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편집 과정
Ⅰ. 성경은 어떻게 편집되었는가? <사 34:16>
1. 원본 없이 여러 사본을 베껴 만든 책을 완전무결한 성경이라 할 수 있는가?
솔직히 말해서 구약 39권의 히브리어 원본과 신약 27권의 헬라어 원본이 하나도 없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그 원문들을 베낀 여려 사본들을 대조하여 만들어 놓은 책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 것을 성경이라고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파괴하려는 고등 비평가들은 성경은 완전할 수 없다고 공박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 정통의 신학자들 중에도 학자의 양심상 시원한 해답을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 사본을 베낄 때도 어떤 사본에는 있고 어떤 사본에는 없기에 괄호를 하고 어떤 사본에는 없음이라고 해 놓은 곳도 있다. 예를 들면 막 16:9~20까지에 보면 페이지 하면에 “어떤 사본에는 9~20절까지 없음”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사본학자들이 성경은 절대로 가감할 수 없는 진리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사본에 있는 것을 써 놓았는데 원문에 없다면 더하는 것이 되고 또 어떤 사본에는 있는데 빠진 사본대로 빼놓았을 때 만일 원문에 있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성경을 감하는 죄가 되겠기에 이렇게 신중을 기하여 써넣고는 본문 아래에 <어떤 사본에는 없음>이라고 한 것이다.
2. 그럼 왜 원본이 없어졌는가?
대개 학자들은 세 가지의 이유로 말한다. ① 재료가 오래된 까닭이었다. ② 오래 두면 우상으로 섬기겠기 때문이었다. 왕하 18:4에, “모세가 만들었던 놋 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라는 말을 보니 영감 된 원본을 두면 우상화할 우려가 농후했기 때문이었다. ③ 원고를 오래 둘 필요가 없음을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이다. 책이 나오면 원고는 없애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 아닌가?
3. 원저작자가 기록한 원본이 없어도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사본이 12만 여권이나 되고 역문도 많아서 학자들은 이를 연구함으로 원문의 형식과 특색을 알아내는데 고충을 느끼지 않았다고 본다.
뵈트너 박사의 말에 의하면, 오늘에 가장 우수한 히브리어와 헬라어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사본 1000권 중 999권은 원본의 말씀이 무엇이었다고 확실히 알게 될 수 있을 만큼 사본한 자들이 바로 베꼈고 또 번역한 사람들도 신실하게 번역했다. 그러므로 사본도 본래 선지 사도들이 거룩한 것과 같은 것이다. 라고 했다.
4. 경건한 사본학자들의 노고를 감사하자.
사본학자들이 원문을 베낄 때 심히 조심하여 한 서기가 각자를 쓰기 전에 주목하여 큰 소리로 낭독을 했으며 특히 여호와의 이름을 쓰기 전에는 전신목욕을 하고 철필을 닦고 한 서기가 한자 쓰고 또 다른 서기가 한자 쓰고 했는데 만일 글이 바로 안 되었으면 전장을 불태웠다는 것이다.
우린 여기서 15세기 이동식 인쇄술이 발명될 때까지 성경의 모든 고대 기록물의 본문이 글자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를 애써 베껴져서 전달된 수고를 생각하고 신앙의 선배들에게 고마움을 느낄 줄 알아야겠다.
