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리!! 교의신학!! 변증학!!

기독교 세계관 바로 세우기/ 류현모, 강애리/ 두란노

하나님아들 2023. 3. 7. 14:59

기독교 세계관 바로 세우기/ 류현모, 강애리/ 두란노

Part 1. 시대 직시- 하루 24시간 세계관이 치열하게 격돌하고 있다.[출처]

1. 충돌하는 세계관

‘세계관’(Weltanschauung)이란 용어는 계몽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저서 《판단력 비판》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독일어 Welt(세계)와 Anschauung(관점)을 조합한 신조어다. 칸트의 명성과 그를 열심히 인용한 헤겔(Hegel)에 힘입어 19세기 유럽 지식인 사회에서 모르면 안 될 상투어가 될 정도로 유행하였다. 이것이 영국과 미국으로 전파되어, World-view로 번역되었고, 그 개념이 동아시아에 전달되면서 세계관(世界觀), 즉 ‘시간과 공간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정착되었다.

모든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한 사람의 세계관은 주변의 제한된 환경으로부터 물과 영양분을 공급받는 나무의 뿌리와도 같다. 같은 나무라도 그 나무가 심겨 있는 토양이나 기후에 따라 현저히 다른 성장과 결실을 보이는 것과 같이 한 사람의 세계관은 그가 태어난 국가, 지역, 가정과 교육에 의해 결정적인 지배를 받는다.

어떤 이는 세계관을 선글라스에 비유하기도 한다. 선글라스 알의 색깔에 따라 투과하는 빛의 색깔이 다른 것처럼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같은 상황에 대해 다른 정보를 받아들이고, 다르게 해석한다. 각 사람은 자신이 선택하고 받아들인 정보에 따라 생각하고, 그 생각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한다. 선택이 달라지면 행동이 달라지고, 그것이 모여서 습관이 달라지며, 인격이 달라져서 마침내 삶의 열매가 바뀌게 된다. 이처럼 우리 생각을 형성하는 정보들을 입력 단계에서부터 제한해 버리는 세계관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고민 없이 살아간다. 누구의 영향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지는지도 모른 채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민감하게 자신의 세계관을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과 동일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면, 그의 삶은 과연 어떤 열매를 맺게 될까? 성경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라고 가르치고 있다. 세계관에 의해 선택된 정보들만이 마음과 생각 속에 입력되어 우리의 행동과 인격이 달라지고, 그로써 삶의 열매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독교와 교회를 공격하는 세상에 대해 자신의 믿음을 변호하고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그들을 품고, 진리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세상을 아는 지식이 모두 필요하다.

2. 세계관은 믿음을 변호한다.

기독교 세계관은 우리 기독교 신앙을 지키고 변호하는 데 필요하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은 세상의 다른 세계관으로부터 여러 방향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공격받고 있다. 진화론으로 대표되는 방법론적 자연주의 철학과 과학에 의해, 초자연을 부정하는 무신론 신학과 철학에 의해, 영적인 것을 부정하는 무신론 심리학에 의해, 절대적 도덕률을 부정하는 상대주의 윤리학에 의해,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과 가정이라는 기본적인 사회 제도를 부정하는 사회학에 의해, 절대적인 정의를 부정하는 법, 정치, 경제학 등 전 학문 분야에서 공격받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진리인 것은 변증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지 않다. 우리 신앙이 진리라면, 아무도 믿지 않아도 진리이고, 진리가 아니라면 모든 사람이 믿어도 진리가 아닌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스스로 최고의 변증자이시며, 우리는 보조자요 증인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변증은 새로운 논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복음의 진리를 피고석에 계신 그분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명확히 증언하는 것이다.

3. 모순되지 않는 일관성 있는 세계관

영국 성공회의 인도 파견 선교사로 40여 년을 섬기고 귀국하여 기독교 변증에 힘썼던 레슬리 뉴비긴은 “성경은 바라볼 책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세상을 봐야 하는 책”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성경이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이해해야 하며 성경이 세상을 바라보는 모든 것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절대적이고 유일한 권위자를 인정하는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성경이 우리에게 계시하는 하나님은 절대적 주권자, 우리 존재의 근원, 삼위일체, 창조주, 전지전능, 무소부재, 공의와 사랑이시며,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결코 그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분이시다.

세상의 무신론자들은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감히 말한다. 반면에 힌두교나 뉴에이지나 정령 신앙은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신이 있다고 주장한다. 얼마나 많은지 “모든 것이 신이고, 나도 신”이라고 말한다.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신조차 절대적이지 않다. 철학과 과학은 존재의 근원(존재론)과 지식의 근원(인식론)을 찾아가는 학문으로, 지식의 근원과 변치 않는 영원한 진리를 추구해 나간다. 무신론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우주가 우리 존재의 근원이며, 진화 과정에서 인간에 이르러서야 생성된 이성이라는 것을 통해 지식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이 유한한데, 세상이 발전하면서 지식은 지속적으로 팽창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다신론, 범신론을 추구하는 뉴에이지는 누구나 다 신이기 때문에 진리는 상대적이라고 말한다.

기독교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선언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말하며, 하나님 아버지께로 이끄는 길이 진리임을 분명히 말한다. 진리가 없다거나 다수의 진리가 있다고 말하는 다른 세계관은 설득력이 없다.

윤리 역시 마찬가지다. 무신론자들은 옳고 그름의 기준은 인간들의 합의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하며, 시대에 따라 선악의 기준도 변한다고 주장한다. 뉴에이지 역시 기준에 따라 윤리 또한 상대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묻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하고 대답하셨다(마 19:16-17).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절대선이심을 강력히 말씀해 주신 것이다. 절대적인 도덕률을 부정하는 사람은 반드시 도덕의 기준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옮기려 한다. 세상의 모든 분쟁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심리학과 사회학에서 무신론자들은 인간의 영혼이란 정체가 없으며 뇌세포 사이의 신호 전달에 의해 만들어지는 한시적인 것으로, 육체의 기능이 정지하면 영혼은 자취 없이 사라진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인간의 고통과 악은 잘못된 사회 제도에 의한 것이며, 인간은 선하다고 주장한다. 선한 인간을 지키기 위해서는 악한 사회를 뜯어 고쳐야 한다. 뉴에이지는 고통과 악은 실재하지 않으며, 스스로가 신(神)임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생긴다고 말한다. 그들은 방해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면, 자신이 신인 것을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 세계관은 우리 영은 육체와 함께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며, 첫 사람 아담의 죄로 인한 타락으로 악과 고통이 인류에게 유입되었다고 말한다. 악과 고통의 원인이 타락한 개인의 심령에 있으므로 사회 개혁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예수님을 향하여 회심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임을 말한다.

법, 정치, 경제학 분야에서 정의를 다루는데, 무신론자들은 절대적인 정의란 있을 수 없으며, 많은 사람이 합의한 것이 곧 정의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법에서는 권력자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만들어지는 실정법이, 정치에서는 권력자들이 원하는 것이 정의가 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경제적 불평등이 모든 악의 근원이며, 그 원인이 되는 경제 체제를 뒤엎음으로써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는 모든 것을 불의로 규정하고,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한다. 뉴에이지는 깨달음을 통해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깨달음을 방해하는 어떤 제도나 법도 정의 구현의 방해 요소로 생각한다.

반면에 기독교는 하나님이라는 절대 기준 앞에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서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를 창의적으로 사용하여 부를 획득하고, 그것을 경제적으로 취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마음껏 사용함으로써 경제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무신론자들은 역사는 우연의 연속이며, 승자가 쓴 투쟁의 기록이기에 믿을 수가 없고 의미도 없다고 주장한다. 뉴에이지에서는 인간의 윤회는 역사 속에서 쳇바퀴 돌아가듯이 반복적인 삶을 살아갈 뿐이며, 깨달음을 통해서만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속에 등장하셨으며, 그분의 언약이 실현될 것을 믿으며 사는 것이 역사라고 말한다. 인류 역사는 창조-타락-구속-완성의 대서사 속에서 설명될 수 있는데, 시작이 있었던 것처럼 언약이 반드시 이루어질 종말이 있다.

이처럼 기독교는 전 학문 분야에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고 있다. 절대적 주권자를 믿는 신학, 예수 그리스도라는 절대 진리를 인정하는 철학과 과학, 하나님이라는 절대 선의 존재를 인정하는 윤리학,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가 악과 고통의 원인임을 설명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분명히 하는 심리학과 사회학, “사랑 가득한 공의”라는 절대적 정의를 말하는 법, 정치, 경제학,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완성의 대서사를 인정하는 역사학 등 모든 기준이 성경 속의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수렴된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은 시대를 뛰어넘어 언제 어디서나 흔들림 없이, 모순되지 않는 일관성 있는 세계관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모든 것이 우연이고, 상대적인 기준에 의존하는 다른 세계관들은 모순투성이의 일그러진 삶의 결과로 드러날 뿐이다.

4. 거듭남과 기독교 세계관

모든 사람은 옳건 그르건 혹은 잘 정립되었건 허술하건 상관없이 자기만의 세계관을 이미 가지고 있다. 우리 삶의 모든 선택을 좌우하는 기준으로, 개인의 일상에서 매 순간 적용되고 있는 것이 세계관이다. 우리가 숨 쉬는 공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너무 가까이 있어 인식하지 못할 따름이다.

기독교 세계관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제임스 사이어(James W. Sire)의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에서는 세계관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세계관이란 이야기이며 실제 근본 구성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련의 전제의 집합이다. 이 전제들은 자신이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고, 일관성이 있거나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옳거나 혹은 완전히 잘못된 것일 수 있다. 즉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몸담을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 주는 하나의 결단이요 근본적인 마음의 지향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사건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한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만났다. 그는 베냐민 지파 유대인으로 위대한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은 골수 바리새파 사람이었다. 그의 세계관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무리들이란 신성을 모독하는, 돌로 쳐 죽일 죄인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 앞에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믿었던 예수님이 빛 가운데 나타나시니 그가 눈이 멀었고, 하나님이 보내신 아나니아가 안수하자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을 만나 바울의 세계관이 새롭게 변화되자 그 즉시 그는 이전에 자신이 핍박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기존 세계관과 새로 얻게 된 세계관이 혼재하는 시기를 보내야 했다. 이전 세계관을 다 허물어뜨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세계관을 제대로 세워 이방의 선교사로 거듭나기까지 아라비아에서 3년의 세월을 보냈다. 아마 고향인 다소에서는 그보다 더 긴 숙성의 기간을 거쳤을 것이다.

이처럼 거듭남을 체험한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 안에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세상의 모든 이론을 전부 허물어뜨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반석, 그분을 계시하는 성경의 반석 위에 우리가 그동안 세상에서 알고 배웠던 지식을 다시 해석하고 바로 세우는 작업을 반드시 해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거듭남의 기쁨 속에 기존의 세계관은 그대로 둔 채 그 위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급하게 세우곤 한다. 이럴 경우에, 내가 경험했던 것처럼 교회와 세상의 이중 잣대 위에서 줄타기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도 세상의 방식을 따라 탈법과 편법을 자연스럽게 선택할 수도 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한 가르침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고, 과거의 경험과 지식을 재해석해야 한다. 물론, 현실 속 우리의 선택도 그 기준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오직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약 1:17) 그분을 기준으로 한 세계관이 기독교 세계관이요 성경적 세계관이다.

