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리!! 교의신학!! 변증학!!

하나님의 섭리교리

하나님아들 2023. 7. 22. 21:05

하나님의 섭리교리              

 

I. 서론


박형룡 박사는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후 세계에 대하여 갖는 관계는 어떠한가?”라는 질문을 제시하고, 초연신론은 하나님을 세계로부터 분리시키고, 범신론은 둘을 혼동하지만, 기독교 유신론은 하나님이 세계를 섭리하신다고 대답하면서, 자신의 섭리 교리를 전개한다.
박형룡 박사의 섭리 교리는『박형룡박사저작전집』 제2권 제2편 제6-8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그의 섭리 교리는 개혁주의 전통과 노선에 충실하고, 개혁주의 안의 다른 학자들과 비교할 때 문제를 일으킬 만한 요소가 별로 없기 때문에 신학적 논란이 일어날 소지가 거의 없다. 이것은 섭리를 부정하거나 섭리를 성경적 개념과는 완전히 다르게 해석하는 이단사상을 제외하고는, 개혁주의 내에서 섭리 교리에 대한 이견이 거의 없다는 반증이다.
다만 박형룡 박사의 섭리 교리는 어느 신학자의 진술보다 그 내용이 풍부하고, 자세히 다루고 있다는 점에 특징이 있고, 그런 점에서 다른 신학자들은 다루지 않은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다. 특히 박형룡 박사가 그의 신학을 거의 차용했다고 알려져 있는 루이스 벌코프와 비교해도, 차이가 있다. 섭리에 대한 벌코프의 진술은 비교적 간단하다.
또 박형룡 박사의 섭리 교리를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칼빈의 교리와 비교해 보면, 두 사람 간에 신학적 차이는 거의 없지만 저술 의도와 강조점에서 약간 차이가 있다.
그리고 섭리 교리에 있어서 개혁주의 학자들 사이에 유일하게 이견이 드러나 신학적 이슈가 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보존’과 ‘통치’ 외에 ‘협력’을 섭리의 요소에 포함시킬 수 있느냐 하는데 있다. 협력을 포함시켜 3구분설을 취하는 학자들과 그것을 제외시켜 2구분설을 취하는 학자들로 대별되는데, 박형룡 박사는 3구분설을 취한다. 그런데 2구분설을 취하는 학자들 가운데 특별히 찰스 핫지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박형룡 박사는 간단하지만 찰스 핫지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그 차이를 피력하고 논평한다.
따라서 필자는 이상의 사실들을 중심으로 박형룡 박사의 섭리 교리를 소개하고 정리해볼 것인데, 먼저 그의 교리를 요약하고, 이어서 다른 신학자들과 비교하면서 그 관계와 차이를 서술하고자 한다.


II. 박형룡 박사의 섭리 교리 개관
 
1. 섭리의 정의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인(엡 1:11) 하나님의 작정들의 실현이다.” 박형룡 박사는 이렇게 간단하게 섭리를 정의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핫지와 벌코프의 정의를 병기하고 있다.


2. 섭리의 성질


박형룡 박사가 지적하는 섭리의 성질로는 보편성, 주밀성, 주권성, 허용성 4가지가 있다.


(a) 보편성
섭리의 범위는 보편적이다(히 1:3, 행 17:20, 엡 4:16). “성경 전체에 걸쳐 자연의 법칙들, 역사의 진정(進程), 개인들의 다양화복(多樣禍福)이 항상 하나님의 섭리적 관할에 돌려졌다. 하늘과 땅의 만물이, 스랍들로부터 작은 원자에 이르기까지 그의 끊임없는 섭리에 의해 정돈된다.”


(b) 주밀성(周密性)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사와 자연사 모두에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마 10:29). “공중에서 떨어지는 빗방울과 눈송이마다, 움직이는 벌레마다, 자라나는 식물마다, 공중에 떠도는 먼지의 가루마다 일정한 원인들을 가졌고, 일정한 효과들을 가질 것이다. 각(各)것이 사건들의 사슬에 한 연환(連環)이며 역사의 많은 대사건들이 이 무의미하여 보이는 것들 위에 진행하였다.”


(c) 주권성
하나님의 섭리적 관할은 주권적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성경과 일상경험이 증거하고, 사람의 도덕적 책임과 의뢰의 감정 또는 위험할 때 하나님께 본능적으로 호소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계와 모든 인간사를 주관하신다는 것이 보편적이며 본유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신적 주권과 인적 자유 사이의 관계를 최선히 요약한 진술은 이러할 것이다. 즉 하나님은 외계의 권유를 제출하시되, 사람이 자기 자신의 성질에 적응하여 행동하시면서도 하나님이 그를 위하여 계획하신 바를 꼭 그대로 하도록 제출하신다.”


