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분석과 설교 개요
사도신경을 분석하기 전에 몇 가지 언어와 관련된 생각들을 하는 것이 좋겠다. 그것은 분석의 방법을 먼저 나누고 그 틀을 사용해서 독자들과 함께 신경을 분석하는 것이 실제적인 이해와 이를 기초로 하여 설교를 만드는 데 효과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석의 방법은 여러 가지 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언어의 몇 가지 원리에 기초해서 분석해 나가는 방법을 사용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문제를 찾아 분석해 나가는 방법이나 신학적, 철학적 이슈를 중심으로 분석하는 방법이나 가급적 신구약의 본문과 많이 연결시켜 나가는 방법, 더 나아가 현대의 특정한 과제와 접목해 나가는 방법 등은 고려하지 않았다. 이 같은 방법들은 이 글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석을 위한 언어 원리들의 이해
말의 구성
말은 여러 가지 성분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진다. 한 가지 단어만으로도 의사소통을 해야 할 때가 있고 때론 그같이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때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단어와 단어들을 결합시킨 형태로 말을 하는 것이 좋다. 그것은 그같이 함으로 의미 전달을 효과적으로 또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을 할 때, 사람은 자신이 이제까지 습득한, 말의 세계 속에 있는 단어들을 사용해서, 특별히 선택한 단어들을 서로 모아 특정한 문장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모든 문장은 언어관습에 따라 그 안에 여러 가지 구성요소를 갖게 된다. 이 요소들이 언어사회에서 약속한 순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을 때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는다.
문장의 기본적인 구성은 주부와 술부이다. 때로 어느 한 쪽이 생략되기도 하지만 그때도 생략된 그 부분이 이미 대화나 글의 바탕에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문장이든 주부와 술부의 구조를 이해하면 기본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문장의 구성요소를 조금 더 자세하게 구분하면 주어, 술어, 목적어 또는 보어, 수식어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문장의 여러 가지 형식에 대해서는 학창시절에 언어 시간을 통해 배운 바가 있을 것이다. 그때 배운 용어 모두를 기억할 필요는 없다. 다만,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을 중심으로 기억해 보자.
일반적으로 기본 문장은 '주어 + 술어'로 구성되고 이 위에 목적어나 보어가 덧붙여진다. 즉 '주어 + 술어 + 목적어 또는 보어' 이같이 된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목적어가 포함된 문장이고, '나는 교회에 간다'는 것은 보어를 포함한 문장임을 모르는 분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수식어는 주어나 술어에 덧붙여질 뿐 아니라 목적어와 보어 등 모든 부분에 덧붙여질 수 있다.
말에서의 정보의 요구
문법용어를 기억하려는 노력보다는 말 또는 글에 이 같은 요소들이 왜 필요한지를 이해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위의 문장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에서 주어 부분인 '나는...' 하고 말할 때 듣는 사람들은 지금 말하는 본인에 대해 말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나는'(주어)만으로는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뭔가 시원하게 서로 소통된 것이 없다. 술어가 덧붙여진 형태 즉, '나는 믿는다' 정도가 되면 조금은 더 이해의 소통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여전히 주어와 술어가 결합한 정도의 정보 제공으로는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 이상의 정보가 필요한 것이다. 말하는 사람은 그 나름대로 더 말하고 싶은 것은 상대에게 더 알려 주고 싶은 욕구가 있을 뿐 아니라, 상대를 설득하고 이해 시키려면 더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듣는 사람은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을 때는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거나 아니면 전하고자 하는 사람의 의도와는 다른 내용으로 정보를 오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때 때로는 무가치하다고 생각하고 무시하거나 거절해 버린다. 이 때 말의 정보는 본래의 사용 목적, 즉 상대를 설득하거나 이해 시키는 것과 같은 수사적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폐기된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 언어소통을 위해 그 이상의 적절한 정보를 양쪽 모두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말하는 사람은 목적어를 덧붙인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정도의 정보는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고, 듣는 사람도 그 정도의 정보를 상대에게 최소한의 정보의 구성 요건으로 요구한 셈이 된 것이다. 좋은 의사소통을 위해서다. 이렇듯 언어소통은 정보교환의 효과성을 위해 쌍방간의 상호작용(interaction)이 불가피하게 요구된다.
보어나 그 외의 다양한 수식어를 붙여나가는 이유도 이와 같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속에 포함되어 있는 정보만으로도 정보 제공의 목적이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판단할 때 또 다른 여러 가지 정보를 더하여 말해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때) (누구와 함께) (어디서) 나는 (왜) (어떤) 하나님을 (어떻게) 믿는다.' 괄호로 된 수식어는 기본적인 말에 덧붙여지는 여러 가지 정보들을 말해준다. 그 외에도 더 많은 다른 정보들을 이 한 문장에 덧붙일 수 있음을 독자는 알 것이다. 그러나 한정 없이 덧붙일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사족을 많이 붙이는 것이 오히려 정보의 소통의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만을 선택해서 덧붙여 기본 구성 또는 구조에 살을 붙여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말의 목적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 다만, 난해하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나 어떤 정보의 높은 가치 때문에 강조해야 할 때는 다른 부분에서 보다 더 많은 양의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이때 반복이나 대조 같은 기술적인 방법을 사용하거나 혹은 단순히 정보의 분량을 늘리는 방법을 사용한다.