Part 2. 시대 통찰- 기독교 세계관은 어떻게 우월한가?

5. 경쟁하는 세계관들

세계관은 삶의 전반에 대한 전제들의 집합이다. 이 전제에 따라 세상은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그중 우리 삶에 가장 폭넓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신의 존재에 대한 전제다. 그러므로 모든 세계관은 유신론적 세계관과 무신론적 세계관으로 나눌 수 있다. 유신론적 세계관에는 기독교 세계관, 이슬람 세계관, 뉴에이지 세계관 등이 있고, 무신론적 세계관에는 인본주의 세계관, 마르크스-레닌주의 세계관, 포스트모더니즘 세계관 등이 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더라도 어떤 신의 존재를 전제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지게 된다. 유신론적 세계관은 크게 일신론, 다신론 그리고 범신론으로 나뉜다. 일신론은 유대-기독교-이슬람의 뿌리인 창조주 하나님을 전지전능한 유일신으로 믿는 세계관이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인간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자력 종교다. 유대교는 여호와께서 주신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이슬람교는 알라와 선지자가 정한 규범을 지키고 선행을 더 많이 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믿는다. 반면에 기독교는 타력 종교로서 인간의 노력과 선행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다신론은 그리스-로마 신화처럼 지혜의 신, 태양의 신, 바다의 신, 미의 신 등 전문 분야를 가진 신을 전제로 한다. 정령 신앙은 산, 바다, 동굴, 고목 등 자연의 영역별로 그것을 관할하는 신이 있다고 전제한다. 산신제나 해신제를 올리는 것은 그곳을 관할하는 초자연적 존재에게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다. 구약 시대에 가나안 땅에 원래 거주했던 족속들의 종교도 풍요, 결실, 다산 등 자신들의 삶을 도울 수 있는 신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 힌두교는 수없이 많은 신을 모시는 종교다. 불교는 원래 무신론이지만, 인간이 해탈의 경지를 지나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처를 신적 존재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모든 것에서 신성을 찾는 범신론에 해당한다. 일본의 신도는 불교를 기반으로 한 범신론에 정령 신앙과 무속 신앙 등이 혼합된 종교다. 가는 곳마다 각종 신을 섬기는 신사가 있고, 집의 현관마다 섬기는 신이 여럿 존재한다.

중세 시대 유럽인의 모든 삶은 기독교적 세계관의 기반 위에 있었다. 르네상스를 거치며, 신학 외에 인문학, 과학 등 다른 학문들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이성이 깨어나는 시대라는 계몽주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때 이신론(理神論, deism) 즉, 이성적인 신론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인간과 격리되어 있는 하나님을 전제한다. 유일한 창조주를 인정하지만, 직접 계시하거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부정한다. 창조하시되 간섭하지 않으시고, 마지막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이슬람의 알라와 비슷하다.이신론에 설득되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잃어버린 인간은 결국 무신론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신론 이후 모더니즘 시대에는 인본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무신론적 세계관이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에서 쌍둥이처럼 태어났다. 이들은 세상을 창조하고,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해 진화론을 환영했으며, 서로 공명하여 진화론을 과학 이론의 중심 패러다임으로 정착시켰다.

20세기 중반 이후 너무나 이성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모더니즘에 반발하여 반이성을 추구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나치 독일 치하에서, 또 소비에트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국가주의와 전체주의의 문제점을 경험한 서구, 특히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고안해 낸 것이다. 그들은 집단이 아닌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고 보았다.물질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의 존재만을 인정하는 자연주의가 이들 무신론적 세계관의 공통점이다. 신이 없다고 전제하므로 우주와 생명은 우연히 생긴 것으로 가정할 수밖에 없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가치에 대해서도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의식, 인격, 이성, 영혼 같은 것은 인간 두뇌 활동의 결과일뿐 허상이라고 보기 때문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 오늘날 무신론적 세계관이 진화론의 패러다임 하에 우리의 교육 현장을 장악하고 있다.

6. 기독교 세계관

세계관은 이야기의 형태로 전달된다. 그 이야기는 대체로 세상의 시작으로부터 종말에 이르는 큰 이야기, 곧 대서사다. 이 큰 이야기를 영어로는 메타내러티브(meta-narrative)라고 한다. 세계관의 메타내러티브에 내 삶의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의 메타내러티브를 근거로 분석할 수 있다. 크레이그 바르톨로뮤(Craig Bartholomew)와 마이클 고힌(Michael W. Goheen)은 그들의 저서 《성경은 드라마다》에서 성경 이야기를 창조-타락-구속-완성의 4단계로 설명한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창세기 3장에서는 선악과 사건으로 인간이 하나님과 단절되는 ‘타락’ 사건이 일어난다. 창세기 4장부터 요한계시록 20장까지는 죄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과 그에 반응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반복적인 실패,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성취와 그분을 통한 구원 계획의 기쁜 소식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요한계시록 21-22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구속의 ‘완성’ 이야기를 전한다.

각 세계관의 메타내러티브가 동일한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다르게 대답하는지를 비교해 봄으로써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 이에 우리 삶에서 중요한 네 가지 질문에 대해 각 세계관의 답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네 가지 질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

둘째, 내 문제의 원인은 무엇인가?

셋째, 그 문제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넷째, 나는 결국 어디로 가는가?

먼저, 기독교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답을 생각해 보자.

첫째,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다. 정체성의 혼란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세상 속에서 괴로워하며 인생을 허비한다. 자신이 너무 보잘것없고,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에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주신 생물학적 성 정체성을 부인하기도 한다. 성경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천지 만물과 모든 생명체를 완벽하게 준비하신 후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전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채소와 과일을 먹을 것으로 허락하셨고, 하늘과 땅과 물속의 모든 생명을 다스리는 일을 맡기셨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피조세계를 위임받은 하나님의 청지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희생해서라도 구원해야 할 만큼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기독교인의 정체성이다.

둘째, 내 문제의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 삶은 전부터 문제들로 가득했고,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여전히 많은 문제 가운데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시점을 기준으로 문제의 근원을 인식하는 방법이 이전과 달라져야 한다. 예수님 이전의 우리는 타락한 죄성으로 인해 문제의 근원을 외부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성경의 메타내러티브는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난 나의 타락에 있다”고 말한다. 또한 나와 마주하는 상대방의 타락이나 우리가 사는 환경의 타락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가 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난 선악과 사건의 결과로 먹고살기 위해 땀 흘리는 수고가 필요하게 되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었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된 것이다. 인생의 문제는 인생의 시기마다 다른 형태로 나타나겠지만, 그 근본을 추적해 보면 타락으로 인해 복합적으로 발생한 문제임을 확인할 수 있다.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바로 나의 죄가 있다는 뜻이다.

셋째, 그 문제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문제의 가장 근본적 원인이 나의 죄에 있다면,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곧 문제의 해결책일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을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인가?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러면 그분이 내 죄를 해결하신 방법은 무엇인가?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나의 죄가 못 박혔다면,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셔야 마땅하다. 지금 내가 당면한 문제의 원인은 나의 타락, 상대방의 타락, 환경의 타락 등 다양하고 복합적이지만, 상대방이나 환경을 내가 원하는 대로 바꿀 수는 없다. 오직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만이,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만이 내가 접근할 수 있는 해결책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내 힘만으로는 할 수 없으므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매 순간 기도할 수밖에 없다. 믿음대로 사는 것이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넷째, 나는 결국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모든 인간이 품는 궁극적인 질문이다. “사후의 세계가 있는가? 있다면 어떤 모양인가? 그곳으로 가기 위한 조건이 있는가? 나는 그 자격을 갖추었는가?” 등 다양한 질문이 파생된다. 

각 세계관은 이들 질문에 대해 나름의 답을 제시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또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는 일을 위임받은 청지기로서 현재를 살 것을 권유한다. 하나님 나라는 나로 인해 내가 머무는 곳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로 다스려질 때 이 땅에서도 도래할 수 있다. 물론,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구원을 얻었고, 그로써 죽음 후에도 심판에 이르지 않으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복을 보장받았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곳은 완전히 회복된 “새 하늘과 새 땅”(계 21:1)이며, 완벽하게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임을 믿는다.

7 이슬람 세계관

이슬람은 ‘복종한다’는 뜻이다. 알라와 무함마드에 대한 복종인데 그에 복종하는 사람들을 무슬림이라 한다. 이슬람 비평가인 스르자 트립코비치는 “이슬람은 단지 종교가 아니라 삶의 전체적 방식이며 그 자체가 세계관인 사회적, 정치적, 법적 체제”라고 말한다. 즉 이슬람은 종교일 뿐 아니라 삶 전체를 완벽하게 지배하는 세계관이라는 뜻이다.

이슬람 세계관을 형성하는 다섯 개의 기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은 오직 한 분뿐이다(일신론). 

둘째, 무함마드는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의 뒤를 잇는 최고이자 마지막 선지자다.

셋째, 신은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를 창조하셨다.

넷째, 코란은 신의 온전한 최후의 계시다.

다섯째, 각 사람을 천국 혹은 지옥으로 보낼 최후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이에 따라 무슬림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5가지 행동 강령이 있다.

첫째, “신은 알라뿐이며 무함마드는 그의 선지자다”라는 신앙고백(샤하다)을 반복해야 한다.

둘째, 무슬림은 하루에 5번 정해진 시간에 메카를 향해 기도(살라트)해야 한다.

셋째, 라마단 기간에는 일출에서 일몰까지 금식하며 금욕(사움)해야 한다.

넷째, 가난한 자에게 수입의 2.5%를 자선(자카트)해야 한다.

다섯째, 능력이 되는 사람은 메카로 순례 여행(하지)을 해야 한다.

이 다섯 가지 외에도 “성스러운 전쟁(지하드)을 수행해야 한다”는 강령이 있다. 지하드는 원래 죄와 악에 대항하는 개인적인 싸움을 의미하였으나 무함마드가 비이슬람교도가 이슬람에 대항하는 것을 가장 큰 죄악으로 규정하였기 때문에 이슬람을 거부하는 개인과 국가에 대한 전쟁도 성전(聖戰)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그들은 내부적으로는 무자비한 징계를 통해 집안 단속을 하면서, 외부적으로는 다양한 호전적인 방법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각 세계관에 공통적으로 주어진 네 가지 질문들에 대한 이슬람 세계관의 답은 코란, 하디스(Hadith), 수나(Sunnah)와 같은 이슬람 경전과 무함마드의 계시에서 찾을 수 있다.

첫 번째 질문, 나는 누구인가? 이슬람의 신 알라와 인간은 주인과 종의 관계로 규정된다. 알라는 자신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인간을 창조하였다고 말한다. 따라서 기독교에서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는 정체성은 불가능하다. 창조주이며 심판자인 알라의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는 종의 정체성만이 있을 뿐이다. 알라는 인간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알라와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피조세계에 대한 알라의 대리자 지위를 인간에게 부여했지만,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철저한 복종뿐이다. 기독교와 달리 알라를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신성모독이며, 알라는 최후의 심판자이기에 인간은 그 법에 복종하면서 심판의 날을 기다려야 한다.

