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능력

하나님아들 2024. 5. 9. 16:52

십자가의 능력

 

제1장 사람이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누구인지 에 대에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말도 있지만 ’생각은 무엇인가‘

사람은 왜 생각하는 존재로 만들어졌는가? 역시 대답하기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사고와 감각은 상대적이다. 절대적인 사고란 있을 수 없다.

밝은 것은 어두운 것을 전제로 배고픈 것은 배부른 것을 전제로 체험하는 것이다.

어떤 상대나 전제조건 없이 무엇을 느끼거나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없는 것이다.

이제 우주와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 부터 사람의 문제를 풀어보자

어떤 사람이 혼자서 무인도에  상륙했다고 하지. 그리고 그곳에는 먹을 것과 쓸 것이 얼마든지 있는 곳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처음에는 먹고 놀고 혼자서 잘 살 것이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서 자기와 함께 그 풍성한 것을 나누면 즐거워 할 수 있는 어떤 상대 즉 가족이나 이웃을 구하게 될 것이다.

사람은 궁핍한 가운데서는 이웃과 싸우지만 넘치고 남으면 그것을 같이 나누고 기뻐할 이웃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의 본성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시면 영원한 충만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신은 전혀 부족함이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빈 것)도 없으시다.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자신의 충만함을 상대에게 줌으로써 더욱 기쁨을 넘치게 하려고 한다.

하나님은 그 모든 영광(충만)을 아들에게 주시고 또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골1:1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골2:9)

 

하늘들 위에 계신 하나님의 충만하신 분이요, 하늘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다.

그 분에게 영원히 받음으로서 영원한 기쁨을 돌려드릴 상대가 바로 우리인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과 정반대의 상대로서 사람을 성경은 ‘육’이라고 말한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8:7)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영이시지만, 사람은 ‘육’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 안에 제한된 존재로서 ‘운동’이라는 형식을 통해 부분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의식한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충만하여 모든 시간과 공간 안에 임재하시지만 , 사람은 자기 몸이 움직여서 체험된 시간과 공간만을 자기의식으로 체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아무리 오래 살고 많이 움직여도 모든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채울수는 없다. 이것이 피조물의 한계성이요 사람의 부분성(그림자)l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그림자, 사진)일 뿐인 것이다

사람 외에 땅의 모든 피조물들은 시간과 공간 안엣거 움직이기는 하지만 영으로 임재하는 것이 아니요 단지 형체만 입게 된다. 예를 들면 고양이가 쥐를 먹이면 죄의 형체는 고양이에게 이전되지만 고양이의 분성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은 무엇을 먹거나 행동했을 때‘자신’이 그것을 했다고 느낀다. 운동을 통해 형체의 변화와 함께 의식의 변화도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을까?

 사랑이란 의식적인 상대에게 자신의 것을 주는 것이 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충만을 주시 위해서 의식적인 상대가 필요하셨다. 하나님은 만물 안에 스스로 충만하신 분이므로 하나님과 대조되는 독립적인 의식의 상대가 필요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대적하는 영인 사탄으로 하여금 사람을 미혹케 허락함으로써 일시적으로 사람이 하나님과 대치되는 의식의 존재가 되도록 하셨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마귀로 하여금 사람에게 접근하여 선악을 구별하는 지혜를 갖도록 유혹하게 하신 것은 자신이 선악을 구별함으로써 의식의 주체 즉, 선택의 주체가 되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람이 혼자 혼자있는 것이 좋지 않다.’하시고 돕는 베필을 지어 주셔서 아담이 자기 안에서 하와를 의식함으로써 자기의식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랑의 통로’도 동시에 주셨다.

이러한 생명 즉, 사랑의 능력을 주신 것이 생명과였다.

물론 아담은 하와를 통하여 유혹을 받았으나 아담의 후손인 우리는 여자의 후손이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영접함으로써 ‘나’ 즉, 사탄과 육을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

그리고는 여자의 후손 즉, 아담을 돕는 배필의 사명을 갖고 세상에 오신것이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1:15)

 

그러므로 사람이 아무리 이기적이라고 할지라도 마귀처럼 될수없으며 반드시 이웃을 의식하지 않을수 없는데 이것이 바로 양심이다

양심은 영어로 conscieceㅇ니데 이것은 con(함께)과 svience(안다)의 결합어로 ‘함께 안다’ ;동감한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양심(사랑의 통로)은 나와 이웃가의 관계를 가늠하는 의식작용이 된 것이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지옥에 간 부자는 전적으로 자기만 의식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그 품에 있는 나사로도 볼 수 있었으며 동시에 땅에 살고 있는 자기의 형제들도 의식하고 있었다.

나라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으니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식을 완전히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부자는 비록 세상에서 자기중심으로 살았지만 결국 자기의식으로는 자기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사람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하자.

 

1. 하나님의 사랑의 상대

사랑은 주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한님의 모든 것을 받을 수 있는 상대가 필요하셨다.

그 상대가 바로 그의 아들이었으며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것으로 충만하게 채우기 위해ㅏ여 자신을 비우셨다(요3:35. 빌2:6)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만제 전에 택하셔서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받도록 예정하셨다(요1:16).

아들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을 받을 수 있는 상대로서 선택되고 예정되고 구속된 것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8:29-30)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충만하신 분이시다.

과거에 충만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미리 아시고 기뻐하시고 원하시고 예정하셨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하늘의 모든 복을 받도록 하시며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로 세상을 충만케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영원한 미래를 통해서 하나님의  충만이 끝없이 우리에게 입혀지는 역사가 새 하늘과 새땅 즉,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나타날 충만한 은혜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엡2:5-7)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입혀진 은혜는 ‘시간 전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시간 안에서 되어지는 모든 사건을 좌우하는 기본적인 은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과거와 현재를 통하여 일어난 사건속에 얽매여서 근심ㄹ하고 걱정한다.

그러나 그 모든 사건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써 다 해결되도록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담대할 수 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8:33)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그리고 우리가 pt상에 태어나서 받은 은혜는 ‘공간적인은혜’라고 할 수있다.

그 이유는 땅의 모든 것은 하늘의 것으로 다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땅을 공허하게 만드시고 땅의 모든 것이 결국 공허로 돌아가 수밖에 없도록 하신 이유는 하늘의 모든 것으로 채우기 위함인 것이다.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시102:25-27)

 

생태계에서 땅의 것을 식물이 흡수하고 식물은 동물이 먹으며, 동물은 사람이 잡아먹는 이치는 공간적으로 나타난 대속의 형체화이다.

하나님이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아들이신 주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셔서 세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도록 하는 방법도 ‘공간적인 은혜’라고 할 수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서 영원히 하늘나라에서 받게 되는 은혜는 ‘운동적인 은혜’라고 할 수있다.

영원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이 없으므로 운동이 있을 수 없지만 우리 성도는 하늘나라에서 운동의 형식으로 은혜를 받게 된다.

사람은 땅에서 사는 동안 몸의 운동으로 형체를 입고 그 형체를 감으로 느낀다.

몸을 움직을 때마다 그에 해당하는 감각(5감), d자의 식(6감), 임재감(7감)을 느꼈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가서도 영원히 하나님의 생명으로 (운동의 형식으로) 형체의 변화와 감의 풍성함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하늘나라에 가면 더 자유로운 움직임이 잇게 된다.

날아가던가, 장소를 이동한다던가, 누구를 만아는 것이 이 세상보다 더 다양해 질 것이고 각각에 해당하는 다양한 형체(환경모양)의 변화를 체험할 것이며 동사에 그 만족감은 세상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계21:24-26)

 

사실 하늘나라에는 시간과 공간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와 같은 운동이 있을 수없겠지만, 영원히 충만하신 하나님이 끝없는 충만함을 우리에게 계속해서 입혀주시는 방법이 이런 방법 외에 또 다른 것이 있을 수 가있을 것인가? 정말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에 놀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3-36)

 

2. 시간전의 은혜

사람은 시간 안에서 살고 있다. 시간 안에서 인과관계을 따라서 giod동하고 체험하고 생각한다.

자기 몸이 움직이는 것만큼 자기 것이 만들어지는데 그것을 사람들은 ‘내 재산’ ‘내집’ ‘내 교회’라고 말한다.

그런 것들은 ‘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통 ‘나’라고 말할 때는 자기 몸(형체)이나 자기가 행동하 것(생기)이나 자기가 느낀 것(5감)이나 자기가 생각하고 의식하는 것(의식,영,6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것들은 진정한 ‘나’가 아니다.

내 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흙을 빚어서 생기를 불어넣어 만들어 주신 것이요, 내가 움직이는 운동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기요, 또한 내가 감각하는 모든 것은 몸이 주위의 상황을 자각하는 작용(생령)일 뿐이다.

 

내가 생각하고 느낀다고 하는 것은 영의 세계에서 오는 그림자이다. 하나님은 본래 땅을 공허하게 하시고 땅의 모든 운동과 형체는 전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나타나 보이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시간 전에 즉, 우리의 형질이 이루기 전에 미리 보시고 기뻐하시고 선택하시고 상대하신 ‘나;’란 분명히 이 세상에서 사는 흙으로 된 몸을 가진 ‘나’도 아니요, 오감으로 환경을 느끼는 ‘나’도 아니요, 육감을 따라 생각하고 느끼는 ‘나’도 아닌 것이다.

 

그러면 진정한 나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나’인 것이다.

시간 전의 나란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리스도 생명 안에서만 확인되는 나이다.

이러한 난 그리스도로 사는 나이며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 움직이는 나인 것이다. 이러한 나가 참된 예수의 형상이며 하나님의 형상인 나이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예수를 믿고 예수로 사는 원천적인 근원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택하신 부르신 하나님 아버지의 택하심과 예정하신 사랑의 역사가 형체로서 나타난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8:28-30)

 

창세전에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은 우리의 생애는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미래와 연결되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그림자(허상, 우상)세상에서 사는 동안 거짓 나(육,겉사람)을 벗어버리고 참 나(새사람) 즉 ‘예수로 사는 나“를 입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골3:5-10)

 

우리가 구원을 얻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노력은 전혀 없이 전적으로 처음과 나중이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의 역사로만 이루어진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8-10)

 

왜 하나님은 천세 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또 구속하지 않을 수가 없으셨는가? 그것은 바로 아들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을 위하여 그리고 아들에 의하여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

우리의 미래도 전적으로 아들의 영광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기 때문에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마16:25).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땅의 것, 보이는 것이 미혹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에 온전히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벧후1:10-11)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인자에게 그가 태어난 후에 나타날 모든것이 입력되어 있다.