옛날엔 글을 토판, 돌, 동물의 뼈, 나무, 가죽, 여러 가지 금속, 질그릇 조각, 파피루스, 양피지 등을 재료로 삼아 써 왔다. 이중 신약 사본들은 파피루스 곧 갈대 같은 식물로 만든 종이와 양피지 곧 동물의 가죽에 쓴 것이었다. 교회 초창기에는 성경사본이 개인 자신이나 지방 회중을 위해 신약의 책 한 권이나 여러 권의 복사판을 가지기를 원하는 개인 신자들의 의해 만들어졌다. 특히 주후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신앙자유를 허용하면서부터 성경을 가지려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에 신약 책의 복사판을 생산하려는 상업적인 책 제작이 보편화되었다. 그리고 글을 쓰는 자들의 수고는 이를 말할 수 없었다. 무릎에 두루마리나 사본을 높고 대개가 바닥에 앉는 것이 습관이었다. 이러한 자세로 하루 여섯 시간씩 했다고 하니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것도 피곤한데 그보다 더 고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복사 때의 오랜 노동의 고생을 책 끝에 적어 놓은 것이 있는데 “글을 쓸 때는 등을 구부리고 위장에 갈비뼈를 쥐어박고 신체를 허약하게 한다” 또 다른 곳에는 “밖에서 심한 눈보라가 치고 서기관의 잉크는 얼고 그의 손은 얼어붙고 펜이 손가락에서 떨어져 나간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주의 일을 한다는 기쁨을 표현하기를 “여행자가 자기 고향에 돌아오는 기쁨과 같이 이 책 쓴다고 수고한 자의 기쁨도 크다” 또 어떤 사본 끝에는 “하나님께 감사할지어다.”라고 쓴 곳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렌델 헤리스란 사람의 계산법에 의하면 시내 산 사본 같은 완전한 신약성경을 생산하는 값은 약 3만 데나리온이라고 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의 노임에 해당된다고 했으니 우리나라의 노무자의 일당을 만원으로 계산한다면 베낀 신약성경의 값은 3억 원이 되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신자들은 예수를 아주 비싸게 믿는 셈이 되는 것이다. 인쇄술이 발달한 요즘 값싸게 성경을 구입할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하겠다.
5. 대부분의 사본이 4세기 후에 것이라면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믿을 수 있다고 성경으로 대답하겠다. 그것은 사 34:16에,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여기 모았다는 말은 편집을 했다는 말인데 이 편집을 불완전한 사람이 한 것이 아니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고 하셨으니 완전한 성령님이 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원본이 없고 비록 베낀 사본만으로 만들어진 책이라도 하나님의 섭리로 편집된 것이니 오류 없이 하셨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
6. 사본을 번역한 것도 원본과 같은 권위로 볼 수 있는 것인가?
현재 신구약 성경이 1100방언으로 번역되었는데 그 중 한국성경은 원본에 가장 가깝도록 되었기 때문에 권위 있는 책이라고 한다. 우리말로 번역된 성경은 1880년에 장로교 대표인 언더우드 목사와 의학박사 헤른 씨와 감리교 대표 아펜젤라 목사와 의학박사 스코란튼씨로 안국성경번역회를 조직했는데 그 중 한국인으로서 봉사한 사람은 이승두, 김승삼, 이창직, 정동명, 이원모 제씨이며 선교사들은 이납시, 기일, 할디, 케불, 왕길지, 배이양, 핏틀 등 일곱 분이었다. 1900년에 신약 27권을 필역했으며 1904년에서 1906년 어간에 수정했고 1920년엔 구약 39권을 필역했고, 1927년에 수정했다고 한다. 참고 성경은 히브리, 헬라의 원문과 중국, 일본, 영국, 라틴어와 그밖에 많은 나라들의 것을 대조하여 번역했다고 한다.
그럼 여기 문제가 되는 것은 원본도 아니요 사본도 아닌 역문만으로 우리가 신용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나는 충분히 신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 증거는 예수님도 사도들도 주전 200년경에 히브리어로 된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을 읽으시고 엄중히 인용하시고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모든 역문도 영감 된 글이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
7. 장로교의 기본교리를 파괴하는 선동자가 되지 말자.
대한예수교 장로회 신조 제1조에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즉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익이니라.”고 했다.
만일 원본은 영감 되고 사본 역문에는 영감이 없다고 한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아니며 장로교의 기본교리를 파괴하는 선동자인 것이다. 물이 가득찬 독에 조그마한 금만 가도 안 되는 이유는 시간이 흐르면 물이 다 새고 말기 때문이다. 우린 그리스도께서 구약을 번역한 성경을 가지시고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고 주장하신 것처럼 비록 번역된 성경이지만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신앙과 본문에 대해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 삼아야하겠다.
Ⅱ. 외경(外經)도 성경이 될 수 있는가?<계 22:18, 9>
신교와 구교는 비슷한 기독교라 하지만 많은 차이점을 갖고 잇다. 그 근본적인 원인을 규명하자면 성경관이 다른데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교에서는 신구약 66권만을 성경으로 인정하지만 구교에선 66권외에 많은 외경도 성경으로 보는데 있다. 그럼 외경도 성경이 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자.
1. 외경이란 어떤 책을 말하는가?
