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스크랩] 하나님의 나라 | 서철원박사

하나님아들 2012. 11. 21. 11:37



하나님의 나라



서철원 박사


1. 서론

1) 신약의 중심 주제

신약의 선포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특히 공관복음은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주제에 의해 지배된다. 예수의 선포의 첫 마디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고, 그의 선지자 세례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하나님의 나라 혹은 천국, 천국, 혹은 나라라는 용어가 마태복음에는 56회, 마가복음에서는 21회, 누가복음에서는 46회나 나타난다. 예수의 설교의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였고, 그가 사용한 설교법인 비유로 그는 주로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과 본성에 관하여 가르치셨다.

메시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이 곧 하나님 나라 도래이기 때문이다. 그가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 의하여 세례를 받았을 때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므로, 메시야 곧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임명되셨다. 그의 성령의 세례는 메시야 임직식이었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메시야 곧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일을 시작하셨으므로 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특별한 의식을 가졌다.

따라서 그의 이해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가 그의 인격에서 실재가 되고 영적 실체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인격에서 친히 다스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였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친히 다스리기 시작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의 왕국을 파멸하고, 죄를 제거하므로 하나님 나라를 확립하셔야 했다. 그가 자기의 죽음과 부활로 죄과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완전하게 확립하기 전에도, 그는 사탄의 권세를 제어하고, 마귀를 추방하며, 사탄의 권세로 당하는 질병 등의 고통을 해결해 주시므로, 사람들을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가 친히 죄를 사해 주고 새 생명을 주었다. 그의 권세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입적하였다. 즉 사탄의 권세와 그의 나라는 궤멸되기 시작했고, 하나님 나라는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사 세상 죄과를 속량하시고 나라와 백성들과 종족들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시사 하나님 아버지께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시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본격적으로 확립되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으로 성령께서 사람들 가운데 오시므로 하나님께서 실질적으로 백성들을 소유하시고 직접 다스리기 시작하셨다.

이 모든 일은 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야 곧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하신 일이고 또 하실 일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도래하였고, 그의 구속의 사역으로 확립되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사도 요한과 다른 서신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개진하였다. 이것이 바울과 다른 신약 부분들에 하나님 나라의 언급이 적은 이유이다. 그래도 신약에 하나님 나라, 천국 혹은 나라들의 용어가 162회 나타나고 있다.

2) 하나님 나라의 논의의 배경

‘하나님의 나라’가 신약의 중심 주제를 이루고 특히 공관복음을 지배하여도 신학계의 주의가 하나님 나라에로 옮아 온 것은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엽까지이다.

19세기의 지배적인 예수의 연구와 예수상은 윤리적 종교적인 측면의 강조였다. 예수는 이상적인 윤리의 교사요 또 천재적인 종교가였다. 그는 특히 사랑의 화신이었으므로 우리가 본 받고 모방할 이상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즉 19세기 말엽까지 예수의 이해는 서구의 기독교화 된 문명의 세계에 통용되고 적용될 수 있는 내재적인 이해이고, 서구 문명 세계와 동일 선상에 서는 그런 예수상이었다.

이런 윤리적이고 내재적인 예수의 이해에 반동이 생겼다. 그것은 1892년 종말론적 운동의 아버지라고 할 요하네스 바이쓰(Johannes Weiss)의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예수의 선포(Die Predigt Jesu Vom Reiche Gottes)란 책의 출판으로 시발되었다. 이것은 릿출(Albrecht Ritschl)이 가르쳐 온 하나님 나라의 관념에 대한 반대로 시작한다. 릿출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예수가 설립한 윤리적 종교적 공동체였고, 법을 시행하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로 구성되었다(참조; Herman Ridderbos The Coming of the Kingdom, lntroduction, Ⅻ). 이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히 내재적이고 인간의 활동과 진보에 의해 진보하는 그런 나라였다.

그러나 바이쓰와 그의 후계자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에 의하면 예수의 선포에는 종말론적인 긴장이 지배하였다. 예수는 통상 생각해 오듯 그런 친숙한 존재라기 보다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생소한 사람으로서, 종말론적인 급박한 기대 속에 산 사람이었다. 그는 후기 유대주의적 묵시 문학적인 배경 속에서 살았던 사람으로서, 예수의 이해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순전히 미래적이고 종말론적인 사건으로서 한 세계의 질서가 붕괴되고 도입 될 새 세계이기 때문에, 릿츌의 내재적인 神國이해는 배척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슈바이쳐도 예수를 그의 종말론적인 생소함과 긴장 중에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구체적인 역사적인 인물로서 예수를 우리 시대에는 낯선 사람이라고 슈바이쳐는 주장한다(Albert Schweitzer,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1964, 401). 예수는 알려지지 않는 이로 우리에게 오신다고 주장한다(Ibid, 403). 예수는 이처럼 종말론적인 분위기 속에 산 인물이었다. 세상 끝이 임박한다는 기대 속에 살았다. 그러나 이 기대가 충족되지 않자 자기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종말의 새 세계를 도입하려고 하였다.

이들 종말론적인 대변인들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시간의 끝에 나타날 미래의 실체이다. 이들 종말론 운동의 대변자들에 의해 사람들의 관심이 하나님 나라로 오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의 선포의 종말론적 특색에 다시 전통적인 자유주의의 윤리적인 교훈의 이해가 복합되었다. 현, 세상을 긍정하고, 그 안에서 살 윤리적 지침과 이상을 재정립하였다. 그리하여 종말론의 개념이 시간과 역사의 끝으로 이해하던 데서 초시간적인 개념으로 바뀌었다. 역사 끝 역사의 도식이 역사, 초역사 혹은 시간 · 초시간의 도식으로 바뀌고, 종말은 언제든지 개인에게 임하는 것으로 보고, 따라서 결단에의 촉구로 보았다. 이 순간이 각 개인에게 종말이기 때문이다. 이 역사, 초 역사의 종말 도식은 발트와 불트만 등의 변증신학자들에 의해 20세기 중반 이후까지 진행되고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신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종말에 하나님에 의해 최종적으로 도입되고 완전하게 설립될 것이지만,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죽음과 부활로 현 세상에 도입되었고 설립되었다. 이 나라가 결코 인간의 노력과 진보에 의해 설립된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통치는 현 인류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의 확립이 역사의 시작부터서 하나님께서 경륜하시고 목표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되고 진행된 하나님의 나라의 논의가 20세기를 신학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논의가 그 특색이 되게 하였다. 전통적으로 진행된 신학적 논의가 신약의 본문의 가르침에서 이탈하였어도, 사람들의 주의를 하나님 나라에 집중되게 한 공을 이루었다.


2. 하나님의 창조의 경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므로 창조주가 되셨다. 그가 자기의 영원한 경륜 가운데서 창조를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는데, 이 작정을 실현하사 무한대한 우주를 생산해 내셨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 손으로 이루신 창조가 자연 세력으로 남아 있게 하신 것이 아니고, 창조가 계발되어 문명화되므로 하나님 나라가 되게 작정하시고 섭리하셨다. 창조의 세력들이 계발되어 문명화되므로 창조주의 지혜와 권능이 찬란하게 현시되게 하시기로 하셨다. 그리하여 창조주의 창조 방식이 모방되게 하셨다. 그러기 위해 창조주는 자기 창조에 놓으신 무한한 보화와 가능성들이 계발되게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지식의 깊이가 어떠한지 조명되게 하셨다. 또 창조의 구성과 그 운영을 알므로 하나님의 통치의 방식이 반복되는 것을 기뻐하셨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지으신 창조의 운명과 그 진행 과정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이 진행되게 하셨다. 그리고 창조와 관련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예견하고 예언하게 되기를 바라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고 준행하게 되기를 바라셨다. 그리하여 자기 창조를 내실 때 정하신 목적이 이루어지게 하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창조가 그 조물주를 기리고 찬양하며 예배하여, 그의 크신 덕과 영광을 기리며, 그 베푸신 모든 은혜와 창조를 인하여 감사하게 되기를 바라셨다. 이 목적 때문에 하나님은 창조를 성전 구조로 조성되게 하셨고, 만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가대가 되게 하셨다. 현시된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지 아니할 존재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창조는 그 전체로 조물주를 경배하고 찬양하는 목표로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종말에서 창조는 조물주를 기리는 경배의 공동체로 설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모든 창조가 역사의 과정을 겪어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를 창조주는 바라셨다. 그러므로 창조가 처음 이루어졌을 때부터 창조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길에 들어섰다.

하나님은 이렇게 창조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수행할 대행자를 지으시기로 하셨다. 무한한 지혜와 권능으로 지으신 우주를 관할할 자이어야 하므로 하나님은 그 조물은 특별한 조물로 지으시기로 하셨다. 많은 면에 있어서 하나님을 닮고, 반영할 그런 영적이고 이지적인 존재를 만드시므로, 하나님의 복사물이 되는 그런 존재로 지으시기로 하셨다. 이 조물이 특별한 일을 맡을 자이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다. 이런 조물로 자기의 창조의 代理 統治者 삼으시기로 하셨다. 하나님은 이런 특별한 조물을 만드시고 그를 아담이라 혹은 사람이라 이름하시고, 그에게 자기의 창조를 맡기셨다.

이런 특별한 조물을 지으시고 하나님은 그에게 큰 축복과 함께 우주의 통치를 위탁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위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다. 이렇게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책임을 위임하셨다. 이 위임으로 그는 창조를 계발할 책임을 맡았고, 하나님의 창조를 다스리는 대리 통치자의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시간의 진행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해석하고 선포할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창조가 하나님의 것이므로 이 창조를 다시 하나님께 성별해 드리고 모는 창조물들의 찬양을 하나님께 바쳐 드리는 책임을 위임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이 이 책임을 강제 아래 억지로 수행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기쁘게 수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와 언약을 맺으시고 기쁘고 자발적인 순종으로서 일하도록 하셨다. 하나님과 약정을 맺은 언약의 당사자로 일하도록 하셨다. 그리하여 행하는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책임 있게 하셨다. 이 약정으로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 위에 통치자로 정식으로 임명하셨다. 이 언약 관계 때문에 아담의 결정과 행동은 우주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특별한 조물을 위해 하나님은 특별한 처소를 하나 만드셨다. 하나님을 모시고 살므로 늘 기쁨이 있는 곳이어서 에덴이라고 이름하시고, 거기에 모든 생활의 부족이 없이 오히려 넘치는 풍요 속에서 자기의 사명을 잘 감당 할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마련한 풍성한 식탁으로 부족함 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창조주로부터 위탁받은 책임을 감당케 하셨다.

이렇게 위임받아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세워진 아담은 낙원에서의 풍성한 삶 때문에 무위도식하고 지낸 것이 아니라, 즉각 일을 시작하여 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식물들과 동물들, 바다와 고기들과 공중의 새들의 이름을 지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예리하고 탁월한 지성으로 사물들의 본성을 규명하여 이름을 지었다. 그가 짓는 이름들은 그 생물들의 본성에 상응하였으므로, 그 이름으로 모든 생물들을 잘 어거하였다.

동물들 뿐 아니라 식물의 본성도 잘 규명하여, 그의 상응하게 그 이름을 명명하였다. 이 이름들로 그는 식물들도 그 필요를 따라 잘 활용할 수 있었다.

아담이 이름을 지을 때 자료들을 수집, 비교 관찰하고, 실험하므로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니라 지성의 최고 단계의 활용이라고 할 직관으로 그렇게 하였다. 그는 봄으로 자기 주변 사물들의 본성을 바로 파악하였고, 그 파악된 본성에 따라 이름을 붙였다. 그 이름은 그 사물들의 본성의 파악이므로, 그 이름으로 사물들을 잘 어거하고 통제하여 활용할 수 있었다.

생물들의 이름을 짓는데서 나아가 아담은 자기 주변의 다른 사물들과 자기 주변의 환경에서 작용하는 체계들을 탐구하고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아담은 이처럼 바쁜 일과를 진행하여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대리 통치자로서의 임무를 잘 수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창조 후 첫 안식에도 동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일도 잘 수행하였다. 하나님의 창조와 그의 영광을 인하여 창조주를 찬양하고 감사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베푸신 모든 특권과 호의로 인해 감사하고 찬양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눈앞에 전개되는 보든 찬란한 삼라만상에서 빛나는 창조주의 지혜와 권능과 영광을 보고 그 창조주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 드렸다. 이처럼 아담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직임도 잘 수행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권 위임에서 이 창조로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가 무엇인지를 잘 깨닫고 있었다. 하나님은 자기가 지으신 세계에 자기의 나라를 설립하시려는 분명하고 확실한 뜻을 갖고 계심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경륜을 바로 해석하고, 창조의 목표와 운명을 바로 해석하고, 廣布해야 했다. 죽 역사 과정의 진행 목표가 무엇인지를 바로 설명하고, 그 하나님의 뜻에 아담은 잘 순응했어야 했었다. 이 창조는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하고 시발하였고 진행하고 있음을 잘 인지하였다. 아담은 창조가 하나님 나라가 되는 일에 잘 수종을 들었다. 또 창조주께서도 자기의 경륜대로 일을 잘 진행하고 계셨다.


3. 역사 과정의 격변과 하나님의 대응

1) 반역

그런데 이 순조로운 하나님 나라에로의 진행이 갑자기 멈춰지고, 그 궤도에 크게 이탈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갑자기 창조에 큰 반란이 발생하였다. 온갖 호의와 은사와 특권을 가득히 부여받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가 악한 자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는데서 돌아서서 자기가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하였다. 하나님의 선악 판단을 절대적으로 알고 살던 데서 자기의 판단을 궁극적으로 삼는 데로 나아갔다. 참과 거짓을 하나님의 결정에 따라 하던 데서 자기 이성을 진위 결정의 궁극적인 표준으로 삼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해 놓으신 해석을 따라서 해석하는 것을 그치고 자기 해석을 구성적이고 창조적인 것으로 삼았다. 또 하나님께 모든 순종의 의무를 지닌 언약 당사자의 자리에서 떠나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기로 하였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던 삶에서 돌이켜 자기를 위해 살기로 전환하고, 목표를 바꾸며,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자기의 나라를 세우기로 한 반란을 일으켰다. 너무도 끔찍한 반란이고 큰 배은망덕이었다. 하나님이 아담을 최고 영광의 자리에 세우셨는데 그 은혜를 배반하고 반란과 반역을 일으켰다.

이 반란을 성경은 타락이라고 명명하였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의 반란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죄와 사망과 고통과 어두움 등의 적대 세력들을 도입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창조의 대리 통치자였기 때문이다. 창조가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하였고,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반사하던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의 지성이 어두워지고, 감정이 비뚤어지고 얽히게 되었으며, 도덕적 바른 판단과 방향을 상실하게 되었다. 아담은 영혼과 육체의 심한 분열 의식을 갖게 되었고, 둘은 하나로 조화 통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죄의식과 함께 심한 죄책감이 지배하였다. 자주인이고 독립적인 왕이 되기를 바랐는데 죄에 매인 종이 되고 따라서 피조물에 종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던 데서 피조물을 섬기게 되었다. 그러므로 더 이상 통치자로서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의 호의가 철수되고 진노와 저주가 임하여 왔다. 즉각적으로 낙원에서 추방되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격리되었다. 즉 생명의 원천에서 절단되었다. 사망이 도입되고 고통과 자연에 해악이 발생하였다. 사망이 창조의 세계의 법칙으로 도입되었고, 고통과 고난이 삶의 방식이 되었다. 또 후회와 한탄과 탄식이 일생의 반려가 되었다. 그리고 부패가 창조의 자연스런 과정으로 도입되었다.

아담 자신도 그 죄 값으로 죽어야 했고, 도 그렇게 판정되었다. 그러나 아담의 반란에 놀라신 하나님께서 그래도 은혜를 베푸시사, 그 반역의 죄 값에도 불구하고 당장 아담을 죽음에 이르게 하시지는 않았다. 그 죄의 벌로써 마땅히 당장 사행이 집행되어야 하였지만, 그의 사형 집행을 유예하셨다. 하나님의 이 호의 때문에 아담은 930세까지 생존하며 자녀를 낳게 되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와 그의 후손들에게 왔고 또 동물과 식물계에도 왔다. 그리고 노쇠가 부패를 촉진하는 여러 현상들과 체계들이 도입되고 진행되었다.

그리고 동물들이 유순한 순종의 자리에서 무서운 대적이 되는 맹수들로 변하게 되었다. 그리고 죄악은 역사하여 창조의 분열과 분리, 해체 작용을 계속하였다.

