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신
마태복음 13 : 18 - 23,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신이 참된 하나님의 자녀인지, 영생을 소유했는지, 자신이 당장 죽으면 하나님의 품에 안길 것인지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분명 그리스도인으로서 불행스러운 신앙 상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상태의 신앙생활은 신자의 마음에 평안과 안전함을 주지 못하고 은혜의 풍성함을 맛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질문> 당신은 오늘 밤 혹시라도 죽음을 맞이한다면 천국에 갈 확신이 있습니까?
1. 확신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①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조작된 권면과 주장에 빠져 자기 암시적인 판단에 따라 구원의 확신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② 다분히 감각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경험에 의존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와 같은 근거로 확신을 구하는 신자들은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 가지는 생기 넘치는 모습과 증거를 쉽게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럼 조금 더 이러한 신앙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2. 성경은 네 종류의 신앙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
1) 단순한 지식적 신앙
야고보서 2 :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마태복음 8 : 29, 이에 저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이것은 어떠한 도덕적 또는 영적인 목적도 갖지 않은 순전히 지성적인 진리의 인식입니다. 이 신앙은 성경의 진리를 받아들일 때 개인적인 관계성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단순히 역사와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순신 장군을 역사상 실제 인물로 믿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서 자라나서 항상 성경을 배우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운 이유 때문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교인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이 지금 살아 계셔서 나 자신과 관계를 맺는 유기적인 연결성은 갖지 않습니다. 이 신앙은 기독교전통의 교육과 성경의 도덕적인 장엄에 대한 통찰력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정통적이고 성경적일 수 있지만 마음에 기초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전도의 방법으로 지식적 찬동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전도 대상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정보를 주고는 “당신은 그것을 믿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예”라고 그들이 대답하면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렇게 단지 어떤 진리에 대해서 찬동만 해도 이것을 구원 얻는 믿음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믿는 대상에 대하여 헌신하는 신뢰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히브리서 11:13).
이 사실을 잘 설명하는 한 예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지적인 찬동과 믿음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 두껍고 넓은 판에 올라 소용돌이치는 강을 왕복하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노인은 자신 뿐만 아니라, 외발 수레와 다른 종류의 수레들을 가지고 왕복하였습니다. 그 강가에 한 소년이 서 있었는데 그에게 노인이 물었습니다. “너는 내가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고 안전하게 왕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에 그 소년은 “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노인은 “좋아! 그렇다면 올라타렴”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싫어요”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실에 대해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진실에는 찬동 이상의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신뢰와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단지 동의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구원 얻는 믿음의 확신은 하나님을 부르게 만들며 또한 하나님을 신뢰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분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므로 단지 어떤 진리에 대하여 지적으로 찬동하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2) 일시적 신앙
마태복음 13 : 20 - 22, 돌밭에 뿌리었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었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이 신앙은 양심의 어떤 자극이나 정서의 분발을 수반하지만 중생한 마음에 뿌리를 박지 못한 종교의 진리에 대한 확신입니다. 이 명칭은 마태복음 13 : 20 - 22절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것이 일시적 신앙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은 이 신앙이 영구적이 아니고 환난과 핍박의 날에 그 자체를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은 종종 위선적인 신앙이라고 불리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의식적인 외식을 내포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은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통상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순수하게 보이면서도 성격상 오래가지 않는 상상적 신앙으로 불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신앙의 소유자를 가리켜 “그 속에 뿌리가 없다”(마 13:21)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중생 속에 심겨진 뿌리에서 나오지 않는 신앙이며 따라서 영혼의 깊은 곳에 새겨진 새 생명의 표현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일시적 신앙은 감정적 생활에 근거를 두고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오히려 인간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일시적, 현세적 문제가 일단 해결되거나, 지나가고 나면 더 이상 그것으로 끝일뿐 영적인 성장이나 하나님을 깊이 아는 마음에로 이끌어 주지 못합니다. 하나의 사건이 단순한 사실일 뿐,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임재가 지속적으로 자리 잡지 못하는 신앙입니다.