(d) 허용성
하나님은 온전히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의 조성자가 아니시다. 다만 죄를 허용하실 뿐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관계를 논할 때, 조성과 허용 사이는 천양지차가 있다. “하나님의 전능한 권능, 헤아릴 수 없는 지혜, 무한한 선은 그의 섭리에서 그렇게도 멀리 나타나서 심지어 천사들과 사람들의 최초 타락과 다른 죄들에까지 확장되나니 단순한 허용에 의해서만 아니라 가장 지혜롭고 능력 있는 제한이 그것에 결부되어 있으며 여러 겹 경륜에서 자기 자신의 거룩한 목적에 향하여 그것들을 달리 정돈하기도 하신다. 오히려 그 죄악성은 다만 피조물로부터서만 나오고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게 하시나니, 그는 가장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죄의 조성자도 재가자(裁可者)도 아니시며 그런 이로 되실 수도 없으시다-웨스트민스터 신도개요 5장 4단”


3. 섭리의 요소


박형룡 박사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칼빈, 댑니, 핫지, 딕, 셰드, 맥퍼슨과 같은 개혁파 교의학자들은 섭리의 요소로 보전(보존)과 정치(통치)를 드는 2구분법을 취했으나 17세기 이후 화란 개혁파 교의학자들 곧 브라켈, 프랑켄, 카이퍼, 바빙크, 보스, 호니히 등은 이 두 요소에 “협력”을 추가한 3구분법을 취했다고 소개하면서, 자신은 3구분법을 지지한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2구분법과 3구분법은 내용상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화란 개혁파 신학자들이 2구분법 대신에 3구분법을 취한 것은 범신론과 초연신론의 위험을 경계하여 섭리에 대한 인간의 노력의 요소를 강조하려는 이유 때문이었다.
박형룡 박사는 이에 대하여 섭리의 3요소는 서로 구별되지만, 하나님의 사역에서는 서로 분리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보전은 만물의 실유(實有)에 관설(觀設)하고 협력은 그 활동(活動)에, 정치는 그 지도(指導)에 관계하나 이것은 결코 배타적 의미로 이해될 것이 아니다. 보전에도 정치의 요소가 있고, 정치에도 협력의 요소가 있으며, 협력에 보전의 요소가 있는 것이다.”


1) 보전
박형룡 박사는 보전 교리가 성경적으로 그리고 추론적으로 증명된다고 주장한다. 보전을 지지하는 성경 구절들은 무수히 많다. 또 추론적으로는 (a) 하나님의 주권 교리, (b) 피조물의 의존적 성격, (c) 우리의 의지(보전은 하나님의 계속적 의지의 표현으로서 우리가 가진 의지는 제일원인의 제이차적 공작일 뿐이다.) 등이 신적 보전을 증명한다.


(1) 보전의 개념
“보전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창조하신 물건들의 존재를 그 성질과 능력과 함께 유지하시는 계속적 동작이다.”
박형룡 박사는 창조 교리는 우주의 존재를 설명하는 것이고, 보전 교리는 그것의 계속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고 창조와 보전을 구분한다. 이것은 보전을 창조의 지속으로 보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2)보전의 성질
(a)하나님에 대한 우주의 구별과 의존
“보전의 교리는 창조된 만물이 다 하나님의 존재와 구별된 진정하고 영구한 존재를 가지며 하나님의 부여하신 능동적, 수동적 모든 특성들을 소유한다고 또는 그것들의 능동적 능력들은 진정한 공능(功能)을 제이원인으로 가지어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추상한다.” 하나님의 존재와 구별되는 모든 피조물은 자존재가 아니라 그 존재의 근거를 하나님께 두고 있다.


(b) 신적 권능의 적극적 계속적 활용
“모든 피조물은 자체의 계속적 존재의 근기(根基)를 하나님 안에 가진 고로 그것들의 계속적 존재는 신적 권능의 적극적 계속적 활용의 효능으로이다.” 보전은 소극적 행동이 전부가 아니다. 만물을 유지하시는 신적 권능은 창조 당시의 신적 권능과 같이 적극적이다.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변경하며 진보적으로 발전하는 세계를 보전하신다.


(c) 유지작업의 물성조절(物性調節)
“만물을 자기의 활동으로 유지하여 보전하시는 하나님의 작업의 성질을 정확히 아는 것을 불가능하나 우리는 그가 자기의 섭리적 공작에서 스스로 자기의 창조물들의 성질에 조절하신다.” 물질세계에서 하나님은 물질적 특성들과 법칙들을 통하여 직접 사역하고, 정신세계에서 하나님은 마음의 특성들을 통하여 직접 사역하신다.
(d) 하나님의 자연적 합작-“보전은 물질과 마음의 모든 공작에 하나님의 자연적 합작(合作)을 함의한다.” 하나님의 합작 없이는 아무 인격이나 세력도 계속하여 존재하거나 동작하지 못한다.


2) 협력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는 피조물의 존재에만 아니라 활동(공작)에도 관계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창 45:5, 출 4:11-12, 수 11:6, 잠 21:1, 에 6:22, 신 8:18, 벧전 1:4, 빌 2:12,13).


