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스크랩] 거짓복음은 없다 (1)

하나님아들 2012. 11. 27. 16:13

전용뷰어

Ⅰ. 서론

1. 연구의 의의와 목적

철저한 바리새인이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바울이 어떻게 그토록 열정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그 원천이 어디서 비롯됐을까? 일반적으로 그의 회심사건으로 보고있는, 다메섹을 향하여 가던 길에서 그가 들었다는 예수의 음성, 그의 눈을 멀게 했다는 그 빛의 경험(행 9:3-5; 26:13-18)은 그를 열심 있는 유대교 추종자로부터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를 전하는 자로서의 전환을 설명해 준다.
그 이후의 그 자신이 천명하는 바,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갈 1:1) 부름 받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서의 그의 삶은 '열정' 그 자체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1회적인 회심사건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이해와, 생명을 내놓는 철저한 헌신이 가능했을까? 주목할 만한 사실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체험은 곧 성령의 체험이며, 성령의 체험은 또한 그리스도의 체험이 된다.
비록 인간의 이성과 감성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그가 전파한 복음이 갈라디아서 1:12에서 밝히고 있는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임을 받아들일 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에 이르며 구원받는 바울의 평생의 외침은 바울에게서 예수에게로 그 기원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너무나 분명했던 이 '복음'은 당시에 많은 난관에 부딪혀야만 했고, 그 이후 교회 내에서 바울 서신의 권위를 인정받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2세기의 교회가 바울의 구원론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으며 이와 똑같은 이해의 부족이 그 이후로 자주 발견되었음은 교회사가 명백히 말해주고 있다. 교회는 바울의 편지들을 보관했으나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했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나오는 바울의 복음은 교회에 계속적으로 도전했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화(義化)가 이루어진다는 독특한 지평을 제시했다.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 교회 내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도는 더 이상 낯설지도, 시비를 운운하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지도 않다. 이것이 수많은 바울 연구와 '이신칭의'의 교리에 대한 연구가 뒷받침된 연유일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지식으로서가 아닌 '이신칭의'의 실제적인 체험이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와 또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의문점으로 남는다. 우리는 언제나 성서로 돌아가서 그것을 새롭게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이 교리 체계와 윤리 법규인가? 혹은 믿음을 통한 구원의 선포와 하나님의 은총인가? 아니면 양쪽 모두인가? 혹자는 양쪽 모두 중요하다고 말하겠지만, 그렇다면 과연 어느 쪽이 우선되어야 할까? 무엇보다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바른 이해가 절실히 필요한 때이며 그에 따른 바른 적용이 요구된다 하겠다.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다른 복음'에의 변증을 바울이 서신을 기록하던 당시의 시대적, 종교적 배경과 함께 숙고해 봄으로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복음"의 의미를 재삼 되새겨 보고자 한다. 또한, 교회가 정직한 자기진단을 통하여 부끄러움 없이 거듭남으로 이 복잡하고 혼란한 세대에 바른 복음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 연구의 범위와 방법

본 논문에서는 갈라디아서의 간략한 개요와 함께 핵심 구절인 1:6-10절에 대한 주석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바울이 서신을 통해서 공격하고 있는 다른 복음에 대한 논증을 종합 분석하는 것으로서 바울이 참 복음임을 말하는 그 '복음'의 실체를 생각해 보고자하며 본 서신을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야 했던 당시 교회상황과 바울이 전했던 복음과는 다른, 비록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필요성은 부인하지 않았지만 그 믿음에 율법의 요구를 더하였던 "어떤 이들"(갈 1;7)의 주장을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유추해내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신칭의' 교리가 보편화되어 있는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도 발견되어지는 율법주의 또는 공적주의를 지향하는 거짓복음에 대하여 경계하고자 한다.
Ⅱ. 본문 분석

