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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福音主義)

하나님아들 2023. 6. 28. 18:05

복음주의(福音主義)              

 

1. 복음주의의 의미
복음주의는 교회사에 나타난 여러 신학적 부흥운동이다. '복음적'이란 말은 한 가지 의미가 아닌,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이단적인 것에 반하여 ①정통적인 것, 로마 가톨릭 교회적인 것에 반하여 ②프로테스탄트 교회적인 것, 그리고 현대적 또는 자유주의적인 것에 반하여 ③전통적 또는 보수적인 것을 나타내고 있다.
복음주의는 복음 자체를 강조하는 표현이며, 복음주의자들이 그들의 입장을 나타내기 위해 선택한 말이다. 복음주의 신학은 복음서의 하나님, 즉 예수의 생애와 그의 교훈에서 계시된 하나님에 초점을 둔 신학을 말한다. 복음주의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자를 보내셨으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구속 은총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는 복음을 믿는 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복음주의란 용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복된 소식, 즉 복음을 선포하려는 기독교의 중심 취지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다.

2. 현대 복음주의는 두 가지 의미
넓은 의미의 복음주의는 18세기 대 각성운동으로부터 일어난 전통신앙(근본주의)을 말하고, 좁은 의미는 근본주의에서 갈라져 나온 신복음주의자들에게 사용되는 명칭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와의 차별을 드러내려는 의도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1942년 미국에서 오켄가(Harold John Ockenga)의 지도로 조직된 전국 복음주의자 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NAE)의 창립을 통해 공식화되었다. NAE는 엄격한 근본주의자들 보다 오히려 온건한 복음주의자 그룹이었다. 흔히 신복음주의로 알려진 새로운 형태의 복음주의는 헤렐드 오켄가, 칼 헨리, 빌리 그래함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들은 극단적 근본주의자(근본주의자)로부터 구별하기 위해 온건한 근본주의인 신복음주의자란 용어를 사용했다. 최근에는 신복음주의란 용어 대신, 간단히 복음주의란 용어가 주로 사용되고 있다.

3. 복음주의의 특징
복음주의의 주된 요소와 특징은 몇 가지로 요약된다. 회심주의(悔心主義), 성서주의, 활동주의, 십자가 중심주의이다.
·회심주의는 삶을 변화시키는 종교적 체험으로서, 회심을 통한 중생을 강조한다.
·성서주의는 성서를 궁극적 권위로 신뢰하는 것이다. 오직 성서 중심주의이다.
·십자가 중심주의는 예수의 십자가 구원은 성경의 절대적이고 전통적 본질이다.
·활동주의는 복음전파에 관심을 두는 것을 말한다. 복음주의는 복음전도의 우선권을 두고 전도와 선교를 강조한다.