언어사용의 원리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기초로 해서 몇 가지 중심 되는 언어사용의 원리들을 추출해 볼 수 있다.
가. 구성의 원리: 문장의 기본적인 구성요소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글과 말에서 기본구조(주어 + 술어 등)를 먼저 파악할 때 그 문장의 기초적인 의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문장을 분석하려면 일반적으로 먼저 주어와 술어를 찾는 것을 권장한다. 더 나아가 구성이 어떻게 짜여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 수식의 원리: 문장의 기본구조에 보어나 목적어 또는 수식어가 덧붙여지는 이유는 전하고자 하는 정보가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보의 폭을 보다 제한하거나(예, 믿는다는 말에 목적어를 '하나님'으로 함으로 여러 대상중에 누구를 믿는지를 분명히 하려 한다) 정보를 더 상세히 제공해야 하거나(예, 하나님이 큰 능력 있는 분임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이라는 말씀을 덧붙였다)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 선택의 원리: 여러 가능성 중에서도 몇 가지만 선택적으로 덧붙이는 이유는 목적성, 적절성, 효과성 등의 이유 때문이다(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덧붙일 수 있는 어구들이 많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 골라서 그의 전능성과 창조주로서의 능력만을 덧붙인 것은 이 부분이 하나님과 관련해서 우선되는 것으로 원저자는 믿기 때문이다.).
라. 강조의 원리: 특별히 강조해야 하거나, 난이도 때문에 더 설명을 요할 때 유사한 정보들을 반복해서 강조하거나 분량을 많이 사용해서 그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경우이다. 이때 반복, 대조, 대비와 같은 기술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고, 단지 그 부분에 말과 정보의 분량을 많이 두어 강조하기도 한다.
마. 순서의 원리: 특정한 부분을 강조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은 그 부분을 부각시킬 수 있는 곳에 두는 것이다. 때로는 중간이나 뒤에 두는 방법도 있는데 보통은 앞부분에 놓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같이 배열의 방법으로도 원하는 정보를 강조할 수 있다. 이것이 순서의 원리이다. 그러나 강조 이외의 목적, 예컨대 순서에 따라 정보의 흐름을 나타내기 위해서라든가 할 때 이 '순서의 원리'가 쓰인다. A - B - C - D 등의 순서로 비슷한 역할의 단어가 열거되어 있다면 A와 B가, B와 C가, C와 D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또 A가 먼저 나올 이유가 있었고, D가 끝에 나올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B와 C가 중간에 위치할 이유도 있을 것이다. 순서를 어떻게 두느냐가 정보를 배열하는 사람의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다. 순서에 따라 말의 '흐름도'(flowchart)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대화든, 글이든 말은 나름대로의 흐름도가 있기 마련이다.
원리적용의 확대
위의 언어 원리들은 한 문장 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한 단락이나 장(chapter) 등과 같은 더 큰 단위의 문장들의 집합에서도 나타나는 언어 현상이다. 단락이나 장은 여러 문장의 연결이다. 한 문장에 전하고자 하는 정보를 다 담을 수 없을 때 여러 문장이라는 더 큰 단위로 언어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여기에 '수식의 원리'가 적용된다. 기본(또는 기초) 문장에 여러 가지 필요한 문장들을 덧붙이는 것이다. 예컨대,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한 문장의 고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므로 성자와 성령 등에 대한 다른 고백들을 추가하는 것이다.
'선택의 원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도신경에 다른 성경적인 고백들을 더 많이 덧붙일 수 있지만, 몇 가지 엄선해서 선정한 이유는 이 같은 선택적 정보제공으로 소기의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다. 달리 말해서, 다른 사항들을 불필요하게 덧붙임으로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강조의 원리'와 '순서의 원리'에도 대부분 동일하게 적용된다. 어느 부분이 단락에서 많이 할애되어 있다면 그 경우의 대부분은 그 내용을 특별히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사도신경에서 기독론 고백에 가장 많은 분량이 할애되어 있는 것은 강조를 위한 것이라 봐야 한다.
또 문장의 열거순서에 의도적인 이유를 찾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대개의 경우에 배열순서에 이유가 있다. 그 문장이 특정한 그곳에 등장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배열의 순서를 통해 순차적 비중을 찾을 수 있지만, 때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중요도에 우선순위가 없이 단지 병렬로 나열한 경우이다. 사도신경에서는 기독론 부분에 '이는' 이후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문장들이 그런 예에 해당할 것이다.
사도신경의 분석
이 같은 언어 원리들에 대한 이해에 기초해서 사도신경을 분석하면 본문연구에 실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먼저 구조분석표를 만들자. 구조분석표는 구성요소에 따라 문장의 구조를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도록 해부해 놓은 것이다. 이를 통해 언어의 원리들이 사도신경을 만드는데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구조분석표 만들기
구조분석표를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가장 기본이 되는 주어와 술어를 처음에 놓는다. 그 다음 약간의 공간을 떼어 놓고 목적어나 보어를 놓는다. 그리고 수식어는 수식을 받는 어구의 뒷부분에 자리하게 한다. 병렬되는 내용의 것은 같은 위치의 밑으로 배열해 놓는다(더 상세한 부언은 지면상 피하겠다).
