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이란!

후크마의 구원론

하나님아들 2023. 9. 27. 18:15

후크마의 구원론은 독특한 특색이 있다. 즉, 그는 기존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한 이론에 대해 먼저 소개하고 있다. 즉, 그는 머레이, 벌콥, 벌카우어 등의 이론을 먼저 소개하고 자기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그는 구원의 순서인 구원의 서정에 관해서 말한다. 그는 다른 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순서에 충실한 듯 보인다. 따라서 그는 구원의 각 과정, 즉 순서에 대해 그의 주장을 밝힌다. 따라서 여기까지는 그의 주장과 다른 개혁주의 신학자들과는 거의 차이가 없다. 단지 개혁주의 신학에 철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다른 학자들이 사용하지 않았던 독특한 용어를 구사한다. 또한, 이미 사용한 용어에 대해서도 재사용을 통해 새로운 용어로 탈바꿈시킨다. 그의 저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론 전개 방식이다. 구원론에서 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하며 여기에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함을 밝힌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은 누차 설명되어 온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이론에서 이를 재사용하여 독자들의 인식을 새롭게 한다. 특히, 그는 행위언약이라는 용어에 대해 많은 비판이 있어왔음을 알고 이 용어는 성경에 근거하지 않음을 밝히고, 아담적 경륜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 용어 역시 성경에 없다. 즉, 그는 비판을 피해가기 위해 새로운 용어를 창출한다. 그가 주장하는 구원의 서정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순서에 따르는 듯하나, 이는 결국 동시에 일어날 수 있음을 밝힌다. 그러면서 그 이유로 성령의 역사와 아울러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한다. 본문은 후크마가 구원의 서정을 말하기에 앞서 방향을 설정하는 방법에서부터 출발한다. 또한, 그는 기존 이론의 타당성을 말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펼쳐 나가되, 기존 이론을 정리함은 물론 한 단계 더 나아간 이론을 주장한다.

 

1. 구원의 서정에 대한 문제의 제기

 

만약 구원론이 ‘구원의 교리’(The Doctrine of Salvation)로서 이해된다면 가장 먼저 다뤄야 할 문제는 구원의 축복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용함에 있어 어떤 서정(order)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수많은 논란이 신학사에 있어왔다. 1737년 루터파 신학자인 야곱 칼포프(Jacob Carpov)는 이 문제를 기술하면서 ‘ordosalutis’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신교와 구교를 망라해서 수많은 신학자가 이 시점을 전후해서 다양한 ‘구원의 서정’(orders of Salvation)을 제안해 왔다. 벌콥은 구원의 서정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그리스도로 이루어진 구원 사역이 죄인의 삶과 마음 속에 주관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이며 그것을 구원과정의 논리적인 순서로 또한 그 과정이 상호 연관 속에 비추어서 성령께서 구원 사역의 적용 가운데서 다양하게 역사하시는 사역을 기술함에 그 목적이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벌콥은 구원의 서정을 시간상의 서정이라기보다는 논리적인 서정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구원과정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다양한 활동 사이의 상호연관 관계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하나님의 공유적 특성에 있어서 시간은 영원성이기 때문이다.

 

1) 세 가지의 다른 접근 방식

 

‘구원의 서정’이란 문제점에 대한 최근의 세 가지의 접근 방식을 논하고자 한다. 한 극단의 경우가 머레이의 경우다. 그는 성경으로부터 구원의 명확한 서정이 추출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의 저서 「성취된 그리고 적용된 구속」(Redemption-Accomplished and Applied)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구원 적용의 다양한 과정이 어떤 서정에 따라 진행되고 있으며 그 서정은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계획과 그의 지혜 그리고 은혜에 의해 제정되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하고도 결정적인 이유들이 성경에 나타나 있다” 머레이는 로마서 8:23로부터 부르심(calling), 의롭게 하심(justification), 영화롭게 하심(glorification)이란 구원의 서정을 추출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는 순서 믿음(faith)과 회개(repentance)를 칭의 앞에 그리고 중생(regeneration)을 믿음 앞에 놓을 만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성경의 교훈에 근거한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그는 칭의(justification) 뒤에 양자 삼으심(adoption), 성화(sanctification) 그리고 성도의 견인(perseverance)을 첨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성경적인 구원의 서정은 부르심, 중생, 믿음과 회개, 칭의, 양자 삼으심, 성화, 견인 그리고 영화(glorification)라고 이해하고있다

 

구원의 서정에 대한 중간적인 입장은 벌콥이다. 그의 저서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에서 성경은 이상과 같은 형태의 구원 순서를 뚜렷이 밝히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성경은 종종 조직신학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보다도 더 넓은 의미들을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구원 사역의 다른 국면들이 서로 유기적 관계 속에 놓여있는 다양한 경우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살펴본 뒤 계속해서 루이스 벌콥은 다음과 같은 구원의 서정을 제시하고 있다: 부르심, 중생, 돌이킴(conversion: 회개와 믿음을 포함함), 칭의, 성화, 견인 그리고 영화.

 

다른 한 극단의 예가 벌카우어의 경우이다. 그는 ‘구원의 서정’이란 개념에 대해 매우 불만족스러워한다. 그는 주목하기를 이 주제에 대한 신학적인 몰입은 종종 구원 자체가 갖는 풍요함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단계들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성경으로부터 구원의 고정된 서정을 추출할 수는 없으며, 예를 들어 로마서 8:30에서의 바울이 의도하는바 역시 구원과정에 나타나는 명료한 단계의 서정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는 믿음은 구원의 여정 속에 있는 하나의 구분점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전 생애에 널리 편만해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러기에 이런저런 이유로 벌카우어는 ‘구원의 서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를 좋아하므로 구원의 서정을 정하기를 거부한다.

 

2) 어려운 문제들

 

‘구원의 서정’을 정하려고 할 때 당면하는 어려움으로는 후크마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구원의 서정’을 설정하는 데에 사용하는 용어들이 조직신학에서 사용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경의 저자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팔링게네시아”(중생: regeneration) 한 단어가 신약에 두 번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오직 디도서 3:5에서만이 이 말은 KJV와 RSV에서는 ‘중생’(regeneration)으로 NIV에서는 ‘거듭남’(rebirth)로 번역되고 있는데, 보통 이해하고 있는 의미인 ‘새로운 영적 삶’(new spirituallife), 즉 성령으로 인해 인간 속에 회복된 새 생명을 가리키고 있다. 또 다른 구절인 마태복음 19:28에서 이 말은 KJV에서는 ‘중생’(regeneration)으로, RSV에서는 “새 세상”(new world)으로, NIV에서는 “만물의 새로워짐”(the renewal of all things)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도래될 만물의 새로운 질서를 지칭하고 있다. 바빙크 역시 다음과 같은 말로 이러한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중생, 믿음, 돌이킴, 새로워짐 등등의 표현들은 성경 속에서 구원의 여정에서 나타나는 연속적인 단계를 가리키기보다는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전체 과정을 한 단어로 요약시키는 것이다”

 

둘째로, 구원의 과정 속에 나타난다는 다양한 단계의 서정 역시 항상 똑같지 않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성화가 칭의를 뒤따르는 단계로 말해지는 데 반해, 고린도전서 6:11에서는 성화가 칭의보다 먼저 언급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셋째로, 종종 구원의 서정을 정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의 토대로 사용되는 로마서 8:30에서도 이 구절의 주요 목적이 ‘구원의 서정’을 정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29절과 30절의 목적은 28절의 말씀인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에서 나타나는 진술의 근거 혹은 이유를 제사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29절과 30절은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구절의 의미를 상술함으로써 그들을 하나님께서 아셨고, 정하셨고, 부르셨으며 또한 의롭다 여기사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러 국면이 나타내고 있는 구원의 서정은 부차적인 목적이다. 바울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들이 누릴 안전과 영원한 축복을 수사적으로 설명하는 데에 있다.

 

넷째로, 믿음이 구원의 서정에 나타나는 여러 관계 중 하나의 단계일 뿐이라고 생각되어서는 결코 아니 된다. 믿음은 성도의 일평생의 삶을 통해 지속되어지며 수행되어야 한다. 믿음은 칭의의 단계에서 필수적이듯이 성화와 성도의 견인 가운데서도 필수적이다.

 

다섯 번째로, 칭의와 성화는 성도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연속의 과정이 아니라 동시에 나타나는 사건들이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0에서 가르치고 있듯이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참조,RSV) 의롭다 하심에 대해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되 거룩하게 하심에 대해서는 그를 영접치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6) 마지막으로 머레이와 벌콥이 주장하는 ‘구원의 서정’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소망이 이들의 서정 속에서는 언급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신컨대 사랑과 소망 역시 믿음만큼이나 구원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필수적인 것들이다.

