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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완성되기까지

하나님아들 2024. 9. 18. 16:3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완성되기까지

 

튤립 선교회 김명도 교수

NAPARC 제20대 회장 역임 tulipministries.org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WCF)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기독교 교파마다 각기 그들이 인정하고 따르는 신앙고백서가 있다. 오늘 전 세계를 통해서 장로교파는 예외 없이 모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를 따라서 헌법을 정한다. 헌법이란 교회의 정치, 교리, 권징, 예배, 행정 등을 말한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의 가르침을 잘 알아 두는 일이 중요한데 실제에 있어서는 심지어 목회 일선의 목자들까지도 WCF 내용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교리상의 오류를 범하기도 하고 오류를 도입하기도 하는 것이 예사다. 이런 일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타락시키고 성도들의 구원의 길을 막아 버린다. “성경대로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 (갈라디아 1:8-9)” 오늘의 기독교계의 문제는 <불순종>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싫어한다.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인간의 주권을 내세운다(human autonomy).

 

역사를 보면, 1300-1400년대는 문예부흥으로, 1500년대는 종교개혁으로 특징 지을 수 있고, 1600년대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정, 1700년대는 독일의 이성주의, 1800년대는 합리주의 (Rationalism) 와 사이비 종파들의 출현, 1900년대는 뉴에이지와 포스트모더니즘, 2000년대는 신 이교도주의 (新 異敎徒主義, Neo-Paganism) 로 특징 지을 수 있다. 20세기 후반에서부터는 완전히 사탄이 활보하는 시대로 변한 것이다. 이것은 New Age 사상을 잉태한 Postmodernism, 그리고 이교도주의 (異敎徒主義) 로 이어 지고 이는 다시 <신사상 (New Thought) 철학> 으로 이어 진다.

 

신사상 (New Thought)의 대표는 바로 Christian Science, Scientology, Church Universal and Triumphant, Eckankar. Jesus Seminar 등이다. 이런 철학의 필연적인 귀결은 상대주의(Relativism), 개인주의(Individualism), 주관주의(Subjectivism), 감정주의(Emotionalism), 사유주의(Privatism) 등인데 성경은 이런 사상을 배격한다. 물론 이런 사상의 뒤에는 무서운 사탄이 도사리고 있고 사단은 “의의 일꾼으로, 혹은 광명의 천사” 로 위장한 인간을 동원하여 그의 사역을 성공적으로 펴 나가고 있다. 그래서 많은 교회를 넘어트린다. C.S.Lewis 의 Screwtape Letters 를 보라, 그러나 중생한 사람들로만 구성된 “무형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 한다 (마태복음 16장). 여기서 C.S.Lewis 의 저서를 인용했다하여 필자가 그의 신학을 모두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신학은 경계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를 이해하려면 그 당시의 영국의 사회, 정치, 종교를 알아야 한다. 영국의 Elizabeth 여왕이 1603년에 죽게 되자 왕실은 스콧틀란드의 James 6세를 James I 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영국을 통치하는 왕위에 등극하게 하였다. 그는 현명하여 1611년에 학자들 50명으로 하여금 성경을 번역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King James Version (영국에서는 Authorized Version 이라고 함)을 만든 분이다. 그는 천주교의 사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전에 Henry VIII 는 본부인이던 Catherine (형수)을 버리고 새로운 묘령의 연인 Ann Boleyn 과 결혼하려고 했는데 천주교 교황이 반대했다. 그는 천주교와 관계를 단절하고 영국 국교인 Anglican Church을 이끌어갔다. 그는 Cambridge 대학 교수였던 Thomas Cranmer 를 Canterbury 대주교 (Archbishop of Canterbury) 로 임명하고 그 대주교인 Thomas Cranmer 에게 이혼과 결혼을 허락받았다. 천주교와 결별하고 예배형식을 개편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다분히 천주교의 형식을 따르고 있었다. 영국 국교의 감독들은 아름다운 예복을 입고, 의식 중심으로 (ritual-oriented) 예배를 인도하였고, 말씀 중심보다는 모든 것이 <의식 중심, Ritual-oriented) 이었다.