따라서 사람이 노력하고 무엇을 하는 것도 자기 안에 중진 범위 안에서의 노력이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정말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 그래서 사람은 땅의 것을 보면 전도서의 저자처럼 절망할수벆에 없다.

우리의 참된 소망과 용기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상대로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시간 전의 은혜’는 시간 안에 사는 우리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절대 요인이며, 이 세상을 떠나서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이유가 된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롬11:32)

 

3.나타난(보이는)은혜

보이지 않는 것은 나타나고 보이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이다.

사랑의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또 아들의 영광을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하여 만들어진 우주 기계가 하늘과 땅이다.

 

하나님은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또 아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주게 하시려고 ‘주는 기계’인 하늘과 ‘받는 기계’인 땅을 창조하셨다.(골1:16-18)

하늘은 주는 곳이요 땅은 받은 곳이며 하늘은 하나님의 모든 것이 내려오는 곳이고 땅은 하나님의 모든 것으로 채워지는 곳이다.

하늘과 땅의 주고 받는 모든 역사는 아들에 의하여, 아들을 위하여 그리고 아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도록 하셨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비밀이신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요, 그 안에는 우주의 모든 보화(가치)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말과 운동은 보이지 않는 사랑(생명이 나타나 전달되는 통로이다. 아버지는 사랑이요 아들은 말씀이며, 말씀에는 사랑의 운동력이 있다.

천지만물은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말씀으로 붙잡혀 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주셨고 우리는 말씀으로 모든 것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 없이는 아무것도 받을 것이 없으며 아무 형체도 나타나지 않도록 하셨다.

하늘과 땅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형상(형체)을 입혀주는 ‘은혜의 기계’이지만 하나님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기계'인 것이다.

 

제2장 하늘과 땅의 구조

 

하늘은 삼층으로 되어있다. 가장 위에 있는 하늘은 ‘하늘들 이의 하늘’로서 창조에 속하지 않은 곳이다.

이곳에는 사랑으로 영원히 충만한 하나님과 모든 것이 넘쳐나는 은혜의 보좌가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영원히 주지 않고는 못 견디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그 영원한 사랑으로 주고 또 주시는 한없는 충만이시다.

영원히 주시는 충만하신 하나님이 계신 곳이 삼층 하늘이다.

삼층천에서 하나님은 하늘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 이곳에서 아버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들에게 주고 부활하신 후 하나님 우편에 오르신 주님은 이곳에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1:16)

 

아버지 하나님의 충만은 아들의 충만의 근원이 되고 동시에  우리 성도들의  충만의 근거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아들의 충만함에 동참케 하시려고 아들이 부활하실 때 우리도 함께 삼층천 하늘에 앉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충만을 누릴 뿐 아니라, 공허로 된 세상을 주님으로 충만케 채울 수있도록 하셨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충만한 생명으로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에 땅에 하늘의 충만한 생명으로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에 땅에 있는 사망의 법, 공허의 법에 메이시 않게 되었으며 땅의 것은 생각할 필요도, 쳐다 볼 필요도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1-2)

 

우리가 누리는 모든 충만의 근거는 우리를 충만케 하시는 자인 그릿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이 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삼층천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 할 수 있게 된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킨 역사도 바로 예수의 영광을 본 삼층전의 믿음이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행3:12-16)

 

우리 성도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충만하여졌으니 마땅히 그것을 누릴 뿐 아니라 그 충만함을 세상에 채워야 한다. 오늘날 교회가 이 삼층천의 충만함을 알지 못하고 땅의 보이는 것에 서로 잡혀 얼마나 방황하고 있는고!!!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 층 하늘에는 천사를 두시고 일층하늘(공중)에는 타락한 천사를 두셨을까? 하늘의 구조를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천사들은 피조물 중에 가장 선한 일을 하는 피조물이다.

이들은 하늘 위에 계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종들이다.

그런데 그 천사들의 사역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오셔서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시며, 하나님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열방이 그 빛을 나오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계셔서 그들의 찬송을 받으시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온 세계가 복을 받도록 하신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 은 하나님께 받은 사역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지만 참 이스라엘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은혜와 진리가 땅에 전달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함을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 우편에 오르신 그리스도ㅜ와 함께 하늘에 오르게 하시고 아버지의 선한 일을 하게 하시며 우리에게 거저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셨다.

그래서 교회의 이름이 충만이요 부활하신 주님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이며 우리는 충만의 통로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늘에서 세상을 충만케 해야 할 직임(위치)을 갖게 되고 천사들은 이러한 충만의 사역을 감당하는 교호;(성도)를 섬기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충만의 통로인 교회가 나타났으므로 하나님의 숨겨졌던 비밀이 드러나게 되었다.

하늘의 천사는 하나님의 사랑과 충만의 전달자로 장차 나타날 교회의 그림자로서 둘째 하늘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엡3:9-11)

 

천사는 교회의 머리신 주님과 성도들에게 그 직임과 위치를 넘겨 주게 되었다.

그래서 하늘에서 자녀의 일취를 갖게 된 성도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말씀을 천하고 마귀를 쫓아내며 세상을 이기는 천사들이 가졋던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천사들은 종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했지만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과 같이 하나님의 충만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방인들처럼 천사을 섬기거나 천사들에게 기도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삼층천은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함을 보고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자리요, 이층 하늘은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의 충만 사역을 미리 볼 수 있는 자리이다.

 

그러면 마귀는 왜 일층하늘에 있게 되었는가?

천사가 하나님의 충만 사역을 감당할 교회의 예표라면 마귀는 하나님의 밖에서는 아무것도 있을 수없다는 세상과 지옥의 예표이다.

하늘의 본질이 충만이지만 땅의 본질은 공허요 무이다.

땅은 하나님의 충만이 채워지는 대상일 뿐이다. 땅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단지 하나님의 층만의 상대가 되는 성도들을 채우기 위한 장소로써 잠시 사용되는 곳이다.

창세 전에는 하나님의 충만함이 하들을 사랑하시고 아들과 같이 계신 것으로 그 영광이 나타났었고 '땅이 사라진 뒤에는 성도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충만)이 영원히 계속되게 될 것이다.

 

땅의 본질은 공허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의 운동력으로 공허라는 스크린위에 형체(피조물)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신 우너리이다.)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말씀 없이 나타난 것은 없다.

이 땅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으며 그 말씀으로 나타난 그림자들이다.

 

‘땅의 피조물들은 모두 말슴의 운동력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 안에서 변화하도록 되어 있다.

어떤 피조물도 스스로 영원히 존재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헬라 철학자 헤라클레토스의 말처럼 말물의 본질은 ‘변화’인 것이다.

하나님만이 여우언하시고 어디든지 영으로 임재하시며 스스로 계신다.

하나님이 땅을 공허 위에 두신 것은 하나님만이 정말로 계신 분(존재)임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다.

하나님은 아들의 영광을 위하여 아들만이 만물의 으뜸이 되게 하시려고 피조물을 그렇게 지으신 것이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골1:16-18)

 

그러므로 피조물이 아무리 크고 위대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림자의 크기나 그림자의 영광 같은 것이다. 그림자는 아무리 크고 웅자하다 할지라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고전1:19)

 

하나님은 타락한 천사를 공중에 남겨 두심으로 거짓형상이 사람에게 드리우게 하셨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쓴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날 수 없도록 되어 있지만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하심 안에 서 독자적인 일을 할수있도록 허락되었다.

 

욥기1장에 보면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유혹하도록 허락하신다.

사람이 사탄에게 유혹을 받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사람은 자기 몸으로 받는 체험을 통해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분할수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빛을 알려면 어두움을 체험해야 하고 줗은 것은 나쁜 것을 통해서만 체험할 수 있는 이치와 같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천국과 지옥의 그림자가 겹치도록 허락하시고, 인간이 반대되는 두 가지를 체험함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사람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 자체에는 선한 것이 있을 수 없다.

사람은 본래 흙으로 만들어져 하나님의 생기로 움직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운동력이 전혀 없다.

뿐만 아니라 그 몸이란 밖에서 주어진 자극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땅에서 하늘의 것을 체험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 하다.

그래서 사람은 땅에서 나타난 형상을 따라 보는 것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진리가 아닌 허상을 체험하게 되는 데 여기에서 바로 ‘나’가 만들어진다.

이‘나’는 하나님과 원수(반대)가되는 영으로부터 미혹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말씀-> 운동력-> 형체(보이는 것)= 피조물.변함

피조물(흙-> 생기-> 운동(몸)-> 환경의 식(생령)-> 하나님의 형상(마귀,거짓 하나님)-> 선악을 구분하는 의식(선악과)-> 나(허상)

 

 

그러므로 사람들이 의식한ㄴ ‘나’란 어떤 피조물보다 더 부패한 공허의 상채이다.

‘나’는 탄식과 실망의 상태밖에 될 수없는 것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렘17:9)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7:24)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서 다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지만 사람의 마음만은 말씀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만족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공허의식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죄요 영적인 죽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모모이 움직여서 어떤 형상 만들어지고 있다고 자기는 살아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 몸이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의 생기요, 어떤 것을 오감으로 체험하는 것도 하나님의 생기로 나타난 그림자일 뿐인데도 말이다.

 

이 거짓 상들은 제대로 연결되지 없으며 어떤 이해도 할 수 없는 정말 혼돈(미련함)의 상이다.

그래서 유자 이래로 ‘나’로부터 무엇을 깨달은 사람도 없고 무엇을 얻은 사람도 없다.

‘나’라는 변화는 그림자를 상대했기 때문에 오직 혼돈과 허무만 체험할 뿐이다.

사람은 지금도 여전히 유혹의 영으로 미혹을 받아 선악을 잘 선택하며 ‘나’가 무엇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아! 미련한 인간이여!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사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롬3:11-18)

 

그래서 이러한 것을 체험한 인간들은 결국 허무주의 철학이나 허무종교를 만들어 낼수 밖에 없는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인간을 이렇게 만드셨을까? 그것은 허무와 혼돈 그리고 죽음의 체험을 통해서 인간에게 진리와 충만, 영광의 생명 체험을 주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 위의 그림자로서 땅의 것을 나타나게 하셨고 하나님과 반대가 되는 지옥과 마귀의 그림자를 세상에 나타나게 함으로써 우리가 하늘의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근심하지 않을 수 없으며 시험(시련)을 당하지 않을 수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요 가벼운 것이고 오히려 우리는 그것들을 통해서 더 큰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룰 수있게 된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4:17)

 

사람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그림자이며 그림자로 된 땅에서 살기 때문에 말씀과 생기의 나타남이 있을 뿐 참된 생명 즉, 하나님의 임재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아담을 만드시고 생명과를 먹으라고 하셨던 것이다.

