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물 이야기
김 문 영
물은 지구에 살고 있는 인류를 비롯하여 모든 생물의 생명줄이다. 물은 인간의 생명과 문명을 위해서 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원인 것이다. 과학자 벤저민 프랭클린은 "우물이 마르고 나서야 우리는 물의 가치를 알게 된다."고 했고, 세계은행 부총재인 이스마일 세라게딘은 "20세기에는 석유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면 21세기에는 물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일 것이다."라고 하여 앞으로 물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했다. 지금 우리가 무심코 마시는 물이 태고(太古)적 사람들이 마시는 물과 같은 물 그 물을 지금 우리가 마시는 물이라고 생각할 때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물은 사람의 몸에 약70%, 어류는 약80%, 그 밖의 미생물은 약95%가 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특이 한 것은 자연의 모든 생물의 생명현상도 여러 가지 물질이 물에 녹은 수용액에 의해서 일어나는 화학변화가 복잡하게 얽힌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에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물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으며 물 용어의 사용은 그 의미에 있어 일정한 규칙성이 있다. 즉 ‘질서와 혼돈,’ ‘생명과 죽음,’ ‘축복과 고통’이라는 양면성이 물이라는 용어에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히브리어에서 물의 의미를 가진 단어는 일반적인 ‘물’을 뜻하는 (may, 마이)와 ‘넘칠듯한 맑은 물’이라는 의미를 가진 (mayim, 마임)이 있다. 이 단어는 오직 복수 형태로만 사용되며, 구약에 나타난 물은 역사적 사건 속에 등장하거나 이스라엘 백성 속에서 진행된 의식 속에서 나타나고, 때로는 비유적 표현 속에서 사용되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물은 때로 질서와 관련된 장면에서, 때로는 혼돈과 관련된 장면에서 등장하고 양면적인 상징으로 나타난다. 여기의 개념은 오직 하나님만이 조정하고 다스릴 수 있는 힘을 소유함을 묘사하고 있다. 물의 나뉨을 통해서 혼돈의 세력을 통제하고 더 적극적으로 질서를 형성하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사역, 홍수 심판으로 인한 혼돈과 그 물이 걷힌 것으로 인한 질서 회복 곧 재창조가 된 노아 홍수 사건, 출애굽과 홍해 사건을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 그리고 이를 노래한 시편 95편 등은 물이 갖고 있는 질서와 혼돈 개념을 말하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한 의식에 물이 등장하는데, 물은 옷이나 몸으로 뿌리는 것,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를 씻는 것, 희생제물을 씻는 것으로 정결 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정결이라는 기능을 갖고 있다. 이런 정결 의식은 내적인 도덕적 순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 및 무죄의 상징으로 진행되어 왔다(시 51:1-2, 7-10). 정결은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축복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이기 때문에 구약에 나타난 정결 의식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조건이 된다.
이스라엘은 유목민족이어서 늘 사람이나 가축이 사용할 많은 물이 필요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비가 적게 내리는 건조한 기후였다.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부족한 물을 대부분 우물에서 얻었고, 그만큼 우물은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심지어 부의 척도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리브가가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에게 기꺼이 물을 마시게 하고, 자진하여 가축에게도 물을 마시게 한 것은, 그녀의 특별한 친절의 표시였다(창 24장). 공동우물에서 가축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경우에는 순번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광야의 불문율에 따랐다(창 26:20,출 2:16,17).
이삭이 그랄에 거할 때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부자가 된다.(창 26:12,13) 이것을 시기한 블레셋 사람이 아브라함 때 판 우물을 메워버리는데 이삭은 결국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로 갔고, 그곳에서도 그랄 목자와 우물로 인하여 다투게 되어서 결국 이삭은 3번이나 우물을 포기하였고, 결국 ‘장소가 넓다’는 뜻의 르호봇이라는 우물을 얻고나서야 우물로 인해 다투지 않게 되었다.(창26:22)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 끝에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게 된다. 홍해(Red sea)는 원어 성경에 보면 갈대바다(Reed sea)로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격하는 애굽의 전차부대를 피해서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너는데 고린도전서10:1-2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대의 사건은 오늘날 교회에서 행하는 세례(침례)의 모형과 그림자(copy & shadow)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서 마라에 이르렀는데 마라의 물은 쓴물로서 먹을 수가 없었다. 마라는 홍해가 가까운 곳으로 지하수와 바닷물이 만나면 희석이 되고 그곳에 불순물이 섞이면 물이 오염이 되어 쓰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백성들이 쓴물 때문에 불평하고 원망할 때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다.” 모세가 쓴물에 던진 나무는 쥐엄나무라는 설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를 지나서 엘림에 이르니 그곳에는 물샘 열둘과 종려나무 70주가 있었다고 한다. 종려나무는 정확히 대추야자로 알려져 있다. 물샘은 물이 나오는 우물인데 물샘 열둘을 단순히 열두 개의 우물로만 알고 있으면 곤란하다. 물샘 하나하나는 이스라엘의 한 지파 전체가 텐트를 치고 머물면서 숙식할 수 있는 넓은 오아시스인 것이다.