 

이를 못 마땅히 여기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다. 영국 국교의 가르침이나 예배형식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Nonconformist 혹은 Separatist, 혹은 Puritan 들이라고 불렀다. Puritan 이라는 말은 성경대로 깨끗한 예배를 드리자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물론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건너온 후에 그들의 경건한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빈정대는 말로, “교만한 사람, 잘난척하는 사람" 이라는 별명으로 변하기도 했지만, 당초의 Puritan은 그렇게 영국의 국교에 반항하여 예배를 신약성경대로 간소하게 바로 드리자는 무리가 생겨났고 세월이 갈수록 그 수가 늘어만 갔다.

 

영국 의회에 이런 청교도들의 목소리가 반영되기 시작했고, 영국의 상하 양원 모두 영국 국교의 예배형식을 수정하기를 원하여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을 물색하여 저명한 인사들로 하여금 영국의 예배 제도를 수정하는 자문을 구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출발한 것이 나중에는 전혀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처음에 이들은 영국국교의 The Thirty Nine Article (39개조 신조)을 수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후 Scotland의 대표 6명이 참석하므로 인하여 그 수정작업보다 성경에서 교훈하는바 믿는 도리와 교회 정치, 예배 형식등을 포함하는 신앙고백서를 새로 만들기로 합의했다.

 

그래서 James I세가 죽은 후 그 뒤를 이은 Charles I 가 새로운 신앙고백을 만드는 일을 적극 반대, 만류하였으나 의회가 왕에게 협조하기를 거부하자, Charles I는 기병대를 동원하여 의사당을 포위하였고, 의회는 Oliver Cromwell 을 수령으로 하는 <의회군대>를 만들어서 영국 왕의 군사 (Royal Army)와 의회군사 (Parliamentary Army)와의 싸움이 일어났다. 지금도 영국 London 에 가보면, Westminster Abbey 앞에 세워진 말을 타고 있는 Oliver Cromwell 의 늠름한 동상을 볼 수 있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1643년부터 1649년까지 London의 Westminster Abbey (웨스트민스터 사원)와 St. Magdalene Church에서 주야로 150명이 넘는 대표자들이 모여서 열심히 설전을 벌리며, 기도하며 성경을 펄쳐놓고 하나씩 하나씩 일을 처리해 나가 1647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전문 33장) 와 대요리문답 및 소요리문답 등 세 가지 문서를 완성하였다. 원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를 중심으로 만든 것은 대요리문답 (Larger Catechism, (전 196문)이었지만 무식한 자들을 위해서 쉽게 별도로 특별히 만든 것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소요리문답 (Shorter Catechism 전 107문) 이다. 사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를 만든 분과위원회의 일은 이로서 1647년에 끝났으므로 스콧틀란드 대표들은 모두 본국으로 귀환하고 남은 사람들은 그 후부터 1649년까지는 주로 목사후보생들에게 목사 고시를 치루는 일에 시간을 보냈다.

 

1993년 9월 23일은 이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만들기 위해서 대표들이 처음으로 소집된지 꼭 350주년 되는 날이었다. 그래서 NAPARC (North American Presbyterian and Reformed Council 북미주 보수 장로교단민 개혁교단 협의회) 주관으로 이 역사적인 행사를 기념하는 축제로 영국 London에 있는 Westminster Abbey (웨스트민스터 사원) 과 이웃 Westminster Chapel (D. Martyn Lloyed-Jones 목사가 목회하던 유서 깊은 교회당)에서 전 세계에서 모인 개혁주의 신학자들, 신학교 교수들, 목회자들, 신학생등 300여명이 모여서 대대적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정 350주년 기념 국제 학술대회>를 개최한바 있었고 이 사실은 영국 London에 있는 뉴스 미디아에서도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일주간 날마다 메디아의 뉴스의 초점은 바로 우리 학술대회 소식이었다.