이 죄의 역사의 진행을 막지 않고 계속되게 한다면 창조의 분리와 해체뿐이어서 마침내 창조 자체의 존속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창조 경륜을 낭패케 하실 수 없으셨다. 하나님은 자기의 창조 경륜을 이루시어 죄와 사탄의 계교 위에 승리하시고 영광을 받으셔야 했다. 그리고 자기의 경륜을 따라 창조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셔야 했다.

2) 제재 조치

이 일을 위하여 본격적인 구속 경륜을 집행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몇 가지 예방 조치를 취하셨다.

그 첫 번째 조치가 죄의 과격한 역사를 약화시키고 막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일반은총의 역사로 죄의 과격한 역사를 약화시키고, 창조가 자기 과정을 따라 운동되게 하시므로 창조를 보존하고 유지되게 하셨다. 죄에도 불구하고 창조가 그 존재와 운행을 계속하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하신 하나님께서 아담의 사형 집행을 연기하시므로 그로 인류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 비록 죄와 사망에 종속한 인류이어도 그에게 많은 자손이 출생되어 나오게 하셨다. 그들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며 하나님의 창조를 탐구하고 계발하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죄악을 억제하는 방책들을 내셨다. 그 중에 제일 큰 방책이 정부 제도의 수립과 운용이었다. 정부는 칼로 무질서와 혼돈을 제거하고 질서를 세우므로 사람들이 함께 살며 인륜사회를 이루고 자연을 계발하여 문명사회가 되게 하는 기본 제도이다. 정부가 칼의 세력으로 폭력과 죄악을 억제하므로 사람들은 서로 화평하며 살수 있게 되었다. 정부가 칼로 악을 억제하고 선을 장려하고 포상하므로 무법천지가 되지 않고 법과 질서가 서므로, 죄의 파괴적 성향이 억제되는 것이다. 정부가 칼의 권세로 악을 벌하고 선을 상주며, 질서를 세우고 폭력을 억제하므로 사람들의 마음이 의식이 있고 지각이 있어서 자기의 삶을 살고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만인이 만인을 대항하여 마주서는 살벌한 자연 상태가 될 것이다.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가 설파한 것처럼 정부가 없는 상태에서의 인간은 이리떼가 서로 마주서듯, 만인이 만인에 대하여 대적이 되는 그런 상태이다. 다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고, 자기의 욕망 충족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해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를 완전 자유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사람들이 정상적인 자기의 삶을 도저히 영위할 수가 없고, 각자가 서로를 향해 싸우는 전쟁의 상태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정부는 악을 제거하고 죄를 감소시키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좋은 도구이다. 정부는 그 공권력으로 그 본래의 제도를 바로 수행하면 하나님 나라의 봉사자이다. 정부가 공권력으로 악과 폭력을 억제하기 때문에 질서가 세워지고 사람들이 죄악의 구조에서 이렇게 담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한 정부라도 무정부 상태 보다는 오히려 낫다고 할 것이다. 정부가 그 손에 쥐어 준 칼의 권세로 정부 통치력이 미치는 지역 내에서 악을 억제하여 질서를 세우고, 사람들로 선을 행하게 하며 적나라한 욕망을 억제하여 윤리적인 사회가 되게 하며, 사람들로 자기들의 재능을 발휘하여 창조의 보화와 가능성들을 계발하게 하면, 그 정부는 하나님의 나라에 봉사자이다.

그러나 이런 악의 억제 방식으로는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여, 창조를 완전히 하나님 자신에게로 회복시키지 못함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창조에서 죄를 완전히 제거하시므로 다시 창조에 하나님의 영광이 찬연히 빛나고 창조주께서 왕으로 완전히 다스리시며, 창조에 충만히 거하사 萬有 안에 萬有가 되시기로 하셨다.


4. 구속 경륜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창조에서 죄를 완전히 박멸하시기로 하셨다. 이 죄의 완전한 제거로 창조를 자기에게로 회복시키는 구속 경륜을 진행하셨다. 이 죄의 박멸을 위해 하나님은 인류역사에서 이 일을 시작하셨다. 구체적으로 일하사 한 민족을 내시고, 그 민족을 위해 부단히 강대국들의 역사에 개입하시사 그들을 인도하셨다. 그리하여 그 민족에서 세상의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구세주가 나게 하셨다. 이스라엘 역사의 숱한 곡절에도 불구하고, 세상 구속주의 출생을 잘 예비하고, 그의 출생의 태반이 되었다.

죄에서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세주는 바로 이스라엘에서 출생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스라엘의 모든 존재 목적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의 준비였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모든 죄와 거기에 연결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구속주로 삼으셨다. 이 예수 그리스도로 세상의 모든 죄의 문제를 다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은 부단히도 인류 역사에 개입하시고 그들을 주관하사 마침내 일을 이루어 내셨다.

하나님은 세상의 구속주로 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죄 때문에 죽게 하시므로 모든 죄과 문제를 다 해결하시기로 작정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로 십자가에서 피흘려 화목제물로 죽게 하시므로 세상에서 죄를 제거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모으시고 생산해 내셨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람들을 새 사람으로 만드시고 또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백성이 되도록 훈련을 받게 하신다. 이 세상의 구원의 역사를 하나님은 종말까지 계속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 구원이 다 이루어질 때 창조를 완전히 정화하실 것이다. 이 때 완전히 죄가 제거되어 하나님이 萬有 안에 萬有가 되신다. 이 상태가 바로 성경이 목표하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한 창조의 완전 정화 이전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세상의 죄 문제를 해결하므로 하나님으로 하여금 직접적으로 세상을 다스릴 수 있게 하였다.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 죄와 사탄에 의해 지배받던 세상을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세상이 되게 하셨다. 이 통치가 종말에서는 완전해져서 세상 나라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의 인격에서 그리고 그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도래하였다.


5. 하나님의 나라

이제까지 해 온 ‘하나님 나라’에 관한 서론적 고찰에서 본론에로 들어올 때 맨 처음 제기될 수 있는 질문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질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수 없이 들어왔고 또 사용하여 왔는데, 도대체 하나님 나라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받을 때 곧장 대답하는 것이 쉽지 않다. 특히 하나님 나라를 그 선포의 중심주제로 삼는 신약도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제공하지 않으며, 또 구약은 “하나님의 나라’도 잘 언급하지 않는데서 그 이유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구약이 하나님 나라를 언급하지 안해도 신약은 구약의 가르침에 뿌리박고 있다.

구약은 하나님의 사역의 목표를 하나님의 통치의 확립과 인류의 구원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의 확립과 인류의 구원을 일치시킨다. 즉 하나님의 통치 확립이 인류 구원이 된다. 신약이 관설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은 구약의 이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다. 바로 이 배경에서 주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언급과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왕으로 자주 고백되고 찬양되었다. 특히 시편에 하나님은 왕으로서 백성의 다스림을 강조하고 고백되었다.

1)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통치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사사시대에는 사사들을 세우시사 다스려도 실제 다스리시는 이는 하나님이셨다. 그러므로 400여년의 사사시대는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신정시대였다. 사무엘을 마지막으로 사사로 해서 왕을 세우게 될 때 사사인 사무엘 자신이 왕정제도의 설립을 싫어하고 반대하였지만 실제로 왕을 요구하므로 배척받으신 이는 저들의 왕이신 하나님이셨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린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그리고 백성들의 요구를 좇아 사무엘이 이스라엘 최초의 왕을 세울 때에도 그 왕정제도가 하나님의 통치를 위임받아서 하는 것으로 백성과 약정이 맺어지므로 허락되었다. 왕은 언약서를 옆에 두고 그 언약을 좇아 정치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말씀에 순종해서 정치하는 위임 통치 형식이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그가 다스리시며, 이스라엘 왕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통치자였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이 실패한 것은 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자기의 왕정에서 분리하여 자기의 세속적 왕권을 세우려한데 있었다. 이스라엘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셨는데 자기가 배척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시고, 그에게 벌을 내리시사 그와 그를 이어 왕될 자들을 손에 의해 멸살되게 하셨다. 사울의 죽음에서 다시 확인 된 것은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이시고, 사람으로 왕된 자는 하나님의 위임 통치자라는 진리였다.

다윗은 이 면에 있어서 크게 성공한 왕이었다. 다윗은 그의 치리 기간에 있어서 하나님의 왕권을 성실히 인정하고 그의 왕되심을 늘 확인해 드렸다. 다윗의 통치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늘 고백하고 자기는 이 하나님의 왕권을 수종드는 자임을 명백히 하였다. 그가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수도를 예루살렘에 정하고서 한 첫 번째의 조치가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오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자기의 왕권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인정해 드렸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권과 자기의 왕권을 일치시켰다.

자기는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진 왕이어서 자기가 자기의 보좌에 대해 전권적이고 세습적인 권리를 주장할 수 없음을 잘 이해하였다. 자기가 왕됨은 하나님의 은혜였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에 순종해 드리는 것 뿐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의 왕권을 굳게 세우려기 보다 하나님의 왕되심을 더욱 굳게 하였다. 다윗은 하나님의 통치권에 성실히 봉사해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였고, 거기에 자기의 영광이 성립함을 보았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께서 자기를 왕으로 세우사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시고 계심을 잘 보았다. 하나님은 다윗의 손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의 약속을 성취하고 계심을 보았다. 여호수아도 가나안 땅을 다 정복하여 그 땅을 백성들에게 다 분배하지 못하였고, 사사시대의 족장들도 땅을 다 정복하지 못하였다. 사울 왕도 땅을 다 정복하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의 생존에 결정적인 위협이 된 불레셋을 다 정복하지 못하였다. 이제 하나님께서 다윗의 손을 의탁하사 미정복한 땅을 다 정복하시고 불레셋을 제압하시므로, 조상들에게 하신 땅에 대한 약속을 이루시므로 그 백성들에게 평안을 선사하시려는 것을 잘 알았다. 이 일을 위하여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시없는 대 용사들을 다윗에게 위탁하셨음도 다윗은 잘 깨달았다.

이처럼 다윗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크게 확대하고 견고히 해 드리므로 하나님께서 도 다윗의 왕권을 굳게 하셨다. 이제 다윗의 후손으로 다윗을 이어 왕이 될 자들이 끊어지지 않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다윗의 재위 기간에 다윗이 범죄하여 가정의 근본법이 다 깨어지게 되어 더 이상 왕이 될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다윗을 왕위에서 끌어내리시지 않으셨다. 다윗의 왕됨은 하나님의 은혜였고 그의 공로가 아니었음으로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일하게 하셨고, 다윗의 왕권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서 그 범죄 관계에서 맺어진 아내에게서 나온 아들을 다윗 왕의 후계자가 되게 하셨다. 사울이 왕 됨에도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자기의 왕권을 세우려 하므로 배척되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잘 알고 하나님의 왕권을 더욱 견고히 해 드리는 수종자 노릇을 하였고 이 수종자 됨에서 오는 영광도 하나님께로 돌려 드렸다.

이와 같이 하여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자기 마음에 합한 한 사람을 통하여 자기의 일을 다 이루시기로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금처럼 다윗을 통하여 다스리는 이스라엘 나라의 왕되심만이 아니고 메시야를 통하여 모든 인류 종족을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의 왕되심을 다윗의 왕권에 연결시키셨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하셨는데, 이 온전히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되심을 다윗의 왕권에 연결시키셨다. 하나님 나라의 왕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다윗의 혈통에서 나게 하셨다.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왕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한 집을 세우시겠다고 약속을 하시고, 다윗의 씨에서 나온 자들로 다윗의 위에 영구히 앉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이스라엘의 왕은 정녕 여호와 하나님이셨고, 세계의 모든 종족의 왕도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도 하나님의 통치권을 잘 인정해 드렸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심 예루살렘에서 다스림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그는 성전을 자기 궁궐 건축에 선행해서 건축하였다. 그리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되심을 분명히 하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중심에 좌정하시고 다스리시니 성이 요동치 않고 평화 왕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치세 기간에 모든 이스라엘에게 평화를 선사하셨다. 그것을 솔로몬이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사전 표상이 되게 하셨다.

그러나 솔로몬이 그의 말년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겨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되심을 경홀히 하고 방해함으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서 나라를 하나님이 빼앗으시기로 하셨다. 그러나 다윗에게의 약속 때문에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 솔로몬의 제국에서 10지파를 떼어내사 작은 나라로 남게 하셨다. 그러나 남방 유다 나라는 다윗의 후손들로 하여금 그 왕위를 이어가게 하시사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이루어지게 하셨다.

그러나 북방 이스라엘 나라는 10지파로 된 큰 나라였지만, 하나님께서 그 왕권을 오래도록 세습되지 않게 하셨다. 저희들의 범죄를 인해 계속해서 왕됨을 못하게 하셨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예후는 특별한 왕이었다. 그는 우상을 극도로 섬기는 오므리가의 아합왕과 그 자손들을 완전히 소제하고 왕이 되어 엘리야도 못하던 바알신의 제사장들을 전멸한 특별한 왕이었다. 그러나 그도 3대에까지밖에 왕이 되지 못하였다. 그가 우상 숭배자들을 징벌하고 또 철저히 소제함도 잘 하였지만 그러나 그는 그 왕권으로 하나님의 일을 도모하지 않고 자기의 일을 추구함으로 하나님의 왕되심을 견고히 하지 못하였다. 그가 왕됨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가 아합왕 밑에서 장군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엘리사 선지자의 생도를 통하여 왕으로 임직되었다. 그러면 그 왕권으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통치권의 확립을 위해 노력했어야 할 것이다. 그는 가장 교만해지기 쉬운 자기의 일을 추구하였다. 그러므로 3대만 임금되는 것으로 예후가문은 끝났다.

유다의 역사에서 역대 왕들이 위기에서 만나는 시험은 하나님의 왕되심의 확인 문제였다. 강대국들이 발흥하고 자기들의 생존을 위협하는데, 생존을 위해서 대국에 의지해야 하겠는데, 선지자들은 와서 굳게 서서 하나님의 다스리시니 하나님만 의지하라 하였다. 이런 경우 인간의 계산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라고 하니 보통 큰 시험과 시련이 아니었다. 당장 큰 예물을 바치고 외교정책으로 문제를 매듭지어 생존을 지탱해야 했는데 왕이신 여호와만을 의지하라고 촉구 받는다. 이 큰 시련과 국가적인 위경에서 많은 왕들이 실패하여 넘어지고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이런 큰 위기에 하나님의 왕권을 굳게 의지한 유다의 왕이 하나 있었다. 그는 히스기야 왕이었다. 앗수르 제국의 대군이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는데, 선지자 이사야가 와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의 말씀을 믿으라고 하였다. 큰 시련과 위기의 때였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의존하고 세상 외교정책을 추구하지 안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신뢰하여 여호와로 하여금 이스라엘 곧 유다의 왕이 되게 하였다. 그러므로 열왕기는 히스기야의 행적을 여러 장에 걸쳐 기록하였으며, 그가 죽었을 때 다윗의 묘실의 높은 곳에 장사하였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로 북방 이스라엘 왕국에 있어서 오므리 왕가는 7,80년간 왕노릇을 하였어도 그들에게는 성경 열왕기의 몇 줄 글로 충분하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셨고, 그 나라를 다스리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들을 통하여 다스리심은 장차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계의 모든 족속들을 다스리실 것의 표상이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들의 왕이시고 또 그러므로 다스리신다는 사실이었다. 이스라엘의 역사의 의의는 하나님의 통치권의 확립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큰 변혁을 겪었다. 8세기 말엽 곧 주전 723/2년 북방 이스라엘의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하여 지상에서 영구히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남방 유다는 150년 정도 더 존속하였다. 그러다가 6세기 초엽 곧 주전 587/6년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멸망하였다.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되어 70년을 지나는 중에 바벨론은 망하고 페르샤가 강대국으로 중동지역을 통일하였다. 이 페르샤 제국에 의해 해방되어 유다에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을 쌓고 하나의 종교 공동체로 살면서 페르샤 제국의 속국으로 있었다. 그러나 결코 하나의 자립적인 정치적인 단위가 되지 못하였다. 오랜 세월 페르샤의 속국으로 있다가 알렉산더 대제의 세계 정복 정책에 따라 페르샤가 망하고, 희랍제국에 합병되었다가, 2세기 초엽 막카비가의 항쟁에 의해 독립을 쟁취하여 지내 오다가 로마제국의 등장으로 그 세력권에 들게 되므로 B.C 63년에 독립을 잃고 이방 에돔의 피가 섞인 헤롯이 왕이 되어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이 긴 유대의 강대국들 밑에서 속국으로 지내는 동안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문제는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권의 확립의 문제였다. 하나님의 통치권이 확립되면 이스라엘이 독립을 다시 획득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메시야를 기다렸고 그가 오시면 이스라엘이 독립할 줄 확신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오직 그들에게는 메시야 소망뿐이었고, 메시야의 오심만이 그들이 살 길이었다. 이 소망에 선지자들이 크게 공헌하였고, 또 저들의 묵시문학이 기대를 더욱 부풀게 하였다. 메시야만 오시면 새 세계가 도입되어 이스라엘의 독립은 물론 이스라엘이 세계 위에 왕노릇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메시야가 오시면 하나님의 왕권이 확립될 것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 나라의 정의

이런 역사적인 상황 속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셨다. 하나님 나라를 듣는 백성들은 하나님의 통치권 확립과 그 왕권이 시행되는 영역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실 때 하나님 나라를 정의하실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 나라’의 발설자나 청취자들이나 그 기본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해의 공동 지반에 서 있었다. 성경적 이해의 배경을 가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로 하나님의 통치와 그 통치가 시행되는 영역으로 이해하였다.

