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본문의 종합분석
본문분석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바울과 그 동역자들은 갈라디아 지방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주었고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여 '은혜' 아래 있었다.
둘째, 그 후에 그들은 바울 일행이 전한 복음과는 다른 복음을 듣고 그것을 좇아 참 복음을 저버렸다.
셋째, '다른 복음'이란 있을 수 없으며 '복음'을 변개 하는 자는 저주 있으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수호하기 위해서 편지를 쓰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복음'의 실체가 무엇이며 그는 또 무슨 이유로 '다른 복음'을 배척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아야 바울의 투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실체를 밝혀보기 전에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성경의 그의 글들은 신학적 논문들이 아니며 로마서를 제외한 그의 서신들 모두가 자신이 선교하는 교회들의 그때 그때의 정황에 따라 보내어진 편지들이란 점이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신학적 체계를 세우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실질적인 내용이 그들의 삶 가운데서 실현되기 위해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와 투쟁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선동자들은 그들이 처음에 믿었던 진리를 왜곡시켰으며 결과적으로 그들은 그리스도를 저버리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다.
갈라디아서는 본질적으로 변증적인 서신으로서, 여기서 바울은 줄곧 갈라디아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그릇된 가르침에 대해 논쟁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갈라디아서 5:7-10은 거짓된 가르침의 기원과 발전, 그리고 그 결말의 전 과정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거짓선생들의 기원은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갈 5:7)라고 하여 갈라디아 교회를 요란케 하였던 자를 지목하고 있다. 이어서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 난 것이 아니라"(갈 5:8)고 하였다. 선동자들은 갈라디아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의 진리를 버리라고 설득했는데 그 설득 작업은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은혜 가운데서 부르셨는데 반해 거짓선생들은 자기가 쌓은 공로의 교리를 퍼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첫 번째 논증은 선동자들의 가르침이 갈라디아 사람들에의 부르심과 어긋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단사설이 갈라디아 사람들을 실족케 한 사실을 살펴보았던 바(7절), 바울은 그 사설이 그들을 "요란케"(10절)하고 또 "어지럽게"(12절) 하였다고 말하면서 그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9절)는 평범한 격언을 인용하고 있다. 이 말은 선동자들인, 거짓선생들의 오류가 전 교회에 오염될 때까지 계속 확산되고 있다는 뜻이다.
바울은 동일한 격언을 고린도전서 5:6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그곳에서는 이 격언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서의 죄에 대하여, 갈라디아서에는 거짓된 가르침에 대하여 적용되고 있다. 사악과 오류에 공통되는 심각한 문제는 이 둘이 모두 퍼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짓된 가르침의 기원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그 영향이 누룩처럼 확산되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선동자들의 메시지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전적으로 다른 것임을 변증함으로 갈라디아 교회들을 이단으로부터 지키고자 힘쓰고 있는 것이다.
선동자들의 오류에 대하여 바울은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란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갈 5:10)는 말로 그들의 결말이 심판에 이를 것을 확신하였다. 바울은 이 오류가 끝내는 승리하지 못할 것이며 갈라디아 사람들은 오히려 그 심령이 더욱 강건하여 질 것이고 또 거짓 선동자들이 제 아무리 자신의 지위를 높일지라도 마침내는 하나님의 심판아래 떨어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이상의 전제를 가지고 바울이 갈라디아서 1:7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그의 상대개념으로 볼 수 있는 "다른 복음"에 관하여 살펴봄으로써 문제의 해결에 보다 더 접근하고자 한다.
1.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문크(J. Munck)는 유대화 하려는 대적자들을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이방 그리스도인들이었다고 주장한다. 문크가 보기에 그들은 바울의 전도로 개종한 사람들이었다. 바울이 갈라디아를 떠난 후, 그들은 독자적으로 구약성경을 읽기 시작하였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할례를 받고 율법 전체를 지키라고 명하신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튀빙겐 학파의 바우어는 갈라디아의 대적자들이 예루살렘 사도들의 합법적인 대변인들이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초대교회는 유대기독교와 이방 기독교의 갈등으로 특징을 이루었다.
라이트풋은 바우어의 이러한 이론에 반대한다. 그가 갈라디아서의 주석에서 이 서신은 '성 바울과 열두 제자 사이에 존재하는 진정한 관계를 보여준다'고 주장한 것은 정당하다. 예루살렘 사도들은 바울의 복음과 그의 사도직의 권위의 정당성을 전반적으로 인정하였다(cf. 행 15장).
쇠프스도 바우어에 반대하여 그의 견해로는 초대교회 안에는 세 개의 집단이 있었다고 보았다. 즉 바울의 집단, 야고보와 베드로의 집단, 그리고 바리새적 집단이다. 예루살렘교회의 중진들은 예루살렘회의에서 온건한 입장을 취하여 이방인의 율법 준수의무에 관하여 양보하였고, 이방인에 대한 바울의 선교를 진정으로 인정하였다. 깊은 갈등은 바울과 유대주의자들 사이에 존재하였고 이들 보수적인 유대주의자들은 '할례를 필수 요건'으로 간주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모세율법이 완전한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바울이 선교하여 세운 교회들 안에서 소란을 일으킨 선동자들로 보고 있다.
