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설교의 특색
Ⅰ. 성경적 설교의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다.
근원적인 설교는 성부하나님, 성자예수님, 보혜사 성령자체의 공작이시다. 설교자는 응용당하는 도구일 뿐이다. 하나님은 여러 시대, 여러 모양으로 인생에게 말씀하셨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히 1:1-3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리고 지금은 성령으로 계시(성경)를 통하여 우리에게 죄에 대하여(십자가), 의에 대하여(부활), 심판에 대하여(재림) 말씀하고 계신다.
요 16:2-11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 구약시대 말씀하신 하나님(성부)
1) 왕적 선포(족장시대 이전)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른 매체가 없이 직접 나타나셨다. 이는 너무 권위가 있어 말씀그대로 바로 이뤄졌다.
2) 제사장적 선포(출애굽이후 광야교회시대)
상징적 매체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셨다. 예를 들면 출애굽(죄악 세계로부터 탈출), 유월절(어린양 예수), 반석, 만나, 성소, 제물, 각종 예식 등이다. 이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
3)선지자적 선포(왕정시대, 예언시대)
예언자의 마음을 감동시켜 말씀을 대언하셨다.
2. 신약시대 말씀하신 예수님(화육강세하신 성자)
1)왕적 선포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믿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2)제사장적 선포 →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직접 드리심으로 희생(제물)이 되셨다.
3)선지자적 선포 → 모든 것을 예언하고 선포하셨다.
3. 말씀하신 보혜사(성령)
성경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성경은 볼 수 없는 성령이 가시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결국 성경적 설교는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보혜사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설교하기 위해 성경 말씀을 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 말씀이 나를 강단으로 끌고 가는 것이어야 한다. 성경이 말을 하고 심부름꾼에 불과해야 한다.(마태, 마가, 누가, 요한 모두 예수그리스도를 기록 → 도구로 사용 받음)
Ⅱ. 성경적 설교의 중심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다.
성경적 설교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있다. 신구약 66권의 중심 사명은 한결같이 예수그리스도를 중심하고 움직인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 성경의 중심문제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증하시기를 모든 성경이 곧 자기에게 대하여 말하고 있다고 했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또한 예수님 자신이 자신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사실도 자증했다. 주님은 모세의 글(율법서)과 모든 선지자의 글(선지서)이나 모든 성경(성문서)의 쓴 바, 곧 자기에게 관한 것을 자세히 자증했다.
눅 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그러므로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는 자이다. 그의 생명수를 (요4:14), 그의 생명의 떡을(요 6:15), 그의 영원한 생명을(요 10:28), 그의 겸손을(요 13:15), 그의 새 계명을(요 13:34), 그의 평강을(요 14:27), 그의 말씀을(요 17:4), 그의 영광을(요 17:22) 주는 자이다.
신비주의자(감정주의자)들은 자기의 체험을 심어 주려고 하고 주지주의자들은 자기 지식을 심어주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설교자는 양들의 가슴에 예수를 심어준다. 주는 것은 희생의 과정을 통과하며 또한 전폭적인 성령의 내적 조명에 의하여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다른 것을 알거나 자랑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2-24절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 했다. 그러므로 성경적 설교의 주제는 모든 사람을 구원에로 초대하는 것이다.
Ⅲ. 성경적 설교는 항상 균형적인 설교체제를 유지한다.
성경적 설교는 항상 온전한 균형을 잃지 아니한다. 이유는 성경자체가 이 사실을 가리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객관성에 편중하여 극단주의로 흘러가지 아니한다.
예를 들면 한 세대 전에 감리교는 회심을, 침례교는 침례를, 자유주의자들은 사회봉사를, 전천년 주의자들은 재림을, 성결교는 성화를, 루터파는 이신득의를, 로마카톨릭은 교회의 보편성을, 희랍정교는 성령의 신비를, 펜타코스(오순절)는 신유에 각각 치중한 나머지 극단에 이르고 만다. 그러나 성경적 설교는 항상 균형을 이루어서 주관적 독단에서 오는 극단주의를 피하게 된다.
① 예정(선택)교리와 인간의 책임문제를 상극같이 오해한다. 그러나 실상은 극단적인 상극이 아니라, 이것은 위대한 조화를 이룬다. 이유는 이들이 모든 하나님의 주권의지에서 나온다고 하는 성경을 따르기 때문이다. 이들의 조화는 가득 찬 신비로서 다만 믿음으로 즐기게 된다.