 

3) ‘구원의 서정’의 필수성 여부

 

그런데도 아직도 구원의 서정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먼저 중생과 구원론의 다른 국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중생(regeneration)이라 함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인간을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시며, 한때는 영적으로 죽은 인간의 마음을 새롭게 하사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게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중생이 정의된다면 중생은 ‘돌이킴’(conversion, 믿음과 회개를 포함), 칭의, 성화 그리고 성도의 견인 모두를 앞서고 있음이 자명하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경험은 영적 삶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의 과정 속에서 중생이 제일 먼저라는 일종의 서정을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중생이 우선된다는 말도 시간상 혹은 연대순의 서정을 가리킨다고 이해될 수는 없다. 중생과 믿음의 관계는 말하자면 전등의 스위치를 켜는 것과 바에 불이 들어오는 것과 같은 동시적인 사건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새로운 영적 삶을 얻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는 믿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을 설명하는 최상의 방법은 중생이 구원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다른 국면들, 즉 믿음, 회개, 성화 등등에 대해서 원인적인 우선순위(causalpriority)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 과정 속에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와 국면, 일련의 연속적인 단계를 포함하는 구원의 어떠한 서정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서 칭의가 돌이킴 뒤에 오고, 성화는 칭의 뒤에 오며, 견인은 성화 뒤에 온다는 것이 사실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돌이킴은 믿음과 회개를 포함하는 것이며, 그러기에 사람은 믿음을 갖게 된 그 시간에 동시에 그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이지, 믿음을 소유한 이후 얼마 지나서 의롭다 여김을 얻는 것이 아니다. 칭의와 성화가 동시적인(simultaneous) 것들이다. 더 나아가 얼마간의 시간 동안 믿음을 소유한 이후에야 비로소 믿음 안에서 인내케 되는 곳이 아니다.

 

벌콥은 하나님의 은혜를 개개인에게 적용하는 일이 단일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바빙크는 그의 저서 「교의학」(Dogmatics)초판에서 구원이 수반하는 모든 축복은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동시에 부여된다고 말했다. 심판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축복들은 구별될 수는 있으되 분리될 수는 없다. 믿음, 소망, 사랑처럼 그것들은 깨어질 수 없는 세 가지 줄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연속적인 단계로 나눠질 수 없는 하나님의 단일 사역에 대해서, 어떠한 연대적인 순서를 정하려는 시도인 ‘구원의 서정’이란 개념을 내어버려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적용함에 있어서 성령께서는 비록 결코 분리될 수는 없으되 각각으로부터는 구별되어야 하는 다양한 경험을 있게 하신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비록 그것들을 하나씩 다루더라도 그것들은 결코 분리되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일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를 들어 소위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만, 이 둘이 언제나 함께 일어난다. 중생과 돌이킴도 분리해서 다룰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절대로 분리되어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연속적인 단계를 갖는다는 ‘구원의 서정’에 대해서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marvelous) 사역, 즉 다양한 국면을 구별해 볼 수 있는 구원의 방법(a way of salvation)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국면이 모두 똑같은 종류의 것들은 아니며, 그러기에 모두가 똑같은 범주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이 구원의 길의 어떤 국면들은 비록 하나님의 능력이긴 하지만, 인간이 해야 하는 것에(믿음과 회개) 주된 관심사가 있는 반면에, 다른 국면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중생과 칭의)에 주안점이 있다. 어떤 국면들은 법정적인 행위(judicalacts, justification)이나, 다른 국면들은 도덕적이며 영적인 갱생(moral and spiritual renewal, regeneration and sanctification)이 주안점이다. 어떤 것들은 순간적인(instantaneous) 행위들, 즉 중생, 위기를 통한 돌이킴과 단회적 성화(definitive sanctification)인 반면에 다른 것들은 지속적인(continuing) 행위들이다. (점진적인 성화와 견인) 요약하면, 구원의 길에 나타나는 다양한 국면은 뒤의 것이 앞의 것을 대치하는 식의 일련의 연속적인 단계들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구원의 과정 속에 나타나는 다양하면서도 동시적인 국면들, 즉 이 모든 국면이 시작된 후에도 계속적으로 나란히 지속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구원과정은 중생→돌이킴→칭의→성화→성도의 견인과 같이 일련의 연속적인 경험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구원의 과정은 동시에 시작되어 지속되는 다양한 국면을 포함하는 하나의 단일한 경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2. 구원의 서정의 내용 분석

 

1) 방향 설정(Orientation)

 

후크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전적 순종과 또한 그의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죄와 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러한 구원 사역(saving work)도 성령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과 삶에 적용될 때야 비로소 그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 구원 사역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다루는 분야가 구원론(soteriology)이다.

 

구원론에 대한 이해가 언제나 동일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찰스 핫지(Charles Hodge)는 그의 저서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에서 구원 계획(예정과 은혜 언약),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그리고 이 사역을 성도의 구원에 적용하는 성령의 역사들을 구원론의 내용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윌리암 쉐드(William.G.T. Shedd)는그의 저서 「교의학」(Dogmatic Theology)에서 다소 그 범위를 축소하고 있다. 즉, 그에게 있어서 구원론은 그리스도의 사역(그의 인격에 관한 논의를 제외함)과 성령에 의한 구원 적용 사역까지를 의미한다. 그러나 후크마는 구원의 축복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호의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의 삶으로 회복하는가에 대한 연구를 구원론의 내용으로 삼으려 한다고 말한다. 이 구원의 적용은 비록 믿음으로 얻어지기는 하나 성령의 역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후크마가 취하는 노선은 신학적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적 전통에선 복음주의 노선이다. 개혁주의 구원론은 여타 다른 복음주의 구원론과 많은 점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독특한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1) 누가 죄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는가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비록 인간의 결정이 중요한 역할을 함은 분명하나, 인간의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이다.

 

(2)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용되는 구원은 그 뿌리를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두고 있으며 그 계획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인간 편의 어떤 공로를 근거로 해서가 아니라 전적인 그의 미쁘신 뜻대로 그의 백성들에게 영생(eternal life)을 주고자 그들을 택하신 것이다.

 

(3) 비록 복음의 메시지를 듣는 모든 자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그의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초청되었으며, 더욱이 그를 영접하도록 간곡히 권유되었을지라도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는 그의 택한 백성, 즉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택함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부여되며 그러기에 그의 구속의 은혜는 보편적이 아니라 특별한 것이다.

 

(4) 그러기에 하나님 구원의 은혜는 유효하며 또한 유기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임의로 행하는 신지들일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떠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한 자들이 그들의 구원을 상실토록 허락지 않으신다는 의미이다.

 

(5) 구원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용되기 위해서는(이러한 구원의 좁은 의미에서 중생과는 구별된다) 비록 인간의 의지와 노력을 포함하긴 하지만 이 구원의 적용은 그런데도 기본적으로 성령의 역사(the work of the Holy Spirit)이다.

 

이상의 독특한 강조점들이 개혁주의 구원론을 특징짓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이 구원의 적용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을 강조한다고 해서 구원의 과정에서 인간의 책임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후크마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피조물」(Created In God’s Image)에서 “피조 된 인격으로서의 인간”이란 글에서 이러한 사상의 한 측면을 피력한 바 있다. 거기서 후크마는 인간(human being)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해 있는 피조물이요, 동시에 책임성 있는 결정을 내리는 하나의 인격체(a person)라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전적 의존(total dependence)과 선택의 자유와 이러한 조화의 관계가 인간의 심오한 신비의 근간(the central mystery of man)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관이 구원의 과정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아보자. 비록 하나님이 인간을 중생시키사 그에게 새로운 영적 생명을 부여하심이 틀림없지만, 믿는 자들 역시 그들의 구원의 과정, 즉 그들의 믿음의 훈련과 성화의 과정 그리고 그들의 견인에 있어서 그들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상 죄로 인해 죽은 자들이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살리셔야 함에는 틀림이 없다. 여기서 좁은 의미에서의 중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러나 중생과 구분되는 구원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여러 국면 가운데 하나님과 믿는 자가 함께 연루되어 있기에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구원을 하나님의 역사요, 동시에 인간의 과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때때로 회개, 믿음, 성화, 성도의 견인 등과 같이 구원과정의 여러 국면이 성도들이 함께 협력하는 하나님의 역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방식이 갖는 문제점은 마치 이 말이 하나님과 인간이 각각 구원 역사의 맡겨진 부분들을 감당한다는 인상을 주는 데 있다. 오히려 이 표현보다는 인간 구원의 여러 국면 가운데서(중생과 구별되는) 하나님이 일하시고 인간도 일한다고 말하는 편이 낫다. 예를 들어 성화의 과정은 백 퍼센트 하나님의 일이요, 동시에 백 퍼센트 인간의 일이기도 하다. 바울은 빌립보서 2:12-13에서 하나님의 일이요 동시에 인간의 일이라는 이러한 ‘자비로운 연합’(mysterious concurrence)을 매우 잘 표현하고 있다.