외경은 영어로 아포그리파라고 불린다. 이 작품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공백 기간 곧 4백년 어간에 기록된 것으로서 그 시대의 역사적 사회적 종교적 사정을 아는 데는 유용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외경의 책명은 에스드라 전서에서부터 매카비 후서까지 열다섯 권이다. 곧 에스드라 전서, 에스드라 후서, 토비트, 유디드, 에스더 부가서, 솔로몬의 지혜서, 전도서, 또는 시락의 아들 예수의 지혜서, 바룩, 예레미야서, 아자리아의 기도와 세 청년의 노래, 수산나, 종과 용, 마나세의 기도, 매카비 전서, 매카비 후서 등이다.
로마 교회서는 1546년부터 트렌트에서 모인 그들의 제19회 종교대회서 결정하여 이 외경들을 성경과 동일한 권위로 믿어 왔다. 또 영국의 성공회서는 준 성경으로 보고 있다.
참고로 구약외경의 일부로서 신교에서 위경(僞經)이라 부르는 것들이 있다. 위경이란 저자의 이름이 그 사람의 것이 아닌 거짓 이름이 붙어 있는 책들을 말한다. 이 위경의 저작연대는 주후 100~200년 사이로 본다. 이 책 중엔 ⌈에녹서⌋ ⌈솔로몬의 시⌋ ⌈이사야 승천기⌋ ⌈모세 승천기⌋ ⌈에녹의 비밀⌋ ⌈엘리야 묵시⌋⌈다니엘 역사⌋⌈아랍의 계약⌋⌈아브라함의 묵시⌋⌈욥의 아내의 애가⌋등이 있다.
그리고 신약에 속한 외경은 단편적인 것까지 종합해서 2백여 권이 있다. 그 중 중요한 책들을 분류하면
① 복음서에 관계되는 것들은
⌈히브리인 복음서⌋⌈애굽인 복음서⌋⌈에비오나이트 복음서⌋⌈도마복음서⌋⌈야고보서 혹은 원시복음서⌋⌈니고데모 복음서 혹은 빌라도의 행적⌋ 등이다.
② 사도의 행전에 관계되는 책들은 ⌈요한행전⌋⌈바울행전⌋⌈베드로행전⌋⌈안드레행전⌋⌈도마행전⌋등이다.
③ 사도의 서신에 관계된 책들은 ⌈아부가루와 그리스도의 왕복문⌋⌈렌툴루의 서신⌋⌈사도서신⌋ 등이다.
④묵시에 관계된 책들은
⌈베드로 묵시록⌋⌈바울 묵시록⌋⌈도마 묵시록⌋등이다.
이 외에도 마리아 승천기, 베드로 복음서, 위(僞) 마태전 복음서, 마리아 탄생기, 유아 그리스도의 아라비아 복음서, 목수 요셉의 복음서, 클레멘트의 고린도 전후서, 바나바서신, 익나디오의 7서신 폴리갑의 빌립보서, 허마서 등등 수다하다.
2. 신교에서 로마교의 외경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1) 역사적으로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구약 39권은 성경으로 인정했지만 외경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명한 유대인 역사가 요세보스는 “예언적 시대는 모세로부터 아닥사스다 때까지”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로마교의 외경은 아닥사스다 때보다 훨씬 후대의 기록이니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2) 구원교리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받을 수 없다.
예를 들면 토비트 외경에는 인간이 십자가의 공로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가 구원의 공로가 되는 것으로 가르치며 또한 구제사업이 죽은 자를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치니 이는 모순천만이다. 토비트 4:10에 “자선은 자선을 베푸는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내고 암흑에 빠지지 않게 해주는 것이다”라고 했고 12:9에도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내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버립니다.”라고 했다. 또 바룩 3:4엔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주 하나님, 죽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드리는 기도를 들어 주소서. 그들은 당신께 죄를 지었고 그들은 주 하나님이신 당신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다 이렇게 성경과 전혀 다른 말이니 받을 수 없는 것이다.
3) 도덕적으로 받을 수 없다.
