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계시록!!! 마라나타!!!

계시록에 나타난 상징적 형상들 및 흐름

하나님아들 2023. 9. 15. 20:28

계시록에 나타난 상징적 형상들 및 흐름     

 

 

계시록에 나타난 주요 상징적 형상들

 

1. 선한 형상들

선한 형상들 형상의 의미 관련 성구
  일곱 금 촛대   예수님 복음의 참 빛을 소유하고 세상에
  흩어져 있는 개교회들
계 1:12
  촛대 사이에
  있는 인자 
  같은 이
  교회의 머리로서 권능과 위엄으로 교회를
   다스리시는 성자 예수님 
계 1:13-16
  하늘 보좌 위에
  앉으신 이
  위엄과 권세로 우주의 역사를 주관하
  시는 초월자 여호와
계 4:2
  보좌 주변의 네 
  생물
  모든 우주 네 방향에 편만한 모든 피조물
  들의 대표
계 4:5-11
  일곱 뿔과 일곱 
  눈의 어린 양
  신성이 충만하시며 세상에 성령을 보내신
  성자 예수님
계 5:6
  여호와의 인을 
  가진 네 천사
  여호와의 사자들로서 여호와와 어린양에
  속한 자들을 보호하는 자들
계 7:1-4
  머리 위에 무지
  개가 있는 힘센 
  천사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고 계시를 전달
  하는 천사 장 미가엘 
계 10:1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신구약 복음과 복음을 세상에 증거 할 
  예수의 증인들
계 11:4
  해를 입은 한 여
  자
  영적으로 여호와의 선민이 된 참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 
계 12:1
  백마 탄 충신과 
  진실
  교회에 대해 약속하신 바를 신실하게 
  지키시는 재림 주 예수
계 19:1
  흰 보좌 위에 
  앉으신 자
  위엄과 권능으로 모든 우주를 최후 심판
  하시는 성부 여호와 
계 20:11


2. 악한 형상들

악한 형상들 형상의 의미 관련 성구
  황 충   여호와의 인을 맞지 않는 불신자들을 
  괴롭히는 사단의 세력 
계 9:4
  큰 붉은 용   옛 뱀 또는 마귀로도 불리는 무서운 
  권세와 잔인한 본성을 지닌 사단
계 12:3
  열 뿔과 일곱 머
  리의 짐승
  사단의 부하들 중 괴수로 모든 세계를 
  지배할 만한 큰 권세를 가진 적그리스도 
계 13:1
  새끼 양 같이 두 
  뿔 달린 짐승
  적그리스도에게 수종들며 어린 양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
계 13:11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
  사단의 사주를 받은 각종 악령들 계 16:13-14
  큰 음녀   우상 숭배와 부패를 조장하는 세상 권세의
  중심 세력
계 17:1
  큰 성 바벨론   죄성으로 오염된 세상 문명의 중심지 계 18:2

 그랜드종합주석 계시록 18장 pp928-929

 

  요한 계시록   적극   가르쳐라

 

이단들의 준동이 날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는 가운데 한국교회의 건전한 성장과 방어를 위해 요한계시록을 성도들에게 적극적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단들이 상징과 은유가 많은 계시록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마치 대단한 비밀을 지닌 것처럼 내세워 성도들을 미혹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기성교회 성도들을 위한 〈평신도를 위한 요한계시록 공과〉가 출간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책의 출간을 계기로 그동안 이단들이 자의적으로 해석해온 계시록의 특정 구절이나 단어들을 정리해본다. 〈편집자 주〉

 

구름타고 오시는 이

먼저 계시록 1장 7절의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구절은 재림 예수는 땅에서 오시지 않고 하늘로부터 구름들과 함께, 능력으로 임할 것을 말씀한다. 또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라는 말씀도 예수님의 재림이 은밀한 사건이 아니라 공개적인 사건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한국의 어떤 이단은 “구름을 타고 오시는 예수님은 ‘영’이다. 구름 속에서 변형되신 예수님의 모습은 성령체였으며 육체가 아니었다. 영으로 오시는 재림 예수님은 사도 요한의 입장에 있는 목자와 함께 역사하신다”고 가르친다. 이는 예수님이 육체적이고 가시적이며 인격적으로 오실 것을 부인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이기는 자

계시록 2장 7절 하반절의 “이기는 자”는 끝까지 변절치 않고 믿음을 지키는 자다. 이는 원칙적으로 모든 성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어떤 이단은 ‘이기는 자’를 신자로 묘사하기도 하면서, 그와 비슷한 표현인 ‘이긴 자’는 이단 교주와 연관 짓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긴 자’는 그들이 교주를 가리키는 말인 ‘사도요한격 목자’, ‘보혜사’(정통 교회가 믿고 있는 성령을 의미하지 않음) 등의 용어와 동격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계 5:5, 6:2에서 ‘이긴 자’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1:7, 2:26에서 ‘이기는 자’는 성도들을 가리킨다. ‘이긴 자’는 그리스도이지 결코 이단교주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또 이기는 자는 계 12:5에 나오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와 동일 인물이 아니다. ‘이기는 자’는 성도들이며 계 12절에 나오는 여자가 낳은 아이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 바른 해석이다. 

24장로들/14만4000명 계 4:4절의 ‘24장로들’은 문자적 의미로 취할 수 없다. 이는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들은 구약과 신약의 교회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옳다. ‘24’는 ‘12’+’12’인데 교회는 구약의 열두 지파와 신약의 12사도의 토대 위에 세워져 있다. 