 

2) 구원의 서정의 국면들

 

(1) 복음 초청(The Gospel Call)

 

복음 초청은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그의 지상대명령(Great Commission, 마 28:18-20)을 통해서 제자들과 모든 세대의 교회를 향하여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이르게 하기 위해 제정하신 방법들을 벗어날 수가 없다. 이 방법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복음의 전파(the preaching of the gospel)라는 것이다. 복음의 초청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사람들에게 제의하는 일,회개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초청, 그렇게 말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죄의 용서와 영생을 받도록 하게 하는 일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복음의 진상(facts)과 구원의 방법(way)을 제시해야 한다. 둘째, 회개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나아오라는 초대가 있어야 한다. 셋째, 용서와 구원의 약속이 제시되어야 한다.

 

후크마는 복음 초청의 특성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주장한다.

 

첫째, 복음 초청은 듣는 사람 모두를 초대한다.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는 일반적 초청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비록 자신의 죄 된 상태를 인정하는 자만이 그리스도께 나아 올 수 있지만, 복음 초청은 자신들의 상태를 깨닫든지, 못 깨닫든지 상관없이 수고 하고 무거운 짐진 모든 자에게 전달되고 있다. 대부분 개혁주의 신학자와 미국의 기독개혁교단(Christian Reformed Church)은 하나님께서는 복음 초청이 전달되는 모든 사람이 구원되시기를 진지하게 바라신다는 사실을 확고히 천명하고 있다.

 

둘째, 복음의 초청은 진지하게(seriously) 의도되었다. 훅스마(Herman Hoeksema)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구원하시기로 선택한 사람들만이 구원초청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 그러므로 이 복음 초청은 은혜와 구원을 모든 사람에게 제시하는 보편적 제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백한 뜻에 따라 어떤 이에게는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르는 냄새요, 또 다른 이에게는 죽음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냄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전달된 모든 사람이 구원받도록 원하시지 않는다. 오직 선택자만이 구원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선택과 유기라는 하나님의 뜻을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양립할 수 없는 논리라고 말한다.

 

셋째, 좋은 의미로 의도된 복음 제시(the Well-Meant Offer)이다. 도르트 총회 당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우리는 당신들(알미안주의자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진지하고 성실하고 위선 없이 그리고 가장 진정으로 복음이 간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도록 부르신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이 사실을 표현함에 있어서 우리는 심지어 기꺼이 당신들의 문서에 사용되고 있는 동일한 용어마저도 사용한다. (serio vocantur, 진지하게 부르심을 받은) 그러나 우리는 좋은 의도로 제시된 복음 초청과 또 한편으로 제한 속죄 교리를 다 함께 수용하고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잘 의도된 복음 초청을 확신하기 위하여 선택 교리와 제한 속죄 교리를 배격해야 할 하등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부르시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께서는 그를 진지하게 부르신다. 즉, 신실하고 조금도 위장되지 않은 온전한 의도와 뜻으로 구원하시려 부르신다.

 

성경은 영원한 선택과 잘 의도된 복음 초청 모두를 가르치고 있으므로 비록 인간의 제한된 이성으로 이 둘을 잘 조화시킬 수 없다 하더라도 모두 받아들여 붙잡아야 한다. 하나님을 사람의 논리의 감옥 속에 가두어둘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신학은 성경의 역설(paradox)을 유지해야 한다. 즉, 신학적 관심은 합리적으로 일관성 있는 체계를 구축하는 일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가르침에 충실하는 일이어야 한다. 잘 의도된 복음 초청은 선교를 위해 엄청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2) 효력 있는 부르심(유효적 소명, Effectual Calling)

 

복음의 초청에 이어서 자연히 등장하는 주제는 그 초청에 대한 응답이 될 것이다. 복음의 초청을 받은 사람 모두가 다 그것을 받아들여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답들이 있다. 반(半)펠라기우스주의자들(Semi-Pelagians)과 알미니안들(Armianians)에 의하면 복음 초청에 대한 결과가 오직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신학적 전통에 따르는 사람은 복음 초청을 받아들이는 이유를 궁극적인 인간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 속에서 발견 되어져야 한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 그리고 마음을 여시는 일을 가리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내면적’(internal) 혹은 ‘효력있는’(effectual)부르심이라고 불렀다. ‘효력 있는 부르심’이란 하나님께서 능히 인간에게 하나님의 복음 초청에 대해서 ‘네’라고 응답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 고전 1:22-24에서 바울은 ‘오직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말을 하는데 이들은 하나님께서 효력적으로 불러내신 사람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뜻의 헬라어 ‘클레토스’(klhtov")는 ‘효력 있는 부르심’을 지칭한다. 롬 8:28-30에서도 부르심을 입은 자(klhtov")들을 표현하는데, 그들은 단지 복음에 의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복음을 믿거나 말거나 상관이 없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아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효력 있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표현한다.

 

효력 있는 부르심이란 하나님 백성들의 마음과 삶 속에 구원을 효력화 시키게 하는 복음의 초청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듣는 자의 가슴을 초자연적으로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사람은 신앙으로 응답할 수 없다. 이러한 마음의 변화는 효력 있는 부르심을 통해서 일어난다. 따라서 효력 있는 부르심이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복음의 초청을 듣는 사람에게 회개와 믿음과 순종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다. 여기에서 순종(obedience)은 효력 있는 부르심의 또 다른 측면을 제시한다: 즉, 유효적 소명은 어떤 특별한 목표를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이미 부르심이란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그 교제로 부르심을 입었다. (고전 1:19) 그러므로 효력 있는 부르심은 인간에게 특별한 삶, 즉 지금의 악과 세상과는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분리하도록 하는 다른 종류의 삶을 살도록 촉구한다. 엡 4:1의 용어를 빌리자면 효력적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산다는 것은 인간에게 매우 부지런한 참여를 요구한다. 효력 있는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의 열매들이긴 하지만, 이는 전적인 인간의 책임성을 요구한다. 머레이는 “이 부르심(유효한 부르심)의 주권성과 그 효력성은 결코 인간의 책임성을 둔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책임성의 기반일 뿐만 아니라 책임성 자체를 확고히 하기까지 한다. 은혜의 위용은 의무수행을 더욱 공고히 한다”라고 말한다.

 

후크마는 복음의 부르심과 유효적 부르심은 그 관련성에 있어서 서로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즉, 복음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이 회개와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부름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는 자는 적기 때문이다. (마 22:14) 한편 효력적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모두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온다. 그런데도 이 두 가지의 부르심을 함께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종종 복음의 부르심과 효력 있는 부르심을 한 부르심의 두 가지 측면 혹은 양면이라고 말하였다.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말씀이 전파되고 가르쳐지고 있는 곳에 효력적으로 부르신다. 그때에 성령의 능력적인 사역은 설교자나 교사가 선포한 말씀을 성령 자신에게 연합시킨다. 그 다음엔 성령께서 일하신다. ① 사람의 마음을 열어 말씀에 응답하게 하시고(행 16:14), ② 마음을 밝히사 복음의 메시지를 이해하게 하시고(고전 2:12-13, 참조, 고후 4:6), ③영적 생명을 부여하시어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향하여 가게 하신다. (엡 2:5) 그러므로 복음 초청을 통해 들려진 말씀이 효력 있는 부르심을 통하여 유효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3) 중생(Regeneration)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착한 사람’(nice people) 정도가 아니다. 그들은 새로운 사람들일 뿐 아니라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루이스(Clive Staples Lewis)는 그의 저서 「단순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두 가지 종류의 삶(생명)을 헬라어에 입각하여 구별 짓고 있다. 하나는 ‘비오스’(bivo), 또 다른 하나는 ‘조에’(zwhv) 라는 단어이다. ‘비오스’는 일반적으로 각 사람 이 소유하고 있는 생명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생물학적인 생명으로 음식, 공기, 물 등과 같은 것에 의해 유지되나 마침내는 죽음으로 끝나는 유(類)의 생명을 말한다. 반면에 ‘조에’는 영적인 생명을 가리키는데, 우리가 다시 태어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말한다. - 이 생명은 영원히 계속되는 삶이다. 루이스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이 두 가지 생명은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실상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비오스’는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인 반면에 ‘조에’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향한 생명이라 할 수 있다. 루이스가 ‘조에’라고 부르는 이 생명은 하나님이 하사하신 선물이다. 중생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왜냐하면, 중생은 구원의 과정의 첫 출발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세 가지 서로 다른 의미에서 중생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서로 연관이 있다. ① 중생이란 새로운 영적 생명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심기어지며 회개하고 믿음에 이르도록 하는 의미에서의 중생이다. (요 3:3,5) ② 심겨진 새 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날 때를 가리켜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 (약 1:18; 벧전 1:23) (3)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최종적인 완성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 (마 19:28, 참조, KJV, ASV, NASB) 마지막으로 언급된 구절에는 ‘팔링게네시아’(palingenesia)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위에서 언급된 영어 번역본에는 중생 혹은 “거듭남”으로 번역되고 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는 디도서 3:5에만 사용되고 있는데 온 우주가 새롭게 갱신되는 것을 칭하고 있다. 즉, 베드로후서 3:13과 요한계시록 21:1-4에서 말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new heaven, new earth)을 말한다.