이런 성경적 배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이고 하나님의 치가 이루어지는 사회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는 죄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성행하는 외적 악만을 얼마만큼 제재하는 세상 왕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를 통해서 설립되고 시행되게 되었다. 이제 하나님의 다스림은 메시야를 통해서 시행되게 되었다. 그러니 메시야의 오심이 곧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까이 와 있다(ἐγγικεν).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의 구현자이고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메시야가 와 계시기 때문이다. 메시야가 사람들 중에 와 계시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 중에 임하여 와 있다. 그러므로 가까이 왔다는 말을 현재 완료형(ἐγγικεν)으로 사용하였다(마3:2, 4:17).

메시야가 사람들 중에 와 계시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 중에 결정적으로 임하여 왔다. 이스라엘의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통치의 완전한 구현자이시다. 그 이전의 왕들은 이 메시야의 그림자였지만, 메시야는 하나님의 통치의 실행과 실현의 완전하고 참된 구현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할 때는 그 나라의 왕으로 오셨다. 하나님이 그를 자기 나라의 왕으로 임명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 백성들에게 나타내시기 전에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시고 이어서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하나님 나라의 왕 곧 메시야로 임직되시고 선포되셨다. 물세례 직후 성령으로 세례 받으심을 메시야로 임직되었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즉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아 메시야로 임직된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권능으로 오셨고 그러므로 성령의 권능으로 다스리게 되었다. 성령의 권능으로 다스리기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의 왕은 그 권능으로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추방하고 죄를 사하며, 기사와 능력을 행하셨다. ‘즉 사탄의 권세와 그의 왕국을 궤멸하여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리시고 죄를 해결하여 하나님을 사람에게 오시게 하셨다.

3) 유대인의 이해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들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자기들의 나라의 해방과 독립에 연결시키고 그리고 원수의 나라를 제압하고 세계를 지배하는 세상적 왕권을 생각하였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기적 행사에서 이스라엘의 자주 독립과 이스라엘의 영광을 생각하였다. 특히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독립의 가능의 능력을 보았다. 그러므로 그 기적 후에 사람들은 예수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로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세상 나라의 회복과 하나님 나라를 일치시키지 아니하셨다.

4) 하나님의 나라

예수 그리스도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로 각각 다른 내용을 생각하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통치로 이스라엘의 독립과 독립국가 이스라엘의 확립과 영광을 생각하였다. 그들은 옛날 다윗 왕이 다스리던 세상의 재판과 그 복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로 죄가 사해지고 제거돼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오시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신령한 나라를 뜻하셨다. 그러므로 성령의 권세로 병이 치료되고, 귀신이 추방되며 사죄가 이루어졌다. 이 나라는 신령하여 이스라엘 한 나라에 국한할 수 없고 전 세계 족속들을 포용하는 보편한 나라가 될 것이었다. 더욱 결정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인격으로 죄고의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께서 세상과 화해하시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결정적으로 수립될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때에 성령께서 인류들에게 오시기 때문이다.

세상을 구속하여 보편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세상적인 독립과 영광을 바랐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신령한 나라 곧 보편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 오셨다. 그는 죄문제를 해결하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 하였는데.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해결 곧 세상적인 나라를 추구하였다. 그것은 당대 세계 최강국가 로마가 추구하던 목표였고, 또 그 목표와 동일하였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목표와 유대인들의 목표가 달랐으므로 유대인들은 예수 스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기적 행사에서 걸려 넘어지고 반감을 갖게 되었다. 하루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고쳐 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이 일을 하나님의 역사로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야라고 하며 기뻐하였는데, 바리새인들은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훼방하여,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였다. 그들은 성령의 나타남과 권능을 훼방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을 책망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선언하시기를,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바리새인들의 기대와는 정반대 됨을 분명히 하셨다. 그러나 귀신을 쫓아냄으로 지금 하나님께서 직접 너희 중에서 다스리기 시작하셨다고 선언하셨다.

5) 구속으로

요컨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친히 다스리기 시작하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기 시작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결정적인 통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서 이다.

이 진리를 계시록 11장 15절이 분명히 한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고 하였다. 여기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에는 단순 과거 시제를 사용하였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이루어지지만, 완전한 다스리심은 종말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6) 세상 통치

그러면 여기서 제기될 수 있는 질문은 천지 창조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이후에는 다스리시고 그전에는 다시리지 안했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신약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과 다른 통치방식을 말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천지의 창조주로서는 이 세상을 지배하시고 보존하시며 섭리하시며, 인류 종족들을 인도하심에 있어서는 창조주로서 왕이시다. 그러나 죄가 인류를 지배하고 있는 한은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들에게 흘러들어 오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의 법이 사람들 중에 그대로 세워지고 순종되지 못하였다. 즉 하나님의 권위가 주권적으로 인정되어 준수되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의 법들이 인간 사회의 법과 질서로 세워지고 준수되지 못하였다. 또 죄가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 계실 수 없었고, 또 그들 마음에 실제로 오시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왕이시지 못하였다. 인류가 죄 아래 있고 하나님과 함께 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참 생명에서 단절되고 이렇게 모든 문제들과 악이 흥성하게 되어 세상이 파멸의 위기들을 수없이 겪어 오게 되었다.

7) 죄의 제거

하나님의 통치에 있어서는 죄가 선결되어야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문제의 해결 없이 설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자기의 나라를 세우시려고 할 때 죄를 제거하는 일을 먼저 하셨다. 따라서 인류 역사는 하나님께서 죄와 투쟁하시는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죄가 해결되기 전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자기의 나를 세우려고 하심을 창조 때부터 목표하셨다. 왜냐하면 그가 인간세계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나라를 세상 백성들 중에서와 세상 나라 위에 세우시려는 일을 창조시부터 목표하셨지만, 아담의 죄에로의 타락이 범죄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위에 세우는 일을 가로막았다.

첫 조상들의 타락과 범죄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세우는 일을 가로막아서 하나님의 지으신 창조로 하여금, 더 쉽게 말하면, 요한계시록 11장 15절의 말씀대로 이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게 하는 것을 못하게 하였다.

범죄는 어두움과 참패와 죽음과 고통 등의 적대 세력을 창조에 도입하여 창조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에서 떠나게 하여 창조 곧 우리 인간 사회와 세상 나라들이 파멸에 직면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창조주는 자기의 창조 목적을 낭패케 하실 수 없기 때문에 타락한 창조를 간섭하시고 섭리하셔서 보존하신다. 창조를 타락과 범죄로 인해 방기해 버리시고, 또 그 죄과를 물어 심판을 집행하셨다면, 하나님의 창조가 보존되고 존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창조주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는 창조 목적과 경륜을 가지셨으므로 이 타락한 세상을 간섭하시고서, 이 창조를 보존하시기 위해 모든 창조가 부패의 길로 가는 것을 억제하셨다. 이 창조의 보존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가능하게 됐고, 또 그 구속을 인해 보존하시기로 하신 것이다.

죄는 그냥 내버려두면 모든 것을 다 분리하고 분열케 해서 마침내 모든 것을 소멸하게 한다. 바로 이것이 죄의 특성이다. 구약 시편에 보면 범죄한 악인들에게 평안함이 없고 쉽게 세상에서 그 자취를 감춘다고 했는데, 그것은 범죄한 사람들이 그 인격에 분열을 겪고 또 범죄하고도 질병을 갖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죄가 사람으로 하여금 그와 같이 그의 인격에 분열을 일으키고 부패하게 할뿐만 아니라 파괴해서 그 사람의 생명을 쉽게 단축케 한다.

이처럼 창조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 가는 과정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이 세상이 타락하므로 온 세상이 다 어둠에 의해 감싸이게 됐고, 부패에 이루게 되어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권능으로 지어진 창조가 파괴되고 소멸되게 되었다.

그러나 창조주는 처음에 창조를 이루실 때 자기의 권능과 영광을 발현하고 발휘하셨고, 또 그 목적으로 창조를 만드셨다. 그 보다 더욱 바라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자기의 나라를 세우시므로 자기 백성들 가운데 자기의 영광이 수천 수만 배로 찬양되므로 더 큰 영광을 보시고, 자기의 인자와 긍휼과 권세가 백성들에 의해 찬양을 받으시려고 하셨다. 이 목표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창조를 파괴하는 죄를 그냥 방치해 두신 것이 아니고 이 타락한 세상에 간섭하셨다.

6. 하나님 나라의 복원

아담이 타락하므로 죄와 저주, 고통과 해악, 사망과 소멸 등의 적대적인 세력들이 인간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런 창조세계에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죄와 저주, 사망과 고통을 창조세계에서 제거하시려고 하셨다. 죄와 악을 억제하기 위해 일반은총이 역사하게 하셨고 기타 여러 방어 방치 제도들을 많이 두셨지만 그런 것들로는 죄악과 고통과 사망을 결정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결정적인 섭리를 이루셨다. 그것은 곧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구속주로 세우신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 아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며 구속하신다.

세상을 구속하신다는 말씀은 죄 때문에 우리의 모든 질병과 고통과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마지막인 죽음, 그리고 부패와 해체가 왔는데 이 모든 것들을 창조에서 제거하시고, 창조를 하나님께로 돌려 그의 영광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케 하는 것이다. 즉 피조물을 다시 하나님의 피조물로 복원시켜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이루시기로 하셨고 마침내 일을 이루시며, 종말에서 모든 것을 완전하게 회복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경륜과 섭리를 따라 마침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사 죄값을 지불하게 하시므로 악한 자의 권세에서 창조를 구출해 내신 것이다. 그리고 이 구속과 함께 마침내 모든 만물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셨다. 완전한 통일은 종말에 이루어질 것이어도 현재도 창조가 질서있는 세계 곧 코스모스로 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통일케 하는 역사와 붙드심 때문이다. 구속이 완료된 창조는 완전히 조화 통일되는 유기체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 이전까지의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그리스도의 출생의 예비였다.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당장 형을 집행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신 것이 아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여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형벌 곧 사형을 집행 유예하셨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 앞에 책임 규명을 받기 위하여 호출되었을 때, 변명하기를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고 책임을 전가하였다. 그 책임전가는 여인에게로 돌린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여자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살며시 책임을 하나님께로 돌렸다.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책임을 물으셨을 때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고 답하였는데, 하나님께서 만드셔서 선악을 아는 나무에 가까이 있어 지나게 하신 뱀이 꾀므로 먹었다고 답하므로, 이 모든 것의 책임을 간접적으로나 화살을 하나님께로 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은 인류를 당장 죽이지 않으셨다. 심판은 선언하셨어도 심판을 당장 집행하지 않으시고 집행유예를 하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는 경륜를 가지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는 아담의 후손들에게서 계속되었다. 노아에게 역사하사 죄악이 극에 달한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지만, 구속주의 오실 준비로 자연의 질서와 현상계가 더 이상 과격한 변동 없이 그 궤도를 달려서 창조가 운용되고 보존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더욱 본격적으로 인류 역사에 개입하시사 아브라함을 택하시사 그의 후손에서 구세주가 출생되게 섭리하셨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야곱의 열두 아들에게 역사하시고, 특히 요셉을 사용하시사 애굽에서 430년간 이스라엘 자손이 번창하여 한 민족을 이룰 수 있게 하시고,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하고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시고 광야 40년을 지난 후 여호수아로 역사하시사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게 하시고, 또 다윗 왕조를 세우신 후 솔로몬으로 성전을 짓게 하시고 하나님을 섬기며 구속주를 기다리게 하시기를 세례요한 때까지 하게 하셨다. 이 모든 것은 다 그것 자체들로 의의와 목적을 가진 것이라기 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을 준비하게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구속주의 출생 준비였고, 그 때문에 존재 의의가 있다.

마침내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여인에게서 낳게 하시고, 이스라엘을 지배한 율법아래 나게 하셨다. 율법아래 나게 하시므로 모든 율법의 요구들을 다 성취해 드리게 하시고, 그 율법의 요구를 따라 죄값을 치르기 위하여 피흘려 죽으심으로 그가 세상의 구속주가 되셨다. 그가 부활하사 하나님의 의가 되시므로 모든 창조로 하나님 앞에 다시 존재할 수 있게 하셨고, 하나님과 세상을 화목하게 하셨다. 이로써 성령께서 사람들 마음에 오시므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다시 오실 수 있게 되었으며, 인류를 자기의 백성으로, 자기의 소유로 가지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들에게로 흘러 넘쳐 오게 되었으며, 하나님은 그의 권능과 은혜와 영광을 인해 다시 찬송을 받으시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뢰되고 순종되며, 그리하여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다시 모시며 섬길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다시 자기의 창조에 오시게 되었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었다. 피조물들이 다시 하나님의 피조물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그 뜻에 일치해서 살게 되었다. 이 일이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가능해졌고 실제로 성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이 일을 이루시므로 그가 세상의 구속주가 되셨다.

이러므로 세상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 시작하였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 구속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는 모든 일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합당하게 나라 자체(αὐτοβασιλεία)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곧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냈다.

그러므로 세상의 구속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임명되셨다. 하나님 나라의 왕은 그냥 왕위를 아버지에게서 상속받은 것이 아니라 왕국을 생산해 내시고 회복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왕은 다스리실 뿐 아니라, 모든 창조를 자기의 나라로 통일하시는 일을 하신다. 하나님의 창조의 재통일은 왕이 자기의 피로 값주어 사시므로 가능하게 되었다. 왕은 세상을 다스리시고 통일해야 한다.

분열되어 있는 나라의 왕은 영광과 권세가 적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 세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를 지불하시고 사탄의 악한 권세에서 사 내시고 해방시키셨다. 완전한 통일과 구속은 종말에서 이루실 것이지만 현재로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셨다. 이렇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세상 나라들을 왕으로서 자기의 나라로 통일하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구속 사건 이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주 예수께서 다스리는 그 사회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적용되어 죄가 사해지고 성령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생명이 지배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그곳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영역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나라를 직접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고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통치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시행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서 사는 곳은 다 하나님의 나라이고 왕으로서 계시는 영역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 되시되 자연적으로 되신 것이 아니고 자기의 죄값을 지불하시고 전 인류와 모든 창조를 악한 자의 권세에서 사 내셨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나라와 인류사회의 모든 영역과 전 자연이 다 그의 것이 되었고, 또 자기 것이라고 권리를 주장하시게 되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값을 주고 사게 되면 그것은 내것이 되었고, 내것이라고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된다. 누가 비시를 걸어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내 것이라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전 인류와 자연, 그 안의 모든 영역들을 다 자기의 피로 값주고 사셨기 때문에 이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권리 주장을 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사회의 모든 활동 영역이 다 그리스도의 것이다. 지금껏 통상 생각해 오듯 교회만이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만을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직장 활동, 음악, 미술 등의 예술의 모든 활동 영역, 모든 문학 활동, 교수와 연구가로서의 모든 활동, 정치와 행정의 모든 활동, 경제와 언론의 모든 영역, 군사와 외교의 모든 활동, 자녀 교육, 주부로서의 가정의 모든 활동 영역 등 인간의 모든 활동 분야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영역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의 피값으로 모든 것을 사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것이라고 권리 주장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영역을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도록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는 책임을 지고 있다.

7. 하나님 나라의 왕 - 그리스도

하나님은 창조 경륜의 집행시 행하셨던 방식을 구속경륜의 집행시에도 동일하게 적용하셨다. 하나님은 창조를 이루실 때 자기 아들로 창조 경륜을 집행하게 하셔서 아들로 창조의 중보자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자기의 창조 경륜과 모든 계획을 다 아들 안에 있게 하시고, 그로 그 모든 경륜을 집행하사 창조주가 되게 하셨다. 창조가 성부에게서 시발하여도 실제로 창조의 경륜을 집행하사 창조를 이루신 이는 성자이시다. 그가 아버지의 창조 경륜을 집행하신 면에서는 창조 중보자이시나 창조를 실제로 이루신 면에서는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아들을 통하여 창조를 이루셨다.