다수의 다른 학자들은 그들이 예루살렘교회의 우익진영이었을 것으로 보며, 유대인의 특권과 모세의 율법을 고수하려는 예루살렘교회 출신의 유대인 순회 전도단들이 저항세력으로 등장하였다고 보고 있다. 몇몇 학자들의 가설은 반대주의자들의 영지주의적인 특성을 말하고 있으나, 갈라디아에서 주로 할례와 율법의 행위가 논쟁점이 된 것으로 미루어 바울의 본질적인 투쟁의 내용에 있어서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이상에서 살펴 본대로 갈라디아 교회를 혼란케 하는 선동자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가 하는 문제는 몇 가지 상이한 견해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할례 받은 자들이며(갈 6:13),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첨부시키는 무리들이면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전파했다는 것과 바울과 같은 의미는 아니지만,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것이다.
2. 다른 복음의 실체
바울은 로마서 1:16에서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이에 앞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갈 3:28)임을 이미 밝히고 있다. 이 복음에 반기를 들고 저항하는 다른 복음의 내용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당시 초대교회의 역사적 정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1) 초대교회의 역사적 상황
초대교회의 정황을 살펴봄에 있어 초대교회의 유대교적 배경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유대인 종교의 근본적인 한 가지 특징은 그 배타성이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선택하신 선민이었다. 하나님과 그 선민과의 사이의 계약이라는 개념은, 모든 시대를 통해서 유대인 교회에서 아주 중심적인 개념이었다.
유대민족 최대의 자랑이었던 선민의식과 함께 그들에게는 철저한 율법준수의 엄격한 요청이 부과되었는데 이러한 민족종교의 영향은 유대인 사회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조차 유대교와 기독교와의 명백한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 채 선교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도록 어려서부터 교육받고 자란 유대인들이었으며, 유대교가 예배하는 같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또한 그들의 경전인 구약성경을 그들 또한 그들의 경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확실히 구약성경은 이방인이 그 계약 관계에 참여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명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할례를 받음으로, 또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을 서약함으로서, 그 국적을 떠나서 이스라엘 민족의 일원이 되기만 하면 용납이 되었다. 그러나 민족종교의 영향은 그 뿌리가 너무나 깊이 이스라엘의 종교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이방인 개종자들은 기껏해야 참 하나님의 집의 외곽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 받는데 그쳤다.
그런고로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가 구원에 대하여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충분한 것이 되지 못했다. 기독교는 유대교가 제공한 것보다 훨씬 많이, 훨씬 받아들이기 쉬운 조건으로 제공했다. 기원 35년경에는 유대교내의 한 종파로 보였을 기독교는 그러나 30년 뒤에는 벌써 분명하게 하나의 세계적 종교가 되어 버렸다.
이상은 초대교회 당시를 잠시 살펴본 것이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하나의 독립된 종교로 출발하기보다 오히려 유대교의 유산을 이어받아 예수운동으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한편으로 기독교 신자들은 처음부터 유대인들이 거짓 메시아로 알고 십자가에 처형했던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과 차이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출발부터 자연히 유대인 크리스천들과 유대교인들과의 관계, 유대인 크리스천과 이방인 크리스천들과의 관계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2) 다른 복음
갈라디아서 1:6-10절을 비롯해서 6장 전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율법준수와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예루살렘회의(갈 2:1-10)와 안디옥 사건(갈 2:11-14)의 언급을 통해서 갈라디아 교회들에서 발생한 할례 선동에 대한 바울의 부정적 입장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그는 적대자들의 할례선동에 동요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은 결코 율법준수나 할례의 문제로 변질될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임을 확인시키고자 편지를 썼던 것이다. 선동자들의 정체를 살펴본 바에 따라 그들의 이론의 근거는 구약성경임에 틀림없다. 구약성경을 바탕으로 그들의 이론을 유추해 본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언약을 맺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 언약의 조건으로 할례가 주어졌고(창 17:19), 그들 후손 대대로 선민임을 자랑스러워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애굽에서 종이 되었고 하나님은 그들과의 언약을 기억하였다. 출애굽에 성공한 그들은 시내산에서 다시 언약을 맺었으며, 모세의 손을 빌어 천사들을 통해 제정한 율법 안에 언약의무들을 계시하였다(출 20장).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레 18:5).
그러므로 율법의 준수는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방인인 너희들도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준수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자 약속의 상속자가 될 수 있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며 그 안에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창 12:3, 18:18, 22:18)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들의 할례와 율법준수는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는 조건이며, 자손이 된 자의 의무이며, 약속의 상속자가 될 수 있는 한 방편으로 제시되었다.