② 죄와 은혜는 상극같이 느껴진다. 성경외에 그 어느 곳에서 인간의 전적 부패와 타락을 폭로하는 진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만큼 죄인이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 진리도 없는 것이다.(구원받을 공로x)
③ 정신과 물질은 상극같이 생각된다. 항상 헬라의 철인들은 정신과 물질의 2원론을 주장하고 물질계는 악하고 정신계는 선하다고 했다. 범신론적 유물론자들은 항상 물질이 정신에서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물질과 정신의 근원은 하나님께로부터 기인되었고, 그 성질은 서로 상반되는 이질성을 인정한다.
④ 기독신자와 이 세상은 염세가 아닌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문화적인 사명을 주장한다.
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⑤ 지정의에 의한 인격적 조화와 균형을 잃지 아니하여 한다. 종교가 주지주의와 감정주의나, 아니면 율법주의에 기울어지지 않도록 균형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것은 성경 자체의 원리에서 신론, 인론, 기독론, 교회론, 종말론 등 기독교 신학에 이르는 전분야 뿐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과학 등 일반 은총에 속한 모든 분야에서도 항상 균형있는 체계를 유지해야 한다.
바울은 항상 설교의 균형이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지 않게 하는 이 사실에 유의할 것을 당부했다
고전 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다시 말하면 십자가를 증거 하는 설교, 예수 중심의 설교, 구속론적인 설교가 균형 잡힌 설교이다.
Ⅳ. 성경적 설교의 성취결과는 성령께서 주장하신다.
설교의 결과는 반드시 성령께서 책임지게 한다. 이는 예수를 믿고 회개하고 신앙을 고백하게 한다. 성령은
① 진리의 영(임마누엘의 영, 요 14:17)
② 가르치는 영(요 14:26)
③ 보혜사 성령(증거의 영, 요15:26-27)
④ 죄, 의, 심판의 영(요16:7-9)
⑤ 진리의 성령(진리가운데로 인도, 인도의 영, 요16:13)
⑥ 영광의 영(요1:14)
⑦ 감동의 영(벧후1:20-21)
⑧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함이다.
(딤후3:16-17)
Ⅴ. 성경적 설교의 결정적 생명은 말씀과 성령이다.
모든 성경은 풍성한 영감의 소산이다.(딤후 3:16) 모든 사람이 설교자의 말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그것이 믿는 자 속에 역사하는 이 일은 오직 그 말씀을 기록케 하신 성령님의 독자적 역사에 기인해야 한다.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 하느니라
전하는 자와 듣는 자가 말씀으로 화합되는 아멘의 역사는 오로지 성령의 내적조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롬10:17), 그리스도의 말씀은 성령의 역사에서만이 가능하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마틴 루터는
“성경이란 아름답고 넓은 과수원과 같다. 거기에는 온갖 종류의 나무들이 자란다. 그리고 나는 설교자에게는 이 특별한 과일을 그의 교인들에게 주는 것 외에 다른 권리가 없다고 하는 나의 친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의 교인들 가운데에는 호도나, 배, 또 앵두를 원하는데 그는 사과를 주고 싶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과만을 주면서 다른 과일들을 그대로 나무 위에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된다. 그는 약속의 땅에서 자라는 여러 가지 과일들을 가져오라는 사명을 가지고 약속의 땅에 간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그가 보기에 매우 좋게 보여 지는 사과와 함께 에스골 골짜기의 포도와 석류열매, 멜론, 그리고 황금 오렌지를 은그릇에 담아 가지고 돌아와야 한다” 고 했다.(특정 설교만 하면 x)
→ 강해설교에 대지 설교는 (교리 70% : 윤리 30%) 적용 또는 (구약50% : 신약 50%)
Ⅵ. 성경적 설교의 중심사명과 표적은 세례운동이다.
설교는 이신득구에 의한 예수의 초청이다
행 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막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그 결과 신앙고백에 이르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의 인침에 의지하여 제자(백성)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사죄와 성별과 하나님의 소유됨과 주를 위한 헌신을 의미한다.
필립 헨리는
“설교자는 말씀의 화살을 가지고 감동적인 수사학을 이용하여 청중들의 머리위로 쏘지 말고 또 천한 표현으로 그들의 다리 밑을 쏘지 말고, 오직 친밀하고 생생한 생명력으로 그들의 가슴을 쏘아라. 이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우리가 마땅히 목적해야 하는 것이다”고 했다.