(1) 협력의 정의
“협력은 신적 능력이 모든 종속적 능력들과 합작함이니, 그 능력들을 그것들의 선정(先定)된 법칙들에 의하여 동작케 함이다.” 사람은 독립적으로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의 관할을 받는다.


(2) 협력에 포함된 요의(의미)


(a) 하나님의 자신적(自身的) 사역
“협력에서 신적 능력은 모든 종속적 능력들과 합작하며 그 능력들을 그것들의 선정된 법칙들에 의해 동작케 하나 신적 능력이 전동작을 주도한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의 동작을 일반법칙에 맡겨 스스로 진행되게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으로 그것을 친히 주도하신다(초연신론에 반대).


(b) 제이원인의 진정성
“제이원인들은 참되며, 단순히 하나님의 공작적 능력으로 볼 것이 아니다” 오직 제이원인들이 참되다는 조건 아래서만 제일원인의 제이원인과의 협력을 말할 수 있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제이원인을 엄밀히 구별한다는 것을 그 첫 면에서부터 드러낸다(계속적 창조설 곧 범신론에 반대).


(c) 두 원인의 합작
“신적 능력은 사람의 능력과 서로 통하되 그것을 파멸하거나 흡수함이 없이 한다. ...하나님의 작업은 자연적 능력들로 하여금 자기와 함께 작업케 하기를 마치 붓과 손이 함께 역사하여 기록을 산출함과 같이 한다.” 신적 협력은 제일원인의 부정(초연신론 또는 무신론)과 제이원인의 부정(계속적 창조설 곧 범신론)이라는 두 오류를 다 거부하고 두 원인의 합작을 지지한다.


3) 정치
박형룡 박사는 보전과 협력 그리고 정치(통치)를 서로 격리된 것이 아니라 한 행동의 세 국면으로 본다. “신적 정치는 보전 및 협력과 똑같이 단순히 하나님의 섭리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것의 전부다.”


(1) 정치의 정의
“하나님의 정치는 하나님이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만물을 목적 있게 통치하시어 자기의 신적 계획의 성취를 확실케 하시는 그의 계속적 활동이다.” 그러므로 섭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에 따라 진행된다.


(2) 정치의 특징


(a) 우주적 왕정
섭리는 우주의 왕으로서의 하나님의 정치다. “하나님은 분명히 엄위지성(嚴威至聖)하시고 응보적 의의 원리를 변치 않으시며 무릇 뜻하신 바를 전능전지(全能全知)로 실현하시는 대주재(大主宰), 심판주이심을 성경이 거듭 말하고 있으니 어찌하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왕으로서의 하나님의 관념을 구약에 나타난 구시대적 사상으로 보고 신약의 부신관(父神觀)으로 대체하거나 사회복음과 같은 사상은 하나님의 민주성을 강조하여 이 사상을 거부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 우주를 왕으로 다스리시는 분이다.


(b) 그리스도의 왕정
신약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반박할 수 없이 증언한다(요 18:37, 눅 23:2, 골 1:13). 그러면 이것이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왕권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목적은 거기서 자기를 교회의 머리로 나타내고자 하심이었으니 그로 말미암아 성부께서 만물을 치리하신다”고 진술함으로써, 성부의 통치가 그리스도를 통한 통치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c) 물성(物性)에의 적응성
정치는 정치를 받는 피조물들의 성질에 적응하여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물리적 세계에서는 자연법칙을 방편으로 하여, 정신적 세계는 간접적으로 마음의 특성들과 법칙들을 통하여, 직접적으로는 성령의 공작을 통하여 정치하신다.”
이 경우 제이원인과 관계하지 않는 하나님의 직접 활동인 이적과 기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것은 비상섭리에 속하는 희귀한 현상으로 통상 섭리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다.


(d) 불가측성
하나님의 정치는 극히 장엄하여 사람의 지혜로 측량할 수 없다(사 55:8,9, 시 77편). 하나님의 사상은 인생의 사상과 다르며 그의 길은 사람의 길과 달라서 천양지차가 있기 때문이다(사 55:8,9).
“하나님의 정치의 난해한 방법들은 그에 향한 숭경을 격발한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타락과 유기, 이방인의 수납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의 신비를 거론한 장을 결론하면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찬송하였다(롬 11:33,34)”


(e) 무적성(無敵性)
하나님의 정치는 또한 무적이다. 하나님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서서 만고 역사의 파란 위에 위엄을 떨치고 있다(시 92:1-4). “하나님의 목적 있는 통치의 무적성은 인생적 표준으로 능히 측량될 것이 아니며 인생적 능력의 유추에 의해 충분히 이해될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가 무적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3) 정치의 범위
“신적 정치는 태초 이래 과거, 현재, 미래에서 하나님의 만유 위에 행하시는 모든 관할을 다 포괄하는 영원한 신적 계획의 실행이다.” 하나님의 정치는 우주적이어서 만세와 만대에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과 그들의 행동들을 다 대상으로 한다(딤전 1:17, 6:15, 단 4:34, 시 22:28, 103:19). 이 통치는 시간적, 공간적 경계도 없다. 이성적 및 비이성적 피조물들, 큰 일과 작은 일들, 사람의 선행과 악행도 다 신적 관할 속에 있다.


