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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트 신조의 역사와 내용 연구

하나님아들 2024. 9. 18. 16:40

도르트 신조의 역사와 내용 연구

 

 

 

초대교회 이래로 교회는 교회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많은 이단들에 대항하여 정통적 진리를 결정해 왔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양성의 통일성, 예정론 등의 중요한 진리를 지키기 위해 동료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아픔을 감수하면서까지 신앙에 관한 진리를 보수하며 그 진리를 보존해 온 것이다. 그 노고가 문서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 조항 하나 하나를 살필 때,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매우 겸허하며, 신중해야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 진리에 대한 논쟁이 나의 주변에 있다면, 그것이 나의 신앙의 고백의 본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진리의 형태로 결정된 신조들이 하나님께서 성자 안에서, 그리고 성령에 의해, 역사 속에서 교회들의 입술을 움직이셨다고 믿는다.

 

여기서는 특별히 많은 교회회의와 신조와 신앙고백의 작성과정 중에서 많은 논란으로 얼룩진 “예정론”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프랑스를 제외한 전(全)유럽의 교회들이 모여 정립한 “도르트 신조”는 세계적인 칼빈총회의 결정체정체이며, 꽃이라 표현할 수 있다. 여기서의 모임의 원인은 비록 알미니안주의의 항변에 대한 반항변으로서 기독교 교리의 일부분만 핵심 사안으로 다루어졌지만, 그 내용은 복음의 본질이며, 바른 구원관을 정립해 놓은 중요 교리이기도하다.

 

먼저는 그 신조를 낳은 나라의 역사적 배경을 살피고, 다음으로 본 신조를 핵심 조항을 살피고자 한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본 신조와 관련된 제반문제를 논하고 결론짓기로 할 것이다.

 

 

(1) 도르트회의 이전까지의 화란의 역사적 배경.

 

① 정치․사회적배경

 

지금부터 2000년 전에 겔트족, 게르만족이 살았던 이 지역을 점령한 로마는 400년가량이 지난 뒤에 로마가 위태로워지자 이 땅에서 물러나고, 이곳은 임자 없는 땅이 되고 여기저기 여러 다른 부족들이 옛날처럼 살고 있었다. 그런데 서로의 왕래가 잦지 않아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세력을 떨치던 프랑크 왕국이 이 땅 네덜란드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프랑크가 여기까지 신경 쓸 형편이 아니어서 네덜란드 지방의 여러 부족들은 사실상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살았다.

 

그러다가 프랑크 왕국을 유럽의 제일 강대국으로 이끌고 이슬람 세력이 서유럽에 뻗는 것을 막은 카알대제 (프랑스어로 샤를르마뉴)가 강력한 중앙중앙집권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이 지방에도 자신의 신하나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귀족들을 지배자로 임명하였다. 그러다가 서기 816년 카알대제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자녀들이 세력다툼을 하는 동안, 네델란드 각 지방은 왕의 간섭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 후 프랑크 왕국은 몇 개의 나라로 갈라졌고(프랑스, 도이칠타트 등), 네덜란드도 후에 남부(벨기에)는 프랑스에, 북부는 도이칠란트에 속하게 되었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프랑스나 도이칠란트가 허약한 나라였기 때문에 네덜란드는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1300년대까지 무역과 공업으로 눈부신 발전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프랑스가 발전한 네델란드를 누르고 막대한 세금을 요구하게 되고, 무역까지 간섭하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중심 지역이었던 플란더즈 상인들이 이에 불만을 품고 무역국이었던 영국으로 하여금 프랑스와 전쟁을 일으키게 했다(100년 전쟁, 1337-1453). 이렇게 하여 네덜란드가 영국 편의 입장에 서서 싸웠는데, 프랑스 안에서도 프랑스 왕을 배신하고 영국과 한편을 든 지방이 있었다. 그곳은 부르고뉴지방이었는데, 부르코뉴는 이 전쟁을 통해 네덜란드와 가까워지게 되었는데, 1369년 부르고뉴의 필립왕과 플란더즈의 왕위 계승자인 마아가렛공주가 결혼하여, 플란더즈지방은 부르고뉴와 합치게 되었다. 이때부터 부르고뉴 왕족이 네달란드 지방을 지배하게 되었다.

 

후에 부르고뉴의 왕 필립왕이 세상을 떠나자 1477년 부르고뉴의 공주며 왕위 계승자인 마라아가 오스트리아 황제 막시밀리안 1세에게 시집을 갔는데, 이로써 부르고뉴는 물론 네덜란드까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막시밀리안 12세의 손자 카알 5세(1500-1558)가 황제의 위를 계승하였는데, 당시의 종개혁의 바람이 책을 많이 읽는 시민의식이 높은 나라 네덜란드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 동안 네덜란드에 대하여 관용 정책을 폈던 카알 5세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으므로, 종교재판의 절차를 이용해 신교도들을 처형하였다. 이러다가 나이 들어 쇠약해진 카알 5세는 황제의 위를 에스파니아의 왕으로 있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면서, ‘피의 메리’라고 불리는 메리여왕의 남편이면서 아들인 필립 2세(1527-1598)에게 넘겨주었다. 필립 2세는 더욱 악한 정책으로 네덜란드 각 주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 중 독립에 눈을 뜬 몇몇 의식 있는 사람들은 그 힘을 더욱 강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필립 2세는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프랑스와 임시 휴전이 이루어짐으로, 그 전쟁에 동원했던 에스파니아 군대를 네덜란드로 보내, 네덜란드의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더욱 그들을 격분시킨 것은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신교를 믿으려는 그들의 뜻과는 반대로 네덜란드 교회를 더욱 엄격한 카톨릭으로 몰고가는 것이었다. 따라서 1566년 우상파괴폭동 등 독립의 운동이 강화되자, 필립2세는 ‘지옥의 사자’라는 별명이 붙은 ‘알바장군(1567-1573년 네덜란드 통치)’과 수천명의 에스파니아 군대를 네덜란드에 보내 무자비한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공포정책에 따라 세 독립 지도자 중 호론과 에그문드는 잡혀 참수형을 당했다. 그러나 나머지 한 사람 오렌지공 윌리암(William of Orange, 1533-1584)은 네덜란드를 빠져나가 1568년 자주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힘겨운 투쟁을 계속하였다(1648년까지 80년간의 독립전쟁). 결국 견디다 못한 카톨릭을 믿는 남부 10주(남부 네덜란드, 現 벨기에)는 무릎을 꿇고 (1579년), 홀란드주를 비롯한 북부 7주(州, 독립정부-現, 네덜란드)는 끝까지 전쟁을 계속하였다.

 

독립전쟁을 이끌던 지도자 윌리암은 1584년 델프트란 곳에서 사망하고, 그의 아들 ‘모리스’(Maurice, 7주 연합의 최고 행정관이면서 군사 사령관)와 정치가인 올덴바르네 벨트(Jan van Oldenbaneveldt)가 뒤를 이어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이처럼 에스파니아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펼치던 네덜란드는 에스나니아로부터 해방을 맞이하고, 1609년 두 나라는 휴전이 이루어졌다.

 

1609년 휴전이 체결되자 두 지도자는 의견의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모리스는 독립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지지하였고, 홀랜드 주(州)를 지배하고 있던 올덴바르네벨트는 지방 자치제를 원하였다. 신학적으로 올덴바르네벨트는 항변파를 지지했고, 모리스는 반(反)항변파를 지지했는데, 두 사람의 의견충돌이 격화되자 올덴바르네벨트가 자신의 휘하에 있는 지방 민병대를 소집하자 모리스는 군대를 파견하여 그를 체포했다(도르트회의 직후에 그는 반역죄로 참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그가 체포된 상황에서 역사적인 도르트회의가 소집되었던 것이다.

 

 

 

② 종교적 배경

 

a. 종교개혁 이전 배경

 

네델란드는 프랑크 왕국에 의해 카톨릭을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프랑크 왕국은 알프스 북쪽 지방에서는 가장 먼저 카톨릭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프랑크 왕국이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였지만, 잘못된 가르침과 우상 숭배 등의 미신적 의식(儀式)의 숭배로 말미암아 그 내용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1517년 이후의 종교개혁운동이 어느 지역보다 먼저 들어온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종교개혁적인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교회 내에서 개혁운동을 추진했던 대표적인 기수는 베긴(Beguines)선교회와 ‘공동생활 형제단’(the Brethren of Common Life)이라는 것이었다. 베긴은 남녀 평신도들로 구성되었으며 검소하고, 경건된 삶을 추구하고 공동생활을 선호하였으며, 말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는데 전력하였다. ‘공동생활단’도 수도원과 학교를 설립하여 신비로운 명상의 삶을 가르쳤으며 이의 영향으로 후대들에게 많이 읽혀졌던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79-1417)의 명상록 ‘그리스도를 본받아’가 나왔다.

 

그들은 사람들을 보고 학문연구를 강조하였고 그 중 고전에 대한 연구를 강조하였다. 베젤 간스포르트(Wessel Gansfort)와 에라스무스(Erasmus)같은 위대한 인문주의자들이 이 시기에 나타났다. 이러한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교회의 죄를 민첩하게 간파하였고 교회의 타락에 대하여 항의의 목소리를 드높였다. 당시의 기독교 인문주의자들 중 대표적인 사람으로써 로테르담(Rotterdam)출신의 에라스무스를 들수 있는데 그의 교회와 사회에 대한 비평이 그의 ‘어리석음에 대한 예찬’에 잘 기록되어있다.

 

또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적 입장에 대한 비평적 견해가 간스포르트와 요한네스 루이스브리크(Johannes Ruysbroeck)에 의해 일찍이 표명되었다. 간스포르트는 성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성례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반드시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됨을 주장하였다. 그는 교황의 무오성과 교회회의 무오성을 부인하고 면죄부에 대해 이의를 표명함으로써 이단으로 정죄를 받게 되었다. 종교 이처럼 개혁의 열기가 있기 이전에 이미 화란에서는 순교가 있었고, 미신적 의식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b. 종교개혁의 시작

 

네덜란드 개신교를 이야기하자면, 칼빈주의가 이 나라에 대표적 교파이기는 하지만, 먼저 소개된 것은 루터의 사상이었다. 매우 일찍이 루터의 저작들이 네덜란드에 도입되어 두루 읽혀졌다. 즉 루터의 가르침은 어거스틴 수도사에 의해 가르쳐졌으며, 이미 1523년에 어거스틴파에 속한 두 사람인 헨드릭 부스(Hendrik Voes)와 요한 반 에센(Johan van Essen)이, 그들의 열정적인 열심 때문에 화형 당하였으며 그들은 신앙 때문에 죽은 첫 번째 순교자들이 되었다. 이처럼 로마카톨릭교회의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개신교는 점차 많은 추종자를 확보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개신교 그룹 가운데서 루터의 견해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성찬 배척론자”들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성찬배척론자들은 성찬시에 그리스도의 몸이 실제로 임재 한다는 주장을 반대하였으며, 다만 성찬은 “거룩한 교통”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성찬 배척론자들 가운데서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코넬리스 호엔(Cornelis Hoen)을 들 수 있으며, 그의 성례관은 스위스 종교 개혁자 쯔빙글리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그는 곧 위협을 받고, 이단자로 정죄 되었으며, 급기야는 1526년에 교수형과 화형을 합친 형벌을 받고 죽음에 넘겨지게 되었다.

 

이렇듯 루터주의와 성찬배척론자들은 로마 교황의 보낸 종교재판관에 의해서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복음을 계속 선포하기 위하여, 새로운 설교자들은 성밖의 광야에서 계속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성례배척론자들의 활동 이후에는, 재침례주의자들이 그들의 바톤을 이어받아 네덜란드에서 종교개혁운동의 중요한 주도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임박한 전천년왕국설을 지지하면서 지상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던 재침례주의자들로서, 신자들간의 평등을 외치고 신자들 간의 공동체 생활을 강조하면서 초대 기독교로 돌아가려고 시도하였다.

