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리델보스-1(H.Ridderbos;)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경적 이해 이승구
이 강의에서는 하나님 나라란 과연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와 어떻게 관련되고, 우리의 세계관과 각 학문 분과의 학문적 활동,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1. 신국(神國)이란 용어와 그 의미
신국(神國), 즉 ‘하나님 나라’(βασιλε α το Θεο )라는 용어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리심(rule or reign)을 뜻하는 용어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그의 주재권(主宰權)을 뜻하고, 부차적으로 그 다스리심을 받는 존재들과 그 다스리심이 미치는 범위와 영역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1]
그러나 이렇게 말하고 나서도 이 말의 의미가 다 드러난 것은 아니다. 과연 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 세상을 하나님이 다스리시니,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인가? 아니면 성경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했을 때는 어떤 다른 것을 뜻하는가? 이는 아주 심각하고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성경에서 그 의미를 배우기를 원한다. 그런데 중요한 성경의 많은 용어들이 그러하듯이, 이 ‘하나님의 나라’란 용어도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그 의미가 성경의 한두 곳에서 정의되어 있는 용어가 아니다.
구약에서는 정확히 이런 용어가 사용된 일이 없고, 신약에서 187회 정도 이 용어와 이를 달리 표현하는 ‘하늘 나라’, 즉 ‘천국’(天國)이란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용어가 사용되었을 때 당대의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그 누구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물어 본 일이 없다. 하나님 나라라는 이 용어는 그저 당시에 이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이 다 그 의미를 알고 있는 양 아주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예수님께서 주로 이 용어를 많이 사용하셨고,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도 이 용어를 다 알고 있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는 (1) 구약에서 이런 개념이 사용된 예를 살펴보고, (2) 이와 연관해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이 용어를 사용한 의미를 검토하고, (3) 예수님과 사도들이 이 용어를 사용한 그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그 의미를 확정할 수 있을 것이다.
2.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용례와 그 의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구약에는 “하나님의 나라”( 또는 )라는 말은 거의 없다. 한번 예외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를 들 수 있다면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여호와의 나라 위에 앉혀”( )라고 말할 때이다. (물론 우리말 시편에는 “주의 나라”라는 표현도 나온다[시 145:11, 12, 13]. 그러나 정확하게는 “당신님의 통치” 또는 “당신님의 다스리심( )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정확히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다스리심”, “여호와의 나라” 등의 말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보스가 잘 말하고 있듯이 “비록 아직 명확한 명칭은 없었지만 그 사상은 구약에서도 나타난다.”[2]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온 우주에 미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
그런데 구약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또 창세로부터 온 세상의 왕으로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므로 온 세상이 다 그의 주관 하에 있다(시편 95:3-7 참조). 그러므로 그는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이다. 보스는 이를 “창조에서 시작되었고, 전 우주에 미치는 섭리로 확대되는 하나님의 통치”라고 부르며, “이는 특별히 구속적인 (하나님) 나라의 사상이 아니다”고 말한다.[3] 이런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고 있는 다음 같은 구약의 구절들을 살펴 보라: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을 입으시며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하도다.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시 93: 1-2).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로 통치하시도다(시 103:19).
이 구절들은 하나님께서는 그 계신 곳, 하늘(heaven)로부터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한다. 이를 하나님께서 “하늘에 그 보좌를 베푸셨다”고 하든지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아 계시다고(겔 1:26-27), 그리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 편에 보시고 서 있다”(왕상 22:19, cf. 욥 1:6; 2:1)고 표현하는 것이다.
또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며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시 11:4)고 말하기도 한다. 이 표현은 실제로 하늘에 보좌가 있고, 하나님께서 그 곳에 앉아 계신다는 말이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로 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도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라고 말하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는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고 말했던 것이다(사 6:1, 6).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통치하셨다는 것으로부터 하나님은 여러 곳에서 왕으로 지칭되신다. 다음 같은 구절들을 보라: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시 10:16).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시 29:10).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우리 왕을 찬양하라. 하나님은 온 땅에 왕이심이라.......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낮으셨도다(시 47:2, 6-8).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오,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시로다(시 95:3).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시편 145:1).
열왕의 왕이시여......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원한 왕이시라(렘 10:7, 11).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가라사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그가 과연 산들 중의 다볼같이, 해변의 갈렐 같이 오리라(렘 46:18, cf. 렘 48:15; 51:57).
(또한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라고 옮겨진 말 중 많은 것이 “여호와는 왕이시니”라고 옮겨질 수도 있는 표현( )임에 유의해야 한다[시편 93:1; 96:10; 97:1; 99:1]). 또 때로는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님이 왕이라고 말씀하기도 하신다: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14하).
이렇게 온 땅의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통치자들을 세우시는 일에서(단 2:37; 4:17; 5:21 등)와 현세적 심판과 주재권의 발휘에서(렘 48:15; 51:57; 시 22:28) 나타난다. 그리고 이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는 영원하다. 이스라엘 백성도 그렇게 말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권능을 목도한 이방의 왕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출 15:18).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시 45:6).
[주의 성도가] ‘주의 나라’( )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능을 일러서 주의 능하신 일과 ‘주의 나라’( )의 위엄의 영광을 인생에게 알게 하리이다. ‘주의 나라’( )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시 145:11-13).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 하노라. 크도다 그 이적이요, 능하도다 그 기사요,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 권병(權柄)은 대대에 이르리로다(단 4:2-3).
시온아! 여호와 네 하나님은 영원히 대대에 통치하시리로다(시 146:10).
(2)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
그리고 위 인용문들 중의 마지막 구절이 시사하듯이 온 땅의 왕이신 하나님은 특별히 이스라엘의 왕이시다(신 33:5; 삼상 12:12; cf. 삿 8:23).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이다(대상 17:14; 28:5; 대하 13:8. cf. 출 19:6).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여겨지는 것이다.
보스는 이를 “신정(theocracy)이라 불리는 특별한 구속적 나라”라고 부른다.[4] 우리가 위에서 살펴 본 대로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통치의 대상이나 그 온 땅의 거민이 다 타락하고 패역하여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기꺼이 받지 않게 되었다. 이 때에는 하나님의 권능의 통치는 온 땅에 미치나 그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즐겁게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마치 사단과 악한 영들도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 있으나 그들을 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것을 전통적으로 “권능의 왕국”(regnum potentiae)라고 불러 왔다. 이 권능의 왕국에는 사단과 악한 영들, 또 이 세상에 불순종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세상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라고 할 때에는 이런 권능의 왕국의 왕이시라는 뜻이 다분하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복종하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아브람을 선택하시고 그와 그의 후손들과 언약을 맺으셔서 그들을 자신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다. 이렇게 특별히 세우신 이스라엘이 특별한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구약적인 의미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었다. 그들은 구약적인 “은혜의 왕국”(regnum gratiae)에 속한 백성들이다.
실질적으로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일 수 있는 것도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구속 사역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 언약 아래에 있는 백성들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은혜의 왕국은 은헤 언약 하에 있는 백성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은혜 언약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시듯이 은혜의 왕국의 왕도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장차 오실 구속자 안에 예기적으로 있는 구약적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었다. 그런데 보스는 “이 구속적 나라를 처음으로 명백히 언급한 것은 출애굽 때”에 나타나는 “제사장 나라”라는 표현이라고 한다(출 19:6).[5]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법궤 위의 시은소에 새긴 그룹 위에 계신 분으로도 언급되신다(왕상 19:15; 사 6:1). 또 때로는 시온산이나 예루살렘으로부터 다스리신다고도 표현되는 것이다(시 44:22; 99:1-2; 렘 8:19). 따라서 이 제사장 나라인 이스라엘 가운데서 왕으로 세우심을 입은 자도 자신 이 진정한 왕이 아니고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며, 하나님께 속한 주권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 대표적인 왕 다윗은 이런 생각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었다: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主宰)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 29:10-12).
그러나 이 이스라엘은 그들의 하나님 백성 됨에 충실하지 못했다. 그들도 그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처럼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해 버렸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여러 모양과 여러 수단으로 현세적인 심판을 내리셨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생각하지 않고 더 악한 데로 나아가 버렸다. 바빌론 포수의 상태는 이 땅에 있는 구약적 하나님 나라가 무너지고 상실된 상황임을 느끼도록 해주었다. 이 역사적 시기는, 보스가 표현한 바와 같이, “그 신성한 나라가 결코 모두 파기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de novo) 가져온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할 정도로 사라져 간 때”였다.[6]
(3) 하나님의 미래 통치
이런 상황 가운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런 일이 임했음을 선지자들을 통해서 선언해 주셨다. 그러나 심판이 하나님의 마지막 말은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왕,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 왕이 장차 온 세상을 공정히 심판하고 만민을 다스리시려고 임하실 것임도 선언하고 강조하는 것이다:
열방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못할지라. 저가 만민을 공평히 판단하시리라 할지로다.......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시 96:10, 13).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 2:44).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의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슥 14:9, 16).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 또는 하나님 통치의 회복이 메시아 예언과 연관된다. 메시아는 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해 보내지는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그 메시아 예언에 속하는 시편 22편의 한 곳에서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 나라의 사상이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이심이로다......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와서 그 공의를 장차 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시 22:27, 28, 30, 31).
구약 선지서들에는 결국 이런 하나님의 나라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모든 나라가 다 하나님께 속할 것이라는 기대로 가득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자들이 시온산에 올라 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오바댜 21)고 말하는 예언은 오바댜에만 한정된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즉 하나님의 통치가 임할 것을 예언하고, 그것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사야도 이렇게 말한다: “그 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니라”(사 14:23).
3.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용례
그러면 이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이 ‘하나님 나라’란 용어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사용했는지를 생각해 보자.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온 세상을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구약에서 잘 배워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는 이런 온 세상에 대한 보편적인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지는 않은 듯하다. 오히려 우리가 지난 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보았던 장차 임할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을 ‘하나님 나라’라고 칭하며 그것을 기다린 듯하다. 이는 신약에 나타나는 당대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사용한 용례를 살펴보면 잘 나타난다.
예를 들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다라”고 한 공회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하였다(막 15:43, 44). 하나님 나라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 나라, 그 통치가 아직은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그 나라, 그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심지어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기다리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도 한번은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하고 물었던 것이다(눅 17:20). 물론 이는 요셉을 비롯한 당대의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미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부인하였다는 말은 아니다. 그 권능의 왕국을 인정하되, 현재는 그런 것에 부합한 현실이 나타나 있지 않음을 보면서 그에 부합한 현실이 눈앞에 전개되기를 기대한 것이다.
구약에서 예언하신 대로 그 왕이 임하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온 세상을 그 의와 공평으로 다스려 주시기를 고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로써 장차 임하게 되는 하나님의 통치를 지칭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 나라가 이 땅에로 임하여 올 것이라고 믿었고, 그 통치가 이 땅에 가득하게 되어 이 온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에 방불하게 되는 날이 어서 속히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 다른 곳에 현존하고 있다가 그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하늘에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현저하게 드러나서 온 땅에 가득하게 되기를 기다렸었고, 그것을 하나님의 통치요, 하나님의 나라라고 지칭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 나라의 임함이 과거 구약적 하나님 나라였던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에게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이까?”라고 묻기도 했던 것이다(행 1:6).
이는 그들이 기다려 오던 하나님 나라의 임함, 즉 이스라엘의 회복이 지금 이루어지느냐는 질문인 것이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되었다. 또 이와 비슷한 것은 “이스라엘의 위로”라는 말이나(눅 2: 25), “예루살렘의 구속됨”이란 말이다(눅 2:38).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도 결국 하나님 나라의 임함을 기다린 것이고, 안나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들은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도 결국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와 동의어적인 말로 사용한 이런 말들을 볼 때에 그들은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이 땅에 임하게 되는 하나님의 통치를 이해했음이 분명해 진다.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 왕국이 그런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거나, 그 실현의 전조로 이해된 것이다.
유대인들의 전통적 두 세대 개념도 유대인들의 이런 하나님 나라 개념을 잘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이 세대(this age) 또는 이 세상(this world)이 끝나면 ‘오는 세대’(즉, 來世, the age to come) 또는 ‘오는 세상’(the world to come)이 오리라고 믿었다.
그들이 바라던 하나님 나라의 임함은 바로 이 오는 세상이 임하는 것이었다. 이런 ‘오는 세대’ 개념은 유대인들의 묵시 문학 가운데 자주 등장하는 용어였고, 이는 하나님 나라의 임함과 동일시 되었다.[7]
물론 당대의 유대 사람들은 항상 구약에 근거한 바른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구약에 근거해서 바른 생각도 했지만, 그것에 대한 기대가 여러 가지 것과 혼합되어 나타났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의 하나님 나라 개념은 다윗 왕국의 회복에 대한 기대로부터 정치적이고 이 세상적인 메시아 왕국 개념으로 발전되기도 했다.
그것이 이 역사 가운데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나, 그들은 대개 그것이 이루어지는 때가 세상 끝, 즉 종말이라고 이해했다. 거뜨리가 잘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유대인들에게는 “그 나라가 오는 세대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8] 즉, 오는 세상에서라야 이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고 본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이 세상은 끝, 즉 종말에 이르고 하나님의 나라만이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4.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왕국 선포(1)
바로 이런 배경 가운데서 세례 요한의 “회개하라”는 선포가 나타났다. 당시의 유대인들의 다양한 집단들은 그들 나름의 다른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가 다 그들에게 임하여 오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세례 요한이 선포한 말을 꼭 그대로 사용하셔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신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그 “회개하라”는 말 다음에 나오는 말은 요한과 예수님 모두에게 있어서 “하늘 나라, 즉 천국(天國)이 가까웠다”는 말이었다.
예수님의 말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자. 마태 복음 4:17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때부터[요한이 잡힌 후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정확히 같은 것을 마가복음에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표현하고 있다.
정황이 모두 같고, 이것이 예수님의 첫 선포임을 생각하면, 이는 같은 것을 표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가깝게 다가온 것’은 하나님 나라요, 천국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같은 실재에 대한 지칭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정확히 어떤 용어를 써서 표현하셨는지를 단언할 수는 없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하셨는지, 아니면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셨는지 말이다. 유대인들의 표현 습관을 생각하면 아마 천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천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다면 왜 마태만 이 용어를 유지했겠는가라고 하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라고 하셨을 텐데 마태가 천국이란 변형을 만들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한다.[9] 그렇지만 우리는 그 말씀을 직접 듣지 못했으므로 예수님께서 어떤 용어를 사용해서 표현하셨는지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η βασιλε α το θεο )와 ‘하늘 나라, 즉 천국’(天國, η βασιλε α τ ν ο ραν ν)이란 용어의 정확한 관계를 정리해야 할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 비추어 보면 이 두 용어는 동의어로 사용된 것임이 분명하다. 후크마가 말하고 있듯이, “하늘 나라[天國]라는 표현과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이 공관복음서에서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는 것이므로, 그 둘 사이의 의미의 차이가 없다고 안전하게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10]
그렇다면 왜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하늘 나라, 즉 천국(天國)이라고 했을까? 게르할더스 보스는 마태복음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여 쓰여졌음을 생각하면서 슐러(Schurer) 등의 해석에 따라서 “하나님이란 이름을, 그것이 다양한 형태로 상당히 회피되던 것이므로 ‘하늘’로 바꾸어 사용하던 유대적 관습”과 관련해서 설명한다.[11]
즉, 여기서 “하늘”이라고 표현된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회피하려고 다른 말로 돌려 쓴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보스는 이와 비슷한 용례로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하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눅 15:18, 21)라는 말과, 예수께서 비판하던 자들에게 물으셨던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서냐?”(마 21:25)는 말을 들고 있다.[12]
이에 해당하는 또 다른 예로 요한이 하는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 3:27)는 말을 들 수 있다. 또한 다니엘서에 나타나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단 4:26)는 말의 난하주에 나타난 원문을 직역한 “하늘이 다스리는 줄을”이라는 표현도 이에 대한 용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의 “하늘”(ο ραν )은 “하나님”에 대한 동의어로 사용되었다.[13]
이런 용례의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하나님 나라를 하늘 나라, 즉 천국(天國)이라고 부른 경우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천국이라는 말이 나올 때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를 하나님 나라라는 말로 이해해야만 한다. 이 용어에 대해서 하늘 나라[天國]라는 말의 어원을 가지고서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용례에 맞지도 않고, 이 말이 사용된 의미에도 반하는 일임에 유의해야만 한다.
이 말의 “하늘의” 라는 말은 이 문단에서 우리가 살펴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라는 말을 대신하여 사용된 말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하늘 나라[天國]라는 말로써 전달하시려는 바를 오해하고자 하는 것이 되겠기 때문이다.
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신약 성경에서 ‘하늘’(heaven)이란 말이 여러 가지 용도를 가지고 나타나고 있음을 잘 주의해 살펴보아야만 한다. 신약 성경을 면밀하게 살펴 본 학자들은 그 용례를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그 첫째는 ‘하늘’을 우주론적인 하늘로 지칭한 경우이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하늘, 해와 달과 별들이 있는 그 곳을 하늘이라고 하였다.
둘째는 위에서 우리가 살펴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을 지칭하는 대신에 ‘하늘’이라고 돌려 표현한 경우이다.
그 셋째는 하나님이 계신 곳, 즉 하나님의 거주지를 지칭해 ‘하늘’이라고 한 예가 있다. 예를 들어서, 시편에서 “하늘”을 하나님의 “거하신 곳”의 병행법적 표현으로 쓰고 있는 시편 33:13-14를 보라: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곧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도다.” 또한 신약에 나타나고 있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란 표현이나(마 6:9),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는 표현(마 7;21; 10:32, 33; 12:50; 16:17; 18:10, 19), 또 “하늘에 게신 너희 아버지”라는 표현(마 5:16, 45; 6:1, 7;11; 18;14), 그리고 “천부”(heavenly Father)라는 표현(마 5; 48; 6:14, 26, 32; 15:13; 18:35)에 나오는 “하늘”은 모두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지칭하는 표현에 해당하는 것이다.
성자께서도 그 “하늘”, 즉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부터 이 세상에 오셔서 성육신하셨고, 구속 사역을 마치신 후에 다시 그 ‘하늘’에 오르신 것이다. 예수께서 친히 그렇게 말씀하신다: “하늘에서 내려 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렇게 묻기도 했던 것이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저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 왔다 하느냐?”(요 6:42) 이처럼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 오셨고, 하늘에서 오셨음을 분명히 하셨다. 또한 그의 사역을 마치신 후에는 그가 계시던 곳, 하늘로 오르셨다. 그가 다시 오시기까지 마땅히 “하늘”이 그를 받아 두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하늘”에 계시고, 그 “하늘”로부터 심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로 임하여 오실 것이다.
이 하늘을 바울은 유대인들의 개념을 따라서 “낙원”(paradise)라고 부르기도 했다(고후 12: 2, 4).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상에서 그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한편 강도에게 “네가 오늘날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다(눅 23:43). 이는 그 강도의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이 분명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이 계신 곳, 즉 ‘하늘’에 계실 것이므로 ‘하늘’(heaven)을 ‘낙원’(paradise)과 동일시하신 것이다.[14]
성경은 신자들이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면전에 있을 것임을 분명히 한다. 예를 들어서, 바울은 자신이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한다(빌 1:23). 이런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는 “개혁 교회들의 일반적 입장은 신자들의 영혼이 죽으면 곧바로 하늘 영광(the glories of heaven)에로 들어간다는 것이다.”[15]
성도들의 몸과 분리된 영혼도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계신 그 곳, ‘하늘’ 즉 ‘낙원’에 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 곳에 있던 성도의 영혼은 부활 때에 몸과 다시 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올 것이고, 그리하여 심판 이후에 “새하늘과 새땅”으로 불려지는 극치의 하나님 나라, 영광의 왕국(regnum gloriae)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벌코프는 “신자들의 최종 상태는 현 세상이 지나가고 새로운 창조가 나타난 후에야 있게 된다”고 말한다.[16] 그 새로운 창조인 새하늘과 새땅이 성도들의 최종적 거주지라는 말이다.[17]
그러므로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천국이 가까웠다”고 표현한 것은 결국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그 오는 세대의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고 하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그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 즉 은혜의 왕국과 영광의 왕국 이외의 것을 가르쳐서 천국이라고 말하거나 생각해 본 일이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즉 천국이 가까웠다”고 말씀하실 때도 다른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과 신약의 하나님 나라 개념을 잘 요약하고 있는 다음 신학자들의 말을 잘 들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왕의 신적인 행위를 생각해야만 한다...... 요한과 예수께서 선포하신 천국은 무엇보다도 역동적 성격의 과정이다...... 왜냐 하면 천국의 임함은 종말 역사의 위대한 드라마의 처음 단계이기 때문이다.[18]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왕이시며, 역사 가운데서 역사를 하나님께서 지향해 가시는 목표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서 행동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19]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 역사 가운데서 역동적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 목표는 하나님의 백성을 죄와 마귀적 세력들로부터 구속하는 것이고, 종국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수립하는 것이다.[20]
그러므로 신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 위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통치 행위로 이는 결국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 극치에 이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그 나라가 “가까왔다”( γγικεν)고 하신 말의 뜻은 무엇일까? 옛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그 하나님 나라가 이제 많이 가까웠다는 말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그 정확한 의미는 예수님께서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신 모든 점을 잘 고찰함으로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절에서 고찰해 보기로 하자.
5.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국(神國), 즉 천국(天國) 선포 (II)
신국(神國), 즉 ‘하나님 나라’(βασιλε α το Θεο )에 대해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무엇보다 먼저 그 나라가 “가까왔다”( γγικεν, is at hand or has come near)고 하였다(마 3:2; 마 4:17//막 1:15). 이 “가까왔다”( γγικεν)는 말에 대해서 다드(C. H. Dodd) 같은 이는 (그 두 개의 헬라어 동사 배후에는 같은 아람어가 있다는 가정에서) 이 “가까왔다”( γγικεν)는 표현을 마태복음 12:28의 “너희에게 임하였다”( φθασεν ' μ )는 말과 같은 뜻이라고 보면서, 이것이 그 나라가 “이미 임하여 왔음”(has come, has arrived and is here)을 표현하는 셈어적인 표현이라고 해석하였다.[21]
그러나 이는 좀 지나친 해석이라고 생각된다.[22]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천국이 가까웠다”고 할 때에는 그 하나님의 다스리심, 즉 심판과 통치의 실현의 임박성을 말하고 있음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를 도입시키실 것이고, 그의 종국적 통치를 수립하실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23]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례 요한은 아마도, 레온 모리스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예수님께서 곧 나타나실 것이고, 그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Kingdom)도 나타날 것임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24] 즉,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天國]의 임박한 미래성을 지시하고 있고, 또 예수님의 사역을 기다리고 있던 그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같은 말을 하고 계실 때 이에 대해서는 이는 아직 그 의미를 잘 모르겠는 모호한 표현으로 보든지 (그래서 좀더 명확한 후의 가르침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든지),[25] 아니면 이전 선지자들이 선포하였고 유대인들이 기다려 오던 그 나라가 이제는 좀더 가까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미래적인 측면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26] 단지 그 나라의 가까움이 얼마나 가까운 것인가 하는 것은 아직 드러나 있지 않다.[27] 만일에 이 말씀을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의미로 볼 때에는 예수님의 다른 가르침으로부터 이에서 좀 더 나아간 가르침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28]
그런데 마태복음 12:28에서는 예수님의 귀신 쫓아내시는 사역에 대한 논의 후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선언하시는 말씀이 나타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의 병행구절도 참조하라).[29]
여기서는 아주 분명하고도 강하게 하나님 나라, 즉 하늘 나라[天國]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 φθασεν ' μ )고 말씀하셨다. 여기 사용된 “앞서다(come before), 임하다(come upon)”는 뜻을 가진 "쁘따노“(φθ νω)라는 동사에서 온 “에쁘따센”( φθασεν)이란 동사의 용례를 생각할 때에[30] 이 말씀은 전혀 모호하지 않게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31]
이 구절의 가르침에 의하면, 힐이 표현하듯이,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에게 가까이 온 것 정도가 아니라, 온 것이다.”[32] 세례 요한이 선포했던(heralded) 그 나라를 예수님께서 도입시키신 것이다(inaugurates). 그러나 이 말은 귀신을 쫓아내는 그 현장에만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이 임하여 온 것이라는 뜻이 아니고, 귀신을 쫓아내는 그 일이 이 은혜의 왕국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天國]가 이미 임하여 온 일에 대한 표라는 것이다.
그 일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성령을 힘입어 하신 일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행하시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로 왔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그것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든지, 소경을 고쳐주는 것이든지, 아니면 앉은뱅이나 문둥이를 고쳐주는 것이든지 말이다. “예수의 인격, 특히 예수의 행위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권위가 사람들 가운데, 특히 예수의 대적자들에게(너희에게) 나타났다.”[33]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사역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왔음을 확언할 수 있다.
마태복음 11:12에서는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하던 “세례 요한의 때부터 천국은 침노한다”(βι ζεται)고 하신다. 이 구절은 아주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많은 이들이 이 구절이 복음서에서 가장 난해한 구절들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34]
따라서 많은 해석이 이에 대해 제출된 구절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35] 우리말 개역에서는 “비아제타이”(βι ζεται)란 이 말을 수동태로 생각해서 “침노당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 “침노당한다”는 말을 수동태와 부정적 의미(hostile action)로 보고 해석한 것이다. 이를 좀더 발전시켜서 세례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사탄과 그의 세력에 의해서, 좀더 자연스럽게는 열심당원들이나 예수님께 저항하고 반대하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천국이 “아주 강력하게 모독당한다”(violently assaulted), “폭력 당한다”(suffer violence)고 해석하는 일부 학자들도 있다.[36]
그러나 이는 이 동사의 주된 용례와도 잘 맞지 않고, 문맥과도 잘 조화되지 않는 해석이라고 여겨진다(pace Blomberg, p. 188). 그러나 이렇게 해석한다고 해도 천국이 침노당하려면 여기에 현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전제되고 있음에(e. g., Hill, p. 201) 유의해야 한다. 즉, 보스가 잘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비유적인 말씀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이는 분명히 세례 요한의 때부터 그 나라가 실재적임을 묘사하는 것이다.”[37]
많은 학자들은 오히려 이 “비아제타이”(βι ζεται)라는 말은 중간태로 해석되어야 하며, 따라서 “강력하게 진전해 오는”(has been forcefully advancing) 이라고 옮긴 NIV에서와 같이 옮겨져야만 하는 말씀임을 분명히 한다.[38]
왜냐하면 리델보스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이는 데포넌트 동사 중간태에 대한 헬라어 용례에 일치하고, 12절 상반절은 핵심이 사람이 천국을 소유하는 방식보다는 천국 자체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12절 하반절에 가서야 어떻게 사람이 그 구원에 참여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맥락을 가지고 있음에 어울리는 해석이기 때문이다.[39]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준비에 이어 나타난 예수님의 사역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로 파고 들어왔다(break into this world)고 확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따라 나오는 “침노하는 자는 빼았느니라”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것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1) 이에 대한 하나의 좋은 해석은 지금 침노하여 들어오고 있는 그 나라와 같은 성격을 지닌 이들, 즉 이 맥락에서는 침노하는 성격을 가진 이들은(βιαστα ) 그 나라에 참여하게 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40] 그러므로 이런 해석은, 래드가 잘 표현하고 있듯이, 12절 앞부분과 함께 “천국은 능력 있게 활동하며 힘있는 반응을 요구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41]
(2) Carson은 이런 해석이 본 장의 가르침이 배제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 절의 앞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위에서 제시한 해석을 따르면서도, 뒷부분에 대해서는 “난폭한 자들이 그것을[천국을] 파괴하려고 시도한다”고 해석하려고 한다. 즉, 이 구절이 하나님 나라의 진전과 함께 난폭한 자들의 천국에 대한 공격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42] 그러나 칼슨의 이런 해석은 NIV가 “모든 사람이 그리로 향하느니라”(everyone is forcing his way into it)고 해석하고 있는 누가복음 16:16과의 병행성을 파괴하는 해석이 된다. 그러므로 전자의 해석이 본문의 문맥에 더 맞는 해석이라고 여겨진다.
천국의 비밀을 은닉하면서 동시에 알려주고 있는 여러 천국 비유들(마 13장 참조)에서도 천국은 일단 주어진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좋은 씨가 이미 뿌려졌고(마 13:24), 천국 말씀은 뿌려졌으며(마 13:19), 후에 크게 성장할 겨자씨 한 알은 이미 심겨졌고(마 13:31), 후에 전부를 부풀게 할 누룩은 이미 가루 서말 속에 넣어졌으며(마 13:33), 밭에 감추인 보화나 극히 값진 진주와 같은 천국은 이미 와 있어서 찾아 질 수 있으며(마 13:44, 45), 그물은 이미 바다에 쳐진 것이다(마 13:47).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에서 이미 천국 잔치는 베풀어지고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마 22:2).
바로 이런 의미에서 갈릴리 회당에서 한 안식일에 이사야 61장을 읽으신 예수님께서는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눅 4:21). 즉, 이사야서가 말하고 있는 여호와의 은혜의 해가 지금 예수님의 메시아의 사역 속에서 성취되었다고 선포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죄에게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셨고, 눈먼 자를 보게 하셨으며, 죄와 사탄에게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에서 이 모든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즉, 자신이 이 예언을 성취하려고 오신 메시아라는 자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헤롯에 의해서 옥에 갇힌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서 “오실 그 이[즉, 메시아]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하고 물었을 때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던 것이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4-5).
이는 이사야 (29:18f.); 35: 4-6; 61장을 비롯한 옛선지자들이 메시아가 임하셔서 하시는 일을 기록한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추론하도록 하는 암묵리의 선포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 오신 자신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왔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말씀과 사역 가운데 현존하고 있다.”[43]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서 이 땅에로 임하여 온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예수님께서 언급하고 있는 이런 일들이 나타나는 데서 때때로 그 나라가 현존하고 있음을 드러내지만, 아직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있는 바와 같은 우주적 대 파국을 동반하고 그 나라의 승리를 드러내며 오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염두에 두신 그 때까지는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지금 이 상황 가운데서는 하나님 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할 수 없다(눅 17:20).
왜냐 하면 “그 [나라의] 처음 강림은 정치적 쿠테타나 어떤 가시적 운동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며,[44] 따라서 지금 그 나라는 “너희 안에 있기”( ντ μ ν στιν) 때문이다. 여기 “너희 안에”( ντ μ ν)라는 말은 크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 말이다. 하나는 그 나라가 현존하려면 사람들의 심령(spirit)과 관련하여 있다는 해석이다. 그 나라 자체가 오직 영적인 실재(a spiritual reality)로만 여기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의 대표적 주장자는 보스이다.
그는 “이는 그 나라가 현재적임과 영적인 것임을 나타낸다”고 한다.[45] 물론 이 해석에는 난점이 있다. 지금 예수님과 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들이 바리새인들이기 때문이다. 그 바리새인들 안에 지금 하나님 나라가 없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은 원칙을 선언하고 계시는 것으로 보면 이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다.
즉, 지금 너희 안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하나님 나라가 있으려면 너희의 심령과 관련해 있는 것이라는 원칙을 선언하는 것으로 보면 말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 안에’라는 말은 꼭 개인들 안에라는 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쓰인 대명사는 포괄적이다. 그렇게 되면, 그 의미는 ‘백성 안에’(among people)라는 말과 동의적인 것이 된다.”[46] 그러나 마샬은 예수님께서 천국을 내면적이고 영적인 사태(inward, spiritual state of affairs)라고 가르치신 일이 없다고 단언한다.[47] 이는 좀 의아스러운 해석이다. 위에서 언급한 보스의 해석과 잘 대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너희 심령 안에”로 보는 해석이 가진 난점은 우리로 이 구절에 대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너희 안에”를 복수로서의 “너희 안에”, 즉 “너희들 가운데”(among you)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는 너희들의 마음 가운데가 아니라, “너희들 가운데”(in the midst of you) 또는 "너희들의 손이 닿는 그 곳에"(in the reach of you)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48]
그 곳에 누가 있는가? 바로 메시아로 오셔서 메시아로 사역하고 계신 예수께서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현존하고 있어서 사람들에 의해서 인식되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신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과 함께 그 나라를 가져 오셔서, 그가 그들 가운데서 살고 계셨기 때문이다.”[49] 그렇게 보면 이 구절도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사역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현존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중요한 구절이 된다.[50]
그러나 또한 아직은 그 나라가 눈에 보이는 식으로 임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왜냐 하면 지금 그 나라는 아직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영적인 실재로서의 하나님의 통치는 예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에게 와 있는 것이다.[51]
이런 사상은 예수님에 의해서만 가르쳐진 것이 아니고 바울도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 이는 이 세상에 있는 이들이 일부는 흑암의 권세 아래에 있고, 일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안에 있으며 그 중간 지대는 없다는 것과 구원함을 받은 이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기워진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아주 확연하게 선언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때때로 그리스도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구별하려고 하는 이들이 있었지만,[52] 비록 그리스도의 나라는 세상 끝에는 아버지께 돌려진다(고전 15:28)고 해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가 다른 것일 수 없다. 특히 이런 구별은 “주석적으로는 지지 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 래드의 말에[53] 유의해야 할 것이다.
엘리스는 이런 입장에서 이 구절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에 의해서 개개인들에게 중재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의 집합적 지위에서 온전히 새 시대의 영역 안에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새 시대적 존재 영역은 파루시아, 즉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야 온전히 실현될 것이다.”[54]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로운 피조물( ν Χριστ , καιν κτ σι )”(고후 5:17)이라고 선언하는 바울의 말에도 이런 사상이 존재한다. 우리는 흔히 이 말을 개개인에게 적용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해석하여 이를 중생과 동일시하지만,[55]
이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는 말씀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첫째로, “피조물”(κτ σι )이라는 것은 사실 일반적으로는 피조계 전체를 지칭하는 중성 명사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ν Χριστ )라는 말은 “어떤 사람”(τι )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피조계”(καιν κτ σι )를 지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56] 그러므로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피조계 전체가 원칙상(in principle) 새로운 피조계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말이다.[57]
랄프 마틴이 큠멜을 인용하면서 말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나님과의 우주적 관계에서의 새로운 장이 열렸고, 옛피조계에서 시작된 아담의 타락의 대재난적 효과가 역전된 것이다.”[58] 이처럼 “바울은 개인의 새로워짐이 아니라, 창조의 새로운 행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59]
물론 이렇게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나타난 새로운 종말론적인 상황으로서의 피조계 전체의 새로워짐을 말한 후에야 그 상황을 개인과 연관시켜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는 이미 새피조계의 한 부분이 된 것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었고 천지의 재창조에서 극치에 이른 인간 실존의 변혁의 한 부분이라는 말이다.) 그들은 단지 옛피조계의 한 부분으로서만 사는 것을 넘어선 것이다.”[60] 바레트가 말하는 것과 같이, “그가 여전히 모든 외양은 변하지 않은 세상에서 살고 있고 그 자신도 그의 이전 죄된 실존의 많은 흔적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눈에 보이는 것에 근거하지 않고 신앙에 근거해서 그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61]
이와 같이 이 구절(고후 5:17)에서 먼저 피조계 전체의 새로움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그 바로 뒤에 이어지고 있는 “옛 것”(옛질서, τ ρχα α)과 “새 것”(새 질서, καιν )의 대조에서도 아주 분명히 드러나는 점이다. 물론 “아직 아니”의 측면도 있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 가시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다. 그것은 미래에 될 일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 세상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바울은 선언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임하여 온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생각하면서 바울이 하는 말인 것이다.
6.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서 다 와 버려서 이제는 더 이상 올 것이 없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사역에서, 또 자신의 메시아로서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로 임하였음을 강조하며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또한 그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아직 오지 않은 측면도 가르쳐 주시고 있다. “최선의 것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62]
예를 들어서, 이 세상의 일로 염려하지 말 것을 권면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2). 그러므로 제자들로서는 “그의 나라를 구하는” 일만이 필요한 것이라고 하신다(눅 12:31). 이는 이 말씀을 하시는 시점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아직 오지 않았든지, 적어도 그 통치의 극치에 이르지는 않았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즉, 여기 나오는 “나라”는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63]
그 미래적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 현재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후에 주실 은혜의 선물이다. 우리는 이미 여기서도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항상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고 추구해야만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64] 이 말씀이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주어진 말씀이기에 아직 오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고 생각하는 이들을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 말기에 주어진 한 말씀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달란트 비유에 따라 나오는 심판을 양과 염소를 나누는 것처럼 하시겠다는 말씀에서(마 25:31-46) 예수님께서는 그 오른 편에 모아진 자들을 향해 하시는 심판자인 임금[王]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신다: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 이들은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때까지는 아직 그 나라를 받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적어도 그 나라의 충만한 현시가 심판 때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의 그 나라는 블롬베르그가 잘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것의 모든 미래의 충만 가운데 그려지고 있는 것”(here envisioned in all its future fullness)이다.[65]
그러므로 이 나라는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이다.[66] 래드가 잘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렇게 “종말론적 완성 때 하나님 나라는 의로운 자가 무상으로 유업 받을 수 있는 어떤 것이다.”[67] 그런 나라의 충만은 하나님께서 “창세로부터 예비하신 것, 즉 영원부터 예비하신 것이 결국 성취되는” 것이며, “실로 이것이야말로 전 세상이 창조된 큰 목적이었다”고 말하는 리델보스의 말은[68] 아주 옳고,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충만한 나라는 유업으로 받는 것이므로 그들이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더구나 그 나라가 창세로부터 예비되었다고 표현한 것은 이를 얻게 되는 것이 인간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준다.[69]
이처럼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의 극치(consummation)는 장래에 심판 때에 있게 될 것이다. 그 때에는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즉, 구약의 하나님 백성으로 자처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신다(마 8:11, 12//눅 13:28, 29). 이는 최후에 있게 될 오는 세상의 메시아적 잔치(cf. 사 25:6-9; 65:13-14), 즉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온 세상으로부터 온 많은 이들이 참여하고, 유대인들이 쫓겨나는 일이 있을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쫓겨남”이란 단어에 대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래드의 다음과 같은 말을 유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단어는 “역사와 언약에 의해서 나라의 본 자손이 된 유대인들이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일단 들어간 후에 그들이 다시 쫓겨날 것을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악한 자들을 ‘그 나라에서’ 거두어 낼 것이라는 언급은 그들이 그곳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70]
예수님께서는 또한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마 13:43)라고도 말씀하신다.[71] 이런 말씀을 생각하면서 과거의 신학자들은 이 생명과 의와 영광과 기쁨으로 가득할 나라를 “영광의 왕국”(regnum gloriae)이라고 불러왔다. 이는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충만해 지는 것이며, 그 나라의 극치에 이르는 것이다. 이런 의미의 극치의 나라는 아직 우리에게 임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 갈 것이 아니요”(마 7:21)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천국은 이제까지 우리가 관찰한 바 “극치에 이른 하나님의 나라”, 즉 “영광의 왕국”을 뜻하는 것이다. 즉, 모리스가 말하듯이, “천국이 충만하게 임할 때”를 지칭하는 말인 것이다.[72] 이는 이 말씀이 심판을 염두에 두고서 하시는 말씀임을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 진다.[7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마 7:22). 여기서 말하는 “그 날”은 분명히 예수께서 심판자로 임하시는 최후의 심판의 날을 뜻한다.[74] 그러므로 같은 맥락 가운데 있는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도 같은 시점을 배경으로 하고서 생각해야 하는 말인 것이다. 최후의 심판에 들어가는 천국은 “극치에 이른 천국”, 즉 “영광의 왕국”(regnum gloriae)인 것이다.