분석의 과정
구조분석표를 만들어 놓으니 사도신경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언어사용의 원리들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구성', '수식', '선택', '강조', '순서'의 원리들을 무턱대고 하나씩 찾기로 해서는 시간 낭비가 많을 것이다. 그보다는 다음의 분석 순서를 따르도록 권하고 싶다.
1. 먼저 전체적인 중심부분을 파악한다. ('구성의 원리'를 우선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즉, 기본구조(주어와 술어)를 먼저 이해하자는 것이다. 사도신경에서는 '내가' '믿사옵나이다' 하는 것이다.
2. 중심에서 시작해서 부분으로 분석해 나가는데, 한 문장 한 문장씩, 그리고 한 단어, 한 단어씩 해나간다. 그러니까 사도신경에서는 첫 문장부터 '내가' -> '믿사오며' -> '하나님 아버지를' -> '전능하사' -> '천지를 만드신' 순으로 분석해 나간다.
3. 이 같은 분석 과정에서 '수식'과 '선택'과 '강조'와 '순서'의 원리들이 어떻게 사용되었는가 살펴본다.
4. 전체적인 측면에서 '순서의 원리'를 다시 점검한다. 즉, 왜 이 같은 순서로 말하고 쓰여져야 했는가를 묻는다. 흐름도에 대한 질문이다.
이제는 이 같은 과정을 사도신경 분석에 실제로 사용하는 것만 남은 것 같다.
제목부터 다루자.
신경(Creed)은 '나는 믿는다'라는 라틴어 '크레도'(credo)에서 나왔다. 사도신경은 이 '크레도'로 시작한다. 믿음의 선언이자 고백이다. 이런 점에서 사도신경은 '나는 믿는다'는 말을 중심으로 하는 핵심 신조들의 모음이다.
그런데 '사도' (또는 사도적)라는 말을 '신경' 앞에 덧붙임으로써 신경의 특성을 말해주려 했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적 기원을 가리킨다고 생각했다. 사도들이 한 사람, 한 사람씩 어구를 만들어 이은 신경이라 본 것이다. 어거스틴이 대표적인 인물인데, 그는 처음 베드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으로 맛디아에 이르기까지 12사도의 공동 연속 작품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사도신경이 가장 오래된 신경이라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사도적 기원을 지지하는 증거는 별로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보다는 사도들이 보여준 신앙과 가르침에 부합하는, 초대교회로부터의 오래된 전승적 신경이라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가장 오래되었고 사도들의 가르침과 일치하기 때문에 사도적 권위가 인정된다. 그래서 '사도신경'의 권위가 보존된다. 사도신경은 초대교회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최상의 '크레도' 선언이다.
사도신경의 기본구조
신경의 골격은 '내가 믿는다(믿사옵나이다)'이다. 한역에는 '믿는다'(a2)는 말을 네 번 반복하는데 본래의 헬라역과 라틴역에는 첫 부분과 성령 앞에 두 번 반복한다(앞부분에 한 번만 쓴 예도 발견된다). 본래의 역본이 세 가지 부분, 즉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과 관련 진리들로 신경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삼분할 하는데 강조를 둔 반면, 한역은 성령 부분에 따로 '믿사오며'라는 말을 첨가함으로써 삼분할 구도의 균형보다는 삼위일체의 형평성에 더 중점을 두고자 한 의도가 드러난다.
설혹 한역의 역자가 그 같은 점을 염두에 두고 번역한 것은 아닐찌라도 오늘날 신경을 고백하는 한국인 신자들은 원본보다는 더 삼위일체적인 부분에 강조점을 느끼고 신경의 삼각구도 자체는 원본이나 다른 역본을 접하는 신자들보다는 덜 실감하게 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성령 뒷부분의 고백들을 번역상에서 성령과 분리시킴으로 원래 성령의 사역들로 성령과 연결해서 말하려 했던 원본의 의도가 약화되었다고 생각한다.