 

당시 NAPARC 의 부회장이던 필자는 이 국제 학술대회의 사회를 보게 되어 유명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강연을 도왔다. 일주간에 결친 학술대회는 대부분 Westminster Chapel에서 열려서 그 유명한 로이드 존스목사님이(Sola 주: 마틴 로이드 존스는 오순절 주의 등 성령론 등에서 정통 신학과는 거리가 멀다) 설교하던 그 강대상에서 사회를 보던 그때 감격이 지금도 어제 일인듯 새롭다. 그때 강의한 여러 세계적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강의내용은 우리 NAPARC 의 중진 위원이던 John Carson (Erskine Theological Seminary 교회사 교수) 와 David Hall (필자보다 신학교 3년 선배, 현재 미국 Virginia 주 Vienna 에서 목회중 PCA 소속 목사) 두 사람의 공저로 간행한 To Glorify and Enjoy God 이란 책에 모두 수록되어있다. 이 책의 초두에는 그 당시 <학술대회> 를 위해서 활동했던 임원들의 명단도 들어있다. 이 책은 개혁주의 서적만 출판하는 영국 Scotland, Edinburgh의 Banner of Truth Trust 출판사에서 1994년에 나왔는데 값은 $33 이며 amazon에서 구입 가능하다.

 

우리 일행은 그 행사를 마치고 장로교의 뿌리인 Scotland 를 둘러볼 기회를 가졌으며 장로교의 아버지인 John Knox 가 목회하던 Edinburgh 에 소재한 St. Giles Church에서 성찬식에 참석하고, Scotland 의 언약파 (Covenanters) 회원 목사 120명이 교수형으로 순교한 Grass Market 을 돌아보며 많은 것을 배우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 때 영국 런던에서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정 350주년 기념 국제 학술대회> 의 감격을 평생 잊지 못하고 있다.

 

 

이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정과정에서 그 연대표를 여기에 적어본다:

 

1603 Elizabeth여왕이 죽고 James I 가 등극.

 

1611 KJV 성경 출현

 

1620 청교도들이 Speedwell 호 배를 타고 영국 Wales 서남단에 있는 Plymouth항을 떠 나 신대륙(미국) 으로 떠났다가 도중에 배가 고장이 생겨 화란의 Amsterdam 에 기 항하여 배를 Mayflower 호로 바꾸어 타고 다시 미국으로 행해하기 시작하였는데 처 음에 Massachusetts 주 Cape Cod 에 있는 Provincetown에 도착하였으나 얼마 후 에 미국 본토인 Boston근처 Plymouth Rock에 정박하다. Pilgrim Fathers 들이 처음 도착한 지점을 후에 Provincetown (섭리의 고을) 이라고 명명하고 후에 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은 화강암으로 된 Pilgrims Monument 를 만들었다. Cape Cod 맨 끝 북단에 위치한 Provincetown 의 이 Monument 에 올라가면 멀리 Boston 까지도 시야에 들어온다. 승강기가 없어서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1625 James I 가 죽고 Charles I 가 등극

 

1629 3월에 Charles I 가 영국 의회를 해산

 

1633 William Laud가 영국 Canterbury 사원의 주교 (Archbishop of Canterbury)가 됨.

 

Laud 추기경은 소위 Wicked Bible 이라는 불리는 KJV 에 인쇄공이 실수하여

 

출애급기 20:14 절에 “not" 이라는 말을 누락하여 그 벌금으로 1600년대 당시

 

돈으로 300 파운드를 지불케 한 분으로 유명하다 (F.F.Bruce, The Books and

 

the Parchment [Fleming H. Revell, 1962], p.177.)

 

1637 영국 Charles I 왕이 스콧틀랜드 교회에 기도서 (Book of Prayer)를 사용하도록 강 요하다

 

1638 2월28일 National Covenant 서명

 

11월과 12월에 Glasgow에서 스큿틀란드 교회 총회 소집

 

1639 감독들과 대항하는 제1차 민란

 

1640 의회가 잠시 모임. 이에 반항하는 감독들의 제 2차 민란. 스코틀란드 군대가 런던에 진입하여 진압작전에 참여.

 

11월에 의회가 정상으로 열림

 

1643 6월12일 영국 국교의 잘못을 의논하기 위하여 유능한 목사들을 소집하기로 결정 하다.