두 번째 질문, 내 문제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슬람은 아담의 원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사건이 일어나긴 했지만, 알라에게 처벌받음으로써 해결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전가될 수 없다고 믿는다. 무함마드를 최고의 선지자로, 메카를 그 수도로 하는 믿음의 집단에 도덕적, 지적, 영적, 사회적, 정치적, 법적으로 완전히 소속되어야 한다. 매일의 삶에서 무함마드를 통해 계시한 알라의 법(샤리아)를 준수하며 살아야 한다. 이 법을 완벽하게 순종하지 못하고, 더 많은 선행을 베풀지 못하는 것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이슬람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처럼 의도보다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 더 중요하다. 따라서 그들의 행위는 율법적이며 위선적이기 쉽다. 이것은 율법 준수를 강조하던 바리새파나 동양의 유교처럼 규범을 지키려 노력하는 도덕적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다.

세 번째 질문, 그 문제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이슬람교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대한 선지자로 인정한다. 그러나 그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과 죽음에서의 부활은 인정하지 않는다. 즉 이슬람에는 복음이 없다. 또 인간의 원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십자가의 대속을 필요로 하지 않고, 타인의 죄를 대속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무슬림 개개인은 오직 알라가 무함마드를 통해 제시한 법 안에서 알라의 뜻에 순종하면서, 악행보다 선행을 더 많이 함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결국,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 자력 종교인 것이다.

네 번째 질문, 나는 결국 어디로 가는가? 이슬람도 기독교처럼 죽음 이후의 영적인 세계를 믿는다. 모든 무슬림은 죽음 후에 알라 앞에서 자기 삶의 선택에 대해 해명해야 한다. 무슬림의 오른쪽 어깨에는 착한 천사가, 왼쪽 어깨에는 악한 천사가 있어 각각 선행과 악행을 기록하고 있다고 믿는다. 최후 심판의 순간에 각 천사가 기록한 선행과 악행의 보따리를 천칭 저울에 달아서 무거운 쪽으로 천국행이나 지옥행이 결정된다고 믿는다.

8. 기독교 vs 이슬람

기독교와 이슬람의 탄생에는 예수님과 무함마드가 있다. 이슬람의 코란은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로 인정한다. 심지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죄 없으심도 인정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컬어지고, “메시아”로 불린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고, 세상에서 사시는 동안 많은 기적을 행하셨으며, 육신의 상태로 승천하신 것까지 기록되어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십자가의 대속이나 육체의 부활 등 예수님의 신성과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완전히 부인하지만, 위대한 선지자로서 비견할 수 없는 특성을 인정하고 있다.

무슬림들의 신앙은 알라의 계시를 받아서 코란을 구술한 최고의 예언자 무함마드를 예수님을 포함한 다른 어떤 선지자보다도 더 높은 위치에 두고 있다. 그들은 “신은 알라뿐이며 무함마드는 그의 선지자”라는 신앙고백을 쉬지 않고 반복해야 한다. 그러나 무함마드를 높이 받드는 근거는 불명확하다. 

무함마드는 AD 570년 메카에서 태어나 610년 알라의 선지자로 지명을 받고, 632년 죽을 때까지 23년간 알라의 계시를 받아 전하는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코란에는 무함마드가 몇 차례밖에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있는 기록에서도 예수님과 같은 신성을 가진 사실은 찾아볼 수 없다. 무함마드의 언행을 기록한 여러 하디스에도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그의 성품과 그가 보인 삶의 오점들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슬림들은 무함마드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예언자’이며 예수 그리스도보다 훨씬 위대한 선지자라고 칭송하고 있다. 예수님에 대한 기록은 신약성경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아주 상세하게 나와 있고, 유대와 로마의 역사서에도 나와 있다. 이 기록은 예수님 생전에 현장을 목격했던 많은 사람이 살아있을 동안에 기록되었다. 반면에 무함마드에 대한 가장 빠른 전기도 무함마드 사후 200-250년 사이에나 기록된 것이다. 무함마드에 대한 첫 전기의 서문에는 위대한 선지자에 대해 부끄러운 내용이나 실망스럽게 여겨지는 내용들은 모두 생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슬림들은 코란이나 하디스 등 그들의 경전을 직접 읽는 경우가 거의 없다. 대부분 종교 지도자나 그의 지도를 받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수받는다. 그 과정에서 기록이 윤색되어 무함마드는 전설 같은 무용담을 가진,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한 선지자로 추앙받게 되었다. 사실, 무슬림이 자랑스럽게 기억하는 무함마드는 그들 경전에 기록된 사람과는 전혀 다른 가상의 인물인 것이다.

이슬람이 기독교를 비판할 때, 흔히 성경의 불완전성을 강조한다. 성경은 원본이 없고, 수많은 사본과 다른 언어로 번역된 판본이 너무나 많아서 진정한 신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고 비판한다. 반면에 이슬람의 코란은 유일한 원본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오직 이슬람만이 변하지 않은 신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사히 알 부카리》(Sahih al-Bukhari)라는 6권으로 구성된 하디스는 코란의 표준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코란은 무함마드가 23년 동안 알라에게서 받은 계시를 기록한 책이다. 그러나 처음 계시를 받았을 때, 바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것을 전문 암송자(하피즈, Hafiz)들에게 암송하게 하였다. 같은 내용을 어떤 사람에게는 다르게 말하기도 했다. 장기간에 걸쳐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모든 계시 전체를 일관되게 암송시킬 수가 없어서 여러 지역의 많은 사람이 각각 다른 부분을 나누어 암송했다고 한다. 

초대 칼리파(정치와 종교 지도자)인 무함마드가 죽은 후, 2대 칼리파는 암송으로만 전해 오던 코란을 기록해 둘 필요성을 느꼈다. 왜냐하면 무함마드가 죽은 후 이슬람에 귀속되었던 많은 부족이 탈이슬람을 선언함으로써 이를 진압하기 위한 전쟁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는데, 군인으로 전쟁에 참여한 하피즈들이 죽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2대 칼리파는 하피즈 중 한 사람인 자이드에게 다른 하피즈들이 부분적으로 암송하고 있는 내용을 수집하여 기록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자이드는 코란을 수집하면서 많은 하피즈의 기억력이 불완전함을 기록해 두었다. 이 과정에서 같은 부분을 다르게 암송하고 있던 하피즈들이 서로 자기의 암송이 옳다고 주장하며 분쟁을 일으켰다.

3대 칼리파인 우스만은 위경의 출현을 우려하여 코란을 급히 표준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자이드가 수집하여 보관 중이던 사본을 재정비하고 교차 검토한 뒤에 모든 이슬람 지역에 통합된 한 종류의 코란을 배포했다. 그리고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그 외의 코란이나 관련된 자료는 모두 불태워 버렸다. 자이드에 의해 수집된 코란에는 빠진 부분이 많아서 당시 최고의 암송자들은 표준화된 코란의 완전성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슬림들은 코란의 편집이 이렇게 불완전하게 끝난 것도 알라의 뜻(인샬라)이라 받아들인다.

코란은 불완전한 구술 수집본들 중에서 하나만 남기고, 다른 것들을 다 태워 버렸기 때문에 유일한 원본이 된 것이다. 반면에 성경은 많은 사본들 사이에 내용상의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것이 오히려 완전성을 보증하는 증거가 된다. 성경은 그 자체만으로 내용의 전달이 명확하여 평범한 사람도 성경만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깨달을 수 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이 자체적 완전성과 명확한 연결성을 가지는 데 비해 코란에 기술된 신구약 성경의 내용은 의미 전달이 불가능할 정도로 내용이 부실하며 코란에만 있는 이슬람 특유의 내용과도 연결성이 부족하다. 성경은 구절마다 많은 학자들의 비평을 받으며 연구 대상이 되어 왔지만, 이슬람에서는 코란 연구를 알라 계시의 신성성을 훼손하는 무엄한 범죄로 생각한다.

9. 인본주의 세계관

인본주의는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인간이 차지한 세계관이다. 초자연을 부정하는 자연주의, 이성을 신뢰하는 합리주의, 과학적인 방법만 인정하는 과학주의 등이 인본주의의 특징이다. 인본주의는 공립학교의 교육 내용을 장악한 존 듀이(John Dewey) 같은 인본주의 교육 철학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확산되었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 인본주의는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한다. 인본주의자들은 우주의 탄생, 생명의 탄생 등 모든 것에 과학적인 설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주의 기원이나 생명의 기원 같은 문제는 과학적인 방법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형이상학적인 문제다. 기원에 대한 그들의 설명 역시 직접 관찰하거나 실험실에서 재현할 수 있는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단지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는 ‘빅뱅이론’이라는 그럴듯한 가설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또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진화론’이라는 가설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설명하는 것만이 과학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초자연적 존재인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단세포 생명체에서 진화해 왔기 때문에 인간의 정체성이 짐승과 다르지 않다고 여긴다. 그러나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에 이르러서야 이성이 발달하기 시작했으므로 인간은 이성을 가진 생명체로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인본주의자들의 생각은 하나님과 동격이라는 평가에서부터 하찮은 미생물과 다를 바 없다거나 마치 기계와도 같다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둘째, 내 문제의 원인은 무엇인가? 인본주의자들은 “인간 개개인은 선한 인격을 가지고 태어나며 스스로 완전하게 될 수 있다. 인간을 둘러싼 사회와 그 제도들이 문제의 원인이며, 인간에게 악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 모두가 선하다면, 어째서 인간 사회가 악하게 되었는가?”라는 인본주의 심리학자 롤로 메이(Rollo May)의 질문에는 누구도 설득력 있는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셋째, 그 문제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인본주의자들은 사회와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므로 그들의 해결책은 사회와 제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작은 사회는 더 큰 사회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궁극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국가 단위 혹은 지구촌 전체의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인본주의자들은 국가가 국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큰 힘을 가진 정부가, 또 전 지구적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국제기구나 세계 정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인본주의자들은 이상적인 사회를 제안하고, 그 이상을 실현하는 것을 대단히 낙관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유혹되기 쉽다. 인본주의자들도 그동안 자신들이 제시한 이상이 잘 실현되지 못했음을 스스로 고백하면서도 낙관적 이상주의의 태도는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

넷째, 나는 결국 어디로 가는가? 인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자연주의나 과학주의에 비추어 인간에게 다른 생명체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즉 병원에서 환자의 생명 신호를 나타내는 심전도, 호흡, 혈압 등이 모두 정지하는 죽음이 닥치면, 인간의 세포 사이의 신호 교환도 사라지고, 결국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되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나 영혼을 뇌세포 사이의 신호 전달의 결과로 나타나는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신호 교환의 상실과 함께 영혼도 육체의 죽음과 함께 깨끗하게 사라진다고 여긴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같은 인본주의자들은 “아마 우리를 심판할 신은 없을 테니 심판에 대한 걱정은 그만하고 인생을 즐겨”라는 현세적이며 향락적인 삶의 태도를 가질 것을 선동하고 있다.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자신의 이성과 과학적 지식에 자신감을 얻은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귀찮게 여기며, 니체의 표현처럼 스스로 신을 죽이고 그 자리를 자신이 차지했으니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의 정체다. 