 

재침례주의자들은 수십년 동안 많은 네덜란드인의 열정적이며, 광란적이라고 할 만큼의 후원을 받았다. 그러나 과격한 침례주의자들의 아성인 뮌스터(Munster)가 함락되자 그들의 활동은 거의 사라져 갔다.

 

이렇듯 루터교, 성례배척론자, 그리고 재침례운동이 몰락의 길을 걷자 이제는 칼빈주의가 로마 카톨릭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융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박해가 심하자 칼빈주의자들은 해외에 망명하였으나 칼빈주의의 기치 아래 모여들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모든 형태의 개신교에 대해서 극심한 박해가 가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초기 칼빈주의 교회(1548-1550)는 국내가 아닌 국외에 세워지게 되었다.

 

즉 런던, 엠덴(Emden),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Frankfort am Main), 그리고 팔라티네이트에 네덜란드 칼빈주의교회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폴란드 출신의 귀족이자 위대한 조직가인 요한네스 라스코(Johannes a Lasco)에 의해 지도되었다. 그러나 1553년 메리가 왕위에 등극하자 영국 내의 네덜란드 교회는 대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서 엠덴이 화란의 새로운 칼빈주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엠덴에서 성경 전권이 1562년에 네덜란드어로 번역되었고,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1560년 디르키누스(Dyrkinus)에 의해 번역되었으며, 1571년에 총회가 엠덴에서 개최되었을 때, 엠덴총회는 화란 개혁교회의 조직 체계와 예배 의식이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였다. 즉 장로교회적 교회정치제도가 채택되었고, 구교에서 볼 수 있었던 위계 계층적 교직제도를 거부하였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신분에 관계없이 주안에서 형제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총회에서 목사, 장로, 집사의 직분을 서로 분리 하였지만은, 목사가 다른 직분보다도 우월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총회는 개혁교회의 신조적 선언인 벨기에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서를 정식으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하는 가운데서 이 총회는 루터파와 칼빈파 사이의 일치를 도모하려는 과거의 시도에 종지부를 찍어 버렸다.

 

그리고 엠덴에서 있었던 또다른 논쟁거리는 비칼빈주의 교회에 대해 개혁교회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칼로서, 어떤 사람들은 각인의 양심에 따라 어떤 종파를 선택하든 그들의 결정을 존중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엠덴 총회는 신학적, 교회적인 문제만 다루지 않고, 실제적인 생활에 관한 문제도 역시 취급하였다.

 

한편 소수이기는 하였으나 칼빈주의자들은 대(對) 에스파니아 전쟁을 주도하였으며, 스페인군을 내몰은 지역(북부 네덜란드)에서 칼빈주의는 공적인 종교가 되었으며 7주(州)의 독립 정부의 후원과 인가 받게 되었다. 이처럼 칼빈주의자들에 대한 독립정부의 호의적 태도에 적지 않게 힘입어 1570년 이후 화란 개혁교회는 성장을 하게 되었고 더욱 그 체계를 견고하게 다져 나갔다.

 

 

(2) 도르트 신조의 독특성

 

a. 신학적 배경

 

그러나 1609년 휴전이 성립되기 전, 개혁교회는 신학적 논쟁으로 인해 큰 혼란을 겪었다. 문제의 발단은 야콥 알미니우스주(Jacob Arminius, 1560-1609)의 가르침이었다. 그는 제네바에서 예정교리에 ‘타락전 선택설’을 첨가했던 베자에게 베웠으며, 1588년에 암스테르담에서 목사가 된 후, 그는 벨직 신앙고백의 개정작업에 참여한 바있는 유니우스(Francis Junius)의 계승자로 1603년에 라이덴 대학의 신학교수가 되었다. 라이덴은 오렌지공 윌리암이 1575년에 세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중요한 개혁주의 대학교였다.

 

교회는 그 대학교의 확고한 정통성을 유지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그런 분위분위기 속에서 자유사상가 더크 쿠른헤르트(D. V. zoon Koornheert)는 개혁교회가 고백하고 있는 ‘예정설’을 부정하였다. 따라서 그의 저서를 검사하라는 암스테르담 시장의 요청을 알미니우스가 받았는데, 오히려 알미니우스가 그 내용이 더 설득적이라고 생각하고 보편적 은총과 구원에 있어서의 의지의 작용을 역설하였다. 그는 선택과, 유기의 작정을 부인하고, 원죄교리를 약화시켰으며,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벨직 신앙고백서의 수정을 주장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타락전 선택설을 주장하는 동료 교수 프란시스 고마루스(F. Gomarus)와 공개적인 논쟁을 하였는데, 사실 고마루스는 알미니우스에게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한 사람이었으나 최대의 적수되고 만 것이다. 이러한 논쟁이쟁이 불붙어 가자 그는 정부가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공적으로 논쟁할 것을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처럼 알미니우스와 개혁교회와의 논쟁은 1609년 알미니우스가 사망하므로써 잠시 중단되었다. 그로인해서 알미니우스 신학은 17세기 초엽에 철저히 분석 당했고 그의 주요 저서는 대부분이 출판을 금지 당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그의 견해는 소시니주의자도 펠라기우스주의자의 관점도 아니었지만, 고백적인 개혁교회 정통신앙과는 달랐다. 즉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총을 유지하는데 관심을 가졌고 타락전 예정설이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들려 한다고 우려했다. 계속해서 그는 기독교 생활에서 믿음과 성결이 중요함을 강조했고 칼빈주의 신학의 몇 가지 요소들이 도덕을 와해시킨다고 우려했다.

 

그의 저서인 ‘예정론의 순서와 형태에 관한 윌림암 퍼킨스의 논문에 대한 고찰’(1602년 작품)에서 그는 선택에 관한 퍼킨스의 견해에 비칼빈주의적인 접근방식을 보였다. 그는 믿음에 이르기 위해 특별한, 효력 있는 은총이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성도의 견인에 관한 교리에 이의를 제기했다. 알미니우스의 죽음은 교회 내에서 분출한 논쟁을 잠시 연기시켰을 뿐이다. 실제로 그의 추종자들은 교회 내에서 자신들의 견해를 용인받기 위해 단호하게 싸워나갔다.

 

그후에 요한 위텐보가르트(John Uytenbogaert)가 이끄는 43명의 알미니우스주의 목사들은 1610년에 희합을 가지고 탄원서 즉 항변서를 작성했고 자신들의 지위를 보호해 줄 것을 홀란드 정부에 요구했다. 아울러 그들은 (당시 화란에서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벨직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그 신조가 항변서의 입장을 따르도록 변경해야 한다고 교회에 청원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5가지로 천명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a) 하나님은 세계가 생기기 전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며 불변한 목적을 가지시고……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예수를 믿고 이 신앙과 신앙의 순종 안에서 이 은혜를 통하여 마지막까지 견딜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또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시며, 다른 한편으로는 고칠 수 없는 불신자들을 …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대로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영원한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예지예정’이란 표현은 피했지만, 그들의 일관된 주장은 그들의 저술 속에 나타나듯이 ‘예지에 입각한 예정’이다).

 

b) …그리스도 예수는 …자기의 죽음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구원과 죄의 용서를 성취하셨다. 그러나 …믿는 사람 이외에는 죄의 이 용서를 실제로 받을 수 없다. ….

 

c) 사람은 자기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을 정도로 죄의 상태에 처하여…구원하는 은혜도 갖지 못했고 또한 자기의 자유의지의 힘도 갖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나며, 이해하는 일과 원하는 일과 뜻하는 일과 …참으로 선한 것을 올바로 이해하며 생각하며 뜻하며 실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 필요하니… 요15장 5절 “그러나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d) 하나님의 이 은혜는 …… 거듭난 사람이라 할 지라도 ……협력하는 은혜 없이는 악의 유혹을 견디어 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선한 행위와 운동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돌려야만 한다. 그러나 그 은혜가 작용하는 양식에 있어서는 그 은혜를 사람이 거절할 수 있는 것이니, (사도행전 7장)

 

e) 참된 신앙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서 그의 생명을 주시는 영생을 받는 사람은 사탄과 죄와 세상과 또 자기 자신들의 육에 대항하여 싸워서 승리를 얻는 충분한 힘을 얻는다. 이것은 언제나 성령의 도우시는 은혜를 통해서 …요한복음 10:28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태만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들의 생활의 처음 시작을 다시 저버리거나, 이 악한 세상으로 되돌아가거나, …은혜를 무효로 돌릴 수 있느냐의 가부문제는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설득하여 우리 자신이 그것을 가르칠 수 있기 전에 성서적으로 더 독특하게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로 구성된 알미니안 신학은 칼빈주의신학에서 조명해 볼 때, 이것은 펠라기안주의의 재현이다. 알미니우스는 예정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덕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준비시키는 은혜 덕에 믿고, 결과적 은혜 덕에 견이케 될 이들이라고 하나님이 예지하신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그리고 믿지 않고 견인하지 못할 이들은 심판하시려는 신적 장정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을 하면서도 알미니우스는, (펠라기우스와는 다르게) 구원을 이루는 데는 신적은혜가 필요하다는 것과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변증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추종자들도 위의 작성된 『항론서』제3조와 4조를 통하여 그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결국 점차 사람을 그 자신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절대적 결정권자가 되게끔 하였다.

 

그렇지만 이 “항변서”를 알미니우스주의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한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널리 가르치고자 하며, 이 이론을 구원의 이론으로서 충분하다고 보고서 그 이상으로 높이거나 그 이하로 낮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영향으로 후에 도르트회의 전의 몇몇 칼빈주의 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하는 알미니우스와의 논쟁에 휘말리면서 좌절감을 맛보게 되었으며 또한 몇몇 도시에서 칼빈주의 자들이 항편파 설교자가 있는 교회에서 탈퇴하는 기이한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1615년에 일부 목사들은 비밀교회회의를 조직할 것과 국가 주도의 교회에서 탈퇴하는 문제를 놓고 대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617년 윌리암의 아들 왕 모리가 공개적으로 위텐보가르트가 설교자로 있는 하구에서의 궁정교회에서 예배보기를 거절함으로써 반(反)항변파인 칼빈주의를 찬동하고 나섰을 때에 사회는 완전히 양분되었다. 그래서 홀란드는 정치가인 올덴바르네벨트, 나머지는 모리스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618년 8월 29일 마우리스가 올덴바르네벨트를 체포하자 항변파의 원리를 주장하던 여러 지도자들은 네덜란드에서 도피하기 시작하기도 했다. 모리스가 확고한 통제권을 장악하자 국가의회는 작년에 포고했던 칙령을 즉시 시행하여 전국교회회의가 1618년 11월에 도르트에서 열리게 하였던 것이다.

 

 

b. 도르트 신조의 신학적 가치

 

우리는 신조의 역사와 가치를 연구하는 과정 속에서 도르트 신조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정신을 잃어 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도르트 총회처럼 비(非)개혁교회의 입장을 명확하게 표명한 신조의 역사가 드물기 때문이다. 다른 신조들도 나름대로 각 시대에 있어서 철저하게 개혁신앙의 입장을 표명하기는 했어도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인 배경으로 인해서 대외적인 입장을 취하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개혁교회의 신조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당시의 총회가 이것을 공식적으로 표명하고 또한 정치적인 입장을 밝히는데 있어서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도르트 총회에서는 우리가 도르트 신조의 역사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개혁신앙의 입장을 분명히 표명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적인 입장을 명확하게 표현했던 것이다. 그래서 비(非)개혁신앙을 주장했던 자들은 당시의 지역에서 목회를 할 수 없도록 파면을 하고 또한 국가 위정자들은 이들은 감금하는 체포령을 내리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정치적인 입장 표명이 도르트 신조의 마지막 선언문에 잘 드러나고 있다.

