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성장의 중요성 엡 4:13~16
100층짜리 아파트 꼭대기 층에 사는 노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부부는 그냥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심심하니까 재미있는 또는 무서운 이야기를 교대로 하나씩 하면서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겨우 겨우 99층까지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99층에 도착했을 때 아내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정말로 무서운 이야기가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남편은 정말 궁금해서 "그래 재밌겠네. 빨리 무서운 이야기 해봐. 어서~" 그런데 부인이 말을 꺼내자마자 남편은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요? "집 열쇠를 경비실에 놓고 그냥 왔어요." 지금 이 부부가 걸어서라도 계단을 올라가는 것은 집으로 들어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집으로 들어갈 열쇠를 경비실에 놓고 온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무엇일까요? 그 열쇠가 신앙 성장입니다. 영적 성장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게 되면 갓 태어난 신생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갓 태어난 신생아가 성장이 멈춘 상태로 자라나지를 못한다면 부모님들의 상심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기독교는 생명공동체입니다. 그러기에 성장해야 합니다. 성장하되 어떻게 성장해야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모습대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라지 못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요 슬픔입니다. 질병 중에 사람의 육체가 성장하지 못하는 병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프로제리아라는 병입니다. 이 병은 염색체 이상으로 생기는 早老症(조로증)입니다. 이병에 갈리면 10대 소년도 80대 할아버지처럼 늙어갑니다. 이병은 수백 만 명 중 하나가 걸리는 희귀병이랍니다. 또 하나는 신체의 어느 한 부위만 자라고 나머지 부위는 자라지 않는 병입니다. 머리가 어른머리인데 몸은 유아처럼 되는 병, 또는 몸은 자라는데 머리가 간난아이 모습으로 멈추어 있는 병, 이런 희귀병의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은 고통스럽고 괴롭기 그지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 하면서 자라나지를 못한다면 프로제리아라는 영적 조로증에 걸린 것과 같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활동하며 자라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자라나야 할 것이 자라나지 않는다면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겁니다. 병이 생겼거나 아니면 죽은 것입니다. 누가 꽃씨를 심고서 꽃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농사를 짓는 농부는 가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기를 기대하며 씨를 뿌립니다. 그러나 뿌린 씨가 어느 정도 자라다가 성장을 멈춘다면 한 해의 농사를 포기해야만 합니다. 영적성장을 가장 싫어하는 존재는 마귀입니다. 또 마귀의 영향을 받는 주변 사람들은 영적 성장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성도들이 자라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고, 열매를 맺게 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좋은 열매가 아닌 못된 열매를 맺도록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살후1:3에서 성도의 믿음이 자라도록 기도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골1:10에서도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도록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사도 베드로도 믿음이 자라도록, 사랑이 자라도록, 말씀의 젖을 사모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고 했습니다. 벧후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여기서 “자라가라”는 말은 동사로 현재형뿐 아니라 명령형입니다. 충고나 조언이나 부탁이 아닙니다.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할 일입니다. 그리고 어느 특정한 때에만이 아닌 계속적으로 자라가야 할 것을 명령한 것입니다. 마치 자전거가 페달을 밟지 않으면 쓰러지고 말 듯 우리도 계속된 노력과 수고가 없으면 쓰러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성장한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말합니다. 회복되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성숙자의 문제점
성숙되지 못한 문제점은 먼저 그 문제가 자신에게 나타납니다. 인생의 많은 문제는 미숙함 곧 성숙하지 못한데서 생깁니다. 미숙하면 쉽게 화를 냅니다. 미숙하면 감정의 기복이 심해집니다. 너무 가볍게 말하고 결정합니다. 미숙하면 요동하는 파도처럼 너무 자주 요동합니다.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받고 쉽게 오해합니다. 전체를 보는 안목이 없어 작은 문제만 생겨도 안절부절 하게 됩니다. 이렇게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당장 피해를 봅니다. 성숙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줍니다. 만일 성숙하지 못한 자식이 있다면 그 자식은 그 부모에게 피해를 주게 될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걱정하게 합니다. 속상하게 합니다. 그리고 또한 육체적으로 힘들게 할 것입니다. 자녀가 성숙하지 못하여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연로한 부모에게 그 일을 대신하게 하므로 부모에게 피해를 줍니다.