+공교육: 현재 대학을 비롯한 교육 기관과 방송, 언론, 문화 예술계에서 인본주의 이념이 대세다.

+교육학: 존 듀이,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 마리아 몬테소리(Maria Montessori), 폴 커츠 등 다수의 대학교수들이 포진해 있다.

+심리학: 스키너(B. F. Skinner), 에이브러햄 매슬로우(Abraham Maslow), 칼 로저스 (Carl Rogers), 에리히 프롬(Erich Fromm) 등이 대표 인물이다.

+과학: 칼 세이건(Carl Sagan), 리처드 도킨스, 토리 히긴스(Tori Higgins),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 등이 있다.

10. 마르크스주의 세계관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은 1800년대 중후반에 출간된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의 《공산당 선언》, 《자본론》 등의 저술에 기초한다. 이후 러시아의 레닌주의, 중국의 마오쩌둥 사상, 북한의 주체사상 등 지역마다 마르크스의 이론을 실행에 옮기면서 다양한 분파들이 생겨났다.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은 1800년대 중후반에 출간된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의 《공산당 선언》, 《자본론》 등의 저술에 기초한다. 이후 러시아의 레닌주의, 중국의 마오쩌둥 사상, 북한의 주체사상 등 지역마다 마르크스의 이론을 실행에 옮기면서 다양한 분파들이 생겨났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 공산주의는 인본주의처럼 초자연을 부인하는 자연주의와 과학주의를 기반으로 하며, 변증법적 유물론에 근거한 사회 변화를 신봉한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다. 소련 공산당은 모든 사람이 열심히 일한다면,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분배받는” 이상적인 공산 사회가 운영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능력만큼 일하지 않고 필요 이상으로 분배받으려는 인민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의 생리학자 파블로프(Pavlov)는 조건 반사 실험을 통해 행동주의 심리학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것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에 반복적 학습을 통해 주입한 조건으로 특정 반응을 유도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인간을 진화 중인 짐승으로 생각한다. 다른 동물이나 기계처럼 어떤 조건을 가하면, 모든 인간은 동일하게 반응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공산당은 그들의 이념에 따르지 않는 인민들을 시베리아 강제 노동 수용소에 보내어 행동주의에 따른 인간 개조를 시도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인민들의 노동에 대한 태도는 개선되지 않았고, 눈치 보는 인간들만 양산하게 되었다.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부인하기 때문에 공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민을 수용소로 보내거나 영원히 제거하는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둘째, 내 문제의 원인은 무엇인가? 공산주의자는 모든 사회 문제의 근원에 경제 체제의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들은 인간 개개인은 선하지만, 잘못된 경제 체제로 인해 사회 문제가 발생한다고 결론짓는다. 공산주의자들은 토지, 공장, 자본 같은 생산 수단을 가진 부르주아가 사회의 모든 조직을 통해 생산 수단이 없는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한다고 생각한다. 그 착취의 사회적 구조에 국가가 있고, 가정이 있다. 교회 역시 부르주아와 힘을 합쳐서 프롤레타리아를 착취 구조 속에 가두고 순응시키기 위해 운영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원시 사회-왕정 사회-봉건 사회-자본주의 사회-사회주의 사회-공산주의 사회의 순서로 경제 체제가 진화해 왔다고 규정한다. 각 경제 체제하에서 재화를 생산하고 분배하는 방식이 사람들의 관계 맺는 방식을 규정한다. 즉 사회에 정착된 잘못된 경제 체제가 근본 문제라고 믿는 것이다. 그 문제에서 파생하여 정치, 종교, 법, 문화 등과 같은 사회 문제로 연결되고, 그것이 개인의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셋째, 그 문제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모든 악의 근원이 잘못된 경제 체제에 있으므로 프롤레타리아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생산 수단을 장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어떤 폭력을 사용하더라도 잘못이 아니라고 규정한다. 그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잘못된 경제 체제에서 파생되어 그것을 지탱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가, 교회, 가정과 같은 사회 구조를 파괴하는 것이다. 낡은 사회 구조를 빨리 무너뜨려야만 새 경제 체제를 안정화시킬 새로운 사회 구조가 정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이러한 과정이 다윈의 진화론에서처럼 점진적으로 일어나야 한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레닌(Vladimir Il’ich Lenin)은 공산혁명을 통해 그 이념을 실제로 실행하는 과정에서 그 변화가 폭력을 통해 급격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넷째, 나는 결국 어디로 가는가? 공산주의자들은 유물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물질 수준으로 여기거나 다른 짐승 이상의 존재로 보지 않는다. 인본주의자들처럼 인간의 생명 신호가 끝나면 그걸로 끝이며, 영혼이라는 것은 없고 사후 세계나 심판도 없다고 믿는다. 그런 것은 구체제의 지배자들이 프롤레타리아를 억압하여 고분고분하게 만들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로 치부한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고, 성경이 제시하는 윤리와 법의 기준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현세적이며 말초적인 즐거움만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또한 강제 노동 수용소를 통한 사상 교육은 인간의 창의적 경제 활동 의지를 말살하고, 오직 숨죽이며 당의 눈치만 살피는 인간을 양산할 뿐이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마오쩌둥(毛澤東), 덩샤오핑(鄧小平), 김일성, 호찌민(Ho Chi Minh), 카스트로(Castro), 체 게바라(Che Guevara)

+진보적 종교인, 해방 신학자, 예수회, 세계교회협의회(WCC) 등이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 해결을 위해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을 수용하고 있다.

11. 뉴에이지 세계관

뉴에이지(New Age)는 힌두교, 불교, 도교 등에서 유래한 범신론적인 세계관으로 진화론, 환생, 윤회, 깨달음 등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다. 조나단 아돌프(Jonathan Adolph)는 “뉴에이지는 일종의 유토피아주의로, 더 나은 사회, 즉 인류가 자신과 자연, 그리고 전 우주와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는 새로운 시대(New Age)를 창조하려는 열망을 가진 운동”이라고 요약한다. 이들은 뉴에이지를 이루려면, 개개인의 큰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 혹은 지구를 ‘큰 나’(브라만)로, 자기 자신을 ‘작은 나’(아트만)로 부른다. 아트만이 브라만과 하나 되는 영적 각성의 순간을 지날 때, 새 시대가 도래한다고 믿는 것이다.“나도 옳고 너도 옳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이것은 상대주의를 대변하는 구호다. “진리는 어느 종교에나 있다.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종착점은 동일하다. 단지 그 종착점으로 가는 길을 다르게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종교 다원주의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는 힌두교의 “모든 사물에는 신적인 요소가 있다”는 주장이나 불교의 “모든 생명은 윤회와 해탈을 통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의 뉴에이지식 표현인 것이다. 모든 것이 신이라는 주장은 인간 스스로가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뉴에이지를 범신론적(우주적) 인본주의라는 뜻의 코스믹 휴머니즘(cosmic humanism)으로 부르기도 한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 범신론을 주장하는 힌두교는 창조의 신 ‘브라흐마’와 유지의 신 ‘비슈누’와 파멸의 신 ‘시바’ 등 3대 신을 모신다. 그들은 이들 신이 원래 하나이지만, 역할에 따라 다른 신격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신이 있지만, 삼주신(三主神)에서 필요한 역할에 따라 파생된 것들이다. 그중에서 인간의 형상을 입고 세상에 나타난 신을 ‘아바타’라고 한다. 뉴에이지 세계관은 인간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신의 일부라고 믿는다. 인간을 신성을 내포한 영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후에는 전생의 업보(카르마)에 의해 더 높거나 낮은 계급의 인간 혹은 동물로 환생한다고 믿는다.

둘째, 내 문제의 원인은 무엇인가? 뉴에이지 세계관은 인간의 문제란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空)을 마치 무엇이 있는 것(色)처럼 느끼면서 아등바등하는 것쯤으로 여긴다(色卽是空 空卽是色).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요,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니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셋째, 그 문제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모든 문제의 원인이 실제로는 없는 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여기고, 끝없는 욕심을 부리는 데 있다고 믿기에 내가 집착하는 그것이 실제로는 없는 것(空)임을 깨닫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이다. 아트만인 내(我)가 우주(梵) 혹은 창조주인 브라만과 하나가 되면, 범아일여(梵我一如)를 깨달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 깨달음(모크샤)을 얻으면, 끝없는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된다(해탈). 해탈의 순간을 지나면, 힌두교에서는 브라만이 되고, 불교에서는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깨달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뉴에이지는 아주 다양한 방법을 제시한다. 힌두교의 고행이나 수련, 또는 불교의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 등의 여섯 가지 덕목을 가리키는 육바라밀(六波羅蜜) 등을 제시하는데, 이런 고전적인 방법들 외에도 참선, 요가, 단전 호흡, 자연요법, 점술, 영매술, 심지어 환각제의 도움을 얻어서라도 브라만과 하나가 되기만 하면 된다고 믿는다. 해탈을 경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깨달음을 인도할 능력이 생기며, 다른 사람이 깨달음을 통해 해탈하는 것을 이끌어야 한다고 믿는다.

넷째, 나는 결국 어디로 가는가? 뉴에이지는 영적인 것을 인정하며, 생명은 윤회의 끝없는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믿는다. 해탈하지 못한 모든 영혼은 전생의 업(카르마)에 따라 영원한 법(다르마)을 충족하는 선업과 그에 어긋나는 악업의 크기에 의해 더 나은 인생으로, 혹은 더 못한 인생이나 동물로 환생한다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윤회와 해탈을 통해 브라만이 될 수 있는 신적인 존재로 여기기에 살생을 금한다.

+깨달음을 얻는 방법: 참선, 요가, 선(禪), 단(丹), 뉴에이지 음악, 기 체조 등

+문화 예술: <아바타>, <스타워즈>, <매트릭스> 등 종교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를 표방하는 영화와 뉴에이지 음악 같은 문화 콘텐츠

12. 포스트모더니즘 세계관

서양의 전통적인 세계관인 기독교 세계관은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며 인간 지성의 확장으로 이신론적 신관을 가진 시대를 지나게 된다. 이신론은 이성적인 신론이라는 뜻이다. 세상의 시작에 창조주 하나님과 세상의 끝에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은 인정하지만, 인간의 삶에 동행하며 일일이 개입하시는 하나님은 부정하는 신론이다. 이와 같이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과 격리된 인간은 즉시 무신론으로 옮겨 가게 된다.