이는 후에 베드로후서와 요한계시록에서 이사야의 예언을 반영하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언급된 것이기도 하다. 베드로는 “주의 날” 또는 “하나님의 날”, 즉 심판의 날이 올 것을 말하면서(벧후 3:10, 12), 그러나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고 쓰고 있다(벧후 3:13). 하나님의 날에 있을 심판 이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있게 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요한계시록에서도 최후에 있을 소위 백보좌 심판(계 20:11-15) 후에 있을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을 그려 주고 있다(계 21:1-7, 9-22:5). 이는 모두 이사야 65:17-25과 66:22-23에서 예언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의 성취를 말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이후에 나타날 “영광의 왕국”, 극치에 이른 하나님의 나라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런 “새 하늘과 새 땅”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天國]가 아직 임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는 지금도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한다. 이는 그 나라의 극치가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가능한 기도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의미에서 이 기도를 날마다 기도하도록 가르치신 것이다. 이렇게 그 나라가 극치에 이르도록 기도하며 그 나라를 위해 애쓰는 이들을 주님께서는 바울과 같이 “그의 천국에(ε τ ν βασιλε αν α το τ ν πουρ νιον) 들어가도록 구원하실 것이다”(딤후 4:18). 이 때의 “천국”도 그 모든 맥락을 고려하면 극치에 이른 천국임을 알 수 있다.[75] 윌버 왈리스도 같은 입장을 취하면서 “이는 이 땅 위에서의 하나님의 미래 통치와 새 땅에서의 미래 통치의 모든 국면을 다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라고 한다.[76] 물론 그는 천년 왕국과 영광의 왕국을 지칭하는 것이다. 여기에 천년왕국이 과연 포함되는가는 또 다른 논의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왈리스는 이 “천국”이라는 말로써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측면을 지칭한 것이다. 랄프 얼도 말하기를 “아마도 여기서는 영원한 상태에서의 미래 왕국을 언급하는 것이다”고 한다.[77] 디모데후서 4장 1절이 심판과 그리스도의 나타남과 그의 나라를 연관시키며 말을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에 4:18의 “그의 천국”도 역시 극치에 이른 천국임을 무리하지 않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극치에 이른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임하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아직 미래에 우리에게로 임하여 올 실재인 것이다. 그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여 오는 일이 남아 있는 것이다.
7.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 아니’ 속의 현존하는 그리스도인과 그의 삶
그러므로, 요약하자면, 하나님 나라, 즉 천국[天國]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가운데서 이미 이 땅에로 임하여 왔으며, 그러나 올 것이 다와 버린 것이 아니고 언젠가 그 나라의 극치에 이를 때가 있는 것임을 확언할 수 있다. 이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유명해진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already, but not yet)의 구조, 또는 그 둘 사이의 긴장이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이런 하나님 나라의 임함의 구조 가운데 있는 것이 중생자의 삶이다.
그러므로 중생자는 먼저 자신이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사역 가운데서 임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의식을 가져야만 한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여 왔고 자신이 중생으로 말미암아 그 천국에 속해 있으면서도 마치 자신이 아직은 천국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그래서 죽은 뒤에나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자신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에 임하여 온 천국에 지금 여기에서도 속해 있음을 의식하고 표현해 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천국과 관련하여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첫째로 회개하는 일이다. 천국 선포와 관련해서 처음 언급된 것은 언제나 “회개”임을 주의해서 보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느니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의로운 나라이므로 의롭지 못한 이는 하나님 나라에 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로운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존재가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따라서 회개해야만 한다. 즉, 자신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음을 인정하고서 하나님께 자신의 존재 모두를 내어 맡기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 회개가 공로가 되어서 그가 의로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보스가 말하듯이, “회개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공적적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78] 왜냐하면 회개는 근본적으로 과거와 관련되어 있고 죄에 대해 반응하는 소극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회개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서 자신의 존재와 행위들이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으며 바르지 않은 것임을 인정하고[회개의 지적인 요소], 그런 자신의 존재와 행위들에 대해서 진정으로 슬퍼하고[회개의 감정적 요소], 그런 자신의 존재와 행위들을 미워하고 그로부터 돌이키는 것이다[회개의 의지적 요소]. 이렇게 회개는 전인적인 것이고 전 포괄적인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회개는 믿음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참으로 회개 한 이는 이제 하나님을 바로 알며, 그의 말씀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그를 신뢰하여 하나님에게 자신을 전부 맡기는 것이다.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뢰하여 그에게 자신의 전폭을 맡기는 그는 그 하나님에 의존해 살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게 된다. 그는 그의 삶 전부를 하나님과 관련해서 사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도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으니, 그 나라는 힘있는 나라요, 하나님의 전능하신 힘으로 이루는 나라이기에 사람은 그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을 믿고 받을 뿐이다. 그 나라와 관련하여 우리가 할 수 잇는 일은 그 나라의 왕이신 하나님을 믿고서 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다.
이런 천국 백성들인 그리스도인들은 기꺼이(willingly) 자신들의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아 나아간다.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실재가 있다. 거듭 강조하여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기 때문이다. 순간 순간의 모든 삶을 하나님과 관련하여 살되, 하나님의 왕으로서의 뜻을 잘 받들어서 그 뜻을 이 땅위에 다 실현해 나가고자 애쓰는 노력을 힘써 해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8. 신국적 세계관의 함의
바로 이런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인 중생자의 세계관은 신국적 세계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의 세계관은 하나님의 통치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그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어야 하는 장으로 본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와 관개하여 이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님 나라 백성인 그리스도인의 관점을 좀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본래 이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을 때에도 모든 측면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다 드러나는 곳이어야 했다고 그는 바라본다. 창조된 세상은 마땅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스려져야 하고 그 뜻의 성취를 향해 나갔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피조계의 대표자인 사람이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위해서 자신들이 먼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이 세상을 통치하여 하나님의 통치하심의 실재를 드러냈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창조는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고 있다는 말로 표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창조된 세계는 그 자체의 모습으로 정태적인 상태에 있어서는 안되고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바 더 높은 상태(the higher state)를 향해서 나아갔어야 했던 것이다. 그 더 높은 상태가 바로 하나님 나라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쫓아 이 세상을 다스리지 못하고 타락해 버리므로 이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가 와야 하는 상황 가운데 있게 된 것이다. 물론 타락한 세상도 하나님의 힘과 전능 아래 있으므로 타락한 세상 전체를 향해서 하나님의 다스리심[統治] 아래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를 신학 상으로는 “권능의 왕국”(regnum potentiae)이라고 불러 왔다. 이런 의미의 통치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포함된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세력이라도 이 통치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통치(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의 왕국(regnum gratiae)을 이 세상에 도입시키신 것이고, 이 은혜의 왕국이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天國]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天國]가 이 땅에로 임하였다고 했을 때는 이 “은혜의 왕국”이 임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능의 왕국[통치]의 대상인 이 세상 안에 그리스도 이후에는 은혜의 왕국[통치]이 함께 하는 것이다. 그 은혜의 왕국은 이 세상 안에서 진행하고 성장하다가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에서 급기야 “영광의 왕국”(regnum gloriae), 즉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화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인 그리스도인은 이와 같은 영광의 왕국의 도래, 즉 은혜의 왕국의 극치에 이름을 소망하며 이 땅에서 살아 나간다. 그의 삶을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으로 특별히 돌아보시며 통치하신다. 하나님 백성에게 잇는 이런 특별한 인도하심과 돌보심과 통치를 전통적으로는 “아주 특별한 섭리”(providentia specialissima)라고 불러 왔다. 이는 “은혜의 왕국”(통치) 아래 있는 이들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이 은혜의 왕국 백성들의 돌봄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그밖에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유지시키시고 발전시키시며 통치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 또는 보편적 왕권이다(regnum potentiae). 그러므로 이 권능의 왕국은 결국 은혜의 왕국, 즉 신약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天國]를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 세상 전체를 이런 신국적 진행의 과정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신국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주)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이런 개념에 대한 잘된 정리로 다음을 보라: G. E. Ladd, Presence of the Future (Grand Rapids: Eerdmans, 1974), pp. 134-38, 127, n. 11; H. Ridderbos, The Coming of the Kingdom, trans. H. de Jongste, ed. Raymond O. Zorn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1962), pp, 24-25, 27.
[2] Geerhardus Vos, Biblical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48), 졸역,『성경신학』(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 1985), p. 410.
[3] Vos, p. 411.
[4] Vos, p. 411.
[5] Vos, p. 411.
[6] Vos, p. 411.
[7] Cf. 1 Enoch 71:15; Pirke Aboth 2:7. 그리고 4 Ezra 와 Baruch서에는 아주 자주 이 개념이 등장한다. Cf. I. Howard Marshall, "Kingdom of God, of Heaven," in The Zondervan Pictorial Encyclopedia of the Bible, vol. 3 (Grand rapids: Zondervan, 1975, 1976), p. 804.
[8] Donald Guthrie, New Testament Theology (Leicester: IVP, 1981), p. 410.
[9] Guthrie, p. 409.
[10] Anthony A. Hoekema, The Bible and the Future (Grand rapids: Eerdmans, 1979), p. 44.
[11] Vos, p. 415. 이와 같은 견해를 표현하는 다른 이들로 다음을 보라: J. Jeremias, New Testament Theology 1: The Proclamation of Jesus (London: SCM, 1971), p. 97; Guthrie, p. 409; Millard J. Erickson, Christian Theology (Grand Rapids: Baker, 1985), p. 1226.
[12] Vos, p. 415.
[13] Cf. Helmut Traub, ο ραν , in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ed. Gerhard Kittel and Gerhard Friedrich, trans. Geoffrey W. Bromiley, 10 vols. (Grand Rapids: Eerdmans, 1964-1976), vol. 5, pp. 521-22.
[14] 거의 모든 주석가들에게 동의하면서 벌코프와 후크마가 이를 아주 분명히 한다. 그들의 말을 영어로 보라. Berkhof, pp. 679: "Luke 23:43. And to be with Christ is also to be in heaven. In the light of II Cor. 12:3, 4 'paradise' can only be a designation of heaven."; Hoekema, p. 103: "......Paradise means heaven, the realm of the blessed dead, and the special habitation of God.......We conclude that Jesus promised the penitent thief that the latter would be with Christ in heavenly bliss that very day."
[15] Berkhof, p. 679.
[16] Berkhof, p. 736.
[17]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좋은 설명을 위해서는 Hoekema, pp. 274-87을 보라.
[18] Ridderbos, pp. 25, 27.
[19] Ladd, The Presence of the Future, p. 331.
[20] Hoekema, The Bible and the Future, p. 45.
[21] C. H. Dodd, The Parables of the Kingdom (London: Nisbet, 1935), pp. 43ff.; "The Kingdom of God Has Come," Expository Times 48 (1936-37): 138ff.
[22] 비슷한 비판으로 다음을 보라. W. G. Kuemmel, Promise and Fulfillment, 2nd edition (London, 1961), pp. 23ff., 105ff.; Herman Ridderbos, The Coming of the Kingdom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62), p. 41; Hoekema, The Bible and the Future, pp. 293ff.; D. A. Carson, "Matthew,"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8 (Grand Rapids: Zondervan, 1984), p. 117: "rather missies the mark"; G. E. Ladd,『예수와 하나님의 나라』 (서울: 엠마오, 1985), p. 173, n. 52; David Hill, The New Century Bible Commentary: The Gospel of Matthew (London: Marshall, Morgan and Scott, 1972; Grand Rapids: Eerdmans, 1990), p. 105.
[23] J. Knox Chamblin, "Matthew," in Evangelical Commentary on the Bible, ed. Walter A. Elwell (Grand Rapids: Baker, 1989), p. 727.
[24] Leon Morris,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Grand Rapids: Eerdmans, 1992), p. 53.
[25] 모리스는 이에서 더 나아가 후에 우리가 논의할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 즉 천국이 이미 그의 사역 가운데서 이미 여기에 있으나, 충만한 그 나라의 극치는 아직 미래적 실재라는 가르침이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해석한다(Morris, p. 83). 비슷한 해석들이 많다. 예로 다음을 보라. C. E. Graham Swift, "Mark," in New Bible Commentary, ed. Donald Guthrie and J. A. Motyer (Leicester: IVP, 1970), p. 855; Craig L. Blomberg, The New American Commentary, Vol. 22: Matthew (Nashville, Tennessee: Broadman Press, 1992), p. 90. 이런 해석은 이 구절을 “예수님의 공생애 첫 부분의 메시지의 요약”(R. E. Nixon, "Matthew," in NBC, p. 821; G. R. Beasley-Murray, Jesus and the Kingdom of God (Exeter: Paternoster Press, 1986), p. 71)으로 볼 때에 가능한 해석이다.
[26] 이런 이해의 대표로 Ridderbos, The Coming of the Kingdom, p. 41을 보라.
[27] 카슨은 여기서 좀더 나가서 이 시점에서도 “예수님에게서는 그 나라가 아주 가까워서 실제로 동터왔을 정도이다”라고 까지 말한다(Carson, p. 117).
[28] 헤르만 리델보스가 비교적 이에 근접한 접근을 하고 있다. 그의『마태복음 주석』 (서울: 여수룬, 1990), pp. 130f.을 보라.
[29] 마태는 대개 “하늘 나라(天國)”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으나(32회), 네 번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도 사용한다(마 12:28; 19:24; 21: 31, 43). 이곳이 마태복음에서 최초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곳이다. 이것이 아마도 “하나님의 성령”과의 병행적으로 쓰이지 않았을까 하는 점에 대한 지적으로는 다음을 보라. D. A. Carson, "Matthew,"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8, ed. F. E. Gaebelein (Grand Rapids: Zondervan, 1984), p. 289; Blomberg, p. 203.
[30] 이 동사가 신약의 다른 곳에서 사용된 예로 다음을 들 수 있다: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ο κ φθασεν)”(롬 9:31);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 φθασεν δ π' α το ργ ε τ λο )”(살전 2:16);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ο μ φθ σωμεν)(살전 4:15).
[31] Cf. Ladd,『예수와 하나님의 나라』, pp. 169, 175. 그러나 우리가 뒤에서 살펴 볼 바와 같이 그 나라가 다 임한 것은 아님에 유의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닉슨의 다음과 같은 요약적 설명이 아주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그 나라]는 임하였다, 그러나 아직 그 충만 가운데 임한 것은 아니다. 그 [나라의] 능력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십자가와 부활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It has just arrived, but not yet in its fullness. The cross and the resurrection are essential for its power to be revealed"(Nixon, p. 832).
[32] Hill, p. 217: "The Kingdom is not just pressing in upon men: it has come." See also Ladd, The Presence of the Future, pp. 138-45; Morris, p. 317: "here it is a present reality"; Francis W. Beare,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Peabody, MA: Hendrickson Publishers, 1981), p. 279: “오는 세대에 대한 선취로 그 능력을 적극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Blomberg, p. 202: "some sense of arrival seems inescapable here"; Ridderbos, p. 371.
[33] Hill, p. 217.
[34] See, e. g., Nixon, p. 830; Beasley-Murray, Jesus and the Kingdom of God, p. 91.
[35] 이 구절에 대한 해석사에 대한 좋은 문헌으로 P. S. Cameron, Violence and the Kingdom: The Interpretation of Matthew 11:12 (Frankfurt: Peter Lang, 1984)을 들 수 있다.
[36] Cf. Willoughby C. Allen,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S. Matthew (Edinburgh: T. & T. Clark, 1907), p. 116; Hill, pp. 200f.; Nixon, p. 830("It is probable that the passive rendering should be adopted.); Beare, p. 260: "the violent people attack the Kingdom to plunder it"; G. Schrenk, "βι ζομαι, βιαστ ," in TDNT 1:609-14; Blomberg, pp. 187f.
[37] Geerhardus Vos, Biblical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48), 졸역,『성경신학』(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5), p. 421.
[38] Cf. Ridderbos, Coming, p. 54;『마태복음주석』, p. 338; I. H. Marshall, "Luke," in NBC, p. 913; Chamblin, "Matthew," in ECB, p. 735; Carson, "Matthew," p. 267. See also William Hendriksen, The Gospel of Matthew (Grand Rapids: Baker, 1973), ad loc.; Bruce D. Chilton, God in Strength: Jesus' Announcement of the Kingdom (Freistadt: F. Loechl, 1977). 그러나 Blomberg 같은 이는 NIV의 번역은 “개연성 없는 듯이 보인다”(seem implausible)고 단언하기도 한다(p. 187).
[39] Ridderbos,『마태복음 주석』, p. 338.
[40] Cf. Ridderbos, Coming, p. 54.
[41] Ladd,『예수와 하나님 나라』, p. 195. 또한 그가 각주 42에 열거하고 있는 같은 의견을 표명하는 학자들을 보라.
[42] Carson, "Matthew," p. 267. 비슷한 입장에서 주해를 하는 이로 Beasley-Murray, p. 93과 그를 따르는 Peter J. Leithart, The Kingdom and the Power (Phillipsburg, New Jerse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93), p. 35를 보라.
[43] Morris, p. 83: "the kingdom is here in his words and deeds."
[44] Merrill C. Tenney, "Luke," in The Wycliffe Bible Commentary (Chicago: Moody Press, 1962), p. 1056.
[45] Vos,『성경신학』, p. 421. 리델보스는 이런 해석을 하는 이들로 P. Feine, Theologie des N.T., (1936), p. 79와 Dodd, pp. 83, 84를 언급하고 있다(Rodderbos, Coming, p. 531, n. 67).
[46] Vos,『성경신학』, p. 421.
[47] Marshall, "Luke," in NBC, p. 914.
[48] Cf. Ridderbos, Coming, p. 531, n. 67(그러나 그의 해석은 다음 주에서 살펴 볼 바와 같이 좀 독특하다); Beasley-Murray, pp. 102-103; Leithart, p. 103. 그러나 Leithart는 다른 곳에서는 “사람들 마음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현존과 통치”로 말하기도 한다(p. xi).
[49] Tenney, "Luke," in Wycliffe Bible Commentary, p. 1056.
[50] Cf. Thomas R. Schreiner, "Luke," in ECB, p. 829.
[51] 리델보스는 이와는 아주 다른 좀 독특한 해석을 제시한다. 동사의 시제가 다 미래사라는 것을 언급하면서 그는 “하나님 나라가 나타날 때에는 하나님의 능력의 큰 일로 너희들 가운데 있게될 것이다”고 의역하는 것이다(Coming, p. 475). 그러므로 리델보스는 이것을 천국의 현재성보다는 미래성을 지칭하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52] Cf. Oscar Cullmann, Christ and Time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50), p. 152; The Early Church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56), pp. 109ff.
[53] Ladd, Jesus and the Kingdom of God, 한역, p. 274, n. 34.
[54] E. Earle Ellis, "Colossians," in WBC, p. 1338. See also Curtis Vaughan, "Colossians,"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11 (Grand Rapids: Zondervan, 1978), p. 180.
[55]이런 해석의 흔적은 주석들에서도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Wick Broomall, "II Corinthians," in WBC, p. 1272; Norman Hillyer, "2 Corinthians," in NBC, p. 1080을 보라. 심지어 Hoekema, The Bible and the Future, p. 39; Philip E. Hughes,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62), pp. 201ff.; C. K. Barrett, A Commentary on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Peabody, MA: Hendrickson, 1973), pp. 173f.; Murray J. Harris, "2 Corinthians,"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10 (Grand rapids: Zondervan, 1976), p. 353에서도 개인적으로 적용하고 있다(물론 그들은 이미 임하여 온 하나님의 나라를 인정하는 터 위에서 이 논의를 하지만 말이다).
[56] 이 점에 대한 옳은 지적과 좋은 논의로 Ralph P. Martin, 2 Corinthians, Word Biblical Commentary 40 (Waco, Texas: Word Books, 1986), p. 152를 보라.
[57] 이 점에 대한 아주 분명한 입장 표명과 좋은 논의로 Vos, Pauline Eschatology (1930; Grand Rapids: Baker, 1979), 졸역,『바울의 종말론』(서울: 엠마오, 1989), pp. 78-81을 보라. 또한 이를 시사하는 Leithart, pp. 169f.도 보라.
[58] Martin, p. 152. Cf. W. G. Kuemmel,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trans. H. C. Kee (London: SCM Press; Nashville: Abingdon, 1975), p. 205.
[59] Martin, p. 152.
[60] James A. Davis, "2 Corinthians," in ECB, p. 989.
[61] Barrett, pp. 174f.
[62] Morris, p. 83: "the best is yet to be."
[63] 다른 많은 주석가들과 함께 특히 Ridderbos, Coming, pp. 77, 238을 보라.
[64] Ladd, Jesus and the Kingdom of God, 한역, p. 350. 이런 점에 대한 래드의 좋은 강조로 p. 230도 보라. 또한 350쪽에 있는 상급에 대한 래드의 이해를 잘 읽어 보라. 한마디로 하면 “상급은 천국 자체이다.”
[65] Blomberg, p. 377. See also Ridderbos, Coming, pp. 37f., 77, 238; Ladd, Jesus and the Kingdom of God, 한역, pp. 298, 367: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영생”; Carson, "Matthew," p. 521: "here that kingdom is consummated." 그러므로 Homer A. Kent, Jr.가 해석하는 식으로 여기서의 나라를 “천년왕국”으로 해석하는 것은("Matthew," in WBC, p. 976) 옳지 않은 해석일 것이다.
[66] Leithart, pp. 17, 232(n. 10).
[67] Ladd, Jesus and the Kingdom of God, 한역, p. 244.
[68] Ridderbos,『마태복음 주석』, p. 725.
[69] 이 점에 대한 좋은 강조로 헨드릭슨의 다음 말을 보라: “이 양들의 선행이 언급되기(35, 36절에서) 전에 무엇보다도 그들의 구원의 근거, 따라서 그들의 선행의 근거가 그들이 영원 전부터 선택되었음에 있다는 사실에 강조점이 주어지고 있다”(William Hendricken, New Testament Commentary: Exposition of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Grand Rapids, 1973], p. 888). 이와 같은 점에 대한 강조는 그들이 “그들의 선행 때문에 복을 받았다”(Blomberg, p. 377)고 말하는 것보다 많은 오해를 제거시키며, 성경의 가르침에 더 충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70] Ladd, Jesus and the Kingdom of God, 한역, p. 275.
[71] 때때로 여기 나오는 “아버지의 나라”를 고전 15:24 등에 나오는 “아들의 나라”와 대조하여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로 보는 이들이 있다(Hill, p. 237; Beare, p. 313). 꼭 그렇게 구분해야만 하는가 하는 논의가 있을 수 있으나 (이에 대한 칼슨의 좋은 비판으로 그의 “Matthew,” p. 327을 보라), 그렇게 본다고 해도 이는 종국적으로 우리에게 임할 영광의 왕국을 지칭하는 말이 된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72] Morris, p. 178. See also Ridderbos, Coming, pp. 37, 77, 291.
[73] 이점에 유의하는 Carson, p. 193을 참조하여 보라.
[74] Cf. Hill, p. 152: "an allusion to the Last Judgment."
[75] Cf. Vos,『바울의 종말론』, p. 67; J. N. D. Kelly, A Commentary on the Pastoral Epistles (Harper and Row, 1960; Peabody, MA: Hendrickson, 1987), p. 220.
[76] Wilbur B. Wallis, "II Timothy," in WBC, p. 1391.
[77] Ralph Earle, "2 Timothy,"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11 (Grand Rapids: Zondervan, 1978), p. 416.
[78] Vos,『성경신학』, p. 436.
http://blog.daum.net/holylife2
===============================================================================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 대한 리델보스의 이해
이승구 박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조직신학 교수)
헤르만 리덜보스의 신학을 전반적으로 검토한다는 것은 짧은 시간과 지면 하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이번에 우리는 그의 신학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성에 대한 그의 견해를 검토하는 작업을 하려고 한다. 그의 가장 큰 공헌 중의 하나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공관복음서의 이해를 잘 정리한 것이고, 바울의 사상을 잘 정리하는 중 교회의 의미를 잘 밝혔다고 사료되기 때문이다. 먼저 그의 하나님 나라[天國] 이해 가운데서 우리들에게서 그 동안 간과된 몇 측면을 지적하고, 그의 교회 개념을 살핀 후, 천국과 교회 관계에 대한 그의 입장을 정리하고, 비판적인 검토를 하도록 할 것이다.
1. 하나님 나라[天國] 이해
공관복음서의 하나님 나라 개념을 잘 정리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그는 "공관복음서에서 우리에게 전승된 예수의 메시지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 나라, 또는 마태복음서에서 주로 표현된 대로 하늘 나라[天國]의 도래이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이제는 너무 잘 알려져서 일반화된 (그러나 이에 충실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리덜보스의 논의를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핵심은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천국은 이미 우리에게 임하여 와서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은 영적인 실재로 진행하여 가다가, 예수님의 재림 때에 그 나라의 극치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 기본적인 리덜보스의 가르침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측면들만을 몇 가지 언급하려고 한다.
첫째로, 리덜보스는 하나님 나라[天國]에 대한 이해를 추상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는 한 곳에서 이를 아주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통치에 관한 일반적 무시간적 진술의 문제가 아니라, 특히 언젠가 보게될 그것의 구속사적 실현의 문제(its redemptive-historical effectuation)이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개념은 주로 하나님의 왕적 자기 주장의 개념, 즉 당신님의 왕적 엄위와 능력과 옳음을 계시하기 위해 당신님께서 친히 이 세상에 오신다는 개념이다. 예수님의 선포의 일반적 목적에 대한 바른 통찰을 얻기 원한다면 우리는 천국의 이 절대적으로 신중심적인 개념을 항상 유념해야만 한다(Coming, 19).
이 구절은 리덜보스의 천국 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구절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구절에 의하면,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의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의 이 세상에서의 실현과 관련된 것이다. 리덜보스는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인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지 않는다. 즉, 그는 단지 하나님의 주권이 시행되는 곳이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을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늘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었으므로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말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리덜보스는 막연히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은 다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리덜보스에 의하면, 이 땅에로 하나님의 통치가 구속사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천국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왕국은 구속을 의미한다"고 말하기도 하며(Coming, 20), "심판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그 나라를 "구속과 심판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시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Coming, 55). 그래서 그는 "그 나라의 도래는 무엇보다도 신적 영광의 증시, 즉 이 땅에 그 온전한 의미의 하나님의 권세가 다시 주장되고 유지되는 것이다"(Coming, 20f.)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그는 이 땅에서 시작되는 구속과 그로 말미암은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영광의 증시에서 하나님 나라를 찾는 것이다. 왜냐 하면 그는 하나님 나라를 "당신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와 관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Coming, 23).
그러므로 그 나라는 구속사적으로 실현된다. 따라서 예수 안에서 이미 임하여온 "천국의 도래는 종말 역사의 큰 드라마의 초기 도입 단계(the initial stage of the great drama of the history of the end)"로 이해된다(Coming, 27). 그리고 리덜보스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과 관련하여 천국의 관계성을 "성취와 극치"(fulfillment and consummation)라는 용어로 정리한다(Coming, 516-23). 즉,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미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이 이 땅에 실현되었고, 성취되었다(fulfillment). 예수님의 오심과 사역은 성취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Coming, 520).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므로 천국이 온 것이다"(Coming, 95). 그러므로 "그 안에서 온 것은 사물들의 마지막(the end of things)이다"(Coming, 526).
천국의 현재성에 대한 논의와 관련한 리덜보스의 큰 공헌의 하나는 '하나님 나라'(ֿ ՂՁՓՉՋՅדՁ ՔՏ ԨՅՏ)와 '아들의 나라'(ֿ ՂՁՓՉՋՅדՁ ՔՏ ՉՏ) 또는 '그리스도의 통치'(Regnum Christi, 메시아 왕국)에 대한 지나친 구별을 피하고, 그런 구별을 시사하는 견해들을 주해적으로 잘 비판하면서 본질상 왜 아들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인지를 주해적으로 잘 밝혀 놓은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에 근거하고 승천으로부터 효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왕국(Regnum Christi)가 시작되었고, 종국의 투쟁 후에 아들이 왕국을 아버지께 바치면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다고 논의하는 오스카 쿨만의 견해를 잘 비판하면서, 리덜보스는 "그 내용에 관한 한 그리스도의 나라는 아버지의 나라와 나뉘어 질 수 없는 것은 마치 성자와 성부가 나뉘어 질 수 없는 것과 같다"고 강하게 논의하고 있다(Coming, 96).
더구나 이런 식의 생각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전에 하나님 나라의 임함에 대한 말씀을 순전히 예기적(proleptically)만 생각하게 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충실하지 못함을 잘 지적한다. 그러므로 "왕국의 임함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오심, 즉 그의 성육신에서이다"라고 주장하면서(Coming, 96), "복음서는 말로나 사상으로나 쿨만의 구별을 알지 못한다"(Coming, 97)고 확언한다. 왜냐 하면 이 논의의 마지막 부분에서 리덜보스가 잘 말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역 안에서, 또 그것을 통하여 그 때로부터 하나님 나라는 실현되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Coming, 97).
그러나 그 마지막의 극치(consummation)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니, "인자가 큰 권능으로 임할" 때에야 극치에 이를 것이다. 물론 그 극치는 성취의 극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이미 시작하신 그의 성취의 사역을 마치시는 일을 분명히 하실 것이다(Coming, 518). 그러므로 이미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이 땅에 임하여 온 천국의 극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parousia)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리덜보스는 "극치라는 주제는 미래에 대한 예상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전체 가르침에 대해서도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한다(Coming, 45).
그러나 그 나라는 이미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로 이미 이 땅에 실현되어 가고 있다는 것, 아니 미래에 대한 모든 것은 성취가 이미 왔다(the fulfillment has come)는 것에 근거해서만 가능하다는 것(Coming, 520) 또한 그의 큰 강조점이다. 예수님의 선포 가운데서는 "성취의 요소가 기대의 요소만큼이나 놀랍고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Coming, 520). "[예수] 안에서 선지자들의 미래가 현존하는 성취(the present fulfillment)가 되었다"(Coming, 55).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그리고 이에 대한 선포인 천국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이 세상 안으로 천국이 들어오는 것"(the entry of the kingdom of heaven into this world, Coming, 334)이 리덜보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따라서 그 결과로 우리가 이 세상 안에서 이미 천국 안에 있다(being in the Kingdom)는 표현이 사용될 수 있는데, 그 때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시작된 구원의 성취에 참여한다는 것"(the participation in the fulfillment of salvation that began with Christ's coming)이다(Coming, 344).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파루시아 사이의 기간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잠정적으로(provisionally) 실현된 성취의 사실에 의해서 규정되고 그 질이 결정되는 것이다"(Coming, 520).
둘째로, 따라서 리덜보스는 천국 복음의 의미와 그 선포를 강조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리덜보스에게 있어서 복음은 천국 복음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천국이 이 땅에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형태들 중의 하나는 복음의 선포"라고 한다(Coming, 334). 그러므로 리덜보스의 이해에 의하면, "천국 복음의 선포는 한편으로는 천국이 이미 도래하였음에 대한 증거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이 선포를 통해서 선포되는 것은 단지 말이 아니라 행위이며, 소리가 아니라 실재이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의해서 지지되고, 그의 사역, 특히 그의 수난과 죽음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Coming, 185). 그러므로 이 천국 복음의 선포와 수납을 통해서 이미 여기서 천국에 들어가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 복음의 선포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은 천국 도래의 서언적(preliminary)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 복음의 선포에 있어서도 도래한 천국의 '이미'와 '아직 아니'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리덜보스는 이 천국 복음이 깨어질 수 없는 단일체를 형성하고 있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고 옳게 지적한다(Coming, 186). 그 한 부분은 복음에서 주어지는 구원이라는 은혜와 관련된 것이고, 또 한 부분은 명령으로 표현되는 요구와 관련된 것이다. 천국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우리는 우리가 이미 받은 은혜를 기억하면서 늘 "깨어 있고 신실해야만" 한다(Coming, 518). 이는 우리들의 모든 삶을 규정 짖는 것이다. 신자들의 윤리적인 삶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사역의 태도가 이 말 속에 함의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 하면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야 할 큰 사역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덜보스는 "모든 민족들에게로 선교사들을 보내는 것은 극치에 이르도록 하는 신적 사역 안의 한 단계이다"라고도 말할 수 있었다(Coming, 520).
그렇다면 리덜보스는 신자들의 중간 상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왜냐 하면 한국 교회에서는 신자들의 중간 상태를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것과 같은 용어로 부르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일단 리덜보스는 바울이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ՓײՍ ԷՑՉՓՔٍ ՅסՍՁՉ)는 말은," 여러 주석가들의 다른 의견들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 바로 후부터 부활 전까지의 구체적인 내용을 지니는 것임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그는, 게르할더스 보스에게 동의하면서, 바울은 부활의 궁극적 소망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죽은 후의 잠정적인 지복의 상태도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공관복음서에서도 부활 이전에 이미 합당한 자로 여겨진 자들에게는 "복된 중간 상태"(an intermediate state of bliss)가 있음이 약속되었다고 한다. 리덜보스는 특히 눅 23:42, 43과 눅 16:19-31에 근거하여 이 복된 중간 상태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죽음 이후 부활 이전까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상태는 "바울의 서신들에서 부활이 가진 것과 같이 온전한 구속적 의의(the full redemptive significance)를 지니고 있지는 않은 것이 분명히 참되다"고 말한다.
그것은 아직 영광스러운 몸 안에 있지 않은 것이고, 따라서 우리에게는 생각 할 수 없는 양태의 인간 존재이다. 물론 신자의 중간 상태는 주와 함께 있는 상태(빌 1:23)이고, "더 이상 지상적인 몸 안에 있지 않은 상태이며, 따라서 모든 불완전과 죄, 그리고 이 몸 안에서 겪는 어려움에서 벗어난 상태"이다. 리덜보스는 이를 언젠가는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나게 될 천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취어진 존재이라고 말한다. 그러고 이는 바울이 강조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롬 8:35, 38ff.).
그러나 그 상태도 아직 미완의 상태이며, 기대의 상태이고, 잠정적 축복의 상태라고 요약하고 있는 안토니 후크마의 요약은 리덜보스의 견해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과 같이 논의하는 리덜보스는 한번도 성도의 이 중간 상태를 지칭해서 the kingdom of heaven으로 부르는 일이 없음에 유의해야 한다.
2. 교회 이해
리덜보스는 교회를 "(천국)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한 공동체에 연합하게 된 사람들을 지칭하는 이름"이라고 정의한다(Coming, 343). 리덜보스는 이런 의미의 교회 개념과 용어가 이미 예수님 자신에게서 분명히 기원하였으며, 이 용어가 공관복음서에서 나타나고 있는 마태복음 16장과 18장의 해당 부분이 분명히 예수님에게서 기원하였음에 대해서 강한 논증을 한다(Coming, 334-42, 347-48, 367). 그는 이렇게 말한다: "중요한 것은 에수님께서 그의 교회와 그의 사후에 있게될 교회의 형성에 대해서 말씀하셨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Coming, 369).
그에 의하면, 마태복음 16장은 "교회에 대해 정교하게 문자화된 계획안은 아니어도, 교회의 헌장"(the charter of the church)이다(Coming, 367). 따라서 리덜보스는 "교회 개념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자기 계시의 범주에 있어서 아주 본질적인 요소"라고 결론 내린다(Coming, 347). 그리하여 리덜보스는 교회는 그저 우연히 나타난 카리스마틱한 현상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경험적인 실재(empirical one)이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심으로 교회 조직이 시작되어졌고,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복음이 선포되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Coming, 342, 367).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교회의 조직은 직임과 기능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Coming, 367).
리덜보스는 이렇게 예수님에게서 나온 이 교회 개념의 기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질문을 하고, 다음 몇 가지 제안들에 대해서 깊이 있는 논의를 하고 있다.
(1) 교회(ecclesia) 개념을 다니엘서 7장의 인자와 함께 언급되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과 연관시키며 설명하는 카텐부쉬(F. Kattenbusch). 카텐부쉬에 대해서 리덜보스는 "교회"(ecclesia)라는 용어와 개념의 진정성을 드러내려는 그의 노력을 높이 사면서도(Coming, 339-40, 347), 카텐부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로부터 교회 개념이 기원하였을 것 같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라는 이 백성이 복음서에서 한번도 그와 같이 불려진 일이 없으므로 특히 다니엘 7:47을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선포에서의 교회 개념의 출발점으로 생각하는 일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Coming, 347f.).
(2) 기본적으로 카텐부쉬를 따르면서, 그러나 그보다 더 폭넓은 하나님의 백성 개념을 생각하면서 '교회(ecclesia)를 '남은 자'들에 대한 (이사야 10:22ff.와 같은) 구약의 자료들의 연속성에서 생각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뢰게(G. Gloege). 글뢰게의 주장에 대해서 리덜보스는 이 구체적인 해석이 실제적으로 옳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지할만한 복음서 내의 근거가 없음을 지적한다. 복음서에서 그 어디서도 말하고 있지 않은 '남은 자'에게 집중하는 글뢰게의 이 견해는 예수님께서 친히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충분히 설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Coming, 348). 그 대표적인 반응의 하나로 리덜보스는 글뢰게의 해석을 "환상적인 구성"(fantastic construction)이라고 말하는 불트만의 비판을 소개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리덜보스는 글뢰게 처럼 남은 자 사상에 근거해서 교회 개념이 나타났다고 보기에는 복음서의 증거가 약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3) 기본적으로는 이들에게 동의하면서도 예수님의 교회 개념은 단순히 다니엘서나 남은 자 개념에서 온 것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구약의 일반적이고 중요한 개념인 하나님 백성 개념이 신약 교회 개념의 토대라고 보는 외프케(A. Oepke). 리덜보스는 복음서에 구체적인 설명의 근거가 없으므로, 글뢰게와 같이 구체적인 설명을 찾으려고 하는 일은 불필요하므로, 일반적인 외프케의 설명에 동의한다고 한다(Coming, 348). 그런 구체적인 설명보다 하나님 백성 개념이 왕국에 대한 예수님의 메시아적 선포에 훨씬 더 일반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4) 카텐부쉬를 따르면서, 아람어적 논의를 하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백성에 대해 일반적인 용어였던 '콰할'(kãhãl)이나 '케할라'(kehãla)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구체화된 회당 모임(synagogue assembly)의 의미로 사용되던 '케니쉬타'(kenischta)를 사용하셨으며, 이는 예수님께서 그의 추종자들을 참된 하나님의 백성 자체를 나타내는 확신 가운데 사는 특별한 회당 모임으로 구체화하기를 원하셨음을 나타낸다고 주장하는 쉬미트(K. L. Schmidt). 이는 외프케의 견해를 좀더 특수하게 발전시키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리덜보스는 교회 개념의 진정성을 드러내려는 쉬미트의 일반적 작업에는 동의하고 높이 사지만(Coming, 341), 이런 구체적 설명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특히 Coming, 356). 그는 쉬미트와 카텐부쉬의 '케니쉬타'를 말하는 견해와 그 이외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생각하는 '콰할'이나 '케할라' 어떤 것이 사용되었던지 기본적인 개념은 신적 언약 백성의 모임(the gethering together of the people of the divine covenant)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Coming, 354). 쉬미트 등은 이 '에클레시아'가 구약적 '콰할'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려고 한다(Coming, 392, n. 66). 즉, 그는 교회(ekklesia)를 유대 공동체 전체 내에서의 예수의 제자들의 구별된 조직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16:18에 관한 한, 그런 구별된 공동체가 실제로 있었는지가 의심스러우며, 따라서 쉬미트가 호소하는 언어학적 용례가 분명히 수립되지 않으며, 에클레시아가 '케니쉬타'이고 그것이 특별한 회당이라는 구체적 설명의 사실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Coming, 356).
또한 교회는 한번도 자신들을 유대교 안에 수립된 회당 공동체로 생각한 일이 없고, 오히려 자신들을 옛 백성을 대치할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으로 이해하고, 실제로 대치했던 것이다(Coming, 357). 이런 논의에 근거해서 리덜보스는 "마태복음 16:18의 '에클레시아'는 70인경에서 거의 항상 '에클레시아'로 번역하고 있는 구약의 '콰할'의 유비를 따라 그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로 해석해야만 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결론 내린다(Coming, 357).
그러므로 리덜보스는 예수님께서 구약의 일반적인 하나님 백성 개념에 근거해서 교회 개념을 제시하셨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이런 이해가 다음 몇 가지 생각에 의해서도 지지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첫째는, 메시아적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즉, 구약의 가르침에 의하면 메시아는 항상 그 백성을 가지게끔 되어 있어서, "백성 없는 메시아 개념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이라고 한다(Coming, 348).