히브리서5:12절을 보면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때가 오래되었으면 마땅히 성숙해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도와주어야 할 터인데 아직까지 다른 사람의 도움이나 받고 살아가야하니 이 어찌 심각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고린도전서 3:1-3절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다른 사람과 분쟁합니다. 영적 성장이 없으면 영적 철부지로 남아있어서 하나님과 목회 사역을 하는 분들을 애태우게 합니다.
영적 성장은 예수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
오늘 에베소서4:13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일과 믿는 일에 하나가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원한다” 바울은 말합니다. 영적성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과 믿는 일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이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했습니다.(호4:6) 즉 이스라엘 백성이 경제적으로는 윤택해지고 세상지식은 점점 많아졌지만,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이 백성이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만큼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지식이 쌓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적성장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분명히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십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가 떠나신 후에 보혜사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시리니 보혜사 성령이 너희에게 오면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알게 하리라”(요14:26)
우리 예수 믿는 성도의 마음속에는 두 세력이 공존하는데 하나는 육신의 소욕이고 또 하는 영의 소욕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육신의 소욕을 누르고 영적인 소욕을 따라 살아갑니다. 영의 소욕을 따를 때에 영적 성장을 꾀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욕망과 뜻대로 살고자 하면 절대로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영적 성장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나는 씨를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지만, 자라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라 했습니다.(고전 3:6-7) 사실 씨를 심는 것도 중요하고 물을 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자라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영적성장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이룰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사도 바울이 영적 성장의 원리를 말합니다. 16절에 “그로부터”, 16절,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다같이 "그에게서“, 원문으로 보면 ”그로부터“, ”그로부터“는 예수님으로 부터”입니다. 모든 영적 성장이 예수님으로부터 옵니다. 이스라엘 광야에서 물을 얻는 세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고인 웅덩이와 흐르는 시내물입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웅덩이에 고였다가 더 많이 내리면 시내로 흘러갑니다. 비는 임하는 은혜를 말합니다. 웅덩이는 거하는 은혜를 말합니다. 시내는 흘러가는 은혜를 말합니다. 영적 성장은 하늘에서 비가 임해야 합니다. 하늘의 비가 내리면 영적 성장이 시작됩니다. 그 은혜의 비가 내 안에 거하면 내 안에서 영적 성장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다가 은혜의 비가 밖으로 흐르면 영적 성장이 밖으로 나타납니다. 은혜는 임하고, 거하고, 흘러갑니다.
영적성장은 맡은 사역에 충성할 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으로 성숙시키는 방법은 사역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함이라”.(엡4:11-12) 그리고 이 사역을 통해 우리를 온전케 하십니다.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역을 위해 부르셔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고 영적성장에 이르도록 훈련시켜주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를 때만 해도 제자들은 정말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그들은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예수의 이름으로 뛰게 만들었고, 예수 전하는 일을 못하도록 협박하는 대제사장의 무리들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 했습니다.(행4) 그들의 믿음은 점차적으로 담대해지고 성숙해지는 것을 확실하게 볼 수 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역에 충성할 때 영적 성숙은 이루어집니다. 영적 성장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맡겨진 사역에 충성할 때 영적성장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영적 성장의 목표
요즘 흔히 쓰는 영어 단어 가운데 멘토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본을 보여줄 수 있고 가르쳐 이끌어 올바른 길로 인도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멘토라 하며 그 멘토 밑에서 성숙함을 위하여 가르침을 받는 사람을 멘토리라고 합니다.