이에서 나아가 아버지는 아들로 모든 창조가 상속자가 되게 하셨다. 이 진리를 성경은 그를 가리켜 모든 창조물 보다 먼저 나신 자(골1:15)라고 표현하였다. 구약이해에 의하면 처음 난자가 상속자이다. 히브리서는 더욱 명백히 그를 만유의 후사로 세우셨다고 진술한다(히1:2). 그러므로 창조의 상속자는 만유를 붙드시사 계속 우주로 존속하게 하신다(히 1:3).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그러므로 그가 만물을 붙드시고 보살피심으로 질서있는 조화의 세계 곧 우주가 되게 하신다(골 1:17).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러므로 아들이 창조의 보존자와 섭리주가 되신다. 이렇게 하신 목적은 아버지께서 아들로 인하여 만유를 통일하시려고 하시기 때문이다(엡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다시 반복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로 경륜하시고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이 창조를 아들을 통해서 이루시고, 그 아들을 왕으로 세우심으로 이 모든 세상을 통일하셔서 이 창조가 아름다운 창조가 되게 하셨다. 이 창조가 아름다운 자연이 된 것은 스스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왕으로 세우시고 통일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아름다운 자연이 된 것이다. 물리학자가 자연에서 자연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다 아들이 창조를 붙들고 계시면서 통일하시기 때문이다. 죄에도 불구하고 이 창조가 질서 정연한 통일체로 운행되고 있는 것은 창조계의 후사요 왕이신 아들의 통일케하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창조주는 창조후 섭리의 경륜을 잘 집행하시므로 창조의 본 목표에 이르도록 역사를 계속하신다. 만유를 통일 유지하시는 아들이 합당히 창조의 왕이시다.

이런 창조가 창조주에게서 탈락되어 가므로 하나님께서 그 회복을 경륜하시고, 이 일을 만유의 상속자이신 아들에게 의탁하셨다. 그러므로 창조주요 만물의 상속자이신 성자께서 구속경륜을 집행하시게 되었다. 이 구속경륜이 성부에게서 시발하시므로 성부께서 아버지의 경륜을 집행하사 구속을 성취하시고, 창조를 아버지께 돌리셨으므로 성자께서 성자께서 구속주이시다. 만물의 상속자이시요 만물을 통일시키시는 왕으로서 성자는 자기의 소유를 회복하기 위해 아버지의 경륜을 집행하셨다.

구속을 위하여 성자 하나님이 친히 육을 입으시사 신인간의 구속 중보자가 되시었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죄값을 지불하시므로 창조를 하나님께로 회복시키시고, 교회를 설립하시므로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셨다. 그가 부활하사 새 인류를 생산해 내시므로 교회의 주가 되셨을 뿐 아니라 회복된 창조의 왕이시다. 이 진리를 골로새서 1장 18절은 이렇게 표현한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사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다. 이 진리의 증거를 위해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저술하였다. 그가 육을 입으시므로 세상의 구원으로 오셨다. 그가 육을 입으시므로 하나님과 사람간을 확실한 보장으로 중보하시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가져왔고 그 귀결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키게 되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생명이 전달되게 되었으며 사죄가 수행되었다. 그러므로 사람들 가운데 평강이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창조의 완전한 회복은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육체에서 이루어지게 하셨다. 하나님과 적대관계를 해결하는 길은 죄값인 사망을 치르므로 죄값을 치르게 하셨다. 피흘려 죄값을 치르므로 인류를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받으시고, 그의 공의를 만족하시사 죄과를 도말하시고 자신을 세상과 화목시키셨다. 이 속죄와 화해의 일을 하나님이 친히 마련하셨다. 그러므로 그가 세상의 구속주이시다. 하나님의 법이 범죄가 범해진 그 본성에서 속상되게 정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 법대로 속죄와 화해를 이루시기 위해 자신이 친히 육을 입으시기로 하셨다. 하나님께서 육을 입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셨다.

그리고 자기의 육체에 죄과를 담당하시사 그 죄의 법이 정한 사망의 값을 지불하셨다. 그러므로 인류의 죄과 문제를 해결하시고 하나님이 친히 세상과 자신을 화해하셨다.

이 속죄가 화해 곧 구속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인류에게 전달되어 새 인류를 조성하셨다. 이 새인류에게 하나님의 영이 오사 역사하사, 교회의 형태로 존속하게 하셨다. 이 새인류 공동체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자기의 뜻을 실현시키며, 자기의 영광을 찬송 받으신다. 하나님께서 친히 새인류에게 오시되 성령으로 오시고 그 안에서 새 생명을 공급하시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신다. 이 백성을 자기의 소유로 삼으시고,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덕과 은혜와 영광을 찬송 받으시므로 창조 목적을 실현시키신다.

이렇게 구속을 이루사 새 인류 곧 교회를 조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교회의 주인이시고 회복된 창조의 왕이시다. 새인류를 만들어 내시므로 그가 그들을 다스리신다. 본래 창조의 왕이신 이가 구속의 사역을 통하여 창조를 회복하심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가져오시므로 구속주 성자께서 다스리신다.

타락한 창조를 속량하시므로 회복된 세계를 다스리신 하나님의 아들은 인류역사의 시작부터 인류와 함께 계시고 인류에게 자주 현현하셨다. 에덴의 타락시 낙원에 임재하사 구속 중보자로 역사하셨으며 족장들에게도 자주 현현하셨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족장들은 자주 만나주셨고, 모세에게 현현하시고, 사사기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육신으로 오실 하나님이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오실 그 하나님이 인류 역사의 초기에서부터 나타나시고 역사해 오셨다. 이 성자 하나님 혹은 제 2위 하나님께서 자기 창조를 구속하시고 회복하시기 위해서 성육신하셨는데, 그의 인류에게의 현현은 자기 성육신의 준비 과정이었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인류의 구속을 위해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렇게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창조의 회복과 구속을 위해 희생의 제물이 되사 그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 드리므로 창조를 사탄과 적대 세력으로부터 구출하셨다. 그냥 세상의 구속주가 되신 것이 아니며 그냥 만유의 상속자와 맏아들이 되신 것이 아니라 자기가 친히 희생의 제물이 되시므로 죄를 제거하여 세상을 악한 자에게서 구출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돌리시므로 왕이 되사 창조를 통일하시게 되었다. 이렇게 창조주는 자기의 피값을 지불하시고 자기의 창조를 자기의 것으로 권리를 재주장 하신 것이다. 창조를 처음 조성하셨을 때에도 자기의 무한한 권능과 지혜를 발휘하셔서 창조를 이루셨기 때문에도 자기의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중간에 타락하였기 때문에 자기의 피를 값으로 지불하시고 이 창조를 다시 자기의 것으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이중으로 자기의 것이라고 권리를 주장하실 수 있게 되었다. 창조와 구속 때문에 이 세상은 이중으로 그리스도의 것이다.

이같은 값을 지불하신 구속주가 자기의 창조에 왕으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구속주는 왕으로서 창조의 모든 부분들과 함께 인간 사회의 모든 영역을 자기의 것으로 권리를 주장하신다. 그리고 인간 사회의 모든 영역을 자기에게로 성별하여 드릴 것을 요구하신다.

창조주와 구속주로서 이중으로 내 것이라고 권리를 주장하신다. 그가 창조주로서 이 세상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함도 당연하지만, 타락한 창조를 자기의 것으로 돌리시기 위해 친히 그가 죽으심으로 피값을 지불하시고 자기의 것으로 사셨다. 이렇게 구속의 사역을 이루신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의 영역들 곧 자연과 인간 사회의 모든 영역들을 자기에게 성별해 드리도록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이 권리주장과 성별 요구를 거역할 수는 있으나, 이 요구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피할 수 없고, 또 그 요구에 대한 책임을 피할 자는 아무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불하신 그의 피값 때문에 그러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력으로 세상을 정복한 징기스칸과 같은 영웅들처럼 하지 않으시고, 이 세상 모든 나라들을 자기의 것으로 거룩하게 구별하여 바쳐 드리라고 요구하신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방식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에 사는 자들은 모두 창조를 성별하여 주 예수께 바쳐 드릴 책임을 진다. 이 요구를 거절할 수는 있으나, 이 요구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사는 자들은 이 성별 요구를 잘 인지하고 왕의 명령을 순종하고 준행해 드려야 한다. 이 준행은 교회와 개인의 경건 생활 영역에서 뿐 아니라 모든 생활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생활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로 또 구속주로 고백되고 인정되게 해야 한다.

창조를 계발하여 그 비밀들을 캐낼 뿐아니라, 그것들을 창조주와 구속주의 것으로 인정되고 고백되며 감사와 영광을 돌려 드림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현금 사회에서의 문제점은 창조는 계발하여 그 비밀들을 밝혀내고 응용하면서도, 그것을 창조주의 것으로 인정하고, 구속주의 은혜로 감사하는 일이 전혀 없이 세속적으로 진행되는 점이다. 창조의 비밀들과 법칙들이 창조주의 것으로 인정되지 않고, 그렇게 있음은 의당한 것으로 치고 그 비밀을 캐내기 위해 수고한 자만 찬탄과 영광을 본다. 이것이 현금 문명사회에 진행되는 창조 질서의 번복이고 변질이다. 이런 현실에서 기독자들은 왕의 명령과 요구를 준행할 당연한 책임과 사명을 지닌다.

또 인간 사회에도 창조 질서에 맞게 법들을 세워 그것들이 하나님의 권위 아래 집행되고 준행되어야 할 것이다. 바른 법질서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가르치신 바를 바로 이해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법에 배치되는 법들을 국가의 권력에 의해 강제로 세워서는 안되고, 또 하나님의 법에 배치되는 가증한 일들을 다수의 관습 때문에 법을 설립해도 안될 것이다. 인간 사회의 법들을 설정할 때에도 창조의 질서에 합하는지를 살피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합하는지를 바로 살펴야 할 것이다. 즉 인간사회의 법질서의 설정과 준수가 하나님의 말씀의 빛아래 서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인간 사회가 인간들만의 사회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주와 구속주로서 역사하시는 인륜사회가 되게 해야 한다.

창주주께서 왕으로 다스리는 사회는 너무 엄준하고 냉혹한 인간 사회가 될 것이다. 냉혹과 형벌만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속주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사회에는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 있어서 재생이 있게 될 것이다. 법이 엄정하게 서면서도 법이 역사하여 자유와 용납이 있고, 사랑의 법이 역사하여, 자유와 해방을 누리며 살게 되어 감사와 기쁨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창조주와 구속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 한다.

이 사회에서는 창조의 계발이 단지 인간들만의 일이 아니고, 그 계발은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의 인정이고 현시가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그에게 감사를 돌려 드리므로 창조주로서 영광을 보시게 된다. 창조의 계발에서 인간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들여다보고, 그 지혜를 해독하므로 하나님의 작은 복사물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선다. 이런 사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역사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거주하신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짐은 하나님의 창조 경륜이 실현되는 것을 뜻한다. 이 경륜이 완전히 실현될 때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만물의 목표이다.

하나님은 사람들 중에서 자기의 경륜을 실현시키시기 위해서 열심이시다. 사람들에 의해 자기의 경륜이 다 구현되지 못할지라도 창조주는 마침내 일을 다 이루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창조주로서 자기의 창조를 구속하사 자기의 소유로 완전하게 확보하셨기 때문이다. 종말에 그의 권능을 발휘하사 창조의 과정을 마감하시면서 창조의 비밀을 다 드러내시고 자기의 영광을 충만케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유 중에 만유가 되심을 자기의 손으로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8. 하나님 나라의 설립과 확장

1) 나라의 설립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인위격으로 신인간의 중보자가 되시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사 피흘려 죄로 인해 부패의 덩어리(massa corruptionis)가 된 인류 중에서 사람들을 사 내시고, 성령을 보내시사 새 인류를 만드셔서 교회가 되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설립하셨다. 그의 피로 속량받은 백성들이 예수의 영으로 살고 그의 말씀을 순종해서 살므로, 하나님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뜻이 순종되고 성취되며, 그의 덕과 은혜가 감사되고, 그의 모든 경륜과 섭리가 찬양되고, 영광을 찬송 받으신다. 이 새 인류는 성령의 지도를 좇아 살며, 하나님의 말씀을 법으로 하고 산다. 이 진리를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계 1:5-6)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리사 사람에게서 죄과를 제거하시고 자기의 백성을 속량하시사 성령을 보내시므로 하나님의 백성을 조성하시고 그의 나라를 세우셨다. 주 예수께서 피흘리시사 세상을 하나님과 화해시키시고, 부활하시므로 의를 이루어 하나님의 백성이 생겨나게 하셨다. 그의 부활은 인류에게 새 생명을 가져오므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인류를 만들어 내셨다. 이들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을 인해 그를 항상 찬양하며 경배하고, 그의 법을 지키며 살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립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요 근본이요 완성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의 모든 것을 창출해 내셨다. 그가 죄과 문제를 해결하여, 하나님께서 사람들 중에 오실 수 있게 하였고 따라서 친히 하나님의 생명을 가져오시고 평강을 가져오셨다. 그리고 성령을 획득하시므로 인류가 더 이상 육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지배받아 사는 존재인 영으로 살게 만드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의 영광에의 동참 소망으로 살게 되었다. 또 사람들의 매일의 생활에서 하나님께서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는 생활 곧 제사장의 삶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알파와 오메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시고, 또 친히 그가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오히려 초대 기독교 교부인 오리게네스(Origenes)의 증거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 자체(αὐτοβασιλεία)이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떼어 놓고는 생각할 수도 없다.

2) 나라의 확장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구속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므로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로 사람들 가운데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는 인류에게서 결코 소실되어 없어지지 않고, 자라고 확장하는 영존하는 나라이다. 이 나라는 모든 산들의 꼭대기 위에 뛰어나고 그 산들 곧 모든 나라와 족속들을 다 포용하는 크고 광활한 나라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그 나라의 법칙과 생명력의 역사로 자라고 확장된다. 이 나라의 내적 법칙의 운동과 생명력이 가만 정체하게 하지 못한다. 계속해서 처음 세워진 영역의 한계를 넘어서서 새 영역에로 확장되어 가고 파급된다. 그 나라의 넘치는 생명력이 역사하여 나라의 영토 확장을 위해 모든 힘을 다 동원하게 한다.

하나님 나라의 왕은 자기의 백성을 감화하시고 동원하시사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고 확장되게 하신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들로 자기들만 그 나라에 속함을 만족하고 있게 하지 못하게 하신다. 다른 사람들과 백성들로 하나님 나라에 가입하도록 설득하고 강권하게 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정체할 수 없고 시간과 함께 계속 확대되고 성장하는 생명력이 넘치는 나라이다.

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사죄를 선포하므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으로 세워졌으므로 확장도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을 전하므로 이루어진다. 나라의 설립이나 확장이 다 같은 힘과 원리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의 나라는 무궁하여 영존하는 나라이며, 한 두 나라에 국한될 수 없어서 모든 족속과 나라들을 포용하고, 역사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그렇게 하여도 세상적 권세와 방식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려 죽으심과 부활, 그의 주 되심과 성령을 허락하심의 선포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죽으심을 하나님의 구원의 길로 선포하므로 확장된다. 그 외 다른 길은 다 하나님의 나라를 돕지 못하고 대적한다. 아무리 인간적 관점에서 유익을 많이 가져올 것처럼 보이는 방법들도 하나님의 나라를 돕고 유익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부패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세상 나라처럼 무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복음 전파와 그 세력으로 이루어진다. 히틀러(Adolf Hitler)처럼 무력과 폭력으로 구라파 제국들을 진압해서 확장하듯 하지 않고, 또 좀 더 선한 목적과 의도로 했던 로마 제국 최초의 그리스도인 황제 콘스탄틴 대제처럼 무력으로 서방에서부터 밀고 와서 동방의 적수를 물리치고 로마 제국을 통일하고서 니케야 공회의를 개최한 것처럼 이루어지지 않고, 또 좀더 좋게 말하여, 로마 교황이 ‘내가 말하노라’ 하면 구라파와 로마 교회 세계가 말을 듣게 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를 이와 같은 방식으로 확장하지 않으신다. 가장 권세 있으신 분이 자기 나라 확장에는 그런 권세의 방식을 활용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세상의 눈에 가장 무력한 방식을 사용하신다.

