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

하나님아들 2024. 11. 13. 22:58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1-3절)

ⓛ 본서의 핵심 부분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이다. 특히 7장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으신 완전한 제사장되심이 언급한다.

② 멜기세덱은 의(義)와 평강(平康)의 왕인 동시에 하나님의 제사장이며,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고,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한 존재, 즉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에 비유될 수 있는 위대한 존재이다.

③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약속의 씨가 생기기 이전부터 우리의 구원을 권념하시고 계획하셨다. 당시 아브라함에게는 약속의 자녀인 이삭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자녀가 될 이후의 모든 자손들을 위하여 메시야를 보내실 것을 멜기세덱을 통하여 보여 주셨다. 결국 이렇게 볼 때 역사적 우연이나 무작위적 선택에 의하여 된 것이 아니라 오직 치밀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 제사장으로서의 멜기세덱의 존귀함(4-10절)

ⓛ 1-3절에서 멜기세덱이 어떠한 존재였는가를 선언적으로 언급한 뒤 본 단락에서는 그러한 멜기세덱이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제사장직을 담당했던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보다 어떻게 우월한가를 논한다.

② 멜기세덱이 레위 지파의 제사장보다 우월한 증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이 레위 지파의 조상인 아브라함보다 높은 위치에서 아브라함이 바치는 십일조를 받았다.

둘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보다 낮은 위치에서 멜기세덱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

셋째, 레위 지파는 십일조를 받았으나 죽었고 멜기세덱은 산다는 증거를 얻었다.

넷째, 엄밀한 의미에서 레위 지파도 아브라함의 허리 안에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
즉 저자는 멜기세덱이 이스라엘의 육적 조상인 아브라함 보다 우월함을 증명함으로써 혈통 상 아브라함의 후손인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보다 멜기세덱이 우월하다는 것을 논증한다. 이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하나님의 참된 대제사장이 되신 그리스도가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보다 우월하고 온전한 대제사장이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

③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리스도의 그림자인 멜기세덱에게 자신이 가진 소유의 십분의 일을 드린 것처럼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인 현대의 성도들도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구속 주되신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우리의 소유를 바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릴 때에 ‘좋은 것’으로 드린 것처럼(4절) 우리도 하나님께 예물을 바칠 때에 우리의 가장 좋은 것을 먼저 떼어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성도라면 마땅히 수입이 생기면 가장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여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를 우선 메어 놓되 가장 깨끗한 것으로 떼어 물질과 마음을 정성 스럽 게 바치는 올바른 헌금 생활의 습관을 길러야 한다.

▣ 강해주석

1절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 창 14:17-20에 보면 멜기세덱은 아무런 사전 언급이나 그의 족보에 대한 소개 없이 갑자기 등장한다. 즉 아브라함이 4왕들을 쳐부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살렘 왕 멜기세덱이 갑작스레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다. 한편 ‘평강’이란 의미를 지닌 ‘살렘’ 에 대해서는 예루살렘을 가리킨다는 견해와 세겜 골짜기의 ‘살렘’을 가리킨 다는 견해가 있다. 이에 관해 많은 학자들은 시 76:2에 근거해 ‘살렘’이 예루살렘의 옛 지명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멜기세덱은 고대 예루살렘의 왕이었던 셈이다.

② ‘지극히 높다’는 말은 아무도 그에 미치지 못할 하나님의 초월적 신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멜기세덱은 살렘 왕으로서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는데 제정(祭政)이 정확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았던 고대 사회에서는 이처럼 왕이 사제직을 동시에 겸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멜기세덱의 이중직임은 아론 자손과의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데 아론 자손은 오직 제사장직만을 수행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직임의 우월성을 예시해 준다. 즉 멜기세덱의 실체에 해당하는 그리스도 역시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과 달리 왕권과 제사장직을 동시에 지니신 분이시다.

2절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 십일조의 효시를 보여준 사건으로 멜기세덱의 축복에 감사하기 위해 아브라함이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바친다. 아브라함의 그러한 행위는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을 인정한 행위였다. 즉 멜기세덱이 아론 계통의 제사장 직분이 세워지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인정받은 자였듯이, 그리스도 역시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세우신 자이다.

② 히브리어로 멜기세덱은 ‘나의 왕은 의이시다’는 뜻이다. 그리고 ‘살렘’은 ‘평강’이란 뜻이다. 저자가 이 같은 멜기세덱의 이름과 살렘의 뜻을 설명하고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와의 연관성을 말하기 위함이다. 즉 의와 평강은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속성으로서 그분은 장차 공의로 사람들을 통치하실 자이며 사람들에게 참된 평강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자이시다. 저자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속성을 멜기세덱에게서 찾고 있다.