선동자들의 주장은 구약성경과 유대교 문헌에 튼튼한 기초를 두고 있다. 이것은 그것들의 명백하고 직접적인 의미를 '이성적'으로 수용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에 선동자들의 논쟁의 힘이 있었다. 선동자들은 이러한 강력한 주장을 가지고 많은 갈라디아인들을 설득하여 그들이 "율법과 할례"를 수용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도록 하는데 성공하였다.
한가지 유념해야 할 부분은 바울은 적대자들의 메시지를 '다른 복음'이라 말하면서 자신들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강하게 주지시키고자 함에는(1:6-9), 토라에 대한 복종과 할례를 받으라는 요구 이외에는 그들의 '다른 복음'은 바울의 그것과 동일했음은 분명하다는 점이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유대주의자들이거나 혹은 제3의 부류든지 간에 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었던 것은 틀림이 없다.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의 가르침을 전했을 것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재림을 전했을 것이다. 그들은 회개를 촉구했을 것이며 천국이 가까웠음을 전했을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라 전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더하여서 율법을 준수해야 하며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3. 다른 복음에 대한 바울의 투쟁
바울은 선동자들의 메시지에 대하여 '다른 복음'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자신이 전한 복음만이 유일한 참 '그리스도의 복음'임을 선포한다. 갈라디아서 1:6-10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다른 복음은 내용을 비교하는 비교의 대상이 아니며 바울은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의 복음에 대해 제기한 최초의 근본적인 의문들에 대해 증언하는 역사적인 문서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국외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자신을 위한 체계적인 최초의 그리스도교 변증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안에서 선동자들에 의해 제기된 이론들과 맞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수호하기 위해 변증한다. 흥미로운 점은 바울 역시 갈라디아인들을 설득하는 근거를 구약성서에서 찾고 있는 점과 자신의 사도권의 신적 기원과 자신이 전한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1) 복음의 기원에 대한 변증
바울은 먼저 그가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의 기원을 밝히는 데서부터 변증을 시작한다. 갈라디아서 1:1에서 사도권의 정당성을 전제하는 것은 그의 적대자들에 의해 그의 사도권이 공격당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서신의 첫머리에서부터 자신의 사도직의 신적 기원을 밝혀야 했던 점도 원사도들과는 다른 점으로(그는 예수의 직계제자가 아니다) 하여 그의 선교가 저항에 부딪치곤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권위와 직결되는 중요한 이슈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사도권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음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참 진리임을 뒷받침하고자 했다.
또한 갈 1:12에서 이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주어졌다고 전제하고 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바울의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복한 것은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바울 자신에게 나타나신 사건을 통해서 된 것이므로 자신이 전한 복음은 진리라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1장 13-14절에서 볼 때, 바울은 유대교적 신앙의 수련이나 지식 습득에 있어서 그의 동년배들 보다 앞서 있었으며, 조상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을 지키는 데도 열성적인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교회', 즉 그리스도인들에 대항하여 열렬한 싸움을 벌인 사람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의 박해는 유대교적 율법에 대한 그의 열성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다메섹 사건을 통한 바울의 변화는 사회적 입장의 전환이 될 것이다. 갈등 관계에 있는 바리새주의적 기득권층의 입장에 서서 박해하던 그가 자신이 핍박하던 그리스도교의 공동체 입장에 서 있는 것은 자신의 사회적인 위치를 완전히 바꾼 것이다. 그러한 위치의 전환은 종교적, 윤리적, 정신적인 것만이 아니라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었다. 바로 이 바울을 완전히 뒤바꾼 힘의 원천으로부터 복음이 주어졌고, 또한 그 복음이 바울의 삶을 주도해 간 것이다.
15절의 '그 아들을 이방 사람에게 전하게 하려고'라는 표현은 다메섹에세 일어난 사건 자체를 묘사하는 말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이 다메섹 사건을 일으키신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을 덧붙인 것이다. 즉 자신으로 하여금 이방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실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자신이 받은 복음이 일절 사람으로부터 더해진 것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 바울이 16절 이하에서 다메섹에서 신적인 기적 사건을 경험한 후에 자신의 행선지를 밝히는 것과 유대 지방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 자신을 개인적으로 알 기회가 없었다는 것과(22절) 예루살렘에서 게바와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를 만나지 않았다는(18-19) 말은, 모두 바울 자신이 원사도들의 영향권에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이는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람들에게 전해 듣고 그 영향을 받아 재구성된 것이 아니며 사람들의 이론이나 사유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그 기원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증거하고자 함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논리적인 변증을 전개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니다. 그러나 사도의 서신들에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주어졌음을 암시하는 부분들을 찾아 볼 수가 있다.
