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지옥

지옥(地獄)은 실재하는가

하나님아들 2023. 9. 14. 17:21

지옥(地獄)은 실재하는가      

 

 

  페리 F. 락우드

1. 지옥이란 장소
​지옥에 대한 심각한 메시지는 이 시대에 있어서 매우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다.
또한 지옥에 대한 설교는 현시대에서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으며 이 시대에 설교단에서부터 지옥과 심판에 대한 설교를 거의 들을 수 없다. 지옥에 대한 설교를 해야할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성경이 지옥의 사실성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에 대한 말씀보다는 지옥에 대한 말씀을 더 많이 하셨다.
만약 우리가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진실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모든 진실함 가운데서 지옥에 대한 설교를 강조해야 한다.
사람들은 지옥에 대한 설교에 반하여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너무 선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시지 않을거야"

물론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은혜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지옥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하셨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구원의 길을 거절하고 스스로 지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지옥에 관한 진실을 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현시대의 강단에서 지옥에 관한 설교를 거의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경고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에스겔 3:17-l8)
현세대는 자신들의 어휘력으로 지옥이란 말을 없애려 했으며 인간의 철학으로 지옥불을 끄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성경은 여전히 똑같은 진실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있다. 물론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데스"(Hades), "타르타루스"(Tartarus), "게엔나"(Gehenna)

성경에서 지옥에 대한 단어를 연구해보면 우리는 "지옥"에 관한 단어가 그리스어로 각각 세 가지로 분류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Hell)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보고"(눅 16:22-23)
*여기에서 지옥은 "하데스"로 나와 있음. 역자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여기에서 지옥은 "게엔나"로 나와 있음. 역자주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벧전 2:4)
*여기에서 지옥은 "타르타루스"로 나와 있음. 역자주
이 세 가지 단어는 서로 다른 장소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모두 지옥이란 한 단어로 번역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 단어를 연구해보면 지옥에 관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타르타루스(Tartarus)
첫째, 이 "타르타루스"라는 헬라어는 신약에서 오직 한 번 나와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벧전 2:4)
또한 비슷한 구절을 유다서에서 읽을 수 있다.
"또 자기들의 처음 위치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거처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 때까지 영원한 사슬로 묶어 흑암 속에 가두어 두셨느니라"(유다서 6절)

하데스(Hades)
구약시대와 지상에서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실 때 모든 죽은 영혼들이 가는 곳은 헬라어로 "하데스", 히브리어로 "스올"이란 곳으로 나타나 있다. "스올" 또는 "하데스"라는 곳은 두 곳으로 분리된 곳이다.
그 중에 한 곳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가는 곳인데 성경에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나타나 있고 또 한 곳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고통 당하는 장소이다. 이 장소는 거대한 심연으로 분리되었기 때문에 결코 왕래할 수는 없는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실 때 구원받고 죽은 성도들에게는 더이상 "하데스"라는 말이 필요없게 되었다. 이제는 바로 "파라다이스"(Paradise)에 있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구원받고 죽은 그리스도인들은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5:8)

그러나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죽으면 곧바로 고통받는 장소인 하데스(불호수 지옥)로 가게 된다.
성경은 그 내용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고통받는 장소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부활하여 받게 될 백보좌 심판의 때까지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계시록 20장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을 수 있다.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계 20:13)

하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에 거듭나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있던 곳이었으며 지금까지도 존재하는 곳이다.
하데스에 관한 가장 현실적 표현은 바로 누가복음 16장이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 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회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을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5:19-31)

이 성경의 메시지는 우화나 비유가 결코 아니다. 우리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실 때는 항상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또는 "또 다른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끔 비슷한 주제나 장면을 비교하는 특별한 곳에서는 "이와 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두 부류의 사람인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비유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성경에서 나와 있는 것처럼 "이와 같이"라는 말씀도 사용하시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지옥의 진실성을 증명하시기 위해 두 사람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씀하시고 있는데 구원받지 못한
부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말씀하시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글쎄요, 내 생각하는 이 메시지가 단지 우화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태도와 생각은 하나님의 진실된 말씀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우선 이 말씀은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들의 저주받을 영혼의 위험성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자들이 가는 지옥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명확하게 설명하시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은 버려두면서 온갖 세상적인 것들을 찾고 있다.
우리는 마태복음 16장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볼 수 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I6:25)
누가복음 16장 19절에는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인생이 영원할 것처럼 사는 부한 자의 한 단편이다. 나는 독자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부자가 할 수 없었던 일이 한가지가 있었다. 자신의 부유함으로 죽음을 막지는 못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부자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는 그가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는 나사로를 집 앞에서 쫓아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돈을 정직하게 벌었으며 자신의 가족들을 돌아보고 사회에서 존경받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많은 돈으로 자선사업을 벌였을지도 모른다.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눅 19:22-23)

그러나 그의 많은 돈과 그의 선행이 그를 지옥에서 건져내지는 못하고 있다.
그가 그곳에서는 아무런 존경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내가 믿기로는 이 부자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존경받을만한 삶을 살았을지라도 자신들의 영혼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무관심했다.
그들은 죽음보다 더 끔찍한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지옥에서 영원토록 고통받으면 살아갈 것이다.
우리는 이 메시지에서 지옥이 우화가 아니라 분명한 한 장소인 것을 들었다.

"저가 음부에서(Hell)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보고"

또한 우리는 부자가 지옥의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형제들을 걱정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세상에 살면서 그런 걱정을 했을리 없다. 그러나 부자는 그제서야 자기 형제들을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고통받나이다)."(24절)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25절)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회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28절)

여호와 증인들이 말한는 것처럼 무덤이 지옥이 아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지옥에서 살아있다.
우리는 계시록 14장 11절에서 다음과 같은 똑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계 14:11)
지옥은 불로 고통받는 실질적인 장소이다.
누가복음 19장 24절에서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라고 부자가 울부짖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지옥에서 피할 수 있는 곳이 존재하는가? 결코 없다. 한 번 거기에 도달하면 어느 누구도 빠져 나을 수 없다.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a great gulf: 거대한 심연)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회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을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 16:26)

나는 당신이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알기 원한다. 바로 부자가 지옥에서 간절하게 기도하고 호소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구하노니(pray:KJV)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회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나는 이와 같이 똑같은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사랑할 수 있는 열정, 부자가 희망 없는 지옥에서 울부짖는 그 심정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부자가 만일 지옥에서 나왔더라면 그는 아마 모든 재산과 자신의 건강과,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희생하여 자신의 형제들의 영혼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영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두번 다시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곧 다가을 지옥의 진노의 불꽃을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일은 지옥에서는 이미 늦은 것이다.
영원토록 기회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늦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문서전도와 방송선교가 복음을 위해 쓰임받고 있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다. 만약 하나님의 사람들이 영원한 행복에 관해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는 더욱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오!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여! 깨어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나라를 위해 담대히 외쳐라!
 