주어와 술어 부분인 '내가 믿는다'(a1)는 말이 이같이 중심적으로 부각되면서 사도신경의 기본내용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내준다. 즉, '내가 무엇을 믿는가?'에 대한 선언 또는 고백의 내용인 것이다. 특히 '믿는다'(믿사옵나이다)리는 현재형 동사를 사용해서 이 고백이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된 것일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시간을 잇는 영원한 고백임을 강조한다. '내가' 믿는 한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영원한 교회 그룹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신경을 믿는 주체가 '우리'나 '그들'이 아니라 '나'(a1)라는 점을 부각시켜야 한다. 특히 '우리'의 고백으로 사도신경을 만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도신경이 신자들 모두의 공통적인 고백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들을 믿는다!'하고 쓸 수 있었다. 그런데도 '크레도'(내가 믿는다)라고 고백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개인의 신앙고백을 중시하는 요청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가 오랫동안 세례문답 시에 이 신경을 강조해 온 이유와 부합할 것이다. 개인적인 고백이 공동체적인 고백에 우선한다. 개인적인 신앙고백 없이 교회적인 신앙고백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은 믿는 '나'의 고백이다. 사도들 또는 초대교회의 신경이 이제 '나의 신경'이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사도신경은 '내가 믿는 진리들' 중 가장 중요한 것들을 추려 모은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
첫번째 신경내용은 성부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이 부분이 첫번째 등장하는 이유는 신앙의 출발이 하나님께로부터 시작한다는 오래된 믿음 때문일 것이다. 또한 성부 하나님이 삼위 중 첫 위이시기 때문이기도 하고 성부 없이 성자와 성령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순서의 원리).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a3)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그것이 신자('나')의 첫번째 신앙선언이다. 다른 그 어떤 존재도 신앙의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오직 하나님(a3)을 믿는다. 하나님 신앙, 이것이 신자의 첫번째 신앙이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신앙(a4)으로 이어진다. 이 고백은 일종의 선언이다. 먼저는 '그 외아들'(b3) 예수 그리스도와 대조해서 아버지, 성부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선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특별한 부성적 사랑과 이를 신앙하는 나의 존재가 자녀로서 그 분께 (또 세상 앞에) 특별함을 나타낸다. 바로 '나'는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떤 '하나님 아버지'를 신앙하는가? 두 가지 어구를 덧붙임으로써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묘사했다. 여기에 언어사용에서의 '수식의 원리'와 '선택의 원리'가 적용된다(사실 '아버지'라는 말이 선택되어 '하나님'이라는 말에 덧붙여지면서 이미 '선택의 원리'와 '수식의 원리'가 적용됐다).
우선 '수식의 원리'와 관련해서 하나님이 아버지이신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아 신자는 그 분이 '전능하신 분'(a5)이시며 '천지를 만드신 분'(a6)이심을 덧붙여 선언한다. '전능하사(하신)'와 '천지를 만드신' 이 두 가지 어구가 서로 어떤 관계인지 밝히는 것도 필요하다. 이 두 가지가 서로 병렬적인 관계여서 모두 '하나님 아버지'(a3-4)를 동일한 비중으로 수식하는 것인지, 아니면 '전능하사(하신)'를 '뒤의 '천지를 만드신'이 보충해주고 있는 것인지를 판별해야 한다. 전자의 경우라면, 두 가지를 따로따로 해석해서 '하나님 아버지'에 덧붙여야 하고, 후자의 경우라면, 두 가지를 따로 해석한 후 다시 서로 연결해서 뜻을 이해하고 나서 '하나님 아버지'에 덧붙여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전, 후자 모두 의미상으로 가능하다. 나는 후자를 선호한다.
하나님은 약한 하나님이 아니다. '전능'(모든 것에 능함)하신 하나님(a5)이시다. 바로 그 같은 하나님을 아버지(a3-4)라 고백하는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 그 분이 아버지가 되신다. '전능'에 대한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그것은 천지를 만드신 사건(a6)이다. 하늘과 땅,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 그 분이 '내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가 되신다. 모든 신은 거짓되나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살아 계신다. 그것도 내게 '하나님 아버지'(a3-4)로 계신다. 이것이 바로 '내가' 믿는 첫번째 믿음이다.
여기서 '선택의 원리'와 관련해서 생각할 때, 신자는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덧붙일 수 있었지만 위의 것만을 추려 명백히 선언해야 한다고 봤다. '하나님'(a3)과 '아버지'(a4)와 '전능하사'(a5)와 '천지를 만드신'(a6)이라는 어구의 결합 속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선언의 응집이 농축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외의 다른 부분을 사도신경은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부분만이 선택되어 신경이 만들어진 목적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이 몇 가지 어구만 선택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아, 신경이 만들어질 때는 하나님에 대한 이단들에 대한 문제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구약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연속성 부분은 어떤 이유에서든 필요했던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예수에 대한 신앙
두 번째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에 대한 것이다. '순서의 원리'에 따르면, 이 두 번째의 고백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고백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다. 두 분의 존재의 우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이 두 분의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신앙이 사도신경에서 제일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점('강조의 원리')에서 우린 이 부분에서 이단적인 주장들이 많아 가장 논란이 많았거나, 예수의 성육신과 사역에 대한 고백이 신자의 가장 중심 되는 고백으로 보고 예수님에 대한 보다 확실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술하여 각 사건마다에 의미를 부여해야 했거나 하였을 동기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예수님에 대해선 상세히 기술하는 것이 필연적이었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역사적인 실사건들의 인정 없이 기독교가 존재할 수 없으므로 예수에 대한 고백이 이같이 길어진 것임을 어렵잖게 알 수 있다(이 부분 설교 시에도 이런 점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신앙한다(b1). 역사에 실재로 '나타나신 예수'(b2)를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나타내신 그리스도'(b3)로 믿는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외아들(b4)이시다.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로서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뜻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친자이신 것이다. 결국 그는 하나님이시다는 '나'의 고백이다. 나는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b6)로 모신다. 나의 주인이며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 주'라고 '우리'(b5)라는 말로 덧붙여 수식한 이유는 공동체적인 고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수식의 원리'). 그 분이 나의 주만이 아니시다. 그를 고백하는 우리 모두의 주님이시다. '나의 주'에서 '우리 주'(b5-6)로 고백함으로써 교회와 공동체로 신앙의 범위를 넓혀 준다. 예수는 그리스도신데 실제 하나님의 외아들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을 주님으로 고백한다. 그렇다. '나'는 바로 이 분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b2-6)를 믿는다.