바울의 이러한 주장은 사람의 상식적인 이해의 범주에서는 사실상의 논쟁이 어려운 부분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통하여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역과 바울의 복음이 기독교 역사에 미친 엄청난 영향력을 감안할 때 그의 변증이 결코 가볍게 취급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람에 의해서 되어 졌거나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께 그 기원을 두는 것은 바울 복음의 절대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과 이해를 초월하는 그의 복음의 우월성인 것이다.
바울에 있어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자체이면서도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진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자신이 증거 한 복음은 진리라고 변증하고 있다.
(2) 할례에 대한 논증
갈라디아서 6:12에서 바울은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를 할례받게 함은"이라고 서술하고 있음을 보아 할례가 강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은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며 할례 받는 자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갈 5:2-3)라고 하였다. 할례는 유대 남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외형적인 표징이었다. 만약에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는 반드시 할례를 받아 유대인으로 귀화해야 했다. 그러므로 할례는 민족적 , 종교적 특성을 지니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의 바울의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 목적은, 그의 선교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의 원사도들에게 그가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2장 3절에서 헬라인 디도의 할례 문제가 언급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예루살렘 회의에서 할례 문제가 쟁점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 디도가 할례를 강요받지 않았다는 것은 예루살렘 회의에서 바울의 주장이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예루살렘 회의에서 얻은 바울의 승리는,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재 확인시켜 주었다. 바울의 복음은 원사도들의 인정받음과 무관하게 진리였지만 예루살렘 교회의 바울 복음에 대한 인정은 바울의 선교 활동에 권위를 더해주는 결과를 가져왔음에 틀림없다.
그는 할례의 문제를 놓고 논쟁하기보다는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예루살렘 회의(갈 2:1-10)와 안디옥 사건(갈 2:11-14)을 언급함으로서 할례의 문제는 이미 검증이 끝났음을 상기시켜 주고자 하고 있다.
바울은 실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러분들이 권위를 인정하는 원사도들은 여러분들이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선포했습니다. 유대인과 같이 여러분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 하였고 믿음으로 여러분 마음을 깨끗게 하셨으니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일지라도 할례 받은 유대인과 차별이 없다고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미 결정된 사항임을 여러분은 잊었단 말입니까? 또한 예수님의 수제자로 여러분이 존경하는 베드로조차도 율법의 행위를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하고 식탁교제에서 외식함으로써 복음을 가리움으로 내가 단호히 책망했음을 듣지 못했습니까? 하물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저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헐어버린 율법의 행위로 돌아가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지며 종의 멍에를 다시 메고자 하는 여러분을 내가 어찌 책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갈라디아 교회들에서 할례를 강요하고 있는 그의 대적자들에 대항하여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사항이라는 합법적인 권위와 원사도들의 전통적 권위를 가지고 자신의 복음을 변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바울이 할례에 대해서 이토록 강경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갈 6:15에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갈 5:6에서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서 역사 하는 믿음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할례를 전했다면 핍박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갈 5:11).
그에게는 할례 그 자체가 문제가 되었던 것이 아니다. 바울의 쟁점은 '할례 받음'에 있지 않고 할례 받는 각 사람이 '할례의 행위'로 아브라함의 자손에 포함되며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한다는데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의를 얻은 것은 다만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며, 아브라함과 함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받는다고 말한다(갈 3:6-9). 바울은 할례 행함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함이었다고 밝히고 있다(갈 2:5).
결국 바울의 논지는 할례를 받음으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화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이 내면적이고 영적인 종교라고 확신할 수 있는 데, 유대교의 외면적 할례의식과 구별이 되는 중요한 구절이 바로 "육체의 모양을 내려고"(갈 6:12) 겉만 번듯하게 꾸미려는자들을 꾸짖는 내용이다.
할례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징표로써 주셨다. 그러나 할례 그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유대주의자들은 할례 그 자체를 중요한 위치에 올려놓고 할례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육체의 외면적 겉치례가 어떻게 영혼의 구원을 확보해 줄 수 있는 구원에의 필수적인 요건이 되겠는가? 만일 우리가 각자의 선행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울은 말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기독교가 내면적이고 영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라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서는 복음의 진수를 이해하지 못한다.
(3) 율법행위에 대한 논증
율법행위에 대한 변증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이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바울은 되풀이하여 이렇게 말했다. 만일 구원이 조금이라도 우리의 행위에 의존한다면, 그리스도의 희생은 가장 큰 실책이 된다. 만일 자신의 노력이나 율법적인 행위로써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불필요한 것이 되어 버린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바울은 두 가지의 논점을 가지고 율법에 대하여 변증하고자 한다. 첫째,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 의롭다함을 받은 신자는 더 이상 율법의 노예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논지의 근거를 변증하기 위해서 구약성경의 아브라함을 소개하면서 그가 어떻게 구원받았는가를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음 얻을 것이다"(창 12:3). 아브라함은 이에 순종하였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떠났다. 그는 늙었지만 자손이 없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네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되리라." 그는 믿었고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의'로 여겨 주었다(창 15:6).