유디드 외경에는 유디드가 하나님의 은총과 보호를 받는 자로서 기만과 거짓된 생애를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9:10, 13). 또 솔로몬의 지혜서와 전도서란 외경에는 도덕생활에 있어서 편의주의가 정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도덕생활에 있어서 편의주의가 정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도덕생활에 있어서의 편의주의나 거짓된 것과 불건전한 내용이 내포되어 있는 외경을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주신 성경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4) 로마 교회가 외경을 성경으로 정한 일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로마교에서는 성경의 권위를 정하는 것이 교회에 달려 있다고 하지만 교회는 성경을 지배할 권한이 없고 성경이 교회를 지배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교회의 산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경을 좌우한다면 이는 개가 꼬리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격이 되고 마는 것이다.
5) 영감서가 아니므로 받을 수 없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어간에 기록된 15권이나 되는 외경을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한마디도 인용을 하지 않았다. 이는 외경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외경은 성경이 될 수 없는 것이다.
3. 외경이 내포된 한글 ⌈성서⌋를 배격해야 된다.
우리는 한글 성경번역의 역사적인 과정을 살펴보고 후대 신자들을 바르게 지도해야 하겠다. 본래 한국교회는 정통의 신앙과 생활의 순결을 이념으로 하는 보수계통의 선교사들로 말미암아 복음을 바로 받은 축복의 나라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는 말씀대로(마 13:25) 일정말엽부터 자유주위신학에 물든 선교사와 해방전후에 외국에 가서 신학을 연구한 사람들 중에 그런 사상에 감염된 분들이 신학교에서 교수하게 되니 보수와 진보로 교파가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그들이 주축이 되어 한글성경 번역위원회가 1957년 5월에 조직이 되었는데 박대선, 김정준, 이여진, 정경연, 문익환, 김철손, 김용옥, 장하구, 지동식, 윤성범, 김찬국, 박창환 제씨였다. 이들을 성서공회에서 흡수하여 만 4년이 걸려 1967년 12월 15일에 ⌈신약 새번역⌋이 나왔다. 그리고는 1968년 2월 15일 신구교성서번역 공동위원회를 조직했다. 위원장엔 김정준, 서기에 정용섭, 위원에 배제민, 문익환, 서종완 신부였다. 본래 5년을 계획했지만 예상외로 11년이 걸려 1977년 부활절에 ⌈성서⌋란 이름에 부제로 <공동번역> <외경포함>하고 초판이 발행되었는데 그 중에 외경 9권이 삽입되어 있다.
여기 문제점이 많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성경 아닌 외경을 포함시켜 평신도들로 하여금 외경도 성경이란 인식을 가지게 했으며 성경 아닌 외경을 성경으로 믿는 천주교와 신교가 같은 것이라는 인식을 준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경과 외경을 따로 했을 뿐 아니라 외경 에스드라 6:27을 정경 에스라 6:6에 번역한 것은 절대 가감할 수 없는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을 마음대로 빼고 더한 죄를 범하고 만 것이었다. 합동측 총회신학 윤영탁 교수는 “성서공회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 존재하는데 일제시만 해도 일정 하에서 저항하며 말씀을 지켜오더니 왜 지금까지 한 번도 넣은 적이 없었던 외경을 넣었느냐?”고 공박질문 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다행한 것은 여기에 반대하여 ⌈생명의 말씀사⌋주최로 유능한 보수주의 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신약은 보수주의 신학계의 유능한 어학자 4명이 1974년 3월에 번역에 착수하여 이미 끝났고 구약은 역시 보수주의 신학계의 유능한 어학자 3명이 1976년 3월에 착수하여 많은 진척을 보았는데 1985년 말에 햇빛을 보게 될 예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주의 학자들과 손을 잡고 바르지 못하게 성경을 번역한 성서공회를 지탄해야겠고 만난을 무릅쓰고 가장 위대한 보수적인 성경번역에 나선 ⌈생명의 말씀사⌋와 그 번역 진을 위해 기도하며 협조를 아끼지 말아야겠다.
Ⅲ. 39 27의 성경
딤후 3:16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했고 벧후 1:21은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했으니 성경은 불완전한 인간이성의 지적 산물이 아니고 영감 받아 기록된 완전한 말씀인 것이다.