 

계 7:4-8의 14만4000명도 오용되는 상징적 숫자 가운데 대표적이다. 이는 144,000=12X12,000= 12X12X1,000으로서 택함 받은 하나님 백성의 총수를 가리킨다고 봐야 한다. 하나님 백성의 총수, 또는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종들의 충만한 수가 맞다. 그러나 이단들은 14만4000을 실제 수라고 가르친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자신들의 단체로 들어온 자들 14만4000명만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단은 ‘하나님의 인을 맞은 영적 새 이스라엘 12지파 144,000명은 새로 창조하는 이스라엘의 제사장 직책을 맡은 새 목자’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펼친다. 

일곱 뿔, 일곱 눈

계5:6절에는 죽임을 당한 어린양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다고 한다. ‘뿔’은 권능을 상징한다. 따라서 ‘일곱 뿔’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권세와 능력의 절대적 완전성을 의미한다. ‘일곱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요한이 친히 설명해 준다. 따라서 이는 온 세계를 두루 감찰하는 성령을 가리킨다. 그런데 어떤 이단은 “문자 그대로의 것이라면 예수님의 모습은 괴물과 같을 것이다. ‘일곱 뿔’은 ‘예수님께 속한 일곱 권세자’, 즉 ‘일곱 육체’를 말한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그 집단에 있었지만 과거에 그 단체를 떠나가 버린 사람들을 ‘일곱 뿔’이라고 가르쳐왔다. 

두 증인

 

계 11:3-4의 두 증인은 4절에 보면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말한다. ‘감람나무’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는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는 통로 또는 기관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슥 4:6). ‘두 감람나무’란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는 기관, 곧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이단 교주들은 두 증인이 ‘하나님이 끝날에 보내시는 사명자들’, “두 감람나무는 그 시대에 하나님의 권세를 받은 두 사람의 사명자를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세우신 자들은 ‘둘씩’ 나타나서 역사를 편다”, ‘사도요한’, ‘지팡이 같은 갈대로 비유한 육체’ 등으로 가르쳤다. 이는 모두 이단 집단 내부의 두 사람을 직접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한편 그동안 한국의 이단들은 거의 계시록에 대한 해설집을 발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태선의 〈설교집 2〉, 류재열의 〈영원한 생명〉, 신천지의 〈요한계시록의 실상〉, 안상홍증인회의 〈성서설교집 2권〉, 여호와의 증인의 〈계시록, 그 웅대한 결정은 가까웠다〉, 이장림의 〈요한계시록 강해〉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의 계시록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과 관련, 유사기독교상담소 소장 최병규 목사는 “이단들이 계시록을 오용하나 기성교회가 상징성과 모호성을 이유로 계시록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이는 시대적 사명을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7명의 기독교인 중 5명은 가짜(?) 

 

일곱은 완전수로 전체를 대변하는 숫자다

교회에 일곱 유형의 크리스챤들이 섞여 있다

계시록의 일곱교회 중에 5교회는 죽은 교회이고 2교회만 살아있다

교회 = 신자라면 7명중에 5명은 죽은 신자이고 2명만 살아있다

크리스챤의 71%가 죽은 신앙을 가졌다

24억명의 기독교인 인구 중 17억명이 죽은 자들이고 8억명만 살아 있는 신앙을 가졌다

 

진실하고 거룩한 신자 : 세상과 얼마나 분리되어 있는가?

타락하고 죽은 신자 : 세상과 얼마나 혼합되어 있는가?

나는 어느 유형의 신자인가?

 

  *예상인구는 정확한 통계가 아니라 가톨릭, 개신교인 인구를 감안하여 예를 든 것이다

 

 NO 신자유형   신앙평가 예상인구 예(24억명)   비율
 1  에베소 사랑없는 신자   ×   0.3억명  1.25% 
 2  서머나  고난과 박해받는 신자 O  1.29억명  5.37%
 3  버가모 타협하는 신자  × 4.06억명  16.9%
 4  두아디라  타락한 신자  ×   1.87억명  7.79%
 5  사데  죽은 신자  ×  3.47억명  14.4%
 6  빌라델비아  거룩하고 진실한 신자 O  5.71억명  23.8%
 7  라오디게아  미지근한 신자  ×  7.30억명  30.4%

 

1. 사랑없는 신자 (에베소)

 

모든 것이 완벽한 것 같지만 사랑이 없는 신자들 유형이다

그들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지만 비난과 비방하는 입을 받아 사람을 공격한다

그들 중에는 너무 정치적이어서 특정한 사람을 위하여 상대진영을 공격하거나 거짓을 옹호하기도 한다

정의와 공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사이에서 고민하는 신자들도 있지만

실제는 하나님을 대한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2. 고난과 박해받는 신자 (서머나)

 

 

가난하지만 영적으로 부자인 크리스챤이다

고난과 박해 가운데 있는 신자들이 전세계적으로 많다

나이지리아, 인도, 이슬람 국가, 불교 국가에서는 교회가 불타고 죽임을 당하며 터전에서 쫒겨나고 있다

아프리카와 이슬람 지역에 사는 신자들이 이 유형에 속하지만 그들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

 

 

3. 세상과 타협하는 신자 (버가모)

 

 

진리를 세상과 사람의 교훈으로 타협하고 혼합하는 신자들이다

세상에는 사탄의 깊은 미혹의 역사가 줄비하게 포장된 덫이 있다

순진한 영혼들이 이 덫에 걸려든다

성경을 내게 편리한 방식에 맞추어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성령과 방언을 부인하고 선교를 위험하다고 반대하며 신자에게서 기독교의 핵심인 신비적인 요소를 배제시키려 한다

성령이 없는 자들이며 사람의 지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유형이다

교황과 많은 가톨릭의 사제와 자유주의 신학대 교수와 학생들이 이 미혹에 빠져 있다 

 

 

4. 타락한 신자 (두아디라)

 

 

기독교인라면서 간음하고 음행하는 신자들이 있다

관용의 함정에 빠져서 동성애와 타종교를 관용한다

그들을 악과 죄를 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강조한다

세상사람들과 같은 도덕적 수준을 가지고 타락한 행동을 하면서도 믿음이 있으니 구원받을 것이라 주장한다

도덕적 타락, 포르노와 간음, 게임과 폭력, 부정과 거짓, 강포와 탐욕에 깊이 빠진 신자들이다

이들은 오히려 교회를 욕먹게하고 많은 사람들을 실족하게 한다

일부는 죄책감에 살면서도 죄에서 쉽게 떠나지 못하기도 한다

이 경우 예수님이 처방전을 주셨다

네 손을 잘라 버리라

손을 잘라버리는 것과 죄에서 과감하게 떠나는 것 중 어느 것이 쉬울까?

