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하신 하나님
에스겔18:1-4, 25-32
송명희 시인은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나’라고 하는 그의 시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지만/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있게 하셨네/
노래로 작곡되어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며 사랑을 받으며 불러지는 시입니다만 이 시는 정말 하나님이 공평하심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보면서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은 거의 없다는 생각을 할 때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재물이 많으면 건강이 좋지 않고, 건강이 좋으면 자식이 문제를 일으키고, 자식들이 똑똑해서 공부를 잘하면 부모가 문제가 있고, 부모가 똑똑하면 자식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송명희 시인과 같이 건강도 없고 재물도 없고 지식도 없지만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는 공평을 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도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공평은 특별히 죄와 심판에 대하여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유다 백성들에게 예언활동을 하던 시기는 아직 나라가 완전히 멸망당하기 전이었습니다.
이때도 이미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의 침공을 당해 무너지는 가슴 아픈 현실을 경험하였고, 일부의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서 유다 백성들은 무슨 이유로 자기들에게 이런 재난이 닥쳤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그 이유를 아주 간단하게 결론지었습니다.
조상들의 죄로 인하여 우리가 심판을 받아 이런 고통과 재난을 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을 그러한 결론의 근거로 들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되면서 남 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망했을 때도 그들은 조상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왕국 붕괴의 대 재앙이 자기들에게 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백성들을 향하여 여호와께서는 그 생각이 옳지 않음을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분명히 깨우쳐주셨습니다.
3절에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속담과 같이 조상들의 죄악으로 자손들이 망하는 그런 불공평한 경우가 다시는 없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자신의 공평성을 몇 가지 사실을 통하여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모든 영혼이 내게 속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모든 영혼은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 속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나 자식 누구 때문에 불공평한 심판을 받는 일이 없이 누구나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자기의 삶에 의하여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가 나를 잘 못 나았기 때문에- 아니예요.
부모가 나를 교육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도 아닙니다.
세상이 너무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영혼은 하나님께 속하였고 하나님은 그 영혼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펴보시고 계십니다.
모든 것이 다 나 때문입니다.
나에게 책임이 있고,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회개의 기회를 충분히 주신다는 것입니다.
25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길이 공평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 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이 공평하고 반대로 인간의 길이 공평하지 않다는 말씀 속에는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신다는 것입니다.
죄를 깨달을 수 있는 기회도 충분히 주시고, 잘못된 길에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도 충분히 주시고, 바르게 살 수 있는 기회도 충분히 주셨습니다.
기회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기회는 있었지만 자신이 그 깨달은 대로 회개하지 못하고 스스로 잘못된 길로 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롯 유다의 예를 한 번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회개하지 못하니까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그러면서 자신의 손을 유다와 같이 그릇에 넣었습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번 하였느니라.”고 까지 말씀하셨지만 가롯 유다는 끝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롯 유다에게 심판을 행한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아니면 그렇게 많은 기회를 받았음에도 회개하지 아니한 가롯 유다가 공평하지 않은 것입니까?
하나님은 오래 동안 참고 기다리시면서 회개의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심으로 공평하게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공평하심에는 분명히 심판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인이 공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면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고 반대로 악인이 그 행한 악에서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그 영혼은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정말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특별히 죄와 그 죄에 대한 심판에서는 공평하십니다.
우리는 이 공평하신 하나님을 정말 두렵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한 성도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아들이 어릴 때는 교회에 다녔지만 장성하면서 발길을 끊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할 것을 권하지만, 그때마다 아들의 논리에 자신이 압도당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이 사랑의 신이라면 왜 태어날 때부터 불구자가 있게 하는가?”
“정말 하나님이 정의의 신이라면 어떻게 이 땅에 불의가 기승을 부릴 수 있는가”
“정녕 하나님이 전능의 신이라면 어찌 이 땅에 그토록 숱한 재난이 있을 수 있는가?”
이와 같은 아들의 반론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분께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답장을 드렸습니다.
“만약 이 세상의 삶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나 버린다면 아드님의 주장이 백 번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코끝에서 호흡이 멈추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이후에 다른 삶이 있다면 아드님의 주장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불구의 몸으로 태어났기에 한평생 영원을 바라보고 살아간다면,
불의한 자로 인해 고통 받기에 영원을 사모할 수밖에 없다면,
재난을 당했기에 비로소 영원에 대해 눈뜨는 자가 되었다면, 그보다 더 복된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져서 영원을 생각할 필요도 없이 살아가는 자가 있다면, 그야말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앞으로 아드님에게 신앙을 권유하려 하시지 말고 머지않아 반드시 관 속에 시체로 드러누울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일깨워 주십시오.