특히 사 34:16에,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곧 편집도 하나님이 하셨으니 성경은 사람의 책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책임이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신신학자들은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도 있고 사람의 말도 있고 짐승의 말도 있고 마귀의 말도 있다”고 하면서 전적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최고의 권위자 예수님은 마 5:18에서,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셨고 특히 요 10:35에 보니 구약 시 82:6의 신이란 한마디를 인용하시면서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라고 축자영감설을 주장하셨다. 그러므로 신신학자들의 말은 잘못된 것이다.
물론 성경엔 마귀의 말, 짐승의 말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께서 저자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었으며 또 그들의 말은 인용했다고 해서 저자의 권위에 하등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책 중에 다른 사람의 말, 글을 인용했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또 사람의 말이 있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주가 시켜서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영감된 것이 틀림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고전 7:12에,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곧 자기 말이라고 했지만 40절에,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 했으니 그 말 역시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말한 것이니 사람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성경은 구약은 39권 신약은 27권으로 되어 있는데 구약은 그리스도의 오실 것을 예언했으며 신약은 예언대로 오신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39 27의 성경’이란 제목으로 신구약의 줄거리를 개론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1. 구약 39권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다.
① 율법 곧 모세 5경 곧 창세기로부터 신명기까지는 행위계약과 그 연장인 율법을 선민에게 주사 지키게 하신 것을 말한다. 특히 흠 없는 동물제사는 율법을 범한 연약한 인간은 오직 죄 없는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만 구원받는 것을 계시하신 말씀인 것이다.
② 사기(士記) 곧 이스라엘의 국민 생활인데 여호수아로부터 에스더까지 12권이다. 이는 율법을 받은 선민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허락의 땅에 들어갔지만 생활이 평안하니 마음이 주께로부터 멀어져 우상을 섬기므로 외적의 침략을 받은 일과 회개하면 사사(士師)와 왕들을 세워 구원하신 일과 마침내는 이방의 포로가 되고만 사실을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을 역사적으로 보여 주시고 사사와 왕들을 세워 구원하는 것은 구원자 그리스도를 그림자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③ 시가(詩歌)인데 욥기에서 아가 서까지 5권과 예레미아애가 1권을 합친 6권을 말한다.
이는 타락한 백성 중에서 충성된 종들이 나타나 율법을 묵상하며 영교에 깊이 들어가 구원의 은혜와 평강을 노래한 것을 말한다. 이 중 욥은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에 동참한 것은 복음은 유대인의 독범 물이 아니라 전 인류 누구든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차별 없이 받는 축복을 말하는 것이다.
④ 선지서인데 대선지 4권 소선지 12권 합 16권을 말한다. 이는 장래 일을 계시로 받아 선민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이 약속으로 소망을 주는 글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구약 39권을 가리켜 요 5:39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고 하셨고 눅 24:27에선, “이에 모세와 및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성경에 쓴 바 자기의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구약 39권은 보이지 않는 바다 밑에 얼음덩어리요 신약 27권은 바다 표면에 돌출한 빙산의 일각과 같고 도 구약은 보이지 않는 나무뿌리요 신약은 보이는 나무 잎 꽃 열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을 깊이 연구하여 그리스도를 자세히 설명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2. 신약 27권은 예언대로 오신 그리스도의 구원완성을 말한다.
① 4복음서 곧 마태복음에서 요한복음까지 4권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심과 지옥고를 대신한 십자가의 저주의 죽음과 영광의 부활로 구원을 성취한 것을 말한다.
② 사도행전은 사복음서에서 부름 받고 훈련받은 사도들이 성령의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한 역사를 말한다.
③ 교리와 생활인데 곧 로마서에서 유대 서까지 21권은 사도들이 영감을 받아 편지를 쓴 것이었다. 이것이 기독교 신학의 체계를 세운 것이었다.
④ 계시록은 총 결론인데 재림의 그리스도를 보여 주사 핍박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고난을 참으며 새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무궁세계를 보여 주시며 주님을 영접할 준비를 게을리 말라고 권면하는 글이었다.
맺는 말
39 27 합 66권을 성경이라 부른다. 이는 이 책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뜻하는 말인 것이다. 왜냐하면 성(聖)은 히브리어로 ‘코테쓰’니 구별한다. 또는 세속을 떠나 하나님과 관계된다는 뜻이며 경(經)은 헬라어로 ‘카논’이니 척도(尺度) 표준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살전 2:13의 말씀과 같이 사람의 말로 받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시 19:7처럼 영혼이 소성되며 히 4:12처럼 운동력이 있는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는 신앙생활이 되어야겠다.
