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하늘과 새 땅 & 새 예루살렘 성(21:1-22:5)
21장 이후는, 재림 후 성도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 성에 대한 확고한 이해가 필요하다.
견고한 말씀은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하고, 간절한 소망은 어려움을 뚫고 나가는 힘을 공급한다.
-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13)
1. 새 하늘과 새 땅(21:1-8)
1) 새 하늘과 새 땅은 언제 나타나는가?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는 시점은 언제인가? 역사적 전천년주의나 세대주의는, 천년왕국 이후에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재림 후 중간단계로 천년왕국을, 또 하나의 지구로 표현하고 있다.
현존 지구가 천년 왕국 때 새로워지며, 이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때, 또다시 변화를 겪는다고 이해하고 있다.
지구에 대한, 서로 다른 세 가지 형태가 있음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본문은 새 하늘과 새 땅이, 현존 지구를 새롭게 하는 다음 단계이며, 최종단계라고 말한다. 오직 두 단계만이 존재한다.
현존 지구가 새롭게 된 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이 부분은 무천년의 견해가 올바르다.
그러나 무천년주의는, 천년왕국이 어떤 형태로든 재림 이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재림 후에도 악인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분명히 알 것은, 재림 후 새롭게 된 새 하늘과 새 땅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천년왕국은 새 하늘과 새 땅 이외의 별도의 땅으로 존재하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 안에 ‘시간적으로 존재’한다.
천년왕국은 주님의 재림 후 새롭게 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탄이 옥에 갇히고, 남겨진 악인들이 바깥 어두운 곳에 던져진 상황에서
예수님이 성도들과 천년동안 혼인잔치를 누리는 시간을 말한다.
우리는 간단하면서도 명확하게, 천년왕국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는 시간은, 당연히 재림하실 때이다.
1절에 보니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면서, 이전의 처음 하늘과 처음 땅, 바다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다(4).
베드로 사도 역시 재림 후 곧바로, 우리 성도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진다고 말한다.
-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바울 사도는 재림과 함께, 새 예루살렘 성이 내려온다고 말한다.
주의 재림을 사모하는 자들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성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다.
새 예루살렘 성은 우리 성도의 처소이다(히 12:23; 계 22:17)
-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후 5:2)
혼인 잔치 기간은, 천년이라는 길고 완전한 시간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천년왕국이라는 용어 자체가,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천년왕국이란 용어보다는, 성경에 나온대로 ‘천년동안 성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 하는 시간’ 으로 사용해야한다.
다시 말하면 천년왕국은,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탄이 결박당한 시간동안, 성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천년동안 왕 노릇 하는 시간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이 땅은 예수님이 재림 하시고, 심판 재앙들이 마무리 될 때, 성부 하나님의 선포하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된다.
-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계 21:5)
2) 창조 이해
(1) 천지창조 ? 창조의 시작
엿새 동안 창조된 세상은,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말로 완결된다(창 1:31).
성경 전체적인 측면에서 보면, 천지창조는 창조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다.
즉 시작을 통해 완성으로 나아가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존재한다.
비록 죄로 인해 모든 피조물들이 저주의 영향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회복의 과정을 거치며,
궁극적으로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에 도달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역시, 그러한 과정을 밟는다. 창조 때에 하나님의 형상은 최종적 형태로 완성된 것이 아니다.
타락으로 인하여 깨어지고, 초림으로 인하여 회복되며, 재림 때 창조의 궁극적 목적으로 완성된다.
신령한 몸,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다(고전 15:44, 49).
어거스틴이 말한, 천지창조 때의 인간 형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이다. 즉 출발점이다.
그러나 재림 후에는,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 즉 완성된 상태로 궁극적인 성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 ? 재창조
초림으로 인한 대속 사역은, ‘사람으로 한정’되어 있다. 그것도 ‘제한 속죄’라는 틀을 가진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죽음이다.
죄로 오염된 이 땅을 회복하기 위한 ‘재창조’이다. 대속사역은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께서, 성도들 가운데 임재 함으로 완성된다.
외적인 환경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히 2:8). 다만 성령의 통치를 통해, 장차 오는 세대의 특성들을, 지금 이 시대에 맛을 보고 있다(히 6:4-5).
성령의 통치는 성도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심을 고백하며, 성도들로 하여금 제자도의 삶을 살아가게 한다.
재창조는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이미와 아직’이라는 큰 틀을 제공하고 있다.