멘토링이란 말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이타카 왕국의 왕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나가기 위해 가장 친한 친구에게 아들 텔레마쿠스를 맡기고 떠났습니다. 오디세우스 왕의 가장 친한 친구 이름이 바로 멘토(Mentor)입니다. 멘토는 오디세우스가 전쟁에서 돌아오기까지 텔레마쿠스의 친구이자, 선생님, 상담자, 때로는 아버지가 돼서 그를 훌륭한 인물로 길러 냈습니다. 그 후로 멘토라는 그의 이름이 지혜와 신뢰로 인생을 이끌어주는 지도자의 의미로 사용 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이 이 기원을 중심으로 일대 일 관계로 인생을 이끌어주며, 상호작용관계가 일어나는 것을 멘토링이라고 합니다. 더 경험이 많고 지혜가 많고 전문성이 있는 멘토에게 배우고 지도를 받는 사람을 멘토리, 또는 멘티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멘토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임하면 자라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랍니까? 엡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까지”를 말합니다.
13절의 말대로 하면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입니다.
“그로부터”가 영적 성장의 출발이라면,
“그에게까지”는 영적 성장의 목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할 것처럼 예수님에 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성장의 목표입니다. 그러니까 한계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까지 자라겠습니까? 누가 예수님처럼 되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역사상 가장 예수님을 닮았다는 분이 있습니다. 성 프란시스입니다. 누가 성 프란시스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사람들이 선생님이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았다 합니다.” 성 프란시스가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만일 나를 자세히 본다면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 프란시스를 볼 수 있게 될 것이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처럼 된 성인은 없습니다.
그뤼셀이 말한 대로 “성인은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이 회개하는 죄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까지 자랄 수 없지만 그러나 예수님까지 자랄 수 있다는 목표는 영광스러운 목표입니다. 안 되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범사에”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영적 성장이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범사에 성장해야 합니다. 성장에는 많은 요소가 있습니다. 다양한 요소가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 다양한 요소 중에서 크게 세 요소가 중요합니다.
방향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안으로, 위로, 그리고 밖으로입니다.
먼저 “안으로”입니다.
“안으로”는 우리 인격과 성품의 성장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면 반드시 첫 번째로 영향을 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인격과 성품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데 우리의 타락한 인격과 옛 성품이 그대로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 달라진 것이 세 가지입니다. 신분이 달라집니다. 신분은 우리를 구원받게 하고 천국에 가게 합니다. 성품이 달라집니다. 성품은 사람을 사랑하게 하고 사람에게 사랑받게 합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거룩하게 합니다. 능력이 달라집니다. 능력은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합니다. 결국 승리하게 합니다. 예수 믿으면 세 가지가 달라집니다. 그런데 누구나 신분은 달라집니다. 예수 믿으면 그 즉시로 신분이 달라집니다. 평소에 망나니같이 살던 사람도 그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면 그 즉시 대통령아들이 됩니다. 대통령 다운 성품과 인격이 없어도 대통령 아들입니다. 그때부터 그는 청와대를 아무 제재 없이 출입합니다. 그래서 능력도 생기고 힘도 생깁니다. 그러나 그가 좋은 사람이 되지 않으면 두고두고 대통령을 욕되게 합니다. 김씨 성을 가진 두 대통령의 아들들이 그러했습니다. 저들은 대통령 아들다운 처신을 하지 못하여서 대통령 재임기간 중에 옥중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신분이 달라지고 능력이 달라졌어도 여전히 문제는 성품입니다. 성품은 사람 됨됨이입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오랫동안 성도들의 삶을 관찰해왔습니다. 그때마다 느끼는 것은 언제나 신앙의 문제는 성품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신분으로 시작합니다. 다음은 능력입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가는 것은 성품입니다. 성품이 최종적인 것을 결정합니다. 앤디 스탠리가 쓴 “성품은 말보다 더 크게 말한다.”는 책에서 “당신의 성품이야말로 당신의 참 모습이다. 당신이 평생 얼마나 많은 일을 이룰지는 성품의 영향을 입는다. 당신이 남들이 알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도 성품으로 결정된다. 당신의 모든 인간관계는 성품 때문에 잘되기도 하고 깨지기도 한다. 외모와 재산으로 결혼은 성사될지 모르나, 결혼을 유지시키는 것은 성품이다. 하나님께 받은 생식 기관으로 자녀는 낳을지 있지만 자녀와 관계를 맺는 능력은 성품으로 결정된다. 모든 것이 성품으로 결정된다.”