이 메시지의 올바른 이해의 핵심은 바로 30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눅 79:30)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그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그의 형제들을 걱정하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그들을 방문하게 된다면 그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피할 수 있으며 틀림없이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사람들이 지옥가는 것이 담배를 피워서, 술을 마셔서, 도둑질을 해서 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맞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오늘날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거듭나지 못했다. 사람들은 영원한 영흔의 행복에 대해서 심각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나는 다음의 두 성경 구절을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남기고 싶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4-15)
이 말씀이 곧 당신에게 적용될 수도 있다.

2. 백보좌 심판대
​ 앞장에서 보아왔듯이 성경은 참으로 명료하게 지옥이 어떤 곳인지 가르쳐주고 있다.
물론 지옥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불심판인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리고 싶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기억은 우리에게 있어서 축복의 선물일 수도 있고 저주일 수도 있다.
구원받지 못한 영흔들에게 있어서 "기억"은 그야말로 저주가 될 것이다.

나는 오래 전에 브뤼셀에 있는 어떤 미술관을 방문했었는데 어떤 유명한 그림에 관해서 설명된 글을 읽었다.
이 그림의 제목은 "지옥의 광경"이었다. 중앙에 있는 사람이 팔을 웅크리고 머리에는 어디서 많이 본듯한 삼각모를 쓰고 있었다. 이름도 없었고 알 필요도 없지만 단번에 그가 나폴레옹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정복자의 얼굴은 놀라움과 공포와 두려움으로 얼룩진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면서 엄청난 공포의 장면을 주목하고 있었다.
나폴레옹 주위에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으며 그 뒤에는 전쟁에서 살해된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또 어린아이가 황제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고 어머니들은 그 주위에 고뇌에 찬 표정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피를 흘리면서 죽은 사람들의 팔과 다리를 절단하고 있었다.
한 여자는 자루에다 자신의 남편의 머리를 담고 있었고 또 다른 여자들은 죽은 사람의 몸통을 나르고 몸을 자르고 있었다.
피흘리는 팔, 절단된 어깨들을 나폴레옹의 얼굴 앞으로 들이대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벌거벗은 사람들이 있고 긴 칼로 사람의 배를 찌르는 모습도 있었다.
어린아이들과 아내들과 어머니들의 얼굴에서는 분노와 공포와 노여움과 증오와 고통과 슬픔이 묘사되었다.
그것은 엄청난 공포의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지옥에 있는 나폴레옹이 그의 생애를 통해 야기된 온갖 고통을 "기억"을 통해 묘사된 것이었다.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 밖에 있다면 당신이 가야할 곳은 지옥뿐이다.
구조대의 사령관인 월리엄 부쓰(William Booth)는 구조대의 일꾼으로 매우 잘 알려져 있는데 그는 런던에서 있었던 어떤 가족의 이야기를 자주하곤 했었다. 이 가정은 믿음에 관해 버리운 사람들이었으며 복음의 적이라고 할 정도로 공인된 사람들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그리고 딸이 있었는데 그들은 어찌나 성경과 복음에 대해서 적대적인 사람들이었던지 그들은 집에 들어갈 때마다 자신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거절한다고 외치면서 들어가곤 했었다.

그런데 구조대의 한 젊은 여인이 이 사람들의 영흔에 대한 깊은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그들의 집으로 한 번 들어가 보기로 결정했다. 적어도 단 한 번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어느날 그녀는 문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그리하여 바로 그 아파트 창문 아래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강하고 확신에 찬 어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견뎌내라, 내 아들아! 너는 지금 병이 들었을 뿐이라구!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지만 죽음 저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단다. 우리는 그것에 관해 완전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모든 책을 읽었으며 모든 사고의 논쟁들도 읽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신화를 오래 전부터 연구해 왔었다. 하지만 죽음이란 어둠을 향한 한 단계에 지나지 않아!
그리고 영원히 평화로운 잠을 자는 것이란다. 그러므로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단다. 조금만 참아내라, 내 아들아!"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흐느끼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나의 보배로운 아들, 엄마의 가슴은 너 때문에 부서지는구나. 그러나 너는 결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단다.
너는 이제 어렸을 때 엄마 품에서 잠자던 것처럼 곧바로 잠을 자게 될 것이다. 너는 이것을 기억해라.
우리는 죽음 저편에 관한 수많은 관련된 질문들을 연구했었다는 것을! 너도 알잖니!
우리의 연구에 대한 능력은 참으로 위대하다는 것을... 우리가 명백하고 신중한 결론에 도달했을 때 거기에는 어둠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죽음은 단지 그것을 통과하기 위한 한 단계이고 그 후에는 영원한 잠을 자게 되는 거란다.
아들아, 이 고통을 잘 견뎌내기 바란다."

또다시 비탄에 젖은 소리가 잠시 멈춘 뒤 그 여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오빠! 약해지면 안돼. 인생에 대한 모든 지식과 신념과 깨달음과 죽음은 바로 건강하던 날, 오빠에게 왔던 것 뿐이야.
우리가 읽었던 책, 우리가 토론했던 것들, 우리가 결론 내렸던 것들이 생각나지 않아? 잠시만 참아내면 돼!
죽음 저편에는 아무 것도 없어."
그러나 숨을 헐떡거리면서 엄청난 절망과 비극적인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견뎌내라고? 그것이 문제야! 무엇인가를 의지하고 견뎌낼만한 것이 내게는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내가 어둠으로 들어갈 때 내가 의지하고 붙잡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

아직 거듭나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에 없는 사람들은 붙잡을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만약 당신이 못 자국난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잡지 못한다면 당신이 그 어둠으로 떨어질 때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영원은 단지 어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고통과 고난과 영원히 저주받은 기억만이 있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한다. 그분만이 당신의 유일한 구세주이시며 당신은 그분을 진실된 마음으로 맞이해야만 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부활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Death and Hell delivered up the dead which were in them - 계 20:13, KJV)
바로 이 현상이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자들의 부활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바로 앞장에서 죽은 자들의 영혼을 보았던 곳은 바로 "하데스"라는 것을 상기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로운 자들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인 "파라다이스"(Paradise)로 옮겨졌으며 이제는 예
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부활은 의로운 영흔들이 부활하고 천년 후(천년왕국이 끝난 후, 역자주)에 일어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천년 후에 두 번째 부활인 심판의 부활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계 20:5)
이 사건은 결국 하나님의 위대한 백보좌 심판으로 이어지는 것인데 계시록 20장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1-15)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모든 사람들이 그 날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반드시 서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세상에서 돈을 벌고 재산을 모으지만 언젠가는 이러한 활동이 중지될 날이 올 것이며 그 날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백보좌 심판대를 살펴보면 그 곳에는 의로운 영흔들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심판대는 오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만 서게 되는 곳이다.

어떠한 광경이 벌어질까? 그곳에는 구원받지 못한 세상의 왕들과 종들과 부자와 가난한 자들과 높은 자와 낮은 자가 다 모일 것이다. 이 심판을 피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우리는 계시록 2O장 12절에서 "책들이 펴 있고"라는 구절을 볼 수 있다.
이 책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모든 나이, 모든 이름, 또한 모든 행위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모든 죄, 모든 사악한 생각, 모든 행위들이 이 심판대 앞에 있는 책에 자세히 기록될 것이고 그 때에 그 책이 펼쳐질 것이다.