 

초기 개혁신학에 있어서는 중생이란 단어가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의미보다 훨씬 넓은 의미로써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칼빈은 중생을 전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돌이킴과 성화를 포함하여-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1561년의 벨직 고백서도 중생을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대부분 17세기 신학자 역시 중생을 돌이킴(conversion, 회심, 개종)과 동일시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좁은 의미의 중생(위의 (1)의 의미)과 넓은 의미의 중생(위의 (2)에 해당)을 구별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성령에 의해 새로운 생명이 심기어지는 것과 돌이킴을 통하여 새 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과의 구별이다. 좁은 의미에서의 중생이란 성령의 사역이라 정의할 수 있으며, 이 사역을 통하여 성령께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전에는 영적으로 죽었으나 이제는 영적으로 살아나게 하여 죄를 기꺼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며, 주님을 섬기도록 하게 하신다.

 

중생에 관해 신명기 30:6에는 영적인 갱신을 마음의 할례라고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중생이라고 부르는 것을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은 말로 묘사하고 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할 것이라” (렘 31:33) 에스겔을 통하여 하나님은 바벨론 유수에 가 있는 그의 백성들에게 장차 그들의 내면을 새롭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겔 11:19, 36:26) 구약에서처럼 신약 성경에도 중생에 관해 더 풍성하고 부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중생’이란 단어가 “새로 태어남”(new birth)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 물론, 그 사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든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각종 나쁜 나무마다 나쁜 열매를 맺는다”(마 7:17)라는 예수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좋은 열매를 맺기 전에 먼저 좋은 나무이어야 한다. “나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심지 않은 모든 나무마다 그 뿌리째 뽑히우리라”(마15:13)라는 말씀도 하늘의 아버지께서 심어 놓으신 나무들은 뽑힘을 당치않을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와 같은 구절들은 중생의 필요성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중생 혹은 신생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는 사도 요한이라 할 수 있다. (요 1:12-13) 중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를 분명하게 가르치는 성경은 요한복음 3장이라 할 수 있다.

 

중생에 관해 바울의 글 중에서 ‘중생’(palingenesia)이란 단어가 꼭 한번 나온다. (딛 3:5, RSV) 이 단어는 새로운 시작을 가리킨다. ‘중생의 씻음’이란 표현은 아마도 세례를 가리키는 것으로 세례가 의미하고 있는 영적 실체를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성령의 새롭게 하심”은 중생이란 죄로부터의 정결케 됨뿐만 아니라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역사하여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지속되게 될 영적인 새로워짐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이 ‘중생’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곳이 유일하게 이곳이긴 하지만 범죄함으로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셨다고 확인하고 있다. 에베소서 2:10과 고린도후서 5:17에서도 바울은 중생을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바울의 말을 통해 볼 때 중생은 성령의 정결케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활동의 열매이며, 이 열매는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새로운 창조 세계의 한 부분인 것을 의미한다.

 

중생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해보면 중생은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의 전적인 변화이며, 성령에 의해 역사되며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본성의 내면적 새로워짐을 말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열매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일어난다. 따라서 ‘중생’(새로운 영적 생명의 심겨짐)은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협력하여 일어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유일한 행위자이시다. 즉, 중생은 “단일적”(monergistic)인 하나님만의 일이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협력하는 “신인협력적”(synergistic) 행위가 아니다.

 

중생은 매우 신비스럽다. 첫째로 그 정의가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역이기 때문이며, 둘째로 사람이 중생을 관찰하거나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중생의 결과들을 관찰할 뿐이다, 새 생명의 이식이라는 좁은 의미에서의 중생을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는 언제 중생이 일어나는지 확증할 수 없다: 자기 자신에게는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더욱이 중생이 일어났다는 확실한 증거들을 잡기란 어렵기 때문에 추측할 뿐이다.

 

중생의 본질에 관해 후크마는 세 가지를 말한다. ① 중생은 갑작스러운 변화이다. 점진적인 성화처럼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다. ② 중생은 초자연적인 변화이다. ③ 중생은 근본적(radical) 변화이다. ‘근본적’(radical)이란 영어는 라틴어 ‘우리’(radix)로부터 유래되었는데, 중생은 우리 본성의 뿌리부터 변화됨을 뜻한다.

 

(4) 돌이킴(Conversion)

 

돌이킴이란 거듭남의 외형적 증거이다. 일반적으로 돌이킴은 회개와 믿음으로 구성된다. 돌이킴이란 하나는 죄로부터의 돌아섬이며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섬김에로의 돌아섬이다. 돌이킴의 ‘원인’은 하나님이시다. 좁은 의미에서 돌이킴을 거듭남으로부터 구별 짓는다면 돌이킴은 사람의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돌이켜 하나님에게 향하고, 회개하고, 믿고, 그분과 화목하기를 요청하신다. 그러므로 개종이라는 교리에서 보았던 역설의 한 예를 보게 된다. 돌이킴은 하나님의 일인 동시에 사람의 일이기도 하다.

 

진정한 돌이킴(true conversion)은 단회적(only in a person’s life) 사건이다. 성경은 민족적 개종(national conversions)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즉, 전체 국가가 주님께로 돌아오는 때를 가리킨다. (수 24:14-27, 대하 29:10-36, 왕하 23:1-3, 욘 3:1-10) 그러나 이러한 민족적 개종들은 단명하기 일쑤였다. 그 나라에 속한 모든 백성 하나하나가 진정으로 돌이킨 것은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경우 선한 왕 뒤에 악한 왕이 등극한 후 백성들은 다시 그들의 죄악 된 길로 돌아가는 일이 허다하였다. 물론, 일시적 개종이라는 것도 있다. 그것은 잠정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경우를 말한다. 즉, 종종 사람들이 회심하고 돌이키는 것 같으나 겉모양만 그렇다는 것이다. 또 다른 종류의 개종으로 제2의 회심(second conversions)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개종이다.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나가 있다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진정한 돌이킴은 오직 한번 일어날 수 있겠지만 그 형태에 있어서는 매우 다양한 변형들이 있을 수 있다. 회심에 있어서 가장 보편적인 구별은 점진적인 돌이킴과 급진적, 위기적 돌이킴이라 할 수 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권면으로 미루어 볼 때 그리스도인 부모들의 자녀들이 겪는 회심은 일반적으로 급진적인 위기심보다는 점진적인 형태의 회심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언약의 자녀는 마땅히 개인적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해야만 한다. 각자마다 죄에 대한 개인적인 인식이 신앙의 깊어짐이 구원의 축복들에 대한 감사가 그리고 주님을 섬기는 일에 대한 헌신이 있어야만 한다.