 

사람들은 움직이는 체험을 하기 때문에 자기가 살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땅의 그림자를 만드는 말씀과 생기로부터 오는 운동력으로 비롯된 것이다.

다시말해, 사람은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에 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망의 법이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2:1-3)

 

지금은 그림자에 끌려 다니면서 무엇이 있는 것 같고 움직이는것 같이 느껴진다. 왜냐하면 그림자 자체가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몸이 생기를 거두시고 그림자를 받은 몸이 흙으로 돌아가 없어지면 운동력이 없는 마귀의 영에게 잡혀서 영원히 고통과 비형체화(죽임)만 당하게 되는데 이것이 지옥이다. 하나님은 충만이요 은혜의 영이지만 반대로 마귀는 강포와 죽이는 영인 것이다.

 

 

 

제3장 주님의 생애

 

주님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우리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러면 주님의 생애를 통해서 사람의 본성을 알아보자.

 

1.자신을 배우심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6-8)

 

불교나 선()교에서는 무()나 공()자체를 명상하고 체득하려 하지만 인간의 인식능력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공이나 무를 알려면 그것의 반대인 충만을 이해하고 체험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배고품을 이해하려면 배부름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과 같다.

주님은 세상에 오실 때 하나님의 충만함을 버리시고 자신을 땅의 특징인 공허와 일치시키셨다. 주님의 비우심은 자신의 신성(충만)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충만과 공허의 권세는 아보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셨다.

땅의 공허를 모르면 하늘의 충만도 기대할 수 없으며, 땅에 있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인식하면 큰 호해가 생기는 것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롬3:4)

 

 

2.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심

주님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같이 가졌던 영광을 갖고 계셨다.

그러나 주님은 하늘의 경계를 넘어 땅으로 오실 때 충만과 반대가 되는 비우심을 입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우주적인 준재이다.

사람은 공허의 본고장인 땅에서 하나님 말씀의 운동력으로 나타난 흙으로 빚어지고, 하나님의 생기로 몸이 움직여서 오감을 통하여 환경의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물질세계인 오감의 세계를 초월하는 신의 세계 즉, 신의 임재에 참여하는 눌라운 피조물이 된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특징은 흙으로 된 것도 아니고(광물단계),생기로 움직이는 것도 아며 (생물단계), 생령이된것도 아니요(동물단계) 하나님의 그림자인 것이다(하나님단계)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형상이기 때문에 신의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의 자기의식은 자기 몸이 움직일 때 오감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시공의식이므로 몸의 운동력이 사라지면 그 의식의 공급이 끝나게 되는데 이것이 육이요 사망이다.

다시말해 사람은 자기 노력으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없으며 결국 땅의 본래 번지인 공허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마귀가 세상의 영광과 사람의 인기, 욕망의 만족을 가지고 유혹했지만 자신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능력으로 육의 것들을 물리치셨다.

주님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또한 아버지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아버지 ‘안’에 거하셨고 자신 안에 계신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일을 하셨다. 그래서 아담 이래로 마귀를 이기고 자신을 이기는데 성공한 사람은 주님한 분 밖에 없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요16:33)

 

주님은 땅에서 사셨지만 하늘의 아버지와 함게 움직이시고 아버지의 일을 하셨다.

주님의 생애는 땅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이루는 생애요, 하나님으 사랑과 구원을 윌에게 보여주는 생애(운동력)였다(막10:45,요10:9-10).

주님을 통해서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이 땅으로 내려오게 된것이다.

 

3. 자기를 낮추심(빌2;8)

사람의 자기의식이란, 자기의 몸을 움직일 때 오감을 통하여 들어오는 환경의식(생령)속에 마귀로부터 선악을 구분하는 능력을 받아 계속 밀리고 쫓기는 현상이다.

그래서 사람은 움직이면 움직이수록 한경을 체험하면 체험할수록 자기 부담이 많아지고 살면 살수록 욕구와 동시에 불만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늘의 것을 구함으로써 자기를 벗어나고, 자신을 낮춤으로써 세상 즉, 땅의 것을 벗어나셨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4:10)

 

사람들은 물질로 자기 환경을 보강함으로써 몸으로 들어오는 감각을 높이려고 애쓴다.

이것이 사람들이 추구하는 소유이며 재산이다. 이러한 삶은 식물과 같은 단계의 삶이다.

식물은 그 형체를 유지하는데 환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주님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환경을 버리고 광야로 가셨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인도하심를 따라 광야로 갔던 것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마4:1)

 

또한 사람은 좋은 환경을 찾아 움직임으로써 자기 욕망을 만족시키려고 애쓴다.(동물단계).

그러나 주님을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을 거절하셨다.

그는 주려서 지경이 되었으나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려고 유혹을 거절하셨다.

세상은 요망번지에 사람을 잡아둔다(요일2:16). 그러나 그 욕망이 지나고 나면 썩어진 것만 남아 생지옥으로 던져지고 후에는 영원한 지옥으로 끌려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칭찬하고 따르는 사람들을 통하여 자기를 높이려고 한다.

그것이 ‘무리요 민종’이다.

민중은 일정한 가치관이 없이 단지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헤어지고 모여든다.(인간관계)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사람에게 의탁하지 않으시고 사람에 대하여 아무 증거도 받으려고 하지 않으셨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권세욕이다.

권세욕이란 다른 사람의 운동력을 착취하여 자기 욕구를 만족시키고 동시에 자기 우월감을 인정받는 것으로 세상에서는 제일 매력있는 자리이다(마귀단계)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종과 섬기는 자로서 높은 위치를 모두 피하였다.  

부모에게 순종함으로써 자신을 낮추시고 요단강에서 침례(시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심으로써 자신을 낮추셨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광야로 가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에도 자신을 낮춤으로 마귀를 이기셨고 자신을 임금 삼으려는 무리를 피함으로써 자신을 낮추셨다.

주님은 부정한 방법으로 자신을 사형 판결한 장로들과 대제사장에게 순복함으로써 자기를 낮추셨고 죽음에 넘기웠지만 자신을 위하여 아무 변호도 하지 않음으로 자신을 낮추셨다.

 

그토록 여겼던 무리들이 장도 바라바는 놓아주고 자신을 십자가에 넘기는 처지에서도 주님은 자신을 지키려 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환경에 의해서 자신을 높이거나 사람으로 자신을 확인 받으려 하지 않으셨다.

세상은 환경과 사람으로 나를 높이는 곳인데 주님은 정말 세상을 의지하지 않는 분이셨다.

 

4.선한 일을 행하심(행10:38)

이땅에는 선한 것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선한 석은 하나님께만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무리 선하게 보이고 선한 것을 원한다 할지라도 악만 토해낼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한 것을 땅 위에 전달하기 위해 천사를 창조하셨고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조성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늘의 복을 땅에 전달하는 성공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땅위에 전달하시려는 복은 하나님의 말씀에 모두 기록되었으며 이스라엘에게 주신 제도에 모두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참 이스라엘이요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이시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요1:45)

 

주님의 생애는 아담으로 인해 끊어진 생명의 역사가 다시 하늘로부터 연결된 생명의 통로였다.

주님의 출생, 성장, 세례, 공생애, 가르침, 죽으심과 그로 말미암아 나타난 심판까지 모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약속하신 언약의 완성이었다.

주님의 공생애(요단강 침례 이후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는 선한 일을 행하시는 천사와 같은 사역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이 땅으로 전달된 것이다.

 

아브라함 이후 이스라엘의 일꾼들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선한 일을 하는 천사사역은 이스라엘의 영광이었다.

그러나 선한 일을 행한다고 해서 모태에서부터 죄로 태어난 사람을 구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도 선한 말씀과 많은 기적으로 가르치고 베푸셨지만 누구도 주님의 말씀이나 선한 행위로 변화 받은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던 것이다.

 

여기에 천사(기적)사역의 한계가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은사와 능력을 받아 교회를 성장시키고 선한 시업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애쓴다.

물론 은사나 능력으로 선한 사업으로 사람들은 모을 수 있고 어떤 운동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어느 누구 하나도 영적인 변화가 없다.

주님도 공생애 기간 동안 기적, 능력,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셨었다.

그러나 주님이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까지 제자들은 그대로 땅에서 이스라엘이 회복되기만을 기대했던 것이다.

 

사실 선을 행하고 어느 정도 기적을 행하는 행위는 세상의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도사나 교주나 대승이 아무리 기적과 말에 능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천사 단계-사탄도 천사임- 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주로 선한 사업이나 기적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대속의 능력 즉, 사랑의 능력이 없이는 천사단계나 마귀의 거짓 기적 단계에 불과한 것이다. (고전13:1-3)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히1:4-7)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살후2:9-12)

 

교회 안에서 자기에게 기적이나 능력이 나타난다고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위치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2-23)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한 초능력이나 선한 일이 아니라 삼층천의 대속의 능력과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5.십자가에 죽으심(빌2:8)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요20:28).

이것이 바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나뉘게 하는 거치는 돌이다(벧전2:6-8)

그것을 어떻게 믿을수 있는가? 하나님은 만드신 만물 안에 그의 신성을 보이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증거도 보여주신다.

이제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그의 하나님 되심을 보자!

 

주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영혼을 사랑하셨다.

가륫유다가 달린 강도와 자신을 비방하는 무리를 위하여 용서를 구하셨다.

십자가 상의 그리스도는 완전한 자기 부인이요, 완전한 대속의 사랑이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6-8)

 

하늘과 땅, 하나님과 사람은 서로 반대가 되는 원수이기 때문에 죽음을 통해서만 경계를 넘을 수 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은 땅에서는 바로 죽음과 저주거리가 되고, 땅에서의 생명과 영광은 하늘에서는 사망과 심판이 된다. 죽음 없이 하늘과 땅의 경계를 넘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3:13)

 

우리 주님이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 세상의 영광과 부귀를 버리고 하늘의 것 즉, 하나님을 섬기기로 택하셨을 때 이미 그의 하나님만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하늘의 경계를 넘어서 땅에 오실 수가 있지 않은가!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였다.

땅의 사람은 누구도 땅의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수도 없거니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을 수도 없다.

