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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에 대한 바른 이해

하나님아들 2023. 11. 12. 23:09

축도에 대한 바른 이해              

 

들어가면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공예배 시에 축도를 행해 왔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라고 목사가 공예배 시에 축도를 하고 후주(後奏)가 따름으로 예배는 폐회에 들어섰습니다.

축도, 또는 축복기도로 불리우는 이 기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있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공예배 마지막에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행하는 '축복의 선언'이라고 정의합니다. 이때 축도는 두 가지 요소를 포함하는데 기도의 요소와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선포하는 것 입니다.


축도의 성격에 대한 견해

1.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예전(禮典)에 대한 제반 법규를 준 후에 축도의 사역은 제사장 아론과 그 계열에게만 주었으며(민 6:24-26), 신약에서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주는 선물'의 의미를 가진 어휘를 사용하면서 단순한 개인의 바램이나 기도가 아닌 하나님의 복이 함께 하는 사실을 알리는 것으로써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막 10:16, 눅 24:50)

2. 사도들에게 이르러서는 축도의 내용을 일반 기도와 달리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 도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구체화하여 사용하였습니다 (고후 13:13, 롬 15:5-6, 엡6:23-24, 살전 5:23, 살후 3:16,18, 히13:20-21). 축도는 자신이 원하는 사연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고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역사하심이" 있어질 것을 알리는 의미로 사도들에 의하여 사용되었습니다.

3. 종교 개혁자들은 예전(禮典)의 상징적인 행위보다 말씀중심의 교회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축도는 더욱 소중한 부분으로 간주되었고, 그 정신은 오늘날 개혁교회에서도 계승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4. 카톨릭교회나 희랍 정교회는 축도를 사제(司祭)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사적 축복(祭祀的 祝福)을 부여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이 견해는 선언에 의하여 축복이 임한다는 '강복(降福) 선언'의 개념입니다.

5. 개신교는 축도를 축복을 기원한다는 견해를 지양해 왔습니다. 축도의 형식은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는 표현을 취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행한 기원(祈願)인데, 헬라 원문에는 "있을지어다"란 동사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교회인 고린도교회와 한 몸을 이룬 자로서 회중과 함께, 회중을 대표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기원하였습니다. 개신교는 축도를 축도자가 하나님이 부여하신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축복의 기원'을 갖는 것으로서 하나님 편에서 그 행위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6. 개신교는 축도에는 '영적 축복의 선언'의 의미가 있다는 견해도 같이 가져 왔습니다. 축도는 축도자가 교회의 회중을 향하여 단지 "삼위일체 하나님의 축복이 교회에 있기를 바랍니다" 하는 기원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언약적 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신 성령이 실제적으로 축복을 주시고 있다는 사실을 선언한다고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축도는 하나님의 일을 맡아 봉사하는 자가 책임과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축복을 기원하며 선언하는 것입니다.

축도의 형식에 대한 견해

축도에는 대제사적(大祭祀的) 축도가 있고, 또한 사도적(使徒的) 축도가 있다고 합니다. 축도를 이렇게 두 가지 형식으로 말하는 것은, 민수기 6장 24-26절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와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를 들어서입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각각 대제사적 축도, 사도적 축도라고 그 명칭을 부를 수는 있지만, 형식에 차이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본래의 성격이 기원(祈願)이요, 축복의 선언임을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민수기 6장 24-26절도 같습니다. 이것은 모세와 아론이 성막 건립이 완성된 직후에 가진 기념 축제(참조. 출 40:17, 레 9장 22-24절) 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최초로 축복을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보면, 축복문이 세 번씩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가 되심이 암시된 표현이기도 한데,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의 모든 삶을 당신의 은혜 안에 두시고서 끌고 나가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바울이 교회를 향해 가진 기도와 같은 개념으로 행해진 것입니다.

축도는 하나님의 구원론적 축복을 내용으로 하고 있음

축도에는 하나님의 구원론적 축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원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때 이 기도는 어순상(語順上)으로 구원론적 차례를 나타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인류의 구원의 길은 그리스도시니 그의 중보적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에 이르지 못한다.