1800년대 중후반, 다윈의 진화론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무신론적 세계관으로의 이행을 촉진하여, 모더니즘 시대를 이끄는 쌍두마차처럼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에 각각 세속적 인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더니즘 시대를 지나면서 너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에 싫증을 느끼고, 비현실적으로 이상주의적인 사회 변혁을 주도했던 히틀러의 전체주의나 스탈린의 독재 정치에 크게 실망하게 되었다. 그래서 프랑스의 좌파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자신들이 이전에 주장했던 마르크스주의의 실패한 부분을 가리기 위해 고안해 낸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이들은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을 최고의 선으로 생각한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인간은 “언어로 구성된 실체”라고 생각한다. 언어로 어떻게 표현되느냐에 따라 실체의 가치가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소수로서 다수를 선동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기술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거짓도 진실처럼 느끼게 만드는 선동 문구를 절묘하게 만들어 낸다. 예를 들면, 동성혼 합법화를 주장하는 구호로 “이성애적 결혼식의 신성함을 믿는 것은 퇴보의 증거이며, 동성 결혼의 법제화를 선호하는 것은 열린 마음의 증거다”를 외치거나 성 해방 구호로 “금욕적 교육 운동을 벌이는 것은 구속하는 행위이며, 자유로운 사랑과 혁명을 추진하는 것은 해방의 표지다”를 외친다. 

둘째, 내 문제의 원인은 무엇인가? 포스트모더니즘은 네오마르크시즘과 궤를 같이하고 있기 때문에 다수에 의한 소수의 핍박이 세상의 가장 큰 문제라고 본다.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면, 아무리 옳은 제도나 법률이라도 나쁜 것으로 규정한다. 이들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학설을 의지해 성적인 충동을 너무 억제하기 때문에 정신 질환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핍박받는 소수는 무조건 선이고, 이들을 핍박하는 다수는 무조건 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건의 진실과는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져서 선악의 규정을 합리화하는 선전 도구로 사용되곤 한다.

셋째, 그 문제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이들은 문제의 근원은 기득권을 가진 다수가 힘없는 소수를 핍박하는 것에 있다고 본다. 그 해결책은 소수가 힘을 모아 기존의 권위와 문화에 도전하여 그것을 해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지적인 작은 충돌과 다툼을 통해 사회의 기반을 흔드는 것이 필요하다. 억압된 소수가 그들을 억압하는 다수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어떤 불법을 행하더라도, 그것은 정치적으로 정당(Politically Correct, PC)하다고 규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법 파업, 불법 점거, 불법 파괴 행위 이후에도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이들의 해결책은 소수를 억압하는 다수의 근본을 뒤흔들어 끊임없이 세상을 바꾸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넷째, 나는 결국 어디로 가는가? 다른 무신론자들처럼 영적인 측면을 부정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사후세계는 없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면, 모든 것은 끝이라고 생각한다. 죽음 후의 심판이나 윤회의 고리 등, 이생의 삶의 선택에서 고려해야 할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지극히 자기중심적으로 마음대로 사는 것이 가능하다. 나를 심판할 하나님이나 지옥은 없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복음인 것이다.

+프랑스 근대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자크 라캉(Jacques Lacan), 롤랑 바르트 등, 이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학 교육의 주류 이념으로 등장시켰다.

+포스트모더니스트의 특징적인 표현법: “그건 네 생각이고”, “너에겐 진리일지 모르나 나에겐 아니야.”

+포스트모더니스트의 행동양식: 모든 전통적 기준을 뒤집으려는 시도, 소수자와 억압받는 자를 무조건 선으로 규정

13. 유교적 세계관

첫째, 나는 누구인가? 유교의 형이상학(만물의 기원이나 존재의 근원을 다루는 학문)은 모든 것의 근원 혹은 우주의 시작을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즉 무극(끝없음) 혹은 태극(너무 커서 끝을 알 수 없음)으로 설명한다. 태극기에도 나오는 태극은 움직이거나(動) 멈추면서(靜) 음양이 생기고, 음양의 조화로 만물이 생성한다. 성리학에서는 태극을 만물의 근원 혹은 근본 원리로 생각하여 이(理, principle)로, 그 원리에 따라 생겨난 자연 만물을 기(氣, master, 우주를 이루는 원질)로 본다. 유교의 우주론은 태극의 원리에 따라 기의 변화로 우주가 생성되었다고 보는 기의 진화론이다. 그들은 태극 외에는 아무 물질도 없는 상태에서 우주가 생겨났다고 본다. 생명도 이런 음양의 조화로 하늘(비인격적)에 의해 생성되는데, 하늘은 理, 사람은 氣가 된다. 왕과 신하,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스승과 제자도 이와 같은 논리에 따라 관계가 성립된다. 기가 이를 따르는 것을 순리(順理)로 규정하기 때문에, 권위에 순종하는 유교 문화의 논리적 근거가 된다.

둘째, 내 문제의 원인은 무엇인가? 유교에서는 理에 의한 氣의 조절이 원활하지 못한 것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다. 하늘과 인간의 관계, 혹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理에 의한 氣의 다스림이 원활할 때, 관계가 안정적이다. 즉 권위에 순종하고 도덕(三綱五倫)과 법질서를 잘 지키면 순리적이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고, 그에 어긋나면 역리적이고 어지러운 세상이 되는 것이다. 한편, 개인의 내면세계에는 사단칠정(四端七情)이 있다. ‘사단’은 인간의 본성에 해당하는 네 가지 마음, 인의예지(仁義禮智)다. ‘인’은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인 측은지심(惻隱之心), ‘의’는 악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인 수오지심(羞惡之心), ‘예’는 사양하는 마음인 사양지심(辭讓之心), ‘지’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인 시비지심(是非之心)이다. ‘칠정’은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慾)으로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두렵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원하는 감정들을 나타낸다. 개인의 마음은 理에서 유래한 四端(이성)에 의해 氣에서 유래한 七情(감정)이 잘 조절되지 않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고 본다.

셋째, 그 문제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인간 개인의 내면세계의 질서, 인간과 외부 세계와의 관계 문제 등 모든 문제에 理와 氣의 질서가 깨어지는 것이 원인이라면, 그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이 될 것이다. 결국, 인간의 선한 본성인 사단을 밝히 드러내어 자신을 닦고, 주변 사람들을 새롭게 하여 선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유교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20] 교육의 방법론은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재가(齋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즉 사물을 잘 살펴서, 쌓은 지식을 넓히고, 뜻을 진실하게 세우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자신의 몸을 수련하고, 가정을 다스린 후, 나라를 잘 다스려 세상을 평안하게 하는 것이다. 수기치인(修己治人), 즉 자신을 먼저 수련한 후에야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군자가 될 수 있다.

넷째, 나는 결국 어디로 가는가? 유교의 삶과 죽음에 대한 관념을 사생관(死生觀)이라 하는데, 죽음을 먼저 앞세우는 것은 모든 일에서 끝을 먼저 생각하는 유교적 사고방식 때문이다. 사후 세계를 따로 설정하지는 않지만, 서양의 인본주의처럼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손을 통해 자기 삶이 지속된다고 본다. 따라서 유교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가문의 사회적 평판이나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손의 번영을 위해 교육뿐 아니라 조상의 묏자리를 위해 풍수지리에 따라 명당을 찾는 일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중용》(中庸)에서 귀(鬼)는 음의 영, 신(神)은 양의 영이라 했고, 《논어》에서는 음과 양의 영험한 기운이 귀신이므로 공경하지만 멀리해야 한다고 하였다. 영에 대해 불가지론적 입장이지만, 존재를 무시하지는 않는다. 기가 모이면 생명이고, 기가 흩어지면 죽음이라 생각한다. 양의 영이 모이면 혼(영혼)이, 음의 영이 모이면 백(육체)이 되어 혼백이 합쳐져 생명이 된다. 반대로 혼백이 흩어지면 죽음이며, 혼은 흩어져서 하늘로, 백은 흩어져서 흙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즉 삶과 죽음의 관계는 기의 이합집산(離合集散)의 변화일 뿐 완전한 단절은 아니라는 것이다.

Part 3. 시대 분별- 세계관은 학문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14. 세계관과 학문은 밀접한 관계다. 

기독교인들은 각 학문 분야의 기준을 자신이 받은 교육이나 경험이 아닌 성경에서 찾아내어 자신의 기독교 세계관 정립에 적용해야 한다. 데이비드 노에벨이 제시한 것처럼, 우리는 창세기에서 10대 학문 분야를 설명하는 구절들을 찾아볼 수 있다. 성경 말씀을 통해 각 학문 분야가 창조 질서의 어떤 측면들을 드러내고 강조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1+2) 신학과 철학: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3) 윤리학: “선악을 알게 하는”(창 2:9)

4) 생물학: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창 1:21)

5) 심리학: “생령이 되니라”(창 2:7)

6) 사회학: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

7) 법학: “내가 네게… 명한”(창 3:11)

8) 정치학(혹은 법률):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창 9:6)

9) 경제학: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창 1:29)

10) 역사학: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창 3:15) 

또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시는데, 각 학문 분야에 대하여 각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1) 신학: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

2) 철학: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3) 윤리학: “참 빛”(요 1:9)

4) 생물학: “생명”(요 1:4, 11:25)

5) 심리학: “구주”(눅 1:47; 딛 2:13)

6) 사회학: “아들”(눅 1:31; 사 9:6)

7) 법학: “법의 제정자”(약 4:12; 딤전 1:9-10)

8) 정치학: “만왕의 왕… 만주의 주”(계 19:16; 딤전 6:15)

9) 경제학: “모든 것의 소유자”(시 24:1, 50:10-12; 고전 10:26)

10) 역사학: “알파와 오메가”(계 1:8)

이처럼 구체적인 성경 말씀의 기준을 가지고 자신의 성경적 세계관을 정립하고, 삶에 적용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또한 성경 전체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통전적으로 이해함으로써, 한 구절에 묶여 편향된 해석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드러난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각 분야에 구체적으로 적용해 나가는 일을 계속해 나가야 할 것이다. 세계관의 정립은 한순간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며 평생에 걸쳐 자신의 관점을 성경의 다림줄에 비교 검토하며 이루어 간다는 점에서 성화의 과정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15. 신학 1: 존재론과 기원론

존재론과 기원론은 신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우주와 우리 주변의 모든 생명체와 사물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느냐의 질문(존재론)은 당연히 그 존재의 시작은 언제, 어떻게 된 것인가(기원론)라는 질문으로 연결된다.

유신론에서 존재의 근원은 ‘신’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이 창조함으로써 존재하기 시작했다고 믿으며,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존재의 너머에 초자연적 존재인 신이 있다고 믿는다. 반면에, 무신론자들은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미명하에 초자연을 아예 배제해 버린다. 물질세계 너머에 어떤 존재도 의미도 없다고 주장한다.

서양의 전통적인 세계관은 기독교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에 과학의 패러다임도 하나님의 창조에 존재의 근거를 두고 있었다.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등 많은 기독교인 과학자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에서 그분의 창조 원리를 찾아내기 위해 연구했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과학계와 교황청의 불화 속에서 과학자들은 학문적 진리를 자유롭게 추구하기 위해 교황청의 종교적 권위주의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했다.

16. 신학 2: 인식론- 신의 존재를 어떻게 알 수 있나? 