 

도르트 신경은 벨기에 교회에서 논쟁되어 왔던 다섯 조항에 관한 정통 교리를 분명하고 간결하게 그리고 올바르게 선언한 것이며, 동시에 얼마 동안 말썽을 일으켰던 잘못된 주장을 지적하여 이를 배격한 것이다. ---이 도르트 신조는 모든 진리와 공의와 은혜를 거스린 채 사람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말로 현혹시키려는 몇몇 사람들의 잘못됨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데,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 이상과 같은 터무니없는 주장, 즉 개혁교회가 인정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배척하는 것을 그들은 주장하고 있다. -- 더 나아가 종교 회의에서는 개혁교회의 참 신앙고백을 중상 모략하고 거짓 증거를 하는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그들에게 경고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연약한 사람들의 양심을 상하게 하고 진실하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 사회를 어지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조의 역사는 단순히 신앙의 내용만을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정치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곳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이 신조를 채택하는 정신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개혁교회라고 했을 때 개혁하고자 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으로 우선적으로 제시되었던 것이 예배와 정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정치적인 입장을 표명한다고 하는 것은 개혁신앙과 다른 비(非)개혁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 포용하지 않고 반드시 이단으로 정죄하고 또한 이단으로 정죄되면 교회의 교제에서 축출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정치적인 입장까지 표명하지 않으면 반드시 비(非)개혁 신앙의 무리들에 의해서 교회는 또다시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이 교회의 역사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정신을 도르트 총회의 역사를 통해서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선언문에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개혁교회의 신조 채택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표현이 다음과 같이 제시되고 있다.

 

이 종교 회의에서 결정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둔 동시에 개혁 교회의 신앙고백과 일치하는 것이다. --- 위에서 말한 잘못된 사람들의 중상 모략으로부터가 아니요 또한 옛날이나 지금의 가르치는 자가 정직하지 못하게 인용했다든지 또는 전혀 의미를 알지 못한 채 곡해해서 인용하는 등의 사사로운 표현으로부터도 아니요, 교회들의 공적인 신앙고백, 즉 종교회의의 모든 교회가 다같이 찬성하여 확정지음으로 정통교리로서 선포한 것에서부터 판단해 주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위의 선언문을 보게되면 역사적 개혁파교회라는 것은 어떤 한 개인의 신앙과 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신앙을 이어서 초대교회의 신앙과 어거스틴과 칼빈과 웨스트민스터에 이르기까지 신조를 통해서 성경신앙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교회가 참된 역사적 개혁파교회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개혁교회에서 채택하는 신조의 채택정신은 철저하게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목적으로 신조를 확립하며 또한 역사적 개혁교회의 신조의 내용들을 소중하게 이어 받고 그 교리적 내용을 세워가는 정신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사도적 신앙과 역사적 개혁교회의 신조들과는 상관없이 단지 현재 시대의 요구나 문화적 바람으로 채택하는 신조는 역사적 개혁파의 신앙적 정신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도르트 신조에서는 비(非)개혁신앙의 교리적인 입장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인 것이다. 즉 다른 신앙고백서들은 이단의 무리를 전체적으로 또는 큰 주제를 따라서 그 내용을 정죄하고 있는데 도르트 신조에서는 문장 하나 하나, 그리고 단어 하나에 있어서까지 참된 성경의 의미 바르지 못한 성경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취급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통해서 우리는 개혁교회에서 신조를 채택할 때 그 정신이란 대충 타협하고 또한 혼합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라 목숨을 내놓고라도 철저하게 성경의 의미를 살피는 정신임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도르트 총회의 참석자들이 항론파가 제시한 내용들을 단어 하나에서까지 문제를 지적하면서 살펴들어가는 그 신학적 깊이에 놀랄 수밖에 없다.

 

 

c. 도르트 신조 배경 및 진행

 

네덜란드 칼빈주의자들은 전국 교회회의에서 공정한 심문을 받을 수 없으며 단순히 지역적인 개인 문제가 투쟁을 야기시켰다는 항변파의 주장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재판절차의 공정성을 보증하고 증명하기 위해 칼빈주의자들은 그 교회회의 정식회원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유럽 전역에 있는 개혁교회들로부터 대표들을 초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각국 대표단이 구성되어 105인이 참석한 세계적인 종교회의가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파견된 대표위원은 다음과 같다. 네덜란드 대표단은 18인의 정치위원과 게더란드, 남 홀란드, 북 홀란드, 절렌드, 위트레히트, 프리슬란드, 오베리셀 그로닝엔, 드렌테, 및 다른 지역 교회회의에서 목사 37인과 장로 19인이 파견되었다. 또한 네덜란드 신학교수 대표단은 요한네스 폴리안더, 프란키스쿠스 고마루스, 안토니우스 티시우스, 아토니우스 왈라에우스 및 시브란두스 루베르투스의 5인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국제대표단은 영국(5인), 팔라티네이트(Pfalz, 3인), 헷센(Hessen, 4인), 낫산(Nassan, 브레멘(Bremen, 3인), 엠덴(Emden, 2인), 독일어 사용권 스위스(취리히 1인, 베른 2인, 바젤 1인, 샤프하우젠 1인), 제네바(2인)에서 파견되었으며, 프랑스와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에도 초청장을 보냈지만 정치적인 문제로 대표단이 오지 못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유감스럽게도 영국과 분리되어 초청 받지 못했다. 제임스 왕은 뒤늦게 스코틀랜드인 한 사람을 대표단에 추가했지만, 그는 월터 발컨컬(Walter Balcanqual)인데, 영국교회 소속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구성된 도로트회의는 칼빈주의교회가 이전에 개최해 본 적이 없는 유일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 총회적인 성격을 띤 교회회의인 것이다.

 

이 회의의 진행은 1618년 11월 13일부터 1619년 5월 29일까지 6개월간 지속된 회의였다. 6개월간 154회의 공식회의를 가졌으며, 화란의 대표들은 교회문제와 관련하여 추가로 22회의 회합을 가졌다. 모든 경비는 국가에서 책임졌는데 10만 길더(guider) 이상이나 들었다 . 회의는 공개로 진행되어 방청객이 많았고, 회의의 회장이나 서기는 모두 철저한 칼빈주의자로 선출되었다. 회의 진행은 1618년 11월 12일 모든 대표자들이 도르트에 도착, 13일부터 본격적인 회의에 들어갔다.

 

교회회의의 기본임무는 항변파의 견해를 판단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네덜란드에서 달아나지 않은 항편파 지도자들은 교회회의에서 자신들의 관점을 밝히도록 소환되었다. 따라서 항론파들이 1618년 12월 6일에 도착하여 논쟁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대변인 시몬 에피스코피우스(Simon Episcopius)를 통해 교회회의의 진행을 연기시키고 대표들을 이간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계략을 이용했다. 나중에는 그들이 한달 이상 그들이 거부하면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 교회회의의 의장인 요한네스 보겔만(Johannes Bogerman)은 항변파들을 해임하고 그들이 쓴 저서를 근거로 결정내릴 것을 선언했다.

 

각양각색의 대표자들 각 자는 알미니우스 교리에 대해 나름대로의 답변을 작성했고 더 저명한 대표자로 구성된 위원회는 채택된 도르트 교회의 법령의 최종 형태를 준비했다. 따라서 항변파에 대한 법령, 즉 4개의 조항이 작성되었는데, 이것은 1619년 5월 6일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 항변파의 3조항은 4조항과의 관계에서만 오류가 있기 때문에 교회 법은 교리의 3,4조항을 하나로 묶었다.

 

이 법령이 완성됨에 따라 1619년 5월 9일 폐회하고, 당일 외국 대표자는 출국하였다. 그러나 화란인은 1586년이래 전국 교회회의가 소집되지 않은 까닭에 교회의 생활과 활동에 대한 다른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회의의 결과 이후 향변파의 정치적인 지도자 올덴바로네벨트는 참수형을 당하였고, 당시의 정치가요, 법률가요, 알미니안 신학자였던 그로티우스(Hugo, Grotius, 1583-1645)는 종신형을 살게 되고, 200여명의 알미니안 목사들은 파면 당하였다.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개혁교회는 국교가 아니더라도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종교였기 때문에, 네덜란드 정부 당국은 “참된 종교(칼빈주의 기독교)”를 옹호할 의무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비록 참석하지 못했지만 프랑스 개혁교회는 뒤에 도르트신조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1620년 알레(Alais)의 23차 총회와 1623년 사렌톤(Charenton)의 24차 총회는 돌트대회의 결정을 모든 목사들에게 주지시켰다.

 

이와 같이 개혁교회에서 실시되었던 회의를 필립샤프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도르트 총회는 개혁교회의 역사 중에서 유일하게, 준(準) 세계교회의 총회의 성격을 가진 회의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도르트 총회는 신학자들의 모임이었던 웨스트민스터 총회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매우 중요한 교리적 표준문서들을 제정하긴 하였으나, 그 참석자들이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신학자들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학식이나 경건함에서 사도시대 이후 어떠한 회의보다 뛰어났다”

 

스위스 교회의 큰 별이었던 Breiting은 화란 대표들의 지식과 역량의 풍부함에 놀라서 마치 회의에 늘 성령께서 임재해 계신 것 같다고 말하면서, 그 자신도 도르트 회의에 열심히 참석했다. 그리고 팔라티네이트의 대표로 참석했던 Scultetus는 자기가 도르트 총회의 대표가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 회의를 말할 때마다 모자를 벗고, ‘지극히 거룩한 총회’라고 말했다고 한다. 심지어 자유로운 사상을 가지 카톨릭 역사가였던 Paolo Sarpi까지도 도르트를 극찬했고, 한 세기가 지난 뒤, 뛰어난 화란의 사학자 캄펜기우스 비트링가(Campegius Vitringa)는 이렇게 말했다. “이처럼 많은 지식이 한 곳에 모인 것은 예전에 없었던 일이다. 트렌트 회의도 이렇지 못했다”

 

 

d. 도르트 신조의 교리적 독특성

 

이 신조의 내용은 4개의 조항아래 93개항목으로 구성되었는데, 59개항은 반항변파의 입장을 기술한 것이고, 34개항은 항변파의 잘못을 지적한 것이었다.

 

 

a) 제 1 조 신적 예정에 관하여(De Divina Praedestinatione)

 

이 항목은 18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5항> “다른 모든 죄와 마찬가지로 이 불신앙의 원인과 그 죄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그를 통한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사로서 다음과 같다(엡2:8)---”

 

6항>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의 선물을 받는데,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하심에 달려 있는 것이다. ……다 멸망 받기에 마땅한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오묘하고도 자비롭고 의로우신 택함과 유기의 작정이 있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대로 사악하고 범죄하여 요동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멸망 가운데 빠지게 하지만, 거룩하고 경건한 영혼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위로로 도우시는 것이다.

 

7항> 선택이라는 것은, 이 세계가 만들어지기 전에 ……그 분 안에서 구원받은 자의 일정한 수를 뽑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시고 죄에서 벗어나게 하셔서 말씀과 성령으로 그 분과 교통하도록 하시고 그들에게 참 믿음을 주시어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엡1:4-6)

 

9항>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택하는 것은 그 선행조건이나 원인 등으로서 인간 속에 있는 어떤 예지적인 믿음이나 그 믿음에 대한 순종, 거룩함 또는 그밖에 다른 어떤 착한 성품이나 기질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선택을 받아서 믿음에 이르고 그 믿음에 순종하여 거룩함에 이르는 등의 순서를 갖는 것이다.

 

10항>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이 은혜로운 선택의 유일한 원인이 되는데…

 

11항> …택자와 유기자의 수가 감소될 수 없는 것이다.