본 필자는 크리스마스를 만날 때마다 자주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어찌하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구속주로 오실 때 연약한 가운데서도 더 연약한 모습으로 오셨는가? 어찌하여 요한 계시록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백마를 타고 승승장구하는 개선 장군처럼 오셔서 세상의 모든 군왕들의 목을 발로 짓밟고 누르듯이 오시지 않으시고, 왜 그와 같이 연약한 모습으로 오셔야 했는가를 생각해 본다. 세상에 다시없는 승승장구하는 장군의 모습으로, 더없는 권세자로 오시지 않으시고, 말구유 위에 연약한 모습으로 오셨고, 세상과 자기의 나라를 통치하시는 방법도 무력에 의해서 하지 않으시고, 복음 전파와 그 나라의 세력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신다.

복음 전파로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오면, 그들의 영혼이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입적된다. 사람들을 강권하여 예수 믿도록 교회로 인도하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로 그들의 죄가 용서되고 또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입적된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

사람들에게 자녀들이 출생하면 반드시 호적 신고하여 그 나라의 시민으로 등록케 한다. 부모가 무식하다고 하여, 10, 20, 30세가 되도록까지 방치해 두는 것이 아니고, 이장, 반장, 통장을 통해서라도 호적에 입적시킨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호적 등록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옴으로 된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와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주 예수를 자기의 주님으로 고백하고 세례 받으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등록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백성들에게서 죄를 제거하므로 이루어진다. 죄의 제거가 하나님 나라 건설의 첫 단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길은 할 수만 있으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파를 힘써 하고 힘있게 하여 사람들로 그를 주님으로 고백하도록 해야 한다. 이 때 죄가 용서되고 새 생명으로 태어난다. 예수 믿어 새 생명으로 다시 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의 출생이다.

그러므로 사람들로 예수 믿어 죄용서 받고 새 사람으로 출생하게 하는 일을 쉬임없이 계속해야 한다. 이미 예수 믿는 자들로 만족해서는 안되고, 사방에 예수 복음을 널리 전파하여야 한다. 동시적으로 만방에 복음을 전해야 하고, 시대적으로 계속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렇게 시대적으로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신자들의 자녀들도 이방인으로 되돌아가고 만다. 그러므로 교회가 자녀들에게 복음의 전파와 교육을 근실히 해야 할 것이다.

3) 신앙 교육

교회 내에서의 신앙 교육은 제2세들이 신자들의 가정에서 출생하였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신앙은 자연적이고 의당한 것처럼 알고 진행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의 입적을 결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자녀들에게도 주 예수를 그들 개인의 주님으로 모셔들이도록 촉구해야 한다. 부모들의 주님, 가정의 주님에서 자기들 개인의 혹은 자기들 인격의 주님으로 모셔들이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 어린 자녀들이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주님으로, 구주로 모셔들이고 고백하게 해야 하고, 또 그것을 자신이 분명히 자기의 신앙 행위로 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신앙 가정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신앙이 자동적인 것으로 알고 신앙 교육을 진행하면, 그들은 이방인으로 결과할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의 대상은 일차적으로 교회에 출입하는 제2세들이다.

또 교회에 오는 불신 자녀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신앙 행위로 모셔들이게 권고하고 가르치고 설교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복음서들의 사건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이야기화 하여 이야기로만 전달하면, 그 애씀이 신앙 결정에로 귀결하지 못한다. 지금껏 우리 한국교회 주일학교 교육이 그 많은 인적 재정적 투자에도 불구하고 별로 성공하지 못하고 대부분 실패로 연속되어 온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복음서의 사건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들을 복음으로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신앙 고백하도록 노력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구원으로 선포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리하여 성경 말씀 특히 신약의 가르침들을 받는 어린이들이 성경 이야기, 예수 이야기로만 듣도록 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단지 교육 대상으로 보고 신앙 지식의 전달과 증가에 주력하는 교육 방식을 지양하고, 그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보고 신앙 지식의 전달과 증가에 주력하는 교육 방식을 지양하고, 그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보고 선교의 절박감에서 교육을 해야 할 것이다. 예수 이야기로는 신앙을 깨워 일으키지 못한다. 예수 행적이 복음으로 선포되고, 그리고 수납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도록 촉구할 때만이 주일학교 종교교육이 소기의 목적과 성과를 거둘 것이다.

이미 신앙을 수납한 어린이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이 복음으로, 구원으로 선포되고 촉구되면 그들의 신앙이 더욱 자라고 확고히 된다. 신앙에로의 결단 촉구와 복음으로서 예수의 행적 선포와 함께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바른 법도를 어린이들에게 전해야 한다. 이것도 복음의 도로 전해야지 율법의 방식으로 금지와 억제의 길로 가르치고 전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린이들이 소극적이 되고 마음에 제재를 많이 느끼게 되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해방과 자유 안에서 행동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종교교육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이것이다. 그리하여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힘있게 계명들을 지키는 인간을 산출해 내지 못하고, 소극적이어서 대개는 어떤 것들을 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복음을 받으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할 자들이다. 어린 생명에 심긴 것은 그들의 성장과 함께 자라기 때문이다. 자라는 것은 결실하여 30배, 60배, 100배로 번창하고 확산된다. 어린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자라면 그들 속에 심겨진 복음의 씨로 자라, 그 복음에 합당한 인격이 되고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자기들의 전문 활동 분야에서 일하여 미친 영향력은 헤아릴 수 없이 크게 된다. 그 결실은 30배, 60배, 100배 이상일 것이다.

추수를 바라면 봄에 씨뿌리고 가꾸어야 한다. 씨뿌리고 가꾸지 않으면 잡초만 무성하여 결실기에 거둘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우리도 복음의 결실을 원하면 어린 심령들에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으로 가꾸어 그 복음 안에서 자라게 해야 한다. 씨뿌리고 가꾸지 않고 거두려고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다. 복음으로 씨뿌리면 반드시 열매 맺을 것이다. 복음으로 씨뿌려 기르면 교회의 일꾼들만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각 활동 분야에서 일하여 큰 복음의 빛을 낼 일꾼들이 많아질 것이다. 학문,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크고 유능한 인재들이 나와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성인으로 중간에 개종한 자들도 크고 유익한 일을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바로 자라지 못했기 때문에 바른 결실을 많이 기대하기 어렵다. 복음의 씨로 자라고 인격이 갖추어진 자들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설립되고, 확장되도록 하려면 어린 생명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로 그 복음에서 자라도록 교육해야 한다.

또 어린 생명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주력해야 할 점은, 그들은 복음을 훨씬 쉽게 받아들이고 순수하게 수납한다는 사실이다. 성인들은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고, 또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쓰는 노력과 시간과 재정의 몇 분의 일만 가지고도 어린아이들에게는 복음을 쉽게 전할 수 있고 바르게만 가르치면 평생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어린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 언제 결실해서 사용할 수 있을까 하고 통상 생각하지만 결실 주기는 생각보다 빠르다. 어린아이들이 곧 중고등학교 과정, 대학을 거쳐 성인이 되고 사회에 봉사한다. 유년주일학교 기간에서 대학을 마치는 기간이 약 10년 정도이고 15년 20년 기간에 유능한 인재들을 쉬 생산해 낼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가장 많이 투자해야 할 곳이 어린이들이고, 바른 종교 교육으로 쭉정이가 아니고 알곡을 거두는 수고를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의 성공 여부는 어린이들의 교육의 성공 여부로 결정된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의 목회사역에 있어서 설교만큼 중요한 것이 교육 사업이다. 교육에의 성공은 곧 목회의 성공에로 연결되어 교회를 바르고 튼튼하게 부흥케 하는 지름길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설교에만 전력하던 데서 교육에 주력하는 데로 방향 전환해야 할 것이다. 목사의 2대 직무는 설교와 교육이다. 그리고 우리 속담 “심는대로 거둔다”는 말처럼 교육은 반드시 헛되지 않아 교육한대로 열매를 거둘 것이다.

지금처럼 무종교적인 시대에도 신앙 교육 받은 대로 신앙인으로 자라고 활동한다. 세계적인 두뇌의학자로 1975년 생을 마친 와일더 펜필드(Wilder Penfield) 교수는 1921년 미국 프린스톤 대학의 철학과를 졸업한 사람인데, 그가 두뇌의학으로 전향한 후, 수천, 수만의 두뇌들을 검사하고서 결론하기를 영혼은 두뇌와 독립적 기관으로 존재하고 활동한다고 주장하였다. 영국의 전통을 따라 미국 의학계가 영혼을 단지 두뇌의 기능뿐이라고 전통적으로 신봉되어 온 바탕에서, 영혼의 독립적 존재와 사후 존재, 그리고 영혼의 창조를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과학적 실험과 검사에도 기인하지만 그의 어렸을 적부터 받아 온 신앙교육이 그로 하여금 혁명적 선언과 전환을 할 수 있게 하였다. 바른 신앙 교육이 한 사람의 일생 경력과 그 종착역을 결정한다(참조, Wilder Penfield, The Mystery of the Mind). 펜필드 교수는 하나님 나라에 큰 기여를 한 훌륭한 학자이다.

한국교회도 바른 신앙 교육을 시행하면 하나님 나라의 일군을 각계 각층에서 많이 생산해 낼 것이다. 또 복음의 수요는 각계 각층의 만민을 포괄하는 보편적 수요이므로 어느 특정 계층을 전도의 대상으로 제한할 수 없다. 가령 전도의 대상은 가난한 자들만이 주력일 수 없다. 가난한 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비교적 쉬운 자들이지만, 세상의 것들을 풍성히 가지므로 만족하는 자들도 복음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자들이다. 많은 재물을 가진 자들, 많은 권세와 높은 지위를 가진 자들, 많은 지식을 가진 자들도 복음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세상의 것으로 풍요하기 때문에 죄문제로 인한 고난과 고통이 더 큰 자들이다. 세상 것들을 풍성히 갖고 평온한 생활을 할 수 있으려면 그들에게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바른 생활의 법이 그들을 지배해야 한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으로 부요한 자들을 부러움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복음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자들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부자들에게는 죄가 지배하므로 대개는 방종이 생활의 법이다. 육체적 포식과 성적 쾌락의 추구와 만족, 하고 싶은 것이면 막지 않고 하는 방임과 방종이 그들을 지배한다. 그들은 복음의 능력 아니고는 돌이키고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 사역자들이 너무 돈에 연연하지 말고 부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영혼이 얼마나 곤고한지를 바로 알고 복음의 권세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또 권력자들은 자고하고 교만해지기 쉬운 자들이다. 권력을 자기 손에 쥐고 큰 일들을 집행하기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도 없어서 자고하고 교만해지기가 십상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큰 죄악들을 범하는 것을 예삿일로 여긴다. 그리고 자기 권력에의 도적 세력을 박멸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한다. 이들이야 복음을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진리를 알기 전에는 그들은 방자와 방종을 생활의 방식으로 하고 산다.

높은 지식을 가진 자들도 그들의 지식이 자기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알게 해야 한다. 고대 희랍 철학에서는 자식은 구원의 길이었다. 참 이론적 지식으로 해탈에 이르고 유한을 넘어서서 신들의 세계에 이를 줄 믿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한 이론적 지식을 희랍인들은 높이 샀다.

현대인들은 지식이 주로 응용적 지식이다. 이 기술적 지식으로 자연의 압제와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에 이를 줄 믿게 되었다. 이 목표와 이상 때문에 근세인들은 자연을 이해하고 정복하려고 줄기차게 노력하였다. 이 때문에 현대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넓은 영역들에서 자연 위에 세력들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 세력들의 행사가 현대 사회의 구조를 중앙 집중적(Collectivistic)이 되게 하여, 많은 생활 영역들을 중앙 통제식으로 만들었다. 이런 중앙 통제식은 대부분의 경우 인간을 자연 세력의 연장선에 두게 하여, 근세인의 염원인 개인적 자유와 해방을 박탈하여 인간을 인과율적 연쇄 작용하에 두게 하였다. 그리하여 개인들로 하여금 내적 무능과 무력감에 종속되게 하였다. 지식은 결과적으로 일면 해방과 자유를 가져왔지만 다른 면에서는 더 크게 억압하고 속박하게 하였다. 지식은 사람들로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하였다.

4) 바른 학문 활동

인간의 지식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복음만이 사람을 구원한다. 많은 지식을 가지 자들의 눈에 유치하게 보이는 지식 체계라고도 할 기독교가 구원의 길이다. 지성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많은 지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지식이다. 지성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같은 지식 수준 혹은 논의 능력의 수준에서 접근해야 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갖는 학적 전제가 기독교의 참 지식 체계에 비추어서 어떻게 타당하지 못한지를 밝힘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교회가 많은 크리스챤 지성인들을 양성 배출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가장 합리적 지식 체계인 기독교의 전제와 논의로 지성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가장 합리적인 지식 체계인 기독교의 전제와 논의로 현금 진행되는 자연과학적 방법의 불합리성을 지적하므로 기독교만이 지식의 구제책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고, 또 세상의 지식이 가능함도 그분 때문이다. 자연과 세상의 바른 이해와 해석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해석해 놓으신 해석의 빛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 해석에 의해 재구성한 지식이 아니고는 참 지식일 수 없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기의 창조를 다 계획하시고 경륜하셨을 뿐 아니라, 그 경륜 따라 창조를 조성하시고, 그 창조를 다 해석해 놓으셨다. 해석되지 않은 창조의 부분은 아무데도 없다. 이제 비로소 인간에 의해 처음으로 재료들을 모아 해석해야 하는 어두운 세계로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이미 하나님의 바르고 합당한 해석으로 철저히 해석되어 모든 세계가 빛으로 가득하다. 단지 인간의 지성이 좁아서 그 해석을 포착하고 다 이해하지 못해서 방황과 미로를 거듭할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학문 활동에 있어서 하나님의 해석을 담아 놓은 성경을 진리의 빛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해석을 재해석하고 하나님의 지식을 재구성하는 유비적 성격을 지니므로 학문하는 노력이 허사가 안되고, 또 그러므로 창조의 한 국면을 절대화하는 주의(主義, ism)化를 막을 수 있다.

결국 학문은 하나님의 계획과 경륜 따라 창조된 창조를 연구하여 사물의 성질과 이치와 법칙을 규명하여 정리하고 해석하여 체계화하는 활동이므로, 하나님의 지식체계를 반복하는 형태를 취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해석의 원리를 구해 오지 않으면, 사람들의 학문이 바른 지식의 체계와 전달을 성취하지 못하고 독단에 이르고 거짓 지식체계가 되고 지식의 파편밖에 안될 것이다. 학문이 구제되는 길고 하나님의 말씀에로 돌아가고, 그리스도의 구속에 기초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창조의 존속은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가능해졌고, 또 실제로 그러하며, 학문이 그 대상으로 하는 창조가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속량되고 존속되어 학문도 비로소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에서도 그리스도의 구속은 증거되고 고백되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학문도 하나님의 말씀의 빛아래서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지성인에 대한 선교의 필요성은 더욱 절박하다.

또 현대 사회는 대학과의 연관 관계에서만 바로 이해될 수 있다. 현대 산업 사회의 발전은 대학에서 학문의 전수와 연구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도 없다. 대학 실험실과 연구실에서의 연구 결과는 곧 사회 생활에 파급되어 가히 혁명적인 영향을 미칠 때가 많다. 그러므로 대학인들은 그 사회의 엘리트들로 현대사회의 주력 세력을 이룬다. 이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과 가치관 형성에 미치는 파급 효과는 팜으로 크다. 이들이 바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고 학문 활동을 할 때 사회의 혼란을 축소할 수 있으며, 과학적 결과들의 이용으로 범죄에 주력하도록 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학 지성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시급하다.

또 지성인들을 복음화하는 것이 필수적인 이유가 있다. 학문의 세계도 그리스도께서 피값으로 자기 것으로 사셨고 그러므로 권리 주장하신다. 그러므로 학문의 영역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역사하시도록 해 드려야 할 사명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학문도 그리스도의 구속과 그의 왕권을 확립해 드리기 위해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학문도 그리스도의 것이다. 이런 목적 실현을 위해 아브라함 카위퍼는 암스텔담에 자유대학을 건립하였다.

이렇게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가 다 그리스도의 왕권 아래 놓이게 하여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사회가 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복음의 전파가 각 계층에 예외 없이 전파되게 해야 할 것이다.

5) 죄악의 억제

복음의 전파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해 드리면 죄가 제거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오시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길이다.