일신론을 바탕으로 한 각 종교는 그들의 경전이 있고, 그 경전에는 신의 존재 여부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있다. 신학은 그 경전을 연구하여 신이 존재함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신의 특징은 무엇이고, 그 신이 우리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등의 질문에 대해 답을 찾아가는 학문이다.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이 계시(스스로를 드러내어 보여 주심)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통해 스스로 계시하신다. 일반계시는 자연 질서를 통해 인간에게 계시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아름답고 장엄한 자연의 경관을 통해, 자연을 연구하며 만나는 오묘한 원리와 법칙을 통해, 태초에 우리 마음속에 심어 두신 양심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알리셨으므로 불신자들조차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참조, 롬 1:19-20). 그에 비해 특별계시는 성경 말씀을 통해 계시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성경은 하나님이 모세를 비롯한 수많은 선지자를 통해 계시하신 내용을 40여 명의 저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책이므로 성경을 통해 스스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딤후 3:16).

특별계시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계시는 이 땅에 직접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육체로 오시어 우리와 함께하신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벧전 3:18)하심으로써 구속의 복음을 나타내셨으며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셨다. 기독교가 세상의 다른 종교들과 다른 것은 누구도 생각해 낼 수 없는 유일무이한 구원의 길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믿음으로써 얻을 수 있다.

17. 신학 3: 무신론 신학

공산주의의 설계자인 마르크스는 종교(기독교)에 대해 “억압받는 피조물들의 한숨이며, 무자비한 세상의 본질이며, 영혼 없는 상황의 핵심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인민에게 환상의 행복(종교)을 폐지해야, 진정한 행복(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레닌은 마르크스의 이념을 현실에서 실행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리고,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합(소련)을 설립했다. 레닌은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노동자들이 신화 속에 나오는 천국이라는 ‘영적 독주’에 취해 당면한 경제적인 가난을 잊게 만든다. 이 독한 술 한 모금만으로도 압제자인 부르주아를 쳐부수려는 혁명적 열의가 낮아진다”고 주장했다. 그의 신학은 한마디로 독단적 무신론이다. 신은 어떤 존재이든 간에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레닌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스탈린(Stalin)이나 흐루쇼프(Khrushchyov) 역시 “종교라는 아편의 마술적 능력을 제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 있다”고 공언했다. 그들은 성직자란 ‘부르주아의 종’이라고 선언하였다. 교회의 모든 재산은 몰수당했고, 믿음을 지키던 성직자와 신도들이 투옥되거나 사형당했다.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배급표가 주어지지 않았고, 그 자녀들의 교육 기회는 박탈당했다.

18. 철학 1: 인식론- 지식이 어떻게 가능한가?

기독교에서는 창조주가 인간에게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으므로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초월적 존재인 신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과 동일하다. 하나님이 알려 주셨기 때문에 알 수 있으며, 특히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에 하나님의 질서가 존재할 것을 가정하기 때문에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연구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범신론인 뉴에이지에서는 개인(아트만)이 자연에 대해 명확한 지식을 가질 수 없지만, 자신이 고등한 자아(신 혹은 브라만)와 하나인 것을 깨달을 때, 모든 것을 즉시 알 수있다고 믿는다. 마치 전기 기구를 전원 콘센트에 플러그인(plug-in)할 때 작동하는 것처럼 깨달음만이 지식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뉴에이지에서 인식은 실재(reality)를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깨달음에 이르는 도구일 뿐이다.

인본주의는 초자연을 부정한 채 자연주의에만 매달린다. 그래서 과학이 모든 인식의 방법론이 된다고 믿는다. 그들에게는 물리적 우주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며, 진화의 결과로 인간에 이르러서야 정신과 이성이 생겨났고, 그 이성을 사용하여 앎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공산주의 역시 유물론적 자연주의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들 모두 과학만이 진리로 접근하는 유일한 길이라 믿으며, 변증법적 유물론이 모든 것의 답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시대의 세계관(인본주의와 공산주의)이 이성 중심, 과학 중심, 논리 중심의 고정된 틀 속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생각을 지나치게 억압한다고 생각한 언어학자와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확장하기 위해 취해진 행동 양식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 진리를 부정하며 주관적 진리를 주장하고, 메타내러티브가 없기 때문에 세계관이 아니라고 스스로 주장한다.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제멋대로 우기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은 기독교와 유신론뿐 아니라 다른 무신론에 대해서도 똑같이 파괴적이다.

19. 철학 2: 철학과 과학

신학과 철학은 존재의 근본과 기원에 대한 지식에서 시작한다. 즉 존재론과 기원론, 인식론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앎의 바탕이 되며, 그 외의 모든 지식은 이 토대 위에 구축된다. 우리는 신의 존재와 기원에 대해 논의하면서, 과학적 방법론이 접근할 수 없는 한계를 발견한 바 있다. 진화론은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믿음으로써 시작되었고, 창조론은 ‘신이 존재함’을 믿음으로써 시작되었다. 지식의 근본이 되는 형이상학적 토대를 과학적 방법론으로는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지식은 어떤 믿음을 근거로 발전한다.

20. 철학 3: 진리란 무엇인가? 

철학은 진리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학교의 기능은 진리의 탐구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진리를 정의할 때는 넓은 의미의 진리와 좁은 의미의 진리로 나눌 수 있다. 넓은 의미의 진리는 어떤 명제가 옳으면, 참 혹은 진리, 옳지 않으면 거짓 혹은 비진리라고 구분할 때의 진리다. 학교 시험에서 “다음 문장 중 옳은 것은 T(true), 옳지 않은 것은 F(false)를 표시하라”와 같이 진위를 가리는 문제의 답을 고르는 것과 같다. “현재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다”라는 명제는 넓은 의미의 참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좁은 의미의 진리는 단순히 참일 뿐만 아니라, 보편적이고 절대적이며 영원토록 참인 동시에 어떤 중대한 의미를 담고 있는 명제를 뜻한다. 그런 면에서 “현재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다”라는 명제는 참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과연 영원히 참인가?” 혹은 “중대한 의미를 함유하는가?”라는 측면에서 좁은 의미의 진리에 포함되기는 어렵다. 각 종교나 세계관이 말하는 진리는 이 범주에 속해야 할 것이다. 좁은 의미의 진리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절대주의,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하는 상대주의, 절대적인 진리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불가지론으로 나눌 수 있다. 세계관마다 좁은 의미 혹은 진정한 의미의 진리를 대하는 태도는 확연히 다르다.

일신론의 종교에서는 절대 주권을 가진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모든 지식의 근원이나 믿음의 근원이 한 분 하나님으로 수렴된다. 절대자를 믿으며 그로부터 나오는 절대적인 가치인 절대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반면에 다신론의 종교에서는 다양한 신들 사이의 절대성을 비교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절대적인 진리를 인정하기 힘들다. 범신론에 이르면 세상의 모든 것이 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진리의 절대성은 더욱 약해진다. 불교나 뉴에이지에서 상대주의를 택하는 것은 이런 범신론적 세계관 때문이다.

무신론의 세계관에서는 절대자인 신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절대 진리를 주장하기 힘들다. 인본주의는 이성을 가진 인간이 신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의 집단 이성이 합의를 통해 절대 진리와 비슷한 것을 세우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필요성을 채우는 것이 진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양한 인간들 사이에서 진리에 대한 합의가 불가능하다는 것과 어떤 것을 절대화하기 위해서는 파시즘이나 공산당의 수용소와 같은 독재와 강요가 불가피함을 경험하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경험을 한 인본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고안한 세계관으로 진리에 대해 극단적 상대주의의 태도를 취한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이자 영원한 생명의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선언하셨다. 기독교에서 정의하는 진리는 정보나 지식의 수준이 아닌 우리 존재의 목적과 삶의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21. 윤리학 1: 절대적 도덕률이 있는가?

윤리학은 “선악의 기준이 무엇이며, 그 기준이 어떻게 정립되는가”에 대한 답을 구하는 학문이다. 진리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선악의 기준에 대해서도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서로 충돌한다. 기독교와 이슬람 같이 일신론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절대적인 도덕률이 있다고 믿는다. 절대자인 신에서 유래한 변치 않고 명확한 기준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반면에 범신론 혹은 다신론적 세계관은 상대주의를 주장하고, 무신론은 절대적 윤리 기준의 근거가 없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기준을 제시하고자 노력한다.

우리는 세상의 교육을 통해 시대가 변하면 윤리의 기준도 변한다고 교육받아 왔다. 그러나 도덕률에는 시대와 국가를 초월한 공통점이 있다. 살인, 도둑질, 거짓말, 간음, 탐욕, 불효, 비겁함은 거의 언제 어디서나 규탄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 같은 도덕률 자체의 보편성과 유사성은 우연과 진화에 의존하는 자연주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류 공통의 도덕적 유산이 있음을 분명히 한다. 이 공통의 도덕적 유산을 누가 어떻게 정의하든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 밖에 어떤 완전한 도덕적 잣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이 완전하고도 보편적인 도덕 규범에 우리 행동을 재어 보는 버릇이 있으며, 그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에는 자기도 모르게 지키지 못한 이유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게 된다. 사람들은 그 규범을 인간 본성의 법칙 혹은 자연법(Law of Nature)이라 부른다.

절대적인 기준 없이 정의는 존재할 수 없으며, 절대적인 윤리의 기준이 없다면 도덕성은 존재할 수 없다. 기독교 도덕성은 우리 밖에 절대적인 도덕률이 존재한다고 하는 믿음 위에, 또 그 절대적 도덕률이 우리 존재 속에도 새겨져 있다는 믿음 위에 세워져 있다. 이는 창조주의 본성에서 흘러나와 피조물의 본성을 통해 흐르는 도덕성이며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 앞에 스스로 드러내신 하나님의 일반계시다.

한편, 십계명이라는 구체적 기준을 통해, 산상수훈 같은 구체적인 가르침을 통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 전체를 통해 성경을 믿음으로 읽는 사람들에게만 특별히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 즉 특별계시가 있다. 우리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통해 변하지 않고, 절대적인 도덕의 기준을 구체화할 수 있다.

절대자인 하나님을 부정하는 무신론적 세계관에서는 도덕성의 근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이성을 가진 자기 자신이 그 근원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개개인의 선악에 대한 판단이 사회 전체의 도덕적 표준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만일 개개인의 선악의 판단 너머 어떤 절대적인 것이 없다면,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그리고 집단과 집단 간의 갈등에서 누구의 도덕적 기준을 선택할 것인지를 판단할 최후의 수단이 없게 된다. 그저 서로 갈등하는 상태로 남겨질 뿐이며 결국 해결은 그 기준을 정할 “힘을 누가 가졌느냐”로 귀결된다. 이것이 도덕적 상대주의의 치명적 약점이다.

22. 윤리학 2: 상대적 도덕률의 문제점

23. 윤리학 3: 약자 보호가 윤리의 기준이 될 때

24. 생물학 1: 진화론은 과학이 아니다

진화론은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진화론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도 하고, 하나님을 떠나고 싶어서 진화론을 믿기도 한다. 진화론은 무신론자들이 하나님 없이 생명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라 생각하여 적극적으로 지지한 덕분에 발전하였고, 근거가 부족한 허술한 가설 위에 세워진 거짓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았다. 