"또 다른 책들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계 20:12)
이 책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다. 만약 이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없다면
그는 영원한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2)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들의 죄를 알고 계시며 또한 모든 기록들을 가지고 계신다.
바로 그날 그 책에 기록된 대로 자신의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
우리가 지금은 그러한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숨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신의 범죄를 숨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에는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다.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의 죄가 그날에 심 판을 받게 될 것이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계 20:13)
세상 어떤 곳에서, 어느 모양, 어느 형태로 죽었든지 그곳은 그 죽은 자들을 기억할 것이며 그들은 모두 부활될 것이다.
또한 지옥도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영혼들의 부활을 위해 내어줄 것 이다.
잃어버린 영혼들은 한 사람도 간과되거나 잊어버릴 수 없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계 20:14)

이것은 곧 결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물이 될 수 없다는 확증인 것이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5)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받는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없기 때문에 받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이름이 교회 등록 카드에 기록되어 있을 수도 있지만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누구든지 불못에 던지우게 된다. 그 심판날에는 결코 거듭날 기회가 두 번 다시 오시 않는다.
모든 것이 그날에 결판나게 되는 것이다.

3. 불못(불호수:The lake of Fire-KJV)
​ 우리는 앞장에서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자는 누구든지 불못에 던지우는 것을 보았다.
불못에 대한 그리스어는 "게헨나"(Gehenna)이다. 그리고 바로 이곳이 최종적인 지옥이 되는 것이다.
최우선적으로 이곳에 던져질 자들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이 될 것이다.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 둘이 산채로 유황 불붙는 못에 던지우고.."(계 19:20)
그리고 천년 후에 사탄과 그의 타락한 천사들이 그곳에 던지워질 것이다.

"천 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7-10)
그 다음 구원받지 못한 영흔들이 "하데스"(현재의 지옥)에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백보좌 심판에 앞에서 영원한 판결을 받은 후 그들 역시 불못에 던지우게 된다. 우리 주님께서 자주 언급하셨던 "게엔나"는 "하데스"하고는 다른 곳이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지옥에 대해서 언급하셨던 성경말씀이 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Gehenna)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게헨나)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마 5:29)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게엔나)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게엔나)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게엔나)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성경은 분명하게 불타는 최후의 지옥인 "게엔나"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있다.
"불못"(계 20:15), "지옥불"(마 5:22), "영원한 불"(마 18:8), "꺼지지 않는 불"(막 9:43,45)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 :8)
어떤 사람들은 지옥불이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단지 형벌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을 믿고 싶지 않다면 꼭 그것을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불이 지옥의 상징적인 형벌로 바뀔 수 있단 말인가?
만약 당신이 그곳에 떨어진다면 상징적인 지옥 불에 좀더 쉽게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존재하고 있는 진실이 사람들의 믿음과 생각과 상징에 의해 바뀔 수는 없다. 지옥불은 문자 그대로이다.
지옥의 형벌은 불로 표현된 어떤 것보다 무섭다. 이 지옥의 고통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8:1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13:2)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22:13)

멸절이론(Annihilation)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영혼들이 죽음과 동시에 사라지며 결코 다시 존재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영흔들은 죽음과 동시에 사라진 다음 두 번째 기회에 다시 창조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기회에서도 영생을 얻지 못하면 그는 결국 불못에 던지우게 되지만 거기서 곧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멸망, 핍절, 패망, 소멸이란 단어를 "멸절", "사라짐"란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중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용하기를 좋아한다.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9)
성경에서 이 말씀의 진실된 의미를 찾아보기 위해 몇가지 성경구절을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멸망(destroyed)"이나 "패망(destruction)"이란 단어를 결코 "멸절"이나 "근절"로 풀이해서는 안된다.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He hath destroyed me on every side - 욥 79:10, KJV)
그러나 그 당시 욥은 아직도 멸절되지 않고 살아있었다.
"(얼마나 자주-KJV) 재앙(그들의 멸망이-KJV)이 그들에게 임함이나"(How often cometh their destruction upon them- 욥 21:17)

멸절이 어떻게 여러번 임할 수 있단 말인가?
"대저 여호와께서 만국을 향하여 진노하시며 그들의 만국을 향하여 분내사 그들을 진멸하시며"
(he hath utterly destroyed them-KJV)
그러나 나라들은 아직까지 멸절되지 않았다.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destroyed)"(히 2:74)
그러나 마귀는 사라지지 않았고 지금까지 존재하면서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이 멸절이론이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거나 쫓겨나기만 하면 그 존재가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났지만 그 존재는 없어지지 않았다(창 4:16).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은 결국 저 천국에서 추방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멸망"이라는 뜻이 그 존재가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소멸, 멸망(perish)이라는 말이 멸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한 번 보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이 사라진다는 그들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이 구절을 인용한다.
멸망, 또는 패망에 해당하는 "Perish"는 그리스어로 "아폴루미"(Apollumi)인데 그 뜻은 "사용하기에는 부적당하다"이다.
여기에 연관된 성경이 마태복음 9장에 나온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마 9:17)
낡은 부대는 사용할 수 없는 상태라는 뜻이다. 그들이 말한 것처럼 그 존재가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복음 15장 17절을 한번 보자.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I perish with hunger-KJV)
이 말은 탕자가 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멸절한 것이 아니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Whereby the world that then was, being overflowed with water, perished - 벧후 3:6, KJV)
그러나 세상이 그 때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But if ye bite and devour one another, take heed that ye be not consumed one of another - 갈 5:15, KJV)
사도 바울은 여기서 그들이 멸절된다는 뜻으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성경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멸망, 패망, 소멸이라는 뜻이 그 존재가 없어진다는 뜻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결국 이 이론은 지옥의 고통이 영원토록 지속되는 것이 아니며 나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 아니라는 아주 교묘한 사탄의 속임수인 것이다.

회복(Restoration)이론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영혼이 불못에서 고통받은 후 다시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 다음의 성경 구절을 보도록 하자.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restitution)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행 3:21)
여기서 만물이 회복되는 것을 하나님의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미리 말씀하셨다.
우리 주님은 만물이 회복되는 그날을 위해 하늘에서 기다리시고 계신다.
그러나 이 말씀이 사탄이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그들의 형벌이 끝난 다음 다시 천국으로 간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

만약 우리가 성경이 참으로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말미암아 기록된 것으로 믿는다면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이 지옥에서 피할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깨우쳐줘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지옥의 영원한 고통을 믿는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수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지옥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보고도 그렇게 무관심한지 이해할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거듭나지 못한 영혼들에게 경고해야 할 시간은 아주 짧으며 그 시간은 금방 지나갈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만약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라면 나는 당신에게 호소하는 바입니다.
당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 죄를 영원히 속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든지 회개하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4. 성경에 대한 질문과 대답
​* 과연 지옥의 형벌은 영원한가?
천국의 행복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지옥의 형벌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똑같이 가르치고 있다. 영원한 행복이 있다면 영원한 형벌도 있다.
"저회는 영벌에(everlasting punishment), 의인들은 영생에(eternal life) 들어가리라"(마 25:40)
이 말씀은 모든 개개인에게 적용될 것이다. 우리는 "Everlasting"과 "Eternal"이란 단어를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이 두 단어는 그리스어로 "아이오니오스"(aionios)라는 한 단어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을 알 수 있다.
(모두 '영원하다'라는 의미임. 역자주)