그러나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는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데 실패하였다(창 16장). 그들은 자신의 의지를 따라(육체를 따라) 계집 종 하갈을 취하여 아들을 얻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이 육체를 따라 갖는 소망을 버렸을 때, 종이 아닌 '자유하는 여자'로 말미암아 '약속의 자녀'를 낳게 하셨다(창 21장). 한 아들은 계집종의 몸에서 육체를 따라 났고, 한 아들은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 약속을 따라 났다.
아브라함의 두 후손, 약속과 육체, 여기서 육체는 의문과 율법을 뜻하고 약속은 상징적이고 영적인 존재다. 사라와 하갈은 각각 아이를 낳았지만, 두 아이는 그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이스마엘은 노예로 이삭은 자유인으로 태어났다. 또한 두 아이는 출생의 방법에서 부터 차이가 난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의 알레고리적(Allegorical)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모든 사람은 종으로 태어나 존재한다. 그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말미암아 그가 자유 하게 되기 전에는,종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이스마엘이 아니면 이삭이다. 이스마엘과 이삭의 출생의 연원은 그것이 역사적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또한 심오한 영적 진리를 함축하고 있다.
이하 갈라디아서 4:21-31의 내용을 살펴보면 계속되는 두 가지 상반되는 개념이 대립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계집종/자유 하는 여자, 계집종의 아들/자유 하는 여자의 아들, 육체/약속, 지금 있는 예루살렘/뒤에 있는 예루살렘, 육체/성령 이 그것이다. 24절에서 '그 두 여자는 두 계약'을 가리킨다. 이 두 계약의 이해 없이는 성서의 이해가 또한 불가능하다. 요컨데 성서는 두 쪽으로 갈라진다. 옛 계약이라는 뜻의 구약과 새 계약이라는 의미의 신약으로서 계약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엄숙한 계약인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의해 사람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또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실 것을 약속한다. 하나님은 그 옛 계약을 모세를 통해서 세우셨으며, 새 계약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우셨는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피로 그 계약에 서명하였다. 여기서 모세의 계약은 율법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시고 예레미야(31:31)를 통해 미리 말씀해 주셨던 새 계약은 '약속'을 근거로 삼는다.
아브라함과의 하나님의 약속의 진정한 상속자는 그의 육체적 후손으로서의 자녀들, 즉 유대인들이 아니고 영적 후손으로서의 자녀들로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을 막론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다. 약속의 아들 이삭이 계집종의 아들 이스마엘에게 조롱을 당했고 그 결과는 "계집종과 그의 아들을 내어 쫓으라"(갈 4:30)고 말하는 것이 바로 성서의 가르침이다. 여기서 우리는 약속이 율법 위에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대목에서 라이트후드(J. B. Lightfoot)는 '사도는 확신에 차서 유대교의 조종(弔鐘)을 울리고 있다'라고 주석 하였다. 베츠는 바울이 유대주의 그리스도교의 입장에 서있는 자신의 반대파를 붕괴시키기 위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에 이원론적 양극을 만들고자 한다고 보았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있는 이들에게 대항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함께 율법 또한 하나님께로 비롯된 '의'를 얻는 것이므로 준수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이들과 투쟁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적대자들로부터 듣고 갈라디아 사람들이 좇고 있는 같은 전통에 대해 다른 해석을 제시하면서 그들이 전하고 있는 메시지가 자신과 다른 '또 하나'의 복음이 아닌 '거짓' 복음임을 밝히고자 한다. 그의 논지는 갈 3장과 갈 4장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데, 율법을 정의하고 있다.
갈 3:11에서 약속은 곧 그리스도라고 밝힌다. '의'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며, 이 언약은 율법이 주어지기 430년 전의 일이며(갈 3:17-18), 하나님은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실 것을 미리 정하셨고,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를 얻었은 즉 믿는 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아브라함의 후사가 되므로 약속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율법이 아브라함 언약의 은혜의 성격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이 제정된 원래의 기초를 율법이 폐지하지 못함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오히려 모세 언약이 아브라함 언약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다루시는 데 있어서 모세 언약을 최고의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유대주의자들을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17절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이 주어진 이후 430년 후에 율법이 주어졌음을 말함으로 율법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에 부수적으로 더해진 것으로 해석한다.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될 사람이 없으니 율법으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일을 항상 행해야만 한다(갈 3:10).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면,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으니 그것은 오히려 저주가 된다는 것이다. 율법은 일점 일획도 어김없이 계속적이고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에 의해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궁극적인 문제가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율법은 선하고, 거룩한 것이나 율법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의 온전하지 못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뿌리 깊은 인간의 죄성을 언급함으로, 사람이 율법의 거룩함을 알고 지키기를 사모할 지라도 그 보다 더 큰 힘이 있어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도록 함을 인식시키고자 한다.