(3)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 성 ? 창조의 완성
죄와 사망의 고통 아래 신음하는 인류와, 다른 모든 피조물들이 궁극적으로 고대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다.
재림은, 현재의 땅과 하늘 그리고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들을, 새롭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볼 때, 성도의 현재적인 성령의 임재와 통치는 커다란 복이다. 모든 피조물들에게 성도는 소망의 대상이다(롬8:19).
성도는 재림 이전에, 이미 새롭게 된 유일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고후5:17).
창조의 완성은, 단순히 현재적인 땅과 하늘의 변형만이 아니다. 궁극적인 완성은, 새 예루살렘 성의 도래와 함께 한다.
새 예루살렘 성의 도래를 잊어버리면, 우리는 다시 천지창조로 돌아가고 만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새 예루살렘 성의 도래로 창조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새 예루살렘 성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의 장막이다(계 21:3). 하나님의 장막이 영원토록 사람들과 함께 있음으로, 창조가 완성된다.
하나님과 성도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될 때, 궁극적인 하나님의 자녀 됨도 완성된다(고전 13:12, 계 22:4).
2. 새 예루살렘 성(9-22:5)
새 예루살렘 성의 도래를 바라보는 요한은, 천사의 친절한 안내로, 성의 외적 형태와 치수을 알게 된다.
그리고 온갖 아름다운 보석으로 이루어진, 성의 구석구석을 보게 된다.
어떤 자들이 그 성에 들어갈 권세를 가졌고, 반대로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자세히 묘사한다.
다시 이야기는 중심을 향해 흘러간다. 계속해서 최고의 영광인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며, 하나님의 얼굴을 뵐 때,
신부된 성도가 받는 영광을, 찬란하게 조명해 준다.
-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사 66:10)
-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사 66:13)
1) 새 예루살렘 성의 여러 가지 용어들 ? ‘모두 하나’
새 하늘과 새 땅은, 재림과 함께 성도들에게 주어진 곳이다. 요한은 ‘새 예루살렘 성’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2).
새 예루살렘 성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표현되고 있다.
거룩한 성(2, 10), 하나님의 장막(3), 하나님의 성(계 3:12), 시온산과 하나님의 도성(히 12:22), 내 아버지의 집(요 14:2),
낙원(고후 12:4; 계 2:7), 셋째 하늘(고후 12:4), 하늘에 있는 성(히 11:16) 등,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지만, 모두 같은 의미이다.
중요한 것은, 새 예루살렘 성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는 것이다. 계시록에는 ‘하나님의 장막’이라 표현한다(21:3, 7:15).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이 어디로 내려오는가? 성도들과 함께 거하기 위해, 새롭게 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내려온다(3).
-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3)
성도들이 누리는 가장 큰 영광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다. 날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영원토록 행복한 시간을 가진다.
-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계 22:4)
새 예루살렘 성의 도래는, 새 하늘과 새 땅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이다.
재림하는 예수님이 받으신 큰 영광중의 하나가, 바로 새 예루살렘 성의 영광스런 도래이다(눅 9:26).
새 예루살렘 성이 하늘에서, 새롭게 된 이 땅으로 도래하는 것이 3회에 걸쳐 나타난다(계 3:12, 21:2, 10).
이것은 성부의 오심과 더불어 일어난다(계 1:4, 8, 4:8).
성부 하나님은 홀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 성에 있는 모든 천사들과,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예수님을 데리고 오신다.
-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예수님)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
새 예루살렘 성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중심으로 내려온다.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은, 현존 지구의 새롭게 됨과 더불어, 하늘의 예루살렘 성이 결합된 형태를 가진다.
-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결박 당한지 천년이 지난 후 잠깐 풀려난 사탄과, 미혹을 받은 만국의 백성들이 빼앗고자 하는 곳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며, 그곳의 새 예루살렘 성이다.
이곳을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이라 칭한다(계 20:9).
2)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새 예루살렘 성(9-11)
혹자는 ‘새 예루살렘 성이 교회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성도들이 바로 새 예루살렘 성으로 상징되었다는 견해이다.
무천년적 견해가 그렇다. 새 예루살렘 성이 성도라면, 성곽은 무엇이며, 금 갈대, 보석들, 성의 길, 성전, 열두 문 등이 무엇인지
또 다른 해석들을 내 놓아야 한다. 이런 해석은 모든 것이 풍유로 귀결된다. 이런 주장들은 모두 허구이다.