 

 

5. 죽은 신자 (사데)

 

 

이들의 신앙이 죽은 이유는 말만 하거나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온전한 행함이 없기 때문이다

행하지 않는 자는 모래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눅11:28)

선행과 구제가 없고 악하고 게으른 염소 신자로 좌편으로 분리되어 바깥 어두움으로 쫒겨날 신자들이다

착한 행실이 없고 흰옷이 더럽혀져서 휴거에 참여를 못하는 부류로 분류된다

하나님은 그들의 외식적인 행위를 다 알고 있다

 

 

6. 거룩하고 진실한 신자 (빌라델비아)

 

 

일편단심 충성스럽고 말씀대로 사는 유형으로 휴거에 참여할 신자들이다

이들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끝까지 인내한다

행실이 바르고 세상의 빛이 되어 영적으로 빛나고 깨끗한 옷을 입고 있다

적은 능력이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기도로 깨어있는 신자들이다

 

 

7. 미지근한 신자 (라오디게아)

 

 

현대교회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가진 유형으로 미지근해서 구역질나는 신자 유형이다

부자이지만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풍요로움에 영적 통찰력은 무디어졌고 연단과 고난이 없으니 안일하고 안락하게 산다

세속주의, 물질주의 행복한 라이프가 최고의 선이다

영적으로 벌거벗은 상태로 들림받지 못하는 현대의 신자들을 상징한다

사데신자들이 옷이 더럽혀 있다면 미지근한 신자들은 아예 옷이 없는 중증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이 풍성해서 안일하게 행복한 상태고 믿음이 있으니 죽어도 구원받을 것이라 생각한다 atsnu.org/_chboard


                      신자에게 있어서 ‘계시록(啓示錄)’의 가치



한국의 기독교에 있어서 오순절운동(Pentecostalism)의 영향은 거의 모든 교단이나 교파를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그렇게 된 것은 이미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올 당시부터 교파적 특색이 점차 신앙의 경험에 치우치는 방향으로의 대대적인 왜곡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적인 성경 해석과 전천년기설(Premillennialism)을 바탕으로 하는 예수재림론은 신사도운동의 기원이기도 한 1940년대 소위 늦은 비 부흥운동(New Order of the Latter Rain)의 경우와 같이 종말론에 대한 큰 왜곡을 불러왔고, 그러한 왜곡 가운데서 요한계시록과 같은 묵시문학은 많은 신자들에게 과격하고 급진적인 두려움의 책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했다. 


요한계시록과 관련하여 메이천(J. Gresham Machen, 1881-1937)은 이르기를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소망의 생활이다… 소망을 생생하게 하기 위하여 요한계시록은 미래의 영광스러운 광경을 보여준다… 요한계시록은 때와 기한을 계산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주신 책이 아니고 보좌에 계신 어린 양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책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라고 했다. 


신자들에게 요한계시록은 공포의 묵시가 가득한 두려움의 책이 아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계 1:3)에게 복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계 1:2)이다.


한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 카이퍼(Abraham Kuyper·1837∼1920),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 1894-1977) 등 화란의 굵직한 신학자들 및 철학자들에 의해 ‘일반은총’의 강조와 ‘영역주권’등을 바탕으로 이 땅에서의 신자들의 생활에 대한 강조가 한 시대를 선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에게 모든 궁극적인 완성과 안식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대망 가운데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즉 신자들에게 있어 성화의 완성, 즉 ‘영화(靈化)’는 언제나 개인적 종말 혹은 궁극적 종말 가운데서 비로소 보게 되는 믿음과 은혜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믿음의 영역, 혹은 은혜의 영역에 대한 안목과 이해는 빈약하기 이를 데 없으며, 상대적으로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강한 애착과 만족은 전혀 가시적인 영역 외에는 의미 있게 생각하지 않는 형편에까지 이르렀다. 


심지어 말씀의 사역자들도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고난과 시련의 현실 가운데서 인내하는 ‘선비’ 같은 자들이 아니라 한낱 탐관오리(貪官汚吏)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실 일반계시든지 일반은총이든지 간에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서 주어지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특별계시요 특별은총으로서의 성경 외에는 그 어떤 일반적인 것들도 구원과 같은 하나님의 깊은 지식을 전해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학이나 일반학문이 성경에 접근하는 길을 닦아주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성경을 근거로 하는 신학이 과학과 일반학문이 찾지 못하는 질문들에 답변을 하고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계시인 성경은 하나님의 택자(擇者)들 외에는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과학을 비롯한 일반학문들의 성경에 대한 관심은 결코 구원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미궁(迷宮)에 빠져버리고 마는데, 그것은 성경의 세부적 명칭 곧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이라는 단어에 어느 정도 암시되고 있는 바라 할 것이다.