갈라디아서는 바울에 의해서 갈라디아 교회의 특수한 상황에 따라 보내어진 편지이다. 갈라디아 교회내의 문제는 바울에게 매우 심각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데, 편지의 인사말(1:1-5)을 마친 직후, 곧바로 문제의 핵심을 매우 격한 표현과 함께 쏟아놓고 있다. 과연 갈라디아교회 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복음이란 '그리스도의 복음 이외의 다른 복음은 없다'는 명제가 대두된다. 갈라디아서의 기록 목적 그 자체가 거짓복음을 배척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굳게 붙들라고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설득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1:11-12은 분명히 바울의 복음의 신적 기원을 주장하는 대목이다. 그 주장인즉 바울의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이란 그가 갈라디아를 처음 방문하였을 때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킨다(cf. 갈 1:6-9, 3:1, 4:13-14). 이를 세분하여 살펴보면,
첫째, 이방인들, 즉 바울 자신의 무할례자들을 위한 복음(갈 2:7)으로써 그것은 의에 이르는 수단으로서의 율법의 저주 및 복종으로부터의 자유를 가져온다(갈 2:16-5:12). 바울은 그것을 다른 두 복음과 분명하게 구별짓기 위하여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복음을 특징짓고 있다(cf. 갈 3:1-14).
둘째,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특히 베드로 및 '기둥역할을 한 사도들'에 의해 대표되는 유대인들, 즉 할례자들을 위한 복음이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이러한 유대적인 해석을 유대인들에게 특유한 기독교 케리그마의 합법적인 형태로 인식하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바울의 복음과 내용상으로 완전히 상이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것이 자신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철저한 율법에의 복종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두 복음을 각각 지지하는 자들이 상대방의 타당성을 인정하는 한에서, 그리고 자기들의 복음과 다른 복음을 지지하는 자들에게 자신들의 복음을 강요하려고 하지 않는 한에서 바울은 이를 받아 들였다.
하지만 분명하게 팔레스타인 교회 내에는 율법으로부터 자유 하는 이방인 선교를 반대했던 율법적 우익파들이 있었다. 그들이 전한 메시지가 바로 바울에게 갈 1:6-9에서 맹렬한 어조로 공격받았던 '다른 복음'이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를 강요하려는 소위 '유대주의자들'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문제를 우리에게 확실히 남겨 주었다. 그것은 전혀 '복음'이 아니며, 노예가 되는 길이다. 그것을 선포하는 자들은 '거짓 그리스도인들'로서 그들은 완전한 진리를 얻는데 실패했다.(cf. 갈 2:4; 5:12).

1. 다른 복음을 좇는 갈라디아 사람들(갈 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 〕 ).