 

돌이킴은 구원과정 중의 한 국면으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동일한 방식으로 개종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규격품 식의 개종 양태를 설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경건주의자들이나 신비적 경향이 있는 사람들은 격렬하고 갈등하는 영혼의 고뇌를 지나 절망의 벼랑에 서 본 경험이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회심을 거쳤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죄에 대한 진정한 회심을 거쳤다고 말할지라도 모른다. 물론, 죄에 대한 진정한 슬픔을 소유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동일한 종류의 감정적인 회심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주장하기를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회심한 날과 시간을 알아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오직 위기적 회심만이 진정한 것이라는 이해가 전제되곤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인 패턴을 설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일일 뿐아니라 성경과도 상충한다. 돌이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도 아니고 그것이 언제 일어났는가도 아니라 그 돌이킴의 진정함에 있다. 만일 사람이 이미 잘못된 방향에 들어서서 가고 있다면 몇 골목을 돌아서 갈 것인가 아니면 지금 곧바로 갈 것인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는 궁극적으로 사람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5) 회개(Repentance)

 

마태복음서는 자기들의 죄들에 대해 슬퍼했던 두 사람에 관한 기사를 싣고 있다. 첫 번째 사람은 자기의 주님을 부끄럽게도 부인했던 베드로이다. 주를 부인한 후 “밖에 나가 통곡하였던”(마 26:75) 인물이었다. 그러나 몇 날 후에 예수께서는 그를 사도직에 다시 복귀시키면서 자기의 양을 기르라고 말씀하셨다. (요 21:15-17) 또 다른 인물은 은 삼십 냥에 자기의 주인을 배반하였던 유다이다. 예수께서 재판정에서 정죄 받는 것을 보고 그는 “스스로 뉘우쳐”(repented himself, KJV) 이르기를 “내가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 27:3) 그 후 그는 은 삼십 냥을 성전에 던져버리고 달려 나가 목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두 사람 사이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었다. 죄의 용서함과 회복이라는 선물을 받게 된 베드로의 회개는 참된 것이었다. 그러나 유다의 회개는 그렇지 못하였다. 자기의 잘못을 인식하기는 했으나 그가 자기의 죄를 예수께 고백하고 그에게 용서함을 구하였다는 증거가 없다. 흠정 역에 “회개하였다”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metavnoia’(메타노이아)라는 동사형인데 직역하자면, “일이 일어난 후에 관심을 갖는다”라는 뜻이다. 반면에 NIV 역은 ”그는 자책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번역하고 있다. 유다의 자살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 중에 가장 슬픈 한 장을 장식하고 있다. 이 사건은 예수의 준엄하신 말씀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다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마 26:24) 회개를 뜻하는 또 하나의 단어로 신약 성경에 나타난 ‘ejpistrofhv’(에피스트레포)는 회개를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metanoevw’(메타노에오), ‘metavnoia’(메타노이아)는 대부분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는 데 사용된다.

 

그러므로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돌이킴(회심, 개종)은 두 가지 측면, 즉 회개와 신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약 성경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으로 시작하여(마 3:2) 회개의 촉구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은(계 3:19)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세례 요한과 예수의 공적 사역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 4:17)라는 선포로 시작되었다. 산상에서의 설교 역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사람들은 그들의 죄 된 행위들을 회개하고 그들의 생각 구조를 전적으로 바꾸어 예수께서 명하시는 것들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그 중심흐름이었다. 부활하신 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그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고 그들이 성경을 이해하도록 하시면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서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도다”(눅 24:46-47)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회개의 선포는 예수의 고난과 부활의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회개가 먼저인가 믿음의 순서에 대해 어떤 신학자는 회개가 믿음에 앞선다고 주장한다: “회개는 곧바로 구원받는 믿음으로 인도된다. 이 구원받는 믿음은 의롭다 칭함을 받는 조건이며 도구이다.” 그러나 다른 신학자들은 회개는 믿음을 따른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칼빈은 이 점을 매우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회개는 끊임없이 믿음을 뒤따라야 할 뿐아니라 믿음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이 점은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명확한 사실이다 … 그러한 사람은 회개의 능력을 결코 알지 못하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실제적으로 우리는 어느 것이 우선인지 말할 수 없다. 회개가 믿음과 구별될 수 있고 또 마땅히 구별되어야 하지만, 이 두 가지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중생(거듭남)으로부터 나오며 돌이킴(회심, 개종)의 두 가지 측면이라 할 수 있다.

 

머레이는 이 점을 잘 지적해 주고 있다.

 

구원으로 이끄는 믿음은 참회하는 믿음이며 생명으로 이끄는 회개 역시 신앙적인 회개이다. 믿음은 죄로부터의 구원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그러나 믿음이 죄로부터의 구원을 향한 것이라면 마땅히 죄를 증오하고 죄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는 갈망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죄에 대한 이러한 증오는 회개를 수반한다. 다시 말해서 회개가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는 것임을 기억한다면 하나님을 향하여 돌이킨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바 된 하나님의 자비를 신뢰하는 믿음을 가리킬 수밖에 없다. 믿음과 회개를 격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구원받는 믿음은 회개 속에 깊이 잠겨 있으며 회개 역시 믿음 속에 깊이 스며져 있다.

 

회개란 중생한 사람이 온전한 삶의 변화를 통해서 새로운 사고와 감정과 의지를 반영하면서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을 향하는 의식적인 돌아섬(consciousturning)이라 정의를 내릴 수 있다. 회개는 단일적인(unitary) 경험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회개는 여러 부분으로 나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회개의 다음과 같은 측면들은 구별될 수 있다. 물론, 분리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① 지적인 측면(intellectual aspect): 참된 회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존엄성을 아는 지식을 포함한다.

 

② 감정적인 측면(emotional aspect): 단지 죄의 결과들에 대해서만 아니라 죄 그 자체에 대한 가슴 저리는 슬픔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죄에 대한 비탄에 또한 기쁨이 있어야 한다. 기쁨이 상실되면 회개는 온전한 것이 아니다.

 

③ 의지적인 측면(volitional aspect): 죄로부터의 내면적인 돌아섬과 용서를 추구함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목적과 동기의 변화도 있어야 한다. 내면적인 변화는 반드시 외형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성경은 회개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역인 동시에 인간의 사역이라고 말한다. 회개를 사람의 일로 묘사하고 있는 여러 성경 구절이 있다. 이 구절들에 의하면 회개가 촉구되고 있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요청되고 있다. (사 55:7, 겔 33:11, 마 4:17, 행 3:19, 17:30, 26:18, 26:20) 그러나 사도행전 11:18에서는 회개가 하나님의 사역으로 분명히 기술되고 있다. 아니,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행하도록 하시는 사역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디모데후서 2:24에도 이와 동일한 논조가 필역되어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를 방해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다스리도록 권고하면서 “혹시 하나님께서 저희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죄인들은 마땅히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하도록 하셔야만 한다.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기를 사람들이 회개해야만 한다고 하고 있다.

 

회개는 한평생 계속 지속되어야 한다. 루터의 유명한 95개 조항 중 첫 번째 항목은 다음과 같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Poenitentiamagite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성도의 전 생애가 회개이어야 한다는 의지를 표명하셨다.” 이 말은 회개에 관한 가장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또 다른 위대한 개혁자인 칼빈도 이와 비슷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하나님 형상의 회복은 한순간이나 하루나 한 해에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계속적이고 때로는 느린 행보를 통하여 하나님은 그의 택한 자들 속에 있는 육신의 부패들을 제거하시며, 그들로부터 죄책을 깨끗케 씻기시며, 그들을 성전들로 자기에게 봉헌시키시고 그들의 모든 마음을 참된 성결로 새롭게 하신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평생을 통하여 회개를 실행하고 이러한 전쟁(회개)이 오직 임종 시에나 끝이 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시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대하여 가장 몹쓸 짓을 했다는 사실을 배운 사람에게 대하여 가장 크게 혜택을 주신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이러한 진흙탕 속에 갇혀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급히 쫓아가 그분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속에서 접붙여진 후에 계속적으로 회개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라.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따르라고 요구하신 그리스도의 요청은 마땅히 평생토록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바울도 그의 독자들에게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롬 12:2)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은 우리들이 한평생 이루어 나가야 할 사명이며 도전을 말한다.

 

회개가 평생의 작업이라는 사실은 몇몇 매우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인 생활의 초반부에 있는 처음 회개와 그 뒤 평생토록 계속 되어지는 회개 사이에 구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둘째, 평생에 이르는 의미에서 회개가 근본적으로 성화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셋째, 회개는 결코 우리에 의해서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공로적 행위 때문이 아니라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들 때문이다.