이처럼 해석의 순서는 '순서의 원리'에 따라 '예수'(b2)에서 '그리스도'(b3)로 그리고 다시 '외아들'(b4)과 '우리 주'(b5-6)로 이어진다. 이음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고 서로 연결시켜 이해하는 작업이 분석이해의 중점이다.
그런데 '나'라는 신자는 예수에 대한 이 정도의 선언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낀다. 제대로 또는 충분히 설명이 되지 않았다고 여길 수 있을 뿐 아니라 아직도 상술하지 않은 부분에서 잘못된 신앙들과는 확실한 구별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더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것(b7-27)을 선택해서 순서대로 수식해 놓는다('강조', '선택', '순서', '수식'의 원리). 선택한 사항들의 면면을 보면 왜 이같이 했는지, 해야 하는지에 대한 동기가 나온다. '나'라는 신자는 예수 출생의 초월성과 그 생애의 역사성을 강조하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과 현존과 심판을 믿음으로 선언한다. 그것도 역사적 실재에 대한 확실한 믿음 고백이다.
'나'는 이 같은 역사적으로 실재한(할) 사건들을 믿음으로 '나'의 신앙이 없는 믿지 않는 이들과 구별된다. 그래서 '마리아'(b9)와 '본디오 빌라도'(b11)라는 실재했던 인물들을 등장시켜서 자신의 신앙고백이 역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마리아에게 나심과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b11-14)이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것이라면 그 외의 다른 것, 즉 성령수태(b8), 부활(b16-18)과 승천(b19-20), 또 우편에 앉으심(b21-23)과 재림(b24-27)이 역사적으로 일어났거나 장차 일어날 역사적 사건들인 것이다. 이것이 '나'의 레토릭이다. '나'는 최선의 수사적 노력을 기울여 역사적 예수 신앙을 선언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제 좀 더 세분해서 살펴보자.
신자는 '이는'(b7)이라는 관계사로 연결하여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수식의 원리'). '
첫째는 성령수태에 대한 선언이다.
'성령으로 잉태하사'(b8), 이 고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초월성과 그의 탄생의 초자연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가, 또 어떻게 '우리 주'가 되실 수 있는가 하는 첫번째 이유가 되기도 한다(엄밀하게는 '그 아들'이라는 어구가 첫번째가 되겠지만 '이는'의 이후의 것들 중에서 말하기는 것이다). 예수는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출생부터 보통 인간과는 달랐던 것이다.
두 번째는 동정녀에게 나신 사건(b9-10)이다.
첫번째와 두 번째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순서의 원리'). 성령으로 잉태함과 동정녀에게서 나신 것은 서로 직접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가 서로 인과관계에 있는 것이다. 원인이 없이는 결과가 없다. 그리고 여기에 동정녀가 '마리아'(b9)였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역사적 사건됨을 한층 강조했다. 만일 이 '마리아'가 처음 '나'라는 신경을 만든 일에 관여한 신자(들)가 고백할 당시에 살아 있어 증인이 되어주었다거나, 또는 최소한 마리아를 생전에 직접 알았던 사람들이 옆에 있을 때 되어진 신앙선언이었다면 훨씬 '나'의 선언이 역사적인 신뢰를 받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세 번째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사건(b11-12)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훨씬 잘 알려진 일이다. 따라서 역사성을 부각시키는 부분이기도 하다. 구약의 예언에서처럼 메시야는 고난을 받으셔야 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고난의 의미를 강조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역사성과 실재성을 고백하고자 했다(실제 설교에 들어가서는 고난의 의미를 강조할 수 있다. 현재의 회중에게는 고난의 역사적 사실성을 강조하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일 경우이다). 고난 받은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난의 역사성이 없이는 그 후에 이어지는 위대한 사건이 있을 수 없다.
네 번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일(b13-14)이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b13)과 그로 인해 죽으셨다는 사실(b14)을 말씀하고 있다. 십자가에 죽으심의 의미를 상기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겠지만 일단 여기서는 신앙고백으로서의 역사적, 사실적 선언에 그친다. 이것은 신경이기 때문이다. 신경은 신경으로써의 역할을 다할 뿐이다. 예수는 죽으셨다. 그것도 사형수의 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는 죽으심으로써 메시야의 역할을 하셨다. '나'는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 분을 '우리 주'로 고백한다.
다섯번째는 부활에 대한 것(b15-18)이다.
예수는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다. 초기의 여러 원본은 이 부분을 세가지로 나눈다. 장사된 것(b15)과 지옥에 내려가신 것과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b16-18)이다. 그런데 한역본에는 이 부분을 하나로 축약했다. 장사된 것과 부활을 서로 직접적으로 연결시켜서 전자는 보조의 위치에 후자는 중심에 놓았다('순서의 원리'). 이것은 앞에 나온 죽으심과 이곳의 부활을 강하게 비교시키며 전면으로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단순 열거적인 원문의 내용에 만족하지 않고 죽으심과 부활하심이라는 두 사건의 중심성을 부각시키려는 번역자의 의도(한역만 아니라 여러 개신교번역에서 이 부분이 삭제되었다.