4. 특사(特事)와 이적


박형룡 박사는 특사와 이적의 실재성이 기독교 신앙에 중요한 지위를 가진 사건들이기 때문에 상세히 고찰할 것을 강조하면서, 따로 한 장(제7장)을 마련하여 설명한다.


1) 일반섭리와 특별섭리
섭리는 먼저 일반섭리와 특별섭리로 구별된다. 일반섭리는 우주 전체의 신적 관할을 의미하고, 특별섭리는 그 각부를 전체와 관련하여 간섭하심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두 섭리는 두 종류가 아니고, 같은 섭리의 두 활동이다. “하나님은 일반섭리에 의하여 우주의 만사만물을 혼돈한 상태에 두지 않으시고 질서적이며 조화적인 혼일체(渾一體)로 유지하여 나가신다. 동시에 그는 특별섭리를 통하여 우주의 각사각물로 하여금 우주 전체와의 관련에서 뜻있게 전진하게 하신다.”
“특별섭리라는 명사는 보다 더 특별한 내포를 가지어 자주 이성적 피조물들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간섭에 관설한다.” 이 특별간섭의 결과는 역사와 생애에 특별사변들로 나타난다. 특별섭리에 의하여 일어나는 특별사변(特別事變)으로는 기도에 대한 응답, 고통에서의 구출, 위험에서의 보존 등이 있다.


2) 통상섭리와 비상섭리(이적)
섭리는 또한 통상섭리와 비상섭리로 구별된다. “통상섭리에서는 하나님이 기정 자연법칙에 엄밀히 응종하여, 제이원인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그러나 비상섭리에서는 그가 직접적으로, 제이원인의 통상공작의 매개 없이 일하시어 이적을 행하신다.” 여기서 이적의 특이한 점은 그것이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적이 자연법칙으로 공작하는 제이원인의 방편에 의하여 산출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적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후대이적의 문제다. 이적 시대는 지나갔다고 믿는 것이 개신교 교회의 일반적인 태도다(칼빈도 이렇게 주장한다). 성경계시기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의지와 구원의 계획을 계시하여 사람들의 신앙을 일으키는 것이 이적을 행할만한 충분한 원인이 되었으나 신약시대에 이후로는 새로운 계시는 불필요하여 소개하지 않고 다만 이미 완성된 계시 즉 기독교 복음을 세계에 전파하여 인류로 하여금 이 복음의 구원하는 지식을 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벌카우어(Berkouwer)와 같은 신학자는 후대이적이 나타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을 경시하는 태도로 성경에도 그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하여 박형룡 박사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다: “이적을 세계 위에 있는 하나님의 권능의 관점에서 고찰하는 때에 이적의 가능성은 항상 있다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후대에 이적이 필요하지 않음을 보아 그것의 개연성을 의문할 수 있으며, 그것이 나타나지 않음을 확인할 때에 그것의 사실성을 부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능하신 창조주, 섭리주께서 자기의 피조물 위에 자기의 권능으로 비상섭리를 수시 단행하실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다.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면 이적을 행하실 가능성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


5. 변신론


변신론(Theodicy)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론이다. ‘변신’은 헬라어로 데오스(神)와 디케(正義)의 합성어로, 글자 그대로 하나님에 대한 변명이고, 변명이란 곧 하나님을 옹호하는 것인데, 그 옹호는 하나님이 올바르고 의롭다는 데에 있다. 변신론은 하나님의 본성과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섭리를 대상으로 삼는다. 여기서 하나님은 권능적 존재로서, 지혜롭고 선하신 존재다. 따라서 변신론은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지배를 옹호하고 그의 영원한 섭리를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 따라 박형룡 박사도 변신론을 전개한다.
변신론에는 다양한 이론들이 있으나 박형룡 박사가 주장하는 성경적 변신론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전개된다. 즉 하나님의 의를 높이 드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우리의 지식의 제한을 고려하여 그 제한 앞에서 평화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몇 가지 성경적 사실들을 들어 성경이 하나님의 의를 확인한다는 것을 추론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의에서 출발
“출발에서부터 하나님 안에 불의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신앙의 결정은 참된 변신론의 고찰에 결정적이다. 이것은 바울이 자기를 교란시킬 경험적 실재들에 대면하여 말한 방법이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 9:14) 이것은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는 연역적 선언을 바꾸어 말한 것이다. 바울은 또한 이 전제를 가지고 세계 안에 하나님의 방도들을 평가하여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롬 11;33)라고 하였다.”