 

(6) 믿음(Faith)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약에서 보통 믿음으로 사용된 명사와 동사 ‘피스티스’(pivsti")와 ‘피스토오’(pistovw)은 약 240번 나온다. 믿음은 회개와 함께 돌이킴의 본질적 측면에서 구원의 필수 요건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것같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다. (히 11:6)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유별난 “행위(work)로(요 6:29)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도록 명하신 일이다. (요일 13:23) 요한의 말처럼 복음서 기자들의 목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구원받는 방법이며(롬 10:9) 확실한 소망으로 가는 길이다. (히 11:1) 부활할 때까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위해 보호를 받는다. (벧전 1:5)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의뢰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사랑을 통하여 역사하는 믿음이다. (갈 5:6) 누가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믿는 자들’(believers)이라 부름으로써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행 2:44)

 

구원하는 신앙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으로서 전 인격, 즉 구원에 있어서 복음에 대한 확신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섬김에 대한 참된 서약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신약의 의미에서 신앙은 사도들이나 다른 자들의 증거의 근거가 참된 체계로 받아들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구속주로서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믿음의 여러 측면은 비록 분리될 수는 없으나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① 지식(knowledge): 성경은 지식이 없이는 참된 믿음이 있을 수 없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며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를 위한 그분의 구원하신 사역을 붙잡는 것이기에 믿음에 포함된 지식은 포괄적 이해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② 찬동(assent): 찬동이란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들을 참 되다고 확고히 받아들이는 행위를 뜻한다. 그런 찬동은 전 인격, 즉 우리의 전 주체가 성경이 가르치는 죄, 그리스도의 구원 그리고 우리의 생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들을 진리로서 받아들임이 포함되어야 한다. ③ 신뢰(trust): 이것이 믿음의 왕관이다. 참된 믿음은 신뢰를 포함한다는 것은 성경에서 믿음에 대해 사용된 단어들과 믿음을 기술하는 데 사용된 비유들 그리고 믿음에 포함된 활동력의 본질이 증거한다. 믿음은 자신을 보지 아니하고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의 세 가지 측면은 비록 때때로 어느 한 명이 다른 면보다 더 중요할지라도 분리될 수는 없다. 믿음은 전인격을 포함한다는 것을 기억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실로 믿음보다 생명의 질에 있어서 더욱 결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믿음의 중심적 신비(central mystery)란 의미는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 또다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역설(paradox)이 있다. ① 하나님의 선물(the Gift of God)로서의 믿음: 특정한 성경 본문들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가르치는 것을 찾기란 어렵다. 구원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참된 믿음을 소유하도록 하지 않으시면 그런 참된 믿음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포함한다. 수많은 성경 구절이 이것을 직접 가르쳐준다. ② 인간의 행위로서의 믿음(the Task of Man): 선포자와 선교사 그리고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증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책임은 선포되고 교육되고 읽혀진 말씀에 의해 믿음이 성장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비록 복음을 믿는 것이 인간의 책임이지만, 믿음이란 전혀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다. 구원받는 것은 에베소서 2:8-9에서 은혜로 인해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후크마는 구원의 확신(assurance)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이 은혜로만 구원을 얻느냐 아니면 부분적으로 자신의 구원이 공적이 되는 선행에 좌우되느냐 하는 것이다. 후자가 사실이라면 누구도 구원을 확신할 수가 없다. 그러나 개혁자들(the Reformers)의 가르침처럼 전자가 사실이라면 비록 항상 구원의 확신에 차 있지는 않다고 해도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칼빈은 성도가 때때로 구원의 확신이 부족할 수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칼빈의 이러한 견해는 칼빈이 확신을 불가능한 것이 전혀 아니라 구원의 본질적인 요소로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칼빈은 구원하는 신앙과 용서받았다는 확신 사이에 어떤 분열도 허락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믿음과 확신을 분리하려는 것은 태양 빛과 태양열로부터 태양을 분리하는 것과 같다.

 

메이첸(Jean Gresham Machen)은 “우리의 구원은 우리 믿음의 강도에 좌우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믿음의 연약함이나 무가치하다고 한 생각 모두 구원의 확신을 흔들 수는 없다. 그 확신의 배경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와 인간을 위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안에서 온전히 발견된다.

 

(7) 칭의(Justification)

 

칭의란 법적으로 법과 일치한 사람을 의롭게 선포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의롭다는 선포는 믿음으로 의롭게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믿는 죄인들에게 법적으로 의가 전가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칭의를 다루는 현저한 구절로 창세기 15:6을 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몸에서 한 아들이 태어나 그의 후사가 될 것과 그의 후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를 믿었다. 이를 의로 여기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다. 로마서 3:22절에서는 그리스도를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는 하나님께서 공급하는 의로움으로 그것은 선포적이며, 법정적이다. 믿음에 의한 칭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칭의의 교리는 구약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율법과 선지자들이 증거했다. 칭의는 믿음으로 주어진다. 이 칭의에 대한 필요성은 로마서 3:22-23의 마지막에 확언되고 있다. “차별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 칭의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다. 칭의의 사역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지만 그런데도 모든 것을 공평하고 바르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이해할 때 칭의 속에 하나님의 공의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처럼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의 관계가 우리의 칭의에 있어서는 갈등이 없는데 그것은 양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칭의가 믿음으로써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칭의 교리를 가장 극적으로 진술한 부분은 빌립보서 3:8-9일 것이다. 이 부분에서 바울은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오직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에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 믿음을 통해서 이처럼 획득된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버린 모든 것들과 비교할 때 비교할 수 없는 무한한 가치의 보화이다. 그런데 야고보는 행위 없이는 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야고보가 지적하는 것은 믿음은 행위에 의해 온전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기쁜 순종의 역사로 그의 진실한 믿음을 나타낸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뿐이지만, 그러나 의롭게 되는 믿음은 홀로인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이다.

 

하이델베르그 교리 문답서에서는 인간의 칭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죄에 대한 그리고 끊임없이 죄에 빠지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의 경향에 대한 깊은 자각과 함께 어울려 진행된다고 한다. 칭의는 받을 자격이 없는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의 선물이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와 의의 전가로 정의된다.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신 것처럼 순종하였던 것처럼 우리를 인정해주는 것이며, 우리는 믿음으로 이런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칭의는 효력 있는 부르심과 결부된다. 칭의는 의의 주입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의 전가의 의미로 이해된다. 칭의의 소극적이고 적극적인 면들이 다 언급되는데 죄의 용서와 성도들을 의로운 자들로 인정하는 것이다. 칭의는 믿음으로 받으며 의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인간의 공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신앙이란 칭의를 받는 유일한 도구이며 신앙은 결코 홀로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 역사하는 것이다. 칭의는 은혜로우면서도(gracious) 법적인(judical) 하나님의 행위(act)이다. 이로써 하나님은 믿는 죄인들을 ‘의롭다’(righteous)고 선언하시는 데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의 것으로 양도되고, 그들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며, 그들을 자기의 자녀로 입적시키고 또한 그들에게 영생을 누릴 권리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칭의는 다음과 같이 이해되어야 한다.

 

① 칭의의 교리는 “하나님 진노의 실상”(the reality of God’s wrath)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분노를 겨냥하고 계신다고 명백히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모두가 다 본질상 하나님 진노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엡 2:3) 그 진노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닥치는 것이다. (엡 5:6) 따라서 칭의의 교리를 하나님의 진노라는 암울한 배경에서 빛나는 은혜로운 메시지로 이해해야 한다.

 

② 칭의는 하나님의 선언적(declarative), 법적인(judical) 행위이지 어떤 과정(process)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의(the righteousness of Christ)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단 한 번 일어난다. 그렇지만 성도는 끊임없는 믿음의 실천으로 계속해서 자신의 칭의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칭의라는 복은 그것이 받아들여진 후로는 위로(comfort)와 평화(peace)와 기쁨(joy)의 끝없는 원천이 되는 것이다.

 

③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만(faith alone) 받아들여지며, 우리 자신들의 선한 행위들(good works)로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다. (롬 3:28) 헨드리쿠스 벌콥(Hendrikus Berkhof)은 우리가 믿음으로 칭의를 받아들인 것은 실제적으로 체험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는 것이다.

 

④ 칭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서 우리의 소유가 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one with Christ)가 되었기 때문이다. 칭의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기초를 두고 있다.

 

⑤ 칭의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the substitutionary work of Christ)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자리를 바꾸어 우리의 신분과 입장이 되신 것과 우리가 받아 마땅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우리 대신 받으신 것을 포함한다. 그리스도는 대속물(substitute)로 그 저주를 담당하셨는데, 저주가 되시기까지 그리하신 것은 그 저주로부터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다. (갈 3:13)

 

⑥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 것”(the imputation of Chris’s righteousness)을 포함한다. 특히, 바울이 칭의에 의해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다는 사상을 발전시켰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의라는 말로써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시고 하나님의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획득하신 공로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의를 전가시키거나 의를 우리의 것으로 돌리는 등의 일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을 확증하는 것이다.

 

⑦ 칭의에서는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함께”(God's mercy and justice come together) 나타난다. 성경은 때때로 하나님의 본성에 속한 이 두 가지 상호보완적인 성격을 함께 드러낸다. 우리의 칭의에서 이 두 가지 성격이 다 충족된다. 칭의는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놀라운 선물이어서 그것은 전적으로 받을 자격도 공로도 없는데 주어지는 과분한 것이다.

 

⑧ 칭의는 소극적인(negative) 면과 적극적인(positive) 면을 다 가지고 있다. 전자는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forgiveness)를 의미한다. 후자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양자 되는 것(adoption)과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권리를 받게 되는 것을 포함한다.