구원받은 사람들이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산다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와 반대로 영원히 지옥의 형벌을 받으며 살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의 영원한 삶에 대해서 언급하시면서 이 두 부류의 영원한 지속성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로마서에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기록했다.
"영원하신(everlasting) 하나님의 명을 좇아..."(롬 16:20)
만약 기록된 대로 지옥의 고통이 영원하지 않고 그 끝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도 영원하지 않다고 믿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계시록 22장에는 의인들의 삶에 대해서 기록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회에게 비취심이라 저회가 세세토록(for ever and ever) 왕 노룻하리로다"(계 22:5)
아마 모든 사람들이 이 말씀에 동의할 것이다. 이와 동일하게 적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무리에 대해서도 기록되었다.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계 14:11)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9-10)
성경은 악한 자들이 받을 영원한 지옥의 고통이 영원히 지속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 사랑의 하나님이 사랑들을 지옥에 보낼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지옥은 원래 마귀와 그 타락한 천사들을 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사람들이 지옥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 그러나 거기에 빠진 사람들은 스스로 천국으로 가는 길을 거절하고 지옥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다음의 이야기는 여기에 해당하는 좋은 예화가 될 것이다.
월슨(Wilson)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살인죄로 교수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살인 사건은 정상이 참작되어 사면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그 사면을 거절했다. 그는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재판관은 그에게 교수형을 확정했다.
이와 같이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의 제의를 거절하고 있다.
사형을 당하지 않을 확실한 길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스스로 이 길을 거절한 것이다.
하나님의 제의를 거절한 사람이 받을 영원한 형벌은 어느 누구도 막아주질 못한다.

*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옥에서 고통받는다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곧 말리나니 음부가 범죄자에게도 그와 같은 것인즉 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을 것이라 그는 기억함을 다시 얻지 못하니 불의가 나무처럼 꺾이리라"(욥 24:19-20)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 65:17)
성경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지옥에 빠질 때 그들은 영원토록 자신의 고통스러운 죄악들을 기억할 것이나
천국에 있는 의인들은 그들을 영원히 잊어버린다고 가르치고 있다.

거듭난 사람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 한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영혼이 버려질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미 구원받을 때 모든 것을 버렸다.
우리의 저주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끝났으므로 두 번 다시 우리에게 저주가 임할 수 없다.
만약 거듭나지 못했다면 지옥의 저주는 항상 그 사람 위에 예비되어 있는 것이다.

* 천국의 문은 거듭나지 못하고 죽은 영흔들에게는 닫혀 있는가?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계 22:11)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회가 오지 못하리라"(요 8:21)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처럼 이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살아있을 때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다.

* 어떻게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거듭나지 아니하고는 결코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도 볼 수도 없다.

* 어떻게 우리가 거듭날 수 있는가?

첫째, 자신의 양심 속에서 성경을 통한 고백이 필요하다.
죄의 대가와 고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는 없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갈 3:22)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둘째, 결코 우리는 우리 스스로 거듭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셋째, 모든 사람의 구원은 각 개인적이며 각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깨닫고 마음에 영접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교회에 나간다고 덩달아서 자신도 구원을 받았겠지 하는 추측은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1)혈통으로나(not of blood)
(2)육정으로나(nor of the will of the flesh)
(3)사람의 뜻으로(nor of the will of man)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넷째, 성경과 반대되는 모든 것에서 돌이키는 행동이 필요하다.
믿음을 증명할만한 행동이 없다면 그는 곧 거짓 그리스도인이다.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양심 깊은 곳에서 주님을 영접하길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값없는 영생의 선물이 주어질 것이다. 영생의 선물은 단번에 이루어지며 은혜로 받은 선물은 영원하다.      

성경은 지옥에 관하여 무엇이라 하는가?              

 

이민규 교수(신약학 전공)

 

1. 들어가는 말

 

  벌코프(H Berkof)나 홀튼(Wilko van Holten)의 말처럼 영원한 지옥은 많은 기독교인에게 회피하고 싶은 주제이고, 최근 코라비(Corabi)의 말처럼 철학적 변증의 도전 앞에서 윤리적으로 다루기 가장 어려운 내용 중의 하나이다. 성경에 보수적인 학자들도 지옥에 관해 분명 많은 문제를 느끼는 것은 틀림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소수에게 주어지는 복이다. (눅 12:32) 아무리 많이 잡아도 현재 기독교인은 인류 삼 분의 일이 안 되고 그중 상당수는 그저 명색만 기독교인이기도 하기에 인류 역사 전체의 구도 속에서 보면 비기독교인은 절대다수다. 이런 내용을 다룰 때 기독교인들의 입에서는 쉽사리 그런 것 따지지 말고 지금 당장 영혼 구원을 위해 힘써야 한다는 말로 상황을 합리화한다.

 

  문제는 지옥 형벌의 무시무시함이다. 전통적인 지옥은 영원히 화형을 당하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다. 지옥에 관하여 불을 은유로 본다고 해도 고통은 현실이다. 한번 화형당하는 상태를 상상해 보라, 일 분이 천 년 같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인간을 백 년 이백 년, 수억 년도 모자라 영원토록 인간을 가장 극심한 고통으로 벌하실 수 있을까? 공의로운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은 동시에 사랑이시다. 그렇다면 인간의 유한한 죄에 무한하고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을 내리는 것이 과연 하나님이 약속하신 공의의 실현일까? (행 12:31) 아니면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적인 잔인함인가? 혹은 지옥은 구원의 신비에 관한 또 다른 측면인가? 물론 구약에는 정의 실현을 위한 현대인들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다양한 보복행위가 나오며 때론 하나님은 복수의 신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나 1:2, 그러나 그는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해 아래 상상할 수 있는 어떤 형벌도 영원한 지옥 형벌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질문으로 기독교를 거부한 이 중에는 유명한 찰스 다윈이 있다. 무한하고 영원하게 징벌하는 잔인한 신을 자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간 기독교 안에서도 영원한 지옥을 받아들이기 난감한 이들이 영혼소멸설, 만인구원설, 연옥 등의 신학적인 제안을 하였다. 복음주의 성서학에서 연옥설은 성서의 근거자료가 몹시 미약하다고 평가됐으나 현재 가장 도전적인 논쟁 중의 일부는 영혼소멸설과 만인구원설의 한 종류인 제한적 징계설이다. 영혼소멸설과 제한적 징계설은 나름대로 복음주의 성서학자 사이에서도 현재 어느 정도 논쟁이 되고 있다

 

  영혼소멸론자들은 성경에서 악인의 최후인 영원한 징벌이 바로 존재 자체의 영원한 소멸이라고 가르친다. 또한, 영원한 지옥이 유한한 죄에 관한 유한한 징벌이냐, 아니면 유한한 죄에 관한 무한한 징벌인가? 혹은 무한한 징벌이란 하나님이 죄에 대하여 영원하게 징벌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랑의 하나님을 거부한 인간 스스로 당할 잔혹한 운명인가?라는 질문도 점점 그 중요성이 늘어나고 있다.