구약과 신약이라는 명칭은 공히 ‘Testament’로 표기되는데, 이는 유언(遺言)이라는 의미다. 즉 첫 언약의 피와 새 언약의 중보자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그 언약(言約)이 유언의 효력을 발휘하는 의미가 구약이든 신약이든 공히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비가시적인 믿음의 영역 가운데서 그 택하심을 따라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히 9:15)하시는 새 언약의 중보자의 유언을 효과적으로 적용하시는 “영원하신 성령”(히 9:14)의 역사와 지도는 언약백성에게만 매순간 공급되는 은총의 진정한 국면이다. 그러므로 택자들 이외에는 성경이 교양을 넓히는 근거가 될 뿐, 구원에 관한 참된 지식을 전달해 주는 바탕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언약(구약과 신약)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많은 경우에 ‘Covenant’로만 생각하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흔히 본다. 마치 히브리서를 기록할 당시에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유대인(히브리인)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을 불쌍하고 어리석게 보면서 율법의 행위와 제사의 행위를 종용했었던 것처럼, 언약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쌍방의 계약이요 우리 편에서의 행위를 조건으로 해서 비로소 성립하는 계약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 언급하는 언약(διαθήκη)이라는 단어에는 ‘Covenant’만이 아니라 ‘Testament’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으며, 특별히 히브리서에서는 Testament의 의미로서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을 언급하며 공히 언약을 Testament, 즉 ‘유언’의 성격으로 소급(遡及)하고 있다.


이처럼 히브리서에서 말하고 있는 언약의 개념 가운데서 구약과 신약의 시대를 각각 생각해 보면, 공히 그 실체가 구체적으로 눈앞에 실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서 조망되어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즉 구약백성들은 예표(豫表)가운데서 믿음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구속을 바라보았고, 신약의 백성들은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영원한 기업에 대한 ‘약속’을 바라본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의 묵시적인 영광의 미래는 부르심을 입은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단적인 소망의 예시(豫示)가 된다. 


메이천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설명 가운데서 “우리는 시련 가운데서 혹은 단조로운 일상들 가운데서 우리에게 있는 소망을 상실할 위험에 항상 직면해 있다”고 하여, 미래의 영광스러운 광경을 보여주는 요한계시록의 유용함을 말한다. 


요한계시록은 회피할 두려운 책이나 당장의 실현을 조급하게 서두르도록 하는 조바심을 부르는 책이 아니라,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이미 족한 비전(Vision)의 책이라는 것이다. 


물론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 22:20)는 말씀을 당장의 현실에 적용하는 폐해(弊害)가 흔할지라도, “주 예수의 은혜”(계 22:21)는 유언을 효력 있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편에서 베푸시는 것으로서 명백하고도 분명하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놀랍게도 이 말씀은 신약이 아니라 구약성경 합 2:2-3의 말씀이다.


나아가 4절에서는 이르기를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어찌 우리가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계 1:8)의 때를 대망(大望)하지 않겠는가? 하박국서와 요한계시록 사이의 ‘성취’(예수 그리스도의 구속)를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현대의 신자들에게 요한계시록이 멀리 있는 두려움이 책으로 되어버린 것은 그만큼 진정한 은혜와는 멀고 현실의 복락에 치우쳐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으로서, 이는 요한계시록에 있는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이라는 마지막 구절이 교훈하는 바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성경의 마지막은 바로 ‘은혜’, 즉 유언을 효력 있게 하신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혜다. 우리들의 그 어떤 수고와 노력과 헌신과 열정도, 그 너머에 있는 은혜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요한계시록은 그 너머에 있는 은혜를 공급하고 있는 책이다.


장대선 목사(가마산교회)

 

요한계시록의 큰 흐름 중 하나 ‘선교'



요한계시록은 무엇보다 선교적인 해석과 적용이 매우 중요하게 요청되는 책이다. 요한계시록을 관통하는 큰 흐름 중에 하나는 선교의 물줄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인 탐구 가운데 요한계시록을 선교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려는 시도는 매우 적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성경적인 가르침을 근거로 하여 주님이 맡겨주신 선교에 헌신해야 할 이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매우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면서 그동안 많이 다루어지지 않았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요한계시록의 선교적인 관점을 다루는 것이 본 글의 목적이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선교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기독교인의 실제의 삶에 적용하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 성경의 마지막 책에 대해서 ‘선교해석학’적인 작업을 시도해야 한다. 그렇다면 먼저 해야 하는 작업은 ‘선교해석학’이 무엇인가 그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선교해석학’을 이해할 때 선교의 교훈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어떤 특정한 본문을 해석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교해석학’은 특정한 본문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선교적 교훈을 찾아내는 해석학적 탐구를 뜻한다.


‘선교해석학’은 성경에 선교를 보여주는 본문이 어디 있는가를 찾아내어 거기서 선교의 의미, 혹은 선교의 원리나 방법을 정리하는 작업이 아니다. ‘선교해석학’은 그 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선교라는 큰 관점(mission perspective)에서 성경 전체를 보고, 성경이 보여주는 선교의 교훈을 찾아내며, 그 결과를 우리 시대의 교회 생활과 크리스천의 삶에 적용하는 신학적 작업을 뜻한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선교해석학'은 단지 “성경의 관점에서 선교를 살펴보는 작업"이 아니라, “선교의 관점에서 성경 전체를 살펴보는 작업"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선교의 관점’은 성경 전체를 조망하는 하나의 ‘해석학적 열쇠’(a hermeneutical key)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해석학적 접근을 통해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선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또한 성경의 각 부분이 선교와 어떠한 관련이 있으며, 어떻게 선교를 다루고 있는가를 설명하게 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선교는 성경이 가르쳐주는 여러 교훈 가운데 단지 ‘하나의 교훈’(a lesson)이 아니라 성경 전체로 들어가는 ‘하나의 문’(a gate)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인간을 향한 그의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보여주시고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선교’라는 관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창세기에서 계시록에 이르는 성경 전체에 걸쳐 나타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선교적인 목적을 처음부터 끝까지 조명해 보는 눈이 열리게 될 것이다.