3절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라는 것은 사람이 아닌 신적존재를 뜻하는 표현이다. 때문에 유대인들은 멜기세덱의 기원에 관하여 갖가지 추측을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미가엘 천사로, 또 다른 이는 노아의 아들인 셈의 후손으로 추정하였다.

② 부모나 족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그가 제사장이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한 것이었다. 레위 지파 제사장의 경우, 아비는 아론의 후손이어야 하고 어미는 레위 지파의 정숙한 여인이어야 했다. 그러나 멜기세덱이 제사장이 된 것은 그 같은 조건을 초월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그림자였다. 다시 말해 저자는 멜기세덱을 신적 존재나 반(半)신적 존재로 높이기 위해서 본 절과 같은 말을 한 것이 아니다. 단지 그는 이로써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직을 예시하는 것임을 말하려고 한 것이다. 즉 아론 계통의 제사장 이전에 하나님께 기원을 둔 제사장 멜기세덱이 있었는바 그는 곧 영원한 대제사장 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③ 성경에서 멜기세덱의 출생과 죽음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저자는 이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경우와 비교하여 유사성으로 삼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시작도 끝도 없으신 영원 자존하시는 분이신데 이는 그 시작과 끝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는 멜기세덱의 경우와 유사하다.

④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 멜기세덱이의 죽음에 관한 성경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니 그를 영원토록 제사장으로만 기억할 수밖에 없다. 또한 그리스도도 본질적으로 영원 자존하시는 분이니 그의 제사장 직임 또한 영원한 것이다.

4절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 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바쳤다는 사실은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이 레위의 제사장 직분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증거 한다.

② 아브라함은 전리품 중 가장 좋은 것으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다. 십일조는 레위인들이 일반 백성들로부터 받아 분깃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레위인들은 이중에서 다시 십분의 일을 구분하여 제사장들에게 바쳤다.

③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는 것은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을 인정하는 것이자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한 자였음을 시사해 준다.

5절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란 아론 가문의 자손들을 가리킨다.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란 아론 자손도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에게서 비롯된 동일한 후손들임을 의미한다. ‘허리’는 ‘생식의 근원’을 의미한다.

② 이처럼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이 일반 백성과 다름없는 동일한 아브라함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십일조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그렇게 규정해 놓으셨기 때문이었다.
③ 멜기세덱은 율법으로 규정되지 않는 제사장이다.

6절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 레위 지파 제사장들은 율법의 규정에 따라 백성들에게서 십일조를 받았으나 멜기세덱은 레위 지파에 속한 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레위 지파 제사장들보다 더 우월한 멜기세덱의 우월성을 보여 준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예표적 인물인 멜기세덱이 레위 지파 제사장보다 우월했던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레위 지파 자손은 아니더라도 레위 지파의 제사 장보다 더 우월한 제사장이심을 예시해 준다.

② 여기서 ‘약속 얻은 자’란 하나님께로부터 가나안 기업에 대한 약속과 자손 번성에 대한 약속을 받은 자인 아브라함을 가리킨다.

7절 “논란의 여지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멜기세덱이 신적 권위를 지니고 있었기에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베풀 수 있었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축복할 때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권위를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남에게 축복을 베푸는 것은 신분상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할 수 있는 행위 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약속을 받은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멜기세덱에게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더 높은 자였으며 그만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 멜기세덱도 실상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자였으니 그 실체인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하여선 새삼스럽게 더 말할 필요가 없다.

8절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 ‘여기는’은 레위 지파에 속한 제사장들을 지칭하는데 이들은 다른 사람과 마찬 가지로 육신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자들이다. 이러한 그들의 죽음은 그들의 제사장 직분 수행과 그들의 십일조 수절 행위에 종지부를 찍었다?

② ‘저기는’은 멜기세덱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라도 멜기세덱은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3절)고 칭함 받을 수 있었다.

③ 저자는 이러한 멜기세덱과 죽을 수밖에 없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을 비교하여 멜기세덱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드러낸다.

9절-10절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 ‘할 수 있나니’의 헬라어 ‘호스 에포스 에이페인’은 신약성경에서 본서에만 등장하는 저자 특유의 표현이다. 본서의 저자는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길게 다루지 않고 주위를 환기시켜 간결하게 끝맺고자 할 때 이런 표현을 주로 사용하였다.

② 레위 지파 제사장들은 율법의 규정에 따라 백성들로부터 십분의 일을 받을 권리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그들도 아브라함을 통하여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레위 지파 제사장들이 직접적으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레위 인들은 혈통 상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며 아브라함은 그들의 조상으로서 그들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는 자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은 그들 모두를 대표한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즉 아브라함과 레위 자손들은 그들 모두를 대표하는 자인 아브라함 한 사람 안에서 연합되어 둘 다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셈이다.