초기의 원본 중에는 이 부분에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것이 없는 경우도 있고 무엇보다 성경적 지지도 많지 않은 데다가 로마교회의 교리를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와 고민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특히 '지옥 하강설'이라는 논란이 일 수 있는 부분을 의도적으로 삭제함으로써 불필요한 논쟁으로 신경의 중심부분이 손상되지 않도록 하는 의도적인 배려를 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이 문장이다: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실제로 사도신경을 외우는 신자들은 이 부분에 '지옥 하강설'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대부분 지나친다.
간혹 설교를 통해서나 그 사실을 알게 될 뿐이다. 신자들이 설교나 강의를 통해 설명을 듣고서는 최소한 어느 정도 '지옥 하강설'에 대해 이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별 다른 의문 없이 지나간다. 이렇게 볼 때 이 부분을 부가적인 설명 없이 넣어 번역했을 때 야기할 수 있는 문제를 미리 제거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역자의 생각이 성공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사흘'(b16)이라는 단어는 부활의 역사성을 더 신뢰하게 만드는 촉진제 역할을 한다. '죽은 자 가운데서'(b17)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선택'과 '수식'의 원리) 우선 그가 예전에 한 번 분명히 죽으셨다는 것, 그리고 예수의 다시 살아나심을 한층 더 강조하면서 그 분이 더 이상 '죽은 자 가운데서' 머물러 계시지 않으신다는 진리를 말 속에 담는다. 이제 영원히 '산 자'로서 '죽은 자'와 확연히 구별되신 것이다.
여섯번째는 승천에 대한 말씀이다.
'하늘에 오르사'(b19-20), 아주 간단한 표현에 예수 승천의 역사적인 사건이 담겨있다. 신경이기 때문에, 왜 오르셨는가, 어떻게 오르셨는가를 자세히 말할 필요가 없었다. 역사적 사실만 말해주면 됐다. '그가 하늘에 오르셨다.' 하늘(b19)을 말함으로 땅의 영역 이외의 특별한 곳이 있음을 전제해 주는데,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결국 하늘에 오르심으로 더 이상 땅에 계시지 않고 하나님이 계신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했다. 물론 이 말씀은 다른 부분들과 함께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해주는 부분이 된다.
일곱번째는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b21-23)을 선언한다.
'내'가 선호하는 하나님의 명칭은 '전능하신 하나님'(b21)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역본도 눈에 띄는데 앞의 하나님에 대한 신조(a3-5)와 연계되어 있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바로 그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우리 말로 번역할 때 특별히 고려한 부분이 눈에 띄는데 '앉아 계시다가'(b23)라고 번역한 부분이다. 우리 말로 현재의 계속을 강조하기 위해 현재동사 '앉다'에다 진행보조어인 '계시다'를 덧붙였다. 하나님의 우편(b22)이 하나님과 동등한 능력과 권위와 영광을 말해준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성부 곁에서 성부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으신 것이다.
여덟번째는 재림에 대한 말씀(b24-27)이다.
'저리로서'(b24)는 '하나님 우편의 자리에서'(b22)라는 뜻이고, '산 자와 죽은 자'(b25)는 이제까지 지구상에 있었던 모든 인류를 말할 것이다. 모든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는 말씀은 적어도 예수께서 심판자라는 사실(b26)과 그가 다시 오실 것(b27), 그리고 그가 오셔서 하실 가장 중요한 일이 심판이라는 것(b26-27) 등 세 가지 진리를 말해준다. 심판자가 되심은 그 분이 성부의 권한을 위임 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가 다시 오실 것과 그가 오셔서 심판할 것임을 동시에 언급해서 이제까지의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 사건들이 이루어진 것처럼, 장차 역사적 사실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 선언한 것이다. 즉, 오르신 그곳에서 그는 다시 내려 오신다. 그것이 '나'의 신앙이다.
이처럼 예수님에 대해 부가하는 설명 여덟 가지는 예수와 관련한 초월성과 일반성이 서로 섞여 있다. 마치 벽에 다 거는 '테이피스트리'(tapestry)처럼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어우러져 짜여있다. 그 어느 것이 단독으로만 나타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이는 것에서 두 가지를 엄밀히 분리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 모든 것이 종합하여 예수(b2)께서 '그리스도'(b3)이심을,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외아들'(b4)이심을, 결국 그래서 '우리 주'(b5-6)가 되심을 증거한다. 그와 함께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의 모든 것을 역사적 실재로서 신앙하는 선언 내용이다.
성령과 그의 사역에 대한 신앙
세 번째 신경내용은 '성령을 믿사오며'(c1-2)하고 시작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원본에는 '믿사오며'가 생략되어 있다. 내 자신 역자는 아니지만 굳이 한역에서 이곳에 '믿사오며'를 삽입했음직한 가능한 이유 두 가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삼위일체적인 강조를 하기 위함일 것이다.
'하나님을 믿사오며 예수를 믿사오며 성령을 믿사오며' 해야 삼위일체의 균형이 맞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다고 원문이 훼손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자가 생각하는 신학적인 목적에 부합한다. 실제로 우리 한역본 사용자들은 '성령을 믿사오며' 하며 고백할 때 자연스럽게 삼위일체적인 강조를 느낀다.
두 번째 가능한 이유는 번역의 기술적인 부분이다.