이것은 누구든지 받아들이는 것이며, 심지어 불트만도 "이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고 말하고 있음을 제시한다. 특히, 유대교의 종말론에서는 항상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있을 것임이 수납되고 있음을 볼 때, 그런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제시된 것은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더구나 마태복음 16장의 교회에 대한 선언에서 "내" 교회라는 대명사에 이런 의미가 있다고 한다(Coming, 348).
이것은 "메시아가 그의 은혜를 주고, 다스리시는 그 백성"을 뜻하는 "내"라는 말이라는 것이다(Coming, 348). 이 말씀에 배후에는 "그들을 위해 그가 행동하시고, 그들을 책임지시며, 그들과 그가 연합하신" 메시아의 백성이 있다는 것이라고 한다(Coming, 349). 그들을 위해 그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시인할" 것이고(마 10:32, 33),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신다(마 12:50; 25:40).
그가 이미 오신 인자시라면 그가 그의 백성을 모으신다는 것은 아주 자명하다는 것이다(Coming, 349). 그리고 메시아로서의 예수님 자신의 활동, 즉 열매를 찾으시고 사람들을 모으시는 것은 또한 부분적으로는 제자들의 사역에도 적용된다고 한다(Coming, 350). 리덜보스는 "처음부터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를 위해 사람들을 얻고 모으는 것과 관련된 어떤 특별한 권세를 주실 것에 대해 약속하셨다"고 한다(Coming, 350). 그런 것들 중의 하나가 "내가 너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니"와 같은 말씀이라는 것이다(막 1:17; 마 4:19; 눅 5:10).
또한 오병이어 사건 같은 상황에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도 제자들의 미래 활동을 지칭하는 분명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Coming, 350). 즉, "미래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은사를 나누어주게 될 것이다"는 것이다(Coming, 350).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친히 그리고 제자들을 통해서 "이미 이 땅 위에서 그의 메시아적 종말론적 교회를 모으셨다"(Coming, 351). "그의 말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본질적으로 그의 백성, 즉 메시아의 백성이다"(Coming, 351).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예수께서 메시아로 선포될 때, 그의 교회는 그 자체를 증시하는 것이다(Coming, 351).
둘째로, 믿지 않는 이스라엘을 언약 백성 됨에서 배제시키고, 하나님의 백성을 새롭게 형성한다(new formation of God's people)는 개념에도 교회 개념이 함의되어 있다고 본다(Coming, 351).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으로 세우는데서 메시아를 통한 그의 놀라운 사역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 그 지도자들을 하나님의 백성 됨에서 제거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Coming, 352). "하나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는 말씀 안에 있는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주실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리덜보스는 해석한다(Coming, 352). 이들은 "천국 선포에 의해 회개하여 자신들이 이미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임을 드러내는 사람들"이다(Coming, 353).
리덜보스는 이와 제자들을 양떼로 언급하는 구절들을 연관시킨다(눅 12:32; 막 14:27)(Coming, 353). 또한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셨을 때도 그들은 그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을 선포하는 자들이 아니라, 또한 종말론적 하나님 백성의 선취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모여진 교회가 처음부터 구현된 것이다"고도 말한다(Coming, 353). 결국 언약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기본적인 모티브도 교회 개념을 자연스럽게 유도해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리덜보스는 "내 교회"라는 표현은 메시아적 측면과 언약적 측면의 결합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Coming, 354).
이제부터 하나님의 백성은 메시아의 백성이다. 그리고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이들은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메시아가 오셨으므로 천국의 은혜를 이미 받은, 그리고 언젠가 인자의 강림 때에 온전한 상태를 받게 될 사람들의 공동체"이다(Coming, 354).
이런 메시아의 교회(ekklesia)를 예수님께서 세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고(마 16:18), 후에 실제로 세우셨다. 이 때 "세운다"는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 이는 구약에서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밭, 농경지, 그리고 하나님의 '건축물'(building)로 이해하던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다(Coming, 357). 그러므로 이는 "하나님이나 메시아에 의해서 그의 백성으로 연합된 사람들의 모이게 됨"이라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된 세운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는 과연 언제, 어떤 방식으로 교회를 세우셨는가? 이점에 관한 리덜보스의 해석은 독특하다. 그는 이에 대해 제기된 기존의 해석 두 가지를 거부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세우심은 (1) 교회를 세우시는 일의 토대로 성찬을 제정하실 것이란 뜻도 아니고, (2) 그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해서 세우실 것이라는 의미도 아니라고 한다. 그렇게 보면 반석 위에 세운다는 의미가 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후에 시작되는 베드로(의 사역) 위에 기독교회를 세울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Coming, 358).
이렇게 세워진 신약의 교회는 "아브라함 안에서 모든 백성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당신님에게로 선택하시고, 언약과 약속들의 세우셔서 당신님을 매신 역사적 하나님 백성의 연속이며 그 성취"라고 이해되고 있고[교회의 구속사적 성격], 바울은 이를 "독특하게" (typically)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묘사하여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의 실재적 존재와 성격을 표현하고 있다고[교회의 기독론적 측면,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교회의 기독론적 존재 방식] 리덜보스는 본다. 리덜보스는 바울 이전부터 "콰할"의 의미로 사용되고 바울도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로 세례 받은 이들의 공동체를 묘사하는 것으로"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이 "에클레시아"라는 말에 "이미 기독 교회 안에서 마지막 때의 메시아적 회중인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계시되었고, 광야에서 언약을 맺을 때 옛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특권과 질이 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적용을 얻게 되었다는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생각은 어떻게 해서 생성되었을까? 어떤 이들은 희랍 세계에서 국가나 사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흔히 몸의 비유를 사용하여 말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사회적, 실천적 해석]. 그러나 리덜보스는 다른 대부분의 해석자들에게 동의하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은 그 지체들 간의 관계와 교제만이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교회와 그리스도 자신의 교제의 성격을 규정 짖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해하는 이해로 리덜보스는 다음과 같이 다양한 이해를 소개하면서 논의한다.
(1) 개신교적 표상적 해석
이 해석에 의하면 교회 안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영으로 내주하시며 그의 영으로 살아 있게 하고 채우시는 교제로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이는 불가시적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지칭하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2) 전통적 천주교의 표상적 이해
전통적 천주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신-인성과 교회의 연합의 결과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수 있다고 보았다고 한다. 특히 성찬에서 주의 몸에 참여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존재의 연장(extension)을 발견하므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된 존재 양상을 집합적인 그리스도 또는 신비한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물리적인 몸에 연합하지만, 교회 그 자체는 몸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하나로 하시는 이들 전체로서 몸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리덜보스는 기존의 해석들을 자신의 성경 주해와 잘 대조시키면서 교회에 대한 이해를 이끌어 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이렇게 이해된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齰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가? 이점이 우리가 다음절에서 고찰하고자하는 이 논문의 핵심적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 문제에 대한 고찰에로 나아가기로 하자.
3.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
리덜보스는, 그의 교회 이해를 다룬 윗절에서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과거의 많은 이들이 마태복음 16:18ff.와 마태복음 18:15ff.의 진정성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그의 논의를 시작한다. 대개 그들은 천국의 일반적 성격이 교회 개념과 양립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서 자유주의 신학은 어느 정도의 조직을 갖춘 신자들의 가시적인 모임인 교회는 전혀 "개인을 구별하고 그로부터 시작하는 정향을 지닌 '내면적 종교'의 선지자인" 예수님의 관심 영역밖에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Coming, 335).
자유주의 신학 일반이 그렇게 하였고, 바이스와 슈바이쳐 중심의 종말론 학파도 예수께서 예언한 인자의 파루시아가 이루어지지 않자 나타난 것이 교회라는 해석을 하였다고 지적한다(Coming, 336). 이 둘을 모두 비판하면서 리덜보스는 "마태복음 16장에 언급된 예수님에 의한 교회의 수립은 그 말의 온전한 의미에서 지정한 것으로 인정되어야만 한다"고 결론 내린다(Coming, 342). 이렇게 이해 할 때 천국 개념도 더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 리덜보스는 과연 천국과 교회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그의 천국에 대한 정의와 교회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한번 더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리덜보스는 이 논의를 요약하는 부분에서 이 두 개념을 다음과 같이 다시 한번 더 명료하게 정의하고 있다: "왕국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고 극치에 이르는 하나님의 커다란 구원의 행위이다.
그런가 하면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받고 부름을 입어 왕국의 복에 참여하는 백성들이다." 다른 곳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약속이 주어진 이들의 공동체이다"(Coming, 361).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왕국 개념이 선행하는 것이다. 왕국은 전포괄적인 관점을 나타내고, 전 역사의 절정을 함의하고, 우주적 차원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반해서,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 덕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 큰 드라마 가운데서 하나님 편에 있게 된 백성이다(Coming, 354). 이런 이해 가운데서 리덜보스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를 논하는 것이다.
그는 신약의 용례에 충실하면서 왕국(basileia) 개념이 아주 엄밀하게 사용된 예와 파생적이고 넓은 의미로 사용된 예를 구별하여 논의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분명하게 의식되지 않으면 우리는 그에게 있지도 않은 모순을 그에게 돌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즉, 리덜보스는 먼저 신약의 용례를 살펴 볼 때 엄밀하게는 왕국(basileia)이 한번도 교회, 즉 복음 선포를 통해 한 공동체에 연합된 이들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일이 없으며, 또한 이 땅에서의 잠정적 구현체로서의 하나님 나라가 교회의 형태와 조직으로 구현된다는 의미로 사용된 일이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Coming, 343). 이런 엄밀한 의미에서 그는 "복음서는 왕국이라는 말이 '교회'라는 의미로 사용된 그 어떤 구절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고 단언한다(Coming, 347). 또한 마태복음 16장에서도 교회와 왕국의 동일시가 의도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Coming, 360).
그러나 리덜보스는 또한 왕국(basileia) 개념이 느슨하게 사용된 예도 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왕국(basileia) 개념이 사용된 예들, 즉 "경계선상의 예들"이 있다고 말하여 질 수도 있으며, 이는 복음서에서의 왕국(basileia) 개념이 언어적 사용이 아주 복잡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Coming, 343).
따라서 왕국(basileia)이라는 말의 파생적 의미에서는 이 말이 교회, 즉 "그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수납되고 하나님 나라의 의가 그 타당성을 얻게된 영역이나 공동체"(Coming, 344) 또는 "신자들의 조직화된 모임"(organized assembly of the faithful, Coming, 344)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일도 있다고 시인한다(Coming, 344). 그리고 이런 파생적인 의미로 왕국이 교회란 뜻으로 사용된 것은 공관복음서에만 나타나는 것으로, 공관복음서 밖에서는 한 번도 교회가 왕국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일이 없음도 지적하고 있다(Coming, 344).
그러나 엄밀한 의미로 사용된 천국은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를 통해서 약속되고 이미 주어진 모든 은혜와 보화 안에서, 교회의 구속적이고 구원적 의미 안에서 드러나게 된다"(Coming, 355). 교회는 "왕국의 은사들과 권세가 주어지고 받아들여진 곳"이기 때문이다(Coming, 356). 이런 뜻에서 리덜보스는 천국은 교회 안에서 드러난다(the kingdom is revealed in the ekklesia)라고도 말한다(Coming, 355). 이런 뜻에서는 "왕국과 교회가 동일하다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Coming, 355).
그러나 그 말은 오직 천국이 교회를 통해서 증시 된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교회는 천국이 아니면서, 또 한번도 천국과 동일시되지 않으면서, 하나님 나라의 계시와 진전과 미래에 둘러 싸여져 있는 것이다(Coming, 356). 결국 리덜보스는 천국과 교회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교회는 왕국의 계시의 열매이다. 그리고 역으로 왕국은 교회가 없이는 파악할 수 없다.
그 둘은 서로에게 복속해 들어가지 않으면서 서로 불가분리적인 것이다"(Coming, 355). 이런 의미에서는 "왕국으로부터의 축출은 교회로부터의 축출을 함의하고, 그 역도 성립한다(Coming, 362)." 교회는 천국의 도구(the instruments of the basileia)로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며, 온 세상에 천국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적 사역을 수행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Coming, 356).
그러므로 천국이 선행하고 그 천국의 공동체로서 교회가 있으면서 그 교회는 천국과 관련된 일정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리덜보스는 특히 마태복음 18:17과 연관해서 언급된 "매고 푸는 권세"가 지교회와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다는 점에 유의하면서 이는 지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법적 권세"(judicial authority)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Coming, 361f.).
특히 사도의 직임은 12제자에게만 있는 독특한 것이지만, 매고 푸는 권세는 그들에게만 있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리덜보스는 옳게 주장한다(Coming, 363). 오히려 이 매고 푸는 권세는 베드로나 사도들에게만이 아니라 처음부터 교회에게 맡겨진 것이라고 한다(Coming, 364, 365); "열쇠들의 권세는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교회에게 그리고 그 기관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고린도전서 5:2-5과 같은 후기의 구절에서 아주 분명히 나타나듯이 말이다"(Coming, 365).
그러나 이 큰 권세는 교회가 그리스도와의 교제 가운데서 그의 이름으로 행할 때에만 현존하는 것이니, 그렇게 행하는 그들 가운데 "내가 있으리라"고 하시기 때문이다(Coming, 366). 그러므로 이는 리덜보스가 아주 잘 지적하고 있듯이 그렇게 모여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계시해 주신 말씀과 관련하여 큰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Coming, 366). 그들의 판단에 대한 신적 재가는 그들이 그의 계시된 뜻에 따르는지 그 여부에 달린 것이다. 이와 연관해서 리덜보스는 이를 마태복음 7:22과 연관시켜 이해할 것을 요청한다(Coming, 366). 교회가 행하는 것이 얼마나 신중해야 할지를 잘 알려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4. 비판적 고찰
이제까지 천국과 교회에 관한 리덜보스의 이해를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이로부터 우리는 이 둘 각각의 개념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 둘의 관계에 대한 좋은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논의 가운데서 조금 비판적으로 고찰 해 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첫째로, 리덜보스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막 1:17; 마 4:19, cf. 눅 5:10)라고 말씀하신 것과 연관해서, 많은 무리를 먹이시는 사건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막 6:37; 마 14:16)라고 말씀하신 것이 제자들의 미래 활동과 관련된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더 많아 보인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물론 제자들이 후에 예수님의 메시아적 은사들을 전하고, 그를 대신해서 그 은사들을 나누어주리라는 것은 옳다. 그러나 이 사건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의 의도 가운데 그런 의미가 함의되어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제자들의 미래 사역을 지칭하는 것으로보다는 제자들로 하여금 단순히 무력함에만 잠겨 있지 말고,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찾아보라는 뜻으로 평이하게 해석하든지 (그래서 후에 이 사건을 깊이 있게 생각하고 그 의미를 잊지 않도록 하신 것이라고 보든지), 아니면 제자들로 하여금 문제를 더 절실히 깨닫도록 하며, 주님의 어떠하심과 사역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제자들에 대한 일종의 꾸짖음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문맥상 더 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둘째로, 마태복음 16:18의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면서 리덜보스는 반석 위에 세운다는 의미를 부각시키려면 이 세움은 결국 베드로의 사역 위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는데(Coming, 358), 이에 대해서 다른 논의의 가능성이 강하게 있을 수 있음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리덜보스는 이런 해석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한다(Coming, 358). 이런 입장에 동의하면서 여기 "반석"을 베드로의 신앙이나 그에게 계시된 진리로 다르게 해석하는 것은 개신교적 편견을 반영하는 것이고, 이것은 본문에 없는 내용을 도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인지가 의심스럽다. 리덜보스의 논의의 과정에도 상당한 추측이 있음은 "베드로 위에"를 "베드로의 (사역) 위에"로 해석적으로 제시하는 데서도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Coming, 358).
물론 그리스도께서 '반석"(ՐִՔՑՁ)이라는 말로 분명히 베드로(ִՔՑՏՒ)를 의미하신 것이라는 리덜보스의 지적과 그 이유로 제시하는 페트라(ՐִՔՑՁ)와 페트로스(ִՔՑՏՒ)는 같은 말의 반복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Coming, 359) 옳다. 이에 대해서는 그가 각주에서 인용하고 있는 떼오도르 쨘(Theodore Zahn)의 생각, 즉 이 두 단어는 모두 예수께서 같은 단어를 사용하신 아람어 '게바'(ԪՇԶ֥Ւ)에 근거한 것이라는 논의가 매우 강한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과 관련해서 이 '반석'을 예수 그리스도 자신, 또는 그의 메시아 됨이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의 존재라고 해석하는 것은 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꼭 베드로의 인격이나 사역에 근거해서 교회를 세울 것이라는 의미라고 해석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리덜보스는 베드로의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증인으로서의 기능에 근거하여 베드로가 그런 사도가 될 것이며, 베드로의 미래 사도로서의 활동에 근거하여 교회를 세우신다는 의미로 해석한다(Coming, 359). 그렇다면 다른 사도들의 활동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리덜보스는 이 상황 가운데서는 신앙 고백을 한 이가 베드로라는 특정한 상황 가운데서 그의 이름이 언급된 것이며, 베드로가 수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다(Coming, 359). 그러면서도 그는 이 문맥에서는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의 대표로(representative)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말도 한다(Coming, 363).
이와 연관해서 그는 사도들 전체를 교회의 튼튼한 기초로(rock-foundation) 제시하는 다른 본문들을 언급하기도 하고(엡 2:20; 계 21:14), 다른 사도들도 교회의 토대로서 그의 중요성을 공유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Coming, 363, 367). 이 뒷부분의 논의는 상당히 신약의 가르침 전반에 기초한 논의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신약 전체의 가르침에 좀더 부합하는 해석은 여기서 베드로를 너무 개인적으로 다루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리덜보스는 본문에 충실하려고 하다가 베드로 개인과 그의 미래 사도직에 집착하는, 따라서 뒷부분의 논의에서는 그것을 다른 제자들에게 일반화하기 때문에 잘 조화되지 않는 해석을 제시했다고 비판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을 때, 주께서 "내가 네 위에 ......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신 것을 볼 때에 이 말씀은 베드로 자신에게 대해서만 말씀하시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제자들 전체(the whole group)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보는 해석이 더 옳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 유의한다면 우리는 리덜보스도 간혹 그것을 시사하는 고백자로서의 베드로(Peter the Confessor) 위에 세우신다는 뜻이라고 보는 해석이 좀더 자연스러우나, 이 때도 역시 우리는 베드로 개인적에게 집착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런 점들을 생각할 때 개신교 내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베드로가 대표로 고백한 그 바른 신앙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보는 해석도 정당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와 연관해서 리덜보스는 마태복음 16장에 나타나는 "매고 푸는 권세"와 18:17의 어귀를 같은 어귀이므로 거의 같은 뜻으로 해석하는 문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런 해석에 근거해서 마태복음 16:19을 복음 선포로 말미암은 구별을 시사하는 견해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보다 자연스러운 해석은 마태복음 16장에서는 주로 복음 선포를 중심으로, 교회 내에서의 상황을 말하고 있는 18장에서는 권징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16장은 오히려 그가 비판하고 있는 복음 선포로 말미암은 구별의 의미로 보는 것이 더 나은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리덜보스가 매고 푼다는 말을 비록 랍비 문학에 자주 나타나는 말은 아니지만, "권위를 가지고 결정한다"(decide with authority)는 말에 대한 유대교 랍비적 전문 용어로 이해하는 것은 옳다(Coming, 360). 이런 의미에서 "맨다"(to bind)는 말은 어떤 것이 율법에 맞지 않는다고(unlawful) 선언하는 것이며, "푼다"는 말은 어떤 것이 율법에 맞는 것이라고(lawful) 선언하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또 이는 합하여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거나 그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도 옳다고 생각된다(Coming, 360). 그러나 그 구체적인 의미는 그가 구체적인 맥락에 따라 잘 생각하듯이, 마태복음 16:19에서는 주로 천국 복음의 선포로 말미암은 천국에 들어오고 축출됨에 대한 선언이, 마태복음 18:17에서는 교회의 치리로 말미암은 어떤 결과가 시사되어 있다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셋째로, 중간 상태에 대한 입장을 논하면서 전반적으로 리덜보스는 전통적인 이해에 충실하게 소개하면서도, 다른 이들의 견해를 소개하고 그에 대해서 별 논의 없이 죽어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다는 말로 결론 내릴 때, 우리는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이 다른 견해로 제시하는 죽음 이후에 성도는 하나님께 특별히 가깝게 있는 것(proximity to God)이며, 쉬는 것이고, 우리는 그런 존재가 있고, 이는 (성령을 통해서)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해 있음을 뜻한다고 해석하는 오스카 쿨만의 견해에 대해 별 논의 없이 그것도 죽음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가 끊어질 수 없음을 지지하는 견해라는 시사를 어느 정도는 주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는 쿨만의 바르지 못한 견해에 대해서 비판적인 리덜보스가 왜 이 문제에 있어서는 그와 의견을 같이 하는지 의아스럽다.
더구나 리덜보스가 빌립보서 1장과 고린도후서 5 장이 영혼이 죽음 이후에 계속적으로 존재하게 된다고 가르치는가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 때문에 이런 의혹은 좀더 증폭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는 사후의 성도들의 상태가 그 존재가 계속되며 의식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교제하고 있는 상태라고 보면서도, 그것이 영혼이 계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는 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어떤 상태인지를 우리는 물을 수 있다. 물론 이는 인간의 몸과 영혼에 대한 전통적 이해와는 다른 좀더 단일론적인 이해를 그가 가지고 있는데서 오는 일반적인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는 이런 단일론에 가까운 입장을 지닌 분들 일반과의 논쟁의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정상적인 상태는 대개 영육단일체적 상태로 존재함을 강조해야 하지만, 이를 강조하는 이도 죽음에서 잠정적으로(temporarily) 이 통일성이 깨어질 수 있고 깨어 질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이와 같은 점들이 같이 논의되어서 우리들의 생각이 성경의 가르침에 좀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리덜보스의 가르침을 잘 받으면서도 그것을 좀더 성경적으로 접근시켜 나가는 작업을 효과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의 진전이 우리의 작업을 통해서 점점 더 이루어 질 수 있기를 원한다.
===============================================================================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 대한 리델보스의 이해
헤르만 리덜보스의 신학을 전반적으로 검토한다는 것은 짧은 시간과 지면 하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이번에 우리는 그의 신학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성에 대한 그의 견해를 검토하는 작업을 하려고 한다. 그의 가장 큰 공헌 중의 하나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공관복음서의 이해를 잘 정리한 것이고, 바울의 사상을 잘 정리하는 중 교회의 의미를 잘 밝혔다고 사료되기 때문이다. 먼저 그의 하나님 나라[天國] 이해 가운데서 우리들에게서 그 동안 간과된 몇 측면을 지적하고, 그의 교회 개념을 살핀 후, 천국과 교회 관계에 대한 그의 입장을 정리하고, 비판적인 검토를 하도록 할 것이다.
1. 하나님 나라[天國] 이해
공관복음서의 하나님 나라 개념을 잘 정리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그는 "공관복음서에서 우리에게 전승된 예수의 메시지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 나라, 또는 마태복음서에서 주로 표현된 대로 하늘 나라[天國]의 도래이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이제는 너무 잘 알려져서 일반화된 (그러나 이에 충실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리덜보스의 논의를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핵심은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천국은 이미 우리에게 임하여 와서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은 영적인 실재로 진행하여 가다가, 예수님의 재림 때에 그 나라의 극치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 기본적인 리덜보스의 가르침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측면들만을 몇 가지 언급하려고 한다.
첫째로, 리덜보스는 하나님 나라[天國]에 대한 이해를 추상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는 한 곳에서 이를 아주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통치에 관한 일반적 무시간적 진술의 문제가 아니라, 특히 언젠가 보게될 그것의 구속사적 실현의 문제(its redemptive-historical effectuation)이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개념은 주로 하나님의 왕적 자기 주장의 개념, 즉 당신님의 왕적 엄위와 능력과 옳음을 계시하기 위해 당신님께서 친히 이 세상에 오신다는 개념이다. 예수님의 선포의 일반적 목적에 대한 바른 통찰을 얻기 원한다면 우리는 천국의 이 절대적으로 신중심적인 개념을 항상 유념해야만 한다(Coming, 19).
이 구절은 리덜보스의 천국 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구절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구절에 의하면,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의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의 이 세상에서의 실현과 관련된 것이다. 리덜보스는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인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지 않는다.
즉, 그는 단지 하나님의 주권이 시행되는 곳이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을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늘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었으므로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말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리덜보스는 막연히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은 다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리덜보스에 의하면, 이 땅에로 하나님의 통치가 구속사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천국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왕국은 구속을 의미한다"고 말하기도 하며(Coming, 20), "심판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그 나라를 "구속과 심판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시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Coming, 55).
그래서 그는 "그 나라의 도래는 무엇보다도 신적 영광의 증시, 즉 이 땅에 그 온전한 의미의 하나님의 권세가 다시 주장되고 유지되는 것이다"(Coming, 20f.)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그는 이 땅에서 시작되는 구속과 그로 말미암은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영광의 증시에서 하나님 나라를 찾는 것이다. 왜냐 하면 그는 하나님 나라를 "당신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와 관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Coming, 23).
그러므로 그 나라는 구속사적으로 실현된다. 따라서 예수 안에서 이미 임하여온 "천국의 도래는 종말 역사의 큰 드라마의 초기 도입 단계(the initial stage of the great drama of the history of the end)"로 이해된다(Coming, 27). 그리고 리덜보스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과 관련하여 천국의 관계성을 "성취와 극치"(fulfillment and consummation)라는 용어로 정리한다(Coming, 516-23). 즉,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미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이 이 땅에 실현되었고, 성취되었다(fulfillment). 예수님의 오심과 사역은 성취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Coming, 520).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므로 천국이 온 것이다"(Coming, 95). 그러므로 "그 안에서 온 것은 사물들의 마지막(the end of things)이다"(Coming, 526).
천국의 현재성에 대한 논의와 관련한 리덜보스의 큰 공헌의 하나는 '하나님 나라'(ֿ ՂՁՓՉՋՅדՁ ՔՏ ԨՅՏ)와 '아들의 나라'(ֿ ՂՁՓՉՋՅדՁ ՔՏ ՉՏ) 또는 '그리스도의 통치'(Regnum Christi, 메시아 왕국)에 대한 지나친 구별을 피하고, 그런 구별을 시사하는 견해들을 주해적으로 잘 비판하면서 본질상 왜 아들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인지를 주해적으로 잘 밝혀 놓은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에 근거하고 승천으로부터 효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왕국(Regnum Christi)가 시작되었고, 종국의 투쟁 후에 아들이 왕국을 아버지께 바치면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다고 논의하는 오스카 쿨만의 견해를 잘 비판하면서, 리덜보스는 "그 내용에 관한 한 그리스도의 나라는 아버지의 나라와 나뉘어 질 수 없는 것은 마치 성자와 성부가 나뉘어 질 수 없는 것과 같다"고 강하게 논의하고 있다(Coming, 96). 더구나 이런 식의 생각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전에 하나님 나라의 임함에 대한 말씀을 순전히 예기적(proleptically)만 생각하게 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충실하지 못함을 잘 지적한다.
그러므로 "왕국의 임함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오심, 즉 그의 성육신에서이다"라고 주장하면서(Coming, 96), "복음서는 말로나 사상으로나 쿨만의 구별을 알지 못한다"(Coming, 97)고 확언한다. 왜냐 하면 이 논의의 마지막 부분에서 리덜보스가 잘 말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역 안에서, 또 그것을 통하여 그 때로부터 하나님 나라는 실현되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Coming, 97).
그러나 그 마지막의 극치(consummation)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니, "인자가 큰 권능으로 임할" 때에야 극치에 이를 것이다. 물론 그 극치는 성취의 극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이미 시작하신 그의 성취의 사역을 마치시는 일을 분명히 하실 것이다(Coming, 518). 그러므로 이미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이 땅에 임하여 온 천국의 극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parousia)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리덜보스는 "극치라는 주제는 미래에 대한 예상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전체 가르침에 대해서도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한다(Coming, 45).
그러나 그 나라는 이미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로 이미 이 땅에 실현되어 가고 있다는 것, 아니 미래에 대한 모든 것은 성취가 이미 왔다(the fulfillment has come)는 것에 근거해서만 가능하다는 것(Coming, 520) 또한 그의 큰 강조점이다. 예수님의 선포 가운데서는 "성취의 요소가 기대의 요소만큼이나 놀랍고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Coming, 520). "[예수] 안에서 선지자들의 미래가 현존하는 성취(the present fulfillment)가 되었다"(Coming, 55).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그리고 이에 대한 선포인 천국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이 세상 안으로 천국이 들어오는 것"(the entry of the kingdom of heaven into this world, Coming, 334)이 리덜보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따라서 그 결과로 우리가 이 세상 안에서 이미 천국 안에 있다(being in the Kingdom)는 표현이 사용될 수 있는데, 그 때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시작된 구원의 성취에 참여한다는 것"(the participation in the fulfillment of salvation that began with Christ's coming)이다(Coming, 344).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파루시아 사이의 기간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잠정적으로(provisionally) 실현된 성취의 사실에 의해서 규정되고 그 질이 결정되는 것이다"(Coming, 520).
둘째로, 따라서 리덜보스는 천국 복음의 의미와 그 선포를 강조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리덜보스에게 있어서 복음은 천국 복음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천국이 이 땅에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형태들 중의 하나는 복음의 선포"라고 한다(Coming, 334). 그러므로 리덜보스의 이해에 의하면, "천국 복음의 선포는 한편으로는 천국이 이미 도래하였음에 대한 증거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이 선포를 통해서 선포되는 것은 단지 말이 아니라 행위이며, 소리가 아니라 실재이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의해서 지지되고, 그의 사역, 특히 그의 수난과 죽음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Coming, 185). 그러므로 이 천국 복음의 선포와 수납을 통해서 이미 여기서 천국에 들어가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 복음의 선포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은 천국 도래의 서언적(preliminary)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 복음의 선포에 있어서도 도래한 천국의 '이미'와 '아직 아니'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리덜보스는 이 천국 복음이 깨어질 수 없는 단일체를 형성하고 있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고 옳게 지적한다(Coming, 186). 그 한 부분은 복음에서 주어지는 구원이라는 은혜와 관련된 것이고, 또 한 부분은 명령으로 표현되는 요구와 관련된 것이다. 천국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우리는 우리가 이미 받은 은혜를 기억하면서 늘 "깨어 있고 신실해야만" 한다(Coming, 518).
이는 우리들의 모든 삶을 규정 짖는 것이다. 신자들의 윤리적인 삶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사역의 태도가 이 말 속에 함의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 하면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야 할 큰 사역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덜보스는 "모든 민족들에게로 선교사들을 보내는 것은 극치에 이르도록 하는 신적 사역 안의 한 단계이다"라고도 말할 수 있었다(Coming, 520).
그렇다면 리덜보스는 신자들의 중간 상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왜냐 하면 한국 교회에서는 신자들의 중간 상태를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것과 같은 용어로 부르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일단 리덜보스는 바울이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ՓײՍ ԷՑՉՓՔٍ ՅסՍՁՉ)는 말은," 여러 주석가들의 다른 의견들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 바로 후부터 부활 전까지의 구체적인 내용을 지니는 것임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그는, 게르할더스 보스에게 동의하면서, 바울은 부활의 궁극적 소망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죽은 후의 잠정적인 지복의 상태도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공관복음서에서도 부활 이전에 이미 합당한 자로 여겨진 자들에게는 "복된 중간 상태"(an intermediate state of bliss)가 있음이 약속되었다고 한다. 리덜보스는 특히 눅 23:42, 43과 눅 16:19-31에 근거하여 이 복된 중간 상태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죽음 이후 부활 이전까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상태는 "바울의 서신들에서 부활이 가진 것과 같이 온전한 구속적 의의(the full redemptive significance)를 지니고 있지는 않은 것이 분명히 참되다"고 말한다. 그것은 아직 영광스러운 몸 안에 있지 않은 것이고, 따라서 우리에게는 생각 할 수 없는 양태의 인간 존재이다. 물론 신자의 중간 상태는 주와 함께 있는 상태(빌 1:23)이고, "더 이상 지상적인 몸 안에 있지 않은 상태이며, 따라서 모든 불완전과 죄, 그리고 이 몸 안에서 겪는 어려움에서 벗어난 상태"이다.
리덜보스는 이를 언젠가는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나게 될 천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취어진 존재이라고 말한다. 그러고 이는 바울이 강조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롬 8:35, 38ff.). 그러나 그 상태도 아직 미완의 상태이며, 기대의 상태이고, 잠정적 축복의 상태라고 요약하고 있는 안토니 후크마의 요약은 리덜보스의 견해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과 같이 논의하는 리덜보스는 한번도 성도의 이 중간 상태를 지칭해서 the kingdom of heaven으로 부르는 일이 없음에 유의해야 한다.
2. 교회 이해
리덜보스는 교회를 "(천국)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한 공동체에 연합하게 된 사람들을 지칭하는 이름"이라고 정의한다(Coming, 343). 리덜보스는 이런 의미의 교회 개념과 용어가 이미 예수님 자신에게서 분명히 기원하였으며, 이 용어가 공관복음서에서 나타나고 있는 마태복음 16장과 18장의 해당 부분이 분명히 예수님에게서 기원하였음에 대해서 강한 논증을 한다(Coming, 334-42, 347-48, 367). 그는 이렇게 말한다: "중요한 것은 에수님께서 그의 교회와 그의 사후에 있게될 교회의 형성에 대해서 말씀하셨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Coming, 369).
그에 의하면, 마태복음 16장은 "교회에 대해 정교하게 문자화된 계획안은 아니어도, 교회의 헌장"(the charter of the church)이다(Coming, 367). 따라서 리덜보스는 "교회 개념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자기 계시의 범주에 있어서 아주 본질적인 요소"라고 결론 내린다(Coming, 347). 그리하여 리덜보스는 교회는 그저 우연히 나타난 카리스마틱한 현상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경험적인 실재(empirical one)이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심으로 교회 조직이 시작되어졌고,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복음이 선포되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Coming, 342, 367).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교회의 조직은 직임과 기능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Coming, 367).
리덜보스는 이렇게 예수님에게서 나온 이 교회 개념의 기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질문을 하고, 다음 몇 가지 제안들에 대해서 깊이 있는 논의를 하고 있다.
(1) 교회(ecclesia) 개념을 다니엘서 7장의 인자와 함께 언급되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과 연관시키며 설명하는 카텐부쉬(F. Kattenbusch). 카텐부쉬에 대해서 리덜보스는 "교회"(ecclesia)라는 용어와 개념의 진정성을 드러내려는 그의 노력을 높이 사면서도(Coming, 339-40, 347), 카텐부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로부터 교회 개념이 기원하였을 것 같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라는 이 백성이 복음서에서 한번도 그와 같이 불려진 일이 없으므로 특히 다니엘 7:47을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선포에서의 교회 개념의 출발점으로 생각하는 일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Coming, 347f.).
(2) 기본적으로 카텐부쉬를 따르면서, 그러나 그보다 더 폭넓은 하나님의 백성 개념을 생각하면서 '교회(ecclesia)를 '남은 자'들에 대한 (이사야 10:22ff.와 같은) 구약의 자료들의 연속성에서 생각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뢰게(G. Gloege). 글뢰게의 주장에 대해서 리덜보스는 이 구체적인 해석이 실제적으로 옳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지할만한 복음서 내의 근거가 없음을 지적한다. 복음서에서 그 어디서도 말하고 있지 않은 '남은 자'에게 집중하는 글뢰게의 이 견해는 예수님께서 친히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충분히 설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Coming, 348). 그 대표적인 반응의 하나로 리덜보스는 글뢰게의 해석을 "환상적인 구성"(fantastic construction)이라고 말하는 불트만의 비판을 소개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리덜보스는 글뢰게 처럼 남은 자 사상에 근거해서 교회 개념이 나타났다고 보기에는 복음서의 증거가 약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3) 기본적으로는 이들에게 동의하면서도 예수님의 교회 개념은 단순히 다니엘서나 남은 자 개념에서 온 것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구약의 일반적이고 중요한 개념인 하나님 백성 개념이 신약 교회 개념의 토대라고 보는 외프케(A. Oepke). 리덜보스는 복음서에 구체적인 설명의 근거가 없으므로, 글뢰게와 같이 구체적인 설명을 찾으려고 하는 일은 불필요하므로, 일반적인 외프케의 설명에 동의한다고 한다(Coming, 348). 그런 구체적인 설명보다 하나님 백성 개념이 왕국에 대한 예수님의 메시아적 선포에 훨씬 더 일반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4) 카텐부쉬를 따르면서, 아람어적 논의를 하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백성에 대해 일반적인 용어였던 '콰할'(kãhãl)이나 '케할라'(kehãla)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구체화된 회당 모임(synagogue assembly)의 의미로 사용되던 '케니쉬타'(kenischta)를 사용하셨으며, 이는 예수님께서 그의 추종자들을 참된 하나님의 백성 자체를 나타내는 확신 가운데 사는 특별한 회당 모임으로 구체화하기를 원하셨음을 나타낸다고 주장하는 쉬미트(K. L. Schmidt). 이는 외프케의 견해를 좀더 특수하게 발전시키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리덜보스는 교회 개념의 진정성을 드러내려는 쉬미트의 일반적 작업에는 동의하고 높이 사지만(Coming, 341), 이런 구체적 설명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특히 Coming, 356). 그는 쉬미트와 카텐부쉬의 '케니쉬타'를 말하는 견해와 그 이외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생각하는 '콰할'이나 '케할라' 어떤 것이 사용되었던지 기본적인 개념은 신적 언약 백성의 모임(the gethering together of the people of the divine covenant)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Coming, 354). 쉬미트 등은 이 '에클레시아'가 구약적 '콰할'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려고 한다(Coming, 392, n. 66).
즉, 그는 교회(ekklesia)를 유대 공동체 전체 내에서의 예수의 제자들의 구별된 조직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16:18에 관한 한, 그런 구별된 공동체가 실제로 있었는지가 의심스러우며, 따라서 쉬미트가 호소하는 언어학적 용례가 분명히 수립되지 않으며, 에클레시아가 '케니쉬타'이고 그것이 특별한 회당이라는 구체적 설명의 사실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Coming, 356).
또한 교회는 한번도 자신들을 유대교 안에 수립된 회당 공동체로 생각한 일이 없고, 오히려 자신들을 옛 백성을 대치할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으로 이해하고, 실제로 대치했던 것이다(Coming, 357). 이런 논의에 근거해서 리덜보스는 "마태복음 16:18의 '에클레시아'는 70인경에서 거의 항상 '에클레시아'로 번역하고 있는 구약의 '콰할'의 유비를 따라 그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로 해석해야만 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결론 내린다(Coming, 357).
그러므로 리덜보스는 예수님께서 구약의 일반적인 하나님 백성 개념에 근거해서 교회 개념을 제시하셨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이런 이해가 다음 몇 가지 생각에 의해서도 지지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첫째는, 메시아적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즉, 구약의 가르침에 의하면 메시아는 항상 그 백성을 가지게끔 되어 있어서, "백성 없는 메시아 개념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이라고 한다(Coming, 348).
이것은 누구든지 받아들이는 것이며, 심지어 불트만도 "이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고 말하고 있음을 제시한다. 특히, 유대교의 종말론에서는 항상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있을 것임이 수납되고 있음을 볼 때, 그런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제시된 것은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더구나 마태복음 16장의 교회에 대한 선언에서 "내" 교회라는 대명사에 이런 의미가 있다고 한다(Coming, 348).