크로아토(J. Severino Croatto)는 “성경은 창세기에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루트를 따라 진행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 ‘독특한 루트’가 바로 ‘선교’라고 하였다. 우리가 성경 전체에서 선교의 사상이나 원리를 퍼 올리지 못한다면 교회가 시도하는 선교 운동은 성경적 토대가 매우 빈약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 교회의 선교의 영적인 에너지가 고갈되어 허기진 상태에 이르게 되고, 그 수명은 짧아지게 될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성경 전체에서 열방을 향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선교 의지와 그의 백성들을 불러내어 이 거룩한 사역에 동참토록 하는 뜻과 목적을 철저하게 배울 필요가 있다.

사실 요한계시록은 많은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해석하기를 꺼려했던 성경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일반 기독교인들도 읽는 것이나 묵상하는 것을 등한시해 온 책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 책을 언뜻 볼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사상이나 표현과는 너무 다르고 멀리 떨어진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는 상징적인 언어나 묵시문학적 표현들이 넘쳐나는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묵상하며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어려웠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때로는 오해를 받기도 하고 종종 냉대를 받은 책이었다. 그러나 만일 이 책을 잘 해석하고 이해한다면 악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많은 영적인 유익과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윌리암 헨드릭슨(William Hendricksen)은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목적에 대해 “악의 세력과 대항하여 싸우는 전투적 교회를 위로하는 것이다. 핍박과 고통을 받고 있는 성도를 위한 도움과 위로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였다.


요한계시록은 위로의 책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어렵고 힘든 시대에 두려움이 아니라 시대를 뚫고 가는 용기와 위로, 많은 영적인 도움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읽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그 책을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이 책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다면 요한계시록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큰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단지 위로를 받는 것으로 만족하고 끝나서는 안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책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비전이 무엇인지, 거칠고 황폐한 이 시대를 살면서 감당해야 될 사명이 무엇인지 새롭게 배워야 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는 방법과 방향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이 논문을 통해 추구하는 방향은 무엇보다 선교의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살펴보는 것이다. “선교의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해 보면 우리는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이 글의 방향이다. 요한계시록을 언뜻 보면 이 책은 거의 선교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나타난 선교 사상이나 가르침을 다룰 때 공동 서신이나 요한계시록을 제외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요한계시록에서 우리는 ‘누구를 선교 현장에 파송한다’는 말씀을 찾을 수 없다. 또한 마태복음 결론 부분에서 발견하는 것처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선교위임령’이나 사도행전에서 발견하는 것처럼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직접적인 선교 명령, 또 이웃 사람들이나 세상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는 말씀을 거의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요한계시록을 피상적으로 읽고 해석한 결과라고 보여진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연구할 때 주로 마지막 때 이루어질 예언에 관한 책으로만 보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선교의 중요성을 갖고 있음을 놓칠 때가 많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이 선교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선교의 마지막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선교의 종결 혹은 선교의 최종 목표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창세기가 하나님의 선교의 시작을 보여주는 책이라면 요한계시록은 선교의 마무리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코넬 고오너(H. Cornell Goerner) 는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성경의 마지막 책은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목표의 놀라운 기록에 대한 절정이며 결론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이 시작하신 선교의 마무리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곳이 있다면 7장이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7장은 사도 요한이 보았던 종말론적 구원과 선교에 대한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계획하셨던 구속의 역사가 종결을 맞이하게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지금까지 역사를 통해 진행되었던 하나님의 선교의 마무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선교의 사명을 받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순종해 온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 될 것이다.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를 통해 7장은 요한계시록의 구조상 극적인 삽입(interlude)과 같은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6장부터 시작되고 있는 어린양의 인을 해제하는 과정의 마지막 부분에 7장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보았던 어린 양의 세상을 향한 심판의 마지막 과정인 7번째 인을 떼기 직전에 요한계시록 7장의 말씀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7장이 선교적으로 중요 한 것은 바로 이 7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선교 비전과 궁극적인 목적을 상세하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양이 하나씩 인을 떼실 때마다 이 땅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되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의 진노가 얼마나 무섭게 임했는지 땅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고 외쳤다. 또한 그들은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부르짖었다. 이 땅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7장은 바로 이렇게 진노가 쏟아지는 한복판에서 사도 요한이 새롭게 보았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장면이었다. 7장은 “이 일 후에 내가 보니”(Μετα ταυτα ειδον και ιδου)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1절). 여기 "이 일"은 무엇을 말하는가? 어린양이 6개의 인을 하나씩 떼시므로 일어나게 될 진노의 사건을 뜻한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네 천사가 땅의 네 모퉁이에서 “사방의 바람을 붙잡았다”고 하였다. 여기 ‘바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네 천사가 진노의 바람을 붙잡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네 천사 외에 등장하게 된 또 다른 천사의 메시지를 통해 분명하게 밝혀진다. 그 천사는 ‘해 돋는 데서 올라온 천사’라고 하였다(2절). 해 돋는 데, 다시 말하면 동쪽에서 천사가 올라왔다는 것은 이 천사가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의 메시지를 가져오게 될 것을 암시한다. 에덴동산도 동쪽에 있었고, 하나님의 영광도 동편에서부터 오고,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을 알고 박사들도 해 돋는 데서부터 찾아왔다. 유대인들에게는 전통적으로 메시야가 해 돋는 데서 올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 요한은 그 천사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세상의 한복판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왔다고 하였다. ‘인’(σφραγις)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소유권의 표시를 뜻한다. 그러므로 그 천사가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유된 백성들을 인을 치고 그들을 멸망의 심판으로부터 보호하시게 될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된다.23) ‘하나님의 인’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표시이다. ‘해 돋는 데서 온 천사는’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쏟아 부을 다른 네 천사를 향하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시기까지... 해하지 말라”고 명령하게 된 것이다(3절).