 

12항> 구원의 확신에 대한 정도와 방법은 다양할 수 있긴 하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이 영원불변한 택정함의 확신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스런 오묘한 일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성령의 기쁨과 거룩한 즐거움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나타난 바 구원받는 자의 확실한 열매를 잘 지켜나감으로 이루어진다. 즉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과 충성스런 경외심, 죄에 대한 탄식, 그리고 의를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과 갈증 등이다.

 

13항> 이 선택을 잘 깨닫고 확신을 갖게 될 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며, …이 선택의 교리를 이해할 때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킴으로써 나태한 자리에 있지 않도록 하며, 세속적인 유혹에 빠져들지 않도록 하지만, 선택받은 자로의 행위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이 있게 된다.

 

14항>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로 인한 이 선택의 가르침이 선지자들과 그리스도 자신 그리고 사도들에 의해서 선포된다. …우리는 이일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복돋우고 위로해 주시기 위하여 일어남을 알 수 있다.

 

16항> …이 선택된 유기의 가르침이 그들을 공포로 몰아 넣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를 …

 

17항> …경건한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이 거룩한 믿음을 따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도록 하기 위해 자녀들이 택함받아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창17:7; 행2:39; 고전7:14).

 

18항> …“네가 감히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롬9:20)

 

 

a)-1 잘못된 주장에 대하여

 

5절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불완전하고 비결정적인 상태로 택함을 받았다가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은 예지된 믿음과 회심, 거룩함, 경건함 등의 생활 등을 이미 시작했거나 얼마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하고 결정적인 선택은 믿음과 회심 그리고 거룩함과 경건함에 끝까지 이르도록 하는 견인(참음)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과 이 믿음에 순종 그리고 거룩함과 경건함 또한 성도의 견인 등은 …선택의 열매가 아니라 완전히 선택될 사람들에게 보여질 일이며, 이러한 주장은 성경과 모순되는 주장이다(9:11; 행13:48; 엡1:4;요15:16; 롬 11:6; 요일4:10).”

 

6절 “택함 받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작정에도 불구하고 택함받은 사람들 중의 얼마는 여전히 멸망 받을 수 있으며 또한 실제로 그러하다. 이것은 성경의 모순된다(마24:24; 요6:39; 롬 8:30)(택자의 유동성).

 

 

b) 제 2 조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의 구속을 통한 인간

 

(De morte Christi et hominum peream redemptione)

 

본 항목은 다음과 같이 9항목을 구성되어 있다.

 

1항> 하나님은 가장 자비로우시며 공의로운 분이시다. …

 

8항> …즉 영원 전부터 구원에 이르도록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구원토록 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있었다.

 

9항> …따라서 정한 시간이 이르면 택함받은 성도는 한 곳에 모이게 될 것이며,…

 

 

b)-1 잘못된 주장에 대하여

 

1절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돌아가시도록 세우신 것은 누구를 구원토록 하기 위한 분명한 계획 없이 되어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만일 그리스도의 공로로 얻은 구원이 실제로 어떤 사람에게 적용된 적이 결코 없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공로의 필연성과 유익성과 그 가치는 그대로 존속할 수 있고 모든 부분에 있어서 완전하게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성경과 모순된다(요10:15, 27; 사53:10)

 

5절>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화해로 은혜 계약에 들어감으로써 그 누구도 원죄로 인한 저주를 받지 않기에 충분한데, 이것은 원죄로 인해 저주받지 않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원조의 죄의식에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주장도 성경에 모순(엡2:3).”

 

6절>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 공로를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얻게 되는 유익을 모든 사람들에게 주셨다. …죄사함을 받고 못 받고의 차이는 그들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이것은 예외없이 누구에게나 주어진 은혜일 뿐 영생을 받는다는 것이 그들 속에 역사하는 어떤 특별한 자비를 입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주어진 은혜를 잘 선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펠라기우스의 오류이다.

 

 

 

c) 제 3,4 조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께로의 회심과 그 태도

 

(De hominis corrptione etconbersione ad Deum, ejusque modo)

 

본 항목은 다음과 같이 17항목으로 구성되었다.

 

2항> 인간은 타락 한 후에 자녀를 낳았고 타락한 조상에게서 또한 타락한 후손들이 나게 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

 

4항> 그러나 인간에게는 타락후에도 자연의 빛과 편광(片光)이 남아 있어서 그것으로 인간은 하나님과 자연의 사물과 선악의 구별에 대하여 어느 정도 지식을 보유하고 있고, 선행과 사회의 질서에 관하여 또 규칙을 지키는 행동에 대하여 어느 정도가 못되며, 인간은 그것을 자연과 사회의 일에 있어서도 정당하게 쓸 수 없다. 아니 더 나아가서는 인간은 본래의 그 광명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아주 더럽혀서 불의한 가운데 그것을 억제하였으므로 이러한 일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수 없게 되었다.

 

5항> 이 자연의 광명에 비춰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선민인 유대인에게 모세를 통해 주신 십계명의 율법을 생각해야 한다. …율법은 죄의 중대성을 밝히며, …이 율법에 의하여 구원의 은혜를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6항> 따라서 광명과 율법이 해낼 수 없었던 일을 하나님은 자신의 성령의 역사로 말씀과 화해의 사역을 통하여 실현하신다. …

 

10항> 그리고 복음으로 부름 받은 어떤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적절한 행사에 돌릴 것이 아니고 …때가 차매…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이다.

 

12항>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사 새로운 모습으로 만드시되 죽음에서 부활의 새 생명을 얻도록 하신 것은 성경에서 강조하는 중생케 하는 힘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복음을 외침으로나 도덕적 권면으로, 또는 인간적인 수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초자연적이고 가장 능력 있으며 동시에 가장 기쁘고 놀라우며 신비스럽고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 보여주듯이 이 중생의 능력은 창조나 죽음에서의 부활 등에 못지 않게 놀라운 것이다.

 

14항>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고, 자기의 뜻을 따라 받거나 거부할 수도 있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시한 정도의 것으로 여겨서는 결코 안 된다. 오히려 이것은 영접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믿게 할 능력이나 힘을 제시해 주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자유의지 도 주시고…믿게 되는 행위 역시 주신다는 것이다.

 

15항> …죄와 거짓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자에게 하나님은 어떤 의무감도 있을 수 없다. …

 

17항> 무한한 자비와 선하심으로 택한 자들에게 베푸시는 그의 가르침의 길이 있는데, 중생케 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역은 복음을 통해 이 일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복음을 중생케 하는 씨앗으로, 또한 영혼의 양식으로 정해 주신 것이다. …따라서 사도들과 그들의 뒤를 이은 교사들은 경건하게 하나님의 이 은혜에 관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미하며 모든 교만을 낮추도록 인도하였으나 동시에 말씀과 성례전과 훈련의 실시에 있어서 복음의 거룩한 교훈으로 사람들을 보존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에 이르러서도 …은혜는 훈계에 의하여 받을 수 있는 것이고…우리의 의무를 즐겁게 수행하면 할 수 있도록…

 

 

c)-1 잘못된 주장에 대하여

 

4절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라도 실상은 죄 가운데서 죽은 것이 아니요, 영적이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없는 것도 아니요, 오히려 의로운 삶에 굶주리고 목말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통회하는 상한 심령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과 모순(엡2:1 ,5: 창세기 6:5; 창 8:21). …”

 

6절 “ 우리가 처음으로 회개하여 신자라 불리게 된 이 믿음이란 하나님에 의하여 받아들인 자질이나 은사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일 뿐이다. 이 믿음에 따라 얻게 되는 능력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 믿음이란 어떤 선물이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주장은 성경과 모순되는데,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믿음과 순종의 새로운 자질과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마음을 인간의 마음속에 넣어주셨다고 선언한다(렘31:33; 겔36:27).

 

9절 “은혜와 자유의지는 회심하는 데 필요한 부분적인 요소가 되는데, 회심의 과정에서 볼 때 은혜는 자유의지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작용하여 결정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이 자유의지를 돕기에 충분하도록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주장은 펠라기우스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경과 모순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롬9:16; 고전4:7)

 

 

d) 제 5 조 성도의 견인(De perseverantia sanctorum)

 

본 항목은 15항목으로 구성되었다.

 

4항> …회심한 이후에라도 육신이 연약하여 하나님의 성령 안에 항상 거하지는 못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 죄에 빠져 육체의 정욕에 유혹되기도 한다. 따라서 성도들은 유혹되기도 한다. 따라서 성도들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을 게을리 할 때 성도라도 …죄에 빠질 수 있다. …다윗과 베드로…

 

6항> ……전적으로 타락되어 영원한 멸망에 빠지도록 하시지는 않는다.

 

7항> 믿음의 씨를 보존해 주신다. …그들 자신이 구원에 이르도록 부지런히 역사 하신다.

 

8항>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거나 실패하지 않는다. …

 

10항> …만일 하나님의 택한 받은 자들이 최후의 승리에 대한 확신과 영원한 영광에 대한 약속을 소유하지 못한 때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되는 것이다.…

 

11항> 심한 유혹으로 믿음과 성도의 견인에 대한 확신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을 때도 있다. 그러나…하나님은 성도를 견인토록 하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시험을 감당케 하시고, …피할 길을 내사…

 

12항> 그러나 성도를 인내하도록 하신다는 이 확신은 교만한 마음으로 이 세상의 안일함 속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겸손한 마음과 충성심, 참된 경건함과 모든 시험 중에서의 참음, 그리고 뜨거운 기도와 인내심, 그리고 진리를 고백하며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이 모든 일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d)-1 잘못된 주장에 대하여

 

6절 성도의 견인이나 구원에 대한 확신은 그 본성을 따져보면 나태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거룩함이나 선한 행동, 또는 그 밖의 다른 경건한 행위를 행하는 데 방해할 뿐이요, 오히려 그러나 확신을 의심한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위의 주장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과 내재하는 성령의 역사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3) “예정론”의 계속되는 논의.

 

여기서 논의되는 내용들은 신학의 초보자들에게 있어서 다소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개혁교회의 신조들 안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부분이 "예정론"이고 이 예정론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아래의 내용들을 깊이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비록 어려움이 있어도 잘 이해해 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비록 어렵게 느껴도 신조에서 성도의 신앙고백의 내용으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무지를 핑계삼지 말고 신조가 제시해 주는 내용을 깊이 따라가서 성경의 깊은 의미를 잘 받아들이도록 해야 할 것이다.

 

 

① 유기의 원인

 

알미니안주의는 칼빈주의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로, 하나님을 죄의 원인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항론파의 입장은 타락전 선택론자든, 타락후 선택론자든 목소리가 같다. 신조 1조 5항의 표현처럼, 불신앙과 죄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다. “다른 모든 죄와 마찬가지로 이 불신앙의 원인과 그 죄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신에게 있다”.

 

그러나 항론파는 이렇게 반박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유기자’는 예정하시지 않은 것이 아닌가? 라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렇게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로지 그의 의로우신 뜻에 따라서 그 누구도 아담의 타락에 빠져 죄의 상태에 놓임으로 저주를 받게 하지도 않으셨고, 또한 믿음과 회심에 필요한 하나님과 은혜로운 사귐에서 벗어나도록 하지도 않으셨다”(항론파의 잘못된 진술 제 1 조 8 절).

 

이와 같은 진술에 대하여 신조는 다음과 같이 성경으로 대답한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9:18).