이것은 "메시아가 그의 은혜를 주고, 다스리시는 그 백성"을 뜻하는 "내"라는 말이라는 것이다(Coming, 348). 이 말씀에 배후에는 "그들을 위해 그가 행동하시고, 그들을 책임지시며, 그들과 그가 연합하신" 메시아의 백성이 있다는 것이라고 한다(Coming, 349). 그들을 위해 그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시인할" 것이고(마 10:32, 33),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신다(마 12:50; 25:40). 그가 이미 오신 인자시라면 그가 그의 백성을 모으신다는 것은 아주 자명하다는 것이다(Coming, 349). 그리고 메시아로서의 예수님 자신의 활동, 즉 열매를 찾으시고 사람들을 모으시는 것은 또한 부분적으로는 제자들의 사역에도 적용된다고 한다(Coming, 350).
리덜보스는 "처음부터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를 위해 사람들을 얻고 모으는 것과 관련된 어떤 특별한 권세를 주실 것에 대해 약속하셨다"고 한다(Coming, 350). 그런 것들 중의 하나가 "내가 너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니"와 같은 말씀이라는 것이다(막 1:17; 마 4:19; 눅 5:10).
또한 오병이어 사건 같은 상황에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도 제자들의 미래 활동을 지칭하는 분명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Coming, 350). 즉, "미래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은사를 나누어주게 될 것이다"는 것이다(Coming, 350).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친히 그리고 제자들을 통해서 "이미 이 땅 위에서 그의 메시아적 종말론적 교회를 모으셨다"(Coming, 351). "그의 말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본질적으로 그의 백성, 즉 메시아의 백성이다"(Coming, 351).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예수께서 메시아로 선포될 때, 그의 교회는 그 자체를 증시하는 것이다(Coming, 351).
둘째로, 믿지 않는 이스라엘을 언약 백성 됨에서 배제시키고, 하나님의 백성을 새롭게 형성한다(new formation of God's people)는 개념에도 교회 개념이 함의되어 있다고 본다(Coming, 351).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으로 세우는데서 메시아를 통한 그의 놀라운 사역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 그 지도자들을 하나님의 백성 됨에서 제거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Coming, 352). "하나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는 말씀 안에 있는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주실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리덜보스는 해석한다(Coming, 352).
이들은 "천국 선포에 의해 회개하여 자신들이 이미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임을 드러내는 사람들"이다(Coming, 353). 리덜보스는 이와 제자들을 양떼로 언급하는 구절들을 연관시킨다(눅 12:32; 막 14:27)(Coming, 353). 또한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셨을 때도 그들은 그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을 선포하는 자들이 아니라, 또한 종말론적 하나님 백성의 선취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모여진 교회가 처음부터 구현된 것이다"고도 말한다(Coming, 353). 결국 언약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기본적인 모티브도 교회 개념을 자연스럽게 유도해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리덜보스는 "내 교회"라는 표현은 메시아적 측면과 언약적 측면의 결합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Coming, 354).
이제부터 하나님의 백성은 메시아의 백성이다. 그리고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이들은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메시아가 오셨으므로 천국의 은혜를 이미 받은, 그리고 언젠가 인자의 강림 때에 온전한 상태를 받게 될 사람들의 공동체"이다(Coming, 354).
이런 메시아의 교회(ekklesia)를 예수님께서 세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고(마 16:18), 후에 실제로 세우셨다. 이 때 "세운다"는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 이는 구약에서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밭, 농경지, 그리고 하나님의 '건축물'(building)로 이해하던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다(Coming, 357). 그러므로 이는 "하나님이나 메시아에 의해서 그의 백성으로 연합된 사람들의 모이게 됨"이라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된 세운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는 과연 언제, 어떤 방식으로 교회를 세우셨는가? 이점에 관한 리덜보스의 해석은 독특하다. 그는 이에 대해 제기된 기존의 해석 두 가지를 거부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세우심은 (1) 교회를 세우시는 일의 토대로 성찬을 제정하실 것이란 뜻도 아니고, (2) 그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해서 세우실 것이라는 의미도 아니라고 한다. 그렇게 보면 반석 위에 세운다는 의미가 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후에 시작되는 베드로(의 사역) 위에 기독교회를 세울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Coming, 358).
이렇게 세워진 신약의 교회는 "아브라함 안에서 모든 백성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당신님에게로 선택하시고, 언약과 약속들의 세우셔서 당신님을 매신 역사적 하나님 백성의 연속이며 그 성취"라고 이해되고 있고[교회의 구속사적 성격], 바울은 이를 "독특하게" (typically)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묘사하여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의 실재적 존재와 성격을 표현하고 있다고[교회의 기독론적 측면,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교회의 기독론적 존재 방식] 리덜보스는 본다. 리덜보스는 바울 이전부터 "콰할"의 의미로 사용되고 바울도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로 세례 받은 이들의 공동체를 묘사하는 것으로"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이 "에클레시아"라는 말에 "이미 기독 교회 안에서 마지막 때의 메시아적 회중인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계시되었고, 광야에서 언약을 맺을 때 옛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특권과 질이 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적용을 얻게 되었다는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생각은 어떻게 해서 생성되었을까? 어떤 이들은 희랍 세계에서 국가나 사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흔히 몸의 비유를 사용하여 말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사회적, 실천적 해석]. 그러나 리덜보스는 다른 대부분의 해석자들에게 동의하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은 그 지체들 간의 관계와 교제만이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교회와 그리스도 자신의 교제의 성격을 규정 짖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해하는 이해로 리덜보스는 다음과 같이 다양한 이해를 소개하면서 논의한다.
(1) 개신교적 표상적 해석
이 해석에 의하면 교회 안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영으로 내주하시며 그의 영으로 살아 있게 하고 채우시는 교제로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이는 불가시적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지칭하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2) 전통적 천주교의 표상적 이해
전통적 천주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신-인성과 교회의 연합의 결과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수 있다고 보았다고 한다. 특히 성찬에서 주의 몸에 참여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존재의 연장(extension)을 발견하므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된 존재 양상을 집합적인 그리스도 또는 신비한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물리적인 몸에 연합하지만, 교회 그 자체는 몸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하나로 하시는 이들 전체로서 몸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리덜보스는 기존의 해석들을 자신의 성경 주해와 잘 대조시키면서 교회에 대한 이해를 이끌어 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이렇게 이해된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齰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가? 이점이 우리가 다음절에서 고찰하고자하는 이 논문의 핵심적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 문제에 대한 고찰에로 나아가기로 하자.
3.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
리덜보스는, 그의 교회 이해를 다룬 윗절에서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과거의 많은 이들이 마태복음 16:18ff.와 마태복음 18:15ff.의 진정성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그의 논의를 시작한다. 대개 그들은 천국의 일반적 성격이 교회 개념과 양립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서 자유주의 신학은 어느 정도의 조직을 갖춘 신자들의 가시적인 모임인 교회는 전혀 "개인을 구별하고 그로부터 시작하는 정향을 지닌 '내면적 종교'의 선지자인" 예수님의 관심 영역밖에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Coming, 335).
자유주의 신학 일반이 그렇게 하였고, 바이스와 슈바이쳐 중심의 종말론 학파도 예수께서 예언한 인자의 파루시아가 이루어지지 않자 나타난 것이 교회라는 해석을 하였다고 지적한다(Coming, 336). 이 둘을 모두 비판하면서 리덜보스는 "마태복음 16장에 언급된 예수님에 의한 교회의 수립은 그 말의 온전한 의미에서 지정한 것으로 인정되어야만 한다"고 결론 내린다(Coming, 342). 이렇게 이해 할 때 천국 개념도 더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 리덜보스는 과연 천국과 교회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그의 천국에 대한 정의와 교회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한번 더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리덜보스는 이 논의를 요약하는 부분에서 이 두 개념을 다음과 같이 다시 한번 더 명료하게 정의하고 있다: "왕국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고 극치에 이르는 하나님의 커다란 구원의 행위이다.
그런가 하면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받고 부름을 입어 왕국의 복에 참여하는 백성들이다." 다른 곳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약속이 주어진 이들의 공동체이다"(Coming, 361).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왕국 개념이 선행하는 것이다. 왕국은 전포괄적인 관점을 나타내고, 전 역사의 절정을 함의하고, 우주적 차원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반해서,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 덕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 큰 드라마 가운데서 하나님 편에 있게 된 백성이다(Coming, 354). 이런 이해 가운데서 리덜보스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를 논하는 것이다.
그는 신약의 용례에 충실하면서 왕국(basileia) 개념이 아주 엄밀하게 사용된 예와 파생적이고 넓은 의미로 사용된 예를 구별하여 논의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분명하게 의식되지 않으면 우리는 그에게 있지도 않은 모순을 그에게 돌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즉, 리덜보스는 먼저 신약의 용례를 살펴 볼 때 엄밀하게는 왕국(basileia)이 한번도 교회, 즉 복음 선포를 통해 한 공동체에 연합된 이들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일이 없으며, 또한 이 땅에서의 잠정적 구현체로서의 하나님 나라가 교회의 형태와 조직으로 구현된다는 의미로 사용된 일이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Coming, 343). 이런 엄밀한 의미에서 그는 "복음서는 왕국이라는 말이 '교회'라는 의미로 사용된 그 어떤 구절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고 단언한다(Coming, 347). 또한 마태복음 16장에서도 교회와 왕국의 동일시가 의도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Coming, 360).
그러나 리덜보스는 또한 왕국(basileia) 개념이 느슨하게 사용된 예도 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왕국(basileia) 개념이 사용된 예들, 즉 "경계선상의 예들"이 있다고 말하여 질 수도 있으며, 이는 복음서에서의 왕국(basileia) 개념이 언어적 사용이 아주 복잡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Coming, 343).
따라서 왕국(basileia)이라는 말의 파생적 의미에서는 이 말이 교회, 즉 "그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수납되고 하나님 나라의 의가 그 타당성을 얻게된 영역이나 공동체"(Coming, 344) 또는 "신자들의 조직화된 모임"(organized assembly of the faithful, Coming, 344)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일도 있다고 시인한다(Coming, 344). 그리고 이런 파생적인 의미로 왕국이 교회란 뜻으로 사용된 것은 공관복음서에만 나타나는 것으로, 공관복음서 밖에서는 한 번도 교회가 왕국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일이 없음도 지적하고 있다(Coming, 344).
그러나 엄밀한 의미로 사용된 천국은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를 통해서 약속되고 이미 주어진 모든 은혜와 보화 안에서, 교회의 구속적이고 구원적 의미 안에서 드러나게 된다"(Coming, 355). 교회는 "왕국의 은사들과 권세가 주어지고 받아들여진 곳"이기 때문이다(Coming, 356). 이런 뜻에서 리덜보스는 천국은 교회 안에서 드러난다(the kingdom is revealed in the ekklesia)라고도 말한다(Coming, 355). 이런 뜻에서는 "왕국과 교회가 동일하다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Coming, 355).
그러나 그 말은 오직 천국이 교회를 통해서 증시 된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교회는 천국이 아니면서, 또 한번도 천국과 동일시되지 않으면서, 하나님 나라의 계시와 진전과 미래에 둘러 싸여져 있는 것이다(Coming, 356). 결국 리덜보스는 천국과 교회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교회는 왕국의 계시의 열매이다. 그리고 역으로 왕국은 교회가 없이는 파악할 수 없다. 그 둘은 서로에게 복속해 들어가지 않으면서 서로 불가분리적인 것이다"(Coming, 355). 이런 의미에서는 "왕국으로부터의 축출은 교회로부터의 축출을 함의하고, 그 역도 성립한다(Coming, 362)." 교회는 천국의 도구(the instruments of the basileia)로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며, 온 세상에 천국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적 사역을 수행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Coming, 356).
그러므로 천국이 선행하고 그 천국의 공동체로서 교회가 있으면서 그 교회는 천국과 관련된 일정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리덜보스는 특히 마태복음 18:17과 연관해서 언급된 "매고 푸는 권세"가 지교회와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다는 점에 유의하면서 이는 지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법적 권세"(judicial authority)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Coming, 361f.).
특히 사도의 직임은 12제자에게만 있는 독특한 것이지만, 매고 푸는 권세는 그들에게만 있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리덜보스는 옳게 주장한다(Coming, 363). 오히려 이 매고 푸는 권세는 베드로나 사도들에게만이 아니라 처음부터 교회에게 맡겨진 것이라고 한다(Coming, 364, 365); "열쇠들의 권세는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교회에게 그리고 그 기관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고린도전서 5:2-5과 같은 후기의 구절에서 아주 분명히 나타나듯이 말이다"(Coming, 365).
그러나 이 큰 권세는 교회가 그리스도와의 교제 가운데서 그의 이름으로 행할 때에만 현존하는 것이니, 그렇게 행하는 그들 가운데 "내가 있으리라"고 하시기 때문이다(Coming, 366). 그러므로 이는 리덜보스가 아주 잘 지적하고 있듯이 그렇게 모여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계시해 주신 말씀과 관련하여 큰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Coming, 366). 그들의 판단에 대한 신적 재가는 그들이 그의 계시된 뜻에 따르는지 그 여부에 달린 것이다. 이와 연관해서 리덜보스는 이를 마태복음 7:22과 연관시켜 이해할 것을 요청한다(Coming, 366). 교회가 행하는 것이 얼마나 신중해야 할지를 잘 알려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4. 비판적 고찰
이제까지 천국과 교회에 관한 리덜보스의 이해를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이로부터 우리는 이 둘 각각의 개념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 둘의 관계에 대한 좋은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논의 가운데서 조금 비판적으로 고찰 해 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첫째로, 리덜보스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막 1:17; 마 4:19, cf. 눅 5:10)라고 말씀하신 것과 연관해서, 많은 무리를 먹이시는 사건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막 6:37; 마 14:16)라고 말씀하신 것이 제자들의 미래 활동과 관련된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더 많아 보인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물론 제자들이 후에 예수님의 메시아적 은사들을 전하고, 그를 대신해서 그 은사들을 나누어주리라는 것은 옳다. 그러나 이 사건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의 의도 가운데 그런 의미가 함의되어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제자들의 미래 사역을 지칭하는 것으로보다는 제자들로 하여금 단순히 무력함에만 잠겨 있지 말고,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찾아보라는 뜻으로 평이하게 해석하든지 (그래서 후에 이 사건을 깊이 있게 생각하고 그 의미를 잊지 않도록 하신 것이라고 보든지), 아니면 제자들로 하여금 문제를 더 절실히 깨닫도록 하며, 주님의 어떠하심과 사역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제자들에 대한 일종의 꾸짖음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문맥상 더 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둘째로, 마태복음 16:18의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면서 리덜보스는 반석 위에 세운다는 의미를 부각시키려면 이 세움은 결국 베드로의 사역 위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는데(Coming, 358), 이에 대해서 다른 논의의 가능성이 강하게 있을 수 있음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리덜보스는 이런 해석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한다(Coming, 358). 이런 입장에 동의하면서 여기 "반석"을 베드로의 신앙이나 그에게 계시된 진리로 다르게 해석하는 것은 개신교적 편견을 반영하는 것이고, 이것은 본문에 없는 내용을 도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인지가 의심스럽다. 리덜보스의 논의의 과정에도 상당한 추측이 있음은 "베드로 위에"를 "베드로의 (사역) 위에"로 해석적으로 제시하는 데서도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Coming, 358).
물론 그리스도께서 '반석"(ՐִՔՑՁ)이라는 말로 분명히 베드로(ִՔՑՏՒ)를 의미하신 것이라는 리덜보스의 지적과 그 이유로 제시하는 페트라(ՐִՔՑՁ)와 페트로스(ִՔՑՏՒ)는 같은 말의 반복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Coming, 359) 옳다. 이에 대해서는 그가 각주에서 인용하고 있는 떼오도르 쨘(Theodore Zahn)의 생각, 즉 이 두 단어는 모두 예수께서 같은 단어를 사용하신 아람어 '게바'(ԪՇԶ֥Ւ)에 근거한 것이라는 논의가 매우 강한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과 관련해서 이 '반석'을 예수 그리스도 자신, 또는 그의 메시아 됨이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의 존재라고 해석하는 것은 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꼭 베드로의 인격이나 사역에 근거해서 교회를 세울 것이라는 의미라고 해석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리덜보스는 베드로의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증인으로서의 기능에 근거하여 베드로가 그런 사도가 될 것이며, 베드로의 미래 사도로서의 활동에 근거하여 교회를 세우신다는 의미로 해석한다(Coming, 359).
그렇다면 다른 사도들의 활동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리덜보스는 이 상황 가운데서는 신앙 고백을 한 이가 베드로라는 특정한 상황 가운데서 그의 이름이 언급된 것이며, 베드로가 수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다(Coming, 359). 그러면서도 그는 이 문맥에서는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의 대표로(representative)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말도 한다(Coming, 363).
이와 연관해서 그는 사도들 전체를 교회의 튼튼한 기초로(rock-foundation) 제시하는 다른 본문들을 언급하기도 하고(엡 2:20; 계 21:14), 다른 사도들도 교회의 토대로서 그의 중요성을 공유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Coming, 363, 367). 이 뒷부분의 논의는 상당히 신약의 가르침 전반에 기초한 논의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신약 전체의 가르침에 좀더 부합하는 해석은 여기서 베드로를 너무 개인적으로 다루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리덜보스는 본문에 충실하려고 하다가 베드로 개인과 그의 미래 사도직에 집착하는, 따라서 뒷부분의 논의에서는 그것을 다른 제자들에게 일반화하기 때문에 잘 조화되지 않는 해석을 제시했다고 비판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을 때, 주께서 "내가 네 위에 ......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신 것을 볼 때에 이 말씀은 베드로 자신에게 대해서만 말씀하시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제자들 전체(the whole group)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보는 해석이 더 옳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 유의한다면 우리는 리덜보스도 간혹 그것을 시사하는 고백자로서의 베드로(Peter the Confessor) 위에 세우신다는 뜻이라고 보는 해석이 좀더 자연스러우나, 이 때도 역시 우리는 베드로 개인적에게 집착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런 점들을 생각할 때 개신교 내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베드로가 대표로 고백한 그 바른 신앙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보는 해석도 정당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와 연관해서 리덜보스는 마태복음 16장에 나타나는 "매고 푸는 권세"와 18:17의 어귀를 같은 어귀이므로 거의 같은 뜻으로 해석하는 문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런 해석에 근거해서 마태복음 16:19을 복음 선포로 말미암은 구별을 시사하는 견해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보다 자연스러운 해석은 마태복음 16장에서는 주로 복음 선포를 중심으로, 교회 내에서의 상황을 말하고 있는 18장에서는 권징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16장은 오히려 그가 비판하고 있는 복음 선포로 말미암은 구별의 의미로 보는 것이 더 나은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리덜보스가 매고 푼다는 말을 비록 랍비 문학에 자주 나타나는 말은 아니지만, "권위를 가지고 결정한다"(decide with authority)는 말에 대한 유대교 랍비적 전문 용어로 이해하는 것은 옳다(Coming, 360). 이런 의미에서 "맨다"(to bind)는 말은 어떤 것이 율법에 맞지 않는다고(unlawful) 선언하는 것이며, "푼다"는 말은 어떤 것이 율법에 맞는 것이라고(lawful) 선언하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또 이는 합하여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거나 그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도 옳다고 생각된다(Coming, 360). 그러나 그 구체적인 의미는 그가 구체적인 맥락에 따라 잘 생각하듯이, 마태복음 16:19에서는 주로 천국 복음의 선포로 말미암은 천국에 들어오고 축출됨에 대한 선언이, 마태복음 18:17에서는 교회의 치리로 말미암은 어떤 결과가 시사되어 있다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셋째로, 중간 상태에 대한 입장을 논하면서 전반적으로 리덜보스는 전통적인 이해에 충실하게 소개하면서도, 다른 이들의 견해를 소개하고 그에 대해서 별 논의 없이 죽어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다는 말로 결론 내릴 때, 우리는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이 다른 견해로 제시하는 죽음 이후에 성도는 하나님께 특별히 가깝게 있는 것(proximity to God)이며, 쉬는 것이고, 우리는 그런 존재가 있고, 이는 (성령을 통해서)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해 있음을 뜻한다고 해석하는 오스카 쿨만의 견해에 대해 별 논의 없이 그것도 죽음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가 끊어질 수 없음을 지지하는 견해라는 시사를 어느 정도는 주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는 쿨만의 바르지 못한 견해에 대해서 비판적인 리덜보스가 왜 이 문제에 있어서는 그와 의견을 같이 하는지 의아스럽다. 더구나 리덜보스가 빌립보서 1장과 고린도후서 5 장이 영혼이 죽음 이후에 계속적으로 존재하게 된다고 가르치는가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 때문에 이런 의혹은 좀더 증폭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는 사후의 성도들의 상태가 그 존재가 계속되며 의식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교제하고 있는 상태라고 보면서도, 그것이 영혼이 계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는 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어떤 상태인지를 우리는 물을 수 있다. 물론 이는 인간의 몸과 영혼에 대한 전통적 이해와는 다른 좀더 단일론적인 이해를 그가 가지고 있는데서 오는 일반적인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는 이런 단일론에 가까운 입장을 지닌 분들 일반과의 논쟁의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정상적인 상태는 대개 영육단일체적 상태로 존재함을 강조해야 하지만, 이를 강조하는 이도 죽음에서 잠정적으로(temporarily) 이 통일성이 깨어질 수 있고 깨어 질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이와 같은 점들이 같이 논의되어서 우리들의 생각이 성경의 가르침에 좀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리덜보스의 가르침을 잘 받으면서도 그것을 좀더 성경적으로 접근시켜 나가는 작업을 효과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의 진전이 우리의 작업을 통해서 점점 더 이루어 질 수 있기를 원한다.
*글쓴 이:이승구 목사
===============================================================================
http://godislove.net/wwwb/ChurchMaker.cgi?db=s20001201817&mode=read&num=57&page=2&ftype=&fval=&ftitle=&backdepth=1&tp=&bp=&rp0=center&rp1=&rp2=&rp3=&rp4=&rp5=&rp6=&rp7=&rp8=&rp9=
헤르만 리델보스의 하나님의 나라 '제 2장'요약
제 2 장 하나님 나라의 일반적 성격(세례 요한과 예수)
4. 하나님 중심의 하나님 나라
우리는 천국이란 개념이 예수의 설교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함을 알고 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천국이란 단어는 동일한 의미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왕 되심이란 견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의 설교의 모든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적이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내용 속에 들어있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 당신의 영광, 하나님의 의에 집중되어있는 것이다. 이러한 천국의 하나님 중심적인 관점은 또한 주기도문에도 나와있다. 자유주의 학자들은 인간을 가장 숭고하게 생각하지만 언제나 예수의 설교에서는 하나님이 그 중심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구원론도 중요하긴 하지만 역시 천국의 하나님 중심 사상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사상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사상들이 있음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언약, 믿음에 의한 칭의 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 사상은 어느 한가지 사상이 아니라 훨씬 포괄적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예수의 설교에 있어 천국의 하나님 중심적인 성격은 그 나라가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기 때문이며 완전히 하나님 자신의 행위에 의존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국은 인간이 창조하거나 진척시켜서 이루어지는 사회가 아니다. 즉, 인간의 도덕적 행동을 통하여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기원하며 하나님의 이적적이고 전능하신 행동에 기초해서만 이해되어야 한다.
5. 역동적인 하나님의 나라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왕국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지만 사실 이 단어는 통치개념이 강하다. 우리는 먼저 성경에서 가까우니라, 임하옵소서, 나타나야 하리라 등에서 그 나라를 우선 공간적인 혹은 정적인 실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먼저는 하나님의 왕적 통치로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또한 천국은 영역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통치가 실현될 수 있는 장소가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그리고 천국에는 인격적 암시가 있는 데, 성경을 보면 천국 비유가 늘 인물을 등장시키고 그의 행동이 나라의 의미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왕국의 성격은 평화롭고 행복한 상태, 사물들의 질서, 선, 선물로도 표현되고 있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왕국의 성격에 대해서 어느 하나를 절대시해서는 안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역동적인 성격의 과정임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늘 천국이 구원과 심판속에 계시된 신적 능력과 관계되어있기 때문이고, 또 예수의 설교에 있어 그 나라의 임함이 단지 그 시작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역동적인 성격으로 인해 천사들은 계속 활동하며 사탄은 비상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6. 메시야 중심의 하나님 나라
마리아의 노래, 사가랴의 찬송중에서 메시야 사상과 하나님 나라 사상은 혼합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여기 누가복음에 나타난 두 노래는 메시야에 대해 민족적인 형태를 띠고 표현한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설교를 보면 하나님 나라와 메시야를 관계시키지만 요한이 말하는 메시야는 민족적인 메시야 관념을 초월하고 있다. 요한은 말한다. 오실 그이는 자신과 다르게 성신과 불로 세례를 줄것이라고 그리고 이 사실은 두가지를 의미하는 데, 구원받을 자들에게는 성령의 은혜를 한없이 부어주지만, 유기될 자들은 불로 버려짐을 당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민족적인 메시야 사상을 초월해 이미 모든 사람들을 향한 종말론적 메시지인 것이다.
이제 예수의 설교를 보자. 예수님은 그의 천국 설교에서 인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인자의 오심은 곧 하나님 나라의 도래이다. 즉, 하나님 나라를 도래케하고 심판을 행하시는 이가 바로 인자인 것이다. 그리고 이 인자는 단지 지상적 통치권을 소유한 자가 아니라 대종말론의 드라마에서 신적 권위를 지닌 우주적 왕권을 맡으신 분이다. 인자의 이러한 초자연적이고 우주적인 성격은 인자가 곧 메시야임을 부각시킨다. 사실 예수님은 천국 설교에서 메시야와 인자가 동일하다는 것을 강조하신다. 따라서 결론은 예수님은 천국에 대해 설교하시면서 인자(메시야)를 언급하셨고 그것은 결국 그의 천국설교가 메시야 설교였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7.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
우리는 또한 예수의 설교에서 종말론적인 면을 볼 수 있다. 즉, 예수는 그의 설교에서 천국을 미래적인 면에서 언급한다는 것이다. 팔복의 경우를 보면 그것은 전부 종말론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즉, 이 세상너머 미래의 세상에서 나타날 복과 완전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서만 발견될 도덕적 완전 상태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이런 종말론적 요소는 그의 말씀에서 본질적인 요소이다. 그리고 이것은 천국의 초월적이고 미래적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말해 천국이 성취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다드는 실현된 종말론이라 하여 천국의 미래성을 언급하지 않고 오직 그 나라의 현재성만을 주장하는 데,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어원적으로 풀면 '가까이 왔다'라는 엥기켄이라는 헬라어를 보면 그것은 70인역에서 "왔다"라는 과거시제의 의미보다 지금 그 때에 도착하다라는 의미로 더 잘 해석되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에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가리키는 구절이 너무나 많다. 막 9:1, 눅 9:27, 그리고 마16:28등은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의 실재로 강하게 부각된다. 이와같이 천국의 미래적 현현은 예수의 설교의 대전제이자 지속적인 관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을 사회가 진화하여 찾아오는 아름다운 선이나 사회질서 같은 것(사회복음의 주장)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또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천국 개념이 결코 시간 개념과 모순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천국은 시간적으로도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시간이 경과한 후에 벌어질 수많은 미래적 사건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적이고 수직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뿐아니라 시간적이고 수평적으로도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역사내에서 활동하시는 신적 사역의 절정과 관계가 깊은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에는 단지 영적으로만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즉 물질적인 면에서도 구속과 생명의 회복이 될 것이다.
8.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은 또한 천국이 이미 성취되고 있는 실재라고도 말씀하신다. 그는 천국이 이미 임하였다고 선언하신다. 세례 요한의 경우 '천국이 가까웠다'는 말은 천국의 현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라는 말은 천국이 이미 임했음을 말한다. '때가 찼다'라는 말은 어떤 것이 이미 최종의 단계에 이른 것을 말한다. 따라서 그 이후에 말하는 천국이 이미 임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거대한 성취의 때가 결정적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눅 4:18,19).
이런 면에서 요한의 설교와 예수의 설교는 차이가 있다. 예수의 설교는 요한의 설교에서 나타나는 심판의 확실함보다는 구원의 선포를 강조한다. 그리고 행동에 있어서도 요한은 은둔적이나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사람들의 생활에 참여하신다. 제자들도 행동하는 방식이 다르다.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과 기도에 힘써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준비하는 것에 힘쓰나 예수의 제자들은 구원의 거대한 때가 도래했다는 확신속에서 즐거워 하고있다. 그래서 이 차이점을 잘 몰라 요한도 처음에는 예수를 알아보았으나 나중에 제자들을 보내어 질문을 한다.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자신이 메시야됨을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예언들이 성취되고 있으며 그럼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현존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가 오기 전(하나님 나라의 도래)에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크나,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 이후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즉 성취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의식하며 즐거워하는 자-보다는 작은 것이다.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나 성취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한은 한 마디로 옛 시대에 속해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더불어 새 시대는 도래했고, 천국은 이 세상에 그 세력을 드러내는 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눅 16:16에서도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요한 이후부터는 천국이 침노될 것을 말한다. 이러한 새 시대는 수 많은 투쟁과 노력을 요하지만 그런식으로 사람들은 그리로 들어가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요한의 설교에서 매우 근접해 있기는 하지만 아직 오지 않았고, 그것은 예수의 오심과 더불어 현재적 실재가 되었다. 즉, 예수안에서 미래의 예언들이 현재적 성취가 된 것이다.
결론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 실재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천국의 미래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천국의 종말론적 성격은 여전히 미래를 지향하며 과정의 문제로서 유지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 대한 리델보스의 이해
헤르만 리덜보스의 신학을 전반적으로 검토한다는 것은 짧은 시간과 지면 하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이번에 우리는 그의 신학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성에 대한 그의 견해를 검토하는 작업을 하려고 한다. 그의 가장 큰 공헌 중의 하나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공관복음서의 이해를 잘 정리한 것이고, 바울의 사상을 잘 정리하는 중 교회의 의미를 잘 밝혔다고 사료되기 때문이다. 먼저 그의 하나님 나라[天國] 이해 가운데서 우리들에게서 그 동안 간과된 몇 측면을 지적하고, 그의 교회 개념을 살핀 후, 천국과 교회 관계에 대한 그의 입장을 정리하고, 비판적인 검토를 하도록 할 것이다.
1. 하나님 나라[天國] 이해
공관복음서의 하나님 나라 개념을 잘 정리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그는 "공관복음서에서 우리에게 전승된 예수의 메시지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 나라, 또는 마태복음서에서 주로 표현된 대로 하늘 나라[天國]의 도래이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이제는 너무 잘 알려져서 일반화된 (그러나 이에 충실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리덜보스의 논의를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핵심은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천국은 이미 우리에게 임하여 와서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은 영적인 실재로 진행하여 가다가, 예수님의 재림 때에 그 나라의 극치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 기본적인 리덜보스의 가르침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측면들만을 몇 가지 언급하려고 한다.
첫째로, 리덜보스는 하나님 나라[天國]에 대한 이해를 추상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는 한 곳에서 이를 아주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통치에 관한 일반적 무시간적 진술의 문제가 아니라, 특히 언젠가 보게될 그것의 구속사적 실현의 문제(its redemptive-historical effectuation)이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개념은 주로 하나님의 왕적 자기 주장의 개념, 즉 당신님의 왕적 엄위와 능력과 옳음을 계시하기 위해 당신님께서 친히 이 세상에 오신다는 개념이다. 예수님의 선포의 일반적 목적에 대한 바른 통찰을 얻기 원한다면 우리는 천국의 이 절대적으로 신중심적인 개념을 항상 유념해야만 한다(Coming, 19).
이 구절은 리덜보스의 천국 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구절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구절에 의하면,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의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의 이 세상에서의 실현과 관련된 것이다. 리덜보스는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인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지 않는다. 즉, 그는 단지 하나님의 주권이 시행되는 곳이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을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늘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었으므로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말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리덜보스는 막연히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은 다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리덜보스에 의하면, 이 땅에로 하나님의 통치가 구속사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천국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왕국은 구속을 의미한다"고 말하기도 하며(Coming, 20), "심판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그 나라를 "구속과 심판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시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Coming, 55). 그래서 그는 "그 나라의 도래는 무엇보다도 신적 영광의 증시, 즉 이 땅에 그 온전한 의미의 하나님의 권세가 다시 주장되고 유지되는 것이다"(Coming, 20f.)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그는 이 땅에서 시작되는 구속과 그로 말미암은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영광의 증시에서 하나님 나라를 찾는 것이다. 왜냐 하면 그는 하나님 나라를 "당신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와 관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Coming, 23).
그러므로 그 나라는 구속사적으로 실현된다. 따라서 예수 안에서 이미 임하여온 "천국의 도래는 종말 역사의 큰 드라마의 초기 도입 단계(the initial stage of the great drama of the history of the end)"로 이해된다(Coming, 27). 그리고 리덜보스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과 관련하여 천국의 관계성을 "성취와 극치"(fulfillment and consummation)라는 용어로 정리한다(Coming, 516-23). 즉,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미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이 이 땅에 실현되었고, 성취되었다(fulfillment). 예수님의 오심과 사역은 성취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Coming, 520).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므로 천국이 온 것이다"(Coming, 95). 그러므로 "그 안에서 온 것은 사물들의 마지막(the end of things)이다"(Coming, 526).
천국의 현재성에 대한 논의와 관련한 리덜보스의 큰 공헌의 하나는 '하나님 나라'(ֿ ՂՁՓՉՋՅדՁ ՔՏ ԨՅՏ)와 '아들의 나라'(ֿ ՂՁՓՉՋՅדՁ ՔՏ ՉՏ) 또는 '그리스도의 통치'(Regnum Christi, 메시아 왕국)에 대한 지나친 구별을 피하고, 그런 구별을 시사하는 견해들을 주해적으로 잘 비판하면서 본질상 왜 아들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인지를 주해적으로 잘 밝혀 놓은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에 근거하고 승천으로부터 효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왕국(Regnum Christi)가 시작되었고, 종국의 투쟁 후에 아들이 왕국을 아버지께 바치면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다고 논의하는 오스카 쿨만의 견해를 잘 비판하면서, 리덜보스는 "그 내용에 관한 한 그리스도의 나라는 아버지의 나라와 나뉘어 질 수 없는 것은 마치 성자와 성부가 나뉘어 질 수 없는 것과 같다"고 강하게 논의하고 있다(Coming, 96). 더구나 이런 식의 생각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전에 하나님 나라의 임함에 대한 말씀을 순전히 예기적(proleptically)만 생각하게 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충실하지 못함을 잘 지적한다.
그러므로 "왕국의 임함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오심, 즉 그의 성육신에서이다"라고 주장하면서(Coming, 96), "복음서는 말로나 사상으로나 쿨만의 구별을 알지 못한다"(Coming, 97)고 확언한다. 왜냐 하면 이 논의의 마지막 부분에서 리덜보스가 잘 말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역 안에서, 또 그것을 통하여 그 때로부터 하나님 나라는 실현되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Coming, 97).
그러나 그 마지막의 극치(consummation)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니, "인자가 큰 권능으로 임할" 때에야 극치에 이를 것이다. 물론 그 극치는 성취의 극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이미 시작하신 그의 성취의 사역을 마치시는 일을 분명히 하실 것이다(Coming, 518). 그러므로 이미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이 땅에 임하여 온 천국의 극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parousia)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리덜보스는 "극치라는 주제는 미래에 대한 예상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전체 가르침에 대해서도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한다(Coming, 45).
그러나 그 나라는 이미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로 이미 이 땅에 실현되어 가고 있다는 것, 아니 미래에 대한 모든 것은 성취가 이미 왔다(the fulfillment has come)는 것에 근거해서만 가능하다는 것(Coming, 520) 또한 그의 큰 강조점이다. 예수님의 선포 가운데서는 "성취의 요소가 기대의 요소만큼이나 놀랍고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Coming, 520). "[예수] 안에서 선지자들의 미래가 현존하는 성취(the present fulfillment)가 되었다"(Coming, 55).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그리고 이에 대한 선포인 천국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이 세상 안으로 천국이 들어오는 것"(the entry of the kingdom of heaven into this world, Coming, 334)이 리덜보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따라서 그 결과로 우리가 이 세상 안에서 이미 천국 안에 있다(being in the Kingdom)는 표현이 사용될 수 있는데, 그 때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시작된 구원의 성취에 참여한다는 것"(the participation in the fulfillment of salvation that began with Christ's coming)이다(Coming, 344).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파루시아 사이의 기간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잠정적으로(provisionally) 실현된 성취의 사실에 의해서 규정되고 그 질이 결정되는 것이다"(Coming, 520).
둘째로, 따라서 리덜보스는 천국 복음의 의미와 그 선포를 강조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리덜보스에게 있어서 복음은 천국 복음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천국이 이 땅에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형태들 중의 하나는 복음의 선포"라고 한다(Coming, 334). 그러므로 리덜보스의 이해에 의하면, "천국 복음의 선포는 한편으로는 천국이 이미 도래하였음에 대한 증거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이 선포를 통해서 선포되는 것은 단지 말이 아니라 행위이며, 소리가 아니라 실재이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의해서 지지되고, 그의 사역, 특히 그의 수난과 죽음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Coming, 185). 그러므로 이 천국 복음의 선포와 수납을 통해서 이미 여기서 천국에 들어가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 복음의 선포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은 천국 도래의 서언적(preliminary)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 복음의 선포에 있어서도 도래한 천국의 '이미'와 '아직 아니'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리덜보스는 이 천국 복음이 깨어질 수 없는 단일체를 형성하고 있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고 옳게 지적한다(Coming, 186). 그 한 부분은 복음에서 주어지는 구원이라는 은혜와 관련된 것이고, 또 한 부분은 명령으로 표현되는 요구와 관련된 것이다. 천국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우리는 우리가 이미 받은 은혜를 기억하면서 늘 "깨어 있고 신실해야만" 한다(Coming, 518). 이는 우리들의 모든 삶을 규정 짖는 것이다. 신자들의 윤리적인 삶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사역의 태도가 이 말 속에 함의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 하면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야 할 큰 사역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덜보스는 "모든 민족들에게로 선교사들을 보내는 것은 극치에 이르도록 하는 신적 사역 안의 한 단계이다"라고도 말할 수 있었다(Coming, 520).
그렇다면 리덜보스는 신자들의 중간 상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왜냐 하면 한국 교회에서는 신자들의 중간 상태를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것과 같은 용어로 부르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일단 리덜보스는 바울이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ՓײՍ ԷՑՉՓՔٍ ՅסՍՁՉ)는 말은," 여러 주석가들의 다른 의견들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 바로 후부터 부활 전까지의 구체적인 내용을 지니는 것임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그는, 게르할더스 보스에게 동의하면서, 바울은 부활의 궁극적 소망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죽은 후의 잠정적인 지복의 상태도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공관복음서에서도 부활 이전에 이미 합당한 자로 여겨진 자들에게는 "복된 중간 상태"(an intermediate state of bliss)가 있음이 약속되었다고 한다. 리덜보스는 특히 눅 23:42, 43과 눅 16:19-31에 근거하여 이 복된 중간 상태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죽음 이후 부활 이전까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상태는 "바울의 서신들에서 부활이 가진 것과 같이 온전한 구속적 의의(the full redemptive significance)를 지니고 있지는 않은 것이 분명히 참되다"고 말한다. 그것은 아직 영광스러운 몸 안에 있지 않은 것이고, 따라서 우리에게는 생각 할 수 없는 양태의 인간 존재이다. 물론 신자의 중간 상태는 주와 함께 있는 상태(빌 1:23)이고, "더 이상 지상적인 몸 안에 있지 않은 상태이며, 따라서 모든 불완전과 죄, 그리고 이 몸 안에서 겪는 어려움에서 벗어난 상태"이다.
리덜보스는 이를 언젠가는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나게 될 천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취어진 존재이라고 말한다. 그러고 이는 바울이 강조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롬 8:35, 38ff.). 그러나 그 상태도 아직 미완의 상태이며, 기대의 상태이고, 잠정적 축복의 상태라고 요약하고 있는 안토니 후크마의 요약은 리덜보스의 견해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과 같이 논의하는 리덜보스는 한번도 성도의 이 중간 상태를 지칭해서 the kingdom of heaven으로 부르는 일이 없음에 유의해야 한다.