'타우마쪼 호티'( ); '이상히 여긴다'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비교하였을 때, 서로 맞지가 않아서 궁금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야말로 놀라는, 수사학적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온 말이다. 바울의 당혹스런 심경을 표현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다만 놀라서 할말이 없을 정도로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이 심각하게 바울을 근심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혜 또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누리는 은혜의 상태를 뜻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는 바울의 의도는, 갈라디아인들에게 구원을 받는 수단으로 은혜의 길과 율법의 길 중에서 어느 것을 택할 것을 가르치는데 있지 않고 그들이 은혜상태의 삶을 버리고 거짓복음으로 전락한 것을 질책하고자 함이다.
'너희를', 이는 갈라디아 이방계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부르신 이',는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같이 속히',이는 갈라디아인들이 다른 복음으로 전락한 사실에 놀라움을 표시하는 것 이상의 다른 의미를 굳이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떠나' 부르신 이로부터 분리·이탈을 뜻하는 전치사 '아포'( , from)에 해당한다. 바울이 편지를 기록하고 있을 때의 갈라디아교회는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부터 다른 복음으로 전락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누리는 상태에서 떠났음을 뜻한다.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셨다는 것은 갈라디아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접했었고, 이 복음을 진리로 받아들였음을 뜻한다. 이제 이들은 다른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변절했다. 바울은 자기가 전한 복음에 반기를 든 그의 적대자들의 선동 내용을 '다른 복음'이라 지칭했다. 여기서 '다른'이란 의미를 파악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의미가 어떻게 규명되느냐에 따라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서신의 목적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다른'이라는 형용사는 어떤 특정한 사물, 사실, 인물 이외의 제2 또는 제3의 다른 사물이나 인물을 단순히 개수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며, 또는 사물, 사실, 인물과 성질, 특성이 다른 제2 또는 제3의 다른 사물이나 인물을 지칭하기도 한다.
'헤테론 유앙겔리온'( ;다른 복음)에서 '헤테로스'( ; 다른)이라는 말은 희랍어에서 두 선택의 가능성 중 다른 하나를 가리키나 헬라화 된 희랍어에서는 그런 분명한 구별이 희미해진다.
본문에서 사용한 '다른'이라는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간에 주석상 논란이 되어 왔으나 분명한 것은 바울이 이 말을 부정적으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7절에서 다른 복음은 없음을 말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는 무리들을 말하는 점으로 볼 때, 자신이 전파한 복음과 유사한 종류의 '다른' 복음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고 자신이 전한 복음만이 유일한 복음이며 그 외의 복음이란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복음'에로 전락했다는 것은 '복음'에 대한 다른 정의를 수용했다거나 다른 종류의 구원의 상태에로 자리를 옮겼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비록 명칭상으로는 '다른 복음'이라 일컬어졌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복음'과 정반대 되는 상태, 즉 실질적으로 완전히 비복음적인 상태로 굴러 떨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일부 주석가들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실제로 본질상 다르지 않은 또 하나의 복음을 향해 돌이킨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를 말하나 바울이 결단코 '다른 복음'을 정당한 의미에서 '또 하나의 복음'으로 사용하지 않았음은 명백하다. 이 문제는 계속해서 심도 있게 다루어 질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그의 사역 중 최우선의 이슈였다. 7절에서의 '다른 복음' 자체의 부정은 그의 입장의 단호함을 명확히 할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도권의 신적 기원을 편지의 첫머리에서 전제한 점과 1:12에서 자신이 전한 복음의 기원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인함을 천명함으로써 자신이 전한 복음만이 유일한 참 복음임을 뒷받침하고자 하였다.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을 나무라는 것은 이상과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종교적 변절자이며 영적 이탈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헤로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다른 복음을 붙잡고 있었다. 참된 복음은 본질상 바울이 사도행전 20: 24에서 말 한대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다. 그것은 쓸모 없는 죄인들에게 주어진 바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기쁜 소식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아들을 우리를 위하여 죽도록 내어 놓으셨다. 은혜로 그는 우리를 자신에게로 부르신다. 은혜로 그는 우리가 믿을 때에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 바울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나왔다"(고후 5:18)함은 모든 것이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에 있어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 은혜의 복음을 받았던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제 행위의 복음이라는 다른 복음으로 돌아서 버렸다. 그들, 선동자들은 분명히 유대주의자들로서 그들의 메시지는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행 15:1)는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위하여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또한 더하여서, 구원을 얻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하며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시작한 것을 모세로 하여금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그리스도가 시작한 것을 사람 자신이 완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사역에 사람의 업적을 덧붙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성취하지 못한 나머지 부분을 사람 스스로 완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역은 완성된 사역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값없이 저어진 은혜의 복음이다. 구원은 오직 은혜에 의한 믿음을 통하여 주어지며 인간의 어떠한 행위나 공로의 업적 없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변절이 그들의 신앙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할속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경험되어진 은혜까지도 져버렸음을 지적하고 있다(갈 3:1-5). 그들은 다른 복음을 쫒아 은혜의 복음을 버린 것뿐만 아니라 은혜로 부르신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은혜의 복음에서 돌아서는 것은 은혜의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빨리 그리고 경솔하게 돌아서기 시작한 갈라디아 사람들을 책망하였다.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복음을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그렇게 된 자라면 이후 바울이 갈라디아서 5:4에서 말 한대로 그들은 은혜에서 떨어진 자이다.
이상과 같은 분석을 통하여 본문 6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볼 수 있다;
"즉,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접했습니다. 이 복음을 진리로 받아들여 그 은혜 안에서 살도록 여러분을 부르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저버리고 전혀 진리가 아닌 비복음적인 메시지를 좇는 것을 보고 나는 너무나 놀라고 경악하였습니다."