3) 이적적 신앙
이것은 소위 은사적 신앙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은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목격하고, 인식을 하지만 그 은사를 통해서 주시는 궁극적인 구원받는 마음의 변화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그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나, 이들은 하나님보다는 이적을 통해서 주어지는 자신의 능력 행함과 초월적 힘에 의한 스스로의 만족에만 관심을 둡니다. 이적적 신앙은 이적이 자신에 의해 또는 자신을 위해 수행 될 것을 마음에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그의 자연적 능력들을 초월하는 일을 행하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이 신앙은 구원 얻는 신앙을 필연적으로 수반하지는 않지는 않습니다. 이 신앙에 대한 구원 얻는 경우에 대해서 성경의 기초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6 : 17 - 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7 : 22 - 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가복음 13 : 21 - 22,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하리라
4) 참된 구원 얻는 신앙
어떤 사람이 지금 은혜의 상태 가운데 있다면, 그 사람은 죽은 후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현재 이런 은혜의 상태 가운데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 사람은 죽은 이후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확신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영광의 아름다움과 극치입니다. 대개의 경우 확신이 있으면 늘 기쁨가운데 거하고, 가장 안전한 위안과 평안함을 누리게 됩니다. 확신은 그리스도인의 행복, 곧 그리스도인이 안락하고 기쁨에 찬 존재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참된 구원 얻는 신앙은 마음에 그 위치를 두고 중생한 생활에 그 뿌리를 박고 있는 신앙입니다. 신앙의 성향(state)과 행동(action)은 엄격하게 구별됩니다. 이 참된 신앙의 행위는 사람의 외적인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행위가 아니라, 죄인의 마음에 하나님이 심으신 새로운 존재로서의 경향입니다. 하나님이 이 신앙의 씨앗을 마음에 심으신 후에만 사람은 참된 신앙의 행위를 할 수가 있습니다.
3 . 참된 신자는 확신이 없을지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요한일서 5:13) ?
사도 요한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에게 그들의 영생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사도는 이미 그리스도를 영접한 신자들에게 영생에 대하여 확인해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여전히 자신의 구원의 확신에 대하여 불안해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구원의 확신은 이미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의 여정을 가고 있는 신자들에게도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5 :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렇듯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은혜를 받은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대한 확신이나 자신의 죄가 용서되었고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결여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경건한 신자도 자신이 영원토록 행복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할 수도 있고, 자신의 영적 상태가 양호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칼빈도 신자가 때때로 구원의 확신이 부족할 수 있음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 “우리가 믿음은 확실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의심이 전혀 없는 그런 확신이나 걱정이 전혀 엄습하지 않는 그런 믿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신자란 자신의 불신과 함께 끝없이 갈등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신자에게 성화의 작업은 금생에서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이 바른 교리의 주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자는 그리스도의 거룩하게 하는 영에서 끊임없이 힘을 공급받아서 계속적으로 죄와 싸웁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자의 본성에 있는 은혜의 요소가 대체로 우세해지고, 점점 거룩하게 되며 죽을 때에는 완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생명을 가진 중생자는 신앙생활의 초보단계에서는 때때로 죄의 유혹에 넘어 갈 수 있으나, 끊임없이 신앙진보를 이루게 되므로, 결단코 신앙의 후퇴를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신앙이 좋았다가 인생의 말년에 신앙이 퇴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모든 소명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이미 경험되고 증거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육신을 벗고, 영혼이 소명을 완성해야할 인생의 말년에 심각한 영적 타락에 빠지는 자는 참된 생명을 가진 영적인 신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자는 단지 자신의 욕심에 따라 신앙의 열심을 추구한 위선자입니다. 그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의 표지가 없는 것입니다.
4. 그렇다면 구원 얻는 참된 확신의 표지는 무엇일까요? ?