2. 교회 이해
리덜보스는 교회를 "(천국)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한 공동체에 연합하게 된 사람들을 지칭하는 이름"이라고 정의한다(Coming, 343). 리덜보스는 이런 의미의 교회 개념과 용어가 이미 예수님 자신에게서 분명히 기원하였으며, 이 용어가 공관복음서에서 나타나고 있는 마태복음 16장과 18장의 해당 부분이 분명히 예수님에게서 기원하였음에 대해서 강한 논증을 한다(Coming, 334-42, 347-48, 367). 그는 이렇게 말한다: "중요한 것은 에수님께서 그의 교회와 그의 사후에 있게될 교회의 형성에 대해서 말씀하셨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Coming, 369). 그에 의하면, 마태복음 16장은 "교회에 대해 정교하게 문자화된 계획안은 아니어도, 교회의 헌장"(the charter of the church)이다(Coming, 367).
따라서 리덜보스는 "교회 개념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자기 계시의 범주에 있어서 아주 본질적인 요소"라고 결론 내린다(Coming, 347). 그리하여 리덜보스는 교회는 그저 우연히 나타난 카리스마틱한 현상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경험적인 실재(empirical one)이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심으로 교회 조직이 시작되어졌고,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복음이 선포되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Coming, 342, 367).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교회의 조직은 직임과 기능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Coming, 367).
리덜보스는 이렇게 예수님에게서 나온 이 교회 개념의 기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질문을 하고, 다음 몇 가지 제안들에 대해서 깊이 있는 논의를 하고 있다.
(1) 교회(ecclesia) 개념을 다니엘서 7장의 인자와 함께 언급되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과 연관시키며 설명하는 카텐부쉬(F. Kattenbusch). 카텐부쉬에 대해서 리덜보스는 "교회"(ecclesia)라는 용어와 개념의 진정성을 드러내려는 그의 노력을 높이 사면서도(Coming, 339-40, 347), 카텐부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로부터 교회 개념이 기원하였을 것 같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라는 이 백성이 복음서에서 한번도 그와 같이 불려진 일이 없으므로 특히 다니엘 7:47을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선포에서의 교회 개념의 출발점으로 생각하는 일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Coming, 347f.).
(2) 기본적으로 카텐부쉬를 따르면서, 그러나 그보다 더 폭넓은 하나님의 백성 개념을 생각하면서 '교회(ecclesia)를 '남은 자'들에 대한 (이사야 10:22ff.와 같은) 구약의 자료들의 연속성에서 생각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뢰게(G. Gloege). 글뢰게의 주장에 대해서 리덜보스는 이 구체적인 해석이 실제적으로 옳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지할만한 복음서 내의 근거가 없음을 지적한다. 복음서에서 그 어디서도 말하고 있지 않은 '남은 자'에게 집중하는 글뢰게의 이 견해는 예수님께서 친히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충분히 설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Coming, 348). 그 대표적인 반응의 하나로 리덜보스는 글뢰게의 해석을 "환상적인 구성"(fantastic construction)이라고 말하는 불트만의 비판을 소개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리덜보스는 글뢰게 처럼 남은 자 사상에 근거해서 교회 개념이 나타났다고 보기에는 복음서의 증거가 약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3) 기본적으로는 이들에게 동의하면서도 예수님의 교회 개념은 단순히 다니엘서나 남은 자 개념에서 온 것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구약의 일반적이고 중요한 개념인 하나님 백성 개념이 신약 교회 개념의 토대라고 보는 외프케(A. Oepke). 리덜보스는 복음서에 구체적인 설명의 근거가 없으므로, 글뢰게와 같이 구체적인 설명을 찾으려고 하는 일은 불필요하므로, 일반적인 외프케의 설명에 동의한다고 한다(Coming, 348). 그런 구체적인 설명보다 하나님 백성 개념이 왕국에 대한 예수님의 메시아적 선포에 훨씬 더 일반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4) 카텐부쉬를 따르면서, 아람어적 논의를 하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백성에 대해 일반적인 용어였던 '콰할'(kãhãl)이나 '케할라'(kehãla)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구체화된 회당 모임(synagogue assembly)의 의미로 사용되던 '케니쉬타'(kenischta)를 사용하셨으며, 이는 예수님께서 그의 추종자들을 참된 하나님의 백성 자체를 나타내는 확신 가운데 사는 특별한 회당 모임으로 구체화하기를 원하셨음을 나타낸다고 주장하는 쉬미트(K. L. Schmidt). 이는 외프케의 견해를 좀더 특수하게 발전시키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리덜보스는 교회 개념의 진정성을 드러내려는 쉬미트의 일반적 작업에는 동의하고 높이 사지만(Coming, 341), 이런 구체적 설명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특히 Coming, 356). 그는 쉬미트와 카텐부쉬의 '케니쉬타'를 말하는 견해와 그 이외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생각하는 '콰할'이나 '케할라' 어떤 것이 사용되었던지 기본적인 개념은 신적 언약 백성의 모임(the gethering together of the people of the divine covenant)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Coming, 354).
쉬미트 등은 이 '에클레시아'가 구약적 '콰할'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려고 한다(Coming, 392, n. 66). 즉, 그는 교회(ekklesia)를 유대 공동체 전체 내에서의 예수의 제자들의 구별된 조직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16:18에 관한 한, 그런 구별된 공동체가 실제로 있었는지가 의심스러우며, 따라서 쉬미트가 호소하는 언어학적 용례가 분명히 수립되지 않으며, 에클레시아가 '케니쉬타'이고 그것이 특별한 회당이라는 구체적 설명의 사실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Coming, 356). 또한 교회는 한번도 자신들을 유대교 안에 수립된 회당 공동체로 생각한 일이 없고, 오히려 자신들을 옛 백성을 대치할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으로 이해하고, 실제로 대치했던 것이다(Coming, 357). 이런 논의에 근거해서 리덜보스는 "마태복음 16:18의 '에클레시아'는 70인경에서 거의 항상 '에클레시아'로 번역하고 있는 구약의 '콰할'의 유비를 따라 그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로 해석해야만 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결론 내린다(Coming, 357).
그러므로 리덜보스는 예수님께서 구약의 일반적인 하나님 백성 개념에 근거해서 교회 개념을 제시하셨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이런 이해가 다음 몇 가지 생각에 의해서도 지지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첫째는, 메시아적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즉, 구약의 가르침에 의하면 메시아는 항상 그 백성을 가지게끔 되어 있어서, "백성 없는 메시아 개념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이라고 한다(Coming, 348). 이것은 누구든지 받아들이는 것이며, 심지어 불트만도 "이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고 말하고 있음을 제시한다. 특히, 유대교의 종말론에서는 항상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있을 것임이 수납되고 있음을 볼 때, 그런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제시된 것은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더구나 마태복음 16장의 교회에 대한 선언에서 "내" 교회라는 대명사에 이런 의미가 있다고 한다(Coming, 348). 이것은 "메시아가 그의 은혜를 주고, 다스리시는 그 백성"을 뜻하는 "내"라는 말이라는 것이다(Coming, 348). 이 말씀에 배후에는 "그들을 위해 그가 행동하시고, 그들을 책임지시며, 그들과 그가 연합하신" 메시아의 백성이 있다는 것이라고 한다(Coming, 349). 그들을 위해 그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시인할" 것이고(마 10:32, 33),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신다(마 12:50; 25:40). 그가 이미 오신 인자시라면 그가 그의 백성을 모으신다는 것은 아주 자명하다는 것이다(Coming, 349).
그리고 메시아로서의 예수님 자신의 활동, 즉 열매를 찾으시고 사람들을 모으시는 것은 또한 부분적으로는 제자들의 사역에도 적용된다고 한다(Coming, 350). 리덜보스는 "처음부터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를 위해 사람들을 얻고 모으는 것과 관련된 어떤 특별한 권세를 주실 것에 대해 약속하셨다"고 한다(Coming, 350). 그런 것들 중의 하나가 "내가 너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니"와 같은 말씀이라는 것이다(막 1:17; 마 4:19; 눅 5:10). 또한 오병이어 사건 같은 상황에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도 제자들의 미래 활동을 지칭하는 분명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Coming, 350). 즉, "미래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은사를 나누어주게 될 것이다"는 것이다(Coming, 350).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친히 그리고 제자들을 통해서 "이미 이 땅 위에서 그의 메시아적 종말론적 교회를 모으셨다"(Coming, 351). "그의 말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본질적으로 그의 백성, 즉 메시아의 백성이다"(Coming, 351).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예수께서 메시아로 선포될 때, 그의 교회는 그 자체를 증시하는 것이다(Coming, 351).
둘째로, 믿지 않는 이스라엘을 언약 백성 됨에서 배제시키고, 하나님의 백성을 새롭게 형성한다(new formation of God's people)는 개념에도 교회 개념이 함의되어 있다고 본다(Coming, 351).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으로 세우는데서 메시아를 통한 그의 놀라운 사역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 그 지도자들을 하나님의 백성 됨에서 제거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Coming, 352). "하나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는 말씀 안에 있는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주실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리덜보스는 해석한다(Coming, 352). 이들은 "천국 선포에 의해 회개하여 자신들이 이미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임을 드러내는 사람들"이다(Coming, 353). 리덜보스는 이와 제자들을 양떼로 언급하는 구절들을 연관시킨다(눅 12:32; 막 14:27)(Coming, 353). 또한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셨을 때도 그들은 그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을 선포하는 자들이 아니라, 또한 종말론적 하나님 백성의 선취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모여진 교회가 처음부터 구현된 것이다"고도 말한다(Coming, 353). 결국 언약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기본적인 모티브도 교회 개념을 자연스럽게 유도해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리덜보스는 "내 교회"라는 표현은 메시아적 측면과 언약적 측면의 결합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Coming, 354).
이제부터 하나님의 백성은 메시아의 백성이다. 그리고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이들은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메시아가 오셨으므로 천국의 은혜를 이미 받은, 그리고 언젠가 인자의 강림 때에 온전한 상태를 받게 될 사람들의 공동체"이다(Coming, 354).
이런 메시아의 교회(ekklesia)를 예수님께서 세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고(마 16:18), 후에 실제로 세우셨다. 이 때 "세운다"는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 이는 구약에서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밭, 농경지, 그리고 하나님의 '건축물'(building)로 이해하던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다(Coming, 357). 그러므로 이는 "하나님이나 메시아에 의해서 그의 백성으로 연합된 사람들의 모이게 됨"이라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된 세운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는 과연 언제, 어떤 방식으로 교회를 세우셨는가? 이점에 관한 리덜보스의 해석은 독특하다. 그는 이에 대해 제기된 기존의 해석 두 가지를 거부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세우심은 (1) 교회를 세우시는 일의 토대로 성찬을 제정하실 것이란 뜻도 아니고, (2) 그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해서 세우실 것이라는 의미도 아니라고 한다. 그렇게 보면 반석 위에 세운다는 의미가 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후에 시작되는 베드로(의 사역) 위에 기독교회를 세울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Coming, 358).
이렇게 세워진 신약의 교회는 "아브라함 안에서 모든 백성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당신님에게로 선택하시고, 언약과 약속들의 세우셔서 당신님을 매신 역사적 하나님 백성의 연속이며 그 성취"라고 이해되고 있고[교회의 구속사적 성격], 바울은 이를 "독특하게" (typically)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묘사하여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의 실재적 존재와 성격을 표현하고 있다고[교회의 기독론적 측면,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교회의 기독론적 존재 방식] 리덜보스는 본다. 리덜보스는 바울 이전부터 "콰할"의 의미로 사용되고 바울도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로 세례 받은 이들의 공동체를 묘사하는 것으로"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이 "에클레시아"라는 말에 "이미 기독 교회 안에서 마지막 때의 메시아적 회중인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계시되었고, 광야에서 언약을 맺을 때 옛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특권과 질이 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적용을 얻게 되었다는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생각은 어떻게 해서 생성되었을까? 어떤 이들은 희랍 세계에서 국가나 사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흔히 몸의 비유를 사용하여 말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사회적, 실천적 해석]. 그러나 리덜보스는 다른 대부분의 해석자들에게 동의하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은 그 지체들 간의 관계와 교제만이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교회와 그리스도 자신의 교제의 성격을 규정 짖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해하는 이해로 리덜보스는 다음과 같이 다양한 이해를 소개하면서 논의한다.
(1) 개신교적 표상적 해석
이 해석에 의하면 교회 안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영으로 내주하시며 그의 영으로 살아 있게 하고 채우시는 교제로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이는 불가시적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지칭하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2) 전통적 천주교의 표상적 이해
전통적 천주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신-인성과 교회의 연합의 결과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수 있다고 보았다고 한다. 특히 성찬에서 주의 몸에 참여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존재의 연장(extension)을 발견하므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된 존재 양상을 집합적인 그리스도 또는 신비한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물리적인 몸에 연합하지만, 교회 그 자체는 몸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하나로 하시는 이들 전체로서 몸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리덜보스는 기존의 해석들을 자신의 성경 주해와 잘 대조시키면서 교회에 대한 이해를 이끌어 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이렇게 이해된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齰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가? 이점이 우리가 다음절에서 고찰하고자하는 이 논문의 핵심적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 문제에 대한 고찰에로 나아가기로 하자.
3.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
리덜보스는, 그의 교회 이해를 다룬 윗절에서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과거의 많은 이들이 마태복음 16:18ff.와 마태복음 18:15ff.의 진정성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그의 논의를 시작한다. 대개 그들은 천국의 일반적 성격이 교회 개념과 양립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서 자유주의 신학은 어느 정도의 조직을 갖춘 신자들의 가시적인 모임인 교회는 전혀 "개인을 구별하고 그로부터 시작하는 정향을 지닌 '내면적 종교'의 선지자인" 예수님의 관심 영역밖에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Coming, 335). 자유주의 신학 일반이 그렇게 하였고, 바이스와 슈바이쳐 중심의 종말론 학파도 예수께서 예언한 인자의 파루시아가 이루어지지 않자 나타난 것이 교회라는 해석을 하였다고 지적한다(Coming, 336). 이 둘을 모두 비판하면서 리덜보스는 "마태복음 16장에 언급된 예수님에 의한 교회의 수립은 그 말의 온전한 의미에서 지정한 것으로 인정되어야만 한다"고 결론 내린다(Coming, 342). 이렇게 이해 할 때 천국 개념도 더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 리덜보스는 과연 천국과 교회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그의 천국에 대한 정의와 교회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한번 더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리덜보스는 이 논의를 요약하는 부분에서 이 두 개념을 다음과 같이 다시 한번 더 명료하게 정의하고 있다: "왕국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고 극치에 이르는 하나님의 커다란 구원의 행위이다. 그런가 하면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받고 부름을 입어 왕국의 복에 참여하는 백성들이다." 다른 곳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약속이 주어진 이들의 공동체이다"(Coming, 361).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왕국 개념이 선행하는 것이다. 왕국은 전포괄적인 관점을 나타내고, 전 역사의 절정을 함의하고, 우주적 차원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반해서,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 덕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 큰 드라마 가운데서 하나님 편에 있게 된 백성이다(Coming, 354). 이런 이해 가운데서 리덜보스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를 논하는 것이다.
그는 신약의 용례에 충실하면서 왕국(basileia) 개념이 아주 엄밀하게 사용된 예와 파생적이고 넓은 의미로 사용된 예를 구별하여 논의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분명하게 의식되지 않으면 우리는 그에게 있지도 않은 모순을 그에게 돌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즉, 리덜보스는 먼저 신약의 용례를 살펴 볼 때 엄밀하게는 왕국(basileia)이 한번도 교회, 즉 복음 선포를 통해 한 공동체에 연합된 이들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일이 없으며, 또한 이 땅에서의 잠정적 구현체로서의 하나님 나라가 교회의 형태와 조직으로 구현된다는 의미로 사용된 일이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Coming, 343). 이런 엄밀한 의미에서 그는 "복음서는 왕국이라는 말이 '교회'라는 의미로 사용된 그 어떤 구절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고 단언한다(Coming, 347). 또한 마태복음 16장에서도 교회와 왕국의 동일시가 의도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Coming, 360).
그러나 리덜보스는 또한 왕국(basileia) 개념이 느슨하게 사용된 예도 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왕국(basileia) 개념이 사용된 예들, 즉 "경계선상의 예들"이 있다고 말하여 질 수도 있으며, 이는 복음서에서의 왕국(basileia) 개념이 언어적 사용이 아주 복잡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Coming, 343). 따라서 왕국(basileia)이라는 말의 파생적 의미에서는 이 말이 교회, 즉 "그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수납되고 하나님 나라의 의가 그 타당성을 얻게된 영역이나 공동체"(Coming, 344) 또는 "신자들의 조직화된 모임"(organized assembly of the faithful, Coming, 344)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일도 있다고 시인한다(Coming, 344). 그리고 이런 파생적인 의미로 왕국이 교회란 뜻으로 사용된 것은 공관복음서에만 나타나는 것으로, 공관복음서 밖에서는 한 번도 교회가 왕국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일이 없음도 지적하고 있다(Coming, 344).
그러나 엄밀한 의미로 사용된 천국은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를 통해서 약속되고 이미 주어진 모든 은혜와 보화 안에서, 교회의 구속적이고 구원적 의미 안에서 드러나게 된다"(Coming, 355). 교회는 "왕국의 은사들과 권세가 주어지고 받아들여진 곳"이기 때문이다(Coming, 356). 이런 뜻에서 리덜보스는 천국은 교회 안에서 드러난다(the kingdom is revealed in the ekklesia)라고도 말한다(Coming, 355). 이런 뜻에서는 "왕국과 교회가 동일하다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Coming, 355).
그러나 그 말은 오직 천국이 교회를 통해서 증시 된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교회는 천국이 아니면서, 또 한번도 천국과 동일시되지 않으면서, 하나님 나라의 계시와 진전과 미래에 둘러 싸여져 있는 것이다(Coming, 356). 결국 리덜보스는 천국과 교회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교회는 왕국의 계시의 열매이다. 그리고 역으로 왕국은 교회가 없이는 파악할 수 없다.
그 둘은 서로에게 복속해 들어가지 않으면서 서로 불가분리적인 것이다"(Coming, 355). 이런 의미에서는 "왕국으로부터의 축출은 교회로부터의 축출을 함의하고, 그 역도 성립한다(Coming, 362)." 교회는 천국의 도구(the instruments of the basileia)로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며, 온 세상에 천국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적 사역을 수행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Coming, 356).
그러므로 천국이 선행하고 그 천국의 공동체로서 교회가 있으면서 그 교회는 천국과 관련된 일정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리덜보스는 특히 마태복음 18:17과 연관해서 언급된 "매고 푸는 권세"가 지교회와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다는 점에 유의하면서 이는 지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법적 권세"(judicial authority)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Coming, 361f.). 특히 사도의 직임은 12제자에게만 있는 독특한 것이지만, 매고 푸는 권세는 그들에게만 있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리덜보스는 옳게 주장한다(Coming, 363). 오히려 이 매고 푸는 권세는 베드로나 사도들에게만이 아니라 처음부터 교회에게 맡겨진 것이라고 한다(Coming, 364, 365);
"열쇠들의 권세는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교회에게 그리고 그 기관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고린도전서 5:2-5과 같은 후기의 구절에서 아주 분명히 나타나듯이 말이다"(Coming, 365). 그러나 이 큰 권세는 교회가 그리스도와의 교제 가운데서 그의 이름으로 행할 때에만 현존하는 것이니, 그렇게 행하는 그들 가운데 "내가 있으리라"고 하시기 때문이다(Coming, 366).
그러므로 이는 리덜보스가 아주 잘 지적하고 있듯이 그렇게 모여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계시해 주신 말씀과 관련하여 큰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Coming, 366). 그들의 판단에 대한 신적 재가는 그들이 그의 계시된 뜻에 따르는지 그 여부에 달린 것이다. 이와 연관해서 리덜보스는 이를 마태복음 7:22과 연관시켜 이해할 것을 요청한다(Coming, 366). 교회가 행하는 것이 얼마나 신중해야 할지를 잘 알려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4. 비판적 고찰
이제까지 천국과 교회에 관한 리덜보스의 이해를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이로부터 우리는 이 둘 각각의 개념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 둘의 관계에 대한 좋은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논의 가운데서 조금 비판적으로 고찰 해 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첫째로, 리덜보스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막 1:17; 마 4:19, cf. 눅 5:10)라고 말씀하신 것과 연관해서, 많은 무리를 먹이시는 사건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막 6:37; 마 14:16)라고 말씀하신 것이 제자들의 미래 활동과 관련된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더 많아 보인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물론 제자들이 후에 예수님의 메시아적 은사들을 전하고, 그를 대신해서 그 은사들을 나누어주리라는 것은 옳다. 그러나 이 사건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의 의도 가운데 그런 의미가 함의되어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제자들의 미래 사역을 지칭하는 것으로보다는 제자들로 하여금 단순히 무력함에만 잠겨 있지 말고,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찾아보라는 뜻으로 평이하게 해석하든지 (그래서 후에 이 사건을 깊이 있게 생각하고 그 의미를 잊지 않도록 하신 것이라고 보든지), 아니면 제자들로 하여금 문제를 더 절실히 깨닫도록 하며, 주님의 어떠하심과 사역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제자들에 대한 일종의 꾸짖음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문맥상 더 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둘째로, 마태복음 16:18의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면서 리덜보스는 반석 위에 세운다는 의미를 부각시키려면 이 세움은 결국 베드로의 사역 위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는데(Coming, 358), 이에 대해서 다른 논의의 가능성이 강하게 있을 수 있음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리덜보스는 이런 해석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한다(Coming, 358).
이런 입장에 동의하면서 여기 "반석"을 베드로의 신앙이나 그에게 계시된 진리로 다르게 해석하는 것은 개신교적 편견을 반영하는 것이고, 이것은 본문에 없는 내용을 도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인지가 의심스럽다. 리덜보스의 논의의 과정에도 상당한 추측이 있음은 "베드로 위에"를 "베드로의 (사역) 위에"로 해석적으로 제시하는 데서도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Coming, 358).
물론 그리스도께서 '반석"(ՐִՔՑՁ)이라는 말로 분명히 베드로(ִՔՑՏՒ)를 의미하신 것이라는 리덜보스의 지적과 그 이유로 제시하는 페트라(ՐִՔՑՁ)와 페트로스(ִՔՑՏՒ)는 같은 말의 반복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Coming, 359) 옳다. 이에 대해서는 그가 각주에서 인용하고 있는 떼오도르 쨘(Theodore Zahn)의 생각, 즉 이 두 단어는 모두 예수께서 같은 단어를 사용하신 아람어 '게바'(ԪՇԶ֥Ւ)에 근거한 것이라는 논의가 매우 강한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과 관련해서 이 '반석'을 예수 그리스도 자신, 또는 그의 메시아 됨이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의 존재라고 해석하는 것은 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꼭 베드로의 인격이나 사역에 근거해서 교회를 세울 것이라는 의미라고 해석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리덜보스는 베드로의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증인으로서의 기능에 근거하여 베드로가 그런 사도가 될 것이며, 베드로의 미래 사도로서의 활동에 근거하여 교회를 세우신다는 의미로 해석한다(Coming, 359).
그렇다면 다른 사도들의 활동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리덜보스는 이 상황 가운데서는 신앙 고백을 한 이가 베드로라는 특정한 상황 가운데서 그의 이름이 언급된 것이며, 베드로가 수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다(Coming, 359).
그러면서도 그는 이 문맥에서는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의 대표로(representative)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말도 한다(Coming, 363). 이와 연관해서 그는 사도들 전체를 교회의 튼튼한 기초로(rock-foundation) 제시하는 다른 본문들을 언급하기도 하고(엡 2:20; 계 21:14), 다른 사도들도 교회의 토대로서 그의 중요성을 공유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Coming, 363, 367). 이 뒷부분의 논의는 상당히 신약의 가르침 전반에 기초한 논의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신약 전체의 가르침에 좀더 부합하는 해석은 여기서 베드로를 너무 개인적으로 다루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리덜보스는 본문에 충실하려고 하다가 베드로 개인과 그의 미래 사도직에 집착하는, 따라서 뒷부분의 논의에서는 그것을 다른 제자들에게 일반화하기 때문에 잘 조화되지 않는 해석을 제시했다고 비판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을 때, 주께서 "내가 네 위에 ......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신 것을 볼 때에 이 말씀은 베드로 자신에게 대해서만 말씀하시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제자들 전체(the whole group)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보는 해석이 더 옳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 유의한다면 우리는 리덜보스도 간혹 그것을 시사하는 고백자로서의 베드로(Peter the Confessor) 위에 세우신다는 뜻이라고 보는 해석이 좀더 자연스러우나, 이 때도 역시 우리는 베드로 개인적에게 집착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런 점들을 생각할 때 개신교 내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베드로가 대표로 고백한 그 바른 신앙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보는 해석도 정당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와 연관해서 리덜보스는 마태복음 16장에 나타나는 "매고 푸는 권세"와 18:17의 어귀를 같은 어귀이므로 거의 같은 뜻으로 해석하는 문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런 해석에 근거해서 마태복음 16:19을 복음 선포로 말미암은 구별을 시사하는 견해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보다 자연스러운 해석은 마태복음 16장에서는 주로 복음 선포를 중심으로, 교회 내에서의 상황을 말하고 있는 18장에서는 권징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16장은 오히려 그가 비판하고 있는 복음 선포로 말미암은 구별의 의미로 보는 것이 더 나은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리덜보스가 매고 푼다는 말을 비록 랍비 문학에 자주 나타나는 말은 아니지만, "권위를 가지고 결정한다"(decide with authority)는 말에 대한 유대교 랍비적 전문 용어로 이해하는 것은 옳다(Coming, 360). 이런 의미에서 "맨다"(to bind)는 말은 어떤 것이 율법에 맞지 않는다고(unlawful) 선언하는 것이며, "푼다"는 말은 어떤 것이 율법에 맞는 것이라고(lawful) 선언하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또 이는 합하여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거나 그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도 옳다고 생각된다(Coming, 360). 그러나 그 구체적인 의미는 그가 구체적인 맥락에 따라 잘 생각하듯이, 마태복음 16:19에서는 주로 천국 복음의 선포로 말미암은 천국에 들어오고 축출됨에 대한 선언이, 마태복음 18:17에서는 교회의 치리로 말미암은 어떤 결과가 시사되어 있다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셋째로, 중간 상태에 대한 입장을 논하면서 전반적으로 리덜보스는 전통적인 이해에 충실하게 소개하면서도, 다른 이들의 견해를 소개하고 그에 대해서 별 논의 없이 죽어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다는 말로 결론 내릴 때, 우리는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이 다른 견해로 제시하는 죽음 이후에 성도는 하나님께 특별히 가깝게 있는 것(proximity to God)이며, 쉬는 것이고, 우리는 그런 존재가 있고, 이는 (성령을 통해서)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해 있음을 뜻한다고 해석하는 오스카 쿨만의 견해에 대해 별 논의 없이 그것도 죽음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가 끊어질 수 없음을 지지하는 견해라는 시사를 어느 정도는 주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는 쿨만의 바르지 못한 견해에 대해서 비판적인 리덜보스가 왜 이 문제에 있어서는 그와 의견을 같이 하는지 의아스럽다. 더구나 리덜보스가 빌립보서 1장과 고린도후서 5 장이 영혼이 죽음 이후에 계속적으로 존재하게 된다고 가르치는가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 때문에 이런 의혹은 좀더 증폭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는 사후의 성도들의 상태가 그 존재가 계속되며 의식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교제하고 있는 상태라고 보면서도, 그것이 영혼이 계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는 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어떤 상태인지를 우리는 물을 수 있다. 물론 이는 인간의 몸과 영혼에 대한 전통적 이해와는 다른 좀더 단일론적인 이해를 그가 가지고 있는데서 오는 일반적인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는 이런 단일론에 가까운 입장을 지닌 분들 일반과의 논쟁의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정상적인 상태는 대개 영육단일체적 상태로 존재함을 강조해야 하지만, 이를 강조하는 이도 죽음에서 잠정적으로(temporarily) 이 통일성이 깨어질 수 있고 깨어 질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이와 같은 점들이 같이 논의되어서 우리들의 생각이 성경의 가르침에 좀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리덜보스의 가르침을 잘 받으면서도 그것을 좀더 성경적으로 접근시켜 나가는 작업을 효과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의 진전이 우리의 작업을 통해서 점점 더 이루어 질 수 있기를 원한다.
http://blog.daum.net/holylife2/4163571
=================================================================================
서울신학대학신학대학원
1991 학 년 도
바울 사상에 있어서의 사랑의 위치 연구
-그의 서신들에서 활용된 공동체 보존윤리로써의 개념의 고찰을 중심으로-
M. Div 과정 성서 신학 전공
임 명 빈
1991년
목 차
Ⅰ. 서 론----------------------------------------------------4
1.문제 제기-------------------------------------------------------4
2.연구의 범위와 방법----------------------------------------------6
Ⅱ. 바울 의 배경------------------------------------------------9
1.바울의 공동체 이상---------------------------------------------9
2.공동체의 새로운 상황------------------------------------------13
3.공동체의 새로운 요구------------------------------------------18
Ⅲ.바울 의 위치------------------------------------------------20
1.호교론적인 위치-----------------------------------------------21
2.기독교 해석의 중심--------------------------------------------24
3.종말론적인 삶의 윤리------------------------------------------28
Ⅳ. 와 유사 개념의 관계----------------------------------------30
1. 와 화목--------------------------------------------------31
2. 와 섬김(봉사)--------------------------------------------36
3. 와 겸손--------------------------------------------------40
4. 와 ---------------------------------------------44
Ⅴ. 의 근원----------------------------------------------------47
1.하나님의 사랑-------------------------------------------------47
2.예수의 사랑---------------------------------------------------51
3.요한의 사랑---------------------------------------------------55
Ⅵ. 결 론-----------------------------------------------------58
참 고 문 헌
Ⅰ. 서 론
1.문제 제기
바울의 신학을 형성하는데 몇가지 중요한 교리가 있다. 그것은 기독론,교회론,구원론,종말론 등이다. 그중에서 바울사상의 핵심은 교회론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의 교훈가운데 핵심은 교회다" 라고 말한 Ridderbos의 생각은바울신학에서 교회론이 차지하는 비중을 말해준다.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대한 모든 언급속에 교회에 대한 토론이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바울의 수많은 서신이 공동체를 세우고 보존하기 위해 쓰여졌다. 그는 그의 서신에서 공동체를 보존하는 윤리를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유추된 것으로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공동체를 지배하는 원리이며 공동체를 보존하는 윤리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된 사람들이 지체로써 모인 무리이다.(고전10:17)따라서 바울이 제시하는 신자의 윤리적 행위는 단독으로 선이나 악을 선택하는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라 지체속에서 이루어지는 윤리적 행위를 의미한다. 즉 신자들의 윤리적 행위는 항상 형제들을 위하여 그리고 형제들로 이루워진 공동체 전체의 덕을 이루기 위하여 선이 되는 것을 선택하고 그것을 행하는 데 있다.(고전8:9,10:33)"바울의 기독교 윤리란 공동체 생활 윤리"라고말말한 니이버(H.R.Niebuhr)의 말이나, "바울의 윤리가 공동체의 윤리라는 것은 이 윤리가 교회 공동체의 역사적 사회적 현실성을 전제한다는 것을 뜻한다." 라고 말한 Wendland의 말은 바울 윤리의 특징적 모습 중 하나가 공동체를 보존키 위한 윤리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라는 개념에 잘 나타나고 있다. 바울이 사용한 몸의 비유는 주님과 함께하는 교회의 통일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이 비유는 지체로써의 모든 신자들의 일체성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강조하고 있다.교회의 각기 다른 구성원들은 각자 상이하지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나타나고있다. 그리고 이 통일성은 공동체를 세우고 보존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교회의 통일성은 전적으로 십자가에서 유추된다.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있었기에 교회가 존재한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서 자신을 주신 목적은 구원받은 개개인의 고립이 아니라 그분께 속하고 서로 사랑하고 봉사하는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모든 신자는 하나로 통일된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는 십자가 공동체이다. 십자가가 공동체 가운데 제시하는 가장 큰 윤리적 성격은 사랑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된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를 보존하는 윤리는 사랑이다.사랑의 윤리는 기독교의 한 중심자리를 점유하고 있다. 사랑은 특별히 기독교 케리그마의 내용인 예수의 삶과 고난 그리고 죽음의 의미로써 흔히 사용되는 '복음'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용어이다. 바울이 복음을 "십자가의 말씀"(고전1:17-18)과 일치시킨 것은 위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이와 같은 사랑이 공동체 윤리로써 가지는 역동적인 위치와 중요성은 바울신학에서 매우 커다란 위치를 점유하고 있으며 그것을 교회라는 테두리안에서 증명해 가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본인은 지금까지 바울의 신학에서 교회론이 차지하는 중요성과 그의 신학 전체에 깔려 있는 사랑의 윤리에 대해 언급하였다. 문제는 그의 교회론과 사랑의 관계성이다. 본인은 바울의 교회론과 사랑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본다.사랑은 교회를 보존하는 윤리이다. 사랑이 없이는 공동체의 형성도 성장도 기대할 수 없다. 이 둘사이를 연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의 교회론과 사랑의 개념을 연결하는데 충분한 교량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공동체를 세우고 보존하기 위한 윤리로써 제시된다. 문제는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이것이 본 논고의 목적이며 과제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교훈과 생애가 어떻게 바울에게 전달되었으며 바울의 그의 사랑을 어떻게 공동체 보존 윤리로 체계화 하였는가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2. 연구의 범위와 방법
성경에서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재론할 필요조차 없다. 구약에서 특히,호세아는 위대한 사랑의 예언자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였다.(호6:6,14:4) 신약에서는 7957절이라는 전체 절수 중 291절(37%)이 사랑에 대한 절수이다. 그중 바울은 127절을 사용하여 신약의 사랑중 43.6%를 바울이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의 전반에 사랑의 신학이 깔려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사랑은 바울의 윤리사상 전역에 미치고 있고 그의 신학의 전체 구성 요소이다' 라고 말한 화이틀리나 "사랑은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의 핵심이다" 라고 말한 헌터의 주장은 본인의 생각과 일치한다.
본연구는 바울의 사랑의 개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기인했다고 전제하고 출발한다. 그리고 이 사랑은 공동체를 지탱하는 중요한 윤리라고 전제한다.그리고 이 공동체 보존 윤리로써의 사랑은 바울이 일관성있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해석하여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적용하는데서 기초되었다고 본다. 바울사상에 있어서 사랑의 개념은 그의 서신들속에 광범위하게 나타나 있으므로 본 연구는 그의 서신 전반을 Text로 하되 특히 고린도전서를 중심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바울서신의 진정성에 대해 진보주의 계열의 학자들은 몇가지 이유를 들어 에베소서,골로새서,데살로니가후서,디모데전후서,디도서의 바울 저작여부에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서신의 내용이 바울적이고,서신내용의 사건이 바울생존시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이며 무엇보다도 서두에서 저자가 바울자신임을 언급한 점을 볼 때 본 논문은 13개 서신 모두를 바울서신으로 간주하는 보수주의 계열의 입장에서 논문을 전개코자한다.
본 연구는 크게 다섯가지 부분으로 구성된다.첫째부분은 바울이 제시한 사랑의 배경에 대한 부분이다. 여기서는 본 연구에서 사랑과 중요한 관계성에 있는 바울의 공동체형성과 요구에 대해 언급한다. 또한 바울이 생각한 공동체의 이상이 무엇인지 제시코자한다. 그리고 고린도교회에서 발생한 문제와 그 문제의 배경에 자리한 공동체 파괴 요소등의 새로운 상황을 점검하고 바울이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사랑의 윤리를 제시했는가 살펴볼 것이다. 율법,플라톤주의,그노시스등의 문제에 직면한 고린도교회의 상황에서 십자가의 신학이 제시하는 사랑의 윤리가 필연적으로 요청되었음을 보게 될 것이다.
둘째부분은 바울신학에 있어서 사랑의 위치에 관한 연구이다. 사랑의 윤리가 지체들간의 일치와 화해 그리고 봉사와 연합이라는 성격에서 공동체를 보존하는 윤리이며, 모든 윤리를 해석하고 완전케하는 윤리의 완성이며, 십자가 신학이라는 기독교 해석의 중심적 위치에서 사랑의 위치를 연구할것이다.
셋째부분은 사랑과 유사한 개념을 Text에서 찾아 일치점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화목,섬김,겸손이라는 세가지 윤리를 사랑과의 관계에서 비교할 것이다.이 개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해석하는데 사랑이라는 개념과 유사개념으로 등장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온 것이 사랑의 개념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지체로써 공동체의 구성원간에 요구되어진다. 그런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과 하나님의 화목.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에게 전하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과 겸손이라는 개념 역시 공동체를 보존하는데 요구되는 중요한 원리이다. 따라서 사랑과 세가지의 개념은 매우 유사한 부분이 있으며 이것을 연구하는 것이 4장의 중요한 과제이다. 그리고 이 모든 개념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내포하고있으므로,사랑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관계성을 4장에서 연구토록 하겠다.
넷째부분은 바울의 사랑의 근거를 찾는 일이다. 하나님 사랑. 예수의 사상. 그리고 사도요한의 사랑에서 근거를 찾으려 한다. 하나님 사랑과 예수의 사랑은 바울에게 큰 영향을 미쳤지만 바울은 이것을 자신의 신학에서 새로이 정립하고 있다. 요한의 사랑은 바울의 사랑과 유사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있다. 따라서 세가지 종류의 사랑을 바울의 사랑이라는 바탕에서 조명해 보는것은 큰 의의가 있다.
본 연구의 방법은 해석학적 방법으로 바울의 서신들에서 그가 사용한 사랑의 개념을 종합 분석 해석하므로 그의 사랑의 이념을 정립해 보려는 것이다. 여기서 해석학적인 방법이란 성서 신학적인 주석 방법을 이야기한다.학자들의 주장보다는 text자체에 사용된 사랑의 의미와 용도를 공동체보존이라는 차원에서 재해석하고 종합하는데 많은 분량을 할애코자 한다. 따라서 본연구는 그의 서신 전반에 쓰인 의 개념을 종합적으로 주석하고자 시도하였다.
Ⅱ.바울 윤리에 있어서 의 배경.
1. 바울의 공동체 이상
지중해 연안의 바울이 지나간 지역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생겨나고 강화되어 배가되기 시작했다.이것은 그의 신중한 정책의 소산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전하여 사람들을 하나님과 친밀한 사이가 되게 할 뿐 아니라 그 말씀이 회심한 사람들의 삶속의 영향을 미쳐 서로간에 개인적인 친숙한 관계가 형성하도록 했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이란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평케 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한데 묶어주는 것이었다.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의 영역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롬15:7) 하나님과의 화평은 다른 사람과의 화평을 수반하는 것이며 이것은 복음전도의 특징을 나타내 주는 것이기도 하다(빌4:2.3) 성령안에서의 연합이란 다른 사람과의 연합을 포함한다. 왜냐면 원래 성령은 개인적인 것이 아닌 공통적인 체험이기 때문이다.(고후13:14,빌2:1,엡4:3) 복음이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인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따라서 바울은 그의 영향으로 생겨난 공동체가 사랑과 연합이 수반되는 공동체의 모습으로 발전되기를 원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복음을 받아 들인다는 것은 공동체안으로 들어감을 의미한다.다른 사람없이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럼 바울이 의도한 공동체는 무슨 공동체인가? 그는 공동체를 (몸)에 비유한다. 물론 바울은 교회를 여러가지의 비유를 통해 묘사하지만 몸으로써의 공동체는 그가 제시한 공동체의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해준다. 이 몸으로써의 비유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연합과 다양성'이다.