▣ 보충자료 1

◆ 의의 왕, 평강의 왕 멜기세덱

멜기세덱을 번역하면 '의의 왕' 또는 '평강의 왕'입니다.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살렘을 통치하는 왕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의와 평강의 왕으로서 이 땅에 오시어 십자가의 구속을 이루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다스리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으로서의 통치는 복음 안에서 오늘날에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되어질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성도는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의와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순종하여 의로운 삶을 살아서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참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 아버딘 조직신학 출신 레담의 기독론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논하면서 레담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되심이 여호와의 불변하는 맹세를 따라 된, 따라서 더 오래되었으며, "영원한 제사장"인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것임을 강조한다. 특히 레담은 창세기 14장을 언급하면서 여기 나타난 멜기세덱의 축복은 12장의 하나님의 축복과 병행되므로, "그런 의미에서 멜기세덱은 그를 통하여 약속된 언약의 축복이 전달되고, 심지어 중재된다고도 할 수 있는 분으로 볼 수 있다"고 까지 말한다(109). 그래서 결국 멜기세덱은, 마치 아론이 모세 언약의 제사장이었듯이, 아브라함 언약의 제사장이라고도 말한다. 그리고 이 아브라함 언약과 연관된 멜기세덱의 제사장 됨은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제사장 됨에 대한 논의에서 흥미로운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유일하신 제사장 되심에 근거해서만 우리가 "제사장 나라"라고 불려 질 수 있는데, 이는 개인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집합체로서의 교회에게 적용되는 것임을 잘 지적한 점이다.

◆ 십일조

십일조에 대한 단편적 언급은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되나, 완전한 규례로서의 언급은 레 27:30-33과 신 12:5-12에 나온다. 즉. 이 부분에서 모세는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두는 모든 생산물의 1/10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함을 교훈했다.

ⓛ 기원

제사장을 봉양하거나 다른 종교적 목적을 위해 재산이나 생산물의 1/10을 바치는 십일조 관습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셈족이나 다른 고대 문화권에서도 널리 시행되어 왔다. 그러나 다른 문화권에서의 십일조 제도는 피지배자에 대한 지배자의 권한을 확인하기 위해 시행된 세금의 일종으로서 수탈적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자신의 모든 소유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여 자발적으로 바치는 성경적 십일조와는 엄연히 다른 성격을 지닌다. 한편 성경에 언급된 최초의 십일조에 대한 기록은 아브라함이 그 전리품 중 1/10을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준 것에서 발견된다.

② 종류

일반적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입장에서는 두 가지로 구분된다.

ⓐ 제1십일조: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일만 하는 책임이 주어진 레위인의 생활을 위해 나머지 백성들은 자신의 소득의 1/10을 바쳐야 했다. 그러면 이번에는 레위인들이 자신들이 받은 것 가운데 다시 10분의 1을 제사장에게 바친 것으로 추정된다.

ⓑ 제2십일조: 제1십일조를 바친 그 나머지 부분(9/10) 가운데 다시 1/10을 취하여 성소로 가져가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성소가 너무 멀면 현금을 가지고 가서 성소 부근에서 잔치 예물을 살 수도 있었다. 이를 ‘축제 십일조’라고도 한다. 한편 안식년을 기준으로 제 3년과 6년에는 제 2십일조를 성소로 가져가 잔치를 베푸는 대신 자신이 살던 성읍에서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들을 구제하는 기금으로 사용했다. 흑자는 이를 따로 구분하여 제 3십일조라 부르며 안식년 기준으로 제 3년과 6년에는 각기 제 1, 2, 3십일조를 모두 드렸다고 본다.

③ 의의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단순히 레위인과 제사장의 생계유지나 성전 수리 혹은 친교를 위한 목적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소득의 일부를 바치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책임을 다한 것도 아니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이며 피조물은 그 은혜로 살아감을 고백하며 이를 감사하는 최소한의 신앙적 표시이다. 따라서 성도는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을 드리되 인색함으로 바쳐서는 안 되며 자신이 모든 재산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청지기임을 고백하는 자발적 심정으로 드려야 한다.