혹 자기의 이념이나 친구를 위해서는 죽을 수가 있겠으나 원수를 위하여 죽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님만이 하늘에서 경계를 넘어 땅에 오실 수 있으며, 하나님만이 온전한 사랑으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실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으심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있는 일을 하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53:10)

 

그리스도 예수는 세상을 사랑하사 사람으로 죽으려고 오신 하나님인 것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8)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보며 죄인을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대속으 역사를 본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어떤 기적도 거절하시고 끝까지 우리의 죄값을 치르신 대속의 사랑 즉, 하나님의 의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위에서 어떤 기적이나 수단이 있을 수 없으며, 오직 죄의 값을 치르는 죽음만이 필요한 것이다.

이 십자가 앞에서 세상에 난무하는 모든 인간들의 이론이나 마귀나 천사들로 나타나는이적이나 기적이 다 쓸모없는 것이다.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가 자랑하고 붙드러야 할 유일한 하나님의 선물이요 구원의 길이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1:21-2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6:14)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로 알아야 한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로 일때 나의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된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되 나의 십자가 즉, 나의 죽음(부인)을 통해서 땅의 경계를 넘어 삼층천에 이르고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입게 된다.

그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신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땅에서 자기 죽음을 통해서 하늘의 경계를 넘는 의지이다.

우리의 십자가는 주님의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대속의 은혜 안에서만 가능한것이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3:9-12)

 

그러므로 믿음은 단순한 인간적인 고행도 아니요, 자기 순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주님의 기적만 쳐다보는 요행심도 기도도 아니다. 날마나 주님으 죽으심을 본받아 우리 자신을 죽음에 넘기우는 결단인것이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4:10-11)

 

십자가의 도는 좋은 환경, 좋은 프로그램의 종교를 즐기는 고상한 종교오락이 아니다.

우리 성도는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땅의 경계를 넘어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에게까지 계속 위로 올라가야 한다.

권세자에게, 남편에게, 부모에게 복종함으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바로 위로 향하는 십자가요(엡4:22~6:9), 안일한 나의 집, 재산, 환경을 버리고 땅의 경계를 넘어 세상에 버려진 영혼을 찾아 대속의 값을 치르는 것이 아래로 행하는 십자가이다.(눅14:33)

 

교회에 오랫동안 다녀서 지위가 높어지고 이름이 알려 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종교적인 경험이 많아지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위로 향하거나, 집자가를 지고 세상을 찾아 아래로 향하는 것만이 오직 나를 살리고 부활의 생명으로 삼층 천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고후4:12)

 

주님께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을 부인하고 복종의 십자가를 지셨고 아래로 세상을 향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심으로써(요1:2)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게 되신 것이다.

 

6. 모든 아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으심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2:9-11)

 

집자가 뒤에는 영광이 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세상에서 바라보신 하늘의 즐거움이었다.

주님의 즐거움은 아버지의 보좌에서 아버지의 영광에 동참하는 영광이요, 모든 천사들이 그의 말씀에 무릎 끓는 영광이요, 모든 악한 영들이 두려워 떠는 영광이요, 모든 상도들에게 영원히 은혜의 찬송과 존귀를 받으시는 영광이다.

우리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윗마디(권세자, 부모, 남편)를 향하여 자기를 부인할 때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까지 주의 영광에 동참 할 수 있으며, 아랫마디(아내 ,자녀, 부하, 세상)을 향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그들을 섬김으로써 하늘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삼층천은 최상의 자리이기 때문에 사실 더 이상 올라 갈 수 없다.

단지 땅에 살면서 육을 가진 성도들이 땅으 것을 버리고 온전함을 이루어야 한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온전히 성화된 성도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고 단지 주님과 동행하면서 다른 성도들을 섬기도 세상을 찾아 내려가는 것밖에 없다.

교회에서 누가 높으냐 하는 것은 욕에 속한 일이며 온전한 삼층천에서 온전히 성화된 성도는 서로 섬기는 것과 세상을 찾아 내려가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권세자나 부모, 남편을 섬기는 것은 신분이 낮아서 섬기는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에서 큰 자로서 대속의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다.

땅에 있는 사람은 누구도 높은 자, 지도자, 랍비가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높은 자이고 우리는 다 서로 섬기는 관계이다.

 

주님과 세상을 향하여 온전히 십자가를 지는 성도만이 삼층천의 교제 즉, 성도의 교제가 가능하게 된다. 말씀의 주제도 십자가요, 기도의 제목도 십자가며, 교제의 조건도 십자가다.

십자가 없는 설교는 말씀이 아니며 삽자가 없이 자기복만 구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 대속의 삽자가 없이 서로 즐기려는고 하는 교제는 참다운 성도의 교제가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빌1:29)

 

 

제4장 십자가 목회의 원리

 

1. 땅의 분질은 무(공허). 광물단계(창1:2)

땅에서 사람이 상대하는 모든 것은 나타난 형상(그림자)이다.

우리 육신 (겉사람)은 오감으로 보이는 형상을 상대하여 마귀의 유혹을 받아 허상(빈 것)만 만든다.(약3:17, 딤전 4:7)

 

이러한 허상 속에 마귀의 영이 자리잡아 거짓이 참인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이것이 사람이 마음이며 만물 중에서 가장 부패한 것이다(렘17:9, 딤전6:5)

그래서 육(나)으로부터는 썩어진 것(쓸모 없는것) 외에 는 거둘 것이 없다.(갈 6:8, 전1;2)

이런 것에서 사람을 깨어나게 만드는 것이 말씀과 기도이다.

말씀과 기도없이는 하늘나라(실상)을 볼수없다.(히1:1)

하늘나라는 사람의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주님과 그의 은혜의 말씀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세상 정보로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받아서 성령이 증거 하시도록 전적을 주님께 의지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성경구절은 얼마든지 외울 수 있지만 진리의 영인 성령의 인도함이 없으며 거짓 영광 거짓 상에서 벗어날 수없다.(16:13)

또한 성도들도 보이는 현상이나 자기 속에 담겨진 허상(우상)에 속지 않도록 전혀 기도에 힘써야 한다(세상과 육의 십자가. 행1:14, 갈6:14)

 

 

2.하늘과 땅은 서로 원수(반대) (롬8:7)

하늘의 생명이 땅으로 내려오면 죽음와 멸시를 당한다.

그래서 주님도 세상에서 죽음과 멸시를 당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도 세상 사람에게는 멸시의 대상 밖에 안되었다.

그러므로 말씀의 사역자는 세상 사람들이 기뻐할 말에 이끌리면 안된다.

하늘의 말씀을 받은 대로 전하여 진리의 영인 성령께서 듣는 자들 속에서 역사하시도록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성도들도 세상에서의 자기 체험이나 자기주장을 버리고 전혀 기도에 힘씀으로써 겉사람을 벗어나 언제든지 말씀과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절대로 세상과 ‘나’를 벗어날 수 없다.

기도없이 성경을 많이 알고 종교적 체험이 많아지면 교만하여 육만 커져서 마귀의 통로만 될 뿐이다.

오늘날 교회가 수난을 당하는 것은 기도없이 교회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처럼 많이 알지만 마귀의 도구밖에는 되지 않는다.

 

기도는 땅의 것을 죽이는 행위이다.

눈을 감아서 눈이로 들어오는 안목의 정육을 죽이고 몸의 운동을 멈춤으로써 땅의 것으로 형체를 만들지 않게 한다.

주님의 임재 앞에 자신의 마음을 열어놓음으로써 세상 생각이 사라지게 하고, 주님과 동행함으로 세상의 행동에서 벗어나게 하며, 입으로 죄를 고백하고 믿음을 고백함으로써 삼층천 은혜의 보좌 앞으로 인도함을 받게하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땅의 경계를 넘어 삼층천에 오르게 된다.

우리 주님은 육신의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기도로써 먼저 죽으셨던 것이다.

말씀을 따라 기도의 고개를 넘지 못하면 절대로 십자가를 질수없다.

오늘날 교회가 대부분 종교 오락장이나 사교장으로 전락한 이유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한 말씀과 기도가 없기 때문이다(기도의 십자가. 눅21:34-36).

 

3.식물은 몸(형체)를 크게 함으로 생명을 이어감

나무들은 더 크고 더 높이 자라려고 한다.

계속 크지 않으면 다른 식물에 가려 살수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없이 클 수 없고 결국에는 넘어질 수밖에 없다.

땅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 것을 크게 하는데 전념한다.

자식, 사업도, 재산도, 교회 건물도 크게 하려고 싸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쓰러질때가 싸운다.

세상에서는 어떤 사업이나 나라도 망하지 않는 것은 없다.(요일2:17)

목회자는 성도들이 세상에서 커지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 말씀과 기도로 자기를 보인하고 삼층천의 충만을 구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자기 것을 위해서 투자하던 시간과 돈 그리고 노력을 주님의 사업에 투자하도록 인도하여 하늘나라에 재물을 쌓도록 해야 한다.(마6:19)

땅의 것은 하늘나라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먼저 하늘나라를 채우면 그림자인 땅의 것은 모두 저절로 채워지도록 되어 있다.(재물의 십자가. 마6:24)

 

4. 동물은 움직임으로 생명을 이어감

동물의 특징은 움직이는 것이다.

움직임을 통해서 먹을 것을 얻고 배설하고 새끼를 낳는다.

먹고 싸고 새끼 낳는 것이 동물이 움직이는 이유이다.

그리고 동물은 더 빨리 더 강하게 움직이려고 한다. 그래야 먹이를 얻고 살아남을 수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동물이 빠르고 강하게 움직여도 하나님이 정해 주신 범위 즉 본능의 범위를 벗어날 수는 없다.

아무리 강한 쥐라도 고양이한테 잡혀 죽게 되고 아무리 강한 맹수도 사람한테는 잡히도록 되어 있다.

사람도 동물번지에 사는 사람은 움직이는 것으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

움직이더라도 더 빨리 더 강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사람도 사회에서도 경제나 군대, 스포츠계에서는 이러한 법칙이 적용되고 있다.

그래서 1초라도 더 빨리, 더 강하게 움직이는 것이 그들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그들과 같은 종류의 직업이나 사업장에서는 앞설는지 모르나 전혀 다른 종류의 상대들을 이기기에는 무익하다.

오늘날 과학이 능력을 높이기 위하여 더 빠르고 더 강한 기계나 도구를 만든다고 하지만 그것에도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더 빨리, 더 강하게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해 서로 싸우기 동물세계를 떠나서 말씀과 시고로 땅의 욕망과 승부근성을 버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삼층천을 향하여 성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거룩’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1-2)

 

삼손은 나실인이었지만 이방여인 드릴라를 따르다가 짐승처럼 죽었다.