1)몸비유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제일 처음 '몸'으로 기술한 것은 고린도전서의 후반부에 나온다. 비록 전반부에 그리스도인 각자를 그리스도의 '지체들' 이라고 언급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고전6:15) 이 첫번의 두 언급은 성격상 매우 신비스러운 것으로 바울이 '주의 만찬'에 대하여 논할 때 나온다. 그 언급들은지체들간의 연합이 단지 서로의 유익을 위하여 은사를 사용함으로써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이루워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울은 몸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몸이니 이는 우리가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 말한다.(고전 10:17)즉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예함으로 하나가 될것을 의미한다. 이 구절은 지체들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공동체가 연합해야 함을 말하며, 그 전후 구절들은 공동체가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함을 말한다.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지체간에 연합된 공동체는 바울이 바라본 공동체의 이상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거하고 그 사랑때문에 타자를 사랑하는 것은 바울이 바라본 공동체를 지탱하는 윤리이다. 바울은 또한 '서로 기다림으로' 그들의 연합을 인식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강조한다. (고전 11:33)공동체에 많은 지체가 있다는 사실이 개인주의적인 태도를 주장한다거나 공동체안에 파당을 형성하는 일을 빚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단결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2)몸비유 : 후기
바울의 후기글에서는 그의 '몸'비유에 어떤 진전이 발견된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몸의 머리'로써 기술되고 있는 점이다. 이것은 공동체들이 직면하게 되는 상이한 환경에서 기인된다. 헬라,유대 및 동방에 수많은 근원으로부터 들어온 종교적인 관념들이 합동해서 그리스도인들의 구역을 위협하였던 것이다. 이런 이방의 관념은 다양한 우주의 능력들이 하나님을 접촉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자들이 그리스도만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이런 능력을 가미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위협을 다루며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로부터 창조되었고(골 1:16)그분은 죄,율법 및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셨을 뿐 아니라 어떤 우주의 세력까지도 제압하였다고 설명한다. (골 1:20) 바울은 또 예수는 단순히 다른 것처럼 신성을 빙자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충만이 거하시고' (골 1:19) '하나님의 형상이요 뛰어나신분' (골 1:15)이라고 말한다. 이 시점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교회인 '몸의 머리'시라고 기술함으로써 몸의 개념을 다시 소개하면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온 지체의 연합을 묘사한다. (골 1:19) 즉 그는 '온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난다'고 말한다.
에베소서에서도 유사한 개념이 나타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차원에서 뛰어나심이 다시 재확인되고 우주적인 능력들과 교회위에 뛰어나심이 특별히 언급된다. 그리고 후에 그리스도의 화목케 하는 사역의 결과로 교회안에 존재하게 되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새로운 연합을 언급한다. (엡 2:16, 3:6)후에 그는 은사에 대해 언급하면서 은사의 다양성이 성도들로 '봉사의 일을 하도록' 또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엡 4:12, 15:16)이것은 머리에까지 자라는 몸의 이미지를 사용하면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더욱 더 완전히 일치되고 지체간에 연합해야 할 것을 제시한 것이다.
바울이 공동체 이상으로 제시한 몸의 비유는 그리스도를 몸의 생명뿐 아니라 연합의 원천으로 보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다양성 속의 연합, 연합에 따르는 相互依存性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연합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수직적 사랑에 기인한 수평적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 공동체의 새로운 상황
바울이 공동체를 '몸'으로 말할때 그는 몸안에서의 불일치의 가능성에 대응하여 그 틀을 제시한 것이다. 언급한대로 교회안에서의 연합은 인식되어야 할 잠재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정해야만 하는 실제인데, 바울은 분열 가능성이 있거나 현존하는 분쟁에도 아랑곳없이 연합을 유지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고전 1:10, 롬 15:15, 빌 2:1, 골 3:12-14, 엡 4:3)고린도전서 1장의 내용으로 볼 때 고린도교회에는 분쟁이 발생헀고 이것은 공동체내에 편당으로 발전했다. 로마와 골로새에서도 편당이 생겨날 위험이 있었다(고전 11:18, 롬 16:17-20, 골 2:16:29)바울에게서 편당이라는 말은 교회들 사이의 분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공동체안에서의 분열을 뜻한다. 그는 말하기를 이 편당은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거나 서로 돌아보는 것이 부족한 결과로 생겨나며(고전 1:12, 11:21)이것은 육신에 속한 일이라고 진술한다.(갈 5:20)
전술한 바와 같이 바울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를 말하면서 지체간의 일치와 연합을 제시하게된 것은 공동체의 여려 문제에 직면하면서 부터이다. 고린도전서는 특별히 많은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바울은 새로운 문제를 다루는 부분이 시작될 때마다 다음과 같은 말에 의해 시작한다.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에게 분쟁이 있다는 것이니"(1:11) 너희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함을 들었으니..."(5:1), " 너희의 쓴말에 대하여는 .." (7:1) "처녀에 대하여는..."(7:25),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8:1), "너희가 교회에 모일때에 너희중에 분쟁이 있다함을 듣고..."(11:18)..., 이와같은 흥미있는 진술에서 보는바와 같이 이미 교회는 분쟁,음행,결혼,우상제물,헌금...등의 문제로 파괴되고 있었다.
무엇이 일치와 연합을 추구해야 할 공동체를 깊이 분열 가운데로 빠트렸는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간의 일체를 허물어 뜨린 가장 큰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그 중에서 가장 큰 요소들은 헬라주의, 율법주의 그리고 그노시스(Gnosis)등의 영향이었다. 이것은 공동체가운데 은밀히 침투된 새로운 상황들로서 바울은 이것들과 대적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공동체의 이상을 제시하였다.
1) 헬라주의-플라톤 주의
바울이 속해있던 유대교는 디아스포라의 유대교로써 헬라적인 관심들과 표현양식들의 영향이 전체적으로 침투되어 있었다. 바울은 헬라주의적 기반에서 장성해서 히브리적 사상을 이루어 기독교적인 인간으로 변화했다. 바울의 교훈에는 분명히 헬라주의적인 근원들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 불트만도 바울이 헬라문화와 접촉하였고 그 영향을 받았다고 서술한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의 개념에 있어서 헬라사상의 s개념을 거부한다. 니렌에 의하면 s신비가 플라톤 신비의 중심이다. 플라톤의 s개념은 소유욕적 사랑,인간의 하나님께 향하는길,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사랑이다. 플라톤의 s 사상은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기독교에 들어왔다. 그리고 기독교의 적인 사랑과 일치하지 못하였다. 바울이 당시 헬라철학의 주요 도시중의 하나인 다소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복음의 메세지에서 s 사용하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모든것을 배설물로 여겼기' 때문이다.(빌3:17-18) 즉 바울은 자기중심적인 헬라철학의 s를 버리고 이타적인 하나님 사랑인 를 강조한다. 그는 고린도전서 13:5에서 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라고 말하고 있다.이것은 그당시 교회에 좋지않은 영향을 끼쳤던 s적 개념을 거부한것이다.
이 는 소유욕적이 아니라 희생과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다. (빌2:6-8)이 아가페는 '십자가의 아가페'이다. 바울은 이런 아가페가 교회를 지배하는 원리가 되기를 원하였다.
2) 유대주의 - 율법
유대주의가 기독교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바울 역시도 히브리 종교의 영향하에서 기독교 신학을 정립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히브리 종교가 주는 기독교에 대한 율법의 영향을 끊임없이 거부한다. 바울은 생활의 지도를 위한 규범으로서의 율법을 배격하지 않지만 ( 3:31, 9:4, 7:7, 12:14) 율법에 대한 해석학적인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이다.그리스도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을 성취함으로써 율법의 시대를 끝내고 그리스도의 시대를 출발시켰다.바울은 성령의 은사인 (갈5:22)사랑의 윤리가 (고전13:1-13) 본질적으로 율법의 성취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이웃사랑의 계명을 부여한다. (갈5:14, 롬13:8-9) 그래서 바울은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갈5:14)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율법은 사랑의 요구이다. 이 율법의 실천이 "서로의 짐을 진다","사랑을 통해 서로 종이 된다"(갈5:13)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다. 이런 율법의 실천으로서의 는 고린도 교회의 파당과 제반문제를 해결하는 원리였다.
3) 영지주의 - 지혜
바울이 고린도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는 말(고전2:2)은 그가 고린도의 지적인 풍토를 염두에 두었음을 시사한다. 고린도인들이 최신의 지혜만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바울은 최신의 지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복음의 특징을 강조하였다. 이 고린도 교회의 지식있는 자들은 A.D 2 C 에 번창한 다양한 영지주의 학파의 영향을 받은자들이었다.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서신을 통해 적어도 고린도가 영지주의의 씨가 자라기 매우 좋은 토양임을 알수 있다. 그들의 지식은 계몽이 덜 되었다고 생각되는 동료 그리스도인을 무시하고 음식이나 성문제와 같은 문제에 있어 미숙한 태도를 취하는 자들을 현혹하는등 공동체의 파괴와 문제를 가져 왔다.
그러나 바울은 음식을 먹는것이 양심이 부자유한 그리스도인에게 해를 끼친다면 그러한 문제는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이웃을 고려한다. 그는 이웃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지식은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없으며, 또한 그리스도인의 친교도 강화될수 없다고 보았다. 사랑의 흐름은 마음속에서 넘쳐 이웃에게 전달된다."이 사랑은 모든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전13:7) 그 본질은"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는"(고전13:5)것이다.
라이첸스타인은 고린도전서 13장에 바울의 논쟁적 색채가 있다고 지적하고 가 Gnosis를 대립함을 말한다. 바울의 찬양의 주제는"아가페는 Gnosis가 부분적(고전13:9)으로 하던것을 폐하지만 아가페는 언제까지나 영원하다"(고전13:8)는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8:1,13:4)고 하였다
3. 공동체의 새로운 요구.
본인은 사랑의 배경이란 장에서 바울이 공동체의 이상으로 제시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각 지체의 다양성과 연합을 살펴보았다.그리고 공동체 가운데 발생한 새로운 상황들에 대해 살펴보았다.문제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공동체가 요구하는 원리는 무엇이고 바울이 이 원리를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가이다.바울은 편당이 일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교리에 대한 고백이나 포괄적인 윤리규정에 동의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동체의 지체들이 동일하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 용납되어진 것과 복음에 합당한 사랑과 연합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즉 그는 "십자가의 신학"이 제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사랑안에서의 일치를 새로운 상황에 부딪힌 공동체의 요구로써 제시하는 것이다. 그는 고린도의 분파적 상황에서 "오직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만 보라"(고전2:2)고 하였다.
바울은 사람들을 서로 나누는 차이점에서 출발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모두에게 공통적인것, 즉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괴리와 그분께 그들이 응답하는데 실패했다는 점에서 출발했다고 뱅크스는 말한다.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죽음과 부활을 알고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여 마지막 날에 도래할 하나님의 왕국을 고대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계속 묘사하고 있다. 이들은 공통된 구원을 함께 나눠 가진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서 지체가 서로 관계를 맺는데 어떤 차이점도 없다. 왜냐면 그들은 공통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수직적인 사랑을 선물로 값없이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안에서는 국적의 차별이 없다.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다 하나이다. 사회적 지위의 차별도 없다. 종이나 자유자나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모두가 하나이고(갈3:28)모두가 한 성령을 받아들인 자며(고전12:3) 결과적으로 한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이 원리는 성적인 차이에도 적용된다. 남자나 여자나 다 예수안에서 하나이다. 이런 차별의 철폐는 상호간의 관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 상호간의 관계를 지배하는 원리는 사랑, 존경,화평,겸손,봉사,덕을 세우는 일이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상호간의 관계를 상호대명사를 사용함으서 해석하고 있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면 "형제애를 가지고 서로 사랑하며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롬12:10) "서로 마음을 같이 하라"(롬12:6)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라"(롬12:10) "그리스도 예수의 본을 따라 서로 같은 마음을 품으라"(롬14:19)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신것처럼 여러분도 형제를 받아들이라"
(롬15:7)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롬16:16)등을 들수있다. 이런 상호간 관계성의 말은 결국 형제 사랑이라는 말로 집약할 수 있고 사랑이 공동체를 세우고 성장시켜 가는데 요구되어지는 원리인 것을 추론해 낼 수 있다.
바울의 모든 신학사상은 결국 다메섹도상의 사건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바울은 다메섹 사건을 기점으로 율법에서 복음으로 전환하게 되었고 그때 예수에 대한 믿음은 사랑으로 작용하는 믿음이 되었다. 이것을 불트만은 '사랑으로 작용되는 신앙' 이 고 표현하였고 바클레이는 '사랑은 믿음의 원동력'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사랑의 믿음은 후에 바울의 선교에 있어서 복음의 케리그마가 되었고 이 원리는 바울이 세운 공동체내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사랑의 요구, 이것은 바울당시 공동체에 가장 필요한 요구였다. '기독교는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마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사랑을 동반하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믿음은 사랑에서 출발한다'고한다Barth의 이야기는 바울의 이런 요구를 잘 반영한다. 그리스도인의 몸인 교회는 언제나 예수의 십자가에 달린 몸과 연결되어야 한다.
Ⅲ.바울 윤리에 있어서 의 위치
1.호교론적 위치
교회가 하나님에 의해 택하심을 받았고 그에게 속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사랑이다. 리델보스에 의하면 '사랑은 교회의 절대적 구성 요소이다' 그 스도가 머리가 되신 몸이 세움을 받는 것이 사랑안에서이다.(엡4:15,16) 그 사랑안에서 신자들은 함께 뿌리를 박고 서게 된다.(엡3:17)이때문에 사랑은 온전히 매는 띠라 불리운다. 참으로 사랑은 그 자체안에서 교회의 연합을 이루게 만든다.(골2:2) 결국 바울에게 있어서 사랑의 요청은 교회안에서 상호책임을 강하게 인식하게 하며 연합을 이루어 교회를 세우는데 효과를 가져왔고 교회를 성장하게 하였다. 바울이 사랑에 관해 기록할때 그는 거의 신자들의 상호적이고 서로 권면하는 사랑을 언급한다. 모든일 가운데 서로 덕을 세우고 유익하게 하는일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고전14:26,살5:11) 그러므로 바울의 아가페는 자신의 권위를 포기하고 공동체를 보존하고 세우는데 그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특히 공동체를 파괴하는 신비적 개인주의의 모든 악행을 책망한다. 그는 교회안에서 이러한 악행이 계속됨을 염려하면서(고후12:20) 소위 악행의 목록들 가운데 그것들에 대해 거듭 경고하고 있다(엡 :31) 그는 이러한 악행이 교회안에서 어떤 특별한 신비적 환상 가운데 나타남에 따라 그것이 개인주의와 자아 지향적인 형태를 띠고 있음을 지적한다. 고린도전서와 로마서에서 이에 대한 심각한 경고를 볼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개인적 경험에 대해 경고한다. 고린도전서8-10장과 로마서14장에서 강한자와 약한자에 대한 교훈 가운데서 바울은 자유와 사랑에 대한 독특한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그는 먹는것과 마시는 것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인정하면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실족하게 될수 있을때 사랑에 호소하면서 자유에 대한 개인주의적 남용을 책망한다. 즉 자유의 남용은 공동체의 연합을 파괴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사랑으로 섬기는 일들 가운데서(갈5:13) 행사되어져야한다. 즉 자유는 공동체 보존윤리인 사랑의 지배를 받아야한다.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안에 있는 각 가지 문제들 즉 분파문제(1:10-17), 도덕적 비행(5:1-13),소송(6:1-11),결혼(7:-
10),우상제물(8:1-13),예배(11:2-34),은사(12:1-14:10),교리(15:1-28)등의 제 문제를 사랑안에서 규합시키고있다.(13:1-13)
호교론적 위치에서의 바울의 는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에 확고하게 다루어져 있다. 여기를 바울은 사랑을 교회와 연합시켜 덕을 세우게 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그는 몸의 유기적 연합으로부터 그의 주장을 전개한다. 이 교훈은 신자들의 개인적 은사를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보다 큰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12:31)고 말한다. 바울은 모든 은사보다도 더 큰 은사로써 사랑에 대해 언급한다.(고전13장) 실상 은사는 몸의 지체로써 공동체에 존재하는 양식이다. 그러나 어떤 큰 은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으며 몸과 어떤 연합도 이룰수 없다. 사랑은 개인주의적, 분리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보존하며, 지체를 연합시키는 작업을 한다.
리델보스에 의하면 바울이 교회의 세움에서 가장 중요시 여긴것은 "교회가 그리스도를 받았고,배운것처럼(골2:6,엡4:20-21)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행하고 그분안에 거하는 일"이라 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 세움은 다른 국면을 동반하는데 이것이 상호간의 일치와 사랑이라 하였다. 이것은 지식의 증거일뿐 아니라 성숙의 증거이기도 하다. 바울은 전체를 지향치 않는 지식을 경고하며 동시에 다른이를 섬기지 않는 지식을 거절한다. 이런지식은 교만케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하였다.(고전8:1)
공동체 중심적인 바울의 윤리는 그가 사랑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방법에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낙스에 따르면 "바울에게 있어서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크리스챤 공동체안에서 이루어지며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그 밖에서는 아무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바울이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한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총체적인 존재를 나타낸다고 보는것과 같이, 믿는자의 사랑도 다른 사람을 위한 삶으로서의 믿음안에서 사는 총체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사랑이 주는 공동체생활의 상호 인격적 관계를 중시한다. 이것은 공동체를 세우고 보존하는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의 인격적 관계는 "이 모든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골3:14) "사랑안에서 스스로 세우라"(엡4:16) "마음을 같이 하어 사랑을 가지고"(빌2:2-3)"사랑 가운데 행하라"(고전16:14)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엡3:17) "사랑안에서 연합하여"(골2:2)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다.
사랑을 통한 교회의 지속적인 세움은 단지 그 개인속에서만 아니라,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완전한 통일성 속에서, 그리스도안에서 교회가 가지고 있는 충만함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는 교회가 한번 받았던바에 일치되게, 신앙과 지식이 증가되고 사랑과 상호교제속에서 완전하게 되는것을 의미한다. 따 서 사랑은 공동체가 전력해야 할 모든일들 중에서 왕좌를 차지하고 있다.
2.기독교 해석의 중심
의 개념은 기독교의 독창적인 것으로 개념을 떠나서는 기독교를
해석할 수가 없다. 니그렌은 " 는 기독교의 중심이고 근본동기" 라고
견제하고 " 는 기독교의 새로운 창조이고 기독교의 근원적 기초개념"이라고 하였다.바클레이는 를 '새로운 성질을 표현하는 새로운 단어였다.'고 하였다. 바클레이는 에 대해 '새로운 성질을 표현하는 새로운 단어 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졸리는 와 같이 중요한 기독교의 신약의 개념들이 신약이전의 작품속에서 발견될 수 있음을 주장하면서 가 그리스도인의 처음 만들어낸 단어라는 주장에 반박을 가한다. 이에 대해 풀레보도 졸리의 말에 동조하면서 '그러나 졸리가 본 사실을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역사에 등장한 그리스도 사건의 독특성을 표현하기 위해 자주 기존 단어들에 새로운 의미를 주입시킨것' 이라고 지적하였다. 분명히 신약의저자들은 당시 선교적 매체 용어로써 세속적 사랑 s와 구별되는 라는 단어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묘사하기 위해 새로운 용법으로 독특하게 사용하였다.니그렌에 의하면 는 바울에 의해서 기독교의 전문용어를 소개되었다. 그러므로 를 떠나서는 기독교가 존재할수없으며 는 기독교를 해석하는 중심이다.
기독교 사랑의 독창적 기초는 '사랑의 개념이며' 이것은 구약을 소급해 올라갔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중계명이 기독교 사랑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한 출발점이 된다. 실상 구약에서 사랑의 계명은 많은 규범과 율법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에 와서는 율법의 전적요구의 요약으로써 최초로 지배적인 위치를 갖게된 것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로마서 13장 10절에 말하고 있는것이다. 기독교는 구약의 사랑의 계명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이웃에 대한 개념에 있어서도 신약의 사랑은 훨씬 보편적이다. 구약은 하나님의 선민을 위한 사랑으로 제한적인 면에서 사용하지만 (신4:37,7:13,10:15,사 49:14,63:9, 램31:3, 습3:17,말 1:3) 기독교의 사랑은 무제한이다. 즉 보편적이고 포용적이다. 바울이 말한것 처럼 거기에는'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나 다 예수안에서 하나이다'(갈3:28).기독교에 와서 사랑이 갖는 보편성없이 기독교를 이해하고 해석하는것은 불가능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는 기독교 해석의 중심 사상이다.(비교 갈5:14.롬13:10)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하나님과 인간과의 교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윤리적 화합 즉 하나님의 비동기적 사랑에서 성취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사랑에 의해서만 성립이 가능한다. 바울의 메세지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인간 피차간의 사랑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차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형제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면 건전한 관계일 수 없다. 퍼니쉬에 의하면 이웃사랑은 역시 하나님 사랑의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사랑은 기독교의 원리적 중심사상이요 기독교 윤리생활의 원칙이다. 그래서 퍼니쉬는 "우리는 바울이 사랑을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의 한 모습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삶 전체의 내용과 양식으로 보고 있다고 결론은 내린다"고 하였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사랑은 모든 삶의 원리를 지배하는 계명의 성취요 은사의 원리요 기독교 해석의 중심이 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은 에 의해서 해석된다. 그에 의하면 믿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단일화되었고 바울은 이것을 선교를 위한 대전제로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 하였다.(롬16:17.갈5:22.빌3:9) 바울이 사용한 믿음은 구약에서 처럼 사람에게 속한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부터 온것이었다. 믿음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행위는 오직 예수의 십자가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랑, 였다. 그러므로 이 를 받아들이는것이 믿음이다. 다른 어떤 사건에서도 믿음은 일어날수 없고 다만 십자가의 구속 사건을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을 얻게 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편에 보여주신 절대적이고 유일한 의 행동이며 믿음에 이르게 하는 은혜의 사건이다.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믿음은 '사랑을 가능케하는 믿음'인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과 사랑은 기독교의 2대요소이다. 이들은 분리운동과 연합운동을 한다. 바울은 모티브를 그의 구원론의 출발점으로 한다.(엡2:8) 믿음은 구원에 이르게하는 동기이다. 그러나 사랑은 구원의 삶을 유지하게 한다.그는 사랑의 송가 결론부분에서 '그런즉 믿음,소망 사랑 이세가지는 항상 있을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고 말한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가지는 모두가 영원하지만 바울의 는 믿음과 소망을 초월한다. 왜그럴까? 핀들레이에 의하면' 믿음과 소망은 개인적인것에 관계되고 있는 반면 사랑은 전 기독교 사회를 포괄하고 있기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믿음과 소망의 근원이기 때문이다'라고말한다. 사상은 기독교신학의 기초이므로 영원한 것이다.
3.종말론적인 삶의 윤리
교회는 종말론적인 구원의 공동체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근거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고 이 기대에 의하여 그의 삶이 결정된 사람들의 공동체로 이해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것 자체로부터 그리고 그 자체를 위해 사는것이 아니라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주권으로 부터 그리고 그의 주권을 위해 살아야한다. 이것이 "십자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교회","타자를 위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종말론적인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거할 때 존재가능하다. 바울은"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라고 하였다. 새로움이라는 개념은 명백히 종말론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이 새로움이라는 개념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오실때 성취되는 단어이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하시고자 원하는 때를 기대하고 있었다(사43:19). 신약에서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새 이름과 (계2:17) 새 노래(계5:9)를 주실것이며, 만물을 새롭게 하실것이다(계21:5) 따라서 이 새로운 창조는 하나님 구원에 대한 계시의 영광스러운 종말이며 성경적인 완전한 구속사의 으뜸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안에 있을때 가능한다. 그리스도안에 있다는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 베푸신 사랑안에 거하는 일이다.
새로운 창조는 새로운 삶을 요구한다.그리스도안에서 새것이 되었다는 종말론적인 진술은 새로운 인간의 창조를 의미한다고 Ladd는 말하였다.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사람들은 더 이상 구시대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롬12:2) 하나님께서는 선한일을 위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룩하였다.(엡2:10) 새로운 창조안에서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차별이 없고 모두가 하나이다.(엡2:15) 바울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이제 옛사람을 벗어버린 새사람이 되었기때문에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럼 새로운 삶은 어떤 삶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삶이다. 바울은 참된 생활이 없는 곳은 아직 복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곳이며 "속이는 정욕을 따라 사는 썩어진 옛사람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옷입지"(엡4:22)않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다. 새로운 삶은 그리스도를 옷입는 삶,즉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사람이다. 그럼"그리스도를 옷입는 삶", 즉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삶은 어떤 삶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새로운 시대에서의 삶 즉 종말론적인 삶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새로운 삶의 형태를 자기부정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께서도 마태복음 16장24절에서 자기부정과 인내의 모범을 제시한다. 이와같이 제시된 참된 모방의 삶을 사는것이 바로 제자의 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가 되려면 서로 사랑하라고 말한다. 바울의 삶의 윤리인 사랑의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거룩하게 하시고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오신"(엡5:25-27,4:16) 예수의 목적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며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9,10) 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강령으로써의 에 기인되고 있다. 따라서 종말론적인 공동체에서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윤리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Ⅳ. 와 유사개념의 관계
바울의 사랑은 3중적 의미를 갖는다고 볼수있다. 첫째는 하나님 사랑, 둘째는 이웃사랑,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사랑이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이웃사랑을 요청한다. 물론 이웃의 개념에는 원수사랑의 개념까지도 포함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공동체간 지체의 실천적 행위에 중점을 두고 연구를 전개하고자 한다.바울은 하나님과의 종적관계에다 인간의 횡적관계를 긋고 있으며, 선행적인 하나님의 종적사랑이 인간과의 만나는 지점에 인간과 인간간의 사랑의 실천이 이루어지는 의미로써의 사랑을 언급하고 있다.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발생한다. 그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이 인간에게 전달될때 사람은 그리스도를 닮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결되어지는 윤리적 변화를수반한다. 따라서 리델보스가 새로운 순종의 영역의 핵심에서 사랑을 놓고 있는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이다. 이러한 사랑의 개념은 바울 교훈의 중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는 고린도전서 13:4-7과 로마서 12:9-21에서 사랑은 여러가지 형태로 전개되고 있으며 일련의 분리된 권면의 형태로써 동일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사랑과 동일한 권면의 형태로써 설명될 수 있는 개념은 화목,섬김,겸손, 용서의 개념이다. 사랑이 공동체내에서 지체간의 윤리적 성격을 규정하는 것처럼 위의 개념 역시 공동체를 보존하는 윤리적 성격은 규정한다. 화목,섬김,겸손은 예수 그리스도의 또다른 사랑의 표현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사랑과 제 개념과의 관계성을 살펴봄으로 바울의 사랑을 좀 더 포괄적으로 이해코자 한다.
1. 와 화목
신약에서 화해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 즉 적대와 소원으로부터의 회복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그의 십자가의 능력안에서 역사된 하나님의 행동이다. 그러므로 화해는 십자가를 통해 인간에게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동이다. 십자가를 통한 화해는 수직적으로 하나님과 화목을 가져오지만 수평적으로는 인간간의 화평을 요구한다. 테일러는 '화해는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경험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개인적인 신앙안에서의 응답에 의존한다. 그러나 정상적으로 그것은 교회에서의 교제안에서 오고 다른 사람과의 개인적 단계를 결정한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구속받은 신자는 공동체내에서 화해의 삶을 살아야 한다. 구속과 화해는 분리된 개념이 아니다. 둘다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하지만 구속은 화해의 삶을 요구한다. 이 화해는 고백으로써가 아니라 생활로써 드러난다. 그래서 오멘은 '우리의 생활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쫓아 화해하는것이 하나님이 명하신 의무와 규율에 대한 화해'라고 하였다. 이러한 오멘에 대하여 테일러는 '우리의 현재의 생활에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사랑의 법인 것을 알고 우리가 발견한 만물이 그것의 실현을 위하여 역사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께 화해되는 것이다.'고 한다. 파머 역시 '용서와 화해의 경험없이 그리스도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참으로 죄를 뉘우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하였다.
이와 같은 화해에 대한 교리는 공동체내에서 사랑에 근거한 화해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공동체 안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의 사랑에 의해 하나님과 화목되었기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써 당연히 요구되는 정신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화해는 화해의 사역이 계속 행해지고 있는 교회안에서의 교제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되는 사람은 점점 더 그의 삶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에 의해 결정된 인격적 질서위에 머무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사람을 대할때 그 사랑으로 봉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것을 알게 된다. 이것을 파머는 '십자가를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비젼에 의해 날마다 유지되는 신앙생활이다' 고 하였다. 따라서 화해는 공동체를 성장시키고 보존하는데 중요한 요소이다.
복음은 화해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그렇지면 바울의 신학은 어떠한가? 그의 화해론의 근거와 내용은 무엇이며 이것이 공동체를 보존하는 사랑의 윤리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것이 본장의 주제이다. Ladd가 말한 것처럼 화해정신은 바울사상에서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사상이 본질적이며 핵심적인 교리임에는 틀림이 없다.
바울에게 있어서 '화목'이라는 말은 ( 의 의미에서) 사회적-사교적 영역에서 유래한 말이고(고전 7:11) 대개 두 당사자 사이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을 말한다. 바울의 글에서 이 용어는 종종'원수됨','막힘'(롬5:10,엡2:14,골1:22)과 대조되어 쓰이고 있다. 이것은 또한 적극적 의미에서 '평화'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울은 화목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두고 있으며,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과 연관시킨다. 그리고 '화목케 하는 직책'이 우리에게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화목의 근거는 그리스도안에 - 그의 죽음에(롬5:10) '그의 십자가에'(엡2:16),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골1:22) - 있는 것이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필연적으로 인간과의 화목을 요청하신 것이다. 그 하나님은 화목케 하는 삶이 인간들의 삶에 실현될것을 요구하신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케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케 하시는 직책을 주셨으니"(고후5:18)라고 바울은 말한다. 즉 화목이라는 말은 원수로서 하나님의 진노아래 사는대신 하나님의 평강과 사랑에 둘러싸이고 그 지배를 받으며 사는 삶일뿐만 아니라 서로 사랑안에서 용납하며 사는 삶이다. 그러므로 사랑과 화해는 밀접한 관계속에 있으며 공동체안에 있는 지체들의 상호성을 동시에 지배하는 원리이다.
바울은 세계를 화목의 대상으로 보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인간과 이웃과의 화목,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목을 요구한다고 보았다.(엡2.3장) 바울은 특히 에베소서 2장 12-17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관계가 십자가의 사랑안에서 소멸되었다고 보았다. 바울은 그들이 이전에는 그리스도가 없던 자요 외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평화를 가져오셨던,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가까이 부르시고 또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하나로 만드시고 대립을 제거하시며 폐하여 버리신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함께 십자가에 관련시킴으로써 이제 그리스도의 화목의 상징적 행위를 사랑안에서 세계의 화목을 실현한 것으로 본것이다.
바울의 화목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은 영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교회의 일치를 가져오게하며, 성령의 강한 역사로 그리스도와 한몸을 이루게 한다. 전술한바와 같이 바울은 주님과 함께하는 교회의 통일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몸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이 비유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믿는 사람들의 일체성을 가장 중요한것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통일성이 가리키는 말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한몸이란 말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자신안에서 한 새로운 사람을 지으셨다. 즉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으로써 교회지체의 부분을 대표하고 있으며 교회를 자신속에서 한 새로운 통일체로 연합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화목은 죄로 인하여 파괴되었고 전 우주의 질서와 일치를 회복하는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화목이라는 매개체속에서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는 일치성을 회복하고 보존,성장되는 것이다.
바울이 화해를 십자가 또는 대속과 대등시한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이 세가지의 근원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는 초기 서신에서 그가 전하는 복음을 '십자가의 도'(고전1:18)라고 했다. 동시에 고린도후서 5:19절에서 그는 동일한 복음을 '화목케 하는 말씀'이라고 했다. 디모데전서에서 그가 부르심을 받은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대속물로 주신것을 증거하기 위함이라고 했다.(2:5.6) 그리고 고린도후서에서는 그의 소명을'화목케 하는 직책'(5:18)이라고 했다. 위의 말씀이 대등한 것이라면 '화목의 말씀'은 곧 '십자가의 도'이고그 본질은 곧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화목케하는 직책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예수를 대속양으로 우리가운데 보내신것과 그것 때문에 지체들이 서로 화목해야 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직책이고 이것이 곧 복음이다. 이러한 바울의 화목의 복음을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여 혼란가운데 있는 지체를 사랑으로 연결하여 공동체를 세우고 보존하게 하는데 충분했으리라 본다.
2. 와 섬김(봉사)
공동체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섬김을 통하여 각지체에게 전달된다.예수께서는 지체간에 서로 사랑할것을 손수 섬김의 본을 보임으로 제자들에게 교훈하셨다. 복음서 후반부의 처음에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13:1-11) 이는 제자들이 예수의 교훈에 참여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12절이하 계속되는 설교에서 예수님의 행위는 지체들 서로의 관계에서 그들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명령되고 있다.(13:14-15)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은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봉사하신데로 사랑안에서 섬기라는 위임이 주어지는 것이다. Bultmann도 이 공식을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도해석한다. 즉 공동체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에게 받은 것을 행할 의무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고별설교는 아버지에 대한 예수의 기도로써 마무리 되어지는데 그 기도는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되게 하는 사랑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다시 그들을 하나되게 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간구이다(요 17:26:26).섬김의 모범에서 시작된 고별설교가 사랑안에서의 일치로 요약되는 것이다. 예수는 떠나가지만 제자들이 상호 섬김을 통한 사랑속에 있는 한 예수는 그들안에 머물게 된다.(요17:26)따라서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의 계명은 제자들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안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제공하는 귀중한 교훈이 되고있다.
바울은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사람에게 종이 된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원칙적으로 그리스도의 자유를 말하면서(고전 10:23, 25-27) 동시에 사랑은 자유에 한계를 지어 놓는다고 하였다.(고전 8:9)즉 사랑은 본질상 언제든지 섬기게 되어 있으며 또한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 예속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골 3:1)이셨지만 동시에 여자에게 나셨고 율법 아래 나셨다.(갈 4:4) 그는 자유자이며 동시에 종이셨다(빌 2:6-7). 바울에 의하면 자유는 율법의 주장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한다.(롬 8:2-4,갈 4:2-5) 그러나 그순간 동시적으로 "사랑의 계명"으로 해석된 "사랑의 법"에 의하여 이웃에 대한 봉사로 속박되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그리스도의 종"(롬 1:1, 갈 1:10, 빌 1:1)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예속시켰다고 말한다.(고전 7:22)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의 섬김의 모범을 따라 타인에게 사랑으로 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섬김과 사랑은 일치한다. 바울의 '종이되다'( 갈5:13, 고전 9:19), '섬기다'( 롬 15:25),'자신을 내어주다'( s 갈 1:4, 2:20)는 말은 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는퍼니쉬의 주장은 사랑과 섬김의 관계성을 잘 설명한다. 또한 Ladd 는 "사랑은 자신의 것을 추구하지 않을 능력이다"라고 보았다. 이는 퍼니쉬와 Ladd 의 주장은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게하라"(고전 9:19),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갈 5:13)는 바울의 권고를 잘 설명하고 있다.
바울의 섬김으로써의 종의 개념은 사랑에 의해 주어진 종의 성격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않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것(갈 5:13)은 오히려 율법의 실천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율법은 사랑의 요구이다. 따라서 서로 종노릇하는 것은 자유의 포기가 아니라 바로 자유의 활동이다. 이것은 섬김을 통한 사랑이 서로 종노릇하는 가운데 공동체를 세우고 권위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전8:1, 롬 14:15)이것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않고 남의 유익을 구할것"을 요구한다.(고전 10:24, 13:5)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한 율법의 요구를 바울은 섬김의 를 통해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섬김의 문제는 바울이 그의 교회들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에서도 잘 표현된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자가 되려 함이라"(고후 1:24)고 말한다. 그의 신령한 부르심과 여러가지 은사, 그리고 교회를 세운 수고등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동체 위에 군림하는 자세로 행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가 그들의 주인이므로 이렇게 할것을 거절하고(고후 4:5)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섬김의 모범대로 그들 가운데 섬김의 정신으로 서 있는 것이다.
바울은 거리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을 때일지라도 그는 공동체 지체중에서 영으로 함께 하면서 동일하게 그들을 마음속에 그릴수 있었다.(고전 5:3, 골 2:5)이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바울은 끊임없이 (함께,공동-)이라는 접두어를 가진 복합어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그의 공동체들이 경험하고 있는 모든일에 그가 함께하고 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바울이 이런식으로자신을 그의 공동체들과 동일시하는 데에는 의미심장한 이유들이 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겸허히 낮아지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와 동일시 하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교회에 대한 섬김의 기반을 그리스도의 죽음에 나타난 사랑에 두고 자신을 그의 회심자들과 동일시 하는 것이다.
바울의 섬김의 정신은 카리스마의 질서에서도 나타난다. 바울에 의하면 카리스마는 단일한 것이 아니라 다양하며 특정인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와같이 다양한 카리스마의 세계에서도 질서가 요구되어진다. 각자 자기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일치와 질서에 기여토록 되었다. 그래서 "은사는 여려가지나 영은 한분뿐이고 각자에게 영의 계시가 공동이익을 위하여 주어진 것"(고전 12:4,7)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한스큉은 "넓은 의미의 카리스마는 개인에 대하여 공동체내의 특정한 봉사활동을 부과하고 동시에 이 봉사활동을 수행할 능력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부름이라"하였다. 그는 이어서 카리스마와 소명과 봉사가 서로 의존관계에 있으며 용어상 교차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고린도전서 12:4-6에서는 카리스마가 봉사와 바뀌어 있고 로마서 11:29와 고린도전서 7:7,17에서는 소명과 바뀌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봉사의 전제가 되는 것이 카리스마라는 것이다.
은사를 말하면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31에서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한다. 왜냐면 은사가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이 은사를 통제하는 원리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은사를 말할 때 그 은사는 교회안에서 지위와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요 남과 공동체를 섬기기 위한 은혜인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 성령의 첫 열매요 최고의 카리스마이다. 이 카리스마는 십자가와 봉사와 사랑의 길을 요구한다. 한 영안에서 각자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한 주님께 순종하면서 서로 사랑으로 봉사하는 것이다.
3. 와 겸손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에서 기초가 되는 요소는 '겸손'이다. (벧전5:3-6,고전15:10,눅17:10) 고통과 교회내의 적절한 교제(롬12:16,엡4:2,빌2:2,골3:12)가 겸손한 마음의 특징을 이룬다. 이런겸손은 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된 인간에게 자신의 몸을 비하시킨 사건에서 발견된다. 그래서 바울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 오히려 자기를 비어 ... 사람과 같이 되었고 ...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이라고 말한다.
빌립보서 2장6-8절은 바울에게 있어서 성육신의 개념이 motif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셔서 인간이 하나님과 사귈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신 이 성육신의 계시, 겸허의 계시가 하나님의 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겸손과 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이다. 그레함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완전한 표현"이라고 했다.
바울은 하나님의 를 깨달은 순간부터 그가 이미 소유한것에 를 새로운 요소로써 단순히 첨가하고 있다. 즉 를 s의 골격에 첨가하여 적용시켰다.(갈5:16) 바울은 두가지 사실을 그의 경험을 통해 명백히 하고 있다. 그것은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8:1)는 것이다. s가 그 교만을 제거할수 없다.여기서 요구되는것이 겸손이다. 교만이 치료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내려오시는 은혜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겸손만이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 사이를 다리놓아 줄수 있다.(엡2:14-16) 이 겸손의 표본은 하나님의 의 발로였고 만이 하나님과 격리된 인간을 회복시킬 수 있다. 그 서 바울은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13:4)라고 말한다.