◆ 십일조 외의 헌금

히브리인은 십일조 이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예물을 하나님께 드렸다. 즉. 그들은 곡식과 과일은 물론 양털과 같은 다양한 소득의 처음 것을 당연히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바쳤으며 이를 큰 예물이라 불렀다. 율법 해설서인 미쉬나(Mishna)에 따르면 이것은 소득의 1/40一1/60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율법은 전체 소득에서 먼저 큰 예물(1/40~1/60)을 제하고 그 가운데서 다시 제 1십일조(1/10),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제한 것 가운데서 다시 제 2십일조(1/10)를 드릴 것을 규정하고 있다. 또한 때에 따라 히브리인들은 번제 소재 화목제 속건제 등 여러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별도의 예물을 바쳤으며 성막 건축 등 특별한 사업을 위해서도 헌금을 드렸다. 그렇다면 우리의 헌금하는 태도는 어떤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 십일조를 드리는 자세
ⓛ 자원하여 드림

십일조 헌금은 다른 헌금과 마찬가지로 자원하여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살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형식상 억지로 드리거나 기쁜 마음으로 바치지 않는 예물은 결코 받지 아니하십니다. 진정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넘칠 때 헌신의 마음이 넘쳐 표현되는 것입니다.
② 구별하여 드림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 헌금도, 드리는 사람이 정성껏 분별하여 드려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생각하면서 십일조 헌금을 하나님께 드려서는 안 됩니다.
③ 아낌없이 드림

근본적으로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십분의 일만 하나님의 것이고 십분의 구는 내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십분의 일은 그 모든 것을 대표해서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물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낌없이 드려야 합니다.

▣ 보충자료 2

철저한 십일조를 드린 사람들

미국의 부호 록펠러는 소년 시절에 공장에 다니며 주급 1불 50전을 타왔는데 어머니가 그 돈을 무릎에 놓고 십일조를 가르쳐주어 시작한 것이 엄청난 금액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세계 최대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Willam Colgate는 집안이 너무 어려워서 16살 때 비누 공장 할 꿈을 가지고 뉴욕으로 가던 중 운하의 선장인 노신사를 만나 자기의 꿈과 포부를 말했더니 “앞으로 뉴욕에서 제일가는 비누회사 사장이 나타날 터인데 바로 네가 그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질 좋은 비누, 정량의 비누를 만들 것과 수입의 십분의 일을 정확히 드리라고 일러주었을 때 그 말을 명심하고 실천하여 큰 거부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1/10을 드리다가 그 다음 2/10, 다음 3/10, 나중에는 5/10를 드렸는데 큰 거부가 되었습니다. 아침 식사로 먹는 오트밀, Quaker Oat Co. 사장, 그로웰도 십일조로 거부가 된 사람이고 Ivory 비누로 유명한 아이보리, 맨솔래담으로 유명한 하이드는 그 옛날 10만 불의 부채가 있는 상태에서 십일조를 드리다가 거부가 되었고 치즈왕 크래프트도 십일조를 드려 거부가 되었고 기관차를 만들어 거부가 된 마티아스 볼드윈씨도 철저한 십일조 생활로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플라스틱 제품의 왕자라고 할 수 있는 스탠리 탐은 처음에 십일조를 해도 실패를 보았다가 전체 운영권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 전부를 드리고 자기는 봉급만 받는데도 엄청난 거부가 되었습니다. 세계에 호텔 체인을 가지고 있는 Holyday Inns의 사장, 웰리스 존슨도 십일조로 거부가 된 사람입니다.

소똥 십일조

몽골에서 사역을 하시는 선교사님께서 소개한 이야기입니다. 몽골교회 주일예배 때였습니다. 말씀을 마치고 헌금을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때 한 성도님이 손을 높이 들더니 질문이 있다고 했습니다. "목사님, 아무거나 십일조해도 되는 겁니까?" "그럼요, 하나님께 받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리면 되는 겁니다." 성도님은 대단히 기뻐했습니다. 헌금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도님이 큰 자루 하나를 들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작은 헌금 바구니에 도저히 넣을 수 없었기 때문에 헌금 바구니 옆에 두었는데 목사님은 그것이 무엇인가해서 자루를 풀어 들여다보았습니다. 내용물은 소똥이었습니다! 몽골에서 소똥은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겨울이 되어 벽에 소똥을 바르면 난방효과가 탁월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소똥은 8월 중순부터 6월초까지 눈이 펑펑 쏟아지는 몽골에서는 뗄 감으로도 아주 유용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겨울을 나려면 적어도 26만 원 가량의 난방비가 필요한데 몽골에서 신입선생님의 월급이 4만 5천원이니 비용은 보통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정말 그 나라에서 소똥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소똥 냄새가 교회를 진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목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함께 기도합시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 이 성도님의 가정에 만 배의 축복을 허락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그런데 놀라운 일은 다음날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마을의 모든 소들이 그 성도님 집 앞에 몰려와 볼일을 보더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소똥이 쌓여 갔습니다. 그 해 그 성도님은 엄청난 소똥 덕분에 뗄 감 비가 전혀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은 소똥은 이웃에 팔아 생활비를 벌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성도의 순수한 십일조 헌신을 기쁘게 받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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