2. 복음을 변질시키는 이들(갈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
6절에 이어 바울은 '다른 복음'이란 있을 수 없음을 재차 주지시키면서 선동자들(어떤 사람들)이 갈라디아 사람들의 믿음을 혼란스럽게 해서 복음을 변질시키고 있다고 비난한다.
'호 우크 에스틴 알로'( ; 다른 복음은 없나니)라는 말은 역이 까다로운 부분이다. '알로'( )라는 낱말을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알로스'( )의 용법에 따라 무엇의 실존여부를 판단하는데 사용되는 낱말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다른 복음이라는 것은 (따로)없다."로 번역될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독일어권 번역과 영어권 번역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다른 복음', 즉 '요란케 하는 어떤 이들'의 복음은 근본적으로 복음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6절의 "에이스 헤테론 유앙겔리온"( ; 다른 복음으로)에서 '다른'이라는 말과 7절에서의 "호 우크 에스틴 알로"( ;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는 '다른'이 각각 다르게 표현되어 있음을 주목할 수 있는 데, 6절의 '다른 복음'은 본래의 복음과는 전혀 다른 복음에로의 전락을 의미하며 7절의 '다른 복음'은 본래의 복음과 같은 종류로서, '또 다른 복음은 없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티네스'( ; some, 몇몇 또는 소수)를 '어떤'이란 말로 번역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보여지며 갈라디아 교회를 선동하고 있는 몇몇 소수의 사람들을 지칭한다. 바울은 이들 소수의 몇몇 사람들의 주장을 "적은 누룩"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소수의 사람들은 누구를 말함인가? 서신상으로는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분명히 밝힐만한 것이 없다. 다만 율법행위가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유태계 그리스도인 것만은 분명하다.
'호이 타랏손테스 휘마스'( ; 너희를 교란시키는 자들); '타랏손테스'라는 이 어원의 여러 형태는 항상 그리스도의 대표적인 선물인 '에이레네'( , 평화)가 아니라 보다 깊은 의미에서의 구원이다.
에이레네는 인간간의 일치 또는 조화를 나타내며, 하나님과의 화평도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그 용법상 세 가지 중요한 개념을 지니고 있다. 1) 안식의 느낌으로서의 평화 2) 하나님과의 화해의 상태로서의 평화 3) 그리고 종말론적 구원으로서의 평화이다. 이 중에서 마지막 의미가 기본적인 것이다. 고전 14:33에서 바울에게 있어 에이레네는 고린도 교회에서 생각을 예언함으로 야기된 어지러움(혼란스런 상태)과 반대되는 정상적인 상태이다. 즉 마음의 평화에 대한 반대말을 묘사한다. '요란케 하다'는 곧 '혼란시키다, 어지럽히다'를 뜻한다.
'메타스트렢사이'( , 변하려, 변절시키다); 바울은 이제 자신이 왜 갈라디아 교인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다른 복음'에 대하여 경계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메타스트렢사이'는 '변하려하다 또는 왜곡시키다'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복음'( )은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하여 바울이 옹호하려는 핵심 내용이다. 그렇지만 바울은 단 한번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개념적으로 정의를 내리지 않았다. 바울은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고 전제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인한 성령체험을 갖고 있는 것이다(갈 3:2).
갈라디아 교회는 거짓 선생들로 인해 한편으로는 혼돈을 다른 한편으로는 파벌간 분쟁을 수반하는 혼란의 와중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러한 혼란은 거짓 교리에 기인된 것이다. 유대주의자들은 복음을 변절시키거나 왜곡시키려 하였다. 이 경우에 있어서 복음을 부패시킬 뿐만 아니라 아예 전후상하를 뒤바꿔 놓음으로써 복음을 전복시켜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거짓 교사들의 두 가지 특징은 교회를 요란하게 한 것과 복음을 변질시킨 것이다. 이 두 가지는 함께 따라다닌다. 복음을 함부로 고치는 것은 언제나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것이다. 아무도 교회를 혼란하지 않도록 내버려 둔 채 복음을 왜곡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는 복음에 의하여 창설되었으며 존속하기 때문이다. 실로 교회의 방해자는 과거나 지금이나 외부사람들이 아니고 복음을 변화시키려는 내부의 소행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요란하게 하는 자는 바로 그들이다.
이상의 7절의 분석을 통하여 본문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볼 수 있다;
"내가 전한 참 진리인 복음과 같은 종류로서의 또 다른 복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소수의 몇몇 전도자들이 여러분들을 혼란케 하는 말로 참 복음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려고 할 뿐입니다."

3. 사도 바울의 반박(갈 1:8-10)

(1) 갈 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 - , ).