앞에서 '내가 믿사오며(a1-2)... 믿사오니(b1)' 했기 때문에 짝을 맞추기 위해서 '믿사오며(c1)... 믿사옵나이다(c3)'로 번역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 이 부분에서 '믿사오며'(c1)를 뺀다면 대신 '또한' 등과 같은 말을 앞에 덧붙여야 할 것이다. 예컨대, '...오시리라. 또한 성령과 거룩한 공회와 ....믿사옵나이다.' 이런 것을 본다면 번역에도 일반 언어사용에서처럼 '선택의 원리'와 '순서의 원리'가 사용된다. 어찌되었든 오늘날의 한인 고백자들은 번역자 덕분에 이 부분에 삼위일체적인 강조와 함께 자연스러운 대칭 구조를 가진 사도신경 한글본을 갖게 되었다. 다만, 앞에 말한 바처럼, 성령 이후의 부분이 성령의 사역이라는 점을 간과하기 쉬운 번역이라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성령을 믿는다'(c1-2)는 것은 대단히 간단한 선언이지만 그 말속에 깊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령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삼위 하나님의 한 위로서 계신다는 선언적 고백이다. 이 말은 성령을 거절하고 등한히 하는 모든 언행에 대한 반대하는 선언에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나'는 성령을 따르는 신앙인임을 주창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직 사도신경이 성령에 대한 이설들이 많지 않았을 기독교 초기의 작품일 것임을 말해주는 특징이라는 점을 역시 부인하기 어렵다.
'거룩한 공회(c4)'는 '거룩한 영' 성령(c2)에 뒤이어 나옴으로써 성령고백의 의도적인 연결 부분으로 보아도 틀림이 없다. 이 점에서 '나'는 의도적으로 성령을 믿는 신앙(c1-2)과 뒤잇는 고백들(c3-9)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순서의 원리'). 그런데 실제로 교리적으로 계속되는 고백 내용들, 즉 교회(c4), 성도의 교통(c5-6), 죄사함(c7), 그리고 육체를 살리며(c8) 믿는 자를 영원히 살리는(c9) 구원사역은 모두 성령의 역할이다. '나'는 뒷부분에서 먼저 성령의 공동체, 교회사역을 2번 언급한 후(c4-6), 성령이 이루는 개인 구원을 3회 언급했다(c7-9).
'거룩한 공회'(c4)는 '하나된 교회'라는 뜻과 그 교회의 거룩성을 함께 강조하는 말씀이다. 많은 교파와 교회가 있는 지금까지도 '나'는 '하나된 거룩한 교회'를 고백하고 있다. 이 고백으로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가 한 주인을 모시고 있음을, 또한 모두가 한 성령의 교회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교회가 있고 나서야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c5-6)이 있다('순서의 원리'). 그것은 성령이 있고서야 교회가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거룩한 교회의 특징은 성도의 교통이다. 성도 서로간의 교통, 이를 통해 사랑과 은혜가 흐른다. 이로 해서 특별한 교회 공동체(c4)가 이 땅에 자리잡는 것이다.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사랑과 섬김의 모임이 이렇게 해서 생겨날 때 그것은 성령(c2)이 역사하고 계시다는 산 증거가 된다. 사실 이 부분은 신앙선언에 담을 필요가 있을까 하고 반문할 수 있는 주제이다. 내용이 교리적 사실이라 말하기에는 뭔가 어색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의 신앙에 담은 이유는 무얼까? 그것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 '나'와 '우리'의 해야 할 의무임을 강조하기 전에 먼저는 이 성도의 교통(c6)이 성령(c2)으로 거룩한 공회(c4), 즉 교회에 실재할 수 있고 또 실재하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닐까 한다. '나'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신앙한다(여기서 한글역에서 '서로'(c5)라는 말을 덧붙임으로 교통에 대한 서로의 책임을 강조했음을 말해두고 싶다.- '수식의 원리').
죄사함(c7)과 몸의 부활(c8)과 영원한 생명(c9)은 구원사역과 관련된 성령의 일이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c7)은 이제까지의 교리적인 신앙선언의 열매이다. 삼위 하나님(a1-c2)을 믿으므로 죄사함을 받기 때문이다. 앞 부분에 대한 신앙은 이 뒷부분에 대한 확신을 가져온다. (한글본에서 사역 보조동사 '주신다'를 덧붙인 것은 죄사함이 위로부터 오는 것임을 좀 더 강조하기 위한 번역자의 노력이다. 그 같은 노력이 꼭 필요한 것인지, 또 목적 이루기에 성공했는지, 또는 그 노력이 일관적인 것인지는 여기서 따지지 않겠다.) 죄사함을 믿는 것은 '나'의 중요한 신앙이다. 믿는 자를 사하시는 은혜 아래 구원의 소망을 갖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몸의 부활(c8)과 영원한 생명(c9)은 구원의 마지막 과정에 일어날 사건이다. 몸의 부활이 '나'의 몸이 후에 똑같은 상태로 복원된다는 것을 믿는 신앙은 아닐찌라도, 영적 부활만이 아닌 전인적인 부활을 믿는 '나'의 신앙인 것이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신앙으로 '나'는 신앙선언을 마친다. '내가' '영원히 사는 것'(c9)을 '믿사옵나이다'(c3) 할 때 신자는 제한된 현재를 벗어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로서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생을 알고 소유한 자로서 새롭게 살겠다는 다짐을 다시 하는 것이다. 그 다짐이 마지막 신앙선언에 담겨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 아니다. 결국 마지막의 '아멘'(c10)이 그것을 보증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멘' 하면서 이제까지의 여덟 가지 신앙선언을 하나씩, 하나씩 인증해 나간다.