요한계시록 6장에서 사도 요한은 어린양의 인 떼시는 것을 통해 주님의 심판의 엄중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7장에서는 천사가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여주시므로 진노가 임하는 세상 한복판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게 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도 요한은 진노 중에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의 인치심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사도 요한은 인치심을 받은 자들이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도 요한은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라"고 증언했다(7:4). 여기 '십사 만 사천'이라는 숫자의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다양한 해석이 있었다. 그 정체성에 대해서는 신학적 논쟁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이 다양한 해석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십사만 사천’을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이스라엘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둘째는 상징적인 의미의 이스라엘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데이비드 온(David Aune)은 144,000의 숫자에 대해 지금까지 신학적으로 논쟁이 되어 온 것을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 144,000을 유대인 혹은 유대적인 배경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보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144,000을 유대적 배경을 가진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출신의 기독교인 모두를 포함하는 교회로 보는 견해이다. 셋째는 144,000을 기독교인 가운데 순교했던 사람들의 숫자로 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학자들이 '십사만 사천'을 상징적인 숫자로 해석하고 있다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했던 진실하게 주님을 믿는 기독교인의 총수를 상징하는 숫자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에 좀 더 집중한다면 사도 요한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십사만 사천'에 대해서는 9절에 나오는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와 의도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44,000의 숫자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라는 수식 문장이 시사해주고 있는 것처럼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이스라엘과 연관시켜 보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고 보인다. 사도 요한은 ‘십사만 사천’ 명의 숫자를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십사만 사천’에 관해서 천사를 통해서 들었다고 하였다(4절). ‘십사만 사천’이 어떻게 구성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사도 요한은 들었다. 그의 증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유다 지파에서 12,000, 르우벤 지파에서 12,000, 갓 지파에서 12,000, 아셀 지파에서 12,000, 납달리 지파에서 12,000, 므낫세 지파에서 12,000, 시므온 지파에서 12,000, 레위 지파에서 12,000, 잇사갈 지파에서 12,000, 스불론 지파에서 12,000, 요셉 지파에서 12,000, 베냐민 지파에서 12,000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인 맞은 자'의 리스트를 보면 특이한 사항이 몇 가지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 이 리스트의 첫 번째 위치는 야곱의 12아들 가운데 장남인 르우벤 지파가 아니라 네 번째 아들 유다 지파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유다 지파의 후손 가운데 메시야가 출생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배치는 구약에도 이미 나타나 있기에 생소한 것은 아니다. 민수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향할 때 진 편성을 한 일이 있었는데 유다 지파의 이름이 이미 장남인 르우벤 지파보다 앞서 선두에 나와 있었다(민 2:1-34). 따라서 성경 기자들이 유다 지파에게 이런 우선권을 주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인 맞은 자’의 리스트에는 야곱의 아들 가운데 다섯째 아들인 ‘단’ 지파가 빠져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 49:17에 나오는 야곱의 ‘단’에 대한 예언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라고 하였다. 야곱의 예언 가운데 단이 '뱀' 혹은 '독사'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단이 하나님을 떠나 사탄 을 추종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단 지파가 리스트에서 삭제된 것은 우상 숭배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사사기에 보면 단 지파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게 되자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다. 로버트 월(Robert W. Wall)은 “단 지파는 이교적 신앙의 우두머리이며 이스라엘 종교적인 타락의 상징이라(삿 18:30-31, 왕상 12:25-33)”고 하였다. 이런 이유로 이교적 우상을 숭배했던 단 지파가 ‘인 맞은 자’의 리스트에 빠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2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신학자 이레니우스(Ireaneus)는 단 지파가 빠진 것이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통이었던 단 지파로부터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라는 사상 때문이라고 보았다.



셋째단 지파가 빠진 대신 그 자리는 요셉의 아들이었던 므낫세 지파로 대치되었다.
요셉에게는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 있는데, 리스트에는 특이하게도 아버지 요셉 지파와 그의 아들 므낫세 지파가 포함되었다. 그 이유는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이들이 모두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 인을 맞은 자들이라“고 했는데(4절), 여기 ’인을 맞는다’(σφραγιζω)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고대 사회에서는 때로 법적인 인증을 위해 인을 찍기도 하였지만 일반적으로 주인이 자신의 소유권을 표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은 바로 그런 뜻으로 ‘인을 맞는다’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에서 온 144,000 명이 하나님의 진노가운데 구원에 참여하게 될 백성임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사도 바울도 동일한 구원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에베소서에서 ‘성령의 인치심’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가 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자신의 소유로 삼으시고 마지막 때 진노가운데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끝까지 보호하 실 것을 확신하고 있다. 세상을 향한 진노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은 진노 중에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고 그의 주권적인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서 나온 ‘인 맞은 자’의 리스트는 바벨론 포로 이후 사라졌던 열두 지파의 종말론적 회복을 보여주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이에 관하여 데이비드 온(David Aune)은 “각 지파로부터 12,000이라는 동등한 숫자를 강조하는 것이 사도 요한이 이스라엘의 12 지파의 종말론적 회복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 ‘십사만 사천’의 리스트는 단지 이스라엘의 12지파의 회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종말론적인 회복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큰 무리에 대한 언급으로 볼 때, 우리가 7:1-4에 나오는 '십사만사천'이라는 숫자에 과도한 관심을 갖는 것은 문제가 있다. 사도 요한이 진노의 한 복판에서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 드라마는 단지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에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십사만사천‘에 관한 음성을 천사로부터 들은 후에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더 크고 놀라운 비전을 보게 되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될 두 무리를 7장에서 보여주고 있다. 


첫째는 이미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7:4-8에 나타나는 ‘144,000’의 그룹이고, 둘째는 7:9에 나타나는 ‘큰 무리’의 그룹이다. 