 

  성경은 지옥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는가? 사실 성서학에서 지옥을 다루는 주류 학자들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특히, 신약은 사후에 관해 구약보다는 많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많은 편은 아니다. 어려운 질문이지만 피하지 말고 혹시 우리가 지나친 선입견과 오해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솔직하고 진실하게 성경에 나타난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자. 원어는 비전공자들을 위해 처음에만 표기하고 이후부터는 한글로 표기할 것이다.

 

2. 본론

 

1. 지옥이란?

 

  지옥이 불신자들이 영원히 불타면서도 소멸하지 않고 끊임없이 고통만 당하는 곳이라는 개념은 역사적으로 중세시대에서 처음 신학화 되었다. 동방의 초대교회에서는 500년 동안 만인구원론(Universalism)이 득세하고 있었지만, AD.160-225에 터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플라톤주의의 영혼불멸설을 수용하면서 “모든 영혼은 불멸하기 때문에 악인에 대한 형벌도 영원하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리라”라는 마태복음 5:26을 해석하면서 영혼이 영광의 부활을 하기 위하여 세상에 있을 때 지은 죄를 정화 받아야 한다는 연옥 교리를 만들었다. 그 후 AD. 3세기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안은 저주받은 자들은 영원히 지옥에서 불태워질 것이라며 그 고통은 절대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 했다. 이후 지옥의 장소에 대하여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중세시대에 어떤 이들은 불덩이인 태양 안에 있다고 믿지만 대체로 땅 밑에 여러 층과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알아 왔다. 이러한 지옥에 대한 상상은 14세기 단테의 신곡에 더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가톨릭 안에서도 오래가지 못했다. 교황 바오로 2세는 지옥을 하나님이 죄인을 징벌하시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인간이 자연스럽게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의 장소라 했다.

 

2. 구약의 지옥? 스올!

 

  먼저 구약에서 주된 관심은 사후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사는 이 땅의 삶이다. 그러기에 구약에서 현대 기독교인에게 익숙한 지옥이란 개념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주로 무덤, 음부로 번역된 스올이란 용어가 나오는데,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란 어렵다. 대체로 이곳은 죽은 자들의 거처다. 이 용어는 지하세계, 혹은 수메르와 바빌론의 이르칼라의 히브리 버전이다. 사후 죽은 자들이 거하는 지하세계에 대한 믿음은 고대 근동에 널리 퍼져 있었다. 오직 이집트에서는 파라오 같은 최상위 계급만이 이런 운명에 얽매이지 않았는데, 그는 지상을 다스리는 신이었고 그가 죽었을 때 신과 연결해주는 특별한 제의와 함께 오직 미라가 됨으로만 가능했다. 당시 히브리인들에게도 주변 근동 문화를 넘어선 죽음 이후에 대한 발전된 사상은 발견하기 어렵다. 스올은 원래 무덤(참조 사 14:11; 욥 17:13-16, 시 30:30) 혹은 죽음의 세계(호 13:14; 합 2:5; 사 28:15, 18, 28:18, 아 8:6, 시 49:14; 89:48; 잠 116:3; 잠 5:5; 왕상 2:6, 9)를 의미했다. 그러나 점차 이는 죽은 자의 영역이라는 의미로 발전하면서(사 14:9. 10; 욥 26:5-6) 모든 인간이 사후에 가야 하는 보편적 운명의 장소로 나타난다. (전 9:10)

 

  구약의 스올은 신약의 지옥과 같은 개념은 아니다. 이곳이 악인에게 사후 징벌의 장소, 의인에게 영생의 장소라는 의미는 명확하지는 않다. 죽음은 모두에게 임하기에 이곳은 악인만 가는 장소가 아니다. (시 9:17, 31:17, 49:13-14) 이곳은 악인뿐만 아니라(민 37:5, 사 38:10, 시 39:3, 9) 의인(창 37:35, 사 38:10, 시 30:3, 9) 그 중간에 있는 자 할 것 없이 다 가야 하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스올에 관한 기본적인 생각은 하나님과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곳”이다.

 

  이곳은 캄캄하고 흙먼지와(욥 17:16)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다. (욥 17:14; 24:19-20, 사 14:11) 죽은 자는 같고 사랑, 미움 시기도 없고 상을 받을 수도 없고(전 9:5-6), 그저 의식 없이 아지랑이 같은 그림자로 침묵 속에 존재할 뿐이다. (시 6:5, 31:17, 사 28:18) 그래서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은 것이다. (전 9:4)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다” (전 9:10) 사후에 인격적인 존재로 살아남을 가능성의 소망 자체는 점진적인 계시를 기다리는 가운데 희미할 뿐이다. 사후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생이라는 개념이 확실하지 않았기에 이곳은 의인들이라도 가기를 원치 않던 장소다. (겔 32:17-32; 시 6:5; 사 28:15) 그곳은 누구도 “주를 찬양할 수 없고 누구도 주께 감사할 수”가 없다. (시 6:5) 스올로 내려가 그 문을 지나면(사 38:10) 누구도 돌아올 수 없다고 믿었다. (욥 7:9-10, 사 38:10, 18) 물론, 부활에 관한 소망이 점진적으로 계시가 되기 시작한다. (단 12:2) 그리고 구약에서도 점점 스올의 의인들에는 미래 희망이 있다는 내용이 전개된다. (호 13:14; 시 16:10, 49:15; 욥 14:13, 삼상 2:6) 요한계시록에서 이 사상을 반영하는데 스올은 죽음이 다스리는 나라요, 죽은 자들이 부활할 때까지 머무는 곳이다. (계 1:18, 20:13)

 

3. 헬라 문헌, 70인 역, 외경에 나타난 하데스

 

  스올은 헬라어로 쓰인 유대 문헌에서는 하데스로 번역된다. 하데스는 헬라 문화에서는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헬라 신의 이름으로 그는 지하세계의 제우스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제우스의 형제로 묘사된다. 하데스는 당시 문헌에서 무덤, 사자의 세계, 사자, 조상 모두를 의미할 수 있다. 혹은 “죽은 자의 프쉬케들”이 거하는 곳이다. 그러나 헬라 문화에서 하데스는 악인이 벌을 받는 지옥의 개념이 아니다. “프쉬케”는 오늘날 주로 개인 고유의 영혼으로 번역하지만, “죽은 자의 프쉬케”란 결코 플라톤이 주장한 개인 고유의 영혼이 아니나. “프쉬케”는 그냥 죽으면 떠나는 인간의 생명력에 가깝다. “죽은 자의 프쉬케”(생명력)는 어떤 의식도 없고 돌아올 수 없는 그곳에서 그저 그림자와 같은 존재로 영원히 잠들어 있을 뿐이다. 오디세이나 오르페우스의 신화에서처럼 죽은 자의 프쉬케를 잠시 깨울 수는 있지만, 그 또한 결국 허사로 돌아간다. 신약에서는 주로 무덤, 죽음으로 끝남을 의미한다.