성령의 교통(코이노니아)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데 현실적으로 관계된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구원을 우리로 하여금 받도록 하는 실제적 방법은 성령의 교통인데, 이 방법이 맨 나중에 온 것도 논리적이다. 구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 이루어졌는데,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일은 우리가 받는 일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와 접촉하시며 교통하셔서 실현시키신다"(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주석, p.115)

축도를 할 수 있는 자격자

축도는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 왔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는 제사장의 신분이기 때문에 목사만이 축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목사들이 갖고 있어서 자신들만이 축도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과 주장은 참으로 잘못된 것이요 위험한 것입니다. 축도는 목사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이 장로교회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목사는 구약의 제사장의 신분이기 때문에 목사만이 축도 할 수 있다는 것은 구약의 제사장의 신분, 신약의 목사의 신분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갖게된 것입니다. 여기서는 이 문제를 왈가왈부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개혁교회에 서 있는 사람은 '만인 제사장'을 익히 배워왔는데,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무지의 소치입니다. 목사나 교회의 회중(교우)들이 다 함께 동일한 제사장인데(벧전 2:9), 목사에게만 축도의 특별한 권세가 부여된 듯이 그렇게 취급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적인 면을 볼 때,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의 성격면에서 볼 때 본질상 목사가 교회의 회중들보다 나을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사실 누구나 교회에 대해 가지는 마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가지고서 축복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만이 축도 할 수 있다고 규정한 것은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봅니다. 분명히 목사는 그 신분에 있어서 교회의 회중들보다 높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목사까지를 다 포함하여 죄인으로서 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은혜를 입음으로 영생을 얻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이룹니다. 이때 교회는 그리스도로 충만한 상태에 까지 이르러 가기 위해서 그 특성상 은사를 필요로 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가르치는 은사로 목사를 주실 필요성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교회를 이룬 회중 가운데서 말씀의 은사를 받은 자가 목사로 세움을 입게 됩니다. 목사는 은사를 받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사역자요 전달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목사는 하나님의 봉사자로서 책임과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믿고 축복을 기원하며 선언합니다. 목사가 스스로의 권위를 가지고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로서 권위를 위임받은 자격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목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호(聖號)로 축도 하는 것입니다.

축도의 대상

삼위일체 하나님의 축복의 기원과 선언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인 교회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인 불신자가 축도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불신자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입니다. 그러니 축도의 대상이 주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인 믿는 자들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미워하시는 죄를 회개하지 않고 계속 그 죄에 머물러 있는 자들을 위해서 축도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엡 6:24). 그런데도 "이 나라 이 민족과 전 세계에 있을지어다"라고 축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대상이 아닌 것이 축도의 대상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 이 나라 이 민족과 전 세계가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든, 또는 땅,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든지간에 상관없이 이것이 축도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허순길, 개혁교회의 목회와 생활, p.71).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그렇게 뭉텅거리로 묶어서 불신자와 함께, 불신 세계와 더불어 축복하시지 않습니다.

공예배에서의 축도

축도는 반드시 교우가 교회의 회중으로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예배 시에서만 행해질 수 있습니다. 축도가 교회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인만큼, 공교회의 성질을 띤 공예배가 아닌 다른 것에서 행해져서는 잘못 사용하는 것이 됩니다. 가령, 친목을 목적으로 한 체육대회나, 야유회, 잔치 모임, 개업식 등에서 예배란 명목으로 축도를 행하는데 축도는 그런데서 행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성경공부를 목적으로 한 집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축도는 반드시 교회의 공예배 시에만 행해져야 합니다.

논쟁이 되고 있는 축도문, 어떤 축도문으로 할 것인가?

축도문은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를 그 형식으로 삼고 있습니다. 아주 간략한 문구입니다만, 교회를 경영해 나가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축도문과 관련하여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오늘날 교회는 이 축도문에 다양한 수식어구를 삽입하여서 사용합니다. 가령 "하늘 영광 보좌를 다 버리시고 죄인된 인간의 몸을 입으시어 낮고 천한 자가 되시고 온갖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무런 값없이 보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며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성령의 교통이 영원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식입니다.

이 기도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가 다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축도는 그 사실을 구구절절이 설명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설교가 아닌, 기원이요 선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말을 해야만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수식어구를 넣어서 사용해야만 축도의 내용이 풍부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하며 선언하면 됩니다. 그것으로 다 설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있을지어다"로 축도를 마쳐야 한다는 주장과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옵나이다. 드립니다, 원합니다)"등 다양하게 축도 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 문제는 우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헬라 원문에는 "있을지어다"란 동사는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meta panton humon"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영어로 "with all you"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be with you all"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한글 개역 성경은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로 명령형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축도의 주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어야 하기 때문에 축도하는 사람을 주어로 하는 "축원하옵나이다, 빕니다, 드립니다"의 종결어는 타당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현대어로서는 적절치 않다면 "모든 성도들과 함께 있을지어다" 라고 하는 것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한글 사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틀린 것으로, 사전에서 '지어다'를 찾을 경우 '...지어다'로 찾으면 '마땅히 하여야 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맺음 끝, 예스런 정중한 표현에 쓰인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있을지어다"와 함께 다양한 문구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할 것은, 축도문이 갖는 성격을 이해하고서 "이렇게 해야 한다"거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로 논쟁 거리로 몰고 나갈 것이 아니라, 국문학적으로 어법에 맞게 통일시키는 작업이 교계에 있어서 혼란을 막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