Ⅳ. 구약과 신약이란 무슨 뜻인가?
우리가 아는 대로 성경은 39권의 구약과 27권의 신약으로 나누어져 있다. 약(約)이란 말은 계약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구약은 옛 계약이란 뜻이고 신약은 새 계약이란 말이다. 계약을 영어로 ⌈테스터먼트⌋라 한다. 그래서 구약을⌈올드 테스터먼트⌋ 신약을 ⌈뉴 테스터먼트⌋라 부른다.
1. 구약 곧 옛 계약에 대하여
옛 계약은 하나님과 시조 아담과의 사이에 맺은 행위계약을 말한다. 행위계약이란 창 2:17의 말씀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소극적인 계명과 창 3:22의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고 영생”하는 적극적인 계명이었다. 한마디로 하면 순종을 조건으로 하는 영생의 계약이었다. 그러나 대표자 아담은 일방적으로 이 계약을 파기하고 말았다.
그 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중 모세를 대표자로 세워 행위계약의 연장이며 재확인격인 율법을 주어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 역시 불순종으로 끝나고만 것이었다.
물론 창 3:15에, “여인의 후손” 그리스도를 허락하사 그분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길을 시대마다 약속하셨으며 특히 멀리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흠없는 짐승을 대신 죽여 속죄 받는 길을 마련하긴 했지만 구약전체의 흐름은 행위계약과 율법의 저주아래 사는 이스라엘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이 구약이었다.
2. 신약 곧 새로운 계약에 대하여
새 계약이란 은혜계약을 말한다. 은혜 계약이란 첫 아담이 실패한 행위계약 또 이스라엘이 불순종한 율법을 마지막 아담이신 완전하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완전히 순종하시고 그 형벌인 죽음, 한 걸음 나아가 영원한 둘째 사망 곧 지옥의 저주를 십자가로 친히 담당하사 죽으셨다가 3일 만에 사망의 권세를 정복하사 부활하신 그분을 마음에 믿기만 하면 첫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굴러 넘어온 것처럼 그리스도의 의가 굴러 넘어와서 죄사 함을 받아 영생을 얻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구속사업을 이루어 가시는 내용이 수록된 것이 신약인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성경을 구약 신약이라고 분류해서 부르는 것은 인류의 구주 그리스도를 기점(起點)으로 해서 그 이전에 하나님과 아담, 하나님과 모세 곧 이스라엘 사이에 율법을 통해서 맺어진 계약을 구약이라 하고 그리스도 이후에 그 분이 이루신 속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전 인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을 신약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구약 신약은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 안에 신약이 있고 신약 안에 구약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구약 신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신앙과 생활의 규범으로 삼아 주께 영광을 돌리는 신자가 되어야겠다.
Ⅴ. 성경기록의 목적 <요 20:31>
세상의 물건 중에 목적 없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 책은 읽고 배우기 위함이고 만년필은 글을 쓰기 위해 있듯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전 1500년에서 주후 95년까지 약 1600년이나 걸려서 기록되고 편집된 성경이 어찌 목적이 없겠는가! 그럼 성경을 인류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1.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으라는 것이다.
요 20:31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인 동시에 전체 성경을 기록한 목적도 된다.
그럼 왜 인류는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그것은 시조 아담이 하나님과 맺은 행위계약 곧 선악과를 먹으면 죽고 생명과를 먹으면 영생하리라는 계명을 어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범죄 했지만 대표자의 자격으로 범했기 때문에 전 인류가 범죄 한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롬 5:12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하였다. 여기 사망이란 뜻은 소멸이 아니고 단절(斷切)고 끊어짐을 말한다. 첫째, 하나님과의 영적축복 상태에서 끊어지고 둘째, 영과 육이 갈라지고 셋째는, 영육이 합해서 영원한 지옥에 버림을 당하는 둘째 사망을 말한다. 그러고 보니 행위계약을 어긴 궁극적인 형벌은 영원한 지옥이요 그 표면적인 것은 육체의 죽음이다. 이 죽음은 아무도 피할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의 형벌이 전 인류에게 적응된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예로부터 이 죽음 문제를 해결하려고 많은 사람이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진시왕은 죽지 않으려고 불사약을 구하기 위해 500의 동남동녀를 사방 여러 곳에 보내었으나 찾지 못하고 죽었으며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어린 아이가 있다. 누구든 만일 그 두려움을 일소할 만큼 확실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해 나는 어떠한 비용, 어떠한 먼 길도 사양하지 않으리라”고 했으니 사실 인간 최대의 고뇌는 죽음이요 그것을 아무도 넘어갈 수 없는 것이다. 설사 지구상의 사형법이 모두 폐지된다고 해도 인간에게 내린 하나님의 형벌인 죽음은 폐지되지 않는 것이다.