복음적이란 용어는 복음에 기초하려는 모든 개신교 교회에 붙여졌다. ‘복음주의’란 말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에도 적용되고 영국에서는 웨슬리파 감리교회에도 사용되었다. 이렇게 사용된 복음주의는 기독교회 기본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편, 성경의 권위와 완전 영감설을 강조하고, 의식적 예배보다는 설교의 우위성을 주장하며,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해서는 짙은 회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복음주의 신학은 영성신학(Spiritual Theology)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위대한 신학 전통의 일부분인 삶의 신학의 방법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정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신학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명상하고 기도하며 연구해야 할 대상이다. 신학연구의 목표는 신학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즉 신학은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결산의 날이 가깝다는 자각에서 행해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복음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 곧, 복음주의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4. 복음주의의 태동
복음주의는 성서로부터 유래한 신학체계인 동시에, 기독교에서 일어난 독특한 운동, 즉 경건하고 헌신적인 신앙 운동이다. 종교개혁 운동, 경건주의 운동, 청교도 운동, 대각성 운동, 부흥운동, 근본주의 운동, 성결운동, 은사운동 등이 그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근본주의가 지나치다고 생각한 온건파들이 1940년대 미국 기독교에서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자신들을 새로운 복음주의(신복음주의)이라고 불렀으며, 1942년 NAE(Neo-Evangelical Association,전미 복음주의자 협의회)를 결성하여 단결하였다. 즉, 신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을 근본주의자들과 구별짓기 위해 한시적으로 "신복음주의자"라고 했으나, 1970년대 후반부터 이들을 편의상 '복음주의자'라고 부른다. 복음주의의 특징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대 복음주의의 역사적 원천은 16세기 독일의 종교개혁이다. 근본주의가 20세기 초 미국에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신학이라고 한다면, 복음주의(福音主義)는 17세기 이후 독일 루터교회의 ‘죽은 전통’에 불만을 품은 경건주의(敬虔主義)운동에서 파생된 운동이다.
종교개혁 이후 독일교회에는 점점 신앙의 고정화 현상이 나타나 교리적 정통주의가 만연케 되자, 슈페너(1635~1705)와 후랑케(1663~1727)를 중심으로 종교적 정열과 내적 생명을 되살리려는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 독일교회에 커다란 각성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기독교는 생활이요 체험이다!’라는 표어를 가지고 성경의 생활화를 강조하였다. 이들의 경건주의 운동이 바로 독일과 영국, 그리고 기타 유럽의 복음주의의 모체가 된 것이다.
종교개혁 시대 독일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복음에 대한 루터의 신앙을 강조하며 자신들을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구별하기 위한 수단으로 복음주의적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다시 말하면 종교개혁은 오늘날 복음주의 운동의 근원과 근간이 되었다. 종교개혁의 표어,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총(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의 원리가 복음주의 정체성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다만 다른 점은 종교개혁운동은 교회 개혁에 주 관심이 있었고, 불신자를 회심시키는 복음전도와 선교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반면, 복음주의는 교회 개혁 보다는 회심과 복음전도에 더 관심이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구원을 죄와 용서라는 법적인 면에서 이해한 반면, 영미 복음주의자들은 성령을 통한 내적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

둘째, 복음주의의 역사적 원천은 17세기 청교도 운동이다. 18세기 영국의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은 청교도 운동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며, 현대 복음주의자들 역시 청교도들의 후예들이다. 청교도 운동은 영국교회 갱신운동이었다. 청교도들은 영국의 종교개혁이 불완전하다고 평가하고 온전한 개혁을 추구했다. 그들은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고 신약성서적 교회의 회복을 모토로 삼았다.
청교도 운동은 건전한 신학과 윤리적 삶에 관심을 두는 이론적이고 도덕적인 운동으로 간주되었다. 청교도 운동은 칼빈주의의 선택의 교리에 의해 일어난 불안에 대응해 새로운 종류의 경건을 발전시켰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선택이란 용어로 개인의 구원문제를 표현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옹호했으나, 선택된 자로 확신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했다. 즉 누가 구원을 받은 자이고 유기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반면, 청교도들은 선택의 명확한 표준을 제시했다. 하나님의 구속 은총에 대한 내적 경험이다. 따라서 그들은 구원의 주관적 증표인 중생의 체험을 강조했다. 즉 형식적 신앙을 반대하고, 체험적 신앙을 주장했다. 미국의 초기 청교도들이 은혜 체험을 고백하는 사람만을 회원으로 받아들였던 것이 그 단적인 증거이다.
복음주의가 신앙의 체험적 측면을 강조하며, 그것이 그 중요한 특징이 된 것은 청교도 운동의 영향이었다. 또한 청교도 운동은 복음주의에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확신과 기독교 국가 건설의 환상을 제시했다.