< 유력한 설교의 제요건 >
유력한 설교란 결국 성경을 전하므로 오는 성령의 역사에서 사람을 감동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함에 있다. 유력한 설교란 성경의 진리(예수)를 증거할 목적으로 인격적인 체험(은혜)을 하고 이성적인 정돈을 통하여 천부의 재능을 발휘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Ⅰ. 목적의식(성경의 진리를 증거 할 목적으로)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의 원천이나 근간도 항상 성경에서 기초해야 한다. 성경에 대한 바른 신앙이나 해석이 절대로 전제하지 않는 한 유력한 설교일 수는 없다. 이유는 성경의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요, 설교의 근본사명과 목적이 성경을 증거하여 구령함에 있기 때문이다.
Ⅱ. 경건과 영력배양(인격적 체험, 은혜체험을 하고)
신구약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예외 없이 저들에게 임한 계시와 그 계시의 증거를 자의식적으로 체험했다. 그러나 저들의 계시체험은 저들 자신만을 위한 개인의 증험문서만이 아니라 말세를 만난 우리를 위함이라고 했다.
먼저 설교자 자신이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아야한다.
롬 4: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롬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고전 9:9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고전 10:10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요1서1:1-3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그러므로 선지자와 사도들이 인격적 계시 체험은, 곧 오늘 설교자 자신들의 인격적 체험이 되어야 한다. 인격적 하나님은 인격적인 피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말씀을 나타내시되 설교자 자신의 인격적 체험을 통하여 나타내시게 한다.
이것은 살아있는 설교의 특색이다. 하나님은 이 방법을 쓰시기를 기뻐하셨다. (고전1장) 설교자의 인격체험은 경건과 영력배양과 많은 영적 체험에서 오는 확신들에서 이루어진다.
Ⅲ. 지적 수단(이성적인 정돈을 통하여)
설교의 메시지는 인간을 상대하고 움직인다면 이성에서 이성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을 인간을 이해하고 그를 사랑하며 접근해야 한다. 여기에는 언어학적, 철학적, 역사적, 음악적, 과학적, 교육학적, 사회학적인 모든 재료가 전달의 방편(기구)으로 총동원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성경은 빛이요, 인격적 체험은 그 빛에 대한 보증이요, 이성적 정돈은 그 빛을 반사하는 종속적 기구들인 것이다. 이를 위하여 논리정돈한 원고설교가 바람직하다.
시세로(Cicero) 는 말하기를
“변설자는 모든 사물을 알아야 할 것을 철칙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Ⅳ. 전달 기능(천부의 재능을 발휘하므로)
설교자는 명철한 사고력과 예민한 감정, 활발한 상상력, 그리고 충분한 발표력(수사력), 탁월한 구상력, 대단한 영도력, 설파력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연구와 학습과 노력으로 어느 정도 발전시킬 수 있으나 천부의 재능이 우선적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선천적 재능을 백분 발휘해야 한다. 천부의 재능은 연술(연기)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설교의 재료수집, 취사선택, 그 구성과 배열, 원고작성 등에도 숙달되어야 한다. 이런 숙련은 설교준비의 요령을 익숙하게 하고 있는 능률있는 설교준비와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충분한 본문과 전후 읽기 필요)
Ⅴ. 궁극적 목적(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설교의 궁극적 목적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전하는 것이다.
① 성경을 이탈한 설교는 비기독교적이고
② 인격체험을 동반하지 않은 설교는 기계적이고
③ 이성적인 정돈이 없는 설교는 맹목적인 동시에 공허하게 될 위험성이 있을 뿐 아니라 독단에 빠지게 되고
④ 모든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설교는 소신이 없고, 박력과 호소력과 감화력이 결여된다. 그것은 결국 설교의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데 비효과적이다. 이 모든 것들을 총동원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 유력한 설교가 되는 것이다.
< 설교의 기본 요소 >
초대교회는 설교에 있어서 4가지 경우들의 기본 형태로 구분되었다.
Ⅰ. 케르그마적 요소
이는 전달자의 선포를 뜻하는데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사실과 내용을 명백하게 진술하는 것이다. 본래 케르그마란 복음의 본질에 대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케르그마는 케룩스 + 케루세인의 합성으로 전령 + 포고의 합성의미이다. 그러므로 케르그마란 복음자체의 포고(선포)이다. 그것은 논의의 여지나, 설명이나, 해석이 필요 없는 복음 그 자체의 순수한 언명, 기본적인 메시지로 그 자체의 선포이다. 말하자면 복음 그 자체이다.