 

6월22일 왕의 의회 활동 금지 명령

 

7월1일 왕의 명을 어기고 의회가 회의를 소집하다

 

7월12일부터 10월12일, 영국 국교의 신조인 39개 신조의 첫 15개항목을 수정작업 시작

 

8월17일 스콧틀란드의 스콧틀란드 언약파의 헌장을 승인함

 

9월15일 스콧틀란드 대의원들이 회의 참가차 의회에 도착

 

9월25일 스콧틀란드 언약파들의 헌장을 승인하기로 영국 하원이 가결

 

10월12일 의회가 교회정치를 연구하라고 대의원들에게 지시. 39개 신조 수정작업 완료

 

10월15일 스콧틀란드 언약파들의 헌장을 영국 상원이 승인가결 채택

 

10월17일 교회 정치를 토론 시작

 

1644 4월22일 안수문제를 다룬 예배모범을 영국 의회에 제출

 

5월24일 예배모법에 관하여 폭넓은 토론 시작

 

8월20일 신앙고백서 제정 위원회를 정식으로 임명하다

 

11월 8일 교회 정치를 의회에 제출하다

 

12월27일 예배모범을 의회에 제출

 

1645 1월 3일 영국 하원이 예배모범 (Regulative Principles of Worship) 을 승인하다

 

여러 안이 있었으나 Mr. Rough 의 안을 반대 없이 승인하다.

 

1월23일 장로교 정치체제 찬성 결의안이 하원을 통과하다

 

2월 7일 요리문답 위원회가 발족하다

 

5월12일 신앙고백서 제정위원회 위원들의 보고

 

7월 7일 대의원들이 교회 정치를 최종 열람하다

 

1646 4월27일 Charles I 가 Scotland의 Newark로 피신함

 

7월19일 대의원들의 의장이던 William Twisse가 죽고, 후임에 Charles Herle 피선

 

12월 4일 신앙고백서 (증거 구절 없는) 하원에 제출

 

1647 4월15일 대요리문 답서 에 관한 토론 시작

 

4월26일 신앙고백서 (증거구절 포함)을 영국 하원에 제출

 

5월11일 여러 분과위원들이 신앙고백서를 열람한 후 신앙고백서를 인쇄소에 보내다

 

8월 5일 소요리문답서 에 관한 토론을 시작하다

 

8월27일 스콧틀란드 교회 교단 (Church of Scotland) 에서 신앙고백서를 승인하다

 

10월15일 대요리문답서 가 완성되어 영국 의회에 제출되다

 

11월11일 Charles I가 Isle of Wright 이란 섬, Carisbrooke 성으로 피신.

 

11월25일 소요리문답서 를 영국 하원에 제출하다

 

1648 3월22일 영국 하원이 신앙고백서를 승인하다

 

4월14일 대소요리문답서 (성경증거구절포함)을 최종 완성하여 영국 의회에 제출 하다

 

6월20일 영국 상원이 신앙고백서를 승인하다

 

7월24일 영국 하원이 대요리문답서 를 승인하다 (상원에서는 승인을 받은 적이 없 다)

 

9월25일 영국 의회가 소요리문답서 를 승인하다.

 

1649 1월20일 Charles I 을 재판

 

1월30일 Charles I 런던시내 (지금의 수상관저 Downing 10번지 건너편) 에서 참형 (斬刑) 당함

 

2월22일 번호를 붙여서 모인 마지막 전체 모임. 폐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와 대,소요리문답서를 만들기 위하여 대의원들이 모인 마지막 날)

 

이날 이후, 거기에 모인 대의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와 대,소요리 문답서 작성의 임무를 모두 마쳤으므로, 목사후보생들의 목사 고시를 위 해서 얼마동안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때 벌써 Scotland에서 왔던 대표단 이나 런던 근처의 대의원 대부분은 귀가한 후였다.

 

1652 3월25일 목사 고시를 위해서 대의원들이 모인 마지막 모임.

 

이와 같이 당초에 영국국교의 예배형식을 수정하기 위하여 영국 의회가 자문을 구할 목적으로 유식하고 신령한 목사님들을 모시고 의견을 듣고 자문을 구하자던 목적이 급기야는 기독교 역사에 찬란하게 빛나는, 특히 장로교 교리의 금자탑 격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와 그 신앙고백서에 입각한 대요리문답서 및 소리문답서 를 만드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모두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역사한 결과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WCF 는 세계 어디를 가도 장로교의 신조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신조를 사용하는 교회나 성도는 결코 WCF 를 성경과 대등 시 하거나 성경의 권위위에 놓는 일이 없으며, 성경이 항상 유일한 권위를 갖는다 (Sola Scriptura). 사람이 만든 것은 무엇이든, 아무리 훌륭한 학자가 만든 것이라도 반드시 오류가 있게 마련이다. 성경만이 오류가 없이 원본(autograph)에 있어서 무오하고 (無誤,infallible) 하고 정확(正確, inerrant) 하다. 이와 반하여 이단들의 특징은 교주(敎主) 의 경전을 성경과 대등시하거나 성경보다 위에 놓는다. 이것은 극히 잘못된 것이다. 이단들은 항상 교주 중심이다.

