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쿠프 문학과 디스토피아 「벌레 폭풍」 속 세상 이야기 벌레가 만든 미래의 팬데믹 격리된 세상 속 사람들의 변화 아름답기만한 사랑 가능할까# 사람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기 시작했다. 인터넷 공간에선 혐오와 악플이 폭증했고, 많은 이들이 사소한 불편을 참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했다.
# 하지만 벌레들이 이동하면서 바이러스를 퍼뜨린 탓에 사람들이 '모니터'로 교류하는 세태를 그린 소설 「벌레 폭풍」 속 세상은 평화롭기만 하다. 모니터가 현실보다 친숙한 세상은 정말 소설처럼 편안할 수 있을까.
인구 2000만명이 넘는 상하이를 봉쇄하자 세상은 아비규환이 됐다. [사진 | 뉴시스]
팬데믹 이후 세계는 달라졌다. 인류의 과학은 바이러스를 이기지 못했다. 백신은 바이러스를 잠시 지연시켰을 뿐이다. 봉쇄, 격리, 거리두기로 물류가 멈췄고, 가게와 학교가 문을 닫았다.
사람들은 빠르게 비대면 세계에 적응했다. 배달 시스템이 발달하고, 온라인 장비가 불티나게 팔렸다. 곧 백신이 보급되자 팬데믹은 그저 '불쾌한 과거'가 됐지만, 사람들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비대면에 쉽게 적응하다가 다시 익숙한 대면 세계로 복귀한 어른들과는 달리 코로나는 아이들의 감각, 사고방식, 나아가 신체에 영향을 미쳤다. 마스크로 입을 가린 탓에 언어 습득이 늦은 아이들이 속출했다.
사람의 표정을 관찰할 기회가 줄어들어 타인의 감정을 파악하는 능력도 떨어졌다. 야외 활동량이 줄어들어 비만 아동이 몇 곱절이나 늘어났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 대면 접촉이 재개되면서 이 문제는 자연스럽게 묻혔다.
만약 더 치명적인 팬데믹이 발생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종산의 장편소설 「벌레 폭풍(문학과지성사·2024년)」에는 타인과의 직접 접촉보다 모니터를 더 친숙하게 여기는 세대가 전면적으로 등장한다.
작가는 '팬데믹'의 자리에 '벌레'를 배치했다. 소설의 시공간은 2100년대의 가까운 미래다. 기후변화로 벌레들이 폭증하면서 치명적인 독감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유행한다.
벌레들이 대규모로 이동하면서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나무와 풀을 없애자 사람들은 '스크린 윈도'를 통해 교류한다. 다섯 단계로 설정된 스크린 윈도는 촉각을 제외하고 현실과 흡사한 입체적인 화면을 제공한다. 사람들은 스크린 윈도를 이용해 회의하고, 산책하고, 심지어 사랑에 빠진다. 주인공 '포포'는 유년기부터 '스크린 윈도'에 최적화한 상태로 성인이 됐다.
포포는 스크린 윈도를 통하지 않고 사람을 직접 만난다는 게 불편했다. 사랑하는 무이라고 해도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 자신은 없었다. 다른 사람의 살갗을 만지거나 키스하고 싶은 욕구를 가끔 희미하게 느끼기는 했다. 하지만 곧바로 강한 혐오감이 올라와서 스킨십에 대한 욕구를 덮었다(94쪽).
포포는 스크린 윈도로 만난 연인 '무이'와 오랜 시간 연애를 했으나, 무이를 실제로 만난 적도, 손을 잡거나 포옹을 한 적도 없다. 언니 '민정'은 그런 포포를 심각하게 바라본다. 민정은 포포를 바깥세상에 적응시키려고 했으나 그럴 때마다 포포는 번번이 거부한다.
포포는 언제 벌레를 만날지 알 수 없고 불특정 다수와 마주쳐야 하고, 더럽고 위험한 가능성들이 산재하는 '진짜 바깥'을 두려워한다. 포포를 비판하는 민정도 벌레 폭풍 시대를 거스르지 못한다. 민정은 결혼을 하지 않고 정부가 제공한 정자로 딸 '리라'를 낳아 키우고 있다. 포포는 리라가 태어난 직후를 제외하고는 조카와 줄곧 스크린 윈도로 소통한다.