그럼 왜 죽음문제를 인간 스스로가 해결할 수 없는가? 그것은 본질과 속성에 변함이 없는 하나님이 내신 행위계약의 형벌이기 때문이요 또한 인간이 타락으로 전적 무능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제 해결의 열쇠는 하나님만이 갖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는 질문에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다(마 19:25,6).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해결하시는가?
대표자 아담이 범죄 하므로 파기된 행위계약 대신 다른 계약 곧 은혜계약을 세우셨는데 그것은 마지막 인류의 대표자 여인의 후손이신 그리스도를 허락하사 그를 땅위에 죄 없이 나게 하시고 행위계약의 연장인 율법을 완전히 지키게 하시고 저주받은 인류를 대신하사 영원한 지옥저주의 고통을 홀로 나무에 달려 죽게 하시고 죄가 없으니 죽어도 다시 살게 하시고 그의 하신 일이 죄인을 용서하는 길임을 알고 믿기만 하면 첫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굴러 넘어오는 것처럼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의 의가 믿는 자에게 굴러 넘어 와서 그의 의로 죄사 함을 받아 예수님처럼 부활 승천 영생하리라고 약속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롬 5:19에,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하셨으니 전자는 아담으로 말미암은 행위계약의 실패를 말하고 후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은혜계약의 성공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기록의 목적은 범죄 타락하여 지옥 갈 인류를 대신하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으라는 것이었다.
2. 믿음으로 행하여 상 받으라는 것이다.
혹은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믿고 행함으로 구원 받는다.”고 하나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만이 받는 것이다. 물론 믿는 자에겐 행위가 뒤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약 2:26은 밝히기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했다. 그러나 고전 3:10~15에 밝히기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의 요점은 터는 믿음이요 행위는 집으로 비유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터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는 사도들의 신앙고백대로 믿는 것이요 집은 공력(功力)곧 사람의 노력인데 금과 은과 보석의 집은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신본주의 생활을 말하고 나무와 풀과 짚의 집은 구원을 받았으나 감사함이 없이 부득이 행하는 인본주의 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에서는 잘 밝혀지지 않다가 나중 재판장이신 주께서 심판하사 밝히시는데 이를 불로 태우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곧 금과 은과 보석의 집 곧 신본주의 행위는 불타지 않고 남을 것이고 나무와 풀과 짚의 집은 불타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행위냐? 불신앙의 행위냐? 를 구별 지어야겠다.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지사충성한 바울 사도는 임종이 가까워짐을 깨닫고 딤후 4:6~8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적재적소라는 말대로 받은 달란트대로 일해야겠다. 그래야 성과가 오르는 것이다. 갈 2:9에 보니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로,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활약했다는 말이 바로 그런 뜻이다.
그리고 우리의 행위에 결코 공로적 성격(功勞的性格)이 없음을 알아야겠다. 다시 말하면 마땅히 한 일이니 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눅 17:10에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고 하셨다. 그런데 상을 주신다고 하니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하게 하사 상주는 것이니 이것 또한 은혜라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고전 15:10에서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가 다른 사도보다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한 말이 바로 그런 뜻이었다.
맺는 말
목적 없는 피조물은 하나도 없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랴! 그럼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요리문답 1은 밝히기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니라.”고 하셨다 .주를 영화롭게 하는 것은 믿음뿐이다. 그러므로 히 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아 주를 기쁘시게 하자. 그리고 그 구원의 하나님 곧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즐거워하고 주안에서 말씀을 지키고 살자. 그리하면 영원한 상급을 받을 것이다.
[출처] 제4부, 성경의 편집 과정|작성자 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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