 

그러나 진술을 마치게 되면, 이중예정에 대한 답은 주지만, ‘유기의 원인’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진술은 하지 않고 있다. 다만 다음과 같이 진술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과 엄한 유기에 대한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대답할 수 있다. 이 사람아 네게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롬9:20).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20:15).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롬11:33-36)”. (제1조 18항) 따라서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성경을 직접 살핌으로써, 유기의 원인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출7:3)”. “(개구리 재앙때)… 그러나 바로가 숨을 통할 수 있음을 볼 때에 그 마음(의지)을 완강케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출8:15)”, “(이 재앙때)…술객이 바로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나 바로가 마음이 바로가 이 때에도 마음을 완강케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출 8:19)”, “(파리 재앙때)…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마음을 완강케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출8:32)” “(독종 재앙때)…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출9:12)”, “(우박재앙때)…바로가 비와 우박과 뇌성의 그친 것을 볼 때에 다시 범죄하여 마음을 완강케 하니 그와 그 신하가 일반이라(출9:34)”, “(메뚜기 재앙)… 여호와께서 모세에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케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너로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 가운데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출10:1-2, 20).

 

이 사실에서 우리는 바로의 마음의 완강케 된 사실에서, 하나님께서 주어로서, 또는 바로가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작정하심에 있어서, 그 대상의 의지를 대상의 뜻과는 반대로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의 자유한 의지를 그대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위 기술한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유기의 원인이 되고 마는 ‘불신앙과 죄’가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곧 하나님의 작정하심 안에서 그 ‘불신앙과 죄’가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유기의 대상뿐만 아니라 ‘그 불신앙과 죄’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아무런 죄의 책임이 없다. 유기의 예정과 죄의 작정만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유기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유기의 원인을 인간론에서 사려할 때는 ‘죄와 불신앙’에 있다고 진술할 수 있다(도르트), 그러나 유기의 원인을 궁극적으로 신론에서 사려해야 하는데, 곧, 하나님의 예정(선택과 유기)하심 속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와 불신앙’이 유기의 원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선행과 믿음이 예정의 원인이 될 수 없음과 ‘죄와 불신앙’ 그리고 ‘선행과 믿음’은 드러난다면 열매로서 드러난 것이다.

 

칼빈이 그의 자필로서 기록한 이 말은 의미심장한 말이다. “모든 것들이 그의 원함과 질서에서 일어난다 고하여 하나님이 죄의 저자라고 말하는 자는 미련하고 중상하는 일이다. 이는 그들이 인간의 명백한 부패와 하나님의 신비한 심판 사이를 구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내용이 다음과 같은 말씀에 보다 더 명백하게 제시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롬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롬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위의 말씀도 보면 인간이 무슨 악을 행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더 높고 큰 뜻에 따라서 택할 자와 버릴 자를 구분하셨다고 증거하고 있으며, 버림받은 자들은 처음부터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으로 이 땅에 존재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이런 유기의 원인을 정확히 알아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과 공로로서 구원이 축복의 선물을 받는 것이 아님을 철저하게 제시해서 인간이 교만하지 않도록 하는데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깨닫고 더욱 겸손함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또한 죄악조차도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음을 배우면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어떤 고난과 환난을 만나더라도 두렵지 않은 위로를 얻게 되는 것이다.

 

 

② ‘타락전선택설’과 ‘타락후선택설’ 논쟁.

 

알미니안의 항변내용이 칼빈주의 안에서 심판되고 해결되었지만, 모든 조항에서 칼빈주의자들이 정확한 일치를 본 것은 아니었다. 특별히 제 1 조항에 대해서 즉, 항변파의 예지예정은 모든 칼빈주의자들이 거부하는 내용이었지만, 하나님의 선택이 타락전이냐, 타락후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칼빈주의자들이 합일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참여자들의 ‘타락후 선택설’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도르트신조의 공식적 입장은 ‘타락후 선택설’로 종결지어졌다. 그러나 화란의 엄격한 신학교수의 고마루스(F. Gomarus)는 ‘타락 전 선택설’을 고집하였다. 고마루스 외에도 마코비우스(Maccovius)가 있었다. 그리고 남부 화란, 오베리셀(Oversel), 그리고 프리슬란드에서 온 대표자들은 이 문제를 결정치 말고, 양 파 모두를 만족시키는 표현을 사용하기를 선호했었다. 곧 도르트회의 ‘타락전 선택설’을 반대하지도, 지지하지도 않은 소극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면 여기서 타락전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의 진술을 먼저 살펴보자.

 

타락전 선택설을 지지하던 고마루스는 선택과 유기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먼저, 선택에 대해서 “권에 이르는 인간의 예정은 (권에 이르기에 충분하고 그 자체가 역시 절대 자유롭고 참되고 은혜로우신 주의 기뻐하심에 따라(살후2:13; 롬8:28-30, 빌2:13) 그의 영광의 찬양을 위해서 온 인류 중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주시고자 능력 있게 역사하고 있는 영광과 은혜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이다.”

 

다음 유기에 대해서 “궁극적 유기는 하나님의 가장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징벌하시는 의에 대한 선포를 위해서 온 인류 중에서 어떤 사람들을 은혜나 영광을 주시지 아니하고, 그 같은 자들을 그들 자신의 자유의지에 다라 죄 가운데 타락하도록 내버려두시고 죄 가운데 있도록 하시며 결국 공으로 그들의 죄악된 의지를 징벌하시기로 결정한 하나님의 결정이다(마11:26; 7:23; 요6:44,65; 10:26; 롬11:7,8; 계20:13; 롬9:18,20-22). 그러나 도르트회의 법령으로 결정된 공식 입장에 제 1 조 7,10,15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7항> “선택이라는 것은, 이 세계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이 그들의 최초의 상태로부터 타락하여 죄와 파멸의 결과를 낳게 됨에 따라 그리스도, 즉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중보자로 또한 택한 자의 머리와 구원의 기초로서 세우신 그 분 안에서 구원받은 자의 일정한 수를 뽑으시는 것이다.… 택함받은 자들이 그 본성에 있어서는 그밖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거나 더 값어치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똑같은 비참한 속에 있었다.”

 

10항>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이 은혜로운 선택의 유일한 원인이 되는데, 하나님께서 구원의 조건을 세우신 것은 인간의 어떤 능력이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범죄한 모든 사람들 중에서 기꺼이 얼마를 뽑아서 자기에게 속한 특별한 백성으로 삼으신 것인데 이는 …”

 

15항> “모든 인간이 택함받은 것이 아니라, 그 중(타락한 온 인류) 얼마가 택함을 받았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롭고 자비로우신 불변하는 사랑에서 제외되어 스스로 파멸에 빠져 구원의 믿음과 회개하는 은총을 받지 못한 채, 그들의 길을 따라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여 끝내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 앞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진술을 정리하여 언급하자면, 타락전 선택설은 선택이 타락의 작정에 우선한다고 주장하며, 타락의 작정을 예정의 가치를 드러내는 방편으로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타락후 선택설은 타락이 선택에 앞선다는 것이다. 이들 양 주장의 논증을 간략하게 논리적인 순서에 따라 도표화면 다음과 같다.

 

 

 

이들 양 주장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의 강점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타락후 선택설’의 강점은 이것이다. 아담 안에서 모두 죽게 되었지만, 그 중에, 선택이라는 ‘은혜’와 나머지는 아담 안에서 그 죄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른다는 ‘공의’가 타락전 선택설보다 더 강하게 논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칼빈주의를 완전하게 만족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전에 아무 계획 없이 사람들을 창조하시고, 그리고는 사람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보신 다음에야 선택과 유기를 하셨다는 이론은 전적으로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지와 죄에 대한 허용의 작정은 이 문제를 논리적으로 예정의 대상에 대하여 타락의 작정에 선행하는 더 깊은 신적 작정이 있는 것이다. 이에 만족할 만한 대답을 주는 것은 타락전 예정론이다.

 

타락전 예정론의 강점은 타락후 예정론의 “은혜와 공의”에 비하여 “하나님의 뜻과 주권”을 강하게 드러내는데 있다. 전자와 후자가 모두, 모든 유기자는 자기 자신의 죄가 그의 저주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여겨야 한다는 점에선 의견을 같이하나(인간론), ‘타락전 선택설’론자는 유기의 궁극적인 원인은 타락에 선행하는 ‘은밀한 신적 작정’(신론)에 있다고 하는 점에 강하게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당한 신학자들이(쯔빙글리, 칼빈, 베자, 피스카토르, 퍼킨스, 호민스(Hommins), 보게르만(Bogerman) 등O 때때로 강력한 표현들을 사용했다. 최종 목적은 ‘타락후 선택론의 은혜와 공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택자에 대한 은혜와 죄인에 대한 공의’는 그 목적을 이루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이 후의 대부분의 교회가 신조를 작성함에 있어서는 ‘은혜’와 ‘공의’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타락후선택설’이 선호하였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만이 희미하게 그 선을 따라가고 있다.

 

 

③ 조직신학에 있어서의 예정론의 위치

 

이 주제와 관련해서도 성도들에게 매우 생소한 면이 있다. 그러나 이 주제도 예정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내용이기 잘 정리해 두어야 한다. 우선 이 주제가 왜 성도들에게 실제적으로 중요한가를 언급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오늘날 대부분의 많은 교회들에서 예정론을 가르치지 않고 또한 거부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나마 예정론을 가르치는 교회들이 있는데 그 교회들 대부분의 방식이 예정론은 우리가 인생을 살고 난 후에 뒤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오셨음을 발견하면서 감사하게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가르치는 이유는 예정론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다 결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그 뜻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고 하면 자칫 인생이 운명론적으로 치우치기 쉽기 때문에 예정론은 신앙생활의 시작에서가 아니라 맨 뒤에서 다루어지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예정론적으로 삶을 살게 되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이 게을러지고 나태해질 염려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그러나 성경과 우리의 신조들이 가르치는 것은 우리의 삶이 철저하게 예정론적 삶, 즉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영원 전에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에 그분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야 하는 삶으로 소개해 주고 있다. 이처럼 예정론을 어떤 위치에서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성도가 살아가는 삶의 정신이 전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주제를 잘 정립해 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먼저 종교개혁은 바울과 어거스틴에로 돌아갔고,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고백에서 로마카톨릭의 펠라기우스주의에 대립하는 입장을 제시할 능력을 얻었다. 처음에 루터는 쯔빙글리나 칼빈과 같이 예정론을 옹호했다. 비록 재세례파에 반하여 후에는 말씀과 성례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크게 강조했지만, 그는 결코 예정론에 대한 그의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처음에는 멜랑히톤도 철저히 루터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1527년 이후로 그는 점차 예정론에서 떠나, 결국에는 공개적으로 ‘신인협동설’(synergism)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루터 역시 점점 더 사변적 예정론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 숨기우신 하나님보다는 은혜를 부여하는 말씀과 성례의 시행에 집중하였고,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바리심(이를 그의 표현된 뜻이라고 했다)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래서 예정론에 대한 멜랑히톤의 견해가 점차 변해 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았으며, 단지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교리를 변증하는데 온 힘을 다 기울였다. 예정은 독자적, 신학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고 여긴 것이다. 이는 그저 이차적인 중요성만 가질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교리에 대한 종합적 접근방법에 대해서는 난색을 표명하고, 하나님에 관한 교리로부터 보다는 사람의 잃어진 상태로부터 예정을 이끌어내는 분석적 접근을 애호하였다.

 

이렇듯 점차적으로 루터의 초기 입장과 전체 종교개혁의 입장을 희생시켜 나간데 비해서, 개혁파의 입장은 종교개혁의 원리에 충실한 것이었다. 쯔빙글리는 그의 논의를 단순히 인간학적 근거에만이 아니라, 특히 신론적 근거에 두면서, 즉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그 논의를 이끌어내면서 예정론과 관련하여 논의하였다. 이점에서 그들은 로마서 9-11장에서 죄론과 은총론에서 시작하여 선택론에로 나아가고, 에베소서1:3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축복을 그의 출발점으로 삼은 사도 바울의 예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후에 바울이 선택을 언급하면서 선험적으로 구원의 모든 축복을 선택으로부터 이끌어내었던 것과 같이(롬9:29이하, 엡1:4이하), 개혁신학자들 중에서도 종합적 접근방법이 점차 분석적 접근방법을 대신하게 되었다.