바울은 절대로 복음을 왜곡시키는 일이 용납될 수 없음을 선포하고 있다. '복음'은 절대불변의 진리인 것이다. 그가 편지 서두에 그의 사도 됨의 신적 기원을 밝히고, 그의 전한 복음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음을 분명히 밝히는 까닭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절대 불변의 진리임에 대하여 제2, 제3의 거론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하고자함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범죄인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것은 은혜로 복음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며 반역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바울 자신이나 그의 동역자들이거나 심지어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복음을 변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바울은 편협하고 교만하고 지독한 고집쟁이 인가? 그가 전한 '복음'은 그의 편협한 고집으로 말미암아 전혀 융통성을 기대할 수 없으며 다른 이론들에 대하여 전적으로 배타적일 수 밖에 없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다만 복음을 변질시킴으로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한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도록 이끌고 있는 선동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단호하게 대처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해되어진 복음에 투철했을 뿐이다.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바울과 그 일행이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 준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 '복음'이라는 명사가 두 번 나오지만, 원문에는 명사가 사용되지 않고 '기쁜 소식을 전하다'라는 동사가 두 번 다 사용되었다. 이 낱말은 그리스도교의 복음전도 활동을 표현하는 전문용어이다.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은 그대로 직역하면, '우리가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으로 전한 것'이 된다.
'저주를 받을지어다' 여기서 저주를 뜻하는 헬라어 '아나데마'( )는 히브리어 '헤렘'( )에서 유래한다. 그것은 재앙을 받아 멸망 받도록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람이나 물건을 가리킨다(cf. 민 21:3; 수 7:1, 11; 삿 1:17).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먼저 바울 자신의 '자기저주'를 포함한다는 점이다.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의 '우리'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 그리고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모두 '저주'의 대상으로서 예외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강한 신념을 나타내는 것이다.
베츠(Hans Dieter Betz)는 그의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조건부 '자기저주'는 다른 사람들을 저주하는 노골적인 행동을 피하며, 이와 같이 초기 그리스도교의 저주 금지를 고려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바울은 본인을 비롯해서 혹 천사까지라도 '저주'를 사양하지 아니할 기세다. 이것은 '복음 왜곡'의 절대불가를 강조하기 위한 가장된 제스추어가 결코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갈 1:12)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는 자는 누구든지 자신과 자신의 동역자들도 결코 예외가 아닌 저주를 받을 것임을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정당하게 객관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의 왜곡'은 넓은 아량과 따뜻한 사랑으로 원만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타협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닌 것이다. 바울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을 뛰어넘는 영역의 문제였던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의지 여하에 상관없이 '저주선포'의 대상에서 자신도 예외일 수는 없다.
이제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은 분명해졌다. 거짓 선생들이 복음을 변질시킴으로써 바울이 개종시킨 자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떠나고 있었다. 그것은 바울이 갈라디아 3:1에서 말한바와 같이 거짓 선동자들이 그들을 미혹하여 꾀이므로 진리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8절과 9절에서 바울은 두 번이나 '저주받는다'고 번역된 헬라어 '아나데마'( )는 신적 금지령으로서, 이것은 그들이 '아나데마' 아래 놓여져서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할 것을 소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저주에 관하여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이 저주는 사도 바울의 개인적 감정의 소산이 아니라는 것을 다음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첫째, 그리스도의 영광이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인간의 업적을 구원에 대한 필수요건으로 만드는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보충으로서 일지라도 그가 완수하신 사역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어떤 면에서 만족스러운 것이 못되며 인간이 첨가해야 하고 그것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십자가의 영광을 헛되이 만드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무효화 시키는 것이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다음으로 인간 영혼의 잘됨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거짓 선생들은 잘못된 거짓 복음을 그냥 붙잡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거짓 복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9:3에서 만약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저주( )를 받아도 좋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복음을 부패시키는 것은 구원의 길을 파괴하는 것이며, 구원받아야 할 영혼을 파멸로 보내는 길이기 때문에 바울은 거짓 선생들이 저주받아야 마땅하다고 단호히 말한 것이다. 예수께서 단호히 말씀하시기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한 사람에 대해서는 "차라리 연자 멧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니라"(막 9:42)고 가르치신 말씀과 바울의 단호한 저주선포는 같은 의미를 가지고있는 것이다.
이제 8절을 분석한 결과를 제시하겠다;
"그러나 나 자신을 비롯하여 나와 함께 복음을 전하는 나의 동역자들이나 혹여 하늘로부터 온 천사일지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2) 갈 1: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 , ).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 우리가 미리 말하였던 것처럼. 여기서 부사절의 주어는 '우리', 주절의 주어는 '나' 그리고 부사절의 시제는 완료형이다. 주절의 시제는 현재성이 사용되고 있는데 '우리가 전에도 말했다'는 것은 바울과 그 동역자가 갈라디아인들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던 그 당시에 이미 말했던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고, '앞에서' 또는 '앞서' 말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필자는 전자의 견해를 취하고자 한다. 이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전에 복음을 받았던 것(Cf. 갈 1:6, 2:5,18, 3:1-5, 4:11,13,14)으로 미루어 보아 유대주의자들의 왜곡된 가르침에 대한 경고가 이미 주어졌을 것임을 알 수 있으며 경계의 메시지가 있었을 것이다.
'전에 말한' 주체는 '우리'라는 말로, 그리고 '지금 다시 말하는'의 주체는 '내가'로 쓰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바로 앞의 8절의 말을 받고 있다고 보기가 어려우며 자신과 자신의 동역자들이 전에 이미 말하였음을 상기시켜주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카이 하르티'( ); 이 순간에, (시간적으로) 바로 앞뒤에, 곧, 즉시 등의 뜻이다.
이상의 본문을 다시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전에 여러분을 방문했을 때, 이와 같이 중대한 위험에 대해서 미리 경고했습니다. 이제 내가 다시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들은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가 있다면 그가 누구일지라도 저주를 받을지어다."