2) 지식의 제한 안에 평화
“하나님의 주권 자체만은 맹목적 운명과 같이 공포를 일으키는 무자비한 개념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사상은 항상 실재, 진정, 생존하시는 게시되신 하나님의 주권에 지향한다. 하나님은 위험한 전횡의 하나님이 아니라 거룩하시고 긍휼하신 아버지시다. 우리는 그에게 전횡을 항의할 것이 아니라 ‘여호와여 당신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당신의 길을 내어 가르치소서’(시 25:4)할 것이다. ....이 하나님의 불가이해성은 우리의 지식의 단편성을 포함적으로 시인한다(고전 13:12). 우리는 우리 지식의 제한을 고려하여 그 제한 안에서 평화를 발견할 수 있다.”


3) 추론적 증명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제한된 지식으로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나 몇 가지 중요한 성경적 사실들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위한 추론적 증명을 시도할 수 있다. 우리가 거론할 성경적 사실은 하나님의 진노, 사람의 죄책, 교회의 송영 세 가지와 죄의 허용에 대한 사실이다.


(1) 하나님의 진노
변신론에 있어서 하나님의 거룩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보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거룩을 강조함에는 하나님을 이 세계의 죄책과 부패에 연루시키려는 시도에 대항하는 열렬한 경고가 포함된다.” 하나님의 진노의 실재성은 죄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릴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은 죄를 용납할 수 없는 그의 거룩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를 강조하는 동시에(시 90:7,8,11) 또한 그의 거룩하심을 반복 확언한다(요일 1:5, 사 6장, 레 11:44, 벧전 1:16).


(2) 사람의 죄책
성경이 인생의 죄책을 강조하는 사실은 하나님의 의를 변호한다. “성경은 만물 위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의 범위 안에 또는 그의 목적의 무적성 안에 인생의 책임이 있음을 확언한다. 하나님의 불가해한 세계 통치는 사람의 범죄 행위에도 관계있다는 것이 성경계시의 표시하는 바다.” 따라서 성경계시에 의하면 하나님이 세계 위에 거룩한 지도를 행하신다는 것을 믿는 신념은 사람이 자기의 죄책을 인식할 때에만 가능하다.


(3) 교회의 송영
성경은 송영으로 충만하다. 송영은 교회가 정상적이라는 것을 표현한다. 모든 시대의 회중은 일어나 송영에 참여하여 기쁜 노래로 그의 앞에 오며(시 95:1,2) 찬송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도록(시 100:4) 권고 받았다. “성경에서 교회는 암흑(불신사상을 포함하는)으로부터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의 영화로운 광명에로 호출된다. 이 호출은 감사와 찬송을 위한 호출이며 감사와 찬송은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을 확신함에서만 가능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자로라” 이것은 참된 변신론의 처음과 나중이다.


(4) 죄의 허용
하나님은 사람의 범죄에 대하여 허용하실 뿐이요, 직접적으로 추진(推進)하지 않으시므로 그에게 책임이 돌아갈 수 없다고 하는 변론은 개혁신학의 관례적인 변신법이다. “뻘카우어와 기타 어떤 신학자들은 이 허용설의 부정당함을 논란한다. 그러나 위에 길게 논술한 성경적 변신론만으로 만족하지 않는 심령들은 이 허용설에 와서 좀 더 명확한 해결을 추구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박형룡 박사의 섭리 교리를 개관해 보았다. 특별히 논란의 대상이 될 만한 내용이 거의 없다. 이의 없이 개혁주의 입장에 충실하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III. 다른 학자들과의 관계 및 비교


1. 루이스 벌코프


박형룡 박사의 신학은 구(舊) 프린스턴 신학으로 대표되는 영미 계통의 장로교 신학과 화란 계통의 개혁 신학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신학으로 알려져 있는데, 섭리 교리만 놓고 보면, 3구분법을 취하고 있는 것 등을 고려할 때 화란의 개혁파 신학 쪽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것으로 사료된다.
그 중에서도 벌코프의 영향이 가장 큰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그의 교의학은 벌코프의『조직신학』을 기초로 삼고, 거기에 다른 학자들의 재료를 첨가하여 종합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섭리 교리에서도 그러한 면모가 분명히 드러난다. 내용상 두 사람의 견해 차이는 거의 없다. 잠시 벌코프의 『조직신학』에 나타난 섭리 부분의 차례를 보자:


VI. Providence


A. Providence in General
1. History of the Doctrine of Providence
2. The Idea of Providence
3. Misconceptions concerning the Nature of Providence
4. The Objects of Divine Providence


B. Preservation
1. Basis for the Doctrine of Preservation
2. The Proper of Divine Preservation
3. Erroneous Conceptions of Divine Preservation


C. Concurrence
1. The Idea of Divine Concurrence and Scriptual Proof for It.
2. Errors that should be avoided
3. Characteristics of the Divine Concurrence
4. The Divine Concurrence and Sin