 

곧 신앙의 생활은 참으로 선택론을 고백케 하는 조건이 되나, 선택의 사실은 모든 영적 은사의 원천이요, 모든 축복의 원천과 첫 원인인 것이다. 이것은 칼빈만이 아니라 , 멜랑히톤, 해밍(Hamming), 부쳐, 올레비아누스 등의 확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정이 신론의 한 부분인가(선험적 순서), 아니면 구원론의 시작과 중간에서 다루어져야 하는가(후험적 순서) 하는 것이 꼭 원칙상 본질적 차이를 함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개혁신학자들은 선험적 순서를 따랐고, 루터파와 알미니안, 그리고 로마카톨릭과 대부분의 근대 교희학자들은, 점차 후험적 순서를 취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이 차이는 개혁파가 사변적인 방식으로 예정을 선험적이고, 철학적이며, 결정론적 신개념에서 이끌어내고, 다른 이들은 성경에 제시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에 충실하기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가장 열렬한 칼빈주의자도 신론과 하나님의 경륜을 가르칠 때마다 성경의 교리 외에는 아무것도 제시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차이의 참된 원인은 칼빈주의에게 있어서는 예정론이 단지 인간론적이고 구원론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특히 신학적 의미를 갖는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즉, 개혁파에게 있어서는 사람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예정의 주된 목적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직신학을 다룸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주관적 의식보다는 성경의 계시에 더욱 충실하여 우선 순위를 찾아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주관적인 의식을 우선한다면, 신론이든, 삼위일체든, 인간론이든 모든 교의가 구원론 이후에 자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은 교의학을 다룰 때에, 진리를 신자들의 의식에 주관적으로 들어온 것인 양 다루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안에서 계시한 것을 객관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따라서 바빙크는 이러한 방법만이 종교적 관심으로서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타당한 것이라고 하였다.

 

 

(4) 도르트신조 이후 ‘예정론’의 흐름.

 

1618년 이후 화란 개혁교회는 개신교 국각임을 공식적으로 표명하고 있는 화란 당국으로부터 여러 가지 지원과 특혜를 누리게 되었다. 교회회의 조차도 개최와 진행에 따른 제반 경비를 국가가 부담하였다. 또한 국가의 허락과 지원에 의해 원어성경을 네덜란드어로 번역하는 성경번역사업을 추진하였다. 따라서 이런 성경번역사업에서 나온 성경은 Statenbijbel(국가성경)로 명명되었다. 참된 개혁신앙에 대한 치안관의 관심이 이 유명한 번역성경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관심도 얼마되지 않아 변질되기 시작했다. 명목상으로는 국가는 교회의 행정적 조직적 업무에만 간섭하였다. 그러나 교리에 대해 관용적인 성격으로 변하면서, 국가는 도르트신조가 허보름대 케르프(Hervormde Kerp)의 신조의 하나로서 인정되는 것을 거절하였다. 이미 도르트신조가 선언된 직후 얼마되지 않아 알미니안은 정죄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 세계의 모든 교회들과 모든 나라들에게 번져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17세기와 18세기 동안에 성장해 나간 모든 소종파들과 종교운동들은 거의 모두가 그 성격상 알미니안적이었다. 이는 자연신론(deism), 퀘이커 사상(Quakersim), 감리교 사상(methodism) 등에 다 적용된다. 몇몇 신학자들만이 굳건히 개혁주의의 본래 입장을 취하였으니, 화란의 콤리(Comrie), 홀티우스(Holtius), 르라헤(Brahe), 스크틀랜드의 보스톤(Thomas Boston, 1617-1732)과 얼스킨(Erskines, -1870)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런 상황 가운데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바빙크가 언급하듯이 전통적인 ‘예정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세기가 되어버렸다. 그는 이렇게 진술하였다.

 

교회의 예정론을 결정론적 의미 즉, 무의식적 운명, 맹목적 자연, 비논리적인 이해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폰 하르트만의 진술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각 사람이 악에로 성향지어졌을뿐만 아니라, 그리로 결정되었음이 분명한 것과 같이, 모든 사람들이 선에로(미리) 성향지어졌을뿐만 아니라 그것에로 결정지어졌다. …절대적으로 유기된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이 분명하듯이 절대적으로 선택된 이들도 하나도 없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가장 버림받은 개인들조차도 그 자신 안에 일정한 양의 은혜를 가지고 있으며, 가장 은혜 받은 개인도 실제적인 악에서 완전히 면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 이러한 생각은 슬라이허마허의 입자이기도 하다. 그에게 있어서는 비록 그의 출발점이 교회론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에 집착한다고 해도, 그는 선택과 유기를 오직 시간관 관련해서만 구별하기 때문이다. 결국, 엄격히 말해서 (그에게는) 유기된 이들이 없다. 아직 변개치 못한 이들은 좋지 못한 환경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고, 아직 변개치 않은 이도 후에는 변개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바빙크가 지적한 이러한 정식 뿌리는 이전 알미니안 사상에서 나온 것임을 우리는 알미니우스와 그의 후계자들의 글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20세기의 바르트의 신학의 등장은 “자유주의자들이 놀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이다.”,혹은 ‘신정통주의다’라는 평가를 하지만, 그의 신학은 전통신학을 통하여 다시 재평가해야 될 것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의 신학은 칼빈과 17세기의 신학과는 그 성격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예정론에 있어서, 그는 선택이 창조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온 인류가 선택되었다고 진술하면서, 역사선상에 나타난 인간의 타락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속죄되었다고한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가 온 인류를 대신한 유기의 대상이면서, 선택의 대상이요, 선택의 주체라고 언급한다.

 

오토 베버가 요약한 『칼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이란 저서를 보면, Barth는 칼빈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결국 분리시켜 놓았다는 비판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다른 하나님의 뜻은 없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선택받은 인간’이라고 언급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선택받은 인간‘이라고서 인간에게는 첫 번 것 즉 선택과 축복과 생명을 허락셨고, 자신에게는 둘째 것 즉, 저버림과 형벌과 죽음을 돌리시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본시 택함받은 자와 저버림을 받은 자 사이에는 구별이 없고 不敬한 자와 믿는 자 사이에 구별이 있다”라고 언급한다.

 

이렇게 되면 모든 사람이 선택(만인구원설) 받은 것 아닌가? 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는데, 이런 질문 가능성에 대하여 그는 “그것은 각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가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쉽게 답한다. 당대의 같은 학자인 에밀 부룬너는 ‘유기’는 성경에서 표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기’를 삭제해 버렸다. 이 두 학자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를 삭제해 버린 것이다.

 

사실 바르트의 주장은 이미 과거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 속에서 발견되어, 17세기 학자들에 의해서 정죄되었던 것이고, 바빙크에 의해서 확인된 내용이다. 이미 칼빈은 그의 자필로 된 짧고 명료한 예정에 대한 고백조항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을 지라도, 순서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것들로 결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지체로 삼는 일보다 앞선다”고 언급하였다.

 

그리고 도로트회의 참여자 중 화란의 신학교수 대표단이었던 Sibrandus Lubbertus가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이 “그리스도는 우리의 선택의 마땅한 원인이 아니라”고 언급하였다. 고마루스(F. Gomarus) 역시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이 선택의 추진하거나 움직이는 원인은 유일하고 전적으로 자유로운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그리스도의 공로”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한다. “이런 선택의 추진하거나 움직이는 원인은 오직 전적으로 자유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기뻐하심이요, 그 때문에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니요 하나님밖에 어떤 것도 아니다. 특별히 더구나 그리스도를 선물하신 것은 위의 세 번 째 대조에서와 같이 구원을 인간의 선택아래 정해진 어떤 수단이다. 그 때문에 이것은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선택의 후속적인 역사이다.” 헷센의 신학자들도 같은 입장을 취하였다. 따라서 Dort회의에 바르트가 들어갈 자리는 없는 것이다. 바빙크 역시 17세기 전통 신학자의 글을 확증해준다.

 

선택이 그 안에서 그를 통해서 실현되는 한, 그가 선택의 원인과 근거인 것은 사실이다. 그는 또한 선택의 목적인 구원의 공적적 원인이며, 또한 택자들의 중보자와 머리이시다. 그리고 선택의 경륜이 성자와 관련하여, 그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루어 진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선택작정의 ‘실현적, 공적적 원인’이 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로마카톨릭 신학자들과, 알미니안, 루터라, 그리고 많은 현대 신학자들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그런 의미에서의 선택의 원인이라고 불리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개혁신학자들은 항상 이런 견해에 대립하여 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자신이 예정의 대상이시며, 따라서 그가 동시에 원인이실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성자의 파송에 앞서 있는 성부의 사랑에서 나온 은사이시다(요3:16; 롬5:8; 8:29; 딤후1:9; 요일4:9). 성자가 아버지로 사랑케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시는 사랑의 아버지 자신의 자발성이란 원천에서 나오는 것이다. …칼빈, 고마루스, 마르크(Marck), 그리고 드 무어(De Moor) 등은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예정되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신자들의 선택은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미리 정하신 것에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곧 그리스도안에서와 통해서이지 그리스도 때문에는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가 선택의 주체로서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것에 대해 전통적인 칼빈주의자들은 용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바르트의 아래와 같은 글은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이 펠라기우스의 얼굴에 가면을 쓴 것처럼, 자유주의의 얼굴에 가면을 쓴 것으로 판단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의 부활과 그 분의 기도를 주목하고 마음에 두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선택받은 것이다.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그 분 안에서’ 신적인 은혜의 선택의 대상이다.

 

이렇듯 순서적으로 전통신학과 유사하지만, 성격상, 기독론으로 출발하는 그의 신학은 전혀 전통신학(계시신학, 개혁신학)을 받쳐 주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알미니안의 정신을 계승하여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의 신학이 단순히 개인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교파도 아니고 장로교에서 ‘개혁신학(?)’으로 판단되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5) 다른 교회회의와 신조와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의 ‘예정론’에 대한 관심과 ‘예정론’에 대한 교회교육의 필요성과 실제적 효과.

 

본 장에서는 성도들을 바르게 가르칠 목적으로 형성된 도르트 신조외에 교회회의와 신조와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을 통하여 ‘예정론’에 대한 관심을 살펴보고, 다음에 ‘예정론’ 교육의 필요성과 실제적 효과를 기술하기로 한다.

 

 

a. 다른 교회회의와 신조와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의 ‘예정론’에 대한 관심.

 

초대교회에서 예정론은 그리 많이 발전되지 않았으니, 이교의 운명론과 영지주의적 자연주의에 반하여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펠라기우스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초대교회의 발자취를 따른 것이나, 그의 합리주의와 고행적 도덕주의는 그로 하여금 이전에 모든 사람에 인정되고 받아들여지던 “원죄교리”를 약화시키도록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이론은 에베소 공의회(431)에서 정죄 되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은 크리소스톰로, 그리고 헬라교부들의 글로 둘러싸여서 진술되었다. 이렇게 완화된 입장에 대해서 중세기에 ‘반(半)펠라기안주의(Semi-Pelagianism)’란 이름이 붙여졌다.

 

카시아누스에 의하면, 인간성은 참으로 죄에 의하여 손상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죄에 의하여 손상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고, 단지 병든 것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마치 스스로는 치유하지 못하나 약을 복용하고, 오랜 후에는 회복될 수 있는 병든 사람과 닮았다는 것이다.

 

또한 우물에 빠져서 스스로는 구조할 수 없으나 그를 구원하기 위해 던져진 줄은 잡을 수 있는 사람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을 따르는 이들과 유사 펠라기우스주의자들 간의 논쟁은 계속되었다. 거의 100년이 지난 후에야 이 논쟁은 그쳐져서 오렌지 공의회(529년)에서 결정하게 되었는데, 이는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못한 결정이었다. 이 실패의 결과로 유사 펠라기안주의가 기에르시 공의회(The Synod of Chiersym, 853)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로마카톨릭의 트렌트공의회는 절대적 예정교리를 거부함으로써 진리에서 완전히 덜어져 나갔다.