그런데 바로 그 성품을 변화시키는 것이 안으로의 영적 성장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이 그렇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본래 성품이 어떠했습니까? 14절입니다. 엡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고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어린아이는 자기만 압니다. 잘 속고 잘 유혹 받습니다. 약합니다. 고집이 셉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툭하면 울고 잘 넘어집니다. 이것으로부터 자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으로 가야 합니다.
다음으로 “위로” 성장합니다.
위는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성장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이 계속 생명을 공급하면 우리는 점점 하나님과 가까워집니다. 하나님과 같이 있고 싶어집니다.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이 행복해집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고 하나님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 떠나서는 살 수 없게 됩니다. 은혜는 훈련으로 가고 훈련은 은혜로 갑니다. 예배 참석이 눈에 띄게 늘어납니다. 주일예배만 참석하던 사람이 수요예배도, 금요예배에도 옵니다. 새벽기도의 즐거움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 가까워지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안 드리는 이유 중에 하나가 예배가 재미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은 정말 심각한 말입니다. 예배는 재미를 얻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놀이나 게임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재미만을 추구하면 큰일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러기에 감격도 있고 기쁨도 있으나 거기는 피 흘림이 있고 십자가가 있습니다. 거기는 아픔도 있고 거기는 통회와 결단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엄밀히 말하면 예배는 재미있지 않습니다. 재미가 있으려면 코미디를 보든지 영화를 보는 것이 낫습니다. 영적 성장 판이 멈추어져 있는 사람들은 예배드리는 것은 큰 부담으로 여깁니다.
정신 위생을 연구하는 데이빗 핀크(David Fink)박사는 [안정을 위한 4박자균형]이라는 내용을 발표를 하였습니다. 인간이 정신적 안정과 평화를 갖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요소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일(work), 놀이(play), 사랑(love), 예배(worship)입니다. 그 첫 자를 따서 흔히WPLW라고 합니다.
목사도 아닌 의학자가 4대 균형 요소에 예배를 넣은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내게 주어진 일이 있어야 하며 일만하는 일벌레 일 중독자가 되지 말고 여가를 즐길 줄도 알아야 하며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하며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릴 때 가장 안정적이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밖으로” 자랍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면 안에만 있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생명은 밖으로 자라고 뻗어갑니다. 위에서 내려 나를 적신 비는 반드시 밖으로 흘러갑니다.
16절입니다. 엡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은 밖으로 흘러갑니다. 사람을 향해 흘러가면 사랑이 되고 섬김이 됩니다. 다른 사람이 고통가운데 있는 데 나만 살자고 모른 척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돕고 사랑합니다. 세상을 향해 흘러가면 사명이 되고 선교가 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반드시 나눠집니다. 그 생명이 본래 십자가에서 왔기 때문에 반드시 십자가의 희생과 섬김으로 나타납니다. 믿는 성도들에게는 사랑으로, 우정으로 나타나고, 믿지 않은 세상에 대해서는 전도와 선교로 나타납니다. 환경이 파괴되는 곳에는 자연에 대한 사랑과 환경에 대한 보호로, 독재와 불의가 판치는 세상에서는 정의와 공의로, 물질적 도움이 필요한 곳에는 구제와 나눔으로 나타납니다.
조지 뮐러에게 어떤 사람이 그의 봉사의 비결이 무어냐고 물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죽었던 날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며, 그는 그의 얼굴을 거의 마루에 닿을 정도로 낮게 굽혔습니다. 계속해서 그는, "조지 뮐러라는 내 자신에게 죽고 또 나의 의견과 선택과 취미와 내 뜻에 죽고, 내 형제나 친구들에게 있어서도 그들의 찬성과 비난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이후로는 나는 다만, 내 자신이 하나님의 인정만을 받도록 배워 왔습니다." 이웃을 돕고 봉사하는 것은 곳 내 몸의 한 곳을 돌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돌보는 것은 실인즉 나 자신을 돌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막12: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이웃을 섬기며 사랑함이 곧 나를 사랑함이니 복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같이 그리스도에게 도달하기 위하여 영적성장을 힘쓰고 애쓰는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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