D. Government
1. Nature of the Divine Government
2. The Extent of this Government


E. Extraordinary Providences or Miracles
1. The Nature of Miracles
2. The Possibility of Miracles
3. The Purpose of the Miracles of Scripture


그의 『조직신학』 165-178면에 나오는 벌코프의 섭리 교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그 내용이 많지 않다. 박형룡 박사의 방대한(?) 양과 비교할 때 특히 더 그렇다. 인용이나 예증 없이 개념을 설명하는 정도다. 다른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는 경우도 많지 없다. 반면에 박형룡 박사는 다양한 신학자들의 입장을 함께 제시하고, 섭리의 각 사실들을 세분하여 작은 소제목과 함께 상세히 다루고 있다. 또 벌코프가 다루고 있지 않은 변신론까지 다룰 정도다.
특히 박형룡 박사는 특별섭리와 비상섭리(이적)의 비중을 높이 평가해 장을 따로 마련하여 자세히 설명하는데 반해, 루이스 벌코프는 특별섭리는 “4. The Objects of Divine Providence” 부분에서, 비상섭리는 “E. Extraordinary Providences or Miracles”에서 아주 간단히 채 한 면도 못되게 설명하는 것으로 그친다. 또 목차를 대조해 보면, 그 체계에 완연한 차이가 보인다. 목차만 보면 과연 박형룡 박사가 벌코프의 영향을 받았는지 의심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것은 박형룡 박사가 벌코프를 따르면서도 단순히 그의 사상을 베끼거나 참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외에 다른 많은 지식들을 동원하고 참조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2. 존 칼빈


『기독교강요』를 통해 접하는 칼빈의 섭리 교리는 박형룡 박사의 교리와 비교해 볼 때, 내용상 차이는 거의 없다. 다만 강조점이 다른데, 이것은 아마 두 사람이 처해있던 상황의 차이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박형룡 박사는 신학적 토양이 척박한 곳에 씨를 뿌리는 심정으로 책을 저술하였기에 기본 개념과 정의에 충실한 서술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교리를 다루는 책이지만, 어디까지나 저술 의도가 신자들의 참된 경건을 돕자는 실천적 용도에 있었으므로 섭리 교리 자체보다 섭리 교리에 대한 신자의 태도와 적용을 주로 다루게 된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제1권, 제16-18장에서 섭리 교리를 다루고 있다. 16장에서는 섭리 교리를 개관하고(“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양육하시고 보존하시며 또한 자신의 섭리로써 세계의 각 부분을 주관하신다.”), 17장에서는 섭리교리가 신자에게 주는 유익을 다룬다(“섭리교리를 어떻게 적용해야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줄 수 있는가?”). 이어서 18장에서는 죄의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자들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언급한다(“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들의 활동을 이용하시며, 그의 심판을 수행하시기 위해 그들의 마음을 굴복케 하심으로써 그 자신은 모든 더러움으로부터 순결을 유지하신다.”).
16장에 나타나 있는 섭리에 대한 칼빈의 견해는 당시에 섭리를 반대하던 철학자들의 견해를 염두에 두고 변증적으로 펼쳐진다. 그는 먼저 창조와 섭리의 불가분의 관계를 주장함으로써 이신론에 쐬기를 박고, 스토아철학의 숙명론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섭리는 운명이나 우연과는 다르다는 것을 역설한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바대로 하나님의 섭리가 운명이나 우연에 반대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이신론자들과 같은 궤변학자들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섭리는 만사를 주관하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으로 간주되는 것은 그가 행동하실 수 있지만 때때로 행동을 중지하시고 방관하시거나 혹은 그가 이전에 정하신 자연의 질서를 일반적인 충동에 기초하여 더욱 지속시키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섭리로 하늘과 땅을 주관하심으로써 만사가 그의 뜻이 없이는 결코 일어날 수 없도록 만드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칼빈은 섭리의 본질을 지적한다: “섭리는 예지가 아니라 만물에 대한 지배를 의미한다.”
그러나 칼빈의 섭리 교리의 실천적 특징은 17장에 들어가면 분명히 드러난다. 칼빈은 성경이 어떤 목적으로 모든 일이 하나님에 의해 정해졌다고 가르치고 있는지 네 가지를 유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와도 연관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섭리는 만사를 결정하는 원리로서, 때로는 매개체를 통해, 때로는 매개체가 없이, 때로는 매개체와 반대가 되게 작용하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섭리는 추구하는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전인류에 대한 그의 관심을 나타내시되, 특히 그가 더욱 친밀하게 보살피기를 원하시는 교회를 다스리는데 있어서 특별히 경성하여 지키려고 하신다는 것이다. 넷째, 비록 아버지다운 자비하심과 사랑 혹은 심판의 엄격함이 종종 섭리의 전과정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모든 사건의 원인들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우리가 겸손한 마음을 지님으로써 하나님의 섭리를 존중하고 그분의 의지를 모든 일의 가장 정당한 원인으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신자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로서 다음과 같이 세부적으로 제시한다:


a. 하나님의 섭리는 경외하는 마음으로 지켜져야 한다-“하나님을 자신을 만드신 분이요 우주를 조성하신 분으로 생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를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자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섭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유익하게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b.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를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는다-“이와 같이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지난날의 불행 때문에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을 것이며...그들 자신의 사악함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지 않을 것이다.”
c. 하나님의 섭리는 적절한 신중함을 요한다-“신중한 사람은 자신을 잘 돌아봄으로써 위협적인 악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무모하게 서두르다가 망하게 된다. 만일 우매함과 사려깊음이 둘 다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도구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d.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사악함을 무죄로 만들어주지 않는다-여기서 칼빈은 악인들에 대해 다음 세 가지 사실을 지적한다:
(a) 악인은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거스른다.
(b) 악인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다.
(c) 하나님은 악인을 이용하시지만 죄의 본질은 그들의 자신의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에게 참으로 큰 위로를 준다고 “신자들에게 위로를 주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제목 아래 그 유익을 다음과 같이 14가지로 나누어 세밀하게 제시한다:
a. 만사가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 이루어진다.
b. 만사가 경건한 자녀들의 유익을 위해 있다.
c. 만사를 위한 인간의 마음과 노력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d. 하나님의 섭리는 언제나 의인의 복지를 보살펴 준다.
e.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을 큰 관심을 갖고 보살펴 주신다.
f. 하나님께서는 여러 방법으로 참된 교회의 원수들을 제어하고 패배시키신다.
g.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 모든 피조물과 사탄까지고 다스리신다.
h. 하나님께서는 인내와 온유를 위해 경건한 자녀들을 연단시키신다.
I.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무기력함을 내버리고 회개해야 할 것을 촉구하신다.
j. 하나님의 섭리는 경건한 자들로 하여금 제이차적 원인들을 무시하지 않고 올바르게 이용하도록 한다.
k. 하나님의 섭리는 신자가 의무를 등한히 할 때 그 실책을 깨닫게 해준다.
l. 하나님의 섭리는 악인들의 죄를 정죄함으로써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게 한다.
m. 하나님의 섭리는 장래에 대해 숙고하게 하여 하나님의 종을 근면, 성실, 열심 있게 해준다.
n.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전능성에 전적으로 맡기고 그들의 부르심에 성실하도록 해준다.
이상과 같이 다양한 유익을 제시한 다음 칼빈은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삶은 견디기 힘든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섭리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아무리 많은 악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신자는 행복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의 마음에는 측량할 수 없는 행복이 있는 것이다.”
이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칼빈의 설명이 얼마나 실천적 용도에 목표를 두고 있는지 역력히 느낄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섭리 교리는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신자들의 삶의 준거틀을 형성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사상이다. 따라서 삶의 과정을 우연이나 숙명으로 생각하는 오늘날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언하는데 그 어떤 교리보다 섭리 교리는 각별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3. 찰스 핫지


박형룡 박사는 자신의 섭리 교리를 전개할 때 종종 핫지의 글을 인용하여 자신의 견해를 돕는데 사용한다. 그러나 박형룡 박사와 핫지의 섭리 교리는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섭리의 요소다. 박형룡 박사는 3구분설을 취하여 섭리의 요소로 보전, 협력, 정치를 든다. 그러나 핫지는 2구분설을 취하여 보존과 통치를 들고, 협력을 섭리에서 제외시킨다.
핫지는 자신의 저서 『조직신학』 제1권에서 협력이론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설명하고, 그 이론이 섭리에 포함되는 것의 부당성을 그 이론은 인간의 자유행위를 파괴하거나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기 때문에 거부되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이유 대신 다른 이유를 제시한다. 핫지가 협력 교리를 부정하는 이유는 다음 3가지다.
첫째, 협력 교리는 자의적이고 잘못된 전제 위에 세워져 있다. 그것은 피조물이 행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인간들의 의식과 모순된다. 우리가 자유행위자라는 것은 자유롭게 행할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자유롭게 행한다는 것은 우리자신의 행위를 일으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에 따라 우리를 영으로 창조하실 때, 우리에게 우리자신의 행위를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셨다. 그러므로 협력 교리는 인간의 자유 행위를 하나님이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오므로 부당하다.
둘째, 협력 교리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피조물과 그들의 모든 행동을 통치하신다는 성경의 단순하고도 확실한 선포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것은 이 통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상 불가능하다. 우리는 물질적 원인들이 활동하는 것을 보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활동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따라서 협력 교리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므로 부당하다.
셋째, 협력 교리는 난점들을 더 배가시킨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통치하시는 방법을 가르치려고 시도함으로써, 우리는 모든 단계에서 사람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아주 미묘하고도 난감한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일으킨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치하신다는 것만 알 뿐 여기서 참된 지식을 얻을 수는 없다.
이와 반대로 박형룡 박사는 협력 교리가 섭리로서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협력 교리가 다양한 이유로 반대를 받아왔다고 말하면서 핫지의 입장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그러나 그를 심하게 비판하지는 않는다. 그는 다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비평들에는 진리의 요소가 없지 않다. 우리가 자주 은폐된 사물을 탐사하여 들어가는 시험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협력의 교리에 있어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시험을 경계하는 동시에 이 교리가 섭리교리의 이해에 가치 있는 보조를 제공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박형룡 박사는 핫지가 첫 번째 반론(협력교리는 어떤 피조물이 행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약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는 신적 협력은 선재적이고 선결적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해결책을 찾는다. 그에 따르면 협력이란 말로만 보면, 먼저 인간이 활동하고 다음에 하나님이 인간과 동사(同事)하신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단 하나의 행동이라도 신적 공작이 없이는 시작되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상 신적 협력은 선재적이며 선결적이다. 물론 이것은 논리적 의미지 시간적 의미는 아니다. 박형룡 박사는 이에 대한 근거를 성경에서 찾는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되(고전 12:6) 자기의 의지의 도모에 의하여 역사하신다(엡 1:11). 그는 이스라엘에게 부를 취할 능력을 주셨고(신 8:18) 신자 안에서 역사하여 그로 하여금 자기(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의지하며 행위케 하신다(빌 2:13).”
핫지가 협력 교리를 반대하는 이유는 신적 주권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옹호하려는데 있는데 반하여 박형룡 박사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여 인간의 모든 동작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하여 진행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협력 이론을 주장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좀 아이러니컬한데, 그 이유는 화란 개혁파 학자들이 협력을 섭리 속에 포함시킨 의도가 사실은 범신론이나 이신론에 대항하여 인간의 노력의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IV. 결론