 

이것은 결국 뒤따르는 교리인 불가항력적 은혜와 견인의 교리까지도 반대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항상 진지들을 고수하고 그 진리를 위해 역사 속에 머물러 왔다. 그러나 아쉽게도 가장 핵심적인 교리인 ‘예정론’에 대한 진술이 뚜렷하게 드러난 교회회의, 신조, 신앙고백, 요리문답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의 신조가 ‘예정론’을 제외한 그리스도의 은혜와 믿음으로부터 구원에 관한 교리를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그 ‘믿음’의 성격을 자유의지로 되었다는 펠리기우스주의자들이나, 성령의 도움으로 의지가 회복되어 믿었다는 유사펠라기우스(알미니안)주의자들의 입장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전적으로 없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믿음’을 언급하기 때문에 ‘예정론’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은혜를 강조하면서, 그 은혜의 성격이 위로부터 곧, ‘신의 작정과 예정’에서 인식되지 않는다면, 구원의 확신에 대한 고백은 항상 유동적인 될 가능성이 많다.

 

‘예정론’에 대한 신조와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의 관심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루터교회의 기본신조인 『아우구스신앙고백, 1530년』은 의식(儀式)행위를 강조하는 카톨릭교회를 의식(意識)한 고백서인 성격을 띠고 있어 ‘이신칭의’에 대한 강조가 뚜렷하다(제4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브로스의 글의 인용은 그 믿음의 원인을 하나님의 작정에 두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구원될 것을 하나님이 작정하셨으며 그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고 우리의 신앙만을 보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것이다”(제6조).

 

칼빈의 『제네바 요리문답, 1542년』과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가 작성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1563년』은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선택’을 잠시 언급하는데, 전자는 제 93문, 후자는 54문에서이다. 그리고 『제1스위스 신앙고백, 1536년』에는 ‘예정론’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고 다만 하나님의 유일한 긍휼과 그리스도의 공로가 강조되어 있다. 즉 “모든 설교에서 역설하여 사람의 심중에 새겨져야 할 것은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유일한 긍휼과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만 주시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모든 복음적 교리 가운데서 가장 높고 중요한 주요 신조가 되어야 한다”(제12장)고 기술하고 있다. 『영국 성공회 신조(39개조), 1563』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영생에로의 선택만을 인정하고 있다(제17조). 곧 유기가 언급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예정교리’의 유익성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볼링거가 작성한 『제2스위스 고백서』(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 1566sus) 역시 ‘선택’에 관하여만 언급되어 있는데, 특별히 살펴지는 것은 ‘선택’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문장이다. 즉, “그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밖에 있는 사람들이 선택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에 대하여 묻는 것은 잘못된다는 사실이 틀림없이 믿어질 경우, 우리는 택함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제10조) 그리고 존 낙스가 작성한 『제1스코틀랜드 고백서』(The First Scotch Confession, 1506년 제8조)는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제 8 조, 교회와 관련하여 16조에 ‘선택’에 관한 언급이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제네바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처럼, 사도신경의 순서에 얽매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기 데 브레이(Guy De Bres)가 작성하고 1561년 엠덴(Emden)개혁교회노회에서 채택한 『벨직신아고백서, 1561년』16조에서 타락후 선택론을 따르는 ‘선택과 유기’를 둘 다 언급하나, 도르트신조나 웨스트신앙고백처럼 다른 교리와 유기적인 관련이 없다.

 

즉, 도르트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선택’을 택자로 제한된 속죄, 선택으로 말미암은 믿음, 칭의, 성화, 견인과 관련하여 언급하지만(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일적 경륜), 벨직 신앙고백서는 ‘우리’라는 대상에 대하여 경륜적으로 역사하는 삼위일체를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즉, 선택은 성부 하나님에 근거하고, 우리의 속죄, 칭의는 그리스도, 믿음, 성화는 성령에 근거하여 기술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선택이 속죄와 믿음과 칭이와 성화와 유기적인 관련 없이 기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 가장 칼빈주의적이고, 명백하게 진술된 신조와 고백은 도르트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그리고 스위스 공통신조이다. 『도르트신조, 1619』는 위에 언급되어 있다시피, 예정론을 다룸에 있어서, ‘선택과 유기’를 둘 다 다룸은 물론이요, 벨직신앙고백서에서 결여된 ‘선택과 다른 교리와의 유기적 관계’를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도르트 신조의 영향을 받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47』역시 도르트신조와 같이, 다른 교리와의 유기적 관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아니 오히려 조직적인 면에서 더 잘 설명해 주고 있다(3장 6항(선택과 구원의 서정의 유기적 관계의 서론격): 8장 6항(속죄), 10장 1항(소명), 11장 4항(칭의), 14장 1항(신앙), 17장 1항(견인)). 그리고 『스위스공통신조, 1675』가 있는데, 이 신조라 할 수 있다. 오히려 신조보다는 ‘변증서’에 가까운 것이다.

 

이 신조는 쮸리히의 존 헨 하이데거(J.H. Heidegger)가 스위스 국회의 요청을 받고 작성한 『스위스공통신조, 1675』인데, 이것은 당시의 수정주의적 칼빈주의신학이 점점 강성하여 갔을 때 그곳의 보수파는 점점 더 엄격한 보수 신학을 제창하게 되었는데, 이 때에 작성된 것이다.

 

여기에서 하이데거는 축자영감설에 대한 강한 주장(2,3항)과 아울러 도르트신조의 선택과 서정의 유기적 관계를 더 강하게 드러냈고, 도르트신조에서 많이 언급되지 않았던 내용 즉, 그리스도는 선택의 대상이지만 원인은 아니라는 점을 더 강하게 변증하여 그리스도께서 만인을 구하려는 목적으로 오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고히 하였다(5항, 6항). 그런데 이 스위스 일치신조는 스위스에서 약 반 세기동안 사용되다가 그 후로는 점점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이 신조 이후 어떤 교회회의나 신조나 요리문답이나 신앙고백도 ‘선택과 유기’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았다. 반면에 스콜라적인 이성이나 알미니안의 사상이 신앙고백과 신조와 교회회의에 영향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1829년의 『컴버랜드 신앙고백』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수정하고 알미니우스적인 요소를 내포하였고, 한국의 장로교 12신조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를 기본문서로 받아들이면서도 ‘유기’에 대한 내용을 포기하였다. 칼 발르트가 기초한 『바르멘 신학선언, 1934』에서도, 미국 연합장로회의 『1967년 신앙고백』에서도 찾을 수가 없으며, 저 세계적인 모임인 W.C.C.(세계교회협의회)는 온통 알미니안으로 채색된 대표적인 모임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의 미래의 교회회의, 신조, 신앙고백은 ‘구원관’에 대한 아무런 교육도 이루어지지 못하게 한다.

 

어떤 이가 “예수믿고 구원받느냐?” 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Yes’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성격과 원인’을 묻는다면, 17세기의 화란의 국민처럼,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 시대의 교회는 과거의 논의(도르트신조, WMC)는 역사적 산물로 이미 지나간 것으로 생각하고, 이러한 것으로 논쟁하기를 더 이상 원하지 않으며, 단순히 예수 믿고 구원받겠다는 것으로 구원에 관한 모든 논의를 마치기를 원하기 때문이며, 이미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곧, 세계적으로 교회교육의 관심은 ‘구원론’을 제외한 선교와 봉사와 세계평화와 세계복음화와 교회일치와 행복추구의 교육에 초점을 맞추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앞으로 21세기의 교회에 대해서 선교와 봉사와 평화와 복음화의 교회일치와 행복구는 더한 낙관을 예상할 수 있으나, 구원에 대해 깊은 은혜를 느끼면서, 순교적인 신앙관과 구원관을 확신할 수 있는 인물을 낳는 교육에 대해서는 더 이상 낙관할 수가 없다.

 

 

b. ‘예정론’에 대한 교회 교육이 필요성과 실제적 효과.

 

이 교리가 성경의 내용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이며, 교육적으로 가르쳐야할 당위성을 가지 것인가? 하는 점에서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는 몇 가지 목적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로서 줄곧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이 교리를 교회에 소개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혹자는 오해하여 ‘예정론’을 악행의 동기로 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칼빈의 언급처럼, 사람들이 이 교리를 이상스럽고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교리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이해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극히 겸손한 태도로 성경을 대한다면 이 진리는 Loraine Boettner의 표현대로, 바다의 고기처럼, 숲의 나무처럼 풍성하게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으며, 진정으로 아름다운 교육을 목적으로 하여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엡1:406).

 

따라서 교육적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고, 이에 대해 ‘침묵’하는 것에 항상 반대하는 입장을 취해왔다. 곧 예정교리를 인정하기는 하지마, 그 교리가 이야기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것을 묻어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개혁주의자들의 공통된 입장인 것이다. Calvin은 그러한 자들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그러한 자들은 선지자, 사도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의 입을 통하여 그 교리를 가르쳐 주신 성령을 통제하는 사람이다. …이 교리를 침묵케 하기보다는 차라리 온 세상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눈앞에 무한한 자비의 보화를 펼쳐 놓으셨는데,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 보화를 발밑으로 던져버린다면, 그것이 과연 제정신이 있는 행동이겠습니까?” 아울러 칼빈은 ‘예정론’을 가르침에 대한 두 가지 교육적 효과를 드러냈는데, 오직 겸손하게 됨과 구원의 확신이라고 언급하면서 이 두 가지가 없다면 저주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처럼 예정론이 우리의 신앙에 주는 유익은 큰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예정론’이 주는 실질적인 유익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기술하기로 한다.

 

 

a)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만 되는 이유를 깨닫는다(1조 13항).

 

Calvin은 이 교리이외에는 우리에게 올바른 겸손을 가르치는 것이 없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만 하시고 부름에 응답하고 선행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를 무색케 할 수 있다. 그러나 선택이 단순히 선택에만 머무르지 않고 구원의 서정에 가지 유기적 관계로서 우리에게 설명되어진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믿음으로, 내가 선을 행함으로’ 구원받게 되었다는 교만함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구원’에 관계해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 겸손해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제네바요리문답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문 121. 하나님은 한 번 우리를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우리가 은혜에 의하여 행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답. 확실히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자유롭게 받으시기 때문이며 그러한 행위에 속한 고유한 가치에 의한 것이 아니다.

 

문 122. 어떻게 해서 그런가? 그러한 행위는 성령에서 생겨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일 가치가 없는 것인가? 답. 없는 것이다. 그 행위 안에는 언제나 우리의 육의 취약성이 얼마만큼 있기 때문입니다.

 

문 123. 그러면 그러한 행위를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답. 만일 그것들이 신앙안에서 행하여진다면 됩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그의 양심 가운데서 다음의 것을 확신해야 됩니다. 즉 하나님은 그 행위를 아주 엄격하게 평가하시지 않고, 완전하다고 여겨주신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모든 불완전한 것들과 오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을 가지고 덮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구원’에 이르는데 있어서 전적으로 무력하다. 하나님께로 직접 나아갈 수 없는 우리에게, 예정과 그 예정으로 말미암은 선행과 믿음과 칭의와 견인과 성화와 영화는 즉, 구원은 우리 힘의 협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 삼위하나님의 통일성 있는 역사가 그 원인이라고 설명될 때에, 우리는 자신의 무가치성(전적타락)을 깨닫고 겸손해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b) 구원에 대한 확신에 도움을 준다.

