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얻는 믿음이란
그들 스스로, 자기들은 구원에 이르는 바로 그 신앙을 소유했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간주하고, 심지어 분별의 영을 가진 사람들조차 충분하다고 인정해주는
류의 사람들이 있다.
시몬 마구스가 그런 경우인데 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행 8:13)
그러한 믿음을 그도 가졌었고 그 믿음을 표현 했었기에 빌립은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였고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주어지는 독특한 특권들을 그에게 허락하였다.
그러나 잠시 후 사도 베드로가 그에게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될 것도 없느니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행 8:21,23)
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 함유된 모든 진리를 그가 알게 되는 한 믿을 수도 있고,
오히려 순수한 그리스도인들보다 성경의 진리를 더 잘 알 수도 있다.
더 많은 시간을 성경연구에 들임으로써 그의 믿음은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이
아직 다뤄보지 못한 많은 진리들을 소유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지식이 증대되면 될 수록 그의 믿음도 점점 풍성해진다.
이런 종류의 믿음으로 그는 사도 바울이 다음의 성경구절에서 언급한 믿음에까지
발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행 24:14)
그러나 이 구절이 그런 사람의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라고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생각을 반대하는 예가 아그립바 왕의 경우에서 나타난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행 26:27)
여기서 당신이 만일 단순한 역사적 믿음을 넘어서는 믿음을 보이라고 요구한다면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제시할 수 밖에 없다.
성경은 사람들이 믿음을 가질 수 있는데 그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아니긴 해도
인간 본성의 산물이 아닌 성령으로부터 온 믿음이라고 말한다.
그 믿음은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 요소들은 교육과 자력에 의하여 산출될 수 없는 것이다.
그 두 가지 요소는,
신령한 비췸과 믿도록 마음을 움직이는 신적인 능력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아도 하늘로부터 조명을 받을 수도 있고
영적인 일에 마음을 기울일 수 있다.
히브리서 6:6은 그 사실을 입증해 준다.
거기서 우리는 배교자들에 대하여 읽는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 사람들은 “비췸을 얻었었으며”
그것은 그들이 신령한 것을 맛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신령한 것에 마음을 기울였고
그것을 환영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성령에 참예한 자”들이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도 신적 기원을 가진 믿음을 소유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믿음 특유의 능력을 경험하며 그 믿음을 삶의 토대로 삼을 수도 있다.
그들의 믿음의 기반은 신적 증거(Divine testimony)일 수도 있으며
그들은 부동의 확신을 가지고 이 기반 위에서 쉬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믿고 있는 내용들이 합리적이고 확실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바로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 존재의 기반인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성경을 믿는 믿음은 신적인 믿음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러한 믿음을 가졌었는데
그들이 출애굽하여 홍해로부터 건짐을 받은 후 광야생활 동안에 그런 믿음을 가졌었다.
그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백성이 야훼를 경외하며 야훼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출 14:31)
그러나 그들 중 다수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졌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다.(히 3:17,18)
이 점을 좀더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성경을 자세히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졌다고 표현한 부분들을
진지하게 연구해야 한다.
예레미야 13:11을 보면 하나님께서
“나 야훼가 말하노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같이 내가 이스라엘 집과 온 유다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라고 말씀하시는데
하나님께 ‘속하는 것’은 그 분을 ‘의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왕하 18:5,6을 보라)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야훼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그가 야훼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야훼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그런데 동일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의 쓸데없음같이 되리라”(렘 13:10)
견고한 의뢰를 나타내는 또 다른 단어로 ‘머무르다'(stay)라는 말이 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야훼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사 26:3)
또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다.
“거룩한 성 백성이라 칭하며 그 이름이 만군의 야훼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사 48:2)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아니라고 누가 의심하랴?
아, 그러나 너무 속단하지는 말자.
이 동일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악하며 네 목의 힘줄은 무쇠요 네 이마는 놋이라”(사 48:4)
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또 다른 표현으로 ‘기대다’(lean)라는 말이 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뿐만 아니라 의존하는 것을 나타내는 데에도 쓰인다.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자가 누구인고”(아 8:5)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도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
다른 누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그 가능성을 인정하고 계신다.
“야곱 족속의 두령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 곧 공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청컨대 이 말을 들을지어다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야훼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야훼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미 3:9,11)
육적이고 세상적인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떠받쳐 주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면서
자기들은 지옥에 떨어질 수 없으며 어떠한 ‘재앙’도 자기들 위에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확신은 무서운 착각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태도도 그 자체로서는 중생의 증거가 될 수 없다.
그 분의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것보다 뛰어난 것이다.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이 유다왕 아비야이다.
여로보암이 그의 군대를 이끌고 그와 맞섰을 때에
아비야가 역대하 13장에서 한 말의 내용은 무게가 있고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먼저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소금 언약으로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사실을 상기시켰다.(5절)
다음으로 그는 그의 대적 여로보암의 죄악상을 낱낱이 열거하였다.
