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울분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그 결과 이 영화로 인해 인화학교는 폐교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우리나라 교회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인화학교가 기독교 복지시설인데다, 영화 속의
범죄자들도 모두 기독교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범죄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자들도,
범죄자들을 위해 피켓 시위를 하는 자들도, 범죄자들을 위해 범정에서 응원하는 자들도, 모두 범죄자들과
함께 같은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본 사람들 중의 일부가 인터넷에 반 기독교적
인 글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결국 감독이 의도했든지 의도하지 않았든지, 이 영화는 반 기독교적인 영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영화를 본 불신자들은 당분간은 기독교인이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일들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 교회에 대하여 기대와 희망을 갖는 것이 아니라, 냉소와 절망을 드러내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뜻있는 사람들은 지금 우리나라 교회는 영성, 도덕성, 공동체성을 상실함으로써,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고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교회에는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종교개혁
기념주일이 아니라 종교개혁주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루터의 종교개혁 496주년을 기념하는 종
교개혁주일을 맞아, 종교개혁의 원리와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종교개혁의 불길을 붙여야 합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원리로 삼은 것은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 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원리 중의 하나인 ‘오직 믿음으로’라는 원리를 우리에게 깨우쳐 줍니다.
오늘 본문 중의 한 구절인 17절을 공동번역성서에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성서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말의 초점은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길은 믿음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개역개정성서나
새번역성서가 ‘하나님의 의’로 번역한 구절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길’로 번역해서, “하나님
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길은 믿음 밖에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여, 올바른 관계를 만드실 수 있는 분은 하나
님 뿐 이십니다. 인간이 어떤 노력을 하여도 회복시킬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회복해 놓으신 그
관계를 믿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될 때에,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오직 믿음만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은, 구원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 편에서 이루신
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 편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내세우지 아니하고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포함합니다. 이제까지 내가 의지해 오던 돈이나 권력이나 지위나 체면 따위는 결단코 내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완전히 없던 것으로 돌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
태어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에,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결코 간단한 말이 아니라 그 의미가 깊고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조금 다르게 번역한 성경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인은 살리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원문 자체가 이러한 번역을 가능하게 한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 사람이 있다면,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 의인 노릇하려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비유에 보면, 그런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과 세리가
함께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한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비유
속의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큰 소리로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켰으며, 정한대로 금식하고, 십일조를 헌금
하였노라고 자신 만만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성전에 가까이 나아갈 용기도 없이 멀리 떨어
져서, 눈을 감고,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사람에 대해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다.”(눅 18:9-14)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세리를 지칭하며, 저 사람은 바리새인을 지칭합니다. 그러니까 세리가 바리
새인보다 의롭다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세리와 같이 자기의 죄를 깨닫는데서 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랑할 것이 아무것
도 없는 자신의 무기력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아무것도 없음을 발견하고, 풍성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그런 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가장 가난한 마음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조금이라도 가진 사람은 믿음을 갖기
가 어렵습니다. 바리새인처럼 율법을 지키므로 갖는 자부심이라든지, 아니면 지식이나 돈이나 지위 같은
것들을 내세우는 마음을 가질 때에, 믿음을 갖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왔던 부자 청년도 너무 가진 것이 많아서, 그 안에 믿음이 들어갈 여백이 없었습니다. 예수
님께서 그에게 가진 것을 모두 팔아 버리고 나를 좇으라고 하신 것은, 그래야만 믿음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한 마음만이 하나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만이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자신을 한 번 돌아봅시다. 우리는 정말로 믿음을 가졌습니까? 우리는 정말로 가난한 마음을
가졌습니까? 자신이 무기력하다는 것과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어쩔 도리가 없어, 하나님 앞에 가슴을
치며 도우심과 용서를 간구하는 사람입니까?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멸시하고,
자기가 가진 하잘 것 없는 우월감에 만족하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자기가 가진 재물이나 지식이나 어떤