 

(a) 예정교리는 신자들이 위험한 자리에 있게 될 때에 안전감을 주며 언제나 자기의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는 것이 안전한 길인 것을 알게 되며 비록 박해를 받는 경우에도 꾸준히 덕행을 지켜 나아가게 한다. 설령, 순교의 자리에 있어서도, 그들은 사단과 악인들이 악한 뜻을 이룰지라도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이루어질 뿐이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울뿐이라는 것을 알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a) 예정론은 우리에게 ‘유기되었다’는 공포에 떨게 하기보다는 구원의 확신을 준다(도르트신조, 1조 16항). 바빙크는 이렇게 진술했다. “첫째, 그 누구도 자신이 유기된 자라고 믿을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진지하게, 그리고 진실로 부름 받아 구원에 이르도록 그리스도를 믿을 의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그 누구도 자신이 유기되었다고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삶과 그의 행위가 하나님께서 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럴 수 있는 이미 지옥에 있는 자인데, 그럴려면 그가 이 땅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도르트신조 1조 16조는 이렇게 진술한다.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며 사망의 몸에서 해방되기를 열심히 바라면서 아직 그들이 바라는 만큼 거룩과 신앙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라도 저버림의 교리 때문에 위협을 받을 이유가 별로 없을 것이다. 그 까닭은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은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며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c) 선교에 확신을 갖게 한다.

 

예정론에 대하여 확실한 가르침을 받은 선교사가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선교지에 땀흘리며 전도한다고 하자. 만일 그 선교사에게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을 영접하게 하지 못한다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와 기쁨이 여전히 있을 수 있다. 예정론의 힘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 때문에 ‘예정론’에 대해 확실한 믿음을 지닌 선교사는 아마도 자기나 자기의 뒤를 이을 사람이 단 한 영혼도 그 선교지에서 얻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되도록 행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는 결코 자신이 구원받지 못했다거나 자신을 복음전도자로 쓰시지 않았다고 간주하지 않는다. 바울도 아덴에서는 아무런 결실도 얻지 못했지만, ‘예정’에 대해 확신을 가지면서 항상 열심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6) 도르트신조의 가치

 

알미니우스의 절친한 친구였던 위텐보게르트는 ‘항의서’가 기초되던 1610년에 이 운동의 영도자가 되었는데, 그는 교회를 신학자들의 학교로 만드는 데 반대하였다. 알미니우스와 함께 그는 종교의 신앙적 중요성만을 강조하였다. 성서만이 권위로 인정되어야 하며 신조나 교리문답은 구속력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의 후계자들도 모든 신조에 대항하여 싸워 왔다. 그런데 이 항위자들이 에피스코피우스의 ‘신앙고백(1622)’를 통해 신앙의 표준에 관한 그들의 소신을 밝힐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이 신조는 그들이 정죄를 받고 화란에서 추방을 당하고 난 후에 출판되었다. 모든 신조에 거절하고 대항하여 싸워 왔던 그들이(항론파) 스스로 그것을 만들어 출판하게 되었다. 그들의 진술에 의하면 “교회에는 신앙고백적 진술을 필요로 하는 사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을 믿어야 되는가를 결정하는 명령이 되어서는 안되며 또 진리와 오류를 판단하는 신앙의 규범이나 표준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한 신앙고백적 진술의 목적은 단지 종교에 관한 그 진술자의 소신의 표현에 지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그것이 성서에 일치되지 않는다고 양심으로 확신하게 되면 그 신조의 입장에 얽매임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소신이다.

 

그러나 그들의 단점은 이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면, 각양각색의 성경관과 신앙의 색깔로 믿는 자들이 누가 신앙의 동지이며 누가 그렇지 않은가를 확인할 수가 없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데 곧, 교회의 질서가 무너지며, 교회의 순수성은 인간 각 개 개인의 이성에 따라 파괴된다는 데 있다. 이미 17세기에 개혁교회의 신조에 있어서 전제가 되는 ‘예정론’에 대한 배척은 심각한 우려를 낳았다. 곧 예정론을 배척한 알미니우스주의가 인간 이성을 절대시하는 17, 18세기 합리주의 낳은 것이다.

 

교회도 이러한 사상적 조류에 편승하여 복음을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으로 채색해 놓았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개혁자들의 목소리는 ‘복음’은 인간의 이성으로 변질되어서는 안되며, 성경에서 소개하고 있는 그대로 받되, 통일성 있는 신조나 고백을 확립하는 것이다. 특별히 ‘예정론’은 ‘복음’의 핵심이며, 그 뿌리이다. 로레인 뵈트너는 복음은 ‘예정’교리에 기초한 것이므로 희소식이라는 명칭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칼빈 역시 그의 『에베소서강해』에서 “이 교리를 침묵케하기보다는 차라리 온 세상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 편이 나올 것입니다.”라고 언급하였듯이, ‘예정론’은 기독교 신앙과 교회 신앙과 교회 신조에 있어서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요소이다.

 

따라서 ‘예정론’에 대한 도르트회의의 결정은 단순히 알미니우스주의를 정죄하기 위한 그 시대의 역사적 산물이 아니다. 바빙크가 언급한 것처럼, ‘예정론’은 개혁교회만의 고백이 아니라, 또한 어거스틴과 칼빈의 의견이기만 한 것이 아닐, 모든 기독교권의 교리(all of Christendom)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을 알리려는 선지자와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손을 거쳐 기록된 성경의 기록이며, 직접적으로는 하나님의 계시인 것이다. 따라서 그 회의의 결정은 모든 교회의 축복이며, 우리는 그 계시 (예정론-도르트회의의 결정)를 먹고 마시는 주의 백성이다.

 

그런데 이제 20세기가 넘어가는 이 시점에선 대부분의 교회가 ‘예정론’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칼 바르트의 ‘예정론’에 대하여 논의없이 여과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바르트가 ‘독일 기독교당’이 히틀러와 그의 획일화된 정책을 하나님보다 숭배하는 것에 반대하여 ‘바르멘 선언’을 작성한 것은 그 역사 속에서 높이 평가받을 일인지 모르겠으나, 진리를 보수하는 그의 신학에 있어서, 그는 부저적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후속역사는 그를 바르게 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1967년 신앙고백이 그 예이다. 그 안에는 복음이 없고 바르트의 얼굴과 그의 신학만이 남아 있다. 이러한 역사는 지금도 열려져 있다.

 

그러나 복음의 빛이 완전히 꺼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바빙크가 몇몇 사람을 진술했듯이 오늘 이 시대에도 그 정신을 이어가는 몇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 그 몇 사람은 지금 ‘복음(예정론)’을 확립하고 변증하여 성경이 살아 있음을, 신앙이 살아 있음을, 구원의 감격이 살아 있음을 소개해야 될 책임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네덜란드에 꽃이 피었듯이, 우리의 땅에도 그 꽃은 피어날 것이라 믿으면서 말이다.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에 의해 정통과 비정통이 분리되는 분위기를 우리는 도르트 신조를 통해서 충분히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쿠른헤르트가 절대예정론을 반대하는 내용의 저서를 내게 되고, 거기다가 유니우스의 계승자로 라이덴 대학의 교수인 아르미니우스가 그의 사상에 찬동하며 나섰을 때, 이 도시는 절대예정론과 예지예정론의 격렬한 논쟁에 휘말리게 된 것은 이런 정신에 입각해 볼 때 당연한 일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아르미니우스가 자신의 학적 사상(學的 思想)을 신학교수로써 주장한다는 것은 좋게 평가될 일이나 역사적 개혁주의 대학교에서 개혁주의 논문으로 학위를 받은 사람이 기본적인 주체와 근거의 문제에 있어서 자신의 입장을 바꾸어 버린 문제는, 그의 학위논문뿐만 아니라 그의 성경적 신앙에도 역시 회의적 평가를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만이 홀로 존재의 근거이시며, 또한 존재의 궁극적 목적(롬11:36)이라는 神論(삼위일체론)의 신앙․신학적 정립인데, 알미니우스는 이 근본 원리를 포기하였음으로 당연히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도 그에게 있어서는 재해석된 것이다.

 

결국 알미니우스는 로마 카톨릭(보편구원설)으로부터 교리적 조정을 받은 것에 불과하며, 로마카톨릭의 미신적 구원론에 교리적 체계를 세워, 다시 로마카톨릭으로 인도하려는 어리석은 시도에 불과하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사상은 예지로 출발하여 자신의 믿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있어서의 자신의 믿음의 과정(연속적인 명)을 보고 예지(됨)를 추측하는 것에 불과하다. 알미니안주의의 교리는 결국 인간의 성향을 만족시켜 주기에 최적의 약이었던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성향은 결코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함을 지속적으로 느끼게 해 줄 수 없다. 오히려 불안함만을 더해줄 뿐이기에, 완전한 구원을 이루기 위해 긴장 속에서 마치 의심스러운 부분을 확실하게 하기 위한 인간의 각고의 노력의 경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아닌 당위성에 순종한 행위에 의한 만족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값없는 은혜가 아니라, 오직 은혜의 통로는 나 자신의 노력이라는 것을 명료히 한다. 결국 이와 같은 교리적 투쟁은 관점의 투쟁이고, 관점의 투쟁은 하나님 중심사상과 인본주의사상의 투쟁이다. 결코 인간의 사상에는 중립이 없다. 무엇을 중심으로 생각하는가에 따라 드러나는 입장이 각기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적 문제로 인한 교회의 분리와 사회의 양분되어진 현상은, 비(非)진리에 대한 칼빈주의자들 입장의 당위였으므로 초래된 결과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양은 목자의 음성을 분명히 알며 따르기 때문에(요10:27) 비진리와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도르트 규정이 성립된 후 사후 정비에 있어서 정치적 관렴문제는 그 당시의 세계관을 따른 듯하다. 앞서 서술했듯이 당시의 세계관은 하나님의 교리를 지키고자 하는 정신이었으므로, 도르트회의 후의 각종의 결정들은 역시 그 시대의 요구라 할 수 있겠다.

실로 도르트총회의 칼빈주의 5대교리 성립은 화란 역사에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칼빈주의 역사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것으로서, 영광스런 하나님께서 칼빈주의자들을 통해 승리하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성경의 내용(敎理)을 인간중심으로 돌리려는 무수한 부류들에 대하여,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의 내용을, 성경에 근거하여 신앙고백서로 작성함으로 우리는 이 내용을 믿는다(creed)하여 끝까지 싸워온 것을 알 수 있다. 설령 진리를 지키려는 싸움에서 표면적으로 패배한 것처럼 보여진 때도 있었으나, 개혁주의자들 이 진리의 내용을 지킴으로 잠시의 안전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품으로 속히 가는 길을 택하여 왔던 것이다. 사실, 아직도 도르트 신조의 진리에 대한 논쟁은 종결되지 않고, 역사 속에서 지금 21세기가 시작하는 시기에까지 과제로 전달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지금 시대의 요구는 위와 같지 않고, 성경 전체를 기록론으로 통하여 구원의 근거를 인간 편에 두는 사상적 체계와, 종교의 일치(WCC, ICCC)를 향해가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에게 남겨 주신 과제는 명확한 것이다. 전통적인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을 계승한 도르트 총회의 후손으로 우리는 얼마나 그 규정에 충실해 있는가를 살펴봄으로 교회 안에 들어온 비(非)성경적이고 비(非)개혁주의적인 것을 단호히 배격하고, 성경적인 참된 교회로 되돌려야 하겠다. 많은 사람과 화합하고 싶은 유혹이 강렬한 이때에 차라리 하나님 편에서 고립됨으로 각오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안에서의 성경에 의한 만족만을 가지고, 계속적인 진리 제시의 투쟁을 해 나가야 하겠다. 왜냐하면 아직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http://kcm.kr/dic_view.php?nid=38350&key=16&kword=&page=

이전에도 신ㅇㄱ목사님이, 타인의 글을 저자를 안 밝히고 본인 글처럼 사용한 사례들이 많아서 중립적으로 링크만 달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