 

원래 임명된 목사들만은 121명으로 (이들을 Westminster Divines 라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영국 청교도들이었다. 그밖에도 스콧틀란드에서 Alexander Henderson과 George Gillespie 등을 비롯한 6명이 참석했고 (이들은 투표권은 없고 참관자들임), 평신도 30명이 있었는데 이 30명중 10명은 상원 의원이고 20명은 하원 의원이었다. 그러나 성공회소속 목사들은 대부분 불참이어서 실제로 매일 회무에 참석한 인원수는 70명에서 80명 사이 였다. 이들은 1643년 7월1일에 처음 모인이후 1649년 2월22일 까지 성실하게 오직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목적으로 임무를 잘 수행했다.

 

이들 대의원들은 대부분 Cambridge 와 Oxford 교수 출신들이어서 당대에 누구보다도 유식한 사람들이며, 동시에 인격이 고매한 분들이었다. 여기에 모인 참석자들은 모두 당대의 쟁쟁한 학자들이며 참으로 <성경대로 사는 사람들> 로서 신앙을 위하여 목숨도 바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었다. 오늘의 각종 총회, 노회, 대회나 교회협의회 등과는 성격이 아주 다르다. 오늘의 회의에서는 불법이 위험수위에 달했고, 욕설과 폭력이 회의 장소에서 난무해도 그것이 회의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묵인한다. 안건을 처리할 때도 본인에게 유리하면 “하나님의 뜻” 이라고 하고, 본인에게 불리하면 “사탄의 역사” 라고 매도한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회원들은 이와는 아주 정반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신앙과 교리에 투철한 분들이었다. 이 신앙고백서가 탄생한 영국에서 조차 오늘날 이런 신실한 학자/목사 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로므모 책을 구입할 때도 17세기 18세기의 영국 Scotland 나 Holland 학자들이 쓴 책들을 구입하면 틀림없을 것이다. 계몽주의는 프랑스에서 Rousseau, Montesquieu, Voltaire 같은 사람들에게서 시작되었고 자유주의 종교사학파

 

(Religionsgeschichtliche Schule) 는 독일에서 시작되어 기독교의 교리를 무너트렸다.

 

이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정에 동참한 학자들은 대부분 신학교 교수들이었는데 그중 특히 몇 사람을 간추려 본다면, Cambridge 대학교의 Queen's College 교수 Herbert Palmer; Oxford 대학교 신학교수부장이었던 Joshua Hoyle; Oxford 대학교 Magdalene 대학의 신학교수 Thomas Goodwin; Cambridge 대학교의 신학교수 John Arrowsmith 및 그의 후계자인 Anthony Tuckney; Cambridge 대학교의 신학교수 Richard Vines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회의에 참석한 참석자 중에서 Cambridge대학 졸업생이 68명, Oxford 대학 졸업생이 48명이었다. 정식으로 임명된 대의원의 목사수가 121명이라면 Oxford대학과 Cambridge 대학 출신들 116명을 빼면 목사들중 겨우 5명만이 다른 곳에서 공부한 분들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들 대의원들은 회의 전체 기간을 통해서 모일 때 마다 다음과 같은 선서를 되풀이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한번 선서하고도 그것을 무시하거나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며 이 문서야말로 참으로 <장차 하나님의 교회에 책임을 져야 할 중대사> 임으로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신념에서였다. 아무도 이에 이의(異意)를 제기하는 분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매번 회의를 하기에 앞서 기도하고 설교하고 Sola Scriptura 개념을 새롭게 인식시킨 후 회무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이는 이들의 모임의 성격이 성경말씀에 입각한 믿음의 도리와, 교회정치, 그리고 예배모범을 만들자는데 모두 마음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대표자들 중에는 Erastians (에라스도 주의자들) 도 있었고 Episcopalian (성공회) 사람들, 청교도(Puritans)들도 있었는데 Erastians 들은 <교회는 국가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고 하여 충돌하였으나 성경구절에는 순복하였고, Episcopalians 는 대부분 임명은 받았으나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드믈었다. 그래서 매일 회무에 참석하는 인원은 많아야 80명을 넘지 못했고 보통 60-70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 필자가 1993년 9월 말에 영국 London Wesminster Abbey 바로 옆에 있는 Magdalene Chapel 에 들어가 보아도 80명도