바울은 표현방법의 최고적 방법으로 십자가를 소개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사랑을 알게 한다. 요한의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요3:16)라는 말을 의미한다. 즉 바울은 '사랑의 하나님'(고후13:11)과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살전4:19) 서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는 그리스도인에게 겸손이라는 삶의 양식을 요구한다. 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키가 말한 는 있음(is)이고 행위(does)이다'라는말은 겸손의 양태로 나타내는 사랑의 존재양식을 잘 표현하는 말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바울의 ' 의 특수한 현현 양식은 겸손이다'. 그리스도인의 겸허는 그리스도안에 있는자에게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긴다"(빌2:3) 이것은 "존경하므로 서로를 앞세우는일"(롬12:10)에 일치시키면서 묘사된다. 이런 겸손은 정신적인 상태로, 하나님에 대한 관계도 아닌 공동체내에서 지체의 지체에 대한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바울의 겸손은 그들의 요구를 경청하고 그들에 거슬려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지 않는 것이다. 즉, "각각 자기일만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는"(빌2:4)것이다. 그러므로 겸손은 의 양식이다. "부요한 자로써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된"(고후8:9) 하나님의 자기겸허는 하나님 사랑의 최고표현이며 공동체를 지배하는 의 또다른 표현이다.
실상 겸손이란 개념은 특별히 기독교적 내용을 지니며(빌2:3,골3:12) 이 용어는 신약성경에서 우선적 의미로 산발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구약에서도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바울에 의해 그리스도의 자아 겸비적 사랑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면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김"(빌2:3),"높은데 마음을 두지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함"(롬12:16) "존경하기는 서로 먼저 함"으로 설명되어지고 있다.이러한 겸손은 그리스도가 자기를 내어주심에 근거한 교회안에서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상호간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과 관련되어 언급되었다. 겸손의 개념과 반대되는 용어는 '높은 마음'(롬11:20),'기만','이기심'(빌2:3), '허식'등이다. 이런모든것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요소들이며 겸손은 이에 대조되는 말로써 공동체를 보존하고 세우는 용어인 것이다.
겸손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은 온유이다. 이러한 서로간의 사랑에 관한 명확성 역시 그리스도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후10:1) 이것은 공동체내에서 범죄한 자들에 대한 자만심을 가지지않고 그들을 바로잡으며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 표현된다.(갈6:1) 이런 온유한 심령은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이런 겸손은 '사랑의 송가'(고전13장)에서 '사랑은 자랑치 아니하고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는'것으로 표현된다.
위에서 살핀것처럼 겸손은 대체로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이것은 사랑의 표현방법이다. 그리고 바울에게 있어서 겸손은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상호관계의 관점과 그리스도의 몸으로 공동체 형성의 관점에서 언급되고 있다.
4. 와
는 바울신학의 핵심을 내포하고 있는 표현으로 '성령안에서' 또는 '사랑안에서' 라는 말과 상보되는 개념이다. "그리스도안에서 "라는 말은 그리스도와의 의식적인 교제를 가르친다. 그리스도안에는 권면이 있으며 (빌2:1) 겸손한 봉사가 있다.(빌2:5)하나님의 평강은 그리스도안에 있는자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준다.(빌4:7)또한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터 끊을 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다.(롬8:39) 니그렌에 의하면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만난다. 그는 실제 인간의 삶 속에서 인간을 만난다. 구속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삶의 조건으로부터 자유케하는 방법을 구성해 줌으로 그와의 교제를 붙러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사랑안에서 인간조건속으로 들어오셔서 낮추심으로 인간과 교제를 형성하였다는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안에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다.이는 그리스도 사랑안에서 하나님 자신의 사랑을 보이시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따라서 와 는 일치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라는 개념을 살필때 먼저 바울의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개념을 주목해야한다. 새로운 피조물의 변화는 신자가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있을 때 일어나게된다(고후5:17). 이 문구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재적인 근본적 변화를 지칭하는 말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안에서 인간예수의 죽음, 그 이상의것을 보고있다. 그는 악한영의 지배를 받는 옛 피조물의 죽음뿐만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적인 새로운 피조물의 출현을 본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행하신 여러가지 실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셨고, (엡1:4) 미리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셨다.(엡1:7) 구속하심(롬3:24)과 거룩하게 하심(고전1:2)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졌다 이 세상과의 화해 역시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졌다(고후 5:19).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가깝게 될 수있다. (엡2:12) 죄사함은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진다.(엡 :32) 이 모든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를 새롭게 하였다. 그러나 역시 이근거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된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것 같이 사랑 가운데서 행하는 삶이다."(엡5: 2 ) 이 말씀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삶이 연결되고 있는 것을 본다. 그것은 와 가 바울에게서 서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는 "그리스도안에"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이 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반영이다.
거쓰리는 "그리스도 안에"는 실제적으로 교회안에 있는 것과 동일한것 이라고 보았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공동체의 형성에 보편적인 기초를 준것으로 보았고 각 신자들은 공동체와 동일시 되어진다.(고전12:13)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는 모든 지체가 한몸이 되며(롬12:5) 모든믿는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이다(갈3:28).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할것없이 모두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된다.(엡3:6) 이와 같은 구절가운데는 공통적인 강조점이 드러나고 있다. 신자들은 개개인으로 뿐만아니라 모두가 같은 백성으로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은 사랑안에 함께 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지체들에게 주어지는 원리이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과 교회가 동일시될때, 교회는 보편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 삶을 나누는 신자들의 모임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삶의 원리와 새로운 도덕사상과 새로운 사상체계를 갖추어야한다. 새로운 삶의 원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인간과 연합했듯이 그리스도안에서 사랑으로 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그래서 바울은"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이다"(롬12:5),"여러분 모두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입니다"(갈3:28)라고 연합을 말한다. 따라서 사랑이 공동체를 보존하고 세우는 원리라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개념역시 공동체를 연합시키고 일치시키는 바울의 중요한 개념인것이다.
와 의 관계성은 바울서신에 이것들이 쓰여진 실례를 비교해 볼때 양자의 일치성이 현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실례를 몇가지 찿아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그안에서 행하라"(골2:6)과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전16:14)의 관계성이다. 그리고 "그안에서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라"(골2:7)와 "사랑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엡3:17)의 관계성을 들 수 있다. 또한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이 되어"(롬12:5)와 "사랑안에서 연합하며"(골2:2)의 관계성을 볼 수 있고"예수그리스도로 옷입고"(롬13:14,갈3:27)과 "하나님의.... 사랑하신자처럼....옷입고"(골3:12)를 들수있다. 이처럼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했고 그리스도안에 거하는것이 사랑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삶은 그리스도와 공동체의 신비한 연합을 가져오며 이것을 또한 지체들을 한몸으로 묶어주는 원리가 되는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공동체를 보존하고 연합하는 원리로써 사랑은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삶이라 할 수 있다.
Ⅴ.Paul 의 근거
1.하나님 사랑
바울의 사랑의 근거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추적하고자 할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바울의 개념을 살펴보아야 한다.왜냐면 사랑이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의 모든 서신서에서 인사말과 맺는말에 '은혜'를 포함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은혜는 헬라어의 인사어에서 확장된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긍휼의 개념이 첨가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바울신학에 있어서 두드러진 특성이다.
은혜의 교리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이다. 더우기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을 가지고 계실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행동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안에서 요약될수 있다. 바울에게는 은혜라는 말이 직접적으로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암시적으로건(하나님 은혜의 집행자로써) 압도적으로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을 내어 주셨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것이 성숙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은혜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는 은혜를 나타내주는 구약의 두단어'헨'( )과 '헤세드'( ) 에서 그리고 바울이 사용한 '카리스'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소서"(출33:13) "내가 너를 무궁한 사랑으로 사랑하노라 그러므로 인자함으로 내가 너를 인도하였다"(렘31:3) 여기서 구약의'헨'은 은총으로,'헤세도'는 인자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신약에서는 '무리에게 자비하심으로 그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엡2:7)이나 '죄가 더한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롬5:20)라고 표현되고 있다. 이 모두는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표현하는 말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는 은혜의 교리가 바울에게 있어서 매우 두드러진다. 특히 로마서와 고린도서에서 두드러진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다.'(롬5:15) '죄가 더한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롬5:20)고 말하고 있다. 그는 또 은혜가 율법보다 우윌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롬6:14),로마서9-11장에서 이스라엘의 위치에 대해서 논하면서 남은자는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는자'(롬11:5)라고 말한다.이런 은혜의 교리는 고린도서에서도 나오는데, 고린도전서 1장 4절에서는 그리스도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구변과 지식을 풍성케 하였다고 말한다. 바울은 그 자신의 경험이 그의 사역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때문임을 깊이 깨닫고 있다.(고전15:10) 그는 또한 그의 행위의 근거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세상의 지식을 비교하고 있다.(고후1:12) 그는 그의 사역을 통해 더 많은 사람에게 은혜가 확장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으로 여긴다.(고후4:15) 그는 은혜에 대한 완벽한 설명을 위하여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은혜의 행위임을 보여주고 있다.(고후8:9) 인간의 필요를 위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강하게 증거되고 있다.(고후9:14,12:9) 이와 같이 그는 은혜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표현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바울서신의 나머지 부분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댸한 동일한 신뢰의 형태가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신자를 부르시는 것은 은혜를 통해서이다.(갈1:6,15) 이것은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엡1:6-7) 다른 사람들과도 서로 나눌수 있는 것이다.(빌1:7) 골로새서에서 은혜는 '진리의 말씀'과 동일한 것이며,(골1:5) 그는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들'(갈5:4)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 이스라엘인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시고 불러 모은 백성이라고 본다.(롬1:6.8:26) 하나님의 백성과 또 이 백성에 속하는 것의 전체적 구성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택하심의 특성에 의거한다. 그 므로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참으로 만인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과 부름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교회의 출발점은 개인이 아닌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와 사랑으로 교회는 새로운 백성이 된다. 하나님은 이 새로운 백성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시는데 이것이 바로 '사랑의 계명'이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에 의거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이 기독교인의 생활과 그 공동체에 미치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접하여 얻게된 총체적 자세이다"
바울의 사상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성령을 무시하고 바울의 기독교를 설명하려 하는것은 전기 없는 현대문명을 설명하려는 것이라고 헌터는 말하였다. 바울은 기독교인의 삶 전체를 성령의 영역, 즉 성령의 역사하심 아래 두고 있다. 성령은 종말이 실제적으로 이 세대속에 도래해 들어 오는 것을 상징한다. 또한 성령이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작용하시는 현존이라고 하는것이 바울의 견해이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마음에 부은바 되니라".(롬5:5) "형제들아 내가 ...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롬15:30)라는 진술에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 사랑은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라 역사안에서 활동하고 능력으로 현존하는 것이다.
2.예수의 사랑
바울의 사상은 다메섹 도상의 그리스도와의 만남사건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점이 형성되었다고 본다. 다메섹 도상의 만남은 바울의 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기초하게 하였고 그 후 바울의 일관성있는 중심은 그리스도 사건의 십자가 해석에 의해 구성되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사랑의 원동력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거룩하게 하시고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오신'(엡5:25-26,4:16) 예수의 목적과 율법의 완성으로써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말씀에 기인한다. 메이첸은 기독교의 기원에 관한 증거는 복음서의 예수와 바울의 종교라고 전제하면서 "바울의 예수에 댸한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며, 사랑은 인격과 인격 사이에 존재한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가 말한 사실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하신 일에 기초를 두고 있다.'그는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셨다'(갈2:20)는 말씀에 바울종교의 기초가 있다" 고보았다.
물론 신학자들 사이에는 바울과 예수의 관계성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도 있다. 쿰멜은 '신학자 바울이 단순한 예수의 종교를 부패시켰다' 고보았다. 또한 그는 역사적 비평방법을 사용하여 유대주의의 전체적 구성안에 있는 예수와 예수로부터 결별된 바울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와의 역사적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었고(롬8:11,6:9.고전15:3-8,12:9), 그는"다른 예수를 전파하지 않았고"(고후11:4),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였고"(고전1:23)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인간예수와 부활하신 주를 동일시 하였고 그의 멧세지가 역사적 예수의 활동과 메세지를 인용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바울의 가르침은 새로운 시작으로써 자신의 사상에 기인한 것보다는 그리스도의 사도(롬11:13,고전9:2,롬1:1,고후1:1,엡1:1,딤전1:1,딤후1:1)와 종(롬1:1,빌1:1,딛1:1)으로써 예수의 가르침의 계속이었다.
예수와 바울의 관계성 문제는 개념에서도 찾을수 있다. 니그렌은 말하기를 " 이념은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중심점이었으며(마22:37-40) 그것은 기독교의 근본동기이다. 또한 그것은 새로운 윤리이고 새 계명이다.(요13:34,요일2:7,요이5) 만약 예수의 복음과 바울의 종교가 다르다면 동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바울에게서 예수의 동기가 살아남아 있다.(롬13:9-10) 그러므로 바울은 새로운 종교의 수립자가 아니라 단순히 그리스도의 사도요 종이다. 바울의 기독교에 동기가 있다면 바울의 종교는 본질적으로 예수 종교와의 계속이다" 라 했다.
이 문제는 예수의 "두가지 계명"(막12:28-34,마22:34-40,눅10:25-37)과 바울의 이웃사랑의 연관성에서 설명될수 있다. 예수께 던진 서기관의 질문은 '첫째'에 관한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첫째 계명과 둘째계명을 동시에말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는 "이에서"( 막12:31)이란 말을 사용함으로 연속적으로 첫째와 둘째를 말하여 각 계명의 독특한 동일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둘째계명은 두번째고 중요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서기관의 질문에 관하여 최고계명을 연달아 말한것의 둘째인 것이다. 마 의 본문에서는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마22:40)라고 말하고 있다.바울은 이웃사랑에 대해 성령의 은사인 사랑의 윤리가 본질적으로 율법의 성취라고 보았다. 그는 이웃사랑의 계명을 부여하며(갈5:14,롬13:8-9) "온 율법은 네 이웃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어졌다"(갈5:14)고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과 일치성을 갖는다.
예수는 이웃을 사랑하는것을 원수 사랑에까지 확대시킨다.즉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 하는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자를 위해 기도하라 ....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마5:43-46, 눅6:27.32.35)라고 말한다. 이러한 교훈은 바울서신에서도 발견된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12:14)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말고 모든 사람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7-21) 또한 예수는 핍박 당하는자를 기꺼이 '문안'할것을 말한다.(마5:47) 그리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할것"(마5:44)을 말한다. 이에 바울은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라고 말한다. 바울은 예수의 사랑의 계명에 기초하여 예수와의 일치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예수와 바울의 motif 에 차이가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을 강조하는 것에 비하여 바울은 예수의 사랑을 강조한다. 예수가 천국의 복음을 강조하는것에 비하여 바울은 십자가 종교의 중심을 강조한다. 그래서 브레데는 "예수가 유대 경건의 가장 고상한 유형으로부터 떨어져 선것보다 바울은 그 예수에서 더 멀리 떨어져 섰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바울이 변질화시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재해석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브레데의 말처럼 바울은 최초로 "구속의 종교로써 기독교를 수립한 기독교의 제2의 창시자"인 것이다.
3.요한의 사랑
요한의 윤리에는 하나님 본성의 핵심이 되고 있는 사랑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사랑이라는 자원은 예수를 통해 공동체에 구현된다.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를 하나님의 속성이며(요일4:7)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세상을 사랑하신 사랑이며(요3:16) 이에 대한 사람의 응답으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보았다. 는 자기희생과 자기부정으로써 예수에게서 실현 완성되었고,이에 대한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에 응답하는 유일한 길이 이웃에 대한 희생적 사랑으로 표현된다고 보았다.
바울의 사랑의 근거를 추적하면서 예수의 열두제자중 하나이며 사랑의 사도로 대변되는 요한의 사랑과 바울의 사랑과의 관련성과 차이점을 점검해 보는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먼저 바울은 사랑을"그리스도의 법"(갈6:2,고전9:1),"율법의 완성"(롬13:10)으로 보았고 요한은 사랑을 새 계명(요13:34)으로 보았다는데서 일치점을 갖는다. 바울은 온 율법은 네 이웃사랑하기를 네몸과 같이 하라 하신 말씀에 이루어졌다(갈5:14)고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고전9:1)는 말을 사용하고있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선포한다. 요한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법은 "주께받은 계명" 곧'하나님을 사랑하는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하는 것'(요일4:21)이다. 요한은 이것을'새계명'이라 했고 그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 사랑이거나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간적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요13:34)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과도 상통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의 객관적인 사귐인 동시에 항구적인 실제로서 사랑의 지식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뿌리요 기초(엡3:18-19)로 보았다.
물론 불트만은 바울과 요한과의 관계는 초대 기독교신학의 직선적 발전도식에 의해 이루어질수 없는 전혀 다른 방향들을 달리고 있다.고 전제하면서 바울과 요한 사이에는 종교사적 분위기나 기독교의 공동용어 즉 영원한 생명(요3:15.36,롬5:21),기쁨(요17:13,롬14:17),평화(요14:17),보내다(요3:17,갈4:4)등의 사용에 있어서는 어느정도 일치점이 있으나 특수한 바울적 용어 즉 육 - 영, 몸,혼,이성,자랑,염려,양심,적 등이나 구원사적인 바울의 용어 즉 하나님의 의, 율법과 은혜 등이나 바울의 구원사적인 관점들이 요한에게는 전혀 없다고 보았다. "요한은 바울학파에 속하지 않고 바울의 영향을 받지도 않고 독창적 인물이고 신학적 분위기에 있어서 다른 분위기에 서 있다 "고 보았다.
그러나 십자가와 하나님의 의 인증은 바울과 요한이 동일하다. 바울의 는 본질적으로 십자가의 이고 (빌2:8), 요한의 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가장 심오한 신비를 나타내고 있는 십자가이다. 요한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만 를 배운다(요일3:16).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아들을 보내셨다"(요일4:6)는 사실에 존재한다. 그리고 예수가"세상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한다"(요 13:1)는 사실에 전제하고 있다. 바울에게와 같이 요한에게서도 그리스도 사랑의 사역의 주체는 행위하시는 하나님이다.
바울과 요한에게 있어서 하나님 사상과 사상은 거의 동일시된다. 즉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롬5:18),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4:8)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는 인간의 사랑을 부른다. 요한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다" (요일4:19)고 한다. 요한의 이 두 사랑의 방향은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인간에 대하여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에 대한 사랑이 서로 다른 의미를 포함하고 있을찌라도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함께 속한다.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자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요일4::20-21). 형제사랑은 바울에게 있어서 역시 하나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에 직접관련된다. (요일 5:1, 3:16, 4:11)
그러나 바울과 요한의 사랑에 있어서 차이점은 형제사랑과 이웃 사랑의 개념에서 드러난다. 요한은 이웃사랑과 형제사랑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즉 는 사랑의 교제인데 요한에게는 사랑의 교제에 제한이 있다. 그가 말하는 형제는 하나님안에서 연합한 제자된 형제이다. 이것은 밖에 있는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요13:35) 세상을 포괄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 한정된다.(요14:21-24,17:6-9,21:7) 그러나 바울은 사랑의 한정성이 아니라 보편성을 말한다. 그가 말하는 이웃사랑에는 원수사랑도 포함된다. 이것은 바울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정직하게 계승한것을 의미한다. 예수가 "핍박하는자를 위해 기도하라"(마5:43-46)고 원수 사랑을 제시한것처럼 바울도 "너희를 핍박하는자를 축복하고......"(롬12:14) "후욕을 당한후 축복하고....."라고 확대되어진 이웃사랑의 보편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울과 요한의 이념은 일치점을 내포하면서도 성격상 차이점이 있다. 요한의 사랑은 가 본질상 하나님과 동일함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이념을 약화시킨다. 니그렌에 의하면 요한의 이념은 기독교의 사랑의 이념에 변천을 초래하였다. 곧 기독교 사랑의 이념이 오직 모니브로써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s 와 로써 결정되게 되었다. 고보았다. 이것은 에로스와 아가페의 이원론적 혼합으로 기독교의 의 절대성을 파괴할 위험성을 가져오게 된다.따라서 하퍼와 같은 사람은 '예수가 명백히 가르친, 친구와 아울러 원수도 사랑하라는 사랑의 보편적 영역이 요한에 의해 심각하게 제한되었으며 그러므로 기독교의 사랑이 그리스도인 사회의 사랑으로 좁혀졌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바울과 요한의 사랑을 구별짖는 가장 큰 차이점이다.
Ⅴ. 결 론
바울의 서신은 일찌기'십자가의 신학''은총의신학'으로 파악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바울이 전파한 복음속에서 결정적인 요소가 되고 있음은 의심할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신바 되었으며(롬5:6-8),그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의롭게 만들고 화해시키는 일을 한다(롬5:9) 이와 같은 신적인 사랑은 윤리적인 명령형이 되어 이웃사랑을 요구하게 된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의 사랑은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행위인 동시에 우리중에 작용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교회는 우리중에 작용하는 사랑의 힘이 이웃사랑으로 실천되는 장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교회가 사랑안에서 보존되고 성장하기를 지속적으로 권면한다. 이는 바울서신의 대부분이 지역에 흩어져있는 교회에게 보낸 편지들이라는 점에서 증명된다.서신의 내용들은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와 그문제의 해결방안, 공동체의 성장방안 그리고 공동체내에서 각지체들의 윤리적 내용들을 담고 있다. 그는 그가 세운 교회이든 아니든지 간에 공동체가 파괴 되고 지체간에 분쟁이 있는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한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계속서신을 보내면서 각 지체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연합하여 공동체를 보존하고 성장시킬것을 권면하고 있다.
바울이 생각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하나되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때문에 수평적인 사랑의 연합을 한 공동체이다.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의 영역으로 수용해야 한다. 사랑은 다양한 구성원들을 연합과 일치로 이끈다. 다양한 구성원들이 복음을 받아 들이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은 이미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을 요청한다는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공동체를 지배하는 원리이며, 공동체를 보존하고 성장시키는 윤리가 된다.
바울은 이사랑의 윤리를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유추한다고 말하고있다. 그에 의하면 사랑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희생케하므로 전혀 무가치한 인간에게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다.(롬5:8이하) 이사랑에 의해 우리는 의롭게되었고 하나님과 화해한자로써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십자가 공동체이다. 그가 십자가에서 자신을 주신목적은 개인적인 차원 이상의 것을 포함하는 사회적인 영역을 의미하고 있다. 구원받은 개개인은 그분께 속하여 서로 사랑하고 봉사하고 섬기는 영역에서 하나를 이루워야한다.
바울이 공동체의 이상으로써 다양성속의 연합, 연합에 따르는 상호의존성,그리고 연합과 의존의 근거가 사랑이라는것을 이미 언급하였다. 이런 사랑은 그리스도의 수직적 사랑이 그 사랑을 입을 사람들에게 있어 수평적 사랑으로 확대될 때 참의미를 부여받는다. 즉 선행적인 하나님의 종적인 사랑이 인간과 만나는 지점에서 이웃사랑으로 실천이 이루어질때 사랑의 참가치가 부여된다.
수평적 이웃사랑은 공동체를 보존하는 중요한 윤리이다. 사랑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요소들인 분쟁, 편랑. 이기심. 육신의일들이 있는곳에 화목,섬김, 겸손, 용서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위의 네 개념은 공동체내에서 지체간의 윤리적 성격을 규정할뿐만아니라, 공동체를 보존하는 윤리적 요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 대한 사랑의 구체적 표현으로 하나님과의 화목,겸손, 섬김, 용서를 보여주셨다. 따라서 바울은 구속받은 그리스도인이 공동체내에서 그러한 삶을 살것을 요청한다. 십자가상에서 보여주신 의 겸허가 바로 공동체를 지배하는 윤리가 될것을 강조한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위의 사랑은 다른 덕목중의 하나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접하게 된 인간의 총체적 삶의 자세이다. 이것은 크리스챤의 삶속에서 날마다 재현되어야 할 삶의 모습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순종이며 그리스도의 본을 좇아가는 것이다. 이 사랑은 모든 것을 포용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영원하다. 이웃과의 개인적인 관계뿐만아니라, 공동체 전체로 퍼져 지체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원리가 되고 공동체를 보존, 발전시키는 윤리가 된다.
참 고 문 헌
Barclay,W. Flesh and Spirit: An Examination of Galatians 5:19-23.
Grand Rapids, Michigan: Baker Book House, 1983.
New Testament Words. London: S.C.M.press,1964
Barth,K Church Dogmatics, Vol.1. trans G.W.Bromiley and T,F,Torrence
Edinburgh:T.and.Clark, 1956.
Barth,W. Niebuhr,H.r.Christian Ethecs. New York:Rorald Press, 1955
Beach,E.Faith,Hope and Love. Philadel phia: The Westerminster press,
1955.
Bultmann,R.Theology of New Testament, Vol.1. trans Kendrick Grobel.Lo-
ndon: S.C.M,Press.1978.
Dodd,C.H. Gospel and Law: The Relations of Faith and Ethnics in Early
Christianity. New York: Columbia University,1951.
Farmer,H.H.The World and God. Ldndon: Nisobet and Co, Ltd,1953.
Findlay,G.G. St Paul's First Epistles to the Corinthians :The Exposit-
or's Greek Testament. Grand Rapids, Michigan:Wm.B.Eerdmams
Publishing Comany.1956.
Furnish,V.P. The Love Command in the New testament: London:S.C.M.Press
1983.
Furnish, V.P.Theology and Ethics in Paul. Nashiville:Abingdon Press,
1968
Graham,A. The Love of God. New York:A division of Doubleday and Compa-
ny,1983.
Harper, M. The Love Affair. Grand Rapids, Michigan: Wm.B.Eerdmans
Publishing press, 1982
Hunter, A.M.Interperting Paul Gospel. London: S.C. M.Press,1954.
Kee,H.C. Understanding the New Testament. New Jersey: Perntice Hall,
1983.
Knox,J. The Ethics of Jesus in the Teaching of the Church. New York
and Nashiville: Abingdon Press, 1961.
Kummel,W.G.The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Accdrding to the Its
Major Witness:Jesus-Paul-John,trans,SohnE,Steely.Nashiville:
Abingdon Press,1978.
Machen,J.g. The Origin of Paul's Religion. Grand Rapids, Michigan:Wm.B
Eerdmans Pubishing Company, 1947.
Metz,D.S. The First Epistle of Paul to the Corinthians -Beacon Bible
Commentary Vol.Ⅶed A.F.Harper. Missouri:Beacon Hill press,1968
Nygren,A. Agape and Eros, Trans Philips Watson.London:S,P.C.K, 1954
Schoeps,H.J.The Foriveness and The Reconciliation.New York: St.Martins
Press,1956.
Whiteley, D.E.H.The Theology of St.Paul. Oxford:Basil Blackwell,1964.
거쓰리,D.[신약신학]정원택,김근수 공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1988.
김균진. [기독교조직신학Ⅱ] 서울: 연세댄학교출판부,1989.
래드,G.E.[신약신학]신성종,이한수공역.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1989.
몰트만,J.[성령의 능력안에 있는 교회]박봉랑외 4인역, 서울:한국신학연구
소,1990.
박봉랑. [교의학방법론Ⅱ]서울:대한기독교 출판사,1990
뱅크스. [바울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이상] 장동수역. 서울: 여수론, 1991.
부루스,F.F.[바울신학] 정원태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1987.
불트만,R. [학문과 신존] 논문집. 제2권, 허혁역.서울: 성광문화사,1981.
스톳트,J. [그리스도의 십자가] 황영철,정옥배역. 서울: I.V.P.1989.
이상훈. [바울신학] 서울: 서울신학대학출판부,1979.
전경연. [고린도서신의 신학논제] 서울: 대한기독교 출판사,1988.
큉,H. [교회란 무엇인가] 이홍근역. 왜관:분도출판사,1991.
해리슨,E.F.[베이커 신학사전] 신성종역. 서울: 엠마오, 1986.
http://kr.blog.yahoo.com/bawtryhall/2798
------------------------------------------------------------------------------------
http://blog.naver.com/simson77/80025712569 | |
안토니 후크마의 신학의 특성과 그 기여를 중심으로 이 승 구 박 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제 1 부: 개요 "개혁 신학"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작업의 범위가 상당히 달라지게 될 것이다. "개혁 신학"이란 말에 대해서 크게 3가지 다른 용례가 있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가장 포괄적인 용례로 종교 개혁적 신학 전체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16세기에 일어난 종교 개혁적 전통을 유지하는 모든 신학이 이에 포함될 것이다. 천주교 신학(Roman Catholic theology)과 동방 정교회의 신학(Greek Orthodox theology)와 대조되는 개혁파 신학, 루터파 신학, 성공회의 저교회파 신학, 심지어는 재침례파의 과격한 종교 개혁의 신학까지가 이에 포함될 것이다. 두 번째 용례는 종교 개혁적 신학들 가운데서 루터파나 과격한 종교 개혁파 신학과 대조되는 칼빈의 신학적 전통을 유지하거나 그 전통으로부터 나온 신학 모두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전통을 따져 볼 때에 (즉, 어떤 신학이 과연 어떤 전통에서 나온 것인가를 생각할 때에) 개혁 신학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용례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칼 바르트나 에밀 부룬너의 신학은 이렇게 전통을 따질 때에는 천주교 신학도, 루터파 신학도 아니고 개혁파 신학의 전통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몰트만의 신학도 전통적 개혁파의 입장에 가깝게 서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톰 토랜스의 신학, 오토 웨버의 신학 등도 개혁 신학인 것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개혁 신학"이라는 말을 이런 용례에 따라서 사용하는 것은 많은 오해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프레드 끌로스터가 잘 말하고 있듯이, 그들 나름의 독특성을 지닌 새로운 형태의 신학을 발전시킨 것이다. 우리가 이 용어를 사용하는 의미는 세 번째 용례에 따르는 것인데, 이는 전통적 개혁파의 전통에 서 있으면서 그 전통적 특성, 특히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점, 제한 속죄를 받아들이는 점, 구원 사역에서의 하나님의 '독력주의'(monergism)를 받아들이는 점등을 포기하지 않고 그 특성을 계속 유지하려는 신학만을 개혁신학으로 부르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그 후반을 살고 있는 20세기 전체에 걸쳐서 이런 의미의 개혁 신학이 어떤 발전과 기여를 하였는지를 일일이 다 검토한다는 것은 아주 커다란 작업이 될 것이다. 나에게 맡겨진 북미 개혁신학의 동향을 살피는 일만 해도 어떻게 그 작업을 다 할 수 있으려는지 알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챨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 제임스 헨리 똔웰(James Henry Thornwell, 1812-1862), 알키발드 알렉산더 핫지(A. A. Hodge, 1823-1886), 댑니(Robert Lewis Dabney, 1820-1898), 윌리엄 쉐드(William G. T. Shedd, 1820-1894) 등의 19세기 미국 개혁신학자들과 월필드(B. B. Warfield, 1851-1921),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1962-1949),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 1873-1957) 등과 같은 20세기 초반에 크게 활동했던 미국 개혁 신학의 거성들이 이루어 놓은 작업에 근거해서 20세기 후반, 즉 1950년대 이후 북미에서의 개혁 신학의 발전과 기여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만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 2 부 : 안토니 후크마의 신학 작업의 특색과 기여 기존의 개혁신학의 틀 안에서 개혁신학을 미국서 잘 발전시킨 20세기 후반의 신학자들로는 역시 웨스트민스터의 조직신학 교수였던 죤 머레이와 칼빈 신학교의 조직 신학 교수였던 안토니 후크마, 그리고 고오든-콘웰 신학교의 역사 신학과 조직 신학 교수인 데이비드 웰즈를 들 수 있다. 머레이는 학생들이 성경 이외의 체계에 붙잡히는 것이 두려워 독립적인 조직 신학 책을 쓰지 않았고, 후크마는 그의 칼빈 신학교 조직 신학 교수 시절 말년에 종말론에 대한『성경과 미래』를, 그리고 그가 은퇴한 후에야 인간론, 그리고 구원론에 해당하는 조직 신학 책을 써내었다. 머레이가 체계적인 조직 신학 책을 써주었거나, 후크마가 더 오래 살아서 조직 신학의 나머지 부분을 다 완성할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된다. 필자가 보기에 후크마는 비교적 머레이의 작업을 잘 반영하면서 작업하였다고 판단되므로 이하에서는 주로 후크마의 작업을 중심으로 논의하도록 하겠다. 물론 안토니 후크마의 신학에는 이전의 개혁 신학자들, 특히 칼빈과 계속해서 그의 정신적인 스승이요 그의 언약 사상을 박사 학위 주제로 삼았던 헤르만 바빙크나 그의 동료요 전임자인 벌코프의 깊은 영향력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신학을 진술하는 형태나 그의 새로운 주장들에는 이전의 신학자들과 비교할 때에 상대적으로 다음과 같은 독특성을 드러내면서 작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 비교적 성경에 대한 체계적 주해를 신학에 좀더 많이 반영하고, 주해에 좀더 철저한 작업을 한 것; (2) 신학적 용어 사용에 있어서도 좀더 성경의 용례를 중시한 점; (3) 신약학자들이 잘 밝혀 낸 하나님 나라 사상에 좀더 충실한 형태의 조직신학을 제시한 것; (4)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통적 개혁신학의 장점에 충실한 신학을 현대의 상황에서 창의적으로 제시한 점. 이와 같은 점에서 그의 조직신학적 작업은 20세기 개혁신학의 진정한 발전과 진보를 나타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근자에 상당히 개혁파적 입장에 서서 조직신학 책을 저술한 그루뎀의 작업과 비교할 때, 후크마의 작업은 발전과 진보적인 측면을 나타내고 있다고 확언할 수 있는 데 비해서, 그루뎀의 작업은 좀더 현대에 작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점과 좀더 평이한 진술을 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신학에 좀더 친근히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점 외에는 과연 현격한 진보의 이정표를 제시했다고 할 수 있으려는지 의문을 표하게 하는 것이다. 특히 성령의 사역 문제 등에 대한 입장 표명 등과 관련하여 몇몇 문제들에 대해서는 과연 철저히 개혁파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는가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이점들을 차례로 검토해 보기로 하자. 1. 주해 과정을 드러내는 신학의 제시 이전의 신학자들도 주해에 근거한 신학을 하였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특히 보스의 조직신학이 그러하리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벌코프의 신학도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후크마는 이런 전통을 받아들이되 이를 더욱 분명히 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일반적으로 이전 신학자들이 주해에 근거해 내린 결론을 중심으로 조직 신학을 제시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비해서, 후크마는 실제 신학을 진술할 때에 주석을 쓸 때와 같이 그 구절과 관련된 모든 점을 다 철저하게(comprehensively) 할 수는 없지만 이 주해의 과정을 필요한 만큼 드러내면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3부작 전체에서 이점이 잘 드러난다. 특히, 종말론과 구원론을 다루는 데서 이 점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제 그의 이런 주해 작업을 드러내면서 신학을 제시하는 몇몇 예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아담에게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해석과 관련해서 후크마는 아담이 불순종한 날 죽지 않은 것에 대한 두 가지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견해는 죽음의 심판에 즉각 시행되지 않고 연기된 것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 때문이라고 보는 바빙크, 카이퍼, 알더스 등의 견해이다. 그리고 두 번째 견해는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을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표현하는 히브리어 관용어임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게할더스 보스의 견해이다. 보스는 이 관용구의 다른 예로 왕상 2:37과 출 10:28을 든다. 이 두 절 모두에서 "~하는 날에는"이라는 말은 "~하면 반드시"란 뜻이라는 것이다. 후크마는 이 둘 모두가 가능한 해석이라고 보면서도 두 번째 견해가 더 개연성이 높은 듯하다고 한다(The Future, p. 81; God's Image, p. 138). 이처럼 후크마는 성경 주해에 좀더 유의함으로서 좀더 나은 입장을 제시할 수 있었다. (2) 성경 주해를 드러내며 작업한 좀더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중간상태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검토하면서 논의하는 빌립보서 1: 21-23에 대한 주해이다. 이 구절이 죽음에 대한 바울의 기대보다는 부활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에 대한 결정적인 반론으로 23절에 나오는 "떠나서"라는 단어가 '아나루사이'( )로 죽음의 순간적 경험을 묘사하는 부정과거 부정사라는 것을 지적한다(The Future, p. 104). 또한 와 같이 두 동사가 한 관사와 연관되어 있는 것은 이 두 가지 부정사들이 나타내는 동작들이 한 가지 일의 두 측면을 나타내고 있다는 문법학자들의 견해에 근거해서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바는 그가 떠나서 죽는 순간이 곧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는 순간이라고 후크마는 논의한다(The Future, p. 104). 후크마는 이처럼 구체적인 주해의 과정을 자세히 드러내어 논의를 분명히 하고 있다. (3) 성경의 가르침을 고려할 때 인간을 영혼과 몸의 통일체로 보는 견해가 옳다는 것을 잘 드러낸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종말론을 쓸 때에는 베르까우어에 의존하며 그가 전인으로서의 인간을 잘 강조하고 있다고 지적하던 그가(The Future, p. 95) 후에 인간론을 쓰면서 이 점을 아주 온전히 잘 드러내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영육 통일체(psychosomatic unity)라고 부르기를 즐겨 한다. 그는 자신의 이런 용법이 죤 머레이에게서 온 것임을 즐거이 밝히고, 브로밀리와 스톱도 같은 견해를 나타낸다고 밝히고 있다(God's Image, p. 217, n. 59). 그는 또한 이렇게 전인으로서의 인간을 이해하는 것의 실천적 의의도 잘 고찰하며 밝혀 내고 있다(God's Image, pp. 222-26). 이런 입장에 따라서 후크마는 바빙크와 리쳐드 마우에게 동의하면서 결국 하나님의 형상이 총체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전체로서의 인류 안에서라는 것을 강조한다(God's Image, pp. 99-101). 