언젠가 아드님이 죽음이란 남의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것임을 인식하게 될 때, 그는 영원한 생명의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 영원한 죽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고 그 죄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한 사람은 분명히 죽을 것이고 심판을 받을 것이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 받는 자가 가장 행복한 자이며 가장 지혜로운 자이고 가장 축복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면 그 사람은 영원한 불행 속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사람도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잘 살았던 못 살았던, 건강했던 건강하지 못했던, 출세를 했건 출세를 하지 못했던, 남자든 여자든 누구나 죄의 문제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결정지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죄와 심판에 대하여 공평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두려움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그 죄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한 삶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죽는 것이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면 그 사람은 삶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죄의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이 중요한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죄에 대하여 공평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첫째로, 책임을 전가하는 삶을 버려야 합니다.
책임을 전가하기에만 바쁜 우리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학교수: 대학교에 저런 형편없는 녀석이 들어온 것은 수치야. 우리나라 중, 고등학교 교육에 문제가 있어 그 책임을 져야 해.
중, 고등학교 교사: 나는 저런 말썽꾸러기 소년을 맡지 않았어야 했어. 초등학교에서 아무런 준비 없이 그냥 중, 고등학교에 보냈단 말이야.
초등학교 교사: 저런 멍청이, 왜 저따위 애를 학교에 보낸단 말인가? 유치원에서는 뭘 가르친 거야?
유치원 보모: 저렇게 훈련받지 못한 애는 처음 봤어. 도대체 저 애의 어머니는 어떤 사람일까?
어머니: 불쌍한 내 자식. 그러나 알고 보면 그 애 잘못도 아니지. 그 애의 친가 조상들이 모두 그 모양이었으니까.
오늘 우리들은 모든 문제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나 환경에 돌리려고 하는 이런 잘못을 범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담은 자신의 죄를 하와에게 덮어 씌웠고, 사울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하고 나서 그 책임을 백성들에게 전가시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모든 불행을 조상들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렇게 책임을 전가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는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당연히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없습니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가 아니라 내 자신의 죄를 볼 수 있어야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고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내 문제요 내 책임이요 내가 해결해야 할 숙제입니다.
누구의 문제나 누구의 책임이 절대 아닙니다.
요나가 탄 배가 큰 풍랑을 만나 모든 사람이 다 죽게 되었을 때 요나는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아노라”고 책임지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나 때문입니다’ ‘나 때문인 줄을 압니다.’라는 책임을 지는 자세를 가질 때 문제를 해결하고 폭풍을 잔잔케 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자의식이 있을 때 베드로와 같이 주님을 만나고 죄의 문제를 해결 받게 될 줄 믿습니다.
둘째로,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30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조상들의 죄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자신의 죄를 회개할 줄도 모르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해결책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단 하나,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 그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자신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아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울부짖는 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했습니다.
회개의 첫 단계는 자신의 죄와 허물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이 모든 불행이, 이 모든 사태가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 때문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자신의 죄와 허물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우선적인 일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세례는 다시는 그 길로 가지 않겠다고 결단하고 결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것을 가리켜 사도 바울은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2절에 보면,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홍해바다를 건넌 것이 세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 말은 홍해를 건넘으로 다시는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는 옛 생활로 돌아가지 않고, 다시는 애굽으로 돌아가지 않고, 옛 생활을 끊고 새로운 삶을 향하여 나아가기를 결단하는 것이 세례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세례는 과거와의 단절이며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모습이 있을 때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고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지는 것입니다.
셋째로,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31절에 보면,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했습니다.
우리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하나는 죄악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죄악을 버리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그 죄악을 버린 마음에 성령을 모시고 성령 안에서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채움의 중요성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에게서 귀신이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귀신이 쫓겨난 마음에 새로운 마음과 영을 채우지 못하였습니다.
그냥 빈 모습으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러자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며 쉴 곳을 구하지 못했던 귀신이 다시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 나중 형편이 이전보다 악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도둑질했던 자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은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자기의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거짓을 버리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해야 합니다.
더러운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선한 말을 해야 합니다.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 때 우리는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고 죄의 심판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정말 공평하십니다.
죄를 해결하지 않고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죄를 해결했으면 심판을 받지 않고 죄를 해결하지 못했으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까?
하나님은 죽을 자가 죽는 것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죽을 자가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 주에 대 각성 전도 집회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죽을 영혼을 살릴 수 있도록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우리가 감당해야 합니다.
죄와 심판에 대하여 공평하신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주님 앞에 나와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 구원의 길을 알려주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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