현대 인본주의 사회에서 진화론은 패러다임이 되어 “견고한 진”(고후 10:4)을 구축하고 있다. 진화론은 처음에 다윈의 《종의 기원》에 근거하여 종 분화를 설명하는 생물학 분야에서 시작하였다. 이후 종 분화의 증거라는 화석과 지층의 연구를 위해 지질학과 지구 과학이 개입되었으며, 우주의 기원을 다루는 천체 물리학이 개입되어 뼈대를 이룬 후, 모든 자연 과학으로 확산되어 다학제적인 패러다임을 형성하였다. 

25. 생물학 2: 가설과 추정으로 가득한 진화론

다윈이 주장한 점진적 진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한데, 그 근거를 제공한 것이 1872년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이 제안했던 ‘지질 계통표’다. 당시 라이엘은 다윈의 《종의 기원》에 감명을 받은 상태였다. 그는 이미 사용되고 있던 베르너(Werner)의 지질 계통표를 더 세분하여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로 구분했다. 그런데 방사성 동위 원소를 이용한 지층 연대 측정법이 없던 그때에 벌써 지구의 나이를 수억-수십억 년으로 간주해 버렸다. 그 당시 영국에서 발견된 지층의 아래쪽에서 발굴된 화석의 연대를 실제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간주했으며, 또 지층이 일정한 속도로 퇴적되어 형성되었을 것으로 가정하여 그 두께에 따라 지층의 연대를 배정하였다. 그리고 그 지층에서 나온 화석을 표준 화석으로 지정하여 연대의 표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지층에서는 각 지층의 두께가 다르거나 화석의 분포가 역전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 지질 계통표의 지층 분류와 표준 화석의 연대는 근거가 부실하기 그지없다.20세기 중엽 방사성 동위 원소를 이용한 암석의 연대 측정법이 개발되었다. 그러나 측정의 오차가 크고, 그 지층을 형성하는 암석의 초기 동위 원소 비율을 알 수 없었으므로 연대 측정에 적용하기는 힘들었다. 진화론자들은 지질 계통표로 정해진 표준 화석의 나이와 비슷한 연대 측정이 나올 때까지 주변 암석의 방사성 동위 원소 측정을 반복하거나 아니면 정직한 자료를 제출했다가 학계에서 퇴출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1872년에 지질 계통표에서 지층의 두께에 따라 설정한 표준 화석의 연대가 거의 그대로 해당 지층 암석의 방사성 동위 원소 측정 연대로 탈바꿈하였다. 또 그 지층의 연대는 표준 화석의 연대를 지지하는 근거로 다시 사용되는 순환논리가 반복되고 있다.

생명의 기원과 우주의 탄생을 연계시키려는 진화론자들의 노력은 대폭발로 생긴 무기물로부터 유기물이 만들어지고, 그 유기물로부터 생명체가 만들어졌다는 가설을 세운다. 1920년대 소련 과학자 알렉산드르 오파린은 ‘화학 진화론’을 내세웠다. 초기 지구에는 유기물이 높은 농도로 축적된 원시 수프가 가득 찬 시궁창이 있었는데, 그 속의 유기물들이 조합을 이루어 세포가 생겨났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당시 화학자들이 작은 무기물 분자들을 원료로 아미노산이나 핵산이 만들어지기는 힘들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1953년 밀러(Miller)와 유리(Urey)는 시험관에서 고압의 전류를 가해 아미노산이 합성됨을 주장하면서, 그것으로 화학 진화론에 근거한 생명 탄생을 증명했다고 주장하였다. 그 시대에는 세포를 단순한 물주머니(cell)로 상상하였고, 유기물이 농도가 높으면 세포가 저절로 생길 것이라는 가설이 통하였다.

26. 생물학 3: 최신 과학은 진화론의 증거를 부정한다.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형이상학적 믿음을 과학적 사실로 둔갑시켜 그들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많은 가설과 추정을 사실인 것처럼 포장하여 자신들의 설명이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다윈이 주장한 공통 조상으로부터의 진화는 어디에서도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처음부터 린네가 형태에 따라 분류를 하였기에 같은 계통에 있는 것들은 닮은 형태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공통 조상의 증거로 제시되었던 헤켈(Haeckel)의 배아 발생도, 시조새, 유인원의 화석들은 모두 진화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조작된 증거임이 밝혀졌다.

27. 생물학 4: 유신 진화론 비판

28. 심리학 1: 정신과 육체

심리학(psychology)의 그리스어 어원은 ‘영혼’을 뜻하는 프쉬케(psyche)와 ‘말씀 또는 이치’를 뜻하는 로고스(logos)에서 파생되어 ‘학문’의 접미사로 사용되는 올로지(-ology)가 합쳐진 단어다. 이것이 뜻하는 것처럼 심리학은 영혼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인간의 행동과 심리 과정을 연구하는 경험 과학의 한 분야다. 기독교는 다른 어떤 세계관보다 영적인 측면과 심리학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본주의, 공산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들을 포함하는 현대 심리학을 검토해 보면, 세속 심리학과 기독교 사이에 심각한 충돌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세속 심리학의 뼈대를 세운 프로이트, 스키너, 파블로프, 매슬로우, 라캉 등이 모두 무신론적인 세계관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들이 현대 심리학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29. 심리학 2: 죄책감

30. 심리학 3: 고통의 문제

31. 사회학 1: 결혼과 가정

기독교는 모든 죄의 근원이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인간의 영혼과 악으로 향하는 영혼의 자유 의지에 있다고 규정한다. 죄에 대한 책임과 회복의 책임은 사회 전체보다는 개인에게 있다. 반면에 무신론자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 문화가 개인의 의식과 행동을 결정짓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죄의 근원을 잘못된 사회와 그 문화에서 찾는다. 대부분의 사회학자가 가족이나 교회나 국가와 같은 사회 기관을 인정하기에 각 세계관이 이런 사회 기관들을 사회의 죄악과 연관하여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를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결혼은 하나님이 최초로 제정하신 제도(창 2:24)이며 가정은 사회의 기반을 이루는 최소 단위이자 하나님의 기업을 나누어 받는 단위다(수 13:15). 특히 고대 이스라엘의 가정은 율법의 근원이자 신앙의 대상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한 신앙고백(쉐마)을 자녀에게 가르쳐 양육하는 기관의 역할을 했다(신 6:4-9). 하나님이 원래 고안하신 결혼 형태는 일부일처제다(창 2:24; 딤전 3:2, 12; 딛 1:6).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몸종 하갈의 갈등(창 16장)이나 야곱의 두 아내 라헬과 레아의 갈등(창 30장)은 일부다처제에서 생기는 문제점들을 보여 준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부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처럼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관계다(엡 5:23). 이처럼 기독교는 결혼과 가정 제도에 명확히 지켜야 할 기준이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에 반해 이슬람은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데 기본적으로 남녀 불평등의 법률을 가지고 있다. 남편은 외도해도 되고, 아내가 마음에 안 들면 때리거나 이혼할 수도 있는데, 그 반대는 허용되지 않는다. 간음의 경우에도 남성보다 여성에게 훨씬 더 심한 벌이 적용된다. 무슬림 가정은 가부장적이며 여성들은 아들을 낳아야 하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 알라보다는 무함마드의 전통에 더 의존하는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억압적인 문화를 형성했다.

인본주의는 기독교의 이성애적 일부일처제를 실패한 사회 제도로 규정하는데, 인간의 성장 가능성을 제한하는 제도로 여기기 때문이다. 특히 극단적 페미니스트들은 전통적 가정은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도록 만든 사회 구조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여성이 남편의 하녀이자 가정부로서 역할을 하고, 아이를 낳아 양육하는 역할을 하게 함으로써 노동 시장의 희생자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인본주의자들은 전통적 결혼 제도 대신에 개방 결혼, 3인 결혼, 결혼 조합, 집단 결혼, 배우자 교환, 동거 등 다양한 방법을 제시한다. 그러나 성적인 결합의 결과인 임신에대해서는 피임과 낙태를 허용하고, 태어난 자녀에 대해서는 국가가 양육을 책임지는 공공 양육 제도를 제안하기도 한다.

마르크스주의 사회에서 전통적 가족 제도는 부르주아들이 프롤레타리아를 지배하기 위한 제도로 폄하된다. 노동자들에게 가족이란 혁명 의식이 결여되도록 만드는 걸림돌이며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다.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후의 사회에 대해 가정이 사회의 산업으로 변화할 것으로 예측했다. 학교가 가정의 역할을 담당할 것이며, 아이들의 양육이나 교육은 국가가 맡아야 할 공적인 일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자유로운 성관계가 증가하면서 간음은 의미가 없어지며 태어나는 아이가 적자인지 서자인지도 의미가 없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뉴에이지에서 전통적인 가정은 미개한 기관이다. 뉴에이지는 어떤 실패든지 의미 있게 보기 때문에 가정은 미개한 기관이지만, 깨달음을 위해서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성적인 자유는 진보의 일부로서 성행위는 육적으로든 영적으로든 스스로 탐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적 취향을 선악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상호 간에 나누는 육적-영적 대화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성행위와 결혼은 큰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중의 일부로서 선악의 판단 기준 밖의 일이며,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도 아닌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결혼을 가장 큰 악으로 여긴다. 사랑, 성, 결혼의 전통적인 개념을 혐오한다. 모든 방면에서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을 가장 우선시하기 때문에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동성애, 양성애, 성전환, 성 정체성의 혼란 등 성 정체성의 자발적 선택에 무한한 자유를 부여한다. 또 성관계의 형태에 있어서도 결혼으로 맺어진 부부 관계를 비롯하여 생식기적 관계, 동거, 공동생활 등 다양한 형태의 성적 실험을 자유롭게 추구한다.

32. 사회학 2: 교회와 교실

각 종교에는 그 종교의 교리가 선포되는 모임과 그것을 전파하려는 사람들로 구성되는 집단이 존재한다. 기독교의 교회, 이슬람의 모스크, 불교의 절처럼 다른 종교들도 그들의 회합이 있다. 그런데 이 시대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 인본주의나 마르크스-레닌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무신론은 교실을 통해 전파되고 있다.

무신론인 인본주의와 공산주의에서는 가정과 교회의 역할을 교실로 이전하고 있다. 공립학교의 교실은 무신론 신앙을 퍼뜨리기 위한 사원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인본주의자들은 가르치는 것이 교실보다 훨씬 멀리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미친다고 말한다.

33. 사회학 3: 국가

34. 법학 1: 윤리와 법

35. 법학 2: 신법과 실정법

36. 법학 3: 기독교인과 법

37. 정치학 1: 인권과 통치권

기독교는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누구도 박탈할 수 없는 기본적인 권리, 즉 인권을 부여하셨다고 이해한다.