우리 성도는 세상적인 표준을 목표을 삼지 말아야 하고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육신의 모양은 다 버려야 할 것이다.

하늘나라는 임재의 나라이므로 운동을 초월하고 빠른 것을 초월한다.

하늘나라는 영원한 충만감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순간적인 승리감이나 쾌감과는 비교가 안되는 것이다.

 

 

5.사람의 문제는 소속감

사람의 특징은 소속감이다.

아담이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고 했을때 인간의 특징을 분명히 보여준 것이며 하나님의 아담을 가르켜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하셨을 때 또한 사람의 특징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사람은 하나님이 형상 즉. 사랑의 형상이기 때문에 혼자서는 사랑을 이룰 수 없다.

사랑이 사람의 본성이기 때문에 사람은 사랑을 이룰 수 있는 상대 즉 돕는 배필이 꼭 필요하다.

사람은 이웃을 자기 ‘안’에 받아들임으로써 자기의식(독처)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것이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이다.

짐승은 ‘안’이 없지만 사람은 ‘안’에서 만난다.

이 ‘안’을 통해서 만자기(밖)를 벗어 날 수 있다.

마귀는 사람에게 선악과를 먹게 하여 몸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감각를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게 함으로써 선택의 부담을 준다.

 

이것은 자유가 아니라 사실은 마귀(죄)에게 종노릇하는 것이다.

마귀는 좋게 보이는 것은 선택하도록 하고 나쁘게 보이는 것은 버리도록 강요함으로써 사람을 자기 부담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마귀는 사람에게 감각을 통하여 헛것을 보게 하고 자기‘안’에서 이웃을 만나는 것보다 이웃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행동을 하도록 모라 넣는다.

이점이 바로 인간의 영인 소속감과 마귀의 영으로 오는 자기 부담과 다른 점이다

사람에게 자기와 이웃을 비교하여 의식할 수 있는 양심이 있다.

이 양심은 자신과 이웃을 비교하여 이웃에 대한 관계를 개선하도록 하는 인간의 독특한 의식작용이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고 영적인 생활을 하는데 양심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식 속에 이웃에 대하여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는 의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벧전3:21)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딤전1:19)

 

마귀는 주는 자기 부담감(독처)인 사람의 소속감(사랑)을 통해서만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참 사람-참된 소속감을 가진 사람)이 마귀의 후손을 이기게 될 것을 하나님은 예고하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

 

사람의 소속이 좋은 것만은 아니라 시림은 소속감이라는 성질 때문에 악을 행하면서도 그 무리엣거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

교회에서도 각 기관들의 소속감으로 인한 문제가 많다.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노인들은 노인들끼리 움직인다.

각 기관들은 횡적인 소속감으로만 움직이기 때문에 목회자의 지도력이 제대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회의를 통해서 다수결로 움직이므로 인도자들의 도리어 끌려 다닌다.

 

오늘날 목사는 설교나 하고 의식만 주관하는 상징적인 존재로 교회의 거의 모든 운동력은 소속감으로 묶여진 당회, 직원희 남녀전도회, 청년회 학생희 등의 행사들로 분산되어 목사를 통해서 전달되는 말씀의 역사 미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결국 교회는 ‘마디’에서 벗어나 서로가 끌고 끌려 다니는 현상이 일어난다.

오늘날 교회가 영적인 열매가 없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인간의 영 즉, 소속감으로 끌려 다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도는 각자 인도자가 주시는 말씀에 복종하고 전혀 기도에 힘씀으로 써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교회ㅏ마다 붙어야 한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2:42)

 

성경에서도 주님과 동향한 자들은 인간적인 소속감을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가정단위로 자녀는 부모에게 복정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교회와 가정이 상하관계의 ‘마디’로 이어갔던 것을 알수 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엡4:16)

 

우리는 창조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참된 소속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가정과 교회를 통해 한 몸을 이루어 생명관계로서 참된 소속감을 가지게 된다.

 

6. 마귀는 자기를 높임(교만)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영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 즉, 사랑의 형상으로 만드셔서 사람이 ‘안’에서 이웃과 만남으로 자기를 벗어나 서 로 ‘하나’가 되도록  하셨다.

그러나 마귀는 사람에게 육신의 오감을 통해서 들오는 경험들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하여 (선악과)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바리도록 유혹함으로써 인간 스스로가 자기에게 좋은 것을 선택하면 좋아질 것같은 착각을 주었다.

그래서 사람의 생명은 이웃과 사랑을 한 몸을 이루지 못하고 자기 선택과 자기 노력으로 하나님과 이웃과는 관계없는 사람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나’이다.

 

‘나’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에게 거짓 신인 마귀가 주는 영적인 허상이다.

사람과 똑같이 흙으로 만들어진 짐들과 오감으로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형상 즉 신의 접촉점으로 없기 때문에 100%본능으로 살아 간다.

그러나 사람은 몸의 본능으로 감각되는 경험을 인간 자신이 선악으로 갈라냄으로써 동물과는 전혀 다른 ‘나’라는 독특한 영적인 현상을 만들어낸다.

‘나’란 몸의 감각으로 들어온 경험이 선악과로 말미암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갈라지는 영적 분열상태 이다.

좋은 것은 더 추구하도록 몸에 부담을 주고 나쁜 것은 피하도로고 긴장을 주는 마음의 분열 상태이다(약1:8)

‘나’란 두 개의 반대되는 의식이 대치된 상태이기 때문에 사람은 긴장과 부담을 가지고 무엇을 향하여 달려가지 않을 수 없고, 동시에 무엇을 피하여 도망쳐야 하는 불안의 연속인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48:22)

 

땅의 모든 것은 하늘의 그림자(현상)인데 그림자를 가지고 선악과으로 갈라서 그것으로 분열된 의식을 갖게 되었으니 사람의 마음은 짐승의 감각보다도 더 타락한 것이다.

마귀는 사람을 거짓으로 유혹하여 죽을 때까지 거짓으로 끌고 다니다가 육신이 흙으로 돌아간 후에도 이루지 못한 ‘나’의 욕망으로 잡히게 하고 영원히 ‘암흑(무)’ 가운데서 고민하도록 만든다.

 

지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니 운동력이 없고 ‘나’가 묶이고 형체도 없이 울부짖게 되는 것이다.

지옥은 운동력도 형체도 없이 흑암 속에서 ‘나’만 남아서 신음하는 고통의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선악을 구별하는 의식은 그대로 남아서 무 형체에 대한 고통 즉, 지옥 불을 피하려고 부르짖는다.

 

사실 지옥은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준비된 곳이지만 어리석은 사람이 마귀의 미혹을 받아 ‘나’에 이끌려 마귀를 따라 영원히 흑암에 갇히게 된다.

‘나’란 마귀가 준 선악과 뭉치이며 세상에서 ‘무’로 끌려가는 지옥의 길이다.

주님은 천국의 길이라면 ‘나’란 지옥의 길이다. 그래서 주님은 계속 ‘나’를 부인하도록 말씀하신다(마16:24)

세상의 특징은 ‘나’만의 세계이다. 그래서 서로 싸우고 죽이지만 얻는 것은 없게 된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약4:1-3)

 

우리가 세상과 나를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참사랑이시며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시는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만 나를 벗어날 수 있다. ‘안’에서 만나는 사랑만이 나를 벗어나게 한다.

 

세상 사람들도 ‘나’라는 긴장과 부담, 고독에서 벗어나려고 ‘사랑’을 외치고 부르짖는다.

그러나 예수 외의  사람의 사랑은 그 속에 다른 ‘나’즉, 다른 지옥이 있기 때문에 잠시 지나면 더 큰 고통과 상처로 자기 속을 채우게 된다.

그래서 세상에서 부르는 모든 사랑의 주제는 비극으로 끝난다.

그렇다고 사랑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여기에 바로 사람의 고민이 있다.

알면서도 미련을 가지고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육이요 세상이요 죄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아래 주셨다.

위에서 오신 사람-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에게 오신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해방자요, 친구요, 참 돕는 배필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혼자 아무리 애써도 희망은 전혀 없는 것이다 .

하나님은 예정하심 안에서 나 위에 권세자를 세우셨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내가 주님께서 세우신 권세자(인도자, 부모, 남편) 즉, 머리에게 복종할 때 내 속에서 역사하는 선악과의 의식이 사라져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자기 경험이나 자기 생각을 판단(선악과)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권세자엑 복종함으로써 내 속에서 역사하는 마귀의 줄을 끓어야 한다.

그래서 주님과 ‘나’를 연결하는 말씀마디에 붙음으로써 주님의 생명과 연결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개인적을 주님을 믿으면서도 권세자에게 순종하지 않는다.

가정과 교회가 계속 깨어 져나가는 이유는 개인적으로는 잘 믿지만 말씀으로 주님과 연결된 생명마디에서 떨어져 나감으로 교회와 가정을 세울 수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신자들이 예배당에서 부지런히 종교행사를 계속 하지만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변확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신 몸 즉, 가정과 교회를 세우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몸 즉, 가정과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

우리의 몸은 세포들이 모여서 살아간다 .몸을 통한 생명만이 모든 필요한 것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개인이 잘하는 것보다 몸을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 몸은 주님이 지정하여 세우신 권세자 밑에서 이루어지도록 섭리되어 있다.

그리고 권세자는 위로 주님의 은혜를 받아서 자기 수하 사람들에게 대속의 사랑을 섬겨야 한다.

그래서야만 참된 사랑의 마디가 연결되는 것이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엡5:22-6:9)

 

교화와 가정에 문제가 있는 것은 권세자들이 마귀의 유혹을 받아 ‘나’만 높이려 하고 아랫 사람들을 섬기려 하지 않을 때와 아랫 사람들이 나만 내세워 권세자들에게 대적하고 반역할 때이다.

그 누구도 자기 노력으로 사랑(구원)을 이룰 수 없다.

우리는 서로 대속과 자기 부인을 통하여 구원(사랑)을 이루는 배필(상대)들이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1-32)

 

 

7.천사단계

천사들은 하늘나라의 일을 하는 사역구조의 원형이다.

하늘나라의 일꾼으로써 우리 성도는 천사들이 일하는 위치와 질서를 보면서일하는 교회의 원형을 보아야 한다.

 

(1)천사는 자기 위치를 지킨다(시103:22)

마귀와 천사의 다른 점은 바로 ‘위치’에 있다.

마귀는 자기 위치를 떠난 천사요, 천사는 자기 위치를 지키는 일꾼이다.(유1:6)

우리의 몸도 각 지체의 위치대로 일을 한다.