셋째, 복음주의의 원천은 경건주의 운동이다. 독일 경건주의는 사상의 체계라기보다 감정의 체계이며 신학적 분위기와 종교적 부흥운동이다. 17세기 정통주의 개신교는 종교 개혁의 생명력 있는 신앙을 상실하고 형식화, 교리화 되었다. 특히 루터교 정통주의는 "따뜻한 종교적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없는 하나의 이론 체계에 불과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것이 경건주의이다. 경건주의의 근본 목적은 엄격한 형식과 교리에서 벗어나 생동감 있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회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적 감정과 경험을 강조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의인, 중생, 성화는 교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체험해야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삶이며 지식 보다 오히려 실천에서 존재한다. 경건주의자들의 주 관심은 개인적 신앙, 즉 자신들의 영혼 구원에 있었다. 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 체험은 경건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체험을 강조한 전형적 실례이다.

넷째, 현대 복음주의의 원천은 부흥운동이다. 부흥운동은 독일의 경건주의,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 운동 및 각성 운동 등에 의해 18-19세기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난 광범위한 신앙운동이다. 그것은 종교개혁적 신앙을 강화하는 영적 각성 물결이었다. 부흥 및 각성운동의 특징은 회심 체험, 경건하고 성결한 삶, 교회갱신, 노예제도 폐지와 인권향상 등 사회개혁, 봉사와 선교 등을 강조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현대 복음주의는 종교개혁, 청교도 운동, 경건주의 및 부흥운동의 산물이다. 이 운동들은 복음주의에 근본 토대와 기반을 형성했다. 한편 복음주의 운동은 현대 초기에 태어나 20세기 중엽 성숙에 이르렀다.

5. 복음주의의 흐름
이 복음주의 신학은 18세기 중엽에 와서 표준적인 전통신학을 재차 확인하고, 크리스천의 삶의 신학에 특별한 역점을 두었다. 특히 공동의 영적 삶의 신학이 또한 강조되었는데, 교회의 갱신과 세계의 복음화, 그리고 사회의 개선을 특별히 강조했다.
1980년대에 와서 복음주의 신학은 크리스천의 삶의 신학에서 벗어나 진지한 성경해석 작업과 이를 반영하는 사상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중세 초기와 종교개혁 시대처럼 정통신학의 유산을 활기차게 선택하려는 증거를 보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바로 그 당시에 복음주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과 충돌함으로써 약화되거나 후퇴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때 복음주의 신학의 빛을 희미하게나마 비추어 주던 학파가 있는데 바로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ayper) 이후에 나타난 화란학파(the Dutch School)이다. 이들은 정통신학의 전통을 확인하고, 모든 부분에서 크리스천의 삶의 신학에 대한 중요성을 깊이 깨닫고 있었으며, 동시에 많은 문제점들을 느끼고 그 당시 발생되는 문제들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의 압력은 계속 증대되고, 복음주의는 약화되었기 때문에, 더욱 더 방어적인 복음주의 신학이 근본주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래서 20세기 중반에는 복음주의 신학 안에 어떤 활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영국 학자들이 진지하고 학문적인 성경해석 방법의 접근에 공헌하였고, 미국 학자들은 조직신학, 변증학, 윤리학 같은 조직신학의 보조학문 영역에서 열심히 연구하였다.

6. 미국의 복음주의
자유주의 교회는 침체 속에 있는 반면, 복음주의 교회는, 특히 지난 20년간, 성장과 확장을 거듭해왔다. 미국 주류 교회들의 교인수가 감소하고 있으나,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교회들은 성장하고 있다. 자유주의의 실패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주의 교회로 발을 돌리게 했다. 1990년 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 급성장한 500개의 개신교회 중 89%가 복음주의에 속한 교회였다. 미국의 복음주의자는 약 4천만 내지 4천5백만 명으로 추산되며, 미국 복음주의의 기관지로 간주되는 {크리스챤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는 1979년 북미 인구의 20%를, 그리고 여론조사기관 갤럽은 개신교 교인 중 48%를 복음주의자로 간주했다.
토마스 오든(Thomas Oden)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신실하게 믿고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을 복음주의자로 정의한다. 루터, 칼빈, 침례파, 웨슬리의 교훈 아래 있는 사람들이 모두 복음주의자에 속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복음을 믿는 자는 모두 복음주의자이며, 복음에 기초한 신학은 모두 복음주의 신학이다. 복음주의 신학이 아니면서 기독교 신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7. 한국교회와 복음주의
한국교회는 일반적으로 ‘복음주의적’이다. 복음주의는 요약해서 말한다면, 경건주의에 개혁주의가 가미된 운동이라고 하겠다. 복음주의 자는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대원칙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한국의 복음주의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의 복음주의는 현재 여러 교파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비록 교파의 배경은 다르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복음의 정열을 가지고, 경건하게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복음주의자라고 한다면, 한국복음주의 운동은 소망스러운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경계할 것은 복음주의가 지나친 경건주의에 흐르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최근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에 비해 유럽의 복음주의 신학이 약세에 있는 것은 지나친 경건주의 운동의 영향 때문이다. 경건주의를 내세운 생활위주의 기독교는 얼마 안가서 교리적으로 이질화 될 염려가 있다.