이는 후에 구원론에서 카이퍼, 월터스 데이비드 모베르그, 리쳐드 마우 등에게 동의하면서 성화의 사회성을 강조하는 점(Saved by Grace, pp. 228-31)과도 잘 어울리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4) 머레이의 논의에 의존하면서 주해 작업을 잘하여 우리의 이해를 크게 진작 시킨 예로 에베소서 4:22-24에 대한 후크마의 설명을 지적할 수 있다. 그는 이 문장 속의 세 가지 부정사(즉, "벗어버리다"는 뜻의 "아포떼스따이"[ ], "새롭게 되다"는 뜻의 '아나네우스따이'[ ], 그리고 "입다"는 뜻의 "엔두사스따이"[ ]를) 많은 영역 본이나 한글 개역과 같이 명령형으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머레이가 제시하는 것처럼 결과를 나타내는 부정사 혹은 설명형의 부정사로 보는 것이 더 옳다고 한다. 그래서 후크마는 이 세 부정사 모두가 주동사인 21절의 "너희가 가르침을 받았다"( )에 의존한다고 한다(God's Image, p. 26f.). 따라서 이 구절은 NIV와 같이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새롭게 되어 ...... 새사람을 입었다고 가르침을 받았다"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구원론에서는 이 문제를 좀더 길게 논의하면서 왜 머레이와 같은 해석을 하는 것이 더 옳은지를 잘 밝혀 주고 있다(Saved by Grace, pp. 209-13). 이는 결국 신자 안에 새사람과 옛 사람이 현존하고 있어서 싸움하고 있다는 다른 개혁 신학자들의 견해에 반하며, 이를 주해를 통해 교정하는 것이다. 후크마는 이렇게 주해에 근거해 작업하므로써 선배 신학자들의 견해를 잘 비판하고 수정하며 보다 성경적인 견해에로 이끌어 간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의 논의는 아주 조심스럽고 다양한 논의의 가능성을 다 제시하면서 부드럽게 논의해 나가고 있다.후크마는 이렇게 주해에 근거해 작업하므로써 선배 신학자들의 견해를 잘 비판하고 수정하며 보다 성경적인 견해에로 이끌어 간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의 논의는 아주 조심스럽고 다양한 논의의 가능성을 다 제시하면서 부드럽게 논의해 나가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적그리스도의 미래 실존성에 대한 베르까우어의 견해에 대한 비판이다. 베르까우어는 이렇게 말했었다: "신약에 묘사된 적그리스도가 역사의 종국에 있을 한 개인(a person)이라는 것을 신약에 근거해서 확실하게 주장할 이유가 없다." 이에 대해서 후크마는 유연하고도 간접적으로 이런 베르까우어의 입장보다는 최종적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막는 자"가 있다고 하는 바울의 말에 근거해서 최종적 적그리스도적 인물이 있음을 주장하는 헤르만 리델보스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역사의 과정 가운데 적그리스도적인 세력의 계속적인 출현과 함께 최종적 적그리스적 인물이 있을 것임을 확언한다(The Future, pp. 158-62, esp. p. p. 159, n. 31). 또한 전통적 개혁신학의 이중 형상관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 개념을 제거해 보려는 베르까우어의 견해를 잘 소개하고 이를 주해에 근거해서 잘 비판하는 것도 후크마의 큰 공헌의 하나이다. 베르까우어는 타락한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임을 지칭한다고 우리가 흔히 인용하는 창세기 9:6과 야고보서 3:9에 대한 스킬더, 슈만, 슈링크 등의 해석에 의존하면서 이는 인간의 현재 상태에 관해서 말하는 구절들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베르까우워는 이 구절들에 대한 자세한 주석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고 후크마는 비판하면서(God's Image, p. 61), 이중 형상론을 부정하는 그의 입장에 대해 깊은 우려를 잘 표현하고 있다(God's Image, p. 64). 이에 속하는 또 하나의 예는 불경건한 자들이 중간 상태 동안에도 고통을 받고 있음을 분명히 확언하는 베드로 후서 2:9에 대한 해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주께서는 경건한 자를 시험에서 건지시며, 불의한 자를 계속되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칼빈이 "형벌 아래 두어"란 헬라어 분사 "칼라조메누스"( )가 현재 시제이지만 그것은 최후의 심판 때에 집행될 미래 형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후크마는 이를 잘 논의하면서 "만일 이것이 베드로가 뜻하는 바였더라면, 왜 베드로가 현재 시제를 사용했겠는가?"고 묻는 것이다(The Future, p. 102, n. 36). 주해에 유의해서 전통적이거나 일반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어떤 입장을 잘 정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예로 사람들을 "자연인"( ), "신령한 사람"( ), 그리고 "육에 속한 사람"( , carnal Christian)으로 나누는 것에 대한 후크마의 논의를 들 수 있다. 스코필드 관주 성경과 C.C.C.의 "성령 충만한 삶의 비결"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진 이런 견해에 대해서, 후크마는 아주 강하게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인정하고 있지 않은 형태의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므로 명백히 배척되어야 한다고 말한다(Saved by Grace, p. 21). 물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여러 수준의 영적 성숙도가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계속해서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야 함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가운데서 하나의 분리된 범주로서의 "세속적인 그리스도인" 개념은 오도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해롭기도 하다고 후크마는 선언한다(Saved by Grace, p. 21). 그는 고린도 전서 3:1-3에 대한 자세한 주해를 통해서 여기서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할 수 없다는 말이 고린도 교인들이 영적인 자들의 부류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고, 마치 세속적인 자들에게 하듯이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미숙함을 지적하면서 세속성에서 벗어나 그들이 신령한 자됨에 상응하게 행동하라는 뜻임을 밝혀 주고 있다(pp. 23-26). 이와 연관된 또 하나의 문제로 1737년 루터파 신학자 야곱 카르포프(Jacob Carpov)가 최초로 그런 용어를 써서 표현한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에 대한 이해 문제를 들 수 있다. 이에 대해서 후크마는 (1) 아주 철저한 구원의 서정을 말하는 죤 머레이의 입장을 (2) 구원의 서정을 비판하면서 구원의 서정이란 말보다는 구원의 길(way of salvation)이라는 말을 선호하는 베르까우어의 견해와 함께 극단적인 입장으로 부르면서 비판하고, (3) 그가 중간적인 입장이라고 부른 벌코프의 견해 보다 좀더 구원의 순서를 "연속적인 경험으로보다는 동시에 시작되어 지속되는 다양한 국면들을 포함하는 하나의 단일한 경험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Saved by Grace, pp. 11-19, at p. 16). 그러나 그는 이런 입장이 이미 벌코프와 바빙크에 의해서 시사된 견해임을 분명히 한다. 예를 들자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개개인 죄인들에게 적용시키는 사역이 통일된 하나의 과정(a unitary process)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벌코프의 말을 인용하고, 또 구원에 수반되는 모든 축복들이 동시에 부여된다고 말하는 바빙크의 말도 인용하는 것이다. 바빙크는 이를 그의 교의학 제 3 판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고 한다: "이 축복들은 구별될 수는 있으되, 분리될 수는 없다. 믿음, 소망, 사랑처럼 그것들은 깨어질 수 없는 세 가지 줄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후크마는 바빙크와 벌코프의 견해를 좀더 성경적으로 발전시키는 입장에서 구원의 서정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 좀더 성경적 용례에 충실하게 된 예 2-1. 주해의 과정에 좀더 깊이 주의하면서 작업함으로써 후크마가 용어 사용에 있어서도 좀더 성경적인 용례에 접근해 간 대표적인 경우가 '스올'( , She'ol)이란 용어가 사용된 용례와 관련된 그의 논의이다. 이전에 벌코프는 이 용어가 일반적으로 3가지 용례를 가진다고 했었다. 그것은 (1) 죽음의 상태, (2) 무덤, (3) 그리고 지옥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후크마는 "스올이 죽음의 상태나 무덤을 의미한다는 것은 잘 성립될 수 있으나 지옥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은 의심스럽?quot;고 잘 지적하고(The Future, p. 96), 왜 자신이 그렇게 말하는지를 벌코프가 인용하고 있는 성구들에 대한 주해를 통해 밝히고 있는 것이다. 벌코프가 스올이 지옥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인용하는 각 구절에 대한 후크마의 논의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 "악[한 자들]이 스올로 들어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러하리라"는 시편 9 : 17에 대해서 후크마는 여기서 시편 기자가 이 사악한 열방들( , gyim)의 모든 사람들이 당할 영원한 형벌을 예언하고 있다고 믿기 어렵다고 하면서, 이 때 스올을 이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인 죽은 자들의 영역으로 번역하면 이 구절의 의미가 아주 잘 살아난다고 한다. 즉, 시편 기자는 불경건한 민족들이 비록 지금은 자신들의 힘을 자랑하고 있어도 죽음으로 깨끗이 제거되어 버리리라고 말한다는 것이다(The Future, pp. 96f.). (2) "사망이 그들 위에 임하여 그들을 산채로 스올에 내려가게 할지어다"는 시편 55:15에 대해서도 병행법에 비추어 볼 때 이는 갑작스럽게 죽을 것을 의미하지, 반드시 영원한 형벌을 함의하는 것이 아님을 잘 드러내고 있다(The Future, p. 97). (3) "지혜로운 자의 길은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으므로[즉, 위로 향하여 생명에 이르므로] 그 아래 있는 음부를 떠나게 되느니라"는 잠언 15:24도 음부라는 말이 표현하는 죽음과 생명의 대조를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해석한다(The Future, p. 97). 이로부터 후크마는 "스올이 영원한 형벌의 장소를 지칭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수립되지 않았다"고 결론 짖는다(The Future, p. 97). 그러나 악한 자들의 사후 운명과 경건한 자들의 사후 운명이 같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구약에서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음을, 즉 경건한 자들에 대한 부활의 약속이 있음을 시편 49:14-15("양떼 같이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죽음이 저희의 목자가 될 것이라,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부터 구속하시리니, 이는 그가 나를 영접하시리로다"), 시편 16 : 10("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시편 17 : 15("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그리고 시편 73 : 24("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등의 말씀으로 확증해 보려고 한다(The Future, pp. 97-99). 이처럼 후크마는 구약에서 음부( ,She'ol)라는 용어가 과연 구체적인 문맥 가운데서 어떤 용례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주해적으로 잘 살피는 과정에서 이전의 쉐드나 벌코프의 스올이 지옥이란 뜻으로 사용된 경우도 있다는 견해를 반박하며 수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구체적인 신학함이 어떻게 좀더 바르고 깊이 있는 주해에 근거해야 하는가를 잘 나타내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주해는 모든 신학함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논의의 과정 중에서 아직도 옛 견해에 대한 못내 아쉬움 같은 것도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자면, 구약에서 이미 부활에 대한 확신이 나타나고 있음을 밝히는 과정에서 후크마는 "경건한 자들이 이 영역에서 구출되는 반면에 경건치 못한 자들이 스올에 계속 남아 있다는 의미에서" "스올이 악인들을 위한 형벌의 장소를 가리키고 있다는 최소한의 힌트를 보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The Future, p. 97, n. 29). 그러나 경건한 자들의 부활은 결국 죽음의 영역인 스올로부터의 부활이라고 본다면 여기사 형벌의 장소를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신약에서의 하데스( , Hades)의 용법을 검토하면서 후크마는 신약에서도 구약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사망 시에 멸절되지 않고 하데스( , Hades)나 아니면 때때로 낙원(Paradise) 또는 아브라함의 품(Abraham's bosom)으로 불린 지복의 장소에서 계속해서 존재한다고 가르친다"고 잘 지적하고 있다(The Future, p. 99). 또한 신약에서도 하데스( , Hades)는 일반적으로 죽은 자들의 영역을 지칭한다고 잘 지적한다(The Future, p. 99). 그런데 이 '하데스'( )란 단어가 단지 죽은 자들의 영역을 지칭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중간 상태 속에서의 고통의 장소를 가리키고 있는 경우로서 사용되고 있는 예로 후크마는 누가복음 16: 19-31의 비유를 언급한다(p. 100). 이에 대한 후크마의 논의도 조심스러워 그는 최종 상태에서의 형벌의 장소를 가리키는 신약의 용어인 '게헨나'( , Gehenna), 즉 지옥과 이 부자가 고통 당하고 있는 곳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는 아주 분명하게 "하데스와 연관된 고통과 아브라함의 품과 연관되어 있는 위안은 이 비유에서 묘사되고 있듯이, 중간상태에 국한되어 일어난다는 것이다"고 말하는 것이다(p. 101). 그러나 그는 아쉽게도 그가 중간 상태에서의 악한 자들의 고통의 장소인 '하데스'( , Hades)와 영원한 형벌의 장소인 지옥( , Gehenna)의 관계를 정확히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가 드러내는 입장으로 볼 때 그는 아마도 최후의 심판 이후에 지옥 형벌이 주어지기까지 악한 자들이 형벌을 당하고 있는 곳이 '하데스'라고 보는 요아킴 예레미아스나 윌리엄 헨드릭슨의 견해에와 같은 견해를 가진 듯하다. 그러나 그 자신의 명확한 진술은 주어져 있지 않음에 유의해야 한다. 이런 견해들은 신약에서의 헤데스의 일반적인 용례와 비추어서 좀 낯선 한 구절, 그것도 해석에 있어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한 구절에 근거해 제시한 논의라는 문제점이 있다. 이런 점에 유의하면서 누가복음 16:19-31의 비유의 근본적 의도에 유의하면서 여기서 중간상태에 대한 가르침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좀더 명확한 신약의 구절들에서 그리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하는 래드 등의 견해와 깊이 있게 비교하며 논의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들에 대한 보다 깊은 논의와 고찰이 후크마 이후에 개혁신학을 하는 이들에게 부과된 신학적 과제의 하나라고 여겨진다. (이와 연관해서 중간 상태가 없다고 부인하는 반 데 류[G. Der Leeuw, 1890-1950]나 알트하우스[Paul Althaus, 1888-1966]에 반해서 고전적 개혁신학자들과 함께 후크마가 성경적 중간 상태 개념을 잘 설명해 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한가지 언급을 해야 할 일 이 있다. 그것은 주의해서 잘 살펴보지 않으면 우리말 역본이 줄 수 있는 한 가지 오해에 대한 것이다. 먼저 우리말 역본에 있는 다음 같은 말을 보라. 이러한 주장에 대해 답변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몇 가지 사실을 인정한다. 성경은 중간 상태에 관해 거의 침묵을 지키고 있으며, 성경이 중간 상태에 관해 기꺼이 말하고 있는 것도 육체의 부활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인간의 미래에 관한 종말론적 메시지에 연관되어 부차적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우리는 또한 중간 상태에 관해 인간학적 묘사나 이론적 설명을 신약성경이 거의 제공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개혁주의 종말론』, pp. 131f.). 이 부분만 문맥에 대한 고려 없이 읽으면 마치 후크마가 중간 상태를 부인하는 듯한 인상을 받을 수 있다. 필자 자신도 우리말 역본에 이 부분을 읽을 때 그런 인상을 받아서 영어 원본을 읽을 때와 다르다는 느낌이 들어서 상세히 비교하는 작업을 했던 것이다. 물론 이 부분 뒤에 후크마의 다음과 같은 말을 잘 번역해서 후크마가 중간 상태를 부인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말 역본도 잘 전달한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 인간은 파멸되는 것이 아니며, 신자는 결코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충분히 주장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성경의 증거들이 있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할 것이다"(『개혁주의 종말론』, p. 132). 그러나 사실 위에서 인용한 부분도 그 원문은 우리가 오해하도록 진술되어 있지는 않다. 이것을 보여 주기 위해 그 부분을 다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이런 반론들에 대한 대답에서 성경은 중간상태에 대해서 아주 적게 말하고 있다는 것과 성경이 중간 상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몸에 부활이라는 사람의 미래의 관한 성경의 주된 종말론적 메시지를 말하면서 부가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 인정되어야 한다.(p. 94). 그러므로 후크마는 다른 고전적 개혁신학자들과 함께 그의 논의의 결론에서나 그 논의에 과정에서도 중간 상태를 부인하는 일이 전혀 없는 것이다.) 2-2. 성경의 용례에 부합하도록 용어를 수정하는 또 하나의 예로 후크마가 성화라는 주제를 다룰 때 죤 머레이를 따르면서 성경적으로 보면 "점진적인 성화"(progressive santification)와 함께 "즉각적인 성화"(definitive santification)를 말하여야 한다고 하며, 이를 명확히 한 일을 들 수 있다. 죤 머레이는 이렇게 말했다: "신약에서 성화에 대해서 언급하는 거의 모든 특징적인 용어들은 어떤 진행 과정이 아니라, 단번에 완성되는 행동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는 이점을 자주 간과한다." 이 "즉각적인 성화"를 표현하는 예로 후크마가 언급하는 구절은 고린도 전서 1:2, 6:11, 사도행전 20:32, 26:18; 로마서 6:2, 4, 6, 14, 17, 에베소서 2:4-6, 골로새서 3:1, 고린도후서 5:17 등이다. 그리고 후크마는 이런 의미로 사용한다면 이를 세대주의자들이 애호하는 용어인 "신분적 성화"(positional santification)로 부를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신분적 성화를 "전가"나 "선언" 등의 개념과 같이 사용하면 이는 성화와 칭의를 구별하지 않게 할 수도 있으므로 유의해야 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후크마는 "즉각적 성화"가 "칭의"와 비슷하게 이해되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화도 성경의 용례에 근거해서 성경의 용법을 반영하면서 "즉각적 성화"와 "점진적 성화"를 다 잘 소개하고 그에 충실하려는 노력은 성경 주해에 근거해서 교의학을 하는 좋은 예로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이 "즉각적 성화"와 "칭의"의 관계를 정확히 밝히는 일이 남겨진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신약 성경의 하나님 나라 사상에 충실한 신학의 제시 이점은 신약 종말론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그 종말론에 근거한 신학을 제시한 점이다. 후크마는 신약 종말론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1) 구약 예언된 커다란 종말론적 사건이 이미 발생했다; (2) 구약의 저자들이 하나의 운동으로 묘사한 것이 이제는 두 단계, 즉, 현세적 성취와 미래 세대를 함의한다; (3) 이 두 가지 종말론적 단계들의 관계는 현세에 실현된 축복이 장차 올 더 큰복들의 약속과 보증이다(The Future, pp. 21f.). 이를 그는 "도입된 종말론"(Inagurated Eschatology)이란 제목으로 제시한다. 물론 이전에 벌코프도 보스 등이 제시한 하나님 나라 개념을 반영하면서 그의 신학을 제시하였으나 후크마에서 처럼 좀더 포괄적인 체계로 하나님 나라 사상을 중심으로 신학을 제시하지는 못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서 후크마는 현세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우리에게 임하여 와서 현세 역사 가운데서 진행되다가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그 극치에 이르는 하나님 나라의 사상을 중시하며 신학을 드러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좀더 강조하고 우리가 그런 사상에 깊이 뿌리 박기 위해서 후크마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몇몇 진술과 인용 등을 인용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고 할 때 우리는 먼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공간적이고 정태적인 실재(a spatial or static entity)를 생각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실제적으로 그리고 유효하게 작용하기 시작한 하나님의 왕으로서의 통치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왕으로서의 하나님의 행위를 생각해야만 한다.......요한과 예수님께서 선포한 천국은 무엇보다 먼저 역동적 성격의 과정이다...... 왜냐 하며 천국의 임함은 종말의 역사의 위대한 드라마의 초기 단계(the intial stage of the great drama of the history of the end)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 역사 가운데서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하나님의 통치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 목표는 하나님의 백성을 죄와 마귀적 세력들로부터 구속하는 것이고, 종국적으로는 새하늘과 새 땅을 수립하는 것이다(The Future, p. 45).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왕이시며, 역사 가운데서 역사를 하나님께서 지향해 가시는 목표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서 행동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당신님의 통치를 수립하시기 위해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하나님의 구속적 통치이다; 이 세대 끝에 묵시문학적 행위로 나타나게 될 이 나라는 악을 극복하고, 사람들을 악의 세력으로부터 구해내며,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통치의 축복을 가져다주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명 가운데서 인류 역사 안에로 이미 들어 왔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두 가지 커다란 운동(two great movements)을 포괄한다: 역사 안에서의 성취(fulfillment within history)와 역사 끝에 있을 극치에 이름(consummation at the end of history)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지금 현세에서(at the present time) 하나님 나라 안에 있으며, 그 복을 누리고 그 책임을 공유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그 나라가 현재는 잠정적이고 불완전한 상태로만(only in a provisional and incomplete state) 현존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세대 끝에 있을 그 나라의 최종 극치에 이름을 기대하는 것이다(The Future, p. 51). 이와 같은 인용문과 후크마의 진술이 분명히 하듯이 하나님 나라는 예수께서 그의 인격과 사명 안에서 이 세상 역사 안에서 현세에로 도입시키신 후로 이 세상 역사 가운데서 진행되다가, 그가 재림하실 때에 그 나라의 극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실존과 작업이 다 그 나라의 성취 안에 있다. 우리는 이런 입장에 굳게 서는 하나님 나라에 충실 한 신학을 더욱 발전시켜 가야 할 것이다. 그런 일차적인 작업을 후크마가 우리 앞에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4. 전통적 개혁신학에 대한 충실성 이 모든 점과 함께 후크마의 신학의 특성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말해야 하는 것은 그가 전통적 개혁신학의 장점에 충실한 신학을 현대의 상황 가운데서 잘 제시해 주었다는 점이다. 이제 몇 가지 예를 들어서 어떤 점에서 그의 신학이 전통적 개혁신학의 장점에 충실한 신학인지를 제시해 보도록 하겠다. 그 첫째 예는 창조와 역사적 아담, 그리고 타락 등에 대해서 그 역사성을 부인하는 입장에서 신학을 전개하는 이들에 대해서 바르게 비판하면서 그의 신학을 제시하고 있는 데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창세기 3:1-7을 사화(史話, Saga)라고 말하면서 아담은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그를 뒤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모형적인 대표자라고 하는, 따라서 인간은 죄인이 아닌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말하는 칼 바르트와 현대인은 더 이상 아담의 역사성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당연시하고 신학을 전개하는 에밀 부룬너, 그리고 아담과 그의 타락 이야기를 모든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사건의 한 예증으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성과 실제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예증으로 이해하면서 "가르침의 모델"(teaching model)이라고 보는 카이털트의 견해 등을 열거하면서,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단호한 입장을 표명한다: "아담과 화와가 한 때 이 땅 위에 살았던 실제적 인물들(actual persons)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나 그들을 상징들(symbols)이나 '가르침의 모델'(teaching models)로 이해하는 것들은 성경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 기초한다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God's Image, p. 113). 그리고 그는 (1) 역대상 1장의 계보, (2) 누가복음 3장의 계보, (3) 이혼 문제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마 19:4-6; 막 10: 6-8), (4) 여인들의 교회에서의 역할에 대한 바울의 말(딤전 2:13), (5) 사망과 부활의 기원을 대조하는 바울의 말(고전 15:21-22), 또한 (6) 대표의 원리에 대한 바울의 말(롬 5:12-21)에 대한 주해에 근거해서 이 모든 구절들이 역사적 아담과 그의 역사적 타락을 실제로 말하고 있다고 논의한다(pp. 113-16). 이처럼 후크마는 창조와 아담의 역사성을 말하고 강조하는 점에 있어서 전통적 개혁신학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전통적 입장에 충실하게 신학을 전개한 두 번째 예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후크마의 견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후크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되어야 할 은사를 가지고" 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전 교회가 다 카리스마틱하다"는 입장을 잘 표현한다(Saved by Grace, p. 32). 그러나 성령의 비기적적 은사는 지금도 오늘날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데 비하여, 병고침의 은사와 방언의 은사와 같은 성령의 기적적 은사들은 더 이상 현재의 교회 가운데서 기대되어져서는 안된다는 전통적 개혁신학의 입장을 잘 논증하고 있다(Saved by Grace, pp. 33-43).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때를 따라서 그의 백성들의 기도를 기적적인 방법으로 응답하신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병고침의 은사는 더 이상 없지만 "당신님의 뜻이면 치료를 허락하옵소서"라는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께서 기적적 치료를 허락하실 수도 있음을 강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연관해서 사람들이 흔히 하는 세 가지 오해도 잘 지적하고 비판하고 있다. 그 하나는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언제든지 육체적인 치료가 일어나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Saved by Grace, p. 40. Cf. 딤후 4:20, 빌 2:27, 고후 12:7-10). 둘째는 기도에도 불구하고 치료가 되지 않은 경우에 믿음의 부족을 생각하거나 말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p. 41). 그리고 셋째는 육체의 병고침이 결코 예배의 주요 목적이나 교회의 주된 사역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p. 41). 전통적 개혁 신학에 충실한 세 번째 예로 이와 연관된 또 하나의 문제인 소위 성령세례 문제에 대한 후크마의 논의를 들 수 있다. 이 문제에서도 후크마는 죤 스토트에게 동의하면서 전통적 개혁신학의 입장과 같이 성령세례는 중생이라는 견해를 그에 반하는 다른 견해들과 대조하면서 잘 논의하고 있다(Saved by Grace, pp 47-49). 넷째로 현대에 들어와서 다시 많이 논의되고 있는 구원의 확신 문제에 있어서 후크마는 칼빈의 입장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입장, 그리고 도르트 신조의 입장을 잘 소개하고 이에 충실히 따르면서 이상적으로는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되는 일이지만 아직 확신이 없는 이들의 신앙을 신앙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는 점을 잘 논의하였다. 그러므로 참신자들도 때때로 확신이 부족할 수 있고, 더 큰 확신으로 성숙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Saved by Grace, pp. 146-51). 다섯째로 전통적 개혁신학 내에 아주 명확히 내포된 가르침이지만 별로 유의하지 않고 강조되지 않는 점 하나를 후크마는 한 곳에서 아주 잘 지적해 주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어려움은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훈육" 또는 징계(fatherly discipline)라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그는 히브리서 12: 5-11을 인용하면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Saved by Grace, p. 18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도 더 이상 형벌이 아니다. 후크마가 성경과 미래에서 잘 말하고 있듯이 "죽음은 그리스도에게는 저주의 일부분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축복의 원천인 것이다"(The Future, p. 84). 여섯째로 소위 '때의 징조들'이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전 시기를 특징 지우는 것임을 강조하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점을 드러냄에 있어서 후크마는 베르까우어의 논의에 많이 의존하면서 논의한다. 또한 후크마는 '때의 징조들'은 재림의 정확한 시기를 찾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재림의 확실성을 알려 주려고 한다는 것을 베르까우워와 함께 강조한다.(The Future, p. 131). 그러나 이렇게 전통적 개혁파의 입장에 충실 할 때에도 후크마는 다른 입장의 사람들에 대한 입장을 비교적 자세하게 제시하고 논의하며 공평하게 판단한 근거에서 그리하고 있다. 이점에 있어서는 후크마와 깊은 논의에 근거한 신학적 논의의 좋은 모범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우리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칭의론을 자세히 논의하고 논박한 것(Saved by Grace, pp. 163-69), 완전주의와 웨슬리의 성화론의 입장을 충분히 검토하고 그것을 논박하는 것(Saved by Grace, pp. 214-25), 하나님 형상론을 논의하면서 바르트와 부룬너, 베르까우어의 견해를 충분히 논의하고 비판하는 것(God's Image, pp. 49-65) 등을 들 수 있다. 5. 다시 고려할 점 이와 같은 특징을 드러내는 후크마는 몇몇 문제에 있어서도 전통적 입장에 대한 비슷한 비평과 변경을 시도하고 있으나 때로는 "이것이야-저것이냐?"(either/or)의 입장보다는 "둘 다(both-and)"의 입장을 취해야 할 경우에도 어떤 한쪽만을 취하여 좀 지나치게 나아가는 입장을 드러내는 때도 있다. 이제 그런 것의 몇 가지 예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첫째로, "영혼의 불멸성"(the immortality of the soul)이란 용어와 그 개념에 대한 후크마의 논의를 생각해 보자. 그는 칼빈, 알키발드 알렉산더 핫지, 윌리엄 쉐드, 벌코프 등의 영혼 불멸 개념이 성경의 가르침과 잘 조화된다는 입장 보다는 이 개념이 계시보다는 이성에 의해서 증명되는 혼합된 조항(an articulus mixtus)이라는 바빙크의 입장과 이에 동의하면서 영혼 불멸 개념이 독특하게 기독교적인 개념임을 거부하는 베르까우워에게 동의하면서 "영혼 불멸 개념은 독특하게 기독교적인 개념은 아니다"고 결론 내린다(The Future, p. 91). 그는 어떤 경우에는 "영혼 불멸"이란 표현이 "성경의 강조 점에 공정하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성경의 강조 점에 반대될 수도 있다"고 한다(The Future, p. 91, n. 14). 후크마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논의에 근거해서 자신의 입장을 주장한다. (1) 성경은 "영혼 불멸"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p. 89). (2) 성경은 영혼 자체의 본래적 불파멸성 때문에 영혼이 계속해서 존재하게 되리라고 가르치지 않는다(p. 90). (3) 성경은 죽음 이후의 영혼의 게속적인 존재가 아주 소망할 만한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서의 삶이 사람의 최고선이라고 가르친다(p. 90). (4) 사람의 미래에 대한 성경의 중심적 메시지는 몸의 부활이다(p. 91). 후크마의 이런 논의는 상당히 좋은 논의이고, 이는 기본적으로 옳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후크마의 이 논의가 영혼 불멸이란 개념과 용어가 기독교적 개념으로 사용되지 못할 결정적인 이유를 제시하는 논의일 수는 없다. 전통적인 한국 사람이 생각하는 영혼 불멸 개념(예를 들어서, 환생하는 인간과 구천을 떠도는 귀신 개념)과 플라톤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영혼 불멸 개념은 분명히 기독교적 영혼 불멸 개념과 다르다. 그러므로 분명한 기독교적 성격을 유지하면서 영혼 불멸 개념을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칼빈, 벌코프 등이 이 용어를 사용했을 때 그들은 바로 이런 의도를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칼빈이 영혼의 불멸성은 영혼의 본성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혼에 부여하신 성질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영혼 불멸이 성경의 가르침과 잘 조화된다고 했을 때 그것이 비성경적이라고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들의 영혼 불멸 개념은 플라톤주의자들의 개념과 연속성도 있지만 비연속성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후크마가 인용하고 있는 바빙크의 다음 말도 이 용어와 개념이 계속 사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성경은 그것[영혼의 불멸]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있다. 이 개념을 하나님의 계시로 선포하거나 이 개념을 전면에 내어놓지 않는다. 이 개념의 진리성을 논의하거나, 반대자들에 반해서 이 개념을 주장하는 일은 더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 불멸 개념이 성경의 강조점에 충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강조점과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는 후크마의 말은 좀 지나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성경의 강조점은 분명히 몸의 부활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적으로 바라야 할 소망이다. 그리고 성경은 사람의 불멸을 가르친다(p. 91). 그러나 이는 기독교적 영혼 불멸 개념과 같이 있을 수 있는 것이지, 사람의 불멸과 몸의 부활에 대한 강조가 오스카 쿨만이 대조시키는 것과 같이 영혼 불멸과 꼭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불신자의 영혼이 멸절할 가능성을 시사하는 일이 많은 오늘날의 신학적 상황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좀더 조심스럽게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또 하나 후크마의 전통적 입장에 대한 개정 노력 중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것이다. 벌코프는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생명의 연합이 이미 구속 언약 가운데서 이상적으로(ideally) 수립되어 있었고, 개관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사역 안에서 실현되었으며, 성령의 역사로 개개인에게 주관적으로 실현된다는 입장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후크마는 주관적 연합 이외의 것은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은 투영된 연합에 대한 묘사라고 하면서, 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명칭을 그리스도와 실존하는 사람들 사이에 실제적으로 유효화하는 것에만 적용하려고 하면서 이상적으로 실현된 연합을 연합의 "뿌리들"(the roots)이라고 하고 객관적인 연합을 연합의 "근거"(basis)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겠다고 수정 제의를 하며(Saved by Grace, p. 55, n. 4), 그의 설명을 해나갔다(pp. 56-67). 이는 벌코프와 후크마의 입장 모두가 상당히 의미 있는 것이고 따라서 두 입장 사이의 열매 있는 논의가 기대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두 분의 입장은 결정적으로 그렇게 다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벌코프는 주관적인 연합만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생각하던 루터파의 견해에 대한 반발로 그 연합은 성경에 의하면 이미 영원부터 있었다는 점을 잘 드러내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이를 연합의 뿌리와 근거로만 표현하면 과연 그 영원한 연합의 성격과 객관적인 성격이 충분히 표현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논의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벌코프의 표현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위의 각주에서 제시한대로 그의 첫째와 둘 째 것은 같은 것을 지칭하는 듯하고, 그래서 후크마는 그 둘을 하나로 묶어 논의하면서 연합의 "뿌리들"이라고 한 듯하다. 또한 그가 이를 "이상적으로 수립된 연합"(ideally established union)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플라톤주의적 표현 흔적도 있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후크마와 같이 이상적 연합과 객관적 연합은 아직 진정한 연합이 아니라고 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 과연 더 유익할 것인가 하는 것은 더 깊은 사고를 요하는 문제라고 여겨진다. 비슷한 문제점의 하나로 나는 후크마가 베르까우워, 훜세마, 머레이 등의 의견에 부분적으로 동의하면서 "행위 언약"이란 용어를 피하고자 하는 논의를 한 것을 들 수 있다고 본다. 물론, 후크마는 베르까우워나 훜세마와 같이 전통적인 개혁 신학이 행위 언약으로 부르는 바와 사상과 그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행위 언약이란 개념 배후에 놓여 있는 교리상의 진리들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이 "시험적 명령"(probationary command)과 그것의 함의를 중요시한다(God's Image, p. 121). 단지 이를 "행위 언약"으로 부르는 것보다는 머레이와 같이 "아담적 경륜"(Adamic administration)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낫다고 보는 것같다. (그는 실제로 이 행위 언약에 대해서 무엇이라 불러야 한다고 제언하지 않는다. 클라인과 로벗슨이 "창조의 언약"이라고 부르기를 애호한다는 소개를 하고, 머레이가 "아담적 경륜"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소개할 뿐이다. 그리고 단지 한 문장에서 이 개념을 말하면서 머레이를 따라 "아담적 경륜"으로 부르고 있다). 후크마가 "행위 언약"이란 용어에 반대하는 이유는 다음 네 가지로 제시되어 있다. (1) 이런 용어, 즉 "행위 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담적 경륜" 안에 들어온 은혜의 요소들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p. 119). (2) 성경이 이를 '언약'이라고 부르고 있지 않다(pp. 119f.). (3) 이를 언약으로 부를 수 있도록 하는 언약적 맹세(a covenant oath)와 재가의식(a ratification ceremony)이 없다(pp. 120f.). (4) 성경에 나타난 언약이란 단어는 언제나 구속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p. 121). 그러나 이 논의를 주의 깊게 읽어 본 이들은 누구나 느낄 수 있듯이 이는 아직 엄밀한 논의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네 가지 이유 제시와 관련해서 우리의 반대 논의를 제시해 보기로 하자. (1) "행위 언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해도 이 언약이 하나님의 매우 은혜로 우신 배려에서 나온 것임을 부인하지 않을 수 있고, 사실 과거의 선배들이 이런 용어를 썼을 때 "행위 언약"에는 전혀 은혜의 요소가 없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담의 인격적이고 철저한 순종에 근거해서 그와 온 인류를 "더 높고 변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상태로 옮기시겠다는 것에 이미 은혜의 요소가 있음을 과거의 신학자들이 모르거나 무시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벌코프는 "아담이 그의 후예들에 대해 서는 자연적 관계에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스럽게 (graciously) 몇 가지 적극적 요소들을 포함하는 언약적 관계를 더하셧"다고 하면서 행위 언약의 언약적 요소들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전통적 개혁 신학에서는 행위 언약에 이미 은헤의 요소가 있음을 분명히 햇었다. 단지 후에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은혜 언약과 비교해서 그 특징을 살려 이를 행위 언약을 명명한 것이다. 때때로 신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제목만 보고서 그런 오해를 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이 "행위 언약"이란 용어를 사용한 이들의 의도를 벗어난 오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 다른 용어가 더 낫다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용어를 전혀 쓰지 말아야 한다는 논의를 구성할 수는 없는 것이다. (2) 물론 창세기에서는 이 아담적 경륜을 '언약'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창조 언약' 등의 용어도 쓰지 말아야 하는가? 그러나 또한 '아담적 경륜'이라고도 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창세기 1-2장에 있는 경륜을 '언약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벌코프가 잘 논의하고 있듯이 여기에 언약의 요소들이 있다면 이를 언약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호세아 6:7을 "저희는 아담처럼( ) 언약을 어기고"라고 이해한다면 이는 아담과의 관계도 언약적 관계로 표현하는 유일한 구절이 된다. 물론 호세아 6:7은 모호한 표현임에 틀림이 없다. 호세아 6:7의 이 문장은 세 가지 해석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1) "사람처럼, 사람들처럼(like men, in human fashion)"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KJV, ASV), (2) 다른 사본 상의 증거에, 의지하여 "아담이란 곳에서( , at Adam) 언약을 어기고"로 해석할 수도 있으며(RSV, JB), 또한 (3) "아담처럼"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ARV, NIV). '거기서'를 이스라엘 땅 전체로 보면, 다른 어떤 해석보다도 "아담처럼"으로 보는 것이 더 개연성 있는 것이 된다. 그렇게 볼 수 있다면 이는 '아담적 경륜'을 언약으로 언급하는 구절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벌코프는 위의 모든 해석 가능성을 언급한 후에 "결국 '아담처럼'이라고 옮기는 것이 최선이다(the best)"고 말하고 있다. 이런 입장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주석가는 카일이다. 그의 다음 같은 말을 보라: '케아담'( )은 '사람들의 방식대로'('after the manner of men')나 '일반적인 사람들처럼'(like ordinary men)이라고 볼 수 없으니, 이런 설명은 '헤마'( )가 제사장들이나 선지자들을 지칭한다고 보거나, 시편 82:7에서와 같이 지배자들과 다른 사람들 사이의 대조가 나타나 있다고 할 때에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케아담'( )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어서는 안된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아담처럼'으로 보아야 한다. 이 명령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와 맺으신 언약이었다(This command was actually a covenant, which God made with him). 왜냐하면 그 것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의 경우와 같이 주님과의 생명적 교제 가운데 아담을 보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욥기 Job 31:33과 이에 대한 Delitzsch의 주석을 보라). 또한 레온 우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담이 금해진 열매를 먹은 것과 같이 고의적으로 알면서 [언약을 어겼다]. '거기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언약으로 주신 이스라엘 땅을 언급한다. 특히 거짓된 제단에서 굉장한 죄들이 자행된 벧엘을 지칭하는 것일 수 있다"고 말하며, "그들이 아담과 같이 언약을 어겼다"고 번역한 NIV의 의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는 물론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알고 있으나 "인물이 훨씬 더 구체적이라고" 하면서 "아담은 하나님의 분명한 금령을 깨었다"고 한다. 물론 이 문장은 여러 해석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는 부차적인 고려 사항으로만 여길 수 있을 것이다. 벌코프나 전통적 개혁신학자들이 오직 이 구절에만 근거해서 "행위 언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 언약에 대한 맹세나 재가 의식이 없으면 언약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견해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창세기 12장에는 아직 아브람과의 언약에 대한 재가 의식이 없고, 이는 후에 15장에야 나타나지만 12장이 언약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과거의 개혁신학자들은 언약적 맹세는 창 2:16f.에 있다고들 생각했던 것이다. (4) 언약은 항상 구속과만 관련된다는 논의도 의문스럽다. 항상 구속을 염두에 두고 있는 특별 계시에 대해서 "전구속적 특별 계시"(pre-redemptive special revelation)를 말할 수 있다면, "전구속적 언약"을 생각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므로 "행위 언약"이란 용어를 쓸 수 없다는 후크마의 논의는 그렇게 강한 것이 못된다. 오히려 우리는 "생명 언약", "에덴 언약" 등은 후의 은혜 언약에 대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는 근거에서 거절했던, 또 "자연 언약"이란 용어는 너무 포괄적이라고 보던 견해에 따라서 "창조 언약"도 그렇게 구체적이지 않다고 보면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용어를 사용한 벌코프를 존중하게 된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행위 언약"이라는 용어를 "아담적 경륜"의 의미로 사용하며, 그와 혼용할 수도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신학적 용어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선배들의 견해를 유지하고, 새롭게 제시되는 용어는 그 전통적 용어의 의미를 더 밝히고 보완하는 것으로 사용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쓸데없는 논의로 시간과 정력이 낭비되고, 잘못하면 오해들도 증폭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후크마는 때때로 전통적 용어의 의미를 더 잘 밝혀 주는 용어를 제안하고 병용하게 하기도 한다. 그 한 예로 전적 부패(Total depravity)라는 말을 유지하고 사용하면서도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을 저어하여 "전반적 부패 또는 철저한 부패"(pervasive depravity)라고 부르기를 애호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 수 있다(Image of God, p. 150). 또한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the active obedience of Christ)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그 의미를 밝혀 "법을 순종하는 순종"(law-keeping obedience)이라고 하고, 수종적 순종(passive obedience, passiva obedientia)에 대해 "수난 받으시는 순종"(suffering obedience)이란 말을 사용하여 이 점에서 그리스도는 순전히 수동적이기만 하셨다고 생각하는 오해를 피하게 하고 그 의미를 더 밝혀 주는 용어를 사용한 것도 좋은 발전의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Saved by Grace, p. 181). 이상에서 우리는 후크마의 신학의 특성들을 열거하고, 몇몇 문제점을 재검토해 보았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후크마가 보여준 선구적인 개혁 신학을 하는 태도를 가지고 그의 학문적 태도를 신학 전 영역에 적용하되, 그보다 더 철저하게 그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귀한 선배가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을 높이 사면서, 그의 작업을 다른 부분에도, 특히 그가 남겨 놓은 신론, 기독론, 교회론 부분에도 적용하고, 다시 새롭게 하는 신학 서론을 써서 그에 근거하여 더 충실한 신학을 제시하는 일이 20세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선 이 땅의 개혁 신학도들의 큰 과제인 것이다. |
'하나님 나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개념 (0) | 2023.11.28 |
---|---|
하나님 나라는 무엇인가? (0) | 2023.11.07 |
천국과 지옥에 관한 원어의 표현 (0) | 2021.09.15 |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 대한 리델보스의 이해 (0) | 2021.06.05 |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 (0) | 2021.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