★ 그렇다면 케르그마의 본질은 무엇인가?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고 믿는 그 자체이다.(마 16:16)
① 그는 다윗의 가문에서 나온 나사렛 예수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로 오셨다. 그는 세계안에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인간의 세계에 들어오신 하나님이시고 시간 속에 출현하신 영원이시다. 그는 전능한 기사를 행하셨다(권능의 하나님). 그는 율법을 완성하셨다(권위의 하나님).
마 5:22,28 (심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34:39-44 (재림)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② 그는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었다.(희생의 하나님)
③ 그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다(승리의 하나님).
④ 그는 승천하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영광의 하나님).
⑤ 그는 마지막 날에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재림하실 것이다.(심판의 하나님)
그래서 역사는 그를 향하여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단순한 무의미의 전진이나 반복이 아니다. 우연의 연속도 아니다. 서로 무관한 연속도 아니다. 그것은 완성을 향해 이동하고 있는 과정이다. 그 완성은 심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며 만유의 주로서의 재림이다.
이렇게 케르그마는 예수의 주권에 구심력을 두고 일어난다. 그의 능력의 강세, 권위의 삶, 십자가의 대속적 희생, 죽음에서의 승리(부활), 영광의 승천, 불가항력적 심판이다. 이것을 언명(선포)하는 그 자체가 케르그마이다. 말하자면 믿어야 할 구원의 본질(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절대적 신앙의 사실을 선포(언명)하는 것이다.
예)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시고,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재림하실 것 이다.(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이루셨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주이시다.
Ⅱ. 디다케적 요소
이것은 기독교의 본질적 요소의 사실을 설명하고 적용하는 과정의 가르침이다. 참된 설교는 복음 그 자체(주 예수)의 사건을 설명해야 된다. 그것도 왜 예수께서
① 화육강세하시고
② 죽으시고
③ 부활하시고
④ 승천하시고
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⑥ 다시 재림하시는 가를 해석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는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시고,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부활하시고, 승리의 귀환을 위하여 승천하시고, 제사장적인 사명수행을 위하여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고, 영벌과 영생을 위하여 재림하실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디다케는 강한 윤리적 요소가 있어야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구원받고, 용서 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상수훈은 이러한 디다케의 전형적인 실례이다. 그러나 항상 케르그마는 디다케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디다케는 케르그마의 뜻을 체계화하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디다케는 기독교 신학과 윤리에 이른 케르그마의 발전 과정이다.
예) 예수께서 왜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재림하실 것인가?
그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고, 그의 부활하심은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함이요, 또한 우리 부활의 첫 열매요, 그의 재림은 악인 심판과 성도 구원완성을 위함이다.
Ⅲ. 파라크레시스적 요소
이것은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여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라고 권면하고, 강청하고, 촉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복음에 대한 강한 호소력과 설득력을 갖는 권면이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우리 죄를 위하여 돌아가신 주 예수를 ① 믿으라는 것이다. ② 회개하라는 것이다. ③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파라클레시스보다 디다케, 디다케보다 케르가마는 선행되어야한다.
예) 주예수를 믿어라(대상)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믿음의 결과)
Ⅳ. 호밀리아적 요소
이것은 복음의 결과를 적용하는 것이다. 기독교 메시지의 빛 가운데서 이제 새 생활을 주제로 다루는 일반적 논의이다. 그러므로 호밀리아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내용이 디다케를 통하여 체계화된 것을 파라클레시스를 통한 후 일어나는 생활의 빛, 곧 열매인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케르그마의 열매이다. 케르그마의 결과이다. 그것은 영생, 곧 구원이다. 축복이다.
예)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즐거워하더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루디아 듣고 청함)
신구약 성경의 구심력은 구원의 복음(케르그마)이다. 성경도 이 구원의 복음(예수)에 중심하고 생명을 수태하고, 생산하며, 양육하고, 영원을 향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참된 설교는 성경자체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생명적인 참된 설교는 항상 이러한 4대 요서를 취하고 이것이 균형 잡힐 때 성취되는 것이다. 케르그마가 없는 디다케, 디다케가 없는 파라클레시스나, 파라클레시스가 없는 호밀리아는 있을 수가 없다. 불행스럽게도 현대 교회 강단에 이러한 균형을 중요시 하지 않거나. 등한히 함으로 설교가 아닌 도덕적 에세이로, 축복이라고 하는 환상에로 도취해버리는 기복신앙을 낳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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