이 두 그룹에 관한 사도 요한의 설명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존재하고 있다.


첫째, ‘들은 것’과 ‘본 것’의 차이가 있다.
7:4-8에 나오는 그룹, ’십사만사천‘에 관해서는 사도 요한이 단지 들었을 뿐이라고 증언하다.40) 그러나 7:9 이하에 나오는 ’큰 무리‘(οχλος πολυς) 그룹에 관한 것은 그가 친히 본 것이라고 하였다. 사도 요한이 ’들었다‘고 한 것과 ’보았다‘고 한 것의 차이는 매우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수적인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이스라엘 지파 가운데 인 맞은 자들의 수는 144,000으로 셀 수 있는 숫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에 사도 요한이 보게 된 사람들의 수는 얼마나 많은지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하였다. 데이비드 온(David E. Aune)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7장에서 ‘144,000’이라는 숫자(4절)와 ‘셀 수 없는 숫자’(9절)를 의도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셀 수 있는 숫자’와 ‘셀 수 없는 숫자’의 차이점은 엄청난 것이다. 비슬리 머레이(G. R. Beasley-Murray)는 "이스라엘의 십사만 사천이 각 나라에서 온 셀 수 없는 큰 무리로 대체되었다"고 하였다.



셋째, 구성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7:4-8에 나오는 ‘144,000’의 그룹은 오직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서 온 사람들로만 구성되었다. 그러나 그가 보았던 '큰 무리'의 그룹(9절)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으로부터 모여 온 무리였다“고 했다. 사도 요한이 9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라는 표현은 요한계시록에서 자주 나오는 중요한 표현이다. 



우선 ‘각’이라는 단어 ‘πας’는 ‘모든’(all)이라는 뜻이며, ‘나라’ ‘족속’ ‘백성’ ‘방언’이라는 네 단어 모두를 수식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사도 요한이 보았던 ‘큰 무리’는 ‘모든 나라’ ‘모든 족속’ ‘모든 백성’ ‘모든 방언’에서 온 자들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선교적 관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 요한이 7장 초두에서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서 온 '십사만 사천'을 다루다가 그 초점을 ‘큰 무리’의 비전으로 향하게 된 것은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적 관심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7장 초두에서 다루고 있는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특수주의적 관점’(particularistic viewpoint)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 후에 나오는 ‘큰 무리’의 비전은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이 고, 선교적인 관심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여기 나타나는 ‘나라’ ‘족속’ ‘백성’ ‘방언’은 유사한 단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차이가 많이 나는 개념들이다. 먼저 나오는 ‘나라’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트노스'(εθνος)라고 하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국토나 어떤 정부 형태를 가진 '국가'의 개념이 아니다. 정확하게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라는 뜻이다. 선교는 무엇보다 인종적인 장벽을 넘어가야 하는 사역임을 암시한다. 선교 사역을 통해 유대인이 혐오하는 이방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사람들이 엄청나게 일어날 것이다.


또한 '족속'이라는 단어는 '훌레'(φυλη)라고 하는데 이것은 어떤 특정한 전통과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종족’(tribe, clan)이라는 개념이다. 선교는 다양한 전통과 문화의 장벽을 넘어가는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은 유대인의 문화가 아닌 수많은 이방 문화권에서 하나님의 구원받는 자들이 일어나게 될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백성'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라오스’(λαος)라고 한다. 어떤 특정한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사람을 총칭하는 단어라고 볼 수 있다. 마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 그는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는데, 여기 나오는 '백성'이라는 단어가 바로 '라오스'이다. 예수님이 구원하실 대상으로서의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구원은 단지 특정한 소수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기회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방언'이라는 단어는 '글로사'(γλωσσα)라고 하는데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뜻한다. 전 세계의 언어의 숫자가 7,100개 정도로 보고 있다. 선교는 이러한 언어의 장벽을 넘어가야 한다. 하나님은 7,100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의 세계로 들어오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여기 사도 요한이 사용하고 있는 ‘나라’ ‘족속’ ‘백성’ ‘방언’이라는 단어들 속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보편적이고 우주적이라는 중요한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로버트 마운스(Robert H. Mounce)는 큰 무리라는 보편성이 나라’ ‘족속’ ‘백성’ ‘방언의 사중적인 구분으로 강조되고 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야 할 대상이 특정한 백성, 특정 한 민족으로 제한되어 있지 않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으로 구성된 민족 교회가 아니라, 모든 시대에 걸쳐 다양한 인종, 문화, 언어권의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로 구성되는 우주적인 교회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9절에 사도 요한이 보았던 ‘큰 무리’의 비전은 언제 완성될 것인가? 하나님께서 찾아야 하는 사람들을 모두 찾게 될 때 완성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시작하신 선교는 그 목표를 향하여 역사의 과정을 거쳐 끊임없이 진행될 것이고 언젠가는 그 마지막에 이르게 될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주시면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다. 이 말씀 가운데 모든 족속’(παν τα εθνη)이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선교는 이 세상에 그 어떤 민족도 제외됨이 없이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는 것이 그 목적이다. 따라서 이 목적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선교는 쉬지 않고 진행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진행 되었던 선교가 이제 마지막 종결점에 이르게 된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선교가 완성이 되고 마지막 종결점에 이르게 되었을 때 구원함을 받은 셀 수 없는 ‘큰 무리’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1)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게 된 큰 무리들에게 두 가지 특징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첫째는 그들이 어떤 인종이든지 상관이 없이 “흰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9절). 여기 ‘흰 옷’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된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이 된 사람들이 아니라면 보좌 앞에 설 수 없음을 의미한다. “흰 옷을 입는다”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정결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관계 정상화는 종교적인 정결 의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스스로의 어떤 수양이나 노력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은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고 했다(14). 예수님의 피의 공로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회복시킬 수 있다.
14절에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라는 표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 정상화는 환난과 고통을 겪은 자들에게 주어진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한 시도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고난과 인내의 과정을 직면하게 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보좌 앞에 설 수 있는 근거는 될 수 없다. 예수님의 피가 그들을 보좌 앞에 설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이에 관하여 “사람들이 적절한 예복을 입고 하나님 보좌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죽으심이 그 근거이다”라고 하였다.