 

들어갈 수 없으리만큼 방이 협소했다. 여기서 의장 William Twisse 목사의 사회로 장장

 

4년간 역사적 신앙고백서 제정을 위해서 기도하고 토론하고 문구를 쓰고 또 기도하고 선서하고 또 성경과 대조해 보고 최종 결론을 지었다.

 

그럼 이제 이들이 서약한 그 서약의 전문을 보자. 원문으로 다음과 같다. 괄호안의 번역문을 참고할 것.

 

I do seriously and solemnly declare, in the presence of Almighty God, that in this Assembly, whereof I am a member, I will not maintain anything in matter of doctrine, but what I think in my conscience to be truth; or, in point of discipline, but what I shall conceive to conduce most to the glory of God, and the good and peace of his church" -A.W. Mitchell. A History of the Westminster Assembly of Divines. Philadelphia: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1841, p. 29.-

 

(본 회원은 본 회의의 한 성원으로서, 본 회의에서, 교리 면 에서는 본인이 양심으로 판단하여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을 것과, 또 행위문제에 있어서는 가장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며 하나님의 교회의 유익과 화명이 된다고 생각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을 것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고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밋철 저, 웨스트민스터 성회 역사, 필라델피아: 장로교 출판부 간행, 1841년, 제29면.-

 

오늘의 교계에서는 신앙고백이 없어졌고, 신조도 사라졌다. 일정한 신앙노선이 없이 무엇이든 expediency (便宜) 중심으로 교회가 편 한대로, 성도들이 편 한대로 믿으며 또한 하나님중심과 말씀중심과 성경중심의 WCF 사상과는 달리 무엇이든 본인에게 기분 좋은 대로 믿고 행한다. 하나님에게 드리는 예배도 <오락중심> 으로 흘러간다. 소위 “열린예배”

 

로 예배를 대신하기도 한다. 그래도 총회나 노회가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고 내버려둔다. 미국의 정통장로교단 (OPC) 같으면 그렇게 목회하는 목사를 당장 파면한다. 성도의 신앙생활도 인간 중심일뿐, 성경의 가르침은 전혀 따르지 않고 있다. “개혁주의”를 믿는다고 주보에 큼직하게 적혀 있어서 그 교회 예배에 참석해 보면 개혁주의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목사가 목회를 하고 있으며 당회의 장로들은 더 할 나위 없이 성경에 무식하다.

 

이러한 경향은 이단들이 교회에 침입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오늘의 이런 신앙풍토와 WCF 기초위원들의 신앙을 비교하면 부끄러울 정도이다. <주님 재림 직전에 있을 가장 큰 징조는 사람들이 성경적인 믿음을 떠나고 사단의 가르침을 진실인줄 알고 추종하는 속임수 (Delusion)> 이다. 다시 말하면, <배도 apostasy> 이다 (딤전 4:1, 마태 24:24, 살후 2:1-12, 딤후 4:1-6, 계 13:13, 계 11:1-10). 주님 재림할 때 이 세상에서 <성경적인 믿음> 을 가지고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될 것을 주님은 예언하셨다 (눅 18:8). 믿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 즉 ‘성경적 믿음“ 자체가 없어진다는 것이 눅 18:8의 말씀이다.

 

누가복음 18:8에서는 “믿음” (he pistis)를 말하고 있다. “믿음” 이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 Greek feminine definite article 인 “he" 가 붙어 있음을 눈여겨보라. 오늘의 교회는 하나씩 둘씩 WCF에서 말하는 신조에서 떠나고 있다. 이제 교회마다 모든 참다운 성도는 WCF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를 바로 공부하여 무너져가는 기독교계를 바로 잡자. 개혁주의 신앙으로 돌아오자. 본 <튤립 교육 선교회> 는 오늘 무너져 가는 기독교 교계를 역사적인 신앙고백에 입각하여 개혁주의 신앙으로 바로 잡고저 문자 그대로 교육 하는 선교기관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