뿐만 아니라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유지되는 길도 죄의 제거와 죄 개입의 방지로만 가능하다. 죄는 아브라함 카위퍼의 말대로 분리하고 분열하는 역사를 하므로 죄가 개입되면 깨어지고 흩어지는 일이 자동적으로 진행된다. 죄가 개인과 교회와 단체와 어떤 사회에 들어오면, 그 개인의 영혼이 병들어 쇠잔하고, 인격의 분열을 심하게 경험하여 모든 기관들이 쇠잔하고, 육체가 병들어 빨리 죽게 된다. 죄짓기 전에는 한번만 해보면 다시없을 좋을 것처럼 장밋빛으로 황홀하게 보여도 한번 저지르고 나면 세상이 빛을 잃고 잿빛으로 변하며, 입맛이 쓰며 불안과 초조와 공포와 좌절과 실의가 숨가쁘게 반복한다. 결국 죽음에로 재촉한다.

교회에 죄가 들어오면 교회가 당하는 수난과 충격과 그 파급 효과가 너무도 크다. 특히 목회자가 범죄했을 경우 그 교회가 당하는 상처는 너무도 크다. 죄는 인격적인 행동이고 윤리적인 성격이어서, 범죄 당사자들만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고 교회 전체에 큰 파괴적인 힘을 미친다. 교인들 중 많은 수가 속임 당한 것이 분하고 원통하여 그 교회를 떠나 이곳 저곳으로 다니며 방황하며, 또 다른 이들은 이제껏 흙탕물을 받아 생수로 마신 것이 분하고 더러워 떠난다. 그리고 그들이 크게 충격을 받아 주를 믿는 신앙이 약화되고 나태해져서 소망과 용기를 잃는다. 즉 많은 영혼을 실족케 하여 낭패케 한다.

이처럼 중생하여 죄를 벗어난 사람들이 모인 단체인 교회에 죄가 들어오면 교회가 파괴되고 바로 자라지 못해 없어지지는 안해도 앉은뱅이와 같은 교회가 되기도 하고, 마른나무와 같은 교회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밖의 사회에 대해 빛을 잃어 조소거리가 되고,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길에 버리어 밟히는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전도의 문이 막혀 구원 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다. 따라서 주 예수의 이름이 욕을 먹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곳에 서지 못하게 한다. 죄가 이렇게 파괴적인 역사를 한다.

죄가 완전히 제거되지 못한 교회에도 죄가 이런 무서운 파괴적 역사를 이룬다면, 처음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미친 아담의 타락이 미친 효과와 영향은 가히 어떠했는지 희미하게나마 추측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저주가 내려지고, 사망이 도입되고, 부패와 허무가 지배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세상의 이전의 찬연한 빛을 상실하였다. 지성이 어둡고 혼미해지고, 도덕적 판단과 바른 양심이 방향을 상실하고 우매해져서 가증한 것들만을 토해내며, 감정과 정서는 혼란하고 비천해져서 음탕한 것만을 좋아하게 되어 천사 같던 왕적 존재가 작은 동물의 동작과 울음소리에도 두렵고 떨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보다 좀 크다고 보이는 것은 다 자기의 보호자로 의지해야 설 수 있다고 생각하리만큼 미천해져서 피조물들을 신들로 섬기게 되었다. 그리고 또 가난과 결핍과 무의미와 목표 상실이 사람들의 생을 지배하였다. 그리고 육체에 병들어 당하는 고통이 크고, 자연이 미치는 해악이 너무 커서 사람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개미처럼 살게 되었다. 전쟁과 질병은 인류를 파리 떼처럼 대량으로 지상에서 소제하여 갔다. 인생은 생의 목적도 없이 실낱같은 목숨을 몇 년 존속 받아 살았다.

이제 그리스도의 구속이 오니 세상이 다시 빛을 발하고, 사람들이 새 생명으로 살아나게 되어 교회가 되고 하나님께서 다스리기 시작하시고, 그 통치의 영역을 복음의 선포와 그 세력과 함께 확장해 가신다. 그러므로 교회가 죄악을 극력 피하고 막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교회 되지 못하고 다시 죄악에 침잠하면, 멸망뿐일 것이다. 죄의 역사는 과격하여 교회 뿐 아니라 사회와 인류와 지구의 존속까지도 위협한다. 이 죄악과 그 파괴 역사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멸절되지 않고 존속되어 온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붙드시고 구속 경륜을 펴셨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 파괴적 죄의 역사에서 구속받은 백성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죄를 억제하고 배제하기 위해서 최대의 노력을 다 기울여야 할 것이다. 작은 죄도 관용하고 묵과하면 안되고 척결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화평이란 명목 아래 죄를 덮고 묵과하는 것은 교회를 교회 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의 진행을 과격하게 억제하는 처사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죄의 파괴적 본성을 잘 알고 죄를 억제하고 배제하기 위해 권징을 성실히 수행해야 할 것이다. 권징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 되기를 그치기 시작한 교회이고 마침내 교회 되지 못할 것이다. 교회와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진행되도록 하려면 교회는 권징하여 죄악을 억제하고 막하야 한다. 권징하지 못하는 현대 교회는 머지 않아 사람들의 단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을 예수 믿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의롭다 함을 받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로 고백되므로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신다. 주님이라는 말이 곧 왕이시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시다.

6) 주 예수

교회의 최초의 신앙고백은 주 예수(Κίριος Ίησούς)이다. 이 고백은 ‘예수는 주시다’, 혹은 ‘주 예수’라는 두 뜻을 갖는데 ‘예수는 주시다’가 신앙고백의 바른 내용이다. 초대 교회가 부활하신 예수에게 주(Κίριος 퀴리오스)란 칭호를 적용할 때는 천지의 대권을 받으신 신적 통치자란 고백이었다. 이런 분을 주님으로 고백하기 때문에 황제를 주라고 부를 수가 없어서 순교의 이슬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예수에게 주 예수, 퀴리오스 예수스(Κίριος Ίησούς)란 칭호를 붙임으로 뜻하는 것은 구약적 배경에서 바로 이해될 수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고유 이름은 여호와, 야웨(Jehovah, Yahweh)이셨다. 구약 교회가 이 이름을 감히 부를 수가 없어서 여러 가지 다른 칭호로 돌려 붙였지만, 그중 가장 대표적인 보편한 대리호칭은 주님, 아도나이였다. 이 전통을 존중하여 구약성경의 희랍어 번역판인 70인경은 여호와, 현대적인 모음 기호로는 ‘야웨’를 주님(Κίριος)으로 번역하였다. 이 야웨의 희랍어 역어인 주(Κίριος)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신약교회가 적용하였다. 이로써 신약 교회는 주 예수란 호칭으로써 구약의 야웨와 동등하신 분 또는 구약의 야웨와 동일하신 분임을 지시하였다.

그러므로 주 예수란 호칭은 예우적 호칭이 아니라 천지의 대권을 다 가지신 하나님이시란 뜻이다. 따라서 백성들이 주 예수라고 고백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위에 모든 주권을 다 가지신 하나님이란 고백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는 그 고백자에게 왕으로 영접되고 또 왕이신 것이다.

7) 하나님의 법으로 삶

죄문제의 해결로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확장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장과 유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으로 되어진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법으로 살 때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진행되며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게 된다.

어떤 나라든지 백성들이 그 국법을 지키지 않고 산다면 그 나라에 통치권이 발휘되며, 주권자가 다스린다고 말할 수 없다. 또 법은 지켜도 백성 일부만 지키고 대부분의 백성들은 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도 합법적인 국가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형무소에 가야 할 사람들과 형무소 밖에 있는 사람들간에 구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 나라가 합법적인 나라로 영위되려면 대다수의 백성들이 국법을 충실하게 준수해야 할 것이다. 그 때만이 그 국가가 주권 국가로서 서며, 자기를 합당하게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대다수의 국민이 국법을 무시하고 지키지 않으면 췌약한 나라가 되어 오래 지탱하지 못한다. 그 나라가 얼마나 강성하느냐는 백성들이 얼마만큼 충실하게 국법을 지키며 사느냐에 달렸다.

하나님 나라의 경우도 동일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 곧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의 법과 질서로 삼고 살 때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역사하신다. 그러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법을 좇아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예수 믿는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모든 생활의 법과 질서로 삼고 살아가는 것을 소홀히 여길 뿐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에 대하여 별 의식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은 교회로 인도하여 예수 믿게 하는 일에는 열심이고 또 예수 믿게만 하면 다 될 것으로 안다. 즉 회개하고 예수 믿는 것까지는 한국 백성들이 열심히 한다. 그러나 예수 믿는 백성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의 법과 질서로 삼고 사는 일에는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소홀히 하고 게을리 하고 있다.

그러나 회개하고 예수 믿는 것은 출생과 같은 과정이고 자라서 단련 받은 백성으로 사는 것은 중단 없는 교육과 훈련으로 된다. 한 나라의 시민들도 출생 후 2,30년간의 교육과 훈련을 받은 후 자기의 직임을 바로 수행하고 민주 시민으로 바르게 살아갈 수 있다. 마찬가지 원리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도 하나님의 법 질서를 따라 살 수 있도록 부단히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들이 회개와 신앙의 수준의 설교만 반복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법을 선포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바른 덕을 함양해야 할 것이다. 목사의 설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도록 성장시켜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첫 번째 요건은 죄를 피하고 옛사람을 죽이고 억제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죄의 유혹이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 이 유혹에 지면 범죄하여 옛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인으로서는 금치산 선고를 받는다.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니게 된다. 그러므로 부단히 죄의 유혹과 욕망을 물리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죄를 이기며 사는 비법은 부단한 주의와 노력도 중요하지만, 죄를 무서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부단히 적용하여, 죄의 욕망과 유혹이 무산되게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지은 죄를 용서받는 데만 소용되는 것이 아니라, 죄에로 빠지는 것을 막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죄의 유혹과 욕망이 일 때 주 예수의 피가 나를 깨끗하게 한다고 고백하면 죄의 유혹과 욕망이 무산된다. 죄의 해결- 이미 지은 죄나 죄에로의 유혹을 해결하는 유일한 대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뢰하고 적용하는데 있다. 이 진리를 요한일서 1장 7절이 분명히 한다(하반절,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로부터 깨끗이 해주고 모든 죄에 들어가는 것에서 깨끗하게 해준다. 주 예수의 피가 죄를 해결하는 가장 탁월한 능력을 행사한다.

또 죄의 유혹을 이기는 길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늘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길이다.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가르치는 진리를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또 우리가 죄의 유혹을 좇으며 죄지으며 살 수 없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의 살과 뼈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으므로 그의 거룩한 생명줄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죄짓고 살 수 없다. 우리가 늘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기억하면 거룩한 몸에 죄짓는 것을 좋아하고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우리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임을 기억하면 죄의 유혹과 충동에 매이는 데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죄를 피하고 옛사람을 죽임과 동시에 새 사람을 살리는 일을 병행해야 한다. 늘 의의 사람으로 살고, 의의 병기로 행하도록 죄악과 불의는 피하고, 의 곧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살아야 한다. 지금은 평온과 평화라는 명목 아래 조용하기를 바라 불의를 보고도 입을 벌리지 않으며 타협하므로 인격자로 성자로 불림 받는 세태이다. 이런 것은 유교적 전통의 체면주의에서 나온 것이요, 선악과 의와 불의의 구분을 철폐하는 불교의 불이(不二)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기독교는 선과 악을 분명히 구분하고 의와 불의를 분명히 나누어 선과 의를 취하고 따르며, 악을 멀리하고 불의를 박멸하는 종교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요사이 기독교인들에게는 대부분 선악 의와 불의의 구분을 전혀 하려고 하지 않고, 이익을 좇아 화평하는 것을 인격자로 선 자로 여기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오히려 불법을 더 좋아하고 불법이라도 거기 자기들의 이익이 들어 있으면, 그것을 옹호하고 편든다.

이렇게 옛 사람의 방식과 사고를 벗어버리지 못해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서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무너지게 될 것이다.


9. 하나님 나라의 생활의 법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들은 새 실재가 되었으므로 변화된 새 실재로 살아야 할 것이다. 새 실재가 되었으면 그리스도의 새 법으로 살아야 한다.

1) 진실의 법

그리스도인도 꼭 지켜야 할 계명들을 갖는다. 그 중에 참, 진실을 말함이 그리스도인의 제1계명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거짓을 말하면 그는 옛 사람이거나, 제 1계명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제 1계명을 지키는 자가 그리스도인이고 거짓을 말하는 자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하나님 나라의 기초를 허는 자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거짓을 말하며 사는 자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생명이 죽은 자이다. 그러므로 그에 합당하게 처리하고 대해야 할 것이다. 그런 자는 공직에도 이르지 못하게 하고, 교회의 직분에도 이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거짓말하는 그리스도인은 송장으로 취급해야 한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직분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 나라의 근본을 허는 자이므로 금치산 선고해서 더 이상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진실과 공의를 기초로 하고 유지되고 통치되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에 바탕을 둔 세상 국가도 가령 예컨대 미국 같은 나라는 진실을 국기(國基)로 삼고 서 있는 나라이다. 닉슨이 탄핵되는 근본 죄목도 진실을 국민 앞에 말하지 않고 거짓을 말했다는데 있다. 미국 200여년의 역사가 최고 득표로 재선된 대통령이 탄핵되므로 사임해야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진실을 기초석으로 하고 서 있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그 나라에 참예하지 못하고 성밖에 있으며 또 불과 유황못에 참예할 것으로 그 나라의 법이 작정하였다(계 22:15, 21:8).

그러므로 교회에서 거짓말하는 자는 제거해야 하고, 참을 말함이 국가와 사회에서도 법이 되어 거짓을 말하는 자는 공직에서도 제거시켜야 한다. 거짓이 지배하는 교회나 국가는 바로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진실이 국가와 교회가 서는 기초이고, 거짓은 그 기초를 허는 큰 죄악이기 때문이다.

어려움에 직면해서도 진실을 말하는 자가 참 인격자이고, 손해를 보면서도 참을 말하는 자가 진리의 사람이다.

진리에 의해 새로워진 사람들은 참을 말하게 작정되어 있다. 그렇지 않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거짓을 좋아하는 자들은 외식하는 자들이고, 종교적 탈을 쓴 자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종교성이 기독교라는 형식을 빌려 열심 내게 하고 있는 것이다. 거짓을 말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아니하므로, 비록 그의 외양은 그 나라에 속한 것 같아도 제거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 유지되고, 또 국가와 사회도 되게 하려면 진실의 법을 높이 세우고 굳게 해야 한다.

처음 타락과 하나님의 일을 망친 것은 거짓이었다. 사탄이 거짓말로 아담을 유혹하고 속여 하나님의 창조로 타락케 하였다. 그러므로 사탄을 가리켜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그리스도께서 정죄하셨다(요 8:44). 또 진리를 받지 않고 거짓을 신봉하고 따르는 자들도 다 마귀의 자손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을 받지 않는 유대인들을 그리스도께서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정죄하셨다(요 8:44a). 모든 인류를 이 큰 불행에로 집어넣어 거의 말살시키고, 하나님의 일을 망친 것은 인류 역사 초기에 행해진 거짓이었다. 거짓은 하나님의 창조를 망하게 하는 것이고, 진실이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 서게 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진실, 참을 말하고 행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굳게 서게 하며 또 거짓을 미워하여 한사코 이것을 추방해야 할 것이다. 진실을 말하고 행하면 하나님 나라에 속하고 하나님의 나라로 진행되게 하는 것이다.

2) 신실의 법

또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지켜야 할 계명은 약속은 꼭 지키는 일이다. 한번 행한 약속은 해로와도 지켜야 한다. 지키지 않으면 거짓을 행함이므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신실성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한번 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한번 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신다. 약속의 상대자가 그 약속 혹은 언약을 파기하고 범죄하여, 그 언약을 완전히 무효되게 하였어도 하나님은 약속을 어기실 수 없기 때문에, 저들의 무신실성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이행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여러 차례 그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 모든 언약을 다 범하고 폐기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호의를 입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자기 약속이시기 때문에 지키시사 그 백성에게 메시야를 허락하시고 구원을 베푸셨다.

하나님께서 인류와 맺은 첫 약속 곧 언약을 생각해 보자.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만물을 지으시고 맨 마지막으로 인간을 특별한 조물로 지으셨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사 하나님의 복사물이 되게 하셨다.

지성을 허락하사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들여다보고 캐내게 하셨으며, 사물들의 본성을 알아 그것들을 이용하고 다스리게 하셨다. 또 하나님의 선악 판단을 따라 선악을 판단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 하나님의 형상이 되게 하셨고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알고 인류와 창조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을 예언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게 하셨다.

또 모든 창조를 하나님께 성별해 드리며, 모든 창조의 창조주 찬양을 화합하여 하나님께 바쳐드리며,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와 덕과 영광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제사장으로 일하게 하셨다. 더욱이 하나님의 창조 왕관으로서 또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이 창조를 다스리는 대리 통치자의 위엄과 영광을 허락하셨다.