 

  70인 역과 외경에서는 스올을 하데스로 번역한다. 외경 문헌에서 인간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죽은 자를 하데스로부터의 살려낼 수도 있는 분으로 묘사한다. (Wis 16:13; Sir 48:5; Tob 132; 그리고 Wis 2:1) 여기서도 하데스는 형벌의 장소는 아니다. 하데스는 의식 없이 거하는 곳으로 이곳에서는 살아생전처럼 하나님을 찬양할 수가 없다. (Sir 17:27; 41:4)

 

  그러나 그 외 문헌에서 하데스가 인간의 보편적 운명이라는 내용과 함께 어렴풋이나마 음부가 악인에 관한 징벌의 장소로도 등장한다. (Apoc. Zaph 10:3-14) 에녹 일서(BC 300)에서도 형벌의 장로로 음부가 소개되는데 내용은 일관성이 없다. 어떤 곳에서는 악인이 영원한 징벌을 받아(에녹1서 22:11) 의인들의 구경거리가 될 것이라 하면서(27:3), 다른 곳에서는 그들이 영원히 소멸할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91:9), 때로 이곳은 부활 때까지 머무르는 일시적인 거처로 소개된다. (Sib. Or.2:227-30; 4Ezra 4:42; Pseudo-Phoc. 112-14; b. Yebam. 17a)

 

4, 구약의 게헨나

 

  게헨나는 원래 성문 바깥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 장소로 히브리어 “게 벤 힌놈”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다. (수 15:8; 18:16) 이곳은 우상 제물을 바친 곳이며 아하스가 그의 자녀를 불태운 곳이다. 이곳은 힌놈의 혹은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로 불린다. (사 66:20-24) 아하스와 므낫세 시대 몰렉에게 제사지내던 곳으로 심지어 자녀를 번제로 바친 곳이기도 하다. (대하 28:3: 33:6, 왕하 16:3) 선지자들은 이곳을 하나님의 큰 심판으로 대학살과 폐허의 장소로 묘사한다. (렘 7:30-33, 19:1-13; 32:34-35, 31:9; 66:24; 왕하 23:10; 레 18:21) 이는 우상 숭배자가 불타는 모습으로 자신을 우상에게 제물을 드리는 형태이다. 나중에 이곳은 장례가 허용되지 않은 부정한 시체들을 버리는 곳이 되었다.

 

5. 유대 문헌의 게헨나

 

  구약 이외의 문헌에서 게헨나는 주로 최후 심판의 장소로 묘사된다. 이곳은 불 혹은 흑암의 환경으로 이를 갈게 되는 곳이다. (Apoc. Ap 15:6; Sib. Or. 1:100-103, 2:292-310) 선한 이의 영혼은 새로운 몸을 받지만, 악인은 영원한 징벌을 받는다는 암시도 있다. (Josephus JW.2.1633:374-75, Ant18.14; Sib. Or.2:292-310)

 

  현존하는 고대 유대 문헌 중 스올과 게헨나가 동일시되는 곳이 한번 발견된다. (b. B. Bat 79a) 의인은 게헨나에 들어가지 않으며 오직 우상숭배와 부도덕한 죄인,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은 자, 여인의 말을 너무 많이 들은 자와(m,’Abot 1:5) 같은 죄인들이 가는 곳이다. 이곳은 철저히 응보의 장소로 죄의 경중에 따라 징벌의 시간이 정해지지만(m. Ed. 2:10), 극악무도한 악인은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다. (b. B. Mes. 58b) 오늘날 유대교에서 게헨나는 주로 형이상학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6. 신약의 지옥

 

6.1. 신약에서 지옥으로 번역된 헬라어들

 

  주로 신약에 나오는 지옥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게헨나, 하데스, 타르타로스가 있다. (벧후 2:4) 헬라 문헌에서 타르타로스는 살아 있을 때 신들을 모욕한 왕 탄탈루스와 시지푸스와 같은 자들이 영원토록 고문을 당하는 바닥이 없는 깊은 구덩이다. 그러나 신약에서 타르타로스는 범죄한 천사들에 대해 영원한 징벌을 하는 곳으로(벧후 2:4) 인간에게 적용되는 곳은 아니다. 따라서 신약에서는 게헨나와 하데스만 주로 다루고자 한다.

 

6.2. 게헨나

 

  게헨나는 신약에 12구절에서 나온다. (마 5:22, 29, 30, 10:28, 18:9, 23:15, 33; 막 9:43, 45, 47, 눅 12:5, 약 3:6) 게헨나는 시체들을 태우고 태운 재를 버리는 장소로 심판에 관한 이사야의 마지막 환상이 근거한 곳이다. (사 66:24) 신약시대 이곳은 쓰레기 소각장으로 계속 불타고 있었다. 악인이 죽음 이후 받을 징벌로 불 심판은 신약에서 대체로 예수님이 자주 사용한다. 복음서에서 이 징벌이 얼마나 오래갈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6.3. 하데스

 

  하데스는 11구절에서 나온다. (마 11:23, 16:18, 눅 10:15; 16:23; 행 227, 31; 고전 15:55, 계 1:18, 6:8, 20:13, 14, 에녹1서 22장은 하데스에 악인과 의인이 구분된 구역이 있다고 말한다) 하데스(지옥)는 교만한 가버나움에 대한 심판(마 11:23), 음부의 권세를 지닌 교회(마 16:18), 자비 없는 자와 거지 나사로의 사후 운명이 전혀 다른 상황(눅 16:23), 예수의 부활(행 2:27, 31), 그리스도인의 부활(고전 15:55, 호 13:14)과 관련하여 사용되는데 죽음의 세계다. 하데스는 계시록에 자주 등장한다. 죽음과 짝을 이루는 초자연적인 상징이며 악인을 징벌하는 곳이다. (계 1:18, 68; 20:13, 14) 계시록의 지옥에 관한 내용은 고도의 상징 언어로 묘사되기에 지옥에 대한 직접 묘사로 보기는 어렵다. 누가복음 16:13에서는 사후 징벌에 관한 장소로 하데스가 사용되는데 이런 차원에서 게헨나의 의도와 유사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여기서도 징벌이 얼마 동안 지속할지에 대하여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대 문헌에서는 악인이 징벌받는 곳으로 하데스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주로 게헨나로 서술되는데 예수의 가르침에서 하데스와 게헨나의 구분은 분명하지 않다. 하데스처럼 게헨나도 몸을 가진 채로 있게 되는데 이 땅의 삶이 지속하는 동안에 죽은 자는 그곳에 가게 된다. (눅 16:27-31) 물론, 이 비유는 교훈을 위한 상징 언어로 묘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게헨나와 하데스 모두 미래의 심판을 기다린다. (마 11:23; 눅 10:15, 마 5:22; 23:33) 계시록 20:14은 하데스 자체의 종말을 말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6.4. 바울서신

 

  바울서신에 지옥이라는 표현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아마도 헬라인에게 하데스란 유대적인 형벌의 장소가 아니기 때문인 것 같다. 바울은 추상적으로 이방인도 이해하기 쉬운 하나님의 진노, 영원한 멸망, 파괴 및 상실로 이를 표현한다. (살후 1:9, 롬 1:18, 9:22: 빌 3:19, 살후 2:10)

 

6.5. 지옥 불?