그리고 그는 야훼께서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과
야훼께서 자기와 및 그의 백성들과 함께 계심을 확실시하였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그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전쟁을 강행하였다.
그 결과 아비야와 그 백성이 (그들을) 크게 도륙하였는데
그것은 저희가 그 열조의 하나님 야훼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아비야에 대해서 말하기를
“아비얌이 그 부친의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였다” 고 한다.(왕상 15:3)
이처럼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 있고,
또한 그의 약속을 의지하며 그의 언약을 주장할 수도 있다.
“위협과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면 많은 반대에 부딪히는 경향이 있다.
그 반대는 안과 밖, 양쪽에서 일어난다.
안으로부터는 위협의 메시지가, 그 속에 죽음이 쓴 맛이 담긴 쓰디 쓴 알약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래서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밖으로부터는 사단이 반대를 조장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사단은 위협의 메시지가 사람들을 일깨워 자신들의 비참상을 깨닫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현재의 비참상을 벗어날 방도를 궁리할까봐 두려워한다.
사단은 위협의 메시지가 사람들을 평화와 행복의 몽상에서 깨울까봐
그들이 사단의 아가리 안에서 잠자고 있는데도 안전하다고 확신시키며
위협의 메시지를 멀리하도록 공작한다.
그러나 약속의 메시지를 전하면 일반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반대하지 않는다.
그 사람 내부에서도 반대가 일어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 약속은 매우 달콤하고
또 자비와 영생을 약속함이 바로 복음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약속의 메시지를 탐욕스럽게 삼켜버리려고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사단도 직접적인 반대를 일으키지 않고
사람들이 차라리 약속의 메시지에 흥미를 갖도록 공작한다.
왜냐하면 이 방법이야말로 사람들을 그들 본래의 상태에 묶어두고
정주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단은 약속의 메시지를 악용하여, 죄악의 무덤 속에 안치되어 썩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안전하다고 확신시킨 후 무덤을 인봉해 버릴 것이다.
그럼으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니느웨 사람들이 보여주었듯이, 사람들이 받아들이기가 더욱 어려운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런 반대와 어려움이 없는 복음의 약속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데이비드 클락슨)
비록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아니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를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잠깐 믿다가 배반하는” 돌짝밭 같은 사람들이다.(눅 8:13)
주님께서는 이 부류의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하셨다.(마 13:20)
우리는 이런 사람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
그들은 밝은 표정으로 행복감에 젖어 있는 영혼들이며,
충일한 정신의 소유자들이며,
또한 자기들이 발견한 지상의 행복 세계로
다른 사람들도 들어가도록 애쓰는 열심덩어리들이다.
이런 사람과 순수한 그리스도인들,
즉 좋은 밭의 사람들을 가려내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둘 사이의 차이점은 명백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그 차이점이 속에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속에는 뿌리가 없는데(마 13:21),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깊이깊이 파보아야만 한다.
독자들이여,
당신들은 당신들 속에 “일의 뿌리”(욥 19:28)가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엄밀히 조사해 본 일이 있는가?
이번에는 훨씬 더 믿기 어려운 경우에 대하여 말해 보자.
여기 이상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기꺼이 자기들의 구주로 모시려고 하면서도,
자기들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일과 그의 명령을 지키는 일,
그리고 그의 율법에 지배받는 일 등은 마지못해서 하는 척 한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며,또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다.
여기 나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성경의 증언이 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주인이신 그리스도에게 복종할 것을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많은 능력을 행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그들은 그들의 믿음을 행위로써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아니다.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이 어느 수준까지 성장할 수 있는가 하는 것과
그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얼마나 유사한가 하는 것을 말하기란 불가능하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그리스도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데,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도 역시 마찬가지이다.(요 2:23,24)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성령의 역사하심에서 출발한 것인데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도 마찬가지이다.(히 6:4)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산출된 것인데,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도 역시 마찬가지이다.(마13:20,21)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주의 재림을 격려하는데,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어리석은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들의 이야기를 보면,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마 25:7) 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기쁨을 동반하는데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신앙도 역시 마찬가지로 기쁨을 동반한다.(마 13:20)
아마 어떤 독자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들을 주의 깊게 생각해 보고
그것들은 매우 혼란스럽고, 한편 우리를 매우 괴롭힌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르겠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이 논문이 독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기를 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영혼을 소중히 여긴다면, 이 논문을 가볍게 대강 읽고 넘어가지 말기를 바란다.
만일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이 실재한다면
(분명히 실재한다),
나의 신앙에 대하여 나 자신도 속을 가능성이 얼마나 많은가!
성령께서 아무 까닭없이 우리에게 이 점에 대하여 그토록 명백하게 주의를 주시는 것이 아니다.