사사기에 보면 사사 옷니엘이 드빌을 점령하고 그 댓가로 갈렙의 딸 악사와 결혼하는데 결혼 선물로 악사는 윗샘과 아랫샘을 받았다. 여기서도 윗샘과 아랫샘은 단순한 우물이 아니라 넓은 오아시스로 이해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물’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는 헬라어 (휘도르)이다. 이 단어의 사용을 보면 역시 구약의 물이 갖고 있었던 개념, 즉 ‘질서와 혼돈,’ ‘생명과 죽음,’ ‘축복과 고통’이라는 양면성을 가진 세 가지 개념을 나타내고 있다. 공관복음 속에서 나타난 광풍 때에 예수께서 많은 물을 향해 명하심(마 8:23-27, 막 4:35-41, 눅 8:22-25)이나 예수께서 물 위로 걸어가심(마 14:23-33, 막 6:45-52)에 대해서는 구약의 물이 가진 질서와 혼돈의 개념, 인간을 대적하는 혼돈 세력과 하나님의 승리라는 구조와 연결해서 해석하는 시도가 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승리하고 영광 받으신 아들의 음성을 물소리에 묘사한 것(계 1:15), 물 위에 앉은 음녀(계 17:1), 용이 물을 강같이 토하여 내는 모습과 핍박의 홍수로부터 구원받는 모습(계 12:15), 심판의 때에 구속 받은 자들이 마실 수 있는 물(계 8:10-11; 14:7; 16:4-5) 등 인간을 대적하는 혼돈 세력과 하나님의 승리라는 구조를 종말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베드로후서 3장 5-6절에서도 창조 때의 물과 노아 홍수 당시 물로 인한 멸망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 멸망과 질서 형성을 암시하고 있다.
공관복음과 요한계시록에서는 인간을 대적하는 세력과의 싸움에서 얻는 승리와 구속 받은 자들에게 주실 생명의 물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온다. 요한계시록 1장 15절에서 하늘의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암시한 물소리는 영생을 주는 물과 같이 영원한 생명력이 있다. 비유적인 용법에서 물은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 있는 참 생명을 나타낸다. 그리고 세례는 정결함과 함께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의 변화를 상징한다(골 2:12).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그와 함께 장사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새 생명을 얻는 것이다(롬 6:4).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복을 받는 조건인 정결에 대해서 많이 기록하고 있는데, 물은 손과 기명을 씻는 의식 등 정결의 수단으로서 사용된다(막 14:13, 눅 22:10). 예수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외적인 씻음보다는 내적인 씻음이 필요함을 말씀하셨던 것이다(막 7:2)
신약에서 물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생명수이다. "모두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라오는 영적 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셨는데, 그 바위가 곧 그리스도이셨다"(고전 10:4). 그리스도 자신이 영원한 생명의 물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 4:14).
물의 상징적 의미는 기독교교 신자의 세례에서 잘 나타난다. 그런데 세례는 신체가 아니라 영혼과 양심 그 자체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나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벧전 3:21). 이처럼 생명수로서 물의 상징적 의미는 세례 안에서 아주 충만하게 표현된다. 세례의 물을 통해 신자들은 영혼의 죄를 씻어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세례 때에 물에 잠겼다가 나오는 것은 세례를 받는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가르쳤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롬 6:3)
또한 성경에는 물을 마시라는 구절이 여러 곳에 나오는데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사55:1)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12:3).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요4:14).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37).