유대교는 사람들이 다만 율법을 지키기로 결심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는 중생하지 않은 사람은 선을 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바울의 비관적인 견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선택하지만 그러나 아담의 후손으로써 그들은 항상 죄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선한 행위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성령이 역사한 결과이다.
바울은 율법과 율법행위를 구분한다. 율법 또한 주신 것이며,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들을 율법이 거스르지 않는다고 하였다(갈 3:21). 율법은 '의'를 이루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며 사람들이 죄를 범하기 때문에 더한 것이라고 말한다(갈 3:19). 바울은 또한 사람들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면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모든 사람이 아담이래 죄 가운데 있으므로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으며(갈 3:21-22), 그 때문에 율법으로 '의'를 얻지 못한다고 하였다. 바울은 율법 그 자체로서는 의에 이르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그렇지만 율법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게 하기 위하여 주어졌으며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본래의 목적을 성취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갈 3:22-23).
율법의 행위에 의해 의롭게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그들의 순종이 의를 얻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완전한 순종'이 구원을 얻기 위해 어떤 계명들, 가령 할례 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 계명을 지켜야 하는 어떠한 행위도 율법주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에 호소한다 해도, 율법의 행위에 의존하는 율법주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시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받을 자가 없으며, 율법의 저주를 피하는 유일한 길은 (갈 3:10-13)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로 '칭의'를 얻는 길 뿐임을 말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바울은 율법 그 자체를 결코 공격하거나 배제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율법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으며 그것은 약속을 폐하는 것이 아니며, 사람들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죄인 됨을 깨달아 약속 안에서 믿음으로 얻는 '의'를 이루실 그리스도를 고대하게 했음을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갈 3:24). 더 나아가 그는 율법을 사랑의 법으로 정의하면서(갈 5:14), 성령을 좇아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할 것을 권면 한다.
바울의 항변은 이와 같이 율법의 본래의 의미를 망각한 채, 외적인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으려는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항변이며 그들의 율법행위는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하기 위해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이므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또 하나의 다른 논점은 의롭다함을 받은 신자는 더 이상 율법의 노예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진실로 전하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으로 논지의 방향을 돌린다.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음을 변증한 바울은 이제 더 이상 율법의 노예가 되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그리스도에 의한 자유함에 대해서 말한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그의 적대자들과의 투쟁은 갈라디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렸던 자유를 그들의 삶에서 계속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그리스도가 오기까지 감금된 상태에 머물렀으나 그리스도께서 자유 함을 주신 것은 곧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실제적인 나타남이다. 바울에 있어서 자유의 개념은 구원의 실제적인 경험이다. 그러나 갈 라디아서 5-6장을 살펴보면, 구원의 실제적 경험으로 누리는 이 자유는 비단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육'으로부터의 자유 또한 구원의 경험인 것이다.
갈라디아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그리스도인들처럼 자유를 경험하도록 하여준 것은 성령의 은사였다. 이 경험은 세상의 원시 종교들과 그것들의 독재적인 악한 지배로부터 해방과 같았으며, 율법과 죄 아래서의 노예상태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무지로부터의, 미신으로부터의, 그리고 사회적 압제와 종교적·문화적 차별로부터의, 해방을 포함하였다.
바울의 시대나 현재에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오해하기 쉬운 부분은 이 '자유'라고 생각된다. 바울에 있어서 자유는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그 실체를 경험함을 의미하는데 반해, (5:18 성령이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의외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육체 가운데서 자유함을 추구함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결과를 낳는다. 실제적 경험으로서 누림이 없이 지식으로 취한 자유함 역시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있지 않다. 바울에 의하면 자유란,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실제로서의 경험인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기초이다.
(4) 또 하나의 논증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그들의 경험을 기초로 하여 갈라디아 사람들의 이해를 끌어내고자 시도하였음을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곧 성령의 은사를 변증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복음을 전하였고 그들은 그 복음을 들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즉음을 생생하게 들었고 또한 그것을 믿었으며 그들은 성령을 받았다.
바울이 거듭 말하기를 그들은 성령을 받았고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능력을 행하는 것을 목도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들이 갈라디아 사람들이 할례를 행하고 율법준수를 위해 애쓰기 전에 복음을 전해 듣고 믿었을 때 있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베츠에 의하면, 이러한 시도는 다른 방법들로서는 얻기 곤란했을 많은 전략적 이점들을 제공한다고 한다. 그것은,
1) 갈라디아인들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문제들을 토론할 수 있다.
2) 상대방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 드는 전문가와 권위자의 거만하고 납득되지 않는 위치를 바울은 피할 수 있다.
3) 성령에 관해서 말함으로써 바울은 이상의 모든 논의에 있어서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이성뿐만 아니라, 특히 성령에 의해 주어지는 저 '이성'에 호소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다는 이 약속을,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이에게 적용된다고 해석하면서 이 약속을 현재 이방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예언으로 해석하고 있다. 성경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을 미리 본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그들의 성령 체험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아브라함의 경험과 동일한 것임을 주장한다.