국가가 정의를 바로 세우는 방법은 하나님의 도덕률에 근거한 법이 사회의 각 기관, 즉 가정, 교회, 직장, 국가 등에서 공정하게 집행되도록 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각 기관이 자유롭고 안정된 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각 사회 기관의 영역을 침범하면 안 된다. 각 기관은 하나님께 부여받은 고유의 기능이 있고, 그 사명을 착하고 충성되게 실행할 청지기의 임무가 있다. 정부가 가정의 영역인 출산, 양육, 교육 등에 관여하거나 회사와 시장에 의해 운영되는 경제를 마음대로 조정하려 하거나 세금으로 특정 종교를 돕거나 방해하는 일은 해서는 안 된다. 정부는 각 사회 기관이 자유롭게 창의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공정한 규칙을 만들어 활동 과정에서 생기는 충돌을 조정하는 역할에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의 세계관에서는 가정, 교회, 직장 등과 같은 전통적 사회 기관들이 이미 그 기능을 상실했으며, 개인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정부가 기존의 자기 영역을 넘어서 기능을 상실한 다른 기관들의 영역에까지 강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을 위임받아 정의를 촉진하려는 정부를 존중하고, 그에 순종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반기를 드는 지도자들에게도 맹목적으로 순종할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정부에 관리나 유권자로서 참여하여,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기 위해 여론을 형성하거나, 투표에서 반대 의사를 표현하거나 탄원서에 서명하는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촉구한다.

38. 정치학 2: 보수와 진보

39. 정치학 3: 성경적 정의

40. 경제학 1: 성경적 경제 체제

자본주의는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생산, 운송 및 판매 수단의 대부분을 개인 혹은 축적된 자본이 소유하고 경영하는 경제 체제다. 사유 재산을 기반으로 그것을 증식하는 것이 경제활동의 목표다. 모든 상품과 노동력에는 가격이 매겨지는데, ‘보이지 않는 손’인 시장이 주된 가격 결정권자다. 이윤 획득을 위한 자유 경쟁 때문에 개인과 기업은 창의력을 발휘하여 생산성을 향상시킴으로써 사회 전반의 공급이 풍요롭게 된다. 반면에 무계획한 상품 생산은 생산과잉으로 인한 가격 폭락과 생산 부족으로 인한 가격 폭등으로 연결된다. 이런 일이 반복되거나 심화될 경우에는 빈부 격차가 커지고, 경제 공황이 일어날 수도 있다. 능력만큼 일하고 일한 만큼 분배받는데, 개인의 능력과 일의 가치는 시장이 결정한다.

사회주의는 생산 수단을 집단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협동 경제와 모든 사람이 노동의 대가로 평등하게 분배받는 사회를 지향한다. 소유권은 국가, 집단 및 협동조합이 전체 혹은 지분의 일부를 소유하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주의가 존재할 수 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제안된 것이지만, 역시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간과하는 실수를 범하였다.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생산량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가정하에 그 과실을 골고루 분배하면 모든 사람이 잘살 수 있게 되리라는 이상주의적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보상 없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지 않고, 다른 사람보다 더 편하고 싶은 마음에 생산성은 점점 떨어지게 된다. 반면에 자기 몫을 더 많이 분배받고 싶어 하는 이기심으로 분배 요구는 갈수록 늘어난다.

41. 경제학 2: 성경적 경제 정의

42. 경제학 3: 일에 대한 성경적 관점

일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는 것으로, 일하는 사람에게 성취감을 느끼게 하고 공동체에 유익이 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목적이다._존 스토트(John Stott), 영국 성공회 사제, 복음주의자

43. 역사학 1: 예수의 부활은 역사다 

44. 역사학 2: 성경의 역사성

45. 역사학 3: 성경의 방향성과 목적성

성경의 메타내러티브는 역사를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즉 이 세상의 역사는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었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복적인 범죄의 역사다. 그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 역사에 반복적으로 개입해 오셨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사건으로 개입의 절정을 이루셨다. 인간의 역사는 결코 반복되지 않으며 완성을 향해 직선적으로 진행되는 종말론적 구속사라는 것이 기독교의 역사관이다. 

이 목적을 향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개입은 우리 삶의 방향성과 목표를 암시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실 때, 각자를 향한 창조의 목적을 두셨으며, 그에 합당한 달란트를 각각 맡기셨다. 인생을 마무리할 때, 우리는 그분 앞에서 자기가 받은 달란트를 어떻게 사용했으며 창조 목적에 합당한 열매를 얼마나 맺었는지 결산해야 한다. 이처럼 인간 역사의 마지막은 심판의 날이 될 것이며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으로써 그 심판에서 승리할 것이다.

Part 4. 시대 돌파- 세계관은 어떻게 삶의 열매로 나타나는가?

46. 성-생명-가정: 기독교가 지켜야 할 핵심 가치

기독교 성 문화에 대한 도전은 네오마르크시즘을 받아들인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선동한 68혁명에서 시작되었다. “금지함을 금지하라”, “구속 없는 삶을 즐겨라”, “혁명을 생각할 때, 섹스가 떠오른다” 등 당시 선전문에서 보이듯, 기존 정치와 도덕 관습에 대한 반란이 전면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이 운동은 너무나 극단으로 흘러 즉시 진압되었고,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의 참전을 반대하는 것으로 시작된 반전 운동과 히피 문화가 혼합되어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모인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성 윤리 파괴에 박차가 가해졌다. 그 결과는 낙태, 이혼으로 인한 편부모 가정, 미혼모, 혼외 동거자 등의 증가로 나타났다. 결국, 성적인 타락은 생명의 파괴인 낙태, 가정의 파괴인 이혼, 그리고 그 파괴된 가정의 자녀들이 가정 밖으로 내몰리고, 가정 밖에서 성 정체성의 상실 및 성적 방황을 겪는 악순환을 낳았다.

가정은 교회와 국가를 형성하는 사회의 기본 단위다. 따라서 성적인 타락은 가정과 교회와 국가의 불안으로 반드시 연결된다. 세계 공산화를 노리는 네오마르크시스트들은 기독교를 근간으로 하는 부르주아의 문화 패권을 파괴해야 공산당이 지도하는 공산주의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아직도 믿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금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 결정에 따른 관련법 제정, 동거하는 커플에게도 부부로서의 권리를 인정해 주는 생활동반자법의 입안 시도, 동성혼을 합법화하는 법안의 입안 시도 등 그람시가 말한 부르주아의 문화 패권을 부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현재 국회에서 입안하고자 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기존의 규범을 지키려는 주류 문화의 모든 발언에 재갈을 물리고, 모든 행위에 족쇄를 채우기 위한 것이다. 이 법이 통과되면 동성애뿐 아니라 다른 도착적 행위를 추구하는 소수자의 잘못을 지적할 수 없게 된다. 학교에서는 모든 성적 취향을 정상적인 것으로 교육해야 하고, 이들이 차별 당했다고 느끼고 고소할 경우에는 고소당한 사람 스스로 차별하지 않았음을 입증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형사상, 민사상 책임을 져야 하고, 징벌적 손해배상의 무거운 벌금을 물어야만 한다. 소수가 다수의 성 윤리를 마음대로 제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7. 차별금지법을 왜 반대하는가?

창세기는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 2:24-25)라고 기록한다. 주변의 모든 사람, 심지어 부모들까지도 배제한 채 오직 두 사람만이 배타적이고도 친밀한 관계를 가질 것을 부부에게 명령하신 것이다. 또 마태복음은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6)라고 기록한다. 이는 영속적인 부부 관계를 통해 가정에 안정성을 부여하시려는 하나님의 명령인 것이다. 하나님은 가정에 생육-번성-충만-정복-다스림(창 1:28)의 생육 및 문화 명령을 내리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합하는 결혼을 통해 세상을 그 자손들로 채우고 다스리라고 분명히 명령하셨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가정의 구성과 역할이다.

차별금지법과 동성혼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동성애는 다른 중독들과 마찬가지로 순간의 짧고 강렬한 쾌락과 점점 더 강한 것을 반복적으로 찾는 중독 뒤에 평생에 걸친 길고 긴 고통이 따른다. 차별금지법으로 동성애 행위를 보호하는 것은 마약, 도박, 알코올 같은 중독 행위를 장려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무책임한 짓이다. 성의 결정은 정자와 난자가 수정하는 순간에 일어나고,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바꿀 수 없다.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면 살 수 없듯이 하나님이 정해 주신 성을 마음대로 바꾸려는 것도 그만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차별금지법은 우리 자녀들 앞에 타락으로 가는 문은 열어젖히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길은 막아 버리는 법이다. 이것이 우리가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입법을 힘을 다해 반대하는 이유다. 

48. 동성애는 유전되는가?

49. 가정: 세계관 선점의 장

세계관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가정과 부모다. 개인이 태어난 가정의 환경과 부모의 세계관이 자녀의 선글라스 렌즈에 강력한 바탕색을 칠하게 된다. 자녀들은 부모의 선글라스로 세상을 바라보듯이 부모와 형제들의 행동을 흉내 내며 가정의 세계관을 스펀지처럼 받아들인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는 자연스럽게 성경적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이슬람 가정의 자녀는 자연스럽게 무슬림이 된다.

가정은 하나님이 만드신 첫 사회 기관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교회다. 가정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는 하나님의 문화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 가정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하신 그분의 지상 명령도 이루어야 한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_잠 22:6

50. 기독교 세계관에 뿌리는 둔 교육의 필요성

미국의 교육 철학자 존 듀이는 공립학교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무신론적 인본주의자로 공립학교에서 기독교를 몰아내는 교육 철학을 세운 사람이다. 그와 인본주의자 동료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이 전후 복구로 혼란스럽던 1930년대에 세계 최강대국으로 일어서려는 미국을 위한 교육 철학을 제시한다. 윌리엄 버클리(William Buckley)는 그들의 주장을 이렇게 정리한다.“미국은 세계를 지배할 새 질서를 수립하고, 수행할 국민을 길러야 한다. 교실에서 새 질서와 기독교가 공존할 공간이 충분치 않다. 절대적이고 제어될 수 없는 신, 매수할 수도 없고 다른 이의 진실에 상관 않는 신, 다수 의견에 개의치 않는 엄숙한 신을 학교가 장려하면 안 된다. 교실에서 신과 국가가 같은 제자를 두고 다투는 것은 강한 분열을 초래할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교실에서 퇴출되어야 한다.” 이런 무신론적 인본주의 이념을 기반으로 변화가 시작된 미국 공교육이 30여 년간 정착되면서 결국 1962년 케네디 대통령 때 공립학교에서의 모든 종교 행위가 위헌으로 판결되어 금지되기에 이른다. 공립학교에서 기독교를 퇴출한 결과는 성적 타락과 생명 경시, 가정의 파괴와 사회 혼란으로 이어졌다. 20년이 지난 1980년에는 미혼모와 성병이 2.5배 늘었고, 십 대들의 성 경험 비율도 3.5배 증가하였고, 이혼율은 2배, 강력 범죄 발생은 7배나 증가했다.

인본주의 공교육으로 인해 기독교는 다음 세대를 잃어 가고 있다. 성경 교육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세계관 교육을 통해 시대를 이해하는 젊은이들을 각 분야의 지도자로 양성할 교육 기관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이를 위해 초·중·고등 교육의 모든 강조점이 성경적 관점으로 수렴되어야 한다.