사회적인 지위로 자신의 삶의 근거로 삼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 이런 것들이 아직 남아 있다면, 완전히 쏟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가난한 자로,
완전히 벌거벗은 자로 서기까지,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고아와 같이 자신을 느낄
때까지, 자기가 의지하고 있는 이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완전하게 떠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막 10:29-30)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와 같이 모든 것을 비우고,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믿음의 눈으로 모든 사물을 보고, 믿음의 눈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기 이전에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 그의 피부색이나 그의 생김새나 그의 지식이나 그의 가문
이나 그가 가진 재산이나 지위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를 합니다. 바울이 활동하던 시대에, 유대인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선민이요, 그래서 할레를 받았고, 율법도 가졌노라고 자랑했습니다. 반면에 헬라인은
그들의 문화와 지식을 자랑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것이 그의 목표인데, 이런 민족 간의 차별이나 나라 사이에 있는 우열의
관계가 복음 전파에 장애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만든다는 사실
을 강조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있는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한 인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 종이나 자유자,
남자나 여자 사이에 있었던 어떤 우열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
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를 받아 가질 때에 모든 인간은 완전히 평등한 인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이런 새로운 인간관계를 받아들이는 것
을 뜻합니다. 예수를 믿는 나의 형제가 피부색이 검든지 희든지, 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지식인이거나
무식하거나, 고위직 공무원이거나 말단 공무원이거나 상관하지 아니하고, 오직 믿음으로 새롭게 된 나의
형제요 자매로 대하고,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하여 죽으신 참으로 귀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정하는 것입니
다.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사람으로 판단하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만이 나의 목적이 되어
야 할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며,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악한 시대에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오직 진리로만 살
아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말의 출처는 구약성서 하박국 2장 4절입니다. 그런데 하박국서가 기록된 때를
보면, 불의가 횡행하고 악한 사람이 잘 되며,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세력을 얻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착취와 억압이 자행되던 사회였던 것입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는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 정직하게 살려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께 이런 항의를 했습니다.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그대로 두시는 것입니까?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잠잠하십니까?
이런 선지자의 질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대답은 더딜지라도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 2:4)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악이 발악을 하고, 온갖 불의와 부정이 있다 할지라도, 결코 각자가
가진 의와 정직을 버리지 말고, 또 하나님께서 반드시 불의를 심판하시고, 의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믿음을
버리지 말고, 인내로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악한 시대에 의인이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인내와 소망으로 하나님의 의를 기다리는 것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이 땅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고난
을 당한다 하더라도,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불의에 진리로
맞서며, 그에 대항하여, 진리를 이 땅에 실현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을 뜻합니다.
비텐베르크 교회 게시판에 95개 조항의 논제를 붙여서, 본격적인 종교개혁의 불길을 붙인 루터는 비텐베
르크 대학의 교수였습니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편안한 삶이 보장된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편안한 삶을 던져버리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진리를 이 땅에 실현시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펼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그 유명한 면죄부 사건입니다. 면죄부 판매는 가톨릭교회의
교황 레오 10세가 자기 당대의 숙원 사업이었던 베드로 대성당 건축 완공에 필요한 엄청난 공사비를 충당
하기 위해 고안해 낸 모금방법이었습니다. 교황이 발행한 면죄부를 구입하기만 하면, 지옥에 간 사람도
천국으로 옮겨진다는 황당한 교리를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했습니다.
사람들이 미혹된 이유는 ‘과잉공로 사상’ 때문이었습니다. 기준치를 초과한 과잉 공로를 교황이 사용할
수 있다는 논리에 사람들이 미혹된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루터가 종교개혁의 불길을 붙인 것입니다. 더 이상 불의를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진리의 깃발을 높이 든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와 같이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오직 진리로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첫째, 모든 것을 비우고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이고,
둘째, 믿음의 눈으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고 사랑하는 것이며, 셋째,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진리로
만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은 어떠합니까? 오직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까?
여러분은 오직 믿음으로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개신교회
교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 모든 것을 비우고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고 사랑하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진리로만 살아서, 오직 믿음으로 사는 성도로 인정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16-17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