*그 영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듣는 자...목마른 자...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계22:17).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계21:6).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물'은 도대체 무엇일까? 성경이 밝히 보여주는 것처럼 물(생수)은 '사람이 마실 수 있는 하나님 자신'인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자신을 마실 수 있을까? 물론이다. 만일 생수의 근원, 물을 내는 깨진 반석, 마실 수 있는 그 영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그리고 알고도 그 물을 마시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타는 목마름의 연속일 것이다. 신자가 거듭난 이후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를 먹고(요6:57) 성령을 마시는 것(고전 12:13)이라고 할 수 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렘2:13).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저희는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출17:6, 고전10:4). 반석이신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갈라지셔서 피와 물을 내셨다.(요19:34).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이는 '그를 믿을 자의 받을 그영'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8하-39상). 유대인, 헬라인, 종, 자유자 다 한 성령으로 세례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영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 이와 같은 말씀들은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이 마실 수 있는 물이신 것을 밝히 보여준다. 그러나 이 물이신 하나님을 실제로 마실 수 있으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갈증을 느껴야 한다(출17:3, 시42;1, 요7:37, 계21:6). 사이다나 쥬스를 마셨을 때 잠시 갈증이 해소되지만 곧 더 깊은 갈증이 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둘째는 생수가 하나님 자신임을 알아야 한다(렘2:13, 고전
10:4, 요7:39, 고전12:13).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어떤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생수(그 영)이시다. 셋째는 주님의 이름을 불러서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물을 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성경은 너희는 여호와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한다(행2:21, 고전12:13, 살전5;17, 고전1;2, 삿15:18-19, 애3:55-56, 사55:6, 12;4, 6).
"목마른 사람들은 다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에 이른 것과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처럼 흘러 나올 것이다."(요 7:37-38 표준새번역)
- 에필로그 -
영화 벤허는 수십년 전에 제작된 영화인데 오늘날까지 감동을 주는 영화로서, 영화의 숨은 주제도 물이라고 할 수 있다.
훌(Hur)의 아들(Ben) 쥬다(Judah)는 신임 총독의 살해범으로 모함을 받고 갤린선의 노예로 끌려간다. 쥬다 일행이 로마군 호송병들에게 이끌려 나사렛 동네를 지나갈 때 동네 사람들은 끌려가는 죄수들에게 물을 먹이는데 쥬다는 호송 대장의 방해로 물도 마시지 못하고 타는 목마름에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고귀한 분(예수)이 나타나 쥬다에게 물을 준다. 쥬다는 심한 갈증에 물을 실컷 마시고 끌려가면서 고귀한 분(예수)을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본다.(감사하는 마음으로...)
쥬다는 넓은 바다의 갤린선 밑바닥에서 노를 젓는 노예로 수년간을 고생하다가 예기치 않게 해전에서 로마의 호민관 퀸터스 에리어스의 생명을 구하고 그의 양자가 되어서 로마에서 전차 경주의 영웅이 된다. 그러나 쥬다는 로마에서의 부귀영화를 뒤로하고 어머니와 여동생을 찾아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만 쥬다가 찾는 어머니와 여동생은 나병환자가 되어서 숨어서 살고 있었다. 쥬다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찾게 되었지만 함께 살 수 없는 처지에 가슴이 아팠다. 쥬다는 그의 가족들을 사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옛 친구 멧살라를 전차 경주에서 만나 생사를 건 대결을 한다. 멧살라는 전차 경주에서 반칙을 일삼으며 쥬다를 이기려고 하지만 자업자득(自業自得)으로 다른 전차에 깔려 경기가 끝난 후 죽고 만다.
쥬다는 전차 경주에서 승리한 후 사랑하는 여인 에스더의 권유로 어머니와 여동생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나사렛 예수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그들이 찾는 나사렛 예수는 로마 병정 들에게 이끌려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 골고다로 향하고 있었다. 쥬다는 수많은 군중들 틈에서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나사렛 예수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나사렛 예수 그분이 쓰러졌을 때 쥬다는 길가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떠다가 마시게 하려 했지만 로마 병사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아쉽다. 예전에 진 빚을 갚으려 했는데...)
나사렛 예수는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다 이루었다” 하고 숨을 거두었을 때 사방은 어둠에 휩싸이고 억수같이 비가 내리는데 쥬다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비를 피해서 근처 동굴에 피해 있을 때에 기적적으로 그분의 치유의 손길이 뻗친다. 그 후 쥬다의 가정에는 기쁨과 평안이 찾아온다. 그들의 가정에 기쁨과 평안을 가져 온 것은 이 땅에 생수(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했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생수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언제나 믿고 따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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