둘째 특징은 그들이 모두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 린 양에 서있다”는 것이다(9). ‘손에 종려 가지를 들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는 행위를 뜻한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도 ‘손에 종려 가지를 들었다’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쳤다”고 했다. 그들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쳤다. 예수님의 왕 되심을 고백하는 외침이다. 이 세상의 종말이 오고 구원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섰을 때에도 그들은 모두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이 만왕의 만주의 주가 되심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9절). 사도 요한이 바라보고 있는 우주적인 교회는 전 세계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구원함을 받아 예수님의 왕 되심을 진정으로 고백하는 무리들의 공동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2)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서 경배와 찬양을 드리게 될 것이다. 
선교의 목표는 선교 그 자체가 아니다. 선교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분명하게 인식해야 하는 것은 선교는 선교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교의 목표는 전 세계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자들을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로 세우는 것이다. “선교의 가장 큰 열매는 열방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우상 숭배의 노예로 살아가는 이방인들을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이켜 참된 예배자로 세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참 예배가 무너진 곳에 선교가 존재하고, 예배가 회복된 곳에는 더이상 선교가 필요 없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7장에서 사도 요한은 더이상 선교가 필요 없는 상황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구원하심을 받은 셀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소리로 찬양을 드리게 것이다(9절). 이 장면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온전히 회복이 된 하늘에서의 종말론적 예배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러한 날을 기다리면서 이 땅에서 선교에 헌신하게 되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모여 온 우주적인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드리는 찬양의 내용은 무엇인가?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다”는 것이다(10절). 이 무리들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님을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찬양을 드린 것이다.


3) 하나님만 영원히 섬기게 될 것이다. 
구원을 받은 자의 기쁨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큰 무리의 비전’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무리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참여하게 될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15절) 이것은 하늘나라에서 선교도 중단되고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중 단 되지만 단 한 가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계속될 것임을 보여준다.

여기 ‘섬긴다’는 말은 ‘라트류오’(λατρευο)라고 하는데 마태는 이 단어를 예수님께서 신명기 6:3을 인용하시면서 사탄에게 명령하시는 말씀 속에 사용하였다.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다만 그를 섬기라”는 것은 ‘하나님만 높이고 그에게만 영광을 돌리라’는 의미이다. 사도 요한은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을 “밤낮 섬긴다”고 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더이상 우상이나 땅의 어떤 것을 섬길 수 시간이나 기회가 따로 없을 것이다. “밤낮”이라는 시간은 휴식이나 중지가 없는 시간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늘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 외에 다른 일을 시도하거나 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4) 영원토록 어린양의 인도하심을 받게 될 것이다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현재라는 시간 속에 살면서 언제나 어린양의 인도하심을 받게 된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따르는 자에게 선한 목자가 되심을 여러 번 강조하고 있다. ‘선한 목자’는 구약에서 그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 있어 자주 사용되는 은유이다. 사도 요한은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도 선한 목자가 되신 어린양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의 보호하심을 받게 될 것을 보여주었다. 선한 목자가 되신 어린양은 양들을 보호하고 구원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게 될 것이다. 사도 요한은 구원함을 받는 성도들을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자” 또한 “어린양에게 속한 자”라고 부른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영적으로 승리하게 되는 이유는 선한 목자가 되신 어린양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구원을 받은 백성들이 현재라는 시간을 떠나 영원이라는 시간 속으로 들어간 후에도 계속해서 선한 목자이신 어린양의 인도를 받게 될 것을 보여주고 있다. 7:17에 보면 사도 요한은 구원함을 받은 큰 무리에 대해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샘으로 인도하시고...”라고 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고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 것이다”(16절). 어린양의 인도하심은 영원하고 완전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7장을 중심으로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요한계시록은 선교라는 주제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특히 이 책은 하나님의 선교의 종결 혹은 선교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범죄 타락하고 동산 나무 그늘에 숨어있던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시므로 선교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하나님의 선교는 한 번도 좌절되지 않고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에서 기록하고 있는 대로 잃어버린 이스라엘 자손, 그리고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찾으시고 그들을 모두 예배하는 자로 세우실 때 하나님이 시작하셨던 선교는 완성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요한계시록은 선교의 마무리를 보여주는 중요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교가 완성되었을 때 어떤 모습,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무엇보다 요한계시록을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 요한계시록을 이러한 선교적 시각으로 해석하는 작업은 우리의 마음을 언제나 뛰게 한다. 하나님의 선교적인 비전을 새로운 차원에서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거친 삶의 현장을 뚫고 나가는 영적 에너지를 공급하게 될 것이다.<방동섭 교수>

 

 요한계시록에 사용된 구약 인용의 분포

 

1. 부분별 분포

부분 성경본문 인용 수
서론 1:1-8 11
환상 I 1:9-3:22 38
환상 II 4:1-16:21 164
환상 III 17:1- 21:8 95
환상 IV 21:9- 22:5 24
종결 22:6-21 16
  348

     

2. 구약성경 분포

성경 성경
13 시            43
27 2
레위기 4 (시서) (45)
3 79
10 22
(모세오경) (57) 43
1 53
1 (대선지서) (197)
삼하 1 2
왕하 6 8
대상 1 9
느헤미야 1 1
(역사서) (11) 2
    15
    1
    (소선지서)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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