 

  불은 지옥에 대한 고통 중 일부를 묘사하는 데 공통으로 언급되는 부분이다. 여기서 지옥 불은 근본적으로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곳에 대한 고통의 상징으로 피조 세상과 인간 경험의 세계에서는 찾을 수 없는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멸망과 징벌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어둠, 울며 이를 간다는 표현이 적게나마 마태복음에 나온다. (마 8:12, 22:13; 25:30, 유사한 표현 계 14:10; 20:10; 21:8) 불과 어둠, 울며 이를 간다는 것 모두 고통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지옥의 장소에 관한 사변도 무의미한 것이다. 이는 지각의 영역 밖에 있는 파멸의 우주적 객관적 양상을 지닌다. 즉, 성경에 나타난 지옥에 관한 묘사는 인간의 상상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은유로 표현된 것이다.

 

  예수가 지옥에 내려갔다는 영어 사도신경의 내용(한글 성경에는 빠져 있음)은 그가 지옥 불의 형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죽음의 권세에 넘겨져 더는 이 땅에 속한 존재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직 하늘에 속한 영화로운 상태도 아니었다는 점을 암시한다. 구속이 아직 완성되지 않는 상태에서 그가 음부(지옥)에 데려간 것은 죽음의 상태로 가장 극단적인 자기 비하 사건으로 성육신의 절정이라 할 수 있겠다. 예수는 모든 지옥 상태까지 극복하고, 즉 승리하여 부활 승천하신 것이다.

 

7. 지옥에 관한 여러 견해

 

  그간 지옥에 관한 여러 새로운 제안이 있었지만, 그중 영원한 소멸 혹은 영원한 징벌의 의미인가에 관하여는 많은 논쟁이 된다. 일부이긴 하지만 복음주의 내에서도 존 스토트(John Stott)와 같이 지옥이 영원한 소멸의 장소로 보는 이들이 있다. 영혼소멸설이 근거로 하는 주요 구절 중의 하나는 데살로니가후서 1:8-9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소멸)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러나 팩커(J. I. Packer)는 스토트의 영혼소멸설을 반대한다. 영혼소멸설을 반대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가장 핵심적인 구절은 마태복음 25:46이다: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먼저 이 두 주장을 그들 입장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7.1 영혼소멸설의 근거

 

  신약의 일부 본문은 “소멸한다”(마10:28)와 “불탄다”라는 이미지를 동시에 사용하여 악인들이 사후 불태워져 소멸할 것을 말한다. (마 7:19, 13:40, 42, 50, 요 15:6) 이외에도 악인의 최종적인 소멸을 암시하는 구절들로는 마 3:10, 3:12, 26:24, 빌 1:28, 살전 1:9절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에 대한 묘사는 사실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이 사후에 문자적으로 영원한 지옥 불 가운데 영원히 징벌을 받는 곳으로 지옥은 중세에 유행했던 플라톤의 영혼불멸설과 성경의 사후 하나님 심판 사상의 혼합으로 만들어진 교리다. 영혼이 불멸하니 하나님의 징벌을 영원히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멸이란 성경에서 오로지 하나님에게 속한 성품으로 피조물에 부여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불멸하는 인간은 오로지 영광의 부활로 구원받는 자와 천국의 완성된 모습인 “새 하늘 새 땅”에게 허락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사실 성경은 어디서도 불멸과 영혼을 연결하는 경우가 없다. “불멸하는 영혼”이란 플라톤주의 혹은 영지주의에 근거한 발상이다. 악인과 불신자의 운명인 지옥은 불과 멸망(destruction)은 소각, 소멸의 의미가 강하다. 지옥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라는 의미는 형벌이 영원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 어느 것도 반드시 소각(소멸, 멸망)될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영원’이라는 성경의 용어에 대한 이해의 차이는 많은 오해를 일으킨다. 예를 들어 유다서 7절에는,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라고 하였다. 성경은 소돔과 고모라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았다고 말한다. 대부분 사람이 지옥이란 말을 영원한 불로써 생각할 때, 꺼지지 않는 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가 지금까지 불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후서 2:6은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라고 말한다. 소돔과 고모라를 태운 영원한 불은 그 결과로 불로 태워진 결과가 영원한 것이지, 불타는 기간이 영원한 것은 아니다. 영원한 지옥 불도 이처럼 이해할 수 있다. 말라기 4:1에서,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했을 때도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지 영원히 불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소멸론자들은 조건적 불멸설을 주장한다. 영원한 징벌은 헬라의 영혼 불멸설을 근거로 탄생한 것으로 성경적이지 않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불멸은 오로지 하나님에게 속한 성품이다. 피조물인 우리가 불멸의 존재가 되는 길은 오로지 생명의 하나님에 종속되어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함으로만 가능하다. 따라서 소멸론자들은 성경이 악인의 멸절을 가르친다고 한다. 또한, 인간의 유한한 죄에 대하여 무한한 징벌이란 하나님의 정의로운 속성에도 맞지 않는다고 한다. 영혼소멸설은 만인 구원론과 다르다. 영혼소멸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만이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영생의 길이며, 지옥은 “영원한 잃어버린 상태”,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됨”이라고 주장한다.

 

  바울서신에는 지옥이라는 표현이 나타나지 않는 것도 영혼소멸설에 이바지한다고 한다. 바울은 추상적으로 영원한 파멸, 파괴 및 상실로 이를 표현한다. (살후 1:9, 롬 9:22 빌 3:19, 살후 2:10 등) 따라서 바울의 견해도 불신자의 운명을 불멸하는 영혼에 대한 영원한 징벌이라기보다는 영혼 소멸에 가깝다고 한다.