앞서 말한 바처럼, 죄사함(c7)과 몸의 부활(c8)과 영생(c9)은 서로 맞물려 연결되어 있다. 이 세 가지는 개인구원의 내용이다. 개인이 믿음을 고백할 때 위로부터 받을 구원의 열매이다. 먼저 하나님으로 시작한 사도신경의 신앙선언이 자연스럽게 개인 구원으로 연결된 것이다. 그래서 삼위 하나님에 대한 선언적, 고백적 성격의 사도신경이 뒷부분으로 가면서 점차 개인 구원적인 측면으로 전환해 간다. 머리가 있으므로 꼬리가 있듯이, 하나님이 계시므로 '나'의 구원이 있다. 그러므로 믿는 '나'의 구원이 있음을 믿으며 선언하는 것은 곧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도신경은 기독교가 구원 종교임을 선언하는 신경이다.
전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분을 대폭 할애함으로써 이 부분에 비중을 두었다. 그래서 단어 사용 수에서 성부 - 성자 - 성령이 각각 7 - 43(7+36) - 20 (한글역 기준)으로 비중을 두었는데, 이를 볼 때 기독론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크고 그 다음은 성령, 성부 하나님 순이다. 그러나 성부와 성령, 이 두 가지는 분량의 차이로 비중을 결정할 수는 없다. '순서의 원리'에 따라 성부에 대한 선언이 먼저 등장하기 때문이다. 분량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언이, 순서로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선언이 각각 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사도신경 설교에서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원저자가 이 같은 강조를 두고 사도신경을 만든 측면을 반영하는 것이 옳다(특별한 이유라는 것은 목양적인 측면에서 회중의 상태를 특별히 감안해야 할 때이다).
설교개요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나'의 신앙이 선언되는 것이다. '나'는 먼저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마지막으로 성령과 성령이 하시는 일에 대한 분명한 신조들을 선언한다. 이를 통해 내가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 임을 세상 앞에 선포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누구를 따르는 자인지, 그리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나가는지 밝혀준다. '크레도' 하면서 신자답게 믿고 살겠다고 결단하는 것이다. '크레도' 하면서 삼위 하나님께 언약을 다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이 같은 수사적인 목적이 현대를 사는 회중들에게 이루어지도록 그 형식과 내용을 담아야 한다. 이와 함께 신경의 언어적인 강조점이 가급적 그대로 부각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세부적인 개요를 잡아보자(위의 분석표와 분석 내용에 나온 부호와 설교개요의 부호는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참작하자. 이태릭체는 그 부분에서 강조하는 내용이다).
I. '나는' 무엇을 믿는가?
A. '크레도'- 누가 믿는 것인가? (a1-2)
B. '나는' 어떤 믿음을 선언할 수 있는가? (사도적 신경)
II.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A. '나'의 첫번째 신앙선언-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a3)
B. '나'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 (a4)
1.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 (a5)
2. '나'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믿는다. (a6)
C. '나'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 (a1-6)
III.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A. 두 번째 신앙선언의 중요성 (b1-27)
B.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b2-3)
C. '나'는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b4)
D. '나'는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b5-6)
E.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여덟 가지 역사적, 미래적 사실들을 믿는다.
1. '나'는 예수의 성령잉태를 믿는다. (b8)
2. '나'는 예수의 동정녀탄생을 믿는다. (b9-10)
3. '나'는 예수의 고난을 믿는다. (b11-12)
4. '나'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믿는다. (b13-14)
5. '나'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b15-18)
6. '나'는 예수의 승천을 믿는다. (b19-20)
7. '나'는 예수의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을 믿는다. (b21-23)
8. '나'는 예수의 심판을 위한 재림을 믿는다. (b24-27)
IV. '나'는 성령과 성령의 사역을 믿는다.
A. '나'는 성령을 믿는다. (c1-2)
B. '나'는 성령의 사역을 믿는다. (c3-9)
1. '나'는 성령의 교회사역을 믿는다. (c4-6)
(1) '나'는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 (c4)
(2) '나'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 (c5-6)
2. '나'는 성령의 구원사역을 믿는다. (c7-9)
(1) '나'는 죄를 사하여 주심을 믿는다. (c7)
(2) '나'는 몸의 부활을 믿는다. (c8)
(3) '나'는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 (c9)
V. '크레도'의 다짐- '나는' 이 진리들을 믿는다. 아멘.
사도신경 설교는 한 번만에 다할 수도 있고, 서너 번에 나눠 할 수도 있지만, 많게는 스무 차레를 넘게 세분해서 항목별로 설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횟수를 잡아 하든 기본적인 구조와 중심적인 내용의 골격은 가급적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그와 함께 매 설교마다 사도신경의 수사적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고 있는지 계속하여 물어야 한다.
김상훈 교수(스텔렌보쉬대 신학대학원)/월간 <교회와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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