박형룡 박사의 섭리 교리는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을 막아내기에 충분할 정도로 성경적 입장에 충실하고, 개혁주의 노선에 굳게 서있다. 그 내용은 대부분 루이스 벌코프의 『조직신학』의 내용을 차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벌코프가 다루고 있지 않은 내용을 충분히 다루고 있는 점으로 볼 때, 벌코프에게만 일방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김길성 교수가 잘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신학은 구프린스턴 신학으로 대표되는 영미 계통의 장로교 신학과 화란 계통의 개혁신학의 조화를 일구어 낸 신학으로 평가할 수 있고, 그의 섭리사상도 이러한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그의 『교의신학』이 일방적으로 그 신학들을 추종하고 복사한 것이 아니라 그의 창작물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견해를 충분히 개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섭리 사상에서도 이 점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개혁주의적 관점을 가진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전능하신 창조주이심을 이해한다면 하나님께서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을 보존하고 다스리신다고 결론내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섭리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진 않지만, 섭리는 분명히 성경적 사상이다. 섭리 사상을 지지하는 성경 구절들은 성경 전체에 걸쳐 산재해 있다. 박형룡 박사의 정의에서 보는 것처럼, 섭리는 하나님의 작정들의 실현으로서, 창조주가 이미 존재하는 피조물을 보존(보전)하시고,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활동(협력)하시며, 만물을 그들의 지정된 목적으로 인도(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지속적 활동이다. 이런 개념에 입각한 섭리 교리는 개혁파 학자들 간에 이견이 거의 없다. 섭리의 요소와 후대이적 문제 정도가 의견이 엇갈리지만, 지엽적인 차이로 볼 수 있고,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는 거의 일치를 이루고 있다.
다만 그가 섭리 교리를 다른 학자들과 비교해 이토록 유례없이 자세히 다루고 있는 것(하지만 다른 분야에 대한 서술도 이처럼 자세하기는 하다)은 그가 가르치던 당시 한국의 상황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세상만사를 팔자나 운명이나 우연으로 보는 사상이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거의 본능처럼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할 필요성이 더 많지 않았을까?
어쨌든 섭리 교리는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다른 중요한 교리들도 마찬가지지만) 특별히, 칼빈에게서 본 것처럼, 신자들의 삶의 준거틀을 형성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사상으로서, 삶의 과정을 우연이나 숙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 한국사회에서 특별히 유효한 교리라는 생각이 든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섭리를 삶의 전제로 삼고, 모든 사건들의 배후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얼마나 클까?




(참고도서)
1. 박형룡. 『박형룡박사저작전집 II』, 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8.
2. 칼빈, 존. 『기독교강요』, 1권, 고영민 역, (서울: 기독교문사, 2006), 388.
3. 핫지, 찰스. 『조직신학』, 1권, 김귀탁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2.
4. 그루뎀, 웨인. 『성경핵심교리』, 김광열, 곽철근 역, 서울: CLC, 2004.
5. Berkhof, Louis. Systematic Theology, London: The Banner of Truth Trust, 1941.
6. 김길성. “박형룡 박사의 신학에 대한 이해와 평가,” 『신학지남』2004, 겨울, 281호.


박형룡 박사의 “섭리 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