이런 특별 조물에게 하나님은 더 큰 호의를 허락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언약을 맺으사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게 하셨다. 이 순종에 머무르면 아담으로 영생에 이르며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도록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하기로 작정하고,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었다. 선악을 아는 나무는 그 자체로 선악을 알게 하는 것이라기 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명하시며, 금하신 선에 머물러 있는 것이 선이요, 그 한계를 넘어가는 것이 악이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의 선악 결정을 절대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선악을 결정하고, 하나님의 판단과 계명이 절대적이 아니라, 자기의 판단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기로 결정하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였다.

그러므로 아담은 하나님의 영생의 약속을 포기하고 또 스스로 합당하지 않는 자로 판정하였다.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촉범하였으니,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정죄와 저주, 사망과 고통이 그 벌로 인류에게 임하여 왔다. 마땅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에게 영생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 약속을 이루시기로 하셨다. 비록 인간은 불신실하여 약속을 지킬 수 없어도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자기가 하신 약속을 지키셔야 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 위해 요구하신 순종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약속하신 영생을 주실 수 있기 위해 그 순종의 조건 이행을 자기가 하시기로 하셨다. 사람이 해야 할 순종을 자기에게 의무 조항으로 부과하시사 자기가 이루시므로 영생을 자기 언약의 당사자에게 허락하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이것이 은혜이고, 이 새 언약이 은혜 언약이다.

하나님은 미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한번 약속은 어떠한 경우에도 기어이 이루신다. 언약의 당사자가 불신실하여 이룰 수 없는 모든 경우에도 하나님은 자기의 신실성 때문에 자기의 언약을 성취해 내신다. 하나님은 이처럼 미쁘신 분이다.

이 미쁘신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도 다 하나님의 신실성을 배우고, 그의 성품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 우리가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고 이루어야 한다.

바로 이 신실 때문에 인간사회가 성립되고 존속되며, 그리고 인간사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신실성이 무너지면 인륜 사회가 아니고 도적 사회가 될 뿐이다. 인륜 사회가 되어 축복된 사회가 되고, 문화가 창달되는 사회가 되려면, 그 사회는 신실성에 기초해야 한다.

더구나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은 한번 정한 약속은 꼭 지키는 신실성을 생활의 법으로 지녀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믿을 수 있으며, 또 딴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게 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사회로 설 수 있다.

3) 양심의 법

또 그리스도인들이 꼭 지켜야 할 법은 양심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이해에 관계된 선택과 결정에 있어서는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고 이해와 유익을 행동의 원리로 삼는다. 그러나 이 길은 개인과 사회를 부패하고 타락하며, 인륜 사회가 되지 못하게 하는 첩경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양심을 따르되 중생되고 진리로 새로워진 양심을 따라서 행동해야 한다. 아무리 목적이 선하고 훌륭해도 수단이 바르지 못하면 그것은 정죄되는 법이고 또 정죄되어야 한다. 아무리 선한 목적도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그것은 혁명적 방법이고 기독교적이지 못한 방법이다. 그리스도인은 목적에 이르는 과정에 늘 중생한 양심을 따라 행동해야 하고, 이해 때문에 양심을 굽히면 안된다. 이해 때문에 양심을 굽히면 도적이 되고 범죄를 구성할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의 행동에 있어서 연약하고 가냘픈 양심의 소리를 따라야 하고 욕망의 충족을 위해 열심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양심을 따르면 우리의 결정과 행동이 좀 더 신중할 것이고, 급하고 속결하지 않을 것이다. 너무 급하게 욕망을 충족하고 유익의 열매를 거두려고 애쓴 후 양심의 가책과 후회 속에 살지 안해야 할 것이다. 욕망에 의해 당위를 희생할 때 반드시 양심의 가책과 후회가 오고 또 그것이 일생을 두고 반복적으로 괴롭힐 때가 많은데 그런 경우 사람이 무기력해지고 자신과 용기있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 그런 것이 심해질수록 그 인격이 분열증을 경함하며 힘을 상실하여, 마침내 폐인이 되거나 낙오자가 되거나 아니면 완악해진 범죄자적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자신과 사회에 대한 큰 손실이고, 사회로 퇴폐적이 되고 무기력하게 되게 한다.

하나님 나라의 계속은 양심을 따라 살므로 이루어진다. 양심수가 많아지는 사회도 안되지만 양심을 넘어서는 것에 인박이고 강해지는 사회도 결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양심대로 살아 편안한 사회를 만들고 살아야 한다. 각자가 다 자기 양심을 따라 살고, 그로써 가책이 없는 삶을 사는 사회이어야지, 항상 감시자가 있어야 양심이 작동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각자가 자기 양심대로 살면서 평안한 삶을 사는 사회이다. 거기에 활력이 있고 화합과 신뢰가 있으며, 평화와 질서가 지배하게 된다. 법과 공권력으로 강제된 평화와 질서는 벌써 병든 사회이다.

양심을 따라 사는 사회는 하나님이 계시고 다스리는 사회이다. 하나님이 계시고 다스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양심을 따라서 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 계시고 그들을 다스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양심을 굴절시키지 않고 살 수 있다.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부터서 하나님의 계심과 다스리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심을 따라 살아도 물질적 손실을 별로 보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양심대로 살기 때문에 너무 경제적 손실을 보는 사회는 심히 부조리한 사회이다. 거기에는 사회 정의가 실현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의 반감이 심하고, 질시와 반목이 심하다. 거기는 참된 평화와 바른 사회 질서와 체제를 유지할 수가 없다. 따라서 사회 계층간에 불평이 심하고 소요와 내분이 심하게 된다.

양심을 따라 살아야 거기 하나님의 법이 서고 그의 다스림이 펼쳐진다. 우리는 우리 욕망을 삶의 법으로 하고 사는데서 양심을 따라 사는 것을 생활의 법으로 하고 살아야 한다. 욕망과 당위가 서로 만나면 대개의 경우는 욕망이 당위를 이기에 되는데, 그것은 인격자의 삶의 방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욕망을 따라 사는 자연적인 삶의 방식에서 양심을 따라 당위를 지키는 단련된 인간들이 되어야 하고, 또 그런 인간들을 생산해 내야 한다.

인간은 자연 출생적 존재가 아니라 교육받아 형성되는 존재이다. 이것이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다. 동물도 교육과 훈련이 있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생존을 위한 반복적인 과정에 불과하나, 인간은 교육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그리고 인간으로 성립될 수 없는 특별한 존재이다. 인간은 교육에 의해 인격체로 발전한다. 욕망의 자연적 수준에서 선악과 진위를 식별하고 선택하여 행동하는 존재가 교육을 통해서 형성된다. 교육에 자기 의식(意識)과 자기 결정의 주체가 되어 하나의 인격이 되고 사회의 바른 구성원이 된다.

바른 교육에 의해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형성되었을 때 인간은 양심을 좇아 살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교육은 양심에 합하는 가치와 삶의 원칙과 원리를 제시하고 거기에 따라 살도록 훈련해야 한다. 이 문제는 결국 가치관과 세계관과 연결된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사회를 자연 발생적으로 출생에 의해서만 형성되지 않는다는 진리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계명들 특히 그리스도의 법을 좇아 살도록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사람들을 교육해야 한다. 그리하여 양심의 소리와 하나님의 계명이 상충되지 않게 해야 한다. 양심도 어떻게 교육받았느냐에 따라 그 발하는 소리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4) 노동의 법 = 대가 지불의 법

넷째로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은 지불한 수고의 대가의 법칙이다. 조물주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일하는 존재로 작정하셨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 풍성한 식탁이 마련된 낙원에 두셨어도 그를 무위도식하게 하신 것이 아니다. 그를 무위 도식하게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의식주에 대해 아무런 염려가 없게 하셨어도, 그로 하여금 매일 힘써 일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크고 많은 일거리들을 수행하게 하셨다.

아담은 자기의 거소인 낙원을 외부의 침입에 대해 잘 지켜야 했고 모든 동식물들의 본성을 살펴서 거기에 합당한 이름들을 지어야 했고 또 그것들을 다스리는 일을 해야 했다. 또 하나님을 섬겨, 그를 찬양하고 감사하며 경배하는 가장 크고 중한 일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게 작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깊이 묵상할 뿐만 아니라, 이미 주신 계시와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그 계시의 빛 아래서 그는 행동하며, 하나님의 현시된 뜻에 따라 역사와 세계를 해석하고 미래를 해석해야 했다.

이에서 나아가 아담은 창조를 계발하여 창조에 담긴 지혜와 권능을 현시하므로 하나님 창조주께 영광을 돌려 드려야 했다. 아담은 창조를 계발하기 위해 매일 창조를 탐구하고, 열심히 자기의 지성을 활용해야 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풀어내므로 조물주의 지혜와 권능을 감탄하며, 또 그를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며, 그의 크신 덕을 기리어야 했다. 따라서 그의 모든 생활과 활동은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적 삶이어서, 종교적 생이 일상의 생과 전혀 구분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의 모든 활동은 하나님을 섬기며 찬양하는 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낙원에서의 삶의 형태는 종말 세계에서도 반복될 것이다. 종말에서 인류의 삶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명상하는 종교적 생활만이 아니고, 정상적인 인간의 활동이 전개될 것이지만, 그 모든 활동이 다 하나님의 덕을 기리고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락 후에는 이런 종교적, 문화적 사명들의 수행 외에 자기의 의식주를 위한 모든 노동까지 해야 했다. 자기의 생존과 모든 문화적 사명 수행을 위해 땀흘려 수고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타락 후에는 수고하여 일하지 안해서는 생존할 수 없도록 되어 낙원에서처럼 여유 있는 삶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제 인간 사회의 모든 일은 노동으로 영위되게 되었다.

이것은 창조주께서 타락 후에 노동을 모든 인간 생활의 근본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니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7b-19). 타락 후부터는 인간은 땅을 수고하여 경작하여 그 소산을 먹게 조물주께서 작정하셨기 때문에 힘써 일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냥 두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땅을 경작하여 거기서 나는 것을 먹게 되는 수고는 일정 기간만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종신토록 수고해야 자기 생명을 부지할 수 있게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그의 수고를 쉬거나 중단하면 그는 자기의 생명을 부지하지 못할 뿐아니라 자기 가족도 유지되지 못하게 작정되었다.

이렇게 땀흘려 수고하여 자기의 생명과 가족을 유지 보존할 책임은 남자에게 지워졌다. 남자가 자기와 가족의 생존의 보장자로 조물주에 의해 지목되었다. 그러므로 남자는 힘써 일하여 자기 몫과 가족의 몫을 다 책임져야 한다. 그가 열심히 일하면 먹고 살 수 있고, 또 먹을 권리를 가지나,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아야 하는 법칙이 성립한다. 이 진리를 바울이 창세기 3장에서 바르게 이해하여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는 법칙과 계명을 정립하였다. 이처럼 먹고살려면 일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나님의 법이 정하였다.

이처럼 누구든지 먹고 살 수 있는 것이 창조주의 정하신 법이면, 일하지 않으면 먹지 안해야 하고, 놀고먹는 자가 있으면 그는 하나님의 법질서에 거슬러서 그렇게 비리를 조성하는 것이다. 인류 사회가 노동에 의해 유지 존속하고 창달한다면, 일하지 않고 먹고 지내는 자는 반사회적이고, 반인륜 사회적인 범죄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인간 사회 유지의 기본법을 헐고 있기 때문이다.

또 땀흘려 일해야 밥을 벌 수밖에 없는 창조주의 법질서가 있다. 저주를 받은 땅은 인간의 수고와 땀흘리는 노동을 제공해야 그에 상응하는 산물을 내게 되었다. 땅은 그냥 두면 저절로 사람이 먹고 살 식물을 생산해 주는 것이 아니라,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어 지력을 소모해 버린다. 반면 땀흘려 수고해서 밭을 일굴 때만이 땅은 사람이 먹고 살 곡식과 채소를 내는 정직한 생산자가 되었다. 땅은 그냥 사용만 해서는 안되고 생산력이 급히 감소되므로 늘 보살핌과 배양이 필요하다. 즉 수고하고 땀흘린 만큼 그 대가를 생산하게 작정되었다.

이 수확체감의 법칙이 근세 곧 18세기 말엽 내지 19세기 초엽에 말더스(Thomas Robet Malthus, 1766-1834)에 공식화되었다. 그러나 이 법칙은 이 때에 처음으로 인류의 意識에 나타나고 알려진 것이 아니다. 풍요의 신인 바알을 섬기는 가나안의 민족들이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또 이 우상 종교를 이스라엘 백성이 전적으로 수납한 후에 바알신을 섬기는 예식에서 이것을 분명히 하였다. 유다 나라가 망하기 전까지 주전 7,8세기경에는 바알을 섬기는 의식이 극심하였다. 그들은 모든 생산의 근원인 땅이 계속 사용하면 지력을 소모하여 풍요가 계속되지 못하는 줄 잘 알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써 버린 지력을 회복 받아 풍요한 생산의 축복을 계속 받기 위해서, 피를 바알신에게 바치면 풍요한 생산력이 회복될 것으로 믿어, 가증하고 끔찍한 죄악인 자녀를 불살라 바알신에게 바치는 일을 하였다. 그리하여 이스라엘과 유다가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예루살렘의 힌놈의 골짜기에서 자녀들을 불살라 풍요와 생산의 신인 바알에게 바치는 가증한 죄악을 계속하였다.

이 수확체감의 법칙은 땅에만 타당한 것이 아니고 모든 생산 조직과 생산 활동에 타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물품을 생산하는 생산 업체들에 이 법칙이 타당할 뿐 아니라, 직접적인 물건 생산이 아닌 보험의 확장에도 한계가 있는 것으로 진단되었다. 땅만 아니라 모든 생산 업체들의 생산성도 무한정 계속적으로 향상되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상승 곡선을 그린 다음에는 하향 곡선, 혹은 정체 곡선을 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생산성의 확대에는 새로운 요소와 활력의 주입 곧 땀흘려 수고해야 더욱 향상할 수 있고, 또 현상을 유지할 수 있다.

인간 사회의 기본 문제인 의식주 문제는 반드시 땀흘려 수고해야만 해결될 수 있게 조물주께서 작정하셨다. 노동이 의식주 해결의 근본이어서 인간 사회의 존속과 보존의 기본법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자기의 일터에서 열심히 노력하여 자기 몫을 다할 때 그 사회는 법이 서고 윤리가 바로 시행되며, 사람들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고, 또 사회가 윤택해질 뿐 아니라, 인간들에게 주어진 재능들을 발휘할 수 있다. 노동이 사회가 유지되고 존속하는 기본법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진행되는 모든 활동과 연구도 다 땀흘려 수고하지 않으면 열매가 없게 작정하셨다. 그것이 예술적 활동이든, 학문적 업적이든, 정치 경제의 활동이든 간에 다 땀흘려 수고함이 없이는 결과가 없게 되었다.

이처럼 조물주는 자기의 피조 세계가 땀흘려 수고해야 그 값을 내게 작정하셨다. 그리하여 세상에 무위 자연 혹은 공짜는 없게 하셨다. 그러므로 세상에 출생하여 자기의 생을 살며 자기의 몫을 하려면 반드시 땀흘려 일해야 한다. 자기가 택한 직업에서 땀흘려 수고해야 자기의 밥을 먹을 수 있고, 자기 가족을 부양하며, 자녀들로 원하는 교육을 받게 할 수 있다. 땀흘려 수고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인간의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다.

옛날에는 농사가 삶의 모든 원천이어서 땅에 수고를 지불하므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이제는 수고를 지불하고 그 대가로 받은 돈으로 자기의 생을 살아야 한다. 돈은 여러 가지로 정의되지만 돈은 지불한 수고의 대가라고 하는 것이 가장 바른 정의이다. 자기의 노동을 지불하고 받은 돈으로 자기의 생을 살아야 사회가 평안하고 바로 서며 분란이 없다. 자기의 수고의 대가로 자기의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다. 각자는 자기의 삶을 영위할 수고와 노동을 지불하고 그 대가로 받은 돈으로 자기의 생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사회 정의이다. 자기의 몫을 하고, 그 몫의 대가로 받은 돈으로 자기의 생존과 생활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 사회에 정하신 합당한 삶이고, 그리고 이 생활의 법이 정의이고, 사회 정의이다. 혹은 말을 바꾸면 사회 정의는 각자가 자기의 생존을 보장받고 자기의 생을 사는 것이다. 이 각자의 정당한 생을 막거나 방해하는 것이 사회의 부조리이고 사회악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다 자기의 생을 자기가 감당해야 하고, 이 일을 위해서 자기의 정당한 노력을 지불해야 한다. 자기 노력으로 자기의 밥을 벌어야 하고 남에게 의존해서는 안된다. 자기의 생을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서, 그것이 바로 부정이고 불의이다. 자기가 수고를 지불함 없이 돈을 가지려고 함은 도적이다. 왜냐하면 돈은 지불한 수고의 대가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자선과 장학 등의 기부된 돈의 활용이 더러 있지만, 그 경우도 형편이 어려운 사람의 생존을 보장해 주는 행위로서 비정기적인 예외이고, 장학금도 가정 형편이 어렵거나 학업이 우수한 경우의 보상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기가 수고해서 벌은 돈을 남에게 줄 때 거기에는 반드시 불평이 있고, 가족들의 반대가 따르기 마련이다. 번 돈이 자기의 수요를 충족하고도 남아 여력이 많을 경우를 혹 제외하고는 형제간들이나 친족들을 돕는 경우도 순조롭지 안해서 가족들의 불평이나 반대가 따르는 것이 통상이다.