바울은 3장 14절에서 갈라디아 사람들의 성령 체험은 아브라함의 경험과 같은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것은 성경이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이방인들을 의롭게 여기실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모든 이방에 앞서 아브라함에게 먼저 복음을 선포한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성령'과 '약속'을 동격관계로 이해하고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을 성령으로 대치한다. 바울은 성령과 약속을 동일시 하는데 왜냐하면 성령은 믿는 사람의 전존재를 규정하는 능력일 뿐만 아니라(3:3-5), 현존하고, 역사 가운데 활동하는 그리스도의 실체가 되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한 변증을 논의하였다. 바울의 결론은 서신의 서두에서(1:7), 밝혔듯이 자신이 전한 복음만이 진리이며, 그 외의 복음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위에서 서술한 4개의 변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의 절대성을 증거 함으로써 율법주의 그리스도인들의 혼합주의가 그리스도교의 또 다른 줄기로서 인정받는 것을 철저히 봉쇄하고 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복음이며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은혜로 말미암은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전부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서 약속으로 주어진 아들의 영, 성령의 은사로 인해 자유에 이르고 또한 성령의 은사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법으로서 본래의 의미로 환원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간다는 것이다.
(5) 요약
갈라디아 교회를 교란시켰던 바울의 대적자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예수 사역의 본질을 분명히 보지 못했다. 고정된 자신들의 의식을 뛰어넘어 아무런 노력과 조건 없이 오직 '은혜' 아래서 주어지는 '의'를 받아들이기에는 그만큼 유대교의 정체성의 깊이가 컷던 것이다. 그들에 있어 바울의 복음은 가볍게 보였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미 약속된 하나님의 의를 획득하고 있다고 믿는 유대인 전체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모든 족속들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창 12:3)는 토라의 언약으로부터 아브라함의 자손임이 최대의 긍지였던 유대인들에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차별 없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약속의 자녀로 인정받음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 않았다. 또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다'는 복음의 의미를 잘못 받아들여 방종했던 측면이 한편으로 발견되어지며(갈 5-6장), 이러한 이유도 갈라디아 사람들이 선동자들의 주장을 정당하게 받아들이도록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히 말한다. '다른 복음'이란 있을 수 없다고, 그에게 있어 예수는 복음 자체였다. 바울에 있어서 예수는 '의'를 이루는 필요충분조건이었다. 이에 더하거나 빼거나 하는 모든 것이 거짓 복음인 것이다.
예수로 의롭다함을 얻고 예수로 말미암아 살고, 예수로 말미암아 선을 이루고 예수로 말미암아 죽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예수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고 죄에 대해서 죽는 자만이, 예수로 말미암아 자유를 누리며 그 자유함 가운데 율법의 요구인 사랑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바울에 있어서 구원은 결코 피상적이지도 않고 사유의 산물도 아니다. 그것은 실제하는 경험으로서 주어지며, 모든 삶 가운데 역사 하는 누림이며 능력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예수 안에 있는 자유나, 성령의 은사나 모두 경험으로 제시된다. 그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율법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의 삶 가운데 '사랑'으로 경험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종합분석을 통해서 선동자들의 메시지가 왜 거짓인지를 밝혀 보았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복음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유대교와의 차이점을 분명히 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대로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는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선교하여 세운 교회에 유대주의자-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이 전파한 것과는 다른 복음을 전하여 갈라디아 사람들을 교란시킴으로 야기되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자신이 전파하는 복음만이 참 복음임을 변증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갈라디아 교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믿음으로 '의'에 이르고 성령 안에서 자유 함을 누리며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는 데 있었다.
Ⅳ. 결론
갈라디아서의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당시의 상황과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상황이 다르며, 바울이 투쟁해야 했던 유대종교와 문화의 정서는 우리의 그것과 많이 다를 수밖에 없음으로 일률적인 단순한 비교는 적절하지 못 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보여주고 있는 자신의 전통적인 유대신학과 율법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 우리에게 기독교 신앙생활의 참 모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는 어느 위치에 서서 주님의 가르침을 보고 배우고 있는가? 초대교회 시절의 신앙의 선배들이 구가하였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늘의 현실에 적당히 꿰어 맞추는 그 옛날의 유대교 율법주의자와 같은 신앙을 갖고 있지는 않는가?