포포의 일상은 곧 위기를 맞는다. 무이와 결혼을 결정한 포포는 무이가 사는 곳으로 간다. 두 사람은 어떤 접촉도 없이'2인용 집'에 거주하면서 스크린 윈도로만 마주한다. 무이는 결혼 전에 포포에게 만나고 싶다고 하지만 포포는 실제 만남이 여전히 두렵기만 하다.
포포에게 삶이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영화 같은 것이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 극장의 좌석에 앉혀져 누가 만든 것인지도 모를 영화를 스크린으로 보고 있다가 갑자기 어느 날 영화가 끝나고 극장 안이 암전된다. 죽음이란 그런 암전 같은 게 아닐까 하고 포포는 생각했다. … 그러다 불쑥 무이가 삶에 나타나 점차 일상을 함께하게 되면서 포포는 처음으로 자신이 실제로 살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됐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110쪽).
포포와 달리 실제 만남에 익숙한 민정도 고민에 빠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결혼을 거부하고 자식만 키우던 민정은 자유로운 연애를 추구했지만,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잃으면서 흔들린다.
코로나19로 비대면이 지속하자 사람들은 비대면에 제공하는 편리함과 효율성에 환호했다. 번거롭게 타인을 만나 불편함을 겪지 않고, 교실에서 선생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아도 되니까. 더구나 필요한 물건은 언제든 빠르게 배달시키면 된다.
비대면 접촉이 늘면서 인터넷 공간에서 혐오 표현과 악플은 오히려 폭증했다. 사람 사이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타인의 고통은 가벼운 가십으로 전락한 것이다. 더 자극적인 스펙터클을 추구하면서 사람들은 점차 이질적인 것을 꺼리고 사소한 불편도 견디지 못하는 존재로 진화하는 중이다.
「벌레 폭풍」은 약 80년 후의 세계에서 벌어진 풍경을 앞당겨 보여준다. 이 소설에 그려진 포포와 무이의 사랑은 무해하고, 기이하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인간에게는 타인의 온기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는 아름답지만 진부하다.
결혼식이 끝나면 포포는 스크린 윈도에서 나올 것이다. 수많은 사람은 한순간에 사라질 테고, 무이는 무이의 공간에, 포포는 포포의 공간에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혼자 쉬다가 서로의 창문을 두드릴 것이다. 옛날 사람들이 보냈던 것 같은 첫날밤은 없을 것이다(288쪽).
포포와 무이의 결말이다. 그런데 가족 사이의 소통까지 스크린 윈도로 대체되는 세계가 과연 그토록 조용할 수 있을까. 이미 우리는 팬데믹의 공포가 생성한 지옥도를 경험한 바 있다. 확진자가 발생하자 바다 위의 수용소로 돌변한 항공모함, 인적이 끊긴 뉴욕의 을씨년스러운 풍경, 인구 2000만명이 넘는 도시(상하이)가 봉쇄되면서 벌어진 아비규환을 기억한다.
반면, 「벌레 폭풍」에 그려진 세계의 모습은 한없이 평화롭다. 벌레들이 나무와 풀을 먹어치우고, 대면 교류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세계의 질서는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 단 2년 남짓한 팬데믹 기간에 백신과 에너지 확보 문제로 벌어진 비극을 떠올려보면 소설에 그려진 사랑은 너무도 안전하다.
소설 「벌레 폭풍」은 벌레 대이동 후 세상을 그리고 있다. [사진 | 뉴시스]
정치·사회적 갈등과 분리되면서 사랑은 아름답고 무해한 풍경으로만 남는다. 벌레가 점령한 세계, 모니터가 현실보다 친숙한 세계에서도 사랑은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을까. 다음 세대에도, 그다음 세대에서도 사랑이 정말로 마지막까지 남은 희망이라면 그것을 가로막는 세계의 불합리와 모순, 체계의 집요한 개입을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이 사랑은 다양한 갈등을 제거한 채 편집된 '릴스'에 가깝다. 차라리 포포가 다른 삶의 가능성을 찾도록 이끌었던 무이가 홀로그램에 불과했다는 설정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그랬다면 포포는 더욱 스크린 윈도의 세계에 머물렀을지 아니면 자신을 기만한 스크린 윈도 바깥으로 뛰쳐나갔을지 궁금하다. 결말이 소설의 도입부가 됐다면, 더 많은 이야기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