새 예루살렘 성을 교회 즉 성도로 주장했던 견해는, 성도들이 기쁨으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감을 보면서, 잘못된 주장을 거두어야 한다.
-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계 21:24)
고난 받은 성도들이 누려야 할 상급이, 바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뵙는 것이다.
이런 부분을 상징으로 해석할 필요가 하나도 없다. 사실 그대로 믿어야 한다.
천사는 요한에게 설명하면서, 새 예루살렘 성을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라고 표현했다(9).
이 말씀은 오해 없이 잘 해석되어야 한다. 본 구절은 9절 이하부터 22장 5절까지 연결된다.
어린양의 신부를, ‘새 예루살렘 성 그 자체’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계속된 설명은, 새 예루살렘 성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거쳐,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는 ‘이기는 자’ 곧, 성도(신부)로 초점이 맞추어 간다.
최고의 순간은 신부가 새 예루살렘 성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 영원토록 왕 노릇하는 것으로 나아간다(계 22:4,5).
새 예루살렘 성은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곳이며, 신부되는 성도들과 신랑되신 예수님이 함께하는 연회의 장소이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신부의 단장으로 묘사한다. 외적인 아름다움과 더불어, 오직 신랑을 위해 정절로 단장한
처녀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다.
요한이 하늘로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성을 보았을 때, 즉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11).
수정 같이 맑은 보석들의 아름다움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았다.
새 예루살렘 성의 최고의 영광은 바로 하나님이시며 성도는 그 영광을 누리는 신부이다.
3) 성의 구조와 치수(12-21)
요한은 자신이 보았던 새 예루살렘 성을, 몇 가지로 나누어 기록하고 있다. 첫째,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다.
각 문들에는 천사들이 있다(12). 각 문들 위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각 문들은 동서남북으로, 각각 세 개의 문들이 있다. 각각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다.
새 예루살렘 성의 크기는, 길이, 넓이, 높이가 모두 같고, 일만 이천 스다디온으로 약 2200km 정도이다.
혹자는 이 크기를 상징으로 보며, 완전하게 알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땅의 완전한 숫자는, 하늘의 모형이다. 원형은 하늘의 것이다. 이것은 상징이 아니라 원형의 숫자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이 있다. 이러한 묘사는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 자체가 상징이 아니다.
이렇게 기록된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이것은 실체를 기록한 것이다.
하늘의 원형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완벽함을 그저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은, 계시록을 미궁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천사가 금 갈대 자를 가지고, 새 예루살렘 성의 크기를 측량했다(15). 사람이 했다면 실수가 있을 수 있지만,
천사가 이 일을 했다는 것을 기억하자.
또한 조금이라도 부정확 할 수 있는, 인간이 만든 갈대 자가 아니다.
천사가 금 갈대 자를 가지고, 성을 측량했다는 점을 볼 때, 완전하고 정확한 측량임을 보여준다.
4) 누가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 성을 상급으로 받는가?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게 된 자들은,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 성을 유업으로 받은 자들이다.
성경은 누구에게 이런 복들을 약속 했는가? 이기는 자가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는다(7).
-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계 17:14)
더 나아가서 계2-3장에 나오는,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진 상급이 무엇인가?
이기는 자가 받는 상급은, 결론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며, 새 예루살렘 성이다.
또한 그곳에서 펼쳐지는 혼인잔치 즉 천년동안 예수님과 왕 노릇하는 즐거움의 참여가 이기는 자의 상급이다.
이것을 알게 되면 계시록의 처음과 나중이 하나임을 이해하게 된다.
이런 상급들이 주어지는 때는, 당연히 주님이 재림하실 때이다(계 11:18).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8)
5) 하나님의 영광과 성도들의 특권(22-27)
요한은 갑자기, 성 안에 있는 성전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지금까지 하늘 보좌에 있던 성전이 없다고 한다(22).
전능하신 하나님과 어린양이 바로 성전이다(22). 성전의 가장 큰 의미는 하나님의 임재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 버리면, 그곳은 아무 의미도 없다(렘 7:4). 지상의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였다.
지상의 성전은 건물이 필요하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없기 때문이다(히 9:8).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지성소로 가는 길이 일년에 한 번으로 제한되었고, 오직 대제사장만이 그곳에 갈 수 있었다(히 9:7).