하나님은 위치대로 교회에 지체들을 두셨다(고전12:18). 오늘날 교회와 가정이 혼란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성도들이 자기 위치를 지키지 않는데 있다. 가장 중심으로 자기 위치를 이용하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위치를 주신 것같이 주님은 각 성도들에게 하늘나라에게 일하는 위치를 주셨다. 성령의 역사하심과 성도가 받은 복(유익)은 바로 하늘나라의 위치에서 비롯된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2:4-7)

 

교회는 오락장도 아니요 인기를 얻는 자기 전시장도 아니다.

각 성도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하늘나라의 위치에서 주님의 일을 하는 곳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위치가 땅으로 이동된 곳이 교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각 성도는 하늘나라의 자기 위치를 지켜 맡은 사역을 곧게 잡아야 한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계3:11)

 

(2) 천사는 질서대로 일한다.

천사들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위치대로 질서를 지킨다.

성경에 나오는 보좌, 주관, 정사, 권세 등은 전부 천사의 서열을 말한다.(골1:16)

하나님의 보좌에서 하나님을 보시고 찬양하는 천사가 스랍 천사(사6:2).

하나님의 보좌를 지키는 천사가 그룹 천사(창3:24, 삼상4:4).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천사장 가브리엘이 있고(단8:16, 눅1:19,26)

이스라엘의 수호천사인 미가엘도 있다.(단10:13,21,12:1)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사들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서열대로, 위치대로 일을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가 높으냐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그들은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보다 자기가 높아지는 jrt에 더 관심이 있었다. (마20:20-24)

오늘날 교회에서 이런 일은 흔히 일어난다.

그래서 서로 싸우고 갈라지게 된다.

우리 성도는 각자 주님께서 주신 s사명을 감당하는데 전적을 힘쓸 것이며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은 주님께서 판단하실 것이다.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마20:23)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고전3:8)

 

(3)천사는 자기 것이 없다.

천사는 ‘나’가없으므로 자기 것이 없다.

그러나 마귀는 자기 것밖에 모르고 사람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끼리(당) 소속감을 갖는다.

사실 이 세상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는 ‘내 것’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우리가 자기 것을 위해서 일할 때 하나님 일을 할 수 없고 도리어 경건을 이용하여 자기 유익만 구하게 된다.

종교사업과 하나님의 일을 외양으로는 비슥하게 보이나 사실은 완전히 다르다.

자기 유익을 위하여 종교사업을 하면 반드시 이웃을 해치고 문제를 만들어낸다.(살후3:11)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먼저 자기 것을 버려야 한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자기 것을 버리는 생애였다. 자기의 것을 다 버리지 않고는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눅14:33)

 

성도에게 있어서 이 버리는 과정이 성화의 과정이요, 이 세상과 나를 벗어나는 과정이다.

우리는 땅의 것, 자기 것을 버림으로써 하늘나라의 충만과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세상 것과 자기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부적합한가를 알수있는 것을 보면 알수있다.

어느 누구도 자기 권세나 자가 물질로 가장 사랑하는 아들 하나도 유익하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로 모든 것을 바리도록 연단하신다.

하나님은 능력은 얻는 능력이 아니라 버릴수있는 능력 즉, 죽은 능력이다.

자기 것을 버린 자만 하나님은 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 할수있기 때문이다.

 

(4) 천사는 하늘의 것을 땅에 전달한다.

모든 좋은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다.

하늘의 것을 땅에 전달하는 일을 하는 것이 천사이다.

그러나 마귀는 하늘의 것이 없으므로 땅의 것 즉, 무와 공허 속에 자기의 거짓 허상을 첨가하여 무엇을 주는 것처럼 사람에게 착각(미혹)을 준다.

그러므로 세상 신 마귀를 따라 내가 가진 지혜(마귀의 선악과)로 무엇을 얻으려고 하면 결국은 공하와 허무 밖에는 아무것도 거두지 못한다.

세상적인 지혜와 도움은 사실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도 빼앗기게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요10:10)

그러므로 주님의 일을 할때 내 방법이나 내 노력이 아니라 주님의 것을 받아서 전달해야 한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벧전4:10-11)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군이 위로부터 받은 것 없이 인위적인 프로그램으로 교인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종교 사업이며 세상의 일밖에는 되지 않는다.

세상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 없이 사람들이 자기 지혜와 노력으로 무엇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더욱 큰 문제(쓰레기)만 생긴다.

교회도, 가정도, 직장도 오래 되면 될수록 더욱 유지하기가 힘들어지는 이유는 땅의 것을 가지고 움직이다 보니 쓰레기가 계속 쌓여가디 때문이다.(갈6:8)

그러므로 우리는 쓰레기가 아난 것 즉, 새것을 하늘로부터 받아야 한다.

성도는 반드시 하늘의 것을 전달해야하며 쓰레기 속에 파묻히기 쉬운 교회, 가정, 세상을 새것으로 채워야 하는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후4:16)  

 

(5)천사는 은사대로 일한다.

천사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창조된 피조물이다(히1:7)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주어진 대로 일한다. 말씀의 사역을 하는 샂브리엘, 능력 천사 미가엘 등 모든 천사들은 각자 맡은 분야대로 일하기에 적합하도록 창조되었다.

우리 성도들도 땅엣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하여 피조된 피조물이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10)

 

우리는 주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새롭게 창조된 일꾼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 취미나 처지대로 일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하고 싶으며 하고 그만 두고 싶어면 그만 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일자리에서 일하도록 구원을 얻는 것이다. (요6:39)

하나님은 하늘의 천사들의 모형을 따라서 땅의 성도들에서 은사를 주셨다.

하늘의 일자리는 성령이 역사하시고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서 피곤한 심령들이 와서 쉬고 가는 쉼터뿐 아니라 누구든지 받은 은사대로 일해야 하는 일터인 것이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고전 12:11)

 

성도의 일자리는 타어나기 전부터 준비되었다.(엡2:10)

우리 성도가 세상에 태어나면서 선천적으로 주어진 성품, 체험, 성, 환경은 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적합하도록 주님 안에서 예정 된 것이다.

 

소질이나 성품은 성령의 은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

그러나 소질이나 성격 자체가 성령의 은사는 아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도 선천적인 소질이나 성품을 무시하고 성공할 수 없는 것같이 주님의 일을 하는데도 각자의 은사를 무시하고 성공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선천적으로 주신 소질이나 성격에 관계없이 인간적인 노력으로 능력이나 지혜를 구하는 것도 성경적이 아니다,.

 

은사는 육신의 소질과 성격에 따라 지적, 정적, 의지적인 은사가 있다.

그래서 각 개인의 은사는 그 사람의 소질, 체형, 성에 따라서 다르게 주어진다(고전12:4-11)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자신의 성품, 체질를 바로 알고 그에 해당하는 은사를 받아서 그 은사대로 주님으 일을 해야 한다.

같은 반사를 하더라도 지적인 은사자(지혜, 말씀)는 가르침으로 , 정적 은사자(구제, 위로)는 축복하고 위로 함으로, 의지적인 은사자는(믿음, 능력, 병고침)는 기도와 믿음으로 학생들을 인도해야 한다.

이 주어진 은사를 따라 주님으 일에 전심전력하다 보면 주님의 온전하심같이 우리엑도 온전함이 나타나 모든 은사가 다 힘하게 된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기본덕인 소질과 은사 즉, 주 은사를 가지고 일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발전이 있다.(딤전4:14-15)

 

오늘날 교회에서 보면 어떤 은사자가 나타나면 모두가 그 사람을 따라 모방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사람은 태어나기 전부터 서로 다르게 각각 다른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 교회에서 담음 목사의 은사를 따라 교인 전부가 똑같이 따라간ㄴ 것도 성경적이 아니다.

목사는 자기 교인들이 각자에 맞는 성령의 은살ㄹ 받아 일하도록 지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는 회의를 한다던가 다수결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각자 받은 은사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일해야 한다.

 

(6)천사의 3대 사역

천사들의 첫째 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이다.

이사야6장과 계시록 5장에는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의 보좌 앞에서 찬양 드리는 천사들의 장면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창제 전부터 우리를 택하시고 어린양의 피로써 대속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계 하려는 것이다.

처사와 마찬가지로 땅의 성도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사명이 하나님게 예배드리는 일이다.

성도는 무엇보다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려야 하며 특별히 방언의 은사를 통하여 하나님께 더 깊은 예배를 드릴수있다.

성도로 하여금 사람의 말이 아닌 천사의 말로 찬양을 드리고 죄와 믿음을 고백하며 말슴을 받고 대속의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말하게 하시는 것이 방언이다.

천사들의 두 번째 사역은 성도를 돕는 일이다.

성경보면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의 성도들을 도와준다는것을 알 수있다. (단6:22, 행12:7-10, 27:23)

우리 성도들이 받은 은혜(은사)를 w\가지고 이웃 성도들을 섬기는 것이 목회이다.

 

천사들의 세 번째 사역은 악한 영들을 물리치는 일이다.

땅의 성도들도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사탄에게 빠져 혹암과 허무에서 심음하는 사람들을 건져낼 수 있는 권세가 있다.(눅4L:18=19)

이상의 천사의 3대 사역이 주님을 통해서 교회에게 주어진 성도들의 3대 사역인 것이다.

 

 

8. 삼층천 교회

교회의 참 주소는 셋째 하늘(삼층천)이다.

이곳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보좌 우편에 앉으신 아들 하나님을 통하여 대속의 역사를 수행하신다.(롬8:34)

삼층천 사역의 본질은 사랑이며 대속이다.

하나님은 사랑과 대속의 역사로 교회를 통하여 서로 반대가 되는 하늘과 땅을 연결시킨다.(엡1:10, 2:16)

교회는 서로 반대가 되는 하늘과 땅을 연결시킴으로써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땅의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된다.

교회를 통하여 땅에 사는 성도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삼층천에 되고, 교회를 통하여 하늘에 계신 주님이 세상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함게 역사하신다.

 

교회는 만세 전부터 한님 속에 깊이 감취웠던 비밀이 마지막 세대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유사 이래로 나타났던 모든 실패를 다 고칠 수 있는 최종적인 해결의 능력이 있다.

아담이 실패하고, 열방들이 실패하고, 이스라엘이 실패하고, 세상이 실패한 모든 것을 교회를 통하여 성취하신다. (엡5:26-27)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의 완성이며 사랑으로 세상을 대속하고 땅위에 한님의 나라가 임하는 현장이다.