(3)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 ; - ; , ).

바울은 '복음'을 수호하기 위하여 벌이고 있는 자신의 투쟁이 사람의 판단에 좌우될 수 없음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복음전파의 원칙과 각오를 갈라디아 교회들과 선동자들에게 엄숙하게 통고하면서 자신은 어디까지나 오직 하나님께 인정받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의 종임을 말하고 있다.
"이제 내가 사람들을 좋게 하랴 하나님을 좋게 하랴".
'페이도'( ); 설득하다, 자극하다, 진정시키다, 호의를 열망하다. '사람을 설득시키다'라는 말은 하나님께 호감, 기쁨을 사다 등을 뜻한다.
본문은 물음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답을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결코 사람의 호감이나 환심에 좌우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준엄하신 판단아래에서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길로 가겠다는 강조의 문장형식이다.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지금까지'( ); 원어로는 '만일 아직도'이다. '아직도'라는 부사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바울이 한때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쓴 적이 있었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유대교의 전도자로 활약하던 시절을 가리킬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대교의 전도자로서 열심 내던 일들이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일이었는지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의 호감과 지지를 원했는가? 물론 그 이유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지만, 아마도 그는 자기자신의 기쁨과 만족으로 인하여 열심을 내었음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는가? 사람의 기쁨이라는 말에서 다른 제3자를 비롯하여 바울 본인 자신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제 그는 사람의 판단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에만 충성하는 하나님께 인정받기를 원하고 또한 오직 하나님만으로 자신의 만족과 기쁨을 삼는 그리스도의 종인 것이다.
1:10을 재구성해 본다;
"지금 나는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로 비위를 맞추고 적당히 타협할 수 없습니다. 내게는 하나님의 판단만이 중요합니다. 예수를 알지 못했던 때에는 사람들의 판단에 귀기울였고 나 자신의 자기만족을 위해서 살았던 적도 있습니다만, 이제는 아닙니다. 만일 이제까지 그와 같은 옛 사람을 벗지 못하였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일 수 없습니다."

4. 요약

이상의 본문에서 나타난 교훈은 오직 하나의 복음만이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오직 하나의 복음만이 있으며 이 복음은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이 주신 제2의 복음은 없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복음 이외의 다른 복음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거짓 선동자들이 남발하고 있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며 양자택일의 성질을 지닌 것도 아니다. 복음은 오직 하나님께서, 인간의 아무런 공로 없이 주신 은총, 즉 은혜의 복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이로부터 돌아서는 것은 참된 복음으로부터 돌아서는 것과 같다.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행동으로서 자신을 구원의 도상에 올려놓으려고 하는 것은 은혜의 복음을 변질시키는 일이다. 이것이 다른 복음과 은혜의 복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 다른 복음과의 판단 기준은 복음의 기원에 관한 것이다. 바울의 저주는 바울이 갈라디아교회들에게 전한 복음 외에 또는 그들이 받은 것 외의 다른 복음을 말한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신약성서의 복음을 말한다. 이는 모든 체계와 의견들이 판단되어야 할 규범과 판단 기준은 본래의 복음 즉, 사도들이 전했고 이제 신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그 복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왜곡시키는 자는 그가 누구일지라도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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