그러나 예수님의 대속 사역으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지성소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 재림으로 인하여 영화롭게 된 성도들은,
이제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성전이라는 단절된 장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영화롭게 된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자유롭게 뵐 수 있다(22:4). 성전 자체이신 하나님과 어린양을 뵙는다.
이제껏 가려졌던 어떤 것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존재할 수 없다.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진 권세가 현실로 이루어졌다(요1:12).
한편 요한은,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 있음을 분명하게 묘사한다(27, 22:15).
만일 남겨진 악인들이 없었다면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게 들릴 것이다.
그 성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은 누구인가? 왜 이들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했는가?(27).
바깥 어두운데 던져진 자들은, 결코 거기서 나올 수 도 없고,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가 없다(계 22:14).
오직 이기는 자들만이, 성에 들어갈 권세를 가진다(계 21:7, 22:14).
6) 보좌로 나아감과 영원토록 왕 노릇 함(22:1-5)
새 예루살렘 성에 대한 이야기는, 점점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나아간다.
성도들에게 생명수 강을 보이시며, 생명나무에 접근하게 하신다(계 22:1,2).
이 생명수 강은, 오래전부터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사 55:1).
이미 싸움을 마친 ‘천상 교회 성도들’이, 아직 치열한 싸움 가운데 있는 지상 교회 성도들을 향해, 간절히 초청하는 말씀이다.
여기서 신부는, 새 예루살렘 성에 있는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이며,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이며, ‘천상 교회’이다(히 12:23).
-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성도는 생명수와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 곁에서, 섬기는 일을 한다.
그리고 가장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다(계 22:4).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이제는 아무런 장벽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이다(고전 13:12).
그런데 성도가 새 예루살렘 성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데 그치지 않,고 중요한 일을 한다.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말씀하신다(5). 성도들이 부활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동안 왕 노릇 한다(계 20:6).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세세토록 왕 노릇 하는 시간이, 바로 천년동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것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는 말과 동일하다(계 3:11, 20:8).
또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셨던 것처럼, 이기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함께 참여한다(계 3:21).
※ 성경 퀴즈(21-22장)
1. 처음 하늘과 땅이 없어지고 난 후, 나타난 것의 이름은?(21:1)
① 새 하늘과 새 땅 ② 천지개벽 ③ 에덴동산 ④ 삼라만상
2. 다음 중 의미가 서로 다른 이름은?(2, 3:12)
① 새 예루살렘 성 ② 거룩한 성 ③ 하나님의 성 ④ 여리고 성
3. 재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이루어진다. 그 말씀은?(5)
① 다 이루었도다 ②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③ 내가 속히 오리라 ④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4.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성’은, 어떻게 움직이는가?(2, 10, 3:12)
① 하늘에서 땅으로 ② 땅에서 하늘로 ③ 우주공간에서 고정 ④ 어둠을 밝히며 회전
5. 새 예루살렘 성의 성곽 위에, 누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가?(14)
① 구약의 12 지파 ② 선지자들 ③ 모든 성도들 ④ 열 두 사도들
6. 새 예루살렘 성의 크기는 가로, 세로, 높이가 모두 같다. 어느 정도인가?(16)
(참고로 1 스다디온 = 약 185미터, 정답은 약 2,200 km)
① 십사만 사천 스다디온 ② 천 이백 스다디온 ③ 만 이천 스다디온 ④ 측정불가
7. 새 예루살렘 성에 출입하는 자는?(27)
① 거짓말하는 자 ② 짐승의 표를 받은 자 ③ 가증한 자 ④ 생명책에 이름 기록된 자
8. 새 예루살렘 성에서 성도는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는가?(22:4)
① 음성만 듣는다 ② 얼굴을 직접 뵌다 ③ 멀리서만 본다 ④ 예수님만 볼 수 있다
9. 새 예루살렘 성에서, 생명나무 열매를 맺는 주기는?(2)
① 매일 ② 일주일마다 ③ 매달 ④ 1년에 한 번
10. 예수님은 누구를 위하여, 사자를 보내 증언하시는가?(16)
① 악한자들 ② 교회들 ③ 이단들 ④ 유대인들
11.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 )?(16)
① 감추어진 만나 ② 생명나무 ③ 알파와 오메가 ④ 광명한 새벽 별
12.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를 다른 말로 하면?(20)
① 마라나타 ② 에벤에셀 ③ 코람데오 ④ 달리다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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