또한 땅에 있는 성도가 하나님의 충만한 것으로 채우는 형장이시도 하다.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3:15-19)

 

서로 반대가 되는 하늘과 땅을 십자가로 연결시킨 교회는 죽고 사는 역사가 계속됨으로써 통로가 유지된다.

그래서 생명밖에 없는 하늘에서도 죽음을 당하신 어린양의 피가 있으며 땅의 성도는 새 생명을 얻기 위하여 계속 하여 죽음에 넘겨져야 한다.(고후4:11-12)

이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유일한 ‘야곱의 사닥다리’이며 땅에서 하늘으 ㄹ오르는 유일한 길 인 것이다.

십자가 없이는 구원도 말씀도 기도의 능력도 없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생명이 하늘과 땅에서 역사하는 곳이 교회이다.

십자가만이 복음의 주제요 자랑해야 할 유일의 보배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십자가가 한낱 장식품으로 전락하는 현실이 아탑깝다.

 

 

9. 영적목회의 원리- 항상 암기할것!!!!

(1)(무:창1:2)

하나님만이 스스로 계신 (존재하는) 분이시고 충만하시다.

그러나 사랑으로 충만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충만을 채우시기 위해 빈 곳이 필요하셨다.

그곳이 바로 땅인 것이다. 그래서 땅의 본질이 무이다.

이것이 바로 땅이 공허, 흑암, 깊음, 혼돈한 이유이다.

 

(2)(상-나타남: 히11:3)무(땅)라는 스크린 위에 하늘의 것이 말씀으로 나타난 것이 현상이요, 보이는 것이고 나타난 그림자다,

땅에 있는 모든 것은 말씀으로 하늘에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땅의 모든 것은 스크린 위에 나타난 영상처럼 말씀으로 나타난 하늘의 상예불과하다.

보이기는 하지만 변하고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보이는 것에 속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러 넣으셨다.

사람의 몸은 흙인데 기()가 들어가 움직이며 다섯 가지 감각으로 물질 환경을 감각한다. 이것이 각()이다

 

영적 목회의 원리

 

                                      자기부인(십자가)

(구원)성화

 

땅   무-> 상-> 각-> 감->신-> 애  하늘

                                                                                             사명 대속(십자가)                                                

 

 

(3)(각-생령: 요일2:15-16)

짐승들도 사람과 같이 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몸의 형체를 유지하기 위한 본능적인 생리작용이다.

각은 전적으로 땅에 속한 것이며 하늘과는 별개의 것이다. 마귀는 이 각으로 사람을 땅에 속하도록 유혹한다.(요3:6)

 

(4)(감:창1:26)

짐승은 생령으로 끝나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그림자(형상)이다.

사람만이 땅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그림자가 비쳐 들어오는 통로이다.

하나님은 사랑(생명나무)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사람에게는 그의  ‘안’에 들어오지만 밖의 것만 보는 자에겐 마귀가 먼저 침입해 온다. 이것이 선악과이다.

 

마귀는 선악과로 사람의 오감을 미혹시켜 각()을 통하여 들어오는 경험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하여 대치되는 감()을 만든다.

그래서 긴장하고 눌리고 끌리고 갈라지는 이상형상이 생겨나는데 이것이 ‘나’

인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을 사람들은 ‘자유’라고 하지만 자유가 아니라 죄의 종이요 사망의 법이다(롬8:3)

사람들은 (마귀-산악과-나-죄)의 종이 되어 세상에서는 쓰레기 인생이요 죽어서는 영원한 지옥까지 끌려간다.

 

(5)(신-믿음: 엡2:8)

(나-죄)의 종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믿음이다.

믿음은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찾아오는 길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사람의 노력이 아니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구원)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다(요1:12)

사람은 자기 ‘안’에 사랑하는 사람을 받아 들일 때 ‘나’의 부담에서 벗어난다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선악과에서 오는 감의 세계를 벗어나 생명의 세계, 신령한 영의 세게로 인도함을 받게 된다.(롬5:5, 벧후4:4)

 

(6)(애-사랑: 요일4:8)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죽음(십자가)을 통하여 하늘의 경계를 sjsadj 우리에게 찬자오신 분이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이 사랑이 구원의 시작이요 끝이다.

성도가 사랑에 이글려 ‘나’를 벗어나서 땅의 경계를 넘어 하늘로 들림 받는 것이 성화요, 거룩이다.

그리고 하늘의 위치에서 대속의 사명을 가지고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는 것이 영적 목회이다.

 

사랑은 믿음의 조건이 되고(갈5:6) 마음의 눌림을 없애주며(요일4:18) 모든 것을 참고 견디게 하고 (고전13:7) 물질로 이웃을 섬기도록 만든다(빌2:17)

 

 

제5장 땅의 경계를 넘어서(천국과 지옥)

 

하나님은 땅의 것을 만드실 때 공허(무)라는 스크린 위에 말씀으로 하늘의 것이 비쳐오도록 하셨다.

지금도 주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붙잡고 계신다.(히1:3)

하나님은 모든 곳에 충만하지만 땅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말씀 - 운동- 형체 - 각 () - 감())의 형식을 있게 하셨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하셨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충만한 임재하심을 피조물인 우리들에게 나누어주시기 위한 것이다.

 

무(무)는 말씀으로 운동력으로 시간과 공간 안에서 형체를 이룬다.

형상(현상)은 오감을 통해 우리 몸에 통해 전달되어 각이 되고, 이것은 다시 감 즉, 의식의 시발점이 된다.

이 감을 통하여 사탄의 영이 들어와 사람의 의식은 자기감 속에 묶이게 되고 ‘나’속에 갇히게 된다.

‘나’는 환경에서 무엇을 잘 선택하면 자기를 개선시키는 것 같은 착각을 하지만 사실 물질적인 환경에 갇히는 것이다.

이것을 사람들은 ‘선택의 자유’라고 하지만 자유가 아니라 땅에 경계를 넘지 못하게 하는 사망의 법에 매이는 것뿐이다

 

그래서 각의 주체가 되는 몸이 늙어서 없어질때 까지 상()을 붙들려고 발버둥치게 만들고 결국‘나’라는 허상 속에 잡혀서 영원한 무(무)속으로 끌려가는데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

그러므로 지옥은 하나님이 숨겨지신 곳이다.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은 없으므로 지옥에도 하나님이 계시지만 ‘나’라는 허상 속에 하나님이 숨겨지는 것이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시139:7-12)

 

지옥은 흑암과 허무 속에서도 계속 선악을 구별하며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 ‘나’라눈 갈등 속에 영원히 갇힌 상태이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비유에서 지옥에 간 부자는 살아서 먹고 마시며 상을 대상으로 각()만 개발시켜 자기 감()속에 잡히고, 결국 죽어서 음부에 가서도 아무것도 없는 흑암 가운데서 불꽃과 고통 즉, 하무의 상을 감각하는 것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는 멀리 나사로가 아브라함과 함께 잘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갈망해야만 했다.

결국 음부 속에서 그는 선악의 갈등 사이에서 고통 당해야 했다.

그래서 지옥은(허무- 선악- 나- 고통)인데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필요적인 종말인 것이다.

 

우리는 ‘나’란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 아들의 영 즉, 자유의 영을 주신 것이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롬8:15-16)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생명)이 우리 안에 부은바 되어 ‘나’라는 선악과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선택과 판단의 주체(머리)는 ‘나’가 아니라 주님인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8:12-14)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나는 각()의 범위를 넘고 상()의 범위를 넘어 주님 ‘안’에서 하늘나라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 즉, 선악가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의 생은 나의 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 움직여야 하는 환경의 지배를 벗어나 하나님의 생명 즉,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초대받게 되는데 이것이 하늘나라이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우리의 노력이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인도하심 즉, 천사들에게 받들려 인도되는 것이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눅16:22)

 

하나님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섬길 수 있도록 하늘의 천사들을 보내셨다.

천사들은 땅에서 모든 상과 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요5:4, 눅1:20)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세상에서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시공을 초월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천사들을 통하여 공급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몸을 벗는 순간 충만한 생명의 나라로 인도되어 거기서도 영적인 상과 각과 감을 누리게 된다. 이것이 천국이다.  부활의 몸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으로 흘러가는 나라이다.

우리는 이 생명의 나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누리기면 하면 된다.

하나님은 무한한 생명이기 때문에 영원히 형체가 없고 볼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나마 그의 무한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하늘나라에 가면 우리의 몸도 있고 집도 있고 강도 있고 나무도 있다.

하늘나라도 땅에서와 같이 영적인 형체와 운동력과 거기에 해당하는 영적인 각(, 몸)과 감()이 잇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땅에서와 같이 내 몸이 움직여서 사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하나님미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셔서 나타나는 나라이다.

 

하늘나라는 ‘나’의 움직임에 구애받지 않으므로 걱정, 근심도 싸움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우편에게신 아들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생명을 입혀주심을써 영원히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계22:3-5)

 

 

제6장 새하늘과 새땅- 삼층천의 은혜(예수공학의 완성)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아들로 말미암아 계획했던 모든 것이 이루어진는 것이다.

우선 새 하늘과 새 땅에는 공허와 혼돈의 원인이 되는 바다가 없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영원한 빛이 되시므로 공허의 상징인 저주와 그림자가 없다. 그리고 태초에 하나님이 아들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장막이 성도와 함께 있게 된다(계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1:3-4)

 

하나님의 생명의 빛이 영원히 비치므로 우리가 영원히 한님의 영광 안에서 왕노륵하게 된다.

그리고 그 영광은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영광이다

사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다 하나님의 것이지 우리의 것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부터 예비해 주신 것이다.(고전2:7)

 

사랑은 사랑하는 상대를 위하여 모든 것을 주는 것이다(엡1:3)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우리 것으로 누리도록 준비하신다.

땅에서는 내 것이 없다.

거짓의 영 마귀가 마치 내것이 있는 것처럼 차각을 주고 있지만 이 땅에서의 삶은 단지 지나가는 나그네 인생일 뿐이다.

한님은 땅의 공허를 영원히 하나님과 함게 ‘있는 것‘으로 채우신다.

그곳에는 저주와 그림자가 없이 영원한 충만으로 채워지게 된다.

그 충만은 하나님의 임재이다. 하나님의 충만은 우리를 위한 생명 즉, 운동력으로 공급된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운동이 있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하나님처럼 모두 다 누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영의 운동으로 형체가 나타도록 하여 부분적으로 누리게 하셨다.

마치 아기가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받았다 해도 당상은 자기 몸으로 움직여서 체험되는 것만 누리게 되는 것과 같다.