그러므로 친척이나 형제간의 경우도 무위도식하도록 하는 것은 결코 바른 법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허는 것이요, 또 그들의 존엄과 가치 의식을 그들에게서 박탈해 가는 것이어서, 사회로 하여금 원만하고 윤택하여 조화있는 사회가 되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들로 다 일해서 자기의 밥을 벌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친족들로 고기 잡는 기술을 배우게 해야지 잡아 놓은 고기를 먹고 즐기게 방치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 어린아이들에게도 그냥 공돈을 주어 버릇하여 그것을 의당한 것인 줄로 알게 하면 안되고 봉사와 돕는 일을 하게 하여 거기에 합당하게 돈을 주어 사용하게 교육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어렸을 적부터 하나님이 세우신 인간 사회 유지의 철칙을 배워서 그 법대로 살게 해야 할 것이다. 이 법으로 훈련함으로 커서도 남에게 의타적이 안되고 자립하게 되고, 사회에 짐을 지우는 가해자가 되지 않게 될 것이다.

돈은 내가 수고를 지불하고서 벌어야 하고 눈앞에 보이는 돈을 욕심 내거나 그냥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런 것은 도적 심리이고 도적 행위이다. 자기가 수고를 지불하지 않는 몫의 돈은 자기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공돈을 너무 좋아해서 문제들이 참으로 많다. 자기가 벌지 않고 남이 벌어 놓은 돈을 그것에 상응하는 수고를 지불함이 없이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하는 심리와 또 그러는 것을 의당한 줄로 아는 행동과 작태가 가장 노골적으로 발현되는 경우가 결혼시 과도한 지참금의 요구이다.

결혼은 한 남자가 한 여인을 자기의 아내로 또 자기 일생의 반려로 맞아들여 살기로 작정하는 인간 대사이다. 남자에게로 결혼하여 오는 여인은 일생 그 남자와 함께 생을 살 뿐 아니라, 또 그 남자를 위해서 자기의 생을 살기 위해서 그에게로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와 자기 아내의 모든 생활을 책임질 자는 남자이고 여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결혼하기 전에 아내를 맞아들여 생활하기에 필요한 생활 도구들과 거소와 돈을 마련해야 하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결혼을 빙자해서 여자 측으로부터 많은 재산을 받아 내려고 크게 마음을 쓰고, 또 그러는 것을 의당한 것으로 안다.

딸의 부모 측에서는 딸을 주는 것만도 마음이 아프고 쓰리며 괴로운데, 지참금조로 많은 돈과 재산을 요구하니 많은 경우에 큰 불행을 초래한다. 결혼 초부터 부부가 단란하고 화기 애애하며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야 할 터인데, 그 지참금의 부담 때문에 결혼 당사자들에게도 너무 위험 부담이 크고, 또 사돈들간에도 좋은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결혼 초부터 불행하거나 이혼의 비극에로 귀착하는 경우가 많다. 이 폐습이 기독교가 들어온지 백년이 넘어도 고치지 못하고 오히려 거기에 다 동화되어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죄악된 관습을 계속하고 있으며, 이것이 고쳐져야 할 죄악된 관습이라는 데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 돈은 남자가 수고해서 벌어야 하고, 결혼을 빙자해서 돈을 요구하는 것은 단호히 죄악으로 정죄되고 근절되어야 한다.

또 경제적 이해 계산으로 여자와 결혼하는 것도 결코 남자들이 취할 바른 삶의 법이 아니다. 아내와 자녀에 대한 양육과 보호의 책임은 전적으로 남자에게 있고 여자에게 있지 않다. 결혼은 사랑과 이해에 근거해야지 경제적인 이해 계산에 근거해서는 불행이 그 일생의 길이다. 돈은 남자가 벌어야 하는데 여자에게 그 책임을 지우는 것은 책임과 역할의 전도이어서 불행이 많다.

또 우리는 자기가 수고를 지불하지 않고 돈을 벌려는 몇몇 손쉬운 길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또 특권시하며 살고 있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국가 공직과 거기에 따른 특권을 치부의 길로 삼아 왔다. 국가 공직자들이 특권을 갖는 것이 사실이고 또 그들의 직책상 그들에게 권력이 주어져 있으며 또 거기에 상응하게 높은 봉급을 지불 받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수고는 그들이 받는 봉급으로 충분하여, 그들의 노고를 다 보상한다. 따라서 그 외 다른 방법 곧 특권과 연관시켜 수입을 확대하는 것은 다 도적이고 부정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5.16 군사 독재 정권의 등장 후 30여년간 국가 공직이 가장 빠른 치부의 길이 되었고, 또 재벌에 상응하는 돈을 단기간에 모으는 길이 되어 왔다. 어떤 자들은 공직에 이른지 몇 년 어간에 몇 십억 내지 몇백 억씩을 긁어모았다. 그 돈들이 지금 수십 조 억의 지하 자금으로, 부동 자금으로 부동산 투기와 증권시장과 유흥업소들과 또 다른 곳에 몰려다니며 죄악을 조장하고 있다.

국가 공직은 국사를 처리하는 봉사자의 자리이지 국가의 돈을 긁어모아도 좋도록 허락 받은 도적의 자리가 아니다. 국가 공직에의 재임으로 국고를 축내어 자기 개인 재산을 증식하는 이 죄악은 엄히 정죄되고 단호히 근절되어야 할 것이다. 액튼(Acton)경의 명언 ‘권력은 부패하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진리대로 독재 정권들의 장기 집권이 이렇게도 큰 죄악을 정상적인 생활의 길로 정착시켰다. 이 죄악을 정당화하기 위해 부패는 후진국의 발전에 유익하다는 천하의 억설과 궤변도 만들어 냈다. 이 죄악은 기어이 척결되어야 할 것이다.

또 자기가 노력하고 수고함이 없이 돈을 벌려는 다른 유형의 사조가 우리 국민들에게 편만해 있다. 그것은 권력의 길에 접근해서 큰돈을 벌 수 없는 많은 백성들이 종교의 길 곧 초자연적인 방법에 의해 부에 이르려는 사고방식이다. 이 뿌리 깊은 사고 방식과 욕망 때문에 한국의 종교들은 거의가 다 기복 종교이고 축복 종교들이 되었다. 불교나 무당 종교들이나 천주교회나 개신교회나 다 축복 종교, 기복 종교의 길을 걸어왔고 또 지금도 걷고 있다.

백성들의 이 수고 없는 큰돈에의 욕망을 이용하여 절간들도 큰 축복을 약속해 주고 너무 많은 재산들을 모아 정부의 능력을 능가할 만큼 되었고, 무당들도 돈을 모아 그 자식들도 외국 가서 박사 학위를 해 오게 까지 되었다. 교회도 백성들의 이 허망한 욕구를 이용하여 축복을 많이많이 선사하고 많은 헌금과 봉사를 강요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기본 사회 유지법을 어기고 교회까지도 축복 선사에 크게 성공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크게 된 대형 교회들이 대부분은 축복 선사와 사회 생활에서의 성공 약속과 또 부자 되는 심리 설파로 그렇게 크게 성공하게 되었다. 적극 심리가 기독교의 복음을 완전히 대치하게까지 되었다.

교회가 각성하여 이런 축복 선사와 헌금의 종용 내지 강요에서 깨어나, 경제적 민주화를 촉구하고, 제도적 비리를 개선하는데 앞장서고, 또 선지자적 선포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경제 제도적 비리의 개선과 또 지역간의 심한 경제적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도록 교회와 정부와 사회 각 계층들이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 계층간의 심한 불균형도 해소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경제적 민주화 없이 진정한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또 이런 제도적 비리의 해소 없이 종교들, 또 교회의 축복 선사와 기복 신앙을 민족의 가슴에서 소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는 국민 각자로 하여금 자기의 빵을 벌어 살 수 있도록 노동 환경을 조성하고, 일자리들을 육성하며, 또 기업들을 지원하여 일자리들을 더욱 확장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일자리들을 마련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각자 자기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부가 할 기본 과제이다. 정부는 많이 가진 자들과 부한 지역들의 비위를 맞추고 그들과 연합해서 정권을 유지하려고 하면 의로운 정부가 되지 못하므로 제도적 비리를 갖는 경제 구조를 개선하고, 또 지역간의 균형 있는 발전을 이루므로 나라가 평안하고, 조화 통일되도록 하고 권력으로 압제하여 강요된 조용함을 평화로 착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정부는 국민 각자로 하여금 자기의 생을 살 수 있도록 그 환경을 마련하고, 또 그런 생이 가능하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수고로 자기의 삶을 살도록 사회 유지의 법을 세우셨으므로 우리는 열심히 일해야 하고, 또 일한 수고의 대가로 살아야 할 것이다. 또 자기의 수고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누구도 탄압할 수 없는 천부적 권리요 하나님이 세우신 법이다.

이 사회가 바로 되고 또 죄악을 경감시키고 문화가 창달하는 길은 다 땀흘려 자기 일을 하고 그 수고의 대가로 사는 것이다. 일하지 않고 먹고사는 법은 없게 해야 한다. 우리는 힘써 일하고 우리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 정당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고 하나님의 복을 입는 공의로운 사회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법이 크게 진전되게 해야 할 것이다.

5) 절제의 법

다섯째로 그리스도인들이 의존해서 살아야 할 법은 절제의 생활 원리이다. 성경 특히 신약이 제시하는 인간 생활의 법은 절제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육체의 정욕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제된 삶을 살아야 한다. 절제의 생활이 하나님이 세우신 바른 인간의 생활 규범이어서 과도함은 언제나 피할 생활의 법칙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삶은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쾌락주의도 아니고 죄악된 성향대로 육체적 욕망으로 사는 방탕주의도 아니다. 또 이런 쾌락, 환락, 방탕, 육욕주의의 반대극인 금욕주의나 고행주의도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다. 금욕주의는 대개는 고행주의가 되어, 육체를 괴롭히고 모든 욕망을 다 죄악시하여 그 욕망의 불을 끄느라고 인생의 주요한 사명과 과업을 포기하는 것을 인생의 전부로 한다.

사람은 대개 욕망에 지배되어 살고 욕망 달성을 위해서 일생 수고한다. 그러나 절제하지 않고 욕망을 따라 과도하면 언제든지 정상적인 생활의 순환이 깨어지고, 조화가 없어진다. 욕망에 따라 행동하고 수고하되 절제가 없으면 건강을 망치고 질병을 얻어 생명이 단축된다.

먹는 것을 절제해야 한다. 먹는 것은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선에서 조절되어야 한다. 과거의 배고픔의 기억 때문에 과도히 먹으면 첫째 위장이 장애를 받아 건강을 망치게 된다. 많이 먹으므로 체중이 과다해지면 온갖 질병이 발생하여 정상적인 생을 살 수 없다. 먹는 것은 언제나 절제하여 자기 생활에 알맞게 해야 한다. 고기와 술 등 고급 음식을 많이 먹는 것도 모든 질병을 유발하게 한다. 고단위 영양가 음식일수록 절제해야 한다. 그것들은 다 질병원이라고 봄이 바르다. 제일 좋은 음식은 하나님이 처음 인류의 양식으로 주신 채소와 과일과 씨맺는 열매들이다. 싱싱한 음식이 제일 좋은 식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밭에서 직접 입으로 가는 식사가 최선의 식사이다. 이 경우도 절제해야 하고 과도하면 건강에 좋지 못하다.

쾌락의 추구도 절제해야 한다. 사람은 다 쾌락은 추구하고, 고통은 피하지만 쾌락도 한도 내에서 즐겨야 하고 쾌락만 추구하면 허무감에 이르고, 나태해져서 사회기강을 헌다.

특히 성적 쾌락은 극도로 절제해야 한다. 성관계는 언제든지 부부관계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부부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성관계도 절제되어야 한다. 과도히 성적쾌락을 추구하면 건강을 망치고 수명을 단축한다. 인간사에 있어서 절제하기가 제일 힘든 영역이 여기이지만 이 일에 있어서 절제가 으뜸이다.

운동과 노동도 자기 몸의 능력에 맞는 한도에서 해야 하고 과도하면 건강을 망치고, 정상적인 인간생활을 할 수 없게 한다. 제일 첫째로 감정을 예리하게 하고 격화하여 아름답고 평온한 생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 감정이 정상적인 흐름을 잃게 되면 바른 판단력을 잃게 되어 인간관계가 원활하지 못해 나빠지게 된다. 이에서 나아가 무리하여 과도함으로 몸의 각 기관들을 압박하여 병이 남으로 건강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활동에 있어서 욕망을 절제하여 바르게 살아야 한다.

은혜는 자연을 회복하고 억압하거나 능가하지 않는다. 통상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를 입으면 자연을 억압해도 되고 또 자연을 능가할 줄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구원의 사역이 아니다. 구원은 자연의 회복이므로 구원 얻은 자는 자연의 질서 곧 창조 질서에 합해야 한다.

사람이 자연을 억압하면 자연의 질서가 깨어져 병난다. 또 자연을 능가하려고 하는 것도 자연 질서를 무시하는 것이어서, 자연 질서가 허물어진다. 그리하여 병에 이르고 자연이 파괴되어 죽음에 이른다. 은혜가 오면 자연이 회복되므로 더욱 자연 질서에 충실해야 하고, 자연 질서대로 살아야 한다.

은혜는 자연을 앙양하지 않는다. 은혜는 치료하는 의약이다. 병들고 연약해진 자연을 정상으로 회복한다. 그 회복은 자연의 한계에 속하고 그 한계 범위를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절제하여 자연 질서를 충실히 지켜야 한다.

자연을 넘어서려고 하는 것은 은혜를 욕되게 하는 것이어서 자연을 파괴한다. 자연이 파괴되면 회복이 쉽지 않아 죽음에 이름이 그 바른 비결이다.  자연을 억압하면 기관이 파괴되어 전체 건강을 이루는 생명 기관들과의 연관이 끊어지므로 죽음에 이르러 생명을 과도히 단축한다. 그러므로 건강하고 평화로운 삶을 수명대로 살 수 있는 길은 자연의 한계 안에 머무름이다. 자연의 한계에 머무르는 법은 바로 절제이다. 절제가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일하고 잠자고 쉬는 것이 절제있게 이루어질 때 건강을 지킨다. 건강을 잃으면 본인 당사자의 고통과 괴로움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가족과 사회에 끼치는 해악이 참으로 크다. 먼저 본인이 괴로움, 번민, 좌절, 실의와 절망을 늘 경험하여 죽음의 공포 아래 떨며 어두운 세상을 산다. 다른 사람은 즐거워하는데 자기는 즐거움이 없고 우울하고 어둡다. 소망과 목표를 위한 전심적인 노력보다 실의와 좌절에 쌓이고 자포자기가 늘 생활의 동반자가 된다. 그러면 병이 더해서 생명을 재촉한다. 젊을 때 절제하지 못하고 욕망대로 행한 것이 이런 재앙을 초래한 것이다.

현대 의학에 의하면 사람은 출생시 자기에게 고유한 일정한 생명력을 갖고 세상에 나온다. 그리고 써버린 생명력은 보충되는 법이 없으므로 건강하고 오래 사는 비결은 자기 몸의 리듬을 따라 살고 무리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욕망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절제하는 것이 정상적인 건강한 삶의 길이다. 이 절제는 모든 사회생활에 그대로 적용되고 확대되어야 한다. 어떠한 형태의 과도함도 다 피해야 한다.

육체적 활동 뿐 아니라 모든 행사가 다 절제되어야 한다. 외적 현시에 더 치중하는 한국 백성들에게 있어서 절제는 매우 어려운 일이나, 절제가 행사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 사회 행사에 있어서 절제는 검소이다. 소박한 행사와 생활양식이 우리의 바른 삶의 방식이다.


출처 : 보길예송교회
글쓴이 : 김완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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