 

⑨ 칭의는 “종말론적인 것들”(eschatology implications)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의 날에 선고하실 판결을 현재로 옮겨온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심판의 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데 이유는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요 5:24) 하나님의 자녀들로 양자 된 것은 우리의 칭의의 열매 중의 하나인데 하나님의 양자 되는 복(롬 8:23)이 장차 완성될 것을 예시한다. 또한, 우리의 칭의가 부여하는 영생 얻는 권리는 결단코 끝나지 않는 어떤 선물(요 11:25-26)을 준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일단 한 번 받은 칭의는 결코 잃을 수 없는 것이다.

 

⑩ 칭의가 “성화로부터 절대 분리되어서는 안 되지만”(must never be seperated from sanctification) 이 두 복은 “서로 구별된다(aredistinct).” 칭의와 성화가 결단코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즉, 하나님은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반드시 성화도 시킨다. (고전 1:30) 그러나 칭의와 성화의 구별은 중요하다. 그 이유는 첫째, 이런 구원론적인 복들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의 진가를 충분히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더 나아가서 칭의는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그들의 행위는 전혀 관계없이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의 칭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순종에 기초하며 우리 자신의 선행들에는 조금도 기초하지 않는다.

 

(8) 성화(Sanctification)

 

하나님은 그 자신이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은(created in his image) 우리에게도 역시 거룩해지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성도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성화’라고 한다. 성화란 죄의 오염으로부터 사람들을 건지셔서 그 본성 전체를 새롭게 하시고 주님을 즐겁게 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로운 역사를 말한다. 성화는 우리의 본성을 새롭게 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룩을 위한 방편에 대해서 성경은 우선 그리스도와 함께한 연합 가운데 있는 것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거룩해진다는 것에 대해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안에서 그와 함께 연합되었기 때문에 거룩하게 된다고 가르친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계속 증거한다. 우리가 성화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서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다. 첫째,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을 계속 유지한다. 둘째, 우리는 믿음으로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셋째,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를 극복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믿음은 수용하는 기능일 뿐만 아니라 작동하는 능력임을 알아야 한다.

 

성화의 모형(the pattern of God)은 하나님을 닮는 것(likeness)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시다. (요 14:8-9, 골 1:15, 히 1:3) 그래서 우리는 성화의 모형이 그리스도와 같다(likeness)고 말할 수 있다. 성화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에 일치되도록 회복(renewal)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의 능동적인 노력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성화의 과정에서 우리는 진심으로 죄와 투쟁해서 승리해야 한다. 이미 받은 구원을 계속적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시키고, 모든 활동 속에서 구원받았음이 분명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성화란 성도들의 노력을 포함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즉각적인(definitive) 행위인 동시에 단번에 완성되는(occurring once for all) 칭의와 구별하여 성화를 성도의 전 생애 동안 계속되는 것으로 주장한다. 성화는 점진적인(progressive) 과정이다. 무엇보다도 죄가 아직도 성도들 속에 현존한다는 성경적 가르침을 통해서 볼 때 성화의 점진적인 측면은 명백해진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 속에 죄가 계속 현존하기 때문이다. 비록 신약 성경이 가끔 성화를 전 생애의 과정으로 묘사하지만 역시 신약 기자들은 성화를 광대한 기간보다도 오히려 특별한 시점에서 발생하는 즉각적인 하나님의 사역으로 서술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즉, 성화를 즉각적인 의미로 묘사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교훈할 뿐 아니라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결정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살아났음을 확정한다. 즉각적이거나 순간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시제를 가진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바울은 “하나님이 …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 또 함께 일으키사 …”(엡 2:4-6)라고 단언한다. 즉각적인 성화에 대한 성경적인 교훈은 성도들이 자신이나 다른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해서 죽었으며, 지금 새로운 피조물이 된 존재로 생각해야 할 것을 시사한다. 확실하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새로움은 무죄 완전한 것이 아니다. 성도들은 세상에서 사는 동안 추악한 죄와 대항하여 투쟁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때때로 죄 가운데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비록 아직 전적으로 새롭게 되지 않았지만 자신이나 다른 성도들을 진정으로 새로워진 인격체로 대우해야 한다. 그러나 즉각적인 성화의 교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이 단호하고 분명하게 죄와 관계를 끊어 버릴 것을 암시한다.

 

점진적인 성화는 성화를 전 생애 동안 진행되는 과정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점진적인 성화는 바울과 누가가 말한 즉각적인 성화를 부정하기보다는 오히려 보충한다. 점진적인 의미에 있어서 성화는 계속 새롭게 하시며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며, 우리를 계속 은총 가운데 성장하도록 하시며 또 우리의 거룩이 완전해지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인식되어야 한다. 바울이 말하는 죄의 지배를 받는 인간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 그는 우리 옛사람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해서 처리하셨다. 성도는 아직도 그 속에 남아 있는 죄로 향하려는 성향과 투쟁해야 한다. 성도는 마귀의 권세에 대항하여 승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며 그리고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한다. 그러나 비록 죄에 대한 투쟁이 매우 실제적이지만 성도는 이제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기독교인은 더 이상 옛사람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새워지고 있는 새 사람이다. 성도는 아직 죄에 대항하여 투쟁하며 또 때로는 죄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는 지금 죄에 대항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성화는 즉각적인 동시에 점진적인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각적인 의미에 있어서 성화는 우리를 죄에 대하여 죽게 하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시키며, 우리를 계속 은총 가운데 성장하도록 하시며 또 우리의 거룩이 완전해지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의미한다. 점진적인 의미에 있어서 성화는 계속 새롭게 하시며, 우리를 계속 은총 가운데 성장하도록 하시며 또 우리의 거룩이 완전해지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인식되어야 한다. 고로 우리는 성화 과정의 시작으로써 즉각적인 성화와 그리고 즉각적인 성화에 의하여 창조된 새로운 인격(the new person)의 지속적인 성숙으로써의 점진적인 성화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다. 양쪽 측면을 포괄하는 전체적인(totality) 성화가 시종 하나님의 사역인 동시에 한편으로 역시 성도의 능동적인 참여를 필요로 한다. 성도들은 믿음으로 즉각적인 성화를 거쳐 자기의 것으로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점진적 성화가 그 목적인 온전한 거룩에 이르도록 계속 노력해야 한다.

 

성화의 목적에는 최종적인(final) 것과 그에 가까운 근사치적(proximate) 목적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화의 최종적인 목적임을 지시한다. (엡 1:4-5, 12, 14, 2:8, 빌 1:9-11) 또한, 성화의 가장 가까운 목적은 하나님 백성의 완전이다. 이 완전은 하나님 향상의 역사에 있어서 최종 단계가 된다.

 

우리의 성화가 완전해졌을 때 우리는 전적으로 영화로우신 그리스도와 같이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면하여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완전하게(totally and undividedly) 영원한 세계에서 하나님의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9) 참 성도들의 견인(The Perseverance of True Believers)

 

견인의 교리는 모든 예배 참석자나 교회 회중(churchgoer)이 신앙 안에서 끝까지 견인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는 공적으로 신앙 고백하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안전하게 된다는 것이나 우리에게 참 성도(true believer)로 보이는 모든 사람이 결코 신앙에서 떠나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시하지 않는다. 더구나 이 교리는 성경이 분명하게 언약을 깨뜨리는 사람이 있다고 증거하기 때문에 구속사 가운데 드러난 은혜 언약 속으로 결합한 모든 사람이 영원히 안전하게 된다는 개념도 아니다.

 

참 성도의 인내 교리(the doctrine of the perseverance)가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다. 참된 신앙을 소유한 성도들은 믿음을 ‘전적으로’(totally) 또는 ‘마침내’(finally) 잃어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관한 참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참 신앙을 가진 성도가 그 신앙을 언젠가 잃어버릴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개혁주의 노선에 있는 사람은 ‘아니다’라고 대답한다.그러나 이 대답을 함에 있어 칼빈주의자는 성도의 우수한 영적 능력에 토대를 두지 않고 그의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께 근거를 두고 대답한다. 칼빈주의자는 하나님께서 참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신앙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참 성도는 그들의 능력 때문에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인내한다.