? 처음으로 강원도를 찾아갔을 때가 있었습니다. 청년부 수련회 장소를 정하고 답사를 간 곳은 강원도 산골에 있는 처남의 오두막이었습니다. 처음으로 가는 초행길이라 강원도를 찾아가는 길 (道)은 여러 가지 불안감과 초조함을 동반하였습니다. 강원도라는 표지판은 이제 다 왔다는 안도와 평안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산 깊은 곳에 있는 목적지까지는 아직도 2시간 정도의 길(道)을 더 가야 하는 여정이 남아 있었습니다. 강원도에 들어간 것은 분명한데 목적지를 확인시켜 주는 도로의 표지판은 잘 확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둠이 내려앉았고, 저녁이 되었습니다.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해 왔습니다. 혹시 목적지를 못 찾는 것이 아닌가? 이러다가 밤새도록 목적지를 찾아 헤매는 것은 아닌가? 험한 길을 운전하다, 사고는 나지 않을까? 중간에 차가 멈추어 서서 산속에 갇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한참을 어둠속에서 헤맨 뒤에 목적지의 근처가 확인되는 표지판을 재차 확인하게 되었을 때, 나의 마음에는 기쁨과 또 다시 안도의 평강이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이 비유를 하나님 나라를 찾아가는 길(道)로 비유하자면, 강원도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표지판은 구원의 확신을 주는 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목적지에 완전히 도착한 것은 아닙니다. 그 다음에도 계속적으로 확인되어야 하는 세부적인 표지가 있어야 합니다. 더 가까이 다가왔다는 표지가 확인될 때, 우리는 계속적인 안도의 기쁨과 평안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표지들이 바로 성화의 기점들입니다. 성화의 기점들이 하나하나 계속적으로 확인될 때, 우리는 계속적인 확신 속에 거하게 됩니다. 성화의 기점들은 온유, 겸손, 자비, 절제, 인내등과 같은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자의 마음을 온전히 다스리게 되면, 그 때에 그 말씀은 중생자의 캐릭터로 대체됩니다. 이렇게 중생자의 본성이 하나님의 말씀의 속성으로 끊임없이 재창조 될 때, 그 영혼은 확신과 영적 안전함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의 표지들이 지속적으로 그리고 계속적으로 확인될 때, 신자는 구원의 확신을 끝까지 놓치지 않게 되고, 비록 지금은 지상에 있지만, 천국에 도착해서 누리는 평강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 : 16 - 24,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6 : 14, 17,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이 틀림없는 확신은 믿음의 본질이 아니라 그 열매이며, 거룩한 생활의 최고의 성취 중의 하나입니다. 또 이 확신은 비상한 계시가 없어도 일상적인 수단들로 금생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결론은, 확신을 얻는 것은 은혜인 동시에 한 의무라는 것이며, 확신을 돕는 것은 모두 부지런히 구하며, 확신을 방해하는 것은 모두 조심스럽게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수한 확신은 은혜를 기르며 경건의 의무를 행하는 일에 해이하거나 무관심하게 될 수 없습니다.
틀림없는 확신은 자연스럽게 계속하는 평화와 기쁨,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가 넘치게 되며, 이러한 은혜들은 우리의 존재의 법칙에 따라 더 큰 즐거움과 힘과 기쁨으로 모든 방면의 의무에 순종하게 합니다. 진정한 신자도 죄에 빠질 수 있지만, 결코 은혜에서 전적으로 떨어질 수는 없으므로, 그는 완전한 확신생활은 잃을는지 모르지만, 확신의 원천인 원칙을 잃을 수는 없으며 따라서 합당한 방법들을 부지런히 애씀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약해진 확신이 강해지며, 잃었던 확신이 회복되리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구원 이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른신앙 개념 - 구원이란? (0) | 2024.10.02 |
---|---|
"구원" 이란 무 엇 인 가 ? (0) | 2024.09.20 |
구원의 확신과 구원에 대한 의혹에 대하여 (0) | 2024.09.20 |
구원에 대한 이해 (0) | 2024.08.12 |
회개 교리설교 이렇게 하라 (0) | 2024.07.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