 

7.2. 유한한 죄에 대한 유한한 징벌(새로운 주장)

 

  그러나 전부터 지옥은 영원하지만, 형벌이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 이들이 있다. 이는 하나님의 정의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특히, 20세기 후반부터 이런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영원한 지옥에서 죄에 따라 징벌을 체험하지만, 그 기간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브루스(F. F. Bruoe)와 그린(Michael Green), 휴스(Philip E Hughes), 무디(Dale Moody), 피녹(Clark H Pinock), 스크로지(W. Graham Scroggie), 엘리스(E E Ellis)와 웬함(J. W. Waham), 퍼지(E W. Fudge), 포위스(D. Powys) 등 다양한 학자가 영원한 지옥이 반드시 영원한 징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지옥의 효력은 영원하지만, 징벌이 영원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런 주장은 현대 주류 유대교의 주장과 비슷하다. 전통 유대교에서는 지옥 형벌이 가장 길 때 1년 정도까지라고 제한한다. 히틀러도 1년 정도면 죗값을 치르고 회개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영원한 지옥을 말할 뿐 영원한 징벌을 말하는 성경 구절은 실제로 어느 곳에도 없다는 것이다. 또한, 유한한 죄에 대하여 무한한 징벌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맞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스도가 궁극적으로 우주를 통치하실 때 지옥에 더는 악이 존재하지 않아야 모순이 없다는 것이다. (고전 15:28, 엡 1:10, 빌 2:10-11)

 

7.3. 지옥은 영원한 징벌의 장소(전통적인 견해)

 

  지옥을 오늘날 전통적인 견해인 아무도 빠져나올 가능성이 없는 영원한 징벌의 장소로 강조한 신학적인 기원은 터툴리아누스(Tertulianus)부터이며, 이후 아우구스티누스, 칼뱅, 조나단 에드워즈에 의해 계승되었다. 최근에는 브레이(G. Brey), 하몬(K. S. Hamon), 포슨(D. Pawson), 피터슨 (RA Peterson) 등이 이 주장을 한다. 마태복음 5장의 세 구절에서 하데스는 악에 대한 영원한 징벌과 관련되어 있는데(마 5:22, 39, 30), 이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모든 고통을 주는 영구적인 징벌을 의미한다. 지옥은 영원한 징벌의 장소임이 틀림없는데, 불(마 25:41; 유 7), 징벌(마 25:46), 멸망(살후 1:9), 심판(히 6:2) 모두 영원한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특히, 마태복음 25:46은 영생과 나란히 언급되는 영벌을 나란히 언급하는데 이는 피하기 어려운 증거 본문이다. 즉, 지옥이 영원한 것일 뿐만 아니라 징벌도 영원하다는 것이다.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의 원인이다. 여기서 죄의 크기나 유한성은 의미가 없다. 하나님과 끊어졌다는 사실이 이미 무한한 심판의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최근 학계에 주목받는 대중적인 신약학자인 톰 라이트(Tom Wright)는 지옥에 관한 흥미로운 주장을 하였다. 그는 루이스(C. S Lewis)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지옥을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거부하는 인간들이 스스로 선택한 곳일 뿐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세상에서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지만, 하나님을 경배하길 거부하는 이들은 점점 철저하게 비인간화의 극치를 달리며 더는 하나님을 반영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 간다. 그리하여 죽음 이후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으로 이전에는 사람(하나님의 형상)이었으나 더는 사람이 아닌(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존재로 변한다. 이들은 자기가 경배하는 우상, 즉 탐닉하는 돈, 권력, 섹스 등의 혐오스러운 노예로 살아난다. 이 일은 사후에도 일어난다. 그가 보는 지옥은 우상숭배의 극을 체험하는 곳이다. 악인들도 사후 부활하지만 오로지 탐욕, 즉 자기 사랑과 자기 경배에 빠져 살게 된다. 지상에서도 성에 탐닉하는 사람은 더욱 성을 탐닉하고 돈을 사랑하는 사람을 더욱 돈을 사랑하게 되어 인간의 형상이 아닌 자기가 숭배하는 돈과 섹스와 같은 우상을 닮게 되는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 없이 악마의 형상을 스스로 선택한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들은 지상에서도 인간 자신의 선택으로 탐욕의 제국, 아비규환을 만들고 산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혜택을 볼 기회는 살아 있을 때뿐이다. 사후 그들에겐 오직 마귀의 형상밖에 남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할 수 없고 따라서 영원히 회개하지 않는다. 톰 라이트에게 지옥은 “참인간 됨의 길을 저버린 사람들이 지속해서 있게 될 상태”이다.

 

  필자가 보기엔 그의 견해는 지옥에 관한 매우 현대적인 반응이다. 현대 서구인들에게 호소력 있는 견해지만 과연 성경의 지옥이 그러한 곳인지 상당한 의문이 든다. 그의 견해는 성경적인 근거가 미약하기에 추론에 멈춘다. 사실 지옥은 정의할 수 없는 용어이다. 랍비 카츠(Rabbi Dr. Dovid Katz)에 따르면 지옥은 형이상학적인 곳이다. 이곳은 장소나 시간의 개념 안에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지옥이 어떤 곳인지 측정하고 평가하는 방법은 없다. 이곳은 나쁜 곳이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지옥은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에 관한 이해를 돕는 용어다. 죄는 분명히 심판받지만, 지옥의 징벌에 대한 어떠한 물리적 서술도 은유일 뿐이다. 그러나 이곳이 어떤 곳이 아닌지는 알 수 있다. 이곳은 불타는 곳이 아니다. 지옥은 물리적 의미로 정의할 수 없다. 물리적 세계는 지옥과 같은 비물리적 세계를 이해할 방법이 없다.

 

3. 결론

 

  현재 복음주의 내에서 논쟁이 되는 지옥에 관한 내용은 지옥의 존재에 관한 찬반이 아니라 지옥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Wolf)의 말처럼 포용이 있으면 배제는 불가피하기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허락하시는 복되고 아름다운 구원의 선물을 거부하는 자에게 배제란 불가피하다. 이 배제는 어떤 모습일까? 복음주의 내에서 지옥 패러다임 중, 영원한 지옥이란 “끝없는 징벌인가?” 아니면 “제한적인 징벌인가”에 관한 논쟁은 모두 성경의 근거를 가지고 주장을 펼치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결과 영혼소멸설이나 제한적 징벌과 같은 주장은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에 부합하지 않는다. 모두 영원한 징벌에 관한 성경 구절에 걸릴 수밖에 없다. 소멸론자들은 영원이란 심판의 결과에 대한 영원성이지 결코 심판행위의 기간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에서 영원이란 용어는 심판에 관한 것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한 지복(至福)에 관하여도 사용된다. (마 25:46) 구원받은 자들의 끊임없는 기쁨은 악인의 끊임없는 징벌과 병행되어 있다.

 

  영원한 형벌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렵다. 어려운 점은 성경의 지옥에 대한 묘사가 이 세상에 속한 경험과 언어로 인간의 경험과 상상을 넘어선 세상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활한 몸이 느낄 지복 상태를 상상할 수 없듯이 우리는 영원한 형벌의 의미를 알 수는 없다. 인간의 제한된 감정과 생각에 갇힌 우리가 부활 이후의 지극한 축복에 대하여 도저히 알 수가 없듯이, 우리는 영원한 형벌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또한, 영원한 심판은 복음을 향한 긍정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어야 하기에 우리는 절대 잃어버린 자를 향한 슬픔의 눈물 없이 지옥을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이성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사후의 문제는 하나님 고유 권한이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적인 논의란 한계가 있다. 사랑과 정의의 기준이 완벽하고 실수나 오류가 없으신 하나님을 전제한다면 실수와 오류를 범하기 쉬운 인간이 하나님의 고유권한을 판단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사후는 분명히 가장 올바른 상태일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지옥이 실재하는 사건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분리됨을 인식하는 곳이라는 점이다. 성서학에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부재가 지옥이다. 아무튼, 전통적인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 개념은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