오늘날의 교회들에서도 외형적인 율법주의는 찾아보기 어렵지 않으며, 진실로 바울이 전하고자 자신의 생명을 바쳐 헌신했던 예수 안에서의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날마다의 경험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재삼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도 바울의 '오직 예수만이'라는 복음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믿음으로만'의 은혜가 값싸게 취급당한다. 자유 안에서 예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참 그리스도인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함으로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하나의 종교'로 전락하는 위기를 맞고 있다. 진실로 복음의 참 진리를 기독교 안에 회복하여 세상으로 하여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 아래 경배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바울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복음의 변질은 교회 밖에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복음의 참 진리를 영혼 깊이 깨닫지 못했던 유대주의자 그리스도인들로 하여 바울의 선교가 많은 어려움에 부딪혀야 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다"(갈 4:29)라고 말하였다. 시대는 바뀌어도 진리는 변하지 않고 역사는 바뀌어도 사람들은 그저 그 자리에 있는 모양이다. 바울이 오늘날의 교회에 파송 된다면, 그는 여전히 4:9절을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을 위한 수고가 헛된 일이 될까 두렵다고 했다. 이 믿음의 대 사도의 투쟁이 헛되지 않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리 가운데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의 생명을 건 수고가 믿음의 후진들에게 그루터기가 되었던 것과 같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후진들의 그루터기가 되어 바른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이다. 바울의 적대자들이 범했던 '다른 복음'의 오류가 기독교 내에서 완전히 거세되어 졌는가 하는 문제를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살펴보아야 할 문제가 아니 겠는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주의자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예수로 말미암는 의로움도, 성령의 역사도 부인하지 않는다. 문제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많으며 더 나아가 복음이 그들이 삶 가운데 누릴 수 있는 실제적인 경험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데 있는 것이다.
바울은 결코 구원의 실체로서의 누림이 없는 예수에 대한 믿음을 말하고 있지 않다. 그의 관심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령 안에서 은혜로 인한 모든 특권을 풍성히 누리도록 하는데 있었던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점을 깊이 유념하지 않은 채, 바울의 복음에 대한 연구가 쌓여진다면, 다만 쏟아지는 정보로 인하여 혼란스러운 현대인들에게 또 하나의 헛된 사유를 더하는 결과만을 얻게 될 것이다.
예수가 온 것은 그를 믿는 자마다 그의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하였다고 말씀하였다. 오늘날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안에서 더 풍성히, 더욱 풍성히 생명을 얻어 그리스도의 은혜를 좇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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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초록
현대의 사회는 괄목할 만한 과학 문명의 발전을 이루었고 엄청난 양의 정보의 홍수 속에서 차라리 어지럽기까지 하다. 이와 같은 와중에서 기존의 질서들이 와해되며 가치관 또한 변화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문명의 발달이 인간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길을 제시하지는 않음으로 많은 문제점들을 안은 채로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와 같이 질주하고 있는 양 보여진다.
도덕적 상태의 타락은 이미 놀라움을 넘어서고 있으며 이 사회에 만연된 부패는 차라리 불감증 상태에 놓여 있음을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사회를 비판하기에 앞서 우리 그리스도인 들과 교회는 심각하게 자성해 보아야만 할 것이다. 교회는 이 어지러운 사회에 빛이 되었는가? 이 부패한 사회에 소금이 되었는가? 현대 신학은 과연 교회들이 나아가야 할 지표를 제시할 능력이 있는가? 이와 같은 물음 앞에서 우리는 바쁜 걸음을 멈추고 밤 낮을 고민해 보아야만 한다. 그것은 내 영혼을 위한 마땅한 노력이며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인 것이다.
바울은 이 책임을 다하기 위해 투쟁했다. 복음을 오도함으로 교회를 교란시키며, 자신들을 자유하게 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돌아섬으로 세상적인 규범으로 변질된 율법과 죄의 멍에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시 짊어지게 하는 유대주의자들과 맞서 복음을 수호하고자 투쟁했다. 은혜와 율법은 결코 모순된 관계가 아님에도 지금까지 많은 이해의 부족이 있음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은혜 안에 머무는 그리스도인에게 율법은 더 이상 행위의 언약이 아니며 그것은 자연스러운 순종이며 성령이 함께 하시는 표현이며 결과로서 나타나지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믿는 믿음은 "의"를 얻게 하며 자유에 이르게 한다. 예수는 진리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이 자유는 방종이 아닌 사랑과 의에 열매를 맺게 한다. 복음 안에서 율법은 '사랑의 법'으로 환원되며 은혜는 율법을 완성시키며 율법은 은혜를 더욱 사모하게 한다. 이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며 이들의 삶의 증거가 세상의 빛이며 소망이 될 것이다.
이제 교회는 깨어 일어나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바로 이해하고 그 복음이 제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만이 참 길이며 진리임을 세상이 알고 복음 안에서 구원을 얻도록 삶으로서 증거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의무이며 책임인 것이다.
어두움은 빛을 싫어한다. 그러나 어두움에 갇힌 자는 빛을 간절히 갈망할 것이다. 세상은 어둠 속에 묻힌 채 향방을 모르고 달리고 있다. 교회는 세상 의 빛이 되어야 한다. 소망을 주어야 한다. 스스로의 삶으로서 예수만이 이 어두운 세상의 빛이며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인 것을 증거 해야 한다.
그러함에 있어서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할 것이다.
출처..네이버 블로그..mokpoj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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