8. 정리
바레트(David Barrett)는 {세계 기독교 백과사전}(World Christian Encyclopedia)에서 복음주의를 근본주의자, 보수적 복음주의자, 신복음주의자 세 가지 형태로 나눴다.

근본주의 : 19세기 미국의 두 신학 조류인 프린스톤 신학과 세대주의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기 위해 공동 전선을 펴고 일어난 신학운동이다. 근본주의는 교리 중심의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다. 성서의 무오와 문자적 영감설,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기적들, 육체의 부활, 인간의 전적 타락, 대리적 속죄, 천년왕국 이전의 재림 교리이다. 그러나 극단적 근본주의로 사회적 비젼을 가진 기독교적 세계관을 제시하지 못하고, 기독교 복음의 한 측면만을 강조했다. 그래서 지나치게 내세 지향적이며, 반지성적이어서 교육받은 대중들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세상 학문과 문화에 대한 지나친 폐쇄성으로 경건주의로 흐르고 있다.

신복음주의자(에큐메니칼 복음주의자) : 1940년대에 근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출현한 것이 신복음주의다. 에큐메니칼 복음주의로 교회일치와 협력에 개방적이며, 세계교회 협의회(W,C,C) 운동에 참여한다. 성서의 제한적 무오성을 확신한다. 복음주의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세계, 특히 북미에서 큰 부흥을 이룩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복음주의의 영적 호소력과 낙관주의적 사고에 매료되고 있다. 정통 기독교 교리를 신봉하고, 복음전도에 헌신적인 것이 복음주의 매력이요 장점이다. 현대복음주의는 활동적이고, 대중적이며 실용적인 것이 특색이다. 신복음주의는 종교개혁 주류의 입장을 회복하면서 특히 세상을 긍정하고 문화를 포용하는 복음주의적 비젼을 지니고 있었다. 신복음주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영혼을 구원할 뿐 아니라 문화를 변혁시키는 복음에 대한 비전을 회복한 것"이다. 신복음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서구에 복음주의의 새로운 부흥이 일어났다.
다만 문제점은 WCC이다 이는 세계 교회의 일치 운동과, 정치적 해방과 경제적 착취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사회에 봉사하고, 교회들이 서로 만나 대화하며 기도하고 관용과 상호 이해의 정신으로 협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취지로 결성되었는데. 특히 타종교들과의 대화의 방식을 강조한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지도자들 중의 일부는 기독교의 절대성을 명백히 부정하는 자들이 있어 종교적 다원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상이 깔려 있다.