 

여기에서 용어의 차이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이 교리에 있어서 ‘참 성도의 견인’(the perseverance of true believers)이라는 표현이 적당한가 아니면 ‘택자의 보존’(the preservation of the elect)이라는 표현이 적합한가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 가지 질문의 요지는 어느 측면에서 용어를 바라보는가의 문제로 축약할 수 있겠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을 보존하시지만,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 안에서 자신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가장 강력하고 집중적인 헌신과 결심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참 성도의 견인이란 표현을 쓰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견인의 교리에 대해 이것이 성경에 근거를 둔 것이라기보다는 칼빈주의적 교리에서부터 철학적이고 교리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연역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참 성도의 견인 교리는 분명하게 다른 철학적이며 교리적인 근거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 증거들은 복음서를 비롯해서 여러 곳에서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눅 22:31-32, 요 5:24, 6:39, 10:27-28, 롬 8:29-30, 고전 1:22, 엡 1:13-14, 빌 1:4-6, 딤후 4:18, 히 7:23-24, 벧전1:3-5 등)

 

견인 교리에 대한 반대 의견이 있다. 견인 교리를 거부하는 사람들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그 이유로는 첫째, 견인 교리는 자기도취(complacency)와 도덕적 방종(morallexity)을 가져온다. 즉, 성도의 견인이 하나님에 의해서 보장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삶의 길에 부주의하게 되고 죄에 대항하여 투쟁하기를 중지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세속적이며 미온하게 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이 교리의 풍자적인 면만 수용하는 것이지 교리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이런 방종에 대해서 경고한다. (고전 10:12) 견인 교리는 참 신자에게 만족스러운 것이다. 그 속에 내주하시며 역사하시는 성령을 모시고 있는 참 신자는 구원의 귀중한 선물에 대하여 감사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위하여 살려고 하는 열정이 있다. 둘째로 견인 교리가 성경과 상충된다(contrary)는 것이 있다. 이 부분에서는 세 가지 형태가 제시되는데 ① 믿음을 지속하라는 권면(exhortations)이 성경에 나온다는 것이다. ② 배교(against apostasy)에 대한 경고가 있다는 것이다. ③ 실제적인 배교(actuala postasy)의 경우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대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제에 소속된 같이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 실제로 거짓 성도들이 항상 있었고 지금도 존재함을 가르친다 .참 성도의 견인 교리는 성경에서 가장 많은 위로의 교훈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이 교리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운다. 즉, 하나님은 그의 능력으로 자기의 백성들이 자기에게서 떠나 타락하지 않도록 지키시며, 그리스도는 누가 자기의 손에서 자기의 양을 빼앗아 가도록 허락하지 않으시며 그리고 성령은 구속의 날까지 그들에게 인치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그의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심으로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신다. 동시에 견인 교리는 우리에게 신앙 안에서 인내하라고 격려한다. 즉, 이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그리고 그의 은총에 의하여 인내할 수 있다. 단지 위안만 강조하고 책임을 간과하며 오직 안전만 주고 권고하지 않는 이전 방법으로 이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한쪽 측면만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 성도의 견인 교리는 위안(comfort)과 책임(challenge)을 포함한다. 그러나 책임은 하나님의 위안에 그 바탕을 둔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시겠다고 하신 약속 때문에 끝까지 인내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토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을 확신한다.

 

3. 평가

 

학자들 간에 ‘구원의 서정’에 대한 일치점을 보지 못하고 있다. ‘구원의 서정’에서 나타나는 세 가지 접근 방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머레이는 성경으로부터 구원의 명확한 구원의 순서가 추출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롬 8:23을 바탕으로 ‘부르심’, ‘중생’, ‘믿음과 회개’, ‘칭의’, ‘양자 삼으심’, ‘성화’, ‘견인’ 그리고 ‘영화’라고 이해될 수 있다. 벌콥은 그는 ‘부르심’, ‘중생’, ‘돌이킴’(회개와 믿음 포함), ‘칭의’, ‘성화’, ‘견인’ 그리고 ‘영화’를 그 순서로 제시한다. 이에 반해 벌카우어는 그는 ‘구원의 서정’이란 개념에 대해서 매우 불만족스러워 한다. 그는 ‘구원의 서정’이라는 말 자체를 반대한다. 이런 순서에 대한 몰입은 구원 자체가 갖는 풍요함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구원의 서정’이라는 표현 보다는 구원의 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를 좋아한다.

 

후크마는 위의 학자들에 비슷하면서도 독특한 순서를 정하고 있다. ‘복음의 초청’, ‘효력 있는 부르심’, ‘중생’, ‘돌이킴’, ‘회개’, ‘믿음’, ‘칭의’, ‘성화’ 그리고 ‘영화’이다. 여기에서 후크마는 부르심을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즉, 복음의 초청과 효력 있는 부르심이다. 위에 든 학자들은 이를 분리하고 있지 않으나 후크마는 이를 분리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한다. 이는 단지 ‘부르심’에 관해서만은 아니다. 모든 순서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고, 그런 후에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주의 영(the Spirit of Lord, 고후 3:17), 그리스도의 영(롬 8:9, 벧전 1:11), 예수 그리스도의 영(빌 1:19), 하나님의 아들의 영(갈 4:6)으로 불리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 동참케 될 때, 성령에 동참케 되는 것이다.

 

후크마는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은 그 뿌리를 하나님의 택정(divine election) 하심에 두고 있다. (엡 1:3-4) 이는 인간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창세 이전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택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후크마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두고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그리스도의 친 백성이요, 영원토록 그리스도에게 속한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 사역을 그리스도의 공로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소유된 자들의 실제적 연합이 가능케 된 것은 오로지 구세주가 그의 백성을 위해 이 모든 일을 행하셨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해 앞서 벌콥은 ‘신비적 연합’(the mystical un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벌콥은 이 용어에 대해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은 신비적이며 초자연적(super natural) 방식으로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며, 바로 그러한 이유로 신비적 연합”(unio mystica)라고 정의 내린다. 또한, 벌콥은 칼빈의 말을 빌어 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구원의 혜택들에 참여할 수 없다는 사상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이를 매우 중요한 진리로 강조한다. 후크마의 용어의 제시는 여기에서도 나타난다. 후크마는 벌콥이 사용한 ‘신비적 연합’ 대신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사용한다. 즉, 이 용어는 벌콥이 사용한 ‘신비적 연합’에 대한 주해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성화’에 있어서 후크마는 머레이를 따르면서도 머레이를 앞서고 있다. 즉, 후크마가 ‘성화’ 주제를 다룰 때 머레이를 따르면서 성경적으로 보면 ‘점진적인 성화’(progressive sanctification)와 함께 ‘즉각적인(단정적) 성화’(definitive sanctification)를 주장하면서 이를 명확히 한 일을 들 수 있다. 이 ‘즉각적인 성화’를 표현하는 예로 후크마가 언급하는 구절은 고린도전서 1:2, 6:11, 사도행전 20:32, 26:18, 로마서 6:2, 6, 14, 17, 에베소서 2:4-6, 골로새서 3:1, 고린도후서 5:17 등이다. 그리고 후크마는 이런 의미로 사용한다면 이를 세대주의자들이 애호하는 용어인 ‘신분적인 성화’(positional sanctification)로 부를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신분적 성화를 ‘전가’나 ‘선언’ 등의 개념과 같이 사용하면 이는 성화와 칭의를 구별하지 않게 할 수도 있으므로 유의해야 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후크마는 ‘즉각적 성화’가 ‘칭의’와 비슷하게 이해되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화도 용례에 근거해서 성경의 용법을 반영하면서 ‘즉각적 성화’와 ‘점진적 성화’를 다 잘 소개하고 그에 충실하려는 노력은 성경 주해에 근거해서 교의학을 하는 좋은 예로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이 ‘즉각적 성화’와 ‘칭의’의 관계를 정확히 밝히는 일이 후크마에게서 남겨진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후크마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누가 죄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는가를 결정하는 결정적 요인 비록 인간의 결정이 중요한 역할을 함은 분명하나, 인간의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다. 둘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용되는 구원은 그 뿌리를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계획 속에 두고 있으며, 그 계획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어떤 공로를 근거로 해서가 아니라 전적인 그의 미쁘신 뜻대로 그의 백성들에게 영생을 주시고자 그들을 택하신 것이다. 그는 구원의 서정에 대해 그것은 구원의 과정이나 순서가 아니라 구원은 단일한 경험으로 이해한다. 철저히 성경적 개혁주의 입장을 견지한다.

 

기존의 구원론과 다른 점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다루고 있다는 것과 소위 구원의 서정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서정에 대한 적절한 이해는 구원과정의 다양한 국면들을 연속적인 것들로 보다는 동시적인 것들이라고 후크마는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구원은 과거와 현재에 적용된 것도 있으나 앞에서 완성되어야 할 점도 있다. 즉,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고 하신 일은 이미 과거에 되어졌으나, 성화는 현재도 계속 진행되고 있으며, 영화롭게 하시는 일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완성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는 이같은 구원의 서정을 ‘구원의 길’로 쉽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마 7:13-14) 그것은 두 길, 즉 멸망의 길과 생명의 길이다. (행 18:25-26, 고전 4:17, 벧후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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