“미혹한 마음에 미혹되어서”(사 44:20)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옵 1:3)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눅 21:8)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갈 6:3)
사단이 그의 교묘한 술책과 능력을 사용하여 가장 악착같이, 그리고 가장 성공적으로 사람들을 속이는 방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가지고 있지 못한데도 가지고 있다고 믿게끔 하는 것이다.
사단은 어떤 다른 계략으로보다도 이 계략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많이 속인다.
모두 논문을 예증으로 삼으라.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사단에 의해 눈이 멀어서 이 글을 읽고 이렇게 말할까.
“이건 나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야.
내 신앙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임이 분명해!”
바로 이런 식으로 사단은 하나님의 말씀이 예리하게 지적하는 것을 외면하게 하고,
그의 포로들로 그들의 불신앙 속에 안주하도록 한다.
사단은 사람들 마음 속에 역사하여 거짓된 안도감을 가지게 하고,
그들을 설득하여 그들이 지금 방주 안에 있다고 착각하게 하며,
그들을 유도하여 위협의 말씀에 대해 무지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주의를 돌려 단지 안락한 약속으로만 향하게 한다.
사단은 가장 유익한 권면,
즉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
는 말씀에 대해 주의하는 것을 단념케 한다.
오, 나의 독자들이여, 바로 지금 이 말씀을 주의 깊게 생각해 보라.
이 첫 단락을 끝맺으면서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의 특별한 결점들과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 못 미치는 점 등을 지적하려고 한다.
첫째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지옥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를 바라지만
자기 자신들로부터 구원해 주시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들은 미래의 진노로부터는 구속받기를 원하면서도
자기의 뜻과 자기 만족 등은 계속 보유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명령 받으실 분이 아니다.
당신은 주님의 조건을 지킴으로 구원받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전혀 구원받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죄로부터 구원하시며, 죄의 권세, 죄의 오염, 그리고 죄책으로부터 구원하신다.
죄의 본질은 나 자신의 길을 고집하는 것이다.(사 53:6)
그리스도의 구원이 임하는 곳에서는
자기 뜻을 고집하려는 정신이 정복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순수하고 능력있고 지속적인 갈망과 결심이 심어진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를 분리하기 때문에 결코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구주로서는 모셔들이기를 원하지만,
그리스도를 그들의 주인으로 모셔서 그분께 그들 자신을 복종시키기는 꺼린다.
설령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실 준비가 됐다 하더라도 절대적인 주인으로서는 아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주인이시거나 아니면 전혀 주인이 아니시다.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의 어떤 영역에서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제한하고 있다.
그들의 세상적인 정욕과 육체적인 관심이 요구하는 자유는
너무나 멀리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간섭할 수도 없을 정도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평안은 탐내면서도 그리스도의 ‘멍에’는 회피한다.
그들에 대해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눅 19:27)
셋째로,
그리스도께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을 수 있겠지만
성화된 자라는 인정을 받기엔 좀 못미치는 사람들의 부류가 있다.
그들은 성화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긴 하지만
그들의 “온 영과 혼과 몸”(살전 5:23)이 온전히 거룩하게 되는 일에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들의 마음이 거룩하게 되는 일에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이 거룩해 지는 것,
즉 교만과 탐심을 억제하는 것은 오른 쪽 눈을 빼어버리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지체들에 대한 끊임없는 절제 따위에는 재미를 못느낀다.
그들은 순화하는 분(Refiner)으로서 그들에게 오신 그리스도,
그리고 그들의 정욕을 태워버리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
또 그들의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
그리고 그들의 낡은 본성의 틀을 완전히 용해하고 그들의 영혼을 녹이며,
그들을 새로운 옥토에서 살게 하시려고 오신 그리스도,
그 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는 일과 자기 십자가를 날마다 지는 일은
너무나 끔찍스러워 몸이 움츠러드는 일이다.
넷째로,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대제사장으로서 봉사하시는 것은 원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왕으로서 다스리는 것은 원치 않는 사람들이 있다.
만일 당신이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확고하고 강경하며 확실하게
‘그렇다’ 고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잘 모르는 주님의 특별한 계명과 교훈을 지키라고 요구하면
그들은 즉시 ‘그것은 율법주의입니다!’라고 소리지르거나,
혹은 ‘우리는 모든 면에 완전할 순 없습니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홉 개의 의무 조항을 적어 놓고 지키라고 하면 수행하겠지만
아마도 열 번째의 의무조항을 지키라고 하면 그들은 즉시 화를 낼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계명은 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그만두라고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극장 가는 일이나 카드놀이 하는 것 등은 기꺼이 포기하려고 하는데
진 밖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것은 꺼려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기꺼이 진 밖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려고는 하는데
그들의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정욕을 부인하는 것을 싫어한다.
독자들이여,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의 계명을 순종하는 일에 있어서 자꾸 보류하는 습관이 있다면
당신도 지옥으로 가는 노중에 있다.
아더 핑크(Arthur W. Pink, 1886-1952)영국의 개혁주의 신학자
'유익한 글! 명언! 단문요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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