복음주의자(보수적 복음주의) : 자유주의 보다는 보수적이나, 근본주의처럼 보수적이지는 않다. 복음주의는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의 중간 길을 택하는 제3의 세력을 말한다. 이들은 온건한 근본주의자들로 근본주의의 내용을 고수하기를 원하나 보다 개방적이고 비판적 형태를 원한다. 급진적 자유주의에 저항하는 동시에, 극단적 보수주의인 근본주의의 신학적 폐쇄성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복음주의 신학의 중요한 업적이다. 오직 성경, 오직 은총, 오직 믿음에 정체성을 두고 있다. 또 신앙의 체험적 측면을 강조한다. 엄격한 형식과 교리에서 벗어나 생동감 있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중시한다.
복음주의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근본주의 보다는 덜하나 역시 지성적 빈곤이다. 복음주의는 폭 넓고 심오한 지성적 노력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비판적 분석과 진지한 성찰보다, 문제들을 단순화하거나, 영감과 은사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대중적 차원에서는 큰 성과를 이룩했으나 지성계나 문화계 상류층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근본주의처럼 신비주의와 바리새인적인 지나친 경건주의(거룩성)로 흐르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자유주의 - 복음주의 - 근본주의 - 신복음주의)

※ 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 체험
근대 성결운동의 아버지는 존 웨슬리이다. 웨슬리로부터 감리교가 시작되었고 성결교회도 시작되었다. 감리교나 성결교는 모두 성결의 교리를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 있다. 영국 성공회의 성직자로 안수를 앞두고 있던 1725년 웨슬리는 자기 인생의 목적은 ‘성결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은 “아무도 거룩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히브리서 말씀이었다. 그 뒤 그의 인생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됐다. 웨슬리는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수많은 경건서적들을 읽었다. 뿐만 아니라 웨슬리는 옥스퍼드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신성클럽은 만들어서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경건한 삶으로 인도하고자 노력했다. 이들은 규칙적으로 일어나서 성경과 경건서적을 읽고 감옥에 가서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이들의 하루 일과를 보면 너무 엄격해서 감히 흉내를 내기도 힘들다. 사람들은 웨슬리의 신성클럽 회원들을 메소디스트(Mothodist)라고 불렀다. 이 말은 원래 고대 그리스에서 건강을 위해서 규칙적으로 행동하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웨슬리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보다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 당시에 사막과 같았던 미국 조지아주로 가서 옛날 사막의 수도자들처럼 살고자 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웨슬리는 뜻하지 않은 스캔들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는 자기 교회의 처녀 홉키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도망치다시피 영국으로 돌아왔다. 영국으로 돌아온 웨슬리의 마음은 무거웠다.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지만 그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또 조지아에서 만난 독일인 교회 목사 슈팡엔베르크와의 대화도 웨슬리에게는 충격적이었다. “형제여, 나는 먼저 당신에게 한두 가지 물어야겠습니다. 당신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의 영과 더불어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언합니까?” 이런 질문에 웨슬리는 적잖이 놀랐다. 왜냐하면,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슈팡엔베르크는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압니까?” 이 질문에 웨슬리는 그렇다고 답변을 했지만 빈 말인 것 같아서 속으로 충격을 받았다.
충격을 준 또 하나의 사건은 모라비안교도들이 풍랑 속에서도 평안히 기도하는 모습과, 모라비안교도인 피터 뵐러를 만난 일이다. 뵐러는 웨슬리에게 ‘거룩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쳐주었다. 또 1738년 5월24일 웨슬리는 올더스게이트라는 곳에서 열리고 있는 모라비안 집회에 참석해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들었다. 이때 웨슬리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졌고 모든 죄에서 해방되는 느낌을 받았다. 이것이 유명한 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 체험이다.
그 뒤 그는 피터 뵐레를 통해서 자신에게는 참된 신앙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정말 죄인 됨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회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름을 뜻한다. 아무튼 뵐레는 웨슬리에게 이신칭의라는 교리와, 믿음은 내 노력으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내 자신을 맡겨 그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었다. 웨슬리는 기독교의 중심에 놓여져 있는 이 중대한 진리, 곧 참된 신앙과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그리고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다.
한국교회도 이신칭의를 말하지 않고 거룩한 삶을 강조한다면 올더스게이트 이전의 웨슬레처럼 될 것이다. 이것은 경건이 아니라 경건주의가 된다. 성결한 삶은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믿음이 있으면 한국 교인들도 자연히 성결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면 전도도 저절로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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