 

하늘나라에 가서는 우리의 몸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움직임으로써 하나님의 무한하신 임재하심을 누리게 될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전혀 부담이 없고 피곤함이나 아픈 것이 없게 될것이 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이며 내 것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벧전1:3-4)

 

최종적으로 우리가 바랄 수있는 은혜는 새하늘과 새땅의 은혜이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벧후3:13)

 

그런데 무한하신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우리가 세상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따라 움직인 정도만큼 극소에서 운동력과 형체로 주어져서 누리게 되는 데 그것은 바로 땅에서 행한 대로 상을 받게 되는 원리이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계22:12)

 

그곳에서는 우리가 신령한 몸을 입게 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제한 없이 누리게 될 것이다.

땅의 몸은 공허의 그림자가 깃들여 있어서 먹어도 만족이 없고 움직여도 항상 더 끌리고 밀리는 선악과의 쓰레기를 몸에 지니고 살아야 하지만 그것에서는 온전한 안식과 평강이 있게 될 것이다.(히4:9, 계22:17)

세상의 왕은 아무리 양식과 옷이 많아도 몸이 피곤하여 다 누릴 수가 없지만, 그것에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으니 환경과 본능의 제약에서 벗어나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다 이루며 영원히 왕노릇하게 될 것이다(요15:7)

사람은 사랑의 상대가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셨다.

그러나 땅에 사는 사람에게는 소속감이 제대로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늘 소위에 대한 불안이 있으며 혼자서 여거 사람의 사랑을 독점하려고 애를 쓴다.

사실 인간사의 대부분이 이 소속감의 결핍에서 오는 불안과 배신감과 눌림의 역사이다.

그러나 새 땅에서는 우리 각자의 영원한 우리의 구주시오 친구이신 주님께 속하여 주님의 것으로 영원히 만족하게 된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계22:4)

 

그곳에 가면 누가 내 편이냐 하는 시기와 다툼이 영원히 끝나게 된다.

땅에서 사람은 마귀로부터 거짓 높임과 자기 소유에 대한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그곳에는 영원한 나의 집이 있고 나의 영광이 있기에 내 것을 위한 싸움과 갈등이 없어질 것이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벧1:7)

 

땅에서는 모두가 거지, 사기꾼 강도뿐이니 빼앗기고 뺏는 강포와 핍박이 넘치나 그곳에서는 영원히 주를 섬기며 서로 나누는 기쁨만 계속 될 것이다.(요17:24)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근본 것인 기쁨과 능력을 가져다주는 것은 일자리이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무리들은 병도 고치고 얻어먹기도 하고 배우기도 했지만 정말 가장 좋은 것으로 복 받은 사람들은 바로 주님이 주시는 일자리, 즉 사명을 받은 제자들이었다.

피조물 중에 가장 존귀한 피조물인 천사들도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자리를 가지고 있다.(시103:22)

우리와 함께 하늘에 오르신 주님은 우리에게 하늘의 일자리 즉, 성령의 직임을 주셨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2:4-7)

 

그러므로 그 어떤 것보다 귀한 은혜는 은사의 은혜 즉, 하늘의 일자리를 얻는 것이다.

땅에서의 일은 우리의 구해서 해야 하지만 하늘의 일은 주님이 주시고 성령님이 역사하신다.

그 일자리를 따라서 성령이 역사하시고 우리가 하늘의 영광과 존귀를 입게 하신다(고전12:24).

역사는 서영님이 하시고 유익은 우리가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일자리는 새 하늘과 새땅에서 우리가 영원히 누릴 영광의 기업을 미리 가져다가 땅에서 누리는 엽습을 하는 것이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고후5:1-5)

 

땅의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일생동안 준비해야 하고 또 얻었다 해도 그 자리를 유지하기가 힘들어 결국 밀려서 쫓겨나게 되지만 성령의 은사는 영원한 것이다.

우리 성도가 땅에서 교회를 세우고 서로 봉사하도록 주신 은사는 영원한 기업인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의 기업을 가져다가 땅에서 누리도록 하신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보증이다

지금 땅에서는 성령의 은사를 통해 하늘의 일을 함으로써 모든 것을 공급받고, 새 하늘과 새 땅에 가서는 영광의 풍성함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성도의 사역을 천사들도 부러워하는 것이다.

 

땅의 모든 것은 공허의 그림자에 채워져있다.

그러므로 땅에서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헛된 것뿐이다(전1:2)

오직 하늘의 것 즉 성령으로 채워지는 은사로서만 땅의 것을 채울 수 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요 우리의 영광이다.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주님으로부터 성령의 은사로 성도를 통해서 땅으로 연결된 통로이다.

성도여!!!! 땅에서 다른 일을 하지말고 능력 주시는 성령 안에서 열심히 주님의 일만 하자!!! 주님의 일만이 영원히 헛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8)

 

땅의 성도들이여!!! 주님이 주신 일자라를 굳게 잡아 그 영광(면류관)을 빼앗기지 말자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계3:11)

 

삼층천의 은혜(예수공학 완성)

 

삼층천(새 하늘과 새 땅)
충만(영광) (계21:24)
주고받음
천사문제
주님의 것으로 섬김(계22:4)
존귀
마귀문제
주님의 존귀와 영광에 동참(계22:5)
소속감
인간문제
주님의 것으로 속함(계22:4)
운동
동물문제
주님의 생명으로 운동(계21:24)
형체
식물문제
주님의 나라(환경)을 누림(계21:2)
공허
땅 문제
새하늘과 새땅(영원충만) (계21:1)

 

 

성도는 땅에서 하늘나라의 일을 해야 한다.

땅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허무의 상이 드러워져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하게 하는 것이 성도들의 사명인 것이다.(눅11:20, 막16:17-18)

 

성령의 은사는 허상의 형태가 깃들어 있는 세상에(식물단계의 문제) 하늘나라의 실상이 임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로 병이 낫게 되고 귀신이 쫓겨나가게 된다.

세상에서 움직일 때마다.

허상의 그림자에 속아 헛것에 미혹되는 (동물단계의 문제) 사람들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자유를 얻게 해주는 것이 성도에게 주어진 능력이다

 

거짓된 소속감 즉, 타라간 양심으로 말미암아 잘못된 것들에 끌려 다님으로 가정과 사회, 교회에서 문제(인간단계 문제)가 생긴 사람들에게 성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주님께 속하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의 위치로 돌아오게 하고, 그 위치에서 말씀에 서게 하는 능력이 있다.

땅의 사람들은 자신을 높이려는 욕망에 마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을 대적하고 이웃을 누른다. (마귀단계 문제)

그러나 성령은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도록 하신다. (벧전4:9-11)

세상에서는 주고 받는데 실패하여 서로 뺏고 빼앗기는데(천사단계 문제) 성령은 성도로 하여금 하늘의 것을 받아서 땅에 주도록 전적으로 역사하신다.(행1:8)

 

성령은 우리 성도들에게 하늘의 기업을 땅에서 누리도록 하신다.

비록 우리는 땅에 살고 있지만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서 땅의 모든 것을  채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성도여!! 안심하라!! 기뻐하라!!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미 하늘의 석을 누리게 된것이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요16:12-15)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고후5:1-6)

 

 

 

후기. 십자가의 능력

 

사도바울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고전13:9)고 했습니다.

성령 받고 은사 받고 능력을 아무리 받아도 부분적인 것밖에는 죄지 않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가 받은 은혜와 능력과 은사로 자기 인생을 다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아무리 능력을 ale은 사람을 따라 다녀도 유익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온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언을 하고 능력을 행하고 말씀의 은사를 받고 또 아무리 목회를 잘하고 병자들 낫게 하고 죽은 사람을 살려낸다고 해도 다 부분적인 갓입니다.

 

온전케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본래 번지는삼층천입니다.

삼층천은 사랑의 번지이기 때문에 반드시 세상이 내려다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나라에 계시지만 세상을 내려다보시면서 세상을 상대로 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하나님 노릇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은사나 능력으로 하나님 노릇을 하지 않습니다.

그 정도는 도사나 타락한 천사도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 고치고 예언을 잘 하고 말씀을 잘 받는 것도 귀하지만 우리는 삼층천의 온전한 사랑으로써 내 부족한 것을 보층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삼층천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은혜만 받는 사람은 자기보다 앞 선 사람을 따라 가는 것이지만 사랑은 나보다 앞선 사람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뒤쳐진 사람들을 감싸주고 그들을 위해서 내려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질수있는 사람이 진짜입니다.

자기보다 못한 남편! 자기보다 못한 자식들, 자기보다 못한 교인들을 붙잡고 그들을 위해서 마음이 글리고 그 사람들이 끌려 올때 자기가 받은 모든 은혜와 은사 위에 부족한 사랑이 보충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각자에게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그 십자가에는 상대가 있습니다. 그 상대를 붙잡는 것입니다.

나보다 못한 상대! 내 마음에 거슬리는 상대! 내 시간을 빼앗아 가는 상대! 내 돈을 꾸어가고 안주는 상대! 내가 아무리 도와주어도 욕을 하고 감사를 모르는 상대!! 그런 사람들이 진짜 나를 온전케 하는 귀한 보배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나를 욕하거나 배은망덕한 사람들도 다 나를 온전케 하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나에게 배치된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며 모든 것을 다 감다하는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그냥 나무판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입혀주신 상대를 버리고는 절대로 온전함을 입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을 싫어도 쫓아내거나 귀찮다고 하면 우리의 인생이 망가지게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도 집이나 땅도 박사학위도 나를 온전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더 삐뚤어지게 만들고 더 바보로 만듭니다. 그렇지만 내 옆에 주어진 사람들은 하나님이 만세전에 특별히 뽑아서 우리의 온전함을 위해서 섭리적으로 붙여주신 세상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 그 십자가 안에 있습니다.

성령의능력을 받아서 마귀를 이기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통해서 삼층천을 통해서 마귀를 이기는 것입니다.

내가 은사 받고 귀신을 내어쫓는다고 해서 마귀를 이기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가면 십자가를 지실 것을 알았고, 사도바울도 예루살렘으로 가면 자기가 공통을 당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십자가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우리가 예언을 통해서 피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아닌 것입니다.

나를 벗어나려면 삼층천의 십자가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자기 성공을 위해서 하는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우리가 온전히 내 인생, 내 땅의 번지, 내 모든 것을 벗어나는 것은 젊은 것도 아니고 늙은 것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말씀도 아니고 은사도 아니고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오직!! 십자가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